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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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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익명 (미확인) | 금, 2019/03/29- 17:36

[식민지 비망록 45 ]

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용산 전원국 터는 어떻게 인쇄국을 거쳐 체신이원양성소로 변했나?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난 2005년에 사적 제157호인 ‘圜丘壇’의 올바른 소리값이 무엇이냐를 두고 크게 논란이 불거진 적이 있었다. 이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숱한 반대의견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보>2005년 11월 16일자를 통해 이것의 독음(讀音)을 ‘환구단’으로 한다는 최종 고시를 냈다. 고종황제의 즉위 관련 내용이 게재된 <독립신문> 1897년 10월 12일자의 기사에 ‘환구단’으로 표기한 사례를 존중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 결정은 여러 모로 그냥 따르기가 어렵다. 우선 해당 일자에 ‘환구단’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오히려 이보다 닷새 앞선 <독립신문> 1897년 10월 7일자에는 ‘원구’라고 표기한 구절이 두 차례나 나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처럼 하나의 신문 내에서도 서로 다른 표기가 혼재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까닭에 <독립신문>의 특정일자 기록 자체가 절대적인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1915년에 신문관에서 펴낸 <신자전(新字典)>에는 圜의 두 가지 음가 ‘환’과 ‘원’ 가운데 圜丘는 ‘원구’로 발음하는 것으로 명기하고 있다.

 

주한영국임시총영사를 지낸 윌킨슨(W. H. Wilkinson)이 갑오개혁 당시 제도개혁의 내역을 담아 펴낸 <한국정부(The Corean Government)> (1897)라는 책에는 ‘典圜局’을 ‘전원국’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표시해놓은 내용이 분명히 남아 있다.

익히 알려진 바 대로 ‘圜’이라는 글자는 ‘환’과 ‘원’이라는 두 가지 음가를 동시에 갖는 경우에 속하므로, 어떤 경우에 ‘환’이 되거나 ‘원’이 되는지를 잘 분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일이 된다. 이 점에 관해 가장 일목요연하게 인용할 수 있는 자료는 <강희자전(康熙字典)>이다. 여길 보면 이 글자의 제1소리값인 ‘원’은 ‘둥글다(圓)’ , ‘하늘(天體)’, ‘돈(法錢)’ 등의 뜻으로 새겨지는 경우이며, 제2소리값인 ‘환’은 ‘두르다(繞)’ , ‘둘레(圍)’ 등의 뜻을 지닌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특히, 이 자료에는 ‘圜丘’라는 용어가 ‘원’의 항목에 설명 용례로 직접 등장하는 것도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천원지방(天圜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의 의미에 따라 ‘둥근 하늘’ 에 제사를 모시는 ‘둥근 언덕’의 제단은 ‘원’의 소릿값을 따서 ‘원구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결코 ‘환구단’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圜’의 음가와 관련하여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항목은 ‘典圜局’의 발음문제이다. 이 글자는 대개 ‘전환국’으로 읽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진 역사용어이기도 하다. <독립신문>의 경우에도 한결같이 ‘전환국’이라는 표기만 등장할 뿐 ‘전원국’으로 표기한 사례는 눈에 띄질 않는다. 하지만 <강희자전>에 따르면 ‘圜’은 ‘법전(法錢, 돈)’이라는 뜻도 담고 있으며, 구부원법(九府圜法, 주나라의 화폐제도)처럼 ‘원’으로 읽는 것이 옳다.
실제로 1886년 이래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통용됐던 주화들의 액면표기를 살펴보면, 화폐의 단위가 ‘圜’인 경우에는 한글 ‘원’을 함께 표기하거나 영어로 ‘WON’이나 ‘WARN’ 또는 ‘WHAN’이 새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취지로 보면 ‘돈(화폐)을 관장하는 기관’을 뜻하는 典圜局은 ‘전환국’이 아니라 ‘전원국’으로 새겨지는 것이 마땅하겠다. 전원국이 처음 이 땅에 등장한 때는 1883년 7월이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83년(고종 20년) 7월 5일 기사를 보면, “임시로 주전소(鑄錢所)를 설치하는 방법으로는 허다하게 계속 공급할 수 없으므로 따로 일국(一局)을 설치하고 상시로 주조하게 하여 경용(經用, 일상경비)에 보태 쓰도록 하며, 설치절목(設置節目)은 군국아문(軍國衙門)에서 마련하여 들이게 하라”는 전교(傳敎)가 있었던 것이 계기였다. 이에 따라 여드레 후인 7월 13일에 전원국관리사무(典圜局管理事務)와 총판(摠辦), 방판(幇辦)을 임명하는 것으로 전원국이 설치되었으며, 다시 7월 17일 기사에는 “전원국이 이튿날부터 불을 붙여 화폐주조를 개시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처음에 전원국에서는 당오전(當五錢)의 주조를 전담하였는데, 이곳에서 근대적인 주화제조가 본격화한 것은 2년이 지난 1885년 8월 이후의 일이다. 이때 선혜청 별창(宣惠廳 別倉)을 조폐기기창(造幣機器廠)으로 정하고 이곳에 벽돌로 만든 공장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886년 11월에 완공을 보았다. 근대시기의 서울전경 사진자료를 보면 서소문 바로 안쪽에 굴뚝이 높이 치솟아 있는 이색적인 풍경이 간혹 눈에 띄는데, 이것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60척(呎, 피트) 높이의 전원국 조폐창의 굴뚝이다. 이곳에는 독일에서 들여온 각종 주화제조기계를 장치하였고, 독일인 기술자 크라우스(F. Klaus) 등 3명이 고빙(雇聘)되어 몇 종류의 시주화(試鑄貨)가 생산되었다.
그 후 1887년에는 일본조폐국의 조각사(彫刻師), 기관사(機關士), 직공(職工) 등 25명이 고빙되어 주조사업을 개시하였으나 한강을 거슬러 오르내리는 운항에 의존하여 원료를 운반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시험적으로 적동화(赤銅貨) 5문(文) 짜리와 황동화(黃銅貨) 10문(文) 짜리의 두 종류를 만들어내는 데에 그쳤다. 이러한 상태에서 1892년 12월에 이르러 원료 반입이 편리한 인천 제물포(濟物浦)의 후화촌(後花村)으로 자리를 정하여 전원국을 신축하고 다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14권에 수록된 「전원국조사보고서(典圜局調査報告書)」에는 인천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까닭을 이렇게 적고 있다.

