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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100주년 특집] 3편, 독립운동에 남녀가 어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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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100주년 특집] 3편, 독립운동에 남녀가 어디 있나

익명 (미확인) | 금, 2019/03/22- 01:38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임정 100주년 특집]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3편, 독립운동에 남녀가 어디 있나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3월 14일 (목요일)
■ 대담 : 예지숙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성우 전해리, 이기호, 이항증 선생

[임정 100주년 특집] 3편, 독립운동에 남녀가 어디 있나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함께 준비한 특집 코너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오늘 세 번째 시간입니다. 세 번째 시간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도움 말씀 주시기 위해서 민족문제연구소 예지숙 연구원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예지숙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하 예지숙)> 네, 안녕하세요. 예지숙이라고 합니다.

◇ 이동형> 오늘 해볼 얘기는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인데, 앞에 오프닝에서도 잠깐 나왔습니다만, 독립운동에 남녀가 따로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평가는 활발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 아니겠습니까?

◆ 예지숙> 그렇죠. 여성의 독립운동 활동이라고 하는 것을 내조나 지원 정도로 생각하면서 보조적 행위로 봤기 때문이고요. 또 한 부분은 이게 전반적으로 일제의 탄압받는 민족 수난사에서 희생의 상징으로만 여성들을 부각했던 거죠. 그래서 우리가 유관순 열사 정도만을 기억하게 된 그런 이유가 됐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후세 사가들의 노력이 부족했다, 이런 점도 있지 않을까요?

◆ 예지숙> 물론이죠. 특히 민족 운동사를 구성하면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은 굉장히 미진했고요. 지금에 있어서 여성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면서 학계 내에서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죠.

◇ 이동형> 그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 역사를 봐도 남성 중심으로 쓰인 역사가 많으니까요.

◆ 예지숙> 그렇긴 하죠. 여성사, 젠더사, 아무래도 한국 사회에서 젠더 이슈가 부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인 요구에 학자들이 부응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 이동형> 네,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정말 앞장서서 스스로의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독립운동가도 당연히 있고요. 유관순 열사도 마찬가지고, 박차정 열사도 마찬가지죠. 게릴라전에 직접 참여했으니까. 이런 분들도 있고, 또 정말로 김구 선생의 아내분이라든가, 어머니라든가, 또 남편이나 아들이 잘할 수 있도록 내조를 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 분들에게도 서훈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죠?

◆ 예지숙> 네, 있죠. 활동을 단지 내조나 안사람의 일, 아내의 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그런 상황이라고 하는 게 상당히 임시적 상황이고, 더불어서 아직은 아주 적확하지는 않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게 굉장히 난민적인 상황인 거죠. 그런 상황 속에서 이분들이 하는 활동이라고 하는 것을 단지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아내의 일이라고 하는 것으로 국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이동형> 특히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여성 학생들, 또 3.1 운동에 참여했던 여성 학생들, 송죽 결사대, 대한애국부인회, 조선애국부인회 등 굉장히 많습니다. 단체도 있고, 개인도 있고요. 3.1 운동도 이후 임시정부로 이어진 민족 운동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여성 독립운동가들, 한 분, 한 분 정리해주시겠습니까?

◆ 예지숙> 네, 아주 여러분이 있는데요. 일단 2.8 독립선언과 3.1 운동에서 활약했던 중심적인 그룹은 여성 학생들 그룹인 것 같고요. 그리고 임시정부 해외 망명가 그룹에 있어서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인 이은숙, 이상룡의 손주 며느리로 알려진 허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인 곽낙원, 상해 임시정부의 안 살림꾼이라고, 이분의 밥을 안 먹은 사람이 없다, 하는 정정화, 장강일기라고 하는 회고록을 남기셔서 연구에 큰 도움을 주신 분들인데요. 해외 망명 여성운동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이동형> 다른 분들은 어떤 분들이 계실까요?

◆ 예지숙> 이외에도 윤희순 열사라든가, 여성 최초의 의병장이라고 하는 윤희순 열사라든가, 굉장히 늦은 나이에 항일 운동에 뛰어든 남자현. 영화의 모델이 되기도 하셨던 분이죠.

◇ 이동형> 전지현 씨의 모델이었죠.

◆ 예지숙> 그렇죠. 그리고 조금 독특한 분들이 있어요. 20년대 후반에 을밀대의 투사라고 당시에 알려졌던, 조선사를 들썩들썩하게 했던 강주룡. 이분은 엘리트가 아니라 하층 여성에서 성장한 여성운동가입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 엘리트 그룹이기는 한데, 허정숙, 주세죽,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고, 공간적으로도 넓고, 이념상으로도 넓은, 아주 다양하고,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 이동형> 허정숙 선생이나 주세죽 선생의 경우에는 여성 운동동도 열심히 했던 분으로 알려졌는데, 강주룡 선생은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갔다? 이것은 어떤 뜻입니까?

◆ 예지숙> 고공농성을 하셨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이분이 평양에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파업을 주도하다가 그 파업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고공농성을 하시고, 그게 당시 동아일보 신문에 크게 보도되면서 여성노동자로서 주목을 크게 받으셨던 분입니다.

◇ 이동형> 작년 대통령 광복절 기념사에서도 언급됐던 분이라고 하는데요. 저도 잘 모르는 것을 보면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 같아요. 그게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가장 문제 같습니다.

