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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와 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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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와 개벽

익명 (미확인) | 금, 2019/04/05- 13:00

1. 어느 고려학인가?

남한학과 북한학이 아니라 한국학과 조선학이라고 해야 한다는 지적에 십분 공감했습니다. 다만 제가 한국학이라고 한 것은 개벽학의 발신지가 북조선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한국’이라는 의미이지, 결코 그 대상이 남한에 한정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그 범위는 지구학이자 미래학이 되어야겠지요. 그래서 개벽학이 한국학의 영역이라는 말은, 량수밍의 동서문화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중국학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국학과 조선학을 고려학이라고 부르자는 제안도 여전히 숙제는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신라학, 고려학, 조선학이라고 할 때의 고려학과 구분이 안가니까요. 확실히 외국인들이 우리를 ‘고려인’(Korean)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만, 외국인들이 중국을 China라고 부른다고 해서 중국인들이 ‘중국’을 버리고 ‘진(秦)’이라고 명칭을 바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고려도 아니고 조선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전적으로 새로운 이름을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도 가능하면 남북학자들이 합의해서요.

조선사상전사

작년에 교토대학의 오구라 기조 교수님이 『조선사상전사(朝鮮思想全史)』를 출간하셨습니다.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해서 김대중과 김정일에 이르는 한반도의 문학·역사·철학·종교의 흐름을 개관한 역작인데, 이상하게도 책 제목을 『한국사상전사』라고 하지 않고 『조선사상전사』라고 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인데, 아마도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부르기 때문에 ‘조선사상전사’라는 이름을 취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종의 ‘한반도사상전사’라는 뜻으로 ‘조선사상전사’라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신라사상사, 고려사상사, 조선사상사라고 할 때의 조선사상사와 구분이 안 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 역시 남북을 통칭하는 공식적인 학술용어가 아직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시대에 한국인들이 한반도를 지칭했던 개념이 최치원 이래로 ‘동방(東方)’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사상사’나 ‘한국사상사’를 ‘동방사상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역시 문제는 남을 것입니다. 지금은 ‘동방’이라는 말을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사용하고 있고, 그 의미도 한반도를 가리키기보다는 ‘동아시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동방’이라는 말에는 중국에 대한 ‘동’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도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최치원 자신은 ‘동’을 중국에 대한 ‘동’이 아니라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만-.

이렇듯 개념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개념이 발화될 때의 문맥과 상황을 반영할 뿐입니다. 노자가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2. 개벽은 깨어있는 자세

제가 지난 20세기의 한국 인문학이 중화와 개화의 포로와 노예가 되었다고 한 것은 중국과 서양을 배척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경계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중국과 서양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문과 수학은 한국에서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초 정도는 마스터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도학과 과학을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에는 100% 공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개벽’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깨어있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누군가가 개벽에 사로잡혀서 동학이나 개벽사상만이 제일이라고 하는 맹목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이것이야말로 反개벽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손병희 학술대회(박길수)

지난주에 모시는사람들의 박길수대표님이 어느 학술대회에서 「손병희의 개벽사상」으로 발표를 하셨는데, 제일 인상에 남는 대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 리더들에게 한 말입니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해서 당장 독립이 되는 건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저는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정신개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이 한국과 비슷하게 식민지지배를 당한 아프리카에서도 ‘흑인의식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근대가 인도나 아프리카의 근대와 유사성이 있다는 뜻이지, 결코 지금의 한국이 제3세계와 비슷하다거나, 오늘날 동아시아 담론이 무용하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중국과 일본의 개벽파를 찾아내고 발굴하는데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영성적 근대론’은 그것이 한국 근대라는 사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 관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전 세계의 대부분의 근대론을 포괄할 수 있다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저는 한국의 근대나 한국의 사례를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이나 학설에는 이제 관심이 적어졌습니다. 그것은 제 주된 연구 분야가 한국근대사상사이기 때문에 오는 한계일 것입니다.

 

3. 개벽으로 다시 보는 해방공간

‘해방공간의 재재인식’이라는 흥미로운 발상을 제안하셨습니다. 사실 제 요즘 관심분야도 ‘개벽으로 다시 보는 한국 근대’입니다. 덕분에 그동안 제가 모르고 있었던 현대사의 중요한 사실들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1948년에 천도교에서 3.1운동을 재현하려 했다는 사실은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모르고 있었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의 정치이념

해방정국(1945~1948)에서 개벽의 입장을 대변한 건국철학이 『천도교의 정치이념』(1947)과 원불교의 『건국론』(1945)인데 둘 다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지적하신대로 남과 북, 성과 속을 모두 아우르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수록된 임형진 교수님의 해제 「천도교청우당, 새로운 세계를 기획하다」(모시는사람들)와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에 실려 있는 백낙청 교수님의 논문 「통일사상으로서의 송정산의 건국론」(모시는사람들)이 두 문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백낙청)

『천도교의 정치이념』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1923년에 창당된 천도교청우당의 세 가지 기본이념이었습니다. 그것은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인데, 이돈화가 『신인철학』에서 주창한 삼대개벽과 용어가 동일합니다. 그런데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의하면 “실제로 청우당의 활동 목적은 민족개벽과 사회개벽의 두 가지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48쪽)고 나와 있습니다. 즉 정신개벽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족개벽이라 함은 여러 가지 의의가 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굴레에서 우리 민족이 해방을 얻자는 것이 제일의적이었고, 사회개벽이라 함은 자본 사회의 제도를 개혁하여 무산계급을 해방하자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청우당의 현실적인 정치이념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원래 보국안민(輔國安民)은 천도교의 신조요 염원인 만큼 천도교의 그것은 곧 당의 이념이 된다. 그런데 해석상 보국(輔國)은 민족해방이 되고, 안민(安民)은 계급해방이 되는 점에서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다.”(48쪽)

저는 이 대목에서 80년대 학생운동과 비슷한 이념을 떠올리게 됩니다. 즉 민족개벽=민족해방은 이른바 NL계열의 주장과 유사하고(대상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습니다만), 사회개벽=계급해방은 이른바 PD계열의 주장과 유사합니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가 고민한 보국과 안민의 문제는 한반도의 영원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천도교의 정치이념』의 경우에는 보국(민족)이나 안민(계급) 중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고 양자를 모두 병진하려 했다는 점인데, 이것은 원래 동학에서 ‘보국안민’이라는 슬로건을 표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나오는 도식대로라면, 1차 동학농민혁명이 ‘안민’(계급)의 문제로 일어났다면, 2차동학농민혁명은 ‘보국’(민족)의 문제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4. 천도교의 이중과제론

『천도교의 정치이념』에서는 보국과 안민의 문제를 ‘이중 과업’과 ‘양대 과제’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조선민족에게 부여된 정치적 사명은 두 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는 민족해방이요, 둘째는 사회해방이다. 연합국의 위대한 전승으로 인하여 우리의 민족해방이 대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주독립을 완성하지 못한 만큼 아직도 이 이중적인 정치 과업은 우리에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두 가지 과업을 동시에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 조선의 특수한 사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냉정하게 생각하고 주밀하게 논의하여 민족 만년 대계인 이 양대 과제를 완전히 수행해야 하겠다.”(51쪽)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본래 삼대개벽을 지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양대개벽으로 축소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양대개벽을 추진할 정신적 동력인 정신개벽은 논의에서 빠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도교인 개개인이 정신수양을 게을리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으로서의 정신개벽에 대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은 80년대 운동권에 이르면 더욱 심화됩니다. 사회운동에 치중한 나머지 정신수양이나 영성수련을 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지요. 제 생각에 원불교에서 ‘정신개벽’을 들고 나온 것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5. 『건국론』의 중도주의

원불교의 제2대 리더인 정산 송규가 쓴 『건국론』은 『천도교의 정치이념』보다 2년 빠른 1945년 10월에 나왔습니다. 해방 직후에 나온 셈입니다. 흥미롭게도 첫 장(章)부터 「정신」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치」, 「교육」에도 ‘(정신)훈련’이나 ‘정신교육’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같은 ‘교정쌍전’이라고 해도 천도교가 ‘정(政)’에 방점을 두고 있다면 원불교는 상대적으로 ‘교(敎)’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국론』의 정신개벽의 특징은 ‘중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건국은 단결로써 토대를 삼고, 단결은 우리의 심지가 명랑함으로써 성립되며, 명랑은 각자의 흉중에 갊아있는 장벽을 타파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장벽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간단히 그 대요를 말하자면, 1. 각자의 주의에 편착하고 중도의 의견을 받지 아니해서 서로 조화하는 정신이 없는 것이요…” (제2장 「정신」)

