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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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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익명 (미확인) | 금, 2019/03/29- 17:56

[회원마당]

임시정부 답사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조선동 예원학교 국어교사, 청년백범 대표

S#1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이 맺어졌다. 이른바 ‘경술국치(庚戌國恥)’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대 전란을 겪은 이후, 조선왕조는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일부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득세하면서, 일부 권력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 백성을 위하는 정치가 아니라 일부 권력층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정치가 이루어졌다. 백성들은 권문세가의 이익을 위해 맞아죽고, 굶어죽었다. 일부 백성들은 스스로 민적(民籍)을 파내고 산으로 들어가 산적이 되었다. 이미 나라는 썩어 들어갔다. 신분제를 기반으로 한 왕조는 금이 가고 있었다.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과 양심을 팔아먹은 조선의 관료들이다. 세계사 어디에도 외부의 힘만으로 멸망한 국가는 없다. 이미 내부에서 썩어 들어가던 국가가 외부의 작은 충격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할 뿐이다. 한일합병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황태자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 대하여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줄 것이다.(후략)

 

한일합병조약문을 읽어 가면서, 나는 화가 났다. ‘조선 황제의 권리를 일본 황제에게 넘긴다’는 제1조로 시작된 조약문은 황족(皇族)의 위엄과 명예를 지켜달라고 한다. 훈공 있는 한국인, 다시 말해 ‘친일파’에게는 표창과 작위와 은급을 내려 달라고 한다. 조선이 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특권만을 행사하고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았던 지배층의 탓이다. 그 지배층들은 나라가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고 명예와 권력과 재산을 보장받고자 한다. 그를 위해 충분한 세비를 공급하라고 한다. 뻔뻔스럽다. 그
세비는 결국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백성들을 쥐어짜라는 이야기이다.
내가 회사를 운영한다 치자. 경영을 잘못하여 회사를 다른 회사에 넘겨야 한다. 회사를 넘기
기 위해 인수합병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나의 경영권과 재산을 보장받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나 때문에 고생한 직원들의 일자리를 보장해달
라고, 직원들을 잘 대해 달라는 내용을 어떻게라도 인수합병서에 넣어야 한다. 나 때문에 고생
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다. 한 나라를 경영한 자들이 우리 국민들을 어떻게 해 달라
는 말 한 마디 없다. 분통이 터진다.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마자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우리 국토 대부분은 조선총독부의 것이 되었다. 당시 국민들 대부분의 직업은 농업이었다.
국민 대부분이 순식간에 ‘소작농’으로 전락한 것이다. 원래 소작농이었던 이들의 삶은 더더욱 황
폐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소작세를 대폭 올리고 여러 가지 준조세 형태로 우리 국민들을 수탈
하였다. 민초들의 삶은 뿌리째 뽑혔다.
우리 민족의 위대함은 1917년 광무선언(대동단결선언)에서 드러난다. 한입합병조약은 대한제국 황제가 대한제국의 모든 권리를 일본 황제에게 이양한다는 것이다. 1917년 상하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박용만·윤세복·조소앙 등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한일합병조약의 부당성을 말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 대한 모든 권리는 이제 우리 민족의 것이 되었으며, 대한제국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여서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가 일본 황제에게 갈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경술국치를 통해서 망한 것은 황제의 나라인 ‘대한제(帝)국’일 뿐이며, 황제가 포기한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는 대한의 국민들이 승계·계승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대한제(帝)국’은 사라졌지만, 그 뒤는 모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대한민(民)국’이 계승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유럽에서 황제국가가 시민국가로 전환되는 데 약 200여 년이 걸렸다. 우리는 이러한 민주적 전환을 10년도 걸리지 않아 이루어낸 것이다.
조선 시대에 모든 공적(公的) 문서의 주어는 모두 임금(왕) 또는 황제이다. 1917년 광무선언, 위대한 정치적 개안(開眼)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 첫 문장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국민’이 우리나라 국권의 주어(主語)로 자리잡았다. 이 정신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본이념이 되었다. 이후 우리 독립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으며, 지금의 대한민국 헌법 정신의 근간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S#2 ‘바리데기’들의 눈물, 한숨, 피

