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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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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익명 (미확인) | 금, 2019/03/29- 17:56

[회원마당]

임시정부 답사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조선동 예원학교 국어교사, 청년백범 대표

S#1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이 맺어졌다. 이른바 ‘경술국치(庚戌國恥)’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대 전란을 겪은 이후, 조선왕조는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일부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득세하면서, 일부 권력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 백성을 위하는 정치가 아니라 일부 권력층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정치가 이루어졌다. 백성들은 권문세가의 이익을 위해 맞아죽고, 굶어죽었다. 일부 백성들은 스스로 민적(民籍)을 파내고 산으로 들어가 산적이 되었다. 이미 나라는 썩어 들어갔다. 신분제를 기반으로 한 왕조는 금이 가고 있었다.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과 양심을 팔아먹은 조선의 관료들이다. 세계사 어디에도 외부의 힘만으로 멸망한 국가는 없다. 이미 내부에서 썩어 들어가던 국가가 외부의 작은 충격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할 뿐이다. 한일합병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황태자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 대하여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줄 것이다.(후략)

 

한일합병조약문을 읽어 가면서, 나는 화가 났다. ‘조선 황제의 권리를 일본 황제에게 넘긴다’는 제1조로 시작된 조약문은 황족(皇族)의 위엄과 명예를 지켜달라고 한다. 훈공 있는 한국인, 다시 말해 ‘친일파’에게는 표창과 작위와 은급을 내려 달라고 한다. 조선이 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특권만을 행사하고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았던 지배층의 탓이다. 그 지배층들은 나라가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고 명예와 권력과 재산을 보장받고자 한다. 그를 위해 충분한 세비를 공급하라고 한다. 뻔뻔스럽다. 그
세비는 결국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백성들을 쥐어짜라는 이야기이다.
내가 회사를 운영한다 치자. 경영을 잘못하여 회사를 다른 회사에 넘겨야 한다. 회사를 넘기
기 위해 인수합병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나의 경영권과 재산을 보장받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나 때문에 고생한 직원들의 일자리를 보장해달
라고, 직원들을 잘 대해 달라는 내용을 어떻게라도 인수합병서에 넣어야 한다. 나 때문에 고생
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다. 한 나라를 경영한 자들이 우리 국민들을 어떻게 해 달라
는 말 한 마디 없다. 분통이 터진다.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마자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우리 국토 대부분은 조선총독부의 것이 되었다. 당시 국민들 대부분의 직업은 농업이었다.
국민 대부분이 순식간에 ‘소작농’으로 전락한 것이다. 원래 소작농이었던 이들의 삶은 더더욱 황
폐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소작세를 대폭 올리고 여러 가지 준조세 형태로 우리 국민들을 수탈
하였다. 민초들의 삶은 뿌리째 뽑혔다.
우리 민족의 위대함은 1917년 광무선언(대동단결선언)에서 드러난다. 한입합병조약은 대한제국 황제가 대한제국의 모든 권리를 일본 황제에게 이양한다는 것이다. 1917년 상하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박용만·윤세복·조소앙 등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한일합병조약의 부당성을 말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 대한 모든 권리는 이제 우리 민족의 것이 되었으며, 대한제국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여서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가 일본 황제에게 갈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경술국치를 통해서 망한 것은 황제의 나라인 ‘대한제(帝)국’일 뿐이며, 황제가 포기한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는 대한의 국민들이 승계·계승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대한제(帝)국’은 사라졌지만, 그 뒤는 모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대한민(民)국’이 계승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유럽에서 황제국가가 시민국가로 전환되는 데 약 200여 년이 걸렸다. 우리는 이러한 민주적 전환을 10년도 걸리지 않아 이루어낸 것이다.
조선 시대에 모든 공적(公的) 문서의 주어는 모두 임금(왕) 또는 황제이다. 1917년 광무선언, 위대한 정치적 개안(開眼)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 첫 문장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국민’이 우리나라 국권의 주어(主語)로 자리잡았다. 이 정신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본이념이 되었다. 이후 우리 독립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으며, 지금의 대한민국 헌법 정신의 근간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S#2 ‘바리데기’들의 눈물, 한숨, 피

옛날 오구대왕이 살았다. 혼례를 일년 미루어야 아들을 낳고, 길하다는 예언을 무시하고 결혼한 탓에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딸만 계속 낳다가 마침내 일곱째도 딸로 태어나자, 화가 난 오구대왕은 일곱째 바리공주를 내다버렸다. 바리공주는 한 노부부에 의해 구해져 길러졌다. 후에 왕과 왕비가 죽을병이 들었다. 백약이 무효였다. 저승의 생명수만이 병을 고칠 수 있다 했다. 오구대왕 부부는 가장 사랑을 많이 주며 기른 첫째 공주를 불렀다. 저승에 가 생명수를 구해, 아비와 어미의 목숨을 구해 달라 했다. 첫째 공주는 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거절하였다. 다음으로 사랑을 많이 준 둘째 공주를 불렀다. 저승으로 가 생명수를 구해, 아비와 어미의 목숨을 구해달라 부탁했다. 둘째 공주 역시 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고개를 저었다. 여섯째 공주까지 마찬가지였다. 낳자마자 내다버린 바리데기가 기적처럼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오구대왕은 체면불고(體面不顧) 바리데기를 불러다가 부탁했다. 그 말을 들은 바리데기가 말했다. 내가 은혜를 입은 바 없으나, 아비의 씨앗을 받아 어미의 배에 열 달 있었으니, 가겠노라 말한다. 바리데기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저승으로 갔다. 바리데기는 무슨 지옥, 무슨 지옥, 무슨 지
옥… 온갖 고생 끝에 저승의 생명수를 구해와 부모를 살려냈다.
나라가 망하자 뜻 있는 사람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그 후 1919년부터 1945년까지 그들이 벌인 투쟁은 세계사에서 그 비슷한 경우조차 찾아볼 수 없는 끈질기고 가열 찬 싸움이었다.
그들은 어두웠던 우리 역사의 등대였고, 우리들의 자존심이자 자긍심이다. 그들을 만나러 간다. 이회영 형제처럼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행한 경우도 있었지만, 모여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기에 다들 ‘바리데기’였다. 나라로부터 은혜 입은 적 없으나, 나라에 몸을 의탁해 살았으니, 기꺼이 지옥의 불길을 향해 간다.
그들의 눈물, 한숨, 피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해 짐을 싼다. 4박 5일의 일정이다. 상하이, 자싱, 하이옌, 항저우, 난징에 남아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흔적을 더듬어 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때 상하이를 향해 집을 나선 윤봉길은 이런 글을 남겼다. 나라 잃은 원수를 갚기 위해 진시황을 죽이려 했던 ‘형가’라는 자객이 남긴 시의 첫 구절이다. “사나이 집을 나서매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으리!” 10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왜 이 길을 나서는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가슴에 담고자 하는가?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답사 하루 전 밤이다.

