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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있으라”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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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있으라”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익명 (미확인) | 금, 2019/03/08- 14:31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임정 100주년 특집]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1편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3월 7일 (목요일)
■ 대담 :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가만있으라”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준비한 특집 코너입니다.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오늘부터 매주 한 번씩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 역사를 되짚어 볼 건데요. 첫 시간에 해볼 얘기는 만세운동을 막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친일파 박중양과 ‘자제단’에 대해서 도움 말씀 주실 분, 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연구원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하 권시용)> 네, 안녕하세요. 권시용입니다.◇ 이동형> 3.1절 특집을 시작하면서 예민할 수 있는 친일 문제를 먼저 꺼낸 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청산하지 못한 현재의 역사이기 때문이죠. 우리 흔히 그럽니다. 우리 민족은 민족반역자를 한 번도 처단해 본 역사가 없다. 동의하십니까?

◆ 권시용> 네, 불행하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제일 큰 이유는 반민특위의 실패겠죠?

◆ 권시용> 그렇죠. 첫 번째 기회였는데.

◇ 이동형>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아니었을까요?

◆ 권시용> 그래도 최근에 또 역사적인 처벌, 이런 것들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죠.

◇ 이동형> 물리적 처벌을 불가능할 거고요.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물리적 처벌이었으면 그때가 딱 한 번의 기회였는데, 그 기회가 좌절된 것도 역시 친일파들, 민족 반역자들의 방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 권시용> 일차적으로는 미군정이 그들을 다시 등용했던 것이 큰 문제였던 거죠. 그리고 거기에 부합해서 친일 반역자, 친일 협력자들이 자기 살길을 찾기 위해서 또 노력을 많이 했던 것이죠.

◇ 이동형> 미군정이 그렇게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우리의 독립 역사를 잘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 권시용> 무지의 소치일 수도 있고요. 한반도를 통치한다는 차원에서,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일본에 충성하고,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서도 협력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죠. 효율성을 따졌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우리 친일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디서는 친일파라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 민족반역자라고 해야 한다,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고유 명사는 친일파로 굳어졌으니까요.

◆ 권시용> 그 용어가 오랫동안 사용되었고요. 그 속에는 매국노, 매국적, 반역자, 일제 협력자, 반민족 행위자 등의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오랫동안 사용됐기 때문에 나름의 역사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 이동형> 해방 이후에 친일파 처벌을 위해서 반민특위를 만들었고요. 2005년 노무현 시기에 만들어진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 위원회, 또 민간단체에서 만든 친일 인명사전. 이 모든 게 친일파 처벌, 혹은 역사적 처벌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처벌할 것이냐.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어디까지를 우리가 친일이라고 할 것이냐, 이런 논쟁은 끊임없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권시용> 그런데 이 시점에 와서 굳이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이런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할 때 거물급 친일파, 대표적인 친일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우리가 이들을 대한민국 법정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역사적 평가만이 남아있다.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래서 어떤 행적이 친일 반민족 행위인가,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 거기에 대한 합의, 이런 게 남겨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처음부터 끝까지 친일한 사람이 있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해서 넘어간 사람도 있고, 다양합니다. 오늘 이야기할 사람은 박중양인데, 박중양이 어떤 사람인지 짧게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 권시용> 박중양은 일찍 일본 유학을 갔던 사람이에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기 전에 러일 전쟁에 참전해서 일본군을 위해서 복무했던 경력도 있고요. 그러고 나서 1906년 무렵부터 강제 병합되기까지 대구 군수를 지냈고, 평안북도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이런 직책을 수행했던 것이죠. 그 기간 동안에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들 탄압하는 데도 앞장섰던 행적이 있는 인물이죠. 그리고 강제 병합되고 나서 그다음에는 도지사, 중추원 찬의, 중추원 부의장, 그리고 마지막에는 일본 제국 의회 귀족원 의원까지 탄탄대로 출셋길을 달렸던 인물입니다.

◇ 이동형> 협력의 대가로 그런 것을 받았겠죠.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그런데 3.1운동도 비난하고, 탄압에 앞장섰던 인물이고, 그리고 4월 6일 자제단을 대구에서 처음 조직했다고 하는데, 이 자제단은 어떤 조직입니까?

◆ 권시용> 자제단은 말 그대로 당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던 3.1운동, 만세시위 열풍을 잠재우기 위해서 조선인들로 조선인들을 막자, 이런 차원에서 조선인들을 회유하고, 만세시위를 탄압할 목적으로 만든 단체였던 것이죠.

◇ 이동형> 3.1 운동이 일어나고 한 달 만에 그런 것을 만들었다는 거네요?

◆ 권시용> 네. 그때부터. 처음으로 대구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전국적으로 만들어진 거죠.

◇ 이동형> 박중양은 당연히도 반민특위가 결성되고 체포됐습니다. 그런데 체포당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고요?

◆ 권시용> 네,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체포당할 때, 조사받을 때 당시 조사를 담당했던 조사관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광수나 최남선 같은 다른 기회주의형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박중양은 몸은 한국인이지만,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해요. 기록도 있고요. 체포당할 때도 나는 당당하게 심판받겠다, 할 테면 해봐라, 이런 식으로 대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 이동형> 그러면 여기서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받았던 박중양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자신의 친일 활동에 대해서 박중양은 이렇게 강변했다고 합니다.

◆ 성우> 나는 시대의 변혁의 희생양으로 무능력한 조선 왕족보다야 문명국이었던 일본의 조선 통치가 훨씬 좋은 정치였어. 한일 병합을 주도하는 이완용을 매국노라 비난하는데, 그는 매국노가 아니라 국난을 당한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사람이요. 어차피 이완용이 없었다면,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을 책임졌을 뿐이오. 만국을 맞이하여 자살했던 순국자들의 의거는 사상계에는 자극을 줄 수 있었을망정, 부국제민의 방도로 보기에는 힘든 것 아니오?

◇ 이동형> 네, 순국자들의 의거까지 폄하하는 이런 일을 벌였는데, 이미 일본은 패망하고, 우리는 광복을 맞았고, 반민특위가 조직돼서 체포당하고, 조사받고, 재판받는데, 아직도 일제인 줄 알았을까요? 왜 이렇게 뻔뻔하죠?

◆ 권시용>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 대한. 당시에 경험했던 메이지 유신을 거친 일본의 근대화. 그런 것에 대한 좋은 기억? 그래서 해방 후에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 시대에 인재를 배출하여 일본의 융성은 실로 불이 난 것 같았다. 드디어 삼대 강국의 일원으로 일본과 중국, 한국이 백인의 식민 지배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유일하게 일본 제국이 엄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 이동형> 그리고 본인 개인의 입장으로서는 그 시절이 가장 찬란했던 순간일 수도 있고요.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무능력한 조선보다 일본의 통치가 훨씬 좋은 정치고,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라 국난에서 백성을 구한 사람이다. 일종의 신념형 친일파, 이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 권시용> 저도 동의합니다.

◇ 이동형> 조금 더 설명해주시죠.

◆ 권시용>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일본에 유학하면서 일본이 이룩하고 있는 근대화에 압도당했고, 그래서 일본이 가는 길을 긍정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 연장선에서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이동형> 어쨌든 이 사람도 반민특위가 실패함으로 해서 당연히 풀려날 수 있었고요. 그리고 59년에 사망했는데, 이때가 86세였어요. 천수를 다 누렸다.

◆ 권시용> 다 누렸죠.

◇ 이동형>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은 19세 때, 20대에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그런데 이 사람은 천수를 누리면서, 그것도 86세 때도 40세 이상 차이나는 일본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고, 한 번도 이분은 심판이랄까요? 그런 것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네요?

◆ 권시용> 40세 이상 차이나는 일본인과 결혼했다는 것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때 이 사람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신문 기사를 보면, 70이 다 된 일본인 아내가 찾아와서 우리 영감이 추운 데 떨고 있으니까 이불을 조금 넣어달라, 이런 부탁을 했다는 게 신문 기사에 실려 있거든요. 일본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건 맞는데,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 이동형> 네, 박중양은 일기와 해방 후에는 ‘술회’라는 회고록을 통해서 일제 강점기를 찬양하고, 그리워하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고 하는데요. 그중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 성우>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의 조선으로 개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 정치를 집행하는 외의 것이 아니었다. 일정 시대의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

◇ 이동형> 그런데 최근 들어서도 박중양의 이런 주장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일본 때문에 발전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 권시용> 요즘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쪽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죠.

