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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역사 시즌3_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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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역사 시즌3_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1부

익명 (미확인) | 화, 2019/03/05- 17:25

* 현장 오디오 상태가 고르지 못한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2019년 1월 23일, ‘3·1운동과 한국인의 삶’ 좌담회가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의 주최로 연구소 5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가 사회를 맡았고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장과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이태훈 연세대 교수가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3·1운동의 성격과 전개 양상, 3·1운동 후의 식민지 조선의 변화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하였다.

참석자들은 이 운동이 전 지역, 전민족적, 전계층적으로 일어났을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학생 등 민중이 사회 전면에 나선 운동이었음을 강조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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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팟캐스트 ‘역적’ 12화 – 2부 「이게 실화냐?」 
“침략신사 야스쿠니”

팟빵에서 듣기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7/08/10-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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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수신 거부 신청합니다.

토, 2017/09/2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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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무손드라  지사는 언가잘모실라카네?

화, 2017/10/0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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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부 [인터뷰 제 1 공장]
“‘광복군 창설일’이 국군의날이 되어야…” 이유는?  – 이준식 관장 (근현대사기념관)

김어준 : 국군의 날은 10월 1일이죠. 그런데 이 날이 아니라 이번주 일요일 9월 17일로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대정부 질의에서도 국무총리 상대로 이 질문이 나왔었는데, 국군의 날 변경을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 관장님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준식 : 예, 안녕하세요.

김어준 : 9월 17일이 무슨 날입니까?

이준식 : 예, 임시정부 산하 국군인 한국광복군이 창군된 날입니다.

김어준 : 광복군 창군날이다. 그러니까 국군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던 광복군이 처음 만들어진 날이 국군의날이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네요, 한마디로. 그 말을 듣자마자 설득되려고 하는데 그게 그러면 언제입니까?

이준식 :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충칭에서 광복군이 창군되었습니다.

김어준 : 그런데 임시정부는 그 전부터 있었지 않습니까?

이준식 : 예, 임시정부는 1919년에 출범했는데요.

김어준 : 그래서 그걸 건국으로 봐야 된다. 뭐 이렇게.

이준식 : 요즘 그런 얘기도 나오고 있죠. 저는 개인적으로 건국이라는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마는, 1919년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했는데 임시정부가 1920년에 바로 독립전쟁 원년이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1920년에 우리가 일제에게 전쟁에서 져서 국권을 빼앗겼으니까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시 일본과 전쟁을 해야 된다. 그래서 독립전쟁이라고 하고 1920년이 독립전쟁 첫 해다. 전쟁을 하려면 군대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임시정부 산하의 국군을 만들겠다는 구상에 착수를 하는데, 당시 중국이 남의 땅이니까요. 남의 땅에서 군대를 만드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김어준 : 다른 나라, 그 나라가 인정해 줄 리가 없지요.

이준식 : 예, 인정해 줄 리가 없어요. 군대를 만들기가 쉽지 않으니까 처음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하고 연계해서 국군을 활용하겠다.

김어준 : 임시정부하고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움직이던 독립군들을.

이준식 : 만주독립군을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시켜서 국군을 만들겠다는 그런 구상을 갖기도 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국군을 만든다는 게 임시정부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의 오랜 꿈이었는데요, 그 꿈이 1940년에 실현이 된 겁니다. 그래서 임시정부 산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건하게 되죠. 정식으로 군대를 만듭니다.

김어준 : 사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더라도 모든 망명정부가, 그 나라에서 정부를 두지 못하고 망명하게 되는 망명정부가 결국은 자기들 원래 땅을 점령하고 있는 식민본국이든, 또는 그 순간 침략해 온 나라든 간에 상대해서 이런 군대를 만들려고 하죠. 군대가 없으면 싸워서 다시 되찾을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1940년에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공식적으로 창군하였다. 그렇군요. 그러면 실제 그때 부대라고 할 만한 인원도 있었습니까?

이준식 : 처음에는 주로 사령부 중심의 군대였습니다. 장교가 더 많았던. 사병보다 장교가 더 많았던, 어쩔 수 없죠. 왜냐하면 당시 중국 안에 사병이 될 수 있는 우리 동포수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김어준 : 동포 수가 있다 하더라도 몰래 사병이 돼야 하는 거니까.

