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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김구 선생 조선탈출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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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김구 선생 조선탈출비화

익명 (미확인) | 금, 2019/03/29- 16:39

[자료소개]

경향신문사는 해방 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3·1절을 하루 앞둔 1947년 2월 28일자에 3·1운동 특집기사를 내보냈는데 그 중 하나가 김구 선생의 기미년 조선탈출과 관련한 비화다. 당시 43세의 김구 선생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 주변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황해도 안악에서 신의주를 지나 중국 안동현에서 이륭양행의 상선에 승선, 우여곡절 끝에 상해로 탈출하였다. 김구 선생을 취재하여 탈출비화를 소개한 기자가 누군지 기사에 언급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편집부

경향신문 1947년 2월 28일자, <기미년 김구선생 조선탈출비화>

 

비록 어떠한 이유를 내세운다 할지라도 민족의 슬픔을 한 몸에 지니고, 일생동안 조선과 더불어 짓밟히며 지나온 이에 대한 간절한 경애의 정을 차마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기미년 3월 초승 조선 천지가 비통한 민족의 함성으로 뒤덮이었을 때 날카로운 왜정 관헌의 눈을 피하여 조국해방의 크나큰 뜻을 품고 표연히 고국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한 한 사람의 지사가 있었으니 그는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한 김구 선생이었다. 겨레들 사이에 혹시 선생의 이야기를 할 때 선생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의 일은 누구나 흔히 알고 있으되 망명을 하던 때 조선 탈출의 기막힌 고초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때마침 해방 이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기념일을 당하여 선생에게서 직접 들은 바로써 아직 공표되지 않은 한 토막 비화를 감히 세상에 소개한다.

탈출 기회 규시(窺視)

기미년 2월 하순 아직도 남은 추위가 봄바람에 섞여 옷깃으로 스며드는 때에 황해도 신천군 동산리 들판에는 17년 언도를 받은 감옥으로부터 가출옥한 당년 43세의 김구 선생이 수많은 농군들과 섞여 괭이를 들고 논보를 닦으며 온종일 농군들의 일을 지휘하는데 원체 일에만 정성을 바치는 듯한 선생의 태도에 저윽히 안심을 한 모양으로 감시를 하던 경관은 저녁때가 되자 일즉이 읍내로 들어가버렸다.
선생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 자당(慈堂)과 부인과 영식(令息)까지 전부 네 식구가 해주로부터 안악읍으로 이사하여 1년 동안 휴양하다가 농촌운동을 표방하고 동산리에서 다시 농군들과 1년 동안을 지냈으나 사실은 어느 때나 우리를 벗어나려는 범처럼 민족해방의 웅지를 품고 멀리 해외로 탈출하기만을 은근히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시망을 뚫고

그러나 위험인물로 생각하여 한때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삼간초옥(三間草屋)선생의 거처에는 날마다 한 사람의 무장경관이 출장하여 밤낮으로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으며 아무리 기회를 노려도 좀처럼 좋은 기회가 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감시하던 경관이 읍으로 사라지자 처음으로 불의(不意)에 찾아온 이 기회를 타서 선생은 농군들에게 읍내에 잠깐 다녀올 터이니 그동안 일을 하여 놓으라 이르고 마치 참말로 잠깐 나들이라도 가듯이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발에는 짚신을 신은 채 가족의 목 빼인 전송도 받는 둥 마는 둥 총총히 집을 나섰으니 이 길이 바로 30년 동안 고국을 등진 장구한 나그네의 길이었다.

