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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100주년 특집] 2편 “국호를 정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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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100주년 특집] 2편 “국호를 정한 사람들”

익명 (미확인) | 금, 2019/03/15- 13:15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임정 100주년 특집]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2편 ‘국호를 정하다, 대한민국’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3월 14일 (목요일)
■ 대담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이기호 성우

[임정 100주년 특집] 2편 “국호를 정한 사람들”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준비한 특집 코너,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오늘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해볼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대한 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허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 우리 헌법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헌법의 기초가 된 것이 1919년 4월 11일 독립운동 대표자 27명이 함께 만든 임시헌장인데요. 3.1운동 이후 상해에 모인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을까. 임시헌장에서 민주 공화제 선언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런 이야기를 오늘 한 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역사적 큰 흐름을 쉽게 짚어주실 분.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 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이하 방학진)> 네, 안녕하세요.

◇ 이동형> 지난해 광복절 특집 때 뵙고, 우리 방송에 오랜만에 초대했는데요. 그때 방 실장님 모시고 이야기 나눈 게 반민특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반민특위가 왜 실패했는지, 또 반민특위 좌초가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런데 오늘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해방 후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무척 분열했다,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 방학진> 글쎄요, 무덤에 있는 친일파들이 기뻐서 무덤 밖으로 나올 그런 이야기를 하셨더라고요. 거꾸로 독립운동가들은 지금 통곡하고 계시겠죠.

◇ 이동형> 반민특위의 와해, 실패, 이 문제는 역사적으로도 다 입증된 거고, 무엇 때문에 와해됐는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많이들 통탄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방학진> 실은 올해가 반민특위가 해체된 지 70년입니다. 49년에 해체됐기 때문에. 반민특위를 만든 곳은 제헌 국회였거든요. 쉽게 말하면, 지금 나경원 의원의 최고참 선배들이 만든 반민특위를 나경원 원내대표가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죠.

◇ 이동형> 모든 국민들의 굉장히 큰 전폭적인 지지를 안고 특별법으로 탄생한 것이 반민특위인데, 그것을 지금 부정하는 이야기를 해서 논란이 앞으로 상당히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얘기로 다시 들어가 봅시다. 헌법 전문에 나와 있듯이, 우리 헌법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성격과 의미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이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3.1 운동 직후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를 포함해서 여러 정부가 곳곳에 흩어져 있지 않았습니까? 결국은 조선반도에서 독립운동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에 망명해서 독립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건데요. 여러 정부들이 상하이로, 또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모인 배경이 있었을까요?

◆ 방학진> 그 당시 상해에는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교민들 자체가 몇 명이 되지 않는 도시였습니다. 우리 조선인들이. 그렇지만 상해를 굳이 택한 이유는 일단 상해가 국제도시라는 측면이 하나 있고요. 그다음에 특히 여러 나라의 조계가 있는데, 프랑스 조계가, 특히 프랑스라고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에 대해서 우호적인 측면이었다는 것도 있었고, 그런데 그 당시에 노령이라든지, 만주 쪽에도 독립운동 단체가 있어서 그쪽으로 기지를 옮기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도 있지만, 두만강이나 압록강을 바로 넘어서면 일본 최강의 부대들이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지리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여러 가지 외교적 노선, 안정적인 논의, 이런 차원에서 상해가 선택된 것으로,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 이동형> 거기서 다 모여서 독립운동가들이 앞으로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 그런 것을 논의한 거죠? 임시의정원.

◆ 방학진> 그렇습니다. 국회죠. 4월 10일이 되면, 임시의정원 100주년이라서 지금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임시의정원 100주년 기념행사를 아주 잘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 이동형> 여기서 국호와 연호, 또 국채, 임시헌장 채택, 여러 가지가 이루어졌는데, 1919년 4월 10일 밤 10시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김 신부로 있는 한 주택에 국내외 각지에 있던 대표자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이들은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기로 결정하고, 첫 회의를 진행했는데, 그날의 상황을 재현해봤습니다.

◆ 성우>“지난달 3월 1일 국내에서 독립선언을 통해 우리는 독립국임을 천명하였습니다. 이에 우리들은 독립국을 세우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선 이 회의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이라고 칭하면 좋겠습니다.” “조소앙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제청합니다.” “의장을 선출하는 게 좋겠습니다. 정식 의장 1인, 부의장 1인, 서기 2인을 선거하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할 것을 개의합니다.”

◇ 이동형> 조소앙, 신석우 선생의 목소리였는데, 저희가 재현을 했습니다. 선거 결과 의장은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서기에 이광수, 백남칠이 당선. 임시의정원을 설립하고, 밤 12시가 넘어서 4월 11일이 됐습니다. 회의는 계속 이어집니다.

◆ 성우> “지금부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의하도록 합니다.” “의제는 먼저 국호를 정하고, 정부의 관제, 공무원 선출, 헌법을 제정하는 것으로 정할 것을 동의합니다.” “그러면 제가 국호에 대한 의견을 제안하겠습니다. 대한 제국의 ‘대한’과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라는 의미에서 대한민국이라 할 것을 제안합니다.” “지난 경술년 대한 제국의 군주가 포기한 주권을 포기했습니다. 군주가 포기한 주권을 국민이 이어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대한 제국이 사용하던 대한은 그대로 사용하되,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라는 의미를 담아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할 것을 찬성합니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음을 선포합니다.”

◇ 이동형>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결정된 과정을 들으셨는데요. 여기서도 조소앙, 신석우 선생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두 분에 대해서 설명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 방학진> 네, 지금 국호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보통 대한 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이게 순탄한 과정을 통해서 바뀐 것으로 알지만, 이 과정에서 상당히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대한’이라는 말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진 분들이 있었거든요. 대표적인 분이 몽양 여운형 선생입니다. 쉽게 말하면, 대한 제국은 고종 황제가 만든 이름인데, 우리가 고종 황제, 반봉건을 표방하면서 민주공화국을 만든다는 마당에 황제가 만든 이름을 쓸 수 있겠느냐, 이런 의미로 대한을 거부하셨는데요. 그런데 이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셨냐면, 신석우나 이런 분은 앞의 대한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바뀌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앞의 대한이라고 하는 것은 수식어에 불과하기 때문에 제국의 나라에서 민국의 나라, 민의 나라로 바뀌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표결을 통해서 대한민국으로 낙찰되었는데요. 말씀하신 신석우 선생님은 재밌는 이력을 가지고 계신 분인데, 우리가 잘 아는 조선일보의 두 번째 사장님이십니다. 아시지만 조선일보는 최초의 대정 실업 친목회라고 하는 친일단체가 만들었고, 20년대에 신석우가 들어오면서 조선일보가 대단히 사회주의 신문이라고 할 정도의 좋은 논조를 가지고 있었다가 33년도까지 하시는데, 33년도에 조선일보 사장이 방응모가 되면서 조선일보는 우리가 아는 친일 신문으로 일관되게 가는데요. 그런 분이 신석우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고요.

◇ 이동형> 방응모 체제 전에.

◆ 방학진> 여기도 조소앙 선생님을 말할 수 있는데, 우리가 말하는 3균주의라고,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이라고 얘기하는 건데요. 우리가 100년 전에 꿈꾸었던 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가, 단순히 일본에서의 독립이 아니라 이런 정치, 경제, 교육에서의 균등한 나라,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나라를 만든 이론적 기초를 만드신 분이 조소앙 선생이 되겠습니다.

◇ 이동형> 방 실장이 잠깐 언급했는데, 국호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습니다. 여운형 선생님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고 갑시다.