건국론

저는 여기에서 말하는 ‘중도주의’야말로 우리가 해방 이후로 잃어버린 정신적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무위당 장일순 선생도 ‘중립화 통일론’을 주창해서 감옥에 갔다고 하는데, 『건국론』의 중도주의와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중도주의이든 중립화이든, 이들이 말하는 ‘중’은 단순한 ‘중간’이기보다는 “배제를 거부하는 포함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설령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른 ‘타자’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투쟁의 상대로 보기보다는 그들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려는 태도입니다. 장일순의 표현대로라면 ‘보듬으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건국론』에서 말하는 “내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는 “내 마음의 장벽”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달려온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영성‘ 대신에 ’아성(我性)‘을 공고히 해 왔다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해방 이후에 잃어버린 정신은 『건국론』이나 장일순이 말하는 ‘중도’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이른바 ‘혐오문화’도 이런 정신의 상실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사례가 아닐까요? 상대의 존재를 긍정하려 들기보다는 처음부터 부정하려는 태도가 앞서는게 혐오니까요.

개벽포럼(도법스님)

지난달에 있었던 제1회 개벽포럼에 도법스님이 연사로 오셔서, 서로 생각이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가운데’에 서서 그들의 의견을 중재했던 경험들을 생생하게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원효식으로 말하면 ‘화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건국론』의 중도주의나 장일순의 중립주의 나 보듬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개벽의 입장일 것입니다. 개벽은 양 극단의 가운데에 서서 ‘새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일종의 ‘중도개벽’인 셈입니다. 19세기식으로 말하면 유학과 서학의 중간에서 양자를 아우르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한 개벽파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벽포럼(청중)

 

6. 21세기의 공통가치를 찾아서

마지막으로 『천도교의 정치이념』을 읽으면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을 소개하면서 이번 서신을 마칠까 합니다. 그것은 보국과 안민이라는 서로 다른 과제를 추구하면서도 그 바탕에는 ‘하늘’이라고 하는 동학의 기본이념이 깔려 있는 점입니다. 80년대식으로 말하면 NL과 PD가 우선시하는 과제는 서로 달랐지만, 양자의 바탕에는 “시천주”라고 하는 공통가치가 공유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시천주는 두 말 할 것 없이 인간과 만물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말합니다. 이 점 또한 해방 이후에 우리가 잃어버린 전통일 것입니다. 각각의 진영에서 자기 주장을 외치면서 상대를 비난하려는 노력은 열심히 해왔지만, 입장이 서로 다른 상대와의 공통토대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에서 ‘공공’의 영역은 확보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개벽’이 주는 메시지는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동학‧천도교‧증산교‧대종교‧원불교 등등이 비록 종교의 형태는 달랐지만 모두 ‘개벽’이라는 공통가치를 향해서 100년 넘게 계승하고 상생해 왔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개벽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해방 이후에 잃어버린 공통가치를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입니다. 해방정국이 ‘좌’나 ‘우’라는 편도(偏道)를 고집했다면, 그리고 해방 이후가 ‘개화’라는 편도(偏道)로 치달았다면, 지금부터는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중도(中道)를 ‘개벽학’이라는 이름으로 찾아보려는 것이지요.

유교, 개신교, 천주교, 천도교, 원불교 계열의 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동학을 공부하는 ‘하늘학회’(가칭)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공통가치로 삼아서 뭇 종교들을 아우르려는 중도의 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과학자까지 가세된다면 금상첨화겠지만요. 앞으로 뜻있는 분들이 하나씩 둘씩 동참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개벽학당도 그런 중도의 일꾼들을 길러내는 산실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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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민족을 위한 정책은 누가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코로나 19 감염병이라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전대미문의 위기 상황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예전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자동차 부품의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도 발생했다. 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불과 0.3° 남았다는 기후 위기의 어두운 그림자는 시시각각 우리의 운명을 옥죄어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사회는 온통 부동산 문제로 난리지만, 도무지 그 정확한 해법을 찾지 못하며 갈팡질팡하고 있다. 아니, 집권당은 오히려 거꾸로만 간다. 가야 할 길은 가지 않고, 가지 말아야 할 길만 가고 있다. 전세상한가 법안 통과 바로 전날 자신의 강남아파트 전세를 그 상한가보다 훨씬 높게 계약했던 청와대 전 정책실장. 가장 ‘공정’하지 못한 행위이며 문자 그대로 ‘정책을 잃은’ 정책실(失)장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거대정당 소속 당 연구소로부터 좋은 정책이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밤늦게까지 불 밝히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연구하는 집현전 선비들을 보고 싶다

불행한 사실은 이러한 ‘답답하고도 특별한’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현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특수 상황은 기존 방식대로 대응하기에는 너무나 특별하고 전반적이며 심층적이다. 창조적인 대응 방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세종 시대에 있었던 집현전이 필요하지 않을까. 집현전에서 불을 밝히며 밤늦게까지 자신의 부동산 이익이나 출세가 아니라 오직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연구하는 그런 선비들이 필요하고 그런 정책기관이 필요하다. 그래서 국가의 위기를 미리 예측하여 대비하고 젊은이들의 취업 기회를 창출하며 또 우리나라 미래의 먹거리를 개척해나가는 중차대한 과제를 수행하는 그런 집현전이 절실한 시대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집현전의 연구 기능을 크게 강화하고 당대의 우수한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집현전에 소속시켰다. 집현전은 이전에 이미 존재하기는 했지만 사실 역할이나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기구였다. 세종은 그러한 집현전을 자신의 정치를 뒷받침하는 국책연구 기관으로 삼고자 하였다.

집현전 학사의 자격은 문사(文士)였으며, 그 중에서도 재행(才行)을 지닌 연소한 자를 적임자로 삼았다. 집현전은 그 설치 동기가 학자의 양성과 문풍의 진작에 있었고, 세종 역시 그와 같은 원칙에 의해서 육성하였으므로 학문적인 특성을 지녔다. 그러므로 세종 대에는 일단 집현전 학사에 임명되면 다른 관직으로 전직(轉職)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학자란 모름지기 평생 정치가가 아니라 연구직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집현전 학사들은 집현전 안에서 차례로 승진하여 직제학 또는 부제학에까지 이르렀고, 그 뒤에 육조나 승정원 등으로 진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숙주와 정인지는 이 방침이 정해지기 전에 이미 집현전을 떠나 신분이 풀렸지만, 이후 출세길을 접어야 했던 집현전 학사들에게는 커다란 좌절이기도 하였다.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을 자상하게 보살핀 것은 유명하다. 내관을 보내 공부를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든 신숙주에게 옷을 덮어 주게 하는 등 특별하게 대우했지만, 집현전에서의 연구직 종사 원칙은 끝내 풀지 않았다.

세종 중기에 집현전의 정원이 16인에서 32인으로까지 증가되었고, 그 기능이 확대되어 유교주의적 의례와 제도, 문화의 정리 사업인 고제연구(古制硏究)와 편찬사업이 시작됨으로써 가장 활기를 띠었다. 집현전의 고제연구는 의례 및 제도의 실천에서 발생하는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 많았으며, 세종의 각종 시책 추진에 필요한 당면하는 정치 및 제도적인 문제의 해결에 참고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각국의 제도와 정책에 대한 연구에 해당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세종은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중국과 우리의 역사에서 치국평천하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를 뽑아 ‘너무 복잡하지도 말고 너무 간략하지도 않도록’ 그 요점을 정리한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게 하였다.

