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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갑질과 을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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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갑질과 을들의 반란

익명 (미확인) | 화, 2019/03/12- 15:45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아무런 합의문 없이 끝났다. 지난 싱가포르 합의 이후, 교착국면을 이어가던 북미관계가 이번 회담으로 무언가 돌파구를 찾고,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새 역사의 중요한 전기가 될 것이라던 낙관적 전망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또 한번 밀고 당기기의 오랜 긴장이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극적인 합의점을 찾고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젖힐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국가간 협상에서 합의와 결렬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때론 협상이 합의에 이르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결렬이 되면서 두 국가의 불편한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강대국과 약소국의 입장에서 협상 결렬이 미치는 충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강대국과 약소국의 협상에 임하는 자세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강대국의 입장에서 약소국과의 협상은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여타의 대외적인 관계의 단지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약소국의 입장에서 강대국과의 협상은 때론 자신의 모든 국가적 역량을 다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이자 동시에 그 결과의 충격은 전 국가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때론 강대국과 약소국의 협상에서 모든 힘을 다한 약소국이 강대국에 비해 더 많은 결과를 얻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강대국과 약소국이 모두 협상에 성실히 임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협상의 원칙을 기켰을 경우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만일 강대국이 자신의 힘을 믿고 비-합리적이며, 약소국의 뒷통수를 치는 협상을 해 왔을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두고 여러 분석과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비판하는가 하면, 북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기도 하고, 애초부터 미국은 판을 뒤집으려고 했었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 미국 국내정치의 영향까지 다양한 각도에서의 분석과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분석과 평가를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근거들이 나오고 있다.

미국의 무리한 요구에서 원인을 찾는 입장은 북미간 불신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이 주장하는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접근을 거부하는 미국의 논리가 전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고, 북의 비핵화 진정성을 문제삼는 측에서는 북이 처음부터 비핵화에 관심이 없고 시간을 끄는 것에 불과했다고 평가한다.

여기에 정상회담 기간 중에 미국 사회를 달구었던 코헨의 의회 청문회 등의 미 국내정치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입지의 약화 때문에 합의문에 서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중 북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문제삼는, 어쩌면 북에 대한 근본주의적 시각을 제외하면 결국 결렬의 요인은 미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협상의 문제를 둘러싼 것이 아니라 미국의 무리한 요구 혹은 자신들의 내부적인 요인 때문에 협상을 결렬시킨 것이다.

흔히 협상은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없고, 모두를 실망시키지도 않는다고 한다. 즉, 협상은 서로가 마주 앉아 무언가를 주고받는 것이며, 따라서 이득과 양보의 함수인 것이다. 그런데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일방적인 요구만을 앞세우는 즉,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많은 것을 일방적으로 얻기만을 요구한다면 이는 공정한 협상이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상대방보다 힘의 우위에 있는 점을 이용하여 비-합리적이고, 무리한 요구를 일삼는 말과 행위를 ‘갑질’이라고 한다. 사회에 갑질이 넘친다면 그 사회는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로 구분되는 말 그대로의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 될 것이며, 그 사회의 법과 질서는 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제2차 북미정상회담은 어쩌면 전형적인 강대국의 ‘갑질’이라 할 것이다. 이를 ‘제국의 갑질’이라 이름붙일까 한다. 사실, 강대국 미국의 갑질은 새삼스럽지 않다. 1994년 모두의 기대를 모았던 ‘제네바 합의’의 일방적인 파기부터 시작하여, 2002년 소위 특사 방북을 통한 ‘고농축우라늄 문제’를 제기하면서 제2차 ‘북핵위기’를 촉발시켰고, 2005년에는 ‘9.19 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BDA’ 사태를 일으켜 협상을 뒤로 돌리고자 했던 것까지…..

역사적으로 제국의 갑질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남북의 관계 개선을 막아왔고, 우리에게 더 많은 인내를 강요해왔다. 그렇다면, 갑질에 대처하는 길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의 갑질에 대해 ‘을들의 반란’이라는 말이 있듯이, 갑질에 대처하는 유일한 길은 ‘연대와 협력’일 뿐이다. 남북의 연대와 협력, 지금 당장 미국의 갑질에 불편해하는 주변 국가들과의 협력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북미간 문제해결을 위한 중재자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당사자이자 한반도 미래의 설계자여야 하고, 남북의 연대와 협력의 힘을 통해 문제 해결의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다행스럽게 제2차 북미정상회담의 결렬 이후에도 북미가 서로에게 결렬의 책임을 묻기는 하지만 협상의 파국을 선언하지는 않고 있고, 여전히 협상의 기대감을 밝히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이미 신년사 분석에서도 밝혔듯이, 우리 정부가 또 다시 무거운 짐을 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제국의 갑질’에 부응하는 것이거나 그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으로의 갑질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과감한 ‘을들의 반란’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 핵심은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듯이 바로 ‘남북의 연대와 협력’일 것이다.

 

통일뉴스, 2019년 3월 11일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가 공동게재에 동의하여 실린 것임).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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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론을 보면 매일매일 코로나19 확진자 및 사망자 수 관련 기사와 마스크 대란 기사가 도배된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늘어나는 코로나19 확진자 및 사망자 수를 농구경기 스코어 중계하듯 보도한다.

더 한심한 건 마스크 관련 기사다. 거의 모든 언론이 ‘마스크 대란’, ‘마스크 품절’, ‘마스크 구입 위한 장사진’ 따위의 기사를 쏟아낸다. 이런 기사들은 마스크 수급을 위한 대안은 없이 마스크 공급을 제대로 못하는 정부 성토로 가득하다.

 

시장경제원리가 정확히 작동하는 마스크 시장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히 생각해보자. 마스크를 생산하는 국내 민간기업들의 공급 한계량은 하루 1000만장 남짓이다. 그럼 국내 마스크 생산 업체들이 지금처럼 생산능력의 한계까지 기계를 돌려 마스크를 생산한 때가 또 있었을까? 단언컨대 없었을 것이다.