◆ 성우> “대한은 이미 우리가 쓰고 있던 국호로서 그 대한 때문에 우리는 망했다. 일본에 합병되어 버린 대한의 국호를 우리가 지금 그대로 부른다는 것은 감정상으로도 용납할 수 없다.”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 일본에 빼앗긴 나라 이름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 이동형> 들으신 대로 여운형 선생은 대한이라는 국호를 쓰면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 같네요. 여운형 선생님은 굉장한 웅변 능력이 있거든요. 도쿄 한복판 일본 정치인 앞에서도 압도하는 웅변을 했던 분인데, 여기서는 논쟁에 졌네요?

◆ 방학진> 소수파였습니다. 소수파였던 분이 얼마 안 되는데, 예를 들어서 몽양을 비롯해 가지고 아마 그런 개인적인 입장 차였던 것 같아요.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론적인 경험들, 이런 속에서 대한민국을 택한 분도 계시고, 그다음에 조선공화국, 고려공화국, 이런 것들에 대해서 자신의 이념적인 지향, 출신 지역, 이런 것을 통해서 그러한 것들이 있었는데요. 여운형 선생님은 소수파였죠.

◇ 이동형> 이념으로 싸운 것은 이해가 가는데, 출신 지역, 혹은 출신 성분 가지고도 싸웠다면서요?

◆ 방학진> 지역은 아무래도 북쪽에 계신 분들은 고려라고 하는 것, 고구려, 이쪽을 선호하셨던 거죠. 사회주의 이념을 조금 더 지향하셨던 분들은 조선이라고 하셨고요.

◇ 이동형> 국호 말고 또 다른 논쟁이 있었습니까?

◆ 방학진> 3대 논쟁이 있을 수 있는데요. 첫 번째가 국호 논쟁이고, 그다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임시정부라는 형태로 독립 투쟁을 할 것이냐, 아니면 정당을 만들어서 독립 투쟁할 것이냐, 이게 두 번째 논쟁점이었고요. 세 번째 논쟁은 구 황실, 전주 이씨. 구 황실을 대우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게 3대 논쟁이 되겠습니다.

◇ 이동형> 황실 문제도 있었군요. 회의가 그렇게 계속 이어지면서 정부의 관제를 결정하고,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 선출이 이어지는데, 어떤 분들이 선출됐죠?

◆ 방학진> 어떻게 보면 이때는 선출됐다기보다 아직은 4월에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실제 9월이나 12월에 가서나 정확한 꼴을 갖추게 되고요. 이때는 서로서로 조각하는 수준입니다. 어떤 자리에는 누구를 앉히자, 어떤 자리에 누구를 모시자,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요.

◇ 이동형> 투표나 이런 것은 없었다고 봐야겠네요?

◆ 방학진> 네, 어떻게 보면 투표라기보다 서로의 동의, 제청, 내가 너를 추천하고, 네가 나를 추천하고, 이런 과정이었던 거죠. 그전에 앞서서 국호 논쟁 이외에 정당이냐, 정부냐의 논쟁을 설명드리면, 여운형 선생과 이회영, 신채호, 이런 분들은 정부라는 것보다는 당을 만들자. 러시아 혁명이라든지, 이런 것을 봤을 때 볼셰비키 정당이 러시아 혁명을 이끌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부를 만들면, 서로 자리다툼을 하게 된다, 누가 장관, 누가 차관, 그다음에 지역을 따지게 되기 때문에 그런 자리다툼을 할 수 없게끔 정당을 만들자. 또는 이회영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독립운동 투쟁본부를 만들자, 총 본부를 만들자, 이런 식의 논쟁이 있었고요. 그다음에 격론이 있었던 것이 황실을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나라가 처음에 구 황실을 우대하는 것으로 첫 번째 헌법에 들어가기는 했습니다만, 역시 여운형 선생도 우리가 황제를 부정하면서 혁명을 하고 있는 마당에 황실을 우대하면 될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이 있었지만, 다수파들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황실에 대해서 극복했지만, 아직 많은 백성들이 황실에 대해서 애환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전략·전술 차원에서 아직 황실은 우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황실 우대 조항을 넣게 된 것입니다.

◇ 이동형> 그리고 국무총리하고, 국무위원에는 어떤 분들이 선출됐죠?

◆ 방학진> 그 당시 국무총리가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이 되었는데요. 그다음에 국무총리는 나중에 12월에 이동녕 선생님이 오시는데, 바로 이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그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최고위의 자리였지만, 이 이승만 씨가 자기가 국무총리하는 것을 거부했죠. 자기는 대통령이지, 나는 국무총리가 최고인 자리에는 안 간다라고 몇 달 몽니를 부렸지만, 그래도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 노령에 있던 정부, 그다음에 서울에서 만들어진 한성 정부를 어쨌거나 통합해서 가을에는 출범시켜야 한다고 왔다 갔다 하시면서 고생하신 분이 도산 안창호 선생님입니다.

◇ 이동형> 내무총장. 외무총장에 김규식. 그런데 이승만은 왜 그 ‘프레지던트’에 집착했을까요? 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대통령 자리에 집착했죠?

◆방학진> 그것에 대해서 본인이 쓴 글은 없지만, 어쨌든 본인은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의 프레지던트다, 라고 누가 인정은 안 했지만, 수시로 명함을 만들어서 뿌리고 다녔다는. 정말 대통령에 집착했던. 아마도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대통령을 본인이 많이 선호했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국무총리 이승만 선출에 대해서 반발은 없었습니까?

◆ 방학진> 가장 많이 반발한 것은 우리 단재 신채호 선생이죠. 왜냐하면, 3.1운동 전후에 이승만이 미국 조야에다가 뭐라고 청원서를 냈냐면, 그 당시 국제연맹이죠. 국제연맹이 우리나라를 통치해주십시오. 위임통치 청원서를 낸 것이 알려지죠. 어떻게 독립을 하겠다는 임시정부 사람들이 위임통치를 주장하는 사람을 최고 지도자로 모실 수 있는가. 그러면서 신채호 선생이 뭐라고 주장하냐면,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아직 생기지도 않은 나라를 판 사람이다. 내가 이승만을 모시는 임시정부에는 절대로 몸담을 수 없다고 해서 박차고 나가셨죠.

◇ 이동형>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았다. 신채호 선생의 이야기였고요. 결국은 이승만은 떠나죠, 상하이를?

◆ 방학진> 떠나기도 하거니와 나중에 25년이 되면, 탄핵이 되죠. 임시정부에 의해서.

◇ 이동형> 이승만이 떠난 후 상해 임시정부는 분열하는 모습을 조금 보였는데요. 의정원은 탄핵 발의에 앞서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에 전보를 보내 수습을 요청합니다. 당시 의정원이 이승만에게 보낸 전보문과 이승만의 답신을 들어봅시다.

◆ 성우> “임시 대통령 이승만 각하. 정부의 형세가 급하니 유지 방침을 보내시고 난국을 정돈하여 주십시오.” “노백린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니 내각을 다시 조직하고 나의 결재를 받은 후에 실시하시오.” “임시 대통령 이승만 각하. 노백린은 국무총리직에 취임이 불능하고 정부에 각원이 없으니 무정부상태이오. 속히 책임을 이행하시되 5일 안으로 회답하시오.” “당신들이 소란을 일으키면 이곳의 재정수합하는 일이 방해되어서 재정곤란을 당할 터이니 속히 정돈하시오.” “임시 대통령 이승만 각하. 시국이 지극히 어려운데 임시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정부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지 못하므로 임시 대통령 불신임안이 제출되었으니 의향을 말씀하시오.” “정식 후임자가 나오기 전에는 사면하지 못하겠소.”

