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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추념식장에서 모두를 통곡하게 만든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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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추념식장에서 모두를 통곡하게 만든 대학생

익명 (미확인) | 목, 2019/04/04- 13:48

4.3 유족 김연옥 할머니의 손녀가 전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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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1주년 4.3 추념식장을 울음바다로 만든 4.3유족 사연의 주인공인 김연옥 할머니(78)가 자신의 기구했던 4.3 경험담을 추념식장에서 발표한 손녀 정향신 씨의 손을 붙잡고 한참을 오열했다.ⓒ 제주의소리

“1948년 일곱살이었던 아이는 부모님 손을 잡고 불타는 마을을 떠나 매일 밤마다 이 굴 저 굴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눈이 많이 내린 터라 맨발이 참 시렸습니다. 끝내 잡혀간 곳은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 수용소였습니다. 주먹밥을 하나 먹었을까.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랑 애기였던 남동생까지 군인들이 다 끌고 나갔는데, 마지막 끌려가는 아버지가 눈앞에서 발로 밟히고 몽둥이에 맞는 걸 본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요. 순간 누군가가 확 잡아챘고, 아이는 그만 돌담에 머리를 부딪쳐서 기절을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혼자 깨어나 살아남은 그 아이의 이름은 김·연·옥.입니다.”

일순간 추념식장은 어느 유족의 사연으로 온통 울음바다가 됐다. 제주에 사는 어느 여대생이 들려준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는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4.3 71주년 추념식장을 찾은 모든 이들의 눈과 가슴을 흥건히 적셨다. 유족이든 아니든, 제주도민이든 아니든, 귀가 열려 있고 심장이 뛰고 있기에 흘린 눈물이다.

제주 안덕면 동광리가 고향인 일곱살이던 아이는 이제 일흔 여덟.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됐다. 손녀 정향신씨가 전한 ‘4.3 광풍’에 의한 김연옥 할머니의 삶은 그야말로 통한의 세월이었다. 어린 나이에 모든 가족을 잃어 고아가 되었고, 제대로 글을 배울 기회도 잃었다.

“저는 할머니에 대해 몰랐던 게 너무 많았어요. 할머니가 글을 쓸 줄 모르셨더라고요. 세뱃돈 봉투에 제 이름 정향신 세 글자를 써 주셨던 2년 전 그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할머니 머리에 애기주먹만한 움푹 파인 상처가 있는데요. 그게 4.3 후유장애였다는 것도 작년 4월에야 알았어요. 심지어 10살 때까지 신발 한 번 못 신어본 고아였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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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내 대학에 재학 중인 정향신씨가 자신의 할머니가 겪었던 4.3당시 아픔을 얘기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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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이야기를 손녀가 4.3추념식 장에서 참가자들에게 들려주자 김연옥 할머니가 오열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할머니는 혼자 바닷가에 자주 나가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우리 할머니는 바다를 참 좋아하시는구나’라고만 생각했었죠. 차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와 동생이 하루 아침에, 땅도 아닌 바다에 던져져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은… 당시 할머니는 고작 8살이었는데…”

무엇보다 할머니가 생선을 드시지 않는 이유를 전할 때는 자신도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살아남은 4.3희생자 유족들이 4.3 트라우마로 얼마나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할머니는 물고기를 안 드세요. 부모, 형제가 모두 바다에 떠내려가 물고기에 다 뜯겨 먹혔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참으면서 멸치 하나조차 먹지 않았다는 사실도 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죠. 할머니의 바다를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너무 미안해요, 할머니. 할머니 삶에 그런 끔찍한 시간이 있었고 멋쟁이 할머니가 그런 아픔에서 살고 계셨는지 몰랐어요.”

손녀가 대신한 김연옥 할머니의 말도 가슴이 먹먹하다.

