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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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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익명 (미확인) | 금, 2019/03/29- 17:56

[회원마당]

임시정부 답사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조선동 예원학교 국어교사, 청년백범 대표

S#1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이 맺어졌다. 이른바 ‘경술국치(庚戌國恥)’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대 전란을 겪은 이후, 조선왕조는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일부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득세하면서, 일부 권력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 백성을 위하는 정치가 아니라 일부 권력층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정치가 이루어졌다. 백성들은 권문세가의 이익을 위해 맞아죽고, 굶어죽었다. 일부 백성들은 스스로 민적(民籍)을 파내고 산으로 들어가 산적이 되었다. 이미 나라는 썩어 들어갔다. 신분제를 기반으로 한 왕조는 금이 가고 있었다.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과 양심을 팔아먹은 조선의 관료들이다. 세계사 어디에도 외부의 힘만으로 멸망한 국가는 없다. 이미 내부에서 썩어 들어가던 국가가 외부의 작은 충격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할 뿐이다. 한일합병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황태자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 대하여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줄 것이다.(후략)

 

한일합병조약문을 읽어 가면서, 나는 화가 났다. ‘조선 황제의 권리를 일본 황제에게 넘긴다’는 제1조로 시작된 조약문은 황족(皇族)의 위엄과 명예를 지켜달라고 한다. 훈공 있는 한국인, 다시 말해 ‘친일파’에게는 표창과 작위와 은급을 내려 달라고 한다. 조선이 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특권만을 행사하고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았던 지배층의 탓이다. 그 지배층들은 나라가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고 명예와 권력과 재산을 보장받고자 한다. 그를 위해 충분한 세비를 공급하라고 한다. 뻔뻔스럽다. 그
세비는 결국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백성들을 쥐어짜라는 이야기이다.
내가 회사를 운영한다 치자. 경영을 잘못하여 회사를 다른 회사에 넘겨야 한다. 회사를 넘기
기 위해 인수합병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나의 경영권과 재산을 보장받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나 때문에 고생한 직원들의 일자리를 보장해달
라고, 직원들을 잘 대해 달라는 내용을 어떻게라도 인수합병서에 넣어야 한다. 나 때문에 고생
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다. 한 나라를 경영한 자들이 우리 국민들을 어떻게 해 달라
는 말 한 마디 없다. 분통이 터진다.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마자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우리 국토 대부분은 조선총독부의 것이 되었다. 당시 국민들 대부분의 직업은 농업이었다.
국민 대부분이 순식간에 ‘소작농’으로 전락한 것이다. 원래 소작농이었던 이들의 삶은 더더욱 황
폐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소작세를 대폭 올리고 여러 가지 준조세 형태로 우리 국민들을 수탈
하였다. 민초들의 삶은 뿌리째 뽑혔다.
우리 민족의 위대함은 1917년 광무선언(대동단결선언)에서 드러난다. 한입합병조약은 대한제국 황제가 대한제국의 모든 권리를 일본 황제에게 이양한다는 것이다. 1917년 상하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박용만·윤세복·조소앙 등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한일합병조약의 부당성을 말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 대한 모든 권리는 이제 우리 민족의 것이 되었으며, 대한제국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여서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가 일본 황제에게 갈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경술국치를 통해서 망한 것은 황제의 나라인 ‘대한제(帝)국’일 뿐이며, 황제가 포기한 우리나라에 대한 권리는 대한의 국민들이 승계·계승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대한제(帝)국’은 사라졌지만, 그 뒤는 모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대한민(民)국’이 계승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유럽에서 황제국가가 시민국가로 전환되는 데 약 200여 년이 걸렸다. 우리는 이러한 민주적 전환을 10년도 걸리지 않아 이루어낸 것이다.
조선 시대에 모든 공적(公的) 문서의 주어는 모두 임금(왕) 또는 황제이다. 1917년 광무선언, 위대한 정치적 개안(開眼)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 첫 문장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국민’이 우리나라 국권의 주어(主語)로 자리잡았다. 이 정신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본이념이 되었다. 이후 우리 독립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으며, 지금의 대한민국 헌법 정신의 근간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S#2 ‘바리데기’들의 눈물, 한숨, 피

옛날 오구대왕이 살았다. 혼례를 일년 미루어야 아들을 낳고, 길하다는 예언을 무시하고 결혼한 탓에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딸만 계속 낳다가 마침내 일곱째도 딸로 태어나자, 화가 난 오구대왕은 일곱째 바리공주를 내다버렸다. 바리공주는 한 노부부에 의해 구해져 길러졌다. 후에 왕과 왕비가 죽을병이 들었다. 백약이 무효였다. 저승의 생명수만이 병을 고칠 수 있다 했다. 오구대왕 부부는 가장 사랑을 많이 주며 기른 첫째 공주를 불렀다. 저승에 가 생명수를 구해, 아비와 어미의 목숨을 구해 달라 했다. 첫째 공주는 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거절하였다. 다음으로 사랑을 많이 준 둘째 공주를 불렀다. 저승으로 가 생명수를 구해, 아비와 어미의 목숨을 구해달라 부탁했다. 둘째 공주 역시 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고개를 저었다. 여섯째 공주까지 마찬가지였다. 낳자마자 내다버린 바리데기가 기적처럼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오구대왕은 체면불고(體面不顧) 바리데기를 불러다가 부탁했다. 그 말을 들은 바리데기가 말했다. 내가 은혜를 입은 바 없으나, 아비의 씨앗을 받아 어미의 배에 열 달 있었으니, 가겠노라 말한다. 바리데기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저승으로 갔다. 바리데기는 무슨 지옥, 무슨 지옥, 무슨 지
옥… 온갖 고생 끝에 저승의 생명수를 구해와 부모를 살려냈다.
나라가 망하자 뜻 있는 사람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그 후 1919년부터 1945년까지 그들이 벌인 투쟁은 세계사에서 그 비슷한 경우조차 찾아볼 수 없는 끈질기고 가열 찬 싸움이었다.
그들은 어두웠던 우리 역사의 등대였고, 우리들의 자존심이자 자긍심이다. 그들을 만나러 간다. 이회영 형제처럼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행한 경우도 있었지만, 모여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기에 다들 ‘바리데기’였다. 나라로부터 은혜 입은 적 없으나, 나라에 몸을 의탁해 살았으니, 기꺼이 지옥의 불길을 향해 간다.
그들의 눈물, 한숨, 피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해 짐을 싼다. 4박 5일의 일정이다. 상하이, 자싱, 하이옌, 항저우, 난징에 남아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흔적을 더듬어 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때 상하이를 향해 집을 나선 윤봉길은 이런 글을 남겼다. 나라 잃은 원수를 갚기 위해 진시황을 죽이려 했던 ‘형가’라는 자객이 남긴 시의 첫 구절이다. “사나이 집을 나서매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으리!” 10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왜 이 길을 나서는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가슴에 담고자 하는가?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답사 하루 전 밤이다.

