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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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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익명 (미확인) | 금, 2019/03/29- 17:36

[식민지 비망록 45 ]

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용산 전원국 터는 어떻게 인쇄국을 거쳐 체신이원양성소로 변했나?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난 2005년에 사적 제157호인 ‘圜丘壇’의 올바른 소리값이 무엇이냐를 두고 크게 논란이 불거진 적이 있었다. 이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숱한 반대의견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보>2005년 11월 16일자를 통해 이것의 독음(讀音)을 ‘환구단’으로 한다는 최종 고시를 냈다. 고종황제의 즉위 관련 내용이 게재된 <독립신문> 1897년 10월 12일자의 기사에 ‘환구단’으로 표기한 사례를 존중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 결정은 여러 모로 그냥 따르기가 어렵다. 우선 해당 일자에 ‘환구단’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오히려 이보다 닷새 앞선 <독립신문> 1897년 10월 7일자에는 ‘원구’라고 표기한 구절이 두 차례나 나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처럼 하나의 신문 내에서도 서로 다른 표기가 혼재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까닭에 <독립신문>의 특정일자 기록 자체가 절대적인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1915년에 신문관에서 펴낸 <신자전(新字典)>에는 圜의 두 가지 음가 ‘환’과 ‘원’ 가운데 圜丘는 ‘원구’로 발음하는 것으로 명기하고 있다.

 

주한영국임시총영사를 지낸 윌킨슨(W. H. Wilkinson)이 갑오개혁 당시 제도개혁의 내역을 담아 펴낸 <한국정부(The Corean Government)> (1897)라는 책에는 ‘典圜局’을 ‘전원국’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표시해놓은 내용이 분명히 남아 있다.

익히 알려진 바 대로 ‘圜’이라는 글자는 ‘환’과 ‘원’이라는 두 가지 음가를 동시에 갖는 경우에 속하므로, 어떤 경우에 ‘환’이 되거나 ‘원’이 되는지를 잘 분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일이 된다. 이 점에 관해 가장 일목요연하게 인용할 수 있는 자료는 <강희자전(康熙字典)>이다. 여길 보면 이 글자의 제1소리값인 ‘원’은 ‘둥글다(圓)’ , ‘하늘(天體)’, ‘돈(法錢)’ 등의 뜻으로 새겨지는 경우이며, 제2소리값인 ‘환’은 ‘두르다(繞)’ , ‘둘레(圍)’ 등의 뜻을 지닌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특히, 이 자료에는 ‘圜丘’라는 용어가 ‘원’의 항목에 설명 용례로 직접 등장하는 것도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천원지방(天圜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의 의미에 따라 ‘둥근 하늘’ 에 제사를 모시는 ‘둥근 언덕’의 제단은 ‘원’의 소릿값을 따서 ‘원구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결코 ‘환구단’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圜’의 음가와 관련하여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항목은 ‘典圜局’의 발음문제이다. 이 글자는 대개 ‘전환국’으로 읽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진 역사용어이기도 하다. <독립신문>의 경우에도 한결같이 ‘전환국’이라는 표기만 등장할 뿐 ‘전원국’으로 표기한 사례는 눈에 띄질 않는다. 하지만 <강희자전>에 따르면 ‘圜’은 ‘법전(法錢, 돈)’이라는 뜻도 담고 있으며, 구부원법(九府圜法, 주나라의 화폐제도)처럼 ‘원’으로 읽는 것이 옳다.
실제로 1886년 이래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통용됐던 주화들의 액면표기를 살펴보면, 화폐의 단위가 ‘圜’인 경우에는 한글 ‘원’을 함께 표기하거나 영어로 ‘WON’이나 ‘WARN’ 또는 ‘WHAN’이 새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취지로 보면 ‘돈(화폐)을 관장하는 기관’을 뜻하는 典圜局은 ‘전환국’이 아니라 ‘전원국’으로 새겨지는 것이 마땅하겠다. 전원국이 처음 이 땅에 등장한 때는 1883년 7월이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83년(고종 20년) 7월 5일 기사를 보면, “임시로 주전소(鑄錢所)를 설치하는 방법으로는 허다하게 계속 공급할 수 없으므로 따로 일국(一局)을 설치하고 상시로 주조하게 하여 경용(經用, 일상경비)에 보태 쓰도록 하며, 설치절목(設置節目)은 군국아문(軍國衙門)에서 마련하여 들이게 하라”는 전교(傳敎)가 있었던 것이 계기였다. 이에 따라 여드레 후인 7월 13일에 전원국관리사무(典圜局管理事務)와 총판(摠辦), 방판(幇辦)을 임명하는 것으로 전원국이 설치되었으며, 다시 7월 17일 기사에는 “전원국이 이튿날부터 불을 붙여 화폐주조를 개시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처음에 전원국에서는 당오전(當五錢)의 주조를 전담하였는데, 이곳에서 근대적인 주화제조가 본격화한 것은 2년이 지난 1885년 8월 이후의 일이다. 이때 선혜청 별창(宣惠廳 別倉)을 조폐기기창(造幣機器廠)으로 정하고 이곳에 벽돌로 만든 공장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886년 11월에 완공을 보았다. 근대시기의 서울전경 사진자료를 보면 서소문 바로 안쪽에 굴뚝이 높이 치솟아 있는 이색적인 풍경이 간혹 눈에 띄는데, 이것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60척(呎, 피트) 높이의 전원국 조폐창의 굴뚝이다. 이곳에는 독일에서 들여온 각종 주화제조기계를 장치하였고, 독일인 기술자 크라우스(F. Klaus) 등 3명이 고빙(雇聘)되어 몇 종류의 시주화(試鑄貨)가 생산되었다.
그 후 1887년에는 일본조폐국의 조각사(彫刻師), 기관사(機關士), 직공(職工) 등 25명이 고빙되어 주조사업을 개시하였으나 한강을 거슬러 오르내리는 운항에 의존하여 원료를 운반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시험적으로 적동화(赤銅貨) 5문(文) 짜리와 황동화(黃銅貨) 10문(文) 짜리의 두 종류를 만들어내는 데에 그쳤다. 이러한 상태에서 1892년 12월에 이르러 원료 반입이 편리한 인천 제물포(濟物浦)의 후화촌(後花村)으로 자리를 정하여 전원국을 신축하고 다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14권에 수록된 「전원국조사보고서(典圜局調査報告書)」에는 인천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까닭을 이렇게 적고 있다.

