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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교류와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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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교류와 융합

익명 (미확인) | 수, 2019/04/03- 10:14

인류문명은 크게 아리안족 문명과 셈족 문명 그리고 한족 문명으로 니누어 볼 수있습니다. 무엇보다 기원적 2천년전 코카써스 산맥 북쪽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아리안족Arya이 이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인류문명은 대융합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서쪽으로 이주한 아리안족은 에게해의 크레타 문명을 몰락시킨 후 그리스와 터키로 연결된 지중해 연안의 도시에서 해상국가로 거듭납니다. 한편 남하한 아리안족은 이란을 거쳐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에 이르러 기존의 드라비다족을 내쫓은 후 인더스문명의 뿌리를 내리게됩니다. 이후 이란을 거쳐 아라비아 반도로 내려온 아리안족은 수메르와 아카드문명에 뒤이은 셈족의 바빌로니아 문명을 패퇴시킨 후 독자적인 페르샤문명을 구축하게 됩니다. 결국 아리안족은 인류문명, 특히 서구문명의 주축을 이루는 그리스로마 문명과 페르샤문명 그리고 인더스 문명을 구축한 주인공으로 거듭나게됩니다.

사진: 서울신문

따라서 아리안 문명의 특징을 알아봅시다. 무엇보다 여러 측면에서 발현되는 다양성을 들수 있습니다. 이는 신관에서도 나타나는데 최고신을 Deva, Jeus, Deus, Dei라고 부르는 다신론으로 표현되었으며 또한 다양한 삶을 살 수있다는 믿을을 전제로한 윤회사상을 믿어 왔습니다. 또 다른 특징을 살펴보면 특히 그리스로 이주한 아리안들은 주로 지중해 해안가 도시들에 살면서 바다를 상대로 교역을 해왔기때문에 항해시에 반드시 필요한 시각중심의 문명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이에따라 그들은 눈에 보여진 것(파도, 현상)과 보여지게 만드는 것(바다, 본체)의 차이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본체를 인식하는 능력인 이성을 중시하게 되는 로고스logos형이상학을 발달시키게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뒤에서 보듯이 본체 중심의 사고는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플라톤에 이르러 절대적 실체론으로 전개하게 됩니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에서 미리 정착했던 셈족 문명의 특징을 알아봅시다. 무엇보다 사막이라는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야했던 그들은 원초적으로 초능력자와 초월자를 요청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기에 초월성과 유일성 및 절대성을 문명의 본질로 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여 그들이 믿는 신은 아리안문명의 다양한 인격신을 배격하고 오로지 최고의 단일신, 예를들어 수메르의 엘, 바빌론의 마르두크, 가나안의 바알, 유대교의 야훼나 이슬람의 알라를 숭배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거의 유사하다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실았던 바빌론의 우르지역에서 믿었던 최고의 신은 마르두크였기 때문에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 유대인의 유대교 야훼는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내용의 유일신이라할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사막에서 살았기때문에 모래바람들이 내는 소리를 중시하는 청각중심의 문명입니다. 하여 야훼의 말씀이 창조를 이루고 율법(십계명)이 된 유일한 소리의 문명으로 남게된 것입니다. 따라서 시각을 배격하고 청각,즉 소리만을 유일신의 증거로 보았기에 신을 시공간속에 형상화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한편, 중국을 살펴봅시다. 중국인들은 인격신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독특하게 하늘을 신으로 상정하여 왔습니다. 즉 신에대한 설문해자를 보면 신은 하늘의 번개 모습을 띄는데 이는 하늘이 위력과 영묘함 그리고 길흉화복의 예측능력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신은 인간의 삶의 주재자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신은 창조자나 구원자가 아니라 인간사를 좌지우지하는 주재자이기에 그의 명령을 잘 따르는 자가 인간사회의 주재자, 즉 (황)제가 된다고 보는 천명론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즉 하늘의 천명을 받는 자는 덕을 갖춘 자이어야하기 때문에 천명론은 인성의 수양론으로 연결되어 집니다. 따라서 중국사상은 심(인간 마음)과 성(우주의 본성, 즉 하늘, 천명)은 출발부터 일치를 지향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즉성 사상은 이후 인도로부터 들어온 불성사상(불성은 가능태로서 보통 실체인 여래장과 혼동되고 있습니다)을 심즉시불(마음이 곧 부처! 즉 불성은 현실태로서 본래성을 의미한다할 것입니다)의 사상으로 격의하여 점수가 아닌 돈오 중심의 6조 혜능의 돈오돈수 사상이 선불교의 정통으로 자리잡게 되어 오늘날 한국의 선불교의 모태가 됩니다.

그리면 이제부터 아리안문명이 서쪽과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기존에 터잡은 셈족 문명과 한족 문명에 끼친 영향을 알아봅시다. 먼저 아리안족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만나게된 셈족 문명,특히 기독교와의 만남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이 만남에서 촉매역할을 한 사람이 로마 시민권자이자 유대인인 사도 바울이라할 것입니다. 그는 아리안 문명에 속한 로마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회심한 후에 셈족의 유대교를 벗어나서 예수의 가르침을 기독교로 보편 종교화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신의 말씀인 율법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만의 종교틀을 벗어나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있기에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수있다는 보편종교로서 기독교 사상을 구축하였는데 이를 이신득의,이신칭의라고 부릅니다. 이신칭의는 그 자신이 디아스포라였기 때문에 기독교를 본토 유대인만의 민족종교가 아니라 그 밖의 유대인 나아가 인종을 초월한 보편종교를 만들기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이를 뒷받침한 사상이 로마의 만민법사상과 스토아의 사해동포주의라할 것입니다. 하여 바울이 기독교 구축에 기여한 공로는 지대하다할 것이나 근원적으로 당대의 그리스,로마의 존재론은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실체론이었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는 바울을 만나 철학적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지만 아쉽게도 이데아와 현상으로 세계를 이분법적이고 수직적인 질서로 보는 실체론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실체론은 실체를 독립적이고 고정불변한 존재로 보기에 단일하고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있으므로 후행존재의 원인이 되는 선행존재는 존재근거인 실체가 되어 상대방의 본질을 파악하여 그를 도구로 지배하고 이용하게됩니다.

(그러나 실체는 인간이 대상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하기위한 언어적 허구개념이라는 점은 수차례 지적하였습니다만 이런 실체 개념으로 2천년동안 지구를 지배해왔으나 이런 허구적 개념으로는 현대의 문제를 절대로 해결할 수없기에 새로운 존재론, 즉 생성론을 구축하여야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을 제1원인의 실체, 즉 플라톤의 이데아로 간주하는 기독교는 피조물인 인간에 대해 초월적인 지위에서 일방적으로 지배할 권한을 갖게되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수직적 계서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질서는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인간과 자연을 무자비하게 지배하게되는 제국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또한 선과 악 또한 실체로 간주하기때문에, 즉 악은 박멸해야할 실체이기때문에 중세의 대표적인 악인 마녀를 불에 태워죽이는 끔찍한 행위를 도리어 정의로 간주하는 비정상의 행태를 보입니다. 따라서 만일 바울이 그리스,로마가 아니라 인도의 불교문화를 찾아 동쪽으로 나아갔다면 상호의존의 연기법과 얽힘의세계로 이루어졌다는 화엄사상, 즉 상입상즉의 사상을 예수의 해방과 구원의 사상에 결합시켰더라면 오늘날 예수의 가르침은 어떻게 구체화되었을까요?