“나는 지금도 바닷물 잘락잘락 들이쳐 가민 어멍이영 아방이 ‘우리 연옥아’ 하멍 두 팔 벌령 나한테 오는거 닮아. 그래서 나도 두팔 벌령 바다로 들어갈뻔 해져…” (나는 지금도 바닷물이 찰랑찰랑 들어오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우리 연옥아’ 하면서 두 팔 벌리고 나한테 오는 것 같아. 그래서 나도 두팔 벌려서 바다로 들어갈뻔 하지)

고아가 된 이후 10대의 시간을 대구와 부산, 서울에서 고생고생하다 뿌리를 잊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고향 제주로 돌아왔을 때는 열여덟살. 김연옥 할머니는 이후 시신 하나 없는 ‘헛묘’를 조성해 여태껏 매년 정성스럽게 벌초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향신씨는 할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할머니는 울 때보다 웃을 때가 훨씬 예뻐요. 그러니 이제는 자식들에게 못해준 게 많다고 미안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는 그 힘든 시절을 묵묵히 견뎌온 멋진 사람이에요. 할머니, 저랑 약속해요. 이제는 매일 웃기로.”

연단 맞은편 객석에서 손녀의 이야기 내내 그치지 않는 눈물이 앞을 가리던 김연옥 할머니는 통곡의 울음과 함께 허공을 향해 “어머니”를 부르짖었다. 평화대공원을 내려다보던 하늘도 함께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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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1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에 참가한 희생자 유족들이 김옥연 할머니의 사연을 듣던 중 곳곳에서 오열했다.ⓒ 제주의소리

<2019-04-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4.3 추념식장에서 모두를 통곡하게 만든 대학생 

※관련기사 

☞경향신문: “4.3때 바다에 던져진 부모님, 파도칠때마다 ‘연옥아’부르는 것 같아” 

☞뉴스제주: 제주4.3 71년,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 달래야 

☞파이낸셜뉴스: 제주4.3 추념식 봉행 “특별법 개정…4.3 완전 해결 첫 걸음“ 

☞아시아투데이: 제주4.3추념식 1만여명 참석한 가운데 거행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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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문화재청의 현상변경 허가승인 받아

친일조각가가 제작한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과 부조물. 정읍시 제공

친일 작가 작품이란 지적을 받아온 전북 정읍시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을 철거한다.

정읍시는 전봉준 장군 동상 철거에 따른 문화재청의 현상변경 허가승인이 완료됐다고 20일 밝혔다. 군사정권 시절인 1987년 10월에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전적지에 세워진 이 동상은 친일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했다. 이 동상 및 배경 부조 시설물은 높은 화강암 받침대 위에 짙은 청동색으로 높이 6.4m, 좌대 3.7m, 형상 3.7m 규모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이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김경승(1915~1992)이 대표적 친일인물로 나와 그동안 동학관련 단체 등은 철거를 요구해왔다. 친일인명사전에는 “김경승은 1942년 6월3일자 <매일신보>에 ‘더 중대한 문제는 재래 구라파의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이같이 중대한 사명을 위해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겠습니다’라는 기고문을 게재할 정도로 친일행적이 뚜렷해, 해방 이후 만들어진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여하지 못하기도 했다”고 나온다.

특히 몸체는 격문을 든 농민군 지도자의 모습이지만 머리는 죄수처럼 맨상투로 돼 있어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또한 동상 뒤의 부조에도 죽창·농기구를 들고 싸움터로 나가는 비장한 농민군의 표정 등이 보이지 않아 역사적·예술적으로 논란이 있었다. 이에 따라 시는 시민과 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해 동상 철거를 결정했고, 철거된 동상은 박물관으로 옮기기로 했다. 시는 예산 12억원을 확보했다. 다음달 공모를 거쳐 내년 5월 완성을 목표로 추진할 방침이다.

유진섭 정읍시장은 “오는 7월 동상 철거 이후 새롭게 제작할 동상은 각계 전문가 자문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사상과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읍 황토현전적지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관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역사적인 장소로, 1981년 12월 사적 제295호로 지정됐다. 정부는 황토현전승일을 기리기 위해 오랜 논란 끝에 ‘5월11일’을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2018년에 제정하고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다.

