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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야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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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야를 읽고

익명 (미확인) | 수, 2019/04/10- 11:53

단야를 읽고

‘김천교육너머’ 사무국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김천 출신으로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던 ‘김단야’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없다고 하자,
“우리가 공부해보고 김천에 이런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걸 알리는 작업을 했으면 해요.”
그리고는 그에 대한 참고 자료들을 소개했다.
경북역사교사모임에서 경북의 항일운동가를 찾아 김천을 답사한 적이 있다고 해서 물어보니
“김천엔 흔적이 너무 없어서 별로 못 가보았다.”면서
“‘단야’라는 소설이 있으니 읽어보세요.”
김찬수 사드저지대경대책위 대표가 귀뜸해 주었다.

시립도서관 도서 자료를 검색하니 관련 자료뿐만 아니라 소설책 ‘단야’도 없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서 그런가? 할 수 없이 인터넷 서점을 뒤졌다. ‘한국사회주의 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길사)외에는 없었다. 중고장터를 뒤졌다. 정동주 지음 전 7권으로 된 대하소설. 발간연도는 1992년이었다. 출판 당시 평을 찾아보니 나쁘지 않은데 절판된 모양이다.
‘단야’는 김천의 독립운동가 ‘김단야’(본명 김태연)를 모델로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운동을 선택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은 그가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러시아인이든 하나같이 자신의 이해관계, ‘이기심’을 따라 움직인다.
문수리, 후에는 대양읍에서 자신의 이익과 욕망에 따라 살아가지만, 그것은 거대한 정치 흐름 속에서의 삶이다. 그 흐름 속에서 인물들의 활동 범위도 넓어져 갔고, 헌병보조원이 되는 등 일본에 적극 가담하여 동포를 괴롭히는 데 앞잡이가 되기도 하고, 일본인과 친일파를 죽이거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반일 행동을 하기도 한다.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사람들은 지배계급인 양반의 수탈에서 일본에게 나라를 뺏기는 과정에서 일상의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의식하든 못하든 그 속에서 각자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부터 일본인들은 조선을 지배하러 치밀한 계획아래 들어오고 있었다.
“일본의 특징은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오.”
조선을 침략하기 몇십 년 전부터 첩자들을 보낸다. 조선의 말을 배우고, 조선 사람들의 성격을 분석하고, 고을의 가장 신임 받는 명망가를 조사한다. 한편으로는 가장 천대받는 출신 중 똑똑한 아이들을 조사한다.
그 결과 조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분상의 차별이고, 조선인들은 성급하고 말로 싸우지 문서에 약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가장 공을 들여야 할 것은 공동체 파괴라는 분석을 내린다.

대양읍에 온 일본인은 먼저 돈밖에 모르는 최건이라는 인물을 이용한다. 그의 이름으로 땅을 사고 제재소를 차려서 일본인 기술자를 불러서 운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그 고을의 노름을 좋아하는 사람을 시켜서 화투를 보급한다. 처음엔 다 잃어주며 농민들을 화투판에 끌어들여 드디어는 그들의 집과 땅을 넘겨받는다. 일본인들이 많아지자 그들이 사는 집을 짓고 유곽을 만들어 최건에게 관리하게 한다. 그러다 최건이 기억에만 의존해 관리하는 걸 약점으로 문서를 만들어 도장을 찍게 하고 제재소에는 손을 떼게 한다.
그리고 가장 유지였던 이들을 이런 저런 친분과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야금야금 그들의 이름으로 소작인들에게 장리빚을 주게 하고, 땅을 사게 하고, 그래서 다시 그들에게서 그 땅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 자녀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낸다. 당연히 마을 유지들은 자식이 일본에서 공부하면 자신의 지위가 더 높아지리라는 기대 심리로, 신분이 천한 김형구는 돈은 많으나 아직도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자식만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그 유혹에 응한다. 일본이 이렇게 유지들의 자녀들을 유학 보내는 것은 일종의 볼모로 데려가는 것이다. 점점 요구 조건을 세게 해서 들어주지 않을 때 걸핏하면 아이들을 들먹임으로써 점차 자신들이 쳐놓은 그물망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한편 천민 출신으로서 뛰어난 아이들도 유학대상이다. 그들의 울분과 분노로 조선을 뒤집으려 하는 것이다. 조선은 조선인의 손으로 망하게 한다는 치밀한 프로젝트였다. 이 과제에 일본에서 들어온 경찰과 깡패들, 또 군대, 헌병들은 당연히 힘으로 조력하였다.
김형구의 아들 단야는 그런 천민, 그 중에서도 가장 천한 백정의 혈통이었다. 할아버지 대부터 돈을 모아 부자가 되고 신분의 차는 없어졌다고 하나 그는 어릴 때부터 그 백정의 출신이라 해서 받는 냉대를 느끼고 자랐다.
이복형 시영은 유부녀인 순개와 바람이 났으나 순개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자 외면하고, 부모가 없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시집가야 하는 양반집 딸 명채를 아내로 맞이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 가로놓인 신분 차이를 뛰어넘지를 못한다. 명채는 어쩔 수 없이 시영의 아내로 살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편과 시댁을 멸시하고 은연중 남편을 냉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영이 일본인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도망가서 숨어 살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이, 명채는 가끔 시영의 소식을 몰래 전해 주던 시영의 친구 정수와 사랑을 나누다가 들키자 아이를 두고 쫓겨난다.