세종 후기에 이르러 집현전은 세종의 신병으로 인하여 세자의 정무처리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이 설치되면서 집현전 학사들이 종래에 맡아왔던 서연직(書筵職)과 함께 첨사원직까지 거의 전담하게 되어 그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집현전의 언론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강력한 언론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점했으며, 국가 정책의 논의에 참여하는 등 정치 활동도 활발해졌다.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을 뛰어넘는 이러한 일,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일

차기 대선주자들은 이 집현전 설치를 공약으로 삼아야 한다. 현 정부도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착수했으면 한다. 시작이 반이라 했다. 시작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집현전을 국회에 설치하는 방안도 있겠지만, 당리당략으로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할 우려가 높아 정부 안에 설치하는 것이 좋다. 당연히 관료들과도 거리를 둬야 할 것이고, 정치권과도 거리를 두면서 오직 나라와 국민들만 생각하고 자유로운 토론과 폭넓은 채널과 소통을 통해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을 뛰어넘는 집현전의 설치, 이것은 시대적 요청이며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소준섭

화, 2021/04/27-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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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7일 법무부와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낙태법 개정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2019년 4월 “형법의 낙태죄 조항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해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판결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후속 조처였다. 그런데 정부의 개정안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충실히 따르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판결 이전으로 역행하는 내용이라는 것이 여성들의 반응이다.

이 정부의 근간이 되었던 촛불집회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20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낙태죄 반대 ‘검은 시위’가 시작되었고, 얼마 전까지도 현 정부의 주요 지지층이 20-30대 여성이었기 때문에, 현 정부의 이러한 역행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디지털 성폭력 문제를 제기한 혜화역 시위 등과 관련하여 여론에서 소위 ‘20대 성 대결’ 담론을 확산시켰을 때에도, 현 정부는 주요 지지층이던 젊은 여성들을 나무라며 청년 남성층의 표를 지키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의 집요하고 헌신적인 노력으로 현재 n번방 사건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형성되는 등, 청년 대중 페미니즘이 한국 정치에 미친 효과가 가시화되기도 했다.

한국의 젊은 남성들이 정치적 침묵을 지키는 경향이라면, 젊은 여성들은 정치적 주체화의 모습을 명료하게 보여왔다. 민주주의는 목소리의 정치이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닥친 집합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시민으로, 정치적 주체로 인식되기보다는 오히려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온갖 다양한 불평등이 겹쳐지고 누적되어 생겨나는 복잡한 불평등의 양상 속에서 유독 ‘성 대결’의 논리를 부각하는 언론의 관점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세력은 여성의 목소리를 먼저 탓하는 관성을 보여왔다. 마치 정치세력에 대한 청년 여성의 지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남성 표의 이탈만이 핵심적인 문제인 양 야단법석을 떨어왔다.

어쩌면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발표된 낙태법 개정안 역시, 최근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정부 여당이 생각해낸 묘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또다시 여성을 도덕적으로 문제시함으로써 남성 표를 조금이라도 유지하겠다는, 구태의연할 뿐만 아니라 그 효과도 의심스러운 관성적 태도에 불과하다. 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데 정치는 왜 계속 이런 관성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성 표는 셈을 할 필요도 없는 휴짓조각이라고 보는 것인가, 아니면 낙태 합법화에 대한 여성의 요구가 소수 페미니스트의 허위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한국 인구의 18% 정도를 이루는 천주교 교리로 한국 인구 전체를 설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천주교의 논리: 태아 생명 보호 대 여성의 권리

미국이나 한국은 천주교 신도가 다수를 이루는 사회가 아님에도, 낙태 문제로 가면 천주교 논리가 전면에 등장하는 기현상이 일어난다. 천주교 논리를 방패막이로 삼는 것인지, 아니면 이 문제에서는 천주교 논리가 보편적 가치를 갖는 것인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태아와 그 태아를 임신한 여성의 관계를 적대적인 것으로 설정한다. 낙태는 태아를 죽이는 것이고, 생명은 하나님의 소관이므로 제 몸 안에 있다고 해서 여성이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성의 몸은 하나님이 인간 생명을 만들기 위해 잠시 빌린 그릇에 불과하므로, 여성에게는 주체적 결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개인의 ‘주체적’ 교리해석을 정당화한 개신교의 논리를 급진화한다면, 여성의 주체적 성경해석이 완전히 부정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낙태 문제와 관련해서는 인구의 소수만을 차지하는 천주교의 논리가 늘 전면에 나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발맞춘 근대 정치사상 역시 여성을 합리적 결정능력을 갖는 주체로 설정하지 않았다. 근대적 주체는 가족 속에서 여성을 ‘보호’한다는 남성이고, 여성은 남성의 가부장적 ‘보호’―라고 표현되는 ‘지배’―를 받으며, 사랑으로 가족에 헌신하는 사생활 속에 숨겨진 존재로서 규정되었다. 즉 여성은 사생활 속에서 신분제적으로 얽매인 존재였다. 따라서 여성의 ‘주체적’ 해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여성은 애초부터 주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적 주체는 사생활의 주인이자 공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 즉 가장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유교적 공동체주의에 기반해서 근대 개인주의를 죄악시해온 한국 사회에서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생명체를 낳고 낳는 우주의 중심 섭리로 재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여성의 몸은 ‘밭’이고 생명의 본질인 ‘씨’는 남성의 핏줄이므로, 여성의 몸은 역시 남성의 혈통집단이 잠시 빌린 그릇에 불과하다. 여성은 자기 몸속의 생명에 대해 어떤 결정권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서양 중세 종교였던 천주교든, 서양의 근대적 정치사상이든, 한국의 유교적 공동체주의든 상관없이, 다소 일반적으로 여성은 자기 몸에 대해서조차 주체적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숙명적 존재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유교의 논리가 매우 심각하게 약화하면서, 한국에서도 낙태 문제와 관련해서는 천주교 교리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여성이 이제는 사생활의 주인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공적 행위도 하는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이러한 논리가 유지되어야 하는가? 언뜻 보아도 이것은 모순적이다. 물론 여전히 여성이 가족이나 공적 영역 속에서 신분제적이라고 할 가부장적 규정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의 주체적 결정능력이 과도하게 요구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여성이 성폭력을 당하면 주체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는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한다. 여성이 자녀 돌봄 부담으로 직업 세계에서 남성과 똑같은 방식으로 조직에 몰입하지 못하면, 여성의 개인주의적 태도나 선택이 문제로 지적된다. 여성은 신분제적으로 가부장제에 종속된 상태에서 완전히 풀려나지 못한 비자유인의 처지면서도 동시에 수퍼히어로와 같은 주체성 발휘를 요구받고 있다. 아마도 이처럼 여성에 대한 요구가 모순적이라서, 논리적 정당화가 아닌 ‘종교적’ 가치의 문제로 낙태 문제가 환원되는 경향이 계속될 것이다. 말하자면 천주교의 논리가 ‘세속적’ 생명권의 문제로 번역되면서, 낙태가 태아의 생명 보호 대 여성의 권리 간의 이분법적인 적대관계의 구도 속에서 다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과 태아가 이렇게 적대적 관계일 수밖에 없다면, 여성에게 태아의 성장을 맡기는 것만큼 무책임한 일은 없을 것이다. 생명체의 적에게 생명체를 위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를 여성의 폭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기술발전에 기대어 태아가 여성의 몸에서 성장하는 것을 최대한 단축해야 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출산과 함께 태아를 어머니로부터 격리하여 그때부터 ‘사랑방 교육’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자녀 양육과 돌봄은 여성의 일로 규정되어 있다. 이 모든 모순을 볼 때, 태아와 여성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신념 또는 종교의 영역에 속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가치는 그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 내에서만 유효하다. 대표적으로 다문화주의는 타 문화에 기이하게 보이는 문화도 문화상대주의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그런 가치의 인정은 해당 공동체 내부로 한정된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과연 우리 사회가 그런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인가?’가 된다.

현대 사회에서 가치 공동체는 신분제적 귀속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선택의 문제, 즉 입장과 탈퇴의 문제이다. 출생과 함께 한국 사회에 귀속되었다고 해서, 한국 사회의 특정 공동체 질서로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가 더 이상 균질한 공동체가 아니라 가치 다원화 및 다양성 속에서 분화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법이 어떤 가치와 신념을 공동체적으로 강요한다면 그것은 헌법 질서에 어긋날 뿐이다. 이것이 낙태문제를 가치와 신념의 문제로 규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물론 기능분화한 현대 사회에서도 지켜져야 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헌법적 가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헌범재판소는 낙태 문제에서 가치를 여성인권의 가치로 규정했고, 그것이 태아 생명과 적대적 관계에 있지 않다고 판결했다. 그런데 정부는 다시 근거가 불명확한 유사공동체적 가치―생명권 대 여성 인권의 이분법에서 생명권을 우선시하는―로 회귀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여성 인권과 태아의 생명권은 상호 적대적인가?