◇ 이동형> 참 안타깝네요.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그런데 우리가 자제단 살짝 이야기했는데요. 1919년 4월 6일에 대구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박중양이 앞장서서 만들었다. 그러면 이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이게 퍼졌겠네요?

◆ 권시용> 그렇죠. 전국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4월 6일에 대구 자제단이 만들어졌고, 그 뒤를 이어서 경북에서는 4월 10일에 안동, 11일에 성주, 16일에는 군위, 의성, 영일, 영천, 칠곡, 김천, 선산, 이렇게 곳곳에 자제단이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다른 도, 평안북도에서는 4월 8일, 함경남도에서는 4월 10일, 그다음에 전라남도에서는 4월 11일, 강원도에서는 4월 13일, 경기도에서도 4월 13일, 충북에서는 4월 15일부터 전라북도에서는 4월 20일부터 자제단, 자성단, 자위단 등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곳곳에서 만들어졌고요. 작년에 발표된 논문이 하나 있어요. 이양희 선생님의 논문인데요. 거기 보면, 전국에 138개 군이 넘는 지역에서 자제단이 조직되었다는 연구를 하셨고요. 면 단위에서도 그런 자제단이 만들어졌거든요. 그러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 이동형> 조선인을 통해서 조선인을 감시하겠다, 이런 거잖습니까? 서글픈 일이었는데, 이런 자제단을 박중양이 만들었다, 그리고 다그치고 설득했다는 건데요. 특히 경북 지역을 누비면서.

◆ 권시용> 네, 아까 쭉 경북 지역에 만들어진 자제단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을 만드는 데 박중양의 역할이 컸어요. 먼저 대구 자제단을 만들고 나서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각 지역을 누비면서 설득, 다그치는 역할, 이런 역할들을 했거든요. 그 결과 이렇게 곳곳에서 자제단이 만들어졌던 것이죠.

◇ 이동형> 만세운동도 하지 말고, 독립운동도 하지 마라.

◆ 권시용> 일본의 통치가 좋은 거다.

◇ 이동형> 방금 박중양이 경북 지역 곳곳을 누비면서 자제단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상황을 보여주는 편지가 있습니다.

◆ 성우> 백작 데라우치 원수 각하. 소생은 지난 15일, 대구를 출발하여 김천, 개령, 선산, 칠곡, 각 군을 순회하며 잘 타일러 이르고, 어제 21일 대구로 돌아와서 도청에서 순회 상황을 진술했습니다. 현재 각지가 모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수많은 병사가 곳곳에 산재하여 총칼로 다스린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후에도 계속 불량자들을 청소하고 오해하는 자를 설득하여 양민을 보살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각지가 모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불량자를 청소하고, 오해하는 자는 설득하겠다. 어떻게 보면 충성 편지처럼도 보이고요.

◆ 권시용> 충성 편지에요.

◇ 이동형> 자랑 편지인 것 같아요.

◆ 권시용> 네, 자기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때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일본에 있었어요. 거기에 편지를 보낸 거예요.

◇ 이동형> 데라우치는 초대 총독도 했잖아요?

◆ 권시용> 맞아요.

◇ 이동형> 내가 이만큼 일했으니까 알아봐 달라?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그래요. 불량자를 청소한다는 표현이 굉장히 무서운데, 결국은 3.1운동,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분들, 그리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을 어떻게 하겠다, 이런 말이잖아요?

◆ 권시용>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 이동형> 자제단은 만세시위를 억압, 탄압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들을 했습니까?

◆ 권시용> 어떤 활동들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자제단 규칙이라는 게 남아 있어서 알 수 있습니다. 도 단위에서는 경기도, 전라북도, 함경북도, 황해도 것이 남아 있고요. 군 단위에서도 남아 있는데, 지금 얘기하고 있는 대구 자제단 규약도 남아 있어요. 이 규칙, 규약을 통해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죠.

◇ 이동형> 결국은 이렇게 만들어서 서로서로 감시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그리고 만약에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빨리 신고를 해라. 그러면 거기에 대한 포상이 있을 테고요.

◆ 권시용> 네, 밀고해라.

◇ 이동형> 일제의 잔인함이 엿보이는 것인데요. 이런 활동의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제단 서명에 날인하지 말라는 내용의 조선 독립신문 제26호 실린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 성우> 세계는 인도와 정의로서 세계를 개조하고자 하고, 일본은 위력과 잔인함으로써 우리는 종속한다. 아! 우리가 적의 폭력 아래 노예의 치욕을 인내한 게 10년이라. 일본은 죄 없는 우리를 포살과 방화와 감금과 자치단 등 가지가기의 악계로서 해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소위 자제단이라 거짓으로 칭하여 강제적 위력적으로 협박 시행하여 날인을 받으나 날인이 우리 민족에게 독립자에게 가당키나 할 것이냐. 우리의 사랑하는 동포여, 백절불굴의 용감함으로 분발하여 적의 압박에 굴복하지 말라. 일시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날인하면, 수십의 구속자가 장래에 화를 면할 수 없다. 일시의 평화는 영구의 화인 것을 자각하여 면면촌촌의 단천을 배척하는 것은 독립자의 합당한 행위다. 낙심하지 말라. 우리의 공화국 정부를 세계가 용인하였다. 대사업이 빨리 성취하지 않는 것을 낙담하지 말라. 고통은 즐거움의 씨앗임을 기억하라.

◇ 이동형> 네, 가슴 뭉클한 그런 내용인데요. 조선 독립신문은 어떤 신문이었죠?

◆ 권시용> 조선 독립신문은 지하 신문이에요. 요즘으로 치면 유인물 같은 거예요. 만세시위 열기를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배포했던 것이죠.

◇ 이동형> 박중양을 처단해야 한다. 이런 의지를 가지고 모였던 사람들도 있다고요?

◆ 권시용> 혜성단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만세운동을 이어가고자 했던 그런 모임이었는데, 대구 지역 계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서 만든 조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혜성단에서 자제단 설립에 앞장섰던 박중양에게 경고장을 보냈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 이동형> 그때도 물론이고, 이렇게 일본에 협력하는 세력과 또 레지스탕스 간의 끊임없는 싸움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 힘으로 해방이 안 됐다, 이런 이야기도 많이 하지만, 어쨌든 일본은 패망했으니까요. 아쉬운 게 45년에 일본이 패망하고, 지금 시간이 굉장히 많이 흘렀고,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100년이나 지난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잔재들이 남았다는 것은 많이 안타깝네요.

◆ 권시용> 그렇죠. 해방된 공간에서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기회를 잃었죠. 미군정 시기에 친일 관련한 경찰과 군인들을 등용했고, 첫 번째 기회였던 반민특위에서 실패를 맛보았고요. 그리고 이후에 독재 정권, 군사 정권을 거치는 동안 친일 청산이라는 것은 말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던 것이죠.

◇ 이동형> 문재인 대통령도 100주년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뿌리 깊은 친일 청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권시용>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할 것은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구하고, 그래서 그 결과를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요. 현실적으로는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우리 사회에서 내릴 수 있도록 구속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봐요. 이를테면 대한민국 정부에서 친일파가 서훈을 받는 일도 있었잖아요? 그리고 각종 친일파에 대한 기념사업도 진행되고 있고요.

◇ 이동형> 동상도 서 있죠?

◆ 권시용> 네, 그렇죠. 다행히 김정수와 같은 사례에서 보듯이 조금씩 역사적인 청산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죠.

◇ 이동형> 알겠습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준비한 특집 코너.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첫 시간인 오늘은 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연구원과 함께 만세운동의 자제를 외친 친일단체, 자제단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저희가 자제단 이야기를 하면서 박중양 한 명만 얘기했는데, 인터넷 검색하면 나올 겁니다. 자제단에서 어떤 사람이 활동하면서 친일 활동을 했는지요. 그것은 우리 청취자분들이 한 번 검색해서 살펴보시기 바라고요. 오늘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첫 시간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권시용> 네, 감사합니다.