 

경성(京城)에서 인천(仁川)으로 이접(移接)한 기인(起因)을 문(聞)한즉 해국내(該局內) 소용석탄(所用石炭) 급(及) 기타 공업용 물품건 수입(輸入)은 전수(全數)히 인항(仁港)에 도(到)하는 고(故)로 해물품(該物品)을 경성(京城)으로 전운(轉運)하려니 강(江)에 수리(水利)를 의(依)하나 엄동시(嚴冬時)에는 빙강(氷江, 결빙)되어 항운(航行)이 절지(絶止)하는 때 있고 인마(人馬)를 의(依)하여 반운(搬運)하려면 일년간(一年間) 경비(經費)는 모인(某人)이 하든 계산(計算)을 알아본즉 이만필(二萬疋)에 하(下)치 아니하며 차(此)를 인(因)하여 이접(移接)하였다 하며 (하략)

 

여기에서 보듯이 한강을 이용하는 방법은 겨울철 결빙 관계로, 육로를 이용하는 방법은 과다한 비용이 발생하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천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이 당시 인천 전원국의 감독은 오사카제동회사(大阪製銅會社)의 사장이던 마스다 노부유키(增田信之)가 맡았으며, 오사카조폐국(大阪造幣局)에서 원형(圓形)의 은지(銀地, 은화의 원재료)와 오사카 제동회사에서 동지(銅地, 동전의 원재료)를 공급받아 은화, 동화, 백동화(白銅貨), 황동화 등 5종류의 주화를 압인(壓印)하여 생산하였다.
청일전쟁의 와중에는 일본의 간섭에 따라 1894년 7월 11일에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이 제정 공포되었는데, 여기에는 새 화폐를 은전(銀錢, 1냥짜리와 5냥짜리), 백동전(白銅錢, 2돈 5푼짜리), 적동전(赤銅錢, 5푼짜리), 황동전(黃銅錢, 1푼짜리)의 네 종류로 유통하도록 하고, 특히 제7조의 규정에 “신식화폐가 다량 주조되기 이전에 당분간 외국화폐를 혼용할 수 있되 다만 본국화폐와 동질(同質), 동량(同量), 동가(同價)의 것이라야 통용이 허락된다”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인천 전원국에서 만들어진 주화는 완전히 일본의 것과 동일한 것이었으므로, 이 말은 곧 일본화폐가 조선 전역에 무제한으로 유통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용산 전원국이 폐지된 자리에 들어선 탁지부 인쇄국의 모습이다. 뒤로 이곳의 상징물인 90척(呎, 피트) 높이의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통감부, <일영박람회출품사진첩>, 1910)