◆ 예지숙> 이분이 또 하층 여성이다 보니까 자료가 워낙 없는 분이기는 한데, 소설로도 재현돼서 접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제가 아까 허정숙, 주세죽 이야기를 하면서 그 시대에 여성주의 운동도 열심히 했다고 했는데요. 당시 시대상이 아무래도 봉건적, 남성 위주의 시대상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여성이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것은 독립운동뿐만 아니고 정치, 사회적으로도 시사점이 있을 것 같아요.

◆ 예지숙> 그렇죠. 여성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주체로 선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여성 규범이라고 하는 것을 변화시키는 일인 거죠. 그러면서 여태까지 우리가 많은 열사들, 독립운동가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분들을 읽어내는 방식이라고 하는 게,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하는 게, 운동사적인 맥락에서 어찌 보면 여성 영웅호걸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읽어냈던 것 같아요. 또 하나는 이분들이 민족에 대한 헌신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성 규범이라고 하는 것들을 변화시켜냈던 분들이라는 맥락에서도 함께 읽어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이동형> 알겠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어봤고요. 지금부터는 몇 분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짚어보겠습니다. 임천각의 종부 허은 지사가 서훈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여성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한 시조부, 이상룡 선생이 남긴 석주 유고, 시아버지 이준형 선생의 유서 등의 자료에서 공적이 확인됐기 때문인데요. 이와 관련해서 허은 지사의 아들, 이항증 선생은 이렇게 기억합니다.

◆ 이항증> “우리 어머니가 서훈받기까지는 참 당신에게 나라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라 찾는 데 온갖 고생을 다했다는 것. 우리 할아버지가 일본의 압박에 유서를 써놓고 자결했거든요.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효가 지극해서 아들인데 부탁하기를 다른 사람 같이 대하지 말고, 아주 무겁게 대하라고 유서에 일부러 썼을 정도죠. 유서 한 장짜리 한 부분입니다. 제일 큰 형님의 이름이 도정입니다. ‘도정이 모친은 효향이 지극하여서 우리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무겁게 대하도록 해라.’ 그러니까 독립운동을 하는데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다른 보통 부인과 같이 대하면 안 된다, 동료로 대하라, 이 말이죠. 특별 지시입니다.”

◇ 이동형> 이항증 선생의 증언을 듣고 왔는데, 저도 고향이 안동이어서 이항증 선생도 동향이니까 오랜만에 정겨운 사투리를 들어서 반갑기도 한데요. 이분 없이 시할아버지 이상룡, 시아버지 이준형, 남편 이병화, 이런 선생들의 독립운동이 과연 가능했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 예지숙> 네, 거의 불가능했겠죠. 독립운동하면서 밥도 먹어야 하고, 기본적으로 생활을 해야 하는 건데요. 그리고 1년 365일 어떤 조직운동을 하거나 사실상 총칼을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기본적으로 이런 재생산이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역할들은 당시에 밥하고 빨래한 것이 무슨 독립운동이냐고 폄하하기에는 너무 아쉬운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이동형> 그래서 유서에서 우리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무겁게 대하라, 이런 이야기를 했겠죠. 그리고 이상룡 선생 집안은 이상룡 선생만 독립운동한 것이 아니고, 이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에요. 종부로서 당연히 여러 가지 일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허은 지사가 남긴 회고록이 있는데요.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애국지사들의 만주 망명과 정착 과정 당시의 상황을 서술하고 있는데, 그중 한 대목 들어보겠습니다.

◆ 성우>“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는데, 때거리는 부족했다. 삼시세끼가 녹록치 않았다. 점심 준비를 위해 어느 때는 중국인에게서 밀을 사다가 마당 땡볕에 앉아서 맷돌로 가루를 내어 반죽해서 국수를 해먹었는데, 고명 거리가 없어서 간장과 파만 넣었다. 양식이 없던 어느 해는 좁쌀도 없어 뜬 좁쌀로 밥을 해먹었는데, 그것으로 밥을 해놓으면 색깔도 벌겋고, 곰팡내가 나서 아주 고약하다. 서간도의 추위는 참으로 엄청나다. 공기도 쨍하게 얼어붙어 어떤 날은 해도 안 보이고 온 천지에 눈서리만 자욱하다. 하늘과 땅 사이엔 오로지 매서운 바람소리만 가득할 뿐이다. 언젠가 이을규 형제분과 백정기, 정화암, 네 분이 오셨다. 그날부터 먹으며 굶으며 함께 고생하는데 ‘짜돔’이라고 하층민들이 먹는 곡식조차 할 수 없었다. 강냉이로 멀건 죽을 쑤어 연명했다 내 식구는 오히려 걱정이 안 되나, 노인과 사랑에 계신 선생님께 너무도 미안하여 죽을 쑤는 날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었다.”

◇ 이동형> 임청각 99칸 대저택을 가지고 있었던 이상룡 선생 일가인데, 노비도 해방시키고 전 가옥, 전답을 팔아서 독립운동하러 만주로 떠났고, 거기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강냉이로 멀건 죽을 쑤어서 연명했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만주에서의 생활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글인 것 같은데요. 아까 우리가 잠깐 정정화 선생님 이야기도 했습니다. 스무 살의 나이로 먼저 상해로 떠난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을 돌보러 갔다가 임시정부 안살림까지 떠맡아서 김구 선생이 조선의 잔다라크다, 라고 칭했던 사람이죠?