옛날 오구대왕이 살았다. 혼례를 일년 미루어야 아들을 낳고, 길하다는 예언을 무시하고 결혼한 탓에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딸만 계속 낳다가 마침내 일곱째도 딸로 태어나자, 화가 난 오구대왕은 일곱째 바리공주를 내다버렸다. 바리공주는 한 노부부에 의해 구해져 길러졌다. 후에 왕과 왕비가 죽을병이 들었다. 백약이 무효였다. 저승의 생명수만이 병을 고칠 수 있다 했다. 오구대왕 부부는 가장 사랑을 많이 주며 기른 첫째 공주를 불렀다. 저승에 가 생명수를 구해, 아비와 어미의 목숨을 구해 달라 했다. 첫째 공주는 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거절하였다. 다음으로 사랑을 많이 준 둘째 공주를 불렀다. 저승으로 가 생명수를 구해, 아비와 어미의 목숨을 구해달라 부탁했다. 둘째 공주 역시 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고개를 저었다. 여섯째 공주까지 마찬가지였다. 낳자마자 내다버린 바리데기가 기적처럼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오구대왕은 체면불고(體面不顧) 바리데기를 불러다가 부탁했다. 그 말을 들은 바리데기가 말했다. 내가 은혜를 입은 바 없으나, 아비의 씨앗을 받아 어미의 배에 열 달 있었으니, 가겠노라 말한다. 바리데기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저승으로 갔다. 바리데기는 무슨 지옥, 무슨 지옥, 무슨 지
옥… 온갖 고생 끝에 저승의 생명수를 구해와 부모를 살려냈다.
나라가 망하자 뜻 있는 사람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그 후 1919년부터 1945년까지 그들이 벌인 투쟁은 세계사에서 그 비슷한 경우조차 찾아볼 수 없는 끈질기고 가열 찬 싸움이었다.
그들은 어두웠던 우리 역사의 등대였고, 우리들의 자존심이자 자긍심이다. 그들을 만나러 간다. 이회영 형제처럼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행한 경우도 있었지만, 모여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기에 다들 ‘바리데기’였다. 나라로부터 은혜 입은 적 없으나, 나라에 몸을 의탁해 살았으니, 기꺼이 지옥의 불길을 향해 간다.
그들의 눈물, 한숨, 피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해 짐을 싼다. 4박 5일의 일정이다. 상하이, 자싱, 하이옌, 항저우, 난징에 남아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흔적을 더듬어 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때 상하이를 향해 집을 나선 윤봉길은 이런 글을 남겼다. 나라 잃은 원수를 갚기 위해 진시황을 죽이려 했던 ‘형가’라는 자객이 남긴 시의 첫 구절이다. “사나이 집을 나서매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으리!” 10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왜 이 길을 나서는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가슴에 담고자 하는가?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답사 하루 전 밤이다.

S#3 죽자꾸나, 상해시대

두 시간 남짓 비행으로 상하이 국제공항에 내렸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남쪽인 상하이는 1월 날씨인데도 따뜻하다. 해발 100m가 채 안 된다는 상하이는 사방 어디에서도 산을 찾아볼 수없는 평원지대이다. 도시 한 가운데로 황포강이 상하이를 동서로 나누며 흐른다. 황포강 동쪽을 ‘포동(浦東)’ 황포강 서쪽을 ‘포서(浦西)’라고 부른다.
첫 여정은 상하이의 번화가인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차창 너머로 보는 중국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 하늘 끝까지 뻗어 있는 것 같은 마천루의 열병식. 변화하고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을 웅변하는 듯하다.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사실 상하이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한 임시정부 청사이다. 첫 번째 사용한 청사는 그 위치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 한다. 두 번째 사용한 청사는 상하이 회해중로에 있다고 한다. 원래 건물은 흔적도 찾을 수 없고 H&M 매장이 들어섰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는 청사를 열 번 정도 옮겼다. 우리가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임시정부의 흔적은 마지막 청사인 이곳 뿐이다.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인 1932년 4월까지 사용한 청사이다. 원래 한 칸만 청사로 사용했었는데, 중국 정부의 협조로 옆의 두 칸까지 모두 세 칸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장사진(長蛇陣), 인산인해(人山人海)를 넘어서서 ‘야단법석(野壇法席)’에 가깝다. 청사는 긴 직사각형 모양이다. 너비는 두 사람이 팔을 벌려 서면 그만이다. 1층 전면으로 응접실이 있고, 1층 후면에는 중국식
부뚜막이 있는 작은 부엌이 있다. 임시정부 사람들이 밥을 짓고 밥을 먹던 곳이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임시정부 중심인물들의 숙소가 있다. 좁고 긴 복도를 따라 나란히 네 개의 방이 있다. 원래 넓지 않은 집인데, 복도와 계단을 빼고 남은 공간을 넷으로 나누었으니, 방의 넓이는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좁다. 기념관 안에서는 촬영을 일절 금한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이곳까지 와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아쉽다.
1층 좁은 중국식 부뚜막 주변으로 자꾸만 눈길이 간다. 이곳에서 이봉창과 임시정부 청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술이 얼큰하게 오른 이봉창이 말했다.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못 죽이나?” “하급 관리 하나 죽이기도 어려운데, 천황을 죽이기가 쉽겠소?” 이봉창은 다시 말했다.
“내가 동경에서 천황의 행차를 본 적이 있소. 그때 내가 엎드려서 생각하기를 지금 만약 내 손에 폭탄만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 대화를 우연히 들은 백범은 이봉창과 함께 침체에 빠져 있던 우리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봉창은 적진의 심장부에 홀로 뛰어들어 큰 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거사 직후 중국의 신문은 이런 제목의 기사를 내었다.
“불행히도 적중하지 않았다.” 이봉창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백범과 마지막 사진을 찍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 나이가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해도 늙은 생활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 이제는 영원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떠나는 것이니,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 이봉창의 거사가 시작된 곳이 이곳이로구나. 한 사나이가 죽음을 앞두고도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이 떠오른다. 1931년 일이다. 이때 이봉창의 나이 서른하나였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봉길이 백범을 찾아온다.
“제가 날마다 채소 바구니를 등에 메고 홍구 쪽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선생님께서 동경 사건과 같은 계획이 또 있을 줄 믿습니다. 저를 지도하여 주시면 죽
어도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이 만남은 두어 달 후 우리 독립운동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는 홍커우공원 의거를 이끌어낸다. 백범과 윤봉길은 서로 시계를 나누어 가지고, 후일 지하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영원히 헤어졌다. 1932년 일이다. 윤봉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먹먹한 가슴으로 임시정부 청사를 나와서 백범 가족이 살았던 영경방 10호를 찾아간다. 당시 이곳은 상하이에서 가난한 동네에 속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인들이 버린 배춧잎 중에 먹을 만한 것을 골라서 생활할 만큼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백범은 아내 최준례를 잃는다. 최준례는 둘째 아들 신을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동이 불편하였다. 시어머니인 곽낙원이 자신의 세숫물까지 치우는 일을 하게 되자, 회복이 덜 된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좁고 가파른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제때 치료를 하지 못해 늑막염이 폐병으로 번졌다. 형편이 어려웠던 터라, 최준례는 외국인 선교회에서 무료로 시술하는 홍커우 폐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병원이 있던 곳은 일본 조계지였다. 프랑스 조계지 밖으로 나갈 수 없던, 일본 조계지에는 더더군다나 갈 수 없었던 백범은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시어머니 곽낙원이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 최준례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후였다. 어미를 잃은 둘째 아들 신은 그때 막 걸음마를 익힐 때였다. 우유를 먹었지만 잘때는 할머니의 빈 젖을 물고야 잠이 들었다. 차차 말을 배웠지만, ‘할머니’라는 말만 알았고, ‘엄
마, 어머니’라는 말을 몰랐다고 한다.
백범이 안악 양산학교 교사였던 시절, 애제자였던 나석주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백범은 나석주를 ‘지사이자 제자’라 칭하였다. 나석주는 조국과 겨레를 위해 무언가 큰일을 도모하고자 톈진으로 가 의열단에 가입할 것을 결심하고 스승인 백범을 찾아온다. 때마침 백범이 생일인 것을 안, 나석주는 양복저고리를 전당을 잡히고 고기와 채소를 사와, 백범의 생일을 기념하였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만국공묘 내 신규식•박은식•노백린 선생 묘가 있던 자리

