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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야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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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야를 읽고

익명 (미확인) | 수, 2019/04/10- 11:53

단야를 읽고

‘김천교육너머’ 사무국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김천 출신으로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던 ‘김단야’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없다고 하자,
“우리가 공부해보고 김천에 이런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걸 알리는 작업을 했으면 해요.”
그리고는 그에 대한 참고 자료들을 소개했다.
경북역사교사모임에서 경북의 항일운동가를 찾아 김천을 답사한 적이 있다고 해서 물어보니
“김천엔 흔적이 너무 없어서 별로 못 가보았다.”면서
“‘단야’라는 소설이 있으니 읽어보세요.”
김찬수 사드저지대경대책위 대표가 귀뜸해 주었다.

시립도서관 도서 자료를 검색하니 관련 자료뿐만 아니라 소설책 ‘단야’도 없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서 그런가? 할 수 없이 인터넷 서점을 뒤졌다. ‘한국사회주의 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길사)외에는 없었다. 중고장터를 뒤졌다. 정동주 지음 전 7권으로 된 대하소설. 발간연도는 1992년이었다. 출판 당시 평을 찾아보니 나쁘지 않은데 절판된 모양이다.
‘단야’는 김천의 독립운동가 ‘김단야’(본명 김태연)를 모델로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운동을 선택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은 그가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러시아인이든 하나같이 자신의 이해관계, ‘이기심’을 따라 움직인다.
문수리, 후에는 대양읍에서 자신의 이익과 욕망에 따라 살아가지만, 그것은 거대한 정치 흐름 속에서의 삶이다. 그 흐름 속에서 인물들의 활동 범위도 넓어져 갔고, 헌병보조원이 되는 등 일본에 적극 가담하여 동포를 괴롭히는 데 앞잡이가 되기도 하고, 일본인과 친일파를 죽이거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반일 행동을 하기도 한다.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사람들은 지배계급인 양반의 수탈에서 일본에게 나라를 뺏기는 과정에서 일상의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의식하든 못하든 그 속에서 각자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부터 일본인들은 조선을 지배하러 치밀한 계획아래 들어오고 있었다.
“일본의 특징은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오.”
조선을 침략하기 몇십 년 전부터 첩자들을 보낸다. 조선의 말을 배우고, 조선 사람들의 성격을 분석하고, 고을의 가장 신임 받는 명망가를 조사한다. 한편으로는 가장 천대받는 출신 중 똑똑한 아이들을 조사한다.
그 결과 조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분상의 차별이고, 조선인들은 성급하고 말로 싸우지 문서에 약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가장 공을 들여야 할 것은 공동체 파괴라는 분석을 내린다.

대양읍에 온 일본인은 먼저 돈밖에 모르는 최건이라는 인물을 이용한다. 그의 이름으로 땅을 사고 제재소를 차려서 일본인 기술자를 불러서 운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그 고을의 노름을 좋아하는 사람을 시켜서 화투를 보급한다. 처음엔 다 잃어주며 농민들을 화투판에 끌어들여 드디어는 그들의 집과 땅을 넘겨받는다. 일본인들이 많아지자 그들이 사는 집을 짓고 유곽을 만들어 최건에게 관리하게 한다. 그러다 최건이 기억에만 의존해 관리하는 걸 약점으로 문서를 만들어 도장을 찍게 하고 제재소에는 손을 떼게 한다.
그리고 가장 유지였던 이들을 이런 저런 친분과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야금야금 그들의 이름으로 소작인들에게 장리빚을 주게 하고, 땅을 사게 하고, 그래서 다시 그들에게서 그 땅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 자녀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낸다. 당연히 마을 유지들은 자식이 일본에서 공부하면 자신의 지위가 더 높아지리라는 기대 심리로, 신분이 천한 김형구는 돈은 많으나 아직도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자식만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그 유혹에 응한다. 일본이 이렇게 유지들의 자녀들을 유학 보내는 것은 일종의 볼모로 데려가는 것이다. 점점 요구 조건을 세게 해서 들어주지 않을 때 걸핏하면 아이들을 들먹임으로써 점차 자신들이 쳐놓은 그물망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한편 천민 출신으로서 뛰어난 아이들도 유학대상이다. 그들의 울분과 분노로 조선을 뒤집으려 하는 것이다. 조선은 조선인의 손으로 망하게 한다는 치밀한 프로젝트였다. 이 과제에 일본에서 들어온 경찰과 깡패들, 또 군대, 헌병들은 당연히 힘으로 조력하였다.
김형구의 아들 단야는 그런 천민, 그 중에서도 가장 천한 백정의 혈통이었다. 할아버지 대부터 돈을 모아 부자가 되고 신분의 차는 없어졌다고 하나 그는 어릴 때부터 그 백정의 출신이라 해서 받는 냉대를 느끼고 자랐다.
이복형 시영은 유부녀인 순개와 바람이 났으나 순개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자 외면하고, 부모가 없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시집가야 하는 양반집 딸 명채를 아내로 맞이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 가로놓인 신분 차이를 뛰어넘지를 못한다. 명채는 어쩔 수 없이 시영의 아내로 살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편과 시댁을 멸시하고 은연중 남편을 냉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영이 일본인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도망가서 숨어 살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이, 명채는 가끔 시영의 소식을 몰래 전해 주던 시영의 친구 정수와 사랑을 나누다가 들키자 아이를 두고 쫓겨난다.