◆ 예지숙> 네, 그렇죠. 이분 같은 경우는 그러면서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쭉 맡아서 하게 되는데요. 이분 일화 중에 굉장히 중요한 일화가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너무 빈곤하고 어렵다 보니까 엄혹한 상황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독립운동 자금인데 생활비죠. 생활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국경을 굉장히 여러 번 담대하게 넘나들었다고 하는 거죠. 이런 분들을 보면 계속 이 활동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실제 이분들이 임시정부의 굉장히 큰 경제적인 역할도 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것을 단지 아내나 안살림이라고 이야기를 또 이 부분에서 그렇게 제한하는 게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 이동형> 그리고 의열단 여성투자 박차정. 김원봉의 아내로 알려진 박차정 의사. 박차정 의사는 역시 박차정 혼자만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고, 여기도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집안입니다. 그런데 박차정 열사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가 조선의용대 군인이 되어서 자기 남편, 그리고 오빠와 함께 게릴라전투에 참여했었고요. 1939년 2월에 중국 강소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당했고, 그 후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해방을 보지 못하고 중국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나중에 남편인 약산 김원봉이 해방 후에 유해를 안고 고향 밀양으로 와서 묘를 마련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아까 우리가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김 마리아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해봐야겠습니다. 김 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다면, 대한은 독립되었을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데, 어떤 인물이죠?

◆ 예지숙> 김 마리아는 근대 교육을 일찍이 받은, 3.1 운동을 통해서 등장한 여성 학생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입니다. 1892년 황해도 장연군 소래라고 하는 지역에서 출생했고요. 이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소래라고 하는 지역이 워낙에 한국에서 기독교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기독교 공동체이고, 여기서 민족운동가들이 많이 나온 지역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거고요. 소래에서 학교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정신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1919년에 2.8 독립선언을 주도하죠. 그리고 2.8 독립선언을 주도하고 그것을 국내에 확산시키기 위해서 국내로 들어와서 광주, 부산, 그다음에 자신의 고향을 돌아다니면서 쭉 3.1 운동을 전국화하게 됩니다. 워낙에 당시 여학교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고 여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지방으로 퍼져나가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한 근대 여성 네트워크를 통해서 이분이 3.1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었고요. 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이후에는 다시 나와서 계속적으로 저항을 하게 되고, 출옥 후에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해서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일을 하죠. 그리고 계속 말씀드리면 그 이후로 상해로 망명을 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 이동형> 1919년에 한 번 체포되었고, 이후에도 귀국한 뒤에 또 한 번 체포되고, 두 차례 투옥 중에 받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에 광복을 불과 1년 앞두고 순국했는데요. 1919년 9월 김 마리아 열사가 작성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취지서를 들어보겠습니다.

◆ 성우> “고어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 같이 사랑하라 하였으니 가족의 집이지만,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제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성립하지 못하고, 나라는 국민의 나라이나 국민 중의 한 사람이라고 나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 나라를 보존치 못할 것은 우부우부라도 밝히 알리로다. 오호라.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로 본회가 설립된지 수년 이래로 적의 압박을 입어 어떠한 곤란과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고 은근히 단체를 이루며 비밀히 규모를 지켜 장래의 국가 성립을 준비하다가 독립국 곤란 중에 부인도 십에 이가 참가하여 세계의 공안을 놀라게 하였으나 이것에 만족함이 아니요. 국권과 인권을 회복하기로 표준삼고 전진하며 후퇴하지 아니하니 국민성 있는 부인은 용기를 함께 분거하여 이상을 상통할 목적으로 단합을 위주하여 일제히 찬동하심을 천만 위망하나이다.”

◇ 이동형> 김 마리아 여사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할 당시에 어떤 생각으로 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고요. 김 마리아 여사가 한국 저고리 안쪽 앞섶 길이가 달랐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뭡니까?

◆ 예지숙> 그 이유가 고문을 심하게 당하면서 가슴 한 쪽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하죠.

◇ 이동형>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 김 마리아 여사가 남긴 말인데요. 누구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희생했음에도 여전히 이름도 없이 누구의 아내, 누구의 가족으로만 기억되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분들의 이름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우리 후손들의 역할은 무엇이 있을까요? 끝으로 정리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예지숙> 많이 기억을 하고, 국가에서 전반적으로 이것을 제도화하고, 보훈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시민사회에서 이런 것을 기억하고요. 그리고 더불어서 여성들이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네,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세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독립운동에 남녀가 어디 있겠나. 민족문제연구소 예지숙 연구원과 함께 해봤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예지숙> 네, 감사합니다.

<2019-03-21> YTN 

☞기사원문: [임정 100주년 특집] 3편, 독립운동에 남녀가 어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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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 선생 29주기 추모 답사기