S#3 죽자꾸나, 상해시대

두 시간 남짓 비행으로 상하이 국제공항에 내렸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남쪽인 상하이는 1월 날씨인데도 따뜻하다. 해발 100m가 채 안 된다는 상하이는 사방 어디에서도 산을 찾아볼 수없는 평원지대이다. 도시 한 가운데로 황포강이 상하이를 동서로 나누며 흐른다. 황포강 동쪽을 ‘포동(浦東)’ 황포강 서쪽을 ‘포서(浦西)’라고 부른다.
첫 여정은 상하이의 번화가인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차창 너머로 보는 중국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 하늘 끝까지 뻗어 있는 것 같은 마천루의 열병식. 변화하고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을 웅변하는 듯하다.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사실 상하이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한 임시정부 청사이다. 첫 번째 사용한 청사는 그 위치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 한다. 두 번째 사용한 청사는 상하이 회해중로에 있다고 한다. 원래 건물은 흔적도 찾을 수 없고 H&M 매장이 들어섰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는 청사를 열 번 정도 옮겼다. 우리가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임시정부의 흔적은 마지막 청사인 이곳 뿐이다.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인 1932년 4월까지 사용한 청사이다. 원래 한 칸만 청사로 사용했었는데, 중국 정부의 협조로 옆의 두 칸까지 모두 세 칸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장사진(長蛇陣), 인산인해(人山人海)를 넘어서서 ‘야단법석(野壇法席)’에 가깝다. 청사는 긴 직사각형 모양이다. 너비는 두 사람이 팔을 벌려 서면 그만이다. 1층 전면으로 응접실이 있고, 1층 후면에는 중국식
부뚜막이 있는 작은 부엌이 있다. 임시정부 사람들이 밥을 짓고 밥을 먹던 곳이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임시정부 중심인물들의 숙소가 있다. 좁고 긴 복도를 따라 나란히 네 개의 방이 있다. 원래 넓지 않은 집인데, 복도와 계단을 빼고 남은 공간을 넷으로 나누었으니, 방의 넓이는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좁다. 기념관 안에서는 촬영을 일절 금한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이곳까지 와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아쉽다.
1층 좁은 중국식 부뚜막 주변으로 자꾸만 눈길이 간다. 이곳에서 이봉창과 임시정부 청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술이 얼큰하게 오른 이봉창이 말했다.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못 죽이나?” “하급 관리 하나 죽이기도 어려운데, 천황을 죽이기가 쉽겠소?” 이봉창은 다시 말했다.
“내가 동경에서 천황의 행차를 본 적이 있소. 그때 내가 엎드려서 생각하기를 지금 만약 내 손에 폭탄만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 대화를 우연히 들은 백범은 이봉창과 함께 침체에 빠져 있던 우리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봉창은 적진의 심장부에 홀로 뛰어들어 큰 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거사 직후 중국의 신문은 이런 제목의 기사를 내었다.
“불행히도 적중하지 않았다.” 이봉창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백범과 마지막 사진을 찍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 나이가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해도 늙은 생활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 이제는 영원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떠나는 것이니,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 이봉창의 거사가 시작된 곳이 이곳이로구나. 한 사나이가 죽음을 앞두고도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이 떠오른다. 1931년 일이다. 이때 이봉창의 나이 서른하나였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봉길이 백범을 찾아온다.
“제가 날마다 채소 바구니를 등에 메고 홍구 쪽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선생님께서 동경 사건과 같은 계획이 또 있을 줄 믿습니다. 저를 지도하여 주시면 죽
어도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이 만남은 두어 달 후 우리 독립운동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는 홍커우공원 의거를 이끌어낸다. 백범과 윤봉길은 서로 시계를 나누어 가지고, 후일 지하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영원히 헤어졌다. 1932년 일이다. 윤봉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먹먹한 가슴으로 임시정부 청사를 나와서 백범 가족이 살았던 영경방 10호를 찾아간다. 당시 이곳은 상하이에서 가난한 동네에 속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인들이 버린 배춧잎 중에 먹을 만한 것을 골라서 생활할 만큼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백범은 아내 최준례를 잃는다. 최준례는 둘째 아들 신을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동이 불편하였다. 시어머니인 곽낙원이 자신의 세숫물까지 치우는 일을 하게 되자, 회복이 덜 된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좁고 가파른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제때 치료를 하지 못해 늑막염이 폐병으로 번졌다. 형편이 어려웠던 터라, 최준례는 외국인 선교회에서 무료로 시술하는 홍커우 폐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병원이 있던 곳은 일본 조계지였다. 프랑스 조계지 밖으로 나갈 수 없던, 일본 조계지에는 더더군다나 갈 수 없었던 백범은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시어머니 곽낙원이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 최준례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후였다. 어미를 잃은 둘째 아들 신은 그때 막 걸음마를 익힐 때였다. 우유를 먹었지만 잘때는 할머니의 빈 젖을 물고야 잠이 들었다. 차차 말을 배웠지만, ‘할머니’라는 말만 알았고, ‘엄
마, 어머니’라는 말을 몰랐다고 한다.
백범이 안악 양산학교 교사였던 시절, 애제자였던 나석주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백범은 나석주를 ‘지사이자 제자’라 칭하였다. 나석주는 조국과 겨레를 위해 무언가 큰일을 도모하고자 톈진으로 가 의열단에 가입할 것을 결심하고 스승인 백범을 찾아온다. 때마침 백범이 생일인 것을 안, 나석주는 양복저고리를 전당을 잡히고 고기와 채소를 사와, 백범의 생일을 기념하였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만국공묘 내 신규식•박은식•노백린 선생 묘가 있던 자리