<2019-03-07>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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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인들의 이름을 딴 기념문학상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온 연구소는 작년 11월 29일 서울 대학로 함춘회관에서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와 공동으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가 열리기까지 작가회의 회원이자 시인인 권위상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전 서울서부지부장)의 노고가 컸다. 이 토론회 이후 작가회의도 올해 3월 25일 내부 토론회를 열어 이 문제를 집중 논의했으며 5월에는 미당문학상 수상 경력이 있는 김혜순 시인이 5·18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수상의 적절성을 두고 논란이 일어 김 시인이 스스로 수상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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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현실문제에 직접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는 송경동 시인이 7월 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미당문학상 후보에 자신을 포함시키려는 중앙일보사의 연락을 받고 “적절치 않은 상”이라며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미당의 시적 역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친일 부역과 5·18 광주학살과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그 군부정권에 부역했던 이를 도리어 기리는 상 자체가 부적절하고 그 말미에라도 내 이름을 넣을 수는 없다”고 썼다. “그건 어쭙잖은 삶이었더라도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한 부정이고,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 왔고 살아가는 벗들을 부정하는 일이며, 식민지 독재로 점철된 긴 한국의 역사, 그 시기 동안 민주주의와 해방을 위해 싸우다 수없이 죽어 가고 끌려가고 짓밟힌 무수한 이들의 아픔과 고통 그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내 시를 존중해 주는 눈과 마음이 있었다면 도대체 나와 미당이 어디에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라며 “ 조금은 외롭고 외지더라도 내가 걸어보고 싶은 다른 길이 있다고 믿어 본다”며 미당문학상 거부 뜻을 분명히 했다.
연구소는 작년 8월 한국문인협회(이사장 문효치)가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려 하자 집회와 기자회견 등을 통해 상 제정을 철회시킨 바 있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17/08/0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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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회원수련회가 7월 8일과 9일 이틀간 충남 아산늘푸름수련원에서 열렸다. 전국 각지는 물론 도쿄에서도 먼 길 마다않고 달려온 260여 명의 회원들과 그 가족들이 함께했다.
먼저 연구소와 회원들의 적폐청산에 앞장 서 온 것에 감사하다는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이어서 내년 3월 개관을 목표로 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추진과정에 대해 김승은 자료실장이 상세히 설명하였다. 뒤이어 수련회의 하이라이트로 지난 한 해 동안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친 광주지부와 대전지부가 모범지부상을 받았다.

01

임헌영 소장이 역사관 건립에 대한 회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호소했고, 올초 연구소 운영위원장에 취임한 이민우 인천지부장은 감사인사를 하는 가운데 “역사관 건립, 회원 배가”를 선창하여 회원들의 열띤 호응을 받았다. 조영숙 회원과 딸 부부, 최리순 회원이 참석한 도쿄지회의 기증자료 소개가 있었다.

02

여는 마당의 하이라이트인 광주지부 ‘꿈꾸는 예술’(대표 정찬경)이 마련한 친일·항일음악회와 큰들문화예술센터의 창작마당극 ‘오작교 아리랑’ 공연은 회원들의 큰 갈채를 받았다.
끝으로 수련원 3층 강당에서 이어진 놀이마당에서는 광주지부의 댄스스포츠 공연이 펼쳐진 가운데 밤늦도록 회원들 간의 친교의 시간이 이어졌다.

03

다음날 현충사를 답사하면서 친일화가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표준영정 교체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아산지회와 함께 진행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2017년 수련회에 함께해 주신 모든 회원분들과 물품을 협찬해 주신 각 지부, 특별히 사전준비와 진행에 많은 도움을 주신 충남지부, 아산지회 회원님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04[ 수련회에 도움을 주신 분들 ]
▪ 광주지부(지부장 김순흥)가 고급 막걸리 ‘사미인주’ 10상자를 협찬해 주었다.
▪ 전북지부(지부장 김재호)가 치킨 3상자를 협찬해 주었다.
▪ 충남지부 최종진 회원이 생막걸리 10상자를 협찬해 주었다.
▪ 논산지회 최의진 회원 친환경스팸 3상자를 협찬해 주었다.
▪ 관악동작지부 송진복 지부장이 보조배터리, 보습제 등을 협찬해 주었다.

월, 2017/08/0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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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27]

주5일근무제가 정착된 요즘에는 거의 사용할 일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기성세대의 머릿속에 제법 남아 있는 언어습성의 하나로 ‘반공일(半空日)’이란 것이 있다. 이를테면 반만 쉬는 휴일, 즉 토요일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표현의 초기 용례가 궁금하여 관련 자료를 뒤져봤더니, <독립신문> 1898년 11월 29일에 공일과 반공일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눈에 띈다.

[통상회 일자 개정] 돌아간 일요일에 독립협회 회원들이 통상회를 하는데 공의하여 가로되 일요일은 7일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공일인데 공일은 세계 각국에서 사람마다 쓰지 않고 의례히 쉬는 날이어늘 독립협회 통상회를 항상 공일에 하는 것이 대단히 불가하니 이 다음부터는 공일 전날 토요 반공일에 통상회를 하기로 영위 작정이 되었다더라.

이것 말고도 일요일을 가리켜 예배일(禮拜日)이라고 한 표현들도 곧잘 보인다. 1880년대 서양 각국과 맺은 수호통상조약 말미에 붙은 ‘통상장정(通商章程)’에 조선의 항구에 입항한 선박이 24시간 이내에 해관에 신고하는 규정과 관련하여 이때 “예배일과 정공일(停公日; 공무를 정지하는 휴일)은 계산에 넣지 않는다.”는 구절이 으레 포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일요일이 공휴일로 정착된 것은 언제부터의 일이었을까? 이에 관한 자료를 세밀하게 살펴보지는 못했으나, <관보> 1895년 윤5월 12일자에 수록된 각령(閣令) 제7호 ‘각 관청 집무시한’ 제4조에 “일요일은 전일(全日) 휴가를 작(作)하고 토요일은 정오(正午) 12시로부터 휴가를 작함”이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아직은 태양력(太陽曆)이 정식 채택되기 이전의 시절이었지만 이 당시에도 이미 쉬는 날로서 일요일의 존재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던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각령 제7호 각 관청 집무시한에 포함된 내용으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관리들의 출퇴근시간이다. 조선시대에는 흔히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에 따라 ‘묘사유파법(卯仕酉罷法: 묘시[오전 5시~7시]에 출사하고 유시[오후 5시~7시]에 퇴청하는 방식)’이 통용되었다고 하는데, 이 원칙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 도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 504년(1895년) 윤5월 10일 각령 제7호의 각 관청 집무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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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관보> 1895년 윤5월 12일자에 수록된 「각령 제7호 각 관청 집무시한」이다. 여기에는 일요일에 종일 휴가, 토요일에 반나절 휴가를 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이것을 보면 계절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 아침 9시 또는 10시에 출근하여 오후 3시 또는 4시에 퇴근하는 방식으로 점심시간을 빼면 하루 5시간 근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여름철 근무시간으로, 정오가 되면 퇴근하여 반나절만 일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직무에 지장이 없는 한 대개 여름휴가를 즐겼던 것으로 나타난다.
대한제국 시절의 관리들은 개국 504년 각령 제7호의 적용을 받았으나 1908년 7월의 각령 제6호로 개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때에도 몇 가지 세부사항이 바뀌었을 뿐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의 하절기에 오후 1시에 퇴근하는 근무방식은 변함없이 지켜졌다.
이왕 말이 난 김에, 일제 통감부에 속한 관리들의 근무형태도 함께 살펴보았더니 1906년 7월 14일에 제정된 통감부령 제22호 ‘통감부 및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이란 자료가 눈에 띈다. 이것을 보면 6월초에서 9월말까지 집무시간은 오전 8시부터 정오 12시까지이고, 나머지 기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단, 토요일은 오후 1시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규정은 1907년 10월 27일의 통감부령 제40호로 개정되었는데, 계절별로 근무시간의 재조정과 더불어 여름철 반나절 근무기간이 7월 1일에서 9월 20일까지로 축소되었을 뿐 대체적인 윤곽은 종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에 관한 규정은 새로 제정되었는데 1910년 12월 12일의 총독부령 제59호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 이때 하절기를 제외한 나머지 시기에는 평일 퇴근시간이 오후 4시로 일괄 단축 조정되었고, 그 이후 1911년 12월과 1912년 3월에 걸쳐 관련 규정이 잇달아 부분 개정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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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 1910년 12월 12일에 수록된 ‘총독부령 제59호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집무시간’. 평일은 대개 오후 4시에 퇴근하고, 하절기에는 정오까지만 근무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의 총독부 관리들은 통상 오후 4시에 퇴근하며 여름철에는 반나절만 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근무형태였다. 예를 들어 1915년 12월에 경복궁 안에 개설된 총독부박물관(總督府博物館)의 경우 열람마감시간은 오후 4시로 정해졌는데, 이는 총독부령에서 정한 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에 그대로 맞춘 탓이라고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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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1월 19일에 수록된 「총독부고시 제296호 조선총독부박물관 설치」 관련 규정. 이것을 보면 관람마감시간이 총독부와 소속관서 집무시간에 맞춰 오후 4시로 정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와중에 1922년 7월에는 총독부와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에 관한 총독부령이 전면 개정됨에 따라 여름철 및 토요일 반나절 근무제가 폐지되고 그 대신에 1년 통산 20일 이내 휴가를 부여하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1924년 6월 28일에 총독부령 제37호가 고시되어 토요일과 하절기(7.21~8.31. 사이)에 정오 12시까지 근무하는 형태가 부활되었으며, 이 시기에 20일 이내의 여름휴가도 함께 주어졌다.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집무시간 개정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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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정비된 집무시간에 관한 내용은 적어도 규정상으로는 일제 패망에 이르는 시기까지 유효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규정이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였는데, 문제는 역시 전쟁이었다.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산되자 전시동원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발맞춰 근무시간 변경의 조짐은 <매일신보>1938년7월10일자에수록된 「하기 반휴제 폐지(夏期 半休制 廢止)」 제하의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사변 발발 이후로 작년 여름에는 조선 안의 각 관청에서 반나절씩 휴식하던 것을 시국관계 사무방면에 종무하는 인원만은 폐지되고 평상시와 같이 사무를 보았는데 사변 1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는 총독부에서는 사변 관계 사무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사무가 분망하므로 금년 여름에는 반휴(半休)를 총독부 부령으로써 전폐할 방침을 결정하고 오는 21일부터 실시할 터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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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으로 인해 총독부 소관 관청이 일제히 여름철 반휴(半休)를 폐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7년 7월 18일자 보도내용