근대적 주체 개념에서는 개인과 의존관계가 상호 명확히 분리되고 또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 우리는 구미 사회의 코로나19 대응을 보며, 근대적 주체 개념의 한계를 목도하고 있다.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근대적인 자율적 주체 개념은 코로나19 상황에서는 비현실적인 상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바이러스의 영향력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초반부터 지금까지 개인의 자유 제한을 정당화할 논리가 없어서, 구미에서는 사회적 봉쇄와 봉쇄를 푸는 단순하고 극단적인 정책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감염병에 대한 공포심으로 인해서 개인정보보호 문제가 충분히 공론화되지 못한 채 행정적 조치들이 서둘러 수행되는 등 인권 차원에서 미흡한 부분이 존재한다. 이것은 단순히 공동체주의적 미덕이라고 얼버무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인권 보호의 문제를 더 깊이 고민해야 하듯이, 서구의 근대적 주체 개념에 대한 근본적 재고 역시 필요하다. 근대적 주체 개념, 특히 인간의 의존성을 완전히 삭제하고 완전한 자율성을 강조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세 방향에서 문제 제기가 존재했다. 하나는 공동체주의이다. 여기서는 기능분화한 현대 사회를 일정한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따라서 자칫하면 과거의 위계적 공동체로 회귀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현대의 기능분화한 사회 원리와 공동체적 가치 공유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페미니즘이다. 여기서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공동체주의 역시 비판한다. 공동체주의에서 주장하는 ‘가치의 공유’를 가부장적 가치의 지배와 동일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제3의 관계주의를 주장하지만, 그것의 내용에 대한 청사진을 속 시원하게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생태적 관점에 서 있는 신유물론에서는 근대적 주체가 인간의 특권적 지위를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인간은 지구 위에서 다른 물질 및 생명체와 의존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데, 근대적 주체 개념은 인간을 물질과 무관한 정신적 존재로만 규정한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와 비교해서 페미니즘과 신유물론이 갖는 강점은, 관계적 존재론을 기존의 ‘공동체’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고 아직 그 내용이 결정되지 않은 수행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공동체주의는 경험적인 공동체 개념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위계관계와 권위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한 공동체는 늘 지배와 피지배의 위계관계를 공동체의 가치로 정당화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가부장적이지 않은 공동체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페미니즘에서는 관계성 강조를 공동체주의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생태적 신유물론에서는 가부장적 지배보다는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강조한다.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관계는 명백히 근대적 개인주의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일단 관계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근대적 주체 개념은 임신한 몸을 포괄할 수 없다. 임신이란 여성과 태아가 일정한 물질적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성의 주체적 결정은 태아라는 생명체에 영향을 주고, 태아에 대한 담론적 규정은 여성의 주체적 결정에 영향을 준다. 여성과 태아는 상호관계 속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인간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공동체의 개념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우선, 이들이 한 몸속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공동체 관계가 아니다. 공동체 관계는 물리적으로 분리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태아는 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관계는 공동체보다 생태적 신유물론에서 주장하는 관계성 개념에 훨씬 가깝다. 태아는 생명체이기는 하나 법적 인격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낙태 문제는 상호 적대관계 속에 있는 생명체와 인간 간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 의존관계 속에 있는 생명체와 인간의 문제가 된다. 특히 하나의 몸으로 연결된 상호의존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적 결정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히 자율적인 주체의 결정과 다른 점은, 결정이 단순히 ‘자유’나 ‘권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책임’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해러웨이는 낙태는 서로가 죽여야 하는 생물체들의 세계 속에서 등장하는 죽이기의 문제와 같다고 보았다. 생물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컨대 먹이 등을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것을 피할 수 없는데, 이런 경우의 결정과 낙태의 결정이 유사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와 불가피하게 연결된 타 생명체에게 응답하는 행위로서의 선택이다. 또 생명체 역시 주체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낙태는 이런 상호 응답의 관계 속에서 책임 있는 응답을 하는 것이다. 즉 낙태는 여성이 자신의 요구와 태아의 요구 모두에 응답하는 결정의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여성과 태아의 구체적 관계로부터 결정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어떤 일반적인 해답을 외부로부터 제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생명체가 장차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특수성을 가졌다는 사실 역시 구체적으로 그 몸적인 관계를 체현하는 당사자가 응답할 문제이지, 외부로부터 특정 응답을 강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여성에게 낙태의 자유는 단순히 자율적인 개인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의존 관계 속에서 수행되는 주체적 결정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여성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가치나 제도적 지원 등은 여성의 결정에서 고려되는 조건으로 작용할 뿐, 법적으로 강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 2020/11/05-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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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류사회에 외면당하는 농촌지원 하향운동

예전에는 대학 내부의 양극화 현상이 그리 심하지 않았고, 농촌 출신의 학생들이 상당수를 점했다. 이들은 자신의 고향의 가족, 친척, 이웃의 농민들이 사회적 약자이고, 농업과 농촌이 쇠퇴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삼농이 심각한 사회문제임을 알고, 대학내의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농촌 지원 동아리를 조직했다. 그때, 마침 중앙이 삼농문제를 중대 국가 전략으로 받아들이는 역사적 전환을 맞아, 동시에 우리는 신향촌건설을 통해, 농민위주로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자발적 동아리 활동을 통해, 하향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두가지 과업이 신향촌건설의 키가 된다. 하나는 농민조직을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학생 동아리를 통해 농촌지원활동에 참여하게 하는 것. 이 두가지가 시대배경하에 만들어진 신향촌건설 운동의 좌우 방향타였다.

2000년에 나는 농업부에서 국무원체제개혁사무소國務院體改辦로 자리를 옮겨, 중국경제체제개혁잡지사의 사장겸 총편집인 역할을 맡게 됐다. 나는 조직의 법인대표 신분을 활용하고 ‘중국개혁’이라는 매체의 플랫폼을 이용하여, 100년전 진행됐던 향촌건설을 부흥시키게 된다. 당시 삼농문제에서 내가 관심을 갖은 것은, 역시 주로 농민조직화와 청년농촌지원의 두가지 업무였고, 잡지사내에 농촌지원연구를 하는 소조직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각지의, 향촌건설사업에 뜻을 둔,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들게 된다. 그중에는 톈진과학기술대학에서 온 류샹보劉相波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역자 주 – 농민들이 주로 그를 부르던 류라오실劉老石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대학생농촌지원동아리를 만들고, 이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실제 활동에  힘을 많이 기울였다. 그와 함께 협력한 치우졘셩邱建生이 있었는데, 그는 주로 농촌에서 농민이 참가하는 커뮤니티대학社區大學(역자 주 – 대만에서 시작된 지역사회운동으로, 대만과 교류가 많은 푸졘성福建 출신인 치우졘셩 등이 이를 참고하여 푸졘성의 농촌마을에서 실험적으로 운영하였다), 협동조합 만들기에 힘을 쏟았다. 그들이 잡지사 농촌지원연구팀의 이 두가지 방면의 실체 책임자였다. 민국시절 량슈밍梁漱溟, 옌양추晏陽初, 루쭤푸盧作孚와 같은 선배들의 일을 이어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나중에 류샹보는 량슈밍향촌건설센터를 만들었고, 치우졘셩은 옌양추평민교육사상연구회를 만들었다.

<그림 8> 2004년 12월, 량슈밍 향촌건설센터가 베이징에서 정식으로 설립돼, 중국개혁 잡지사의 대학생 농촌지원연구 프로젝트를 이어 받게 된다. 전국 대학생농촌지원연구 십주년 토론회 겸 량슈밍향촌건설센터 설립5주년 행사(2009년)에서, 안휘성 푸양남탕흥농협동조합 발기인 량윈뺘오가 발언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말해, 우리의 프로젝트와 당시 주류 사회가 추진하던 시장화개혁은 정반대 방향이었다. 소위 당시의 ‘경제체제개혁’은, 시장화를 통해, 불가피하게 빈부격차를 확대할 수 밖에 없다. 또 시장화개혁은 필연적으로 시장의 조절 위기현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시장경제는 어떻게 위기에 빠지는가? 사회적 약자를 돕는 구조를 파괴하고, 빈부격차를 확대시키기만 할 뿐, 좁히지 못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양극화이다. 그래서, 중국은 이런 개혁과정에서 주로 도농이원화 구조를 통해, 명확한 도농간의 격차를 초래했고, 이는 객관적으로 드러난 결과이다. 당시 나는 월러스타인의 발언을 빌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행복한 도시는 다 엇비슷하다. 하지만 불행한 농촌은 각양각색의 불행한 양태를 보인다. “ 지금 생각해도 도농이원구조의 폐해를 드러낸 적절한 표현이다.