박임근 기자 [email protected]

<2021-04-20> 한겨레

☞기사원문: 친일작가가 제작한 ‘전봉준 장군 동상’ 철거한다

화, 2021/04/20-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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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목, 2021/04/29-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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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장구슬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윤모 할머니가 지난 2일 별세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윤 할머니가 지난 2일 오후 10시쯤 별세했다고 3일 밝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윤모 할머니가 지난 2일 별세했다. (사진=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

정의연에 따르면 1929년 충청북도에서 태어난 윤 할머니는 13세가 되던 1941년 일본 군인들이 할아버지를 폭행하는 것을 보고 저항하다가 트럭에 실려 일본으로 끌려갔다.

윤 할머니는 일본 시모노세키 방적 회사에서 3년 정도 일하다가 히로시마로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로 온갖 수난을 겪었다. 해방 후 부산으로 귀국한 윤 할머니는 1993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정의연은 “윤모 할머니는 해외 증언, 수요시위 참가 등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활동을 하셨다”며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고 전했다.

할머니와 유족 뜻에 따라 장례는 비공개로 진행된다.

이날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은 윤 할머니의 사망에 애도를 표했다.

정 장관은 “또 한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떠나보내게 돼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생존 피해자 분들께서 건강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실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강화하고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을 위한 사업도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생존자는 15명에서 14명으로 줄었다.

한편 지난 4월21일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생 소송(2차 소송)에서 각하 판결로 사실상 패소했다.

이에 정의기억연대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총 40개의 시민단체는 항소를 추진하고 나섰다.

단체 관계자들은 지난 4월28일 서울시 중구 정동 민주노총 교육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외면하고 국가면제(주권면제)를 이유로 일본의 손을 들어준 판결에 참담하다”며 2차 소송 각하를 규탄, 항소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2021-05-03> 이데일리

☞기사원문: 위안부 피해 할머니 1명 별세…남은 생존자 14명

※관련기사 

쿠키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별세…남은 생존자 14명

쿠키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별세…남은 생존자 14명

머니투데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별세…여가부장관 “명예회복 적극 추진”

수, 2021/05/0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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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상 국가는 아무도 못 건드리는 우상으로 군림하며 가장 가공할 폭력과 살상을 저질러왔다. 국가에게서 우상의 가면을 벗겨내고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박탈할 수 있는 것은 이성과 윤리로 무장한 깨어 있는 시민들뿐이다. 국가가 국민을 섬기는 수레가 되어야지 국민이 국가를 우상으로 섬기는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강우일ㅣ베드로 주교

지난 3월28일 일본에서 96세의 재일교포 한 분이 뇌출혈로 타계하였다. 성함은 ‘이학래’, 1925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그는 1942년 봄 어느 날 돌연히 마을 면장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총독부에서 남방포로감시원 모집이 나왔는데, 네가 가라’는 통보였다. 2년 근무에 월급도 나온다고 했다. 17세 소년은 군인으로 징집되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다. 군속 신분으로 타이와 버마를 잇는 국경지대의 철도 건설 현장에 파견되어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게 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동남아 전선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연합군 포로가 수십만에 이르렀다. 포로들 감시를 위해 3천여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동원되었다. 이씨가 배속된 곳은 타이였고 영화 <콰이강의 다리> 이야기로 유명해진 지역이다. 일본군은 포로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였다. 깎아지른 절벽을 끼고 철로를 건설하는 난공사는 많은 포로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씨는 일본군 공병대가 요구하는 노역 인원을 매일 차출하기 위해 포로 측 대표와 자주 충돌하였다. 포로들의 보호를 규정한 ‘제네바 조약’ 등은 들은 적도 없고, 복종하지 않는 자는 가차 없이 구타하는 것이 그가 받은 일본군 교육의 전부였다. 일본군의 도구로 동원된 조선인 포로감시원 중 148명은 연합군 전범재판에서 포로 학대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23명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씨도 싱가포르에서 열린 오스트레일리아군의 군사재판에서 단 두차례의 공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수 감방에 같이 있던 동료들이 차례로 형장으로 불려 나가는 공포의 수감생활이 8개월 계속되다가 어느 날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수감생활 중 작업 시간이 끝나면 그는 책을 읽으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덮어씌워진 억울한 운명의 연유를 찾으며 식민지 백성이었던 자신이 ‘가해자’로 둔갑하게 된 경위를 돌아보았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자행한 불의와 부조리에 말할 수 없는 울분을 느꼈다. “내가 그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역경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전쟁이야말로 모든 해악의 근원이다”라고 그는 수기에 썼다. 이씨는 자신을 전쟁에 가담시킨 천황제 파시즘을 증오하고 만년은 오직 평화를 위한 일을 찾아 나섰다.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인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하고 복지와 원호 대상에서도 제외했다. 고립무원이 된 어떤 이들은 생활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55년 조선인 B, C급 전범 70여명은 ‘동진회’라는 자치회를 결성하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원호와 보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 정부는 ‘한일 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며 이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인도 아니면서 ‘전범’이라는 엄청난 불명예를 뒤집어썼고, 조국은 이들을 ‘대일협력자’로 간주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들은 모두 ‘우리의 희생과 죽음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절규하다 하나씩 세상을 떠났다.