 

다음해인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는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 남대문 근처에 있던, 경제침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불행히 불발하였다. 뒤쫓아온 일경들과 총격전을 벌이며 일본 경찰 7인을 사살하고 자결하였다. 나석주가 순국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백범은 그 후부터 죽는 날까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지 않았고, 나석주는 영영 다시는 자신의 생일을 맞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지금 이곳은 상하이의 번화가로 변모하였다. 영경방 일대는 고풍스러운 건물 외관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실내는 고급 식당 등으로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다.
임시정부 사람들이 상하이에 모여들기 전, 이곳 상하이에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분들이 계신다. 예관 신규식 선생, 백암 박은식 선생 같은 분들이다. 선견지명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고, 평생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애쓰던 분들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분들이 잠들어 계셨던 만국공묘로 간다. 이분들의 유해는 1993년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참으로 무심한 후손들이 아닐 수 없다. 선생님들 잠들어 계셨던 곳에 준비해간 차와 술을 올리고 두 번 절했다. 뜨겁고 뭉클한 것이 울컥 올라왔다. 어찌 아는 이 하나 없는 이역만리 땅에 계셨어요? 우리가 참으로 죄인입니다!
눈물 마를 사이도 없이 홍커우공원으로 이동한다. 윤봉길 의사 의거지(義擧地)이다. 상하이를 점령한 기념식과 천황 생일인 천장절을 겸하여 기념하는 기념식장에 단신으로 들어가 일본군 시라카와 대장 등 군 수뇌부와 주중 일본 대사, 상하이 민단장 등을 폭사시켰다. 윤봉길이 들고 간 폭탄은 두 개였다. 하나는 도시락 모양, 또 하나는 물통 모양. 폭발력이 강한 도시락 모양 폭탄을 던지고, 물통 모양의 폭탄은 자결용이었다고 한다. 단상 주변에 민간인, 특히 어린이들이 있는 것을 본 윤봉길은 불필요한 희생을 줄
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폭발력이 약한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졌고, 단상 위에 있던 일본군 수뇌부 등을 제외한 민간인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윤봉길의 의거로, 중국인 특히 국민당 정권은 한국인에 대해 재평가하게 된다.‘만보산 사건’ 등으로 나빠졌던 한국인에 대한 평가가 놀랄 만큼 좋아졌고, 우리 독립운동을 국민당정권이 돕게 되는 계기가 된다. 또 미주, 하와이등지의 한국인들이 임시정부에 다시 성원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침체기를 걷던 우리 독립운동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의거로 백범에게는 60만원(2002년 환산 200억원)의 현상금이 붙었고, 임시정부와 임시정부 사람들은 길고 긴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윤봉길기념관 안에 모셔진 윤봉길 의사 흉상

중국인들은 윤봉길의 호 ‘매헌(梅軒)’을 따서, 홍커우공원 안에 ‘매헌(梅軒)’이라는 윤봉길기념관을 만들어 놓았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정성스럽게 잘 꾸며 놓았다.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아침나절, 마당로 임시정부 청사에 장사진을 이루던 한국인들은 왜 이곳은 외면하는 것일까? 가이드에게 물으니, 홍커우공원 버스 주차장이 좁아서, 주차하기가 어렵고 홍커우공원과 거리가 멀어서 그렇단다. 나 이런! 세상 물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헌 주변에 때 이르게 핀 매화만이 우리들을 수줍게 반겨주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황포강에서 유람선을 탔다. 상하이를 동서로 가르며 흐르는 황포강에서 바라보는 포동(浦東)과 포서(浦西)는, 한쪽은 중국이 과거 제국주의 침략을 겪을 때 지어진 유럽식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고 반대쪽에는 과거의 아픔을 이겨내고 우리는 이렇게 성장했다는 걸 웅변하듯이 현대식 마천루들이 줄지어 서 있다. 포동은 포동대로 포서는 포서대로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한다.
이 강 옛 선착장 자리에서 의열단원은 일제 군부의 거물이며 해외 영토확장 계획의 지도적 이론가를 자처하는 침략주의자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 하였다.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세 사나이가 나섰다. 3월 28일,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를 필두로 수십 명의 고관과 육·해군 장병 및 거류민을 포함한 다수의 일본인들, 그리고 각국 외교사절단이 영접차 도열해 있는 가운데 다나카를 태운 여객선이 오후 3시 반경에 황포탄 세관 마두(碼頭)의 잔교(棧橋) 앞에 도착했다.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 몇 걸음 내디뎠을 때, ‘권총 사격의 귀재’ 오성륜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잰걸음으로 다나카를 추월하여 나온 미국여인이 그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1

혼비백산한 다나카가 대기 중인 자동차를 향해 줄행랑을 놓았다. 도망가는 다나카를 향해 김익상이 권총을 겨누었다. 두 발을 쏘았는데 빗맞아 모자만 꿰뚫었다. 김익상은 연이어 다나카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긴박한 상황에서 너무 서두르다 보니, 안전핀을 먼저 뽑아야 하는 걸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 사이에 다나카는 황급히 차에 올라타 출발하였다. 우왕좌왕하는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 이종암이 힘껏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자동차 앞바퀴에 적중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바로 터지질 않았고, 옆에서 있던 영국 군인이 강물 속으로 차넣어 버렸다. 이리하여 의열단원 3인의 암살 저격은 불행히도 실패하고 말았다. 의열단원들은 거사 지령을 받으면 탄두를 갈아서 뭉툭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총알이 관통하여 다른 사람까지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름다운 상하이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자주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분들을 떠올린다. 묵직한 아픔과 슬픔이 화려한 조명과 눈물처럼 뒤섞인다.