여기에서 보듯이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총독부 소속관원들은 더 이상 여름철 반나절 근무제라는 호사를 누리지 못하였다. 이때 하절기 반휴제의 철폐는 총독부령의 개정으로 명문화하지는 않았고, 다만 정무총감이 해마다 관통첩(官通牒)을 내리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러한 시국 변화에 맞물려 1937년 12월에는 겨울철 출근시간을 종전의 오전 10시에서 9시로 한 시간 당기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으로 다시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게 되자 1942년 11월 1일 총독부령제275호 ‘전시중(戰時中)의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에 관한 건’이 제정되어 평일 퇴근 시간이 오후 4시에서 5시로 늦춰졌고, 토요일의 경우에도 정오 12시에서 오후 1시로 조정되었다. 이듬해인 1943년 7월에는 하절기 반휴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두 달 후인 9월에는 토요일 반나절 근무제도가 사라졌다. 일제의 패망이 완연해진 1944년으로 접어들어 총독부 관리들은 전시중 하절기 20일 휴가제의 철폐를 맞이한 데 이어 일요일에도 출근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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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 1942년 7월 18일자에 수록된 정무총감 발신 관통첩(官通牒) 내용. 여기에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여름철 집무시간은 단축 없이 평상시처럼 실시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해방 이후 시기에는 1949년 6월 4일에 제정된 ‘대통령령 제125호 공무원 집무시간 규칙’에 따라 ‘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의 대원칙이 확립되었고, 그 이후 여러 차례 규정 개정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이러한 근무형태가 정착된 것으로 나타난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일제의 침략전쟁이 없었더라면, 나아가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 자체가 애당초 없었더라면 이 땅의 관공서 관리들은 적어도 출퇴근시간에 관한 한 “오후 4시 퇴근에, 여름철 반나절 근무”와 같은 태평성대를 여전히 누리고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월, 2017/08/07-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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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지회 회원들, 재일동포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 있는 자료 다량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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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우편으로 보내온 기증 자료들 / 최정부님의 민족학교 재학 때 사진들 / 조영숙 회원의 남편 작업복

도쿄지회(총무 조영숙) 회원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용 자료들을 다량 보내왔다. 기증자는 최정부, 조영숙, 남영자 세 분으로 모두 혈연관계이기도 하다. 기증 자료들 대부분은 사진이며, 그 외 외국인등록증명서, 상호부조증서, 작업복, 책자 등도 함께 보내왔다. 보내 준 사진이나 자료마다 일일이 조영숙 총무가 자세하게 설명을 적어놓아 기증 자료에 대한 해설만으로도 작은 책 한 권이 될 정도이다.
최정부 님(1941년생, 최리순 회원의 부친)은 원 호적지가 경북 의성으로 1947년 도쿄 오오타구 지역의 최초의 민족학교인 조선 카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일본의 민족교육 탄압으로 ‘도립조선인학교’를 거쳐 도쿄 조선 중,고급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바에서 건축설계사 취업에 도전했지만 민족차별, 취업차별로 좌절했다. 그 후 삼촌집에서 주물, 고철 수집 등의 일을 도우면서 22세 때 남춘자님과 결혼했고 청년연맹활동(오오타구 청년동맹 부위원장)도 열심히 했다. 2004년 한국 국적으로 변경했으며, 슬하의 2남 2녀는 물론 외손자 모두 조선학교를 졸업했거나 다니고 있을 정도로 민족의식이 투철하다. 따님인 최리순 회원을 통해 보내주신 자료는 해방 후 초기 민족학교 관련 사진들과 청년동맹 시기의 사진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해방 후 초기 도쿄지역의 재일동포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삿포로 동계올림픽 응원사진, 도쿄 청년본부 주최 역전마라톤 대회 사진, 총련 씨름대회 중앙대회 모습, 청년동맹 행사와 각종 활동사진 등은 사료적 가치가 높다. 그밖에도 결혼 이후 식구들의 삶을 보여주는 사진들도 함께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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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숙회원의 딸 남영자의 어린 시절 사진들

조영숙 회원의 식구들이 보낸 사진 자료도 사연이 아프다. 조영숙 회원의 경우 1985년 8월 27일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동포 3세와 결혼한 ‘뉴카마 New Comer’이다. 일본에서의 생활을 통해 재일동포들의 삶과 아픔에 대해 이해, 공감하게 되었고, 1985년 8월 일본에서 ’외국인등록증‘을 받으면서 자신의 삶이 ‘그 이전의 역사’와 ‘그 이후의 역사’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본인의 ‘외국인등록증명서’과 함께 기증한 사진들은 ‘그 이후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것이며, 그 시작이 ‘외국인등록증명서’라고 기증 취지를 밝혔다. 그 외에도 따님인 남영자(이번 수련회에 남편과 함께 참가)의 사진들과 재일동포인 남편(남경출)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낡은 작업복 등도 함께 보내왔다.
이번 자료 기증에 애를 쓴 조영숙 총무는 지금도 차별과 각종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재일동포들의 삶을 모국이 알아주고 관심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증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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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 히구치 유이치(도쿄 고려박물관 관장)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가 「경성용산시가지도」(1908)를 기증했다. 지도의 앞면에는 용산 병영지초기배치모습, 관공서, 통감부, 서대문감옥 등이 표시되어 있고 뒷면에는 광고가 빼곡히 자리잡고 있는데 파성관 호텔, 여관 천진루 등 일본인 가게와 주요 사업체의 광고를 확인할 수 있다.
7월 4일 와카타니 마사키 씨가 ‘1944년 9월 인천송현공립국민학교 제1회 졸업기념 촬영, 정신대원 7명의 환송회’라고 쓰여 있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환송회 기념사진 등 총 5점을 기증했다. 이와 함께 식민 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0만 엔(약100만원)을 후원했다. 일본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 3인이 7월 6일과 7일 양일에 걸쳐 소장자료를 기증해 주었다. 나카가와 히사코(삼광작전조사회) 씨는 보고자료 「金学順さんをしのぶ会」 (1998)와 1990년대 활동하면서 찍었던 일본군위안부 5명(강순애, 김상희, 김학순, 박복순, 황금주, 모두 작고)의 사진 등 총 35점을 기증했다. 구리하라 요시코(新聞うずみ火 기자) 씨는 황금주 할머니의 사진 10점을, 쓰보카와 히로코(「慰安婦」問題解決オール連帯ネットワーク) 씨는 김상희 할머니의 로사리오(천주교 묵주)를 기증했다.