단야 역시 어린 시절 정수 아버지 강재상의 사랑방에서 만난 채호와 게걸 목사가 세운 교회학교에서 배우면서 양반 딸인 지호와 사랑이 싹트지만, 그 만남은 순탄할 수가 없었다. 강재상은 지호와 단야가 어울리는 것을 묵인했지만, 그 어머니는 싫어한다. 어머니의 강요로 혼례식을 치른 첫날 지호는 엽기적인 행각으로 신랑을 노하게 하고 파혼을 한다. 그리고 단야를 찾아 일본으로 떠났으나 둘은 같이 살면 살수록 신분이라는 벽을 깨뜨릴 수가 없었다. 절망한 지호는 아이를 낳자마자 죽여 버린다. 그리고 단야와 조선으로 돌아와 오랜 고민 끝에 헤어지기로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단야는 일본에서 독립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듯 살아야 하는 천민의 처지에서 인간답게 살다 죽을 수 있는 해갈과 해방의 샘물’을 갈구하게 된다. 그에게 사회주의를 가르쳐준 스승이 조선 총독부에서 제의한 문화제도 연구를 하러 조선으로 들어가면서 단야에게도 같이 하자 제의했을 때, 그는 스승에게 실망하고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일본의 사회주의 역시 일본에 오면 일본 제국주의화한다는 것을.
단야, 지호의 두 오빠, 최석두 모두 아버지가 처음부터 또는 피치 못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섰고, 그 아버지들의 욕망 때문에 일본에 유학 왔지만, 부모들과 달리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은 최건의 아들 최석두.
단야는 러시아로 간다. 러시아에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넘어온 조선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주로 함경도에서 힘들게 살다가 시베리아로 가면 먹고 살만한 것을 알고 겨울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이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촘촘히 초소를 세우고 총을 쏘아댄다. 총탄을 피해가며 강을 건너가면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죽은 걸 날이 밝아서야 확인하게 된다. 일단 강을 넘어가면 시베리아에 정착해 살 수 있다. 당시 시베리아 땅을 개간하는데 조선은 귀한 자원이었고, 그러한 러시아에 많은 조선인들이 귀화한다. 제정러시아 때는 짜르 왕정을 위해 러일전쟁에 가담하고 혁명이 일어나서는 자연스럽게 백군위의 편을 들게 된다. 그러나 백군위 쪽을 일본군이 지원하고 볼세비키 혁명에서 적군의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조선인들은 갈등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적군에 가담하기로 한다.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자 더 많은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하러 또는 일본의 수탈을 피해 시베리아로 향했다. 개중에는 조선에서 지배계층이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여기서도 지배계층이 되길 원해서 갈등이 있기도 했다.