 

다음해인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는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 남대문 근처에 있던, 경제침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불행히 불발하였다. 뒤쫓아온 일경들과 총격전을 벌이며 일본 경찰 7인을 사살하고 자결하였다. 나석주가 순국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백범은 그 후부터 죽는 날까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지 않았고, 나석주는 영영 다시는 자신의 생일을 맞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지금 이곳은 상하이의 번화가로 변모하였다. 영경방 일대는 고풍스러운 건물 외관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실내는 고급 식당 등으로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다.
임시정부 사람들이 상하이에 모여들기 전, 이곳 상하이에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분들이 계신다. 예관 신규식 선생, 백암 박은식 선생 같은 분들이다. 선견지명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고, 평생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애쓰던 분들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분들이 잠들어 계셨던 만국공묘로 간다. 이분들의 유해는 1993년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참으로 무심한 후손들이 아닐 수 없다. 선생님들 잠들어 계셨던 곳에 준비해간 차와 술을 올리고 두 번 절했다. 뜨겁고 뭉클한 것이 울컥 올라왔다. 어찌 아는 이 하나 없는 이역만리 땅에 계셨어요? 우리가 참으로 죄인입니다!
눈물 마를 사이도 없이 홍커우공원으로 이동한다. 윤봉길 의사 의거지(義擧地)이다. 상하이를 점령한 기념식과 천황 생일인 천장절을 겸하여 기념하는 기념식장에 단신으로 들어가 일본군 시라카와 대장 등 군 수뇌부와 주중 일본 대사, 상하이 민단장 등을 폭사시켰다. 윤봉길이 들고 간 폭탄은 두 개였다. 하나는 도시락 모양, 또 하나는 물통 모양. 폭발력이 강한 도시락 모양 폭탄을 던지고, 물통 모양의 폭탄은 자결용이었다고 한다. 단상 주변에 민간인, 특히 어린이들이 있는 것을 본 윤봉길은 불필요한 희생을 줄
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폭발력이 약한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졌고, 단상 위에 있던 일본군 수뇌부 등을 제외한 민간인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윤봉길의 의거로, 중국인 특히 국민당 정권은 한국인에 대해 재평가하게 된다.‘만보산 사건’ 등으로 나빠졌던 한국인에 대한 평가가 놀랄 만큼 좋아졌고, 우리 독립운동을 국민당정권이 돕게 되는 계기가 된다. 또 미주, 하와이등지의 한국인들이 임시정부에 다시 성원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침체기를 걷던 우리 독립운동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의거로 백범에게는 60만원(2002년 환산 200억원)의 현상금이 붙었고, 임시정부와 임시정부 사람들은 길고 긴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윤봉길기념관 안에 모셔진 윤봉길 의사 흉상

