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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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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익명 (미확인) | 금, 2019/03/29- 17:56

[회원마당]

임시정부 답사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조선동 예원학교 국어교사, 청년백범 대표

S#1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이 맺어졌다. 이른바 ‘경술국치(庚戌國恥)’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대 전란을 겪은 이후, 조선왕조는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일부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득세하면서, 일부 권력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 백성을 위하는 정치가 아니라 일부 권력층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정치가 이루어졌다. 백성들은 권문세가의 이익을 위해 맞아죽고, 굶어죽었다. 일부 백성들은 스스로 민적(民籍)을 파내고 산으로 들어가 산적이 되었다. 이미 나라는 썩어 들어갔다. 신분제를 기반으로 한 왕조는 금이 가고 있었다.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과 양심을 팔아먹은 조선의 관료들이다. 세계사 어디에도 외부의 힘만으로 멸망한 국가는 없다. 이미 내부에서 썩어 들어가던 국가가 외부의 작은 충격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할 뿐이다. 한일합병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황태자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 대하여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줄 것이다.(후략)

 

한일합병조약문을 읽어 가면서, 나는 화가 났다. ‘조선 황제의 권리를 일본 황제에게 넘긴다’는 제1조로 시작된 조약문은 황족(皇族)의 위엄과 명예를 지켜달라고 한다. 훈공 있는 한국인, 다시 말해 ‘친일파’에게는 표창과 작위와 은급을 내려 달라고 한다. 조선이 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특권만을 행사하고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았던 지배층의 탓이다. 그 지배층들은 나라가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고 명예와 권력과 재산을 보장받고자 한다. 그를 위해 충분한 세비를 공급하라고 한다. 뻔뻔스럽다. 그
세비는 결국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백성들을 쥐어짜라는 이야기이다.
내가 회사를 운영한다 치자. 경영을 잘못하여 회사를 다른 회사에 넘겨야 한다. 회사를 넘기
기 위해 인수합병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나의 경영권과 재산을 보장받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나 때문에 고생한 직원들의 일자리를 보장해달
라고, 직원들을 잘 대해 달라는 내용을 어떻게라도 인수합병서에 넣어야 한다. 나 때문에 고생
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다. 한 나라를 경영한 자들이 우리 국민들을 어떻게 해 달라
는 말 한 마디 없다. 분통이 터진다.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마자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우리 국토 대부분은 조선총독부의 것이 되었다. 당시 국민들 대부분의 직업은 농업이었다.
국민 대부분이 순식간에 ‘소작농’으로 전락한 것이다. 원래 소작농이었던 이들의 삶은 더더욱 황
폐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소작세를 대폭 올리고 여러 가지 준조세 형태로 우리 국민들을 수탈
하였다. 민초들의 삶은 뿌리째 뽑혔다.
우리 민족의 위대함은 1917년 광무선언(대동단결선언)에서 드러난다. 한입합병조약은 대한제국 황제가 대한제국의 모든 권리를 일본 황제에게 이양한다는 것이다. 1917년 상하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박용만·윤세복·조소앙 등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한일합병조약의 부당성을 말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 대한 모든 권리는 이제 우리 민족의 것이 되었으며, 대한제국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여서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가 일본 황제에게 갈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경술국치를 통해서 망한 것은 황제의 나라인 ‘대한제(帝)국’일 뿐이며, 황제가 포기한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는 대한의 국민들이 승계·계승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대한제(帝)국’은 사라졌지만, 그 뒤는 모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대한민(民)국’이 계승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유럽에서 황제국가가 시민국가로 전환되는 데 약 200여 년이 걸렸다. 우리는 이러한 민주적 전환을 10년도 걸리지 않아 이루어낸 것이다.
조선 시대에 모든 공적(公的) 문서의 주어는 모두 임금(왕) 또는 황제이다. 1917년 광무선언, 위대한 정치적 개안(開眼)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 첫 문장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국민’이 우리나라 국권의 주어(主語)로 자리잡았다. 이 정신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본이념이 되었다. 이후 우리 독립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으며, 지금의 대한민국 헌법 정신의 근간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S#2 ‘바리데기’들의 눈물, 한숨, 피

