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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 3월 5일 서울 시위를 주도한 강기덕과 학생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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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 3월 5일 서울 시위를 주도한 강기덕과 학생지도부

익명 (미확인) | 금, 2019/03/29- 16:31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0]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 3월 5일 서울 시위를 주도한 강기덕과 학생지도부

조한성 선임연구원

학생대표 강기덕과 김원벽, 3월 5일 인력거를 타고 만세 시위를 지휘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19년 1월의 어느 날 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관수동에 있는 중국요리집 대관원에 모였다.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인 박희도가 주선한 모임이었다. 청년회 회원을 모집하는 데 전문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이 자리에는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김형기, 경성전수학교의 윤자영,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주종의 등 전문학교 학생들과 보성법률상업학교 졸업생인 주익, 연희전문학교 출신의 배화여학교 교사 윤화정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날 모임에서 시국에 관한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고 하니 이때야말로 조선이 독립을 할 적기가 아닌가. 평화의 정착을 위해 민족자결주의가 주창되었다고 하니 약소국도 독립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생긴 것이 아닌가. 당장 독립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과 좀 더 사태를 관망해야 한다는 의견이 격렬히 이어졌다.
결론이 나진 않았다. 모임의 본래 목적이 여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희도는 그동안 전문학교 학생들이 서로 소원하여 만나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가자고 덕담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이날의 모임은 모두의 가슴에 묵직한 돌덩어리를 남겼다.
며칠 후 강기덕이 김원벽을 찾아왔다. 김형기도 왔다. 그들은 함께 독립운동을 하자고 했다. 다수의 학생들이 뜻을 모으고 있으니 함께 하자고 했다. 결국 김원벽은 그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제2회, 제3회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2월 20일 승동교회에 각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이 모였다.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 한위건, 경성공업전문학교 김대우와 경성전수학교의 전성득, 윤자영,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김문진, 이용설 등이었다. 전문학교 학생들은 이삼일 전인 2월 17~18일에 각 전문학교별로 학생대표를 선정했다. 동지가 될 수 있을지 신원과 인격을 조사하고, 괜찮다싶으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여 본인이 승낙하면 대표자로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2월 20일 전문학교 학생들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추진하고 있는 독립운동에 최대한 협조하되, 그것으로 운동을 끝내지 말고 학생들이 주도하는 운동을 계속해서 벌여나가기로 결정했다.
“독립운동은 한번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제1회에 선언서를 발표한 사람이 체포되면 제2회, 제3회, 계속하여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전문학교 학생들은 이러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책임자를 1선 간부와 2선 간부로 나누었다. 1선 간부는 학생들이 주도한 제2차 독립운동을 책임지도록 하고, 2선 간부는 그 이후에 있을 3차 독립운동을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천도교와 기독교가 주도하는 제1차 독립운동에는 전문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최소화하는 대신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기로 했다. 학생들은 독립운동을 결의하는 순간부터 독자적인 운동을 꿈꿨다. 종교인들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에 협력하기는 하되, 그 운동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운동을 벌일 생각이었다. 학생들이 주익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따로 준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학생들, 독자적 독립선언서 발표를 포기하다

“학생들이 독자적인 독립선언의 발표를 중지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질문에 김원벽이 대답했다.
“2월 20일경 선언서를 인쇄하려고 했소. 그런데 박희도가 기독교, 천도교 측에서도 독립운동 계획이 있으므로 하나의 운동에 두 가지 선언서가 있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며 자신들의 계획에 합류해달라고 했소.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고, 선언서는 난로에 넣어 소각해 버렸소.”

학생들과의 논의 창구였던 박희도. 후일 변절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독립선언서는 학생들의 독자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내용적으로 완성시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발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천도교와 기독교 인사들이었다. 그 중심에 강기덕과 김원벽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박희도가 있었다.
박희도는 학생들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의 포기를 종용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격렬한 논쟁 끝에 학생 측은 선언서의 발표를 포기하는 대신, 3월 1일 이후의 운동은 학생 측이 맡아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양측의 갈등은 완전히 봉합되지 않았다. 종교인들은 학생들의 선언서 발표를 막긴 했지만, 학생들의 독자적인 운동에 대해 깊은 우려가 있었고, 학생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종교인들에게 불만이 있었다. 양측의 갈등은 결국 사달을 내고 말았다. 2월 28일 밤,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명월관지점(태화관)으로 변경한 것이다.