열차 내의 요행

논틀밭틀로 사람을 피하며 밤이 된 후에 사리원읍으로 들어간 선생은 그 고장에 사는 의사 김우범(金禹範) 씨의 호의를 입어 내실에서 조심조심 하룻밤을 지샌 후 밝는 날 새벽차로 신의주로 향하였다.
선생의 품에는 숨은 유지들의 온정으로 얽힌 노자 500원을 수건에 싸서 지니었을 뿐이다. 선생은 3등 차간 한 구석에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데 때마침 3월 초승이라 차가 서는 곳마다 천지를 뒤흔드는 만세소리와 사포끈(?)을 턱에 건 일인 관헌들이 눈이 벌개서 날뛰는 꼴이 차창 밖으로 내다보인다. 차에서 하룻밤을 무사히 지나고 이튿날 아침 신의주역에 내려 만세사건으로 승객들을 이잡듯이 수색하는 경관에게 수건에 싼 돈 500원을 내어놓고 “의주로 재목을 사러왔다”고 감쪽같이 속여 넘긴 후에 아슬아슬하게 경계망을 돌파하여 성내로 들어가니 의주에서는 이미 만세운동을 한바탕 치르고 난 끝이라 주막에서 밥을 사먹으며 듣노라니 간밤에 주모자 22명이 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목적지 상해로

요기를 한 후 선생은 곧 중국사람 인력거를 빌려 타고 안동현으로 건너가서 이곳에서는 당시에 이륭양행(怡隆洋行)을 경영하던 영국 아일랜드 사람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 1880~1943)라는 이의 호의를 입어 그의 집에서 일주일을 묻다가 상해로 가는 그의 상선을 타고 일행 15명이 안동현
을 떠났다. 원래 조지라는 사람은 조선사람에 대하여 뜨거운 동정을 품고 있어서 하나씩 둘씩 왜국 관헌의 눈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오는 조선의 지사들을 무조건 하고 집에 들여 보호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와준 조지 루이스 쇼

 

그때 김구 선생과 함께 상선을 타고 상해로 간 사람들은 선생까지 전부 15명이었으나 지금은 선생의 기억에서 사라진 이가 태반으로 생각나는 사람만 적으면 다음과 같다. 선우혁(鮮于爀) 송병조(宋秉祚) 장덕로(張德櫓) 이원익(李元益) 김병조(金秉祚) 조상섭(趙尙燮)…이 15명 조선의 지사들이 이륭양행 창고로부터 비밀리에 상선에 오를 때 주인 조지 씨는 일일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선장에게는 “이 15명은 조선의 독립투사들이니 각별히 조심하라”고 재삼 부탁하였다.
상선을 타고 고향을 떠난 지 보름 만에 상해 프랑스 조계에 상륙하니 검붉은 황포강 너머로 멀리 고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김구 선생의 눈에는 한순간 감격의 눈물이 어리었다.
그 후로 조지 씨에게는 임시정부로터 감사하는 특별 훈장을 수여하였다.(1963년 한국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편집자)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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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베 총리, 문재인 대통령에게 “어리석은 인간”, “하찮다”고 표현해
(선데이저널=채수영 기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가리켜 “어리석은 인간(노로마,???)”, “하찮다(쯔마라나이, ?????)”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유럽(프랑스)의 유명풍자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는 일본 소식통의 주장을 인용하여 아베 총리가 최근 진행된 ‘일본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극렬히 비난했다고 전했다.

‘일본회의’는 일본 우익 최대로비단체로 1997년 우파단체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통합, 결성한 조직이다.

현재 아베 총리를 비롯한 대다수 각료가 일본회의 멤버로 있으며 ‘기본운동방침’은 황실 존숭(천왕제 부활, 국민주권 부정), 헌법 개정, 국방의 충실(재무장), 애국 교육 추진, 전통적 가족 부활이다.

아베 총리는 이 회의에서 북한의 미사일이 일본 본토 상공을 가로지른 것을 두고 북핵문제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무능을 지적했다.

최근 8월 29일과 9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북한의 미사일이 일본 홋카이도 상공을 넘어가면서 일본은 경보시스템을 발동하고 홋카이도 지방 대피훈련을 벌린바 있다.

아베 총리는 북한의 미사일이 일본을 혼란에 빠트린 것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돌렸다.

문재인 대통령을 ‘무능’하다고 표현하면서 한국이 현재 북한 핵, 미사일문제에 대한 뽀족한 수가 없는 현실에 대해 지적했다고 한다.