중국인들은 윤봉길의 호 ‘매헌(梅軒)’을 따서, 홍커우공원 안에 ‘매헌(梅軒)’이라는 윤봉길기념관을 만들어 놓았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정성스럽게 잘 꾸며 놓았다.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아침나절, 마당로 임시정부 청사에 장사진을 이루던 한국인들은 왜 이곳은 외면하는 것일까? 가이드에게 물으니, 홍커우공원 버스 주차장이 좁아서, 주차하기가 어렵고 홍커우공원과 거리가 멀어서 그렇단다. 나 이런! 세상 물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헌 주변에 때 이르게 핀 매화만이 우리들을 수줍게 반겨주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황포강에서 유람선을 탔다. 상하이를 동서로 가르며 흐르는 황포강에서 바라보는 포동(浦東)과 포서(浦西)는, 한쪽은 중국이 과거 제국주의 침략을 겪을 때 지어진 유럽식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고 반대쪽에는 과거의 아픔을 이겨내고 우리는 이렇게 성장했다는 걸 웅변하듯이 현대식 마천루들이 줄지어 서 있다. 포동은 포동대로 포서는 포서대로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한다.
이 강 옛 선착장 자리에서 의열단원은 일제 군부의 거물이며 해외 영토확장 계획의 지도적 이론가를 자처하는 침략주의자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 하였다.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세 사나이가 나섰다. 3월 28일,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를 필두로 수십 명의 고관과 육·해군 장병 및 거류민을 포함한 다수의 일본인들, 그리고 각국 외교사절단이 영접차 도열해 있는 가운데 다나카를 태운 여객선이 오후 3시 반경에 황포탄 세관 마두(碼頭)의 잔교(棧橋) 앞에 도착했다.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 몇 걸음 내디뎠을 때, ‘권총 사격의 귀재’ 오성륜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잰걸음으로 다나카를 추월하여 나온 미국여인이 그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1

혼비백산한 다나카가 대기 중인 자동차를 향해 줄행랑을 놓았다. 도망가는 다나카를 향해 김익상이 권총을 겨누었다. 두 발을 쏘았는데 빗맞아 모자만 꿰뚫었다. 김익상은 연이어 다나카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긴박한 상황에서 너무 서두르다 보니, 안전핀을 먼저 뽑아야 하는 걸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 사이에 다나카는 황급히 차에 올라타 출발하였다. 우왕좌왕하는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 이종암이 힘껏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자동차 앞바퀴에 적중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바로 터지질 않았고, 옆에서 있던 영국 군인이 강물 속으로 차넣어 버렸다. 이리하여 의열단원 3인의 암살 저격은 불행히도 실패하고 말았다. 의열단원들은 거사 지령을 받으면 탄두를 갈아서 뭉툭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총알이 관통하여 다른 사람까지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름다운 상하이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자주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분들을 떠올린다. 묵직한 아픔과 슬픔이 화려한 조명과 눈물처럼 뒤섞인다.


1 오성륜이 쏜 총탄에 맞아 절명한 젊은 부인은 신혼여행 중인 미국인이었는데, 그 남편 되는 영국인 스나이더가 영사관 구치소로 면회를 와서 “조선 청년들의 의기에 배운 것이 많다”며 오성륜을 위로하고 갔다.

 

백범은 상하이 시절을 회고하면서 ‘죽자꾸나 상해시대’라고 압축하여 적었다. 큰 뜻을 품고 저마다 모여들었지만, 자금줄은 끊기고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중국인들이 버린 배춧잎 더미를 뒤져 먹을 만한 걸 골라야 하는 간난신고가 이어졌다. 여기저기서 배신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밀정이 횡행했다. 그 시절 백범은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라고 적었다. ‘죽자꾸나 상해 시대’를 주린 배를 움켜주고 누항에서 바릿밥을 마다하지 않은 분들이 있었다. 그 시절을 한숨을 반찬 삼아, 눈물을 국 삼아 찌개 삼아 견뎌낸 분들 덕분에 우리는 존재한다. 그분들을 잊지 않고자 한다.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한다. 발바닥에 새기는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시민들의 의견

심정섭 지도위원 제67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85점 보내와
6월 18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7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보성문화>, <새전남>, <월간호남> 등 전라도 지역에서 발행한 잡지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기금전달식 후 자료 기증 잇달아
▪ 기타무라 메구미 씨, 제7차 일본 교류관계의 소장자료 전달
지난 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기금전달식에서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교류단체와 개인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6월 9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일본역사사진첩>(1914), <황족화보>(1930)등 총 5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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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카와 마사키(재한군인군속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씨가 2003년 재한군인군속 추가 제소에서 사용한 플래카드, 2009년 군군재판 도쿄고등법원 판결 후 지원하는 모임이 받은 플래카드 2점을 기증했다.