S#3 죽자꾸나, 상해시대

두 시간 남짓 비행으로 상하이 국제공항에 내렸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남쪽인 상하이는 1월 날씨인데도 따뜻하다. 해발 100m가 채 안 된다는 상하이는 사방 어디에서도 산을 찾아볼 수없는 평원지대이다. 도시 한 가운데로 황포강이 상하이를 동서로 나누며 흐른다. 황포강 동쪽을 ‘포동(浦東)’ 황포강 서쪽을 ‘포서(浦西)’라고 부른다.
첫 여정은 상하이의 번화가인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차창 너머로 보는 중국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 하늘 끝까지 뻗어 있는 것 같은 마천루의 열병식. 변화하고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을 웅변하는 듯하다.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사실 상하이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한 임시정부 청사이다. 첫 번째 사용한 청사는 그 위치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 한다. 두 번째 사용한 청사는 상하이 회해중로에 있다고 한다. 원래 건물은 흔적도 찾을 수 없고 H&M 매장이 들어섰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는 청사를 열 번 정도 옮겼다. 우리가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임시정부의 흔적은 마지막 청사인 이곳 뿐이다.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인 1932년 4월까지 사용한 청사이다. 원래 한 칸만 청사로 사용했었는데, 중국 정부의 협조로 옆의 두 칸까지 모두 세 칸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장사진(長蛇陣), 인산인해(人山人海)를 넘어서서 ‘야단법석(野壇法席)’에 가깝다. 청사는 긴 직사각형 모양이다. 너비는 두 사람이 팔을 벌려 서면 그만이다. 1층 전면으로 응접실이 있고, 1층 후면에는 중국식
부뚜막이 있는 작은 부엌이 있다. 임시정부 사람들이 밥을 짓고 밥을 먹던 곳이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임시정부 중심인물들의 숙소가 있다. 좁고 긴 복도를 따라 나란히 네 개의 방이 있다. 원래 넓지 않은 집인데, 복도와 계단을 빼고 남은 공간을 넷으로 나누었으니, 방의 넓이는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좁다. 기념관 안에서는 촬영을 일절 금한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이곳까지 와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아쉽다.
1층 좁은 중국식 부뚜막 주변으로 자꾸만 눈길이 간다. 이곳에서 이봉창과 임시정부 청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술이 얼큰하게 오른 이봉창이 말했다.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못 죽이나?” “하급 관리 하나 죽이기도 어려운데, 천황을 죽이기가 쉽겠소?” 이봉창은 다시 말했다.
“내가 동경에서 천황의 행차를 본 적이 있소. 그때 내가 엎드려서 생각하기를 지금 만약 내 손에 폭탄만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 대화를 우연히 들은 백범은 이봉창과 함께 침체에 빠져 있던 우리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봉창은 적진의 심장부에 홀로 뛰어들어 큰 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거사 직후 중국의 신문은 이런 제목의 기사를 내었다.
“불행히도 적중하지 않았다.” 이봉창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백범과 마지막 사진을 찍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 나이가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해도 늙은 생활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 이제는 영원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떠나는 것이니,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 이봉창의 거사가 시작된 곳이 이곳이로구나. 한 사나이가 죽음을 앞두고도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이 떠오른다. 1931년 일이다. 이때 이봉창의 나이 서른하나였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봉길이 백범을 찾아온다.
“제가 날마다 채소 바구니를 등에 메고 홍구 쪽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선생님께서 동경 사건과 같은 계획이 또 있을 줄 믿습니다. 저를 지도하여 주시면 죽
어도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이 만남은 두어 달 후 우리 독립운동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는 홍커우공원 의거를 이끌어낸다. 백범과 윤봉길은 서로 시계를 나누어 가지고, 후일 지하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영원히 헤어졌다. 1932년 일이다. 윤봉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먹먹한 가슴으로 임시정부 청사를 나와서 백범 가족이 살았던 영경방 10호를 찾아간다. 당시 이곳은 상하이에서 가난한 동네에 속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인들이 버린 배춧잎 중에 먹을 만한 것을 골라서 생활할 만큼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백범은 아내 최준례를 잃는다. 최준례는 둘째 아들 신을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동이 불편하였다. 시어머니인 곽낙원이 자신의 세숫물까지 치우는 일을 하게 되자, 회복이 덜 된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좁고 가파른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제때 치료를 하지 못해 늑막염이 폐병으로 번졌다. 형편이 어려웠던 터라, 최준례는 외국인 선교회에서 무료로 시술하는 홍커우 폐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병원이 있던 곳은 일본 조계지였다. 프랑스 조계지 밖으로 나갈 수 없던, 일본 조계지에는 더더군다나 갈 수 없었던 백범은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시어머니 곽낙원이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 최준례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후였다. 어미를 잃은 둘째 아들 신은 그때 막 걸음마를 익힐 때였다. 우유를 먹었지만 잘때는 할머니의 빈 젖을 물고야 잠이 들었다. 차차 말을 배웠지만, ‘할머니’라는 말만 알았고, ‘엄
마, 어머니’라는 말을 몰랐다고 한다.
백범이 안악 양산학교 교사였던 시절, 애제자였던 나석주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백범은 나석주를 ‘지사이자 제자’라 칭하였다. 나석주는 조국과 겨레를 위해 무언가 큰일을 도모하고자 톈진으로 가 의열단에 가입할 것을 결심하고 스승인 백범을 찾아온다. 때마침 백범이 생일인 것을 안, 나석주는 양복저고리를 전당을 잡히고 고기와 채소를 사와, 백범의 생일을 기념하였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만국공묘 내 신규식•박은식•노백린 선생 묘가 있던 자리

 

