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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가족의 삶 :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자제인 김정육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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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가족의 삶 :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자제인 김정육 선생

익명 (미확인) | 월, 2019/04/01- 14:26

출처: 김정육 구술/서혜원 기록,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제308호, 2019.3.25

[헌법 13조 3항]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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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자제인 김정육 선생

연좌제는 1981년 3월 25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연좌제는 개인의 범죄를 가족·친지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형벌이다. 조선시대 삼족을 멸하던 악독한 형벌은 한차례 폐지된 적 있으나 그것이 가진 성격만치 끈질겼던 터라 사라지지 않고 생명을 연장해나갔다. 그리고 1950년대 무렵, 처음으로 내가 연좌제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등고시를 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신원증명서를 발급받을 때였다. 담당자는 한참이 지나도 발급을 못하고 갸웃거렸다. ‘신원조회 불가능.’ 고시를 치기도 전에 자격을 박탈당했다.

왜 시험을 치지 않느냐는 친구들에게 속사정을 말하지 못했다. 연좌제에 걸려 아무것도 못하는 줄 알면 혹여 다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연좌제에 걸린 이는 호적부에 빨간 줄이 그어졌다. 빨간 줄을 가진 채로는 여행은커녕 취직도 할 수 없었다. 국내를 돌아다닐 때는 승인을 받아야 했다. 친일 경찰들이 빨갱이를 소탕하러 활개치던 시대였다. 그들은 마음대로 남의 가정집을 들쑤시며 시찰을 돌았다. 나라 팔아먹은 자들이 나라 지키던 분의 후손을 검문했다. 수상한 시절이었다.

아, 되짚을 말이 생겼다. 내게도 꼬리표가 있었구나. 시찰 대상이라는 꼬리표. 아버지에게도 비슷한 게 달려있었는데 좀 더 무시무시한 이름이었다. 살생 대상이라는 꼬리표. 남한 정부가 수립된 뒤 아버지는 친일 척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갑작스레 집에 방문했다. “친일 군경들을 건들지 말아라.” “장관 자리를 줄 테니 하지 말아라.” “왜 이러십니까?” 아버지는 이 대통령의 말을 끝내 듣지 않았다. 이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반민특위 사무실이 습격당했다. 수많은 부상자가 생겼고 전국에서 온 친일행위 고발문은 불태워졌다. 아버지는 테러리스트의 살생부에 올랐다. 아버지는 결국 위원장 자리에 사표를 냈다. 아버지의 살생 딱지는 그 자취를 감추기에는 억울해 나에게까지도 미약하게 이어졌나 보다.

한때 대학에 입학한 적이 있다. 어릴 적 나는 김구, 신익희 등 알만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자랐다. 한문이든 법이든 정치든 대단한 분들을 보고 터득했다. 그분들의 가르침을 물려받아 법학도를 꿈꿨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대학 등록금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밥걱정에 시달려온 내가 등록금을 마련한다는 게 가당한 일인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막내가 영양실조로 굶어죽은 뒤 근사한 밥을 먹었던 기억은 한 번뿐이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우리 남매를 고아원에 위탁하기 전, 누나와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맛있게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독립운동가가 자식을 삼시세끼 먹일 수 있는 선택은 그뿐이었다. 따뜻한 밥이라니 얼마나 생소한 말인지. 결국 대학을 관둬야 했다. 밥벌이가 시급했다. 나를 받아주는 곳은 공사판이었다. 신원증명서 없이 일을 하고 돈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고마운 직장이었다.

“중동에 가면 떼부자로 돌아온다.” 말단으로 들어가 현장소장으로 오른 내게 중동 공사 참가 제의가 들어왔다. “글쎄요.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딴 사람을 보내시죠.” 여권이 발급되지 않는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 없는 것이었다. 욕심이 없는 척 묵묵히 일했다. 겉으론 태연했지만 어떻게 속상하지 않았을까. 결혼했고 안정된 가정을 원하던 처지였다. 하지만 중동에 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일은 조금 지나 건설현장의 예산제도가 바뀌면서 일한 만큼 돈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나는 돈을 모을 수 있었고 성내동에 13평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약 40년 동안 꿈에만 그리던 내 집이었다. 뒤늦게 자식도 보았다.