옛날 오구대왕이 살았다. 혼례를 일년 미루어야 아들을 낳고, 길하다는 예언을 무시하고 결혼한 탓에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딸만 계속 낳다가 마침내 일곱째도 딸로 태어나자, 화가 난 오구대왕은 일곱째 바리공주를 내다버렸다. 바리공주는 한 노부부에 의해 구해져 길러졌다. 후에 왕과 왕비가 죽을병이 들었다. 백약이 무효였다. 저승의 생명수만이 병을 고칠 수 있다 했다. 오구대왕 부부는 가장 사랑을 많이 주며 기른 첫째 공주를 불렀다. 저승에 가 생명수를 구해, 아비와 어미의 목숨을 구해 달라 했다. 첫째 공주는 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거절하였다. 다음으로 사랑을 많이 준 둘째 공주를 불렀다. 저승으로 가 생명수를 구해, 아비와 어미의 목숨을 구해달라 부탁했다. 둘째 공주 역시 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고개를 저었다. 여섯째 공주까지 마찬가지였다. 낳자마자 내다버린 바리데기가 기적처럼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오구대왕은 체면불고(體面不顧) 바리데기를 불러다가 부탁했다. 그 말을 들은 바리데기가 말했다. 내가 은혜를 입은 바 없으나, 아비의 씨앗을 받아 어미의 배에 열 달 있었으니, 가겠노라 말한다. 바리데기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저승으로 갔다. 바리데기는 무슨 지옥, 무슨 지옥, 무슨 지
옥… 온갖 고생 끝에 저승의 생명수를 구해와 부모를 살려냈다.
나라가 망하자 뜻 있는 사람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그 후 1919년부터 1945년까지 그들이 벌인 투쟁은 세계사에서 그 비슷한 경우조차 찾아볼 수 없는 끈질기고 가열 찬 싸움이었다.
그들은 어두웠던 우리 역사의 등대였고, 우리들의 자존심이자 자긍심이다. 그들을 만나러 간다. 이회영 형제처럼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행한 경우도 있었지만, 모여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기에 다들 ‘바리데기’였다. 나라로부터 은혜 입은 적 없으나, 나라에 몸을 의탁해 살았으니, 기꺼이 지옥의 불길을 향해 간다.
그들의 눈물, 한숨, 피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해 짐을 싼다. 4박 5일의 일정이다. 상하이, 자싱, 하이옌, 항저우, 난징에 남아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흔적을 더듬어 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때 상하이를 향해 집을 나선 윤봉길은 이런 글을 남겼다. 나라 잃은 원수를 갚기 위해 진시황을 죽이려 했던 ‘형가’라는 자객이 남긴 시의 첫 구절이다. “사나이 집을 나서매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으리!” 10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왜 이 길을 나서는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가슴에 담고자 하는가?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답사 하루 전 밤이다.