<애뉴얼 리포트> (1911~1912년판)에 수록된 용산 인쇄국에 종사하고 있는 조선인 여직공들의 제책작업광경이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1898년 8월 15일에는 인천에 있던 전원국을 서울의 용산강으로 옮기는 결정이 내려지게 된다. 이 당시 이전 장소로 정해진 곳이 군자감 강감(軍資監 江監; 원효로 3가 1번지 구역) 터였다. 이 자리가 선택된 이유는 갑오개혁 때 각도(各道)에서 올라오는 일체의 물납(物納)이 폐지되고 대전(代錢, 금납)으로 하도록 변경됨에 따라 이곳이 비어있는 공간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용산 전원국은 1898년 10월부터 토공(土工)이 개시되었으나 여러 가지 정세의 변화로 공사가 지연되었다가 1900년 5월에 이르러서야 건물이 대략 완성되고 시운전을 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때마침 한강철교의 완성과 더불어 그해 7월 8일 경인철도의 전 구간이 개통되자 8월 22일에는 인천에 남아있던 제반 기계를 수송하는 일에 착수하였고, 9월 8일 이후 백동화를 압인하는 일이 용산에서 재개되었다. 물론 이곳에서 백동화의 남발이 이뤄졌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시기에 ‘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財政顧問)의 용빙이 강요된 결과 1904년 10월 14일에 임명된 탁지부고문(度支部顧問)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 의해 이른바 ‘화폐정리사업’의 이름으로 전원국은 철폐되고 말았다. 비록 관제(官制)는 사라졌으나, 화폐정리 탓에 회수된 엄청난 수량의 백동화를 녹이고 절단하는 작업은 1911년 3월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고 알려진다.
전원국이 폐지된 이후 옛 군자감 강감 터를 차지한 것은 탁지부 인쇄국(度支部 印刷局)이었다. 1904년 12월 6일 칙령 제30호 「인쇄국 관제」를 통해 설치된 이 기관의 생성과 변천과정에 대해서는 <경성부사> 제2권(1936), 1016~1018쪽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국내(局內)에 설치했던 인쇄사업에 관해서는 명치 37년(1904년) 10월 전원국의 폐지와 동시에 탁지부 인쇄국 관제가 발포되어 전원국 터는 인쇄국이 되고, 인쇄공장 300평과 제지공장 100평에서 우편절수(郵便切手, 우표), 징세인지(徵稅印紙), 기타 석판(石版)과 활판(活版)에 속한 잡인쇄(雜印刷) 사업만을 존속시키는 것으로 했다. 39년(1906년) 3월 1일 인쇄국 공장 전부가 소실되어 9월에 복구했고, 40년(1907년) 10월부터 한국은행권(韓國銀行券) 제조사업도 기도하여 그해 7월부터 제(諸) 설비공장의 축조에 착수했다. 42년(1909년) 11월 27일 증설의 대공사를 준공하고, 이듬해 11월부터 은행권의 제작업에 착수했다.
이보다 앞서 41년(1908년) 관제개정에 있어서 국(局, 인쇄국)을 특립(特立)의 한 관청으로 삼아, 탁지부대신 관리 아래에 인쇄제지사업의 직영(直營)을 하는 것으로 되었다. 또 이해부터 교과서의 인쇄를 하고, 나아가 수입인지, 수형용지(手形用紙, 어음용지), 소절수(小切手, 수표) 용지류, 국고채권(國庫債券), 각 은행주권(銀行株券), 제2회 농공채권(農工債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 고급의 인쇄도 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보듯이 전원국의 기능이 인쇄국으로 전환된 것은 일찍이 이곳에서 지폐 발행을 위한 제지소가 설치된 바 있고, 이와 병행하여 우표와 수입인지 등 관공서에서 필요한 제반 인쇄물을 이곳에서 공급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시기에는 ‘탁지부 인쇄국’이라는 간판 아래 각종 주권, 채권, 어음, 수표용지 등을 제조하였고, 경술국치 직전의 시점에는 한국은행권의 제판(製版)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또한 교과서를 비롯하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현행대한법규유찬(現行大韓法規類纂)>과 같은 관찬 간행물들도 모두 이곳에서 인쇄되었다.