단야는 독립에서 나아가 해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의미의 조선 해방은 신분우월주의자들의 뿌리 깊은 참회와 그 실천이 한 켠에 서고, 차별 받아온 사람들의 몸에 밴 굴종의식과 자기 비하를 태워내고서 평등관을 받아들이는 실천이 다른 한 편에 서서 이룩해내는 것일 때에라야만 조선인 모두를 위한 해방이 될 것이야.”
라고 그는 조선의 해방, 사랑과 평등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레닌에게서 발견하고 그에게 고려연방제, 또는 고려연방국을 제의한다.
“농민과 노동자의 나라가 러시아이며, 러시아의 희망은 농민과 노동자로 하여금 러시아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데 있음을 맨 처음 설파한 사람도 레닌이오.”
“레닌은 참고할 만하다고 믿어. 따라서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하는 노선을 따르면서 우리의 독자성을 살려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해보자는 것이오.”
러시아는, 특히 시베리아는 아직 적군이 백군과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지도 못했고, 또 연합국이 철수했지만 일본이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어서 조선인들이 앞장서서 일본을 막아주기를 바라는 처지였다. 하지만 일본의 힘이 강력해서 적군은 그들과 싸울 여력이 없어 레닌은 일본과 협상을 도모하던 차였다. 일본 또한 많은 친일 조선인들을 보내어 이로 인해 시베리아의 조선인들은 갈래갈래 찢어졌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대양읍에도 그 물결이 밀려왔다.
일본은 수리조합을 세워 고리대금업을 하고, 빼앗은 조선인 땅을 다시 밀고 네모반듯하게 만들어 소작을 시켰다. 그리고 신작로를 만드는데 마을 사람들을 동원했다. 신작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일직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주와 관계 되는 곳(사실은 지주 이름의 일본 땅)은 돌면서 마을을 두 동강 내기도 하면서 진행되니 자연히 동네 사람들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작로를 만드는데 모든 동민들이 동원되었다.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응하지 않자 할당량을 정해 일찍 마치면 보내준다고 회유도 하고 그래도 응하지 않는 자는 매로 다스리니 사람들은 움직임이 달라졌다. 그러다가 말다툼이 일어나서 일본인 감독을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죽이고 파묻기도 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경찰은 숫자상으로 적으니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일본에서 지원 군대가 오자 무력 진압은 심해져, 예배당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넣고 밖에서 총을 쏘고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
그렇게 진압되고 나자 사람들은 낮에는 아무 말없이 일하다가 밤에는 산으로 가서 나무마다 태극기를 달았다. 아침 햇살에 태극기가 나무마다 나부끼는 대목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날 무렵 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밝혀진 민족자결주의는 제국주의들의 민족자결주의지 식민지 민족들의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 다녀온 단야는 우울해졌다. 그를 우울하게 만든 것은 삼일운동의 실패가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 친구들이 식민지 상황에 체념하고 목숨을 잘 보전하자는 자세 때문이었다.
시베리아에서도 일본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어 조선인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모조리 강간하는 처참한 살육이 있었다. 레닌은 일본과 협상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이 사건은 조선인들이 경거망동하여 일본인들을 자극하여 일으킨 사건이라 생각하고 화를 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조선인 대표를 만났다.
1921년 한국공산당이 창립되고, 이동휘가 대통령이 되었다. 한국공산당은 그것이 곧 완전하고 성숙한 유일한 조선인들의 합법적인 정부가 되기를 갈망했다.
1922년 백위군 잔여 세력은 지리멸렬해지고 최후 거점이던 블라디보스토크에 적색 깃발이 올려졌다. 일본군은 사할린을 제외한 전 시베리아 지역에서 쫓겨나고 친일하던 조선인들도 국내로 철수했다.
하지만 단야는 실종되었고, 최석두는 죽었다. 레닌도 죽고 조선인들을 과히 탐탁지 않아 하던 스탈린이 권력을 잡아 시베리아 조선인에겐 강제이주정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는 ‘조선공산당’이 세워졌다.

긴 호흡의 이야기 요소요소마다 작가는 다양한 사료를 인용했다. 그 중 가장 애절한 것은 고종황제에게 을사조약이나 정미칠조약을 체결한 매국대신들을 처벌하라는 간곡한 상소문이었다. 일본군의 겁박에 굴하지 말고 그들을 처벌하여 기강을 바로잡으라는 최익현의 글에 넘치는 기개는 꼰대로만 알고 있었던 그 최익현이 아니었다.
2·8독립선언문이나 레닌의 연설문등을 읽으며 문득 왜 우린 이런 사료들을 가지고 공부하지 않았을까 의문스러웠다. 신채호의 ‘조선독립선언’을 읽으면 이 사람을 무정부주의자라고 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데 말이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도대체 무엇일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헌병제도를 도입하여 모든 군인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칼을 차게 했다. 그들의 교육 목표는 일본 천황의 충실한 종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천황의 명령을 받을 정도의 지식이면 족했다. 그래서 너무 많이 배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찰도 마찬가지였다. 주지는 총독부에서 임명했고, 일본식 절이 동네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조선인들의 의식을 일본화해서 근본적으로 조선을 없애겠다는 것이 일본의 목표라고 단야는 생각했고, 그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교육 목표는 뭘까? 서울대를 비롯한 스카이대 진학인가? 한국의 학생들은 모두 학자가 될 듯이 밤 12시가 넘도록 공부를 한다. 예전엔 대학만 가면 되었지만, 지금은 대학에 가서도 취직 공부로 날을 보낸다. 그런데 왜 한국인의 의식 수준은 나아지지 않는 걸까? 왜 우린 역사에 대해 제대로 잘 모르는 걸까?
동국대 철학과 강유원 교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서해 유성룡의 ‘징비록’을 제목과 저자만 알지 읽지 않는다. 다 안다고 착각을 한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도 징비록을 읽지 않았다. 일본을 욕하는 이 글을 일본인들은 한 해 5천 부씩 사 본다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 후배들도 교육법을 달달 외면서 교사 임용고시 공부는 하지만 실제 관련 책을 읽지는 않는다. 읽었다고 착각을 한다. 그러니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그나저나 이 작가가 이 이야기에서 희망으로 말한 것은 무엇일까? 예배당에 도망가 있다가 총탄과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박근우와 김순지의 사랑, 김시영과 순개 사이에서 태어나 절에 맡겨졌던 선봉 스님, 그리고 최석두가 총 맞아 죽는 순간 품에 지니고 있었던 신채호의 ‘조선독립선언’에서 희망을 찾은 걸까?