S#3 죽자꾸나, 상해시대

두 시간 남짓 비행으로 상하이 국제공항에 내렸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남쪽인 상하이는 1월 날씨인데도 따뜻하다. 해발 100m가 채 안 된다는 상하이는 사방 어디에서도 산을 찾아볼 수없는 평원지대이다. 도시 한 가운데로 황포강이 상하이를 동서로 나누며 흐른다. 황포강 동쪽을 ‘포동(浦東)’ 황포강 서쪽을 ‘포서(浦西)’라고 부른다.
첫 여정은 상하이의 번화가인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차창 너머로 보는 중국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 하늘 끝까지 뻗어 있는 것 같은 마천루의 열병식. 변화하고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을 웅변하는 듯하다.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사실 상하이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한 임시정부 청사이다. 첫 번째 사용한 청사는 그 위치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 한다. 두 번째 사용한 청사는 상하이 회해중로에 있다고 한다. 원래 건물은 흔적도 찾을 수 없고 H&M 매장이 들어섰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는 청사를 열 번 정도 옮겼다. 우리가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임시정부의 흔적은 마지막 청사인 이곳 뿐이다.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인 1932년 4월까지 사용한 청사이다. 원래 한 칸만 청사로 사용했었는데, 중국 정부의 협조로 옆의 두 칸까지 모두 세 칸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장사진(長蛇陣), 인산인해(人山人海)를 넘어서서 ‘야단법석(野壇法席)’에 가깝다. 청사는 긴 직사각형 모양이다. 너비는 두 사람이 팔을 벌려 서면 그만이다. 1층 전면으로 응접실이 있고, 1층 후면에는 중국식
부뚜막이 있는 작은 부엌이 있다. 임시정부 사람들이 밥을 짓고 밥을 먹던 곳이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임시정부 중심인물들의 숙소가 있다. 좁고 긴 복도를 따라 나란히 네 개의 방이 있다. 원래 넓지 않은 집인데, 복도와 계단을 빼고 남은 공간을 넷으로 나누었으니, 방의 넓이는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좁다. 기념관 안에서는 촬영을 일절 금한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이곳까지 와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아쉽다.
1층 좁은 중국식 부뚜막 주변으로 자꾸만 눈길이 간다. 이곳에서 이봉창과 임시정부 청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술이 얼큰하게 오른 이봉창이 말했다.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못 죽이나?” “하급 관리 하나 죽이기도 어려운데, 천황을 죽이기가 쉽겠소?” 이봉창은 다시 말했다.
“내가 동경에서 천황의 행차를 본 적이 있소. 그때 내가 엎드려서 생각하기를 지금 만약 내 손에 폭탄만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 대화를 우연히 들은 백범은 이봉창과 함께 침체에 빠져 있던 우리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봉창은 적진의 심장부에 홀로 뛰어들어 큰 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거사 직후 중국의 신문은 이런 제목의 기사를 내었다.
“불행히도 적중하지 않았다.” 이봉창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백범과 마지막 사진을 찍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 나이가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해도 늙은 생활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 이제는 영원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떠나는 것이니,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 이봉창의 거사가 시작된 곳이 이곳이로구나. 한 사나이가 죽음을 앞두고도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이 떠오른다. 1931년 일이다. 이때 이봉창의 나이 서른하나였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봉길이 백범을 찾아온다.
“제가 날마다 채소 바구니를 등에 메고 홍구 쪽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선생님께서 동경 사건과 같은 계획이 또 있을 줄 믿습니다. 저를 지도하여 주시면 죽
어도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이 만남은 두어 달 후 우리 독립운동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는 홍커우공원 의거를 이끌어낸다. 백범과 윤봉길은 서로 시계를 나누어 가지고, 후일 지하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영원히 헤어졌다. 1932년 일이다. 윤봉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먹먹한 가슴으로 임시정부 청사를 나와서 백범 가족이 살았던 영경방 10호를 찾아간다. 당시 이곳은 상하이에서 가난한 동네에 속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인들이 버린 배춧잎 중에 먹을 만한 것을 골라서 생활할 만큼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백범은 아내 최준례를 잃는다. 최준례는 둘째 아들 신을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동이 불편하였다. 시어머니인 곽낙원이 자신의 세숫물까지 치우는 일을 하게 되자, 회복이 덜 된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좁고 가파른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제때 치료를 하지 못해 늑막염이 폐병으로 번졌다. 형편이 어려웠던 터라, 최준례는 외국인 선교회에서 무료로 시술하는 홍커우 폐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병원이 있던 곳은 일본 조계지였다. 프랑스 조계지 밖으로 나갈 수 없던, 일본 조계지에는 더더군다나 갈 수 없었던 백범은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시어머니 곽낙원이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 최준례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후였다. 어미를 잃은 둘째 아들 신은 그때 막 걸음마를 익힐 때였다. 우유를 먹었지만 잘때는 할머니의 빈 젖을 물고야 잠이 들었다. 차차 말을 배웠지만, ‘할머니’라는 말만 알았고, ‘엄
마, 어머니’라는 말을 몰랐다고 한다.
백범이 안악 양산학교 교사였던 시절, 애제자였던 나석주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백범은 나석주를 ‘지사이자 제자’라 칭하였다. 나석주는 조국과 겨레를 위해 무언가 큰일을 도모하고자 톈진으로 가 의열단에 가입할 것을 결심하고 스승인 백범을 찾아온다. 때마침 백범이 생일인 것을 안, 나석주는 양복저고리를 전당을 잡히고 고기와 채소를 사와, 백범의 생일을 기념하였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만국공묘 내 신규식•박은식•노백린 선생 묘가 있던 자리