조선총독부 인쇄국 관제가 폐지된 다음날인 『조선총독부관보』 1912년 4월 1일자(호외)에는 발행처의 표기가 ‘조선총독관방 총무국 인쇄소’로 변경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개시된 이후에는 이곳은 ‘총독부 인쇄국’으로 승계되었다가 1912년 3월의 총독부 관제 개정으로 인쇄국이 철폐되고 ‘총독관방(總督官房)’으로 소속이 바뀌면서 ‘인쇄소’로 전환되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은행권(朝鮮銀行券) 지폐를 찍어내는 것과 <조선총독부관보>의 인쇄도 이곳에 속한 주요 업무의 하나였다. 그러나 1923년 3월 28일에 이르러 예산절감을 이유로 총독부 인쇄소의 민영화가 추진된 결과, 그 자리 그대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朝鮮書籍印刷株式會社)가 설립되어 사업 일체를 승계하였다. <매일신보> 1923년 1월15일자에 실린 「조선도서인쇄준비위원회」 제하의 기사에 따르면, 이완용(李完用), 박영효(朴泳孝), 송병준(宋秉畯), 민영기(閔泳綺), 한상룡(韓相龍), 조진태(趙鎭泰), 이병학(李炳學; 李柄學), 김승환(金昇煥) 등 다수의 조선인 친일인사들도 회사 발기인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때 친일귀족 박영효는 창립 때부터 사장 자리에 올라 1935년 5월 6일까지 재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은행권은 ‘대일본제국정부 내각인쇄국(內閣印刷局)’에서 제조하는 것으로 이관 처리되었으나, 나머지 총독부 인쇄소의 소관이었던 대부분의 업무는 ‘총독부 고시’의 형태를 거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의 몫으로 귀착되었다. 예를 들어, 총독부관보의 인쇄 및 발매를 비롯하여 “조선총독부가 저작권을 갖는 여러 학교의 교과용 도서, 교수참고용 도서, 기타 필요한 도서의 번각(飜刻)에 대한 발행”, 그리고 “총독부가 저작하는 조선민력(朝鮮民曆; 책력)의 제조 및 판매”에 관한 권한도 이 회사가 갖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1936년 12월에 종전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터에 신축된 체신이원양성소의 전경이다. (<조선의 체신사업(소화 13년판)>, 1938)

 

<일본지리대계> 제12권 조선편(1930)에 수록된 경성시가도에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옮겨간 ‘육군탄약고(옛 총기제조소자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용산과 마포의 경계지점인 도산(桃山, 모모야마; 지금의 도원동)에서 포착한 용산 방향의 전경이다. 사진의 아래쪽에 건축 공사중인 곳이 일본군의 유곽(遊廓)으로 유명했던 모모야마(1912년에 ‘야요이쵸’로 개칭)이고, 중간에 보이는 건물이 나중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옮겨오는 일본군 탄약고이며, 오른쪽 위로 언덕 너머 굴뚝이 보이는 곳이 당시 ‘탁지부 인쇄국’ 자리이다. (조선타임스신문, <황태자전하 한국어도항 기념사진첩>, 1907)

경성비행장에 근무할 천녀(天女), 즉 에어포트 걸(스튜어디스)의 모집기사에 체신이원양성소가 시험장소로 표시되어 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29일자)

 

그 후 1935년 6월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는 종전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인접한 ‘대도정(大島町, 지금의 용문동) 38번지’에 건물과 시설 등을 새로 갖춰 그곳으로 근거지를 옮기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자리는 원래 대한제국 시기에 총기제조소(銃器製造所)가 설치된 곳이며, 이후 일본군에 접수되어 화약고(火藥庫)로 사용되던 공간이었다.
이와 동시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빠져나간 곳에는 체신이원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가 들어와서 이 구역을 넘겨받았다. 이 기관은 일찍이 총독부가 전기통신, 전신전화의 공무(工務), 항로표지업무 등 특수한 기능을 요하는 체신사업 종사원들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8년 1월 21일에 정식으로 설립하였고, 그해 5월 이후 경복궁 서쪽의 ‘창성동 117번지’에 있던 경찰관연습소(警察官練習所, 옛 대한적십자사 및 대한적십자병원 터) 자리를 넘겨받아 사용하던 상태였다.
오래도록 인쇄시설이 포진하고 있던 구역에 총독부 체신국이 새로운 건물을 신축한 연혁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6년 12월 20일자에 수록된 「체신이원양성소, 낙성식 성대 거행」 제하의 기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체신국 체신이원양성소는 금년 6월 원정(元町) 3정목 고대지에 기공하여 공사중이던 바 총부지(總敷地) 7,500여 평에 근대식 양옥이 완성되었으므로 19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정오경 동 양성소 대교실에서 미나미(南) 조선총독 대리로 오타케(大竹) 내무국장 이하 관공민 150여 명 참석으로 식을 마치고 별실 강당에서 성대한 피로연이 있은 후 오후 2시경 산회하였다.

 

<경향신문> 1950년 5월 21일자에 게재된 ‘국립체신고등학교(원효로 3가 1번지)’ 관비생 모집공고이다.

 

이로부터 이 공간은 일제의 패망 시점까지 조선총독부가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기반시설로서 우편, 전신, 전화, 항로를 비롯한 여러 체신기관에 종사할 요원들을 배출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연혁 때문인지 해방 이후에도 이 구역에는 체신관련 교육기관이 그대로 점유하였다. 실제로 이곳은 미군정 시기인 1946년에 ‘조선체신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국립체신학교’로 다시 바뀌었으며 이내 ‘체신대학’의 명칭을 달고 운영되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체신고등학교’도 함께 설립
되었으나, 1957년 7월 10일 「체신제학교설치령(遞信諸學校設置令)」에 따라 종전의 체신학교 대학부는 ‘체신학교’로, 종전의 체신학교 고등부는 ‘체신학교 병설 체신고등학교’로 각각 위상이 재정비되었다.