이에대해 BuddistChristian이 하나의 해답을 제시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아리안족이 동진하여 인더스강에 독자적인 인더스문명을 개척하여 다신교인 힌두교를 낳았으며 이후 부처라는 걸출한 각자를 만나 힌두교의 존재론과는 전혀 다른 종교인 불교를 성립하게 됩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큰 차이는 힌두교는 실체론에 근거한 사상이고 불교는 비실체론,즉 생성론,사건론,과정론 에 근거한 자연철학이라할 것입니다. 하여 힌두교는 범(Brahman)아(Atman)일여에서 보듯이 불교와 유사하게 보입니다만 힌두교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보고 불교는 존재를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의 연기적 과정이라고 보고 있으므로 모든 존재는 연기법에의해 내재적으로 서로 생성과정에 참여하기에 우주의 뭇 존재는 연기로 촘촘히 얽혀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존재는 상호 내재하므로,즉 상입하기에 서로 남남이 아닙니다(즉 자기언급self reference). 또한 같이 참여하기에 서로 등가적 존재로서 평등하므로, 즉 상즉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세계관에서는 지배복종의 계서적 구조는 사라지고 오직 수평적 상호관계만 존재하므로 강자에 의한 약자를 배제하는 변증법이 아닌 강자와 약자가 중첩하여 제3의 대안을 제시하는 창발적 중도법을 따르게 됩니다. 하여 비록 아리안문명이 인도에 다신론과 실체론에 기반한 힌두교를 낳았으나 그럼에도 석가모니라는 위대한 각자를 만나 불교라는 비실체적 존재론을 통해 아리안의 실체는 허상에 불과하고 연기론이 실상의 법칙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제 인도불교가 중국에 미친 영향을 알아 보도록하겠습니다. 인도의 대승불교가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연기사상외에 유가행 중관학의 공사상과 세친의 유식사상 그리고 화엄사상이 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인도 고승인 달마대사가 중국 남부 양나라에 들어갔을 당시 중국불교는 호국불교 또는 기복불교로 전락되어 부처 본연의 가르침이 쇠락되어 버렸으며 이를 알고난 달마태사는 부처 가르침을 신도들이 직접 깨닫게 하기위해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행을 하게됩니다. 하여 달마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중국은 자신의 고유사상과 융합 convergence 또는 자신의 고유사상으로 격의 transformation한 중국만의 독자적인 선불교를 만들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중국의 고대 유교의 심성론은 심과 성 (본성,자성)은 일치한다고 (심즉성) 보았으며 또한 본성은 하늘로 부터 부여받았기때문에 부지런히 수행을 하여 마음의 덕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한편 인도에서는 불성은 부처가 될 가능성을 의미하기에 자신이 불성의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고 이후 수행을 통해 불성을 깨우쳐 우주의 실상을 깨닫는다는 것을 골격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여 중국의 심즉성 사상과 인도의 심즉시불 사상(이는 이(불)사(심)무애사상에도 나타납니다)은 서로 유사성을 띄기에 인도의 점수돈오 사상이 중국에서 선불교로 정착하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결국 인도의 점수돈오 사상이 중국의 심즉성 사상에 힘입어 선불교로 격의하게되었다할 것입니다. 다만 차이점은 인도 불교는 불성을 여래장처럼 ‘가능태’로 보았기에 요가처럼 점수의 수행이 필요하였다고 본 반면 중국은 본성,즉 자성을 ‘현실태’로 보았기 때문에 찰나심에의해 돈오할 수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중국인들은 불성이 현실태이기에 즉시 알아차리기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중국 선불교는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나뉘게 되는데 남종선의 좌장인 신수대사는 인도불교처럼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야한다고 본 반면 6조 혜능은 본성 또한 본래무일물이므로 수행한다고 반드시 알아차릴 수있는 것만은 아니기에 수행이 의미없고 오직 찰라의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는 위에서 본 중국 전통의 심즉성 관점을 온전히 따르고 있는 입장이라할 것입니다. 즉 신수는 점수돈오이고 혜능은 돈수돈오라할 것인바, 이런 관점은 기존의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논쟁과는 내용이 다른 문제이니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한편 달마의 영향으로 중국인은 종래의 심성론을 불교적인 심즉시불 사상으로 다시 격의하게 되었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심즉성과 심즉시불은 같은 의미라고 보았으며 결국 마음과 우주 본성은 일치한다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금나라로부터 송나라가 남송으로 쫒겨나가게 되자 주희는 중화의 부흥과 사회기강의 확립을 부르짖게 되는데 이의 근본원인을 불교의 반사회성에 있다고 보았기에 불교를 척결하고 새로운 유교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는데 이 것이 신유학, 즉 주자학, 성리학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도는 불성을, 중국은 자성을 본성으로 보고 주객미분 이전의 본래면목이라하여 심즉성과 심즉시불 사상에 의해 본성과 마음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희는 우주의 본래면목(본성)을 주객을 번별하는 인간의 도덕성으로 격하시킨 후 성과 심은 일치하지가 않다며 이를 이원적으로 분리시킨후 성이 심을 수양하는 존재, 즉 (도덕)성 의 함양을 위해 성이 심을 양성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성이 아닌 심의 덕을 쌓기위해,즉 천명을 받기위해 심을 수양해야한다는 유학의 정신과도 배치된다할 것으로 주희의 신유학은 마음과 분리된 성중심의 실체론적 계몽주의라할 것으로 뒤에서 보듯이 실체론이 갖는 문제점을 모두 노정하고 있다할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그는 성을 도덕성으로 축소시킨 다음 이를 ‘성’이 아닌 ‘리’라고 칭하였으며 성으로부터 분리된 ‘심’, 즉 마음을 지닌 존재를 ‘기’라고 격하시켰습니다. 이는 불교의 ‘이’와 ‘사’의 사상의 본 뜻(자연과 인간의 일치!)을 완전히 배격해버리고 단지 형식적 이원적 구조만을 흉내낸 것에 불과합니다. 즉 그는 불교의 우주 원리를 인간의 윤리로 도용한 것이라할 것입니다. 하여 그가 불교의 우주원리인 이사무애를 형식상 차용하였지만 실상은 이를 이용하여 인간사회의 윤리기강을 잡으려하였기에 실제로는 그는 이사무애,즉 이기무애가 아닌 이선기후를 추구한 것이라할 것입니다. 즉 중화를 중심으로 그틀의 가치나 제도를 보존하기위해 타 민족을 도덕적으로 계몽하고 훈육하고자한 것에 불과하다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불교의 존재원리를 인간의 규범(도덕)원리로 격하시킨 후 선험적인 ‘리’에 경험적인 존재인 ‘기’가 복종해야 사회질서가 살아난다는 지극히 인간중심주의, 중화중심주의의 폐쇄적인 사상으로 유교를 전락시켰는데 이는 서구의 실체론 못지않게 리를 실체화시켜 못 존재를 그에 복종시키는 계서적 구조(3강5륜), 경직성(예론), 폐쇄성(중화사상), 인종차별(호론과 낙론) 등을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중국은 근대의 과학화, 민주화, 산업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퇴행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세계 문명은 항상 상호 작용에의해 생성된다는 것을 알 수있으며 나아가 실체론적 존재론(유일신사상과 신유학등)으로 무장한 문명은 개방성, 역동성, 창발성이 부족하기에 새로운 문명의 대안을 찾는 중도적 자세가 결여되어 반자연, 반인간, 반문명으로 흐른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있다할 것입니다.

ㅡ하여 바울이 서쪽으로 가지않고 동쪽으로 갔거나, 달마가 동쪽으로 가지않고 서쪽으로 갔으면 인류문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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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어느 의회든 법안 검토는 의원의 본업이다

그렇다면 세계 다른 나라 의회에서는 법안 검토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미국 의회의 경우, 의원에 의하여 법안이 제출되면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된다. 위원회에 회부된 법안은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의하여 소위원회에 넘겨지는데, 소위원회는 청문회 개최(미국 청문회의 경우, 입법을 위한 청문회가 높은 비율을 점한다)와 꼼꼼히 조문 하나하나를 심사하는 축조(逐條)심사를 수행한다. 물론 상임위원회에서의 이 모든 활동은 의원들 자신들이 직접 수행한다.

프랑스 의회 역시 본회의든 상임위원회든 발언을 포함한 모든 진행이 의원들에 의하여 직접 수행된다. 의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법안의 각 조문에 대한 조문 투표를 실시한 뒤 법안 전체에 대한 전체 투표를 실시한다.

독일 의회는 각 정당 내 상임위원회마다 소그룹이 운영되고 여기에 각 정당에 소속된 정책연구위원들이 결합해 매주 화요일마다 만나서 짧게는 6주에서 길게는 6개월에 걸쳐 상임위 의제를 사전에 토론하고 조율하기 때문에 의원 개개인의 전문성도 향상되고 각 정당의 전문성도 당연히 증대되며 이는 의회의 전문성 제고로 이어진다. 소그룹에서 채택된 사항은 대부분 그대로 정당 전체의 견해로 채택된다.

정치 후진국이라 불리는 일본 국회의 경우에서도 법안에 대한 검토는 당연히 의원의 몫이다. 일본 국회에서 법안 제출은 의원법제국의 입법보좌를 받아(다만 이는 법률상 요건이 아니고 단지 참고 요건이다) 준비되고 정당 내의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법률안이 확정된다. 정당 내 절차는 정당 내 정무조사회(政務調査會)나 정책심의회 부회(部會, 전문 분야별로 모이는 회합을 가리킨다)를 거쳐 정책심의회나 혹은 정책심의회 전체회의 등에서 결정한다. 나아가 총무회나 중앙집행위원회 등 상부기관의 의결을 거친다.

 

법안 검토는 입법 과정의 핵심이자 본령(本領)이며 기본

그러나 우리 국회의 경우, ‘의회’의 이러한 국제적인 보편적 기준과 너무나 상이하다.

우리 국회에서 상임위원회에서의 검토보고는 법률안의 심사 과정 중 전체 위원회에서 법률안의 제안 설명이 끝난 뒤 ‘반드시’ 전문위원이 낭독하도록 되어 있다.

그 결과 채택되는 소위원회의 수정안 내용도 전문위원의 검토 내용과 대개 일치하는 경우가 많고,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에서 지적되지 않은 문제점은 위원회 심사과정에서 대체로 거론되지도 않는 성향을 보인다. 예산안에 대한 예비심사 검토보고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니 예ㆍ결산 검토보고는 사실 이 분야에 대한 의원들의 전문성 및 시간 부족으로 법안 검토보고 경우보다 입법관료의 주도권이 훨씬 강하다.

결국 이렇게 하여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는 위원회 심사의 대강의 범위와 차원을 ‘제시’해 주며, 논의의 초점과 방향을 ‘정립’해 주는 결과를 가져온다. 뿐만 아니라 실제 심의 결과 채택되는 소위원회의 수정내용 구성에서도 매우 큰 영향력이 발휘된다.