 

다음해인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는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 남대문 근처에 있던, 경제침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불행히 불발하였다. 뒤쫓아온 일경들과 총격전을 벌이며 일본 경찰 7인을 사살하고 자결하였다. 나석주가 순국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백범은 그 후부터 죽는 날까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지 않았고, 나석주는 영영 다시는 자신의 생일을 맞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지금 이곳은 상하이의 번화가로 변모하였다. 영경방 일대는 고풍스러운 건물 외관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실내는 고급 식당 등으로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다.
임시정부 사람들이 상하이에 모여들기 전, 이곳 상하이에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분들이 계신다. 예관 신규식 선생, 백암 박은식 선생 같은 분들이다. 선견지명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고, 평생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애쓰던 분들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분들이 잠들어 계셨던 만국공묘로 간다. 이분들의 유해는 1993년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참으로 무심한 후손들이 아닐 수 없다. 선생님들 잠들어 계셨던 곳에 준비해간 차와 술을 올리고 두 번 절했다. 뜨겁고 뭉클한 것이 울컥 올라왔다. 어찌 아는 이 하나 없는 이역만리 땅에 계셨어요? 우리가 참으로 죄인입니다!
눈물 마를 사이도 없이 홍커우공원으로 이동한다. 윤봉길 의사 의거지(義擧地)이다. 상하이를 점령한 기념식과 천황 생일인 천장절을 겸하여 기념하는 기념식장에 단신으로 들어가 일본군 시라카와 대장 등 군 수뇌부와 주중 일본 대사, 상하이 민단장 등을 폭사시켰다. 윤봉길이 들고 간 폭탄은 두 개였다. 하나는 도시락 모양, 또 하나는 물통 모양. 폭발력이 강한 도시락 모양 폭탄을 던지고, 물통 모양의 폭탄은 자결용이었다고 한다. 단상 주변에 민간인, 특히 어린이들이 있는 것을 본 윤봉길은 불필요한 희생을 줄
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폭발력이 약한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졌고, 단상 위에 있던 일본군 수뇌부 등을 제외한 민간인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윤봉길의 의거로, 중국인 특히 국민당 정권은 한국인에 대해 재평가하게 된다.‘만보산 사건’ 등으로 나빠졌던 한국인에 대한 평가가 놀랄 만큼 좋아졌고, 우리 독립운동을 국민당정권이 돕게 되는 계기가 된다. 또 미주, 하와이등지의 한국인들이 임시정부에 다시 성원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침체기를 걷던 우리 독립운동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의거로 백범에게는 60만원(2002년 환산 200억원)의 현상금이 붙었고, 임시정부와 임시정부 사람들은 길고 긴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윤봉길기념관 안에 모셔진 윤봉길 의사 흉상

