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문명의 교류와 융합

지역

문명의 교류와 융합

익명 (미확인) | 수, 2019/04/03- 10:14

인류문명은 크게 아리안족 문명과 셈족 문명 그리고 한족 문명으로 니누어 볼 수있습니다. 무엇보다 기원적 2천년전 코카써스 산맥 북쪽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아리안족Arya이 이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인류문명은 대융합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서쪽으로 이주한 아리안족은 에게해의 크레타 문명을 몰락시킨 후 그리스와 터키로 연결된 지중해 연안의 도시에서 해상국가로 거듭납니다. 한편 남하한 아리안족은 이란을 거쳐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에 이르러 기존의 드라비다족을 내쫓은 후 인더스문명의 뿌리를 내리게됩니다. 이후 이란을 거쳐 아라비아 반도로 내려온 아리안족은 수메르와 아카드문명에 뒤이은 셈족의 바빌로니아 문명을 패퇴시킨 후 독자적인 페르샤문명을 구축하게 됩니다. 결국 아리안족은 인류문명, 특히 서구문명의 주축을 이루는 그리스로마 문명과 페르샤문명 그리고 인더스 문명을 구축한 주인공으로 거듭나게됩니다.

사진: 서울신문

따라서 아리안 문명의 특징을 알아봅시다. 무엇보다 여러 측면에서 발현되는 다양성을 들수 있습니다. 이는 신관에서도 나타나는데 최고신을 Deva, Jeus, Deus, Dei라고 부르는 다신론으로 표현되었으며 또한 다양한 삶을 살 수있다는 믿을을 전제로한 윤회사상을 믿어 왔습니다. 또 다른 특징을 살펴보면 특히 그리스로 이주한 아리안들은 주로 지중해 해안가 도시들에 살면서 바다를 상대로 교역을 해왔기때문에 항해시에 반드시 필요한 시각중심의 문명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이에따라 그들은 눈에 보여진 것(파도, 현상)과 보여지게 만드는 것(바다, 본체)의 차이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본체를 인식하는 능력인 이성을 중시하게 되는 로고스logos형이상학을 발달시키게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뒤에서 보듯이 본체 중심의 사고는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플라톤에 이르러 절대적 실체론으로 전개하게 됩니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에서 미리 정착했던 셈족 문명의 특징을 알아봅시다. 무엇보다 사막이라는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야했던 그들은 원초적으로 초능력자와 초월자를 요청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기에 초월성과 유일성 및 절대성을 문명의 본질로 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여 그들이 믿는 신은 아리안문명의 다양한 인격신을 배격하고 오로지 최고의 단일신, 예를들어 수메르의 엘, 바빌론의 마르두크, 가나안의 바알, 유대교의 야훼나 이슬람의 알라를 숭배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거의 유사하다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실았던 바빌론의 우르지역에서 믿었던 최고의 신은 마르두크였기 때문에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 유대인의 유대교 야훼는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내용의 유일신이라할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사막에서 살았기때문에 모래바람들이 내는 소리를 중시하는 청각중심의 문명입니다. 하여 야훼의 말씀이 창조를 이루고 율법(십계명)이 된 유일한 소리의 문명으로 남게된 것입니다. 따라서 시각을 배격하고 청각,즉 소리만을 유일신의 증거로 보았기에 신을 시공간속에 형상화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한편, 중국을 살펴봅시다. 중국인들은 인격신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독특하게 하늘을 신으로 상정하여 왔습니다. 즉 신에대한 설문해자를 보면 신은 하늘의 번개 모습을 띄는데 이는 하늘이 위력과 영묘함 그리고 길흉화복의 예측능력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신은 인간의 삶의 주재자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신은 창조자나 구원자가 아니라 인간사를 좌지우지하는 주재자이기에 그의 명령을 잘 따르는 자가 인간사회의 주재자, 즉 (황)제가 된다고 보는 천명론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즉 하늘의 천명을 받는 자는 덕을 갖춘 자이어야하기 때문에 천명론은 인성의 수양론으로 연결되어 집니다. 따라서 중국사상은 심(인간 마음)과 성(우주의 본성, 즉 하늘, 천명)은 출발부터 일치를 지향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즉성 사상은 이후 인도로부터 들어온 불성사상(불성은 가능태로서 보통 실체인 여래장과 혼동되고 있습니다)을 심즉시불(마음이 곧 부처! 즉 불성은 현실태로서 본래성을 의미한다할 것입니다)의 사상으로 격의하여 점수가 아닌 돈오 중심의 6조 혜능의 돈오돈수 사상이 선불교의 정통으로 자리잡게 되어 오늘날 한국의 선불교의 모태가 됩니다.

그리면 이제부터 아리안문명이 서쪽과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기존에 터잡은 셈족 문명과 한족 문명에 끼친 영향을 알아봅시다. 먼저 아리안족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만나게된 셈족 문명,특히 기독교와의 만남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이 만남에서 촉매역할을 한 사람이 로마 시민권자이자 유대인인 사도 바울이라할 것입니다. 그는 아리안 문명에 속한 로마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회심한 후에 셈족의 유대교를 벗어나서 예수의 가르침을 기독교로 보편 종교화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신의 말씀인 율법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만의 종교틀을 벗어나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있기에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수있다는 보편종교로서 기독교 사상을 구축하였는데 이를 이신득의,이신칭의라고 부릅니다. 이신칭의는 그 자신이 디아스포라였기 때문에 기독교를 본토 유대인만의 민족종교가 아니라 그 밖의 유대인 나아가 인종을 초월한 보편종교를 만들기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이를 뒷받침한 사상이 로마의 만민법사상과 스토아의 사해동포주의라할 것입니다. 하여 바울이 기독교 구축에 기여한 공로는 지대하다할 것이나 근원적으로 당대의 그리스,로마의 존재론은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실체론이었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는 바울을 만나 철학적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지만 아쉽게도 이데아와 현상으로 세계를 이분법적이고 수직적인 질서로 보는 실체론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실체론은 실체를 독립적이고 고정불변한 존재로 보기에 단일하고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있으므로 후행존재의 원인이 되는 선행존재는 존재근거인 실체가 되어 상대방의 본질을 파악하여 그를 도구로 지배하고 이용하게됩니다.