이준식 : 그리고 대개 독립운동하시는 분이 나이가 많으니까 사병은 상대적으로 적었죠. 그러면서도 한국광복군이 계속 사병을 확대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고요. 그래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그래도 꽤 많은 병사들을 확보하는 성공을 했고요.

김어준 : 그런데 중국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 땅에 다른 나라의 군대가 창군됐다고 주장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실체가 적더라도 생겨버리기 시작하면 가만두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이준식 : 많이 알려지기로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견제를 많이 했습니다. 왜냐면 자기 땅에서 군대 만들겠다고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엔 견제를 많이 했습니다. 견제하는 방법이 한국광복군을 만들되 중국 국민당 군의 통제 아래에 두겠다. 요즘 말로 하면 통수권, 작전권이죠. 통수권을 중국 정부가 갖는다는 조건으로 한국 광복군을 승인하려고 하니까.

김어준 : 굉장히 뭔가 서글픈데요. 왜냐하면 지금도 한국은 미국이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임시정부가 창군할 때부터 중국이 또 작전권을 행사하겠다고.

이준식 : 그래서 임시정부가 단안을 내립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승인이 없는 상태에서 광복군을 창군하는 거죠. 근데 창군을 했다고 하더라도 활동을 하려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야 되는데 중국 국민당 정부가 지원하기는커녕 계속 견제를 하니까요, 방해를 하니까요. 할 수 없이 광복군의 통수권을 중국 국민당에게 넘겨줍니다. 굴욕적인거죠. 사실 따져보면.

김어준 : 이해갑니다, 저는. 그렇지 않을 방법이, 도리가 별로 없을 것 같으니까요.

이준식 : 그래서 한 2-3년에 걸쳐서 임시정부하고 광복군이 통수권을 되찾기 위해서 굉장히 애를 많이 씁니다.

김어준 : 지금 역사의 복사판이네요.

이준식 : 네, 1944년에 드디어 통수권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1944년에 정말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되는 거죠.

김어준 : 선배들이 훨씬 낫네요, 4년 만에 찾았으면.

이준식 : 네, 4년 만에 찾았으니까 굉장한 성과죠.

김어준 : 저희는 지금 육십 몇 년 동안 못 찾고 있는데. 어쨌든 지금 우리 국군이 미군에게 작전통제권을 넘기고, 전작권을 넘기고 아직 되돌려 받지 못하고 있는 오리지널 버전이 광복군 창군 때도 있었다.

이준식 : 한국광복군이 의미가 있는 것은 임시정부 산하의 자주적인 군대가 되려고 굉장히 애를 많이 썼고, 또 그것을 실현했다는 겁니다.

김어준 : 그게 싫어서 일본의 소위 강점이 싫어서 거기까지 가서 군대를 만들어 싸우겠다는 사람들이 또 중국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체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 같아요, 그 분들이. 어쨌든 4년 만에 또 되찾았다. 그러면 실제 중국군, 당시 인민군하고 같이 작전을 했다든가. 그러니까 중국이 당신들은 별개의 군대라고 인정을 해야 같이 작전을 할 것 아닙니까? 그런 연대작전을 했다는 기록은 있습니까?

이준식 : 1944년에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군사협정을 맺고요.

김어준 : 군사협정을 맺었다. 확실하게 인정한 거네요. 협정을 맺었다면.

이준식 : 중국이 독자적인 군대로 인정을 한 거죠. 그리고 1943년, 1944년 무렵부터는 다른 연합국 군대인 영국군, 미국군과의 공동작전도 추진해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는 유명한 한국광복군의 독수리작전이라는 게 미군과 공동으로 추진이 됩니다.

김어준 : 이건 뭐 부인할 수 없는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군대가 확실한데, 그럼 지금 국군의 날은 10월 1일은 뭘 기념하기 위해서 된 겁니까?