도시에 대량의 자본이 집중되면서, 그 효과로 도시 수입은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농촌의 세가지 생산요소 유출현상이 나타난다. 자금, 토지, 노동력 이 삼대 기본요소가 모두 장기적으로 대규모로 농촌에서 빠져나가고, 사람들은 농촌을 외면하게 된다. 어떤 영역이든, 삼대 요소가 장기적으로 빠져 나가면, 쇠락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종합적인 삼농문제를 간과하고, 주로 시장경쟁력을 중심으로 농업문제만을 강조하다 보면, 당연히 농민의 빈곤화, 농촌의 쇠퇴, 농업의 약화로 이어진다.

이것은 객관적 결과이고, 시장화를 통해 나타나게 됐다. 그러므로, 시장화 개혁을 주장하는 국무원체제개혁사무소의 목소리가 주류가 되어, 우리가 강조하는 삼농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일 이를 받아들이면, 자본이 도시와 산업으로 집중화 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개발 속도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발전주의가 주류 개혁이론과 개혁정책의 신념이 돼, 일반적으로 우리의 삼농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내가 주도하는 잡지사가 삼농 문제에 주목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당시의 주류 시장화개혁노선과 점차 갈등을 빚게 된다. 결과적으로 나도 그들의 눈밖에서 벗어나 주류 체제안에서 밀려나게 됐다.

<그림 9> 대학생 농촌지원활동 참가자들의 모습. 2000년 이래, 량슈밍향촌건설센터와 전국 240여개 농촌지원 관련 동아리들은 매우 긴밀하게 협력하였다. 10년에 걸쳐 전국 200여개 대학 300여개의 동아리를 훈련시켰다.

그외에도, 당시 전국의 매체가 시장화 개혁에 발맞추어, 독립 재정을 요구 받았다. 거기에다 벌어들인 소득중 일부는 다시 주관 기관에 관리비로 납부해야 했다. 관영 잡지사임에도 국가에서 전혀 재정지원을 하지 않았고, 스스로 돈을 벌어 살림살이를 꾸려야 했다. 경영 독립을 위해서는 결국 광고가 필요하고, 기업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다. 즉, 자본가의 입맞에 맞는 기사를 생산해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백명의 잡지사 직원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나? 잡지사 내부의 편집자들과 기자들도 점차 농민 편에 서고자 하는 우리들의 논조에 반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우리 향촌건설 자원활동가들은 그렇게 다시 적수공권 상태로 시작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처음에는 잡지사의 자원을 활용했으나, 약자인 농민 편에 서려는 우리의 움직임은, 기업가들과 농민의 권익 보호 문제로 시끄러워지는 것을 싫어하는 지방정부의 반감을 샀다. 잡지사는 더 이상 광고를 실을 수 없게 됐고, 자금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됐다.

내가 잡지사에서 향촌건설 운동을 진행한 결과로, 외부 주류 세력의 반발을 샀고, 잡지 내부 인력의 밥그릇 걱정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잡지사 법인 대표였으나,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염려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대표직을 사임하게 됐다. 그렇게 향촌건설은 다시 제도권에서 밀려 났다.

잡지사에 재직한 2001년부터 2004년 사이 대략 3년간, 향촌건설은 어쨌든 백년후 새출발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그후에 우리는 사회적 약자가 겪는 어려움을 스스로 체감할 수도 있었다. 2004년 전후로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잡지사에서 쫓겨 나면서, 의탁을 할 기관이 따로 없어졌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 다행히도 삼년간, 우리는 이미 전국 각지에서 상당수의 학생동아리를 키워냈고, 십여개의 농민협동조합을 만들어냈다. 대학생들은 청년 자원활동가로서 농촌으로 가서, 농민들과 협력하고 있었고,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어, 우리는 객관적인 존재감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렇게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류샹보의 량슈밍향촌건설센터는 둥지를 잃었음에도 나름의 생존방법을 모색해 나갈 수 있었다. 당시 우리는 허베이河北성 띵定현의 자이청翟城마을에 옌양추향촌건설학교를 만들고, 치우졘셩의 옌양추평민교육연구회가 이곳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됐다. 주로 마을안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림 10> 2003년 7월19일 옌양추향촌건설학원이 중국향촌건설의 발원지인 허베이성 띵현 자이청마을에 설립됐다. 이 학교는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 교육’이라는 원칙을 지속할 수 있었고, 농민협동조합, 생태농업, 생태건축 등의 영역에서 실천과 교육, 연구를 실행했다.

량슈밍 향촌건설센터의 주업무는 대학생들이 교육에 참가하고 농촌으로 가서 지원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졌지만, 당시 사무실을 빌릴 여유가 없었고,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테이블을 놓아 둘 공간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베이징 교외지역에 자리를 잡았는데, 초기에는 안정되기가 힘들었지만, 이후에 후원기관들이 조금씩 생겨나서, 프로젝트 경비지원을 받고, 청년들이 장기적으로 농촌에서 실천하는 것을 지원하도록 자리잡았다. 이것이 농촌인재육성계획, 줄여서 인재계획이라고 부르는 프로젝트이고, 청년 자원활동가를 매년 농촌으로 보내서 일하게 한다.

이처럼, 당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나와 류샹보 모두, 이 운동이 ‘신시대상산하향운동’으로 발전해서, 지금과 같은 큰 사회적 흐름과 영향을 만들어 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4. 제도권 교육의 전복 

청년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내려가서 자원활동가로 일하도록 독려하면서, 우선 이들 지식인들의 지식체계 자체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다. 이들은 과연 농민들과 두 손을 맞잡고 협력할 수 있을 것인가 ? 이 문제는 청년, 학생들 혹은 교사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난 백년간의 산업화 역사의 유산이다. 산업화 시대의 교육은, 산업화의 요구에 부응할 수 밖에 없다.

산업화시대의 요구란 무엇인가 ? 내가 좋아하는 비유가 있다. 아마 채플린의 모던타임스란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영화속에서 생기넘치던 채플린이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는 기계에 맞춰, 표준화된 동작을 취하게 된다. 이 희극은 사람을 기계로 만드는 것을 비판하는데, 산업화 시대의 교육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기계화에 다름아니다.

소위 현대 교육은, 인류를 인력자원으로 보고, 인력자본의 도구로 삼는다.

<그림 11> 제1회 전국대학생 농촌지원연구 교류및 토론회 사진 (2004년 1월, 베이징) 2016년까지 베이징 량슈밍향촌건설센터는 23회에 걸친 대학생 농촌지원연구 교류회를 열었고, 누계 3,500여명의 우수한 청년 자원활동가를 키워냈다.

현대교육에서 중요한 이론중 하나가 교육을 도구로 삼는다는 것이다. 인력자원을 성인노동력자본으로 전환시키는 도구이다. 그렇다면 성인노동력자본이란 무엇인가? 산업자본에 협력하고, 산업자본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교육체계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의 기타속성, 사회속성, 자연속성 등을 최대한 약화시키고, 산업자본이 요구하는 인력자본 속성만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교육이 훈련시킨 청년학생의 지식구조는 근본적으로 농촌의 다원화된 사회적 존재 형성에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농촌은 지역마다 특성이 상당히 다르고 농업은 자연, 자원, 기후, 지리 등의 조건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서, 농업 지식은 근본적으로 로컬화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천차만별의 농업에 통일된 표준 지식체계를 적용할 수 없다. 그래서 미국중심의 제도권 농업학문지식을 참고하는 것이 현재 큰 곤란을 겪고 있다. 젊은이들이 농업관련 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꺼리지만, 학문지식을 표준화하면 할수록, 이렇게 습득한 지식을 농촌에 가서 사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농촌은 다양성이 기본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르침과 배움간의 대립과 갈등이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대해, 학생들이나 학교를 탓할 수 없다. 그보다는, 산업화를 추구하면서 하나의 표준화된 지식체계를 좇아온 과거 백년 역사를 탓해야 한다. 중고등학교 교육도, 초등학교도 모두 표준화된 제도권 교재를 사용하고, 그것도 전국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교재를 사용한다. 이곳은 고산지역이고, 저곳은 비옥한 흑토, 또 여기는 붉은 흑, 저기는 황토, 이곳은 석회암 지역, 저곳은 해안가, 임업지대, 초원, 습지 이렇게 지역마다 로컬한 지식을 생산해야 하는데, 현재의 교육체계는 당연히 이의 실현이 불가능하다.

