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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 3월 5일 서울 시위를 주도한 강기덕과 학생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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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 3월 5일 서울 시위를 주도한 강기덕과 학생지도부

익명 (미확인) | 금, 2019/03/29- 16:31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0]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 3월 5일 서울 시위를 주도한 강기덕과 학생지도부

조한성 선임연구원

학생대표 강기덕과 김원벽, 3월 5일 인력거를 타고 만세 시위를 지휘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19년 1월의 어느 날 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관수동에 있는 중국요리집 대관원에 모였다.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인 박희도가 주선한 모임이었다. 청년회 회원을 모집하는 데 전문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이 자리에는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김형기, 경성전수학교의 윤자영,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주종의 등 전문학교 학생들과 보성법률상업학교 졸업생인 주익, 연희전문학교 출신의 배화여학교 교사 윤화정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날 모임에서 시국에 관한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고 하니 이때야말로 조선이 독립을 할 적기가 아닌가. 평화의 정착을 위해 민족자결주의가 주창되었다고 하니 약소국도 독립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생긴 것이 아닌가. 당장 독립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과 좀 더 사태를 관망해야 한다는 의견이 격렬히 이어졌다.
결론이 나진 않았다. 모임의 본래 목적이 여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희도는 그동안 전문학교 학생들이 서로 소원하여 만나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가자고 덕담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이날의 모임은 모두의 가슴에 묵직한 돌덩어리를 남겼다.
며칠 후 강기덕이 김원벽을 찾아왔다. 김형기도 왔다. 그들은 함께 독립운동을 하자고 했다. 다수의 학생들이 뜻을 모으고 있으니 함께 하자고 했다. 결국 김원벽은 그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제2회, 제3회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2월 20일 승동교회에 각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이 모였다.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 한위건, 경성공업전문학교 김대우와 경성전수학교의 전성득, 윤자영,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김문진, 이용설 등이었다. 전문학교 학생들은 이삼일 전인 2월 17~18일에 각 전문학교별로 학생대표를 선정했다. 동지가 될 수 있을지 신원과 인격을 조사하고, 괜찮다싶으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여 본인이 승낙하면 대표자로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2월 20일 전문학교 학생들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추진하고 있는 독립운동에 최대한 협조하되, 그것으로 운동을 끝내지 말고 학생들이 주도하는 운동을 계속해서 벌여나가기로 결정했다.
“독립운동은 한번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제1회에 선언서를 발표한 사람이 체포되면 제2회, 제3회, 계속하여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전문학교 학생들은 이러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책임자를 1선 간부와 2선 간부로 나누었다. 1선 간부는 학생들이 주도한 제2차 독립운동을 책임지도록 하고, 2선 간부는 그 이후에 있을 3차 독립운동을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천도교와 기독교가 주도하는 제1차 독립운동에는 전문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최소화하는 대신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기로 했다. 학생들은 독립운동을 결의하는 순간부터 독자적인 운동을 꿈꿨다. 종교인들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에 협력하기는 하되, 그 운동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운동을 벌일 생각이었다. 학생들이 주익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따로 준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학생들, 독자적 독립선언서 발표를 포기하다

“학생들이 독자적인 독립선언의 발표를 중지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질문에 김원벽이 대답했다.
“2월 20일경 선언서를 인쇄하려고 했소. 그런데 박희도가 기독교, 천도교 측에서도 독립운동 계획이 있으므로 하나의 운동에 두 가지 선언서가 있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며 자신들의 계획에 합류해달라고 했소.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고, 선언서는 난로에 넣어 소각해 버렸소.”

학생들과의 논의 창구였던 박희도. 후일 변절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독립선언서는 학생들의 독자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내용적으로 완성시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발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천도교와 기독교 인사들이었다. 그 중심에 강기덕과 김원벽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박희도가 있었다.
박희도는 학생들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의 포기를 종용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격렬한 논쟁 끝에 학생 측은 선언서의 발표를 포기하는 대신, 3월 1일 이후의 운동은 학생 측이 맡아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양측의 갈등은 완전히 봉합되지 않았다. 종교인들은 학생들의 선언서 발표를 막긴 했지만, 학생들의 독자적인 운동에 대해 깊은 우려가 있었고, 학생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종교인들에게 불만이 있었다. 양측의 갈등은 결국 사달을 내고 말았다. 2월 28일 밤,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명월관지점(태화관)으로 변경한 것이다.

