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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와 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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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와 개벽

익명 (미확인) | 금, 2019/04/05- 13:00

1. 어느 고려학인가?

남한학과 북한학이 아니라 한국학과 조선학이라고 해야 한다는 지적에 십분 공감했습니다. 다만 제가 한국학이라고 한 것은 개벽학의 발신지가 북조선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한국’이라는 의미이지, 결코 그 대상이 남한에 한정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그 범위는 지구학이자 미래학이 되어야겠지요. 그래서 개벽학이 한국학의 영역이라는 말은, 량수밍의 동서문화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중국학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국학과 조선학을 고려학이라고 부르자는 제안도 여전히 숙제는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신라학, 고려학, 조선학이라고 할 때의 고려학과 구분이 안가니까요. 확실히 외국인들이 우리를 ‘고려인’(Korean)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만, 외국인들이 중국을 China라고 부른다고 해서 중국인들이 ‘중국’을 버리고 ‘진(秦)’이라고 명칭을 바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고려도 아니고 조선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전적으로 새로운 이름을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도 가능하면 남북학자들이 합의해서요.

조선사상전사

작년에 교토대학의 오구라 기조 교수님이 『조선사상전사(朝鮮思想全史)』를 출간하셨습니다.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해서 김대중과 김정일에 이르는 한반도의 문학·역사·철학·종교의 흐름을 개관한 역작인데, 이상하게도 책 제목을 『한국사상전사』라고 하지 않고 『조선사상전사』라고 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인데, 아마도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부르기 때문에 ‘조선사상전사’라는 이름을 취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종의 ‘한반도사상전사’라는 뜻으로 ‘조선사상전사’라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신라사상사, 고려사상사, 조선사상사라고 할 때의 조선사상사와 구분이 안 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 역시 남북을 통칭하는 공식적인 학술용어가 아직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시대에 한국인들이 한반도를 지칭했던 개념이 최치원 이래로 ‘동방(東方)’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사상사’나 ‘한국사상사’를 ‘동방사상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역시 문제는 남을 것입니다. 지금은 ‘동방’이라는 말을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사용하고 있고, 그 의미도 한반도를 가리키기보다는 ‘동아시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동방’이라는 말에는 중국에 대한 ‘동’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도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최치원 자신은 ‘동’을 중국에 대한 ‘동’이 아니라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만-.

이렇듯 개념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개념이 발화될 때의 문맥과 상황을 반영할 뿐입니다. 노자가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2. 개벽은 깨어있는 자세

제가 지난 20세기의 한국 인문학이 중화와 개화의 포로와 노예가 되었다고 한 것은 중국과 서양을 배척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경계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중국과 서양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문과 수학은 한국에서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초 정도는 마스터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도학과 과학을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에는 100% 공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개벽’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깨어있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누군가가 개벽에 사로잡혀서 동학이나 개벽사상만이 제일이라고 하는 맹목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이것이야말로 反개벽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손병희 학술대회(박길수)

지난주에 모시는사람들의 박길수대표님이 어느 학술대회에서 「손병희의 개벽사상」으로 발표를 하셨는데, 제일 인상에 남는 대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 리더들에게 한 말입니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해서 당장 독립이 되는 건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저는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정신개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이 한국과 비슷하게 식민지지배를 당한 아프리카에서도 ‘흑인의식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근대가 인도나 아프리카의 근대와 유사성이 있다는 뜻이지, 결코 지금의 한국이 제3세계와 비슷하다거나, 오늘날 동아시아 담론이 무용하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중국과 일본의 개벽파를 찾아내고 발굴하는데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영성적 근대론’은 그것이 한국 근대라는 사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 관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전 세계의 대부분의 근대론을 포괄할 수 있다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저는 한국의 근대나 한국의 사례를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이나 학설에는 이제 관심이 적어졌습니다. 그것은 제 주된 연구 분야가 한국근대사상사이기 때문에 오는 한계일 것입니다.

 

3. 개벽으로 다시 보는 해방공간

‘해방공간의 재재인식’이라는 흥미로운 발상을 제안하셨습니다. 사실 제 요즘 관심분야도 ‘개벽으로 다시 보는 한국 근대’입니다. 덕분에 그동안 제가 모르고 있었던 현대사의 중요한 사실들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1948년에 천도교에서 3.1운동을 재현하려 했다는 사실은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모르고 있었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의 정치이념

해방정국(1945~1948)에서 개벽의 입장을 대변한 건국철학이 『천도교의 정치이념』(1947)과 원불교의 『건국론』(1945)인데 둘 다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지적하신대로 남과 북, 성과 속을 모두 아우르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수록된 임형진 교수님의 해제 「천도교청우당, 새로운 세계를 기획하다」(모시는사람들)와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에 실려 있는 백낙청 교수님의 논문 「통일사상으로서의 송정산의 건국론」(모시는사람들)이 두 문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백낙청)

『천도교의 정치이념』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1923년에 창당된 천도교청우당의 세 가지 기본이념이었습니다. 그것은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인데, 이돈화가 『신인철학』에서 주창한 삼대개벽과 용어가 동일합니다. 그런데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의하면 “실제로 청우당의 활동 목적은 민족개벽과 사회개벽의 두 가지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48쪽)고 나와 있습니다. 즉 정신개벽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족개벽이라 함은 여러 가지 의의가 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굴레에서 우리 민족이 해방을 얻자는 것이 제일의적이었고, 사회개벽이라 함은 자본 사회의 제도를 개혁하여 무산계급을 해방하자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청우당의 현실적인 정치이념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원래 보국안민(輔國安民)은 천도교의 신조요 염원인 만큼 천도교의 그것은 곧 당의 이념이 된다. 그런데 해석상 보국(輔國)은 민족해방이 되고, 안민(安民)은 계급해방이 되는 점에서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다.”(48쪽)

저는 이 대목에서 80년대 학생운동과 비슷한 이념을 떠올리게 됩니다. 즉 민족개벽=민족해방은 이른바 NL계열의 주장과 유사하고(대상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습니다만), 사회개벽=계급해방은 이른바 PD계열의 주장과 유사합니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가 고민한 보국과 안민의 문제는 한반도의 영원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천도교의 정치이념』의 경우에는 보국(민족)이나 안민(계급) 중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고 양자를 모두 병진하려 했다는 점인데, 이것은 원래 동학에서 ‘보국안민’이라는 슬로건을 표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나오는 도식대로라면, 1차 동학농민혁명이 ‘안민’(계급)의 문제로 일어났다면, 2차동학농민혁명은 ‘보국’(민족)의 문제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4. 천도교의 이중과제론

『천도교의 정치이념』에서는 보국과 안민의 문제를 ‘이중 과업’과 ‘양대 과제’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조선민족에게 부여된 정치적 사명은 두 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는 민족해방이요, 둘째는 사회해방이다. 연합국의 위대한 전승으로 인하여 우리의 민족해방이 대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주독립을 완성하지 못한 만큼 아직도 이 이중적인 정치 과업은 우리에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두 가지 과업을 동시에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 조선의 특수한 사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냉정하게 생각하고 주밀하게 논의하여 민족 만년 대계인 이 양대 과제를 완전히 수행해야 하겠다.”(51쪽)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본래 삼대개벽을 지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양대개벽으로 축소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양대개벽을 추진할 정신적 동력인 정신개벽은 논의에서 빠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도교인 개개인이 정신수양을 게을리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으로서의 정신개벽에 대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은 80년대 운동권에 이르면 더욱 심화됩니다. 사회운동에 치중한 나머지 정신수양이나 영성수련을 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지요. 제 생각에 원불교에서 ‘정신개벽’을 들고 나온 것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5. 『건국론』의 중도주의

원불교의 제2대 리더인 정산 송규가 쓴 『건국론』은 『천도교의 정치이념』보다 2년 빠른 1945년 10월에 나왔습니다. 해방 직후에 나온 셈입니다. 흥미롭게도 첫 장(章)부터 「정신」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치」, 「교육」에도 ‘(정신)훈련’이나 ‘정신교육’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같은 ‘교정쌍전’이라고 해도 천도교가 ‘정(政)’에 방점을 두고 있다면 원불교는 상대적으로 ‘교(敎)’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국론』의 정신개벽의 특징은 ‘중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건국은 단결로써 토대를 삼고, 단결은 우리의 심지가 명랑함으로써 성립되며, 명랑은 각자의 흉중에 갊아있는 장벽을 타파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장벽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간단히 그 대요를 말하자면, 1. 각자의 주의에 편착하고 중도의 의견을 받지 아니해서 서로 조화하는 정신이 없는 것이요…” (제2장 「정신」)

건국론

저는 여기에서 말하는 ‘중도주의’야말로 우리가 해방 이후로 잃어버린 정신적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무위당 장일순 선생도 ‘중립화 통일론’을 주창해서 감옥에 갔다고 하는데, 『건국론』의 중도주의와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중도주의이든 중립화이든, 이들이 말하는 ‘중’은 단순한 ‘중간’이기보다는 “배제를 거부하는 포함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설령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른 ‘타자’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투쟁의 상대로 보기보다는 그들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려는 태도입니다. 장일순의 표현대로라면 ‘보듬으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건국론』에서 말하는 “내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는 “내 마음의 장벽”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달려온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영성‘ 대신에 ’아성(我性)‘을 공고히 해 왔다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해방 이후에 잃어버린 정신은 『건국론』이나 장일순이 말하는 ‘중도’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이른바 ‘혐오문화’도 이런 정신의 상실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사례가 아닐까요? 상대의 존재를 긍정하려 들기보다는 처음부터 부정하려는 태도가 앞서는게 혐오니까요.