더구나 의사 진행에 대한 세부 규칙이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국회의 입법관료들이 제시하는 선례에 대한 해석에 의하여 의사 진행상의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는 한국 국회의 현실에서 결국 위원회 입법관료들이 위원회의 심사과정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커지게 되어 있다. 실제로 위원회 운영상의 시나리오가 위원회 입법관료들에 의하여 작성되고 있으며, 위원장은 이들이 준비한 각본에 따라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검토보고서를 토대로 회의를 진행하게 되므로 검토보고서는 입법 논의의 출발점이자 결정적 변수일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법안 검토’란 입법 과정의 핵심이자 본령(本領)이며 기본이다. 사실상 입법과정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 ‘검토’ 과정을 의원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리’하는 것은 의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다.

국회에서는 매일같이 입법토론회와 공청회가 분주히 열리고 본회의장이나 상임위에서 법안 통과 문제로 ‘식물국회’니 ‘동물국회’니 볼썽사나운 살풍경이 벌어지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본질 왜곡을 가리는 변죽일 뿐이다.

 

공무원의 법안 검토보고’, 국민이 명령한 입법권에 대한 명백한 직무유기

상임위원회란 본래 정당 간 정책대결의 장이다. 미국 의회의 경우, 상임위원회 입법지원 인력인 스태프(Staff)는 18명의 전문위원을 포함하여 위원회당 평균 75명으로서 다수당과 소수당이 소속 의원 수에 비례하여 인원을 배정받고 소수당은 최소 1/3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독일 의회의 상임위원회 입법지원 조직은 주로 교섭단체 정책위원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어 그 총수는 2004년 현재 837명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우리 국회처럼 입법관료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

사실 우리 국회에도 위원회 공무원과 별도로 이른바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이라는 제도가 존재하고는 있다. 각 교섭단체별로 의석수에 따라 배분되는데, 급여는 국회 예산에서 지급되고 국회 사무처 소속으로 별정직 공무원의 신분이다. 2019년 현재 총 인원은 67인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은 당파성과 당에 대한 충성심에 비하여 전문성이 검증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당의 정책과 관련한 전문성보다는 상당수가 기본적인 자격에 있어서 부족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실질적인 능력과 역할의 측면에서도 대단히 취약성을 노출시켜 단지 개별 정당의 운영을 지원하는 데 치우치고 있다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을 정당 관료가 형식적으로 맡으면서 당료의 임금보전책으로 활용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은 실정이다. 2003년의 경우, 32명의 교섭단체 정책위원 중 25명이 당료 출신이었고, 6명이 국회 공무원 출신이었다. 더구나 최근 들어 집권 여당의 당정책위원은 기재부, 행안부 등 행정부 현직 관료들을 ‘편법’으로 임용하는 방식으로 충원하고 있어 국회 입법과정에 행정부 관료들의 개입을 적극적이고 합법적으로 보장하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 국회의 입법권은 지금 심각한 왜곡 상태에 놓여 있다. 국회가 지금 안고 있는 문제는 수 없이 많지만, 의원 입법권에 대한 침해라는 이 문제야말로 국회의 본원적 문제라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국민들은 자기들을 대신하여 국가 입법을 수행할 대표를 선출해 국회를 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에 의해 선출된 대표인 의원들이 입법을 방기한다? 자신들에게 부여된 본업을 수행하고 있지 않는 이 문제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또 어디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변질된 국회이고, 왜곡된 국회이다. ‘의회로서의 기본’이 상실되어버린, 그리하여 이미 의회라 할 수 없는 국회이다. 기본이 왜곡되어서는 모든 일이 뒤틀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회 스스로 이 문제를 개선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실제 필자가 만난 한 중진의원은 의원들이 이 문제의 개혁에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현재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법률안을 논의할 경우 국회 공무원인 전문위원이 법률안을 읽고 요지와 주요 쟁점 등을 설명하는데, 그런 ‘귀찮은’ 일을 의원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심리에 형성되어 굳어진 이러한 자세 자체가 이미 왜곡된 우리 국회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국민이 명령한 ‘직무’에 대한 명백한 ‘유기’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인식하고 제기할 때 국회 문제도 해결될 수 있어

지식인들과 시민운동은 이 문제의 중요성과 긴급성에 대하여 인식해야 하며, 그리하여 국회 개혁운동에서 가장 선결적인 문제로 제기해야 한다. 이 문제는 입법 수행을 최고 임무로 부여받은 국회의 본질적 허구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식인들과 시민운동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한다면, 이 문제는 의외로 크게 여론화될 수 있고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국회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다.

현재 우리 언론은 대개 클릭수를 노리는 자극적인 기사나 가십성 뉴스에만 주목할 뿐 언제나 기본과 근본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사회는 더욱 혼탁해지고 더욱 분열되며, 말초와 지엽으로만 흐르게 된다. 이제 언론도 기본과 근본에 충실해 진정한 ‘사회의 목탁’으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아나운서를 비롯하여 연예인, 스포츠스타 등등 좀 유명세가 있다 싶으면 모두가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 그리하여 이 땅에서 국회의원이란 그저 ‘출세’와 ‘성공’의 가장 큰 상징으로 전락해버린 오늘의 비극적인 현실도 타파할 수 있다.

화, 2020/02/2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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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분단 70년의 시간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 자력이 아닌 미·소 연합의 힘으로 일본을 몰아낸 이상 코리아가 미국과 소련의 영향권을 벗어날 길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분단을 벗어날 수 있었던 아마도 유일한 방도는 전후 신탁통치를 받아들인 오스트리아형 통합방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내전이 격화되면서 코리아와 동아시아는 미소 냉전이 본격화하는 격발지가 되었고, 결국 코리아 남북은 국제 전쟁에 휘말리는 자충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략 1946년에 시작되어 1953년까지 줄기차게 끓어오른 코리아의 적대와 충돌은 이후 70년 남북의 지형을 결정지었다. 이후로도 남북은 적대와 대립을 벗어나지 못했다. 미소와 미중의 적대와 대립이 완강했을 때는 그런 이유가 단지 외부의 탓이라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먼저 미중 간 적대와 대립이 해소되었을 때(미중 데탕트와 미중 수교)도, 이어 미소 냉전이 종식되었을 때도, 코리아의 적대와 대립은 해소되지 못했다. ‘코리아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 주변 강국들의 탓’ 그중 특히 ‘미국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것이다. 코리아 내부가 적대와 대립을 해소할 확고한 의지와 방법을 세워 내놓지 못했다. 두 코리아가 서로를 국가로서 인정하지도 못하면서 연방과 연합을 주장해보아야 그것이 적대와 대립을 해소할 리 없었다. 오히려 격화시키는 소재로 역용될 수 있었다. 먼저 코리아 남북이 양국체제로 전환하여 전쟁 상태와 분단체제를 끝내야, 남북 상호 간의 의심과 대결의 소지를 없앨 수 있고,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주변 강국들이 코리아의 적대적 대립을 이용하는 판을 바꿔갈 수 있다. 남북 두 국가 간의 연합도 연방도 그때서야 비로소 실제적인 방안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낙중은 70년 강고한 분단체제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살았고, 그 결과 남북 모두에서 수인(囚人)/호모 사케르의 삶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명준은 어떤가. 남북 모두를 포기하고 중립국행을, 그리고 자살을 선택했던 그는 남북 모두에 비판적이었던 1950~1960년대 지식인들의 심리 상태를 표상한다. 김낙중은 반대의 길을 걸으려 했다. 남북을 모두 포기하는 길이 아닌 남북을 모두 인정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로 남북 두 나라가 그를 비판하고 부정하고 버렸다. 그가 선택했던 ‘서로 인정하는 남북’이란 그의 관념 세계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남북의 전쟁 상태, 분단체제 속에서 허여된 자유와 책임이란 상대를 철저히 부정하고 말살하는 전제 위의 자유와 책임이거나 아니면 언제든 체포되어 고문받고 살해될지 모르는 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갈 자유와 책임이었을 뿐이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코리아 남북관계에서 가능한 네 가지 이념형(ideal type)적 선택지를 생각할 수 있다. I유형은 남과 북 모두를 인정한다. II유형은 남만을 인정하고 북을 부정한다. IV유형은 북만을 인정하고 남을 부정한다. III유형은 남과 북 모두를 부정하거나 남과 북 모두에 의해 부정된다. 이 유형은 코리아의 적대 상태, 분단체제에 비판적이었던 이들의 입장이다. 이명준은 스스로 남과 북 모두를 포기(부정)하는 유형을 표상하고, 김낙중은 남과 북의 양측에 의해 부정되는 유형을 대표한다. 지금까지 현실로 존재했던 것은 II, III, IV유형뿐이었다.(아래 〈그림 1〉 참조)

이제 지난 70여 년 존재할 수 없었던 I유형이 현실로 다가왔다. 남북이 통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I의 길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 그것이 코리아 양국체제의 길이다. II, III, IV의 길은 모두 닫혀 있다. 지난 70년의 역사가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길은 이미 한 번 그 가능성이 열렸던 적이 있다. 1989~1991년 사이 미소 냉전이 종식되고 남북 두 국가가 유엔에 동시 가입했으며 남북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할 것을 약속한 <남북기본합의서>에 합의했던 시기다. 여기서 반보만 더 나갔다면 양국체제의 길은 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무엇보다 남과 북 내부에서 I의 길을 열어갈 힘이 아직 부족했다.(종합적인 분석은 1부 1장 참고) 이제 2016~2017년 촛불혁명을 통해 그 가능성이 다시 한번 열렸다.