독립선언 장소가 탑공공원에서 명월관지점으로 변경된 이유

2월 28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변경할 때 이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박희도였다. 학생들이 탑골공원에 모이면 어떤 일을 할지 모르므로 잘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문제제기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민족대표들 사이에 확산되었고, 독립선언 장소는 순식간에 명월관지점으로 변경되고 말았다.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대관원에서 박희도와의 만남을 계기로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후 민족대표는 박희도를 통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독립운동으로 학생들의 행동을 제어하고자 했다. 문제는 그러한 의도가 생각보다 잘 먹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종교계의 독립운동에 거리를 두고 있었고, 끝까지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유지하고 했다. 2월 28일에 있었던 박희도의 발언은 제어되지 않는 학생들의 운동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이었다. 그 불안감이 결국 양측의 불협화음을 야기하고 만 것이다.
3월 1일 오전 10시경, 보안 유지를 위해 하루 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강기덕의 병실 문을 급히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대표 김문진이었다. 그는 울상이 된 얼굴로 독립선언 발표 장소가 변경된 소식을 알렸다. 강기덕은 김문진, 한국태와 함께 명월관 지점으로 달려갔다.

학생과 대중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강기덕은 손병희와 기타 ‘민족대표’들에게 장소를 변경한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서를 발표하면 경찰이 자신들을 현장에서 체포할 것이고, 학생과 군중들이 그것을 보면 폭동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했다. 폭동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장소를 변경했다는 답변이었다.
강기덕은 납득하지 못했다. 학생과 군중에 대한 저들의 뿌리 깊은 불신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강기덕은 말했다.
“민족대표가 파고다공원에 가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폭동의 원인이 됩니다.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서를 발표한다고 학생과 시민을 모아놓고 갑자기 명월관지점에서 한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파고다공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가 가지 않아서 폭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책임지겠소. 선언서는 여기서 발표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소. 우리는 여기서 발표할 테니 당신은 돌아가는 게 좋겠소.

” 강기덕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때 책임진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예심판사의 질문에 강기덕이 대답했다.
“모르겠소. 난 그때 실례되는 태도를 취하고 말았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나의 팔을 잡고 제지했고, 그곳은 무척이나 혼란해져 버렸소.”
참아야 했지만 강기덕은 참지 못했다. 분노가 그의 이성을 모두 잠식한 것 같았다.
강기덕은 만류하는 사람들에 의해 끌려나오다시피 해서 명월관지점을 나왔다. 몇몇 사람이 따라 나와 차분한 말투로 그를 설득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의 귀에 그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바로 그때 강기덕은 이제 막 명월관지점으로 들어가는 이갑성과 눈이 마주쳤다. 이갑성은 박희도와 함께 학생 측과 긴밀히 의견을 나눴던 기독교 인사다. 그런데 이갑성은 무언가 얘기할 듯하다가 아무 말 없이 문 안으로 사라졌다.
“손병희 등이 파고다공원에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심판사의 질문에 강기덕이 답했다.
“마음에 불평이 있었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시작하겠다

2월 28일 밤 ‘민족대표’가 장소를 변경했을 때, 박희도나 이갑성은 학생지도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대상은 김원벽이었을 수도 있고, 강기덕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강기덕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소식이 그에게까지 닿지 못했거나, 닿았더라도 충분히 납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강기덕과 김문진은 탑골공원의 학생과 시민들에게 ‘민족대표’가 오지 않기로 한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날의 만세시위를 책임지기로 한 학생들에게 ‘민족대표’와 상관없이 집회를 진행하라고 했다. 강기덕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불법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자리를 떠났다. 강기덕은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산공원으로 향했다. 인근에 있는 조선총독부와 경무총감부가 신경이 쓰였지만 그곳만큼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은 없었다. 시위 계획대로 된다면 학생과 군중들은 조선총독부가 있는 혼마치 일대로 오게 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민족이 온 힘을 다해 부르는 만세의 함성이 공원 안까지 들려왔다. 학생과 군중들이 대열을 갖추고 행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휑했던 마음이 어느새 다시 뜨거워졌다. 확실해진 것이 하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싸움이라는 점이었다. 학생들만으로 제2의 독립운동을 하기로 했을 때부터 학생들은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인들의 마음엔 이미 봄이었다

3월 5일 남대문역 앞 도로는 오전 9시가 되기 전부터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3월 5일 학생들이 주도하는 제2차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날 시위에 각자가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나왔다. 구호를 적어 넣은 깃발이 대표적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엔 언제나 그러하듯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새로운 생각이 태어나고 새로운 인식이 자라난다.