 

경성(京城)에서 인천(仁川)으로 이접(移接)한 기인(起因)을 문(聞)한즉 해국내(該局內) 소용석탄(所用石炭) 급(及) 기타 공업용 물품건 수입(輸入)은 전수(全數)히 인항(仁港)에 도(到)하는 고(故)로 해물품(該物品)을 경성(京城)으로 전운(轉運)하려니 강(江)에 수리(水利)를 의(依)하나 엄동시(嚴冬時)에는 빙강(氷江, 결빙)되어 항운(航行)이 절지(絶止)하는 때 있고 인마(人馬)를 의(依)하여 반운(搬運)하려면 일년간(一年間) 경비(經費)는 모인(某人)이 하든 계산(計算)을 알아본즉 이만필(二萬疋)에 하(下)치 아니하며 차(此)를 인(因)하여 이접(移接)하였다 하며 (하략)

 

여기에서 보듯이 한강을 이용하는 방법은 겨울철 결빙 관계로, 육로를 이용하는 방법은 과다한 비용이 발생하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천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이 당시 인천 전원국의 감독은 오사카제동회사(大阪製銅會社)의 사장이던 마스다 노부유키(增田信之)가 맡았으며, 오사카조폐국(大阪造幣局)에서 원형(圓形)의 은지(銀地, 은화의 원재료)와 오사카 제동회사에서 동지(銅地, 동전의 원재료)를 공급받아 은화, 동화, 백동화(白銅貨), 황동화 등 5종류의 주화를 압인(壓印)하여 생산하였다.
청일전쟁의 와중에는 일본의 간섭에 따라 1894년 7월 11일에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이 제정 공포되었는데, 여기에는 새 화폐를 은전(銀錢, 1냥짜리와 5냥짜리), 백동전(白銅錢, 2돈 5푼짜리), 적동전(赤銅錢, 5푼짜리), 황동전(黃銅錢, 1푼짜리)의 네 종류로 유통하도록 하고, 특히 제7조의 규정에 “신식화폐가 다량 주조되기 이전에 당분간 외국화폐를 혼용할 수 있되 다만 본국화폐와 동질(同質), 동량(同量), 동가(同價)의 것이라야 통용이 허락된다”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인천 전원국에서 만들어진 주화는 완전히 일본의 것과 동일한 것이었으므로, 이 말은 곧 일본화폐가 조선 전역에 무제한으로 유통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용산 전원국이 폐지된 자리에 들어선 탁지부 인쇄국의 모습이다. 뒤로 이곳의 상징물인 90척(呎, 피트) 높이의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통감부, <일영박람회출품사진첩>, 1910)