마스크 소비가 과거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도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린 근년부터인데, 소비가 크게 늘었다고 해봐야 마스크 제조업체들의 생산능력 한계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을 것이 자명하다.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의 일 평균 마스크 생산량은 최대 생산가능량의 몇분의 1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신천지 교인들의 집단 감염 등으로 코로나19가 전국으로 번지면서 너나 할 것 없이 공포에 질린 채 마스크 구입에 혈안이다. 쉽게 말해 가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부당이득을 노린 생산업체·유통업체의 사재기도 마스크 가수요 증가에 일조했음은 물론이다)했고, 이 가수요는 국내 마스크 제조업체들의 생산능력한계를 가볍게 넘어선다.

전 국민이 매일 마스크 한 개씩만 구입하려해도 매일 5000만개의 마스크가 필요하다. 현재 마스크 생산능력의 5배에 달하는 수요를 당장 해결할 길은 전혀 없다.

그리고 감염병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생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민간업체들이 생산 시설과 인력을 대거 늘릴 리도 만무하다. 감염병이 잦아들고, 해 뜨면 사라지는 아침안개처럼 가수요가 소멸되면, 생산 시설을 확장한 기업들을 기다리는 건 파산이기 때문이다. 설사 일부 기업들이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한다해도 시차효과 때문에 지금의 공급부족 현상을 타개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게 대한민국 경제가 채택하고 있는 시장경제원리의 작동 방식이다. 감염병으로 인해 가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마스크 가격이 폭등하고, 마스크가 품귀 현상을 빚는 건 시장경제원리상 지극히 당연하다. 시장원리를 조금만 알아도 지금의 마스크 부족을 정부 탓만으로 돌릴 수 없다.

 

정부가 마스크 공급? 엄청난 낭비와 비효율도 감수해야

그러거나 말거나 언론과 야당, 일부 시민들이 문재인 정부에 요구하는 건 이런 것 같다.

‘코로나 사태 이전과 같이 KF80, KF94마스크를 1000원 남짓의 저렴한 가격에 맘 편하게 구입하고 싶다. 정부가 무능해서 혹은 사태 초기에 중국에 퍼줘서 마스크가 모자라니 정부는 책임져라.’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매일 5000만장의 저렴한 마스크를 전 국민에게 신원을 확인해 배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보다 다섯 배 이상의 마스크 생산능력을 확보해야 하고, 매일 전 국민에게 1인 1장의 마스크를 제공하는 배급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정부가 마스크 생산업체를 전부 국영으로 만들든, 아니면 지금의 마스크 생산업체들이 매일 5000만장의 생산능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데 드는 천문학적 비용(공장증설, 기계구입, 인력확충 비용 및 그 유지비용)에 대해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든 어마어마한 비용이 발생하는 건 불문가지다.

생산능력만 확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사재기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1인 1장의 마스크 배급이 정확히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신원 확인 시스템과 배급 장소 및 배급 담당 인력의 확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모두 엄청난 비용이 발생할 게 자명하다. 마스크 5000만장 생산능력 확보 및 유지, 마스크 배급체계의 구축 및 유지 등에 들어가는 천문학적 비용은 모두 세금이다.

그런데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어쩌다 발생하는 전염력 강한 역병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천문학적 낭비와 비효율을 감수하는 게 말이다. ‘모든 시민들에게 매일 저렴한 마스크를!’을 외치며 정부를 성토하는 자들은 적어도 그에 따르는 천문학적 낭비와 비효율을 감수할 각오는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시장경제와 작은 정부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자들이 그럴 리 없다.

 

지금은 마스크 가수요를 억제하는 방법뿐

거듭 말하지만 지금의 마스크 품귀와 가격 상승은 감염증 공포로 인한 가수요 때문이다. 이로 인한 일시적 마스크 부족 해결 방법은 가수요를 통제하는 길 뿐이다. 사재기에 대한 단속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특정 기간 동안 구입할 수 있는 마스크의 수를 제한해야 한다. 정부도 그렇게 가닥을 잡은 것 같아 다행이다.

코로나19 공포 마케팅을 통해 마스크 가수요를 폭발시킨 언론은 이제 마스크 타령 좀 그만하기 바란다. 이 마당에도 배급제 운운하며 정부를 공격하는 언론도 있다. 공격하더라도 대안을 내놓고 하기 바란다.

토, 2020/03/21-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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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지식경제의 또 다른 심층적인 특징은 지식경제가 우리가 작업하는 방식과 정신이 관념을 발전시키고 발견을 성취하는 방식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을 수립해준다는 데에 있다. 생산이란 우리의 힘을 향상시키는 기술의 도움을 받아 자연을 변형하고 자연의 힘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지식성장이 경제활동의 중심축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신규제품이나 신규자산, 이를 형성하는 새로운 방식은 우리의 추측과 실험을 상품과 서비스로 구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식경제의 이와 같은 성격규정에서 경제생활에 중요한 어떤 것들, 예컨대 생산에서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 즉 협력체제나 기술적 노동분업 나아가 우리가 협력하고 있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제도적 안배들은 배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지식경제의 중요한 충동을 급진화함에 따라 실천적인 목표를 달성하고자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은 상상력의 표현이 된다. 이 방향으로 더 전진하기 위해서는 미시적 수준에서, 즉 현장에서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경제와 정치의 제도적 안배들을 쇄신하여 이러한 안배들이 시장과 국가에 관한 확립된 가정과 안배들을 당연시하기보다는 우리가 이를 초극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허용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정신활동의 두 측면에 대한 견해를 확립하지 않고서는 상상력을 협력으로 전환하는 데에서 무엇이 관건적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 한 측면에서 정신은 구닥다리 기계, 즉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에서 중요했던 기계의 일종과 같다. 이러한 정신은 모듈과 같아서 (뇌가소성에서 한계가 존재하는 한) 뇌의 구분된 영역들과 연결된 다양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공식과 같아서 판에 박힌 공식, 규칙 또는 알고리즘에 따라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정신의 행동 또한 반복적이다.