◇ 이동형> 네, 이렇게 해서 결국은 탄핵까지 당하는데, 그 훗날 광복 후에 이승만은 일본에 의해서 맥아더를 만나고, 그리고 한국으로 들어올 때는 미군과 함께 굉장히 큰 환영을 받고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 이후에 백범 선생 같은 경우에, 그러니까 상해 임시정부, 그때는 상해가 아니었습니다만, 중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는 1차, 2차, 이렇게 나눠서 들어왔는데, 홀대받으면서 들어왔단 말이죠.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라고 볼 수 있겠죠?

◆ 방학진> 그게 한국에서의 독립운동가들이 가장 먼저 입국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이승만을 먼저 한국에 들여보낸 것. 그리고 임시정부를 뒤늦게 들여보낸 것. 이것이 미군정의 가장 큰 포석이었고, 지금도 그 포석 속에서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렇게 봅니다.

◇ 이동형> 오늘 우리가 특집 방송, 두 번째 시간으로 대한민국 국호가 어떻게 정해졌는지, 그 절차를 이야기해드렸는데요. 올해가 3.1운동, 또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후손들이 이 정신을 어떻게 계승해야 한다고 보는지,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방학진> 네, 3.1운동은 그냥 만세가 아니라 혁명인 것이죠.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올림으로써 과거 봉건과 단절했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우리 스스로를 혁명함으로써 새로운 나라를 꿈꿨다. 그래서 전주 이 씨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도산 선생의 말에 의하면 2,000만 모두가 황제가 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기틀을 선언한 곳이 바로 3.1운동이었습니다. 그러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다 같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이동형> 네,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제2편, 국호를 정하다, 대한민국.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과 함께했는데요.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참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만,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었잖아요? 우리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분들 아니었어요?

◆ 방학진>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의 아주 좋으신, 마음씨 좋은, 그다음에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하는 그런 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네,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하고요. 저희는 다음 주에 3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방학진> 네, 고맙습니다.

<2019-03-14>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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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화론과 조선 그리고 이인직

사회와 사회적 결과의 상(上)에 진화론을 응용하야 사회적 단체로서 공구(攻究)의 대상을 삼는 것이 중요한 바니 개(蓋) 차(此) 단체가 개인과 무이(無異)함도 유(有)하나 생존의 수단을 인(因)하야 상호 경쟁함은 개인보다 가장 제(諸) 단체에 재(在)함이라 (중략) 차(此)와 여(如)히 일체의 사회적 제도는 선악의 각 인종을 일 사회적 단체에 결합한 것인데 기 단체는 상적(相滴)한 경쟁자와 경쟁하는 일 단위라. 부(夫) 자연도태의 제법(諸法)은 차 사회적 단체 상(上)에 행(行)하며 차(此) 단체는 사회진화 과정에 중요한 단위라.(이인직, 「사회학 속(續)」, <소년한반도>,19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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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한반도>창간호(1906.11.1)

 

이인직의 신소설은 보았어도 이른바 ‘진화론’에 대해 언급한 글은 대부분 처음 보았을 겁니다. 여기서 이인직이 언급한 진화론은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82)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아니라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입니다. 사회진화론은 흔히 쓰이는 약육강식, 우승열패,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됐다면 이해될 런지요.
19세기 서구에는 다양한 사상들이 난무했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의 사회학과 실증주의,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90)를 중심으로 한 사회진화론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진화론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를 풍미했던 이론입니다. ‘Social Darwinism’ 즉 ‘사회다위니즘’이란 이름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적으로 적용한 이론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명칭은 20세기 중반에 19세기의 사상적 흐름을 정리하면서 후세에 붙여진 이름이지 당시에 쓰이던 명칭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진화론에 대한 저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1859)보다 먼저 출간되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의 시조인 스펜서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진보의법칙과원인(Progress: Its Laws and Cause)>를1857년에발표했습니다.물론 사회진화론이 나중에 다윈의 진화론을 흡수한 것은 사실이며 심지어 다윈조차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사회진화론은 스펜서 개인의 이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다윈의 이론을 흡수하여 사회의 발전을 사회유기체적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자유주의를 강조하여 인간의 경쟁을 장려하는 많은 사상가의 시도를 사회진화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상당히 왜곡하고 있습니다. <종의기원에대하여>라는 다윈의 진화론 저서 제목에서도 진화(evolution)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책의 본문 속에서도 다윈은 진화(evolution)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진화’라는 표현은 진화 이전 보다 ‘우월’해 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에서의 진화는 우월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생존경쟁(Struggle for Life)에 의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일 뿐입니다. “더 강하거나 우월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생존에 적합했기에 살아남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윈은 진화(evolution)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변화를 포함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더군다나 스펜서의 경우 생물학적 진화론의 관점은 다윈보다 라마르크(LAMARCK, Jean 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1744-1829)에 가깝습니다. 이른바 ‘용불용설(用不用說)’로 대표되는 그의 이론은 ‘획득형질의 유전’ 즉 후천적인 노력으로 획득한 형질이 유전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진화론은 19세기 서구 사상계를 휩씁니다. 결국 다윈마저도 <종의 기원에 대하여> 제5판에서 ‘진화(evolution)’라는 말을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애초에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철학과 자연과학의 통합된 이론을 만드는 것과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를 목적으로 했습니다만, 문제는 당시 제국주의는 이것을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활용한다는 점이며, 사회진화론이 그에 부합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한중일 3국의 사회진화론의 수용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일본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1836~1916)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중 가토 히로유키와 량치차오는 절대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은 1880년대부터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을 아시아에서 가장 처음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가토 히로유키가 다윈과 스펜서의 번역서 수준을 넘어서서 사회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원리론을 형성해가고 있었습니다. ‘evolution’의 역어로 진보와 개화를 조합한 ‘진화’라는 신조어를 만든 것도 그였습니다. 개화파의 ‘개화자강론’은 국가주의와 제국주의론을 뒷받침하는 구실을 하던 일본 사회진화론의 수용 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을 접하고 흡수했던 경우는 유길준처럼 서구 유학을 통해 직접 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중국과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중국과 일본에 의해 재가공된 사회진화론이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사회진화론을 해석하는 방식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일본은 다소 공격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이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번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옌푸(嚴復, 1854~1921)와 가토의 번역을 비교하면 ‘evolution’을 각각 ‘천연(天演)’과 ‘진화(進化)’, ‘struggle for existence’을 ‘물경(物競)’과 ‘생존경쟁(生存競爭)’, ‘natural selection’을 ‘천택(天擇)’과 ‘도태(淘汰)’, ‘survival of the fittest’을 ‘택종유량(擇種留良)’과 ‘우승열패(優勝劣敗)’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 번역합니다. 이외에도 옌푸는 사회복지와 관련된 용어들은 ‘부강’과 관련되는 용어로 번역했습니다. ‘natural selection’(자연선택)을 예로 들면 옌푸는 원 단어의 뜻에 가까운 ‘천택’으로 번역한 반면 가토의 경우 불필요한 것, 부적당한 것이 ‘제거’되고 적합한 것만이 남긴다는 의미의 ‘도태’라는 단어를 선택합니다.
일본의 사회진화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사회유기체설’입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사회도 생물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기체라고 보았습니다. 이 이론은 스펜서가 비록 ‘자유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사회진화론을 논리를 전개했음에도 논리적 귀결은 전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회유기체설은 사회를 유기적 전체로 파악함으로써 개인을 사회에 종속되는 존재로 인식하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1880년대 일본정부는 ‘천부인권설’에 근거한 자유민권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의 개인에 대한 우월성을 지향하던 국권신장파 가토를 앞세웠고 결국 관민협조론이 득세하게 됩니다.
일본의 사회진화론 외에도 중국의 사회진화론 또한 국내 지식인에게 흡수되는데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95)의 <진화와윤리>를번역한옌푸의<천연론(天演論)>(1898)등이 출판과 동시에 한국에 수입되기도 했지만 중국의 사회진화론이 지식인을 비롯한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량치차오의 글을 통해서입니다. 1899년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에량치차오의 논설 「애국론(愛國論)」을 시작으로 량치차오 붐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1903년 량치차오의 사회진화론이 담겨있는 <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1902)을비롯해1914년까지100여개의 글이 번역 소개됩니다. 량치차오의 사회진화론은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강’과 ‘부국강병’으로 귀결되며 한국의 ‘계몽주의’와 ‘자강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량치차오 역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일본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게 되고 종국에 사회진화론과 관련된 용어도 가토가 번역한 용어로 모두 교체하게 됩니다.
다소 장황하게 ‘사회진화론’에 대해 정리한 것은 이인직을 비롯해 당시 지식인들이 혼란된 세계관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근대 사상과 문물이 밀려들어오고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이라는 혼란 속에서 구한말 지식인들이 판단과 선택을 하게 했던 사상적 배경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용서’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시기 한국의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과 그에 근거한 근대지상주의, 동양평화론, 대동합방론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정치학교에서 공부한 이인직은 일본의 사회진화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연이(然而) 기(其) 발전(發展)하야 일정(一定)의 직능(職能)을 수(遂)하는 소사회(小社會)와 차등(此等) 소사회(小社會)를 포함(包含)하는 대사회(大社會)의 간(間)에는 중요(重要)한 차별(差別)이 유(有)함으로써 (중략) 기(其) 사회(社會)의 골격(骨格)되고 구조(構造)된 자 (者)-니라. 생물학상(生物學上)의 어(語)를 적(籍)하야 말하진디 기(其) 기관(機關)이라 칭 (稱)할만한 자(者)라 (중략) 오인(吾人)은 사회(社會)의 일분자(一分子)이라.(이인직, 「사회」, <소년한반도> 1, 1906)