개벽포럼(도법스님)

지난달에 있었던 제1회 개벽포럼에 도법스님이 연사로 오셔서, 서로 생각이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가운데’에 서서 그들의 의견을 중재했던 경험들을 생생하게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원효식으로 말하면 ‘화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건국론』의 중도주의나 장일순의 중립주의 나 보듬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개벽의 입장일 것입니다. 개벽은 양 극단의 가운데에 서서 ‘새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일종의 ‘중도개벽’인 셈입니다. 19세기식으로 말하면 유학과 서학의 중간에서 양자를 아우르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한 개벽파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벽포럼(청중)

 

6. 21세기의 공통가치를 찾아서

마지막으로 『천도교의 정치이념』을 읽으면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을 소개하면서 이번 서신을 마칠까 합니다. 그것은 보국과 안민이라는 서로 다른 과제를 추구하면서도 그 바탕에는 ‘하늘’이라고 하는 동학의 기본이념이 깔려 있는 점입니다. 80년대식으로 말하면 NL과 PD가 우선시하는 과제는 서로 달랐지만, 양자의 바탕에는 “시천주”라고 하는 공통가치가 공유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시천주는 두 말 할 것 없이 인간과 만물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말합니다. 이 점 또한 해방 이후에 우리가 잃어버린 전통일 것입니다. 각각의 진영에서 자기 주장을 외치면서 상대를 비난하려는 노력은 열심히 해왔지만, 입장이 서로 다른 상대와의 공통토대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에서 ‘공공’의 영역은 확보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개벽’이 주는 메시지는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동학‧천도교‧증산교‧대종교‧원불교 등등이 비록 종교의 형태는 달랐지만 모두 ‘개벽’이라는 공통가치를 향해서 100년 넘게 계승하고 상생해 왔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개벽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해방 이후에 잃어버린 공통가치를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입니다. 해방정국이 ‘좌’나 ‘우’라는 편도(偏道)를 고집했다면, 그리고 해방 이후가 ‘개화’라는 편도(偏道)로 치달았다면, 지금부터는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중도(中道)를 ‘개벽학’이라는 이름으로 찾아보려는 것이지요.

유교, 개신교, 천주교, 천도교, 원불교 계열의 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동학을 공부하는 ‘하늘학회’(가칭)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공통가치로 삼아서 뭇 종교들을 아우르려는 중도의 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과학자까지 가세된다면 금상첨화겠지만요. 앞으로 뜻있는 분들이 하나씩 둘씩 동참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개벽학당도 그런 중도의 일꾼들을 길러내는 산실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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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의회 선배들은 지금 국회와 달랐다

1948년 8월 25일 오전 9시 반, 제헌의회 제48차 본회의가 열려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비롯한 법안을 논의하였다. 특별법기초위원회 김웅진 위원장이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제목부터 시작하여 제1조, 제2조, 제3조……. 각 조문마다 차례차례 낭독하고 이어 모든 의원들이 발언권을 얻어 논의하고 토론하여 마지막에 조문에 대한 투표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가령 제2조 조문이 투표 끝에 결정되기까지는 2시간도 넘게 기나긴 논의가 이어졌다. 그러나 모든 의원들이 활발하게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하였다. 그러고도 시간이 모자라 다음날 다시 동일한 시각에 속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진실은 힘이 강하다

유진홍 의원 지금 제2조를 가지고 벌써 두 시간이나 토론했습니다. 법원 원 정신이라는 것은 현행범 범죄자의 징계요, 장래를 경계하는 것이 법의 원 정신입니다.

….중략….

김장열 의원 제2조 말단에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는 문구를 「재산 및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 이상을 몰수한다」로 수정하는 것을 동의합니다.

…중략….

이석주 의원 2조도 역시 1조와 같이 준엄한 처벌을 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정기를 살리지 못할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1조는 매국적이고 2조는 매국적이 아니라고 하지만 수작(受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에 와서 그 재산을 반만큼 몰수해서 그 자들을 그대로 둔다면 그 자들이 그 재산의 위력을 가지고서 우리 조선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독립을 방해한 그 효력이 얼마나 컸는지 생각해보면 앞으로 그 재산의 힘을 가지고 무슨 장난이 있을지 그것을 생각해보십시요. 그러므로 그 재산을 2분지 1 이상을 몰수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수정안을 찬성합니다.

부의장 김동원 가부 묻겠습니다. 이 동의를 잠깐 낭독할텐데 자세히 듣고 표결해주십시오.

(기록원 낭독 – 제2조 중 ‘재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 이상’으로 수정할 것)

부의장 김동원 2조에 대한 수정안입니다. 수정안을 낭독해드렸는데 거기 대해 묻겠습니다.

(거수 표결)

재석 145, 가가 88, 부가 15, 그 수정안은 가결되었습니다.

이석 의원 제2조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의장 김동원 제2조는 전부 수정 통과되었습니다.

이석 의원 아닙니다. 일부만 수정되었지 전체 수정된 것이 아닙니다.

부의장 김동원 그러면 지금 수정 동의한 이 말씀하세요. 제2조는 전체 수정한 것인지 전부 수정한 것인지 어떻게 되었습니까?

김장열 의원 그 재산권 전체를 말한 것입니다.

부의장 김동원 제3조를 낭독할 테니까 들으세요.

「일본 치하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수정안이 있습니다. 김명동 의원 외 12인의 수정안이 있습니다. 나와 말씀해주시오.

 

이날 특별법기초위원회 김웅진 위원장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제목부터 시작해 제1조, 제2조, 제3조, 각 조문을 차례차례 낭독했다. 이어 수많은 의원이 발언권을 얻어 논의하고, 토론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조문에 대한 투표를 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제2조 조문이 투표 끝에 결정되기까지는 2시간도 넘는 기나긴 논의가 진행됐다. 그 속에서 의원들은 활발하게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모자라 다음날 같은 시각에 본회의를 속개하도록 했다.

지금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하지만 이미 ‘선배 국회의원’들은 스스로 법안을 검토하고 토론하고 결정했다. 지금의 국회의원들은 선배들을 본받아 대의권 그리고 입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재 입법시스템으로는 요원하다는 점이다.

 

의원이 직접 검토해야 협치도 가능하다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공무원이 ‘검토’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우리 국회밖에 없다. 어느 나라 의회든 당연히 국회의원이 검토하고 토론하고 심사한다. 그것이 곧 국회의 본업이고, 또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이다.

위의 표는 2018년 6월 27일 진행된 독일연방의회 법사위 제19차 회의 일정 공지사항이다. 원래 독일의회에서 위원회 법안심의는 비공개이지만 중요사안에 대한 공청회는 공개된다. 이 회의는 낙태광고금지제한에 관한 형법개정법안 공청회를 겸한 법안심의회의다.

a) 법안은 자유민주당*FDP가 발의한 법안이고, b) 법안은 좌파당*Linke가 발의한 법안이다. 옆의 빨간 박스에서 Berichterstatter/in는 검토보고자를 의미한다. Abg.는 의원(Abgeordnete/r)의 약자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검토보고는 각 당의 의원들이 수행하고 있다. 의원명은 기민당/기사당, 사민당, 대안독일당, 자민당, 좌파당, 녹색당의 순서다.【1】

 

협치, 과연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을까?

한국 정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협치’를 말하고 주문한다. 그러나 ‘협치’란 그저 단순히 당사자들과 참여자들이 생각을 바꾼다고 이뤄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잠시 우리에게 ‘상식’으로 굳어져버린 방식을 바꿔 생각해보자. 바로 이 지점에서 국회의 본령인 입법과정 그 자체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

우리의 국회 구조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일하는 시간은 없고, 싸우는 시간은 많다. 그러나 만약 우리 국회가 독일 의회의 전문 검토보고 의원처럼 입법과정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즉 법안의 발의부터 검토 그리고 심의와 의결까지 다른 교섭단체 의원들과 함께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접촉하고 논의하게 된다면 사정은 크게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의원들은 다른 정당의 소속 의원들과도 자연스럽게 논의하고 토론하며 필연적으로 상호 소통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활동은 일상적이고 상시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우리가 말하는 ‘협치’도 충분히 가능해질 수 있다.

외화내빈, 빛 좋은 개살구로 갈수록 문제가 되고 있는 법안발의 남발 현상 역시 다른 나라 의회의 경우처럼 당연히 정당 내부에서 의원들과 당 소속 정책전문위원의 논의를 거쳐 충분히 사전 검토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법안발의가 남발되어 상임위원회가 한 차례 회를 열 때마다 법안이 수십, 수백 건 첩첩산중 쌓임으로써 정작 필수불가결한 법안에 대한 심의와 의결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기현상도 방지할 수 있다.

 

중국의 전국인대도 법안 검토는 대표가 직접 한다

그렇다면 왜 국회의원들은 국회 전문위원 검토보고의 문제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먼저 그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특히 초선의원의 경우에는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 고칠 의사는 별로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문제점을 알고서도 눈을 감는 것이다.

