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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민주화가 되어야 생각의 민주화가 되고, 생활 속에서 민주화를 실천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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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민주화가 되어야 생각의 민주화가 되고, 생활 속에서 민주화를 실천할 수 있어

익명 (미확인) | 금, 2019/03/29- 15:53

[회원인터뷰]

말의 민주화가 되어야 생각의 민주화가 되고, 생활 속에서 민주화를 실천할 수 있어
어린이문화 발전과 우리헌법읽기운동에 힘쓰고 있는 이주영 어린이문화연대 대표

인터뷰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문 :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답 : 제가 위하고 간, 두 군데에 암이 발병해서 2011년 명예퇴직을 했어요. 치료를 3년 정도 했죠. 처음에는 수술을 못할 정도였어요. 특히 간이 안 좋았는데 암세포가 여러 군데 분포해 있었어요. 다행히 표적 치료제가 있어서 그걸 먹었더니 암세포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저한테 딱 맞는 약이었던 거예요. 이렇게 잘 맞는 경우는 3~4% 정도라고 하더군요. 의사도 처음 봤다고 했어요. 그래서 수술하고 완치되었습니다. 다시 살아난 거죠.

문 : 지금은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답 : 어린이 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어린이 관련 교육, 문화, 예술 단체들이 모여서 서로 정보를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어린이문화연대라는 모임입니다. 퇴직 후 약 10년째 대표를 맡고 있어요. 또 3년 전부터는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이라는 모임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온국민이 헌법을 읽고 헌법대로 운영하는 나라를 만들자는 운동입니다. <손바닥 헌법책>을 만들어서 한 권에 5500원씩 후원금을 받아서 배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뜻대로 1919년 3·1혁명을 대한민국 독립선언기념일로 하자는 뜻을 알리기 위해 3년 째 대한민국 생일잔치를 하고, <독립선언서 말꽃 모음>과 <대한민국 생일은 언제일까요?> 라는 책도 냈습니다.

문 : 어린이문학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요?
답 : 제가 처음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은 1977년 당시 교육현실이 너무나 열악했어요. 그때 책을 통해 이오덕 선생님을 알게 되었지요. 선생님은 당시 시골 초등학교 교장이셨는데, 어린이문학 평론과 교육 현장에 대한 수필을 쓰셨어요.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를 보고 감동을 받아서 선생님을 찾아갔고, 이오덕 선생님이 쓰신 어린이문학 평론을 읽으면서 어린이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문 : 이오덕 선생님한테서 어떤 가르침을 받으셨나요?
답 : 선생님이 쓴 책 중에 <시정신과 유희정신>이란 책이 있는데요. 그 책에 우리나라 어린이문학가들이 갖고 있는 열등의식과 극복 문제에 대해 쓰신 글이 있어요. 문학은 우리 겨레 아이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가장 중요한 예술인데 그 창작자인 어린이문학가들이 이중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셨어요. 하나는 서구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이고 또 하나는 성인문학에 대한 열등의식이라는 겁니다. 이런 열등의식을 극복하지 못한 작가들이 쓴 작품은 어린이들한테 해를 끼치기 때문에 이런 이중 열등의식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셨지요. 1970년대 상황이 실제로 그랬어요. 이오덕 선생님은 1920년대 어린이문학운동에 앞장섰던 방정환, 현덕, 마해송 같은 분들이 갖고 있던 문학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하셨지요. 또 당시 아동문학가들이 모작이나 표절에서 벗어나 가장 우수한 예술성을 갖춘 아동문학을 창조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 점에서 권정생 작가를 높게 보셨죠. 그런 문학이 나와야 어린이 교육이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어요.

이오덕선생님

문 : 이오덕 선생님이 우리 어린이문학에 끼친 영향은?
답 : 1970년대만 해도 동화는 아이들만 본다. 유치한 동화, 유치한 동시, 유치한 연극, 유치한 영화. 그걸 창작하는 유치하고 질 낮은 사람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었어요. 그러나 1990년대를 지나면서 그런 잘못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동화, 동시, 동요, 동극은 유치한 예술이 아니라 가장 소중하고 귀하고 높은 예술이고 그런 예술을 창작하는 어린이문학인 또한 그렇게 보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어린이문학이 소중하게 대접받게 되었어요. 이오덕 선생님이 끼친 영향이 크지요.