다음해인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는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 남대문 근처에 있던, 경제침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불행히 불발하였다. 뒤쫓아온 일경들과 총격전을 벌이며 일본 경찰 7인을 사살하고 자결하였다. 나석주가 순국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백범은 그 후부터 죽는 날까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지 않았고, 나석주는 영영 다시는 자신의 생일을 맞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지금 이곳은 상하이의 번화가로 변모하였다. 영경방 일대는 고풍스러운 건물 외관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실내는 고급 식당 등으로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다.
임시정부 사람들이 상하이에 모여들기 전, 이곳 상하이에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분들이 계신다. 예관 신규식 선생, 백암 박은식 선생 같은 분들이다. 선견지명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고, 평생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애쓰던 분들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분들이 잠들어 계셨던 만국공묘로 간다. 이분들의 유해는 1993년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참으로 무심한 후손들이 아닐 수 없다. 선생님들 잠들어 계셨던 곳에 준비해간 차와 술을 올리고 두 번 절했다. 뜨겁고 뭉클한 것이 울컥 올라왔다. 어찌 아는 이 하나 없는 이역만리 땅에 계셨어요? 우리가 참으로 죄인입니다!
눈물 마를 사이도 없이 홍커우공원으로 이동한다. 윤봉길 의사 의거지(義擧地)이다. 상하이를 점령한 기념식과 천황 생일인 천장절을 겸하여 기념하는 기념식장에 단신으로 들어가 일본군 시라카와 대장 등 군 수뇌부와 주중 일본 대사, 상하이 민단장 등을 폭사시켰다. 윤봉길이 들고 간 폭탄은 두 개였다. 하나는 도시락 모양, 또 하나는 물통 모양. 폭발력이 강한 도시락 모양 폭탄을 던지고, 물통 모양의 폭탄은 자결용이었다고 한다. 단상 주변에 민간인, 특히 어린이들이 있는 것을 본 윤봉길은 불필요한 희생을 줄
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폭발력이 약한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졌고, 단상 위에 있던 일본군 수뇌부 등을 제외한 민간인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윤봉길의 의거로, 중국인 특히 국민당 정권은 한국인에 대해 재평가하게 된다.‘만보산 사건’ 등으로 나빠졌던 한국인에 대한 평가가 놀랄 만큼 좋아졌고, 우리 독립운동을 국민당정권이 돕게 되는 계기가 된다. 또 미주, 하와이등지의 한국인들이 임시정부에 다시 성원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침체기를 걷던 우리 독립운동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의거로 백범에게는 60만원(2002년 환산 200억원)의 현상금이 붙었고, 임시정부와 임시정부 사람들은 길고 긴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윤봉길기념관 안에 모셔진 윤봉길 의사 흉상

중국인들은 윤봉길의 호 ‘매헌(梅軒)’을 따서, 홍커우공원 안에 ‘매헌(梅軒)’이라는 윤봉길기념관을 만들어 놓았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정성스럽게 잘 꾸며 놓았다.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아침나절, 마당로 임시정부 청사에 장사진을 이루던 한국인들은 왜 이곳은 외면하는 것일까? 가이드에게 물으니, 홍커우공원 버스 주차장이 좁아서, 주차하기가 어렵고 홍커우공원과 거리가 멀어서 그렇단다. 나 이런! 세상 물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헌 주변에 때 이르게 핀 매화만이 우리들을 수줍게 반겨주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황포강에서 유람선을 탔다. 상하이를 동서로 가르며 흐르는 황포강에서 바라보는 포동(浦東)과 포서(浦西)는, 한쪽은 중국이 과거 제국주의 침략을 겪을 때 지어진 유럽식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고 반대쪽에는 과거의 아픔을 이겨내고 우리는 이렇게 성장했다는 걸 웅변하듯이 현대식 마천루들이 줄지어 서 있다. 포동은 포동대로 포서는 포서대로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한다.
이 강 옛 선착장 자리에서 의열단원은 일제 군부의 거물이며 해외 영토확장 계획의 지도적 이론가를 자처하는 침략주의자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 하였다.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세 사나이가 나섰다. 3월 28일,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를 필두로 수십 명의 고관과 육·해군 장병 및 거류민을 포함한 다수의 일본인들, 그리고 각국 외교사절단이 영접차 도열해 있는 가운데 다나카를 태운 여객선이 오후 3시 반경에 황포탄 세관 마두(碼頭)의 잔교(棧橋) 앞에 도착했다.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 몇 걸음 내디뎠을 때, ‘권총 사격의 귀재’ 오성륜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잰걸음으로 다나카를 추월하여 나온 미국여인이 그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1

혼비백산한 다나카가 대기 중인 자동차를 향해 줄행랑을 놓았다. 도망가는 다나카를 향해 김익상이 권총을 겨누었다. 두 발을 쏘았는데 빗맞아 모자만 꿰뚫었다. 김익상은 연이어 다나카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긴박한 상황에서 너무 서두르다 보니, 안전핀을 먼저 뽑아야 하는 걸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 사이에 다나카는 황급히 차에 올라타 출발하였다. 우왕좌왕하는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 이종암이 힘껏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자동차 앞바퀴에 적중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바로 터지질 않았고, 옆에서 있던 영국 군인이 강물 속으로 차넣어 버렸다. 이리하여 의열단원 3인의 암살 저격은 불행히도 실패하고 말았다. 의열단원들은 거사 지령을 받으면 탄두를 갈아서 뭉툭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총알이 관통하여 다른 사람까지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름다운 상하이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자주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분들을 떠올린다. 묵직한 아픔과 슬픔이 화려한 조명과 눈물처럼 뒤섞인다.


1 오성륜이 쏜 총탄에 맞아 절명한 젊은 부인은 신혼여행 중인 미국인이었는데, 그 남편 되는 영국인 스나이더가 영사관 구치소로 면회를 와서 “조선 청년들의 의기에 배운 것이 많다”며 오성륜을 위로하고 갔다.

 

백범은 상하이 시절을 회고하면서 ‘죽자꾸나 상해시대’라고 압축하여 적었다. 큰 뜻을 품고 저마다 모여들었지만, 자금줄은 끊기고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중국인들이 버린 배춧잎 더미를 뒤져 먹을 만한 걸 골라야 하는 간난신고가 이어졌다. 여기저기서 배신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밀정이 횡행했다. 그 시절 백범은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라고 적었다. ‘죽자꾸나 상해 시대’를 주린 배를 움켜주고 누항에서 바릿밥을 마다하지 않은 분들이 있었다. 그 시절을 한숨을 반찬 삼아, 눈물을 국 삼아 찌개 삼아 견뎌낸 분들 덕분에 우리는 존재한다. 그분들을 잊지 않고자 한다.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한다. 발바닥에 새기는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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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61]