김낙중은 양국체제의 가능성이 처음 열리기 시작했던 1980년대 말의 상황 변화에 매우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남북의 상호 인정을 통한 통일의 길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한 듯하다. 1989년에는 통일 민간단체 대표 자격으로 4단계 통일론(평화공존 기초 구축 → 국가연합 → 연방국가 → 통일 민족국가)을 국회 토론회에서 발표하는 등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김낙중의 이런 활동에 주목한 북측이 ‘김일성 주석’의 이름으로 공작원과 고위직 간부를 그에게 보냈고, 김낙중의 ‘원형적 분단초월의식’은 이들과의 만남을 거부하거나 기피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조작’이라 항변하기도 어렵게 다시금 ‘간첩사건’에 말려들었고, 결국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당시 양국체제의 가능성을 폐쇄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던 냉전대결 세력들에게 역이용되고 말았다.

필자가 특별히 주목했던 것은 이러한 체험 이후 김낙중의 변화였다.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그는 양국체제의 요점을 최초로 분명히 명시하게 되었다. 연합인가 연방인가 문제보다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먼저라는 것이다. 이제 역사적인 문서가 된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나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은 1989년 김낙중이 제안했던 ‘4단계 통일안’과 아주 가까운 내용이다. 그러나 이제 2000년의 김낙중은 이 두 역사적 문서의 한계를 분명히 제기하고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남측의 ‘연합’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안의 공통성을 인정했지만 “서로를 국가적 실체로 인정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을 회피”하였고, 그 이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흔히 칭송되어왔던 유명한 구절인 “쌍방 사이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상호 간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는 일을 피하기 위한” 또는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 비판이 매우 직설적일 뿐 아니라 암묵적으로 남북의 지도자와 지도층, 정책브레인들을 직접 향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실로 통일에 이르려고 한다면 남북 지도자와 지도층의 획기적인 발상과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김낙중은 그 요점이 코리아 남북의 두 나라가 서로를 국가로서 인정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는 1989~1992년 사이, 남측 여야의 지도층 인사들과 그리고 북에서 ‘김일성 주석’의 이름으로 보낸 고위간부까지를 모두 만나 통일문제에 대해 심도 깊게 토론해보았다. 이 경험 속에서 그는 일단 이론과 언어 차원에서는 남북 양측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들이 생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낙중의 2000년의 비판을 보면 그가 그동안의 남북 대화 당사자들 간의 논의에서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이 빠져 있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북 대화에 나섰던 남북의 지도자와 지도층이 일면 용기 있게 남북 평화공존의 상황 조성에 나서면서도 바로 이 결정적인 지점을 ‘회피하고 거부해왔다’고까지 쓰고 있다. 통일문제에 관해 남과 북의 통일 정책 핵심인사들과 직접 대화해보지 않고는 쓰기 어려운 직설적인 표현이다.

양국체제란 먼저 코리아 남북 두 국가가 ‘자신의 체제의 자기존립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말살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상대에 대한 신뢰’는 상호 강화적인 미덕이다. 양국체제의 첫 계기였던 80년대 말~90년대 초반에는 한국도 조선도 그러한 자신감과 신뢰가 부족했다. 양측이 큰 용기를 내어 양국체제에 접근했지만, 한발 더 내딛어 핵심적 신뢰의 조건을 합의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필요조건은 되었으나 충분조건이 아직 채워지지 못했다. 그러나 2016~2017년을 거치면서 그러한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이 비로소 형성됐다. 이 책 앞 장에서 상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그 핵심은 ‘촛불혁명’과 ‘북핵 완성’ 그리고 ‘북미 대화’의 조합이다. 이를 통해 한국과 조선은 자기 체제에 대한 자신감과 상대에 대한 신뢰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역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북미 공존의 대화 기조를 앞으로의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쉽게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코리아 양국의 ‘자기존립에 대한 자신감’과 ‘상대에 대한 신뢰’가 강화될수록 더욱 그러하다. 이로써 코리아가 분단체제에서 양국체제로 체제전환을 이룰 역사적 계기는 충분히 무르익었다.

양국체제는 남북 두 국가의 평화와 공존을 위한 인식체계요 방법론이며, 통일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중간 경로다. 양국체제가 안정되면 남북의 동포는 그동안 허용되지 않았던 많은 자유를 얻는다. 우선 현재의 중국과 대만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정도의 교류와 통신이 목표가 될 수 있다. 물론 이조차 단번에 이루어질 일은 아니고 급하게 서두르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더디더라도 결코 되돌려지지 않는 단단한 합의의 기초를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양국체제의 기초는 두 나라가 서로의 주권, 영토, 정통성을 확실히 인정하는 데 있다. 이 삼자를 서로 부정하고 적대해온 지 70년이다. 이를 바꾸어가는 일은 꾸준한 인내와 지속성, 그리고 용기를 아울러 요청한다.

김낙중과 이명준이 경험했던 분단체제에서 남북 두 국가와 사회는 이들 개인의 자유의 대극에 서 있었다. 그들의 자유혼을 유린하고 억압함으로써 자신(체제)의 무제약적 자유를 한껏 과시했던 셈이다. 분단체제의 남북 정권은 서로 자신에로의 동일화를 요구했다. 아울러 그 동일화의 강도만큼 상대에 대한 부정을 강요했다. 분단체제에서 허여되는 자유와 책임이란 그러한 동일화만큼의 자유와 책임이었다. 김낙중과 이명준의 자유와 책임이란 바로 그 동일화를 거부하는 만큼의 자유와 책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양국체제에서의 자유와 책임은 동일성이 아닌 차이의 인정에 기초한다. 이 속에서 (양국)체제의 자유와 김낙중·이명준의 자유는 상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차이를 존중하고 대화하면서 공존하려 했던 김낙중·이명준의 자유혼은 비로소 현실의 거처를 찾게 되고, 이로써 국가, 사회,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 서로 발걸음을 맞추어가는 시대로 접근해간다. 그러한 국가와 사회와 체제는 분명 이명준, 김낙중과 같은 자유혼이 꿈꾸었던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광장”에 한 걸음 다가간 곳일 터이고, 그때 비로소 통일은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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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4/0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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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방의회 의원의 입법 활동서면 인터뷰>

연방의회 바이에른 아욱스부르크 지역구 의원 울리케 바르 (Ulrike Bahr, 사회민주당•SPD) 의원실 답변으로 본 독일 연방의회의 입법과 의원의 역할:
상임위원회 법안 검토보고 및 토의과정을 중심으로

작성자: 지역구 보좌관 크라취(Kratzsch)

 <각 교섭단체는 상임위원회별로 주제에 따라 검토보고 의원을 둔다>

 

1. 연방의회의 한 의원이 공약사안 등과 관련하여 야심적인 법안을 발의하고자 하는 것을 상정하였을 때, 이 과정에서 의원, 의원실, 의회공무원 등이 어떠한 역할로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하는가?

답변:

a) 의원의 역할

바르 의원은 ‘가족위원회’(가족/노인/여성/청소년 위원회 약칭) 및 그 산하 ‘시민연대소위원회’ 상임위원이다. 추가로 보건위원회 및 가족위원회 산하 아동소위원회 대리위원이다(해당 상임위 및 소위 상임위원 궐석 시에 대리).

연방의회 의원들은 다양한 상임위 가운데 적절한 위원회에 배정받음으로써 전문정치가가 된다. 각 원내 교섭단체는 한 상임위 내에 전문 주제에 따라 각각 전문 검토보고 위원을 둔다. 바르 의원은 가족위원회에서 “아동‧청소년복지, 시민연대, 취약아동건강” 사안 등에 대한 전문검토 보고자이다.

법안이 연방의회에 발의되는 것과 관련하여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은, 누가 발의자이고 어느 상임위가 주관 상임위인가이다. 그러므로 바르 위원의 경우, 가족부가 주관상임위이고 해당법안이 바르 의원의 전문검토보고 분야에 해당하는가가 관건이 된다.

대부분의 연정교섭단체의 법안은 해당 부처에서 준비되고, 내각(국무회의)에서 의결되어 의회에 발의된다. 이어서 연정 교섭단체는 법안의 변경 여부에 대하여 토의를 한다. 의원발의법안은 사실상 야당의원들이 발의하는 것인데 의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바르 의원이 찬성한 동성혼인허용법(민법개정)”을 사례로 본 당과 의원의 역할을 보자면)

연방의회가 열리는 매주 사회민주당(SPD)은 의원 전원이 참석하는 의원총회를 개최한다. 여기에서 연방의회 본회의를 앞두고 논의될 법안과 의결될 법안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진다. 당에는 연방의회의 각 상임위원회 구성에 상응하는 원내 교섭단체 워크그룹(Arbeitsgruppe/AG)이 존재한다. 각 워크그룹 대표는 여기에서 현안의 내용과 각 상임위원회의 토의 및 표결 결과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이 과정에서 예컨대 바르 의원은 관련 상임위원회와 사회민주당 소관 워크그룹의 논증을 비교하여 어느 입장을 따를 것인지를 결정한다. 당의 표결 권고(당론)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 각 의원은 여기에서 자기 당의 모든 의원과 최고위원회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할 수 있다. 표 분산을 막기 위해서 당론 구속이 존재하는데, 원내 교섭단체는 의원총회가 진행되는 동안에 해당 워크그룹 대표를 통해 소속의원들에게 표결권고(당론투표)를 전달한다. 하지만 의원들은 법적으로 이에 구속받지는 않는다.