옛 용산 전원국 자리이자 총독부 인쇄국 자리이자 체신이원양성소 자리였던 원효전화국 터는 2018년 4월 이후 ‘KT 용산 IDC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골목길은 1900년에 개통된 용산포구 행 전차(電車)가 오가던 길이기도 하다.

 

1962년 1월 1일에는 두 학교가 폐지되고 체신공무원훈련소가 설치되었으며, 체신공무원교육원과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 등의 명칭변경이 있었다. 1999년 5월 12일에는 새로운 청사가 완공되면서 1936년 체신이원양성소가 이곳으로 옮겨온 지 60여 년 만에 충남 천안으로 이전하기에 이른다.
이와는 별도로 1976년 1월 16일에는 이 구역 안에 원효전화국(元曉電話局)이 신설된 바 있으며, 이 자리는 원효전신전화국과 국제전화국 시절을 거쳐 2018년 4월 이후 지하 5층 지상 5층 규모의 ‘KT 용산 IDC 신축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상태이다. 현재는 이 앞에 ‘군자감 강감터’라는 것을 알리는 문화유적표석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이곳이 1898년 이래 용산 전원국과 총독부 인쇄국과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시절을 거쳐 체신이원양성소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노골적인 경제침탈이 거듭되었던 공간임을 알리는 안내판 하나 정도는 추가로 설치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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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한일 시민들이 함께 외친
“야스쿠니 NO!”―야스쿠니문제 국제회의 온라인 화상회의로 열려

10월 23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야스쿠니문제 국제회의가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되었다. 이 국제회의는 침략신사 야스쿠니의 본질을 폭로하고, 야스쿠니무단합사철폐소송의 현황을 점검하며, 국제사회에 야스쿠니문제의 해결을 호소하기 위해 2016년부터 매년 서울에서 열려왔는데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올해는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사무국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했으며, 동북아역사재단과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후원으로 마련되었다.

 


올해는 2006년부터 시작된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을 맞이하여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 성찰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에 함께 해온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 원고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변호인단, 연구자, 활동가, 지원단, 시민 등이 참가하여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가졌다. 특히 올해 국제회의를 준비하며 온라인 화상회의의 특징을 살려 인터넷 홍보를 통해 일반 참가자를 모집하였는데, 한국과 일본에서 30여 명의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참가하여 야스쿠니문제의 대중화라는 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김영환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에서 이희자공동대표는 개회사를 통해 코로나 사태를 맞아 비록 직접 만
날 수는 없지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함께 싸워나갈 것을 강조하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모든 이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모임’ 사무국장은 스가 정권의 출범을 맞아 대일과거청산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전망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한일시민들의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야스쿠니 합사철폐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아사노 후미오(浅野史生), 오구치 아키히코(大口昭彦) 변호사
는 발표와 토론을 통해 코로나로 지연되고 있는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의 진행상황과 앞으로의 소송전략에 대해 원고 유족들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2부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하는 시간이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제안자이기도 한 서승 공동대표(우석대 석좌교수)는 15년의 운동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이 문제의 해결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한 캠페인,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연구주체의 양성, 유럽에서의 국제회의 개최 등 이 운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언했다. 한편, 평생 동안 모아온 야스쿠니 관련 자료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모두 기증하기도 한 즈시 미노루(辻子実) 야스쿠니반대도쿄촛불행동 공동대표는 야스쿠니반대를 위한 한국 시민들과의 연대를 통해 얻은 성과를 소개하고 국제적인 시민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3부 패널토론은 야스쿠니반대운동에 참여한 청년세대를 대표하여 권다정(청년시대여행) 활동가와 도쿄촛불행동의 사무국으로 활약해 온 나카무라 모모코(中村桃子) 씨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에 참여한 감상과 자신의 변화에 대해 발표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일본과 한국 사무국의 실무를 맡고 있는 이영채, 김영환 사무국장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의 성과와 한계, 과제와 전망에 대해 토론했다. 이날 국제회의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이희자, 최낙훈, 이명구, 박진부, 박남순, 동정남, 박매자, 이병순, 신명옥 어르신들께서 함께 하여 일본의 변호단, 지원단 여러분들과 화상으로나마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코로나를 함께 잘 이겨나가자는 의미에서 응원의 인사를 나누었다. 한편, 회의장 벽면에는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의 원고로 참여했으나, 먼저 세상을 떠나신 원고들(김희종, 임복순, 고인형, 임서운, 윤옥중, 남영주, 최두용, 유충현, 백귀례, 남영주)의 사진으로 채워진 현수막이 걸려 참가자들을 숙연케 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일본의 참가자들은 야스쿠니문제의 해결을 위해 먼저 가신 분들의 몫까지 힘껏 싸워나가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야스쿠니 NO!”를 힘차게 외쳤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수, 2020/12/0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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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20년 교사 직무연수 운영,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 읽기>