벽제관 후면 언덕에 솟아오른 ‘전적기념비’의 정체는?
침략전쟁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랐던 그들만의 기념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제강점기 도시인의 일상생활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다 보면 곧잘 마주치는 용어의 하나가 ‘하이킹(hiking)’이다. 누군가는 이를 ‘산책여행(散策旅行)’이라고 옮겨놓은 것을 본 적도 있는데, 어쨌거나 도회지 생활에 심신이 지친 사람들이 배낭을 꾸려 반나절이나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교외지역으로 도보여행을 하는 것을 일컫는 표현이다.
이러한 하이킹은 193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던 시기에 크게 성행한 적이 있었고, 심지어 전시체제기가 본격화한 이후에도 “걷는 것은 훌륭한 국민운동”이라고 하여 이러한 활동 자체가 크게 장려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경성 근교(京城 近郊)의 하이킹 코스를 소개하는 특집 연재기사들이 잇따라 신문지상에 등장하였고, 여러 단체에서 주선하여 벌어지는 하이킹 행사도 신청자 모집에 어렵잖게 큰 호응을 이끌어 내곤 했다.
이 당시에 무수하게 쏟아졌던 하이킹 관련 안내서적을 통틀어 그 으뜸으로 꼽히는 것은 단연 ‘경전하이킹코스(京電ハイキングコース)’ 시리즈였다. 1937년 10월 15일에 제1집 <북한산(北漢山)>이 처음 선을 보인 이후로 같은 달에 <비봉(碑峰)>(제2집), <풍납리토성(風納里土城)>(제3집), <당인리(唐人里)>(제4집), <양천(陽川)>(제5집) 등이 한꺼번에 배포되었고, 해를 바꿔 1938년 5월에는 <벽제관(碧蹄館)>(제6집)과 <남한산(南漢山)>(제7집)이 추가로 발간되었다. 이 시리즈의 제1집 말미에 수록된 ‘편집후기’를 보면 앞으로 발간할 예정인 전체 30개에 달하는 하이킹코스의 목록이 장황하게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최초의 방대한 계획과는 달리 실제로는 총7편을 펴낸 것을 마지막으로 시리즈의 발간은 중단되고 말았다. 아무튼 이들 자료는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의 전무였던 무샤 렌조(武者鍊三)의 지시에 따라 3년 정도의 기획기간에 걸쳐 편찬한 결과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성전기의 산악부원과 감리실원이 주축이 되어 실지조사를 겸하고 카토 칸카쿠(加藤灌覺), 오카다 코(岡田貢), 이마무라 토모(今村鞆) 등과 같은 준관변학자(準官邊學者)의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전문적인 사진촬영자가 배치되어 다양한 화보 성격의 사진자료가 첨부되었다. 여기에는 도보여행지로 이동하는 교통편에 관한 정보라든가 각 지점 간의 행로 등이 소상히 서술되어 있고, 각 코스에서 풍치가 빼어난 곳들에 대한 소개는 물론이고 주변 행로에 흩어진 고적(古蹟)에 대한 설명도 비교적 풍부하게 곁들여졌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시리즈로 펴낸 ‘경전하이킹코스’의 제6집 <벽제관(碧蹄館)> (1938년 5월 1일 발행)의 표지 모습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임진왜란 당시 벽제관전투의 현장이 묘사된 지도자료이다. 흔히 벽제관전투라고는 하지만 실제의 전장은 여석현(礪石峴, 숫돌고개)을 중심으로 한 곳이었으며, 더구나 벽제관의 위치도 지금과는 다르게 ‘빈정리’에 자리하고 있었다.(경성전기주식회사, <벽제관>, 1938)

 

<벽제관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1938)에 수록된 문록교(文祿橋, 분로쿠바시) 쪽에서 바라본 벽제관 일대의 원경사진으로 산중턱에 보이는 하얀 돌기둥이 곧 ‘벽제관전적기념비’이다.

 

여석현(礪石峴, 숫돌고개)의 정상에 설치된 벽제관 고전장 표석의 모습이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설치한 흔적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잔존여부를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벽제관>, 1938)

 

혹여 이러한 행로 도중에 일본인과 관련한 사적지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촘촘하고 상세한 설명이 주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 가운데 1938년 5월 1일에 발간된 <벽제관(碧蹄館)>(제6집)은 바로 이러한 범주에 속한 대표적인 하이킹 안내서였다.
벽제관이라고 하면 두말할 나위 없이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자기네 선조들의 전승지(戰勝地)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그 어느 곳에 못지않게 세밀한 사료조사와 현지탐방이 뒤따랐던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한 결과를 담은 것이니만큼 비록 소책자일망정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려 제작한 흔적이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역력히 감지되고 있다. 그런데 이 <벽제관>의 75~76쪽에는 벽제관 주변의 탐방행로를 이렇게 그려놓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띈다.

 

…… 현재 그 관리는 당지(當地)의 우편소장(郵便所長) 사에키 토루(佐伯融) 씨 등을 중심으로 하는 벽제관전적보존회(碧蹄館戰蹟保存會)에 맡겨져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거의 동씨(同氏)의 안내로 전적견학(戰蹟見學)의 편의를 얻고 있음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벽제관의 역(役)이 있던 이래로 춘풍추우 340년 소화 8년(1933년) 9월에 이르러 이 전적을 기념하기 위한 일대기념비(一大記念碑)의 건립이 실현되었다. 비(碑)의 모양은 애급(埃及, 이집트) 나일 하반(河畔)의 광야에 흘립한 오벨리스크(Obelisk)를 본뜬 것으로, 경성으로부터 벽제관에 오는 손님들이 명군(明軍)의 진지였던 월천리(越川里)에 이어지는 작은언덕을 지나자마자 곧장 북방 밀수(密樹)의 언덕 위에 그 높고 하얀 자태를 인식하는 일이 가능하다. 비는 양질의 화강암(花崗岩)으로 제작되어 전기(電氣) 연마를 하여 광택이 아름답고 새로 식수한 수십 주의 앵수(櫻樹, 벚나무) 가운데에 서있다. 비의 표면에는 고 중추원촉탁 김돈희(故中樞院囑託 金敦熙) 씨의 글씨로 ‘벽제관전적기념비(碧蹄館戰蹟記念碑)’
라는 여덟 글자를 새겼으며, 이면(裏面) 비의 대석(臺石)에는 당시 경기도지사 마츠모토 마코토(京畿道知事 松本誠)씨의 이름으로 다음의 명(銘)이 새겨져 있는데, 글은 이왕직 촉탁에하라 젠즈치(江原善槌)가 지은 것이다.
비가 있는 언덕 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괘갑수(掛甲樹)라고 전해지는 느티나무 고목이 있다. 언덕 아래에는 벽제관의 건물이 있다. (비명 부분은 인용생략)

 

이 내용에 따르면, 벽제관으로 가는 작은 고갯길을 넘어서자마자 모든 도보여행객들은 누구나 저 벌판 너머로 온통 사쿠라의 동산으로 변신한 언덕 위에 높이 솟아 있는 ‘벽제관전적기념비’의 존재를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구도였다. 여기에 나오는 중추원촉탁 김돈희(1871~1937)는 일제 때 서예가로 크게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그는 선암사 강선루, 낙산사 의상대 등의 편액 글씨를 남겼으며, 특히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제호(題號)도 바로 그의 글씨라고 알려진다.
일찍이 이곳 벽제관 지역에는 1911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명목상 고양군수(高陽郡守)가 회장을 맡고 기타 지역유지가 여기에 참가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의 보존회 설립이 추진되었으며, 그 결과 1915년 4월에 “문록역(文祿役, 임진왜란) 때의 유적인 벽제관, 괘갑수(掛甲樹) 등의 보존 관리 및 이를 널리 사회에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벽제관고적보존회(碧蹄館古蹟保存會)가 설립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나중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碧蹄館戰蹟紀念碑建設會)라는 것이 꾸려져 기념탑의 건립까지 시도된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3년 10월 12일자에 수록된 「이십여 성상(二十餘 星霜)을 농촌계발(農村啓發)에 전심(專心), 벽제일대(碧蹄一帶)에서는 신(神) 같이 앙모(仰慕), 사에키 토루(佐伯融) 씨의 공적(功績)」이라는 제목의 인물탐방기사를 통해 그 내막을 엿볼 수 있다.