(그러나 실체는 인간이 대상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하기위한 언어적 허구개념이라는 점은 수차례 지적하였습니다만 이런 실체 개념으로 2천년동안 지구를 지배해왔으나 이런 허구적 개념으로는 현대의 문제를 절대로 해결할 수없기에 새로운 존재론, 즉 생성론을 구축하여야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을 제1원인의 실체, 즉 플라톤의 이데아로 간주하는 기독교는 피조물인 인간에 대해 초월적인 지위에서 일방적으로 지배할 권한을 갖게되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수직적 계서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질서는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인간과 자연을 무자비하게 지배하게되는 제국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또한 선과 악 또한 실체로 간주하기때문에, 즉 악은 박멸해야할 실체이기때문에 중세의 대표적인 악인 마녀를 불에 태워죽이는 끔찍한 행위를 도리어 정의로 간주하는 비정상의 행태를 보입니다. 따라서 만일 바울이 그리스,로마가 아니라 인도의 불교문화를 찾아 동쪽으로 나아갔다면 상호의존의 연기법과 얽힘의세계로 이루어졌다는 화엄사상, 즉 상입상즉의 사상을 예수의 해방과 구원의 사상에 결합시켰더라면 오늘날 예수의 가르침은 어떻게 구체화되었을까요?

이에대해 BuddistChristian이 하나의 해답을 제시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아리안족이 동진하여 인더스강에 독자적인 인더스문명을 개척하여 다신교인 힌두교를 낳았으며 이후 부처라는 걸출한 각자를 만나 힌두교의 존재론과는 전혀 다른 종교인 불교를 성립하게 됩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큰 차이는 힌두교는 실체론에 근거한 사상이고 불교는 비실체론,즉 생성론,사건론,과정론 에 근거한 자연철학이라할 것입니다. 하여 힌두교는 범(Brahman)아(Atman)일여에서 보듯이 불교와 유사하게 보입니다만 힌두교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보고 불교는 존재를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의 연기적 과정이라고 보고 있으므로 모든 존재는 연기법에의해 내재적으로 서로 생성과정에 참여하기에 우주의 뭇 존재는 연기로 촘촘히 얽혀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존재는 상호 내재하므로,즉 상입하기에 서로 남남이 아닙니다(즉 자기언급self reference). 또한 같이 참여하기에 서로 등가적 존재로서 평등하므로, 즉 상즉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세계관에서는 지배복종의 계서적 구조는 사라지고 오직 수평적 상호관계만 존재하므로 강자에 의한 약자를 배제하는 변증법이 아닌 강자와 약자가 중첩하여 제3의 대안을 제시하는 창발적 중도법을 따르게 됩니다. 하여 비록 아리안문명이 인도에 다신론과 실체론에 기반한 힌두교를 낳았으나 그럼에도 석가모니라는 위대한 각자를 만나 불교라는 비실체적 존재론을 통해 아리안의 실체는 허상에 불과하고 연기론이 실상의 법칙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제 인도불교가 중국에 미친 영향을 알아 보도록하겠습니다. 인도의 대승불교가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연기사상외에 유가행 중관학의 공사상과 세친의 유식사상 그리고 화엄사상이 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인도 고승인 달마대사가 중국 남부 양나라에 들어갔을 당시 중국불교는 호국불교 또는 기복불교로 전락되어 부처 본연의 가르침이 쇠락되어 버렸으며 이를 알고난 달마태사는 부처 가르침을 신도들이 직접 깨닫게 하기위해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행을 하게됩니다. 하여 달마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중국은 자신의 고유사상과 융합 convergence 또는 자신의 고유사상으로 격의 transformation한 중국만의 독자적인 선불교를 만들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중국의 고대 유교의 심성론은 심과 성 (본성,자성)은 일치한다고 (심즉성) 보았으며 또한 본성은 하늘로 부터 부여받았기때문에 부지런히 수행을 하여 마음의 덕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한편 인도에서는 불성은 부처가 될 가능성을 의미하기에 자신이 불성의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고 이후 수행을 통해 불성을 깨우쳐 우주의 실상을 깨닫는다는 것을 골격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여 중국의 심즉성 사상과 인도의 심즉시불 사상(이는 이(불)사(심)무애사상에도 나타납니다)은 서로 유사성을 띄기에 인도의 점수돈오 사상이 중국에서 선불교로 정착하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결국 인도의 점수돈오 사상이 중국의 심즉성 사상에 힘입어 선불교로 격의하게되었다할 것입니다. 다만 차이점은 인도 불교는 불성을 여래장처럼 ‘가능태’로 보았기에 요가처럼 점수의 수행이 필요하였다고 본 반면 중국은 본성,즉 자성을 ‘현실태’로 보았기 때문에 찰나심에의해 돈오할 수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중국인들은 불성이 현실태이기에 즉시 알아차리기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중국 선불교는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나뉘게 되는데 남종선의 좌장인 신수대사는 인도불교처럼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야한다고 본 반면 6조 혜능은 본성 또한 본래무일물이므로 수행한다고 반드시 알아차릴 수있는 것만은 아니기에 수행이 의미없고 오직 찰라의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는 위에서 본 중국 전통의 심즉성 관점을 온전히 따르고 있는 입장이라할 것입니다. 즉 신수는 점수돈오이고 혜능은 돈수돈오라할 것인바, 이런 관점은 기존의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논쟁과는 내용이 다른 문제이니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한편 달마의 영향으로 중국인은 종래의 심성론을 불교적인 심즉시불 사상으로 다시 격의하게 되었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심즉성과 심즉시불은 같은 의미라고 보았으며 결국 마음과 우주 본성은 일치한다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금나라로부터 송나라가 남송으로 쫒겨나가게 되자 주희는 중화의 부흥과 사회기강의 확립을 부르짖게 되는데 이의 근본원인을 불교의 반사회성에 있다고 보았기에 불교를 척결하고 새로운 유교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는데 이 것이 신유학, 즉 주자학, 성리학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도는 불성을, 중국은 자성을 본성으로 보고 주객미분 이전의 본래면목이라하여 심즉성과 심즉시불 사상에 의해 본성과 마음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희는 우주의 본래면목(본성)을 주객을 번별하는 인간의 도덕성으로 격하시킨 후 성과 심은 일치하지가 않다며 이를 이원적으로 분리시킨후 성이 심을 수양하는 존재, 즉 (도덕)성 의 함양을 위해 성이 심을 양성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성이 아닌 심의 덕을 쌓기위해,즉 천명을 받기위해 심을 수양해야한다는 유학의 정신과도 배치된다할 것으로 주희의 신유학은 마음과 분리된 성중심의 실체론적 계몽주의라할 것으로 뒤에서 보듯이 실체론이 갖는 문제점을 모두 노정하고 있다할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그는 성을 도덕성으로 축소시킨 다음 이를 ‘성’이 아닌 ‘리’라고 칭하였으며 성으로부터 분리된 ‘심’, 즉 마음을 지닌 존재를 ‘기’라고 격하시켰습니다. 이는 불교의 ‘이’와 ‘사’의 사상의 본 뜻(자연과 인간의 일치!)을 완전히 배격해버리고 단지 형식적 이원적 구조만을 흉내낸 것에 불과합니다. 즉 그는 불교의 우주 원리를 인간의 윤리로 도용한 것이라할 것입니다. 하여 그가 불교의 우주원리인 이사무애를 형식상 차용하였지만 실상은 이를 이용하여 인간사회의 윤리기강을 잡으려하였기에 실제로는 그는 이사무애,즉 이기무애가 아닌 이선기후를 추구한 것이라할 것입니다. 즉 중화를 중심으로 그틀의 가치나 제도를 보존하기위해 타 민족을 도덕적으로 계몽하고 훈육하고자한 것에 불과하다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불교의 존재원리를 인간의 규범(도덕)원리로 격하시킨 후 선험적인 ‘리’에 경험적인 존재인 ‘기’가 복종해야 사회질서가 살아난다는 지극히 인간중심주의, 중화중심주의의 폐쇄적인 사상으로 유교를 전락시켰는데 이는 서구의 실체론 못지않게 리를 실체화시켜 못 존재를 그에 복종시키는 계서적 구조(3강5륜), 경직성(예론), 폐쇄성(중화사상), 인종차별(호론과 낙론) 등을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중국은 근대의 과학화, 민주화, 산업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퇴행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세계 문명은 항상 상호 작용에의해 생성된다는 것을 알 수있으며 나아가 실체론적 존재론(유일신사상과 신유학등)으로 무장한 문명은 개방성, 역동성, 창발성이 부족하기에 새로운 문명의 대안을 찾는 중도적 자세가 결여되어 반자연, 반인간, 반문명으로 흐른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있다할 것입니다.