심정섭 지도위원 제56차 자료기증, 도서류, 문서류 총 51점 보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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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1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제56차 자료기증을 했다. 이번 기증자료는 학교단체 사진 등 문서와 도서다. 또한 본인이 편저한 <졸재조병조시문집졸재유고>(2017)를상근자 전원에게 기증하였다.
6월 8일 김재범 씨가 <심산 김창숙 평전> 등 도서 11권을 기증했다.
6월 30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이었던 구수미 회원이 만주지역 관련 자료를 기증했다.
7월 20일 서양수 회원(서울남서지부)이 연구소를 방문하여 1965년부터 2007년까지 기록한 「同年契」 1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7/08/0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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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 교수가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영상을 홍보해 여론의 주목을 끌었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가 유네스코산업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근대산업시설 중 한국인 등의 강제동원 관련 시설에 ‘역사의 전모’를 밝히라고 일본정부에게 권고한 사항을 이행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상에는 몇 가지 부정확한 사실이 담겨 있다. 영상에서는 군함도에 강제동원되어 죽은 한국인이 120명이라 한다. 그러나 1984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찾아낸 〈화장인허증하부신청서(火葬認許證下附申請書)〉 등 일명 ‘하시마자료’에 따르면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하시마에서 죽은 한국인은 123명이다. 여기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사망한 수가 64명이니 굳이 따지자면 강제동원 희생자는 50여 명이라 해야 맞다.
영상에 사용된 사진들도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누워서 탄을 캐는 장면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정확한 연도와 지역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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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①


이 글은 2017년 7월 25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군함도의 진실 공방과 한국 정부가 할 일〉을 수정·보완한 글이다. 분량상 싣지 못한 내용을 추가하면서 기고 후에도 계속 유포되고 있는 잘못된 정보를 교정하기 위해서다.


 

(사진①) 한겨레신문에 글을 썼을 때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 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서 일하던 일본인 광부라 했으나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유사한 사진으로 훈도시를 입고 누워서 탄을 캐는 사진도 있다.

26(사진②) 이 사진도 자주 한국인 강제동원피해자 사진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메이지시기 치쿠호탄광에서 탄을 캐는 일본인 광부의 모습이라 한다. 누워서 탄을 캐는 광부의 구도와 이미지가 거의 같기 때문에 두 사진이 혼용되고 있다. 영상에는 폭행을 당해 등에 상처가 나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쓰였다. 1926년 <아사히카와신문>에 실린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은 홋카이도 나카가와군에 있던 노동자 합숙소에서 학대당한 토목노동자를 찍은 것이라 한다.(사진③)
서교수가 사용한 사진①과 사진③ 모두 폭력과 학대, 열악한 노동조건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었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 실태를 직접 증명하는 사진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이 받은 차별과 학대, 가혹한 노동조건 등의 실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은 없다. 통제된, 그리고 전쟁 홍보만 허용되던 시기에 그런 사진 자체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1920~30년대 일본 언론의 고발로 확인된 이런 사진들을 통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피해자들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수많은 증언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내친 김에 몇 가지만 더 지적해두자. ‘어머니 보고 싶어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라는 글이 탄광벽에 적힌 사진이 있다.(사진④)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탄광노동자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한때 언론에서도 많이 쓴 장면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훗날 강제동원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탄광을 방문한 조사단들이 연출하기 위해 쓴 걸 찍은 것이라 한다. 그러니 굳이 사용해서 시비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 앙상한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네 명의 한국인 사진도 강제동원 피해의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사진⑤) 이 사진의 주인공들은 신기수(辛基秀)의 사진집 <韓國倂合と獨立運動>(1995)에따르면,1945년10월 효고현 오쿠보형무소를 출옥한 조선인들로 강제동원 피해와 직접 관련이 없다.
통계상의 잘못도 있다. 군함도와 함께 등재된 다카시마탄광에 한국인 4만 명이 강제동원되었다는 통계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건 실무자의 단순 실수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외교부가 강제동원지원위원회에 관련 정보를 요청할 때 위원회 직원이 4천 명을 4만 명으로 잘못 적어 보고했다. 나중에 수정되긴 했으나 언론과 인터넷상에는 잘못된 숫자가 이용되었고, 지금도 계속 인용되고 있다. 한 가지 더, 일제시기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가 700여 만 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를 사용할 때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재까지 과거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공식문서를 기초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 중국,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강제동원된 노동자는 최소 72만 명, 군인․군속으로 끌려간 청장년이 최소 36만 명, 일본군‘위안부’ 등 여성 동원이 십수 만 명으로 해외로 강제동원 수가 최소 120만 명에 이른다.
여기에 1~3개월 단위로 한반도내에 동원된 이른바 ‘도내동원’의 연 인원이 600여 만 명도 있다. 따라서 국내외를 포함해서 총동원된 700여 만 명이라는 수치는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되었다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다만 한국정부와 일본정부가 1965년 한일협정에서 대상이 됐던 피해자는 ‘해외동원자’들이었고, 노무현정부 때 지원(사실상의 보상)을 받은 피해자들도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도내동원의 경우 그 실태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인 데다 식민지 시기를 살았던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법을 통한 진상규명과 지원 대상에서 뺀 것이다. 때문에 현재 우리가 강제동원의 피해를 말할 때 대상자는 120여 만 명이라 해야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숫자 몇 개 사진 설명 하나 잘못되었다고 강제동원의 본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의 우익들은 오류나 실수를 공격하면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처럼 군함도의 강제동원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 아니면 피해자들의 주장에 흠집을 냄으로써 한국의 주장이 과잉된 민족 감정에 근거하고 있어 뭔가 사실을 과장하거나 날조하고 있다는 불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국내는 모르겠으나 국제사회에서는 이게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 문제다.
군함도를 놓고 국제사회를 향해 일본 정부와 우익은 세 가지 여론전을 펼칠 전망이다. 첫째, 2015년 유네스코 총회 석상에서 일본대사가 인정한 한국인 강제노동(forced to work)은 국제법에서 규정한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 1910년 일본에 의한 조선 ‘강제병합’이 합법이며, 따라서 1938년의 국가총동원법과 1944년의 징용령에 의한 동원 역시 합법이므로 강제노동의 예외규정(전시하의 동원)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군함도에서 한국인들은 차별 받지 않고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냈다는 당시 거주자들의 회고나 미담을 적극 발굴하여 알릴 것이다. 여기에 낙성대연구소 소속 연구원이 발표한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과 일본인 노동자들 사이에는 민족별 임금차별이 없었다. 다만 노동의 숙련도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 논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홍보전에 나설 것이다. 한국의 연구자가 강제동원에 따른 민족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나서니 일본으로서야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는가.
셋째, 한국은 사태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엉터리 자료를 만들어 역사를 왜곡·날조함으로써 일본을 때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 증거로서 서교수의 광고 영상이 좋은 먹이감이 된 것이다.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이 점에선 한국의 언론들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강제동원 피해 통계를 두고 벌어지는 진실 논쟁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게 있다. 그것은 가해자인 일본정부와 기업이 스스로 진실을 밝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진상규명 대부분은 모두 피해자와 한일의 시민단체가 수십 년간 싸워서 얻어낸 것들이다. 여기에는 한국정부의 책임도 크다. 특히 지난 9년간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최악이었다. 피해자 유족과 시민단체가 직접 일본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유골조사와 봉환 문제를 협의해 해결의 물꼬를 텄지만, 정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초은행에 1945년 이전 일본 내에서 일했던 한국인 우편저금 통장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부는 모른 체 했다. 국제법에 따르면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국가가 지배국가로부터 관련 문서를 인계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 한다. 식민주의 극복을 위해 지속적인 진상규명과 자료 공개, 기념․기억 사업과 교육 등 새 정부가 해야 할 긴 목록 가운데 하나다.
영화 군함도가 개봉되었다. 무더운 여름이 더 더워질 것 같다.