단야 역시 어린 시절 정수 아버지 강재상의 사랑방에서 만난 채호와 게걸 목사가 세운 교회학교에서 배우면서 양반 딸인 지호와 사랑이 싹트지만, 그 만남은 순탄할 수가 없었다. 강재상은 지호와 단야가 어울리는 것을 묵인했지만, 그 어머니는 싫어한다. 어머니의 강요로 혼례식을 치른 첫날 지호는 엽기적인 행각으로 신랑을 노하게 하고 파혼을 한다. 그리고 단야를 찾아 일본으로 떠났으나 둘은 같이 살면 살수록 신분이라는 벽을 깨뜨릴 수가 없었다. 절망한 지호는 아이를 낳자마자 죽여 버린다. 그리고 단야와 조선으로 돌아와 오랜 고민 끝에 헤어지기로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단야는 일본에서 독립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듯 살아야 하는 천민의 처지에서 인간답게 살다 죽을 수 있는 해갈과 해방의 샘물’을 갈구하게 된다. 그에게 사회주의를 가르쳐준 스승이 조선 총독부에서 제의한 문화제도 연구를 하러 조선으로 들어가면서 단야에게도 같이 하자 제의했을 때, 그는 스승에게 실망하고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일본의 사회주의 역시 일본에 오면 일본 제국주의화한다는 것을.
단야, 지호의 두 오빠, 최석두 모두 아버지가 처음부터 또는 피치 못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섰고, 그 아버지들의 욕망 때문에 일본에 유학 왔지만, 부모들과 달리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은 최건의 아들 최석두.
단야는 러시아로 간다. 러시아에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넘어온 조선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주로 함경도에서 힘들게 살다가 시베리아로 가면 먹고 살만한 것을 알고 겨울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이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촘촘히 초소를 세우고 총을 쏘아댄다. 총탄을 피해가며 강을 건너가면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죽은 걸 날이 밝아서야 확인하게 된다. 일단 강을 넘어가면 시베리아에 정착해 살 수 있다. 당시 시베리아 땅을 개간하는데 조선은 귀한 자원이었고, 그러한 러시아에 많은 조선인들이 귀화한다. 제정러시아 때는 짜르 왕정을 위해 러일전쟁에 가담하고 혁명이 일어나서는 자연스럽게 백군위의 편을 들게 된다. 그러나 백군위 쪽을 일본군이 지원하고 볼세비키 혁명에서 적군의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조선인들은 갈등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적군에 가담하기로 한다.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자 더 많은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하러 또는 일본의 수탈을 피해 시베리아로 향했다. 개중에는 조선에서 지배계층이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여기서도 지배계층이 되길 원해서 갈등이 있기도 했다.

단야는 독립에서 나아가 해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의미의 조선 해방은 신분우월주의자들의 뿌리 깊은 참회와 그 실천이 한 켠에 서고, 차별 받아온 사람들의 몸에 밴 굴종의식과 자기 비하를 태워내고서 평등관을 받아들이는 실천이 다른 한 편에 서서 이룩해내는 것일 때에라야만 조선인 모두를 위한 해방이 될 것이야.”
라고 그는 조선의 해방, 사랑과 평등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레닌에게서 발견하고 그에게 고려연방제, 또는 고려연방국을 제의한다.
“농민과 노동자의 나라가 러시아이며, 러시아의 희망은 농민과 노동자로 하여금 러시아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데 있음을 맨 처음 설파한 사람도 레닌이오.”
“레닌은 참고할 만하다고 믿어. 따라서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하는 노선을 따르면서 우리의 독자성을 살려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해보자는 것이오.”
러시아는, 특히 시베리아는 아직 적군이 백군과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지도 못했고, 또 연합국이 철수했지만 일본이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어서 조선인들이 앞장서서 일본을 막아주기를 바라는 처지였다. 하지만 일본의 힘이 강력해서 적군은 그들과 싸울 여력이 없어 레닌은 일본과 협상을 도모하던 차였다. 일본 또한 많은 친일 조선인들을 보내어 이로 인해 시베리아의 조선인들은 갈래갈래 찢어졌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대양읍에도 그 물결이 밀려왔다.
일본은 수리조합을 세워 고리대금업을 하고, 빼앗은 조선인 땅을 다시 밀고 네모반듯하게 만들어 소작을 시켰다. 그리고 신작로를 만드는데 마을 사람들을 동원했다. 신작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일직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주와 관계 되는 곳(사실은 지주 이름의 일본 땅)은 돌면서 마을을 두 동강 내기도 하면서 진행되니 자연히 동네 사람들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작로를 만드는데 모든 동민들이 동원되었다.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응하지 않자 할당량을 정해 일찍 마치면 보내준다고 회유도 하고 그래도 응하지 않는 자는 매로 다스리니 사람들은 움직임이 달라졌다. 그러다가 말다툼이 일어나서 일본인 감독을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죽이고 파묻기도 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경찰은 숫자상으로 적으니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일본에서 지원 군대가 오자 무력 진압은 심해져, 예배당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넣고 밖에서 총을 쏘고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
그렇게 진압되고 나자 사람들은 낮에는 아무 말없이 일하다가 밤에는 산으로 가서 나무마다 태극기를 달았다. 아침 햇살에 태극기가 나무마다 나부끼는 대목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날 무렵 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밝혀진 민족자결주의는 제국주의들의 민족자결주의지 식민지 민족들의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 다녀온 단야는 우울해졌다. 그를 우울하게 만든 것은 삼일운동의 실패가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 친구들이 식민지 상황에 체념하고 목숨을 잘 보전하자는 자세 때문이었다.
시베리아에서도 일본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어 조선인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모조리 강간하는 처참한 살육이 있었다. 레닌은 일본과 협상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이 사건은 조선인들이 경거망동하여 일본인들을 자극하여 일으킨 사건이라 생각하고 화를 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조선인 대표를 만났다.
1921년 한국공산당이 창립되고, 이동휘가 대통령이 되었다. 한국공산당은 그것이 곧 완전하고 성숙한 유일한 조선인들의 합법적인 정부가 되기를 갈망했다.
1922년 백위군 잔여 세력은 지리멸렬해지고 최후 거점이던 블라디보스토크에 적색 깃발이 올려졌다. 일본군은 사할린을 제외한 전 시베리아 지역에서 쫓겨나고 친일하던 조선인들도 국내로 철수했다.
하지만 단야는 실종되었고, 최석두는 죽었다. 레닌도 죽고 조선인들을 과히 탐탁지 않아 하던 스탈린이 권력을 잡아 시베리아 조선인에겐 강제이주정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는 ‘조선공산당’이 세워졌다.

