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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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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익명 (미확인) | 금, 2019/03/29- 17:36

[식민지 비망록 45 ]

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용산 전원국 터는 어떻게 인쇄국을 거쳐 체신이원양성소로 변했나?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난 2005년에 사적 제157호인 ‘圜丘壇’의 올바른 소리값이 무엇이냐를 두고 크게 논란이 불거진 적이 있었다. 이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숱한 반대의견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보>2005년 11월 16일자를 통해 이것의 독음(讀音)을 ‘환구단’으로 한다는 최종 고시를 냈다. 고종황제의 즉위 관련 내용이 게재된 <독립신문> 1897년 10월 12일자의 기사에 ‘환구단’으로 표기한 사례를 존중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 결정은 여러 모로 그냥 따르기가 어렵다. 우선 해당 일자에 ‘환구단’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오히려 이보다 닷새 앞선 <독립신문> 1897년 10월 7일자에는 ‘원구’라고 표기한 구절이 두 차례나 나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처럼 하나의 신문 내에서도 서로 다른 표기가 혼재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까닭에 <독립신문>의 특정일자 기록 자체가 절대적인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1915년에 신문관에서 펴낸 <신자전(新字典)>에는 圜의 두 가지 음가 ‘환’과 ‘원’ 가운데 圜丘는 ‘원구’로 발음하는 것으로 명기하고 있다.

 

주한영국임시총영사를 지낸 윌킨슨(W. H. Wilkinson)이 갑오개혁 당시 제도개혁의 내역을 담아 펴낸 <한국정부(The Corean Government)> (1897)라는 책에는 ‘典圜局’을 ‘전원국’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표시해놓은 내용이 분명히 남아 있다.

익히 알려진 바 대로 ‘圜’이라는 글자는 ‘환’과 ‘원’이라는 두 가지 음가를 동시에 갖는 경우에 속하므로, 어떤 경우에 ‘환’이 되거나 ‘원’이 되는지를 잘 분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일이 된다. 이 점에 관해 가장 일목요연하게 인용할 수 있는 자료는 <강희자전(康熙字典)>이다. 여길 보면 이 글자의 제1소리값인 ‘원’은 ‘둥글다(圓)’ , ‘하늘(天體)’, ‘돈(法錢)’ 등의 뜻으로 새겨지는 경우이며, 제2소리값인 ‘환’은 ‘두르다(繞)’ , ‘둘레(圍)’ 등의 뜻을 지닌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특히, 이 자료에는 ‘圜丘’라는 용어가 ‘원’의 항목에 설명 용례로 직접 등장하는 것도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천원지방(天圜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의 의미에 따라 ‘둥근 하늘’ 에 제사를 모시는 ‘둥근 언덕’의 제단은 ‘원’의 소릿값을 따서 ‘원구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결코 ‘환구단’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圜’의 음가와 관련하여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항목은 ‘典圜局’의 발음문제이다. 이 글자는 대개 ‘전환국’으로 읽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진 역사용어이기도 하다. <독립신문>의 경우에도 한결같이 ‘전환국’이라는 표기만 등장할 뿐 ‘전원국’으로 표기한 사례는 눈에 띄질 않는다. 하지만 <강희자전>에 따르면 ‘圜’은 ‘법전(法錢, 돈)’이라는 뜻도 담고 있으며, 구부원법(九府圜法, 주나라의 화폐제도)처럼 ‘원’으로 읽는 것이 옳다.
실제로 1886년 이래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통용됐던 주화들의 액면표기를 살펴보면, 화폐의 단위가 ‘圜’인 경우에는 한글 ‘원’을 함께 표기하거나 영어로 ‘WON’이나 ‘WARN’ 또는 ‘WHAN’이 새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취지로 보면 ‘돈(화폐)을 관장하는 기관’을 뜻하는 典圜局은 ‘전환국’이 아니라 ‘전원국’으로 새겨지는 것이 마땅하겠다. 전원국이 처음 이 땅에 등장한 때는 1883년 7월이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83년(고종 20년) 7월 5일 기사를 보면, “임시로 주전소(鑄錢所)를 설치하는 방법으로는 허다하게 계속 공급할 수 없으므로 따로 일국(一局)을 설치하고 상시로 주조하게 하여 경용(經用, 일상경비)에 보태 쓰도록 하며, 설치절목(設置節目)은 군국아문(軍國衙門)에서 마련하여 들이게 하라”는 전교(傳敎)가 있었던 것이 계기였다. 이에 따라 여드레 후인 7월 13일에 전원국관리사무(典圜局管理事務)와 총판(摠辦), 방판(幇辦)을 임명하는 것으로 전원국이 설치되었으며, 다시 7월 17일 기사에는 “전원국이 이튿날부터 불을 붙여 화폐주조를 개시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처음에 전원국에서는 당오전(當五錢)의 주조를 전담하였는데, 이곳에서 근대적인 주화제조가 본격화한 것은 2년이 지난 1885년 8월 이후의 일이다. 이때 선혜청 별창(宣惠廳 別倉)을 조폐기기창(造幣機器廠)으로 정하고 이곳에 벽돌로 만든 공장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886년 11월에 완공을 보았다. 근대시기의 서울전경 사진자료를 보면 서소문 바로 안쪽에 굴뚝이 높이 치솟아 있는 이색적인 풍경이 간혹 눈에 띄는데, 이것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60척(呎, 피트) 높이의 전원국 조폐창의 굴뚝이다. 이곳에는 독일에서 들여온 각종 주화제조기계를 장치하였고, 독일인 기술자 크라우스(F. Klaus) 등 3명이 고빙(雇聘)되어 몇 종류의 시주화(試鑄貨)가 생산되었다.
그 후 1887년에는 일본조폐국의 조각사(彫刻師), 기관사(機關士), 직공(職工) 등 25명이 고빙되어 주조사업을 개시하였으나 한강을 거슬러 오르내리는 운항에 의존하여 원료를 운반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시험적으로 적동화(赤銅貨) 5문(文) 짜리와 황동화(黃銅貨) 10문(文) 짜리의 두 종류를 만들어내는 데에 그쳤다. 이러한 상태에서 1892년 12월에 이르러 원료 반입이 편리한 인천 제물포(濟物浦)의 후화촌(後花村)으로 자리를 정하여 전원국을 신축하고 다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14권에 수록된 「전원국조사보고서(典圜局調査報告書)」에는 인천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까닭을 이렇게 적고 있다.