의원들은 비록 자신들 대신 공무원들이 법안을 검토하는 것이 자신의 권한을 크게 축소, 훼손시키는 것이지만, 우선 사람들이 전혀 모르고 있고 또 실제 그 일을 자기가 직접 하려면 시간상 능력상 힘들고 귀찮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사실 본심은 안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 하는 척만 하면서(더구나 사람들은 대개 여기에 속아 넘어간다!) 실제로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결국 모두 공무원에게 떠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입만 열면 ‘독재국가’라면서 단칼에 무시하는 중국에는 전국인대(全國人代)【2】, 즉 전국인민대표 조직 중에 ‘전문위원회’라는 위원회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처럼 국회 공무원이 담당하는 그러한 전문위원회가 아니다. 바로 대표자, 즉 전국인민대표 중에서 전문가 출신의 대표들로 구성된, 명실상부한 전문위원회이다.

이제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무능한 그리고 국민에게 봉사하고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할 의지가 없는 사람이 처음부터 국회의원이 되고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국회가 되어야 한다.

 

【1】 수년 전에 필자가 한 인터넷매체에 국회 검토보고제를 비롯해 기고문을 연재하고 있을 때 국회사무처의 한 간부가 해당 매체에 이메일을 보내 필자를 ‘비방’하면서 필자의 기고 게재 중단을 종용한 일이 있었다. 그 간부는 문제의 이메일에서 국회의원이 검토보고를 직접 수행해야 한다는 필자의 글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전문위원의 법안에 대한 검토보고제도를 문제시하면서 법안을 제출한 국회의원이 검토보고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검토보고제도는 그 법안의 타당성 여부, 문제점, 심사방향 등을 검토하여 보고하는 것인데, 이를 법안을 제출한 사람이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검토보고제도의 취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타인에 대한 명예훼손과 언론자유에 대한 심각한 훼손을 차치하더라도, 문장 자체부터 전혀 다듬어지지 않는 등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그의 주장은 의회에서의 검토보고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인식 결여, 현재의 관행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2】 여기 ‘전국인대’는 흔히 ‘전인대’로 칭해지지만, 중국에서는 반드시 ‘전국인대’라 부른다. 명칭은 관계자들의 시각과 요구에 따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수, 2020/08/05-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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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광복절 광화문 집회로 한국의 코로나19 양상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그것은 단순히 확진자 수의 급증과 확진 속도의 증가 등 의학적 또는 양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편의상 광화문 집회 이전을 코로나19 제1기, 이후를 제2기로 나누어 부르도록 하자. 이렇게 시기를 나누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코로나19가 비추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광화문 집회를 전후로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제1기에도 물론 초기에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분열이 두드러졌다. 새로운 감염병을 ‘우한폐렴’으로 부르며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을 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신천지 신자 감염으로 확진자 수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그런 정치적 분열이 더욱 커지는 듯했다. 그러나 정부-산업-의료계의 발 빠른 협업으로 감염병 차단에 성공하면서, 특히 외국의 언론을 중심으로 한국의 감염병 대응에 대한 찬사가 그런 정치적 분열을 중화했다.

물론 정치적 대립의 양상 속에서도 시민들은 여야 성향을 막론하고 정부의 감염병 대응에 매우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분열의 잦아듦이 순전히 서구 언론의 공적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서구 언론에서 포착한 지점이 바로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라는, 그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의 언론들은 ‘어떻게 이런 특이한 현상이 한국에서는 가능한가?’를 분석하느라 열심이었다. 특히 처음부터 대중국 봉쇄정책을 폈던 대만, 싱가포르와 달리 봉쇄정책 없이 감염병 대응에 성공한 한국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러나 정작 그들 또는 그들이 지면을 할애해준 자국 전문가나 재외 한국인 학자들의 의견 중 대세는 ‘유교 문화’나 그와 관련된 ‘집단적 순응성’, ‘독재 경험으로 인한 파시즘적 경향’ 등 봉쇄정책을 폈던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별 차별성이 없는 내용이었다. 한국에 우호적인 마이클 샌델이 ‘공동체 감성’이라는 그나마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순응성이나 집단주의, 독재 등이 부정적이거나 전근대성을 암시하는 표현인 만큼, 외국의 언론에서 이런 표현들은 대체로 한국 정부의 확진자 추적 및 정보 공개와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특히 강력한 개인정보 보호법을 갖춘 유럽에서 그와 같은 원색적 비난이 돌출했는데, 거기에 재외 한국인 학자들이 가세하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오리엔탈리즘 관점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정부 기관의 확진자 정보 추적은 법적 기반을 갖는 것이고, 그 법은 과거 메르스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즉 그것은 한국사회의 ‘독재 적응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염병 대응에 대한 이전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비판’에 기초한 것이다.

물론 법 제정이나 집행에 있어서 개인정보 관련 사회적 논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음은 마땅히 지적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개인정보 인권 감수성이 서구보다 미약하게 관찰되는 경우에도, 순응성이나 집단주의 문화로의 환원은 분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화적 편견을 재생산하는 오리엔탈리즘에 가깝다. 그뿐 아니라 과거 스페인 독감 이후 ‘전염병의 위력’을 완전히 잊은 듯한 서구에서 일어난 ‘마스크’에 대한 적대감과 지리멸렬한 논쟁은, 그러한 오리엔탈리즘이 문화적 차별주의뿐만 아니라 비과학적 태도와도 결합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공동체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은 한국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착한 임대인 운동’이나 의료인들의 대구 자원봉사 지원과 같은 긍정적 현상들에 기초하여 한국사회의 ‘공동체 감성’에 대해 평가했다. ‘공동체’라는 개념은 서구의 주류 사회학에서는 전근대성이나 집단주의와 거의 다르지 않게 사용된다. 그리하여 전근대적인 공동체적 연대 관계와 근대적인 기능적 연대를 대립시킨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에서 사용하는 ‘공동체’는 이미 기능분화가 진행된 서구 자유주의 사회를 대상으로 ‘공동체적 덕성’의 회복을 촉구하는 개념이다. 반면에 과거 사회학에서도 마르크스주의 쪽에서는 ‘노동계급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근대적 의미로 ‘공동체’ 개념을 사용했다.

‘공동체’ 개념이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지만, 그것의 핵심은 ‘도덕적 가치 또는 문화의 공유’에 있다. 다원주의를 내세우는 자유주의 사회학에서는 가치 중립성을 강조하며 기능분화에 기초한 복잡한 사회에서 도덕적 가치의 공유가 특수주의를 강화하고 보편성을 훼손한다고 본다면,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이나 공동체주의에서는 이념이나 덕성의 공유―즉 공동체적 정체성―에 기초하여 평등 또는 사회정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 개념은 사회구성원이 공통의 정체성을 갖는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민족주의나 흑인문화, 고유문화 등을 강조하는 종속이론이나 다문화주의에서도 공동체 개념을 중시한다.

이렇게 보면 자유주의만이 ‘공동체’ 개념에 반대한다고 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 제3세계 민족주의, 공동체주의, 다문화주의 등은 모두 반자유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 역시 ‘가치의 공유’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보면서 자유주의의 이율배반을 비판하는 관점이 있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근대 소유계급 남성의 정체성’에 기초한 것으로서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처럼 ‘동질적인 집단 정체성’을 기정사실화하는 모든 관점에 대항하여 ‘차이의 정치학’을 펼쳤다. 따라서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동질성을 강조하는 ‘공동체’ 개념이 아니라, 차이를 당연시하는 ‘도시적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1】

 

한국은 공동체 사회인가?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공동체적인 사회인가? 또는 공동체적 감성에 기초하여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가? ‘공동체’의 개념이 도덕적 가치의 공유라면, 위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는 이념 대립이 여전히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세대 간 가치변화로 소통이 어려우며, 젊은 층에서는 젠더갈등 역시 역동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제1기에서 공동체적 가치의 공유가 두드러졌다면, 그것은 ‘안전’의 가치, 특히 ‘전염병으로부터의 안전’이라는 매우 특수한 가치의 공유일 것이다. 메르스의 위험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에, 사회적 이질성이 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의 위협 앞에서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결속력이 한국사회의 ‘공동체’ 속성이 아니라, 재난 앞에서의 ‘실용주의적 연대’의 성격을 갖는 것임을 보여준 사건이 바로 광복절 광화문 집회였다.