ㅡ하여 바울이 서쪽으로 가지않고 동쪽으로 갔거나, 달마가 동쪽으로 가지않고 서쪽으로 갔으면 인류문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지난 광복절 광화문 집회로 한국의 코로나19 양상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그것은 단순히 확진자 수의 급증과 확진 속도의 증가 등 의학적 또는 양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편의상 광화문 집회 이전을 코로나19 제1기, 이후를 제2기로 나누어 부르도록 하자. 이렇게 시기를 나누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코로나19가 비추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광화문 집회를 전후로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제1기에도 물론 초기에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분열이 두드러졌다. 새로운 감염병을 ‘우한폐렴’으로 부르며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을 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신천지 신자 감염으로 확진자 수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그런 정치적 분열이 더욱 커지는 듯했다. 그러나 정부-산업-의료계의 발 빠른 협업으로 감염병 차단에 성공하면서, 특히 외국의 언론을 중심으로 한국의 감염병 대응에 대한 찬사가 그런 정치적 분열을 중화했다.

물론 정치적 대립의 양상 속에서도 시민들은 여야 성향을 막론하고 정부의 감염병 대응에 매우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분열의 잦아듦이 순전히 서구 언론의 공적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서구 언론에서 포착한 지점이 바로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라는, 그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의 언론들은 ‘어떻게 이런 특이한 현상이 한국에서는 가능한가?’를 분석하느라 열심이었다. 특히 처음부터 대중국 봉쇄정책을 폈던 대만, 싱가포르와 달리 봉쇄정책 없이 감염병 대응에 성공한 한국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러나 정작 그들 또는 그들이 지면을 할애해준 자국 전문가나 재외 한국인 학자들의 의견 중 대세는 ‘유교 문화’나 그와 관련된 ‘집단적 순응성’, ‘독재 경험으로 인한 파시즘적 경향’ 등 봉쇄정책을 폈던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별 차별성이 없는 내용이었다. 한국에 우호적인 마이클 샌델이 ‘공동체 감성’이라는 그나마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순응성이나 집단주의, 독재 등이 부정적이거나 전근대성을 암시하는 표현인 만큼, 외국의 언론에서 이런 표현들은 대체로 한국 정부의 확진자 추적 및 정보 공개와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특히 강력한 개인정보 보호법을 갖춘 유럽에서 그와 같은 원색적 비난이 돌출했는데, 거기에 재외 한국인 학자들이 가세하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오리엔탈리즘 관점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정부 기관의 확진자 정보 추적은 법적 기반을 갖는 것이고, 그 법은 과거 메르스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즉 그것은 한국사회의 ‘독재 적응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염병 대응에 대한 이전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비판’에 기초한 것이다.

물론 법 제정이나 집행에 있어서 개인정보 관련 사회적 논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음은 마땅히 지적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개인정보 인권 감수성이 서구보다 미약하게 관찰되는 경우에도, 순응성이나 집단주의 문화로의 환원은 분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화적 편견을 재생산하는 오리엔탈리즘에 가깝다. 그뿐 아니라 과거 스페인 독감 이후 ‘전염병의 위력’을 완전히 잊은 듯한 서구에서 일어난 ‘마스크’에 대한 적대감과 지리멸렬한 논쟁은, 그러한 오리엔탈리즘이 문화적 차별주의뿐만 아니라 비과학적 태도와도 결합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공동체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은 한국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착한 임대인 운동’이나 의료인들의 대구 자원봉사 지원과 같은 긍정적 현상들에 기초하여 한국사회의 ‘공동체 감성’에 대해 평가했다. ‘공동체’라는 개념은 서구의 주류 사회학에서는 전근대성이나 집단주의와 거의 다르지 않게 사용된다. 그리하여 전근대적인 공동체적 연대 관계와 근대적인 기능적 연대를 대립시킨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에서 사용하는 ‘공동체’는 이미 기능분화가 진행된 서구 자유주의 사회를 대상으로 ‘공동체적 덕성’의 회복을 촉구하는 개념이다. 반면에 과거 사회학에서도 마르크스주의 쪽에서는 ‘노동계급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근대적 의미로 ‘공동체’ 개념을 사용했다.

‘공동체’ 개념이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지만, 그것의 핵심은 ‘도덕적 가치 또는 문화의 공유’에 있다. 다원주의를 내세우는 자유주의 사회학에서는 가치 중립성을 강조하며 기능분화에 기초한 복잡한 사회에서 도덕적 가치의 공유가 특수주의를 강화하고 보편성을 훼손한다고 본다면,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이나 공동체주의에서는 이념이나 덕성의 공유―즉 공동체적 정체성―에 기초하여 평등 또는 사회정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 개념은 사회구성원이 공통의 정체성을 갖는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민족주의나 흑인문화, 고유문화 등을 강조하는 종속이론이나 다문화주의에서도 공동체 개념을 중시한다.