 

경성(京城)에서 인천(仁川)으로 이접(移接)한 기인(起因)을 문(聞)한즉 해국내(該局內) 소용석탄(所用石炭) 급(及) 기타 공업용 물품건 수입(輸入)은 전수(全數)히 인항(仁港)에 도(到)하는 고(故)로 해물품(該物品)을 경성(京城)으로 전운(轉運)하려니 강(江)에 수리(水利)를 의(依)하나 엄동시(嚴冬時)에는 빙강(氷江, 결빙)되어 항운(航行)이 절지(絶止)하는 때 있고 인마(人馬)를 의(依)하여 반운(搬運)하려면 일년간(一年間) 경비(經費)는 모인(某人)이 하든 계산(計算)을 알아본즉 이만필(二萬疋)에 하(下)치 아니하며 차(此)를 인(因)하여 이접(移接)하였다 하며 (하략)

 

여기에서 보듯이 한강을 이용하는 방법은 겨울철 결빙 관계로, 육로를 이용하는 방법은 과다한 비용이 발생하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천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이 당시 인천 전원국의 감독은 오사카제동회사(大阪製銅會社)의 사장이던 마스다 노부유키(增田信之)가 맡았으며, 오사카조폐국(大阪造幣局)에서 원형(圓形)의 은지(銀地, 은화의 원재료)와 오사카 제동회사에서 동지(銅地, 동전의 원재료)를 공급받아 은화, 동화, 백동화(白銅貨), 황동화 등 5종류의 주화를 압인(壓印)하여 생산하였다.
청일전쟁의 와중에는 일본의 간섭에 따라 1894년 7월 11일에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이 제정 공포되었는데, 여기에는 새 화폐를 은전(銀錢, 1냥짜리와 5냥짜리), 백동전(白銅錢, 2돈 5푼짜리), 적동전(赤銅錢, 5푼짜리), 황동전(黃銅錢, 1푼짜리)의 네 종류로 유통하도록 하고, 특히 제7조의 규정에 “신식화폐가 다량 주조되기 이전에 당분간 외국화폐를 혼용할 수 있되 다만 본국화폐와 동질(同質), 동량(同量), 동가(同價)의 것이라야 통용이 허락된다”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인천 전원국에서 만들어진 주화는 완전히 일본의 것과 동일한 것이었으므로, 이 말은 곧 일본화폐가 조선 전역에 무제한으로 유통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용산 전원국이 폐지된 자리에 들어선 탁지부 인쇄국의 모습이다. 뒤로 이곳의 상징물인 90척(呎, 피트) 높이의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통감부, <일영박람회출품사진첩>, 1910)