<애뉴얼 리포트> (1911~1912년판)에 수록된 용산 인쇄국에 종사하고 있는 조선인 여직공들의 제책작업광경이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1898년 8월 15일에는 인천에 있던 전원국을 서울의 용산강으로 옮기는 결정이 내려지게 된다. 이 당시 이전 장소로 정해진 곳이 군자감 강감(軍資監 江監; 원효로 3가 1번지 구역) 터였다. 이 자리가 선택된 이유는 갑오개혁 때 각도(各道)에서 올라오는 일체의 물납(物納)이 폐지되고 대전(代錢, 금납)으로 하도록 변경됨에 따라 이곳이 비어있는 공간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용산 전원국은 1898년 10월부터 토공(土工)이 개시되었으나 여러 가지 정세의 변화로 공사가 지연되었다가 1900년 5월에 이르러서야 건물이 대략 완성되고 시운전을 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때마침 한강철교의 완성과 더불어 그해 7월 8일 경인철도의 전 구간이 개통되자 8월 22일에는 인천에 남아있던 제반 기계를 수송하는 일에 착수하였고, 9월 8일 이후 백동화를 압인하는 일이 용산에서 재개되었다. 물론 이곳에서 백동화의 남발이 이뤄졌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시기에 ‘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財政顧問)의 용빙이 강요된 결과 1904년 10월 14일에 임명된 탁지부고문(度支部顧問)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 의해 이른바 ‘화폐정리사업’의 이름으로 전원국은 철폐되고 말았다. 비록 관제(官制)는 사라졌으나, 화폐정리 탓에 회수된 엄청난 수량의 백동화를 녹이고 절단하는 작업은 1911년 3월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고 알려진다.
전원국이 폐지된 이후 옛 군자감 강감 터를 차지한 것은 탁지부 인쇄국(度支部 印刷局)이었다. 1904년 12월 6일 칙령 제30호 「인쇄국 관제」를 통해 설치된 이 기관의 생성과 변천과정에 대해서는 <경성부사> 제2권(1936), 1016~1018쪽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국내(局內)에 설치했던 인쇄사업에 관해서는 명치 37년(1904년) 10월 전원국의 폐지와 동시에 탁지부 인쇄국 관제가 발포되어 전원국 터는 인쇄국이 되고, 인쇄공장 300평과 제지공장 100평에서 우편절수(郵便切手, 우표), 징세인지(徵稅印紙), 기타 석판(石版)과 활판(活版)에 속한 잡인쇄(雜印刷) 사업만을 존속시키는 것으로 했다. 39년(1906년) 3월 1일 인쇄국 공장 전부가 소실되어 9월에 복구했고, 40년(1907년) 10월부터 한국은행권(韓國銀行券) 제조사업도 기도하여 그해 7월부터 제(諸) 설비공장의 축조에 착수했다. 42년(1909년) 11월 27일 증설의 대공사를 준공하고, 이듬해 11월부터 은행권의 제작업에 착수했다.
이보다 앞서 41년(1908년) 관제개정에 있어서 국(局, 인쇄국)을 특립(特立)의 한 관청으로 삼아, 탁지부대신 관리 아래에 인쇄제지사업의 직영(直營)을 하는 것으로 되었다. 또 이해부터 교과서의 인쇄를 하고, 나아가 수입인지, 수형용지(手形用紙, 어음용지), 소절수(小切手, 수표) 용지류, 국고채권(國庫債券), 각 은행주권(銀行株券), 제2회 농공채권(農工債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 고급의 인쇄도 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보듯이 전원국의 기능이 인쇄국으로 전환된 것은 일찍이 이곳에서 지폐 발행을 위한 제지소가 설치된 바 있고, 이와 병행하여 우표와 수입인지 등 관공서에서 필요한 제반 인쇄물을 이곳에서 공급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시기에는 ‘탁지부 인쇄국’이라는 간판 아래 각종 주권, 채권, 어음, 수표용지 등을 제조하였고, 경술국치 직전의 시점에는 한국은행권의 제판(製版)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또한 교과서를 비롯하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현행대한법규유찬(現行大韓法規類纂)>과 같은 관찬 간행물들도 모두 이곳에서 인쇄되었다.