이렇게 보면 자유주의만이 ‘공동체’ 개념에 반대한다고 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 제3세계 민족주의, 공동체주의, 다문화주의 등은 모두 반자유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 역시 ‘가치의 공유’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보면서 자유주의의 이율배반을 비판하는 관점이 있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근대 소유계급 남성의 정체성’에 기초한 것으로서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처럼 ‘동질적인 집단 정체성’을 기정사실화하는 모든 관점에 대항하여 ‘차이의 정치학’을 펼쳤다. 따라서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동질성을 강조하는 ‘공동체’ 개념이 아니라, 차이를 당연시하는 ‘도시적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1】

 

한국은 공동체 사회인가?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공동체적인 사회인가? 또는 공동체적 감성에 기초하여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가? ‘공동체’의 개념이 도덕적 가치의 공유라면, 위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는 이념 대립이 여전히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세대 간 가치변화로 소통이 어려우며, 젊은 층에서는 젠더갈등 역시 역동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제1기에서 공동체적 가치의 공유가 두드러졌다면, 그것은 ‘안전’의 가치, 특히 ‘전염병으로부터의 안전’이라는 매우 특수한 가치의 공유일 것이다. 메르스의 위험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에, 사회적 이질성이 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의 위협 앞에서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결속력이 한국사회의 ‘공동체’ 속성이 아니라, 재난 앞에서의 ‘실용주의적 연대’의 성격을 갖는 것임을 보여준 사건이 바로 광복절 광화문 집회였다.

광화문 집회를 계기로, 공동체적이었다던 한국사회에서 이제는 ‘이기주의’가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사회는 다른 기능분화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도 아니고 이기주의적이지만도 않다. 코로나19 제1기에서 ‘공동체적 대응’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한국사회의 공동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코로나19 재난에 대한 한국사회 특유의 위험성(risk) 인식이다. ‘위험사회’에서 위험은 리스크를 번역한 것이다. 즉 현대 기술문명위험의 사회를 ‘재난사회’가 아닌 ‘위험(성) 사회’라고 부르는 이유는, 재난의 가능성과 현실이 위험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통해 걸러져서 비로소 그에 대한 대응을 부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과거 메르스에 대한 공포와 그와 연관된 정권변화 등 일련의 사건들이 만들어놓은 ‘인식 틀’을 거쳐서 코로나19를 인식했고, 그 결과 정부와 산업체, 의료기관이 모두 합심할 수 있었다. 단지 코로나19 감염병에 대한 공포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해서 가능한 정부 실패와 의료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기업 이미지 제고와 새로운 이윤의 실현 가능성 등 다양한 요인들이 함께 작용하여, ‘공동체적 연대’가 아닌 ‘기능적 연대’를 가능하게 했다. 제도 실패의 위험에 대한 자각이 한국사회의 이질성과 갈등 속에서도 기능적 연대를 가능하게 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연대 속에서 여당의 선거 승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형성된 새로운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작금의 ‘이기주의’가 ‘공동체 감성’을 거의 완전히 대체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공동체 감성’이든 ‘이기주의’든 둘 다 완성된 속성으로서 존재하는 한국사회의 어떤 본질적 측면이 아니라, 코로나19 감염병과 한국사회의 정치·경제·문화적 재배치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사회는 전근대적 공동체도 아니고, 독재에 익숙한 순종적 사회도 아니며, 모든 사람이 사회적 덕성에 대한 개념을 공유하는 동질적 사회도 아니다. 오히려 광화문 집회를 전후로 첨예해진 갈등 상황이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는 한국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코로나19의 위력 아래 연대와 통합이 촉진되었던 제1기의 국면이 이제 정부의 부동산 정책, 의사 증원 계획 등의 환경변화로 인해서 제2기의 ‘이기주의’ 국면으로 전환된 것이다.

 

연대의 희망: 부작용의 정치? 또는 새로운 존재론적 정치?

집단적 이해관계를 내세우는 ‘이기주의적’ 이익집단들은 반공동체적 집단인가? 아니면 그들만의 특수 공동체를 형성한 것인가? 이런 물음과 함께, ‘공동체’라는 개념의 중립성 또는 도구적 성격이 드러난다. 즉 ‘공동체’란 단지 특정한 도덕적 감정을 공유하는 집단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관찰 수준에 따라서 공동체와 사회 또는 공동체와 이익집단을 상호배제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전환이 가능한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자유주의 사회학에서 주장한 ‘기능분화’ 개념은 이 지점에서 문제가 된다. ‘기능분화’가 공동체의 특수적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는 ‘보편성’의 기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나 페미니즘에서 지적하듯이, 기능분화의 보편성 역시 또 다른 특수주의적 가치의 하나일 뿐이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부르주아 특수주의를 노동자계급 특수주의로 바꾸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면, 페미니즘은 특수주의 감정의 집단적 동일시 자체를 ‘차이 억압의 기제’로 의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동체는 억압적이거나 이기주의적으로도, 또 더 많은 평등을 위한 연대의 방식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기주의적인 집단적 목소리, 집단감정을 어떻게 ‘선한 영향력’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할 수 있는가? 즉 이제 더는 기능적 연대가 불가능한 것인가?

기능적 연대란 개별 이기주의 행태가 사회 각 부문의 기능적 연동 속에서 역설적으로 사회통합의 결과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초창기에 기능주의와 행보를 같이 했던 급진 구성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후기로 가면서, ‘기능적 연대가 불가능해진 세계사회’에 대해 발언했다. 도덕적 가치의 공유가 아니라 기능 및 이해관계의 분화에 기초한 사회라는 측면에서 한국을 비롯한 현대사회는 여전히 기능적 연대 이외의 다른 형태의 연대를 추구하기 어렵다. 집단적 가치의 공유로 회귀하자고 주장할 경우 독재나 파시즘으로 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코로나19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집단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이기주의적 집단 행태가 불거지면서 과연 ‘연대가 가능한가?’라는 불안감이 증폭하고 있다.

루만처럼 새로운 연대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사회학자가 있는가 하면, 새로운 연대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사회학자도 있다. 울리히 벡은 산업사회가 위험요소로 계산하지 않은 생태위험이 부메랑이 되어 산업사회를 강타하면서 새로운 연대가 불가피해졌다고 보았다. 단순한 기능적 연대가 아니라, 연대의 기초가 바뀌는 ‘성찰적(또는 반사적, 재귀적)’ 성격의 연대를 주장했다. 기능적 연대의 바탕이 위에서 보았듯이 이기주의―즉 인간의 합리적 이해추구―라면, 새로운 ‘성찰적 연대’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산업생산의 부작용―특히 생태위험―이다. 이해관계에 갇혀서 ‘기능적 연대’의 불가능성을 키우는 인간이 아니라, 산업에 의해 파괴된 생명체들 또는 지구가 새로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부작용의 정치’를 사회적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위험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행위자들이다. 따라서 벡은 ‘실용주의적 연대’를 주장했다. 인간의 이해심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해관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 앞에서 시시각각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근대성 비판은 ‘탈근대성’이 아닌 ‘성찰적 근대성’의 방향을 취한다. 말하자면 ‘성찰적 연대’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 실용주의적으로 조율되는 기능적 연대를 의미한다.