<그림 12> 제5회 전국농민협동조합조직포럼 및 량슈밍향촌건설센터 십주년 기념 촬영 (2015년 전국농업전시관).

그렇게, 우리가 청년지식인들을 조직해서 농촌에 갔을 때,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지식이 향토사회속에서 실천을 하려할 때, 무용지물임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첫번째 문제이고,

두번째 문제는, 90년대 후반부터 소위 교육 대약진을 시도하면서 이루어진 교육의 산업화이다. 애당초 원인은 당시의 생산과잉문제였다. 불경기속에, 대량의 청년들이 취업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정부가 정원을 늘려, 홍수예방을 위해 댐에 물을 고수위로 저장하듯, 잠재적 취업예비군을 학교에 잠시 머물게 했다. 당시 대학이 정원을 늘리기 위한 좋은 명분이 됐다. 그래서 과거의 전문대학이나, 직업훈련학교가 4년제 대학으로 승격이 됐다. 이러한 학교들은 4년제 대학으로서 학생들을 교육시킬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이 돼버렸다. 동시에 정부가 민간이 투자한 사립대학을 설립할 것을 독려했다. 이러한 사립대학들은 교육 산업화를 통해, 이윤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우후죽순처럼 학교가 생겨났다. 하지만, 당시에 준비된 교수 인원이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고등교육의 질은 저하하면서, 학비는 증가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또, 저소득층인 농민과 노동자 자녀들의 진학률이 떨어졌다. 학력이 낮아서 다시 경제적 하층민이 양산되는 사회불평등과 이원화 구조가 심화됐다.

현재 중국에는 수천만명의 대학생이 있다. 매년 7~8백만명이 졸업하기 때문에 세계 최대규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학생들이 졸업하자마자 실업자가 된다. 특히, 비명문대학 학생들이 그러하다. 이런 학생들은, 명문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함으로써, ‘신분상승’을 꾀하기도 한다. 하지만, 명문대학들은 이들에게 기회를 잘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입학력고사가 평생을 좌우하게 된다. 이런 시스템은 반드시 정부의 제도권 교육을 통해서 만들어 낼 수 있다. 엄격한 표준화 교육이 전제가 된다. 이렇게 중국의 학생들은 암기에 능한 사람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 갈 수 있다. 하지만, 혁신능력은 어느정도, 남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질, 또는,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하는데, 이런 학생들은 이렇게 융통성없는 과정을 거치는 제도권 교육에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되면, 교육계는 내부적으로 매우 심한 배타성을 지니게 된다. 교육계 내부에 양극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최고 명문대학에 정말로 우수한 인재가 입학할 수 있을까 ? 그저 암기능력이 좋은 학생이 훌륭한 학생인가 ?

그리고 중국의 대학교육은 90년대부터 서방의 교육 체제를 그대로 카피해서 사용하고 있다. 특히 대학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교과서를 그대로 수입, 번역할 것을 요구한다. 심지어 일본이나 한국, 유럽의 학문적 성과도 참고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중국이 미국과 같은 사회인가 ? 교육 시스템의 변화는 이미 사회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고, 심지어는 국제사회에서도 비판을 받는다.

다시 정리해보자, 모두가 중국 교육이 제대로 된 인재를 배출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왜일까? 첫째, 산업화와 관련이 있다. 표준화된 제도권 교육만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두번째,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원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교육산업화가 초래한 악성 부채와 교육비 증가가 만들어낸 매우 복잡한 난맥상을 아직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제도권 교육으로 배운 표준화된 지식을 들고 농촌으로 갈 수 있을까? 농민들과 쉽게 협력할 수  있을까? 그래서 량슈밍향촌건설센터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후에는, 매년 농촌으로 갈 인재를 육성하는 계획을 실행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갈수록, 이런 고학력 청년들이 농민, 농촌, 농업과 어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삼농의 객관적 필요와 고등교육 시스템이 배출한 인재의 능력 사이에는 상당한 갭이 존재한다.

이 일을 수행하면서, 재미있는 일도 많이 겪었다. 많은 기업가들이 내게 말한다. “원교수님, 이런 식으로 배출된 인재들이라면 얼마든지 저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량슈밍 향촌건설 센터에서 지금까지 2백명이 넘는 인재를 육성했지만, 실제 수요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요소가 급진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젊은이들을 농촌으로 보낼 때, 우선 대학에서 배운 쓸모없는 지식은 한켠으로 치워두라고 요구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당신들이 머리에 금테두르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내가 명색이 대학생인데라며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마라. 사실 머리 속의 지식들은 쓸모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 발밑의 뜨거운 대지가 요구하는, 향촌생활에 적합한 것들이 아니다. 역으로 청년들이 일단 삼농의 요구에 맞출 수 있게 되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 특권의식 따위는 내려놓고 농촌에 가서, 농민들과 함께 뒹굴면서 일년을 보내고 나면, 무슨 일에 임하든,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림 13> 농촌지속가능발전 인재계획은 량슈밍향촌건설센터가 대학생 농촌지원조사연구내용으로 향촌건설 운동에 참가하는 청년들을 일년간 지원하게 된다. 2005년부터 매년 10여명 이상의 학생들이 참가하고있다. 제1기 참가자들 교육과정 수료 (인민대학교).

이런 각도로 보자면, 량슈밍향촌건설센터의 농촌우수인재계획은 실질적으로 현재의 교육산업화가 만든 모순과 형식주의적인 제도권 교육체제가 만든 폐해에 대해서 일종의 돌파구를 여는 혁신을 일으킨 셈이다. 상대적으로 완전히 서구화되고, 표준화된 지식으로 제도권 주입식 방법을 통해 인력자본화한 교육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혁신이다. 오늘날 모두가 혁신에 참여하는 시대에, 정말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급진적 혁신이다. 인재계획은 사회의 광범위한 수요에 부응하는 인재를 배출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진정한 교육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인재계획은 실천, 중국의 현실에 발을 딛고 농민과 결합된 ‘일동양애’형 인재의 교육방식이다.

 

5. 탈엘리트주의의 향촌건설 

적수공권으로, 대사를 치르기 위해 나설 때, 균형을 잡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성인이 되고, 이렇게 많은 일을 벌이고 다닐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사실, 나서고 싶지도 않았다. 만일 한 사업의 성패가 특정인 한명에게 달려 있다면, 이것은 매우 리스크가 큰 상황이다. 거버넌스 이론에 의하면, 이 사람을 제거해야 한다. 아니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힘들다. 시작할 때부터, 매우 명확한 집단적 책임의식이 필요하다. 수십년간 이렇게 많은 청년학생들을 동원해서 농촌의 삼농사업에 참여하게 하면서, 늘 생각해온 것이 있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일이 아니라, 대중의 일이라는 것이다.

최근 강연에서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향촌건설의 큰 특징중 하나가 탈엘리트주의이다. 나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 한다. 우리 세대는 수많은 역사의 질곡을 경험했고, 적지 않게 고생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 남아 사회적 발언권을 갖게 된 사람들은 5%에 불과하다. 이중에는 대학에 진학한 이들도 있고, 외국으로 간 이들도 있고, 기업가가 되는 등, 모두 중국 사회의 엘리트가 됐다. 하지만, 우리는 나머지 95%를 잊지 말아야 한다. 대다수의 동년배 지식인 청년들이 하방의 경험이 있다. 함께 대중운동에 참여했고, 나중에 도시로 돌아와서 일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나중에 정리해고를 당한 이들은, 저소득층으로 전락했다. 이게 95%가 겪은 일들이다. 승자가 된 5%는 주위의 95%를 잊어서는 안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 95%에 농촌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인 소망으로 말하자면, 탈엘리트주의 사회를 실현하고 싶다. 이를 실현할 여유가 없고 능력과 노력이 부족한 것에 탄식할 뿐이다. 나는 주위의 훌륭한 인재들에도 못미치고, 공부도 부족하다. 그래서 영원히 분투할 수 밖에 없다.