조선총독부 인쇄국 관제가 폐지된 다음날인 『조선총독부관보』 1912년 4월 1일자(호외)에는 발행처의 표기가 ‘조선총독관방 총무국 인쇄소’로 변경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개시된 이후에는 이곳은 ‘총독부 인쇄국’으로 승계되었다가 1912년 3월의 총독부 관제 개정으로 인쇄국이 철폐되고 ‘총독관방(總督官房)’으로 소속이 바뀌면서 ‘인쇄소’로 전환되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은행권(朝鮮銀行券) 지폐를 찍어내는 것과 <조선총독부관보>의 인쇄도 이곳에 속한 주요 업무의 하나였다. 그러나 1923년 3월 28일에 이르러 예산절감을 이유로 총독부 인쇄소의 민영화가 추진된 결과, 그 자리 그대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朝鮮書籍印刷株式會社)가 설립되어 사업 일체를 승계하였다. <매일신보> 1923년 1월15일자에 실린 「조선도서인쇄준비위원회」 제하의 기사에 따르면, 이완용(李完用), 박영효(朴泳孝), 송병준(宋秉畯), 민영기(閔泳綺), 한상룡(韓相龍), 조진태(趙鎭泰), 이병학(李炳學; 李柄學), 김승환(金昇煥) 등 다수의 조선인 친일인사들도 회사 발기인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때 친일귀족 박영효는 창립 때부터 사장 자리에 올라 1935년 5월 6일까지 재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은행권은 ‘대일본제국정부 내각인쇄국(內閣印刷局)’에서 제조하는 것으로 이관 처리되었으나, 나머지 총독부 인쇄소의 소관이었던 대부분의 업무는 ‘총독부 고시’의 형태를 거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의 몫으로 귀착되었다. 예를 들어, 총독부관보의 인쇄 및 발매를 비롯하여 “조선총독부가 저작권을 갖는 여러 학교의 교과용 도서, 교수참고용 도서, 기타 필요한 도서의 번각(飜刻)에 대한 발행”, 그리고 “총독부가 저작하는 조선민력(朝鮮民曆; 책력)의 제조 및 판매”에 관한 권한도 이 회사가 갖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1936년 12월에 종전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터에 신축된 체신이원양성소의 전경이다. (<조선의 체신사업(소화 13년판)>, 1938)

 

<일본지리대계> 제12권 조선편(1930)에 수록된 경성시가도에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옮겨간 ‘육군탄약고(옛 총기제조소자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용산과 마포의 경계지점인 도산(桃山, 모모야마; 지금의 도원동)에서 포착한 용산 방향의 전경이다. 사진의 아래쪽에 건축 공사중인 곳이 일본군의 유곽(遊廓)으로 유명했던 모모야마(1912년에 ‘야요이쵸’로 개칭)이고, 중간에 보이는 건물이 나중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옮겨오는 일본군 탄약고이며, 오른쪽 위로 언덕 너머 굴뚝이 보이는 곳이 당시 ‘탁지부 인쇄국’ 자리이다. (조선타임스신문, <황태자전하 한국어도항 기념사진첩>, 1907)

경성비행장에 근무할 천녀(天女), 즉 에어포트 걸(스튜어디스)의 모집기사에 체신이원양성소가 시험장소로 표시되어 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29일자)

 

그 후 1935년 6월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는 종전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인접한 ‘대도정(大島町, 지금의 용문동) 38번지’에 건물과 시설 등을 새로 갖춰 그곳으로 근거지를 옮기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자리는 원래 대한제국 시기에 총기제조소(銃器製造所)가 설치된 곳이며, 이후 일본군에 접수되어 화약고(火藥庫)로 사용되던 공간이었다.
이와 동시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빠져나간 곳에는 체신이원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가 들어와서 이 구역을 넘겨받았다. 이 기관은 일찍이 총독부가 전기통신, 전신전화의 공무(工務), 항로표지업무 등 특수한 기능을 요하는 체신사업 종사원들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8년 1월 21일에 정식으로 설립하였고, 그해 5월 이후 경복궁 서쪽의 ‘창성동 117번지’에 있던 경찰관연습소(警察官練習所, 옛 대한적십자사 및 대한적십자병원 터) 자리를 넘겨받아 사용하던 상태였다.
오래도록 인쇄시설이 포진하고 있던 구역에 총독부 체신국이 새로운 건물을 신축한 연혁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6년 12월 20일자에 수록된 「체신이원양성소, 낙성식 성대 거행」 제하의 기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체신국 체신이원양성소는 금년 6월 원정(元町) 3정목 고대지에 기공하여 공사중이던 바 총부지(總敷地) 7,500여 평에 근대식 양옥이 완성되었으므로 19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정오경 동 양성소 대교실에서 미나미(南) 조선총독 대리로 오타케(大竹) 내무국장 이하 관공민 150여 명 참석으로 식을 마치고 별실 강당에서 성대한 피로연이 있은 후 오후 2시경 산회하였다.