 

개(盖) 국가(國家)의 대직능(大職能)은 내부(內部)의 규리(睽離)와 외부(外部)의 공격(攻擊)에 대(對)하야 신민(臣民)을 보호(保護)하는 바라. 차(此)와 여(如)히 일체(一切)의 사회적(社會的) 제도(制度) 선악(善惡)의 각종인(各種人)을 일사회적(一社會的) 단체(單體)에 결합(結合)한 것인디 기(其) 단체(團體)는 상적(相適)한 경쟁자(競爭者)와 경쟁(競爭)하는 일단위(一單位)라. 부(夫) 자연도태(自然淘汰)의 제법(諸法)은 차(此) 사회적(社會的) 단체상(團 體上)에 행(行)하며 차(此) 단체(團體)는 사회진화과정(社會進化過程)에 중요(重要)한 단위 (單位)라.(이인직, 「사회학 속」, <소년한반도> 3, 1907)

 

위 글은 ‘사회유기체설’에 정확히 부합하는 내용입니다. 생존경쟁과 그 경쟁에서 도태되는 단위를 국가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국가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국가 내의 각 성원들은 그들의 직능을 국가를 위하여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이인직만이 아니라 당시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논리였습니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의 이익 혹은 권리가 우선시됩니다. 어쩌면 이 논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군사독재시절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논리가 그것입니다.

 

이인직과 친일

이인직이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본격적으로 계몽운동에 투신하는 시기는 1906년 귀국 후인 일제의 통감정치 때입니다. 이인직은 당연히 통감정치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토의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국가 간에도 생존경쟁에 의해 적자생존의 논리가 적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본 사회진화론의 논리 중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 1850-1922)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1893)입니다.그 내용은“동양의쇠운을만회하고흥아(興亞)의 대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동아(東亞)의 여러 나라가 대동아연맹을 결성해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중국과는 동맹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사상은 이후 일본 군국주의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사상적 기초인 ‘대동아공영권’으로 이어집니다. 즉 ‘대동합방론’은 일본의 아시아 제국(諸國)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이인직은 귀국 전부터 이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슬프다. 나라의 세력과 백성의 힘이 쇠미해짐이 이와 같이 심하니 어찌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양(洋)을 따지지 말고 우방에게 호소하고 그 감응의 동정을 구하는 것이 실로 목하의 급무일 것이다. 지금 사처(四處)를 돌아봐도 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동양의 문명국 일본밖에 없다 (중략) 원컨대 선진한 일본국 인인군자(仁人君子)는 그 동정을 찬성하여 문명의 모범을 가르쳐주시기를 (「韓國新聞創設趣旨書」, <都新聞>,1903.5.5)

 

방금 서세동점하여 아주일폭(亞洲一幅)은 거의 사분오열에 이르려고 한다. 단 일본은 홀연히 국초(國礎)를 굳게 하여 동양의 우이(牛耳)를 잡고 보차순치(輔車脣齒)의 의(宜)를 인방(隣邦)에게 두텁게 하여, 백년의 장책을 이에 확립하였다.(「夢中放語」, <都新聞>,1901.12.8)

 

이인직이 1906년 2월 친일단체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 주필로간 것은어찌보면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4개월만인 같은 해 6월에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천도교에서 창간한 민족지 <만세보(萬歲報)>의 주필로 자리를 옮겨 신소설 <혈의누>를 연재하기도 했지만 그가 어떤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답은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는 이완용의 비서역할을 겸하며 일관되게 친일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09년 12월 4일 이완용 내각과 대립하던 일진회 이용구가 합방청원서를 제출하자 이완용 내각은 이인직 등을 동원하여 즉각 조직적 반대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인직은 「국민대연설회」의 연사로 직접 나서기까지 했는데, 그 반대운동은 겉으로는 합방에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일진회에 합방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반대운동이었습니다. 12월 22일 이완용은 명동에서 이재명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지만, 이틀 전인 12월 20일 이인직은 이완용의 밀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각 신문, 재일유학생, 대한동지회 등과 교섭해 일진회 반대 여론을 조성하고 이듬해 3월에 귀국합니다.
결국 1910년 8월 4일 일본어를 못하는 이완용을 대신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츠(小松綠)와 합방에 관한 담판을 벌입니다. 이인직은 통감부와 대한제국 내각 간의 연결통로 역할을 했고, 두 사람의 담판은 양측의 재가를 얻어 한일합방조약의 초안이 됩니다.
이인직이 했던 역할에 비하면 합방 후 그 대가는 초라했습니다. 이완용을 비롯한 한일합방의 공로자들에게는 귀족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이 내려졌으나 이인직에게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서얼 출신인 것이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완용과 그의 절친 조중응이 각각 백작・자작과 은사금을 받고 죽을 때까지 호위호식을 누린 것과 비교하면 그가 그토록 봉건주의를 비판했던 결과가 무색해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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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 사망 기사. 매일신보 1916. 11. 28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의 객원을 거쳐 종래에는 친일유림단체경학원(經學院) 의사성(司成)에 올라 천황을 찬양하는 글을 쓰며 여생을 보냅니다. 1916년 11월 총독부의원에서 입원 치료중 사망하는데 장례식은 일본 천리교 의식에 따라 치러졌고 아현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집니다. 그가 죽자 조선총독부에서 지급한 장례비는 450원이었습니다.