식민지역사박물관은 현직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직무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를 주관했다. 이번 연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근현대사 자료들 중에서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사료들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편성됐다. 참여한 교사들은 모두 5차에 걸쳐 ‘니시키
에’, ‘일출신문조선쌍육’, ‘애국반회보’ 등 일제의 선전 자료와 친일, 강제동원으로 대표되는 과거사 청산 과제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10월 27일(화) 진행된 이번 연수의 첫 프로그램, 「니시키에로 본 청일전쟁과 지워진 역사」에서는 강효숙 원광대 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니시키에(錦絵)는 근세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를 모태로 탄생한 회화 장르로, 18세기 후반부터 메이지 시기까지 유행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반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침략주의를 고취시키고 선전 미술로 활용되는 등 어두운 양면을 가진 예술이기도 하다. 강효숙 교수는 니시키에의 화려함 속에 감춰진 일본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에는 조선과 청나라를 ‘야만’으로 격하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한 ‘청일전쟁’이 니시키에를 통해 다시금 조망됐다.
강의를 마친 후 수강생들은 박물관 상설전시실을 방문, 「조선안성도격전지도朝鮮安城渡激戰之圖」 등 청일전쟁 관련 니시키에를 관람했다. 아울러 박물관은 강연장 내에도 10여점의 니시키에를 별도 전시하여 수강생들의 학습과 체험을 도왔다. 이러한 실물 사료 체험에 대해 수강생들은 필요한 부분을 기록하고 때로는 설명을 청하기도 하며 높은 열의를 보였다. 박물관은 앞으로 이어질 연수에서도 사료를 실제로 감상하고 체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편성할 예정이다.
올해 직무연수는 11월 24일까지 이어진다. 2주차 「일출신문 조선쌍육으로 본 일제의 강제병합과 왜곡된 역사 인식」에서는 놀이, 삽화 속에 담긴 일제의 침략 의도를 분석해본다. 3주차 「친일 관련 사료와 디지털아카이브 활용방법」에서는 방대한 일제강점기 사료군에 어떻게 접근하고 활용해야 하는지를 방법론적 측면에서 다룰 예정이다. 제4강과 5강에서는 애국반 회보와 강제동원의 실상을 사료와 사진을 통해 분석해보며 일제 지배 정책의 기만성과 식민지 폭압의 실체를 파헤친다. 다양한 시각, 이미지 자료와 피해자들의 증언 영상을 활용하여 수강생들의 학습 성취를 돕는다. 한편, 이번 직무연수와 관련된 내용은 연수 종료 이후 유튜브 및 뉴스레터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목, 2020/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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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Ⅱ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을 맞아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이라는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이번 강좌는 독립운동가들의 인생 여정을 통해 의열투쟁의 의의를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강좌는 11월 28일에서 12월 13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현장과 온라인 수강을 병행할 계획이었지만 1강과 2강 진행 이후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3강에서 6강은 온라인 수강만으로 변경되었다. 강의는 촬영 후 편집 영상을 홈페이지에 게시함으로써 많은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쉽게 수강할 수 있도록 진행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대전대학교 한성민 교수의 <3개의 총탄이 만든 역사, 안중근>이란 주제로 ‘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나?’라는 물음과 함께 당시 이토의 ‘만주시찰 목적’을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은 <끝나지 않은 3·1운동의 전율, 강우규> 주제로 춘천교육대학의 김정인 교수가 강의하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3·1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강우규의사의 의거와 함께 3·1운동의 흐름을 다시 되짚어줌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3·1운동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강의였다. 첫 주 강의는 방역지침을 준수하기 위해 강사와 현장참여자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한 상황에서 강의를 진행하였다.
3강에서 6강은 수강생 없이 온라인 수강을 위한 강의 촬영으로 진행되었다. 3강 <위대한희생 빛나는 투쟁, 의열단>은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강의하였다. 의열단은 어떤 단체인가 알아보고, 특히 1923년 ‘제2차 대암살파괴계획(황옥경부폭탄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의열단원 김시현과 밀정 황옥을 통해 의열단의 활동과 조선총독부의 밀정 운용에 대해 심도있게 다루었다. 또한 4강 <윤봉길, 한국과 중국을 잇는 폭탄을 던지다>는 남기현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이, 5강 <여성, 광복군에 들어가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승훈 교수가 강의하였다.
6강 <재일조선인의 삶과 저항, 이봉창>은 광운대학교 국제학부 김광열 교수가 진행하였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일본 거주 조선인의 생활 실태, 민족차별과 임금차별에 맞선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정리하고 일본거주 조선인 노동자였던 이봉창이 민족차별에 반감을 갖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과정을 요약하여 이해도를 높여준 강의였다.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Ⅱ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은 1강에서 6강 모두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와 민족문제연구소, 서울시 강북구 홈페이지를 통해서 12월 말까지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2021년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현장과 온라인 수강으로 계획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역사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수, 2020/12/30-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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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줏대있는 중립이 우리의 몫이다