중국인들은 윤봉길의 호 ‘매헌(梅軒)’을 따서, 홍커우공원 안에 ‘매헌(梅軒)’이라는 윤봉길기념관을 만들어 놓았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정성스럽게 잘 꾸며 놓았다.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아침나절, 마당로 임시정부 청사에 장사진을 이루던 한국인들은 왜 이곳은 외면하는 것일까? 가이드에게 물으니, 홍커우공원 버스 주차장이 좁아서, 주차하기가 어렵고 홍커우공원과 거리가 멀어서 그렇단다. 나 이런! 세상 물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헌 주변에 때 이르게 핀 매화만이 우리들을 수줍게 반겨주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황포강에서 유람선을 탔다. 상하이를 동서로 가르며 흐르는 황포강에서 바라보는 포동(浦東)과 포서(浦西)는, 한쪽은 중국이 과거 제국주의 침략을 겪을 때 지어진 유럽식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고 반대쪽에는 과거의 아픔을 이겨내고 우리는 이렇게 성장했다는 걸 웅변하듯이 현대식 마천루들이 줄지어 서 있다. 포동은 포동대로 포서는 포서대로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한다.
이 강 옛 선착장 자리에서 의열단원은 일제 군부의 거물이며 해외 영토확장 계획의 지도적 이론가를 자처하는 침략주의자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 하였다.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세 사나이가 나섰다. 3월 28일,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를 필두로 수십 명의 고관과 육·해군 장병 및 거류민을 포함한 다수의 일본인들, 그리고 각국 외교사절단이 영접차 도열해 있는 가운데 다나카를 태운 여객선이 오후 3시 반경에 황포탄 세관 마두(碼頭)의 잔교(棧橋) 앞에 도착했다.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 몇 걸음 내디뎠을 때, ‘권총 사격의 귀재’ 오성륜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잰걸음으로 다나카를 추월하여 나온 미국여인이 그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1

혼비백산한 다나카가 대기 중인 자동차를 향해 줄행랑을 놓았다. 도망가는 다나카를 향해 김익상이 권총을 겨누었다. 두 발을 쏘았는데 빗맞아 모자만 꿰뚫었다. 김익상은 연이어 다나카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긴박한 상황에서 너무 서두르다 보니, 안전핀을 먼저 뽑아야 하는 걸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 사이에 다나카는 황급히 차에 올라타 출발하였다. 우왕좌왕하는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 이종암이 힘껏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자동차 앞바퀴에 적중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바로 터지질 않았고, 옆에서 있던 영국 군인이 강물 속으로 차넣어 버렸다. 이리하여 의열단원 3인의 암살 저격은 불행히도 실패하고 말았다. 의열단원들은 거사 지령을 받으면 탄두를 갈아서 뭉툭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총알이 관통하여 다른 사람까지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름다운 상하이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자주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분들을 떠올린다. 묵직한 아픔과 슬픔이 화려한 조명과 눈물처럼 뒤섞인다.


1 오성륜이 쏜 총탄에 맞아 절명한 젊은 부인은 신혼여행 중인 미국인이었는데, 그 남편 되는 영국인 스나이더가 영사관 구치소로 면회를 와서 “조선 청년들의 의기에 배운 것이 많다”며 오성륜을 위로하고 갔다.

 

백범은 상하이 시절을 회고하면서 ‘죽자꾸나 상해시대’라고 압축하여 적었다. 큰 뜻을 품고 저마다 모여들었지만, 자금줄은 끊기고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중국인들이 버린 배춧잎 더미를 뒤져 먹을 만한 걸 골라야 하는 간난신고가 이어졌다. 여기저기서 배신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밀정이 횡행했다. 그 시절 백범은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라고 적었다. ‘죽자꾸나 상해 시대’를 주린 배를 움켜주고 누항에서 바릿밥을 마다하지 않은 분들이 있었다. 그 시절을 한숨을 반찬 삼아, 눈물을 국 삼아 찌개 삼아 견뎌낸 분들 덕분에 우리는 존재한다. 그분들을 잊지 않고자 한다.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한다. 발바닥에 새기는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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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大富至言(대부지언)

 

富源言力勉(부원언력면)

貧者遂嚬眉(빈자수빈미)

不動多錢入(부동다전입)

當然起大疑(당연기대의)

 

큰 富者 나으리의 지극히 당연한 말씀

 

富의 근원 열심히 힘씀이라 말하니

가난한 者 마침내 눈살을 찌푸리네

움직이지 않아도 많은 돈 들어오니

마땅히 큰 의심을 일으키게 된다네.