긴 호흡의 이야기 요소요소마다 작가는 다양한 사료를 인용했다. 그 중 가장 애절한 것은 고종황제에게 을사조약이나 정미칠조약을 체결한 매국대신들을 처벌하라는 간곡한 상소문이었다. 일본군의 겁박에 굴하지 말고 그들을 처벌하여 기강을 바로잡으라는 최익현의 글에 넘치는 기개는 꼰대로만 알고 있었던 그 최익현이 아니었다.
2·8독립선언문이나 레닌의 연설문등을 읽으며 문득 왜 우린 이런 사료들을 가지고 공부하지 않았을까 의문스러웠다. 신채호의 ‘조선독립선언’을 읽으면 이 사람을 무정부주의자라고 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데 말이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도대체 무엇일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헌병제도를 도입하여 모든 군인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칼을 차게 했다. 그들의 교육 목표는 일본 천황의 충실한 종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천황의 명령을 받을 정도의 지식이면 족했다. 그래서 너무 많이 배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찰도 마찬가지였다. 주지는 총독부에서 임명했고, 일본식 절이 동네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조선인들의 의식을 일본화해서 근본적으로 조선을 없애겠다는 것이 일본의 목표라고 단야는 생각했고, 그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교육 목표는 뭘까? 서울대를 비롯한 스카이대 진학인가? 한국의 학생들은 모두 학자가 될 듯이 밤 12시가 넘도록 공부를 한다. 예전엔 대학만 가면 되었지만, 지금은 대학에 가서도 취직 공부로 날을 보낸다. 그런데 왜 한국인의 의식 수준은 나아지지 않는 걸까? 왜 우린 역사에 대해 제대로 잘 모르는 걸까?
동국대 철학과 강유원 교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서해 유성룡의 ‘징비록’을 제목과 저자만 알지 읽지 않는다. 다 안다고 착각을 한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도 징비록을 읽지 않았다. 일본을 욕하는 이 글을 일본인들은 한 해 5천 부씩 사 본다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 후배들도 교육법을 달달 외면서 교사 임용고시 공부는 하지만 실제 관련 책을 읽지는 않는다. 읽었다고 착각을 한다. 그러니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그나저나 이 작가가 이 이야기에서 희망으로 말한 것은 무엇일까? 예배당에 도망가 있다가 총탄과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박근우와 김순지의 사랑, 김시영과 순개 사이에서 태어나 절에 맡겨졌던 선봉 스님, 그리고 최석두가 총 맞아 죽는 순간 품에 지니고 있었던 신채호의 ‘조선독립선언’에서 희망을 찾은 걸까?

“개인적 저주나 원한은 그 대상물이 사라지면 투쟁의 목표와 방법을 잃게 된다. 그러나 투쟁의 대상과 목표가 단순히 시간적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아니라 한 사회 전체에 걸쳐서 내재한 때에는 그렇지 않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투쟁은 곧 인간 자체의 해방과 자유에 기여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싸움이며 이는 곧 행복이라는 차원으로 치닫는 숭고한 과제인 것이다.”
는 말에 감동을 받고,
“저는 조선이라는 한 국가의 해방에 머물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인간 자체의 해방을 원하고 있습니다.”
는 염원 속에 작가의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일까?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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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론님 뭐 좀 여쭈어 볼께요 임시정부나 광복부터 시작해서 친일인사들과 한국의 정치역사에 대해서 서술한 책이 있으면 추천바랍니다

최소 2종류가 필요합니다 추천바래요~ 수고하세요

금, 2017/08/18-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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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 문학박물관을 방문했는데 문학관내 만해 스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친일파 내지 친일 논란이 있는 인물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일제시대 조선일보 관련 전시 코너였지만 이광수, 주요한, 김동인, 채만식, 노천명 등을 만해 박물관에 있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친일파와는 상종하지 않았던 그리고 유명한 최남선과의 일화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런 처사는 만해 스님에 대한 모독 이라고 생각합니다.

 

일, 2017/08/20-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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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 라는 이름의 낚시 집어제가

버젓이 유통 판매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자기나라 서쪽바다를 일본해라 부르는건

굳이 욕하고 싶지않은데요 우리나라에 판매하는 물품에

버젓이 일본해라는 이름을 붙혀서 판매를 한다는것과

낚시인들의 수차례 건의에도 들은척만척 변명만 늘어놓고 개선의 의지가 안보이네요

마루큐 라는 떡밥 회사의 제품입니다

이 건 에 대해서 해결을 좀 부탁드리고자 글을 남겨봅니다

 

일, 2017/08/2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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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답사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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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대학살기념관 화평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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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12월 난징대학살 80년을 맞아 기념관 공사가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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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위안소유적진열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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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위안소유적진열관 외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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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리지항위안소 옛터 진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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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위안소유적진열관 내부에 전시된 민족문제연구소 발행도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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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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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열사공묘 내부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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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열사공묘에서 항일전에 참전한 조선인 전상국, 김원영 열사의 이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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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열사공묘 야외에 전시된 당시 중국군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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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산 김원봉 주도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터(현재 천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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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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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간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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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혁명당 거점(현재 난징 호가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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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경으로 유명한 부자묘(공자 사당) 입구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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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고속철도 난징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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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에서 광저우로 가는 아침 첫 고속열사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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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국공합작을 계기로 설립된 황포군관학교는 현재도 항일역사공간으로 활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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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벌 타도, 국민혁명 완성을 목표로 한 황포군관학교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도 많이 입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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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청년들이 많이 다녔던 대학이자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중산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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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포군관학교 입구에 있는 쑨원의 유언(革命尙未成功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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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 반국민당 정부 무장봉기(광저우꼬뮌)에 참여했다 희생된 조선 청년들을 기려 세워진 광주기의열사능원의 ‘중조인민혈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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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공사 중인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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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기의열사능원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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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이항증 선생(석주 이상룡 증손자)에게 ‘항일’ 구호로 격려하는 학생 답사 단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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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의정 비문에 의하면 광저우꼬뮌 당시 희생된 조선인 혁명가들이 약 150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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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저우 신해혁명기념관에는 당시 주요 혁명가들의 동상이 역동적으로 제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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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당시 시국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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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놓고 열강들의 각축을 보여주는 시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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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해혁명기념관 등 대부분의 역사기념관은 국민들의 역사교육을 위해 입장료가 무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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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헤혁명기념관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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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저우는 주강 강변의 야경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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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저우아시안게임이 열린 주경기장 주변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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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형색색 조명이 변하는 주강 강변의 광저우탑

월, 2017/08/2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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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우리 국민들부터 대피시켜야하는거 아닌가? ㅠ.ㅠ

월, 2017/08/2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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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1-50

0821-51

버스
(1) 합정역 정류장 하차 뒤 성산초등학교 방면 50M
간선버스271, 지선버스27011, 지선버스7013A, 지선버스7013B
(2) 성산초등학교입구 정류장 하차 뒤 합정역 방면 50M
간선버스271, 지선버스27011, 지선버스7013A, 지선버스7013B

지하철
2호선 6호선 합정역 8번 출구 –> 월드컵 경기장, 성산초교 방면 350m -> GS25 편의점을 왼쪽에 두고 좌회전 50M -> 웰빙센터

차량
합정역 네거리(월드컵경기장, 마포구청 방면) -> 성산초교 앞 교차로 (망원동 방향 좌회전) -> 50M 롯데공개인중개사무소 앞 비보호 좌회전 -> 성산초교를 왼쪽에 두고 50M 남경슈퍼 앞 좌회전 -> 30M 웰빙센터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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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21 | 지도 크게 보기 ©  NAVER Corp.
월, 2017/08/2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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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길게 줄을 선 사람들.