광화문 집회를 계기로, 공동체적이었다던 한국사회에서 이제는 ‘이기주의’가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사회는 다른 기능분화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도 아니고 이기주의적이지만도 않다. 코로나19 제1기에서 ‘공동체적 대응’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한국사회의 공동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코로나19 재난에 대한 한국사회 특유의 위험성(risk) 인식이다. ‘위험사회’에서 위험은 리스크를 번역한 것이다. 즉 현대 기술문명위험의 사회를 ‘재난사회’가 아닌 ‘위험(성) 사회’라고 부르는 이유는, 재난의 가능성과 현실이 위험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통해 걸러져서 비로소 그에 대한 대응을 부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과거 메르스에 대한 공포와 그와 연관된 정권변화 등 일련의 사건들이 만들어놓은 ‘인식 틀’을 거쳐서 코로나19를 인식했고, 그 결과 정부와 산업체, 의료기관이 모두 합심할 수 있었다. 단지 코로나19 감염병에 대한 공포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해서 가능한 정부 실패와 의료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기업 이미지 제고와 새로운 이윤의 실현 가능성 등 다양한 요인들이 함께 작용하여, ‘공동체적 연대’가 아닌 ‘기능적 연대’를 가능하게 했다. 제도 실패의 위험에 대한 자각이 한국사회의 이질성과 갈등 속에서도 기능적 연대를 가능하게 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연대 속에서 여당의 선거 승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형성된 새로운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작금의 ‘이기주의’가 ‘공동체 감성’을 거의 완전히 대체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공동체 감성’이든 ‘이기주의’든 둘 다 완성된 속성으로서 존재하는 한국사회의 어떤 본질적 측면이 아니라, 코로나19 감염병과 한국사회의 정치·경제·문화적 재배치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사회는 전근대적 공동체도 아니고, 독재에 익숙한 순종적 사회도 아니며, 모든 사람이 사회적 덕성에 대한 개념을 공유하는 동질적 사회도 아니다. 오히려 광화문 집회를 전후로 첨예해진 갈등 상황이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는 한국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코로나19의 위력 아래 연대와 통합이 촉진되었던 제1기의 국면이 이제 정부의 부동산 정책, 의사 증원 계획 등의 환경변화로 인해서 제2기의 ‘이기주의’ 국면으로 전환된 것이다.

 

연대의 희망: 부작용의 정치? 또는 새로운 존재론적 정치?

집단적 이해관계를 내세우는 ‘이기주의적’ 이익집단들은 반공동체적 집단인가? 아니면 그들만의 특수 공동체를 형성한 것인가? 이런 물음과 함께, ‘공동체’라는 개념의 중립성 또는 도구적 성격이 드러난다. 즉 ‘공동체’란 단지 특정한 도덕적 감정을 공유하는 집단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관찰 수준에 따라서 공동체와 사회 또는 공동체와 이익집단을 상호배제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전환이 가능한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자유주의 사회학에서 주장한 ‘기능분화’ 개념은 이 지점에서 문제가 된다. ‘기능분화’가 공동체의 특수적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는 ‘보편성’의 기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나 페미니즘에서 지적하듯이, 기능분화의 보편성 역시 또 다른 특수주의적 가치의 하나일 뿐이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부르주아 특수주의를 노동자계급 특수주의로 바꾸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면, 페미니즘은 특수주의 감정의 집단적 동일시 자체를 ‘차이 억압의 기제’로 의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동체는 억압적이거나 이기주의적으로도, 또 더 많은 평등을 위한 연대의 방식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기주의적인 집단적 목소리, 집단감정을 어떻게 ‘선한 영향력’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할 수 있는가? 즉 이제 더는 기능적 연대가 불가능한 것인가?

기능적 연대란 개별 이기주의 행태가 사회 각 부문의 기능적 연동 속에서 역설적으로 사회통합의 결과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초창기에 기능주의와 행보를 같이 했던 급진 구성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후기로 가면서, ‘기능적 연대가 불가능해진 세계사회’에 대해 발언했다. 도덕적 가치의 공유가 아니라 기능 및 이해관계의 분화에 기초한 사회라는 측면에서 한국을 비롯한 현대사회는 여전히 기능적 연대 이외의 다른 형태의 연대를 추구하기 어렵다. 집단적 가치의 공유로 회귀하자고 주장할 경우 독재나 파시즘으로 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코로나19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집단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이기주의적 집단 행태가 불거지면서 과연 ‘연대가 가능한가?’라는 불안감이 증폭하고 있다.

루만처럼 새로운 연대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사회학자가 있는가 하면, 새로운 연대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사회학자도 있다. 울리히 벡은 산업사회가 위험요소로 계산하지 않은 생태위험이 부메랑이 되어 산업사회를 강타하면서 새로운 연대가 불가피해졌다고 보았다. 단순한 기능적 연대가 아니라, 연대의 기초가 바뀌는 ‘성찰적(또는 반사적, 재귀적)’ 성격의 연대를 주장했다. 기능적 연대의 바탕이 위에서 보았듯이 이기주의―즉 인간의 합리적 이해추구―라면, 새로운 ‘성찰적 연대’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산업생산의 부작용―특히 생태위험―이다. 이해관계에 갇혀서 ‘기능적 연대’의 불가능성을 키우는 인간이 아니라, 산업에 의해 파괴된 생명체들 또는 지구가 새로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부작용의 정치’를 사회적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위험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행위자들이다. 따라서 벡은 ‘실용주의적 연대’를 주장했다. 인간의 이해심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해관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 앞에서 시시각각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근대성 비판은 ‘탈근대성’이 아닌 ‘성찰적 근대성’의 방향을 취한다. 말하자면 ‘성찰적 연대’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 실용주의적으로 조율되는 기능적 연대를 의미한다.

반면에 2000년대 이후, ‘탈근대성’에서 ‘탈인본주의’로 방향을 바꾼 새로운 관점이 지적 세계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흔히 ‘신유물론’이라고 불리는 경향이다. 여기서는 인간과 여타 생명체나 물질의 주체적 행위성을 위계적으로 서열화하지 않는다. 특히 페미니스트이자 입자물리학자인 캐런 버라드는, 인간과 물질이 양자역학적 ‘얽힘’의 관계성 속에 공존하므로 인간은 단순한 윤리적 차원이 아닌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미 ‘책임의 윤리’에 묶여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책임’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로부터 윤리적으로 추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존재 방식 자체라는 것이다. 인간의 주체성은 인본주의적으로 주어진 속성이 아니라 물질과의 양자역학적 얽힘으로부터 발생하는 사건―반복되는 사건―이므로, 얽힘의 관계 속에서 물질에 응답하는 능력(response-ability)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책임이란 바로 그러한 존재론적 응답능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코로나19 시대에 한국 사회에 요구되는 연대는 ‘이해관계의 합리성’이 인간 존재 조건의 일부에 불과한 것임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기주의가 자연적 본성이 아니라 (타인을 포함하는) 물질과의 얽힘으로부터 발생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 즉 우발적인 존재론적 사건을 의미론적으로 규정하고 고정한 것임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얽힘이 없으면 그러한 사건도 불가능하므로, 이기주의보다 책임이 더 우선적인 존재의 조건이다. 역설적이지만, 모든 이기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타자와의 얽힘인 것이다.

이해관계를 내세우는 특수집단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어떤 얽힘의 결과인지를 인지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 안에 타자의 이익이 배제된 채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이해관계의 정치’가 아닌 ‘책임의 정치’로 전환하도록, 사회의 전반적 인식 역시 ‘인간 본성=이기주의’라는 도식을 버려야 한다. 또 그러한 책임의 정치가 공동체의 도덕으로부터 도출되는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생명체로서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임을 겸허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와 같은 ‘책임의 정치’에서는 굳이 공동체적 동질성이라는, 언제든 억압의 기제로 전환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지 않다. 즉 그것은 ‘존재론적 정치’인 것이다.

울리히 벡의 ‘실용주의 정치’는 리스크 개념의 ‘사회적 구성주의’라는 형이상학과 이해관계의 근대적 실재론을 ‘부작용의 정치’를 매개 삼아 절충한 형태이다. 반면에 신유물론의 ‘존재론적 정치’는 이해관계와 같은 사회적 구성물을 ‘사건’으로, ‘얽힘’을 사건의 물질적 발생조건으로 설명함으로써, 책임의 물질적 실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실재론―버라드의 경우 ‘행위적’ 실재론―을 피력한다. 많은 이기주의적 특수집단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코로나19가 단순한 ‘음모’가 아니라 살아 있는 바이러스이듯이, 바이러스의 위협에 처한 사회 역시 단순한 사회적 구성물이 아니라 존재론적 실재인 것이다.

 

【1】 아이리스 매리언 영, 2017, 『차이의 정치와 정의』, 김도균·조국 옮김, 모티브룩.

 

홍찬숙

화, 2020/09/01-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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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공기와 더불어 생명체 유지에 필수물질이다. 만일 물과 공기가 없다면 사람과 같은 동물뿐만 아니라 꽃피고 열매를 맺어주는 식물조차 살아남지 못한다. 특히 물은 이산화탄소와 함께 광합성을 일으키는데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바닷물과 민물의 풍부함에 눈이 팔려 그 소중한 가치를 지나치기 쉽다. 물은 지구 표면의 71%를 덮고 있다. 이 가운데 사람들과 생물들이 이용 가능한 지하수는 0.61%, 호수와 강물은 0.01%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물은 빙하 형태로 2.04%를 차지하고, 바닷물은 나머지 97.33%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지구상 물의 분포는 인간들이 음용가능한 물이 매우 귀하다는 걸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처럼 귀하고 중요한 물이 요즘에 들어 간헐적으로 특정지역에 국소적으로 쏟아지는 폭우로 변하면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을 낳아왔다. 그래서 대륙을 지배하던 중국의 왕조가운데 치산치수를 잘하면 좋은 군주 소리를 들었지만 홍수 예방과 치산치수를 잘하지 못하면 권좌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말하자면 ‘물의 정치’야말로 민심 지지와 이반의 흐름을 직접적으로 투영하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토목국가에서 건설재벌과 토목학계, 토호 중심의 지역정치는 이익담합공동체로써 공동체이익 또는 일반 이익이라는 이름아래 사익 추구와 특수이익의 관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올해 한국에서는 6월 중순부터 시작하여 8월초가 되어서야 50일이 넘는 긴긴 장마가 끝났다.【1】 “이번 장마는 기후위기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곳곳에 쏟아진 폭우로 논밭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는 물난리를 겪었다. 특히 그동안 토목건설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대로 “대하천(대강, 大江)에 큰 댐이 있어야 홍수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 모두 거짓과 기만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4대강 16개 보 건설이후 큰 비가 오지 않은 탓에 그런 검증기회가 없었다.