1 오성륜이 쏜 총탄에 맞아 절명한 젊은 부인은 신혼여행 중인 미국인이었는데, 그 남편 되는 영국인 스나이더가 영사관 구치소로 면회를 와서 “조선 청년들의 의기에 배운 것이 많다”며 오성륜을 위로하고 갔다.

 

백범은 상하이 시절을 회고하면서 ‘죽자꾸나 상해시대’라고 압축하여 적었다. 큰 뜻을 품고 저마다 모여들었지만, 자금줄은 끊기고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중국인들이 버린 배춧잎 더미를 뒤져 먹을 만한 걸 골라야 하는 간난신고가 이어졌다. 여기저기서 배신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밀정이 횡행했다. 그 시절 백범은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라고 적었다. ‘죽자꾸나 상해 시대’를 주린 배를 움켜주고 누항에서 바릿밥을 마다하지 않은 분들이 있었다. 그 시절을 한숨을 반찬 삼아, 눈물을 국 삼아 찌개 삼아 견뎌낸 분들 덕분에 우리는 존재한다. 그분들을 잊지 않고자 한다.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한다. 발바닥에 새기는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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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어떤 인연 –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에 부쳐

김경현 후원회원(행정안전부 전문위원)

 

2001년 8월부터 연구소를 후원하기 시작한 김경현 후원회원은 제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이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3팀장을 지냈다. 현재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서 전문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 글은 2018년 타계한 ‘진주정신’의 표상으로 일컬으며 지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왔던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를 맞이해 고인과의 인연을 되돌아보고 쓴 회고담이자 추도사이다.- 엮은이