매 상임위원회 회의가 있기 전에 당의 상임위원들은 소속 당 워크그룹과 만나, 상임위 회의에 대비한 논의를 한다. 검토보고자들은 상임위에서 토의될 사안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하며, 여기서 의원들은 특정 사안이나 법안에 대한 토론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당 소속 워크그룹이 상임위에서 법안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가 조율된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워크그룹이 스스로 이니셔티브를 주도하고자 하면 스스로 법안이나 의안을 작성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연정의 상황에 따라 연정파트너와 조율을 하고 각 교섭단체별 의결을 거쳐 상임위나 본회의에 회부되어야 한다.

검토보고자는 상임위에서 다른 교섭단체에 대하여 자기 교섭단체가 사안에 대하여 어떻게 결정하였는지에 대하여 설명한다. 예컨대 바르 의원의 검토보고 사안인 경우 바르 의원이 워크그룹 및 다른 동료의원과 원내 교섭단체의 제1 대화창구가 된다. 바르 의원은 검토보고에 충실을 기하기 위하여 유관 기관 및 활동가들과 수많은 면담을 진행한다. 물론 비판적 견해도 환영한다. 이로써 자신의 결정이 가능한 현실적이고 정의롭게 내려질 수 있도록 최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바르 의원은 교섭단체 내 워크그룹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판단과 평가 및 바람직한 수정사항 등을 다른 위원들에게 전달한다.

 

b) 각 의원의 보좌진

보좌진은 바르 의원을 위해 내용적인 작업을 한다. 문의사항에 대하여 리서치를 하고, (전문가) 소견을 청취하고, 간담회 일정을 준비하며 의원을 위한 현안보고서를 작성한다. 특정사안에 있어 불명확성이 존재하는 경우 바르 의원에게 완전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보좌진이 활용할 수 있는 거대한 정보원으로서 예컨대 연방의회학술서비스(입법지원실)와 연방통계청 등이 있다. 보좌진들은 다른 의원실로부터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며 소속 당 보좌진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c) 정당의 전문위원

사회민주당 원내 교섭단체에는 각 상임위에 상응하는 워크그룹에 최소한 1명의 전문위원을 배치하고 있다. 전문위원은 의원들과 보좌진들을 응대하여 법안 제출 및 토의 과정에서 이들을 내용적으로 지원한다. 전문위원들은 워크그룹 대표들과 밀접하게 공조한다. 각 의원실의 업무가 전문위원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다. 전문위원들은 다른 원내 교섭단체들, 특히 연정 파트너와의 회합을 주선하여, 법안의 논쟁 부분을 적시에 인지하고, 필요한 경우 의견 조율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주나 지자체 의원 보좌진과의 공조는 이루어지지 않는데, 이는 법이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 당중심부도 사회민주당 원내 교섭단체와는 별도로 움직인다.

 

d) 연방의회 공무원

연방의회학술서비스(입법지원실)의 학술지원직(입법조사관)들은 현안들에 대한 정보를 중립적으로 의원들에게 제공한다. 이러한 작업은 단지 의원이나 의원실의 의뢰가 있는 경우에만 이루어진다. 이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각 의원실에 달려있다.

상임위원회를 위해 일하는 연방의회 직원들은 조직 관련 사무지원인력으로서 일한다. 이들은 의사규칙의 준수를 살피면서 회의록을 작성한다. 입법과정에는 내용적으로 일체 개입하지 못한다.

이와 달리 각 부처의 공무원들은 법안 작업을 하며 법안의 구성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들이 부처의 정치적 의지와 지시에 구속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법안 검토의원 아닌 다른 사람이 대리한다면, 그것은 의회라 할 수 없다>

 

2. 법안의 발의 및 상임위원회 토의 과정

a) 상임위원회 참석자: 상임위원회 위원

▪상임위 위원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 대리참석자가 지정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대리위원이 존재한다. 보좌진이나 입법조사관에 의한 대리는 불가능하다. 회의는 위원회가 선출한 위원장에 의해 진행된다. 위원장은 회의를 가능한 중립적으로 진행하여야 한다. 검토보고자는 각 원내교섭단체의 의원이며, 이들이 가장 먼저 법안과 의안에 대하여 발언을 한다.

▪연방의회 상임위원회 직원은 표결‧발언권이 없이 회의에 참석하여 회의진행을 지원하고 회의록을 작성한다.

▪연방정부 장관 및 차관 또는 부처의 대표단은 의원의 질문이 있는 경우 배석한다.

▪공청회 전문가는 해당 전문사안과 관련하여 초빙되어 의원들에게 해당 사안에 대하여 의견을 진술하고 질의응답을 한 후 해당 사안에 대한 토의가 끝나면 퇴장한다. 공개 공청회인 경우는 예외이지만, 일반적으로 상임위원회는 비공개로 진행된다.

▪연방의회학술서비스(입법지원실) 입법조사관의 경우, 미리 신청 등록을 한 경우 ‘등록된 게스트’로 상임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허용되지만, 발언권은 주어지지 않는다.

 

b) 상임위원회 회의 진행

상임위원장에 의한 개회선언

▪의사일정의 소개

▪간사(일반적으로 워크그룹 대표)들이 회의 시작 전 진행일정에 대해 최종 합의: 당일 토의사항에 대한 연기라든지 표결 진행 등

▪검토보고자의 보고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원의 직무이며, 입법조사관(전문위원)이 대신할 수 없다. 상임위 위원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경우, 반드시 대리위원을 지명하여야 한다.

 

c) 상임위 법안 토의 및 의결 과정

법안이 상임위에 도달하면 토의가 시작되는데, 각 원내 교섭단체의 입장을 표명하는 검토보고로부터 시작된다. 이어서 법안의 세부사항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지며, 이는 연방의회 의사규칙이 정한 순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진행된다. 모든 수정요청 사항은 위원회 다수결로 확인되어야 한다.

연정 원내 교섭단체들의 검토보고자들은 각 당 워크그룹 대표들과 때로는 부처 대표단과 회합을 갖고 위원회 표결을 준비하기 위하여 자체 검토보고자 회의를 갖는다. 종종 심야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래 걸리는 토의과정에서 법안의 세부사항들이 연정 파트너들 사이에 조율되고 확정된다.

법안의 세부사항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면 위원회는 이에 대한 표결을 실시하며 본회의의결 권고안을 작성한다. 위원장은 결과를 접수한 후 직권으로 수정안을 본회의에 회부한다.

 

3. 법안발의자로서 본회의 의결과정에서 의원의 역할 여부?

사회민주당은 대연정 파트너이고 대부분의 법안은 각 부처에서 올라오며, 그 법안들의 토대는 연정협약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 의원의 경우 소관 검토보고자로서의 지위에서 관련 법안에 대하여 코멘트를 하고 평가를 할 수 있다. 사전에 당 워크그룹에서 의견조율을 한 후 해당 상임위원회에서 수정제안도 할 수 있다.

법안은 본회의에서 3회독을 거치며, 각 원내교섭단체가 본회의에서 법안에 대해 코멘트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역할을 (상임위) 검토보고자인 의원이 담당한다.

<이 글은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학모 연구위원이 2018년 9월 독일 연방의회 아욱스부르크 지역구 의원 울리케 바르 의원실에 보낸 질의에 대한 답변으로서 독일어 원문을 박학모 연구위원이 옮겼다.>

화, 2020/04/2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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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달 동안 서양의 현대철학을 다시 리뷰하면서 발견한 것은 현대철학은 니체, 하이데거나 화이트헤드가 탐구해온 보편적 존재론과 포스트모더니즘(푸코, 라깡, 들레즈, 데리다 등),후기포스트모더니즘(알랭 바디우, 조르쥬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과 같은 사회철학, 문화철학 및 정치철학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철학, 문화철학과 정치철학은 모두 그 뿌리를 보편적 존재론을 실체론이 아니라 생성론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는 특히 니체의 생성철학과 하이데거의 실존철학 및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보편적 존재론외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및 소시에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도 힘입은 바도 크다 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덧붙여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서양철학은 시계열적으로 가족유사성을 띄고 있기에 현대철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건 후기포스트모더니즘이건 반드시 그의 사상적 피상속인이 스승으로 존재하기에 그들 스승의 철학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현대 철학자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푸코, 들레즈와 데리다는 프랑스출신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니체와 하이데거 철학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해가 불가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새삼 그들의 사상의 역사적 폭과 깊이가 상상 이상으로 넓고 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오늘날 서양문명의 철학적 토대(자유, 평등, 박애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참여와 연대 등)가 만만치 않게 굳건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서구문명의 전통적 이념들이 최근 코로나 사태를 맞아 비상사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서구 정신문명의 근원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도 제기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필자의 입장은 이러한 팬더믹은 서양 문명의 근본적 결함인 실체론적 존재론에서 기인하는 바도 있지만 도리어 산업화에 따른 독점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 및 재벌독점자본주의와 그이 극단적 발현형태인 신자유주의의 모순에서 기인하는 것이 훨씬 크다할 것이며 이제는 자본주의 자체를 거부할 수 없다라는 체념으로 인해 심화된 산업화의 모순이 인간의 대응능력을 넘어서버릴 정도로 급격히 악화되버린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과도 일치하는 것이기에 따라서 오늘날 마지막 현대철학자라는 칭호를 듣는 지젝의 철학을 일별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지젝의 철학적 태반으로 헤겔의 변증법과 칼 맑스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들 수가 있습니다.