임무성 교육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천안지회·아산지회가 주최하고 충청남도 교육청이 후원하는 임종국선생 29주기 추모 답사가 11월 11일에 진행되었다. 답사 여정은 천안삼거리 공원→요산재(임종국선생 서재, 살림터)→천안공원묘원(무학지구 철쭉 4-1)→신부공원(임종국선생 조형물) 순이었다.
뿌연 미세먼지를 뚫고 천안삼거리공원 주차장에 참가자들이 집결하였다. 본부에서는 방학진 기획실장, 강대운이 참가하였고, 지부 참석자들은 이민우 운영위원장 부부, 권희용 충남지부장, 최기섭 천안지회장, 홍남화 아산지회장, 최요식 세종지부장을 비롯하여 35명가량이었다.
수많은 차로 빽빽한 천안삼거리 공원 주차장 한가운데 눈에 확 띠는 낡은 화물차에 스티커로 붙여진 ‘친일청산’ 구호가 반갑게 답사 일행을 맞아주었다. 천안 사람들에겐 이미 명물이 된 트럭이라 한다. 주차장 한켠엔 충남도교육청에서 지원한 대형버스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임종국선생이 살던 요산재는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가야 하는 탓에 회원들 승용차에 분승하여 출발하였다.
천샛골 낚시터를 지나 몇 굽이 산길을 오르니 가파른 산자락 아래 추모객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듯한 선생님 서재로 쓰시던 집이 나타난다. 1980년 식구가 다 같이 이사와 산 곳으로 가옥, 창고, 과수원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도 대중교통으론 왕래가 쉽지 않은 곳으로 선생님 살아 생전엔 천안삼거리 공원에서 한 2km를 걸어 들어와야 했던 곳이다. 요산재(樂山齋)란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쉽게 알 수 있겠다. 선생은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집필에 전념하며, 밤농사 등으로 생계도 해결하려 하셨던 것이다. 농사 중엔 밤농사가 그래도 손이 덜 가는 편이라 한다. 지금은 선생이 기거하고 글 쓰시던 건물은 새롭게 개축되어 있고 선생이 심은 밤나무 외에 아로니아 농사, 토종꿀 양봉도 추가로 하며, 얼마 전 추수에서 귀하다는 옥광밤을 3톤이나 수확했다고 한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시며 펜을 잡고 있던 선생의 모습이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친다.
(지금 이곳엔 캐나다 이민 갔다 돌아온 노부부가 살고 있다. 답사일행이 도착했을 땐, 교회에 가서 주인 없는 집에 불쑥 방문한 불청객을 향해 목이 터져라 짖어대며 경계를 늦추지 않던 세마리 애완견도 손자 손 붙잡고 들어오는 주인을 보자 꼬리를 흔들어대며 조용해진다. 구입할 땐 몰랐는데, 큰 존경을 받는 일을 하신 분이 살던 집에 살게 되어 놀랍기도 하고 영광이라 하며 답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충남지부 회원들은 요산재 입구에 있는 천샛골 낚시터 앞에 ‘임종국 선생 거처’라는 안내표지판을 세우는 것을 내년의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내년은 임종국 선생 서거 30주기라 추모객이 더 많이 올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집 앞 마당에 작은 비석을 세우는 것은 이미 주인의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추모객 일행은 다시 천안삼거리공원으로 돌아와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이동하여 천안공원묘지에 도착했다. 꽤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인데도 묘소 앞까지 버스가 올라간다. 선생은 나주 임씨 가족공동묘 3기 중에 앞쪽 동생 묘와 대각선으로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참여한 회원들은 선생의 숭고한 뜻을 한마음으로 되새기며 이민우 운영위원장을 필두로 술 한 잔, 담배 한대 올리고 추념 후 음복을 했다. 그리고 다 같이 우렁차게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고 하산하러 버스로 향했다.
산이라 그런지 낮인데도 날이 쌀쌀해졌다. 다시 버스로 20분 정도 시내 쪽으로 이동하여 신부 공원에 도착했다. 추워진 날씨에 목도리를 하고 계신 임종국 선생 조형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3626명의 역사독립군의 후예가 부활시킨, 예의 꿰뚫는 듯한 눈빛의 역사독립군 대장 임종국 선생 흉상. 한 해 먼저 자리 잡은 ‘평화의 소녀상(2015)’, 선생보다 한 해 뒤에 입주한 ‘6월민주항쟁 30주년 표석(2017)’이 사각 모양의 공원 세 군데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생전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한 작업을 평생의 업으로 삼으셨던 분에게 사후에 마음을 터놓는 든든한 동지들이 생겨 공원에 화기가 돈다. 지역 이름을 따서 ‘신부공원’이라 불리는 곳인데, 조형물들의 성격을 감안해서 ‘평화의 공원’으로 개명하는 운동에 충남지부 회원들이 앞장서고 있다.
이곳에서도 묵념을 올리는 한편, 참가자 모두는 다시 한 번 선생의 뜻을 기리며 민주와 평화와 통일을 향한 각오를 새로이 다졌다.

수, 2019/01/0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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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국세현 기획실

 

12월 5일 2018 항일음악회에서 힙합퍼포먼스를 선보인 이지 크루(EZ crew) 박원상 대표(37)가 인터뷰를 위해 연구소를 찾았다. 이지 크루는 이번 항일음악회 ‘독립군 아리랑, 다시 부르는 희망의 노래’에서 더 히스토리(The History)라는 제목으로 색다른 힙합 퍼포먼스를 펼쳐 보여 젊은 관객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문 : D.VIVE는 무슨 뜻이고 어떻게 생겨난 말인가요?

답 : D.VIVE는 사전에 없는 말이에요. 대한민국의 D와 만세의
VIVE를 결합한 말인데 제가 만든 신조어예요. 처음에는 사실
D.VIVE라는 이름만 만들어 놓은 상태였어요. 근데 D를 놓고 보니
까 대한민국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대한민국 만세가 되는 거
예요. D는 댄스의 첫 글자이기도 하니까 댄스 만세도 되잖아요. 같이 하는 동료들과 어
렵지 않게 D.VIVE를 대한민국 만세라고 정했어요. 저희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 거지요.
시작은 그랬어요

문 : 민족문제연구소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요?