“개인적 저주나 원한은 그 대상물이 사라지면 투쟁의 목표와 방법을 잃게 된다. 그러나 투쟁의 대상과 목표가 단순히 시간적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아니라 한 사회 전체에 걸쳐서 내재한 때에는 그렇지 않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투쟁은 곧 인간 자체의 해방과 자유에 기여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싸움이며 이는 곧 행복이라는 차원으로 치닫는 숭고한 과제인 것이다.”
는 말에 감동을 받고,
“저는 조선이라는 한 국가의 해방에 머물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인간 자체의 해방을 원하고 있습니다.”
는 염원 속에 작가의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일까?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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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미국한테만 가면 전부다 맛탱이가 가버리네

다 팔아묵고 왔네

참나…

목, 2017/08/0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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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일제강제노역 내용에 관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증폭되니, 민문연 홈페이지 해킹당했네요.

내가 가입,참여하면 무슨 사이트이든 해킹피해, 회원정보유출되길래 민문연 홈피 가입안했는데,

가입안해도 해킹피해 보는구만.

 

아무튼, 시민역사관( 식민지역사관 ) 후원하였고,  발기인 신청했습니다.

 

– 음악, 영화, 사랑, 책, 예술, 문화, 역사 를 좋아하는 단순한 한민족인 –   Mrrkgpy 7 

 

그 이석훈 맞음.  사실 돈도 없고, 여자 못사귄지 16년이 다 되어가면서도

아무튼, 나중에 내 손자 보여줄려고 발기인 신청했습니다.

 

PS – 자유게시판이라서 그런지 글 적는 뉴라이트부류 쓰레기들도 정말 많네요.

 

목, 2017/08/03-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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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다운로드]


한국 외교부의 어깃장에 강력 항의한다.


중앙일보 2017년 8월 3일자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시절인 지난해 11월 외교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일본기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 행사에 부정적 견해들을 인용한 의견서(이하 외교부 의견서)를 대법원에 전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은 1965년의 한일 청구권협정과 상관없이 일본 기업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외교부 의견서는 대법원의 판결 취지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어 피해자들과 피해 회복을 위해 싸워온 시민단체로서는 분노와 함께 절망감을 떨칠 수 없다. 지난 5년간 피해자들은 대법원이 최종 확정판결을 내리길 손꼽아 기다렸다. 그 사이 피해 당사자 원고들은 모두 돌아가셨다. 확정판결이 이렇게까지 늘어진 데는 일본기업의 지연 전술이 있었다. 그러나 항간에는 한국정부가 방해하고 있어 늦어지고 있다는 강한 의혹도 돌았다. 그런데 이번 보도로 그것이 의혹이 아니라 사실임이 확인됐다. 그동안 외교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해 일하지 않았다고 비판했으나 이제 그걸 수정해야겠다. 일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일을 방해했다고.

외교부 의견서를 보면서 지난 2002년 외교부가 한일협정 문서 공개를 거부하면서 내세운 ‘악명 높은’ 답변이 떠오른다. 문서를 공개했을 때 한일 관계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답변을 받아보고서 우리는 한국 외교부가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본 외무성 한국지부가 아닌가 착각했다. 외교부 의견서 역시 같은 기조에 서있다. 불리하면 새로운 논리를 개발해서라도 자국 피해자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자 국가의 의무 아닌가.