김덕영 선임연구원

화, 2018/03/2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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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가자 접수
▲ 참가자 접수
▲ 사회를 보는 방학진 기획실장
▲ 사회를 보는 방학진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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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8/03/27-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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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수 회원

 

2018년 2월 9일, 드디어 기대보다 걱정이 많았던 평창겨울올림픽이 엄동설한을 녹이는 감동을 연출해냈다. 평창올림픽은 유치단계부터 우여곡절이 많았고, 국내적으로 수천 년 동안 온존한 산천을 허물어야 하는 환경훼손문제로 불화가 있었고 막대한 예산으로 준비된 시설들의 올림픽경기 후 유지와 활용방안이 논란거리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단국 한반도의 휴전선에 인류평화의 제전을 마련하여 갈등과 적대와 대결을 끝내고 평화를 함께 누려보자는 간절한 소망으로 성공적인 올림픽 개막을 이루어냈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로 조성된 국제사회의 제재와 긴장으로 남한 민중이 겪은 두려움과 불안은 올림픽경기가 제대로 치러질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북한의 올림픽 참가와 한반도기를 앞세운 단일팀 입장으로 그동안의 근심이 봄날 눈 녹듯이 풀어졌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그동안 꽉 막혔던 남북 사이에 대화의 문이 열리고 땅길, 하늘길, 바닷길까지 열려 막힘없이 오가며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평화가 찾아와 이것이 현실인지 실감하기조차 어리둥절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유폐되고 장막 속에 묻혀 있던 통일 논의가 봇물처럼 터지고 기대 또한 만발하다. 그러나 통일로 가는 길은 기대만큼 난제가 너무 많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첫 번째 장애는 남남 갈등이다. 이것은 불행 중 더 큰 불행이다. 지구촌 여러 나라를 초대한 잔치마당에 북한 참가를 반대하는 시위로 올림픽정신을 부정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이전에 남남 갈등을 풀지 않고 통일이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준 사건이다.
또 하나의 장애는 국제적 개입과 부당한 간섭이다. 미・소 야합으로 비롯된 조국 분단과 국제대리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열강들은 여전히 우리의 통일 의지를 꺾고 분단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국토 분단과 겨레의 분열은 73년간 갈등 분노 적대 대결의 악순환으로 생긴 내상으로 증오의 일상화를 초래했다.
통일은 남과 북이 서로 미워해야 할 적이 아니고 가엾은 피해자라는 자각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통일은 애초에 한말 한글 한역사 한겨레로 한반도에서 한나라로 살았던 때로 돌아가서 다투지 말고 평화롭게 살자는 간절한 소망이다. 통일은 평화로 가는 디딤돌이고, 남과 북이 평화로 가는 길이 함께 사는 길이며 오직 함께 사는 길만이 평화로 가는 길이다. 평화로 가기 위해서는 맨 먼저 마음부터 열고 남과 북이 한겨레 한동포임을 자각하고 미움을 걷어내야 한다.
다음으로 말문을 터서 서로 위로하고 이해하면서 희망을 살려내야 한다. 그리고 길을 열어 서로 오가며 정을 쌓고 도와주면서 자주 자립을 이뤄내야 한다. 이번 평창올림픽이 이 땅 이 겨레에게 평화와 통일의 희망을 자각케 하는 단처를 마련해 준 것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소득이요 횡재라 아니 할 수 없다.
반목은 서로에게 손해를 주고 평화는 서로에게 이익을 준다. 국제사회의 야욕으로 갈라졌던 국토, 찢겨진 겨레의 상처를 아물게 하려면, 지금 이 땅에 사는 겨레가 있는 힘과 지혜를 모아서 외세 개입과 간섭을 물리치고 ‘생명과 평화 자주권’을 굳건하게 지켜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이제 우리 겨레의 비극과 불행과 고통을 청산하는 길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로 뭉쳐서 우리를 구원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6・25 동족상잔의 쓰라린 전쟁을 치르고도 65년 동안이나 서로를 노려보며 불안하게 살아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전쟁은 파멸이다. 핵과 미사일을 소용없게 하는 길은 화해와 평화만이 유일한 길이다. 화해로 가기 위해 우리 겨레 한 사람 한 사람이 휴전선 철조망보다 강고한 마음속 장벽을 허물어 버리자.

2018. 2. 12

여럿이 함께 손잡고 ‘평화의길’ 김판수 두손모음

화, 2018/03/2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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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흥 광주지부장

 

우리가 섬이냐
땅으로 가자

헤엄치지 말고
걸어서 가자
배 타지 말고
버스로 가자
비행기 타지 말고
기차로 가자

오늘 못 가면
내일 또 가고

 

모레도 못 가면
글피에 또 가고

올해안에 못 가면
내년에 또 가고
내년에도 못 가면
그 내년에 또 가고

서둘지 말고 가자
싸목싸목 가자

우리가 섬이냐
땅으로 가자

화, 2018/03/2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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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소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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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항 위안소구지진열관 안에는 할머니가 된 소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답사단의 소녀가 그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청년백범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후원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사기행’이 10회를 기록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하이를 시작으로 자싱, 하이옌, 항저우, 난징을 찾아가는 일정이다. 이번에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여든이 넘으신 민문연 이광찬 회원과 이윤 회원 등 17명이 다녀왔다.
이봉창 의사가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문을 두드렸던 상하이시기 마지막 임정 청사. 의열단원 오성륜・김익상・이종암 의사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를 저격한 황포마두. 김구 선생 어머니가 먹을 만한 것을 고르기 위해 중국 사람들이 다듬고 버린 채소더미를 뒤지던 골목길.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독립운동가들의 유골이 흩어져 있는 송경령능원(상하이 외국인묘지였던 만국공묘의 현재 명칭). 김구 선생이 이봉창ㆍ윤봉길 의사 의거 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중국 뱃사공 주애보와 살았던 자싱의 피신처. 시진핑 주석이 저장성 당서기 시절에 찾아왔던 하이옌의 김구선생피난처. 중국의 ‘국가급 항전시설 및 유적지’로 지정된 항저우 서호 옆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김원봉 선생이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했던 난징 산골의 천녕사, 여운형・조동호・김마리아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다녔고, 민족혁명당 창당식을 거행했던 난징대학교.
중일전쟁시기 일제가 난징 시민 30만 명을 학살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남경대도살조난동포기념관(南京大屠殺遭難同胞紀念館). 난징총독부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곳에 동양 최대 규모의 위안소를 만들어 놓고, 눈앞에서 벌였던 그 잔인한 짓을 지금도 인정조차 하지 않는 일본의 무모함에 말을 잃어버리게 되는 곳 리제항 위안소구지진열관. 그곳에는 끌려온 어린 소녀가 할머니가 되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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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천녕사 앞에서 기념촬영

 

옛날 의병전쟁을 하시던 분들의 머리에는 꽃이 피었다고 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산과 들에서 몇날 며칠을 씻지도 못했던 그분들의 머리에, 바람에 날려 씨앗이 꽂히고 그것이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현실의 몸은 거칠고 고단했지만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꽃으로 기억돼야 하는 역사다. 우리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그분들 같은 삶의 길을 갈 수 있었을까? 다시는 그런 삶을 걸어야만 하는 시대가 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그분들을 잊지 않아야 하고, 그분들이 걸으셨던 길을 따라 걷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화, 2018/03/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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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2018 정기총회 간략 후기

 

지난 주 토요일 (3.24), 민족문제연구소 총회, 부끄럽고 참담했습니다.

저는 총회 이틀전 개인 성명서에서 발표한대로, 연구소 주인인 회원의 대표기구, 운영위원회를 무력화시키는 정관개정에 반대의사를 피력하기 위해 홀로 어렵사리 참석했습니다

 총회 시작전 로비에서 개인 성명글을 배포하는데.. 몇몇 운영위원과 회원들이 험악한 얼굴로 돌아가며 저의 몸을 잡아끌어 밖으로 쫓아내려는 통에 몸싸움을 하고, 유인물도 못 돌리고많이 시달렸네요

총회 진행중엔 더 심각..  