<그림 14> “즐겁게 생활하며 이상을 좇는다” — 량슈밍향촌건설센터 신청년공사 웹자보.

이 과정에서 나는 탈엘리트주의를 자각하게 됐고, 내 주위의 95%를 잊지 않게 됐다, 역으로 5%의 주류 엘리트 사상을 좇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의 사상을 인정하면, 세상의 재화를 인정해 버리게 된다. 이 부는, 엘리트 그룹이 사회를 이끌며 만들어낸 수익이다. 당연히 엘리트들이 독점하고 엘리트들이 분배한다. 그리고 엘리트들은 2차분배를 통해 남은 몫으로 약자를 지원한다. 이것이 제도의 역할이며 주류적 사고이다. 나는 여기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우리 엘리트가 승자가 됐지만, 이러한 방법밖에는 없을까? 더 공평하고 정의로운 방법, 공정한 방법이 없을까 ? 95%가 함께 누려야 할 부분을 엘리트가 독점하고, 그저 나머지를 다시 재분배해야 하나 ?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기에 대중민주주의를 주장한다. 일종의 다원성 공생 사회이다. 일종의 지속가능한 발전 방식이고, 인류의 생계와 생태가 결합된 생태문명이다. 이는 현재의 주류 사상과는 구별되는 대안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향촌건설 사상이 일종의 탈급진화(역자 주 – 저자는, 서구적 산업화를 급진화로 표현한다. 그의 대표 저서 “100년의 급진”은 이를 뜻한다.)를 추구하게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옛 문명의 계승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삼성오신三省吾身, 음양지도陰陽之道, 상선약수上善若水와 같은 사상을 공부하는 것이다. 일단 탈엘리트주의를 받아들이면, 자연히 상대적으로 생태환경과 조화하면서, 지속가능한 포용적 발전사상도 인정하게 된다.

나는 성악설을 믿지 않는다. 사회에는 비록 수많은 악이 존재하지만, 사람됨을 갖춘다는 것은, 성악설을 믿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상선약수를 실천할 수 있다. 나쁜 짓은 사소한 일이라도 해서는 안되고, 선한 일은 사소한 것이라도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한걸음 한걸음 실현해 나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다… “세계는 우리의 것이고, 일을 이뤄내기 위해 우리 모두가 서로 의지해야 한다.”

 

김유익

목, 2020/11/12-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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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의회 선배들은 지금 국회와 달랐다

1948년 8월 25일 오전 9시 반, 제헌의회 제48차 본회의가 열려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비롯한 법안을 논의하였다. 특별법기초위원회 김웅진 위원장이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제목부터 시작하여 제1조, 제2조, 제3조……. 각 조문마다 차례차례 낭독하고 이어 모든 의원들이 발언권을 얻어 논의하고 토론하여 마지막에 조문에 대한 투표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가령 제2조 조문이 투표 끝에 결정되기까지는 2시간도 넘게 기나긴 논의가 이어졌다. 그러나 모든 의원들이 활발하게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하였다. 그러고도 시간이 모자라 다음날 다시 동일한 시각에 속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진실은 힘이 강하다

유진홍 의원 지금 제2조를 가지고 벌써 두 시간이나 토론했습니다. 법원 원 정신이라는 것은 현행범 범죄자의 징계요, 장래를 경계하는 것이 법의 원 정신입니다.

….중략….

김장열 의원 제2조 말단에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는 문구를 「재산 및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 이상을 몰수한다」로 수정하는 것을 동의합니다.

…중략….

이석주 의원 2조도 역시 1조와 같이 준엄한 처벌을 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정기를 살리지 못할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1조는 매국적이고 2조는 매국적이 아니라고 하지만 수작(受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에 와서 그 재산을 반만큼 몰수해서 그 자들을 그대로 둔다면 그 자들이 그 재산의 위력을 가지고서 우리 조선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독립을 방해한 그 효력이 얼마나 컸는지 생각해보면 앞으로 그 재산의 힘을 가지고 무슨 장난이 있을지 그것을 생각해보십시요. 그러므로 그 재산을 2분지 1 이상을 몰수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수정안을 찬성합니다.

부의장 김동원 가부 묻겠습니다. 이 동의를 잠깐 낭독할텐데 자세히 듣고 표결해주십시오.

(기록원 낭독 – 제2조 중 ‘재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 이상’으로 수정할 것)

부의장 김동원 2조에 대한 수정안입니다. 수정안을 낭독해드렸는데 거기 대해 묻겠습니다.

(거수 표결)

재석 145, 가가 88, 부가 15, 그 수정안은 가결되었습니다.

이석 의원 제2조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의장 김동원 제2조는 전부 수정 통과되었습니다.

이석 의원 아닙니다. 일부만 수정되었지 전체 수정된 것이 아닙니다.

부의장 김동원 그러면 지금 수정 동의한 이 말씀하세요. 제2조는 전체 수정한 것인지 전부 수정한 것인지 어떻게 되었습니까?

김장열 의원 그 재산권 전체를 말한 것입니다.

부의장 김동원 제3조를 낭독할 테니까 들으세요.

「일본 치하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수정안이 있습니다. 김명동 의원 외 12인의 수정안이 있습니다. 나와 말씀해주시오.

 

이날 특별법기초위원회 김웅진 위원장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제목부터 시작해 제1조, 제2조, 제3조, 각 조문을 차례차례 낭독했다. 이어 수많은 의원이 발언권을 얻어 논의하고, 토론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조문에 대한 투표를 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제2조 조문이 투표 끝에 결정되기까지는 2시간도 넘는 기나긴 논의가 진행됐다. 그 속에서 의원들은 활발하게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모자라 다음날 같은 시각에 본회의를 속개하도록 했다.

지금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하지만 이미 ‘선배 국회의원’들은 스스로 법안을 검토하고 토론하고 결정했다. 지금의 국회의원들은 선배들을 본받아 대의권 그리고 입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재 입법시스템으로는 요원하다는 점이다.

 

의원이 직접 검토해야 협치도 가능하다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공무원이 ‘검토’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우리 국회밖에 없다. 어느 나라 의회든 당연히 국회의원이 검토하고 토론하고 심사한다. 그것이 곧 국회의 본업이고, 또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이다.

위의 표는 2018년 6월 27일 진행된 독일연방의회 법사위 제19차 회의 일정 공지사항이다. 원래 독일의회에서 위원회 법안심의는 비공개이지만 중요사안에 대한 공청회는 공개된다. 이 회의는 낙태광고금지제한에 관한 형법개정법안 공청회를 겸한 법안심의회의다.

a) 법안은 자유민주당*FDP가 발의한 법안이고, b) 법안은 좌파당*Linke가 발의한 법안이다. 옆의 빨간 박스에서 Berichterstatter/in는 검토보고자를 의미한다. Abg.는 의원(Abgeordnete/r)의 약자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검토보고는 각 당의 의원들이 수행하고 있다. 의원명은 기민당/기사당, 사민당, 대안독일당, 자민당, 좌파당, 녹색당의 순서다.【1】

 

협치, 과연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을까?

한국 정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협치’를 말하고 주문한다. 그러나 ‘협치’란 그저 단순히 당사자들과 참여자들이 생각을 바꾼다고 이뤄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잠시 우리에게 ‘상식’으로 굳어져버린 방식을 바꿔 생각해보자. 바로 이 지점에서 국회의 본령인 입법과정 그 자체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

우리의 국회 구조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일하는 시간은 없고, 싸우는 시간은 많다. 그러나 만약 우리 국회가 독일 의회의 전문 검토보고 의원처럼 입법과정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즉 법안의 발의부터 검토 그리고 심의와 의결까지 다른 교섭단체 의원들과 함께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접촉하고 논의하게 된다면 사정은 크게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의원들은 다른 정당의 소속 의원들과도 자연스럽게 논의하고 토론하며 필연적으로 상호 소통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활동은 일상적이고 상시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우리가 말하는 ‘협치’도 충분히 가능해질 수 있다.

외화내빈, 빛 좋은 개살구로 갈수록 문제가 되고 있는 법안발의 남발 현상 역시 다른 나라 의회의 경우처럼 당연히 정당 내부에서 의원들과 당 소속 정책전문위원의 논의를 거쳐 충분히 사전 검토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법안발의가 남발되어 상임위원회가 한 차례 회를 열 때마다 법안이 수십, 수백 건 첩첩산중 쌓임으로써 정작 필수불가결한 법안에 대한 심의와 의결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기현상도 방지할 수 있다.