이번 8월 장마의 폭우로 인해 6일 한탄강댐 상류의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 8일 섬진강댐 하류의 구례와 하동, 용담댐 유역 남원, 임실, 순창, 무주, 진약 지역 마을과 저지대 농지가 물에 잠겼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제1야당 미래통합당은 4대강 사업을 통해 댐을 짓지 않아서 홍수피해를 입었다고 설쳐댔다.

 

4대강 사업성과에 대한 전면 재평가 기회

이명박 대통령은 많은 국민들과 환경단체가 필사적으로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에 큰 댐 건설을 강행한 끝에 16개보(洑)를 설치했다. 이 막대한 토목사업은 한국형 녹색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즉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아래 2008년 12월 29일 낙동강지구 착공부터 시작하여 2012년 4월 22일까지 무려 22조원의 예산을 투입해 추진한 대하천 정비 사업이었다. 즉 홍수조절과 수량 확보를 위해 4대강 본류를 준설하고, 16개의 보를 설치하고 수변 지역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2013년 박근혜 정부시절 감사원 감사를 해 보니 이 4대강사업은 한 마디로 ‘한반도 대운하’ 재추진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게 밝혀졌다. 그래서 강바닥까지 파낸 지역이 생겨났으나 도로 메워지는 곳이 확인되었다. 어찌되었든 이번 집중호우로 인해 경남 창녕군의 낙동강 제방 일부도 8월 9일 붕괴되었다.

4대강 사업의 홍수 예방 효과에 대해 효과가 있다는 쪽은 이번 섬진강 유역 제방 붕괴는 4대강 사업에서 빠졌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류와 지천까지 4대강 사업을 확대했다면 홍수 피해가 줄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낙동강 제방 붕괴는 약한 제방 탓이지 낙동강 보 설치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4대강 사업은 홍수 예방 효과가 없다는 쪽 주장은 섬진강 유역 제방 붕괴는 갑작스러운 댐 방류 때문에 일어났다면서 섬진강이 4대강 사업 제외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홍수피해가 적은 4대강 본류는 이런 사업 이전에도 홍수 피해가 적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낙동강 보 설치로 인해 수위와 수압이 높아져 낙동강 제방이 붕괴되었다고 설명했다. 4대강 반대 의견을 돌이켜보면 4대강 본류에 수많은 보 설치할 게 아니라 지류와 지천 정비부터 해야 하고, 하천 바닥까지 긁어대는 준설을 하지 말며, 한반도 대운하는 전혀 경제적이지 않다는 반론을 폈었다. 건설재벌과 토목학회, 강남부동산지옥 향유 세력이 이익담합공동체를 형성, 강행했다.

환경부는 “이렇게 큰비가 온 적이 없다”고 해명하면서 정부 차원에서 4대강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여 과연 4대강 사업이 홍수 예방 효과가 있는지 오히려 홍수 유발 가능성이 있는지 분석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미 4대강 사업은 감사원 감사를 받았고, 대법원에서 법적 판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12월 국무조정실 산하 ‘4대강 사업조사평가위원회’의 분석대상이 되어왔다. 큰 비가 내리지 않았던 때였는지 이 ‘4대강조사평가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4대강 사업 후 대부분의 구간에서 홍수 저감 효과가 확인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보의 역할에 대해 “댐처럼 홍수 조절 용량을 가지지 않는다”고 적시했다. 22조 원이라는 막대한 국민혈세를 투입하였지만 애초부터 경제성이 없는 사업이었음을 확인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이처럼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업들이 비경제적 평가에도 강행됨으로써 터무니없이 많은 국민세금이 낭비된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대통령후보 선거 공약대로 2018년 8월 ‘4대강 자연성 회복을 위한 조사·평가단이 구성되어 4대강 보를 개방하고, 그 영향을 모니터링해 처리방안을 제시하도록 했다. 2019년 2월 조사평가단은 생태 모니터링과 보 유지 시 경제적 편익을 평가했다. 그래서 우선 금강과 영산강의 5개 보 중 세종보와 공주보, 죽산보의 해체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보 해체나 4대강 재자연화 추진은 답보·지체·유야무야되고 있다. 그래서 ’문재인의 4대강사업‘이라는 독립언론 기획취재물이 방영되었다.【2】

 

섬진강 유역 둑 붕괴는 인재가 맞나?

지난 8월 7일과 8일 하루 밤 사이에 489 mm의 폭우가 구례에 내렸다. 갑자기 늘어난 엄청난 수량의 물은 저지대로 흘러갔다. 섬진강변에 설치되었던 낡은 다리로 넘어 물은 흘러 넘쳤고, 불어난 물은 강변 쪽이 아니라 강변 밖 쪽의 둑에 엄청난 압력을 가하는 탓에 이 수압을 견디다 못한 둑이 허물어지며 구례읍내 주택가는 한 순간에 물에 잠겼다. 얼핏 보면 자연재해의 모습이다. 비가 한순간에 많이 쏟아졌으니 어찌할 도리가 있었느냐는 게 수량을 관리는 한국수자원공사의 입장이었다.

물을 모아두었다가 물을 대 주고 물세를 받아 운영한다는 게 한국 용수(K-Water)라는 구호로 널리 알려진 한국수자원공사이다. 이번 폭우피해를 낳게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문제의 섬진강댐 관리주체의 하나도 수자원공사이다. 지난 8월 8일 섬진감댐은 평소처럼 강우예보에도 불구하고 장마가 거이 끝나간다고 판단하였는지 물을 가두어두기 위해 방류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만수위에 가까이 댐 그득히 집수하였다. 그러다가 위험하다고 판단이 되자 방류를 시작했다. 약 40분간 방류한 수량은 최대 초당 8.52t에 달했다.

계곡에서 큰물을 만나 곤욕을 치른 사람들은 그 공포의 순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물이 뛰어들 듯이 물기둥이 이룬 채 갑자기 쳐내려온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며칠에 걸쳐 내리는 이슬비나 가랑비는 내리는 족족 지면을 적시며 땅 속으로 땅속으로 스며들고 가라앉는다. 이에 비해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로 강수량이 한꺼번에 많아지게 되면 그처럼 지면을 적시며 지하로 스며들 시간도 없이 엄청난 물이 그대로 아래로 치고 내려가게 된다. 그래서 깊은 산속 계곡에 모아진 많은 빗물은 작은 연못이나 소(沼)를 거친 뒤 커다란 물기둥처럼 되어 흘러내리는 것이다. 이처럼 빗물이 갑자기 쏟아져 일어나는 특수상황이야말로 한 두 사람으로써는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난이요 천재지변을 당한 것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기상예보에 주목해야 하고, 그런 호우를 회피하기 위한 사전예방조치를 해야만 한다.

상류의 댐에서 갑자기 방류를 하게 되었을 때 그 물은 하류로 흐를수록 유속은 느려지지만 유량은 더욱 많아지면서 하류 지역의 제방에 직접 압력을 가하면서 붕괴 원인으로 돌변한다. 제방(堤坊)이 붕괴되었다라고 표현할 때 사람들은 종종 ‘둑이 터졌다’고 말한다. 이처럼 둑은 엄청난 수량과 높아진 물의 압력에 의해 물러진 흙이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되는 것이다.

<그림 1> 댐에 물을 집수, 방류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위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댐은 200년 발생빈도의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건설되고 있다.【3】 그 이전시기의 건설된 댐은 100년 빈도의 홍수 대비용이었다. <그림 1> 참조.

섬진강댐은 다목적댐이다. 이번 방류사고는 어떻게 일어났을까? 첫째, 폭우가 퍼붓기 이전에 댐 수위조절 위한 예비방류를 부실하게 했다. 댐을 비워두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7일 오후 집중호우가 내릴 때 이미 수위는 둘째, 섬진강 하류지역 물난리가 일어난 8일, 섬진강댐관리소는 최대 허용치를 초과해 대규모 방류를 해버렸다. 셋째, 주민들에 제때 알려주지도 않았다. 처음엔 방류량을 “초과 안했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방류량을 “넘겼다”고 말을 바꿨다. 섬진강댐 하류 수해는 7개 지역에 달했다[<그림 2>와 <표 1> 참조].

“동아일보 취재 결과 수자원공사는 8일 오후 3시 30분에서 4시 10분까지 40분간 섬진강 댐의 계획방류량인 초당 1,868t보다 평균 4.65t(누적 1만1160t) 많은 초당 1,872.65t을 방 류했다. 최대 초당 8.52t까지 초과한 때도 있었다.【4】

<그림 2> 섬진강댐 하류 7개 지역 수해 현황

출처 : 지명훈·강은지. “수위조절 때 놓친 수공, 방류시간 통보도 늦어 주민 대응 못해” 동아일보 2020. 8. 13.