제가 어렵사리 발언기회를 얻어 발언을 하자마자 모 운영위 부위원장이 제 앞 자리에서 계속 고함과 삿대질 하며 방해, 뒤에 단상에선 소장님이 발언을 짧게 하라고 계속 재촉하면서 방해..작전 짠 듯이

또 다른 반대발언을 하는 회원의 입을 틀어 막기 위해 마이크를 빼앗으라 하고 퇴장지시하고..또 다른 회원은 아예 마이크 잡을 기회도 주지않고 퇴장 지시

언젠가 삼성의 주총에서 윤종용 부회장이 소액주주들에게 고압적으로, 함부로 하던 광경이 떠올려지고..

 정관개정은 어느 단체나 총회의 제일 중요한 사안입니다. 민주적 총회였다면, 지나가는 말로라도 회원의 의사를 물었을 법도 한데, 그러기는커녕, 반대발언을 하는 소수를 탄압하는 모양새. 깜짝 놀랐습니다. 소장님이 총회를 그렇게까지 비민주적, 편파적, 고압적으로 진행하실 줄은..

그리고 발언하러 나온 회원에게 회비 내셨습니까?” 라고 핀잔을 주는 건 도대체 뭔지

암튼 그날 총회 진행을 통해서 느낀 건 소장님은 분명 회원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과, 지부장들뿐 아니라 회원들 스스로도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 그래서 더 찝찝하고 참담했습니다.

연구소 회원들이 어떻게 이렇게 타락했습니까?” 총회장이 어수선해지자 임소장님이 하신 말씀,
회비 내셨습니까?” 와 함께 그날의 명언 등극.

 

2018. 3. 28
전 운영위원장 (9) 여인철

수, 2018/03/28-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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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철씨의 사실을 왜곡하고 민문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후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에서 더 이상 침묵하면 않될 것 같아서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본인도 당일  총회에 참석한 회원으로서 저의 시선으로 보고 느낀점을 말씀드립니다.
1.정관수정안에는 회원과 운영위원의 권리를 박탈한 조항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아래 첨부한 사진 속 개정안을 참고하세요.
단 논쟁이 된 조항은 20년전 초창기에 만들어진 조항인 정관제32조 3항 “기타 연구소의 일상업무를 심의.의결한다”는 조항을 폐기하는 문제를 침소봉대하고,
본인이 민문연 운영위원장을 했던 분이 후임 운영위원장과 운영위원이 결정한 개정안을 비민주적이라고 폄하하고, 운영위원장과 정관개정소위원회 위원을 한 운영위원을 사퇴하라고 성명서를 발표해서 명예를 손상시키고, 민문연  소장과 회원이 비민주적이고 패거리 집단처럼 호도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당일 총회 시작 후 2시간 정도 흐른 뒤 정관개정안 의결 순서가 되어서 제안자인 xxx 운영위원장이 제안설명을 하고, 개정안을 반대하는 여인철씨가 반대입장을 발표했는데, 너무 장황하게 얘기를 해서  찬반토론을 위해서 3분안에  발언을 마쳐달라고 사회를 본 소장이 부탁을 드렸고, 찬반 토론이 시작되어 찬성하는 회원과 반대하는 쪽에서 1명씩 발언을 하는 중에 xxx 전 지부장이 마이크를 잡고 오랜 시간 발언과 제안과 상관없는 얘기를 해서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가고 회의가 난장판이 되어 마이크를 끄게하고 진행을 위해서 퇴장을 요청했는데 계속해서 악다구리를 부리고해서 퇴장을 요청하였지만 계속해서 회의를 방해했습니다.
하여 더 이상 회의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해서 소장이 충분한 의사를 알았으니 표결에 붙이겠다고 하여 개정안 삭제를 낸 여인철씨와 뜻을 같이하는 5명만이 반대하고 200여명이 넘는 회원이 찬성을 해서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통과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올고 다른 회원과 운영위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틀리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촛불을 들었고, 민문연 운영위원장을 엮임했던 회원으로서 올바른 행동이라고 판단되지 않습니다.
또한 민문연 내부의 문제를 사실을 왜곡해서 촛불을 들었던 이 카톡방에 퍼트리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총회에 참석한 수 많은 회원의 목소리는 안중에도없고 내가 주장한 것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비민주적이고 폭거가 되는 것입니까?
참으로 안타깝고 개탄스럽습니다.

20년 가까이 여인철씨를  보아온 저로서는 요즘 행태에 대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합니다. 부디 자중하시고 본인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추신)  위 글은 저가 저와 여인철 회원이 활동하는 카톡방에 올렸던 글을 그대로 공유합니다. 일방의 글로 인하여 민문연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오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안따까운 마음에서 글을 공유합니다.

-대한민국100년 3월 28일-
_민족문제연구소 (전)경기북부지부장  김재광_

목, 2018/03/29-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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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요일해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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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월1일

 

목, 2018/03/29-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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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은 우리 민족의 핵이자 세계평화의 핵이다.

세계 인류역사의 흐름에서 국제관계는 오직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양심에 의거한 국가 대 국가의 협정과 약속은 강국들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철저히 무시되고 파기되는 것이 일반이었다. 이런 세계사의 흐름에 북은 핵무력 강성국가로 우뚝 자리 매김 했다.

지난 시간은 어땠는가!
소위 말하는 강대국이라는 국가들이 조그만 땅덩어리의 북을 전 세계적로 제재하고 압박하여 고립압살정책을 펼치지 않았던가! 심지어 같은 노선을 걷고 있던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 조차도 그 힘에 아부굴종하며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이나 자행되어 온 미제의 침략적 만행과 비겁한 주변국의 동조에도 불구하고 북의 위대한 인민들과 지도자들은 전세를 역전했다. 지금은 오히려 압도하고 있다.

바로 북의 핵무력!

북핵은 지금 현재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내고 있고,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평화의 핵이 되고 있다. 전쟁광 미제놈들은 이렇게 종이 호랑이처럼 북핵의 위력 앞에 꼼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고, 국제사회에서 너도나도 북핵을 지지하고 나서는 것이다.

힘이 없어 죽임 당했고, 굶어 죽었고, 수탈 당했던 한반도 피의 역사가 말해주지 않는가!
인두겁을 쓴 제국주의자들의 짐승같은 만행은 여전히 중동에서 무참히 학살되고 있는 어린이와 노인, 여성들, 고문 받는 청년들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한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 협정을 맺기 위해서 그렇게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힘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북핵이 있어야만 지금의 대화국면이 계속 될 수 있다. 미제를 흔들어 좨치면서, 국제적인 강국들 사이에서 평화의 깃발을 쥐고 있는 근본 힘은 바로 북핵이며, 북의 단결된 민중의 뜻이다.

우리민족의 핵이 결국 강성번영통일국가의 핵으로 되는 것이다!
평화의 핵! 민족의 핵을 온 힘을 다해 지켜가자!

목, 2018/03/29-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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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위원장은 세계적인 지도자로 되고 있다.

최근 이루어진 북중 정상회담 내용을 보면, 김정은 위원장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북미 대결에서 압도적인 핵 무력의 힘으로 미제국주의를 타승하고, 남북정상회담을 4월 말로 이끌어내는 힘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과정에서 파격적이고 전격적인 중국 방문을 통해서 시진핑과의 회담을 성사시켜내면서 다시 한번 미국과의 대결에서 우위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였다.