<애뉴얼 리포트> (1911~1912년판)에 수록된 용산 인쇄국에 종사하고 있는 조선인 여직공들의 제책작업광경이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1898년 8월 15일에는 인천에 있던 전원국을 서울의 용산강으로 옮기는 결정이 내려지게 된다. 이 당시 이전 장소로 정해진 곳이 군자감 강감(軍資監 江監; 원효로 3가 1번지 구역) 터였다. 이 자리가 선택된 이유는 갑오개혁 때 각도(各道)에서 올라오는 일체의 물납(物納)이 폐지되고 대전(代錢, 금납)으로 하도록 변경됨에 따라 이곳이 비어있는 공간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용산 전원국은 1898년 10월부터 토공(土工)이 개시되었으나 여러 가지 정세의 변화로 공사가 지연되었다가 1900년 5월에 이르러서야 건물이 대략 완성되고 시운전을 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때마침 한강철교의 완성과 더불어 그해 7월 8일 경인철도의 전 구간이 개통되자 8월 22일에는 인천에 남아있던 제반 기계를 수송하는 일에 착수하였고, 9월 8일 이후 백동화를 압인하는 일이 용산에서 재개되었다. 물론 이곳에서 백동화의 남발이 이뤄졌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시기에 ‘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財政顧問)의 용빙이 강요된 결과 1904년 10월 14일에 임명된 탁지부고문(度支部顧問)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 의해 이른바 ‘화폐정리사업’의 이름으로 전원국은 철폐되고 말았다. 비록 관제(官制)는 사라졌으나, 화폐정리 탓에 회수된 엄청난 수량의 백동화를 녹이고 절단하는 작업은 1911년 3월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고 알려진다.
전원국이 폐지된 이후 옛 군자감 강감 터를 차지한 것은 탁지부 인쇄국(度支部 印刷局)이었다. 1904년 12월 6일 칙령 제30호 「인쇄국 관제」를 통해 설치된 이 기관의 생성과 변천과정에 대해서는 <경성부사> 제2권(1936), 1016~1018쪽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국내(局內)에 설치했던 인쇄사업에 관해서는 명치 37년(1904년) 10월 전원국의 폐지와 동시에 탁지부 인쇄국 관제가 발포되어 전원국 터는 인쇄국이 되고, 인쇄공장 300평과 제지공장 100평에서 우편절수(郵便切手, 우표), 징세인지(徵稅印紙), 기타 석판(石版)과 활판(活版)에 속한 잡인쇄(雜印刷) 사업만을 존속시키는 것으로 했다. 39년(1906년) 3월 1일 인쇄국 공장 전부가 소실되어 9월에 복구했고, 40년(1907년) 10월부터 한국은행권(韓國銀行券) 제조사업도 기도하여 그해 7월부터 제(諸) 설비공장의 축조에 착수했다. 42년(1909년) 11월 27일 증설의 대공사를 준공하고, 이듬해 11월부터 은행권의 제작업에 착수했다.
이보다 앞서 41년(1908년) 관제개정에 있어서 국(局, 인쇄국)을 특립(特立)의 한 관청으로 삼아, 탁지부대신 관리 아래에 인쇄제지사업의 직영(直營)을 하는 것으로 되었다. 또 이해부터 교과서의 인쇄를 하고, 나아가 수입인지, 수형용지(手形用紙, 어음용지), 소절수(小切手, 수표) 용지류, 국고채권(國庫債券), 각 은행주권(銀行株券), 제2회 농공채권(農工債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 고급의 인쇄도 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보듯이 전원국의 기능이 인쇄국으로 전환된 것은 일찍이 이곳에서 지폐 발행을 위한 제지소가 설치된 바 있고, 이와 병행하여 우표와 수입인지 등 관공서에서 필요한 제반 인쇄물을 이곳에서 공급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시기에는 ‘탁지부 인쇄국’이라는 간판 아래 각종 주권, 채권, 어음, 수표용지 등을 제조하였고, 경술국치 직전의 시점에는 한국은행권의 제판(製版)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또한 교과서를 비롯하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현행대한법규유찬(現行大韓法規類纂)>과 같은 관찬 간행물들도 모두 이곳에서 인쇄되었다.

조선총독부 인쇄국 관제가 폐지된 다음날인 『조선총독부관보』 1912년 4월 1일자(호외)에는 발행처의 표기가 ‘조선총독관방 총무국 인쇄소’로 변경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개시된 이후에는 이곳은 ‘총독부 인쇄국’으로 승계되었다가 1912년 3월의 총독부 관제 개정으로 인쇄국이 철폐되고 ‘총독관방(總督官房)’으로 소속이 바뀌면서 ‘인쇄소’로 전환되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은행권(朝鮮銀行券) 지폐를 찍어내는 것과 <조선총독부관보>의 인쇄도 이곳에 속한 주요 업무의 하나였다. 그러나 1923년 3월 28일에 이르러 예산절감을 이유로 총독부 인쇄소의 민영화가 추진된 결과, 그 자리 그대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朝鮮書籍印刷株式會社)가 설립되어 사업 일체를 승계하였다. <매일신보> 1923년 1월15일자에 실린 「조선도서인쇄준비위원회」 제하의 기사에 따르면, 이완용(李完用), 박영효(朴泳孝), 송병준(宋秉畯), 민영기(閔泳綺), 한상룡(韓相龍), 조진태(趙鎭泰), 이병학(李炳學; 李柄學), 김승환(金昇煥) 등 다수의 조선인 친일인사들도 회사 발기인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때 친일귀족 박영효는 창립 때부터 사장 자리에 올라 1935년 5월 6일까지 재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은행권은 ‘대일본제국정부 내각인쇄국(內閣印刷局)’에서 제조하는 것으로 이관 처리되었으나, 나머지 총독부 인쇄소의 소관이었던 대부분의 업무는 ‘총독부 고시’의 형태를 거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의 몫으로 귀착되었다. 예를 들어, 총독부관보의 인쇄 및 발매를 비롯하여 “조선총독부가 저작권을 갖는 여러 학교의 교과용 도서, 교수참고용 도서, 기타 필요한 도서의 번각(飜刻)에 대한 발행”, 그리고 “총독부가 저작하는 조선민력(朝鮮民曆; 책력)의 제조 및 판매”에 관한 권한도 이 회사가 갖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1936년 12월에 종전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터에 신축된 체신이원양성소의 전경이다. (<조선의 체신사업(소화 13년판)>, 1938)