조회환 한국외대 명예교수(4월혁명회 회원)

 

 

이 땅 한반도에서 오천년 역사를 일궈온 우리민족은 당연히 한반도의 토박이고 주인이다. 우리의 무사안일과 외세의 침탈로 인하여 식민지나 분단이라는 쓰디쓴 역사도 있지만, 오늘의 북한 땅이나 남한 땅 모두 한 덩어리의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갖은 곡절 끝에 지금은 미국과 중국 두 초강대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내 땅에 살면서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태도는 타파해야 하며 그 책임은 우리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이제 당당하게 주권을 찾아야 한다.
첫째, 우리 국민, 우리 민족의 주체성 확립이 선결조건이다. ‘근본이 서야 길이 생긴다’(本立道生)는 옛 성인의 말씀을 빌릴 필요가 없이, 우리가 피동적으로 남에게 끌려가거나 의탁하지 않고, 줏대 있게 사는 것은 우리의 당당한 고유권한이다. 우리는 지금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세계 10위 이내 강국 내지 중견국의 지위에 있다. 자생 자립 자위에 필요할 정도의 물질적 실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정신적으로 다시금 ‘3.1 독립혁명정신’이나 ‘사월혁명정신’을 발휘하면 확실히 ‘자기확립’이 되는 것이다. 주인다운 주인이 되려면 타자의 간섭이나 강요는 배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초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상대적으로 약소함을 비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대국들이 우리를 서로 ‘자기 편’ 또는 ‘자기와 유대관계 유지’를 바라고 있는 것은 우리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의 반영임으로, 우리의 지혜 있는 대처가 ‘중요도’의 수준을 결정할 것이다.
둘째,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싸우고 말고는 우리와 상관없다.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설에 의하면 기존 강대국과 새로 부상하는 강대국은 전쟁으로 승부를 겨루는 경우가 ‘많다’는 설인데, ‘꼭 싸운다’는 말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요즈음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는 긴장이 된다. 그 이유는 ① 우리가 미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에, 미중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동맹관계를 파기하지 않는 한, 자동적으로 미국과 함께 총을 들어야 하고, ② 내 땅에 주둔한 미군과 미군기지는 유사시 중국 측의 일차적인 타격 표적이 되어 미군도 다수 희생되겠지만, 우리의 인명과 땅 그리고 재산의 손실은 가공할 수준일 것이므로 우리도 마땅히 반격하게 되어 중국과는 중첩적으로 적이 되는 것이다. 이웃사촌과의 불화는 없어야 하는 것이다. 두 강대국이 자기들의 생존을 위하여, 서로 상대방의 본토 공격은 두려워서 전면전은 피하겠지만 주변지역, 특히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국지전의 위험은 있다. 왜 남들이 자기 땅은 놓
아두고 내 땅에서 싸우는가? 우리는 당연히 ‘반대’ 또는 ‘동조거부’ 자세를 취해야 하며 그러면 외세는 다른 편법을 찾거나 평화의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국제평화를 위해 우리가 중심을 잡자. 더러는 한미동맹만 굳건하면 미국의 위세 때문에 ‘무사태평’할 것으로 착각하고 말끝마다 ‘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라는 말만 앞세운다. 외세의존이 생리화된 심상의 노출이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가 영원히 의탁하기엔 ‘남이라는 한계’가 있고, 또 미국도 이미 중국 러시아와 더불어 3대 군사강대국중 하나일 뿐이다. 미국과 중국의 무력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비교의 기준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대칭적으로 비교하면, 핵무기의 경우 미국이 6천개 중국이 4백 개 정도라니 15대 1이다. 그러나 차이에도 불구하고 파괴력의 무섭기는 똑같아서 비교가 무의미하다. 또 비대칭적으로 보면 여섯 배나 많은 미국의 항공모함 수는 중국의 뚱펑-21, 26 등 ‘항공모함 킬러’ 앞에서는 이미 한물 간 무기라고 중국은 주장한다. 어떻든 전쟁은 서로 무서울 수밖에 없다. 설령 미국이 다소 비교우위에 있다 하더라도 전세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중국 격언에 “아무리 강한 용이라도