평창 올림픽에서 보여진 북의 행보는 과감하고 통이 큰 결단력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이익을 실현하는 조치라면 큰 품으로 받아주고, 양보하는 배려와 존중의 입장까지 보여주고 있다. 삼지연 관현악단의 공연 내용을 볼 때도 그렇고, 자유한국당 및 남의 적폐세력이 북을 물어뜯으며 어떻게든 평화를 깨보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헤아리며 과감하게 평창 올림픽을 평화의 올림픽으로! 우리 민족의 대경사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같은 힘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인가!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과 이번 대북 특사가 언급한 발언에서 우리는 그 힘의 원천을 알 수 있다.

▷ 푸틴
한반도를 둘러싼 핵(核) 외교전의 ‘승리자’이자, 앞으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성숙한 정치인’

“나는 김정은이 당연히 이번 판을 이겼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전략적 과제를 해결했다”며 “핵폭탄을 갖고 있고 사실상 전 세계 어느 지점, 최소한 적의 영토 모든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 1만3000km나 되는 긴 사거리의 로켓도 갖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이제 북한 지도자는 상황을 정리하고 진정시키는데 관심이 있다”며 “그는 전적으로 소양이 있고 이미 성숙한 정치인”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12/2018011200321.html

▷ 대북특사
특사단은 김정은에 대해 ‘배려’ ‘숙성된 고민’ ‘여유’ ‘리더십’ 같은 표현을 쓰며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방문 중 북한이 보인 태도에 대해서도 ‘열린 경호’와 ‘정성 어린 대접’을 했다고 말했다. 특히 김정은이 지난 5일 접견 때 특사단에게 한·미 연합 훈련 등을 언급하며 여러 번 “여러분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이해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정은은 한국 및 서구 언론에 나온 자신에 대한 평가를 언급하면서 ‘무겁지 않은’ 농담까지 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특사단은 “김정은은 전 세계의 시선과 (한국) 국민의 기대도 잘 알고 있었다. 북한으로서도 쉽지 않은 난제들을 말끔히 풀어가는 과정에서 그의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09/2018030900275.html

대단히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정치지도자로 되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
같은 민족의 한 사람으로 참으로 자랑스럽고 긍지가 높아진다.

앞으로 있을 4월 남북정상회담과 5월 북미정상회담에서도 이러한 우리 민족의 힘이 전 세계로 보여질 것을 상상해 보라! 우리 민족이 세계적으로 이렇게 강대한 적이 있었던가! 남북이 힘을 합쳐 번영하는 통일 조국의 위상을 높여내자!

목, 2018/03/2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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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광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길게 말한 것이 아니라 첫 마디에 반대에 봉착했습니다. 저는 왜 개정을 반대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다면서 집행부가 이사회도 무시하고 운영위원회도 무시하고 지부도 무시한다고 운을 떼고 그 예를 들겠다고 했는데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함을 당했습니다.

제가 하고자 했던 말들은 하나도 잘못됨이 없는 정당한 반대토론이었는데 김재광님은 저더러 엉뚱한 발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정관이 개정되기 전이라도 이렇게 이사회와 운영위와 지부를 무시한다면 제도적으로 집행부에 권력이 집중되도록 개정된다면 앞으로는 얼마나 더 무시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정당한 반대토론이지 쓸데없는 말을 하려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찬성토론은 다 들어주고 반대토론은 소리질러 방해하고 발언기회를 차단하는 것은 비민주적이고 일방적인 폭거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마이크를 빼앗으려 하고 물리력으로 신체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범죄라고 생각하고 저를 다중(4명)이 밀어붙이는 데 대해서 저를 놔달라고 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반대토론을 봉쇄하고 결의를 한 것은 효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김재광님이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금, 2018/03/3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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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김점구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직후 회원에 가입했습니다.
1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연구소는 제게 있어 매우 소중한 인생경험이었고 진실과 정의를 위해 자신의 아버지마저 고발했던 임종국 선생의 정신은 지금도 삶의 지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원들을 가장 많이 만났던 곳은 진실과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총회는 그동안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며칠 동안 정관을 다시 살펴봤고, 정관 일부 조항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몇 개의 글을 봤습니다.
여인철 전 위원장의 성명서와 총회 후기, 김재광 전 지부장의 반박, 강세형 전 지부장의 재반박 글도 꼼꼼하게 읽어봤습니다.

성명서는 총회장이 아닌 이곳에 올린 글이므로 총회후기와 반박, 재반박 글 그리고 총회장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소회를 밝힙니다.

개정안에 대한 여인철 전 위원장의 반대 의견이 시작되자 발언 중단 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했습니다. 발언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김순흥 지부장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개정안과 관련 없는 내용이었지만 중단 요구 없이 순탄하게 발언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강세형 전 지부장의 첫 마디는 개정안 반대였습니다. 바로 고함이 난무했고 급기야 마이크 OFF, 퇴장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강세형 전 지부장이 발언을 할 때 제 옆의 회원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사람은 회원이 아니다.’
강세형 전 지부장은 회비를 내고 있다고 밝혔으나 제 옆의 회원은 회원이 아니라는 고함을 이어갔습니다.

가 왜 회원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답은 전남 동부지부에서 제명했다였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충격 아니 경악을 금치못했습니다.
누가 지부에게 본부 회원을 제명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까?
정관 어디에 지부에 제명 권한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까?

<민족사랑> 회비납부자 명단을 확인해봤습니다.
전남동부지부(순천 여수 광양 고흥 곡성 구례 보성)…. 강세형….
2018.3, 2018.2.. 2017.3, 2017.2…

볼테르는 이렇게 말햇습니다.
사람들은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
제명운운한 회원은 그저 반대 의견을 방해하기 위해 총회에 참석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김재광 전 지부장은 여인철 위원장의 성명서(총회장이 아닌 카톡)까지 인용하며 반박했는데, 저는 총회장에서의 상황을 바탕으로 의견을 밝히겠습니다.


당일 총회 시작 후 2시간 정도 흐른 뒤 정관개정안 의결 순서가 되어서 제안자인 xxx 운영위원장이 제안설명을 하고, 개정안을 반대하는 여인철씨가 반대입장을 발표했는데, 너무 장황하게 얘기를 해서 찬반토론을 위해서 3분안에 발언을 마쳐달라고 사회를 본 소장이 부탁을 드렸고, 찬반 토론이 시작되어 찬성하는 회원과 반대하는 쪽에서 1명씩 발언을 하는 중에 xxx 전 지부장이 마이크를 잡고 오랜 시간 발언과 제안과 상관없는 얘기를 해서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가고 회의가 난장판이 되어 마이크를 끄게하고 진행을 위해서 퇴장을 요청했는데 계속해서 악다구리를 부리고해서 퇴장을 요청하였지만 계속해서 회의를 방해했습니다.
하여 더 이상 회의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해서 소장이 충분한 의사를 알았으니 표결에 붙이겠다고 하여 개정안 삭제를 낸 여인철씨와 뜻을 같이하는 5명만이 반대하고 200여명이 넘는 회원이 찬성을 해서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통과된 것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면을 봤습니다.
서로의 기억이 다른 것일까요?
(촬영한 동영상을 함께 보기를 제안합니다)

여인철 전 위원장의 발언은 처음부터 방해를 받았습니다. 장황이라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XXX지부장은 강세형 지부장입니다.
강 지부장이 오랜 시간 발언과 제안과 상관 없는 얘기’…
발언다운 발언은 없었습니다. 첫 마디가 개정안 반대였고 즉시 고함이 터져나욌습니다.
난장판은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습니까?