 

<일본지리대계> 제12권 조선편(1930)에 수록된 경성시가도에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옮겨간 ‘육군탄약고(옛 총기제조소자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용산과 마포의 경계지점인 도산(桃山, 모모야마; 지금의 도원동)에서 포착한 용산 방향의 전경이다. 사진의 아래쪽에 건축 공사중인 곳이 일본군의 유곽(遊廓)으로 유명했던 모모야마(1912년에 ‘야요이쵸’로 개칭)이고, 중간에 보이는 건물이 나중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옮겨오는 일본군 탄약고이며, 오른쪽 위로 언덕 너머 굴뚝이 보이는 곳이 당시 ‘탁지부 인쇄국’ 자리이다. (조선타임스신문, <황태자전하 한국어도항 기념사진첩>, 1907)

경성비행장에 근무할 천녀(天女), 즉 에어포트 걸(스튜어디스)의 모집기사에 체신이원양성소가 시험장소로 표시되어 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29일자)

 

그 후 1935년 6월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는 종전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인접한 ‘대도정(大島町, 지금의 용문동) 38번지’에 건물과 시설 등을 새로 갖춰 그곳으로 근거지를 옮기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자리는 원래 대한제국 시기에 총기제조소(銃器製造所)가 설치된 곳이며, 이후 일본군에 접수되어 화약고(火藥庫)로 사용되던 공간이었다.
이와 동시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빠져나간 곳에는 체신이원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가 들어와서 이 구역을 넘겨받았다. 이 기관은 일찍이 총독부가 전기통신, 전신전화의 공무(工務), 항로표지업무 등 특수한 기능을 요하는 체신사업 종사원들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8년 1월 21일에 정식으로 설립하였고, 그해 5월 이후 경복궁 서쪽의 ‘창성동 117번지’에 있던 경찰관연습소(警察官練習所, 옛 대한적십자사 및 대한적십자병원 터) 자리를 넘겨받아 사용하던 상태였다.
오래도록 인쇄시설이 포진하고 있던 구역에 총독부 체신국이 새로운 건물을 신축한 연혁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6년 12월 20일자에 수록된 「체신이원양성소, 낙성식 성대 거행」 제하의 기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체신국 체신이원양성소는 금년 6월 원정(元町) 3정목 고대지에 기공하여 공사중이던 바 총부지(總敷地) 7,500여 평에 근대식 양옥이 완성되었으므로 19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정오경 동 양성소 대교실에서 미나미(南) 조선총독 대리로 오타케(大竹) 내무국장 이하 관공민 150여 명 참석으로 식을 마치고 별실 강당에서 성대한 피로연이 있은 후 오후 2시경 산회하였다.

 

<경향신문> 1950년 5월 21일자에 게재된 ‘국립체신고등학교(원효로 3가 1번지)’ 관비생 모집공고이다.

 

이로부터 이 공간은 일제의 패망 시점까지 조선총독부가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기반시설로서 우편, 전신, 전화, 항로를 비롯한 여러 체신기관에 종사할 요원들을 배출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연혁 때문인지 해방 이후에도 이 구역에는 체신관련 교육기관이 그대로 점유하였다. 실제로 이곳은 미군정 시기인 1946년에 ‘조선체신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국립체신학교’로 다시 바뀌었으며 이내 ‘체신대학’의 명칭을 달고 운영되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체신고등학교’도 함께 설립
되었으나, 1957년 7월 10일 「체신제학교설치령(遞信諸學校設置令)」에 따라 종전의 체신학교 대학부는 ‘체신학교’로, 종전의 체신학교 고등부는 ‘체신학교 병설 체신고등학교’로 각각 위상이 재정비되었다.

옛 용산 전원국 자리이자 총독부 인쇄국 자리이자 체신이원양성소 자리였던 원효전화국 터는 2018년 4월 이후 ‘KT 용산 IDC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골목길은 1900년에 개통된 용산포구 행 전차(電車)가 오가던 길이기도 하다.

 

1962년 1월 1일에는 두 학교가 폐지되고 체신공무원훈련소가 설치되었으며, 체신공무원교육원과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 등의 명칭변경이 있었다. 1999년 5월 12일에는 새로운 청사가 완공되면서 1936년 체신이원양성소가 이곳으로 옮겨온 지 60여 년 만에 충남 천안으로 이전하기에 이른다.
이와는 별도로 1976년 1월 16일에는 이 구역 안에 원효전화국(元曉電話局)이 신설된 바 있으며, 이 자리는 원효전신전화국과 국제전화국 시절을 거쳐 2018년 4월 이후 지하 5층 지상 5층 규모의 ‘KT 용산 IDC 신축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상태이다. 현재는 이 앞에 ‘군자감 강감터’라는 것을 알리는 문화유적표석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이곳이 1898년 이래 용산 전원국과 총독부 인쇄국과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시절을 거쳐 체신이원양성소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노골적인 경제침탈이 거듭되었던 공간임을 알리는 안내판 하나 정도는 추가로 설치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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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정육 구술/서혜원 기록,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제308호, 2019.3.25