독립선언 장소가 탑공공원에서 명월관지점으로 변경된 이유

2월 28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변경할 때 이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박희도였다. 학생들이 탑골공원에 모이면 어떤 일을 할지 모르므로 잘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문제제기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민족대표들 사이에 확산되었고, 독립선언 장소는 순식간에 명월관지점으로 변경되고 말았다.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대관원에서 박희도와의 만남을 계기로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후 민족대표는 박희도를 통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독립운동으로 학생들의 행동을 제어하고자 했다. 문제는 그러한 의도가 생각보다 잘 먹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종교계의 독립운동에 거리를 두고 있었고, 끝까지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유지하고 했다. 2월 28일에 있었던 박희도의 발언은 제어되지 않는 학생들의 운동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이었다. 그 불안감이 결국 양측의 불협화음을 야기하고 만 것이다.
3월 1일 오전 10시경, 보안 유지를 위해 하루 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강기덕의 병실 문을 급히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대표 김문진이었다. 그는 울상이 된 얼굴로 독립선언 발표 장소가 변경된 소식을 알렸다. 강기덕은 김문진, 한국태와 함께 명월관 지점으로 달려갔다.

학생과 대중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강기덕은 손병희와 기타 ‘민족대표’들에게 장소를 변경한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서를 발표하면 경찰이 자신들을 현장에서 체포할 것이고, 학생과 군중들이 그것을 보면 폭동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했다. 폭동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장소를 변경했다는 답변이었다.
강기덕은 납득하지 못했다. 학생과 군중에 대한 저들의 뿌리 깊은 불신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강기덕은 말했다.
“민족대표가 파고다공원에 가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폭동의 원인이 됩니다.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서를 발표한다고 학생과 시민을 모아놓고 갑자기 명월관지점에서 한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파고다공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가 가지 않아서 폭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책임지겠소. 선언서는 여기서 발표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소. 우리는 여기서 발표할 테니 당신은 돌아가는 게 좋겠소.

” 강기덕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때 책임진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예심판사의 질문에 강기덕이 대답했다.
“모르겠소. 난 그때 실례되는 태도를 취하고 말았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나의 팔을 잡고 제지했고, 그곳은 무척이나 혼란해져 버렸소.”
참아야 했지만 강기덕은 참지 못했다. 분노가 그의 이성을 모두 잠식한 것 같았다.
강기덕은 만류하는 사람들에 의해 끌려나오다시피 해서 명월관지점을 나왔다. 몇몇 사람이 따라 나와 차분한 말투로 그를 설득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의 귀에 그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바로 그때 강기덕은 이제 막 명월관지점으로 들어가는 이갑성과 눈이 마주쳤다. 이갑성은 박희도와 함께 학생 측과 긴밀히 의견을 나눴던 기독교 인사다. 그런데 이갑성은 무언가 얘기할 듯하다가 아무 말 없이 문 안으로 사라졌다.
“손병희 등이 파고다공원에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심판사의 질문에 강기덕이 답했다.
“마음에 불평이 있었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시작하겠다

2월 28일 밤 ‘민족대표’가 장소를 변경했을 때, 박희도나 이갑성은 학생지도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대상은 김원벽이었을 수도 있고, 강기덕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강기덕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소식이 그에게까지 닿지 못했거나, 닿았더라도 충분히 납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강기덕과 김문진은 탑골공원의 학생과 시민들에게 ‘민족대표’가 오지 않기로 한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날의 만세시위를 책임지기로 한 학생들에게 ‘민족대표’와 상관없이 집회를 진행하라고 했다. 강기덕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불법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자리를 떠났다. 강기덕은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산공원으로 향했다. 인근에 있는 조선총독부와 경무총감부가 신경이 쓰였지만 그곳만큼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은 없었다. 시위 계획대로 된다면 학생과 군중들은 조선총독부가 있는 혼마치 일대로 오게 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민족이 온 힘을 다해 부르는 만세의 함성이 공원 안까지 들려왔다. 학생과 군중들이 대열을 갖추고 행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휑했던 마음이 어느새 다시 뜨거워졌다. 확실해진 것이 하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싸움이라는 점이었다. 학생들만으로 제2의 독립운동을 하기로 했을 때부터 학생들은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인들의 마음엔 이미 봄이었다