반면에 2000년대 이후, ‘탈근대성’에서 ‘탈인본주의’로 방향을 바꾼 새로운 관점이 지적 세계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흔히 ‘신유물론’이라고 불리는 경향이다. 여기서는 인간과 여타 생명체나 물질의 주체적 행위성을 위계적으로 서열화하지 않는다. 특히 페미니스트이자 입자물리학자인 캐런 버라드는, 인간과 물질이 양자역학적 ‘얽힘’의 관계성 속에 공존하므로 인간은 단순한 윤리적 차원이 아닌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미 ‘책임의 윤리’에 묶여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책임’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로부터 윤리적으로 추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존재 방식 자체라는 것이다. 인간의 주체성은 인본주의적으로 주어진 속성이 아니라 물질과의 양자역학적 얽힘으로부터 발생하는 사건―반복되는 사건―이므로, 얽힘의 관계 속에서 물질에 응답하는 능력(response-ability)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책임이란 바로 그러한 존재론적 응답능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코로나19 시대에 한국 사회에 요구되는 연대는 ‘이해관계의 합리성’이 인간 존재 조건의 일부에 불과한 것임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기주의가 자연적 본성이 아니라 (타인을 포함하는) 물질과의 얽힘으로부터 발생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 즉 우발적인 존재론적 사건을 의미론적으로 규정하고 고정한 것임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얽힘이 없으면 그러한 사건도 불가능하므로, 이기주의보다 책임이 더 우선적인 존재의 조건이다. 역설적이지만, 모든 이기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타자와의 얽힘인 것이다.

이해관계를 내세우는 특수집단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어떤 얽힘의 결과인지를 인지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 안에 타자의 이익이 배제된 채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이해관계의 정치’가 아닌 ‘책임의 정치’로 전환하도록, 사회의 전반적 인식 역시 ‘인간 본성=이기주의’라는 도식을 버려야 한다. 또 그러한 책임의 정치가 공동체의 도덕으로부터 도출되는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생명체로서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임을 겸허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와 같은 ‘책임의 정치’에서는 굳이 공동체적 동질성이라는, 언제든 억압의 기제로 전환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지 않다. 즉 그것은 ‘존재론적 정치’인 것이다.

울리히 벡의 ‘실용주의 정치’는 리스크 개념의 ‘사회적 구성주의’라는 형이상학과 이해관계의 근대적 실재론을 ‘부작용의 정치’를 매개 삼아 절충한 형태이다. 반면에 신유물론의 ‘존재론적 정치’는 이해관계와 같은 사회적 구성물을 ‘사건’으로, ‘얽힘’을 사건의 물질적 발생조건으로 설명함으로써, 책임의 물질적 실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실재론―버라드의 경우 ‘행위적’ 실재론―을 피력한다. 많은 이기주의적 특수집단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코로나19가 단순한 ‘음모’가 아니라 살아 있는 바이러스이듯이, 바이러스의 위협에 처한 사회 역시 단순한 사회적 구성물이 아니라 존재론적 실재인 것이다.

 

【1】 아이리스 매리언 영, 2017, 『차이의 정치와 정의』, 김도균·조국 옮김, 모티브룩.

 

홍찬숙

화, 2020/09/01- 01:07
3
0

“쿠바 공공의료의 다른 이름, 하얀 가운 노예들”. 얼마 전 조선일보에 버젓이 실린 기사 제목이다. 기사 내용과는 별개로 조선일보가 제목을 다는 ‘실력’은 타의 추종을 받는다. 특히 사실관계 확인에는 극도로 인색한 해외지역 사례를 마구잡이로 인용하거나,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를 숨기지 않는 편파적 보도와 해석들로 국제뉴스의 상당 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기도 한다.

조선일보가 유독 집중하는 라틴아메리카의 두 나라가 있다. 바로 베네수엘라와 쿠바다. 이 두 국가는 소위 ‘사회주의’ 이념 지향이 두드러지는 곳이다. 이들 시각에 의하면, 두 나라의 모든 ‘불행’은 자본주의 체제를 따르지 않은 대가였고,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이다.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일찌감치 미국의 눈엣가시였으며, 호시탐탐 체제 전복을 노리고 있는 사실을 과연 모르는 자가 있을까.

이 두 체제를 ‘악’의 축으로 규정한 미국의 이념적 틀에 편승한 탓일까. 이들 국가를 다루는 국내 주류 언론의 대부분 시각은 시종일관 편협하고 악의적이다. 그런데 때마침 국내에서는 코로나19사태를 계기로 다시 한번 “공공의료”에 대한 논의가 수면에 떠 올랐다. 그리고 이어 의사들의 진료거부가 시작되었고, 이를 바라보는 많은 국민의 시선은 싸늘했다. 환자 생명을 담보로 의사들이 보인 작태에 많은 이들은 분노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이번에도 조선일보는 ‘시의적절’한 기사, 즉 공공의료에 대한 진지한 문제 제기나 대안을 논의하는 방식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덮어버리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의 기사로 응수했다. 쿠바 의사들은 이제 ‘하얀 가운 노예들’이 된 것이다. “쿠바는 이웃 국가에 폭탄이 아니라 의사들을 보낸다”라는 피델(Fidel)의 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하얀 가운의 부대”에서 차용한 표현일 게다.

과테말라로 파견된 여의사가 매춘을 강요받는다는 이야기부터, 쿠바 의사들은 반드시 해외 의무복무 기간을 가져야 한다는 터무니 없는 사실, 의사 면허증을 반납하려고 하면 수년간의 수감 생활을 해야 한다는 등, 사실이 아닌 거짓들로 채워진 기사가 보란 듯이 실렸다. 기사의 태반은 출처가 불분명했고, 사실확인도 제대로 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국내 ‘주요’ 언론사인데 사실관계 정도는 확인하는 ‘수고’를 바란다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조선일보가 ‘하얀 가운 노예들’이라 부르는 쿠바의 “헨리리브(Henry Reeve)국제의사파견단”은, 2005년 최초 결성된 이후 재난과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전 세계 수백만 명에게 긴급의료를 지원한 공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고, 이에 한국인 최초 국제기구 WHO 사무총장을 지낸 故이종욱 박사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이종욱 박사 상(Memorial Prize)”을 2017년에 수상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걸까.

이탈리아는 초기 코로나19 사태로 의료체계가 마비되자 쿠바 의사들을 요청한 바 있다. 이에, 쿠바는 화답했고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한 약 52명의 의료진을 파견했었다. 이후 약 두 달간의 임무를 끝내고 고국 쿠바로 돌아온 의료진들의 모습이 생방송으로 전파를 탄 적이 있다. 마침 이 방송을 함께 보고 있던 쿠바 친구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들 눈에 새겨진 세 글자! ‘잘난 척’. 그랬다. 그것은 그들의 자랑스러움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무사히 귀국한 의사들을 환영하는 방송에서는 그들을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와중이었다. 이때, 무뚝뚝하게 진지한 말을 곧잘 던지는 친구는 혼자 웅얼거리듯 말을 내뱉는다.