[헌법 13조 3항]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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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자제인 김정육 선생

연좌제는 1981년 3월 25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연좌제는 개인의 범죄를 가족·친지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형벌이다. 조선시대 삼족을 멸하던 악독한 형벌은 한차례 폐지된 적 있으나 그것이 가진 성격만치 끈질겼던 터라 사라지지 않고 생명을 연장해나갔다. 그리고 1950년대 무렵, 처음으로 내가 연좌제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등고시를 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신원증명서를 발급받을 때였다. 담당자는 한참이 지나도 발급을 못하고 갸웃거렸다. ‘신원조회 불가능.’ 고시를 치기도 전에 자격을 박탈당했다.

왜 시험을 치지 않느냐는 친구들에게 속사정을 말하지 못했다. 연좌제에 걸려 아무것도 못하는 줄 알면 혹여 다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연좌제에 걸린 이는 호적부에 빨간 줄이 그어졌다. 빨간 줄을 가진 채로는 여행은커녕 취직도 할 수 없었다. 국내를 돌아다닐 때는 승인을 받아야 했다. 친일 경찰들이 빨갱이를 소탕하러 활개치던 시대였다. 그들은 마음대로 남의 가정집을 들쑤시며 시찰을 돌았다. 나라 팔아먹은 자들이 나라 지키던 분의 후손을 검문했다. 수상한 시절이었다.

아, 되짚을 말이 생겼다. 내게도 꼬리표가 있었구나. 시찰 대상이라는 꼬리표. 아버지에게도 비슷한 게 달려있었는데 좀 더 무시무시한 이름이었다. 살생 대상이라는 꼬리표. 남한 정부가 수립된 뒤 아버지는 친일 척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갑작스레 집에 방문했다. “친일 군경들을 건들지 말아라.” “장관 자리를 줄 테니 하지 말아라.” “왜 이러십니까?” 아버지는 이 대통령의 말을 끝내 듣지 않았다. 이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반민특위 사무실이 습격당했다. 수많은 부상자가 생겼고 전국에서 온 친일행위 고발문은 불태워졌다. 아버지는 테러리스트의 살생부에 올랐다. 아버지는 결국 위원장 자리에 사표를 냈다. 아버지의 살생 딱지는 그 자취를 감추기에는 억울해 나에게까지도 미약하게 이어졌나 보다.

한때 대학에 입학한 적이 있다. 어릴 적 나는 김구, 신익희 등 알만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자랐다. 한문이든 법이든 정치든 대단한 분들을 보고 터득했다. 그분들의 가르침을 물려받아 법학도를 꿈꿨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대학 등록금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밥걱정에 시달려온 내가 등록금을 마련한다는 게 가당한 일인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막내가 영양실조로 굶어죽은 뒤 근사한 밥을 먹었던 기억은 한 번뿐이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우리 남매를 고아원에 위탁하기 전, 누나와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맛있게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독립운동가가 자식을 삼시세끼 먹일 수 있는 선택은 그뿐이었다. 따뜻한 밥이라니 얼마나 생소한 말인지. 결국 대학을 관둬야 했다. 밥벌이가 시급했다. 나를 받아주는 곳은 공사판이었다. 신원증명서 없이 일을 하고 돈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고마운 직장이었다.

“중동에 가면 떼부자로 돌아온다.” 말단으로 들어가 현장소장으로 오른 내게 중동 공사 참가 제의가 들어왔다. “글쎄요.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딴 사람을 보내시죠.” 여권이 발급되지 않는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 없는 것이었다. 욕심이 없는 척 묵묵히 일했다. 겉으론 태연했지만 어떻게 속상하지 않았을까. 결혼했고 안정된 가정을 원하던 처지였다. 하지만 중동에 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일은 조금 지나 건설현장의 예산제도가 바뀌면서 일한 만큼 돈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나는 돈을 모을 수 있었고 성내동에 13평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약 40년 동안 꿈에만 그리던 내 집이었다. 뒤늦게 자식도 보았다.

88올림픽이 열리던 해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내가 쓰러졌다. 급성 신부전증이었다.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서는 계속 공사판 일을 할 수 없었다. 멀리 떠나지 않고 오후에 아내 곁에 머물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신문지 돌리는 일을 했다. 그러다 돈을 더 벌고 싶어 신문 속지를 끼우는 작업을 추가로 맡았다. 이 작업을 하면 70만 원 정도가 들어왔다. 대신 속지작업이 끝나는 대로 새벽 배달을 나가야 하니 쉬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힘든 티를 낼 수 없었다. 어느 날은 아들이 새벽에 내 뒤를 몰래 따라와 일을 훔쳐보고 있었다. 결국에는 아버지를 돕는다고 시간이 날 때마다 속지작업을 도왔다. 돈을 그렇게 어찌어찌 벌었다. 아내에게 신장을 이식해 줄 은인도 나타났다. 무명의 천사는 나중에 알고 보니 민주당 총재의 부인이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어려움에 처했으니 구제하라.”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들었다. 아내의 신장 이식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역시 길지 않았다. 아내는 2005년 10월 18일 13시 32분 세상을 떠났다. 이따금 아내가 눈을 감은 날짜를 소리내서 읊어본다. “이천오년 시월 십팔일 십삼시 삼십이분.”