3월 5일 남대문역 앞 도로는 오전 9시가 되기 전부터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3월 5일 학생들이 주도하는 제2차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날 시위에 각자가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나왔다. 구호를 적어 넣은 깃발이 대표적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엔 언제나 그러하듯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새로운 생각이 태어나고 새로운 인식이 자라난다.

대한문 앞 광장 만세시위 광경. 위의 사진에서 뒤로 보이는 건물은 당시 경성일보 겸 매일신보 사옥(지금 서울시청 자리). 미국 컬럼비아대 유니언신학교의 버크도서관 소장.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3월 5일 남대문역 일대를 붉게 물들인 붉은 수건도 그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붉은 수건을 머리띠인양 머리에 두르기도 하고, 완장처럼 팔에 감기도 하고, 손에 들고 흔들기도 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붉은 수건은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불덩어리를 내 친구, 내 이웃에게 전하는 도구였다.
9시가 조금 지난 시각, 군중 속에서 2대의 인력거가 나타났다. 인력거에 탄 청년들의 손에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이 들려 있었다. 강기덕과 김원벽이었다. 군중들은 인력거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다. 만세의 함성이 온 시내를 뒤흔들었다.
‘만세’로 조선인은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독립과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싸웠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아무도 억압 받지 않는 세상, 아무도 차별 받지 않는 세상, 아무도 착취 받지 않는 세상이 그것이었다.
강기덕은 시위를 시작한 지 10분 만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원벽은 좀 더 오래 버텼지만 그 역시 많이 길지는 않았다. 시위의 경험이 부족해 지도자를 보호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 것은 금세 배울 수 있으니까. 그리고 누군가 다음 사람이 그들이 떨어뜨리고 간 깃발을 주워 흔들면 될 테니까 말이다.
봄은 아직이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마음엔 이미 봄이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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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

오는 8월 29일은 한일합병조약문이 발표된 경술국치일입니다.

이날, 서울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개관합니다.

그동안 시민들의 성금으로 개관이 추진됐는데, 식민지 시대 민중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개관에 앞서서 이지수 기자가 미리 다녀왔습니다.

◀ 리포트 ▶

빛바랜 종이에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이 한 자 한 자 적혀 있습니다.

“부모님께오서 양 내외가 걱정없이 사시고 아들도 잘 지내며…”

강제징용 피해자인 김외준 씨가 전쟁터에서 부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입니다.

편지 옆에는 전쟁터에 끌려가 시베리아에 억류됐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규철 씨의 수기가 전시돼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전쟁터로 가야만 하나. 일본을 위해서 죽고싶지 않다…”

벽면 한쪽에는 순사 임명장, 조선총독부 관료 임명장 등 친일파들의 행적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모두 식민지 시기를 겪었던 민중과 후손들이 수십 년 동안 간직했다가 기증한 물건들입니다.

강제징용 피해자나 항일운동가들의 유족들이 활동하면서 모은 자료는 물론, 일본 시민들이 보내온 것도 적지 않습니다.

[이희자/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대표]
“내가 활동을 하면서 나도 나이가 먹어가잖아요. (기록들이) 재탄생을 하게 돼서 나는 정말 30년의 활동이 허무하지 않았고…”

전시된 물건만 4백여 점, 서고에 보관된 기록물까지 합하면 7만 점 가까이 됩니다.

[김승은/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장]
“식민지배의 실상과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가 거기에는 일상적인 민중의 삶도 있고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지난 2007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기 시작해 11년 만에 시민 5천여 명의 기증품과 기금 35억 원이 모여 만들어졌습니다.