국제관계라는 것이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문제는 형세가 불리하거나 논리가 부족하더라도 피해자를 위해 일하려고 노력하고 있느냐이다. 피해자들로서는 그것만으로도 많은 위로가 될 것이다. 정 안되면 하는 척이라도 해라. 그게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하에서 외교부는 무엇을 했나. 피해자와 시민단체가 유골 조사와 봉환 문제를 비롯해서 노동자의 통장 반환 문제, 야스쿠니문제 등을 두고 일본정부와 씨름을 할 때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배상 판결까지 부정하는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했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일하는 기관인가. “이게 나라냐”라는 비난이 달리 나온 것이 아니다.
최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놓고 외교부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서서 해결책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국가에 의해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들이 피해를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국가가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모든 국가가 지켜야할 국제법의 한 원칙이기도 하다. 이 원칙은 위안부 피해자분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권피해자들에게 적용되며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 피해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국가는 자국민의 인권보장을 위해 외교적으로 필요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이번 외교부 의견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책임회피에 급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교부가 지고의 가치라고 여기고 있는 1965년의 한일 청구권협정 역시 인권과 정의에 기초하여 재검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해방 후 7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음하며 절규하는 피해생존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하에서 이들이 어떠한 경위로 동원되어 비인간적인 조건하에서 인권유린을 당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이 끝난 다음 어떤 과정을 거쳐 귀국했으며, 돌아가신 경우 사망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밝히고, 유골이라도 수습해 생사도 모르는 가족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은 모두 일본 정부에게 있다.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은 이러한 피해자들의 권리를 대변하기 위해 진지하게 과거를 성찰하고 성실하게 진실을 규명해 이들이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당당하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는 데 있다. 형식적인 법 논리를 들이대며 궁색하게 잘못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을 변명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법을 말하곤 있지만 힘의 논리만이 정의라는 법과 인권을 부정하는 인식과 다를 바 없다. 잘못된 시대, 잘못된 정부에 의해 잘못된 합의가 피해자들의 삶을 또다시 유린한다고 한다면 이를 바로 잡는 일은 이 시대에 바로 오늘 제대로 된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비판의 화살이 국정을 농단한 주범들에게만 겨냥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국정 농단을 가능하게 했던 수많은 ‘아이히만’들에게도 그 화살이 겨눠져 있다. 외교부라고 여기서 비껴갈 수 없을 것이다. 외교부의 아이히만들이 바뀌지 않는 한, 그리고 뼈를 깎는 반성과 혁신이 없는 한, 한국 외교의 미래는 없다. 변화는 피해자들에게 사죄를 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다시 묻는다. 한국 외교부는 누구를 위해 일하는 기관이며, 관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지를. 이제 당신들이 답변할 차례다.


2017년 8월 4일
민족문제연구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금, 2017/08/04-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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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7/08/04- 18:28
92
0





금, 2017/08/04-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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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7/08/0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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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지난 7월 4일 도쿄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주최로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의 의의를 다시금 확인하고 향후 지속적인 활동을 다짐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번 집회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지가 용산으로 확정된 후 처음으로 갖는 집회로 연구소에서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대표,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강동민 자료팀장, 노기카오리 선임연구원 그리고 교육홍보실 오경아 영상팀원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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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집회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작은 행사로 준비되었지만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참가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높은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의 인사말에 이어 이희자 대표가 참가자들에게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의의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강동민 자료팀장이 그동안의 활동 경과와 건립지 개요, 향후 계획을 보고하자 참가자들은 감동과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이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와 과거사’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아 한일 시민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매개로 더욱 깊은 교류를 추진해나가자고 제안했다.
그동안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이 집회를 개최할 때마다 사회를 보는 이가 있다. 대학생 시절부터 이 활동에 참여해온 다나카 유키 씨다. 이날도 사회를 맡은 그는 “오늘 집회는 앞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일본에서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 개관 후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소감으로 집회를 마무리했다.
이미 모금 목표액 500만 엔(약 5,080만 원)을 달성했지만 이날을 계기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활동을 더욱 활성화하자는 것이 이 집회의 취지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날 집회에 처음 참가한 와카타니 마사키 씨는 진지하고 성실하게 또 열정적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려는 우리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며 거액의 건립기금을 쾌척하고 귀중한 자료도 기증했다. 이렇게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낸 이 모임은 앞으로도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며 활동을 추진해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월, 2017/08/0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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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지난 5월 15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역사 전문 팟캐스트 채널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1 ‘역적’(역사적폐청산)이 회를 거듭할수록 회원들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시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1부에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이 역사적폐의 주범이 누구이고 이들의 역사쿠데타 배경과 논리가 무엇인지를 심층적으로 파헤쳐서 재미있는 입담으로 청취자들의 귀를 사로잡고 있다면, 2부의 ‘이게 실화냐’
에서는 매회 다양한 전문가를 초대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역사문제를 짚어주어 관심을 받고 있다.

13이제 ‘시즌 1 역적’은12화(8월 7일) 마지막 본방송과 8월 여름특집, 그리고 9월 에필로그를 끝으로 마
감하고 ‘시즌 2’를 준비할 예정이다. 앞으로 남은 시즌 1 여름 특집 방송에도 회원들이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기를 기대한다. 팟캐스트 ‘역적’은 팟캐스트 전문채널 팟빵과 유투브, 아이튠즈에서 ‘역적’을 검색하면 쉽게 찾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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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은희 교육팀장