1990년대 초부터 이씨와 동료들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법정 투쟁을 시작하였다. 양심적인 일본인들(우쓰미 아이코씨 등)도 이들을 지원하며 함께 연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1999년 12월 ‘보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국가의 입법정책에 속한 문제’라고 규정짓고 원고 측 패소로 판결하였다. 2008년 5월 일본 국회의 민주당 의원들이 피해자 1인당 300만엔의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법안을 작성하였으나 국회의원 대다수의 무관심으로 폐기되고 말았다. 일본제국은 조선을 식민지화한 다음, 조선의 어린 10대 소년들에게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황국신민의 도리라고 세뇌하고 전쟁터로 징발하였다. 이 소년들은 동남아 밀림 속에서 일본군의 수하가 되어 최악의 철로 공사에 동원된 연합군 포로들을 다그치다가 ‘전범’이라는 끔찍한 혐의로 법정최고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이라는 국가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타국 소년들을 데려다가 전쟁 원흉의 죄를 덮어씌웠다. 사형을 당했거나, 장기형을 치르고 평생을 죄인으로 숨어 살았던 이들은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와 부조리의 희생자요 피해자들이다.

이학래씨와 동료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접하며 즉시 떠오른 것은 미국이 시작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 군인들이다. 2년 전에 나는 베트남 꽝남성 퐁니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다. 베트남전쟁 때 민간인들이 한국군에 집단으로 살해당한 곳이다. 벼가 파랗게 자란 들판에 74위의 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었다. 이 마을은 본디 남베트남 군인 가족들도 여럿 살고 있었고, 한국군과는 같은 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군이 마을 옆 도로를 따라 행군하던 도중에 마을을 향해 진입해 주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당시 8살 소녀였던 응우옌티탄은 몇몇 생존자 중 하나다. 그녀도 배에 총을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어머니와 가족 5명을 모두 잃은 응우옌티탄이 2020년 4월에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4월13일 국방부와 국가정보원에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자료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들도 처음엔 살아 있는 사람을 향해 좀처럼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순박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나 참전 군인들은 고백한다. 전투가 벌어지고 옆에 있던 동료가 적의 총탄에 피 흘리며 쓰러지는 순간, 그곳은 지옥으로 변하고 윤리나 이성과 결별한다고. 눈앞에 등장하는 상대가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구분할 여유가 없다고.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병사들은 몹시 앓았다. 스스로 자진한 이들도 있다. 아직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으며 가족에게 말 못 하고 밤중에 혼자 악몽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국가가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들이다.