박노정 선생님의 생전 모습(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박노정(朴魯貞, 1950~2018) 선생님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분의 삶을 이야기해야 제가 맺은 인연에 대한 의미도 부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노정 선생님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경남 진주시 봉곡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주 교육장을 지낸 부친과 중등학교 교장을 지낸 형이 있는 교육자 집안이었습니다. 경상대학교 농과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학군장교(ROTC)로 임관해 전방에서 육군보병 소대장을 지냈으나 폭압적인 군대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군병원에 입원했다가 의가사로 제대했습니다.
이후 출가하고 입산해 팔공산 원효암 등지를 전전하며 승려생활을 하다가 속세에 나왔는데, 고향 진주에 돌아온 후 시인과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습니다.
문인활동으로 ‘동기 이경순선생’ 전집간행위원회 상임위원, 진주문인협회장, ‘진주 가을문예’운영위원장, 진주민예총 회장, 이형기시인 기념사업회장, 경남시인협회장 등을 지냈습니다. 이경순(李敬純)은 일제 때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던 진주의 시인이고, 이형기(李炯基)도 시 「낙화(落花)」로 유명한 진주의 시인입니다.
특히 사회단체활동으로 남성당 김장하(金章河) 선생께서 설립한 진주 남성문화재단에서 이사로 활동했으며, 진주문화예술재단 이사를 비롯해 진주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진주정신지키기모임 대표, 진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6․15공동선언실현을 위한 진주시민운동’ 상임대표, 진주주민협의회 공동대표, 독도수호와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저지를 위한 시민운동본부 공동대표 겸 ‘친일잔재청산 시민운동 공동대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시민단체를 맡아 지역사회운동을 이끄는데 헌신했습니다.
박선생님의 지역사회활동 중 가장 두드러지고 애정을 쏟았던 활동은 지역언론운동이었습니다. 1990년 3월 시민주를 모아 <진주신문>이 창간될 때 발행인과 편집인을 맡았는데, 창간 호에 축하시를 발표했습니다. 이후 2002년까지 <진주신문> 대표이사를 지내며 지역언론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박선생님은 <진주신문> 발행인을 지낼 때 지역권력과 토호세력을 상대로 비리와 부정을 폭로하면서 여러 차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사건으로 피소되어 법정에 서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친일청산운동에 앞장서 친일화가였던 이당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논개영정(論介影幀)’을 논개의 사당인 진주성 의기사에서 뜯어내 폐출했다가 유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박선생님은 ‘진주정신’을 지키고 역사정의를 세운 행위가 죄가 된다면 벌을 달게받겠다고 벌금납부를 거부해 강제노역형에 처해짐으로써 진주교도소 노역장에 유치되었습니다. 이에 진주시민들이 앞장서 모금운동을 벌여 그 성금으로 벌금을 납부해 풀려났으며, 남은 금액은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를 창립하는데 의미있는 기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진주지역사회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실천적 삶의 모습을 보여준 박선생님이었습니다. 과연 저는 어떻게 박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의 끈을 맺게 되었을까요. 1980년대 중반 대학 재학 때 절친했던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선배를 통해 박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는 경상대 터울시조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여태전(余泰田) 선배였습니다. 어느날 저는 여태전 선배의 손에 이끌려 박선생님이 본성동 옛 진주시청 앞에서 운영하는 찻집 ‘아란야(阿蘭若)’[불교용어로 ‘수행처’를 의미함]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박선생님이 가르치는 <금강경(金剛經)> 강의를 듣다가 따분해서 밥만 몇 차례 얻어먹고 도망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박선생님은 개의치 않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저를 불러 <진주신문>에 들어오라고 이끌어 1991년 8월 저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직업으로 팔자에도 없는 신문기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박선생님은 아란야를 방문한 양산 효암학원 채현국(蔡鉉國) 이사장에게 여태전 선배를 훌륭한 젊은이라고 소개해 여선배가 바라던 교직의 길을 걷게 해 주었습니다.
여선배는 양산 효암여상을 시작으로 진주 삼현여고 교사, 산청 간디학교 교감, 창원 태봉고교장을 거쳐 남해 상주중학교장을 지내며 대안교육에 힘쓴 훌륭한 교육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여선배도 박선생님이 추구했던 바와 같이 민족정신과 역사정의활동에 공감하여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지요.
한편 박선생님이 <진주신문>에 있을 때 가끔 직원회식을 가졌는데 드물었지만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술은 전혀 마시지 못했지만 노래는 꽤 잘 불렀습니다. 2차로 자리를 옮긴 노래방에서 반주에 맞추어 노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르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 이 노래는 음유시인으로 잘 알려진 백창우(白昌牛) 시인이 작사・작곡하고 가창력과 호소력이 있던 임희숙(任喜淑) 가수가 1984년에 불러 히트한 곡입니다. 노랫말과 음율이 마치 박선생님이 젊은 시절에 겪었던 고단하고 힘들었던 신산한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3년 저는 박선생님과 함께 검찰조사를 받고 법정에 서야만 했던 운명적인 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제가 당시 경남지역의 최대 현안사업이던 남강댐 보강공사에 따른 수몰지 보상과 관련한 측량비리 및 부정보상에 대한 문제를 심층 취재한 기사를 작성해 보도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그때 이 기사를 본 사천군의회 이원식(李源植) 의원이 자신의 땅에 측량비리와 부정보상이 있다는 취지로 보도한 <진주신문>의 기사에 대해 취재기자였던 저와 신문발행인이었던 박선생님을 창원지방검찰청 진주지청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했던 것입니다.
진주지청은 고소사건을 접수하자마자 경찰에 사건을 배당하지 않고 직접 수사에 착수해 신속하게 두 사람을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검찰에 구속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로 당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이의원은 당시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순회심판 조정위원을 맡고 있었던 지역유력자로서 검찰과 법원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원식 의원은 당시 사천군의원으로서 지역현안과 관련해 언론보도 및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에 있었으므로 <진주신문>의 기사가 비방을 목적으로 작성된 사실무근한 허위사실로 보기 어려워 그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심 진주지원 재판에서 검사는 피고인들에게 징역 3년씩을 구형했고 판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습니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했습니다. 그 결과 창원지방법원에서 열린 2심 합의부재판에서는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사실관계가 입증되고 언론보도의 공익성이 인정되어 실형을 내린 원심판결을 파기했습니다. 그러나 기사에 일부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여전히 판단함으로써 벌금형이 선택되어 각각 벌금 100만원이 선고되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벌금형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다시 상고했는데 대법원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원심파기환송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냈습니다. 1997년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함으로써 사건을 창원지방법원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지역유력자이며 공적인 존재로서 현직 군의원에 대한 비리의혹은 정당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므로 언론보도로 인한 군의원 개인의 명예가 훼손된다고 하기보다 지역민의 알권리가 우선되어야 함으로 이를 취재해 보도하는 언론의 행위가 부당하다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판결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창원지방법원 형사부로 되돌아온 파기환송심 재판에서 피고인들에게 모두 무죄가 선고되면서 이 사건은 완전히 끝나 판결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5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끌어온 <진주신문>에 대한 남강댐 수몰지 보상과 관련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사건이 무죄로 판결되면서 진실이 승리하고 정의가 살아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저 자신의 개인적인 승리보다 올곧은 언론인의 자세로 초지일관한 박선생님의 승리였고, 또한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진주신문>의 승리였습니다. 이후 저는 <진주신문> 필화사건을 깨끗하게 마무리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신문사를 떠났습니다. 비록 IMF사태를 계기로 신문사를 그만 두고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와 논개제에서 잠시 문화운동을 하다가 2004년 역사운동을 위해 진주를 떠나 서울로 왔지만, 박선생님과 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주에서 친일청산운동을 하던 박선생님을 서울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는데, 2009년 <친일인명사전> 출간을 기념하는 국민대회가 열리던 자리였습니다. 원래 숙명여대 강당에서 열기로 예정되었으나 대학측의 거부로 효창공원의 백범 김구(金九) 선생 묘소로 옮겨져 열릴 때 그곳을 찾아온 박선생님을 발견하고 매우 놀라워하며 뜨겁게 해후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당시 저는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활동을 하면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편찬활동에도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박선생님은 2015년 형평문학선양사업회장 등을 지내며 만년에도 활발히 활동했으나 2018년 지병이 악화되어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00세시대라는 요즘의 장수추세에 비추어 보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너무 이른 야속한 죽음은 아니었는지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부인 황선옥(黃善玉) 여사께서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박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시에서 자신과 함께 했던 ‘낯선 사내’를 스스로 지우고 먼 길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박선생님이 지웠던 낯선 사내는 생애
의 전부를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청빈한 삶을 살았던 박선생님의 자화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 박선생님은 결코 낯선 사내가 아니었으며 그는 아직도 저의 ‘영원한 <진주신문> 발행인’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진주신문>도 박선생님도 없고 단지 이름만 같은 짝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여전히 제 마음속에는 젊은 혈기가 넘치던 그때 그 시절의 <진주신문>과 박선생님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박선생님의 장례식 때 황여사께서 다음 생에는 부부가 아닌 좋은 친구로 만나자고 했던 말이 뇌리에 남습니다. 저 역시 다음 생에는 기자와 발행인이 아니더라도 어떤 인연이든지 끈이 이어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도 괘념치 않을 것입니다.
박선생님이 생전에 남긴 시집으로는 첫 시집 <바람도 한참은 바람난 바람이 되어>를 비롯해 <눈물공양>과 <운주사> 등이 있는데, 저는 첫 시집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아직도 귓전에는 박선생님이 신문사에서 저를 부르던 호칭이 이명처럼 들려옵니다. ‘김경현 기자’가 아닌 “경현 수좌”라고 부르곤 했던 다정한 목소리가 이제는 바람이 되어 다시 귓전을 스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또 다른 저의 사회학과 선배이던 양곡(暘谷) 시인의 시 「고 박노정 시인」을 인용합니다. 이 시를 음미하면서 박선생님의 영면을 빌며, 2주기(7월 4일)를 앞두고 그분의 삶과 인연을 소중하게 추억하고자 합니다.