대통령이 일하는 곳, 청와대를 보러 온 관람객들입니다.


<인터뷰> 홍영수(경기도 고양시) : “주말에는 6개월 치가 다 예약이 마감돼 있었고,(이것도 방학이라서) 평일 날은 좀 어려웠어요. 간신히 했어요.”


1시간 반가량 청와대 곳곳을 둘러보는 관람 코스.


제한된 장소에선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 후원엔 관람객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문화재가 한 점 있습니다.


바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입니다.


<인터뷰> 신상빈(경기도 용인시) : “못 봤어요. 아예 못 봤어요. 코스에 없나 본데.”


<인터뷰> 홍순(인천시 서구) : “저희는 가족들이 놀러 다니면서 이런 불상도 많이 보는데 여기서는 못 본 것 같아요. 확실히.”


이 불상은 최근 한 시민단체가 원래 위치로 되돌려 달라는 진성서를 청와대에 내면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인터뷰> 혜문(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 “(불상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겁니까?) 아닙니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통일신라 불상이 왜, 언제부터, 청와대 안에 있게 된 걸까?


청와대 직원들조차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보안구역에 있다는 불상.


직접 본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더더욱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데요.


청와대 불상에 얽힌 길고도 복잡한 사연을 들여다봤습니다.


청와대 후원 숲 속, 보호각 아래 다소곳이 앉아 있는 석조 불상.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만들어진 석조여래좌상입니다.


불상의 높이는 1.16m.


석굴암 본존상의 축소판으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예술성을 보여주는 보물급 문화재로 꼽힙니다.


<인터뷰> 박임관(경주학연구원 원장) : “양어깨가 딱 벌어지고 가슴이 볼륨이 있고 그다음 무르팍이 아주 크게 웅장하게 되어 있어서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불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빼어난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불상은 관람이 쉽지 않습니다.


대통령 관저에서 가까워 일반인의 접근이 철저하게 금지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 화면 역시 지난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찍은 것으로,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촬영 허가가 난 적이 없습니다.


취재진이 청와대에 불상을 직접 찍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보안 문제 때문에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최근에 불상을 직접 본 사람은 없을까?


수소문 끝에 취재진은 문화유산 답사 모임을 운영하고 있는 강대철 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강 씨가 청와대에서 불상을 직접 본 때는 2015년 11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청와대 불상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사진도 찍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불상의 옆 모습과 뒷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1000년이 넘는 세월에도 보존 상태가 좋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 강대철(옛문화답사회 대표) : “딱 보니까 석굴암의 본존불 생각이 딱 나더라고요. 당당한 자세라든가 또는 조각기법, 그다음에 전체적인 느낌 같은 것이 상당히 가치 있는 문화재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이렇게 좋은 작품이 좀 더 대중들한테 보여졌으면 좋겠는데 외롭게 여기 계신가 하는 생각이 좀 많이 들었죠.”


통일신라 불상이 청와대에 있게 된 이유는 뭘까?


불상 앞에 놓인 돌에는 경주 남산 절터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옮겨온 거라고 적혀 있습니다.


불상이 처음 있었던 자리를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 시내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논밭을 지나 마을 뒷산 쪽으로 걸어 올라가자, 산 아래 탁 트인 지형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신라시대에 ‘이거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입니다.


1,0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에 무너져 내린 석탑만 황량한 절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청와대 불상의 고향을 이곳으로 보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

는 1939년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문서.


당시 일본인이 남긴 경주 출장 보고서를 보면, 이 불상은 본래 경주군 내동면 ‘도지리’의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거라고 돼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이곳에선 도지마을, 도지동이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또 다른 근거는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조를 보면, 737년에 왕이 돌아가시자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인터뷰> 박임관(경주학연구원 원장) : “성덕왕릉의 북쪽에 이거사가 있다는 건데 북쪽에 절터는 이곳이 거의 유일한 절 터이기 때문에 이거사가 정확한 걸로 보고, 이곳에서 청와대에 있는 미남 불상을 옮겨갔다, 이렇게 보고 있죠.”


이 불상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은 한일병합 늑약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2년 말 경주를 방문한 데라우치는 한 일본인의 집 정원에서 잘생긴 불상 한 점을 만납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조선총독부 문서를 보면, 데라우치 총독이 불상을 거듭 되돌아보며 유심히 살피자, 집 주인이 총독의 의중을 눈치채고 불상을 즉시 경성(서울)의 총독관저로 보냈다고 기록했습니다.


총독 진상품 신세가 된 불상이 경주를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서울 남산의 총독 관저.


남산 북쪽 길을 따라 남산공원 방향으로 오르다가, 지난해 새롭게 조성된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안으로 발을 들여 놓으면, 치욕의 역사를 보여주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통감 관저, 훗날 총독 관저가 있던 자리입니다.


이 터 옆을 자세히 보면 절벽 아래 깎아지른 바위가 있습니다.


바로 이곳이 불상이 옮겨졌던 장소입니다.


1913년 2월 데라우치는 자신의 일기에, 불상을 절벽 바위 아래 안치하고, 개안식을 열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취재 과정에서 입수한 한 장의 사진.


일본 관리들 사이에 불상의 얼굴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 이순우(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그 기록이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고 그래서 그 당시 위치는 사진 자료도 있습니다만 일단 총독관저 이웃한 절벽 아래쪽에 있다고 그랬거든요. 큰 나무면서 절벽 아래니까 저기 바로 보이는 저 위치라고 보실 수가 있는 거죠.”