 

<경향신문> 1950년 5월 21일자에 게재된 ‘국립체신고등학교(원효로 3가 1번지)’ 관비생 모집공고이다.

 

이로부터 이 공간은 일제의 패망 시점까지 조선총독부가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기반시설로서 우편, 전신, 전화, 항로를 비롯한 여러 체신기관에 종사할 요원들을 배출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연혁 때문인지 해방 이후에도 이 구역에는 체신관련 교육기관이 그대로 점유하였다. 실제로 이곳은 미군정 시기인 1946년에 ‘조선체신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국립체신학교’로 다시 바뀌었으며 이내 ‘체신대학’의 명칭을 달고 운영되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체신고등학교’도 함께 설립
되었으나, 1957년 7월 10일 「체신제학교설치령(遞信諸學校設置令)」에 따라 종전의 체신학교 대학부는 ‘체신학교’로, 종전의 체신학교 고등부는 ‘체신학교 병설 체신고등학교’로 각각 위상이 재정비되었다.

옛 용산 전원국 자리이자 총독부 인쇄국 자리이자 체신이원양성소 자리였던 원효전화국 터는 2018년 4월 이후 ‘KT 용산 IDC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골목길은 1900년에 개통된 용산포구 행 전차(電車)가 오가던 길이기도 하다.

 

1962년 1월 1일에는 두 학교가 폐지되고 체신공무원훈련소가 설치되었으며, 체신공무원교육원과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 등의 명칭변경이 있었다. 1999년 5월 12일에는 새로운 청사가 완공되면서 1936년 체신이원양성소가 이곳으로 옮겨온 지 60여 년 만에 충남 천안으로 이전하기에 이른다.
이와는 별도로 1976년 1월 16일에는 이 구역 안에 원효전화국(元曉電話局)이 신설된 바 있으며, 이 자리는 원효전신전화국과 국제전화국 시절을 거쳐 2018년 4월 이후 지하 5층 지상 5층 규모의 ‘KT 용산 IDC 신축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상태이다. 현재는 이 앞에 ‘군자감 강감터’라는 것을 알리는 문화유적표석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이곳이 1898년 이래 용산 전원국과 총독부 인쇄국과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시절을 거쳐 체신이원양성소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노골적인 경제침탈이 거듭되었던 공간임을 알리는 안내판 하나 정도는 추가로 설치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시민들의 의견

친일청산을 위한 제안

 

독립운동하신 분들과 후손이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실정에 대하여 안타깝다 못해 국가의 정통성마저 의구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독립운동 후손분들에 대한 예우는 더욱 존중하고 높여야 하여야 한다는 등의 말장난은 그만하고 친일파에 대한 재산몰수라든지 물리적인 처단이 어렵다면 역사의 평가와 응징을 통하여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후대에 교훈을 남겨야합니다.

 

하여 제나름대로 제언을 한다면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좀 더 면밀한 분석과 정리를 통하여 역사로서 응징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친일파들은 즉시 파묘하고 거기에 친일행위자가 묻혔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그 자의 무릅 꿇은 청동상을 세운다.

광화문광장, 독립기념관 광장등에 독립과 친일역사거리를 만들어 친일매국노들의 이름과 행적을 새긴 청동으로 깔고 그 내용이 선명하게 보일수 있도록 강화유리로 처리하여 사람들이 밝고 다니게한다.

그 앞에는 가장 존경받는 모습으로 독립운동가의 청동상을 만들고 앞에는 무릅 꿇은 친일파 조각상을 만들어 역사로서 응징한다.

친일파가 태어난 곳에는 그 지역을 상징하는 장소에 위와 같은 것을 지역규모에 맞게 설치한다

3.1절과 광복절에는 독립기념관과 광화문광장에 친일파상징물을 만들어 상징물을 밟는 친일밟기(지신밟기)놀이로 승화시켜 문화로 발전시킨다.

친일후손들에게는 일정기간 기준을 설정하여 공직은 철저히 배제한다.