대한문 앞 광장 만세시위 광경. 위의 사진에서 뒤로 보이는 건물은 당시 경성일보 겸 매일신보 사옥(지금 서울시청 자리). 미국 컬럼비아대 유니언신학교의 버크도서관 소장.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3월 5일 남대문역 일대를 붉게 물들인 붉은 수건도 그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붉은 수건을 머리띠인양 머리에 두르기도 하고, 완장처럼 팔에 감기도 하고, 손에 들고 흔들기도 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붉은 수건은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불덩어리를 내 친구, 내 이웃에게 전하는 도구였다.
9시가 조금 지난 시각, 군중 속에서 2대의 인력거가 나타났다. 인력거에 탄 청년들의 손에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이 들려 있었다. 강기덕과 김원벽이었다. 군중들은 인력거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다. 만세의 함성이 온 시내를 뒤흔들었다.
‘만세’로 조선인은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독립과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싸웠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아무도 억압 받지 않는 세상, 아무도 차별 받지 않는 세상, 아무도 착취 받지 않는 세상이 그것이었다.
강기덕은 시위를 시작한 지 10분 만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원벽은 좀 더 오래 버텼지만 그 역시 많이 길지는 않았다. 시위의 경험이 부족해 지도자를 보호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 것은 금세 배울 수 있으니까. 그리고 누군가 다음 사람이 그들이 떨어뜨리고 간 깃발을 주워 흔들면 될 테니까 말이다.
봄은 아직이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마음엔 이미 봄이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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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시민역사강좌 열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민간연계 시민대학에 3년 연속으로 선정되어 시민역사강좌를 개최하였다. 6월 29일부터 9월 14일까지 3개월 간 진행되는 시민역사강좌는 ‘프로그램Ⅰ: 내일을 여는 선언-우리시대 표상이 된 가치들과 그 역사’ 5꼭지와 ‘프로그램Ⅱ: 한일역사부정론의 궤변’ 5꼭지로 구성되며,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강의장에서 온라인 ZOOM
화상강좌로 진행하고 있다. 수강생은 일반 시민과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2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 분포를 보인다.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강의지만 꾸준하게 매주 30여 명이 참여하여 시민강좌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프로그램Ⅰ은 노동, 여성, 난민, 동물생명권, 지역을 주제로 한국현대사에서 변혁을 위해 외쳐진 각 분야의 선언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시대가 현재 지향하고 있는 다음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8월 17일부터 진행할 프로그램Ⅱ의 기획 의도는 현재의 일본과 한국에서 나타나는 역사부정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자행된 강제동원의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을 이열치열로 이겨내려는 참여자들의 열기는 우리 사회현상의 변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시민사회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실천적 움직임으로 승화하고 있다.

화, 2021/07/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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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강제동원증언전 개막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피해자들의 목소리로 일본의 산업유산 시설이 지워버린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증언’하는 기획전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가 7월 16일(금)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이번 전시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공동으로 주최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시작하는 날에 맞춰 개막한 이 전시회는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통해 일본에 ‘전체 역사를 알게 하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이행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있다. 전시는 크게 2부로 나눠진다. 먼저 제1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에서는 ▲‘가라면 가는 거지’ – 식민지 조선 청년의 강제동원 실상 ▲‘갇혀서 일하는 신세야’ – 강제노동 현장의 일상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 반인권적인 처우와 사건·사고 ▲‘다 같은 노예 신세였어’ – 중국인 피해자와 연합군 포로의 강제노동 실태 등이 피해자들의 증언영상을 중심으로 전시된다. 이 같은 증언영상들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20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채록」 사업(민족문제연구소 수행)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2004년 출범) 조사활동 ▲강제동원피해자 소송운동 ▲일본 시민단체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과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의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을 통해 확보된 것들이다.