또한 아베 총리는 ‘일본회의’에서 한일위안부합의 역시 재논의할 뜻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하찮다(쯔마라나이)’고 평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위안부합의 수정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강력히 피력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 8월 17일에도 위안부 합의 변경과 관련해 “골대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면서 “지금까지 합의한 것이 전부다”라고 위안부 합의 변경에 대해 선을 그은 바 있다.

아베 총리는 현재 일본대사관 뒤 소녀상을 옮길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한국정부는 이 요구를 받아들일 뜻이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아베 총리는 2013년 11월 한국을 두고 “어리석은 국가”라는 망언을 쏟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하찮다”라고 표현한 것 역시 과거 입장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2017-09-20)

 

 

 


일, 2017/10/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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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님께 요청 드릴 사항 2가지가 있어서 게시판에 글 남깁니다.

1. 박정희가 일제때 활동했던 사진과 기록(어느 문헌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지) 그리고 해방 후 빨치산

행적에 대한 사본을(원본 명시)  우편으로  보내주실 수 있는지요?

요청 드리는 이유는 제 70 노모가 박정희(박근혜) 숭배자(일명 박사모)라 언터넷에 떠도는 사진과 기록,

뉴스 매체가 조작이라면서 신뢰하질 않습니다.

그러면서 가짜 뉴스, 개소리의 진원지인 유튜브 관련 박사모 관련 사이트는 왜 이리 신뢰하는지 참…

박정희의 친일 행적이 담긴 사진과 기록 내용, 해방 후  빨치산 행적을 공식 문서로 해 확인시켜주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제 메일로 받는 방법도 확인해 볼 수 있으나 정확한 기록에 의한 것이 더 확실한 팩트로 전달할 수 있기에

부탁 드립니다.  보내주실 주소는 제 개인 정보란의 집 주소(인천)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사 비용 및 우편요금이 발생한다면 납부하도록 하겠습니다. )

2. 핸드폰 기기 변경으로 친일인명사전을 재 다운로드 하려는데 방법을 알려주세요.

기존 핸드폰 기기(아이폰6s plus)에서 10,000으로 구매했는데 기기 변경(LG G6)하고 다시 받으려고 하니

다시 10,000을 납부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이라서… ㅠㅠ

아니면, 다운로드 받은 사람의 기기 정보와 인적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연결하여 기기 변동이나 전화번호

변경시에도 다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수정 보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월, 2017/10/09-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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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팟캐스트 ‘역적(역사적폐 청산)’- 에필로그

수, 2017/10/11-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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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1

금, 2017/10/13-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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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1

월, 2017/10/1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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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수리온부터 사드까지 누구를 위한 안보인가 =군의 적폐청산과 개혁방향

진행: 김미화 
출연: 김종대 정의당 국회의원,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하어영 한겨레21 기자

본 프로그램은 포럼 진실과 정의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의 모임 ·한겨레21 ·한겨레TV와 함께 합니다. 

프로듀서: 이경주ㅣ종합편집: 문석진ㅣ타이틀: 이정온ㅣ카메라: 정동화 이규호 김도성 조성욱ㅣ메이크업 : 강도겸ㅣ기술: 박성영 ㅣ연출: 이규호
제작: 한겨레TV

※ 한겨레TV <2017.10.17>

☞기사원문: 김미화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적폐청산 3화 (안보)

※ 관련영상

☞한겨레TV: 김미화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적폐청산 2화 (경찰)<2017.10.10>

☞한겨레TV: 김미화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적폐청산 1화 (검찰과 국정원) <2017.9.26>

화, 2017/10/1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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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content/uploads/2017/10/201710.pdf

목, 2017/10/1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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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

목, 2017/10/1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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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현 연구위원

지난 9월 21일 대법원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로써 올해 5월 12일에 나온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민족사랑 5월호 참조)이 확정되어 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를 둘러싼 친일논쟁은 사법적인 차원에서 일단락되었다.
방응모의 친일행적은 해방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1948.9.22. 공포, 법률 제3호)에 따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다루지지 못하다가 50여 년이 흐른 뒤인 2004년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민규명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에 의해 2009년 6월 29일 방응모의 행위들이 친일반민족행위인 것으로 결정되었다. 구체적으로 반민규명위는 그동안 밝혀진 그의 행위들이 반민규명법 제2조의 13, 14, 17호에 해당된다고 했다.