 

<時調로 改譯>

 

富源은 힘씀이라니 貧者 눈살 찌푸리네

움직이지 않더라도 많은 돈이 들어오니

마땅히 크나큰 의심을 일으키게 된다네.

 

*大富: 큰 富者 *至言: 지극히 당연한 말. 또는 지극히 좋거나 중요한 말 *富源:

경제적 富를 생산할 수 있는 근원이나 천연자원 *力勉: 부지런히 힘씀  *嚬眉:

눈살을 찌푸림 *多錢: 돈이 많음. *大疑: 크게 의심함. 큰 의심이나 의혹.

 

<2018.7.8, 이우식 지음>

일, 2018/07/08-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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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2018 정기총회 간략 후기

 

지난 주 토요일 (3.24), 민족문제연구소 총회, 부끄럽고 참담했습니다.

저는 총회 이틀전 개인 성명서에서 발표한대로, 연구소 주인인 회원의 대표기구, 운영위원회를 무력화시키는 정관개정에 반대의사를 피력하기 위해 홀로 어렵사리 참석했습니다

 총회 시작전 로비에서 개인 성명글을 배포하는데.. 몇몇 운영위원과 회원들이 험악한 얼굴로 돌아가며 저의 몸을 잡아끌어 밖으로 쫓아내려는 통에 몸싸움을 하고, 유인물도 못 돌리고많이 시달렸네요

총회 진행중엔 더 심각..  

제가 어렵사리 발언기회를 얻어 발언을 하자마자 모 운영위 부위원장이 제 앞 자리에서 계속 고함과 삿대질 하며 방해, 뒤에 단상에선 소장님이 발언을 짧게 하라고 계속 재촉하면서 방해..작전 짠 듯이

또 다른 반대발언을 하는 회원의 입을 틀어 막기 위해 마이크를 빼앗으라 하고 퇴장지시하고..또 다른 회원은 아예 마이크 잡을 기회도 주지않고 퇴장 지시

언젠가 삼성의 주총에서 윤종용 부회장이 소액주주들에게 고압적으로, 함부로 하던 광경이 떠올려지고..

 정관개정은 어느 단체나 총회의 제일 중요한 사안입니다. 민주적 총회였다면, 지나가는 말로라도 회원의 의사를 물었을 법도 한데, 그러기는커녕, 반대발언을 하는 소수를 탄압하는 모양새. 깜짝 놀랐습니다. 소장님이 총회를 그렇게까지 비민주적, 편파적, 고압적으로 진행하실 줄은..

그리고 발언하러 나온 회원에게 회비 내셨습니까?” 라고 핀잔을 주는 건 도대체 뭔지

암튼 그날 총회 진행을 통해서 느낀 건 소장님은 분명 회원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과, 지부장들뿐 아니라 회원들 스스로도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 그래서 더 찝찝하고 참담했습니다.

연구소 회원들이 어떻게 이렇게 타락했습니까?” 총회장이 어수선해지자 임소장님이 하신 말씀,
회비 내셨습니까?” 와 함께 그날의 명언 등극.

 

2018. 3. 28
전 운영위원장 (9) 여인철

수, 2018/03/28-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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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간략후기’, 김재광 전 지부장의 반박문에 대한 반론 

민족문제연구소 김재광 전 지부장님,, 

지난 328일에 모 카톡방과 이 자유게시판에 올린 김재광 지부장님의 글에 대해 바쁘고 할 일이 쌓여있는데 시간을 내서 반론을 쓰는게 참 아깝지만, 혹시라도 저런 글을 보시고 오해를 하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할수 없이 주말에 쉬는 시간 쪼개서 반론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3. 24) 총회에 온 회원들은 이미 (정관개정에 대한) 박수통과 요청에도 기꺼이 환호하며 응할 만반의 준비가 되있던 사람들이지요. 그 사람들을 어떻게 돌려세우겠어요, 그 짧은 시간에 

더구나 제가 반대발언 시작하자마자 바로 앞에서 일어나 삿대질하고 고함지르던 운영위 모 부위원장과 회원들에조금 지나니 단상에서는 3분 안에 짧게 끝내라고 계속 큰소리로 방해(?)하시는 소장님 때문에 중간 중간 발언이 끊기고..나중엔 결국 간신히 1분만 더 발언하겠다고 하면서 마무리를 했으니 충분히 주장을 펼칠수 없었지요 

나중에 어떤 분은 그 광경을 보시고 서로 미리 각본이 있었던 것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디다. 