 

특히 하시마 강제동원 피해자인 서정우 씨, 이경운·이지창 씨의 증언영상과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강제노동실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료들이다. 수십 년간 이 문제에 천착해온 일본 시민단체 POW연구회와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의 협력으로 공개가 가능했다. 제2부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에서는 유네스코 일본 산업유산의 등재 논란과 현재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산업유산정보센터의 문제점을 다루었다. 특히, 제2부는 2015년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독일 본에서 일본 산업유산 전시(戰時) 강제노동의 어두운 역사를 세계유산위원들에게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민족문제연구소 주최·주관)의 확장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에 폴란드 아우슈비츠수용소, 독일 푈클링겐 제철소 등과 같은 ‘부정적 세계유산Negative Heritage)’이 어떤 방식으로 후대에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를 소개하면서 일본 산업유산의 역사부정 실태를 꼬집는다. 
아울러 연구소는 이날 전시 개막과 함께 강제동원의 전체 역사를 전시하도록 촉구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안을 지지하고 일본 정부의 충실한 이행을 촉구하는 한일 시민단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같은 활동들은 일본 산업유산 현장에서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 등에게 가해진 전시 강제노동의 역사를 알리는 온라인 한일시민연대공동행동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캠페인 및 이벤트가 기획·추진될 예정으로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

수, 2021/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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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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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집는 듯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1년 365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구곡을 끊어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간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 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區) 안에 있다.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당시 코뮨 때에 희생된 5천여 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 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1927년 국민당의 쿠데타로 공산당이 궤멸되고 또한 반군벌 반봉건세력이 무너질 때 조국의 독립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중국인민은 그들 나름대로 지방군벌이 득세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 한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국민당의 배신으로 멀어져간 조국독립에의 꿈이 광저우 봉기의 시발점이었다.
그즈음 나는 김산의 광동에서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행을 하는 중에 있었다. 1927년의 김산 역시 이곳 기의(起義)에 참가를 하였었다. 그들은 장개석 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광저우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잠시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점령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장개석 군대와 진형명 군대가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간 150여 명의 조선인 동포들을 ‘물에 녹은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피해 층계를 내려와 찾은 곳은 팔각정자였다. 왠지 빗소리에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던 음악소리가 연못을 지나갈 때는 더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왼쪽) 조우원용과 천티엔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오른쪽) 혈제헌원 정자

연못가의 녹음으로 가려진 곳이 음악소리의 발원지였다. 소리는 울부짖듯 한꺼번에 내딛다가, 흐느낄 듯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듯 하고 다시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흐르는 곡조의 유장함이 더해지고 종국에는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내는 소리로 마감되었다.
조우원용(周文雍)과 천티엔쥰(陳鐵軍)의 죽은 시신은 그렇게 양쪽의 연못에 버려지고 묻혔다. 1927년 11월, 남창(南昌) 봉기에 이어 광저우에서 봉기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나중에 봉기의 주모자들을 체포할 때 이들도 잡힌 것이다. 봉기가 실패한 결과는 5천여 명의 목숨이 조선에서 온젊은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조우원용 23세 그리고 천티엔쥰 24세, 그들은 처형되기 직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의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기념한 정자(血祭軒轅亭)는 1957년에 세워졌다. 연못은 당시의 처형장이었으니 이곳에서 죽어간 것이다. 끝간 데 없이 허공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는 사실은 그때 죽은 사람들과 조우원용 그리고 천티엔쥰의 진혼곡이었음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자 곁에 세워진 그 두 사람의 동상. 약간은 머리를 숙인 듯, 조우원용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천티엔쥰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호수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커다란 정자는 봉기에 참여한 150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4년 전, 나라가 망하고 설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젊음들이 해왔던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대학가는 뒤숭숭하였다. 그러다가 5월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끌려가고 실종되었으며 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은 한때 은행직원이었다. 영어도 유창했던 그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같이 야학을 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하였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혁명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피와 땀을 요구하였다. 절망과도 같은 삶을 개선해 보고자 죽음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부르고 잊지 못한다. 선각자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명들이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꽃처럼 사라져 갔는가. 여기에서 ‘물속의 소금’ 그리고 ‘봄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이념과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편 혈제헌원정의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그리고 광주의 윤상원과 박기순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남겨져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 모두는 이름을 남기건 남기지 못했건 모두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누군가 이곳 정자를 낀 연못을 돌 때 들리는 노랫가락이 진혼가임을 안다면 한줌의 꽃이라도 그들을 위해 뿌려주지 않겠는가,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윤상원과 박기순 그리고 남의 나라 혁명에 가담하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조선의 젊은 혼들에게.

토, 2021/08/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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