다른 측면에서 정신은 모듈이나 공식과 다르다. 이러한 정신은 뇌가 소성을 이용하여 뇌의 물리적 하부구조의 다양한 부분들에 유사한 역량을 부여할 수 있고, 자유롭게 모든 것을 여타 모든 것과 재조합할 수 있다. 이는 수학에서 회귀적 무한(recursive infinity)이라고 부르는 역량이다. 이러한 정신은 자신의 정립된 관행이나 방법을 기각하고 자신의 확립된 전제들에 도전하고 계속해서 발견을 이루거나 정신이 회고적으로 명료화하는 통찰들, 적절한 관행들, 방법들, 전제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는 시인이 부정적 능력이라고 불렀던 권능이다.

이것이 우리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측면이다. 상상력은 기계로서의 정신과 대조적인 반(反)기계로서의 정신이다. 상상력의 측면에서 정신은 두 가지 구성적 작동방식을 가진다. 첫 번째 작동은 칸트가 강조했던 것으로서 거리두기이다. 그 이미지는 인식의 기억이다. 두 번째 작동은 칸트가 간과한 것으로서 변형적인 변주이다. 우리는 어떤 자연적이거나 계획적인 개입에 반응하여 현상의 변화를 기획하거나 자극함으로써 현상을 파악한다. 우리는 그 현상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혹은 우리가 그 현상을 무엇으로 바꿀 수 있는지와 같은 인접한 가능성들의 범위에 현상을 포섭함으로써 그 현상을 이해한다. 생산과 상상력의 근접성은 지식경제의 심장이며, 지식경제가 확산되고 심화될수록 더욱 그렇다.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생산과 상상력의 유사성을 탐구할 수 있다. 하나는 작업을 조직하는 방법이나 노동의 기술적 분업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기계로서의 정신과 반기계로서의 정신(상상력)의 상대적 권능이나 우위성은 뇌의 물리적 구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 상대적 권능이나 우위성은 생산의 제도와 관행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조직에 의해 형태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만약 정치가 인간관계의 형태를 둘러싼 투쟁을 의미한다면) 정치의 역사는 정신의 역사에 내재적이다.

지식경제 하에서 우리가 함께 일하는 방식(기술적 노동분업)은 상상력으로서의 정신의 작동방식과 닮기 시작하고, 그 각각의 특징들, 한편으로는 정신의 비모듈적이고 비공식적인 특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이 더욱 완전하게 발현됨에 따라 그 회귀적 무한의 역량과 부정적 능력을 갖기 시작할 수 있다. 생산은 이러한 특성들과 능력들 덕분에 인접한 가능성의 잠재영역에서 새로운 제품과 새로운 생산의 가능성들을 이용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다. 감독적 역할과 집행적 역할 간의 차이나 결과적으로 전문화된 집행적 역할들 간의 차이가 완화될수록, 생산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실현할 기회는 더 나아진다.

생산계획은 집행과정에서 작업반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정된다. 결과적으로 작업반 내에서 전문화된 역할들은 더 이상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역할들 간의 구분의 고착성은 개념 정립과 집행 간의 차이의 명료성의 이면일 뿐이다.

기술적 노동분업이 어떻게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는 경제에 적용되는 경우 당혹감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더 익숙한 군사적인 응용사례를 가지고 있다. 재래식 정규군으로 조직된 보병여단은 지휘관과 병사의 엄격한 구분과 야전에서 고정된 역할들을 가진 지휘통제구조를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보병여단은 자체적으로 구비한 군사기술의 잠재력, 즉 화력기술 및 통신장비를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서 매우 제한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보병여단은 기습전에 대응하여 전장에서 재편성하고 변통하는 능력에서도 제한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적절한 훈련을 받고 기술을 습득하고 장비를 갖춘 비정규군은 전투의 계획과 실행 사이에 그와 같은 뚜렷한 차이를 두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군대는 엄격한 지휘통제구조를 피할 것이며, 긴급한 장애와 기회에 비추어 계획을 조정할 더 큰 재량을 하급 장교와 하급 부대에 배정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군대는 스페셜리스트에게 동시에 제너럴리스트가 되라고 요구할지도 모른다. 부대가 이러한 이상을 추구하면 부대는 뛰어난 작전능력을 구비할 것이고 전통적인 정규군보다 화력과 통신장비를 더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부대는 야전에서 흩어지고 다시 집결하고, 일관성과 추진력을 상실하지 않은 채 기습전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군사적 진화의 노선은 정규군이 상황에 따라 자체적으로 확장하고 중앙의 (그러나 느슨하고 유연한) 통제를 수용하고 야전에서 일관성과 추진력을 보존하는 능력을 유지하면서 비정규군의 일부 특성들을 외부로부터 획득하는 것이다. 똑같은 일이 경제에서도 일어나야 하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는 것은 그 자체로 지식경제의 발전과 확산에서 진보를 의미한다. 현장에서 협력방법은 더욱 완전하게 상상력의 특징들을 띠게 된다.

이제 상상력으로서의 생산이라는 동일한 아이디어가 기술적 노동분업 뿐만 아니라 기계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이전의 선진적인 생산방식(기계화된 제조업과 그 후속형태인 공장제 대량생산) 아래에서 노동자는 마치 자신이 기계의 일부인 것처럼 일했다. 애덤 스미스의 핀공장이나 헨리 포드의 조립 라인에서 그의 동작은 기계들의 동작을 연상시켰다. 노동자와 기계의 유사성은 은유나 먼 비유 그 이상이었다. 그러한 유사성은 프레더릭 테일러와 같은 산업조직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되고 정전화되어 경영자와 작업반장에게 실제적인 지침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선진적인 생산방식 하에서 우리는 심지어 그러한 관행의 가장 신중한 표현형태에서도 기계로서의 정신을 본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이 교육을 경제성장의 기본요소 중 하나로 떠받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 시대의 노동자에게 교육을 통해 요구되는 바가 사실상 거의 없다는 사정은 당연하다. 이러한 노동자가 필요로 했던 것은 복종심, 기본적인 문해력과 수리력, 손재주, 특히 손과 눈의 협응력이었다.