중국의 남송 악왕묘(악의) 옆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간신 진회부부의 무릎꿇은 간신조각상이 있고 사람들이 침을 많이 뱉어 형식적으로 침을 밷지 마세요란 표지도 해 놓았다고 합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방법이라도 강구하여 국가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였으면 합니다

 

 

 

수, 2018/10/1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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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청산을 위한 제안

 

독립운동하신 분들과 후손이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실정에 대하여 안타깝다 못해 국가의 정통성마저 의구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독립운동 후손분들에 대한 예우는 더욱 존중하고 높여야 하여야 한다는 등의 말장난은 그만하고 친일파에 대한 재산몰수라든지 물리적인 처단이 어렵다면 역사의 평가와 응징을 통하여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후대에 교훈을 남겨야합니다.

 

하여 제나름대로 제언을 한다면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좀 더 면밀한 분석과 정리를 통하여 역사로서 응징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친일파들은 즉시 파묘하고 거기에 친일행위자가 묻혔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그 자의 무릅 꿇은 청동상을 세운다.

광화문광장, 독립기념관 광장등에 독립과 친일역사거리를 만들어 친일매국노들의 이름과 행적을 새긴 청동으로 깔고 그 내용이 선명하게 보일수 있도록 강화유리로 처리하여 사람들이 밝고 다니게한다.

그 앞에는 가장 존경받는 모습으로 독립운동가의 청동상을 만들고 앞에는 무릅 꿇은 친일파 조각상을 만들어 역사로서 응징한다.

친일파가 태어난 곳에는 그 지역을 상징하는 장소에 위와 같은 것을 지역규모에 맞게 설치한다

3.1절과 광복절에는 독립기념관과 광화문광장에 친일파상징물을 만들어 상징물을 밟는 친일밟기(지신밟기)놀이로 승화시켜 문화로 발전시킨다.

친일후손들에게는 일정기간 기준을 설정하여 공직은 철저히 배제한다.

중국의 남송 악왕묘(악의) 옆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간신 진회부부의 무릎꿇은 간신조각상이 있고 사람들이 침을 많이 뱉어 형식적으로 침을 밷지 마세요란 표지도 해 놓았다고 합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방법이라도 강구하여 국가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였으면 합니다

 

 

 

수, 2018/10/1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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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港映畵俳優周潤發氏全財産寄附

 

錢蟲盈四海(전충영사해)

快擲此誰何(쾌척차수하)

衆語眞英傑(중어진영걸)

村儒詠讚歌(촌유영찬가)

 

홍콩의 영화배우 주윤발 씨의 전 재산 기부

 

온 세상이 돈벌레들로 가득한데

시원스레 내던지니 이 누구인가

뭇사람이 진짜 英傑이라 말하니

시골의 선비도 찬가를 읊는다네.

 

<時調로 改譯>

 

돈벌레 세상인데 쾌척하니 이 뉘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진짜 英傑이라 하니

시골에 사는 선비도 찬가를 읊는다네.

 

*香港: 홍콩  *四海: 온  세상.  사방의  바다  *快擲: 금품을  마땅히 쓸 자리에 시원

스럽게 내놓음 *誰何: 누구 *英傑: 영웅호걸(英雄豪傑) *村儒: 시골에 사는 선비.

 

<2018.10.18, 이우식 지음>

목, 2018/10/1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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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cafe.daum.net/minjokstraight/ihsH/2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10명? 1만3천명?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러분!

2018년 3월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12,959명입니다.

실제 회비를 내는 회원은 월 평균 9,818명입니다.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도 정기총회 자료집 7~8P)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는 1만3천여 명이 아니라 고작 10명이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임원이 5명입니다.

결국, 임원을 제외하면 회원은 고작 5명입니다.

■ 2017년 12월 ~ 2018년 3월 신입회원
민족문제연구소는 회보 『민족사랑』에 매월 신입회원과 신입회원 인사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017년 12월 신입회원만 27명이고, 2018년 1월 40명, 2018년 2월 69명입니다.
2018년도 정기총회가 열린 3월에는 46명이었습니다.
3월달 신입회원도 안되는 10명을 대상으로 총회를 소집하고, 의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2017년 12월 신입회원 27명

◎ 2018년 1월 신입회원 40명

 

◎ 2018년 2월 신입회원 69명

 

◎ 2018년 3월 신입회원 46명

■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도 정기총회, 숙명여대 순헌관 중강당

2018년 3월 24일.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도 정기총회가 숙명여대 순헌관 중강당에서 열렸습니다.