문 : 어린이문학이 왜 천대 받았나요?
답 : 1960년대 이후 군사정권은 어린이청소년을 많이 탄압했어요.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에 어린이 청소년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 걸 잘 아니까요. 당시 김산호 화백이 그린 <라이파이>란 연작 만화책이 인기를 끌었는데, 그게 이승만과 같은 독재정치에서 생겨나는 악을 물리치고 정의가 승리하는 내용이었거든요.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동화들이 인기를 끌었고요. 그래서 박정희 독재정부에서는 초중등 학생들이 사회와 정치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했고, 만화를 마약, 폭력, 부패와 함께 4대 악 가운데 하나로 몰아가면서 탄압했어요. 어린이문학 단체도 없애고 동화나 동시도 반공문학으로 쓰게 했죠. 유신 이후에는 학생자치회도 다 없애고 학도호국단으로 만들어서 민주주의 싹을 잘라버렸지요. 이오덕 선생님은 이런 문학과 교육 현실에 대해 비판하면서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문 : 어린이문학이 민주주의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답 : 열등의식을 심어주는 어린이문학은 반인간적이고 반민주적인 인간으로 자라게 하지요. 이오덕 선생님은 우리 겨레 역사와 현실을 참되게 담아내는 문학, 통일과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동화와 동시를 써서 읽혀야 우리 민족과 민주주의가 살아난다고 하셨어요. 어린이문학을 아름답고 쉬운 우리말로 써야 민주화가 된다고 했어요. 이걸 말의 민주화라고 하는데요. 말의 민주화가 되어야 생각의 민주화가 되고, 생활 속에서 민주화를 실천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말이 민주화가 되지 않고는 정치나 경제도 민주화가 될 수 없다고 하셨지요. 어린이문학이 그것을 담아내서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는 가장 소중한 그릇이 되는 겁니다. 이런 민주, 민족, 인간화 문학에 대한 생각을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했어요. 그걸 한 마디로 참교육이라고 했어요. 1980년대 우리교육현장을 크게 일으켜 준 참교육이라는 말도 이오덕 선생님이 만드신 거지요. 이런 생각이 젊은 교사와 권정생을 비롯한 어린이문학가들에게 충격과 영향을 주었습니다.

문 :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영향은 어땠나요?
답 : 이오덕 선생님은 일제 때 방정환 선생님 활동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어요. 방정환 선생님은 민족적 열등의식을 벗어던지고 민족의 역사와 삶을 가꾸는 책을 쓰셨다는 거예요. <사랑의 선물> <77단의 비밀> <만년 셔츠> 같은 작품이지요. 〈어린이〉라는 잡지도 내셨지요. 이오덕 선생님이 〈어린이〉 영인본을 500부 한정본으로 찍으려고 선주문을 받는다며 권유했어요. 당시 제 월급이 7만원 정도였는데 10만원을 내고 그걸 사서 봤어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 어려운 항일 투쟁기에 아이들을 위해 다달이 그렇게 좋은 잡지를 냈다는 것에 놀랐지요. 그 잡지가 남북한 전역은 물론 일본과 흑룡강과 상해까지 나갔다고 해요. 한때 10만부가 나갈 만큼 인기가 있는 잡지였다고 해요.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을 비롯해 당시 수많은 아이들이 그런 잡지를 보면서 자란 거지요. 어린이문학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1980년에 동화 읽는 어른 모임인 어린이도서연구회를 서울양서협동조합 산하단체로 만들게 된 겁니다. 어린이도서 연구회는 1980년 이후 현재까지 우리 어린이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어린이문화연대도 어린이도서연구회를 기반으로 만든 모임이고요. 방정환 선생님은 우리 겨레 어린이운동과 어린이문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주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그 영향은 점점 더 커질 것 같습니다. 올해 3월부터 5월까지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방정환 전시회’를 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문 : 어린이날의 내력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답 : 방정환 선생님이 계시던 천도교에서 1922년 3월 1일 제1회 어린이날 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방정환 선생님은 다음해 조선소년운동협회를 만들고 그 단체 주최로 1923년 5월 1일에 제1회 어린이날 행사를 다시 합니다. 어린이운동을 천도교에서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그때 어린이들이 종로를 행진하면서 뿌린 전단이 ‘어린이해방선언’이에요. 어린이를 윤리적 억압과 경제적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유인물입니다. 그걸 20만 장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어요. 당시까지 세계 어린이운동사에서 이런 표현을 쓴 선언문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이들이 억압에서 해방되어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선언문이 나온 거예요. 세계 최초가 아닌가 생각해요. 나중에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바꿉니다.