이준식 :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1950년, 그러니까 6?25전쟁 와중이죠. 6?25 전쟁 때 육군 제 3사단이 38선을 처음 돌파해서 북진에 성공한 날이다. 그래서 그 날을 기리기 위해서 10월1일을, 1956년 이승만 정부 땝니다. 이승만 정부 때 10월 1일을 국군의날로 지정했다는 얘기가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1954년인가요, 1953년인가요?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는데 이게 10월 1일입니다. 그래서 10월 1일이 어쨌거나 의미 있는 날이다. 그래서 1956년에 처음으로 국군의날로 지정을 했습니다.

김어준 : 38선 돌파한 것도 의미는 있지 않습니까?

이준식 : 38선돌파도 의미가 있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것도 의미가 있긴 하죠. 그런데 그런 날이기 때문에 국군의날로 지정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요.

김어준 : 사실 국군의날 하면. 보통 무슨 날, 한글 창제 했던 날을 한글날이라고 하는 거죠. 제헌절하면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이것도 국군의날 하면 당연히 막연히 국군이 창설된 날인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이준식 : 국군이 창설되거나 아니면 국군의 역사가 시작되는 날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김어준 : 38선을 돌파한 날이군요, 이게.

이준식 : 그래서 국군이 역사가 시작된 날을 찾다보니까 그래도 광복군 창건일이 가장 어울린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김어준 : 당연히 그런 데 있어서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같거든요? 애초에 광복군이 1940년에 창설이 되고 중국과 군사협정도 맺었고 미군과 당시 공동작전도 했다면 규모는 작더라도 국군의 뿌리가 확실하니까. 한글도 지금 한글하고 똑같지는 않거든요, 되돌아가면. 문자도 달라요. 어법도 다르고. 하지만 그 때 창설, 만들어진 게 확실하니까. 그런데 보수진영에서는 반대한다고 하는데 왜 반대하는 겁니까?

이준식 : 보수진영에서 반대하는 건 건국절 논란하고 직결이 되는데요, 보수진영에서는 대한민국 역사가 1948년 8월15일부터 시작됐다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은 무관하다고 얘기하니까요. 그러니까 국군의 날도 광복군 창건일로 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김어준 : 당연하네요. 그걸 인정하는 순간 48년이 아니라 40년대부터 군대가 있다고 해야 되니까요.

이준식 : 예. 거슬러 올라가면 광복군이 창건되기 이전에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인정을 해야 되고 그게 싫은 거죠.

김어준 :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인정하기 싫은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보수진영에서.

이준식 : 대한민국 건국은 독립운동과 무관하다고 보는 겁니다. 독립운동 때문에 대한민국이 건국된 게 아니라, 흔히 말하는 건국세력이라고 그러죠. 건국세력에 의해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주장을 하고 싶은데 그 건국세력이라는 게 내용을 보면 두 부류입니다. 하나는 친일파고 하나는 정치깡패입니다.

김어준 : 아, 그랬습니까? 정치깡패 얘기도 많이 나오기는 합니다.

이준식 : 정치깡패가 이른바 건국과정의 반공반탁 운동을 주도한 세력 중에 하나거든요. 우리는 정치깡패라고 하지만 그쪽에서는 애국세력이라고 하겠죠. 애국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이 가능했다.

김어준 : 지금 가스판 들고 아스팔트에 나오시는 분들이 가끔 있었잖아요? 프로판 가스통 들고. 그걸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한쪽에서는 그분들이 애국세력인 것이고 무관한 제삼자가 보기에는 정치깡패 아니냐. 그런 세력과 친일파가 소위 이승만 정권의 탄생에 핵심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 많이 하죠. 우리 보수진영의 뿌리가 친일파에 맞닿아있는 거 아니냐.

이준식 : 친일파라는 말을 하기 싫으니까 건국세력이라는 말로 미화하는 거죠.

김어준 : 실제 친일파라고 불릴만한 세력이 이승만 정권의 주축을 이뤘습니까?

이준식 : 예를 들어 군만 얘기하자면요, 이른바 국군이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1960년까지 국군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육군참모총장을 보면 모두 다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습니다. 60년까지 그랬습니다.

김어준 : 박정희 전 대통령도 뭐 일본 장교 출신 아닙니까.