유발거사(有髮居士)였다/술은 마시지 못해 차를 즐기며/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언제나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시(詩)를 좋아했고/문화와 예술을 좋아했다/무엇보다도 올곧고 결 바른 시대의/민족정신을 좋아했다????에나 진주사람이었다/옳고 바른 일에는 늘 앞장서고자 했고/시들어져가거나 꺼져가는 목숨들에게는 슬그머니 다가가/빙그레 미소 지으며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불어넣어주곤 했다.

화, 2020/05/2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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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이설 고유문(鐵道移設 告由文)

임청각을 가로지르는 중앙선 철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인 이항증 선생이 12월 17일 임청각 방음벽 철거행사에 앞서 사당에서 고유제를 지내며 고유문을 낭독하고 있다.

 

오늘은 근 80년 동안 임청각 앞을 가로지르던 철로가 옮겨지는 날입니다. 임청각은 한 가문의 종가인 동시에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곳입니다.
1896년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될 무렵, 당시 임청각의 주인 이상룡 선생은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만들어 외세에 저항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 경학사와 부민단을 조직해 항일투쟁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3,500여 명의 졸업생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비롯해 수많은 항일투쟁 전선에서 활약했습니다.
선생은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 등의 중임을 맡아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1932년 만주에서 생을 마치셨습니다.
광복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석주 이상룡, 동구 이준형, 소파 이병화로 이어지는 3대(代) 종손과 형제 숙질 등 11명이 서훈되었고, 임청각은 ‘현충시설’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철길과 방음벽에 가로막힌 임청각은 예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과거사는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고, 국토는 분단되어 민족의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에는 남북(南北)과 여야(與野)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독립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석주의 정신이 오늘날 갈등을 잠재우고 미래를 가리키는 등대가 되길 바랍니다.
아! 드디어 오늘 국가와 국민의 노력으로 철로가 옮겨지고 임청각은 일제 강점기 이전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휘어지며 앞을 막았던 철도가 곧게 펴지며 제자리를 찾음은 철도 본연의 역할인 ‘소통과 이동의 자유 회복’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철길이 이어져 금강산과 백두산을 연결하고, 대륙을 횡단해 유럽으로 뻗어 나가길 소망합니다. 그 길 위로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이 퍼져나가길 기원합니다.

2020. 12. 17.
석주 선생 주손 창수 삼가 고하나이다.

월, 2021/01/2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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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광복회가 국회의원 후보자 대상으로 국립묘지법 개정 설문조사를 실시하여여야 국회의원 90명이 법 개정에 찬성한데 이어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는 5월 24일과 6월 13일 각
각 서울과 대전현충원에서 ‘친일과 항일의 현장 현충원 역사 바로 세우기’ 행사를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과 연구소 후원으로 진행했다. 이번 행사에는 서울과 대전현충원이 속해 있는 서울 동작구와 대전 유성구의 이수진, 김병기, 조승래 의원이 직접 참석해 국립묘지법 개정을 약속했다.
국민여론 역시 친일파 이장에 긍정적이다.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2019년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청산 문제 전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당시 조사결과도 10명 중 7명(74.4%)이 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반대는 17.5%) 6월 2일 오마이뉴스가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 결과에서도 ‘이장해야 한다’는 응답이 54.0%로 절반을 넘었다.(이장 반대 32.3%)

화, 2020/06/2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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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광복회, 반민특위 습격일에 경찰청장 사과 요구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6월 6일 오후 3시, 1949년 6월 6일 당시 친일경찰이 자행한 반민특 위 습격 사건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반민특위 유족과 광복회원, 일반시민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졌다. 또한 당시 습격의 책임을 지
고 현 민갑룡 경찰청장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해 4월 3일 서울 광화
문광장에서 열린 제71주년 4‧3 광화문 추념식에 참석, 경찰총수로서는 처음으로 “무고하게 희
생된 분들께 사죄드린다”는 뜻을 밝혔으며 올해 5월 12일에도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경찰
의 지난날을 반성 한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이날 행사는 중부경찰서 앞 가로수에 리본달기를 시작으로 김원웅 광복회장의 대회사, 송영길 의원의 인사말, 임헌영 소장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의 연대사, 구호제창 순으로 마무리됐다. 김원웅 회장은 “71년 전 오늘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폭란의 날’로써 가슴 아프고 슬픈 날이었다.
이 날로부터 이 나라는 ‘친일파의, 친일파에 의한,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며, “광복회는 올해부터 이 날을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하고, 매년 이 날을 애상(哀傷)의 날로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임헌영 소장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모든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반민법을 무력화시킨 데서 비롯됐다. 물론, 그 명령자는 이승만이지만 친일경찰들이 대세를 이루어 반민특위를 무장 습격한 경찰의 수치스런 과거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며, “아직도 과연 경찰이 과거의 미망에서 깨어났는지 각성하는 계기를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화, 2020/06/2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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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2)