그전에 아버지 얘기를 빠뜨렸다. 아버지는 1990년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받았다’는 말은 어쩐지 순순하게 들리니 ‘받아냈다’고 쓰겠다. 아버지가 임시정부에 있던 자료를 전부 보훈처로 보냈다. 얼마 기다리자 보훈처에서 심의중이라는 우편이 날라왔다. 그리고 그해 4월, 드디어 아버지의 국민장 서훈이 결정 났다. 국민장은 3급짜리 훈장이다. 뭐 이런 급수에 연연하고 싶지는 않지만 최근 별세한 5·16 쿠데타의 중심인물인 김종필 국무총리는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받았다. 김 총리가 가담한 일과 아버지가 해온 일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하튼 나는 살아왔다. 올해 85세가 되었다. 사실 내 호적은 몇 번이나 장난질 쳐져 실제와는 다르지만 호적상 여든 다섯이다. 이 나이를 먹어서야 몇몇 사람들이 찾아온다. 내가 살아온 시절을 듣고 싶다고 한다. 구전동화 읊듯이 이야기를 한다. 으레 사람들은 마지막 질문으로 이런 말을 한다. “정부에게 원하는 것은 없습니까.” “아버지가 납북되시고 연좌제에 묶여 산 세월을 보상받으셔야죠.” “명예회복이 필요하지 않나요.” 고래를 가로젓는다. “내 평생 요즘처럼 정부에서 오는 공문이 친절한 적이 없어요.” 이전 세월 내가 정부에 탄원을 낼 때마다 답변을 받고는 화가 치밀지 않은 적이 없다. 아버지와 나를 짐짝처럼 처리하던 이들이 그래도 요즘은 같은 말일지언정 돌려가며 이야기한다. 더 바랄 것도 없다. 나이 여든을 넘겼다. 그저 고민은 내년 만기되는 아내의 무료 묘자리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한 것이다. 한 푼 두 푼 모으면 아내를 편안한 안식처로 모실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나를 남겨두고 먼저 떠난 아들을 떠올린다. 배급소에서 아비를 돕던 착한 아들. 그가 남긴 어여쁜 손녀 손자. 김예일리와 김선리. 녀석들에게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아직 어린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모를 이야기를 내 손으로 모두 적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나는 지금을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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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김정육 선생의 아버지는 김상덕 지사(1891~1956. 경북 고령 출신)이다. 김 지사는 1919년 도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유학생 대표 11인 중 한 명이었다. 2·8독립선언으로 1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에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단체 ‘정의부’의 최고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윤봉길 의사의 폭파 의거 후 한중 연합군을 창설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또한 상해 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문화부장을 지냈다. 해방 후 고향에서 제헌국회 의원으로 활동했고, 친일 척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에 당선됐다. 그러다 6·25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평양 교외 재북인사묘역에 안장되어 있고,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제308호, 2019.3.25.)

월, 2019/04/0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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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友人(기우인)

 

草屋梅花發(초옥매화발)

南窓寄友人(남창기우인)

君吾爲李杜(군오위이두)

共醉詠芳春(공취영방춘)

 

벗님에게 띄우는 글

 

草屋에도 고운 매화 활짝 피니

남쪽 窓에서 벗님께 글 띄우네

그대와 나 李白과 杜甫가 되어

함께 취해 아름다운 봄을 읊세.

 

<時調로 改譯>

 

草屋에도 매화 피니 南窓에서 글 띄우네

그대는 李白이 되고 나는야 杜甫가 되어

둘이서 함께 취하여 아름다운 봄을 읊세.

 

*友人: 벗 *南窓: 남쪽으로 난 窓 *李杜: 李白과 杜甫 *芳春: 꽃 피는 아름다운 봄.

 

<2019.4.1, 이우식 지음>

월, 2019/04/0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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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용덕
전국2팀 선임기자

인천공항에서 중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이면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에 닿을 수 있다. 125년 전 한반도에 큰 영향을 끼친 청일전쟁(1894~1895·중국은 갑오전쟁, 일본은 일청전쟁으로 부름)의 승패가 결정된 곳이다. 일본군이 랴오둥반도에 이어 청나라 해군의 주력기지인 이곳 웨이하이의 류궁다오(유공도)를 점령하자, 청은 실권자인 리훙장(이홍장)을 일본에 보내 강화에 나선다.

류궁다오는 웨이하이에서 배로 15분 거리다. 중국은 1985년 이 섬에 청일전쟁을 기억하는 ‘중국갑오전쟁박물관’을 지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크기로 청일전쟁 관련 유물 1천여점을 전시하는데, 패전기념관치고는 규모가 상당하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잠자는 중국의 천년 꿈을 깨운 것은 갑오전쟁”이라는 문구가 들어온다. 청의 사상가 량치차오(양계초)의 글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입해 인조를 무릎 꿇게 한 청의 기세등등함이 이 박물관에는 없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돼 평양과 황해에서의 패전, 뤼순(여순)대학살, 청일전쟁 패배 이후 열강의 반식민지가 된 늙은 제국의 고통만이 손에 닿을 듯 펼쳐진다.