박물관은 오는 29일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될 예정입니다.

MBC뉴스 이지수입니다.

<2018-08-14> MBC

☞기사원문: ‘경술국치’ 기록한다..식민지 역사박물관 개관

※관련기사

☞ 경향신문: 일제강점기 역사박물관, 시민 모금으로 ‘첫 개관’

☞ KBS: “치욕도 역사” 시민이 세운 ‘식민지 박물관’ 첫 공개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이끈 이이화 건립위원장 인터뷰 이 위원장
“식민지 시대 아픈 역사 고스란히 알릴 것…청소년 위한 토론장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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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와 인터뷰 하는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촬영 성서호]

 

(파주=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3·1 운동 때 발표한 독립선언서의 원본을 확보했습니다. 일본 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간 이들의 편지나 일기도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어요.”

이이화(82)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은 광복절을 맞아 경기도 파주 자택에서 진행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물관을 소개하며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사 대중화에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 사학자인 이 위원장은 처음 건립위원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고령을 이유로 자리를 고사했지만, 오는 29일 박물관의 정식 개관을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공적 자금의 도움 없이 시민들의 모금과 자료 기증으로 마련된 박물관은 특히, 여러 박물관 중 가장 많은 기증품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이 위원장은 “돈을 주고 사 와도 자료를 못 구하는 마당에 국가 예산도 안 받고 어떻게 꾸릴지 걱정이 컸다”며 “그런데 예상치 못한 호응을 받았고, 여러 곳에서 자료를 희사해 주셨다”고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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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의 칙유 [민족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그는 “전시 자료 7만 점 정도를 모았는데 국내외 통틀어 7개 정도밖에 없다는 3·1 운동 독립선언서 원본도 있다”며 “강제 징용된 일본군에서 몸에 두르던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적힌 띠는 물론,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글 등의 자료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밖에 식민지역사박물관에는 “한국의 통치권을 예전부터 친하고 믿고 의지하고 우러르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한다”는 내용의 순종 칙유(勅諭·임금의 말씀을 적은 포고문)와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포고문 등 국치의 아픔을 담은 사료가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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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민족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나라를 팔고 귀족이 된 조선 고위층들이 1910년 11월 부부동반으로 일본을 관광하던 당시의 흑백사진 등을 담은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이나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을 감시·탄압했던 경찰들의 자료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나라를 빼앗긴 시절 민초들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1940년 육군지원병에 끌려갔다가 전쟁터에서 소식이 끊겼던 임용택 씨의 사진부터 1945년 징집된 뒤 관동군 자폭특수대에서 훈련받은 이규철 씨의 육필일기 등은 당시 민중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런 자료들은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들의 유족이 직접 기증한 것이다.

이 위원장은 식민지역사박물관의 의의를 해방 후 7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디딤돌’이라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만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해방 이후 경제 발전상에만 집중했지, 독립운동의 역사를 소홀히 하고 있다”며 “이번에 개관할 박물관은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똑바로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지향점은 과거를 반성하고, 진실을 밝히고 화해하는 것”이라며 “일본과 친일파들이 반성하도록 하고 이후 화해하자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초대 박물관장 제안을 손사래 치며 거부한 그는 앞으로 박물관이 ‘살아있는’ 곳이 되길 바랐다.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강의도 듣고, 토론도 하는 학습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해방이라고 식민지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닌 만큼 자꾸 말로만 떠드는 것보다는 국민이, 특히 청소년들이 많이 알게 해야 한다”며 “기본 성격은 박물관이지만, 참신한 방법으로 식민지 역사를 알리기 위해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경술국치 108주년을 맞은 이달 29일 문을 연다. 2007년 준비위원회 발족 이후 약 11년 만으로, 공적 자금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일반시민 성금과 자료 기증으로 마련됐다.