조선·동아 전쟁범죄의 민낯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언론은 ‘표현의 자유’를 기본 정신으로 성장한다. 자유는 언론이 성장하기 위한 토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권력의 억압적 성격에 저항하는 언론의 속성으로 상당한 순기능을 우리 사회에 가져다준다. 그러나 반대로, 권력의 위치에 선 언론이 행하는 ‘표현의 자유’는 국가의 이름하에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장치로 변질된다. 여기에 심각하게 경도된 언론들은 특히 전쟁이나 사변 같은 사태에 민중을 선동하면서 중대한 인권범죄를 합리화하거나 폭력과 증오의 ‘표현의 자유’를 외치기도 한다.
국제인권규약은 전쟁선동, 선전 등에 대한 언론의 자유에 분명한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 제20조에 따르면 전쟁을 위한 어떠한 선전도 법률에 의하여 금지되며, 차별이나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만한 증오의 고취 또한 금지된다. 물론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생한 국제적 선언으로 그보다 이전의 사례에 일방적으로 적용하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같은 규약은 존재 자체로 언론의 전쟁부역 행위가 얼마만큼 심각한 폐해를 끼쳤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이재승 교수는 규약 제20조가 “특정한 유형의 표현들이 갖는 파괴적인 성격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언론이 앞장서 민중을 전쟁의 참상 속으로 이끈 사례는 우리 역사에도 적지 않다. 특히 여기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이어진 일제의 침략전쟁 시기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보인 ‘전범언론’으로서의 면모들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이는 한글신문 100년 역사를 자화자찬하기에 앞서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분명한 ‘상흔’이고 어둠이다. 물론 이들이 전쟁부역언론으로 존재한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3년 남짓한 짧은 시기에 불과하지만, 그 보도들은 전쟁이라는 극도의 사회적 불안에 떨었을 조선 민중을 달래고 전쟁의 양상을 투명하게 보도하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앞장서 전쟁을 선전하고 전쟁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일본국민들의 입장에서 게재하라
두 신문은 과연 어떤 입장에서 전쟁보도를 시작했을까? 조선일보는 올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한 〈간추린 조선일보 100년사 – 민족과 함께 한 세기〉에서 중일전쟁과 그 이후의 보도경향을 “강요당한 친일지면”으로 정리했다. 말하자면, 총독부가 자신들의 보도태도를 ‘친일적’ 으로 바꾸려 압박했고 그에 따른 <언문신문지면개선사항>,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 과 같은 “총독부의 모진 탄압”이 더해져 “획일화된 지면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한층 강화된 언론통제책을 써서 언로(言路)를 막으려 한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총독부는 1936년 8월 발생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언론통제를 강화하게 된다.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를 무기한 정간조치 했고, 이듬해 1937년 일본 황실기사 취급방침과 총독부 시정방침에 대한 보도 강화 등을 지시하는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 18개항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와 같은 총독부의 압박이 본격적으로 가해지기도 전에 ‘스스로’ 굴종을 자처하고 나섰다. 연구소가 찾아낸 경성종로경찰서 비밀문서 4466호, <조선일보의 비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은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주필 서춘, 편집국장 김형원, 영업국장 김광수 등은 조선총독부의 언론사 대표자 소집, 협조요청이 있기 전인 1937년 7월 11일, 이미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친일적’ 편집방침을 확고히 결정했다.

 

<조선일보의 비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1938.5.24,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이 문건에는 조선일보 간부진의 회의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7월 11일 회의를 통해 기사를 일본국민의 입장에서 게재하도록 결정했다.

 

당시 회의에서는 중일전쟁이 막 시작되던 시류를 일본적 입장에서 반영하여, “일본군, 중국 장개석 씨” 등의 용어를 “아군·황군, 지나 장개석” 등으로 고치고 논설은 “일본국민으로서의 입장에서 게재”할 것에 대해 논의했다. 특히 사장 방응모는 회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동아일보는 일장기 마크 1개 문제로 수십 만 엔의 손해를 입지 않았는가. 또 민중을 1919년처럼 지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려 편집방향에 반대하던 김형원·김광수를 굴복시켰다. 이에 제2회차 호외부터 “일본국민의 태도”로써 편집하기로 했다.
동아일보의 실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일제에 복종을 다짐하는 청원서와 서약서를 제출하고 ‘사고(社告)’까지 특필함으로써 본격적인 부역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조선총독부 미츠하시(三橋孝一郞) 경무국장은 동아일보 정간 해지 담화에서 동아일보가 “총독정치에 익찬(翼贊)할 것을 선서”하였고 “일본제국의 신문지로서 진(眞)사명에 매진할 것을 서약”하였다고 평가했다.(「동아일보 발행 정지 처분의 해제에 이른 경과」, 1937)

 

전쟁선전의 서막 ‘무력철퇴를 가해야’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 발생 이후 전선이 상해로 확대되어 감에 따라 두 신문도 본격적인 전쟁 선전의 구호를 지면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 이들의 보도는 일제가 도발한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일본군을 “아군(我軍)” 또는 “황군(皇軍)”으로 내면화시키고 있었다.
1937년 7월 16일 동아일보는 조선신궁에서 거행된 기원제 보도에서 “황군”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며 전쟁선전의 막을 올렸다. 이어 8월 20일 사설을 통해 “황군은 드디어 화평해결의 희망을 방기하고 전단을 개시했다”며 스스로의 입장을 사설에 담기 시작했다.
바로 3일 뒤인 8월 23일에는 조선일보가 “지나응징”의 구호를 사설에 게재하며 선전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는 당시 일본 육군에서 슬로건처럼 유행했던 “폭려지나응징(暴戾支那膺懲)1”과 상응하는 어투의 사설이기도 했다. 더불어 조선일보는 중국정부에 “자진하야 전비(前非)를 깨닫는 날까지 무력철퇴를 가하는 것이 즉, 응징의 유일한 목적”이라며 호전적 논조로 일제의 입장을 대변했다.
일본군이 침략의 전선을 확대하는 동안 수시로 날아온 ‘일본동맹통신발’ 전황보도를 두 신문은 별다른 수정이나 검토 없이 지면을 할애해 실었다. 조선, 동아는 일본 동맹통신사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일제의 전쟁선전에 일본 통신사들이 적극 활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면 조선, 동아의 ‘받아쓰기’는 침략전쟁을 널리 퍼트리는 ‘확성기’나 다름없었다.
두 신문의 전쟁보도 경쟁이 극에 달한 것은 1937년 12월 중순, 난징침략 때였다. 이 12월을 기점으로 조선일보가 보도한 난징 관련 기사는 무려 161건, 동아일보는 109건에 이른다. 전쟁 사진 또한 ‘남경함락화보’, ‘사변화보’ 등의 제목으로 수시로 보도되었다. 특히 난징 ‘함락’ 하루 전인 12월 12일자 조선일보 석간에는 ‘남경함락축하행사’를 주제로 한 기사가 특필되기도 했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일본군의 승리가 “충용한 황군장병의 우월”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내세우면서 이 전쟁이 중국 국민의 “배일환상(排日幻想)”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켰다는 등의 논리로 일본 정부의 침략의도를 완전히 대변했다.
한편, 동아일보는 12월 12일 사설에 일장기까지 함께 게재했다. 통상 게재되지 않았던 일장기 이미지를 ‘난징함락’을 기념하며 조간 2면 1단에 특별 삽입한 것이다. 사설은 일본 정부가 “군사행동의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장기전을 불사”해야 한다고 적으면서 난징 내에서 진행되고 있던 시가전에 대해 “숙청(肅淸)공작도 시간문제”라며 전투적 논조를 사용했다.