“우리는 영웅이 될 생각이 없어. 그저 의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지”.

그렇다. 소위 ‘국뽕’ 방송이었다. 마치 올림픽에서 메달을 타거나 자국의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들을 맞이하는 세계 여느 국가들이 보여주는 흔한 방송이다. 방송사가 이른바 ‘국위선양’ 이슈를 다루는 유난스러움도 만국 공통이다. 이에 시니컬하게 반응하는 친구도 평범한 시청자의 모습일 뿐이다.

의사가 되려는 의대생들이었기에, 그들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나는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던 터였다. 미래 쿠바 맨발의 의사들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주위의 모든 의대생이 이런 교과서 같은 말을 툭툭 던지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도 다양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까. 낮은 임금에 불만을 가진 아이들도 있고, 공부를 다른 전공보다 많이 해야 하는 너무 ‘당연한’ 현실에 구시렁거리는 아이들까지. 그럼에도 이들 모두 그들의 미래 직업을 자랑스러워한다. 의사가 되고 싶고, 그 직업을 대하는 각자의 각기 다른 이유야 내가 어찌 다 알 수 있으랴마는.

쿠바는 이번 코로바19사태로 적어도 30여 국가에 의료진을 파견했고, 그들의 안전한 귀국을 기원하는 “박수”소리가 매일 밤 9시면 동네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해외 파견된 의사들을 기다리는 가족, 친구이자 연인들이고 이웃이기도 한 쿠바 지역 주민들의 응원과 기원이 담겼다. 이들 모두는 쿠바 의사들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왜 굳이 이들을 ‘하얀 가운 노예들’로 둔갑시켜야 했을까.

돌연 쿠바 의사들의 ‘인권’이 걱정된 것은 아닐 테니, 오랜만에 다시 한국 사회의 수면으로 떠 오른 공공의료에 대한 논의가 못내 못마땅했다고밖에는 읽히지 않는 이유다. 합리적 의견들을 수렴하여 공공의료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시도조차 쿠바 공공의료에 대한 거짓 뉴스를 유포하는 것으로밖에는 응답할 만큼 궁색한 것인가! 그도 아니면, 이 시국에 선정적 뉴스 제목으로 클릭 수를 늘리려는 기자 한 개인의 ‘일탈’로 봐야 하는가! 진실이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쿠바 의사들을 ‘매춘부’와 ‘노예’로 소개한 이들의 볼썽사나운 저널리즘은 당분간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공공의료가 못마땅할 수도 있고 쿠바의 사회시스템이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거짓과 날조된 사실로 채운 기사가 아닌 진실과 확인된 사실에 근거하면 안 되는 것일까?. 이번 조선일보 기사가 적어도 영어판으로라도 실리지 않는 이상 쿠바 사람들이 이 기사를 읽게 될 확률은 제로다. 따라서, 당사자들의 항의를 받을 가능성도 없다. 이 기사는 오롯이 대한민국 국민만을 겨냥한 가짜뉴스인 셈이다. 우리도 ‘대충’ 그냥 넘겨버리곤 한다. 사실관계를 굳이 확인해야 할 만큼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지장을 주지는 않으므로. 그래서일까. 이렇게 고약하고 악의적인 해외 기사가 계속해서 판을 치는 이유가 말이다.

 

정이나

화, 2020/09/08- 01:14
3
0

헌법 제64조 제1항은 “국회는 법률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의사(議事)와 내부규율에 관한 규칙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은 국회의 의사와 내부규율을 ‘법률’이 아니라 ‘규칙’의 형식으로 규율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독일, 영국 등 서구 국가 의회들은 의회 내부의 조직과 의사절차를 ‘법률’이 아니라 ‘의회 규칙’이라는 형식으로 정하고 있다. 즉, 대부분 국가의 의회에서는「의회법」, 혹은 「국회법」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민에 의해 새로 선출된 새로운 입법자로서 새로운 회기의 의회에 대한 ‘형성적인’ 권한을 갖고 자기 규율을 정해야 한다는 취지에 부응하여,「의회법」대신「의사규칙」을 제정하여 운용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하원의 경우, 의회가 새로 시작될 때마다 전기(前期) 의회의 ‘규칙’을 개정하기 위하여 규칙위원회가 구성된다. 다만 매 회기 의사규칙이 개정되기는 하지만, 그 변화의 폭은 일반적으로 제한적이다. 상설위원회인 규칙위원회는 다수당이 다수를 차지하며, 하원 지도부의 강력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국회법이란 형식은 한국과 일본뿐

우리나라가 「국회법」을 제정한 것은 역시 일본의 「국회법」을 그대로 ‘이식’하고 답습하여 모방했기 때문이다. 즉, 「국회법」은 일제 잔재인 셈이다. 우리의 제헌 국회가 가장 먼저 가결한 법률은 바로 「국회법」이었다.

근본적으로 얘기하자면, 입법자인 국회는 4년마다 그 의회기가 바뀌고 그 구성원이 바뀌면서 의회의 ‘불연속성’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이전의 처리되지 못한 법안들도 폐기되는 운명에 처한다.

그런데 우리 국회처럼 이전 의회기(예를 들어, 19대)의 입법자들이 해당 의회기 국회를 위해 만든 의사규칙을 국회법의 형태로 굳힘으로써 다음 의회기(예를 들어, 20대) 및 그 의원들에 자동적으로 적용되도록 강제하여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다만 우리 국회가 항상 의사절차를 둘러싸고 크고 작은 논란을 거듭해온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의회제도 자체가 불안정한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보완하는 의미에 있어서 국회법의 존재가 의회 안정화라는 기능을 그나마 수행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경직성 강한 국회법대신, 매 회기마다 의사규칙새로 제정해야

하지만 지금의 「국회법」은 국회의 구성과 조직에 관한 기본 원칙 외에 국회 운영의 일반 원칙까지 모두 포괄하고 있다. 이는 경직성이 강한 국회 구성 및 조직 문제와 정치적 수요 및 상황에 의하여 가변성이 큰 국회 운영의 일반 문제가 하나의 법질서 하에 놓이게 됨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국회법」 자체의 관리에 난점이 초래될 뿐만 아니라 세밀하고 구체적이어야 할 국회 운영에 관한 규정이 가이드라인만 제시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국회법을 버려야 국회가 산다

특히 그간 우리 국회는 독재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되고 비정상화되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곧 지속적인 「국회법」개악을 통한 제도적 무력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최소한 「의사규칙」에 비하여 경직성이 대단히 강한 이 「국회법」은 그간 우리 국회에서 변경할 수 없는 철옹성의 관행적 질서로 작동되어왔고, 한편으로는 국회 스스로 그 틀에 그대로 안주하면서 우리 국회의 왜곡과 비정상화가 지속되었다. 그 결과는 바로 오늘날의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극심한 불신으로 표출되고 있다.