암튼 저는 처음부터 정관개정안이 거부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시작한게 아닙니다. 다만, 집행부의 배은망덕한 운영위원회 무력화와 집행부로의 권한집중의 의도를 가진 개정안이 잘못됐다는 걸 누군가는 지적을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대전에서 힘들여 총회에 올라간 거지요. 문제제기의 성과는 있었다고 봅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겠지요 

그런데 김지부장님 글을 쓴걸 보니 정관개정에 반대한 사람들은 훼방꾼이나 나쁜 사람’, 찬성하는 사람들은 정의파좋은 사람이라는 아주 단순한 인식의 틀을 갖고 있네요 

김지부장님의 글 전체가 악의를 담고 있으나, 한 단락만 인용해서 얘기해보면 

찬반 토론이 시작되어 찬성하는 회원과 반대하는 쪽에서 1명씩 발언을 하는 중에 ooo 전 지부장이 마이크를 잡고 오랜 시간 발언과 제안과 상관없는 얘기를 해서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가고 회의가 난장판이 되어 마이크를 끄게하고 진행을 위해서 퇴장을 요청했는데 계속해서 악다구리를 부리고해서 퇴장을 요청하였지만 계속해서 회의를 방해했습니다.” 

김지부장님, OOO 전 지부장님이 오랜 시간 발언?” 하거나, “제안과 상관없는 얘기?”를 했다? 

OOO 지부장님을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본바와 너무 달라 회의 동영상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OOO 전 지부장님은 저는 정관의 문제점을 말씀 드리겠습니다…”하고 발언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약 10여초 정도 지나자 바로 소장님이 , 회원님, 정관개정에 대해서만 얘기해주세요…”라며 제지에 나섰습니다. 분명 개정 정관의 문제점에 대해 말하겠다고 시작한지 몇초만에 

그리고는 여기저기서 회원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고함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OOO 지부장님과 회원들과의 사이에 고성이 오가자 소장님이 진행요원을 부르시며 마이크 빼앗고 퇴장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김재광 지부장님, 그렇게 함부로 허위로 얘기하는거 아닙니다. 마이크를 잡은 OOO 전 지부장님은 정말 몇 마디도 못해보고 마이크를 빼앗겼어요. 왜곡하지 마시고, 확인해 보세요 

소장님은 찬성발언을 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제지를 안 하시거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부탁하셨고, 반대발언자에게는 발언이 반대쪽이란 게 드러나는 순간부터 개입해서 방해를 시작하셨습니다. 김지부장님이 그렇게 객관적이고 정의롭다면 왜 반대발언을 막는 소장님이나 회원들의 악다구니에는 침묵하나요 

조세열 사무총장은 자기 주장을 담은 글을 아무 힘 안들이고 자료집에 넣어 전달한 반면, 나는 총회장 앞에서 내 주장을 담은 유인물을 돌리다 운영위원과 회원들에 의해 욕설을 들어가며 이리저리 끌리고 내 쫓기면서 시달림을 당했는데, 그렇게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이고 부당한 건 왜 아무런 얘기 안하지요 

그리고 총회장 밖에서 시위를 하는 사람들의 현수막을 칼로 찢는 태극기부대 같은 행태에 대해서는 왜 말이 없지요 

앞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치 객관적인 양, ‘정의파인 양 하지 말고 그냥 집행부 시각에서 얘기하겠다고 하세요. 그러고도 역사정의를 바로 세운다고요? 자신부터, 사소한 정의부터 바로 세우시길 