21세기 미-중 패권경쟁에 나선 중국이 왜 부끄러운 과거 역사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을까. 궁금함이 풀린 것은 기념관 출구에 적힌 ‘물망국치 원몽중화’란 글을 보면서다. ‘국가의 치욕을 기억해 중국의 꿈을 이루자’는 그 말은 애국주의를 선동하는 이른바 ‘국뽕’ 냄새가 다분하지만, 국가의 수치를 미래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간절함만은 전해진다.

일본으로 건너간 리훙장이 도착한 곳은 부산 맞은쪽의 시모노세키다. 이곳에서 육순의 노인은 랴오둥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내주는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었고, 일본은 당시 협상장이던 산기슭에 ‘일청강화기념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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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갑오전쟁박물관.

무심코 지나쳤다 찾은 단층 건물의 전시실에는 1895년 조약 협상이 이뤄진 협상장이 복원돼 있다. 패자의 웅대한 박물관에 견줘, 승자의 기념관은 내용이나 규모에서 초라하다.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을 맺고 15년 뒤 한반도를 강제병합하며 군국주의 국가로 나아가 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출발점이 청일전쟁이었음을 감추고 싶은 속내가 보이는 듯도 하다.

부끄러운 역사를 치열하게 되새김하는 중국, 이를 축소하고 숨기는 일본 사이에 낀 우리는 어떤가.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앞 골목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있다. 지난해 8월 문을 연 국내 유일의 일제 침략과 독립운동사를 보여주는 전문 박물관이다. 5층 건물 중 2층 상설전시장에는 400여점의 자료가 전시 중인데 ‘친일과 항일’의 흔적을 담기에는 그 공간(240㎡)이 비좁아 보인다. 수장고에는 10만여점의 자료가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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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인명사전. 한겨레

이 작은 공간 하나를 여는 데도 긴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11년 시민 모금에 나섰고 박물관 건립에 7년이 걸렸다. 시민의 힘으로 세운 이 박물관은 방문객을 위한 주차 공간은 고사하고 건물을 사느라 빌린 20억여원의 이자를 다달이 내는 일도 버겁다.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려는 시민들만의 노력은 여전히 힘겹다. 국가의 친일청산 노력은 또 어떤가.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이 출범하며 사라졌다. 정부가 처음으로 반민족행위자 1007명을 선정했으나, 추가조사는 물론 당시 확인된 반민족행위조차 국민에게 교육하고 알리는 일도 흐지부지됐다. 반민족적 행위로 얻은 재산을 조사할 친일재산조사위원회도 사라졌다. 국가의 친일청산 시계는 10년 전에 멈춰 서 있다.

오는 11일이면 상하이(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돌이다. 중국 대륙 수만리 피난길에서도 독립된 나라, 정의로운 나라를 꿈꾼 선열들의 바람과 달리, 우리는 지금도 제1야당 원내대표가 “(친일청산을 위한) 반민특위로 국론이 분열됐다”고 버젓이 말하는 ‘망언의 시대’를 살고 있다. 멈춰 선 시계를 다시 돌려야 할 때다. [email protected]

<2019-03-31> 한겨레 

☞기사원문: [한겨레 프리즘] 멈춰선 시계를 돌리자 / 홍용덕

월, 2019/04/01-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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懇請北韓諸人民軍隊總蹶起

 

正恩家運盡(정은가운진)

不可逆天心(불가역천심)

極限人民苦(극한인민고)

哀哉淚滿襟(애재루만금)

 

북한의 모든 인민 군대에게 총궐기할 것을 간청함

 

김정은의 집안 運 이제 다했으니

하늘의 마음은 거스를 수 없다네

인민의 괴롬 궁극 한계에 이르러

슬프다!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時調로 改譯>

 

김정은 運 다했으니 저 하늘 뜻이라네

인민들의 그 괴롬 궁극 한계에 이르러

슬프다! 눈물이 흘러 옷깃에 가득하네.

 

*懇請: 간절히  청함. 또는  그런 청(請) *總蹶起: 모두 참여해 힘차게 일어남. 또는

그런  행위  *家運: 집안  운수  *不可逆: 변화를  일으킨 물질이 본디 상태로 돌아

수 없는  일.  비가역(非可逆)  *天心: 하늘의  뜻.  천의(天意). 눈에 뵈는 하늘 한가운

  *極限: 궁극의 한계. 사물이 진행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단계나 지점을 이름.

 

<2019.4.1, 이우식 지음>

월, 2019/04/0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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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朝家(고조가)

 

自派無高傑(자파무고걸)

非人作長官(비인작장관)

民心離叛甚(민심이반심)

未久味辛酸(미구미신산)

 

朝廷에 告함

 

자기 쪽의 系派에는 인물 없으니

사람답지 못한 者도 長官이 되네

백성들 마음 떠나 배반함 심하니

未久에 괴로움, 쓰라림 맛보리라.