개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심판이 가능하다.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개인들도 심판받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는 최고의 권위와 권좌를 보유하기에 이를 심판할 사람이 없다. 역사상 국가는 아무도 못 건드리는 우상으로 군림하며 가장 가공할 폭력과 살상을 저질러왔다. 국가에게서 우상의 가면을 벗겨내고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박탈할 수 있는 것은 이성과 윤리로 무장한 깨어 있는 시민들뿐이다. 국가가 국민을 섬기는 수레가 되어야지 국민이 국가를 우상으로 섬기는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2021-05-06> 한겨레

☞기사원문: [강우일 칼럼] 국가의 죄

토, 2021/05/08-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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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발자국]31. 충북 박달재 : ‘친일 문인의 두 얼굴’ – 반야월과 ‘종천(從天) 친일파’ 서정주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 가슴이 터지도록.

유명한 옛 유행가 ‘울고 넘는 박달재’ 가사다. 박달재는 충북의 충주에서 제천을 잇는 38번 국도를 따라 제천에 거의 다 이르면 있는 고개다. 특히 이 고개는 과거시험을 보러가던 경상도 청년 박달과 이 고개 아랫마을의 금봉이가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에 대한 전설을 가진 곳으로, 인기 작사가 반야월이 이 전설을 노래가사로 만들었다.

이 노래 덕에 이 고개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고개 이름 박달재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고개는 한 때는 많은 트럭들의 정체가 일어났던 곳이지만, 이제 박달재터널이 생긴 뒤 통행량이 한적해졌다.

이제는 거의 버려진 이곳이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인 이유는 반야월 때문이다. 그는 작곡가 박시춘, 가수 이난영과 함께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이라고 불린 탁월한 작사가로, ‘단장의 미아리고개’, ‘소양강 처녀’, ‘산장의 여인’ 등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히트곡을 작사했고 그런 만큼 가장 많은 노래비를 가진 작사가로 알려졌다. 이 곳 박달재에도 박달과 금봉이의 사랑을 형상화한 커다란 조각 동상이외에 ‘박달재 노래비’라는 그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주목할 것은 이 노래비 옆에 세워져 있는 작은 팻말이다. 2016년 제천의병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제천단양지회가 설치한 하얀 이 팻말은 ‘반야월의 일제 하 협력 행위’라는 제목 아래 그의 친일 행각을 고발하고 있다. 나는 이 고개를 넘어가다 우연히 이를 발견했을 때 받았던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 땅에 이 같은 친일 고발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친일군인 김백일의 ‘친일행위처단비’는 거제 포로수용소에 있는 김백일 동상 옆에 세워져 있다).

나아가자 결전이다. 일어나거라 / (…) / 민족의 진군이다 총력전이 / 피 뛰는 일억일심 함성을 쳐라 / 싸움터 먼저 나간 황군 장병아 / 총후는 튼튼하다 걱정 마시오 / 올려라 히노마루 빛나는 국기 (…) / 승리다 대일본은 만세 만만세.

그는 이 같은 가사로 ‘일억일심’을 작사하고 직접 노래 부르는 등 친일 행각을 벌였고,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으며, 사망 2년 전인 2010년 국회 간담회에서 일제 지배 하의 친일 행각에 대해 사과했다는 사실을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 박달재에 있는 작사가 반야월의 ‘박달재노래비’ 옆에는 그의 친일 행각을 고발하는 표시판이 설치되어 있다. ⓒ손호철
▲ 가수 반야월의 일제 하 협력 행위 고발판 ⓒ손호철