문 : 학교현장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가 어떤 것들인가요?
답 : 성내운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게 있는데요. 우리가 교육을 정말 잘했던 때가 해방되고부터  6·25 때라는 거예요. 그때는 교육현장에 정부 간섭이 거의 없었다는 거죠. 당시 교육계에 뜻을 가진 교사가 많이 들어와서 아이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고 해요. 그런데 1957년에 장학사 제도가 생기면서 교육이 망가지기 시작했고, 학교현장에 일제 식민지교육 방식이 살아났다는 겁니다. 일제 때 사범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교장이나 장학사를 비롯한 교육행정가가 되면서부터요. 그러면서 학교와 교실에 일제 때 용어가 다시 등장하고, 교무실 칠판에 한자를 쓰고, 아이들을 번호로 부르고, 군대식 애국조회를 실시하고, 황국신민서사를 본뜬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하고…. 그렇게 교육 전반이 일제 때 방식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해방 후 급격히 확산되던 민주교육은 껍데기 구호가 되었지요. 학교에서 어떤 부분이 아니라 전체 교육 방식이 일제 식민지교육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던 거죠. 그걸 깨자는 게 참교육 운동이었던 겁니다.

문 : 손바닥 헌법책을 만들어 보급하신다고요?
답 : 네, 제가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말로 살려놓은 민주주의>(1997. 지식산업사)와 <우리말로 살려놓은 헌법>(2012. 고인돌) 복간했습니다. 1990년대 초에 한승헌 변호사 주선으로 이오덕 선생님이 대법원에 가서 법관들을 대상으로 법률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는 강의를 몇 차례 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헌법을 봤더니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헌법은 나라를 운영하는 바탕인데, 그런 헌법을 한문으로 써 놓았으니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읽을 수가 없지요. 

 


이건 헌법을 국민이 읽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라고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헌법을 일단 한글로바꾸고, 한글로 바꾸고 보니 뜻을 알기 힘든 한자말이 많아서 그걸 쉬운 우리말로 바꾼 헌법이에요. 복간 했는데 잘 안 나가요. 국민들이 헌법을 읽어야 하는 필요를 모르는 거지요. 그래서 2016년 3월 1일부터 <손바닥 헌법책>을 만들어서 모든 국민이 한 권씩 갖고, 손바닥 보듯이 헌법을 읽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죠. 2016년 3월 1일에 1만부를 만들었는데 1주일 만에 다 나갔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26만부가 나가고 있어요. 이 헌법책을 본 사람들에게 ‘헌법책이 이렇게 작아?’, ‘1시간 만에 읽을 수 있네?’ 라고 말하게 됩니다. 초등학생도 참여할 수 있도록 1권에 500원에 보급하고 있어요. 헌법에 대한 관심과 접근성을 아주 쉽게 만든 거지요. 더 많은 사람들이 헌법을 읽고 알았으면 좋겠어요. 100년 전 선조들이 왜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대한민국 독립을 선언했고, 임시정부를 만들어 27년 동안 독립전쟁을 치루고, 대한민국 30년이 되는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으로 대한민국을 재건한 것인지, 어떤 민주공화국을 꿈꾸었는지를.