전국에서 수 백여 명의 회원이 참석했습니다.

(2018.10.12. 숙명여대에서 좌석수는 360석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알림/화보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10명!!!!!!!!!!
민족문제연구소는 3월 8일에 정기총회를 열었다며 서울시교육청에 의사록을 신고했고, 4월 24일에 임시총회를 열었다며 의사록을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의 회원이 참석한 3월 24일자 2018년도 정기총회 의사록은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3월 8일자 정기총회와 4월 24일자 임시총회는 도대체 누가 열었고, 누가 허위로 의사록을 작성했을까요?

민족문제연구소가 서울시교육청에 신고한 총회의사록을 보겠습니다.

■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 정기총회 회의록 

1. 회의 일시 : 2018년 3월 8일 17:00~19:00

2. 회의 장소 : 민족문제연구소 3층

3. 회원 총수 : 10명(함○○, 임○○, 윤○○, 조○○, 신○○, 김○○, 박○○, 박○○, 방○○, 이○○)

4. 임원 총수 :   5명(함○○, 임○○, 윤○○, 조○○, 신○○)

5. 출석 회원 :   9명(함○○, 임○○, 윤○○, 조○○, 신○○, 김○○, 박○○, 방○○, 이○○)

6. 출석 감사 :   2명(임○○, 최○○)

7. 회의 안건 : 2017년 결산 승인(안)

8. 회의 내용 

                     정관 규정에  따라 위와 같이 법정수에 달하는 회원이 출석, 본 총회가 적법하게 성립되었음을 알린 후 개회를 선언하고, 사전에 통지한 사항인 다음의 의안을 부의하고 심의를 구하다.

[의안 상정] : 2017년도 결산 승인(안)

이하 생략…

■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 임시총회 회의록

1. 회의 일시 : 2018년 4월 24일 18:00~19:00

2. 회의 장소 :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47다길 27(청파동2가, 서현빌딩 3층) 소재 당 법인의 사무소

3. 회원 총수 : 10명(함○○, 임○○, 윤○○, 조○○, 신○○, 김○○, 박○○, 박○○, 방○○, 이○○)

4. 임원 총수 :   5명(함○○, 임○○, 윤○○, 조○○, 신○○)

5. 출석 회원 : 10명(함○○, 임○○, 윤○○, 조○○, 신○○, 김○○, 박○○, 박○○, 방○○, 이○○)

6. 회의 안건 : 2017년 결산 승인(안)

7. 회의 내용 

                     정관 규정에  따라 위와 같이 법정수에 달하는 회원이 출석, 본 총회가 적법하게 성립되었음을 알린 후 개회를 선언하고, 사전에 통지한 사항인 다음의 의안을 부의하고 심의를 구하다.

[의안 상정] : 감사 선임

                 감사 최○○

위 피선자는 즉석에서 그 취임을 승낙하다. …

■ 언제부터 회원이 10명이 되었나?
○ 1997년 106명, 1999년~2000년 100명, 2002년 30명, 2003년 3월에 10명, 11월에 20명, 2004년 2월에 20명입니다.
2000년 초반 부터 회원이 많이 늘었는데 오히려 줄고 있습니다.
*년도별 총회의사록의 총 회원수는 여기에서 확인하세요.  http://cafe.daum.net/minjokstraight/jWTQ/6

◎ 1997년 6월 15일 정기총회 106명

2004년 4월 17일자 임시총회부터 전체 회원은 10명이 됩니다.
2008년 7월 15일자 임시총회에서 9명으로 줄고, 2009년 2월 21일자 정기총회에서 다시 10명이 됩니다.
이때 부터 2018년 4월까지 10명이 유지됩니다.

전체적으로 볼때 2004년부터 2018년까지 14년 동안 신규 회원이 한 명도 늘지 않고 10명을 유지합니다.

◎ 2004년 4월 17일 정기총회 10명


의사록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8년까지 회원이 단 한명도 증가하지 않습니다.


■ 1만3천여 회원은 어디로 갔습니까?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3월 24일 숙명여대에서 개최한 총회는 무엇입니까?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언제 10명에게 1만3천여 회원의 권리를 대신하라고 했습니까?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언제 10명이 감사를 선출하고, 결산 승인을 대신하라고 했습니다?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개최한 총회에서 선출한 임원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총회에서 승인안 결산승인, 예산승인, 사업승인은 무엇입니까?