야마모토 나오요시(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 씨가 <계간전쟁책임연구>, 군인군속재판관련자료등책자와문서, 현수막을기증했다.

야스다 치세 씨가 <아시아태평양전쟁한국인희생자보상청구사건소송>(1992)을기증했다.

평화교육연구위원회에서 <新潟県内における韓國·朝鮮人の足跡をたどる>(2010), <平和教育委員會資料シリーズ 第2集 新聞などに見る新潟県内韓國朝鮮人の足跡>(2006) 도서 3권을 기증했다.

야노 히데키(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 씨가 활동했던 자료 모음인 플로피디스크, 카드, 명함 파일 등 다량의 자료와 지난 2018 남북정상회담 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 등을 기증했다.

히구치 유이치(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씨가 6월 18일 「용산시가도」(1929)를 기증했다. 이 지도는 용산 일본군기지와 용산역 및 주변의 철도기지 등이 표시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번 호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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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도시코 씨가 2014년 6월 27일 기증에 이어 <일본의 전사>등 강제동원관련도서31권과 ‘일본정부와 피해자의 목소리에 응답하라’에서 찍은 사진 등을 기증했다.

 

▪ 3월 24일 김삼웅 지도위원이 1962년 발행한 『동경재판』(전3권)을 기증했다. ‘동경재판’은 극동군사재판소가 제2차 세계대전 중 극동지역의 전쟁범죄자들을 심판하였던 재판으로 정식명칭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이다. 이 책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조일신문법정기자단에서 작성했다. 동경재판 당시 법정사진과 함께 재판의 모든 과정을 담은 유일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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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이덕문 회원이 지난해에 이어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제13회숙명여자대학교졸업앨범>(1964)등 도서 3권이다.

▪ 6월 14일 호시카와 가즈에(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 씨가 아베 반대 표찰 1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수, 2018/08/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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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청년시대여행이 공동 주관하는 ‘일제 강제동원과 야스쿠니신사-촛불원정대 특강’이 7월 4일부터 매주 목요일 민족문제연구소 강연장과 ‘청년협동조합 몽땅’의 사무실에서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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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강으로 구성된 이번 강좌는 올해 8월 도쿄에서 열리는 ‘야스쿠니의 어둠에 평화의 촛불을’ 공동행동 참가자를 대상으로 마련된 것으로, 현지 행사에 앞서 참가자들이 한일관계와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동북아 평화공존의 방안을 스스로 찾아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준비되었다.
1강에서 김진영 선임연구원은 일제식민지배의 특징과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개괄적으로 설명하였다. 이와 함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례와 한일 양국정부의 대응을 통해 강제동원 문제의 현재 상황을 살펴보았다. 2강에서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은 야스쿠니신사의 역사를 바탕으로 ‘천황제’와 야스쿠니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 그 허상과 야만성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현 일본사회의 사상적 근원, 우경화의 연원을 설명하여 강좌 참가자들과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7월 19일 3강에는 영화 ‘안녕사요나라’ 상영회와 주인공인 이희자 ‘보추협’ 공동대표의 강연이 준비되어 있고, 7월 26일 4강에는 촛불행동 설명회와 참가자 전체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 김진영 선임연구원

수, 2018/08/0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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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반민특위 설립 70주년을 맞아 6월 20일 연구소 5층 교육장에서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인 김정륙 회원(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1시간 정도 진행된 이날 간담회에서 김정륙 회원은 당시 서울 충무로에 있던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로 이승만 대통령이 찾아와 김상덕 위원장을 회유한 이야기, 김상덕 위원장이 6·25 직후 납북된 과정과 그 후 비참했던 가정사 등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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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회를 마친 후 김정륙 회원은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인장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 인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 시절 그리고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할 당시 사용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것이다. 김정륙 회원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마련된 2층 전시실에 인장을 직접 진열했다.
김정륙 회원은 아버지의 유품을 ‘가장 믿을 수 있는 곳’에 기증하게 되어 마음이 놓인다며 소중하게 보관해 달라고 당부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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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물 1층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전달식’이 열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이하 잇는 모임)이 건립기금 1억 345만 원을 시민역사관건립위원회에 전달했다. 식민주의 청산과 동아시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일본 시민과 단체로부터 모은 기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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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기금전달식에는 잇는 모임에서 서승 공동대표, 안자코 유카 공동대표,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 등 총 19명이 참석했고, 연구소 측에서는 이이화 시민역사관건립위원장, 함세웅 이사장, 임헌영 소장, 이민우 운영위원장 등 약 60명이 참석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들도 함께 했다.
기금전달식에 이어 2층 전시실에서 자료기증식이 진행되었다. 잇는 모임은 그동안 기금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전후보상운동의 전개과정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모아왔는데, 이날은 ‘재한군인군속재판의 요구 실현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 후루카와 마사키 씨가 커다란 현수막을 기증했다. “야스쿠니 합사를 하지 마라!! 유골을 돌려 달라!!”라는 구호가 힘찬 글씨체로 적혀 있는 이 현수막은 2003년 군인군속재판 추가제소 당시 일본 법원 앞에서 피해자들과 일본 시민들이 함께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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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는 모임 참가자들은 기금전달식에 앞서 효창원과 백범김구기념관, 남산 권역을 답사했으며, 6·10민주항쟁 31주년이 되는 날에는 남영동 옛 대공분실을 견학했다. 그들은 일제와 국가폭력으로 짓밟힌 역사가 켜켜이 쌓인 용산과 남산 일대를 답사하면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의의를 다시금 확인했다. 동시에 앞으로 더 많은 일본 시민들에게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알리고 함께할 것을 다짐했다.