답 : D.VIVE가 새겨진 옷을 만들었는데 그 판매수익금을 좋은 일에 쓰고 싶었어요. 마침 8·15 광복절도 다가오는데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기부하는 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죠. 근데 이상하죠? ‘대한민국 만세’라는 말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궁금해졌어요. 우리나라는 도대체 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을까?
궁금하긴 한데 학창시절에 그런 걸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더라구요. 정확하게 가르쳐준 선생님들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혼자 책도 읽고 검색도 하며 찾아봤죠. 여기저기 전화해서 물어 봤어요. 하지만 다들 맨숭맨숭하게 그런 거 알아서 뭐 하게 하는 분위기였는데, 연구소에선 우선 만나자고 하더라구요. 그날 바로 방학진 실장을 만났죠.
방 실장과 만나서 제가 생각한 것들을 의논했어요.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둘러봤지요. 둘러보고 나니 우리가 알고 있는 근현대사, 특히 친일파에 대해서는 다시금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어린 후배들에게 친일의 역사를 새롭게 일깨워 주고 싶었어요. 때마침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개관한다고 하니 옷 판매수익금을 박물관에 후원하겠다고 하자 흔쾌히 그러자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인연이 닿았어요.

문 : 이지 크루가 힙합 퍼포먼스로 2018 항일음악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답 : 공연을 준비하게 된 것은 방학진 실장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였어요. 그날 방학진 실장과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과 남영역 부근에 있는 경찰청 인권센터, 남영동 대공분실에 갔었죠. 저는 아직은 영웅적인 이야기가 더 와닿는 편인데 김구 선생 등 독립지사들이 계신 효창공원이 그랬어요. 그날 정말 좋았어요. 둘러보고 나서 방학진 실장이 힙합 퍼포먼스 형태로 독립지사 추모극을 만들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그 말에 공감했어요. 청소년과 청년들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흥미롭게 역사를 느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어요.
사실, 정확한 연도와 날짜를 안다고 해서 역사를 아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이 그때 어떤 감정이었고 어떤 각오였는지를 느껴보는 것이 진짜 역사를 알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춤과 몸짓, 힙합으로 그걸 전달하면 좋겠다 싶었죠.

문 : ‘더 히스토리’를 준비하는 과정은 어땠나요?
답 : 항일음악회에 공연을 올려보자고 하니까, 처음에는 “그래, 해 보든가. ” 시큰둥한 반응이었어요. 근데 며칠이 지나니까 참가하는 친구들이 자기 역할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그에 대한 의견을 내는 거예요. 어떤 친구는 이완용에 대해 찾아보고 와서는 “이놈은 빠진 데가 없더라구! 안 좋은 조약이란 조약에는 다 들어가 있어. 친일계의 삼관왕이야!” 그러더라구요. 또 다른 친구는 “일본군 옷 못 입겠어요. 죄지은 기분 들어요. 다음엔 좋은 역 하고 싶어요.” 라구 말했죠.
처음에는 별 생각 없던 친구들이 점점 변해가는 가는 모습이 보였어요. 춤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었어요. 전 이때 정말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역사를 제대로 아는 마음은 선한 마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문 : 이번 공연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답 : 공연 준비와 연습 시간은 딱 한 달이었어요. 아주 짧았죠. 일제에 침략당하는 우리 근현대사의 초반이라는 중심 이야기는 정해져 있었지만 이야기들 간의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부분은 시간부족으로 잘 잡지 못했어요. 예를 들면 친일파들이 변질되는 과정을 더 섬세하게 그리지 못한 것이죠. 친일파들의 옷
이 조선 관료복에서 양복으로 바뀌고 양복입은 관료들에게 일제가 훈장을 달아주는 식으로 친일의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친일파들이 훈장을 받을 때 백성들이 핍박받는 장면도 넣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어요. 춤은 대사 없이 동작으로만 감정을 전달하는 장르인데 사실적이면서도 역동적인 감동 전달 장면이 좀 부족했어요.

문 : 공연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답 : 공연을 준비하느라 한달 동안 친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이지 크루 잠실본점에서 매주 금, 토, 일마다 모여서 4시간 이상 연습했어요. 연습기간이 아이들 중간고사 기간과 맞물려 있어서 더 힘들었지요. 부천이나 동탄에서 사는 아이들이 많아서 오가는 시간도 꽤 걸렸고요.
이번 공연이 첫 무대인 아이들도 있고 평생 춤을 추고 싶어하는 아이들도 있어요. 그런 아이들에는 의미 있는 좋은 무대였지만 사실 아이들 입장에선 예쁘지 않은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걸 싫어하거든요. 그런데도 불평도 없이 묵묵하게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 줘서 고맙고 기특했어요. 다음엔 의상도 신경 써서 만들어 주고 싶네요.

문 : 박원상 대표님은 왜 춤을 추나요? 무대에 올린 공연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답 : 춤은 그냥 좋아요. 춤을 추는데 많은 의미가 있다면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요. 중고등학교때 장기자랑에 나가면 후배들이 “오빠~” 외치며 환호하잖아요. 그때 그 기분이 좋아서 춤을 췄어요. 그 마음이 아직까지 남아서 춤을 추는 것 같아요. 무대의 시간은 나만의 시간이잖아요.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 시간이죠. 물론 책임감이 따르죠. 잘 하면 환호와 박수를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되죠. 그래서 부단한 연습이 필요해요.
저는 대회 참가 경력보다는 공연과 작품을 만드는 일을 더 즐겨했어요. 슈퍼모델 선발대회 개막 작품, 부산 원아시아드 BOF페스티벌 개막 작품들을 만들었어요. 한국전력에서 후원한 뮤지컬에는 예술 컨설팅도 했구요.
춤을 같이 시작한 친구들이 현장에서 춤을 출 때 저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교습 분야로 먼저 나왔는데 다행히 가르치는 게 제 적성에 맞는 듯해요.