88올림픽이 열리던 해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내가 쓰러졌다. 급성 신부전증이었다.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서는 계속 공사판 일을 할 수 없었다. 멀리 떠나지 않고 오후에 아내 곁에 머물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신문지 돌리는 일을 했다. 그러다 돈을 더 벌고 싶어 신문 속지를 끼우는 작업을 추가로 맡았다. 이 작업을 하면 70만 원 정도가 들어왔다. 대신 속지작업이 끝나는 대로 새벽 배달을 나가야 하니 쉬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힘든 티를 낼 수 없었다. 어느 날은 아들이 새벽에 내 뒤를 몰래 따라와 일을 훔쳐보고 있었다. 결국에는 아버지를 돕는다고 시간이 날 때마다 속지작업을 도왔다. 돈을 그렇게 어찌어찌 벌었다. 아내에게 신장을 이식해 줄 은인도 나타났다. 무명의 천사는 나중에 알고 보니 민주당 총재의 부인이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어려움에 처했으니 구제하라.”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들었다. 아내의 신장 이식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역시 길지 않았다. 아내는 2005년 10월 18일 13시 32분 세상을 떠났다. 이따금 아내가 눈을 감은 날짜를 소리내서 읊어본다. “이천오년 시월 십팔일 십삼시 삼십이분.”

그전에 아버지 얘기를 빠뜨렸다. 아버지는 1990년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받았다’는 말은 어쩐지 순순하게 들리니 ‘받아냈다’고 쓰겠다. 아버지가 임시정부에 있던 자료를 전부 보훈처로 보냈다. 얼마 기다리자 보훈처에서 심의중이라는 우편이 날라왔다. 그리고 그해 4월, 드디어 아버지의 국민장 서훈이 결정 났다. 국민장은 3급짜리 훈장이다. 뭐 이런 급수에 연연하고 싶지는 않지만 최근 별세한 5·16 쿠데타의 중심인물인 김종필 국무총리는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받았다. 김 총리가 가담한 일과 아버지가 해온 일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하튼 나는 살아왔다. 올해 85세가 되었다. 사실 내 호적은 몇 번이나 장난질 쳐져 실제와는 다르지만 호적상 여든 다섯이다. 이 나이를 먹어서야 몇몇 사람들이 찾아온다. 내가 살아온 시절을 듣고 싶다고 한다. 구전동화 읊듯이 이야기를 한다. 으레 사람들은 마지막 질문으로 이런 말을 한다. “정부에게 원하는 것은 없습니까.” “아버지가 납북되시고 연좌제에 묶여 산 세월을 보상받으셔야죠.” “명예회복이 필요하지 않나요.” 고래를 가로젓는다. “내 평생 요즘처럼 정부에서 오는 공문이 친절한 적이 없어요.” 이전 세월 내가 정부에 탄원을 낼 때마다 답변을 받고는 화가 치밀지 않은 적이 없다. 아버지와 나를 짐짝처럼 처리하던 이들이 그래도 요즘은 같은 말일지언정 돌려가며 이야기한다. 더 바랄 것도 없다. 나이 여든을 넘겼다. 그저 고민은 내년 만기되는 아내의 무료 묘자리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한 것이다. 한 푼 두 푼 모으면 아내를 편안한 안식처로 모실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나를 남겨두고 먼저 떠난 아들을 떠올린다. 배급소에서 아비를 돕던 착한 아들. 그가 남긴 어여쁜 손녀 손자. 김예일리와 김선리. 녀석들에게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아직 어린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모를 이야기를 내 손으로 모두 적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나는 지금을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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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김정육 선생의 아버지는 김상덕 지사(1891~1956. 경북 고령 출신)이다. 김 지사는 1919년 도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유학생 대표 11인 중 한 명이었다. 2·8독립선언으로 1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에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단체 ‘정의부’의 최고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윤봉길 의사의 폭파 의거 후 한중 연합군을 창설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또한 상해 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문화부장을 지냈다. 해방 후 고향에서 제헌국회 의원으로 활동했고, 친일 척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에 당선됐다. 그러다 6·25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평양 교외 재북인사묘역에 안장되어 있고,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제308호, 2019.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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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빈 링크 쪽에 댓글 달아도 반응도 없고…

 

수, 2018/01/24-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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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민청학련 등 굵직한 시국사건 변호…남양주 묘소에 동료·가족모여 추모
민주화운동 동료들 “겸손한 고인 뜻에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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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운동 대부’ 이돈명 변호사를 기억하며
(서울=연합뉴스) 이돈명 변호사의 7주기를 기리기 위해 인권운동을 함께한 동료와 가족이 지난 11일 경기 남양주 별내면 천주교 성당묘지를 찾았다. 왼쪽부터 문국주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 상임이사,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이 변호사의 장남 이영일씨,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 2018.1.14.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영화 ‘1987’ 흥행으로 과거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이들이 재조명을 받는 가운데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대부’로 불린 고(故) 이돈명 변호사의 7주기가 최근 특별한 행사 없이 조용히 치러졌다.