월, 2017/08/0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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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여름방학을 맞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국사 강좌를 열었다.
최근 ‘암살’, ‘밀정’ 그리고 ‘군함도’와 같이 우리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영
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한 장면들이 무엇일까하는 궁금증을 가질 법하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 청소년이 영화를 통해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질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영화로 배우는 일제강점기’라는 제목으로 강좌를 개설하였다.
이번 강좌는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연구소 상근자들이 직접 강사로 나섰다. 조한성 선임연구원,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장, 김승은 자료실장,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이 7월 25일부터 28일까지 4일간 강좌를 진행되었으며, ‘밀정’, ‘암살’, ‘안녕, 사요나라’, ‘군함도’를 차례로 다루었다. 특히 다큐멘터리 영화 ‘안녕, 사요나라’를 다루는 강좌에서는 강제동원 피해 유족인 이희자 여사(태평앙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와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해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를 직접 느끼고, 역사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수강신청은 7월 10일부터 24일까지 기념관 홈페이지에서 강좌 별로 20명을 선착순 접수하였다. 무료로 진행되는 강좌이며 출석을 강제하지 않는다는 점과 여름휴가가 변수로 떠올랐으나, 기념관 인근에 위치한 신일중학교 교사의 권유로 평소 역사에 흥미를 가진 3학년 학생 6명이 전 강좌를 참여하였고, 1강 20명, 2강 24명, 3강 25명, 마지막 강좌는 수강생의 학부형까지동석한 까닭에 29명으로 수강 정원을 훌쩍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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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좌를 마친 청소년들은 ‘전체 역사를 기억하고, 강제동원 피해자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강사의 질문에 각자의 다짐과 응원을 담은 메시지를 작성해 희망나무를 꾸몄다. 제일 인상 깊은 강좌로 제3강 ‘안녕, 사요나라’를 꼽으며 일본의 강제 징용 피해를 진정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모든 강좌를 빠짐없이 들은 청소년 17명에게는 수료증을 발급했다.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은 일제강점기 저항과 협력의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주제로 개관1주년 기념 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을 준비 중이다. 또한 기념관 인근 묘역에 잠든 역사적 인물을 주제로 한 시민강좌와 독립민주시민학교 강좌를 계속 진행할 예정이니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

∷ 최인담 학예사

월, 2017/08/0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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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 ‘부민관 폭파의거’ 72주년을 맞아 연구소는 광복회 화성시지회(지회장 안소헌)와 서울특별시의회(의장 양준욱)의 후원으로 7월 22일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서 기념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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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식에 앞서 이준 열사 집터 등 북촌 일대에서 ‘친일의 길, 항일의 길’이라는 주제로 회원, 시민 등 약 3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답사를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권시용 연구원이 안내를 맡아 이상재 집터, 여운형 집터, 김성수 옛집, 한용운 옛집, 진단학회 사무소 터, 손병희 집터, 이병도 집터, 한상룡 옛집, 윤보선 가옥, 정독도서관, 윤덕영, 윤택영 집터 등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의거 7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함세웅 이사장과 안소헌 지회장, 임헌영 소장 등이 부민관 폭파의거의 의의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의거 70주년을 맞아 재현한 연극 ‘정의의 폭탄’을 녹화한 16분 분량의 요약 영상을 상영하여 참가자들은 부민관 폭파 의거와 의거의 주역인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 세 분 독립투사의 삶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역사의 현장인 경성 부민관은 1935년 건립되어 여러 차례 명칭과 용도가 바뀌었으며 1991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현재까지 서울시의회로 사용되고 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서울시의회 양준욱 의장과 사무처의 지원으로 본 회의장을 기념식장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기념식 마지막 순서에서 영화 〈군함도〉 개봉을 맞아 배우 송중기 팬연합이 모금한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500만원) 전달식이 진행되어 그 의미를 더했다.