이후 1927년 총독 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새로 지어지면서 불상도 함께 옮겨진 겁니다.


그 뒤 1934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불상에 관한 기사가 실립니다.


불상을 ‘미남석불’이라 부르고,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경주의 보물”이라며 상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 뒤 8.15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까맣게 잊혔던 불상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기자인 이구열 소장.


1973년에 초판을 펴낸 <한국문화재 수난사>란 책에 통일신라 불상의 기구한 사연을 상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인터뷰> 이구열(미술사학자) : “우리로선 문화재 수난의 참 하나의 사례죠.근데 어쨌든 그렇게 됐던 건데 그게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고 경주에 있다가 서울에 와서 지금 청와대에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에요. 그때 많은 것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도 많거든.”


다시 세월이 흘러 청와대 불상이 세간의 이목을 끈 때는 지난 1994년.


구포역 열차 전복부터,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 서해 훼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충주호 유람선 화재까지…


갖가지 대형참사가 잇달아 터지며 민심이 흉흉해지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불상을 치워버린 게 화근이 됐다는 등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습니다.


급기야 청와대가 출입기자단에 불상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집니다.


해방 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식민지 시대의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청와대 통일신라 불상.


그동안 제자리로 되돌려달라는 숱한 요구가 있었지만, 아직 달라진 건 없습니다.


<인터뷰> 이순우(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불상이 청와대에 있어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전혀 없죠, 당연히. 그것은 뭐냐면 불상 자체는 워낙에 우리가 잘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죠. 그런데 우리 한국을 강제 병합했던 바로 그 당사자인 데라우치 총독의 손을 거쳐서 그 불상이 지금 총독관저에 옮겨지게 됐고, 바로 그다음에 총독관저 옮겨지는 거에 따라서 청와대에 들어갔지 않습니까? 그거는 전형적인 일제잔재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광복 72주년을 맞은 올해 시민단체가 또다시 문제 제기에 나섰습니다.


청와대에 있는 불상을 원래 자리인 경주로 돌려보내 달라는 진정서를 청와대에 낸 겁니다.


<인터뷰> 혜문(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 “과거사에 대한 청산, 과거 권위주의적인 시대 청와대의 모습에서 탈피하고 적폐청산을 강조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새 정부 출범과 더불어서 청와대 불상이 원래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과거 시대와 다른 새로운 시대의 청와대의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고 굳게 닫혀 있던 청와대 문을 활짝 열겠다고 약속한 새 정부.


여기에 맞춰 청와대 불상도 과연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김석기자 ([email protected])


<2017-08-20> KBS

☞기사원문: ‘청와대 불상’ 경주 가나?



※관련기사

KBS: ‘아픈 역사’ 청와대 석조불상…경주로 이전?

월, 2017/08/2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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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화성 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미국을 흔들고 있다.>

1. 북의 화성 14형, 미국을 확실한 과녁으로 집어넣다.

2017년 7월 4일과 28일 연달아 진행된 북의 화성 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은 한마디로 세계사적 사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7월 28일 발사한 화성 14형은 고각발사로 약 1000KM를 비행하였고 정상각도로 발사한다면 그 사정거리가 최소 10,000KM 최대 14,000KM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미국 동부의 주요 도시, 워싱턴이 북한의 핵 타격 범위 내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확증해 주었다.

미국도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사정거리가 미 전역을 포괄하고 있음을 자인하고 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국가의 우두머리로 소위 ‘세계 경찰관’을 자처해 온 미국은 이제 본토에 대한 실질적인 핵 위협이라는 불안거리를 안게 되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은 가장 발전된 무기 체계로 평가되며 불의의 시각에 발사되고 요격회피기동을 할 경우 마하 20이상의 속도로 낙하하는 탄두에 대한 요격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대륙간탄도미사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미국은 중국, 러시아와 수교관계에 있지만 북과는 법적으로는 정전상태, 즉 전쟁을 일시 중지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동안 동북아 패권을 쥐기 위해서 대북적대정책을 지속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 오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것이 미국에게는 최대의 안보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

2. 미국은 이제 핵전쟁에 대비해야

미국은 지금 공식적으로 북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신뢰성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내년 초에나 갖출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아직 탄두의 재진입 기술 문제가 있기 때문에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신뢰성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북한의 핵, 미사일 기술의 진전속도와 그 독자적 발전 경로를 무시한 발상이다. 미국이 그동안 거쳐왔던 발전경로를 보면 아직도 수십 회의 실험을 해야겠지만 북은 수회의 시험만으로도 그 성능을 확증해 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미국은 이제 핵전쟁을 대비해야 한다. 본국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며 전쟁에 대한 방어 준비를 하지 않아 핵공격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된 미국과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의 핵전쟁 위협에 대비해 전 사회적 방어체계를 갖춘 북. 상당히 대비되는 상황이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미국은 하와이에서 북의 핵 공격을 대비한 비상훈련을 월 단위로 진행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요격미사일 방어체계에 국방비 예산을 대폭 증강시키며 각종 전략자산과 신무기 개발에 막대한 돈을 투입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핵전쟁에 대비한 사회적 인프라가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이런 문제는 북이 전자기탄을 발사할 경우에 대한 토론에서도 제기되었다. 북이 미국 영공 수백KM의 상공에서 전자기파를 최대로 발생시키는 핵폭탄을 3~4개만 터뜨려도 미 전역의 전력공급망이 붕괴되며 이를 회복하는데 10년 이상이 소요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어 왔다. 미국이 핵전쟁을 대비하려면 보조전력계통의 신설과 핵방호를 위한 각종 시설의 구축 등이 필요하며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하는데, 지난 수십년 간 핵위협을 해 왔지 핵위협을 당해오지 않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매우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한마디로 핵전쟁이 현실로 다가왔으며 그에 대한 대비는 너무나도 취약한 것이 미국의 실정이다.