<표 1> 섬진강댐 하류 7개 지역 수해현황(2020. 8. 12. 오후 현재)

국회 안호영 의원실은 한국수자원공사가 제출한「용담댐, 합천댐, 섬진강댐 운영현황 (2020. 6. 21. ~ 8. 11)」<표 2> 자료를 분석,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지난 8월 7일 ~ 8일 집중호우가 예상됐음에도 불구하고 예년수위(용담: 246.73m, 합천: 149.95m, 섬진강: 178.38m)에 비해 많은 물을 저장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림 2>에서 빨간 점선은 예년 수위].

<표 2> 장마기간 집중호우시 3개 댐 운영 현황 (단위: m)

예를 들면 용담댐은 예년보다 높은 수위에서도 예비방류를 하지 않았고, 홍수기 계획홍수위도 준수하지 않았으며 초당 2,500톤을 방류하면서도 30분 전에야 주민에게 고지했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안호영 의원은 “이번 용담댐 주변지역의 홍수 피해는 집중호우만의 문제가 아닌 홍수관리 매뉴얼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은 인재(人災)”라고 지적했다. 특히 용담댐의 경우 집중호우 일주일 전인 지난달 30일, 용담댐 저수율은 이미 홍수기 제한수위인 85.3%에 도달했고, 다음 날에는 90% 가까이 다다랐다. 이런 상황에서 수자원공사는 「댐관리규정」에 따라 댐의 안전과 상·하류의 홍수 상황 등을 고려하여 당시 방류량을 늘려야 했지만, 오히려 초당 300톤가량 흘려 내보내던 방류량을 45톤으로 줄인 것이다. 또한 섬진강댐의 경우 8월 7∼8일 집중호우 전부터 홍수기 제한수위보다 3m 낮게 댐 수위를 유지해 사전에 1억1600만 톤의 홍수조절용량을 확보했으나, 8일 오후 2시 30분 홍수기 제한수위(196.5m)를 넘긴 197.89m를 기록하고 있었다. 안의원은 “홍수 관리의 최종 책임을 지고 있는 환경부가 홍수 피해 난지 열흘이 넘도록 어떠한 입장도 내지 않고, 모든 것을 <댐관리 조사위원회>로 넘기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대응”임을 단언하며 피해지역 주민들의 입장에서 조속한 결론을 내려줄 것을 촉구했다.

<그림 2> 섬진강댐 운영현황(2020. 6. 21 ~ 8. 11.)

수자원공사 사장은 8월 13일 섬진강댐 하류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찾아가 “제 때 물을 내보내지 않고 뒤늦게 대규모 방류를 하는 바람에 수해 피해를 입었다”고 항의방문을 하자 “3개 기관이 섬진강댐을 공동 관리를 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담당하는 역할이 있어서 그걸 넘어서 움직일 수 없다”고 변명했다. 섬진강댐은 수자원공사와 농어촌공사, 한국수력원자력 등 3개 기관이 공동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이런 물관리 체계를 책임지게 될 환경부는 어떠한가 들여다보자.

조명래 환경부 장관은 8월 16일 아침 10시 수해 현장인 구례5일장에서 상인들의 거친 항의를 받았다. 그 다음 서시1교를 들른 후 구례상하수도사업소, 전북도청 등을 잇따라 방문했다. 이날 방문일정에는 송상락 전남도행정부지사, 송하진 전북도지사, 김순호 구례군수, 영산강유역환경청장, 영산강홍수통제소장, 수자원공사 사장 등이 참석했다. 사고를 일으킨 쪽과 피해주민을 대신할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동행한 셈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안호영 의원은 지난 8월 2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환경부 조 장관에게 “이번 폭우 피해는 수자원공사가 홍수 대비 메뉴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발생했다”고 질타했다. 이 자리에서 조 장관은 “인재적 요소가 있었다” 고 인정했다.

야 이 도둑놈들아

시도 때도 없이 국회 앞 노상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이들이 많다. 국회 정론관조차 이용할 수 없는 다급한 사정의 민원인들이 기자들 앞에서 자신들의 입장이나 의견을 발표하고 일장 연설을 하는 게 다반사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필자는 참으로 기가 막힌 장면을 보고 너무나 놀란 적이 있다.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단결 투쟁 이라는 구호가 새겨진 머리띠를 두르고 국회의사당을 향해 한 입으로 이렇게 외쳐대는 것이었다. 현장을 지나던 행인의 하나였던 필자에게는 바로 누구를 규탄하거나 사퇴하라는 말보다도 더 큰 충격으로 들려왔다.

야 이 도둑놈들아 아 아 !!!

원래 ‘월급도둑’이란 말은 군대사회에서 널리 회자되어왔다. 군인이란 국가 안전보장을 위해 전시나 평화 시기에 모두 필요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종종 군대의 존재가 평화 시기에 너무나 많은 군사비 지출 부담 때문에 사회적으로 이런 저런 군소리를 듣게 되는 게 보통이다. 특히 중요하지 않은 보직을 차지하고서 특별한 일도 없이 월급을 축내는 부류야말로 ‘월급도둑’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 말은 제 밥값도 제대로 못하는 공직자를 지칭할 때 빛을 발한다. 사실 국회의원들이 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면 공직자 가운데 월급도둑을 몰아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를 보다 못한 노조집회에서 장관과 정부출연기관장들 가운데 몇 몇은 국민세금을 축내는 ‘월급도둑’이라고 단정할 만한 무책임과 무능력, 무성의를 질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 이번 장마피해에 대해 과연 누가 ‘월급도둑’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짓 했을까?

첫째, 폭우가 쏟아져도 너무나 많이 한꺼번에 쏟아진 이번 2020 장마 피해는 어떤 기준에서 본다면 얼마든지 예상된 것이었다. 6월초부터 중국 안후이, 장시, 후배이 등 27개 성(省)과 시에 쏟아진 폭우로 인해 7월 초순에 이미 이재민이 4000만 명에 육박했다, 최대 담수호 장시성 포양호는 1998년 대홍수 당시의 수위를 넘어서면서 범람 위기를 맞았다. 일본은 7월초부터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기록적 폭우가 쏟아졌다. 7월 4일부터 내린 폭우로 하천이 범람하여 마을이 침수된 일본 구마모토현 구마촌에서 고립된 주민들은 땅 바닥에 밥(식), 쌀(미), 물, SOS라는 글씨를 적어놓고 구조를 기다리는 사진이 이미 국내에 보도되고 있었다(한겨레 2020. 7. 6.).

한국에서도 이미 6월 29일, 강릉에 206밀리미터의 비가 쏟아져 6월 중 강수량 기록을 109년 만에 갱신했고, 속초시 설악동에 281.5 밀리미터의 비가 내려 전국에서 가장 많은 1일 강수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기상청은 7월 14일까지 강한 바람과 함께 남해안과 지리산 부근에 300 밀리미터 이상의 폭우가 예상된다고 12일 예보했다. 따라서 중국과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상륙하여 이번 장마철에만 16차례나 비구름이 덮쳐왔다. 따라서 수해대책당국은 이처럼 퍼부을 장마비에 대한 수방대책을 수립, 시행되었어야만 했다.

둘째,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이상기후에 따른 국지성 폭우는 자연재난을 낳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미 지적되었듯이 이번 몇 가지 폭우피해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아니라 인재지변(人災地變)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무용지물이 되고 만 한탄강댐의 문제과 그 상류지역의 상습침수문제에 대해 다음 기회에 살펴보도록 해야 하겠다.

셋째, 치산치수의 올바른 정치는 “정책 따로 집행 따로”가 아니라 공약이나 정책의 이행, 신뢰의 회복, 협치의 실천에서 그 성패를 좌우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많은 환경단체와 시민사회의 줄기찬 활동과 요구에 부응하여 물관리를 일원화하자는 합의가 있어왔다. 즉 수질과 수량 재해예방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건설부(수량)와 환경부(수질)가 나누어 맡고 있던 물관리행정을 환경부로 일원화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필자가 지난 5월 12일 대한민국 제20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 회의장에 목격했던 사실은 건설교통부 국장이 출석하여 미래통합당 간사의 질문에 답하면서 아직 부처간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 한마디에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자동 폐지되었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이 물관리 일원화 문제를 담당한다고 말해왔던 대통령 직속 물관리위원회는 4대강 대형보(洑) 상시 개발 후 재평가 실시에 따라 보 해체, 재자연화 여부 등을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지역 농민들이 보 해체를 반대하면서 해당 지방자치단체장들과 지역구 출신 국회의원들이 반대와 주저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전임 대통령 정책실장 등이 4대강 보 해체와 재자연화에 대해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들춰지고 있다.【5】 밥값을 제대로 하지 않는 공직자들이 남아 있는 한 녹색국가로의 전환은 매우 더디거나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걸 해결하는 것은 아무래도 시민사회의 감시와 함께 정치권, 특히 집권여당의 책임과 역할 제고가 너무나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한민국 제19대 문재인 대통령 선거공약을 통해 헌법이 보장한 규정을 성실히 수행하여 국민의 안전과 생명 보호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더불어민주당 2017. 4. 나라를 나라답게. 제19대 대통령선거 더불어민주당 정책 공약집 247쪽). 즉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대한민국 헌법 제 10호 제34조 제6호). 슈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집권당으로써 이런 헌법 규정의 준수와 이행에 필요한 모든 입법 노력을 다해야 하며, 정부의 관련법과 예산 집행에 대해 엄격한 잣대로 감시하고, 촉구하며 선도해야 할 것이다. 그 길만이 녹색국가로 전환하는 지름길이요 올바른 길이라는 점을 재삼재사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정권시기 4대강 준설과 보건설이라는 토목사업은 현대건설, 대우건설, 삼성물산, GS건설, 대림산업으로 구성된 경부운하 컨소시엄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여기에 국내 토목건설관련 학회와 협회가 이익공동체를 구성했고, 강남부동산지옥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자본친화 시장 세력들이 가세하여 졸속 강행되어 만들어졌었다. 이들 토목건설이익공동체는 이제 16개의 보가 완성되자마자 이제는 지역 토호정치세력과 유착하여 과거의 과실이나 중대 수환경 문제를 은폐·호도·분식하면서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야 할 강과 하천의 생명과 환경을 여전히 쥐락펴락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새롭고 신선한 ‘물의 정치’, 올바른 치산치수정책이 확실하게 수립되어 이런 구시대의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 이익담합공동체와 충분한 거리를 두고 단호히 그 연결고리를 차단하고, 새로운 녹색생명 개혁공동체를 구성, 운영하는데 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민주진보개혁세력과 함께 시민들이 참여하는 녹색국가로의 전환을 앞당기는데 앞장설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방송을 이번 장마기간을 각각 54일과 58일이라고 보도했다. 한국방송 창 296회: 54일 장마의 경고. 2020. 8.22. https://www.youtube.com/watch?v=96qc_kOhp7Q ; 한국방송 시사직격 41회. 슈퍼 장마가 남긴 경고. 2020. 8. 21. https://www.youtube.com/watch?v=n2D9hxfwvM4