지식경제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고 또한 지식경제의 심화와 확산은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이러한 변화는 상상력의 모형에 따른 생산의 쇄신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또 다른 실례를 제공한다. 여기서 이러한 변화를 지도하는 원칙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기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개관으로 제시한다.

아주 최근까지 기계의 요체는 우리가 반복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우리를 대신하여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런 기계들을 공식과 같은 것이라고 부르자. 기계가 틀에 박힌 공식과 같이 작동한다는 사실은 기계의 가장 큰 가치가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공식과 같지 않게 행동하도록 허용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시사할지도 모른다. 그 기계의 사용자는 반복하고 기계 장치로 코드화하는 것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활동들에 그들이 가진 최고의 자원,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한 자원(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

그러나 기계와 사용자의 이와 같은 관계는 생산방식의 역사에서 지배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량생산에서 기계와 노동자의 관계에 대한 실례가 보여주듯이, 노동자는 더욱 빈번히 기계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모방하거나 다양하지만 비교적 공식과 같은 활동으로 기계를 보완함으로써 마치 그가 자신의 기계 중 하나인 것처럼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비교적 단순하고 경직된 기계일지라도 사용자들로 하여금 기계를 모방하는 대신에 기계를 최선으로 이용하도록 허용하는 기술의 잠재력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기술의 잠재력은 주류 경제사의 주변으로 내몰리게 된 공예적이거나 장인적인 생산형태로 달성되었다.

생산방식의 역사와 이러한 생산방식을 배태한 경제, 정치, 문화의 역사는 기계의 진화를 위축시키고 또한 기술적 노동분업을 형성해왔다. 기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기계가 아닌 것, 반(反)기계, 또는 비공식적이거나 비알고리즘적으로 작업하는 방식이라는 아이디어는 지금까지도 순전히 사변적인 가능성에 그쳤다.

지식경제의 도래는 현재의 고립적이고 상대적으로 피상적인 형태에서도 기계에 대한 기존의 이해와 이용방식을 거부하는 기계들의 발전을 수반하였다. 지식경제의 도래는 특히 현재 인공지능과 기계학습으로 알려진 기술혁신의 가장 혁명적인 분야에서 그러한 발전을 수반하였다. 지식경제의 초기 역사에서 지금까지 발전된 기계들을 이해할 수 있는 두가지 기본적인 방식이 있다.

우선, 지식경제의 기계들은 공식에 따르는 좀 더 고차원적인 장치들일 뿐이다. 우리는 특정한 용도에 한정하여 일련의 제한된 조작들의 공식들과 알고리즘들을 그러한 장치에 코드화하는 것 그 이상을 수행한다. 우리는 그러한 장치가 사례와 경험에서 새로운 동작을 추론하고 그에 따라 1차적인 알고리즘과 공식을 변경하도록 허용하는 메타적인 공식들과 알고리즘들을 혹은 2차적인 추론규칙들을 그러한 장치들에 부여한다. 우리는 기계들이 자신의 절차들을 조정할 때 반응하는 경험과 사례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심지어 이러한 기계들에 무작위성의 요소까지 장착할 수 있다.

또 다른 이해에 따르면 이 기계들이 수행하기 시작한 활동은 고차적인 형태의 공식과 같은 활동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계들은 일반적인 추론규칙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 우리는 공식에 따르지 않은 기계기능을 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방법과 같은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차량을 안전하게 운전하는 방법과 같은 더욱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적응적인 조작능력의 획득으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능력들은 과업들의 물리적 수행의 맥락에서 발전한다.

가장 발전한 기계들에 대한 두 번째 이해에 따르면 우리가 고차적인 추론규칙으로 파악한 것은 그러한 추론규칙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 규칙을 명확히 하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적응적인 진화적 상승에 대한 회고적 기술에 불과하다. 그러한 능력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은 피아제의 인지심리학에서 연구된 발달과정과 유사하다. 즉 추상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 다음에 나타나고 개념적인 것은 조작적인것 다음에 나타난다. 공식적인 환원이나 표현에 반발하는 실용적인 여분은 존재한다

기계의 역사에서 이러한 새로운 단계, 즉 지식경제에서 시작하고 지금 인공지능과 기계학습이라고 부르는 단계에 관한 메타-공식적이고 조작적인 이해들은 부상하는 새로움에 대한 대안적인 철학적 해명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해명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에 신뢰할 만한 근거를 적어도 아직까지는 확보하고 있지 않다. 기계 역량들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이 두 가지 설명들을 등가적이거나 보완적인 것으로 더 이상 취급할 수 없다는 점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지점까지 진보하는 때가 곧 도래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술의 역사에서 이러한 새로운 단계를 최종적으로 어떻게 규정하든지 상관없이 사람과 기계의 관계에서 어떤 근본적인 사항은 이미 변하였다. 비록 그러한 접근 방식이 심지어 비교적 원시적인 초기 기술의 모든 잠재력을 허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게 기계의 친구로서 배역을 주는 방식으로 대량생산을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현재 고립적이고 단절된 형태에서도 지식경제의 노동자를 기계의 그림자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 기계들은 어떤 일에서는 인간 노동자가 일찍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계도 가질 수 없는 것, 즉 상상력을 보유한다.

공식적인 것에서 메타-공식적이거나 포스트-공식적인 것으로의 운동은 내가 앞에서 상상력이라고 불렀던 마음의 두 번째 측면을 기계(원칙적으로는 모든 기계)가 구현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이 아니다. 상상력의 특징은 부정적 능력이다. 즉 상상력은 어떤 현상이나 어떤 사태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고 이윽고 변형적 변주들의 범위 안에 그러한 현상이나 사태를 포섭하는 정신의 능력이며, 정신이 아직 볼 수 없었던 어떤 것을 더 잘보기 위하여 정신의 확립된 방법들을 버리고 정신의 현재적 전제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신의 능력이고, 나아가 이전에는 생성될 수 없었던 통찰을 이해하는 방법들을 반성적으로 발전시키고 그 전제들을 공식화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상상력은 역량에 관한 것이 아니라 비전에 관한 것이다. 기계는 원칙적으로 이와 같이 이탈적이고 예지적인 힘을 가질 수 없다. 상상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 즉 인간 실존의 온갖 유한한 결정 요소들에 대한 인간의 초월성, 우리가 만들고 살아가는 개념적이고 사회적인 세계 안에 유폐될 수 없는 우리의 역량에 뿌리박고 있는 힘이다.