 

…… 당지(當地)에 군청(郡廳)이 있을 시(時)에는 300여 호(戶)의 인가(人家)가 즐비하던 것이 군청이 20여 년 전에 경성(京城)으로 이전한 후로는 폐가파옥(廢家破屋)이 연년(年年)히 증가하여 지방이 쇠퇴하여짐을 우려하고 발전책(發展策)을 연구하였으나 장래 산간촌락(山間村落)으로 아무리 생각하여도 적당한 대책이 없어 고심하였다.
당지의 벽제관은 역사가 깊은 고적이오 또한 문록역 고전쟁지(古戰爭地)이므로 이를 보존에 주력하여 각 지방에 선전(宣傳)하여 10여 성상(星霜)을 두고 당국에 교섭한 결과 재작춘(再昨春)에 기부인가(寄附認可)를 받는 동시에 당국 원조와 동지의 찬조를 얻어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를 조직하고 내선만(內鮮滿) 각지를 통하여 기부금모집에 노력한 결과 9천여 원(圓, 엔)의 거액을 모집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불행히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자 이어서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속출(續出)되어 국내는 전시상태를 이루었으니 계획하였던 사업도 지연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래(以來) 국제관계가 점차로 진압(鎭壓)됨을 따라 금춘(今春)에 공사가 착수하여 이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근만원(近萬圓)의 공비(工費)로 건설된 기념비는 웅장하게도 벽제관 후산상(碧蹄館 後山上)에 돌립(突立)하여 벽제의 면목을 일신케 되었으며 벽제관공원(碧蹄館公園)이라고 부르게까지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일본인 사에키 토루는 1911년 이후 고양우편소장을 거쳐 벽제우편소장으로 장기 재직하면서 벽제관고적보존회의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특히 총독부의 고관 또는 내외귀빈(內外貴賓)을 포함하여 일반 탐방객이 벽제관을 찾을 때마다 이곳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다시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를 꾸려 1931년 이래 모금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9천 원의 기부금에다 당국의 보조금 1천 원을 더하여 1933년 봄에 이르러 마침내 기념비의 제작에 착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벽제관전적기념비의 건립 제원(諸元)에 대해서는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 제12집 제9호(1933년 9월)에 수록된 「벽제관전적기념비 설계개요(設計槪要)」라는 자료에 잘 요약 정리되어 있다.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에서 제작 발행한 ‘벽제관전적기념비’의 모습이다. 벽제관 후면 언덕 위에 세워진 이 기념비의 전면에 보이는 글씨는 중추원촉탁 김돈희(中樞院囑託 金敦熙)가 썼으며, 그 아래쪽에 ‘조혼(弔魂)’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벽제관 건물과 벽제관전적기념비를 도안(圖案)에 담은 통신일부인(通信日附印)의 모습이다. 1934년 1월 20일부터 벽제우편소를 통해 사용하는 우편물에 적용되는 일종의 기념스탬프이다. (조선총독부 체신국, <조선체신사업연혁사>, 1938)

 

[총고(總高)] 38척(尺) 2촌(寸), 비(碑)의 높이 33척 3촌, 하부(下部) 크기 5척 2촌각(寸角), 상부(上部) 크기 2척 7촌각
[기단(基壇)]은 원형(圓形)으로 높이 2척 9촌, 외경(外徑) 40척, 내경(內徑) 36척, 삼방(三方, 세 방향)에 폭(幅) 8척의 계단(階段)을 두고, 계단 좌우에 길이 7척 폭 4척의 장원형(長圓形)의 수석(袖石, 소맷돌)을 붙임. 탑신(塔身)과 기단(基壇)은 둘 다 전부 화강석으로 만듬.
[탑신(塔身)] 앞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 아래에 조혼(弔魂)이라 새기고, 뒤에는 건설유래기(建設由來記)를 새김.
[기단(基壇)] 상(床)은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중앙 원형을 따라서 배수구(排水溝)를 두며, 사방(四方)으로 방사선상(放射線狀)의 토관(土管)으로 배수시키도록 사리(砂利, 자갈)를 까는 것으로 함.
[기공(起工)] 소화 8년(1933년) 4월 5일
[준공(竣工)] 소화 8년(1933년) 7월 5일
[제막식(除幕式)] 소화 8년 9월 9일
[공비(工費)] 4,165원(圓)
[양식(樣式)] 근대식(近代式)
[설계(設計)] 조선총독관방 회계과(朝鮮總督官房 會計課)
[시공사(施工者)] 경성미술품제작소(京城美術品製作所)

 

이에 따라 1933년 9월 9일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의 제막식이 거행되었으며, 당시의 조선총독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가 몸소 이 행사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사를 남겼다.

 

…… 방금(方今) 내외(內外)의 정세(情勢)는 더욱 난국(難局)에 향(嚮)하여 동아(東亞)는 드디어 다사(多事)코자 하여 국민(國民)의 왕성(旺盛)한 사기(士氣)와 열렬(熱烈)한 건투갱진(健鬪更進)하여 아세아민족(亞細亞民族)의 각성(覺醒)을 요(要)함이 익공(益功)한 추(秋)에 당(當)하여 여사(如斯)히 왕사(往事)를 추회(追懷)하여 미래(未來)에 선처(善處)한 도표(道標)가 될 만한 의의(意義) 있는 시설(施設)의 실현(實現)은 정신(精神)의 작흥(作興), 극동민족(極東民族)의 융합(融合)에 선보(禪補)됨이 자못 대(大)할 줄로 신(信)한다.