【2】 뉴스타파 2020. 7. 21. 문재인의 4대강 https://www.youtube.com/watch?v=5iMl0teBBWs&t=1638s

【3】 https://ko.wikipedia.org/wiki/%EB%8C%90

【4】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00813/102427206/1

【5】 문화방송 2020. 7. 21. 4대강에는 ‘꼼수’가 산다 – 후반부 – PD수첩. https://www.youtube.com/watch?v=UDT9_bZ9ZQI

 

허상수

현재 한국사회과학연구회 이사장 / 전 성공회대학교 교수·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 고려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공영역: 인권 및 과학기술사회학, 연구주제: 지속가능한 사회, 이행기 정의, 정보사회

금, 2020/09/04-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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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즉 세계적 유행병인 코로나19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의학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대처에 있어서 ‘이동량’이나 ‘사회적 거리두기’, ‘사적 모임 제한’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이 또한 사회학적 문제임을 알게 된다. ‘사회학적’이라 함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어떤 무엇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발병 및 확산 초기에 그 ‘어떤 무엇’은 사회적 심성 또는 지배적 규범의 문제로 해석되었다. 그리하여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 유교 문화권 국가의 ‘순종적’ 국민 덕에 방역이 잘 된다고 해석되었다. 물론 신천지 등 일부 개신교 집단에서 전체 사회보다 자기 집단에 ‘순종적’인 문화가 방역에 가장 큰 장애가 됨이 곧 밝혀졌지만 말이다. 이처럼 사회적 관계의 질서에서 ‘집단도덕’이 핵심이라고 보는 견해는 근현대 주류 사회학의 고전적인 주장이다.

다음으로, 그 사회적인 ‘어떤 무엇’은 공공의료제도라는 ‘제도’의 문제로 이해되었다. 특히 한 국제기관에서 독일의 공공의료제도를 높이 평가하여 한국보다 방역에 앞서 있다고 평가하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내 공공의료제도의 문제가 드러나면서 그와 같은 의견이 대두했다. 그러나 스페인 등 여타 유럽 국가의 환자까지 실어와 병상을 제공했던 독일에서 코로나19 방역이 실패하여 사회폐쇄가 연장되면서, 이런 관점은 설득력을 잃었다. 또 공공제도가 잘 갖춰진 대표적 북유럽 복지국가인 스웨덴에서 난데없는 ‘집단면역 실험’을 했다가 실패하면서, 단순히 ‘제도’만의 문제가 아님이 명백해졌다. 이렇게 의료제도를 문제의 핵심으로 보는 경우는 의료사회학적인 입장이다.

최근 들어 코로나19의 감염 동선을 추적하기 어려운 경우가 잦아지면서, 사회적인 ‘어떤 무엇’의 핵심은 역학조사 및 그와 관련된 개인정보 수집의 문제로부터 점점 멀어져서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회폐쇄 여부, 즉 개인들의 이동량 통제 문제로 넘어갔다. 결국 3차 유행에 와서는, 역학조사 중심의 초기 감염병 대응에서 실패하여 익명적, 집단적 자유제한 정책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던 유럽과 유사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서구와의 차이가 나타났다. 서구에서는 사회폐쇄에도 불구하고 이동량이 크게 줄지 않아서, 젊은이들의 파티와 사적 모임에서의 감염이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리하여 학교나 직장과 관련된 이동량까지 줄여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이 이동량 감소로 상당히 잘 연결되는 결과를 보여왔다.

지금까지 경과를 보면, 결국 사회적인 ‘어떤 무엇’에서의 핵심은 ‘사회적 거리’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단순히 정부 방침에 잘 따라주는 ‘순종적’ 심성의 문제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른 차원의 문제로 볼 것인지가 핵심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코로나19를 통해 드러난 또 다른 ‘사회적 거리’의 표현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택배 노동자의 과로, 아파트 경비원 폭행 주민, 정인이 사건 등의 아동학대 부모에 대한 분노를 통해 나타났다. 택배 노동자의 과로에 대한 공감은 인간적 공감의 형태로만 표출될 뿐, 과로를 강요하는 산업의 이익분배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독일에서 간호 및 돌봄 노동자의 처우개선에 대한 문제가 코로나19를 계기로 집단적 목소리로 표현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아파트 경비원 폭행에 대한 분노 역시 노동권의 문제보다는 개인 인권의 측면에서 공감대가 확대되는 양상이다.

그러나 살인과 구별되기 힘든 양상의 아동학대에 대한 분노는 단순히 인격적 분노가 아니라 제도의 작동불능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아동학대 신고 절차를 제대로 따른 행위자가 시민들 개인에 한정되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경찰이나 입양기관과 같은 조직적 행위자는 모두 책임회피와 무시로 일관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가 학대 부모에 대한 인간적 분노 못지않게 컸다. 그러나 정인이에 대한 젊은 부모들의 진정성 있는 추모의 물결은, 그 이전의 세대들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전경이기도 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정인이에 대한 추모가 ‘남에 대한 추모’라는 거리감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거리감의 변화

택배 노동자, 아파트 경비원, 학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2차 집단’ 관계 속에서 개인들이 느끼는 ‘사회적 거리감’이 매우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과거의 ‘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개인들은 ‘남’의 고통에 공감하고 있다. 과거 ‘정’은 인연 맺기와 유관한 친밀감이다. 일회적이거나 익명적인 성격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공감이 아니라, 인연 지속의 기대감 속에서 호혜적인 감정을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즉 사회학에서 말하는 ‘1차 집단’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택배 노동자, 아파트 경비원, 아동학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연고가 배제된’ 공감으로서, 사회학에서 말하는 ‘2차 집단’적인 관계에 가깝다. 주류 사회학에서는 ‘2차 집단’ 관계의 핵심은 이익이라고 보았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결합한 ‘차갑고’ ‘계산적인’ 관계라고 규정했다. 물론 거기에도 호혜성이 성립하나, 그것은 ‘인격적 친밀감’이 아니라 ‘공적 의무’에 기초한다. 즉 만일 공감이라는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한층 추상적인 시민적 공감이다.

서구에서는 그런 시민적 공감이 공적 제도화를 낳았고,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다양한 절차들이 확립되었다. 즉 서구에서 제도화는 곧 규범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실현 역시 의미한다. 그런데 택배 노동자나 아파트 경비원의 경우를 통해 보이듯이, 한국에서 공적 공감은 제도화로 쉽게 연결되지 못한다. 공감되는 개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 자체가 기대되기 어려운 현실이다. 제도화가 어려운 이유는 규범이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고용자의 산업 논리가 더 우선인지, 아니면 피고용자의 인권이 더 중요한지가 사회적으로 논의된 적조차 없어서 규범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규범의 상태이다. 또는 정인이 사건에서처럼, 제도화가 이루어진 경우에도 그 제도는 작동하지 않는다. ‘남’에게 공감하는 개인들은 제도를 따름으로써 그 규범에 동조하지만, 제도를 지켜야 할 권력기관은 제도를 무시할 만큼 규범에 무지한 것이다.