이주영 회원은 1977년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암울한 교육현장에 문제의식을 느끼던 차에 이오덕선생의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이오덕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는다. 이후 이오덕 선생과 함께 한국글쓰기 교육연구회와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등을 만들어 글쓰기·독서 교육의 기틀을 다지는 활동을 벌였다. 2003년 이오덕 선생 의 타계 후 선생의 문학과 교육사상을 연구하여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1년 이오덕 선생의 삶과 교육, 어린이문학을 정리한 <이오덕,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를 출간하는 등 이오덕 선생의 ‘참교육’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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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11/1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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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35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문화재수난사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으로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이란 석조유물이 있다. 불교미술의 꽃이라는 일컫는 이 사리탑은 일본인 골동상에 의해 일찍이 1911년 여름 강원도 원주에 있는 절터를 벗어나 서울 명동과 일본 오사카 등지를 떠도는 통에 남다른 풍상을 겪었고, 1912년 12월경에 간신히 국내로 재반입된 이후 다시 총독부박물관의 야외전시유물로 전락한 이래 거의 한 세기가 넘도록 경복궁 안에 오갈 데 없이 갇혀 있어야 했던 비운의 문화재이다.
특히 한국전쟁 때는 포탄을 맞아 탑신이 크게 파손되는 악운이 겹치는 바람에 만신창이가 되었다가 콘크리트로 겨우 외형이 복구되었고, 2016년 4월에 와서야 전면적인 해체 수리 복원을 위해 대전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간 상태에 있다. 그런데 이 사리탑이 애당초 원래의 절터에서 무단 반출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된 내력이나마 자세히 알려지게 된 것은 흥미롭게도 후지무라 도쿠이치(藤村德一)라는 일본인이 『거류민지석물어(居留民之昔物語) 제1편』(1927)라는 책에 남겨놓은 「현묘탑강탈시말(玄妙塔强奪始末)」이라는 글 덕분이다.
그는 통감부 시절에 ‘퇴한명령(退韓命令)’을 받은 전력이 있고, 그 바람에 자기들 나름으로 반체제 인사로 간주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선지 그의 책에는 「관헌의 횡포와 관리의 비상식」이란 소제목이 말해주듯이 자기네 위정자(爲政者)들에 대한 반감이 노골적으로 반영된 내용이 곳곳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하세가와 원수(長谷川 元帥)와 아방궁(阿房宮)」이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정리된 글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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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총독과 용산총독관저의 전경이 배경도안으로 묘사된 조선총독부 발행 ‘시정7주년기념엽서’(1917)

 

세간에 용산의 ‘아방궁’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씨가 일찍이 러일전쟁 직후 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 경성에 재임중에 러일전역비(러일전쟁비)의 잉여금 50만 엔을 들여 군사령관 관저로 하고자 건설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하세가와 씨는 물론이고 아직 그 누구도 이곳에 거처를 정한 바가 없는 불가사의한 건축물이다.(중략)
50만이라고 하는 국탕(國帑, 나랏돈)을 낭비하고 그 책임을 전가시키기 위해 궁여지책의 결과로 이를 이궁(離宮)으로 삼으려고 계획하기에 이른 것은, 국민이 단호하게 이를 힐책하지않을 수 없고, 20년 전의 50만 엔은 오늘날 2백만 엔에 필적할 거금으로 이를 낭비하고 그 후 처지가 곤란해져서 부적합한 곳에 이궁을 둬야 할 필요는 추호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가 이 대건축물을 일컬어 늘 불충관(不忠館)이라고 하는 까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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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병합기념사진첩』(1910)에 수록된 ‘데라우치통감 신임피로회장 약도’의 모습이다. 용산정거장 건너편으로 한국주차군사령부와 등진 자리에 포진한 통감관저의 위치 관계와 삼각도(三角道, 삼각지) 쪽에서 연결되는 행로가 잘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서 아방궁이라고 일컫는 곳은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이다. 흔히 총독관저라고 하면 남산 왜성대 인근에 자리한 옛 통감관저를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과는 별개의 관저가 또 하나 존재했다는 얘기이다. 그 위치는 지금의 용산미군기지 안에 포함된 곳으로 서울 용산역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중간쯤이었으며, 일제 때의 지번(地番)으로는 ‘한강통 11-43번지’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다.

 

일제강점기 총독관저의 소재지 변동에 관한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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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무라의 글에서 나타나듯이 용산총독관저는 원래 한국주차군사령관 관저의 용도로 세운 건축물(1907년 6월 기공, 1910년 4월 준공)이었다. 하지만 너무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립된 탓에 건물이 완공되기 이전에 이미 ‘통감관저’로 용도변경이 추진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총독부가 별도의 건물을 지어 이것과 맞교환하는 형태로 인수인계가 이뤄졌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정작 이곳이 총독관저로 바뀐 이후에는 아무도 이곳을 집무공간으로 삼았던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1932년 8월에 우가키(宇垣) 총독이 자기 가족과 함께 여가를 즐기기 위해 20여 일 남짓 이곳에 기거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참의 세월이 흐르도록 그 누구도 이곳을 거처로 정한 일조차 없었다. 무엇보다도 유지관리비용이 지나치게 컸고, 서울 시내와 동떨어진 곳에 자리하다 보니 업무상 불편이 크다는 것이 그 이유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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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지리풍속대계 제16권』(1930)에 수록된 용산총독관저 일대의 전경사진. 왼쪽 위에 지붕이 드러난 건물은 조선군사령부(옛 한국주차군사령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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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에 수록된 용산총독관저의 대문 쪽에서 담아낸 전경사진.