목, 2018/10/18-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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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牧師輩與僧徒

 

病者焉嘲藥(병자언조약)

飢人捨食糧(기인사식량)

耶蘇同佛淚(야소동불루)

盜賊數無量(도적수무량)

 

목사들과 중들에게 告함

 

病者가 어찌 藥을 조롱하겠으며

굶주린 이가 양식을 버리겠는가

예수와 부처 눈물을 흘리시나니

도둑놈 숫자 헤아리지 못하겠다.

 

<時調로 改譯>

 

병든 이가 어찌하여 藥을 조롱하겠으며

잔뜩 굶주린 사람이 양식을 버리겠는가

예수와 부처가 우니 도둑놈이 無量하다.

 

*僧徒: 수행하는 중의 무리 *飢人: 기자(飢者). 굶주린 사람 *食糧: 양식 *耶蘇:

‘예수’의 음역어(音譯語) *盜賊: 도둑 *無量: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음.

 

<2018.10.19, 이우식 지음>

금, 2018/10/19-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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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10/1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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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1

▲ 주인을 기다리는 이름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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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리그라퍼 김효룡 작가님이 참가자들에게 예쁜 글씨를 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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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날 3팀으로 나누어 마곡사를 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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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시 문화해설사분이 마곡사 답사를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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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 답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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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와에 놓인 돌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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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양주 김재광 회원 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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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의 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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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 백범당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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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지’를 집필한 지수걸 연구소 이사(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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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 대광보전 안에 시주자 명단에 ‘조병갑’의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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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 돌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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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운동가 주하주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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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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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준찬 최수련 부부의 우리가락 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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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섭 공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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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섭 공주시장과 공주지회 회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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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의인 고 안병하 치안감님의 아들 안호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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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밤까지 이어진 뒤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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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 숙소를 떠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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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 숙소를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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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세종회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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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에서 답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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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치 전적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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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우 운영위원장의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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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을 기약하며 ‘친일파 청산!’

금, 2018/10/19-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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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內外政勢

 

狡猫摩鼠子(교묘마서자)

餓虎舐羔羊(아호지고양)

兩者云仁愛(양자운인애)

歎聲滿四方(탄성만사방)

 

나라 안팎의 政勢

 

교활한 고양이가 쥐를 쓰다듬고

굶주린 호랑이가 어린羊을 핥네

兩者가 어짊과 사랑을 운운하니

감탄의 소리가 사방에 가득하네.

 

<時調로 改譯>

 

狡猫가 쥐 어르고 餓虎가 어린羊 핥네

어짊과 또 사랑 따위 兩者가 운운하니

오호라! 감탄의 소리 사방에 가득하네.

 

*國內外: 나라 안팎 *鼠子: 쥐 *餓虎: 굶주린 범이는 뜻으로, 매우 위험하거나

무서운 대상을 이르는 말 *羔羊: 어린羊. 또는 염소와 羊 *仁愛: 어진 마음으로 

사랑함.  그 사랑  *歎聲: 몹시  감탄하는  소리. 몹시  한탄하거나  탄식하는 소리.

 

<2018.10.21, 이우식 지음>

일, 2018/10/2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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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隣村老巨富入獄

 

錢財無限慾(전재무한욕)

末路果如何(말로과여하)

我樂貧窮道(아락빈궁도)

蝸廬又醉哦(와려우취아)

 

이웃 마을 늙은 巨富가 감옥에 갇힘을 보며

 

돈에 대한 욕심이 무한하더니

마지막 무렵이 과연 어떠한가

나는야 빈궁함의 道를 즐기며

오두막에서 또 취하여 읊는다.

 

<時調로 改譯>

 

錢財慾 끝없더니 末路 과연 어떠한가

나는야 가난함과 궁색의 道를 즐기며

초라한 오두막에서 또 취하여 읊는다.

 

*隣村: 이웃  마을 *巨富: 대단히  많은  재산.  富者  중에서도 특히 큰 富者 *入獄:

감옥에  들어감. 또는  감옥에 갇힘. ≒입뢰(入牢) *錢財: 돈 *末路: 사람의 일생

가운데에서  마지막 무렵. 또는 망해 가는 마지막 무렵의 모습 *貧窮: 가난하고

궁색  *蝸廬: 달팽이의  집이라는  뜻으로, 작고  초라한  집을 비유으로 이르

. 와사(蝸舍). 와실(蝸室). 와옥(蝸屋). 또는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2018.10.22, 이우식 지음>

월, 2018/10/22-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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