문 :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답 : 힙합으로 표현하는 우리 근현대사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어요. 첫 번째 이야기는 일제 침략부터 3·1운동까지예요. 이번 항일음악회에 올린 것은 그 이야기의 한 부분이예요. 두 번째는 만주에서 벌어진 항일투쟁 이야기고 세 번째는 안중근, 윤봉길 의사와 같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어요. 네 번째 이야기는 해방과 그 직후 대한민국의 상황을 그리고 싶어요. 해방 직후에 복잡한 역사적 상황들이 많지만 희망차고 힘차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특히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있어요. 민족문제연구소가 많이 도와주실 거지요? (하하) 젊은 춤꾼들과 청소년, 일반인들이 모여 3·1운동 100주년을 표현해 보는 거죠. 가족이나 남녀노소 누구든 참여해서 그날을 느끼고 즐길 수 있도록요. ‘리멤버 기억하라, 1919’ 이런 주제가 되겠죠.
사실 삼일절이나 광복절 날 하는 공식 행사는 재미없잖아요. 21세기 아이들에게 19세기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그런 방식은 역사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죠. 100년 전 3·1 운동을 청소년들에게 알리고 싶다면 요즘 아이들의 방식으로 표현해야 해요. 힙합이나 비보잉 같은 스트릿 댄스(street dance)가 아이들의 하고 싶은 말을 조금이라도 대신하면 좋겠어요.

수, 2019/01/02-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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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안미정

 

 

 

• 지난 11월 9일, 12회 임종국상 시상식에 앞서 고(故) 임종국 선생의 부인인 이연순 여사가 임종국 선생이 즐겨 연주하던 클래식 기타 1점을 기증했다. 생전에 임종국 선생은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악기 연주에 능했다. 클래식 기타는 수준급이었고 첼로 역시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가 연주하는 모습은 사진과 악보집으로 남아있다.

• 11월 16일,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인 채영희 회원(대구지부)이 비녀 2개와 화로에 꽂아 두고 쓰는 작은 부삽 1점을 기증했다. 비녀는 채충식 선생의 가문이 지난날 높은 벼슬을 했던 증거인 정경부인貞敬夫人의 비녀로 가보처럼 소중히 간직해온 유물이다.

• 11월 18일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광도신사廣島神社: 시민생활편> 1권을 기증했다.

• 11월 23일 언주중학교 동아리 다온(박정빈, 이다윤, 이상우, 이어진, 정소양)이 독도 알리기 L자형 홀더 500장을 기증했다. ‘독도, 이것만은 꼭 알고 가자’의 제목으로 한·영판 홀더를 만들고 전교생에 배부, 독도 빙고 게임, 독도 사랑 교내캠페인, 독도 골든벨 등 독도를 알리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 11월 27일 가와구치 사치코 씨가 <딸이 전하는 아버지의 역사>(이흥섭 지음) 1권을 기증했다. 이 책은 1944년 5월 황해도 곡산에서 콩밭을 매다 일본으로 끌려가 광산 노동을 하고 해방 후에도 어려운 생활을 한 이흥섭 씨의 이야기로 일제시기 강제동원의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의 성격이 강하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수, 2019/01/02-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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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7일 오후 6시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이하 ‘역사재단’) 주최로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에서 강만길저작집 출간기념회를 열었다. 강만길 고려대명예교수의 의사에 따라 직접 논문 지도를 받은 제자들만 참여하는 소박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신용옥 역사재단 상임이사의 사회로 진행된 기념식에서 저작집 간행위원회 대표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이어 신용옥 이사가 저작집 출간 경위
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제자인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의 감사인사, 저작집을 펴낸 창비 기획편집위원장인 백영서 교수 및 임헌영 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강교수는 답사에서 “이번 저작집 역시 학자로서 치열하게 살고자 한 삶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며 “앞으로 후학들이 나를 넘어서는 뛰어난 연구업적을 남기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고 소회를 밝혔다.

 

강만길저작집은, 역사재단이 2010년부터 기획한 것으로 역사재단과 창비사의 2년간의 노력 끝에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출간 40주년을 기념해 올 12월에 간행된 것이다. 강교수의 첫 저작인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을 시작으로 초판 출간 연도에 맞춰 19권의 저서를 순서대로 배치하고 2010년에 나온 〈역사가의 시간〉은 자서전이라는 성격을 고려해 저작집의 마지막 권으로 했으며 미출간 원고도 한 권의 단행본으로 엮었다. 특히 제자 20명이 각 저서에 대한 사학사적 의미를 조명하는 해제를 실어 그 의의를 더했다.
• 편집부

수, 2019/01/02-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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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9/01/0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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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2018/12/3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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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寄金正恩

 

壓制連三代(압제연삼대)

衆言未久亡(중언미구망)

民飢君飽喫(민기군포끽)

共産若豺狼(공산약시랑)

 

김정은에게 거듭 띄우는 글

 

압제하는 정치가 三代를 이으니

뭇사람 未久에 망한다고 말하네

백성은 굶는데 임금은 배부르니

공산주의란 승냥이와 이리 같네.

 

<時調로 改譯>

 

壓制三代 이으니 未久에 망한다 하네

백성은 굶고 있는데 임금은 배부르니

오호라! 공산주의란 豺狼과도 같다네.

 

*壓制: 권력이나 폭력으로  남을  꼼짝 못 하게  강제로  누름 *三代: 아버지, 아들,

손자의  대. ≒삼세(三世)  *衆言: 많은  사람의  말 *未久: 얼마 오래지 아니함

*飽喫: 배부르게 먹음. 포식(飽食). 포복(飽腹) *共産: 공산주의(共産主義).