[email protected]

<2018-08-14> 연합뉴스

☞기사원문: “시민의 힘으로 세운 식민지역사박물관…살아있는 역사 될 것”

수, 2018/08/15-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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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승빈 기자

검찰이 직권으로 청구해 진행된 1970년대 간첩조작 사건 ‘문인간첩단 사건’ 재심에서 문학평론가 임헌영(필명, 본명 임준열)씨가 무죄를 선고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7단독 홍기찬 부장판사는 21일 임씨의 재심 사건 선고공판을 열고 “과거 임씨의 혐의를 인정하는 취지 자백은 보안사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인정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검찰은 이번 선고와 같은 취지로 임씨에 무죄를 구형한 바 있다.

임씨는 1974년 이호철·김우종·장병희·정을병씨 등과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문인들의 개헌지지 성명에 서명한 이후 간첩조작 사건에 휘말렸다.

임씨 등 피해자들은 당시 영장 없이 12일 동안 구금된 상태에서 잠 안재우기, 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한 끝에 범죄 사실을 허위로 자백했다.

이에 따라 정씨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임씨 등 나머지 4명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3년형을 받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지난 2009년 ‘문인간첩단 사건’이 간첩조작 사건이라고 확인하고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 조치를 권고한 바 있다.

이후 당시 무죄 판결을 받은 정씨 외에 다른 피해자들은 이미 2011년 12월 재심 청구를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임씨도 재심 청구를 준비하던 가운데, 검찰이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했다. 직권재심은 형사판결에 재심사유가 발견된 경우 검찰이 피고인을 대신해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는 제도다.

이는 앞서 지난해 8월 문무일 검찰총장이 과거 반민주적, 인권침해적 수사로 실체가 왜곡됐던 시국사건들에 대해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한 뒤 ‘직권재심 청구 TF를 구성해 재심을 진행하겠다’고 밝힌 데 따른 것이다.

임씨는 이날 무죄 선고 직후 “재심 청구를 하려고 했는데 검찰 공안부에서 먼저 재심을 청구하고 법정에서 검사가 무죄를 구형했다. 세월이 바뀌니 이런 일도 있다”며 기쁘면서도 얼떨떨한 심경을 전했다.

임씨는 과거 그의 보안사에서의 가혹행위 등으로 어쩔 수 없이 했던 허위자백이 그대로 검찰의 기소장과 재판부의 판결문이 됐다며 억울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이번 검찰의 재심청구 및 무죄 선고에 대해 “문인간첩단 사건 이후 44년 동안 간첩으로 불리우며 정상적인 인생을 살지 못했다”며 “늦었지만 지금이나마 박정희 정권의 간첩조작 사건이었음이 밝혀져 대단히 기쁘다. 앞으로 많은 재심을 통해 억울한 사람들이 누명을 벗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8-6-21>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문인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임헌영, 44년 만에 누명 벗어

금, 2018/06/2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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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겐 건국의 공이 있고 박정희에겐 산업화의 공이 있다고 말씀 하신 분이 계십니다

혹자는 이승만은 건국의 공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고요

어느 것이 맞는지 귀 연구소의 답변이 궁금합니다

 

수, 2017/09/20-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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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가 어린이 책을 좌편향이라며 낙인찍은 정황이 보인다. <시사IN>이 입수한 문건을 보면 ‘전태일이 위인으로 소개’돼 있어 ‘도서 선택에 신중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적혀 있다.

박근혜 정부는 집요하게 ‘좌편향’을 문제 삼았다. 기존 검인정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라고 공격하며, “99.9% 전국 고등학교의 절대다수가 편향된 역사 교과서로 가르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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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5월 이병기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오른쪽)과 안종범 경제수석이 청와대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좌편향’ 낙인찍기 집착은 교과서만이 아니었다. <시사IN>은 박근혜 정부가 기존 어린이 교양도서도 좌편향이라며 낙인찍은 문건을 입수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캐비닛 문건’이다. 여기에는 이병기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지시사항에 대한 이행 및 대책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같은 내용이 <시사IN>이 입수한 안종범 업무수첩 51권 곳곳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이하 국정화)를 추진하던 2015년 11월23일, 이병기 실장은 청와대 참모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아래 <그림 1-1> 참조). “당분간 ‘집필진 명단 미공개’의 불가피성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해 불필요한 논란을 차단하고, 명단 보안 관리에도 만전을 기할 것(교문수석).”