•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수, 2018/08/0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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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오후 2시, 육군사관학교 화랑연병장에서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음)와 육군사관학교(교장 정진경 중장)가 공동주최한 이날 기념식은 처음으로 육사에서 열렸는데 이는 육사가 신흥무관학교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학교라는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육사는 지난 해 12월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특별 학술회의를 열었고, 올해 3월 1일에는 육사 교정에 독립전쟁 영웅 5인(이회영,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의 흉상을 제막하는 등 우리 국군의 뿌리 찾기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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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임원, 유족, 시민 등 60여 명이 참석한 기념식에는 1,100여 명의 육사생도 전원이 연병장에 도열했다. 주동욱 경희민주동문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 준비위원장이 신흥무관학교 경과보고를 했고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기념사를 했다. 윤경로 상임대표는 기념사에서 “신흥무관학교 선열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육사 생도들이 배우기를 원했는데 쉽지 않았지만 촛불시민들의 덕분으로 가능했다”면서 “앞으로도 매년 기념식을 육사에서 열 수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념식을 마친 후에는 육사 생도들의 분열식이 거행되었다. 이어서 독립전쟁 특별전시회를 관람 후 육사 생도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을지강당에서 공연된 항일음악회 관람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이날 기념식에는 윤경로 상임대표를 비롯해 이항증 공동대표, 정철승 조직위원장, 김용호 행사위원장 등이 참석했고 독립운동가 유족으로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차영조 선생 그리고 김순흥, 권위상, 김희원 운영위원 등이 함께 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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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者增稅(부자증세)

 

衆庶號增稅(중서호증세)

人君不欲聽(인군불욕청)

何由初約遠(하유초약원)

請願若雷霆(청원약뇌정)

 

富者에 대한 增稅

 

썩 많은 이들이 增稅 부르짖는데

나라님은 당최 들으려 하지 않네

무슨 연유로 첫 약속 멀어졌나요

請하고 願함이 천둥과 벼락 같네.

 

<時調로 改譯>

 

많은 이 부르짖는데 나라님 듣지 않네

그 무슨 까닭으로 첫 약속 멀어졌나요

請하고 願하는 바가 천둥과 벼락 같네.

 

*增稅: 세금의 액수를 늘리거나 세율을 높임. ≒복상(卜相) *衆庶: 뭇사람 *人君:

임금. 나라님 *初約: 처음에 약속 *請願: 일이 이루어지도록 청하고 원함 *雷霆:

뇌정벽력(雷霆霹靂).  천둥과 벼락이 격렬(激烈)하게 침. 또는 그런 천둥과 벼락.

 

<2018.8.1, 이우식 지음>

목, 2018/08/0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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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통일의 집’ 방문기

최인담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사

 