 

중국의 전국인대도 법안 검토는 대표가 직접 한다

그렇다면 왜 국회의원들은 국회 전문위원 검토보고의 문제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먼저 그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특히 초선의원의 경우에는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 고칠 의사는 별로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문제점을 알고서도 눈을 감는 것이다.

의원들은 비록 자신들 대신 공무원들이 법안을 검토하는 것이 자신의 권한을 크게 축소, 훼손시키는 것이지만, 우선 사람들이 전혀 모르고 있고 또 실제 그 일을 자기가 직접 하려면 시간상 능력상 힘들고 귀찮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사실 본심은 안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 하는 척만 하면서(더구나 사람들은 대개 여기에 속아 넘어간다!) 실제로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결국 모두 공무원에게 떠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입만 열면 ‘독재국가’라면서 단칼에 무시하는 중국에는 전국인대(全國人代)【2】, 즉 전국인민대표 조직 중에 ‘전문위원회’라는 위원회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처럼 국회 공무원이 담당하는 그러한 전문위원회가 아니다. 바로 대표자, 즉 전국인민대표 중에서 전문가 출신의 대표들로 구성된, 명실상부한 전문위원회이다.

이제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무능한 그리고 국민에게 봉사하고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할 의지가 없는 사람이 처음부터 국회의원이 되고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국회가 되어야 한다.

 

【1】 수년 전에 필자가 한 인터넷매체에 국회 검토보고제를 비롯해 기고문을 연재하고 있을 때 국회사무처의 한 간부가 해당 매체에 이메일을 보내 필자를 ‘비방’하면서 필자의 기고 게재 중단을 종용한 일이 있었다. 그 간부는 문제의 이메일에서 국회의원이 검토보고를 직접 수행해야 한다는 필자의 글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전문위원의 법안에 대한 검토보고제도를 문제시하면서 법안을 제출한 국회의원이 검토보고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검토보고제도는 그 법안의 타당성 여부, 문제점, 심사방향 등을 검토하여 보고하는 것인데, 이를 법안을 제출한 사람이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검토보고제도의 취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타인에 대한 명예훼손과 언론자유에 대한 심각한 훼손을 차치하더라도, 문장 자체부터 전혀 다듬어지지 않는 등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그의 주장은 의회에서의 검토보고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인식 결여, 현재의 관행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2】 여기 ‘전국인대’는 흔히 ‘전인대’로 칭해지지만, 중국에서는 반드시 ‘전국인대’라 부른다. 명칭은 관계자들의 시각과 요구에 따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수, 2020/08/05-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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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무력화’는 역대 군사정권의 최대 관심사였다

우리 현대사에서 국회는 역대 독재정권의 눈엣가시였다.

국회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허수아비로 만들고자하는 시도는 이승만 정부 때부터 국회프락치 사건 등을 비롯하여 지속적으로 존재해왔고, 그 움직임은 박정희 · 전두환 군사정권에 들어서서 더욱 강화되었다. 실제 이들 군사정권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국회였다. 1961년의 5·16 쿠데타를 비롯하여 1972년 유신 선포 그리고 1980년 전두환의 5·17 계엄확대는 모두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를 선포하면서 일차적으로 국회의 움직임을 일체 봉쇄하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특히 유신헌법에 의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이른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통령 간선제로 변경하였다. 또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유정회(유신정우회)’라는 이름으로 임명하고 대통령이 헌법의 기본권을 중단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 등을 시행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국회 해산권과 모든 법관의 임명권을 대통령이 가지게 되는 등 사실상 대통령 1인이 혼자서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대통령 임기도 6년으로 연장하고 중임 및 연임 제한도 철폐하여 사실상 종신집권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국회의 국정감사와 국정조사를 폐지하고 대통령에게 헌법개정권과 국회 해산권도 부여하였다. 나아가 유신 헌법은 대통령을 행정, 입법, 사법의 삼부(三府) 위에 군림하는 ‘국가 영도자’로서의 ‘국가 원수(元首)’로 규정하였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충실한 계승자로서 국회 권한의 약화라는 과제는 지속적으로 정권의 최대 관심사였고 제1의 역점 사업이었다.

 

오늘 우리 국회 난맥상의 뿌리는 군사정권의 국회 왜곡에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지금의 국회는 독재 권력, 더욱 구체적으로는 군사정권이 얽어놓은 족쇄에 포획되어 있다.

실제 초선으로 여의도에 입성하면 처음 몇 달 동안은 인사할 곳도 많고 보고도 많이 받아야 하고 가볼 곳도 많고 등등…… 이렇게 정신없이 지내다가 1년쯤 되어야 비로소 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상임위원회의 업무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상임위에서 나름 성실하게 법안을 심사하여 의결해봤자 ‘제2원(院)’으로 불리는 법사위에서 백년하청 묶어 놓을 수도 있고, 때로는 아예 내용까지 수정해버린다. 의원 위에 의원 있고, 상임위 위에 법사위 있는 꼴이다.

법사위의 이러한 ‘제2원’으로서의 높은 위상은 박정희 유신정권에서 완성되었다. 또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되어 막 상임위 일이 손에 잡힌다고 느끼는 그 순간, 이제 상임위를 바꿔야 한다. 의장 역시 임기 2년이다. 사실 2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금방 흘러가버린다. 2년 임기란 실제 ‘의식’과 행사만 치르다가 보내기 딱 좋은 기간이다. 세계의 어느 의회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상임위 위원의 2년 임기제는 이승만 정권 때부터 시작되었다.

한편 매년 10월이면 국감, 즉 국정감사의 계절이다.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국감이지만, 의원 입장에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국감 두 달 동안 그리고 국감 준비에 한두 달을 꼬박 매달려야 한다. 그런데 세계 어느 의회에도 국정감사 제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국회의원에게 입법이란 문자 그대로 본업이다. 세계 어느 나라 의회든 이 원칙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입법권한이야말로 의회와 의원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국회에서는 의원이 법안을 발의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의원이 그 법안을 충실하게 제정하기 위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보려고 해도 실제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법률에 의해, 구체적으로 국회법의 규정에 의해, 법안에 대한 모든 검토 권한이 모조리 국회 공무원들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가히 ‘비(非)의회적 제도’ 아니 ‘반의회적 제도’라 불러도 결코 지나침이 없다. 이러한 ‘비정상적’ 제도는 당연히 세계 어느 나라 의회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국회 공무원에 법안 검토 권한을 부여한’ 오늘의 이러한 제도는 국회를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고 통제하고자 한 박정희, 전두환 독재 권력의 의도가 그대로 관철된 것이다.

그래서 국회란 외부에서 보면 할 일이 너무 많아 보이지만, 정작 입법이라는 본업과 관련해서는 할 수 있는 게 실제로 별로 없는 상황이다.

이렇게 하여 결국 국회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으로 전락해버렸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국회는 군사독재 권력이 의도한 바대로 족쇄로 채워져 있는 곳이다.

 

군사정권이 남긴 국회적폐의 청산이 국회개혁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지금 국회 개혁의 핵심은 역대 군사정권이 국회를 무력화하고 통제하기 위해 왜곡시킨 제도적 족쇄 장치들을 철저하게 해체하는 데 있다. 그 제도적 족쇄 장치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큰 문제는 이제까지 누차 강조했듯 의회제도의 기본과 원칙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교란시키고 있는 국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 제도이다. 이외에도 국회 운영상의 족쇄 정치인 법사위의 체계ㆍ자구 심사 권한, 상임위 위원의 2년 임기제도와 국회의장 2년 임기제 그리고 국감제도 등도 모두 군사독재가 남긴 적폐들이다.

이제 군사정권이 왜곡시킨 이러한 비정상적인 제도들을 폐지하고 개혁함으로써 의회제도의 보편적 규범을 복원시켜내야 한다. 그것이 곧 국회가 진정 의회다운 의회로서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우리 국회도 불신의 깊은 늪을 벗어나 비로소 국민의 신뢰를 획득할 수 있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권력이 왜곡시켜놓은 ‘국회 적폐’를 청산하는 것은 국회 개혁의 시작점이자 그 본질이며 핵심이다.

 

소준섭

화, 2020/08/18-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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