이날 교육부는 국정교과서 집필진을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누가 참여하는지 이름을 밝히지 않아 ‘복면 집필진’이라는 비판을 샀다. 정부 입맛대로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과정을 불투명하게 하고, 집필진의 비전문성을 숨기려는 의도라는 지적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 실장은 계속해서 집필진 비공개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바로 다음 이어진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 문건 내용이 눈길을 끈다. “어린이 교양도서의 이념 편향성, 특히 위인전집에 있어 대상 위인 선정의 좌편향성이 매우 심각한데 이러한 도서가 교양도서로 출판되도록 놔둔 교육부/문체부에 문제가 있음. 행정조치에 앞서 이러한 실상을 학부모들이 정확히 알도록 해 도서 선택에 신중하도록 유도할 필요 *전태일, 레닌, 호찌민, 모택동, 체 게바라 등을 위인으로 소개.”

안종범 업무수첩에도 기록된 지시사항

같은 날(2015년 11월23일) 쓰인 안종범 업무수첩에도 관련 내용이 나온다. ‘5. 역사 교양도서(아래 <그림 1-2> 참조)’라고만 쓰인 단어에 위와 같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전태일과 같은 노동자 등을 다룬 도서는 ‘좌편향’이 심하다며 어린이가 읽지 못하게 정부 부처가 민간 출판에도 개입하라는 초법적인 주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불편한 감정도 숨기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당시 서울시교육청은 서울 지역 중·고교 도서관에 <친일인명사전>을 배포할 계획이었다. 이 또한 편향이라고 몰아세웠다.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안)’에는 관련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아래 <그림 2-1> 그림 참조). “친일인명사전이라는 용어가 자꾸 회자되지 않도록 하고, ‘학교가 특정 편향 단체의 출판을 지원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점을 적극 알려나갈 것(교문수석).” 같은 날 작성된 2016년 2월14일 안종범 전 수석은 청와대 티타임 메모를 남겼다. 1번부터 7번까지 기록한 내용의 다섯 번째가 ‘친일인명사전?(아래 <그림 2-2> 참조)’이다. 0608-4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4389명이 이름을 올렸다. 2008년 박지만씨 등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인명사전>에 실으면 안 된다”라며 게재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지만 기각된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친일인명사전> 수록은 학문적 의견 표명에 가깝고 발간 목적이나 동기가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으로 볼 수 있다”라고 판단한 바 있다.

국정화를 ‘이념 전쟁’으로 인식한 박근혜 정부는 비판세력을 제어할 방법을 끊임없이 강구했다. 2015년 9월30일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안)’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교과서 국정화 성공을 위해 국민을 설득하고 비판세력을 제어할 정교한 추진 전략과 디테일한 상황 진전 계획이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함…. ※이러한 대국민 홍보 강화를 위해 KBS, EBS 등 매체를 잘 활용할 필요(위 <그림 3-1> 참조)”.

박근혜 전 대통령 또한 안종범 전 수석에게 국정화 홍보전에 나서라는 주문을 했다.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뜻하는 2015년 9월20일자 VIP 메모에 ‘1. 국정교과서, 부모들 마음 움직여야, 조갑제 대한민국 진실을 지키기 위하여, 김일성 보천보 전투 X, 조선 MBC 한경 매경, 시민단체 부모단체(위 <그림 3-2> 참조)’로 기록되어 있다. 국정화 찬성 여론 조성을 위해 언론과 시민단체 등을 활용하라는 취지다.

이와 같은 지시를 내리고 시행하는 데 관여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해 이병기 전 비서실장, 안종범 전 경제수석, 김상률 전 교육문화수석은 현재 모두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다만 이들은 박근혜 게이트 관련 혐의로 기소되었고, 국정교과서 관련 직권남용 등 혐의는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2018-06-05> 시사인

☞기사원문: 어린이 책에 붙인 좌편향 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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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6/0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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