1 인도(人道)에서 벗어난 모질고 사나운 중국을 혼낸다는 뜻

 

조선일보 1937년 12월 12일 석간 2면
해당 기사는 “오직 앞으로 남은 문제는 아직도 성중에 머물러 있어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시내잔적의 소탕이 있을 뿐이다”라는 평가와 함께 난징함락이 “전국적으로 국민환호의 대상”이 되어 축제가 전 조선적으로 진행됨을 자축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난징 침략 후 참혹한 시가전이 일어났던 시기에 보도된 기사들은 더욱 자극적이었다. 12월14일 동아일보는 동맹통신의 기사를 인용, “격렬한 백주시가전 혈(血), 시(屍), 규환(叫喚)에 충만”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는 “적병 최후의 절규가 들”린다는 표현과 함께 “대일장기(大日章旗)는 욱광(旭光)을 받으면서 번양하고 있”는 풍경을 지극히 ‘일본적’ 입장에서 표현해내고 있었다. 참고로 이 보도는 난징대학살이 일어났던 시기(12월 13일~15일)에 게재됐다. 난징 대학살과 이 보도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증유의 대학살이 일어났던 시기에 ‘피와 시체, 규환’으로 넘쳐나던 전장을 그 어떠한 문제의식과 인도적 양심 없이 보도했다는 것에서 분명한 비판점이 있어 보인다.

 

전쟁, 그리고 ‘만들어 낸 영웅’
두 신문의 전쟁부역은 단순히 전황보도에만 그치지 않았다. 1938년 일제가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고 조선인의 병력 동원에 나서자 조선, 동아일보는 지원병제도를 선전하는 기획기사, 사설, 사진보도를 연이어 작성했다. 각 지역별 지원병 실적을 경쟁적으로 발굴, 보도했다. 신문 1면의 대부분이 지원병 특집 기사로 구성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들은 조선청년의 ‘지원열’을 선전하기 위해 각종 미담사례를 발굴해 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9년 ‘이인석 상등병 영웅화 보도’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 제1기생으로 동원된 이인석은 1939년 6월 중국 산서전선에서 전사했다. 조선인 지원병으로는 최초의 전사자였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이인석의 전사소식이 전해진 즉시 “영예의 전사”라는 수식어를 달며 미화했다. 이에 질세라 동아일보는 바로 이튿날 이인석의 가정방문 기사를 실었다.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겨있을, 부인의 소감을 어떻게라도 싣겠다며 고인의 자택을 찾아가는 ‘위문’을 감행한 것이다.
나아가 두 신문은 이인석 상등병의 고별식, 위령제 등이 행해지는 현장을 찾아가 이인석 상등병의 유가족들을 상대로 ‘셔터’를 눌렀다. 유가족들의 “애수”와 전사의 명예로움을 더해주는 기사를 쓰기 위함이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1939년 10월 석간 2면 기사 “색연필”을 통해 이인석 상등병의 죽음이 “조선 사람에게 몇 갑절의 열매를 맺게 할” “고마운 주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두 신문이 동원된 조선청년에 대한 추모보다는 일제를 위한 전사자의 현창(顯彰)에 초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39년 7월 9일 조간 2면. 동아일보 대전지국이 故 이인석 상등병의 가정을 방문, 미망인을 만난 내용을 담은 기사

 

조선일보 1939년 10월 1일 석간 2면. 위령제 관련 기사에서 보도된 이인석 상등병의 양친과 부인(가운데)

 

두 신문의 이인석 영웅화 보도는 조선, 동아 폐간 직전인 1940년까지 이어졌다. 지원병 제도의 성과를 올리고 지원을 부추기는데 이인석 상등병의 전사를 인용한 것은 물론, 이인석 상등병을 소재로 한 음악극(나니와부시)까지 만들어진 당시 상황에 편승해 적극적인 홍보기사까지 신문에 싣기도 했다.

 

100년 세월에도 부재한 ‘반성’
일제의 침략전쟁에 부역했던 이 시기들은 조선, 동아일보 입장에서도 분명 지우고 싶은 과거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올해 100주년을 기념한 사설에서 중일전쟁 이후 자신들의 과오를 그저 “100년 비바람을 버텨온 나무에 남은 크고 작은 상흔”이라며 뜬구름 잡는 논평을 남겼다. 또 “일제강압과 신문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이 오점으로 남아 있다”고도 평가했다. 그나마 동아일보가 이번 100주년을 맞이해, 일제 침략시기의 언론부역에 대한 ‘사과’를 표명한 것은 나름의 진전 같아 보인다. 물론 그조차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압박으로 저들의 요구가 반영된 지면이 제작”되었다고 에둘러 변명하였기에 그 진정성이 완전하다고 하긴 어렵다.

일제강압과 신문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이 대체 왜 그 같이 현란한 전쟁부역으로 나타났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같은 논평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일제강점기가 조선일보에 있어 ‘크고 작은 상흔’이었다면 조선일보의 전쟁선전에 상처 입은 민중들의 아픔은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신문을 반성과 성찰의 시험대에 올리는 것이다.

 

▪ 참고문헌
최상원 외, 「1937년 일본군의 중국 난징 점령 관련 한국언론의 보도태도」. <지역과커뮤니케이션> 14, 2010.2
박용규, 「일제의 지배정책에 대한 신문들의 논조 변화」, <한국언론정보학보> 2005.5
장신, 「1930년대 언론의 상업화와 조선동아일보의 선택」, 역사비평, 2005.2
조선일보사, <간추린 조선일보 100년사 – 민족과 함께 한 세기>, 2020
이재승, 「증오적 표현과 역사의 부정」, 국회 토론회 <올바른 기억확립을 위한 법률 제정을 위한 토론회>, 2007.5.16.

화, 2020/06/2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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