을 공동(共同)으로  관리하고  소유함  *豺狼: 승냥이와 이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

 

<2019.1.4, 이우식 지음>

금, 2019/01/04-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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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급식이 아닌 학교 다닐쩍에 도시락 처먹던 세대들은 잘 알게야. 

점심시간에 애들끼리 도시락 먹으면 당연 서로 같이 싸온 반찬 나눠먹고 하는게 올바른 것이며 국가간 외교로 따지면 주는게 있으면 받는게 있는 국제적 참다운 교류인게다. 

그런데 꼭 도시락은 안 싸오고 거지새끼 처럼 염치도 없이 애들한테 밥이나 얻어 처먹고 반찬이나 축내면서 왔다갔다하는 얄미운 새끼들 있지? 

바로 이런 새끼들이 지금 북괴 빨갱이같은 새끼인게다. 

남한한테 얻어먹고 퍼가고 바라는건 졸라리 많으면서 정작 남한한테는 아무런 도움도 안되고 오히려 해만되고 말썽이나 부리는 애물딴지 개버러지 새끼들 

바로 북괴 빨갱이거지10새끼들인게다.

금, 2019/01/0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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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시빌

팔용동

목장원

주소는

창원 의창구  팔용로 494-20

박상규윤항기의 경상5회 갑짱들아!

진영당감 일세

ㅍㅏ이브

손소리통  목장원:256-6205

합천봉산똥대지가

생각나는  오마고  창원 경상고 다섯기  정기총회에서

ㅂㅗ고픈 칠팔칠구팔공의  경상고5기

황금도야지해  에는 희비 제대로 내고

경조사 스님에게  찾아 배야 대는데,

기해와기회

올겐 진짜  너거 한테 비찐거 가파야 대는데,

0110모교일  19:00에 봄세

금, 2019/01/0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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笑筆强於刀諺

 

日本霜刀國(일본상도국)

朝鮮久筆邦(조선구필방)

如何其結果(여하기결과)

誤信正無雙(오신정무쌍)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속담을 비웃다

 

일본은 시퍼런 칼의 나라였고

조선은 오래 붓의 나라였지만

그 결과는 마침내 어떠했던가

잘못된 믿음 참으로 무쌍했네.

 

<時調로 改譯>

 

일본은 서슬도 푸른 칼의 나라였었고

조선은 오랜 세월 붓의 나라였었지만

그 결과 어떠했던가 誤信 무쌍하였네.

 

*霜刀: 서릿발같이  푸르고  날카롭게  서슬이      *如何:   형편이나 정도가

어떤가의  뜻을  나타내는 *結果: 어떠한 원인으로 결말생김. 그런 결말의

상태 *誤信: 잘못 믿음 *無雙: 서로 견줄 만한 게 없을 정도로 뛰어나거나 심함.

 

<2019.1.5, 이우식 지음>

토, 2019/01/05-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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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임종국 선생의 엄정함과 양심이 지배하는 사회를 소망하며

새해 우리 사회를 향한 나의 소망 두 개.

하나는 우리 사회가 엄정함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엄정함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패거리 짓기, 같은편 편들기와 봐주기가 지배하는 사회다.

친일연구를 하다가 알게 된 아버지의 친일행적까지도, 대학 은사 유진오 등 많은 인연 닿는 인사들까지도 “그런 저런 사정은 일체 눈을 감기로 작정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자료와, 그것을 정리한 카드 속에 묻혀서 생사를 함께 할 뿐인 것이다”라고 쓴 임종국 선생의 엄정함이 오늘날 우리 시대가 다시 불러와 기려야 할 시대정신이다.

동문이니까, 동향 사람이니까, 같은 편이니까…등등의 부족사회 수준의 감성으로 잘못된 것에 눈감고 침묵하고 봐주는 사회 분위기, 2019년에는 사라졌으면 좋겠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양심회복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썩지 않은 구석이 없다.”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내가 유학에서 돌아와 인사차 찾아뵌 교수님이 1991년에 하신 말씀이다.  그 후 한 세대 가량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 사회는 그때보다 나아졌을까?  아니다.  세상 곳곳이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로 얼룩져있다.

아예 ‘양심’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진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무감각하거나 무관심하다.  처벌도 죄질에 비하면 솜방망이다.  앞에서 말한 엄정함이 부족한 때문이다.  그러니 어물쩍 넘어가고, 비리와 부정부패는 계속된다.  저지르는 사람들이나 그냥 넘기는 사람들이나, 양심과 엄정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수준 낮은 사회 분위기가 2019년에는 사라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2019. 1. 4
민족문제연구소 제명자, 회원
여인철

토, 2019/01/05-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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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변호인단 “강제징용 기업 한국 자산 압류해달라” 강제집행 신청
아베 주장하는 ‘국제법‘ 뭐냐 질문에… 법조계 “나도 물어보고 싶다”
법조계 “‘국제법 위반했다’ 국내외 향한 ‘여론전’… 그 이상 이하도 아냐”

[법률방송뉴스=유재광 앵커]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두고 일본이 범정부 차원에서 반발하고 있습니다. ‘LAW 인사이드’ 신새아 기자 나와 있습니다.

어제(6일) 아베 신조 총리가 뭐라고 입장을 밝힌 모양인데 어떤 내용인가요.