 

요약하자면 바야흐로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가 진행되는 이때에 옛 벽제관 전투를 기리는 시설물의 등장은 그 자체가 미래의 길잡이가 될 만한 것이라는 언급인 셈이다. 또한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다시 극동민족의 융합을 이끌어내는 승전의 주체가 되리라는 것을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벽제관 일대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여긴 탓인지 일본군대의 사기를 앙양하고 전의를 새롭게 다지는 공간으로 종종 사용된 흔적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1933년 10월에는 때를 맞춘 듯이 용산주둔 일본군 보병 제78연대가 벽제관 일대에서 추계대훈련을 실시한 적이 있었고, 좀 더 나중의 일이지만 1938년 12월에는 육군병지원자훈련소(陸軍兵志願者訓練所) 생도 200명이 벽제관 마을에서 견학차 하룻밤을 머물렀던 사실도 드러난다.
그리고 일제패망기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1943년 10월에는 벽제관전투 350년이 되는 해라고하여 당시 전몰자에 대한 추조제(追弔祭)가 이곳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벽제관전적기념비가 해방 이후 어느 시기에 철거되어 사라진 것인지는 분명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동아일보> 1950년 1월 22일자에 게재된 김진구(金振九)의 연재기고문 「국치비존폐(國恥碑存廢)의 시비(是非) 하(下)」를 보면, “…… 구랍 29일 회견할 때에 구 경기도지사(具 京畿道知事)는 희망적으로 표명하였다. 일인 소행인 벽제관(碧蹄館)의 전적비(戰蹟碑)와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장난인 인왕산맥(仁旺山脈)의 암석각자(岩石刻字)만은 제거하고 싶다고 ……” 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것으로 보면 1950년을 넘어가는 시점까지도 벽제관 전적기념비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매일신보> 1940년 6월 28일자에 수록된 벽제관 사방공사 관련 ‘치산치수비’의 제막식 기사이다. 이 기사에는 분명 벽제관 앞에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은 그 행방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대개 벽제관이라고 하면 이 전적기념비의 존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것 말고도 별스러운 기념물이 하나 더 있었다. 1940년 6월 24일에 제막된 ‘치산치수지비(治山治水之碑)’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은 1930년부터 1936년까지 6년 계속사업으로 고양리(高陽里) 주변 3개리에 걸쳐 사방사업(砂防事業)을 실시한 결과 산림녹화를 이룩한 것을 기리고자 일제가 이에 대한 기념물로 조성한 것이었다.
<매일신보> 1940년 6월 24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 따르면 분명히 벽제관 앞에다 이것을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이 역시 해방 이후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혹여 이 근처에 매몰 처리된 것이라면 언젠가는 홀연히 그 존재가 다시 드러나서 이것의 정체가 뭔지를 재확인하기 위해 달갑지 않게 일제강점기의 해묵은 기록을 다시 뒤져봐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수, 2020/08/26-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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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독립민주시민학교,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특별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사월혁명 60주년을 맞아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의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특별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강좌는 해방 이후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4월혁명을 문화예술인들이 어떠한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켜 혁명정신을 이어 나가고자 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강좌는 9월 5일에서 9월 20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현장 수강과 온라인 수강을 병행할 계획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 방침에 따라 온라인 수강으로 변경되었다. 실제 강의를 촬영한 뒤 영상 편집을 마친 결과물을 근현대사기념관과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려 많은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쉽게 수강할 수 있게 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문학평론가인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이 <이승만 독재정권과 문화예술계의 대응-한국문학에서 본 4·19혁명>의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해방 전후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승만에 대한 문학적 평가와 함께 혁명문학 소개를 통해서 세계혁명문학의 특징과 문학에서의 4월혁명의 성과를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 <껍데기는 가라! 시인의 절규-4·19혁명과 한국문학>은 한양대학교 유성호 교수가 강의하였다. 이 강의를 통해서 신동엽, 김수영 등의 시인들의 작품에 4월혁명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3강 <혁명의 기록-사월의 노래>는 성공회대학교 이준희 교수가, 4강 <잘 돼 갑니다-우상의 시대>는 한상언영화연구소 한상언 소장이 맡았다. 대중문화 속에 4월혁명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알 수 있는 강의였다. 이 외에도 5강 서울대학교 방민호 교수의 <피의 행진-대열 속에서>, 6강 숙명여자대학교 권성우 교수의 <성찰, 자유, 배신의 미학-4·19가 문학에 미친 영향과 파장> 강의도 온라인으로 수강할 수 있다.
독립민주시민학교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강좌는 근현대사기념관의 홈페이지 외에도 민족문제연구소와 서울시 강북구의 홈페이지에서 2020년 10월 18일까지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계획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양질
의 역사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목, 2020/09/2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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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학교현장을 다시 떠나며

이민우 운영위원장

 

1981년 5월 21일 오후 8시경 인천제일교회에서 한완상 교수의 강연회가 끝나고 청년학생 5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전두환 물러가라’ ‘노동3권 보장하라’ ‘광주민중항쟁 진실규명하라’ 외치며 동인천역으로 향했다. 당시 나는 인천 인성여고 교사이며 인천기독청년협의회 회장이었다. 1981년 5월 18일에 이미 5.18 민중항쟁에 대한 진실규명과 전두환정권의 사죄 등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한 때였다.
나는 그날 저녁에 인천 중부경찰서에 잡혀갔다. 당시 동인천역 근처에 있었던 광야서점에 내 이름 앞으로 와 있던 유인물 300여 장의 출처를 대라며 경찰은 같이 연행되었던 다른 후배들과 나를 엄청 두들겨 고문하였다.
이렇게 되어 나는 결국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만기 출소하고 인성여고에서 해직되어 교단을 떠났다. 내가 경찰서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 때에 나중에 출소한 후에 알았지만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학생은 학교 교무실의 내 자리를 지키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하여 참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출소 후에는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아 당시 탄압받던 민주노조였던 콘트롤 데이터 노동조합 탄압저지대책위 간사로 또 원풍모방대책위 간사로 여기저기를 누비다가 결국 생산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직접 함께 투쟁하자고 하여 가방공장에서, 트랜스 공장에서 1년여를 일하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간사로 들어가 10년을 노동현장에 대한 상담과 투쟁에 대한 지원활동을 하였다. 1980년대 노동현장은 너무나도 열악한 상태였다. 그래서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도 그 한복판에서 3개월여를 집에도 못가고 치열하게 현장과 함께하였다. 참으로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이 세상이 변혁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으로 그나마 만족할 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인천에 선인학원 재단이 있었다. 당시 부패사학의 대명사였다. 이 재단을 실제로 만들고 운영한 사람은 그 유명한 백인엽이었다. 조그만 사립재단을 인수하여 선인재단으로 바꾸고 그 산하에 유치원 1곳, 초등학교 1곳, 중고등학교 10곳, 전문대학 1곳, 대학교 1곳 도합 14개의 학교를 거느린 거대 사학재단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비호를 받아 그야말로 사학재벌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온갖 비리가 발생하여 인천교육계의 암덩어리가 되었다. 졸업장을 팔아먹고, 그야말로 학교 부지를 헐값에 사기 위하여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학교 건물을 짓는데도 학생의 교육환경은 최악으로 9층 건물에 화장실은 1층에 달랑 한 개뿐이었다. 이렇듯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조건의 교육환경에 학생들을 수용하고 학생들에게 노동을 시키기도 하고, 교사를 옛날의 하인을 부리 듯 하니 최악의 교육조건에 내몰린 학생들과 교사, 교수 들이 학원민주화를 외치며, 학원 부패척결을 외치며 들고 일어나자 지역사회에서 선인학원 정상화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이들의 싸움을 지원하였다. 나도 여기에 함께하여 결국에는 선인학원이 해체되어 14개의 학교가 공립화되고 인천대학교는 부패사학의 대학에서 국립대학교으로 탈바꿈하였다.
인천대학교의 정상화를 위하여 나는 이때에 교직원으로 들어가 5년여를 일하고 1999년 김대중정부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교사 복직 때에 마지막으로 복직하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을 학교현장에서 평교사로 복무하고 정년을 맞이하여 다시 학교현장을 떠나게 되니 참으로 인생은 길고도 짧은 것 같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면 책 몇 권 쓸 정도로 많은 굴곡을 겪으며 살아간다. 정년을 하면서 나를 돌아보니 참으로 사연과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고 시대정신에 부응하여 나의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나 한편으로는 많은 부분이 부족한 삶이어서 아쉬움도 크게 남는다. 앞으로 우리 민족적 과제인 평화와 통일, 아직도 미완인 친일 청산을 위해 씨름하며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금, 2020/09/2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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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안익태의 표절과 변절