김재광 회원님께 여쭙습니다.
김순흥 지부장의 발언은 개정안과 관련 있는 발언이었습니까?
김순흥 지부장은 개정안에 대한 의견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별 다른 제지 없이 발언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올고 다른 회원과 운영위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틀리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촛불을 들었고, 민문연 운영위원장을 엮임했던 회원으로서 올바른 행동이라고 판단되지 않습니다.”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입니다.
왜 다르다가 아니라 틀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총회장을 나와 교문까지 가는 동안 무리지어 가는 서너명의 회원과 교문까지 걸어갔습니다.
총회장의 얘기가 오갔고 한 회원이 왜 난리를 피워 하기 싫으면 그만 두지…..’

오랜만에 회원들과 식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자리가 민족문제연구소 총회장이 아니기를꿈이었기를.. 망상을 했습니다.

오늘 정관을 다시 살펴볼 생각입니다.

사무국에 제안합니다.
정관에 대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회원방을 개설해 주시기 바랍니다.

토, 2018/03/31-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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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을 학수고대하던 훌륭한 회원들이 전국에서 모여 ,

업무보고를 하고 뒤풀이 장소에서 동지애를 확인하며 축제인 듯 즐거운 시간을 가질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입구에서부터 유인물이 나눠지고,다시 그에 대한 반박문이 나눠지면서 썰렁해졌고,

뒤풀이 장소도 분산돼서 다소 맥이 빠지는 기분이더군요.

 

감히 건의를 드리자면 ,

한 회원이 유인물을 나눠주는 걸 본 운영진 측에서 따로 그 분과 충분한 대화를 가졌거나 ,

아님 이전부터 불거진 문제였다면 정기총회 전에 충분한 토론이 있었어야 한다고 봅니다.

선동을 하자 선동으로 맞서는 듯한 이 분위기는 그동안의 우리 민문연의 분위기가 아니더군요.

그리고 일단 일이 벌어져서 총회 중 발언의 기회를 줬으면 경청을 하는 게 예의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의견이 다소 황당했다 하더라도 들을 준비도 되잖은 상태로 거듭 발언의 기회를 허용하고,

반박의 기회를 부여하면서 ,마치 똥파리 정치꾼들의 난장판인 듯 변모했고,

차마 견딜 수가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뒤풀이 장소를 찾았습니다.

거기서라도 얼마간의 해원이나 이해의 장이 마련될 것이라 기대를 했던 것이죠만,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뒤풀이 장소와 ,

장소섭외 시의 소홀함이 있었던 듯 사업장의 주인들은 빨리 밥이나 먹고 꺼지라는 투더군요.

 

한 사람이 아쉬운 현 상태에서 이처럼 동지를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과연 바람직한 걸까요?

이제 근사한(?) 아지트도 마련했고,

행사에서 여러분들의 좋은 평가도 듣고 하니 기고만장한 것일까요?

수 년 전 서울시의화 별관애서 정기총회를 갖고 ,

근처의 회관에서 뒤풀이를 했던 때가 생각나네요.

당시 광복회회원들이 참석을 한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누구보다 굳건해야 할 광복회가 돈에 흔들려 관변단체로 전락한 것 아니냐며 호통을 치던 게 생각납니다.

통쾌하더군요.

그런데 이번 총회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어땠나요?

만약 처음 참석한 사람이었다면,당시 그 자리엔 처음 참석한 사람들도 적잖았던 것으로 압니다만,

무슨 이런 거지발싸개같은 모임이 있나 생각지 않았을까요?

두 번 다시 참석하고 싶잖아졌을 겁니다.

후원도 중단했을지 모릅니다.

 

벼도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기 마련입니다.

벼만도 못한 우리가 되지 않으려면 날로 성숙해가고,겸손해져가는 우리가 됐으면…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불만을 가지셨던 분들과의 갈등,반드시 해소해 주십시오.

설사 그들이 잘못 생각했더라도 우리가 누구입니까?

피붙이보다 더 끈끈한 애국충정으로 모인 동지들 아닙니까?

이처럼 후일담으로까지 감정의 골을 파면서 멀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가 걸리더라도 푸시고 더욱 끈끈하게 뭉칠 수 있도록 애써주십시오!

 

친일청산이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친일청산만 제대로 해내면 모든 적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걸 아는 우리가,

아직도 고개를 바짝 쳐들고 기승을 부리고 있는 친일매국노들과의 투쟁의 적전에서

이처럼 분열을 해서야 말이나 됩니까?

 

네.익명의 뒤에 비겁하게 숨지 않겠습니다.

저는 천안의 하 상욱입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토, 2018/03/3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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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인 역사 나눔 프로그램’, 역사 기반의 게임 개발 지원

▲ 게임인 역사 나눔 프로그램 협약식

게임인재단이 역사 연구 기관과 손잡고 역사를 주제로 한 게임 개발을 지원한다.

게임인재단은 3월30일 민족문제연구소,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협약식을 열고 역사 기반 게임 개발을 지원하는 ‘게임인 역사 나눔 프로그램’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게임인 역사 나눔 프로그램은 지난 16일 발표한 ‘게임을 통한 역사 대중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사를 기반으로 한 모바일, PC 온라인 게임 개발 활성화를 위해 마련됐다. 한국 게임 개발사 및 개발자를 대상으로 하며 게임인재단 공식 이메일([email protected])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선정된 개발사는 게임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진, 영상, 악보 등 각종 역사 관련 사료를 지원받으며 저작권 검수, 역사 연구 기관의 자문과 각종 교육 프로그램 등을 무상으로 제공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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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me X History 게임인 역사 나눔 프로그램 ⓒ 게임인재단 공식 페이스북(www.facebook.com/gamein.or.kr/ )

게임인재단은 역사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장르의 게임 출시를 지원할 예정이다. 게임인재단 측은 “게임 속에 김구, 안창호가 직접 캐릭터로 등장하거나 복원된 독립군가를 편곡해 게임 속 BGM으로 활용할 수도 있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숨겨진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와 게임 스토리에 접목하는 등 그 활용 소재와 범위는 무궁무진할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밝혔다.

게임을 통한 역사 대중화 프로젝트의 첫 번째 참여 사례로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이 새롭게 제작된다. 투캉프로젝트가 제작하는 ‘난세의 영웅 리뉴얼'(가칭)은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총 10편의 구성으로 개발 중인 역사 기반 모바일 게임이다. 게임 고유의 재미와 역사적 지식 두마리 토끼를 모두 겨냥하고 있다.

안겨레 투캉프로젝트 대표는 “역사를 게임으로 재미있게 풀어 대중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간다는 취지에 공감해 동참하게 됐다”라며 “최근 새롭게 개발 중인 ‘난세의 영웅 리뉴얼(가칭)’의 근현대사편을 광복절과 같은 역사적 의의가 있는 날 공개할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게임인재단은 “그동안 역사를 기반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 음악 등이 대중문화의 중심에서 사랑받아왔다”라며 “이제는 게임의 차례며 역사도 하나의 IP가 되어 게임의 인기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역시 “난세의 영웅을 시작으로, 3.1혁명 100주년이 되는 2019년에는 더 많은 역사 나눔 게임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 나가겠다”라고 밝혔다.

<2018-03-31> 블로터

☞기사원문: 게임인재단-민족문제연구소, 역사 기반 게임 개발 지원

※관련기사

더코리아뉴스: 게임인재단, 역사 기반 게임 개발 지원하는 Game x History ‘게임인 역사 나눔 프로그램’ 시작

☞서울경제: 게임인재단, ‘게임인 역사 나눔 프로그램’ 시작

☞스포츠경향: 게임인재단, ‘게임인 역사 나눔 프로그램’ 시작

더게임스: 게임인재단 등 역사 기반 게임개발 지원

 

토, 2018/03/3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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