이러한 기계의 가장 효과적인 사용은 마치 자신이 기계인 것처럼 작업하거나 사고하지 않는 노동자들에 의한 기계사용이다. 기계와 반기계(달리 말하면, 노동자)의 결합은 노동자나 기계가 독자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우리는 기계에게 부여하였던 저차원의 규칙과 고차원의 규칙 이외에 이러한 규칙에 저항하는 능력과 이러한 저항으로 성취한 발견들을 반성적으로 이해하는 능력까지 기계에게 장착함으로써 기계를 상상력의 거점으로 만들 수 없다. 우리가 인간과 기계의 격차를 줄이고 심지어 연산능력에서는 인간을 능가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계까지 개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계보다 앞서 간다. 거북이, 즉 우리가 손수 만든 거북이[기계]와의 가장 중요한 경쟁에서 아킬레스처럼 기계는 결코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서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물질적 이익뿐만 아니라 도덕적 이익에도 응답한다. 우리가 늘 하는 일의 더 많은 부분을 기계가 수행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변화는 노동자와 기계가 분열하는 세계를 나타낸다. 많은 사람들은 결국 대부분의 일자리를 빼앗는 기계라는 유령을 불러왔다. 나는 나중에 급진화되고 경제 전반에 확산된 지식경제 아래서 노동의 성격은 변할 것이지만 노동의 총량은 줄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근거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주장은 기술혁신에 대한 반론으로서 노동총량불변이론에 대한 정통경제학의 거부 태도와 완전히 일치한다. 진정한 위험은 그 반대다. 노동자층의 압도적인 다수는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기계가 할 수도 있는 일을 수행하도록 내몰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의 능력에 대한 존중을 통해 발전하는 경제라면 어느 누구도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시장경제의 제도적 안배를 바꾸지 않는다면 이러한 잠재력은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방식을 제외하고는 실현되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논의하게 될 특정한 방향의 시장질서의 제도적 개편은 지식경제의 심화와 보급을 위한 주요한 요건 중 하나이다. 그러한 변화의 한 요소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설명에서 일찌감치 언급할 만하다. 계약형태로 매매하는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노동이 자유노동의 지배적인 형태로 남아 있는 한, 지식경제가 선호하고 요구하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는 억압되거나 통제되기 쉬울 것이다. 재산권의 이름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사람들이 경영 재량권의 극대화에 대해 갖는 이익은 이러한 잠재력의 달성을 억제한다. 이들의 권력적 이익은 엘리트 노동자와 기술자의 작고 고립된 세상 바깥에서 기계와 노동자의 관계에 대한 혁명적인 변화를 반대한다.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의 변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바라고 기대했던 대로 임노동이 점차 고차적인 자유노동으로서 독립자영업과 협동기업으로 이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러한 19세기 이상이 21세기의 현실과 가능성으로 전환되는 경우 그 이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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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6/05-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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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내내, 김정은이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나지 않자 많은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북한의 젊은 지도자가 과연 제자리를 지켜낼 수 있느냐는 의구심에 대한 견해가 여기저기서 돌출하는 가운데, 북한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정책이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 핵심적인 질문은 등장하지 않았다.

더구나 지난 3년 동안 한국과 중국이 북한의 안정과 번영 그리고 비핵화에 투자한 가치가 무시되고 있었다.

김정은이 공석에서 오랜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등장하기 전에, 동아시아와 남북 간의 장기적 관점에서 큰 변화를 일으킬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4월15일 총선에서 민주당이 단원제도인 국회의원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여당이 180석을 차지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이제부터 야당의 반대가 있다 하더라도 입법과정을 신속히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정부의 북한정책에 대해 향후 2년간, 그리고 2022년에 있는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후보가 재집권에 성공한다면, 아마도 7년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 같다. 이제 6개월 남은 미국 대선과 더불어 문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이라는 지원의 여부가 2021년에 자리잡게 될 워싱턴의 미국정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한 한국 정치에 있어서도 총선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세 분야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첫째로 유엔과 미국의 제재와 별도로, 한국정부는 북한을 더욱 포용하려는 노력을 이미 시작하고 있다. 서부와 동부의 해안에 철도연결을 재건하는 일이 착수되었고, 평양과 공동으로 COVID-19 팬데믹 방역에 대한 협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문대통령의 남은 2년 임기 동안 상기의 노력들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두 번째, 문정부의 강화된 정치적 집행력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대한 한국의 주도성과 룰-셋팅(rule-setting)의 역할을 장기간 예고하고 있다. 민주당의 압도적 승리는 COVID-19가 가져온 위기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문정부가 팬데믹 대응에 시민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지 못했다면, 여당의 총선 결과는 매우 심각했을 것이다.

동시에 총선결과는 소위 수구야당의 붕괴라는 결과와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야당의 텅빈 정책과 권위주의에 대한 맹신 그리고 반공주의라는 단세포적 대응이 당내 주요 지도자들의 패배를 가져왔고 현재까지 당을 허우적거리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여당의 강화된 입지와 야당의 축소라는 지형은 중도적 입장을 지닌 민주당의 의원 대부분들에게 2027년까지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보여진다.