안녕하세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러분. 저는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사 최인담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연구소가 강북구의 요청으로 기념관을 위탁운영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2016년 개관 이래 제가 이곳에서 일한지 어느덧 2년 이상이 흘렀습니다.
강북구에 문익환 목사의 사택으로 알려진 통일의 집이 있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가까이에서 근무하게 된 김에 빠른 시일 내 한번 가봐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업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좀처럼 통일의 집을 방문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통일의 집이 공사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박물관으로 새 단장을 한다는 것이었어요. 박물관 건립과 운영을 위해 사단법인 통일의 집에서도 박물관 운영을 위해 연구소에 조언을 구하고자 기념관으로 연락을 준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기념관 위탁 운영 과정을 상세히 전달해드리고자 연구소로 직접 연결해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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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7일, 다시금 ‘통일’이라는 말이 아주 가깝게 느껴진 날이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인 상황과 마주하게 된 것이죠. 아직도 그날 아침 사무실의 분위기가 생각납니다. 다섯 명의 직원들은 지금 이 순간이 훗날 오래도록 기념할 역사적 순간임을 직감했었는지 각자 앞에 놓인 모니터에 시선을 떼지 못했어요.
군사분계선에 선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는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모습은 어느 새 악수를 나누는 모습으로, 또 악수를 나누는가 싶더니 어느새 김정은 위원장이 천진한 모습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팔을 잡아끌며 야트막한 방지턱을 넘는 모습으로 장면이 바뀌더군요. 군사분계선이 마음속에 그린 상상의 것이었나, 이렇게 넘을 수도 있는 것이었구나 싶어 울컥했습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실감나지 않던 정상회담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날 이후로 사회의 많은 곳에서 변화가 일어났음을 실감해요.
그리고 지난 6월이었습니다. 통일의 집이 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하고 관람객을 맞아들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박원순 서울시장과 배우 문성근 씨가 손님을 맞이하는 사진도 몇 편의 기사를 통해 접했지요. 그로부터 며칠 뒤 강북구청의 담당 주무관이 기념관을 직접 방문했어요. 주무관은 통일교육원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강북구청과 서로 만나기로 했대요. 이를 발판삼아 강북구가 ‘통일’을 주제로 근현대사기념관과 연계하여 역사체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어요.
사실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이래 통일교육원에서 교육을 받는 수강생들이 기념관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교육프로그램을 공유한 적은 없었거든요. 또 기념관에 전시 해설을 요청하신 적이 있지만 통일교육원의 교육프로그램의 주제와 맞지 않아 지속적으로 교류가 이어지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강북구와 근현대사기념관과 통일교육원이 서로 연계하여 통일교육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요!
그간 근현대사기념관은 기념관 인근에 있는 애국자시 16기의 묘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살려 시민들과 청소년 교육프로그램을 활성화하고 있었어요. 근현대사기념관에서 도보로 10분 이내 갈 수 있는 초대 제헌국회 부의장 신익희 선생 묘역, 1세대 검사 이준 열사 묘역,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 묘역, 초대 국군이라 할 수 있는 광복군 합동 묘역,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 묘역을 1시간 시간 코스로 둘러볼 수 있는 ‘초대初代길’은 근현대사기념관을 찾는 중고등학교 학급 단위의 단체관람객에게 매우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념관 설립 단계부터 민족문제연구소는 통일교육원과 국립4·19민주묘지 그리고 통일의 집을 염두하고 기념관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량으로 통일의 염원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2016년 8월, 광복 71년주년을 맞아 시민들의 소중한 모금과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의 회비로 후원한 독립민주기념비가 세워질 당시 기념비의 의의는 독립과 민주 그리고 통일을 기념하고 염원하는 조형물을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었어요. 지난 10년간 냉각된 남북의 분위기에도 통일이라는 염원을 잊지 않은 연구소의 바람도 근현대사기념관의 전시와 독립민주기념비에 고스란히 녹아있었습니다. 그러던 찰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저에게 통일의 집 방문기를 써달라는 요청을 하셨어요. 아, 이제는 정말 통일의 집 방문을 미룰 수 없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2018년 7월, 여름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었습니다.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통일의 집까지 걸어가는 데는 작은 골목 사이 최단거리로 15분 정도가 걸리더군요. 국립4·19민주묘지 앞을 거쳐 큰 길로 간다면 3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통일의 집 앞 골목까지 이정표가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아서 50m 정도 지나치기도 했지만 이내 훤한 대문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박물관과 만날 수 있었어요.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문익환 통일의 집 개관전이 열린다는 커다란 플래카드도 볼 수 있었어요. 반쪽 문이 열린 대문으로 총총 계단을 올라가니 소담한 정원이 펼쳐지더라고요. 뒤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펼쳐진 빨간 벽돌집은 문익환 목사와 가족이 1970년부터 살던 집이라고 합니다.
1994년 문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 부인 박용길 선생님께서 ‘통일의 집’이라는 현판을 걸고 일반에 공개하면서 알려졌다고 해요.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의 성금으로 집을 복원하였으며 2018년 6월 1일 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어요. 지금은 문익환 목사가 남긴 유품과 글, 서한 등 귀중한 근현대사의 자료를 보존하고 평화와 통일을 꿈꾸는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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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하기 전에 안내판을 꼼꼼히 읽고 화단을 한번 둘러보며 숨을 가다듬었고 있노라니,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순간적으로 저는 문익환 목사 댁을 방문한 손님이 된 기분을 느꼈어요. 문영금 통일의 집 관장님은 문을 열고 친히 슬리퍼를 내어주시며 손님을 맞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둘러보는 시간을 가지시라며 관람객을 배려해 주셨어요.
거실로 들어서자 “너른마당”이라는 글자가 적힌 액자가 눈에 띄었어요. 문익환 목사의 글처럼 오래 된 피아노와 문익환 목사의 사진과 그림이 벽에 걸렸으며, 문익환 목사를 주제로 한 다양한 책들이 거실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아담한 거실에 둘러앉아 벗과 덕담을 나누는 어떤 순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관람객을 배려한 작은 의자와 방석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아들방에서는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문익환 목사의 생애를 담은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윤동주, 장준하와 같은 역사 속 인물들과 교류하며 보편적인 말과 진실함으로 사람들 한가운데 서 있으며, 김일성 위원장과 포옹하는 장면이 나지막하면서도 힘 있는 육성과 함께 지나갔습니다. 그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해방의 혼돈을 거친 젊은 청년이 종교에 헌신하면서도 민주화운동의 거목이 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느낄 수 있었지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유물은 박용길 선생님이 모아놓은 남편의 수인번호였어요. 생애 중 10여 년 이상을 춥고 고달픈 곳에서 투쟁해 왔는지를 알 수 있었지요.
다음으로 기도방은 한가운데 자그마한 탁자가 놓여있었어요. 이곳에 앉아 기도하는 목사님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다음으로 안방으로 가는 복도를 두고 널찍하고도 깔끔한 화장실이 사용한 흔적 그대로 남아있었어요. 복도 벽면에는 문익환 목사의 청년시절, 신학자의 삶, 수감생활, 방북의 과정을 지도와 연표, 사진으로 보여주는 그래픽 패널이 있었어요. 좁은 집을 전시실로 알차게 활용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안방으로 들어서니 붉은 벽돌이 노출된 천장 일부가 눈에 띄었어요. 관장님께서 함께 둘러보시며 원래 복도에서 끝나는 집을 안방 방향으로 집을 증축하면서 가려져있던 굴뚝을 이번에 노출시켰다고 하셨어요. 마당이 훤히 보이는 안방은 문익환 목사의 자필 편지, 성서 연구 노트가 가지런히 진열장에 정리되어 있었어요. 생전에 그가 읽던 책은 성서부터 역사서, 시집 등이 벽면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습니다.
그렇게 박물관을 둘러보고 문영금 관장님과 너른마당에 앉아 담소를 나눴어요. 관장님께서 제게 전시를 어떻게 보셨는지 물으시며 말씀하셨어요. 원래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통일의 집을 개방했을 때는 아버지의 유품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물건들을 최대한 보여줄 수 있도록 배치하셨대요. 그러다 박물관으로 단장하면서 전문가의 의견에 따라 바꾸다보니 배치할 수 있는 물건이 줄어들어 아쉬움이 남는다고 하셨어요.
그렇지만 이 공간은 문익환 목사가 살았던 집을 고스란히 복원하고 그 안에 그의 생애와 그 시대의 치열함이 녹아있는 유물들이 놓여있어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을 살리고, 또 다른 공간에서 얼마든지 특별전을 개최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소장 자료를 가지고 계시니 그것을 활용할 수 있으면 의미 있는 공간이 될 것 같아 앞으로 더욱 기대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남과 북이 평화를 약속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은 이때, 박물관에 걸린 ‘남누리 북누리 한누리 되도록’ 이라는 글처럼 통일을 향한 염원이 한데 모여 천천히 평화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목, 2018/08/0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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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 시즌2