이는 미 경제에도 큰 부담이 될 것이며, 지금 미국인의 70~80%가 북의 핵공격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황 자체가 사회적 긴장과 모순을 격화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하겠다.
3. 화성 14형 발사 이후 쏟아져 나오는 대화론

미 군부는 자신들이 세계 최강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 언제든지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엄포를 놓고 있으며 미 중앙정보국장은 북의 정권교체를 공공연하게 거론하고 있다. 최근 조성된 긴장 국면에서 미국이 선제폭격, 예방전쟁이나 정권교체 공작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이라는 위기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선제타격론에 대한 미국 내 반발도 만만치 않다. 이미 미 군부의 일각에서는 실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동안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전쟁이 되며,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이 예상된다는 공포에 질린 소리를 해대기도 하였고, 미 국방부, 국무부의 전직관리들도 다양한 북미대화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비핵화가 아닌 북의 핵탄도미사일이 미 본토에 도달하지 않는 선(중거리 핵탄도미사일 용인)에서의 핵군축 안까지 있다.

트럼프가 정치에 발을 디디게 한 계기를 주었다는 키신저는 중국을 통한 대북압박을 강화하기 위해서 하나의 한국(흡수통일) 정책의 폐기, 주한미군철수를 중국에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 미국에서는 북에 대해서 나올 수 있는 주장은 다 나오고 있고, 북한의 현실적 실체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고 하겠다. 지금 미국은 북에 대해서 단일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중국에게 볼멘 목소리만 하는 매우 취약한 행태만을 보이고 있다. 지금 미국의 일각에서 그 무슨 북의 정권교체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고장난 레코드판의 반복에 다름이 아니다.

지금 한국의 일부 우익세력들은 한미동맹은 영원하다고 주장하며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에도 한미동맹은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철저히 자국의 이해와 요구에 기초해 움직이는 실용주의 국가, 자본주의 국가이다.

LA와 뉴욕, 워싱턴에 핵미사일이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북에 대한 선제타격이나 정권교체를 추진할 수 있고, 그것이 한미동맹의 근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일부 우익세력들의 생각은 현실을 보지 못하는 사대주의적 사고에 불과하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한반도에서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게 된 것이 엄연한 현실이며 북의 국제전략적 지위는 달라졌다.

4. 미국의 분열은 체제붕괴로까지 가속화될 수도

공화당계의 원로로 키신저가 대표 인물 중 한 명이라면 민주당계의 원로는 브레진스키가 대표인물 중 한 명이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제국이 되기에 취약한 점으로 미국 국민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들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파쇼독일과 같은 전체주의가 되기에는 국민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미국은 국가보다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전통이 강하고 주별 독자성도 강하다. 트럼프에 대해서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구호가 LA 등지에 울려 나온 것은 이런 미국민들의 성향을 대표하는 현상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기존 정치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트럼프의 등장이 이런 미국의 전통적인 개인주의, 자유주의 관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전체주의, 동원체제를 도입하기 위한 시도라는 분석도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미 독점자본의 심각한 위기는 결국 전체주의를 통한 총력동원체제를 요구하는데 미국의 체질개선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이런 시도는 미국 내에서도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북의 핵위협이 현실화되고 있는 조건에 국운을 건 대북전쟁에 미국민들은 열광적 지지를 보낼 수 있겠는가. 미 본토가 전쟁터가 되고 핵의 불바다가 펼쳐지는 상황에서 미국민의 절대 다수가 멀리 떨어진 동북아시아에서 그 무슨 개인적 이득을 얻는다고 목숨을 건 전쟁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지금 미국에게 던져진 근본적인 질문이다. 미국의 전통적 관습에 기초한다면 미국민들은 미국의 호전세력들에게 동조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독점세력들이 전쟁을 택한 순간, 미국 사회는 일대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근 년에 들어와서 미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흑인폭동과 같은 사태가 다중으로 발생하고 각 주들의 알력과 갈등이 더 심하게 번질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전쟁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원격전쟁으로 벌어져 왔을 때에는 하나의 산업, 전자게임으로밖에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제 자신들의 집 마당에 핵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전쟁이 산업과 게임으로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다. 수많은 엄폐시설을 갖추고 그곳에서 수년간 생활할 수 있는 독점자본가들과 관료집단들에게 핵전쟁은 여전히 산업과 정치수단의 하나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수의 미국인들에 그것은 공포이고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이며 결국 미국의 해체라는 파국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북은 화성 14형 발사로 미국에게 북미평화협정체결, 주한미군철수로 나서든지 아니면 자멸로 길로 치달아 갈 것인지 선택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

북의 화성 14형 시험발사가 던진 메시지와 그 파장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세계사의 근본적 질서가 변화하는 바로 그 현장을 살고 있으며 거기에서 미국은 하나의 거대한 공룡, 적응하지 못하며 자기 무게로 무너지는, 파산하는 제국으로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끝)

월, 2017/08/2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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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기 [텀블벅 펀딩]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사라져가는 기억을 위해 집을 지어주려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프로젝트
0712-2

일본 남쪽, 나가사키 항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하시마(군함도)는 야구장 두 개 정도 크기의 작은 섬입니다.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져 근대화의 상징으로 불렸던 이 섬은 좁은 섬에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는 모습이 마치 군함처럼 보여 그때부터 ‘군함도’라고 불렸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그대로 간직한 그 섬에서 과연 누가 살았을까요?

지상에서 일하는 일본인과 달리 강제동원 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지하에서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그 지하는 숨 쉬기조차 어렵고 몸을 펼 수 없을 만큼 좁았으며, 식량과 식수조차 주어지지 않는 말 그대로의 지옥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석탄 채굴을 위해 강제동원 되었지만, 그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때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가 족히 10개는 넘게 들어 있다는 납골당과 공양탑은 지금은 파괴되어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근대화의 상징’, ‘자랑스러운 세계유산’으로 포장하려는 군함도(하시마)는 일본의 근대화가 강제징용 된 조선인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0712-3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많은 나라들이 과거를 돌이켜보며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역사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정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떨까요? 우리는 아직도 친일문제가 분명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한일 과거사를 청산하고,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반민특위 정신을 이어받고,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일 과거사 문제뿐만 아니라 박정희기념관 건립 저지, 친일파기념사업 저지와 같은 다양한 활동과 전시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과거사 청산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이제 행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민족문제연구소가 꾸준히 모아온 자료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며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바라보고 기억하기 위해 2018년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려 합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부지를 정했지만,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박물관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많은 것들이 부족합니다. 0712-4 Print

일본은 한일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근거 없음’이라고 주장합니다. 과거에 동아시아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동아시아 안보를 지키는 파수꾼이라 자처합니다. 게다가 일본은 일제 침략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의 상황을 토대로 경제부흥을 이끌었지만, 전후 보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발언을 그치지 않습니다. 한국정부는 그렇다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했을까요? 한국정부 역시 일본정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한국정부는 국민적 합의 없이 한일협정을 진행해 그 청구금을 경제발전의 재원으로 사용한 바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 역시 당사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진행하여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 번 눈물을 쏟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곁에는 과거를 부정하는 세력들에 저항하며 물러서지 않고 목소리를 내온 역사의 산 증인들이 살아 계십니다. 그러나 역사의 산 증인이신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며 과거를 증명하는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조금씩 사라지고 흩어져가는 기억들을 이제 한 곳에 모아 모든 이들이 함께 기억하고, 세대를 넘어 기억을 전달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지어주려 합니다. 이 기억들이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시민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시민들이 함께 모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여 제대로 된 역사 인식과 함께 역사를 통해 성찰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합니다.