먼저 그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정의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결코 들레즈를 비롯한 후대의 철학자들이 함부로 단정해버린 동일성 또는 통일성의 변증법이 아니라고 재해석하면서 헤겔은 시간성 속에서 변화와 운동을 일으키는 원리를 변증법으로 풀어보고자 한 것이지 결코 차이를 지양하고 배제하여 동일성으로 차이들을 해소해버리는 전체주의적인 철학자가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새롭게 현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독자적인 시각에서 ‘차이의 변증법’을 주장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헤겔은 칸트의 선험적 주체와 같은 독자적인 주체는 존재하지 아니하면 단지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속에서만 자신의 존재의미를 갖게 된다고 보았기에 결국 주체와 타자 사이의 차이를 변증법을 통하여 해소시키고자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에 헤겔의 입장을 대체로 계승한 지젝은 타자를 주체의 결핍으로 보았으며 그러한 결핍의 타자를 통해, 즉 타자의 부정성과 차이성을 통해 즉자인 주체는 자신을 반성하게 되며 이후 타자의 부정을 재부정하는 재귀적 부정을 통하여 자신을 합정립synthese하게 되는데 여기서 타자는 결코 즉자로 흡수되거나 통일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지젝의 변증법은 동일성 또는 통일성이 아닌 타자(대자)를 영원히 차이로 인정하는 차이의 변증법으로 나아가게 되며 단지 차이의 타자로 인해 즉자인 주체는 한껏 고양된 재귀적 존재self-being로 다시 태어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를 우리 속담대로 해석하자면 ‘애들은 서로 싸우면서 큰다’라는 관점과 같다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즉자의 결핍을 내용으로 하는 대자인 타자를 통해 즉자는 자신의 존재의 결핍을 인식하고 반성을 하게 되며 이후 즉자는 자신을 재부정하면서 재귀적 존재로 고양되어가는 한편 영원한 차이인 대자는 자신의 존재를 즉자에 의해 지양되거나 억압받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고유한 부정성을 유지하며 존속하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여 지젝은 즉자는 결핍과 차이인 대자를 통해 재귀적 존재로 고양되는 한편, 즉자는 차이로서의 대자(타자)를 억압하거나 지양하지 않고 즉자와 동등하게 등가적인 가치를 인정해주는 생성론의 세계관을 구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그는 맑스의 이데올로기이론과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결합시키면서 그만의 독자적인 쥬이상스, 즉 향유의 이론을 전개시켜 나갑니다.

맑스는 이데올로기를 부르죠아의 허위의식이라고 규정하였는데 라캉은 프로이트의 생물학적 정신분석학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 해석하면서 자아를 상상계, 상징계와 실재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지젝은 맑스의 이데올로기이론을 상징계이론으로 재해석해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젝은 유아의 상상계를 거울단계로 해석하면서 소타자인 어머니를 자아로 착각하면서 자아는 이미 정신분열의 조짐을 보이는데 상징계에 이르러서는 프로이트의 아버지와 같은 대타자인 국가, 규범, 종교, 자본주의 등에 의해 주체가 수동적으로 사회화되는데 이중에서도 특히 자본주의의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간의 주체가 결정적으로 형성되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결국은 자본이 만든 실상을 은폐한 거짓 환상에 불과하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자본이 만들어낸 잉여욕망의 이데올로기를 마치 욕망의 실상을 구현한 실재계인양 호도하고 왜곡하여 주체를 자본에 복종하는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결국 자본주의는 자신을 결코 전면에 드러내지 않은 채 국가, 종교, 문화, 예술 등 대타자 뒤에 숨어서 욕망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면서 인간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주인이 되고자 획책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여 그는 무엇보다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지 않은 채 대타자들의 뒤에 숨어서 결코 자본주의 모순의 피해자들과의 전면전을 거부하는 자본의 교활한 책략에 봉사하는 잉여욕망의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작업을 빨리 시작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본은 항상 대타자들 뒤에 숨어버리기 때문에 자본주의 모순에 따른 피해자들(노동자, 무산자, 소수자등)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투쟁의식을 희석시키기 때문에 결코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혁명은 전략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지젝은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자본이 만든 상징계의 이데올로기만이라도 그 허상, 환상을 폭로하여 해체하자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 그는 실재계를 향한 향유, 즉 라깡의 쥬이상스enjoyment로서 죽음충동으로서의 향유를 제시하게 됩니다.

달리 설명하면 상징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것은 주체에게는 일종의 기존 사회질서를 부정하는 자살행위와 같은 모험이기에 실재계를 찾아나서는 모험인 향유는 죽음충동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기존 상징계의 질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방법의 실현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향유를 주장한 것입니다.(이는 지젝이 맑스와는 달리 상부 구조가 하부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능산적 주체는 단지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의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주체가 되어 스피노자의 능산적 욕망, 즉 코나투스Conatus가 만개한 실재계를 현실에 실현시킬 수 있는 향유와 차이의 변증법의 주인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 것 입니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의 현대적 변형태인 신자유주의에 대해 엄청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가 슬리브족 출신으로서 서구의 자유주의가 지나치게 개인주의와 결탁하면서 공동체의 연대와 공화주의를 해체하고 뷸평 등을 가속화시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강화하는데 이바지 했다고 보았기에 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허구성을 폭로하는데 앞장서 온 것입니다.

즉, 그는 신자유주의가 자유의 확장이 아니라 도리어 자유의 불평등을 확대, 심화시켰기 때문에 실질적인 자유의 평등을 실현하기위해서는 형식적 민주주의나 경제적 신자유주의를 배격하고 자본과 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전반적인 개입과 통제가 필요하다고 본 것으로 그 방법으로 코나투스로 가득한 실재계를 향한 향유를 제시한 것이며 대안으로 맑시즘과 기독교의 평등정신의 복원을 꿈꾸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대타자에 의해 수동적으로 노예가 되도록 강요해온 자본의 잉여욕망의 이데올로기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이를 해체하는 작업에 시민들이 새로운 인식론, 존재론과 변증법의 주체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현실정치에도 앞장서서 직접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철학은 평등을 강조한 나머지 자유주의 정신의 기틀마저 손상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하는 우려와 함께 존재의 욕망을 당위인 평등가치로 통제하는데 실패해온 역사적 경험을 반추해본다면 그의 정치철학 역시 윤리학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수, 2020/04/29-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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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단서를 앞서 최원식 교수의 “분단체제를 상정한 남북연합”이라는 구절에서부터 풀어가 보기로 하자. 남북연합이란 분단체제론에서 제기해온, 분단체제 극복과 변혁을 위한 핵심적인 방법론이다. 그런데 그 남북연합은 분단체제를 “상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분단체제론은 분단체제 부정론, 극복론, 변혁론이지만, 그 부정, 극복, 변혁을 위해서는 분단체제의 존재와 존속이 상정되어야 한다. 이러다 ‘분단체제’가 ‘분단체제 극복’의 과업 안에 포함돼 어느덧 그 일부가 되어버린다. 그러다 보니 분단체제론과 분단체제를 혼동하는 현상도 생겨난다. 결국 부정했던 대상을 인정하고 공존하게 되는 딜레마가 분단체제론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 ‘분단체제론의 곤경(딜레마)’이라 부르자.

그런데 최원식 교수가 보여주었듯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분단체제는 ‘분단된 남북을 연계시키는 불일불이의 상태’, 즉 그 자체가 “통일의 최종형태”가 될 수도 있는 상태로 격상되는 단계로 나갈 수도 있다. 부정의 대상이었던 분단체제가 소극적인 인정을 넘어 이제 적극적인 긍정의 대상으로 완전히 탈바꿈해버린다. 이것을 분단체제론의 역설(패러독스)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 분단체제론의 역설은 최 교수의 언급을 통해 그 순수한 형태를 드러냈지만, 그 역시 분단체제론의 이론 구조 안에 잠재해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애초부터 백 선생의 분단체제 개념 자체에 부정과 긍정의 2중 계기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분단체제의 부정적 현상을 강조해왔지만 이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었고, 이론적으로 핵심적인 지점은 분단체제란 ‘둘이 아닌 하나의 체제’라는 발상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하나의 체제’라는 발상 속에는 ‘분단의식’ 또는 ‘반쪽국가의식’의 강렬한 ‘분단부정의 정언명령’이 ‘무의식적 금압’으로 깊이 깔려 있었던 것이고,(이 책, 37~46쪽) 그렇기 때문에 ‘한 민족이 이룬 두 개의 국가’, ‘두 개의 코리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양국체제론에 대해 그토록 강한 거부감을 보이게 된 것이다.