 

김정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강사1

1. 들어가며

 

1942년 9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음악회’에서 안익태가 자작곡인 교향환상곡 <만주국>을 직접 지휘하였다.

 

안익태 애국가2의 표절문제가 최초로 제기된 것은 1964년, 제3회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피터니콜로프(Петър Николов)에 의해서이다.
그는 〈애국가〉가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오 도브루자의 땅이여, 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와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불가리아 태생의 작곡가이자 UCLA 교수 보리스 크레만리에프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악보를 보내오면서 표절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중앙대 이유선 교수는 저서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이를 한 번 더 언급하며 새 국가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애국가〉의 표절에 관한 시비는 <코리아 타임스>의 음악평론가 제임스 웨이드(James Wade)와 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 공석준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그 뒤에도 전 중앙대학교 교수 노동은에 의해 논의된 바 있다.
본고에서는 〈애국가〉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유사성에 대해 선율형을 중심으로 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표절 사실을 확인할 것이며, 〈애국가〉 작곡 이후 안익태가 전개한 자기표절의 일련의 과정이 어떻게 변절과 위장의 수단이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1 국가만들기시민모임 사무총장 겸 연구위원장
2 이하 <애국가>로 약칭함.

 

 

 

안익태의 대한국애국가(大韓國愛國歌) 자필악보. 1949년 4월 18일 사보(寫譜)

 

2. 안익태의 표절

애국가의 작곡시점은 1935년 11월, 미국 필라델피아이며, 같은 해 12월 28일 초연되었다. 즉 불가리아 방문 전에 〈애국가〉가 작곡된 점은 사실일 것이나, 공석준 스스로가 독보(讀譜)에 의한 참고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꼭 불가리아를 직접 방문해야만 불가리아의 노래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안익태는 〈애국가〉 작곡을 위해 40여 개국의 국가(國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들을 모아 기초자료로 삼았다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접했을 개연성은 부정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두곡의 선율을 상세히 비교하여 표절 여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래 악보의 윗단은 〈애국가〉이고, 아랫단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이다. 굵은 선은 선율의 흐름이고, 위아래를 연결한 가는 선 중 초록색은 일치하는 음, 노란색 선과 원은 변주된 음이다.

 

 

셋째 단 이외의 부분에서 선율의 흐름이 유사하다는 점이 한눈에 드러난다. 〈애국가〉의 출현음 총 57개 중 맥락과 음정이 일치하는 음은 모두 33개(58%)이며, 변주된 음까지 포함하면 그 개수는 모두 41개(72%)이다. 즉 선율의 맥락과 음정의 일치도를 기준으로 하면 두 곡의 유사도는 58~72%이다. 이처럼 높은 유사도를 표절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애국가〉에서 노랫말과 선율이 부합하지 않는 부분들 또한 표절로 인한 결과로 추정된다. 예컨대 아래 악보 첫마디 ‘동해물과’에서 ‘해’가 악구의 정점에 있으며, 음가도 가장 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음절에 악센트가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동’과 ‘해’는 연결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동/해물과’로 들리며, 결과적으로 노랫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제2마디의 ‘백두산이’는 더 심각하여, 한반도에서 가장 높으며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백두산의 형상이 아래로 거꾸러진, 계곡과 같은 선율형으로 되어있다.

곡풍(曲風)에 있어서도 대체로 처량하여 기백을 느끼기 어렵고, 장엄하고 활기찬 면이 부족하며, 애국적 감격이 표현되지 못하였으며,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계속 지적되어왔다. 이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에 기존에 있던 〈애국가〉의 노랫말을 붙이면서 초래된 결과로 분석할 수 있다. 원래 약박인 선율을 강박으로 시작함으로써 ‘동/해물과’가 되었고, 원 선율을 변주하면서 백두산이 거꾸러진 형상이 되었으며, 원래 활기찬 행진곡 풍의 곡을 보통 빠르기보다 느리게 바꾸면서 활기와 기백이 감소된 것이다. 서양의 노래가 원곡이므로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전혀 갖추지 못한 점도 문제이다. 결국 〈애국가〉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을 결과적으로 상당 부분 차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3. 안익태의 자기표절

안익태가 자신의 작품을 연주한 일시와 장소를 정리한 것3


3 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37-38쪽의 표 참조.

 

 