어느 시민단체에서 단체와 집행부의 일상활동을 운영위원회에서 심의 의결하는 단체는 보지를 못했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사업을 하지 말라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운영위원회가 무소불의의 권력기간입니까?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 김재광 

참여OO 정관을 한번 보세요. 회원과 운영위원회를 얼마나 존중하며 큰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지를 

운영위원회가 심의의결을 하면 사업을 못합니까? 그러면 지난 20년 동안, 그리고 김지부장님이 운영위원으로 있을 때도 심의의결 했었는데, 그때 연구소/집행부가 사업을 못했어요? 김지부장님 인식수준이 부끄럽고 걱정됩니다 

더 이상 왜곡된 사실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정의로움을 갈망하는 회원님들과 시민들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게 하시길 부탁드립니다 

2018. 3. 31

민족문제연구소

전 운영위원장(9) 여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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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김재광 지부장의 반박문 

여인철 회원의 민문연 총회 후기에 대한 반박문 

여인철씨의 사실을 왜곡하고 민문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후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에서 더 이상 침묵하면 않될 것 같아서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본인도 당일 총회에 참석한 회원으로서 저의 시선으로 보고 느낀점을 말씀드립니다.

1.정관수정안에는 회원과 운영위원의 권리를 박탈한 조항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아래 첨부한 사진 속 개정안을 참고하세요.

 단 논쟁이 된 조항은 20년전 초창기에 만들어진 조항인 정관제323기타 연구소의 일상업무를 심의.의결한다는 조항을 폐기하는 문제를 침소봉대하고, 본인이 민문연 운영위원장을 했던 분이 후임 운영위원장과 운영위원이 결정한 개정안을 비민주적이라고 폄하하고운영위원장과 정관개정소위원회 위원을 한 운영위원을 사퇴하라고 성명서를 발표해서 명예를 손상시키고, 민문연 소장과 회원이 비민주적이고 패거리 집단처럼 호도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당일 총회 시작 후 2시간 정도 흐른 뒤 정관개정안 의결 순서가 되어서 제안자인 xxx 운영위원장이 제안설명을 하고, 개정안을 반대하는 여인철씨가 반대입장을 발표했는데, 너무 장황하게 얘기를 해서 찬반토론을 위해서 3분안에 발언을 마쳐달라고 사회를 본 소장이 부탁을 드렸고 

찬반 토론이 시작되어 찬성하는 회원과 반대하는 쪽에서 1명씩 발언을 하는 중에 xxx 전 지부장이 마이크를 잡고 오랜 시간 발언과 제안과 상관없는 얘기를 해서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가고 회의가 난장판이 되어 마이크를 끄게하고 진행을 위해서 퇴장을 요청했는데 계속해서 악다구리를 부리고해서 퇴장을 요청하였지만 계속해서 회의를 방해했습니다. 

하여 더 이상 회의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해서 소장이 충분한 의사를 알았으니 표결에 붙이겠다고 하여 개정안 삭제를 낸 여인철씨와 뜻을 같이하는 5명만이 반대하고 200여명이 넘는 회원이 찬성을 해서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통과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올고 다른 회원과 운영위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틀리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촛불을 들었고, 민문연 운영위원장을 엮임했던 회원으로서 올바른 행동이라고 판단되지 않습니다. 또한 민문연 내부의 문제를 사실을 왜곡해서 촛불을 들었던 이 카톡방에 퍼트리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총회에 참석한 수 많은 회원의 목소리는 안중에도없고 내가 주장한 것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비민주적이고 폭거가 되는 것입니까? 참으로 안타깝고 개탄스럽습니다. 

20년 가까이 여인철씨를 보아온 저로서는 요즘 행태에 대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합니다. 부디 자중하시고 본인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북부지부장 김재광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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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민단체에서 단체와 집행부의 일상활동을 운영위원회에서 심의 의결하는 단체는 보지를 못했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사업을 하지 말라는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운영위원회가 무소불의의 권력기간입니까?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일, 2018/04/01-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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