∷ 편집부

월, 2017/08/0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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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7월 14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간 이준 열사의 순국 110주기를 맞아 오후 1시부터 종로구 안국동 덕성학원 해영회관에서 이준 열사의 집터 표석 제막식을 가졌다.
함세웅 이사장은 여는 말에서 “비록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일본의 국권 침탈을 세계에 널리 알린 이상설・이준・이위종 세 분의 열사의 뜻을 가슴에 새긴다. 이준 열사가 살았던 110년 전의 집터가 새로 밝혀진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집터 표석을 통해 이준 열사의 독립정신이 시민에게 널리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축사에서 “이런 중요한 일을 대한민국 정부가 먼저 나서서 하지 못한 것이 한편으로 부끄럽지만 정부가 못 하는 일을 앞장서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다”며 “2년 뒤면 건국(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데 새 정부가 취임한 만큼 독립국가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도 “안국동 집터는 이준 열사가 안창호 선생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독립 자주의 염원을 실천하던 현장”이라며 “비록 열사께서는 숭고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역만리에서 순국하셨지만 우리는 열사의 애국정신을 더욱 지향해 미래의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박상임 덕성학원 재단이사장, 김영종 종로구청장이 축사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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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우 책임연구원이 이준 열사 집터 위치 확인 및 집터 표석 제막까지의 경과를 보고하였다. 이준 선생의 사위 유자후가 쓴 <이준선생전>(동방문화사, 1947)에 나오는 이준 집의 소재지 ‘북서 안현 11통 16호’와 한성부 호적자료(1906년 6월 작성)의 ‘안국방 소안동 안현 11통 6호’를 토대로 삼아 <황성신문>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별건곤>의 기사와 토지대장 등을 샅샅이 조사하여 이준 집터가 ‘안국동 152・153번지’이고 현재 종로구 안국동해영회관(건물 서쪽에 인접한 안국 153 베이커리카페 포함) 자리임을 밝혀냈다. 연구소는 지난 3월 관련 자료를 첨부하여 종로구청에 표석신설신청서를 제출하였고 3월 20일 열린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 제1차 회의에서 ‘이준 집터’ 표석설치안이 심의 통과되면서 7월 14일 이준 열사 순국 110주기에 맞춰 표석 제막식을 열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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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수유리 묘역에서 열린 이준 열사 추모식에 참석한 뒤 행사장에 도착한 이준 열사의 외증손자인 조근송 씨(이준열사기념사업회 명예회장)는 유족을 대표해 집터 위치 확인과 표석 제작에 관여한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이준 열사가 여기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고 있어 감격스럽다”고 소감을 말했다.
오후 1시 40분 기념행사를 마친 후 해영빌딩 왼편에 설치된 표석에 모여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함세웅 이사장, 임헌영 소장, 박원순 서울시장,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조근송 유족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건하게 치러졌다.
한편 제막행사 전인 12시 30분에는 이양재 이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이 이준 열사 유묵과 광복군의 태극기 등 자신이 소장한 귀중한 독립운동 자료와 고서 수십 점을 행사장에 전시하고 직접 자료 설명도 해주었다.