만약 다른 나라 의회처럼 새로 구성된 국회가 새로운 ‘의사규칙’을 규정하는 시스템이라면 매 회기마다 이러한 독재 권력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국회법」이라는 형식과 틀로써 국회 운영을 결정해온 우리 국회는 이러한 기회조차 상실하고 말았다.

전진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상적인 경로가 필요하다. 우리 국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헌법이 규정한 바에 따라, ‘국회법’이 아니라 세계 의회의 보편적 모델인 ‘의사규칙’ 형식이 바람직하다.

사실 ‘대의기구로서의 핵심사항 및 기본 원칙을 규정하는’ 국회법에 국회 소속 공무원인 전문위원의 ‘전문 조항’을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커다란 문제의 소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현재의 국회법은 제21조에 국회사무처 조항을, 제22조에 국회도서관, 제22조의 2항에 국회 예산정책처, 제22조 3항에 국회 입법조사처 조항을 두고 있다. 그런데 국회법이란 국민의 대의기구로서의 핵심사항과 기본 원칙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사무처와 도서관 등의 국회 내 입법지원기구를 국회법에서 별도의 조항으로 두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원래는 아래 (자료1)의 1960년 국회법에 국회도서관 조항이 처음 규정되었는데, 이때의 조항 규정이 (자료2)의 형식보다 더 합리적이다.

<자료1>

第24條(國會圖書館) 議員의 調査硏究에 資하기 爲하여 따로 法律의 定하는 바에 依하여 國會에 國會圖書館을 둔다(1960년).

<자료2>

第22條(國會圖書館)

①國會의 圖書 및 立法資料에 관한 業務를 처리하기 위하여 國會圖書館을 둔다.

②國會圖書館에 圖書館長 1人과 기타 필요한 公務員을 둔다.

③圖書館長은 議長이 國會運營委員會의 同意를 얻어 任免한다.

④圖書館長은 國會立法活動을 지원하기 위하여 圖書 기타 圖書館資料의 蒐集·整理·보존 및 圖書館奉仕를 행한다.

⑤이 法에 정한 외에 國會圖書館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따로 法律로 정한다(1988년).

참고로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면, 일본 국회법 제130조에 “의원의 조사연구에 자문하기 위하여 별도로 정한 법률에 의하여 국회에 국립국회도서관을 둔다.”라고만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국회법 제42조에 별도로 ‘전문위원과 공무원’을 규정하고 있는 조항 역시 대의기구로서의 핵심사항과 기본 원칙을 규정하는 국회법의 취지상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국회 소속 입법지원기구인 국회도서관, 입법조사처, 예산정책처 규정을 비롯하여 전문위원 등 국회소속 공무원에 대한 규정은 국회법이 아니라 하위 규정인 시행규칙으로 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소준섭

수, 2020/09/16- 02:55
3
0

안녕하세요?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이재욱 소장입니다.

「다른백년」을 통해 여러 분들과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農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여러분들과 만나겠습니다.

“농(農)”은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농업・농촌・농민을 ‘삼농’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 농지가 있습니다. 농지는 농업, 농민에 묶여 있는 개념이지만 ‘경자유전의 원칙’이 무너지면서 농의 문제를 얘기할 때 농지도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이 네 개의 개념들을 어느 하나만 떼어서 얘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각각의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농업・농촌・농민・농지를 묶어서 ‘農’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농의 문제는 모두 이 네 개의 문제입니다.

 

◎ 농업

우리나라의 식량자급율은 50%가 되지 않습니다. 곡물자급율은 23% 정도밖에 안됩니다. 신자유주의 농정을 추진하면서 우리 농업은 강제로 경쟁력에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전체 농민의 90%가 농업소득 천만원 이하입니다. 농외소득이나 자가소비분까지 다 합친 농가소득은 도시 근로자 평균 소득의 60%정도 밖에 안됩니다. 더 이상 소득보장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농민들이 농민수당이나 농민기본소득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이농이 본격화된 후 농업노동력이 급격히 줄어 들었고 이로 인해 기계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농업노동력이 부족해 지면서 외국인 농업노동자들을 고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농산물은 석유와 외국인노동자들이 생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이 농업의 문제입니다.

 

◎ 농촌

농촌은 원래 농사짓는 농민들이 사는 마을을 말합니다. 그런데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면서 농촌이 공동화(空洞化)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은 태어나는 아기가 없고 농촌의 학교는 폐교가 되고 60대 이상 고령자들이 대부분인 노인마을이 되었습니다. 비어가는 농촌을 별장, 펜션, 전원주택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이제 농촌은 ‘농민들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농지가 가까이 있는 마을’로 재정의 해야 할 지경입니다. 그나마 경관이 좋거나 서울 등 대도시에서 가까운 마을은 살려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외딴 벽지 마을은 아예 소멸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2028년이 되면 인구정점에 이르고 그 이후 인구절벽이 시작되어 급격히 인구가 줄어들어 소멸되는 시・군이 생길 거라고 예측합니다. 그런데 농촌의 소멸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1개 리에 30세대만 살아도 많이 산다고 합니다. 소멸되는 마을이 늘어나고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농촌은 인정없는 마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농촌문제입니다.

 

◎ 농민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은 이제 늙은 농민들이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농사를 이을 자식이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으면 할아버지 농민은 은퇴를 합니다. 그리고 손자를 보고 대를 이은 자식이 짓는 농사의 보조자가 됩니다. 이렇게 은퇴를 하던 할아버지 농민들이 이제 자식도, 손자도 없는 농촌에서 70이 넘는 나이가 되도록 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농사를 이어서 하는 승계농은 전체 농가의 10%도 되지 않습니다. 그 나마 이런 승계농의 대부분은 대규모 축산농이나 벼농사를 크게 하는 대농들의 자식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국가간 이동 차단이 되어 물류이동도 원활하지 못한 상황이 이어지고 외국인 노동자들의 수급도 어려워진다면 국내 농업의 생산력을 시급히 올려야 하는데 이제 농사지을 농민들이 없어서 농업진흥정책을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앞으로 농사를 누가 지을 것인가. 비농민 출신들이 농촌으로 이주해서 농사를 지으려면 어떤 뒷받침이 필요할까? 농민들의 재생산 문제도 심각합니다. 농민의 문제입니다.