세 번째, 이번 총선의 결과로 국제적 정치 지형에서 한국이 지닌 미들-파워라는 정치적 위상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다. 이러한 입지는 국제적으로 중심역할을 해야 할 중국과 미국의 위치가 극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시점과 겹치면서 더욱 부각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영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지만, 최소한 향후 몇 년간은 이들의 힘은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성숙단계에 들어서고 있고,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볼 수 있는 현대적인 조정능력을 갖춘 사회정책이 점차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최근의 COVID-19에 대한 신속한 대응역량은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자신감과 독자적 위치를 확인하는 괄목할만한 여러 성취 중의 하나이다.

5월에는 피로 얼룩졌던 광주의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40주년 행사가 있었다. 더욱이 지난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신속한 회복을 이룬 점과 부패한 전직 대통령들을 감옥에 가두는 시민주도의 제도적 분출은 현대한국의 전망을 더욱 밝게 한다. 현재도 사회 전체가 협심하여 COVID-19와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성과들은 시민사회의 조직능력이 광범한 지지를 받는 지도력과 결합하여 비폭력적 방식으로 얻어낸 것들이다. 이들의 목표는 정치권력과 국회의원들 그리고 지방정부 책임자들에게 시민사회라는 공간이 요구하는 기대치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한국이 지닌 미들-파워의 잠재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의사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여전히 내부에서 북한과의 평화프로세스를 진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액션을 취해야 하는지 논란이 진행 중이고, 미국과 동맹관계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논쟁의 주제이다.

그러한 논쟁들은 지역 내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동아시아의 안전과 발전에 대한 지역 내 행위자들과 기구들 사이에 활력과 자신에 넘치는 한국정부의 세심하고 스마트한 움직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유엔의 제재와 한반도와 지역에 미치는 제재의 역할은 남북간 외교에 관여하는 모든 당사국들에게 매우 중요한 변수로 남아 있다. 역내의 발전과 안전에 관련된 주요한 전진은 제재의 향방에 달려 있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주도적으로 제재를 풀어가지 못하면 오히려 종속적 위치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미국과의 건설적 역할이라는 주제 역시 서울과 워싱턴 간에 조용한 그러나 여전히 주요한 형안이다.

이러한 병행적 논쟁들이 수십 년 만의 중대함을 더하는 미국대선을 앞둔 상황에 전개되고 있다. 누가 백악관을 차지하던, 한국이 한반도 현안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압박은 증대될 것이다. 또한 한국 역시 2022년 5월 대선을 앞에 두고 정치권이 움직이고 있다.

앞으로 2년 간은 COVID-19가 야기한 위기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대응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와 ICBM 미사일 시험을 재개하여 현재 유지되고 있는 힘의 균형에 변화를 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한국은 보다 폭넓은 포용정책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지난 20여 년간 그러했듯이 공히 남북한에 대한 오판을 지속할 것이며, 추가적인 포용정책과 비핵화의 진전을 방해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병렬적 조합의 상황은 지속될 것이지만, 미국의 합법적 위치가 조락하고 한국정부의 부상하는 새로운 역할(위임, empowered)에 대한 기대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한국은 자신 뿐만 아니라 지역의 모든 당사자들의 이익을 진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확대된 힘을 사용할 것인가?

 

출처 : East Asia Forum, 20202-05-20.

Stephen Costello

조지워싱턴 대학교 내 한국연구센터의 객원연구자이며, ‘아틀랜드 회의’와 ‘김대중 평화재단’의 전직 이사출신

토, 2020/05/23-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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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인정하든 안하든 백인에게는 뿌리 깊은 선민의식이 있다. 흑인에 대한 ‘태생적’차별이다. 일본도 조선에 대한 선민의식이 있다. 36년간을 지배했다는 자만감이 그것이다. 그럼 대한민국은 조선(북)에 대해 그런 ‘쓸데없는’ 선민의식이 없을까? 있다고 본다. ‘우리보다 못 산다’는 우월감 같은 것들이 우리의식을 강력하게 지배한다. 민주당 당 대표 이해찬의 표현을 빌려 이를 표현하자면 정말 ‘천박한’ 우월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면 먹고사는 문제로 ‘체제경쟁은 끝났다’는 말도 되지도 않는 소리이다. 유치원생들이나 초등학생들이 싸울 때면 툭하면 나오는 ‘너그 집은 우리 집보다 못살잖아’와 같은 유치한 말싸움이다.

이 모두를 총칭하면 대한민국 안의 오래된 ‘북(한)판’ 오리엔탈리즘이다. 북한이 무조건적으로 대한민국보다 못해야하고, 사회주의는 무조건 자유민주주의보다 못해야 한다는 지독한 반공이념의 잔재이다. 하지만, 그 편협한 인식을 거둬들이고 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오히려 성립한다.

과연 대한민국은 정상국가인가?

한 국가의 정상성 기준을 ‘먹고 사는’ 경제지표로만 평가할 수는 없을 텐데, 그런 측면에서 대한민국이 북에 대해 배워야 할 것들은 없는지 겸허하게 따져봐야 한다. 왜냐하면 남과 북은 통일로 반드시 다시 만나야 할 민족이고, 미래이기 때문이다. 백년대계가 그렇게 우리 앞을 기다린다.

①하나, 뭐니 뭐니 해도 국가와 국가 간 비교에서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잣대중의 하나는 ‘자주국가’냐, 아니면 ‘예속(종속)국가’이냐 하는 그것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같은 민족으로써 동일한 식민지 경험이 있지만,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은 정 반대였다. 대한민국은 외세에 대해 좀 자유롭지 못한 반면, 반대로 북은 국가의 생명과도 같은 ‘자주’를 나름 잘 지켜내었다. 세계 최강 유일강대국과 상대하며 극강제재와 압박을 잘 견뎌내었다. 아니, 견뎌오고 있었다고 봐야한다.

이는 제아무리 대한민국이 선거제도라는 민주성과 세계 10위 내외의 경제력, OECD가입국이라 하더라도 미국식 민주주의체제에 포섭되어 ‘미국이 기침만 해도 감기 걸리는 체질’의 대한민국이 좀 본받아야만 하는 북의 국체와 같다.

②둘, 국난을 극복하는 방식의 차이 문제이다.