현지 토박이 왕뱀을 제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미국은 원거리 원정이라는 공간적 불리함 때문이다. 월남전 등에서 미국이 패한 것은 약해서가 아니지 않는가? 이제는 우리가 중심국이 되어 전쟁은 말리자는 것이다. 사실 과거 열강들은 식민지화를 당연시해왔고 현지 민간인 대량학살이나 노예화는 다반사가 아니었던가 ! 이제 우리나라는 중견국이 되었고 또 국민의 결기도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가 일어서는 한 어느 나라도 단독으로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없는 위치이다. 우리의 자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강대국들의 ‘경계적 관심’도 그렇게 만든다. 그래서 중심만 잘 잡고 중지를 모으면 더욱 확실하게 ‘세계의 중심국’까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부턴 세계의 스포트라이트(the Spotlight)를 받아가며 강대국들의 헤게모니 쟁탈행위를 막고 평화공존의 길로 가도록 견인할 책무와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넷째, 이제 강대국들에게 ‘잘못된 과거사’의 해결을 촉구하자 한반도의 분단은 미국의 제안과 러시아(당시 소련)의 동의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원래 분할한다면 패전국이자 전범국인 일본을 분할 점령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상하게도 우리 땅 남과 북을 분할 점령하였으니 미소 양국이 애당초 잘못했던 것이다. 북한의 남침을 개탄하지만, 분단되지 않았다면 남침은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군은 일찍 철군했지만 그 대신 인접한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했고, 미군은 한국의 ‘동맹국’이라는 새로운 지위로 인해 한국주둔을 계속하고 있다. ‘안보’라는 이유로 ‘어떤 조건’ 동안 ‘장기 주둔’을 이해할 수 있으나 ‘너무 장기주둔’을
‘허용’하거나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분단의 폐단은 ‘통째 점령’ 보다 결코 더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일제 때는 맨 북쪽의 함경도와 평안도민부터 맨 남쪽의 전라 경상 제주도민까지 알게 모르게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하여 서로 사랑하면서 국내외에서의 의병전투나 독립투쟁 등 대일항전을 하던 국민일체감이 살아있었다. 지금은 남북 동포간의 적대관계라는 ‘민족 내부의 불행’과 ‘외세에 대한 부담’이라는 2중의 장애에 직면해있다. ‘분할통치’(divide and rule), 그것은 제법 식자연할 용어이지만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인 ‘간악한 이간질’이며, 이간시킨 자는 손쉽게 ‘이간당한 자들’을 조종하니 우리의 비극은, ‘외세의존’에 타성(惰性)화된 자기망실 상태에 있으며 이대로 가면 거의 ‘영구적’으로 지배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묶은 자라야 (묶인 자를) 풀 수 있다’(結者解之)는 말은 지당한 얘기이다. 묶은 자가 풀어 주지 않는다면, 풀어줄 만한 제3자라도 있어야 하는데, 있기도 쉽지 않고, 있다 해도 ‘묶인 자’의 요청과 ‘묶은 자들’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묶은 자들을 향해서 풀어달라는 요구를 끝까지 관철하는 것이 관건(關鍵)이다. 국제정치에서는 ‘힘이 곧 정의’라는 악담이 난무하지만 ‘정의’가 꼭 없는 것도 아니고, 만약 없다면 있게 해야 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미국주도의 평화체제(Pax Americana)가 오래이다 보니 결함도 많았다. 그러나 이 체제의 핵심도 원래는 ‘평화’가 먼저이고 ‘주도권’ (hegemony)은 그 다음이다. 그 점도 미국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상생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중심국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책무이다. 동시에 “단계적인 평화통일”이건 “연방제 평화통일”이건
남북은 자주적으로 허심탄회 얘기하여 통일된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통일의욕을 상실하고 분단생활에 안주하여 나몰라하면 점점 더 잘게 분열하고 콩가루가 되어 결국은 남의 손쉬운 먹이가 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통일을 이루어 더욱 확실하게 줏대있는 중심국이 됨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국제평화도 주도해야 될 것이다.

수, 2020/12/30-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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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효창독립커피 4탄 김창숙 커피, 5탄 지청천 커피 출시

 

연구소는 일상 속에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자 효창독립커피를 기획하여 4월 차리석 커피를 시작으로 이상룡, 권기옥 커피에 이어 12월 24일부터 김창숙 커피와 지청천 커피를 선보인다. 김창숙 커피의 디자인은 국외 독립운동유적지를 찾아 알리고 있는 사진작가 김동우 회원이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안에 있는 김창숙 선생 동상을 촬영했으며 한글 글씨는 이진경 작가가 써주었다. 지청천 커피의 디자인은 이윤엽 판화가가 제작했다. 효창독립커피 구입은 hyochangmall.com(효창몰)에서 가능하다.

수, 2020/12/3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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