역사의 참혹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민의 귀에 닿도록 만든 것은 피해자의 용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가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곁에서 도운 것은 한국에서 조직된 시민들의 힘이었습니다. 역사는 시민의 것입니다. 강한 자들이 제멋대로 헝클어놓은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 위해,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이제 역사 위에서 성찰하기 위해 시민의 힘이 필요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통해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기 위한 큰 길을 내고 싶습니다. 함께 동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 2017/07/1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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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다운로드]

국정교과서 부역자에 대한 인적 청산,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1. 최근 교육부의 김연석 과장이 인천의 한 중학교 교장으로 발령이 났다가 철회된 것을 두고 일부 보수 언론을 비롯해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두 야당이 ‘전 정부의 정책을 맡았던 실무 공무원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4월 한국교원대학교 사무국장 발령을 받았다가 학교 구성원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자 이준식 전 교육부 장관이 학술원으로 전보 조치한 박성민 부단장까지 거론하며 두 사람을 정권교체의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파렴치한 작태를 보이고 있다. 두 야당과 보수 언론은 두 사람을 국가공무원법상 ‘성실 의무’와 ‘복종의 의무’ 규정에 따라 주어진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 ‘실무 공무원’으로 정의하며, 이들에 대한 발령 취소나 전보가 선량한 공무원들에 대한 정치 보복이라고 주장한다. 자유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공무원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라는 망발도 서슴지 않는다.

2. 우리 헌법 7조는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고 하여, 공무원의 법적 지위·책임·신분과 정치적 중립성 등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 공무원은 그 임용주체가 국민이고, 그 직무가 공공성을 띠기 때문에 특정인이나 특정의 당파·계급·종교·지역 등 부분이익만을 대표하여서는 아니 되고, 국민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 국민은 국가권력을 이들에게 신탁(信託)한 주권자이기 때문에,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公僕)이어야 하는 것이다.

3. 한국갤럽이 작년 12월 2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추진을 찬성한다는 응답자는 17%에 불과했다. 반대 의견이 67%, 유보한다는 답변이 15%로 나타났다. 국정교과서 현장 검토본이 공개된 후 여론조사에서 내용이 적절하다는 반응은 11%에 그쳤고, 71%는 부적절하다고 응답했다. 국민 절대 다수가 국정교과서 추진 자체에 반대하고 서술내용 또한 부실하다는 데 동의한 것이다.

4. 이런 여론조사 결과를 접하고서도, 교육부 고위 공무원인 두 사람이 지난 2년 동안 박근혜 정권이 밀어붙인 국정교과서 정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실을 되돌아보면, 이들이 ‘국민의 공복’이 아니라 ‘정권의 충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결코 ‘선량한 실무 공무원’이 아니라, 중립의무를 저버리고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거역한 ‘불량한 어용 공무원’이었던 것이다.

5. 김연석은 박근혜 정권이 국정화를 강행하던 2015년, 역사교육지원팀장, 국정화 추진 비밀 T/F팀 기획팀장,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 기획팀장을 연이어 맡았던 인사이다. 그가 거쳐 간 조직은 총리령으로 급조된 것으로 국정교과서 제작을 위해 만든 기구들이었다. 특히 그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공무원임에도 불구하고 2015년 국정감사 당시에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만 기존 한국사 교과서를 좌편향으로 정의한 ‘색깔론 보고서’를 작성해 몰래 전달하기도 했다. 직속상관인 장·차관의 결재도 받지 않은 이 행위에 대해,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 교문위원들은 공무원이 정치적 중립성을 위반한 것이라고 강력 항의하고 질책한 적이 있다.

6. 박성민 역시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 부단장으로 국정교과서 추진의 핵심 인사였다. 고위 공무원 신분인 박성민은 새누리당 전희경 의원의 주관한 국회 토론회에 참석하여, 자신이 부임한 후 1년 동안 국정교과서 작업을 총괄하면서 ‘전혀 부끄럽지 않게 작업했다’고 말했다. 학계의 ‘국정교과서가 오류투성이의 균형감각을 상실한 편향적인 역사책’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공연히 ‘시비를 건다.’며 조롱했다. 게다가 역사교사들이 수능 필수가 아니라서 ‘설렁 설렁 수업을 한다.’거나 학생들이 ‘촛불집회 한다니까 우르르 가서 막 이야기한다.’ 등의 막말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 속에서 진행되는 촛불집회를 폄하하고 역사교사들과 학생들을 모욕했다. 박성민 역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심각하게 위반한 대표적인 인사다.

7. 지난 3월 17일 대구지방법원은 문명고등학교 학부모가 낸 ‘연구학교 지정처분의 효력 정지 신청’을 인용하였다. 법원은 문명고가 국정교과서를 주교재로 하여 역사수업을 진행함으로써 학습자인 학생들의 인격발현과 학부모의 자녀교육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면서, 그 근거로 학생의 학습권 및 학부모의 자녀 교육권은 결코 희생되어서는 아니 되는 “헌법상 보장되는 중요한 기본권”이라는 점을 들었다. 불법, 탈법, 위법, 꼼수로 점철되었던 국정교과서 제작에 충성을 다한 김연석과 박성민은 ‘헌법 가치’인 학생의 ‘학습권’과 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권’을 침해하는 데 일조한 ‘범법자’인 것이다.