13.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
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이 정하는 규모 이
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17.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
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방응모는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랐다. 이 사전의 발간에 대해 조선일보가 11월 9일 오피니언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갉아먹는” 것이라고 하는 가운데 2010년 1월 방응모의 양자인 방우영, 방우영이 죽자 그의 아들 방상훈이 원고로 또한 이들의 회사인 조선일보사가 원고 보조 참가인으로 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냈다. 서울행정법원의 1심판결에 비춰보면 조선일보사의 일제시기 행위가 어느 국가기관에 의해서도 문제되지 않았는데도 조선일보사가 원고측에 선 이유를 약간 짐작할 수 있다. 판결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2005.12.29. 제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선정할 때 반민규명위
의 결정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고 이에 따라 “재산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사주의 행적과 재산상속, 언론사라는 상속된 회사의 성격과 활동, 뉴라이트, 건국절, 국정교과서 파동, 이른바 ‘역사전쟁’, ‘역사적폐’ 등 많은 것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반민규명위는 2005년 5월 31일 발족하여 2009년 11월 30일 활동을 종료하였기 때문에 위원회의 결정과 관련된 헌법소원이나 행정소송의 수행 등은 행정자치부 산하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맡게 되어 방응모결정 취소소송의 피고 역할을 하였다. 방응모의 상속자들과 조선일보사의 소송은 그 후 2010년 12년 22일 서울행정법원의 1심 판결,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 2016년 11월 9일 대법원의 상고심 판결, 다시 2017년 5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과 이번의 대
법원 판결까지 6년여의 재판과정을 거쳐 5개의 판결문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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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관이 내무대신에게 전투기 제작 군수회사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주식인수에 관한 승인을 요청하면서 이 회사 유일의 조선인 감사인 방응모를 ‘경성유력자’로 표시하였다.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주식인수의 건을 승인함」(일본내무대신, 1944.10.6.) 출처: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반민규명법 제2조가 열거하는 친일행위결정과 관련하여 결국 13호에 관한 위원회의 결정만이 적법한 것으로 판결되었다. 17호 관련은 2012년의 단계에서 절차적인 이유로 위법하게 되었고, 14호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투어졌지만 역시 위법한 것으로 이번 판결로 확정되었다. 법원이 인정한 구체적인 방응모의 친일행위는 잡지 ????조광????의 발행, 여기에 논설 투고한 것, 임전대책협력회와 조선임전보국단의 간부로서의 활동에 국한되었다. 조선항공공업의 주주와 감사로 활동한 것(14호 해당)이나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직과 선전부 위원이었던 사실(17호 해당)은 반민규명법의 문구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형식적 논리로 친일이 아니라고 한 셈이다. 결국 위원회와 달리 법원이 볼 때는 방응모의 과거 행적은 일부만이 친일에 해당하는 것으로 범위가 대폭 축소되게 되었다. 어렵게 친일반민족행위규명에 관한 입법이 이루어지고 국가기구인 반민규명위가 활동했지만 사법부에 의하여 그 의미와 효과는 반감된 것이다. 이번 대법원의 기각 판결에서는 ‘심리불속행’이라고 하여 상고심 자체를 열어주지 않았다. 아쉬움을 떠
나서 친일반민족행위 규명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일부 대법관들과 판사들이 배반하고 방응모에게 부분적으로 면죄부를 발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 분노의 마음까지 든다.
이제 이해승의 친일재산에 대한 사건을 제외하고 방응모 재판이 종료됨에 따라 반민규명위와 관련된 소송들도 끝나고 친일반민족행위 문제에 대한 성찰과 실천은 다시 시민사회로 넘겨지게 되었다. 친일문제에 대한 입법, 위원회의 활동, 사법 판결에 이르는 국가의 관여가 한 바퀴 돈 지금, 시민사회측에서 식민지배와 부역협력자들이 남긴 역사적 과제들을 다시금 점검해볼 때이다.

목, 2017/10/1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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