시민 개인의 시민적 공감과 제도 규범 간의 이러한 괴리는, 아마도 민주주의 절차를 권위적으로 제도화한 한국 정치사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즉 제도화를 위해서는 대표된 권력이 필요하고, 권력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대표자에게 이양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 정치사에서는 이런 중간 과정이 아예 생략되거나 아니면 단순 절차적으로만 적용되어왔다. 권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소유대상이 되어 그 자체가 이익으로서 분배된다. 권력을 대표자에게 이양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권력 대표자에게 전달이 되지 않으므로, 개인들은 추상적인 시민적 공감의 수준을 넘어 사무치게 인격적인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제도화가 개인들의 마음과 괴리되어 있는 만큼, 그리하여 제도화가 규범의 표현이 아니라 권력의 표현이 되고, 그리하여 사회적 규범이 무엇인지 확인이 안 되는데 개인들의 감정만 확인되는 상태에서, ‘남’에 대한 격한 인격적 공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내 집단’과 ‘남의 집단’을 엄격하게 나누어 이질적으로 집단 관계를 규정하던 고전적인 사회적 관계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오히려 ‘나’, ‘공감되는 다른 개인’, ‘권력기관’으로 상호작용의 대상을 삼분하여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고, ‘나’를 포함한 ‘개인’과 ‘권력기관’ 간의 권력 비대칭성을 뼈저리게 인식하는 마음의 상태가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한다. 말하자면 시민 개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권력에서 소외된’ 남들에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공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한국에서의 방역 성공은 권력기관에 대한 이러한 불신과 쌍을 이루는 듯이 보인다.

주권자로서 미약한 개인의 처지에서 신뢰할 수 없는 권력기관을 마주하여, 스스로 솔선수범해서 방역의 최전선에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한국에서 지금까지 방역이 성공했던 이유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렇게 성공한 방역 역시 서구의 방역 못지않게 위태로울 수 있다. 서구의 경우 개인 주권자 의식이 강한 개인들이 정부의 방역 정책을 불신하여 방역이 어렵다면, 한국에서는 제도적 권리가 약한 개인들이 최악의 상황을 예방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방역 정책을 따르기 때문이다. 시민 개인들의 이런 자발적 동원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시민들의 헌신적인 솔선수범이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제도화한 권리’의 형태로 보상받아야 한다. 현재의 방역 성공은 한국의 의료제도, 경제 제도, 이익분배 방식 덕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스스로 솔선수범하고 타인에게 마음 깊이 공감하여 ‘시민적 동원’의 최고치를 만들어낸, ‘좋은 시민’들 덕이기 때문이다.

 

홍찬숙

화, 2021/02/09-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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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에서 대충 파악이 되듯이 이번에는 우리나라 축산과 육식의 과다 섭취의 문제이다.

통계상 우리나라는 1인당 육식섭취량이 일본보다 2배 정도 많다고 한다. 1년에 먹어치우는 닭의 양이 2억 마리가 넘는다. 이것도 2019년 통계이니 코로나로 인해 집콕생활을 강요받았던 지난해에는 더 늘었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양의 고기를 먹는 것이 가능할까?

그건 미국을 비롯해 외국에서 값싸게 들여오는 GMO(유전자조작농산물) 사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사료용으로 천 만톤 정도의 GMO 사료를 수입한다. 우리나라 쌀 생산량(2020년도 약 350만톤)의 약 세배 가까이나 된다. 수입량에서 짐작되듯이 우리나라는 많은 식용 가축을 키우고 있다.

불과 20~3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농가는 대부분 소 한 두 마리를 키웠고 그 소들은 일소로 쓰이기도 하고 농가소득에서 짭짤한 부수입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사료를 공급하는 곡물 수출국의 기상이 악화되어 사료값이 오르면 소를 한 두마리 키우는 농가는 버티기 힘들다. 또 부업으로 한 두 마리를 키우던 농가의 농민들이 나이가 들면서 사료 급여와 분뇨 처리가 힘들어지면서 사육을 포기하게 되었고 축산은 점점 규모화 되어갔다.

이제 시골 농가에서 부업으로 소 한 두마리를 키우는 농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축산은 농가에서 생산하는 여러 작물이나 품목 중 하나가 아니라 축산업이라는 영역으로 독립되었고 전문 경영자들에 의해 좁은 공간에서 대량으로 사육되고 있다.

조류독감(AI)이라든가 구제역, 아프리카 돼지열병(ASF) 같은 가축전염병에 감염되어 농장에 있는 가축을 전부 살처분했다는 얘기는 20~30년 전만 해도 들을 수 없었던 얘기이다.

좁은 땅에서 많은 가축을 키워야 하니 조밀하게 키우는 밀식 축산을 할 수 밖에 없다. 동물 학대니 동물 복지니 하는 얘기는 문제가 되는 그 때 뿐이고 축산 환경은 개선되지 않는다. 가축전염병은 한번 돌면 밀식, 밀접된 축산농장 안에 사육되는 동물에게 급속히 전염이 된다. 특히 요즘 지어지는 양계장은 냄새를 줄이고 외부의 전염병을 차단하기 위해 창없이 밀폐된 축사를 짓는다. 무창계사라고 한다. 전염병이 침입하면 집단감염이 일어나기 딱 좋은 시설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조류독감이 이번 겨울에 다시 나타났다. 조류독감에 감염된 농장의 닭이나 오리들은 모두 살처분된다. 살처분이라는 말에는 섬찟, 끔찍, 폭력, 잔인이라는 느낌이 잘 안드러나지만 감염이 되면 이 농장의 닭들은 농장 주변에 땅을 파고 안락사 과정도 없이 생매장으로 살육된다. 조류독감이 발생한 농장의 닭이나 오리들은 물론 살처분되고 반경 3km 이내의 농장에 있는 닭이나 오리들도 모두 예방 행위로 똑 같이 살처분된다. 한 농장에서 키우는 닭이나 오리들은 수 십, 수 백 마리가 아니라 수 만, 수십 만 마리가 된다. 이 생명들이 영문도 모르고 한꺼번에 구덩이로 내몰려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경기도 화성에 가면 ‘산안마을’이라는 농사공동체가 있다. 이 공동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사육방식을 이용해서 유정란을 생산한 곳이며 친환경 축산과 동물복지농장을 실현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농장 가까운 가금류 농장에서 조류 독감이 발생했다. 반경 3km 안에 포함된 산안마을 양계장의 닭들도 살처분의 대상이 되었다. 농장 앞에는 공무원들이 초소를 세워 달걀 반출과 사료반입을 막고 있다. 공동체 식구들은 살처분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고 이 공동체 대표를 지낸 윤 모 대표는 가축들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을 바꾸더라도 막겠다고 농성을 하고 있다.

산안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은 양계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고, 공동체를 통해 개인과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성찰하는 삶을 택했고 강요나 유혹이 아닌 공명과 스스로의 결단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인간이 가져야 할 존엄을 지키는 만큼 자기들이 키우는 닭과 가축도 존중하고 건강과 행복권을 지켜주려고 노력했다.

정부는 동물학대와 가축전염병으로부터 동물들을 지키고 동물권, 행복권, 동물복지를 실현하는 동물복지농장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산안마을은 그 가장 앞자리에 있다.

산안마을 양계장은 2014년 조류독감 대유행 때도 매몰 명령이 떨어졌으나 끝까지 버텨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은 곳이다.

전염병에 감염된 가축은 멀리 이동할 수 없다. 그래서 농장 가까운 곳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살아있는 가축을 집어넣고 묻는다. 지금은 살처분 광경이 끔찍하다고 TV에 잘 안나오지만 우리는 그 전에 얼마나 잔인하게 처리했는지 기억한다. 거대한 구덩이에 대형덤프트럭으로 가축들을 쏟아부으면 멀쩡한 소나 돼지가 살겠다고 가파른 구덩이를 기어오르고 굴삭기 대형 삽날로 밀어넣고 찍어누르던 장면을.

가축 살처분은 그 지역 주민과 공무원들에게 생명을 죽여서 받는 정신적 고통 – 트라우마를 남긴다. 가축 주인들에게는 경제적 타격과 실의를 남긴다. 지역은 토양과 지하수 오염의 위험에 빠진다.

대량 밀집 공장형 축산의 필연적 결과이다.

육식의 제한없는 섭취. 신 선진국 대한민국의 반성 지점이다.

지금과 같이 육식을 과잉섭취하면 동물복지농장을 확대하기 어렵다. 대량 밀식 축산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사료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식량자급율을 올릴 수도 없다.

육식의 대량 섭취는 건강에도 좋지 않지만 지구환경에도 악영향을 준다. 탄소 배출로 인한 지구 환경위기의 1/4이 축산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경기도 가축방역심의회에서 ‘산안마을’의 상황을 확인하고 조류독감에 감염되지 않고 앞으로도 안전이 유지된다고 파악하여 농식품부에 건의하면 살처분 대상에서 빠질 수 있다.

다행히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산안마을 상황을 보고받고 ‘예방적 살처분은 공장식 밀집사육을 전제로 만들어진 규정’이라며 친환경적으로 동물권을 존중해서 운영하는 동물복지농장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이점이 없으니 경기도 차원의 기준안을 마련해 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경기도가 산안마을의 닭들에게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적용한다면 ‘예방적 살처분’이라는 일방적 처리 방식에서 농장의 유형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새로운 길이 열리더라도 과다한 육식의 섭취를 줄이지 않으면 전염병이 돌 때마다 예방적 살처분으로 수많은 가축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구를 위해, 우리의 건강을 위해, 동물 복지를 위해, 식량자급을 위해, 축산농장의 이웃주민들을 위해 고기를 조금만 먹기, 일주일에 한번 이하로 줄이기를 함께하기를 간절히 요청드린다.

인간과 동물, 자연과의 관계를 착취와 수탈이 아닌 협력과 상생의 관계로 회복하지 않으면 가축들은 늘 살처분의 위험에 놓일 수밖에 없다.

산안마을이, 산안마을 닭들이 살아남기를 기원한다.

간절히…

 

이재욱

화, 2021/02/2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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