분단체제론에서 ‘분단체제’란 ‘하나’의 체제이기 때문에 ‘하나(분단체제)에서 하나(통일)로’ 갈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양국체제에 대한 반발의 근원이 있다. 양국체제론은 한반도 상태를 ‘하나’의 체제가 아니라 두 국가 상태라 하니, 이것은 애초부터 통일을 하지 말자는 것 아니냐고 단정해버린다. 너무나 단순한 이해가 아닐 수 없다. 하나가 되자면 우선 둘이 서로 인정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이 양국체제다. 그런데 그렇게 둘임을 서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가 되자고 하면 ‘먹느냐 먹히느냐’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남북이 경쟁적으로 적대와 불신을 고조시켜왔던 체제가 분단체제였고, 그 분단체제가 통일을 가로막아왔던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 장애물을 치우고 양국체제가 정착되어야만 통일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했다.

분단체제론은 비원(悲願)의 언어인 ‘분단’을 동시에 희원(希願)의 언어로도 사용하고 있다. 분단체제론에서 분단체제는 고통이자 동시에 희망이다. 그렇다 보니 분단체제론의 서술 속에서는 이렇게 한쪽으로는 비원과 고통 그리고 다른 쪽으로는 희원과 희망이라는 정반대의 가치와 정서가 ‘분단체제’라는 하나의 개념을 통해, 이때와 이 장소에서는 이 얼굴로, 저때와 저 장소에서는 저 얼굴로, 번갈아가며 널뛰기 하듯 나타난다. 분단체제론 측에서야 그것이야말로 ‘분단체제’의 양면성과 복합성의 전체상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자부할지 모르겠지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분단체제가 도대체 이것인지 저것인지 자꾸만 헷갈리게 만드는 식자들의 악취미이거나 고질적인 병통이 아니냐고 항의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순전히 이론적으로만 보자면 무슨 악의나 악취미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고, 분단체제론에 내재한 곤경과 역설이 필연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일 뿐이다.

시간적으로 보면, 분단체제론을 처음 제기했던 90년대 초반에는 분단체제의 부정성에 대한 비판과 민중주도 분단극복의 운동성에 대한 강조가 논의의 표면을 압도하여 ‘하나의 체제로서의 분단체제’라는 이론적 핵심이 갖는 함의를 덮고 있었다. 그러다 1997년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위해」라는 글에서부터 분단체제의 부정적 파생 현상보다 ‘둘이 아닌 하나의 체제’로서 갖는 분단체제의 적극적 의미에 대한 인정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이는 1999년에 쓴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새 발상」에서 ‘과정으로서의 통일’과 ‘국가연합’에 대한 적극적 강조로 이어진다. 분단체제 상태에서 연합을 하다 어느 순간 문득 통일이 된다는 발상이다. 2005년에 쓴 「6·15 시대의 한반도와 동북아평화」에서도 둘이 아닌 하나의 체제로서의 남북 상태가 연방·연합제의 조건이 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기조는 이후 출간된 저서들에서 일관되게 유지되어 2012년의 「‘포용정책 2.0을 향하여」에서 종합된다. 그러다 2018년에 이르면 백 선생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말에 “과정으로서의 남북연합 건설”이라는 말까지 더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최 교수의 표현대로 ‘남북연합이 분단체제를 상정’하는 것이라면, ‘과정으로서의 남북연합 건설’이라는 말을 새로 도입하여 ‘불일불이의 분단체제 상태의 장기화’에 대한 적극적 인식을 한 단계 더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분단체제론 30년 궤적 속에서 분단체제는 그 30년간 흔들리고, 허물어지고, 해체되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불사의 존재가 되었다. 분단체제에 대한 백 선생 자신의 기왕의 표현을 통해서 그러하다. 먼저 2006년 출간된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의 머리말이다.

벌써 8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흔들리는 분단체제’라는 책 제목을 달면서 당시로서는 약간의 모험심을 발휘했다. 분단체제가 안 흔들리면 어쩔 거냐는 주위의 은근한 귀띔도 없지 않았다 …… 지금 돌이켜 보면 — 이것이 이번 책의 주장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데 —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남북에서 그것을 받쳐주던 군사독재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1987년 6월부터 이미 동요하기 시작했었다. 따라서 1997~1998년께 가서야 ‘흔들리는 분단체제’라는 제목을 생각해낸 나는 현실에 뒷북이나 치며 따라가는 지식인의 한 표본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그런 지식인들의 세계에서는 2000년 6월의 남북공동선언으로 ‘6·15 시대’가 열리기 이전에 분단체제의 흔들림을 공언했다는 점에서 얼마간 앞서간 형국이 되었다 …… 6·15 공동선언 이후의 세월 동안, 애초의 부푼 기대가 갖가지 난관으로 좌절을 겪는 가운데서도 남북관계가 꾸준히 진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진작에 흔들리던 분단체제가 드디어 허물어지기 시작했으며 ‘6·15 시대’가 곧 분단체제의 해체기에 해당한다는 믿음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분단체제는 이렇듯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고, 허물어져도 허물어지지 않고, 해체되어도 해체되지 않았다. 이렇게 글을 쓴 지 12년이 흘러 이제 촛불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2018년에도 백 선생에게 분단체제는 여전히 마찬가지다.

세월호 때나 탄핵행동 때 무작정 ‘가만있으라’던 권력자들은 몰락했고 그들의 노골적인 ‘좌파·종북’ 몰이는 자유한국당 내에서조차 신용을 잃었다. 그러나 분단체제는 반공수구세력보다 훨씬 뿌리가 깊고 신축자재한 것이어서 일반민중더러 ‘가만있으라’는 기득권층의 논리는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재생될 수 있다.

과연 그토록 신축자재한 분단체제에 대응해야 하는 분단체제론 역시 최소한 그만큼은 신축자재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래야 분단체제를 극복·변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신축자재한 분단체제론이 본 2018년의 분단체제는 단순히 “일반민중더러 ‘가만있으라’는 기득권층의 논리”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다.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닌” 무엇이 되었다.

통일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러나 전쟁을 또 한번 하는 것보다는 지금 상황이 차라리 낫다 하는 게 거의 국민적인 합의사항이 돼버렸어요. 그게 분단체제의 한 기반이죠. 그러니까 분단체제라는 게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쨌든 1953년부터 지금까지 전쟁이 다시 안 일어나고 살아왔으니까 세계의 다른 분쟁지역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행복한 편입니다. 아주 행복한 것은 아니고 그래도 상대적으로 다행스러운, 중동의 여러 지역이나 발칸반도 어디하고 비교하더라도요.

아무리 불만족한 현실이더라도 그래도 거기서 만족할 구석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삶일 것이다. 현상 인정의 심리적 장치가 없다면 삶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렇듯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상에 ‘분단체제’라는 이름을 내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분단체제’가 마치 ‘삶의 조건’, ‘인간 조건’ 수준으로 범박화되기도 하고, 동시에 초월화되기도 한다. ‘분단체제’란 민족 간의 참혹한 전쟁을 일으키고야 말았던 체제다. 전쟁 후의 평화도, ‘경제성장’도 항상 조마조마한 전쟁 위기의 칼끝에서 이뤄져야만 했던 체제였다. 분단체제란 바로 그러한 남과 북의 항상적 위기와 비정상 상태, 즉 영구적 비상 상태(permanent state of emergency)의 구조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체제가 “굉장히 행복한 편”이고, “상대적으로 다행스러운” 것이었다니. 도대체 분단체제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개념이 초점을 잃으면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되는 순간 무의미해진다.

결국 백 선생의 분단체제론에는 분단체제의 지속을 수동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더 나아가 분단체제의 성격 자체에 긍정이 포함되기에 이르는 곤경과 역설의 싹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 곤경과 역설은 분단체제론에서 분단체제라는 개념이 2중의 모습을 띠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 부정의 대상이며, 다른 한편으로 긍정의 대상이 된다. 후자, 즉 긍정의 대상으로서의 분단체제는 ‘남북연합을 허용하게 해주는 조건으로서의 둘이 아닌 하나의 체제’라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백 선생의 글 속에서는 그것이 직접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보다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분석에 들어가기에 앞서 백 선생의 분단체제론의 이론사적 위상을 먼저 짚어둘 필요가 있다. 이론에도 장강의 앞 물결 뒷 물결이 있고, 생애 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보아야 이론의 전체 풍경을 볼 수 있다. 백 선생이 분단체제에 대한 단편적인 발상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라 하지만, 이론적인 구성을 갖춘 체계적 입론으로서 ‘분단체제론’을 처음 내놓은 것은 1992년 《창작과비평》 78호(겨울호)에 발표한 「분단체제의 인식을 위하여」였다. 이 시점은 묘하다. 소련·동구권의 붕괴로 동서 냉전이 종식된 이후이며, 그 여파로 한반도에서 분단 이래 최초로 열렸던 양국체제의 가능성이 내외의 ‘북한붕괴론 – 흡수통일론’ 유포 세력의 반격을 받아 급격하게 닫혀가는 시점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는 분단체제가 그 절정을 지나 크게 흔들리던 위기의 시기였고, 그 위기는 분단체제가 붕괴하고 양국체제가 열리는 첫 계기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분단체제에서 양국체제로의 전환을 완수해낼 내적 역량의 부족(주로 민주진영의 분열로 야기된 것)과 외적 조건의 한계(주로 미국의 대북정책이 강경일변도였던 점)로 인해, 그 가능성이 급격히 닫히고 있던 시점이었다. 아울러 이 시기는 동구권 붕괴와 87년 대선 패배 이후 야권과 운동권이 분열하고 약화되면서 80년대의 ‘사회구성체’ 논쟁을 비롯한 여러 혁명 이론들이 급속히 쇠퇴해가던 때이기도 했다.