 

상황이 이러하니 이곳은 그저 역대 통감이나 총독이 주관하는 연회와 접대가 드문드문 벌어지는 공간으로 사용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예를 들어 1910년 7월에 데라우치 통감이 부임했을 당시 축하피로연이 벌어진 장소가 이곳이었으며, 경술국치 이후로는 천장절 축하연이나 만찬회 따위가 곧잘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황제가 몸소 이곳까지 행차했다는 기록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은 간혹 식민지 조선을 찾은 일본 황족이나 서양의 귀빈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평상시에는 거의 비어있는 공간인 까닭에 그때마다 대대적인 건물수리와 조경공사가 벌어지곤 했다
용산총독관저가 이처럼 시설과 규모는 번듯하나 지나치게 화려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덩치가 큰 탓에 이러한 처치곤란의 신세를 타개하기 위해 나온 발상이 바로 이궁(離宮) 건설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감독을 지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와 같은 이는 『양경거류지(兩京去留誌)』(1915)를 통해 이를 조선에 있어서 천황 이궁의 하나로 삼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설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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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11월 13일자에 실린 미나미 총독 주최 제3회 고령자 초대회 관련보도.

 

『매일신보』 1935년 7월 11일자에 수록된 기사에 따르면, 왜성대 총독관저를 병합기념관으로 보존하는 대신에 용산총독관저를 증축 개조하여 새로운 관저로 사용하려는 계획이 수립된 적이 있었으나, 이 역시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자못 흥미로운 것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1936년 이후 1941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80세 이상의 장수노인(長壽老人)을 전국에서 초대하여 이곳 총독관저에서 성대한 경로잔치를 벌였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국민정신 작흥과 경로사상 고취를 명분으로 내세운 이 행사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에 다음과 같은 미나미 총독의 인사말에서 잘 포착되고 있다. 『매일신보』 1938년 11월 13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는 그 내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는 미나미 총독이올시다. 오늘 고령자 제씨가 이 같이 다수히 참석하여 주신 것을 충심으로 기뻐합니다. 무릇 장로를 존경하는 것은 사람의 자연스런 지정이오 또 도덕의 근원인데 특히 동양에서는 경로의 좋은 습관이 깊이 사회에 침윤되어 왔고 조선도 고래로 이 미풍이 성황하였는데 이것을 민중 전반에 궁행실천시키고 싶어서 총독된 이후로 매년 고령자 위안회를 개최하고 지방에도 이를 장려하고 있는 터입니다.(중략)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은 천황폐하의 어능위(御稜威) 아래 용맹과감한 황군장병의 분투와 열렬한 총후국민의 협력에 의해서 여러분도 아다시피 지난번 항일의 제2수도인 한구(漢口)도 함락하고 적은 멀리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사변은 결코 이로써 끝나지 않고 금후 국민은 일층 공고한 각오와 노력이 필요한 터이니 여러분은 장로의 입장에서 젊은 사람들을 편달하여 주어야 합니다.

 

용산총독관저의 연혁을 따라가다 보면, 일제가 패망을 앞둔 시점에서 이곳은 다시 ‘조선총독부지도자연성소(朝鮮總督府指導者鍊成所)’의 용도로 사용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고이소(小磯) 총독이 반도통치의 세 가지 큰 방침의 하나로 내세운 ‘수양연성의 철저적 실천’을 구현하기 위해 1943년 3월 1일부터 용산총독관저를 이용하여 개설한 기관이었다.
황도수련원(皇道修鍊院)의 성격을 띤 이곳에서는 육군중장 출신의 사이토 야헤이타(齋藤彌平太)가 소장을 맡았고, 총독 자신을 포함하여 총독부의 각 국장과 도지사 등을 대상으로 한 연성회가 진행되었다. 또한 총독부 고등관은 물론이고 판검사, 부윤, 군수 등을 집결시킨 수련회도 곧잘 이곳에서 실시된 바 있었다.
『매일신보』 1944년 7월 7일자에 수록된 기사에는 중추원 참의 30명이 참가한 합숙훈련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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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8월 29일자에 실린 총독부지도자연성소 입소식 관련 보도내용.