∷ 김민철 책임연구원

월, 2017/08/0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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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을 차근차근 들추다 보면 형제, 부자, 조손, 사촌 등 혈연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함께 실려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박기순과 박영철이 그런 경우다. 국가도 이들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전북 전주에서 미곡상으로 시작해서 조선을 대표하는 재벌로 성장하기까지, 그리고 친일파하면 떠오르는 ‘명성’을 얻기까지 이 부자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신도시 개발 특수를 누리다
박기순(朴基順, 1857~1935)의 장례식을 전하는 신문기사(<매일신보>1935.10.6)에의하면,그는 40세가 넘어서야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생전에 1만 5천여 석을 넘길 정도의 부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가 79세에 사망했으니 그의 재산 형성 시점은 일본인들이 경제침탈을 본격화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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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순과 취향정(醉香亭). 취향정은 박기순이 1917년 자신의 환갑을 기념해 전주 덕진공원 내 연지에 세운 정자다.

 

박기순은 열두 살에 부친을 여의고 어느 상점의 사환 노릇을 하다가 미곡상으로 독립하였고, 전주평야의 미곡을 군산에서 인천으로 내다 팔아 큰 이득을 얻었다. 이를 기반으로 토지를 사들여 만석꾼의 이름을 얻었고, 당시 전라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토지왕’이 되었다.(<삼천리>,1931)특히박기순은신도시‘이리’(지금의익산)개발과정에서막대한시세차익을얻었다. 오늘날의 강남 개발이나 수도권 신도시 개발의 벼락부자를 떠올리게 한다.
일찍이 일본 자본은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인 만경강 일대 호남평야에 주목했다. 강제병합 후 그들은 이 비옥한 평야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181920년대 이리역 주변 모습

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그 과정에서 군산과 전주를 사이에 둔 식민도시 이리가 개발되었다. 1914년 1월 호남선이 경성-대전-이리-나주-목포로 연결되
었고, 그해 11월에는 이리와 전주를 잇는 전북경편철도가 개통했다. 10여 호에 불과하던 작은 마을 ‘솜리’는 가로로는 군산과 전주, 세로로는 경성·대전과 목포를 잇는 교통 중심지로 거듭났다. 신도시 이리 개발은 식민지경영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는 총독부 권력층의 의도와 일본인 대토지자본가들과 박기순과 같은 일부 조선인자본가들의 적극적 개입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박기순은 신도시 및 역세권 개발의 혜택을 온전히 누렸다. 원래 박기순의 소유 토지는 전주도심이 아니라 외곽지대에 분포하고 있었다. 주로 이리역, 구이리역, 대장촌역, 삼례역, 전주역, 신리역 등 경편철도 연변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그는 신도시·경편철도·역세권 개발로 이어진 토지가치 상승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그의 토지는 1930년 현재 685정보였고, 사망하기 2년 전인 1933년 조선신탁주식회사에 320만평을 신탁했는데 당시 토지 시가는 150만 원에 달했다.
그렇다고 떨어지는 감을 누워 받아먹은 것은 아니다. 박기순은 전주경편철도설치기성회 회장을 맡아 전주-이리간 경전철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철도가 개통한 후 1916년에는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 이사까지 맡았다.
개발에 필요한 기부도 아끼지 않았다. 1912년부터 1919년 사이에 박기순은 호남선 부지, 전주-군산 간 도로부지, 전주-영동 간 도로부지, 전주 덕진공원 건설비, 전주 다가공원 방천석축, 전주 다가교 가설비 등을 기부했다. 그 덕에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10세트와 감수포장 등을 받았다. 자신이 소유한 땅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차역과 시가지가 개발되도록 총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와의 관계도 잘 관리했다. 여산군수, 조선식산은행 이사, 전주면협의회 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지역 유지들이 일제 협력을 통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밟아갔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북자성회를 조직한 점이 주목된다. 당시 3.1운동을 방해하고 저지할 목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반대 단체가 조직되었다. 자제단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북자성회 규약에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는 자를 배척하며, 그러한 자가 있다면 곧 본부장이나 지부장에게 밀고할 의무’를 명시했다. 박기순은 이 단체의 조직에 앞장섰고, 전주지부의 지부장을 맡았다.

여기에 아들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이 힘을 보탰다. 박영철은 1912년 8월부터 1918년 9월까지 전북 익산군수를 지냈다. 신도시 이리가 개발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즉 박영철은 신도시 개발과 주변지역을 잇는 도로 및 철도 개설에 있어서 관권 즉 조선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실행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식민권력을 등에 업은 부자의 콤비플레이는 그들을 일약 전북을 대표하는 갑부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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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업은행 은행장 시절의 박영철(52세)

 

이제는 중앙이다
터닝포인트는 조선상업은행이었다. 1931년 박영철은 전국적 지점망을 가진 대형은행인 조선상업은행의 은행장 자리를 꿰찼다. 전북을 주름잡던 박기순-박영철 부자는 조선을 대표하는 자산가로 도약한 것이다.
1920년 박기순은 전주에서 삼남은행을 설립했다. 미곡상을 거쳐 신도시 개발에서 축적한 막대한 토지자본이 금융자본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전주 지역 대지주와 유지들이 대주주이자 경영진으로 참여했다. 그렇지만 삼남은행이 성장해 가는 몇 년 동안 박기순은 대주주와 중역들을 차츰 물갈이해나갔다. 기존 주주들이 매도한 주식은 박기순 일족이 사들였다. 1925년 무렵이 되면 본인이 사장이자 최대 주주였고, 아들 박영철을 비롯한 박준철, 박판철, 박신철 등 일가붙이가 대부분의 주식을 소유했다. 삼남은행은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주식 세습구조의 한 사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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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상업은행

 