안익태의 일본식 이름 ‘에키타이 안’(EKI TAI AHN)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8년 7월, 헝가리의 외트뵈쉬(Eötvös) 기숙학원 서류이다. 그는 이를 한국식 이름과 혼용했으며, 해방 이후인 1952년까지도 스페인에서 일본식 이름을 썼음이 확인된다.
〈에텐라쿠〉는 에키타이 안이 1938년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럽에서 가장 많이 연주한 레퍼토리로, 일본의 아악 〈에텐라쿠(越天樂)〉의 주제 선율을 그대로 활용한 곡이다. 이 곡은 1940년에는 〈야상곡과 에텐라쿠〉라는 이름으로, 1960년 6월 15일에는 〈강천성악(降天聲樂)〉이라는 이름으로 연주된다. 1962년 1월 한국 초연시 언론에는 세종대왕이 지은 아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940년에 작곡했다고 보도된다. 〈에텐라쿠〉의 원 악보와 음원은 존재하지 않으나, 1941년 헝가리 월드 뉴스에 등장하는 1분 정도의 편집 영상을 KBS 음원의 6분 01초 이후와 비교하면 동일곡이라는 점이 이해영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즉 〈에텐라쿠〉는 〈강천성악〉으로 자기표절되었다.
1938년에 초연된 〈코리아 판타지〉는 1940년 10월 19일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교쿠토(極東)〉가 연주되면서부터 자취를 감춘다. 〈교쿠토〉에는 〈애국가〉가 포함된 4악장의 합창 부분이 생략되고, 몽고여행의 기억을 담은 ‘음악이야기’로 대체된다. 그것은 불가리아 노래를 반 이상 닮은 〈애국가> 선율을 듣는다면 불가리아 청중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지 않았겠는가.
1943년 1월 3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에텐라쿠〉와 함께 연주된 〈토아〉(Toa) 역시 〈교쿠토〉의 다른 이름으로, 일본어이며 ‘동아’(東亞)를 뜻한다. 이는 다시 1942년 9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에서 〈만주국〉이라는 곡명으로 연주되며, 마지막 악장에 만주국을 찬양하고 추축국의 결속을 다짐하는 합창이 들어간다.
바로 이 4악장 합창 부분 대본을 에하라 고이치가 썼는데, 그는 만주국 건국 이후 하얼빈특별시 부시장을 역임하고, 독일이 만주국을 승인한 1938년부터 주 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한 인물이며, 주독 일본 첩보기관(IS)의 총책이다. 에키타이 안은 에하라 고이치의 사저에서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 초까지 기거하며 그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였으며, 그 대가로 일본제국과 나치독일에 선전 활동 용역을 제공하였다.
〈만주국〉은 1944년판 〈한국 환상곡〉으로 다시 재구성되어서, 1946년 3월 15일 바르셀로나 리세오 극장에서 연주된다. 이때 마지막 악장에는 다시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사용하였다. 즉 〈한국 환상곡(코리아 판타지)〉, 〈교쿠토〉, 〈토아〉, 〈만주국〉은 대동소이한 곡이며, 최초에 합창으로 표현된 ‘애국’의 자리는 ‘몽고’로, 또 ‘만주’로 바뀌었다가 다시 ‘애국’으로 돌아왔다. 만주국을 찬양하고 추축국 3국의 동맹을 다짐하던 그 선율로 다시 ‘애국’을 노래한 것이다. 결국 안익태의 대표작들은 모두 자기표절의 결과로 생성된 이명동곡(異名同曲)이었다.

 

4. 나가며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을 애국가로 부르는 것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작곡한 〈애국가〉가 어찌하여 결과적으로 불가리아 노래를 차용한 ‘표절’이 되었을까?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로 하여금 독자적이면서 민족 정체성을 가진 선율을 쓰게 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애국가〉가 과연 ‘애국’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에키타이 안에게 있어 표절과 자기표절은 일신의 영달을 위한 변절과 위장의 수단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애국가〉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을 결과적으로 표절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만일 의도적 표절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나라의 노래와 이처럼 닮은 선율을 〈애국가〉로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낯 뜨거운 일이다. 국민 모두가 오랫동안 불러왔다고 해서 그 부끄러움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국가라면 적어도 우리나라의 건국이념, 철학, 역사, 자부심, 비전 등이 담기고, 모두가 함께 부르면서 정서적 공감대 형성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평화와 평등까지 고취시킬 수있는 좀 더 진취적이고 기상이 있는 선율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담긴 전통장단과 악조라야 함은 물론이다.
일반에 널리 알려진 주제, 또는 자신이 특정 작품에서 썼던 주제를 다시 활용하여 창작하는 것은 여러 작곡가들이 즐겨 쓰는 창작기법이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선율을 그 출처를 밝히지 않고 주제로 활용한다든가, 전반적으로 동일한 곡을 이름만 바꾸어 다시 발표하는 행위는 표절과 자기표절에 해당한다. 표절과 자기표절은 ‘창작’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금기시되는 행위이며, 가장 기본적인 ‘양심’의 문제이며, 법적,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안이다.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오래 전에 만들어져서 저작권 관련 법적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결과적 표절임을 확인한 이상 공식적 행사에서 이를 부르기를 강요하거나 권장하는 일은 앞으로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우리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을 모두 반영한, 정통성과 품격을 갖춘, 대한민국의 법정 국가(國歌)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여야 할 때이다.

목, 2020/09/2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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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개막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이 9월 25일 개막하였다. 올해는 역사적인 사월혁명이 일어난 지 60주년 되는 해이다. 이번 전시는 예기치 않았던 코로나-19 상황으로 근현대사기념관이 장기적으로 휴관하여 오랜기간 미루어졌지만 민주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1960년 4월을 기억하기 위하여 가을의 시작과 함께 전시를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특별전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4월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 4월혁명의 진행과정, 5·16군사쿠데타로 인한 혁명의 좌절,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이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4월혁명을 어떠한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켰는지 보여주고 있다.
제1부 〈우상의 시대-‘국부’가 된 독재자〉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여 1948년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이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어떻게 이승만을 ‘국부’로 우상화 하였는지 보여준다. 당시 이승만 우상화의 도구가 된 〈대한뉴스〉 영상들과 다양한 사료들은 독재정권을 노골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제2부 〈구호로 보는 사월혁명〉은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던 2·28대구학생의거와 “3·15선거는 불법이다”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라”고 외치던 1차 마산의거를 지나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 등의 정권타도 구호와 함께 4월혁명의 반독재투쟁을 보여준다. 그리고 4월혁명 이후 “한미경제협정 결사반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등 사회변혁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연표의 시대순에 따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4월혁명 당시의 현장감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함께 만나 볼 수 있다.
제3부 〈사월 그날, 이후〉에서는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 26일 이승만의 하야로 ‘승리의 화요일’로 바뀐 이후 민중들의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한 변혁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7·29총선으로 집권한 민주당이 4월혁명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자 대두한 혁명세력의 저항과 변혁운동 등이 5·16군사쿠데타 세력의 철저한 탄압으로 ‘미완의 혁명’이 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유물로는 4월혁명 이후 만들어진 많은 단체들이 어떠한 목소리를 내려하였는지 보여주는 격문이 실물자료로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제4부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에서는 4월혁명이 문학과 예술에 어떠한 역사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는지 볼 수 있는 공간이다. 4월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혁명정신이 퇴색하는 상황에서 자기반성과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조지훈, 김수영, 신동엽 등 시인의 노래를 통해 함께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영화와 대중가요에서 4월혁명 전후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당시의 음반과 출판물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북한에서 남한의 4월혁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북한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번 특별전시는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11월 15일까지 사전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으며 VR전시로도 제작 중이어서 10월 말부터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특별전을 통해 60년 전 앞선 세대가 피흘리며 쟁취하고자 했던 자유, 민주, 평등의 가치가 무엇인지 마음속에 새겨보는 뜻깊은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수, 2020/11/1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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