 

중추원 참의 30명의 합숙연성이 6일 오후 1시부터 용산의 총독부지도자연성소에서 5일간 예정으로 시작되었다. 참의들은 지난 4일부터 총독부에서 열린 중추원 회의에 출석하여 결전하 반도 민중의 전의앙양(戰意昻揚)과 황국근로관 확립에 관한 열성스러운 의견을 개진하였고 또 고이소 총독의 훈시를 듣고 금후 민중의 지도자로서 봉공할 결의를 굳게 한 터인데 연 2일간 계속된 회의로 자못 피로한 터임에도 불구하고 연성에 참가한 것이다. 이날 오후 1시 연성소에 집합한 전원은 처음 신체검사를 받고 연성소 직원으로부터 주의사항 설명을 들은 다음 오후 6시부터는 신배(神拜)로부터 시작하여 열성스러운 연성을 시작하였다.

 

이곳 용산총독관저는 한국전쟁 시기에 반파(半破)된 모습이 드러난 적이 있다는 사실만 드러났을 뿐 아무도 이 건물의 최후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용산 ‘아방궁’ 역시 일제침탈사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의 하나라는 점만큼은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금, 2018/04/2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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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S 피해자입니다
파산이라는 것은 적어도 37 명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자는 해선 안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1년 3개월 많은 이들이 이혼과 그리고 월세방으로 나 앉았고 그리고 37 명의 소중한 생명이 지병악화 또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김성훈이 파산된다면 전 열심히 일하면 살려 하지 않을겁니다
똑같이 한탕 크게 해 먹고 파산 신청 할겁니다
법보다 국민정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조금이라도 빚은 갚아야 하는 것으로
공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아껴 사는 국민들이 억울하지 않더록 해 주십시요 꼭요

화, 2017/12/0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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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IDS홀딩스  1만 2천명의 피해자중 한사람입니다.

 

2016년 9월 2일

IDS 김성훈대표가 긴급구속 되고

그 이후 모집책으로부터 김성훈대표가 100%변제를 해줄것이라며 기다려달라고만 했습니다

본인도 큰돈을 투자했으며

IDS가 잘못되면 자신이 더 큰일난다며 지난 1년이상 민사 형사 소송을 지연시켜왔습니다.

 

물어볼때마다 희망고문 하듯

잘 될꺼라고만 했고

실질적인 변제안이 나올거라며

너무 확신에 차서 말을 했기에

전 믿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후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이제와서는 제가 결정하고 투자한거니 변호사비용이며 법원 인지세와 송달료등을 요구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는 저로써는

다 따를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후 도저히 답답해서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경찰서에 찾아가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김성훈을 비롯하여

모집책 또한 같은 사기공범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이제라도 이 일을 조금이라도 해결하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밤잠을 설쳐가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마음을 다스려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정말 피같이 모은 돈인데

그냥 이대로 사기맞은것으로 끝난다면 미쳐버릴것 같고 절대 절대 포기할수가 없었습니다.

 

피해자들의 돈으로 법무법인 태평양을 선임하여 변호를 받고

구치소 동기인 한재혁과 공모하여 또다른 사기변제안을 만들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한 씨는 김성훈 ‘구치소 동기’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792

 

 

그 대위변제자는 피해자들의 피같은 돈으로

경찰 인사 청탁을 하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경찰 인사 청탁 정황 드러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452

 

사건의 전말이 하나하나씩 들어날때마다 어이가없고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파산이라는 또 다른 커다란 시련이 떡~!하니 나타나  피해자들의 앞을 가로막아

추운겨울 한파가 뼈속을 파고들고 흘린 눈물이 얼어붙는것같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올바른 역사행동을 하는 곳이고

이런 훌륭한 곳의 고문변호사를 맡고 계시는 분이니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수, 2017/12/0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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