[기자] 네. 아베 총리가 어제 NHK ‘일요토론’ 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받은 전범기업 신일본철주금의 한국 내 자산 압류 신청에 대해 “매우 유감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반도 출신 노동자’와 관련해서 압류를 향한 움직임은 매우 유감이다”

“국제법에 근거해 의연한 대응을 취하기 위해 구체적 조치에 대한 검토를 관계부처에 지시했다”는 것이 아베 총리의 워딩입니다.

아베 총리는 그러면서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이 끝났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앵커] 아베 총리가 “매우 유감이다”고 한 전범기업에 대한 자산 압류 신청, 어떤 내용인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죠.

[기자] 네, 지난 연말 우리 강제징용 피해자들 변호인단이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에 일본 전범기업인 신일철주금이 포스코와 함께 설립한 합작회사 ‘PNR’의 한국 자산을 압류해달라며 강제집행을 신청했는데요.

관련해서 변호인단은 지난해 두 차례 신일철주금 본사를 직접 방문해 협의를 요청했지만 신일철주금 측이 면담조차 거부하며 모르쇠로 일관하자 이에 대한 대응 조치로 한국 내 자산 압류를 신청한 것입니다.

여기다가 배상 판결을 받은 또 다른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해서도 비슷한 압류 절차를 진행할 계획인데요. 이에 일본 정부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앵커] 아베 총리 워딩을 보니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등 ‘국제법’을 많이 언급하고 있던데 국제법이 어떻게 돼 있다는 건가요.

[기자] 네, 안 그래도 궁금해서 강제징용 손배소송을 수행한 김세은 변호사에게 “국제법이 어떻게 돼 있어서 아베 총리가 그러는 거냐” 라고 물어봤는데요. 돌아온 답변이 걸작이었습니다.

“그 국제법이 도대체 뭔지 나도 물어보고 싶다”는 답변이었는데요. 직접 들어 보시죠.

[김세은 변호사 / 법무법인 해마루]

“아, 저희도 사실 그게 궁금한데요. 일본 측에 좀 물어봐 주셔야 될 거 같은데. 어느 국제법, 계속 아베 총리나 고노 외무상 워딩이 그래요. 국제법 위반이다, 국제법에 근거해서 조치를 취하겠다고 얘기를 하는데 어느 국제법인지 사실 국제법이라는 건 없어요.”

[앵커] “국제법이 없다”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기자] 네, 통상 ‘국제법을 어겼다’고 할 때는 김세은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어떤 국제 조약, 또는 어떤 국제 협약, 몇 조 몇 조, 이걸 위반한 거다“ 이렇게 얘기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베 총리의 워딩은 이런 게 없이 그냥 거두절미하고 “국제법 위반이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는 건데요. 국내외를 향한 ‘여론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게 김세은 변호사의 말입니다. 직접 들어보시죠.

[김세은 변호사 / 법무법인 해마루]

“사실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모호하게 그냥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엄청 ‘국제법 위반이다’ 라고 이야기 하면 우리가 되게 큰 잘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떤 걸 위반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주장이고요”

일본 정부 일부 각료가 ‘한국에 대한 트럼프식 관세 보복’ 등을 언급하는 것도 다 이런 여론전, 보수우익 결집 등 정치적 목적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앵커] 일본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면 어떻게 되나요.

[기자] 네,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재판을 받는 건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재판처럼 어느 일방이 제소를 한다고 해서 바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고요. 양 국 정부가 모두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기로 동의를 해야 재판 관할권이 국제사법재판소에 발생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미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새삼 국제 분쟁화 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은 옵션이 못 된다는 게 법조계의 설명입니다.

[앵커] 일본 정부는 저렇게 강경하게 나오는데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처해야 될까요, 그러면.

[기자] 네, 한일청구권협정 3조 1항엔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배상업무가 종료됐다는 일본과 그건 정부 차원의 일이고 민간 차원은 다른 문제라는 게 우리 정부 입장인데요.

일단 외교 경로를 통해 풀어보고 안 되면 별도의 중재위원회를 구성한다든다 하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의 말을 한 번 들어보시죠.

[조시현 /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한국 외교부가 지금 오늘 반응이 나왔잖아요. ‘비우호적이고,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다’고 했는데 저는 지금 단계에서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말한 것은 아닌가. 아베 정부가 제일 먼저 취할 것은 뭐냐면 협의를 해야죠. 언론 선전전을 할 것이 아니고…”

[앵커] 일본은 총리까지 나서 여론전을 펼치는데 우리 정부도 기민하게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될 것 같네요. 오늘 잘 들었습니다.

<2019-01-07>법률방송뉴스 

☞기사원문: 아베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결”… 강제징용 변호사 “아베가 말하는 ‘국제법’은 없다”

화, 2019/01/0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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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8일 충북지부전체회원모임에서 임헌영 소장님은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사무국에 요청을 하라고 하셨고, 지난 3월 24일 정기총회에서도 의문이 있으면 언제든지 사무국에 연락을하여 문의하라고 했습니다.

2018. 12. 14. 서울시교육청은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하여 행정처분을 했습니다.
행정처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운영에 있어서 법률 또는 행정처분 기준을 위반했기 때문이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 회원들이 공유하여야 할 중차대한 사안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영업상 경영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며 비공개했던 총회 의사록을 교육청을 통해 입수해 확인해 본 결과
2002년 1월에도 동부교육청이 법인실태 조사후 고발 및 시정시시를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회원은 민문연 집행부에서 어떻게 연구소를 운영했으면 고발을 당해야 했는지 그 이유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작년에 또 서울시교육청이 현장 실사를 하고, 행정처분을 했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이 행정처분한 공문을 제공해주시고, 회원에게 공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화, 2019/01/08-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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