해방에도 불구하고 친일파가 계속 권력을 잡으면서 친일 문제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금기로 남아왔다. 임종국 교수가 1966년 발표한 역사적인 <친일문학론>을 발표해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지만, 그 이후에도 이 문제는 최근까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임헌영 등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1991년 임종국의 뜻을 살려 민족문제연구소를 만들어 친일파에 대한 조사연구 작업을 벌여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정부 차원에서도 2005년 뒤늦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이에 대한 조사를 벌여 제1차 106명, 제2차 195명, 제3차 705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일왕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장교를 지원했던 박정희는 제외됐다. 이들 중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사람으로 유명한 친일 고문 경찰 노덕술 등 225명은 정부로부터 훈장 등 서훈을 받았는데, 2019년 현재 25명에 대한 서훈이 취소됐고 노덕술 등 200명에 대한 서훈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 천안에 설치되어 있는 친일문학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의 흉상 ⓒ손호철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겨울 설경으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한 곳이 전북 고창의 선운사다. 선운사에서 바다 쪽으로 올라가 기막힌 전망의 언덕 위에 폐교를 잘 정비한 건물 옥상에 서서 바다가 내려다보면, 누구나 다 아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떠오른다. 이곳이 서정주 문학관이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 시인’, ‘우리말 시인 중 가장 큰 시인’, ‘시의 정부(政府)’라는 칭송을 받지만, 친일인명사전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가 발표한 친일파 명단에도 오른 대표적인 친일 문인이다. 그는 그 이후에도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을 칭송했으며, 그래도 솔직하게 사과를 한 반야월과 달리 기이한 변명을 늘어놓는 등 ‘우리말 시인 중 가장 큰 곡학아세의 큰 어른’이었다. 아니, ‘학문을 왜곡해 아부를 한 것’이 아니라 ‘글을 왜곡해 아부를 한 것’이니 곡문아세(曲文阿世)의 큰 어른’이다.

우리의 몸뚱이를 어디에다가 던져야 할 것인가?

(…)

인제 겨우 스무 살인 벗아, 나도 너처럼 하고 싶구나.

나도 총을 메고 머언 남방과 북방을

포연과 탄우를 뚫고 가보고 싶구나.

그는 ‘우리말의 달인’답게 뛰어난 문장력으로 젊은이들에게 징병을 권유했다. 가미가제까지 찬양한 서정주는 민주화 이후인 1990년대에도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 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고 “이것이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라고 생각해, 이 같은 하늘의 뜻을 따른 ‘종천(從天) 친일파’라는 기이한 변명을 펼쳤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친일 행각을 솔직히 사과한 반야월은 최소한의 양심은 가진 것이다.

서정주의 ‘곡문아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광주 학살의 주범 전두환에게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라는 생일 축시를 바치기도 했다. 이렇게 찬양한 것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서정주는 “하도 깡패같이 굴어서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을 안 죽일 것 같아서 그랬다”고 변명했다고 한다. 그의 ‘후학’들도 마찬가지다. 그의 전집을 발간하면서 “생전에 시집으로 발표한 작품만 수록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웃기는 변명 아래 그의 친일시들을 뺀 것이다.

▲ 전북 고창에 있는 미당 서정주 문학관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서정주의 흉상 ⓒ손호철
▲ 서정주문학관에 쓰여 있는 서정주의 업적에 대한 설명 ⓒ손호철

나는 친일과 죽고 죽이는 이념 대립을 강요당했던 일제와 해방정국에 청년으로 살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일개 필부가 아니라 지도자나 지식인은 달라야 한다.

뤼시엥 골드만이란 프랑스의 철학자는, 한 인간은 연구할 때 그 시대가 불가피하게 한계지우는 ‘한계 의식’이 있고 그 시대에도 가능했던 ‘가능 의식’이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에 이광수가 친일 한 것을 평가할 때, 순수 가정으로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면 친일은 ‘한계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이나 장준하 등 반일 운동을 한 사람들이 많다면, 그것은 그 시대에도 가능한 ‘가능 의식’이지 한계 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인훈의 소설 중 <서유기>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 한국사 주요 인물을 만나는데, 이광수를 만나 친일 행각을 다그치자 이광수는 흐느끼며 “나에게 단파 라듸오만 있었다면” 하며 흐느낀다. ‘단파 라듸오’가 있어 미국이 내보내는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면 미국이 이기고 있는 것을 알고 친일하지 않고 버티다가 민족적 영웅이 됐을 텐데, ‘단파 라듸오’가 없어 일본의 선전처럼 일본이 이기는 줄 알고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단파 라디오를 생각하며 고창을 떠났다.

<2021-05-17> 프레시안

☞ 기사원문: ‘친일’ 반야월‧서정주, 같지만 달랐다

월, 2021/05/17-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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