14일 이 변호사의 민주화운동 동료들에 따르면 고인의 7주기인 지난 11일 경기도 남양주 별내면 천주교 성당묘지의 묘소에는 가족과 동료들이 찾아 차분하게 추모의 시간을 보냈다.

영화 1987에서 배우 설경구가 연기한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과 문국주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 명예의장 등은 묘소에 모여 고인의 생전 뜻을 기렸다.

이들은 모두 이 변호사와 함께 민주화운동에 헌신했으며, 지금은 모두 진보진영 시민사회 원로로 꼽힌다.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이 변호사와 함께 활동한 문 전 상임이사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변호사께서 생전 워낙 겸손한 분이었기 때문에 조용하게 (고인을) 기리는 편이 고인의 뜻에 맞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평생 대중교통을 이용할 정도로 검소하고 소박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이 변호사 별세 이후 그가 위원장을 맡았던 천주교인권위원회는 매년 추모 미사를 집전했으나 2016년 5주기 미사가 마지막이었다. 올해 추모 미사에는 가족만 참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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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운동 대부’ 이돈명 변호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 변호사는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 변호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인혁당 사건과 김지하 반공법 위반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 광주 민주화운동 등 굵직한 시국사건에 빠지지 않고 활약했다. 황인철·조준희·홍성우 변호사와 ‘4인방 인권변호사’라는 별칭도 얻었다.

이 변호사는 1986년 5·3 인천사태와 관련해 수배 중이던 이부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8개월 동안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같은 해 한승헌·홍성우·조영래 변호사 등 인권변호의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과 ‘정의실현 법조인회(정법회)’를 결성했다. 정법회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전신이기도 하다.

이 변호사는 이후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인권위원장, 민변 고문, 조선대 총장, 한겨레신문 상임이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상지학원 이사장, 천주교 인권위원회 이사장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 2011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2018-01-14> 연합뉴스
☞기사원문: 조용하고 검소하게…’인권운동 대부’ 이돈명 변호사 7주기

일, 2018/01/1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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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7/08/04-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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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 문의에 대해 답변 주신 김재운 운영위원님께 감사드리며 제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저는 김재운 운영위원님의 사적 의견을 듣고자 문의한 것이 아닙니다.
운영위원회 명의로 게시된 글에 의견을 밝히고 의문이 있어 이민우 운영위원장님께 문의한 것입니다.

김재운 운영위원님이 당시 상황을 100% 완벽하게 알고 있더라도, 운영위원회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면 사견일뿐입니다.

김재운 운영위원님의 답변은 참고만 할뿐 그 어떤 판단을 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
이민우 운영위원장님!!

총회 이후 전개되고 있는 현 상황은 <정관 개정의 건> 자체가 아니라 (일반 회원은 알 수 없는) 해묵은 갈등이 표출 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몇 년전 대충의 내막은 들었지만,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고 자연히 해소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총회를 전후하여 일어난 여러 상황을 보면서 해소가 아니라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현직 운영위원이 극단적 표현을 써가며 다투는 모습은 제가 알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전현직 운영위원들이 모습을 목도하는 회원들은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운영위원은 각 지부 회원을 대표하고, 운영위원회는 회원을 대표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식 기구입니다.

운영위원회는 현 상황에 대하여 입장을 밝혔지만, 의문 해소가 아니라 의문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래서 위원장님께 의견을 밝히고 문의와 제안을 했으나 아직까지 답변이 없습니다.

위원장님이 본 게시판을 매일 확인하지 못해서 답변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김재운 운영위원님!

제 게시물을 위원장님께 전달하셔서 위원장님이 확인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원장님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2018.4.26

회원 김점구

목, 2018/04/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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