남과 북은 공히 1990년대 그 성격과 내용은 좀 달랐지만, 똑같이 어려움을 겪었다.

대한민국은 극단적 시장자본체제인 신자유주의정책 수용과 모라토리엄(국가부도)으로 나타났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간 그나마 부족하게 시행되어왔던 국민복지, 노동복지, 인권과 경제권마저도 상당히 후퇴시켰다. 촛불정부라는 문재인 정부도 이 후유증을 제대로 극복해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반면, 북은 그러한 상황-에너지난, 식량난, 외화난 속에서도 아주 높은 수준에서 국가가 시행해왔던 인민복지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말이다. 전반적 무상 11년 의무교육제도(지금은 12년)와 무상 의료치료제도, 무세금제도, 무상 주택분배제도 등은 그대로 지켜져 국가의 무한책임을 다했다.

누가 더 국가적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있는가?

체제와 이념의 프레임을 벗어던지면 국가를 부도내고, 하루아침에 그 평범한 수많은 노동자와 국민 일상의 삶을 파탄으로 몰고 간 그런 대한민국, 그 극복이후에는 권력과 돈으로 갑질‘gapjil’이 일상화되고, 결과 1: 99사회가 되고, 전직 대통령들이 줄줄이 감옥가는 그런 대한민국이 더 정상적인가?

아니면 모든 인민들을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인내를 요구하며 어려운 국가살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들의 전략과 노선을 지켜내려고 했던, 더 나아가 국가의 생명선과도 같은 자주의 문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서 당당한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그런 국가가 더 정상적인가? 쉽지 않는 판단의 문제이다. 하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듯이 자주 또한 구걸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③셋, 자기언어(국어)에 대한 태도문제이다.

자기 나랏말로 국어를 정해놓고도 세계적 추세라는 미명하에 국어인지 외국어인지 구분이 안 갈만큼 혼용되어진 일상 언어가 판치는 그런 국가와, 자기 민족의 전통과 자기 민족의 언어 순수성을 잘 지켜나가고자 노력하는 그런 국가 중에 어느 국가가 더 정상적이며 어느 국가가 더 비정상적인가?

분명한 것은 우리말, 우리글 장려정책 일환으로 꼭 필요한 외래어가 아니면 모두 우리말로 표현해야 된다는 법률이 대한민국에게는 있다. 그러함에도 대한민국은 자기 국어에 대한 철학과 태도정립이 모순되게도 ‘영어화’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좀 폼 나 보이려고, 또는 영어·국어, 심지어 신조어까지 혼용해야만 하는 분위기라서 .. 등등, 그렇게 우리 모두는 육체적 몸통만 한민족이고, 정신적 영역의 세계는 미국화에 함몰된다.

또 다른 한 예도 그 민낯이 적나라하다.

법으로 한글 이외의 옥외간판은 법률적으로 처벌대상이지만, 이미 외래어 간판의 천국이 되어 버린 대한민국이다. ‘웃고픈’ 한 현실은 시부모님이 찾아오지 못하게 아파트이름도 외래어로 어렵게 짓는다는 그런 국가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이다. 과연 정상적인가? 국어사용 우선 법률이 있음에도 그 법률은 이미 사문화되어 외래어가 도시 전체를 집어삼켜 무국적의 도시화가 엄청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④넷, 이 외에도 수많은 비교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할 수 있다.

자살률, 실업률, 교통 사고율, 노인 빈곤율, 산재 사망률, 입시지옥(1등주의) …. 등등 10여 가지 지표 이 모든 것들이 OECD기준에 대입되면 꼴지 이거나 꼴지 그 다음 순위이다. 수 십 년째 그렇게 일상화된 대한민국이다.

반면, 북은 유엔인권규약 A로 볼 때 국가가 가장 높은 높이에서 모든 인민들에 전반적 무상 11년 의무교육제도(지금은 12년)와 무상 의료치료제도, 무세금제도, 무상 주택분배제도가 보장되고, 국가 구성원 들 중 당원이나 당 간부들의 과로사가 제일 많다. 이와는 달리 대한민국 관료사회는 자기 국민에 대해 ‘개, 돼지’ 취급하는 사회이다.

무얼 함의하고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가 북보다 났다고 할 수 있는가? 전형적인 외눈박이 북(한)인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철저하게 북을 리바이어던(Leviathan)된 괴물로 제조해(manufactured) 그 허상으로 권력유지와 통치기반의 정당성을 확보해야만 하는, 즉 미증유의 반공이념에다 이것도 모자라 더 반북(反北)화된 종북이데올로기를 탄생케 해 한국판 매카시즘(마녀사냥)을 불러들인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과연 대한민국은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체제인가?

촛불정부(를 자임한) 대통령께서는 북을 향해 ‘체제경쟁이 끝났다’했지만, 헌정사상 임기 중 대통령이 파면될 만큼 대의민주주의체제는 허약했고, 그와는 또 다른 의미로 현대 정당정치에서 국민적 지지여부로도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정당문제마저도 법(국가보안법)적 잣대가 개입돼 진보정당이 해산되는 너무나도 허약한 체질의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대한민국이다.

낯설지 않는 대한민국 풍경이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내 안의 티끌은 진작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만 크게 보는’ 그런 못난 국가와 똑 닮아있다.

미국에 대해서는 미국을 너무나 닮아싶어 했고, 그 모든 것을 신봉하려했던 우리 대한민국이었지만, 진작 우리안의 또 다른 반쪽, 북에 대해서만은 너무나도 민망한 인식의 소유자들이었다.

이제는 벗어나자.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가 북을 찬양할 이유도 없겠지만, 적어도 제대로 된 북 들여다보기는 해야 한다. 불필요한 구시대적 적대의식과 분열구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북 바로알기 및 배우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게 성큼 통일의 기운이 다가올 수 있게 해야 한다. 충분히 이미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북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울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민이 되고 싶다.