 

◎ 농지

우리나라 헌법 제 121조 1항은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1950년대 농지개혁으로 우리나라 농지의 90%가 농민들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자작농의 시대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경제개발을 하면서 저곡가, 저농산물 정책으로 인해 생산비도 안되는 농사를 포기하는 농민들이 늘어났습니다. 농촌을 떠나는 농민들의 땅은 남아있는 농민들이 사야하는데 농업소득으로는 땅을 살 형편이 안되니 도시사람들에게 팔렸습니다. 경자유전의 원칙은 허물어지고 비농민과 투기자본이 땅을 살 수 있는 규제완화가 이어졌습니다. 지금은 전체 농지의 50% 이상이 비농민 소유입니다. 지역에 사는 농민들의 이름을 빌려사는 명의 신탁 농지까지 합치면 70% 이상이 비농민에게 넘어갔다고 합니다. 개발이익을 기대한 투기자본들이 농지를 잠식하고 헌법의 원칙은 무너졌습니다. 앞으로 개헌을 하면 사문화된 경자유전의 원칙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나옵니다. 농사를 짓겠다고 들어오는 후계농들은 농지를 구하기가 어려워 안정적인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농지의 문제입니다.

 

‘농의 재구성’은 이런 농의 문제를 수면위로 올리고 대안을 제시해 나갈 것입니다. 각각의 주제를 분리하여 다루기도 하고 연결하여 드러내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또 마을과 지역의 이야기들을 사례로 들어가며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기후위기와 코로나19로 인해 빚어지는 농의 위기와 국민 먹을거리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농업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남과 북이 함께 사는 평화공존의 시대가 열리면 8천 만이 함께 먹는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그런 중장기적인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문재인 정부의 농업 정책은 이런 위기감과 장기적인 대책을 세우려는 국가적 고민이 없어 보입니다.

농의 문제를 고민하는 농업 전문가들은 지금 우리 농업을 살릴 마지막 기회라고 합니다.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골든 타임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참 안타까운 시간들이 흘러갑니다.

농업예산을 획기적으로 재편성하고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및 농림부와 농촌진흥청, 농어촌공사, 농식품유통공사, 농촌경제연구원 등 산하기관들이 협력하고 융합하여 농업정책을 새로 짜고 강력하게 추진하여야 합니다.

 

이재욱

월, 2020/09/21- 22:34
3
0

미 의회, “‘이해충돌방지법’,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법천명

최근 한 국회의원의 ‘이해충돌’ 사건이 불거지면서 이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의 이해충돌 논란은 비단 이번만이 아니라 그간 국회에서 여야 불문하고 계속 발생해왔다.

외국에서 공직자들의 ‘이해충돌 방지제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다.

‘이해충돌(Conflict of interest) 방지제도’란 공직자가 자신과 4촌 이내의 친족과 관련된 업무를 할 수 없도록 하는 조항으로서 미국 등 선진국의 공직자 부정부패방지법의 핵심조항이다. 미국 의회는 1962년 케네디 정부가 제정한 ‘이해충돌 방지법’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법”으로 평가한 바 있다.

 

이해충돌 문제를 둘러싼 혼란, 국회의 직무유기

사실 우리나라의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은 본래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이라는 이름으로 논의가 시작되었다. 즉, ‘김영란법’이 처음 발의되었던 당시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 규정’은 관련법안의 핵심적인 골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지루한 논란만 거듭하다가 결국 입법과정에서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라는 이유로 그 내용이 송두리째 누락되어 빠져버렸다. 당시 국회는 ‘추후에’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을 분리해 재론하기로 하였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그랬듯 아무런 후속 조치도 없었다. 이해충돌 문제를 둘러싼 오늘의 혼란은 전적으로 국회의원들의 직무유기다.

선출직을 포함한 공직자의 ‘이해충돌’이란 사적 이해관계, 특히 직계 및 친인척과 이해관계가 있는 직무수행, 공정한 직무수행을 저해하는 대외활동, 업자와의 다종다양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모종의 거래, 소속기관 등에 가족의 채용 및 계약체결 등으로 표출된다.

미국 연방법률 제18편 제208조는 미국의 공직자는 본인은 물론 배우자와 자녀,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단체, 자신이 향후 고용될 수도 있는 단체 등과 금전적 이해관계가 있는 사안에 관하여 공직자로서 결정ㆍ허가 등의 행위를 한 경우 처벌된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고의성이 없는 경우 1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지지만, 고의성이 있는 경우 5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양형이 증가한다.

반면 우리의 현행 공직자윤리법에는 이해충돌 방지 의무만 있을 뿐 관련 처벌 조항은 부재한 상태로서 선언적 의미 외에 아무런 실효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의 부정행위방지법, 프랑스의 공무원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법률, 캐나다의 이해충돌법, 호주의 연방공무수행법, 일본의 국가공무원윤리법 등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해충돌방지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다.

영국 하원의 윤리규정 제10조는 “어떤 의원도 의회 내의 모든 사안을 다룸에 있어 보수를 받고 이익을 보호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No Member shall act as a paid advocate in any proceeding of the House)”고 규정되어 있다. 이해 관련이 없는 집단을 위해 단순히 보수를 받는 로비스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제11조는 더욱 구체적이다. “의원은 여하한 경우에도 자신이 금전적인 보수를 받는 의회 밖의 기관이나 상업 법인의 이사, 고문, 자문, 혹은 어떤 지위를 계속해서 가질 수 있다. 또 그러한 기관이나 법인으로부터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의원이라 할지라도, 이 규정이 정하는 지침 3장에 따라 행동한다는 전제하에 사안의 이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장관, 의원, 공직자와의 의회 내 절차를 위한 미팅과 협의에 참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의원은 나중에 경제적 혜택이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어떠한 기관이나 개인의 금전적, 물질적 이득이 되는 절차나 미팅을 주체적으로 시도해서는 안 된다.”

독일 하원의원이 준수해야 할 이해충돌 방지 규정은 무려 67쪽에 이른다.

 

국회에서 왜곡된 김영란법, 다시 만들어야 한다

예전에 일부 의원이 국회에 파견된 판사에게 재판과 관련된 민원을 부탁했다는 이른바 ‘재판민원’ 사건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관행적인 문제”로 간주된 바 있다.

이해충돌 방지 규정은 형사적ㆍ 경제적ㆍ 재정적 제재를 통하여 ‘부적절한 처신이나 관행’으로 치부되는 외부 압력과 청탁을 처벌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국회의원을 비롯한 주요 이해관계자들에게 강력한 경고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이들 주요 행위자들로 하여금 ‘자기 통제’를 강제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방향성을 지향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국회는 이제라도 당초의 약속을 지켜 이해충돌 방지법을 제정하든가 아니면 ‘김영란법’을 개정하여 본래의 입법취지대로 이해충돌 방지 규정을 보완해야 한다. 그리하여 국회의원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기준과 규범을 명문화함으로써 더 이상 국회가 이런 문제로 국민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스스로 법과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화, 2020/09/29- 22:16
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