10∷ 박광종 선임연구원

월, 2017/08/0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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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기념사업에 혈안이 되어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는 구미시가 2016년 4월 8일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의 요청으로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 신청서를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우정사업본부에 신청했다.
신청서를 접수한 우정사업본부는 같은해 5월 23일 ‘2016년 제1차 우표발행심의위원회’를 열고 ‘박정희대통령 탄신 100주년’ 우표 발행을 결정했다. 총 17명 중 이날 심의위원회에 참석한 위원 9명 전원이 찬성한 것이다. 하지만 백범김구기념관이 신청한 ‘백범일지 출간 70주년 기념우표’는 찬성 4, 반대 5로 발행이 무산됐다. 이 같은 사실이 일부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는 했으나 촛불집회와 탄핵국면에서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국회에서 신경민, 추혜선, 최명길 의원 등이 박정희 우표 발행의 부당성을 제기했고 미래창조과학부와 우정사업본부 노조에서도 반대하고 나섰다. 구미지역 시민사회단체들도 역시 우표 발행 중단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한 우정사업본부에는 우표 발행 문제와 관련해 200건이 넘는 반대 민원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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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 단체들의 논리는 명확했다. 우정사업본부의 우표류발행업무처리세칙 4조는 ‘정치적·종교적·학술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소재’는 우표 발행을 못하도록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표발행심의위원 중에는 국정농단의 공범인 김기춘의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이 포함되어 있음도 확인됐다.
연구소는 우표발행 저지를 위해 신경민 의원실, 우정사업본부 노조 등을 방문해 연대키로 하고 2017년 6월 22일 광화문 1번가 국민인수위원회 앞에서 국가공무원노조와 함께 기자회견을 가진데 이어 6월 29일에는 연구소 단독으로 우표발행심의위원회가 열리는 서울중앙우체국 앞에서 발행 취소 촉구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결과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에 대해 재심의 결정을 내렸다 최근 적폐청산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높아지면서 입장을 선회하고 원점에서 재논의한 결과 총 14명이 참석해 11명이 찬성, 반대 1명, 기권 2명으로 재심의가 결정됐다.
이에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7월 12일 재심의 회의를 열고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여부를 다시 논의했다. 그 결과 전체 17명 위원 가운데 12명이 참석해 철회 찬성8명, 반대 3명, 기권 1명으로 최종적으로 우표발행이 취소된 것이다.
당초 우정사업본부는 재심의할 근거가 없다며 기존 결정대로 발행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새 정부가 들어선데다 근거가 없다는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 우정사업본부가 박정희 우표 발행 재심의에 나서게 된 근거로 내밀고 있는 것은 ‘우표류 발행업무 처리세칙’ 제17조 2항 2호이다. 세칙에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우표발행 및 보급에 관한 사항에 관해 우정사업본부장의 자문에 응한다”는 규정에 근거해 김기덕 본부장이 우표발행심의위원회에 재심의 문제에 대한 자문안건을 올린 것이다. 이는 그간 입장을 뒤집는 것이라 허위해명 논란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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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발행이 취소가 예견되자 세종시청사 내 우정사업본부 앞에서 우표 발행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였던 남유진 구미시장은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냈고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7월 14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우표 발행이 취소되었답니다’라는 전면 광고를 내보내는 등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연구소는 앞으로도 박정희 기념사업 등 친일독재 미화와 역사왜곡 중단을 위해 최선을다할 것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17/08/07-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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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인들의 이름을 딴 기념문학상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온 연구소는 작년 11월 29일 서울 대학로 함춘회관에서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와 공동으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가 열리기까지 작가회의 회원이자 시인인 권위상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전 서울서부지부장)의 노고가 컸다. 이 토론회 이후 작가회의도 올해 3월 25일 내부 토론회를 열어 이 문제를 집중 논의했으며 5월에는 미당문학상 수상 경력이 있는 김혜순 시인이 5·18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수상의 적절성을 두고 논란이 일어 김 시인이 스스로 수상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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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현실문제에 직접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는 송경동 시인이 7월 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미당문학상 후보에 자신을 포함시키려는 중앙일보사의 연락을 받고 “적절치 않은 상”이라며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미당의 시적 역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친일 부역과 5·18 광주학살과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그 군부정권에 부역했던 이를 도리어 기리는 상 자체가 부적절하고 그 말미에라도 내 이름을 넣을 수는 없다”고 썼다. “그건 어쭙잖은 삶이었더라도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한 부정이고,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 왔고 살아가는 벗들을 부정하는 일이며, 식민지 독재로 점철된 긴 한국의 역사, 그 시기 동안 민주주의와 해방을 위해 싸우다 수없이 죽어 가고 끌려가고 짓밟힌 무수한 이들의 아픔과 고통 그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내 시를 존중해 주는 눈과 마음이 있었다면 도대체 나와 미당이 어디에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라며 “ 조금은 외롭고 외지더라도 내가 걸어보고 싶은 다른 길이 있다고 믿어 본다”며 미당문학상 거부 뜻을 분명히 했다.
연구소는 작년 8월 한국문인협회(이사장 문효치)가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려 하자 집회와 기자회견 등을 통해 상 제정을 철회시킨 바 있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17/08/0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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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회원수련회가 7월 8일과 9일 이틀간 충남 아산늘푸름수련원에서 열렸다. 전국 각지는 물론 도쿄에서도 먼 길 마다않고 달려온 260여 명의 회원들과 그 가족들이 함께했다.
먼저 연구소와 회원들의 적폐청산에 앞장 서 온 것에 감사하다는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이어서 내년 3월 개관을 목표로 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추진과정에 대해 김승은 자료실장이 상세히 설명하였다. 뒤이어 수련회의 하이라이트로 지난 한 해 동안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친 광주지부와 대전지부가 모범지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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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 소장이 역사관 건립에 대한 회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호소했고, 올초 연구소 운영위원장에 취임한 이민우 인천지부장은 감사인사를 하는 가운데 “역사관 건립, 회원 배가”를 선창하여 회원들의 열띤 호응을 받았다. 조영숙 회원과 딸 부부, 최리순 회원이 참석한 도쿄지회의 기증자료 소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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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마당의 하이라이트인 광주지부 ‘꿈꾸는 예술’(대표 정찬경)이 마련한 친일·항일음악회와 큰들문화예술센터의 창작마당극 ‘오작교 아리랑’ 공연은 회원들의 큰 갈채를 받았다.
끝으로 수련원 3층 강당에서 이어진 놀이마당에서는 광주지부의 댄스스포츠 공연이 펼쳐진 가운데 밤늦도록 회원들 간의 친교의 시간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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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현충사를 답사하면서 친일화가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표준영정 교체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아산지회와 함께 진행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2017년 수련회에 함께해 주신 모든 회원분들과 물품을 협찬해 주신 각 지부, 특별히 사전준비와 진행에 많은 도움을 주신 충남지부, 아산지회 회원님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04[ 수련회에 도움을 주신 분들 ]
▪ 광주지부(지부장 김순흥)가 고급 막걸리 ‘사미인주’ 10상자를 협찬해 주었다.
▪ 전북지부(지부장 김재호)가 치킨 3상자를 협찬해 주었다.
▪ 충남지부 최종진 회원이 생막걸리 10상자를 협찬해 주었다.
▪ 논산지회 최의진 회원 친환경스팸 3상자를 협찬해 주었다.
▪ 관악동작지부 송진복 지부장이 보조배터리, 보습제 등을 협찬해 주었다.

월, 2017/08/0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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