위기와 혼란은 새로운 이론을 요청한다. 그러나 분단체제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분단체제론이 등장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더구나 이렇게 등장한 분단체제론은 뜻밖에도 분단체제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하위체제로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그러한 것처럼, 장기지속의 존재임을 설파했다. 80년대 ‘사구체 논쟁’이 러시아 혁명 이후 자본주의 –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대결논리와 그 연장인 반제국주의 – 민족해방투쟁의 혁명이론인 NLPDR(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의 양 측면(NL과 PD) 사이의 논쟁이었던 만큼, 자본주의 – 사회주의의 진영 대립이 붕괴된 새로운 상황에서 미래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시각이 요청되던 때였다. 그런데 왜 다시 ‘장기 자본주의’이고 더구나 ‘장기 분단체제’인가?

자본주의 – 사회주의 양 진영의 대립, 즉 냉전의 붕괴는 단순히 사회주의(현실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알리는 신호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깊은 수준에서 세계사적 격변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소위 ‘아메리카 발견’으로부터 시작된 서구 자본주의적 근대의 긴 여정과 그 격발점이 된 ‘긴 유럽내전’, 그리고 그 유럽내전을 배경으로 한 유럽 – 서구의 세계지배의 역사가 비로소 종식되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러한 사실이 이제 서서히 학계를 중심으로 인정되고 확산되고 있지만, 분단체제론이 처음 모습을 보인 1990년대 초반에 이러한 인식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백 선생의 분단체제론이 크게 의지한 세계체제론자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도 2001년의 가히 묵시론적인 9·11 이후에야 (그가 500년 되었다고 본)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막장에 이르렀다는 것, 세계사는 미지의 새로운 단계(가지치기, bifurcation)로 접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새로운 단계가 자신의 입론인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론 자체에 대한 상당한 수정을 요구한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인식이 미치지 못했다.

나는 백 선생의 분단체제론에 대한 비판에 앞서,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분단체제론이 처음 제기되었을 당시인 80년대 말~90년대 초반에 그토록 크게 변화했던 현실에 대한 완전한 조망을 가질 수 없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된다고 본다. ‘사구체 논쟁’의 주도자들 대부분이 이론적인 혼란과 좌절 속에서 물러나 앉는 상황에서 백 선생이 새로운 종합의 무거운 짐을 지려 했던 용기는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아울러 그 이후 거의 30년 동안 담론의 확산을 넘어 ‘6·15 민족공동위’ 등 현실의 통일촉진운동의 주요 행위자의 하나로 적극적 역할을 해온 것 역시 그렇다. 이 글은 이러한 인식을 전제한다.

다만 공적과 함께 그러한 시대상황에서 나왔던 이론의 한계 역시 짚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2018년)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적 전환기다. 그런 작업 없이 미래는 정확히 포착되지 않는다. 분단체제론이 처음 제기된 1990년대 초반은 오늘날보다 더 큰 변화가 진행 중이었고, 당시의 현실과 미래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불투명하고 불확실했다. 당시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처음 겪는, 어느 역사책에도 전례가 없는 새로운 상황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단체제론은 ‘길’을 제시해야 했는데, 이때 현실과 미래에 대한 탐색은 ‘인간의 조건’ 속에서 필연적으로 과거의 의상과 언어를 빌려 행해질 수밖에는 없었다. 이 또한 백 선생이 제기했던 분단체제론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의상과 언어를 빌린다’는 말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유명한 풍자적 언어이지만, 나는 결코 단순히 풍자적인 뜻으로 이 말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말을 했던 때의 마르크스는 아직 젊었다. ‘빌린다’보다는 강물처럼 ‘잇는다’가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질서와 같다. 반드시 빌리고 이어갈 수밖에 없되, 또한 그것을 넘어서 가야 하는 것이 무거운 사명이다.

백 선생이 이었던 흐름의 하나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었다. 이 이론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체제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붕괴 이전부터) 이 체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예견하고 있었다. 소련·동구권 붕괴 직후 이러한 세계체제론에 근거한 분단체제론이 나름의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소련 해체 이후 미국 중심의 일극주의적 세계질서는 세계체제론이 설파해온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일성(專一性)을 입증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9·11 이후 이라크 전쟁의 실패, 그리고 연이은 금융 위기로 미국 일극주의는 급격히 막을 내렸다. 이후 세계는 명백하게 다극화로 가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전일성 대신 국가, 시장, 호혜 공동체가 다양하게 조합되는 ‘혼합체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앞 물결은 백 선생 자신이 그 가운데 있기도 했던 70년대 재야 민주화운동의 ‘분단시대론’과 ‘분단체제론’이었다. 엄혹한 냉전, 유신시대의 절정기에 제기된 이 견해들은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이 안으로부터 이에 ‘상응하는’ 세력이 생기면서 ‘분단체제’로 발전했다고 보았다. 70년대 분단시대/체제론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는 남과 북 모두의 정부·체제·국가에 대한 강한 불신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주도자들은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투쟁을 이끌면서 투쟁의 궁극적 목표를 통일에 두고 있었는데, 그 통일이란 남과 북의 현존 체제, 국가를 부정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남과 북의 기왕의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공모(共謀)에 불과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냉전의 절정기에 남과 북 모두를 정당성 없는 ‘반쪽국가’(1971년 함석헌 선생의 표현으로는 “둘 다 가짜”)로 보는 것은 그 시대에는 그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두 개의 가짜’를 걷어내고 ‘민중의 힘’으로 하나의 진짜를 찾아내자는 것이 당시 재야운동권 분단체제 극복론의 논리요 정서였다. 70년대 재야 민주화론, 통일론이 한국 민주화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다. 그 논리와 정서는 모든 코리안에게 ‘무의식적 금압’으로 깊이 깔려 있던 ‘분단부정의 정언명령’의 강렬한 표현이었고, 백낙청 선생의 분단체제론은 그 흐름을 이었다. 그러나 ‘둘 다 가짜’라는 논리와 정서는 동서 냉전이 종식되고 남북 유엔 동시가입이 이뤄졌으며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어 분단체제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이후에는 더 이상 자명한 명제일 수가 없었다.

필자가 양국체제론을 제기하게 된 것은 87년 이후 30년에 대한 뼈아픈 반성, 복기(復碁)의 결과였다. 그때는 촛불혁명 전이었고 상황은 암담했다. 우선 어찌하여 87년의 희망이 이렇게까지 어두운 지경으로 곤두박질쳤는지 그 이유를, 그 뿌리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도달한 것이 한국 현대사에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가 30년 주기로 작동해왔다는 생각이었고, 그 ‘마의 순환고리’를 깨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단체제를 끝장내고 양국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던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이제 그 촛불혁명의 힘으로 ‘분단체제에서 양국체제로의 전환’은 막연한 희망을 넘어 현실의 발판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체제전환’이 이루어져야 촛불은 진정 혁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제기된 양국체제론에 대해 뜻밖에 창비 분단체제론 그룹이 그렇듯 강하게 반발해온 이유가 무엇일까? 문제제기의 전후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다만 양국체제론을 제기한 목적이 단지 창비 분단체제론을 비판하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필자가 ‘잃어버린 30년’을 복기하면서 분단체제 – 분단체제극복의 논리가 ‘분단체제의 반복강박’의 일부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비판은 창비 분단체제론을 특정한 것이 아니라 87세대 운동권 일반, 아니 60~80년대에 형성된 민주화 운동권 일반의 분단극복 논리에 내재된 모순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런 논리로는 ‘마의 순환고리’를 깰 수 없었고, 그 결과 87년은 결국 다시 독재로 회수되고 말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 없이, 다만 창비 분단체제론을 비판했다는 사실 자체에 반발하고 있었다. 그 반발의 내용도 들여다보면 ‘분단체제’ 비판을 ‘분단체제론’ 비판과 등치하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애초부터 양국체제론 구상의 동기가 무슨 ‘창비 비판’에 있지도 않았고 분단체제와 분단체제론은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처음에는 그렇게 특이할 정도로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분명히 내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본지(本旨)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순한 오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반발의 배경에 필자와 창비 그룹 사이에 ‘분단체제’ 개념에 대해 매우 큰 이해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서서히 그리고 이제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양국체제론은 분단체제론과 마찬가지로 분단체제를 비판하며 이를 극복하자고 한다. 그런데도 양국체제론에 그렇듯 반발하는 이유는 실제로 ‘내가 생각하는 분단체제’와 ‘분단체제론이 생각하는 분단체제’가 실제로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읽어 보니 분단체제와 분단체제론은 분명 서로 구분이 안 되는 바 있다. 분단체제를 비판하고 극복하자고 시작한 분단체제론이 어느덧 분단체제와 동반(同伴)하자는 이론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양국체제론의 핵심은 마의 순환고리를 끊자는 것이고, 마의 순환고리의 핵심에 분단체제가 있다. 따라서 양국체제론의 입장에서는 분단체제를 확실히 끝장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분단체제론은 어느덧 분단체제와 적당히 공생하자는 주장이 되어버린 것인가. 분단체제론은 어느덧 ‘분단체제 현상유지론’이 되어버린 것인가. 그렇다면 정말 문제는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게 된다. 중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를 차근차근 밝혀보기로 한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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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5/0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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