 

<時調로 改譯>

 

自派엔 無高傑이니 폐인도 長官 되네

백성들의 마음 떠나 배반함이 심하니

未久에 괴롬과 쓰림 맛보게끔 되리라.

 

*朝家: 조정(朝廷). 조당(朝堂). 임금이 나라의 정치를 신하들과 의논하거나 집행하

곳.  또는  그런  기구 *自派:  자기  쪽의 계파(系派)나  유파(流派)  *高傑: 고상하고

걸출 인물 *非人: 사람답지 못한 사람. 폐인(廢人) *民心: 백성의 마음. 민정(民情)

*離叛:  人心  떠나서  배반함  *辛酸: 맵고  심.  괴로움과  쓰라림.  고생. 고초(苦楚).

 

<2019.4.2, 이우식 지음>

화, 2019/04/0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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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9/04/0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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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자 유진오의 생가터와 추모비가 하남시 향토유적 제10호입니다. 이를 철회하려고 하남시청에 민원을 제기했으나 거절을 당했습니다. 친일부역자의 생가터와 추모비를 철회시키려고 하는데 힘이 되어주실 수 있는 분들은 힘이 되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화, 2019/04/0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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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한사람으로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촉망받을 만한 인물이던데

왜 여기에서 미꾸라지 행태를 하는데 시간을 허비하는지요

시민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정치에 입문

잘 안되니 다시 시민운동가로 변신

이제 촛불시민의 대표자로 둔갑하여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고 있더군요

촛불혁명 때 무엇을 했는지요 ㅎㅎ

정치나 하시고 이제  회원직도 내려 놓으심이 좋을 듯 합니다

여인철씨

 

화, 2019/04/02-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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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하남시 향토유적 제10호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유진오의 생가터와 추모비입니다.
이를 철회하기 위해서 도와달라도 민족문제 연구서
자유게시판에 올렸더니 연락이 오셔서
근시일내에 만나뵙고 조언을 듣고 도움도 받기로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남시SNS시민기자단장  심윤석

수, 2019/04/0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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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問(답문)

 

問難吾豈答(문난오기답)

未免白頭童(미면백두동)

半識無爲道(반식무위도)

時時或可通(시시혹가통)

 

물음에 답하다

 

어려운 걸 물으니 내 어찌 답하랴

머리 허연 어린애 아직 못 면했소

저 無爲의 道에 대해 반쯤 아는데

때때로 혹 가히 통할 수도 있다오.

 

<時調로 改譯>

 

難問題 어찌 답하랴 白頭童 못 면했소

無爲의 道에 대하여 내 반쯤은 아는데

때때로 어쩌면 가히 통할 수도 있다오.

 

*答問: 물음에 대답함 *問難: 어려운 것을 물음 *白頭: 백수(白首). 허옇게 센 머리.

 

<2019.4.3, 이우식 지음>

수, 2019/04/03-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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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大富牧師

 

惡者蒙仁化(악자몽인화)

焉無欲報恩(언무욕보은)

餘錢方喜捨(여전방희사)

亦救我靈魂(역구아영혼)

 

큰 富者 목사에게 지어 주다

 

악인이 어진 德의 감화를 입었는데

어찌 은혜 갚고자 함이 없겠습니까

남은 돈 바야흐로 기꺼이 내놓으

또한 저의 영혼도 구하여 주옵소서.

 

<時調로 改譯>

 

仁化를 입었는데 왜 報恩 없겠습니까

남은 돈 바야흐로 기꺼이 내놓사오니

원컨대 저의 영혼도 구하여 주옵소서.

 

*大富: 큰 富者 *惡者: 악한 사람 *仁化: 인덕(仁德)의 감화 *報恩: 은혜를 갚음. 수은

(酬恩) *餘錢: 쓰고 남은 *喜捨: 어떤 목적을 위하여 기꺼이 돈이나 물건을 내놓음.

 

<2019.4.3, 이우식 지음>

수, 2019/04/03-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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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次成三問先生絶命詩韻

 

僅僅新生國(근근신생국)

何爲殆半(하위태반사)

北狂南腐爛(북광남부란)

難復本來(난복본래가)

 

삼가 成三問 선생의 絶命詩에 次韻하다

 

겨우 독립해 새로 생긴 나라인데

어찌하여 거의 반쯤 기울게 됐나

北은 미쳤고 南은 썩어 버렸으니

본래 집 회복하기 쉽지 않으리라.

 

<時調로 改譯>

 

겨우 생긴 나라인데 왜 반쯤 기울었나

北은 미쳐 버렸고 南은 썩어 버렸으니

본래 집 회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

 

*次韻: 남이 지은 詩의 운자(韻字)를 따서 詩를 지음.  또는 그런 방법  *成三問:  조선

세종 때의 文臣(1418~1456). 字는 근보(謹甫). 號는 매죽헌(梅竹軒). 집현전 학사로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세조 元年에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해  처형됨. 저서에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僅僅:

겨우  *新生國: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  독립한  국가  *腐爛:  썩어서  문드러짐.

 

<2019.4.4, 이우식 지음>

목, 2019/04/04-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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