– 역전다방- 최후의 결전3편

“해방전야의 독립운동가들: 민족주의 진영”

목, 2018/08/0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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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내역사 시즌2-비하인드히스토리 9화

44년만에 무죄, 문인간첩단 조작사건과 임헌영

 

 
목, 2018/08/0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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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 최후의 결전 2편

해방전야의 독립운동가들 “공산주의 그룹과 조선독립동맹”

목, 2018/08/0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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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비하인드 히스토리 8회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기념관”

목, 2018/08/0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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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구소에 관한 허위사실을 계속 유포하는 사람(비회원)이 교육청에 정관 정보공개를 청구하더니, 이제는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교육청 승인 정관을 ‘연구소 소개’에 게시해 놓았으니 더 이상 의미없는 정보공개 청구를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목, 2018/08/02-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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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 관련 게시물을 진정 민족문제연구소가 쓴 글이 맞나요?
내가 알고 있는 민문연의 수준이 이정도였습니까?

의미 없는 정보공개청구?????

지난 3월 24일 총회 이전에 홈페이지에 정관이 게시되었고, 여러 회원이 문제를  제기하자 홈페이지에서 정관을 삭제했습니다.
왜 삭제했습니까?

지도감독기관인 서울시교육청에 정보공개청구를 했을때
민문연은 ‘정관은 영업상. 경영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며 공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공개해야할 정관을 스스로 공개하지 않은 것도 큰 문제인데,
‘영업상.경영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비공개해달라도 했습니다.

민문연 운영의 근본 규범인 정관마저도 공개하지 않으려는 민문연의 작태에 분노가 치솟습니다.

만약, 민문연이 미리 정관을 공개했다면 정보공개청구도 없었을 것이고.
‘영업상.경영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추가의 정보공개청구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정보공개청구를 하지 않았다면 홈페이지에 게시했을까요?
가슴에 손을 언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회원의 당연한 권리 행사를 ‘의미 없는’이라고 했습니다.

점입가경, 설상가상…..
민문연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봄날 눈 녹듯 사라지고 있습니다.

임종국 선생이 작금의 사태를 보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금, 2018/08/0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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