박기순은 삼남은행을 경영하면서 전북경편철도, 전북잠업, 전북축산주식회사 등의 이사로 참여했다. 은행가로서 그 재력을 토대로 다른 분야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의 기업활동은 전주를 넘어 익산, 남원, 군산 등지로 확대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지역의 각종 공직과 사회단체, 학교조합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제 박기순은 전북 지역을 대표하는 자본가이자 유지로 성장했으며, 1924년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됨으로써 그의 명망과 사회적 입지는 한층 더 공고해졌다.
중추원 참의가 되고 전북을 대표하는 지역유지가 되었지만, 박기순의 경제적 기반은 여전히 지역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 한계를 뛰어넘어 전국적 레벨의 자본가로 발돋음하는 것은 아들 박영철의 몫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군인의 길을 걷던 박영철은 강제병합후 행정관료로 변신했다. 처음 부임한 곳이 전북 익산이었고 앞서 보았듯이 신도시 이리 개발과정에 힘을 보탰다. 조선총독부 지시에 철저히 순응하면서도 행정가로서의 자질을 발휘하여 신도시 개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익산군수에 이어 도참여관, 도지사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이때 박영철은 새로운 도약을 모색했는데 바로 중앙 재계로의 진출이었다.
함경북도 지사를 마지막으로 관계에서 물러난 박영철은 박기순으로부터 삼남은행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후 곧바로 조선상업은행과의 합병을 단행했다. 1928년 5월 당국의 인가를 받은 은행 합병으로 조선상업은행은 전국 지점망을 가진 대형은행이 되었고, 삼남은행은 6개월 뒤 단행된 ‘신은행령’(자본금 200만원 이상의 주식회사가 아니면 은행 업무를 할 수 없음)의 파고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금융정책에 관한 정보를 미리 알지 못했다면 할수 없었을 발빠른 대처였다. 박영철은 조선상업은행 부행장에 취임했다. 지역 관료출신인 박영철이 본격적으로 중앙 재계에 진출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조선상업은행 은행장자리에 올랐다. 이제 그는 토지의 민영휘, 금광의 최창학, 방직의 김연수와 함께 조선인 4대 재벌로 불렸다.(<삼천리>, 1932) 박영철은 차츰 자신의 입지를 넓혀 갔다. 1930년에는 조선미곡창고회사 이사, 1932년 10월에는 조선철도회사 이사에 선임되었다. 이어 1932년 12월 조선신탁주식회사 이사가 되었다.
이 회사는 경제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금융신탁업무를 담당했다. 박기순이 이 회사에 320만 평(시가 150만 원)의 부동산을 신탁했으므로 박영철의 기반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 밖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맥주회사, 북선제지화학공업주식회사 등의 중역을 맡았다.
조선의 4대 재벌이라 해도 총독부 권력과의 돈독한 관계는 필수였다.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확전해 가는 동안 박영철은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부육군병지원자후원회 등 일제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의 주요간부로 활동했다. 또 조선미곡조사위원회, 조선산업경제조사회,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저축장려위원회, 물가위원회, 시국대책조사회 등에 참여하는 등 총독부의 식민통치 파트너로 활약했다. 이제 박영철은 “한상룡과 함께 중앙의 중요한 지위에서 활약하는 조선 문제의 대표자”란 평판을 얻었다.(<시정25년기념 약진지조선>, 1935)
한시에서 드러나는 친일의 진정성 박영철은 일제강점기에 군수, 도지사, 중추원 참의를 비롯한 고위 관공직을 역임했고,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또 조선 재계에서 알아주는 전국구 재벌이었다. 그렇다 보니 박영철이라고 하면 친일파 재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박찬승 교수는 박영철을 일러 ‘전방위 활약을 보인 친일파’라 표현했다.(<친일파99인>,1993)그런데 박영철은 많은 한시와 여행기, 그리고 회고록을 남긴 문학인이기도 하다. 현재 <백두산유람록(白頭山遊覽錄)>(1921),<아주기행(亞洲紀行)>(1925),<구주음초(歐洲吟草)>(1928),<오십년의 회고(五十年の回顧)>(1929),<다산시고(多山詩稿)>(1932,1939)와같은 저작이확인된다.
친일파들이 하는 흔한 변명 중 하나가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는 것이다. 내심으론 일제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일제 권력의 위협과 강제 앞에서 한 개인이 저항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허접한 변명에 불과하다. 특히 박영철의 시와 산문처럼 내면의 목소리가 담긴 문학작품은 그런 변명을 일축할 분명한 증거가 된다.
<다산시고>를보자.다산(多山)은박영철의호다.박영철은1932년에자신의한시를모아이 책을 펴냈고, 그후에 쓴 시를 합쳐 1939년에 다시 같은 제목의 책을 냈다. 모두 859수의 한시가 실렸는데, 관련 연구에 따르면 이 가운데 대략 100여 수를 친일작품에 해당한다.

  風雲日露兩交兵 풍운처럼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니
  東亞安危在此行 동아시아의 안위가 여기에 달렸구나
  萬里從征投筆起 만리 출정길에 붓 던지고 일어서니
  誰知定遠是書生 정원후(定遠侯, 班超 33~102)가 서생임을 누가 알리요
 〈종군일로전역 從軍日露戰役, 1904〉

박영철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그때 지은 시이다.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을 동양과 서양의 대결로 인식하고, 동양의 평화는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는데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반초를 떠올렸다. 후한시대 학자였지만 무인으로 자원해 서역 흉노원정에 용맹을 떨친 반초처럼 자신도 붓을 던지고 일본의 대륙 진출에 공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서구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동양인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연대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위해 내세웠던 이른바 ‘대동아합방론’에 정확히 부합한다.
박영철은 일본에 공감하여 그들의 조선 통치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식민지 건설에 적극 협력하였다. 박영철이 추구하는 세상은 일본제국주의의 번영과 함께 했다. 따라서 일본의 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을 추구하는 행동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역사 발전을 돌이키려는 것으로 보았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함경북도 참여관이던 박영철은 “신정(新政) 이래 생명재산의 안전 또는 교육 민업의 발달은 구한국정치에 비할 바가 아님은 누구라도 이의 없을” 것이니 성과 없는 무모한 운동은 그만두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란 것도 두 민족이 같은 수준에 이르면 권리의무에 차별이 없어질 것이란 희망도 피력했다.
박영철에게 조선은 ‘일본 내지가 연장된 곳’이었다. 동민회(同民會) 활동은 그런 생각의 실천이었다. 동민회는 ‘철저한 내선융화의 실현을 통한 아시아민족의 결합’을 주장하며 참정권 청원 운동을 벌인 단체다. 즉 제국 신민의 일원이란 의식의 내면화를 기반으로 조선인들에게도 일본 국정에 참여할 권리를 달라는 요구였다. 서구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그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1928년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고 유럽 각지를 돌아본 후 박영철의 감상은 이런 시로 표현되었다.

  白黃人種各西東 백인종 황인종이 각기 서양과 동양을 차지해
  文字方言互不通 문자와 지역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
  欲求平和長久策 평화를 이루려는 장구한 대책은
  先須全亞結心同 먼저 모든 아시아가 한 마음으로 뭉쳐야 한다.
  〈세계대세 世界大勢, 1928〉

러일전쟁 한복판에서 가졌던 박영철의 다짐은 20여 년이 흐른 뒤에도 변함없이 재현되었다. 이제 일본과 조선을 넘어 동양이 하나가 되어 서구 열강을 막아내야 한다. 드디어 일본 제국의 성장과 번영이 중국대륙으로 뻗어 나가니 박영철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다. 아래는 1932년 만주국에 가서 발표한 경축시,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공략하는 일본군대를 찬양하는 시다.

  滿洲九月下天兵 9월 만주에 하늘의 군사가 내려오니
  一境簞壺老幼迎 노유를 막론하고 밥 싸들고 환영한다.
  革舊而今新政好 옛 제도를 혁파하니 이제 새 정치가 좋아서
  三千萬衆得蘇生 삼천만 민중들이 다시 살아났도다.
  〈축만주신건국 祝滿洲新建國, 1932〉

  北京戰捷又南京 북경을 점령하고 남경을 함락하니
  萬里山河旭日隆 만리산하에 빛나는 태양이 떠오르네
  赫赫皇威光四表 혁혁한 천황 군대의 위세 사방에 빛나니
  東洋自此保平和 이 때문에 동양이 평화를 유지하는구나
  〈황군위문가 皇軍慰問歌, 1937〉

1937년 박영철은 경성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가 되었다. 시에서 보듯 그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이고, 더 나아가 만주와 중국도 일체라는 대동아공영론을 확신하고 있다. 일본 군대는 침략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해방자였다. 만주의 민중들을 다시 살린 일본 군대는 하늘이 내린 천병이요, 중국대륙을 점령한 천황의 군대는 동양의 평화를 가져올 평화유지군이었다. 일제의 전쟁은 동양평화와 인류복지를 위한 성전이었다. 당연히 조선 사람도 신성한 일본의 전쟁에 동참해야 했다.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중추원 참의 박영철은 “반도민의 국민관념에 신기원을 그은” 것으로 평가하고, 신성한 의무를 위해 “부디 모범적이고 개인이나 가정에 치부가 없는 자신 있는 사람이 지원”하기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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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시절 박영철.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박영철 총영사는 북중국과 몽고 각지를 순회하며 일본군을 위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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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유람록>과 <아주기행>

 

박영철은 시 외에도 기행문과 회고록 등을 남겼다. <백두산유람록>은박영철이전라북도참여관이던 1921년에 출간한 것으로 백두산 기행문과 시를 엮은 것이다. <아주기행>은강원도지사 시절에 발간한 기행문으로 백두산·지리산·한라산 등 국내여행지와 일본·대만·간도·블라디보스톡·만주·몽고·중국 등 해외를 견문한 것이다. <구주음초>는1928년암스테르담올림픽을 참관하기 위해 3개월에 걸쳐 아시아·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남긴 기록이다.
<오십년의회고>는박영철이51세되던1929년에낸 회고록이다.한글이나한문이아닌일본어로 썼으며, 본인의 행적보다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주 독자층으로 일본인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조선 멸망의 원인을 우리 민족에게 돌리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특권계급의 창궐과 관리의 부패, 정의와 공적 도의의 전멸 등을 꼽았고, 무기력하고 나태한 민족성, 낮은 문화와 생활수준을 지적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사대주의적 자학사관에 빠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 박영철
박기순·박영철 부자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박순(朴淳)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본래는 양반이었지만 점차 가세가 기울어 박기순 대에 이르러서는 평민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그렇지만 미곡상으로 시작해 ‘토지왕’으로 이름을 날리는 등 형편이 나아지자 한학에 관심을 쏟았다. 1935년 박기순이 사망할 때 그의 집에는 3만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박영철도 일본에 유학가기 전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이후 한시를 즐겨 짓고 한문으로 저작을 남기는 등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인지 고서화와 시문 등 전통예술에 큰관심을 기울였다. 경성 소격동 144번지(현재 정독도서관 앞 선재미술관 자리) 박영철의 저택
에는 추사 김정희와 오세창 등의 그림과 글씨, 고려자기 등이 널려 있었다. 1930년과 1932년에는 동아일보사가 개최한 조선고서화전람회에 유명한 고서화를 다수 출품하기도 했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거부를 이룬 경제력이 그 밑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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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역화휘>와 <근역서휘>