토, 2020/08/08-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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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의 사진들은 14년 전인 2006년에 북측의 초대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며 일부 기업들의 입주가 시작한 개성공단을 방문하면서 찍은 사진들이다. 전문적으로 준비된 사진들이 아니지만 당시의 환경과 분위기를 전달해주고 있다. 비록 미국이 지원을 포기했지만, 남북 당국이 협력하여 개성산업단지GIC를 착수하여 진행해온 점은 매우 높게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개성이 폐쇄된 오늘 GIC를 둘러싼 노력을 제대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이는 124개의 업체와 5만 4천명의 북한 노동자와 700여명의 남한 관리자들이 함께 일해온 역사적 현장이다.

미국이 한반도 정책의 방향을 선회한 탓에, GIC가 준공되어 가동을 시작한 이래 워싱턴은 이에 대해 적정한 평가를 내린 바 없다. 1994년 제네바 일반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조지 W. 부시 정권이 2001년에 들어서면서 이를 무시하였다. 2015년에 발생한 이란과 맺은 핵협정의 파기에 대한 비극적이고 전초적인 사건이었다. 2001년과 2015년 당시 동일한 인물들이 개입하였는데, 그 중의 한 인사가 바로 존 볼턴이다.

개성공단의 운용이 함께 일해온 5만4천명 북한노동자의 일상이 한국전쟁 이후 가장 인도적으로 전진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외부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맥락에서 GIC는 매우 상징적인 사업이었으며, 남과 북이 함께 이룬 성공이었다.

미국의 경제분석가들은 GIC의 운용이 자본주의 방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매우 비판적이었고 이에 따라 미행정당국은 광범위하게 감시를 지속하여 왔다. 북한에 지불되는 임금에서 시작하여 남한이 제공하는 각종 지원의 내용들을 이들은 변칙으로 간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내의 몇몇 싱크탱크의 전문가들은 GIC에 추가로 투자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여 왔다. 만약 이들 검토가 현실로 진행되었다면, 북한 경제가 지니고 있는 투자의 위험을 보다 안정적으로 전환시켰을 것임에 분명하다. 대부분의 외국투자는 선행된 최초의 투자를 따라서 이루어진다. 이런 검토가 현실화되었다면, 투자의 규모는 점차로 확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물론 실현되지 않았다. 2001년 조지 부시가 당선되면서 투자확대의 검토는 철회되었고 GIC의 활력은 사라졌다. 남한 정부 (이명박 정권) 역시 계획대로 규모를 유지하고 확대할 능력도 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던 점도 실패의 원인이었다. 결국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2016년 산업공단을 폐쇄하였고, 포용정책이 만들어 낸 성과물은 과거의 추억으로 남았으며 이후 강압정책으로 재개되지 못했다.

 

GIC의 미래전망

현재의 시점에서 북한과 협력하여 GIC를 새로운 경제사업의 차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 워싱턴과 서울 당국의 주요 현안이다. 분명한 것은 서울당국이 기대하는 만큼 워싱턴이 당분간 이 현안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남한 당국이 상황을 주도해야만 한다.

만약에 GIC사업모델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서울과 워싱턴 당국이 포용정책으로 이를 지원하려 했다면, 투자에 대한 적정한 규제의 절차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해관계의 일차적 당사자인 남한은 북한과 함께 그러한 절차의 기구를 설립하는 것이 매우 합당했을 것이다.

이러한 기구가 필요한 배경에는 1980년대 말 소비에트가 붕괴되면서 발생한 경제적 재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 당시 국제사회는 러시아를 순리에 맞게 시간을 두고 개방하면서 공공의 자산을 공공의 목적에 따라 처분하고 보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잘못된 일들을 진행하였다. 국가소유의 기금들이 소수의 조직된 권력자들에 넘겨지고 일반시민들은 사기를 당했다. 당시에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외부의 행위자들(서구세력들)이 보다 적극적(전향적)으로 협력하는데 실패했다고 당시에 관계하였던 많은 이들이 증언한다.

GIC에 대한 다른 사례는 현대그룹이 남한 정부와 무관하게 사전에 북한과 협상을 진행하면서 보였던 탐욕과 이기심이다. 미리 합의된 사항을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시하여 615 회담을 앞둔 대통령에게 선택의 여지를 봉쇄하였다. 아마도 여러분들도 기억하실 것이다. 현대그룹이 사전에 일을 진행시킨 부담으로 김대통령의 퇴로가 막힌 셈이었다. 투명한 절차로 통제하지 않으면 거대 기업들은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만들곤 한다. 이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향후에 북한에 투자가 다시 재개된다면, 투자가 남한에서 이루어 지던, 이웃국가 도는 국제적인 차원에서 진행되던, 반드시 투명성을 유지하고 최상의 금융시행과 신뢰가 담보되는 강력한 ‘투자의 절차 investment gate’로 진행되어야 한다. 아마도 우선적으로 남한과 북한의 금융개발 공직자들이 일차적으로 기구를 조직하고 차후에 세계은행 유엔 아시아개발은행 등 국제적인 기구의 주요한 지침에 따라서 보완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물론 최종적인 결정권은 북한당국에 있지만, 상기 조직들의 지난 수십 년간 선행된 사례에서 얻은 경험들이 북한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서울당국 역시 절차라는 과정에 반드시 개입해야 한다. 미국이라는 동맹이 이러한 복잡하고 상호협력을 요구하는 다자적인 사업을 구상하거나 이에 기여할 의지도 없고 그럴 능력이 없다는 점은 의심에 여지가 없다. 비핵화와 평화협정의 과정도 동일하다.

GIC현안을 남북한 당사자들에게 맡기었다면, 준공한지 20년이 지난 지금 크게 확장된 공단의 사업을 자축하였을 것이고 한반도에는 비핵화가 실현되었을 것이다. 지난 20년은 남북한 지도자들이 GIC 사업에 책임을 함께 나누고 관계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규모를 확장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미국 역시 자신들의 이익이 보호되고 확장된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못했다). 여러 측면에서 한국이 미국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미국에게 한국의 역할이 더욱 절실하다.

 

Stephen Costello(스테판 코스텔로)

금, 2020/09/18-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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