8. 최근 문재인 정부의 각 부처는 과거 정부의 정책 중 국민의 의견을 무시하고 진행했던 정책을 되돌아보고 같은 실수를 방지하기 위한 TF를 꾸리고 있다. 외교부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를, 통일부는 ‘정잭 검증 TF’, 문체부는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 TF’를 각각 구성했다. 심지어 국정원도 ‘국정원 적폐청산 TF’를 구성해 이전 정권의 적폐를 밝히는 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9. 반면 ‘역사쿠데타’의 주역인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대 국민 사과는 물론 적폐 청산을 위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준식 전 장관은 어떤 정치적 책임도 지지 않고 퇴임사에서 ‘국정교과서가 최선은 아니었다.’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다시 서울대 명예교수로 돌아갔다. 이영 전 차관은 퇴임식에서 국정교과서를 추진했던 시기를 ‘힘들었지만 보람 있는 시간’이라 말하고 한양대 교수로 돌아갔다. 전 교육부 차관 김재춘 역시 현재 한국교육개발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10. 교육부뿐만이 아니다. 집필진 구성, 집필기준 작성, 그리고 탈법 감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무를 맡았던 국사편찬위원회의 진재관 편사부장, 박덕호 역사교과서 편수실장도 국정교과서 폐기 이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바뀌었지만, 국정화에 찬성하였던 뉴라이트 성향의 위원들은 아직도 뻔뻔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들은 출세를 위해 기꺼이 정권의 ‘충견’이 되어 주권자인 국민이 반대하는 국정교과서 정책을 밀어붙임으로써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고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 ‘역사의 죄인’이다.

11. 그러는 사이 국정화 추진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교육부 관료들은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범법자’들을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이 나서서 비호하고 있는 형국이다.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시대착오적인 야당과 보수언론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국정교과서 부역자에 대한 강도 높은 인적 청산을 함으로써, 교육적폐 청산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끝>


2017년 8월 21일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월, 2017/08/2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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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역적 여름특집2] 도쿄 야스쿠니 반대 촛불행동에 가다
2017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야스쿠니 반대 촛불행동!

월, 2017/08/2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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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크스,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제거 지시

미CIA가 도널드 트럼프 美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차 중국공산당대회를 앞두고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제거 작전에 나섰다는 정황이 제기되고 있다.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북한문제에 중국과 이견을 갖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의 독재체제에 문제의 원인이 있다는 분석에 근거하여 CIA에게 긴급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현재 시진핑 주석은 19차 중국공산당대회를 앞두고 수십년 유지돼온 집단지도체제의 관례를 깨고 ‘시진핑 1인체제’를 구상하고 있다.
중국 혁명원로 2,3세대 자녀들로 구성된 태자당의 정치권력화 시도가 철저히 분쇄되고 장쩌민파 지방세력 역시 완전히 몰락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정치형국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시진핑의 독재’를 막아내야 한다는 입장을 표방하면서 CIA에게 암살을 지시했다고 한다.
또한 꾸준히 있어온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북한도발과 무역적자 문제에서의 갈등으로부터 그런 결론을 내린 것으로 추측한다.
지난 12일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은 전화통화를 통해 북한 도발문제에 대해 논의를 했고 백악관에서는 “양국 정상 간 관계는 매우 가까우며, 이는 북한 문제의 평화적 해결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안보리 새 대북제재 2371호 합의 당시 중국이 원유공급 중단은 반대했던 점, 북한의 도발책동에 중국이 사실 침묵하고 있는 점, 북한의 태도에 전혀 변화가 없는 점 등을 내세워 이것이 사실 시 주석 채널의 문제라고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이번 19차 중국공산당대회를 계기로 시진핑 주석이 아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바라보고 있다.
실제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이 글은 허프포스트US의 “Wikileaks said Trump wanted to get rid of Xi.”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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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leaks said US President Trump wanted to get rid of Xi.

CIA is moving to get rid of China’s President Xi jinping before upcoming 19th Congress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CPC) by order of Donald Trump.
wikileaks said Washington and Beizing have different opinion about North Korea affair and thinking that originates by the despotism of Xi, Trump ordered CIA urgent intruction to remove Xi.
Recently China’s President Xi jinping has made ‘one man leadership’ breaking collective leadership system in preparing of 19th Congress of the CPC.
The Princelings, Crown Prince Party wanted to possess the political power, but Xi pulverized that attempt and local power of Jiang Jemin had ruined.
perceiving the “serious” situation of China political system, Trump gave signs to kill Xi in order to block ‘the tyranny of Xi’.
It is also because of that Xi has not agreed with the sanction of North Korea and currency manipulating problem.
Last 12th according to a White House Statement, Trump had a phone call to Xi and discussed about the North Korea affair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Presidents is an extremely close one, and will hopefully lead to a peaceful resolution of the North Korea problem”.
But Trump is thinking the change of China’s president because Beizing didn’t want to stop oil supply to North Korea at discussing about the new UNSC Sanction 2371 and China didn’t any action to stop North Korea’s missile and there is no change in North Korea’s attitude.
As so, US President Donald Trump needs new man for China’s president and exchange of regime in 19th Congress of the CPC.
But Which method CIA uses to accomplish the order is confidential.

목, 2017/08/24-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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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모닝~♡] 역시 우리 이니님은 현명하시다!
최근 우리 문통님께서 미국의 일방적인 FTA재협상 요구에 너무 열받으셨단 소식을 청와대 지인으로부터 전해들음.

너무 멋있음~!! 미국은 이제 지는 해라는 표현을 직접하시며, 대한민국의 미래는 중국과 러시아에 있다고 판단하신 듯. 미국의 강압에 지혜롭게 대처하시면서 사드철회를 전제로하는 중국과 러시아와 물밑접촉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고 한다.

요즘 이런저런 소식들에 암울한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열심히 민주화 운동에 함께했던 선배한테 이런 소식을 듣고 나니 역시 우리 이니님이란 생각을 다시 해본다. 전국민이 이렇게 깊고 현명한 생각을 하는 우리 문통령님을 끝까지 믿고 가야한다. 보이는게 다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한테 하등 도움안되는 싸드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중국과 러시아랑 손잡아야하는 대세를 청와대도 잘 알고 있는 듯~!! 끝까지 응원합니다~♡

목, 2017/08/2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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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역적 여름특집2] 도쿄 야스쿠니 반대 촛불행동에 가다

목, 2017/08/24-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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