 

그런데 박영철을 단순히 수장가로만 평가하고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당시 박영철은 위창 오세창의 지도를 받아 <근역화휘(槿域畵彙)> 3책과 <근역서휘(槿域書彙)> 35책을 펴냈다. <근역화휘>는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그림 67점을 수록한 것으로 안견의 그림으로 전하는 산수도, 신사임당의 그림 등이 실렸다. <근역서휘>는 조선시대 명현의 글씨를 망라한 책이다.
흩어져 있던 고서화를 모으고 위창의 안목에 기대 가치 있는 작품들을 책으로 엮었으니, 우리문화유산의 정수들이 실렸다고 평가된다. 특히 1932년 5월에는 <연암집(燕巖集)>을 17권 6책으로 간행해 냈다. 학계에 ‘박영철본 <연암집>’으로 잘 알려진 책이다. 그동안 필사본으로만 전하던 <열하일기>와 <과농소초> 등 연암 박지원의 저작을 최초로 공간하여 세상에 알렸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으며, 내용 또한 매우 정확하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펴낸 국역 연암집도 박영철본을 대본으로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39년 박영철이 사망한 후 유족은 경성제국대학에 115점의 유물을 기증했다. 자신의 수장품과 진열관 건립비를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라는 박영철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거기엔 <근역화휘>, <근역서휘> 외에도 김정희, 이황, 정약용,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의 작품이 포함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이를 기초로 경성제국대학진열관을 건립했고, 이를 인수한 서울대학교는 1946년 부속박물관을 개관했다.
박영철의 인생에서 <근역화휘>, <근역서휘>, <연암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인물이면서도 결과적으로 그는 우리 전통문화를 수호하는 데 일조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어 보인다.
박영철이 고서화를 수장한 것은 한학에 관심이 컸고 한시와 서화 등을 즐겼던 그의 성정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또 자신의 수장품을 조건없이 기증하고 심지어 전시실 건립비까지 쾌척한 사실은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로서의 모범을 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박영철이 수장품을 기증한 곳이 서울대학교가 아닌 경성제국대학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중일전쟁에서 일본 군대가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박영철은 조선의 문화와 예술 역시 일본이 건설할 ‘대동아’의 문화적 자산이 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민족의 유산, 그래서 다시 찾아야 할 가치가 아니었다. 일본이 대동아주의를 내세우며 추구한 동양성의 한 축을 담당할 미래 가치였다.

아버지와 아들, 친일파의 오명을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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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이 친히 장례식에 쓸 폐백과 제물을 내렸다는 <동아일보> 1939년 3월 15일자 기사.

 

1939년 3월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한 박영철에게 일본 천황은 친히 장례식에 쓸 폐백과 제물을 내리고 훈2등 욱일중수장을 추서했다. 당시 박영철의 사망으로 뇌일혈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의학박사 김성진은 “뇌일혈이란 대체로 지식계급에 많은 병입니다. 그 이유는 혈액이 몰려오는 기회가 노동자보다는 훨씬 많기 때문에 출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혈압이 높아져서 혈관이 파열되어 뇌에 출혈을 일으키게 됩니다. 장소가 뇌인만큼 위험하고 또 뇌를 많이 쓰는 저명인사에게 많게 됩니다. 대체로 비대하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는 이에게 많은 병으로 노동자에게는 좀 드문 병입니다.”(<매일신보>1939.3.15)라고설명했다.
뇌일혈이 노동자보다 지식계급에 많은 병이라는 설명은 지금의 의학상식으로선 동의할 수 없지만, ‘비대하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에게 많이 나타난다는 설명은 일견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아마도 박영철의 비대한 몸집을 염두에 둔 설명인 듯하다. 박영철의 사진들을 보면 그의 체구 변화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깊어짐과 함께 박영철의 몸집도 비대해져 갔던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땅에서 지배자에게 코드를 맞춘 삶으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해방 후 그들의 고백처럼 세상이 뒤바뀔 줄 몰랐을 것이고, 세월이 흘러 부자가 나란히 치욕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줄은 짐작이나 했을까. 대를 이어 친일한 사람들 중 아랫대의 누군가는 해방을 맞아 일제의 패망을 보아야 했다. 그런데 박기순-박영철 부자처럼 해방 전에 목숨이 다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이 계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친일로 이룬 부를 누리다 삶을 마쳤다. 하지만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친일파라고 평가받는다면 그 치욕이 배가되지 않을까.

∷ 권시용 선임연구원

월, 2017/08/07-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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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역사교과서공익감사청구_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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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7/08/0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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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팟캐스트 ‘역적(역사적폐 청산)’
11화 – 1부 “뉴라이트 역사 쿠데타 5편 – 박정희 신화의 허구 ②”

팟빵 링크
http://www.podbbang.com/ch/14024

수, 2017/08/0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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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08/1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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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일시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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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08/1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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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0810-1

1. 귀 언론사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2. 2017년 8월 12일,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일본 도쿄에서 ‘천황제’와 야스쿠니신사에 반대하는 촛불행동을 진행합니다. 올해 도쿄 촛불행동은 2018년 메이지유신 150년을 염두에 두고 “동아시아의 시점에서 ‘메이지유신 150년’을 다시 묻는다.”는 주제로 열립니다. 2006년부터 매년 8월 도쿄에서 개최되어온 이 행사는 이제 일본 시민사회에서 평화집회의 새로운 전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 행사에 대한 우익들의 노골적인 방해와 위협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3. 현재 일본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아베 신조 일본총리는 올해 안에 ‘전후체제’를 끝내고 ‘새로운 일본’으로 나아가겠다는 포부를 공공연히 밝혀왔습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일본정부는 국민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법’과 ‘공모죄’를 잇따라 성립시켰으며 그토록 염원하던 평화헌법의 개정을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4. 아직도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전쟁’과 ‘식민지지배’를 반성하지 않고 전쟁책임을 부정하는 역사왜곡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야스쿠니신사입니다. 야스쿠니신사는 아시아·태평양전쟁시기에 일본인들에게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전쟁동원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한 ‘침략신사’입니다. 이곳에는 지금도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희생당한 조선인 21,000여명이 합사되어 있고, 야스쿠니신사는 희생당한 가족의 이름을 빼달라는 한국 유족들의 요구를 여전히 묵살하고 있습니다.

5. 많은 관심과 취재를 부탁드립니다.


※ 행사 세부일정
1) 때 : 8월 12일(토) 오후 1시30분

2) 곳 : 도쿄 한국YMCA 지하 스페이스 Y (http://www.ymcajapan.org/ayc/hotel/jp/access-access.html)

3) 심포지움 “동아시의 시점에서 ‘메이지유신 150년’을 다시 묻는다’

・다카하시 테쓰야(동경대 교수): 아베정권은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하라 다케시(방송대 교수): 천황의 대물림과 ‘메이지 150년’
・남상구(동북아역사재단) : ‘동양평화’ 확립의 시점에서 본 일본-아베 총리의 역사인식

4) 유족증언 : 한국, 일본 유족

5) 콘서트 : 고토부키, 손병휘, 이정열

6) 19:00 ~ 촛불행진 출발

목, 2017/08/1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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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팟캐스트 ‘역적’ 12화 – 2부 「이게 실화냐?」 
“침략신사 야스쿠니”

팟빵에서 듣기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7/08/10-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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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님,

핸폰 번호변경으로 친일인명사전을 재 다운로드 하려는데

방법을 알려주세요.

멜주소: [email protected]

목, 2017/08/1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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