이준식 :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내지는 않았으니까. 육군참모총장 명단만 놓고 보면 십 몇 년 동안 만주군 내지 일본군 출신이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결국 육군의 주류가 일본군 출신이라는 얘기죠.

김어준 : 만주군이라는 게 독립군 때려잡던 군이거든요, 정반대로. 독립군이 아니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게 아니에요, 만주군은.

이준식 :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군의 국군이죠.

김어준 : 그 역할이 독립군 때려잡는 것 아니에요.

이준식 : 예, 독립군 때려 잡는. 항일세력 때려잡는 게 만주군이 하는 일이었죠.

김어준 : 다른 나라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보통은 초기 건국세력들이 대부분 이런 역사를 거친, 터키도 그렇고. 대부분 독립운동하던 쪽에서 초기 대통령을 내놓거나.

이준식 : 군도 독립군 출신들이 주도권을 잡는 게 정상적인 거죠.

김어준 : 너무 당연한 건데 우리는 독립군을 때려잡던 쪽에서 군을 장악했었다, 초기에.

이준식 : 그러니까 국군의 뿌리로 독립군과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게 된 거죠.

김어준 : 이해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신 걸로 저는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추천받았는데, 선생님을.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지시게 된 겁니까?

이준식 : 저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기도 하고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니까 당연히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고요.

김어준 : 그리고 부모님한테 얘기를 들으셨겠군요, 쭉.

이준식 :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독립운동사를 공부를 했고요. 독립운동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사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김어준 : 그럼 혹시 부모님도 광복군 출신이셨나요?

이준식 : 어머니가 광복군 출신이셨습니다.

김어준 : 어머님이요? 아버님이 아니고요? 그럼 혹시 어머님의 아버님 외할아버지가 혹시.

이준식 : 외할아버지도 광복군이셨고요.

김어준 : 그쪽 핏줄이시군요. 우리는, 저도 어릴 때 독립군에 대해서 별로 안 배웠어요. 그냥 독립운동을 조금 했다. 그게 어마어마하게 긴 장이어야 할 것 같은데. 한 두 페이지 배웠던 것 같아요.

이준식 : 지금은 많이 가르치죠. 왜 그러냐 하면 1987년 헌법이 개정되지 않습니까? 우리 현행 헌법인데, 현행 헌법 전문에 뭐라고 되어 있냐면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 후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해서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을 완수해야 될 사명을 갖고 있다’고 적어놨거든요. 거기서 독립운동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헌법 전문에 나와 있으니까 적어도 80년대 후반 이후에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지금은 독립운동사를 많이 가르칩니다.

김어준 : 알겠습니다. 중간에 제가 잠깐 말씀드리면 만주군 출신 쪽의 반론권도 저희가 보장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런 얘기를 중간중간 많이 하는데 반론으로 연락 오는 적이 사실 거의 없어요. 거의 없긴 한데, 자, 이래서 10월1일이 국군의날이면 당연히 국군이 창설된 날이어야 하는 게 맞고, 논리적으로. 다른 날들은 다 그러니까요. 그리고 그것을 따져보니 있다실제로, 광복군이 창건된 것이. 그리고 주변국에 의해서 독립된 군대로 인정도 받았고 협정을 맺은 기록도 있고 공동작전의 기록도 있다. 게다가 국군이 38선을 통과한 날이 의미가 있으나 실제 그 국군이 소위 이승만 정권의 친위대 역할을 한 걸로 보여지는, 그런 국군의 구성이 일본군이었지 않느냐. 일본군 출신, 혹은 만주군 출신이었지 않느냐. 그러니 법통을 따지자면 당연히 9월 17일로 옮기는 게 맞다. 이 정도로 요약하면 되는 거죠?

이준식 : 예, 정확하게 요약하셨습니다.

김어준 : 제가 요약은 잘 해요. 깊이는 없는데. 그런데 이런 반론도 제가 본 적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이게 왜 이렇게 연결되는지 논리적으로 머릿속에 구성은 안 되는데, 국군의날을 그렇게 바꾸면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사실이, 그 사실의 의미가 퇴색된다. 왜 퇴색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게 주장합니다.

이준식 : 저도 잘 모르겠는데 그런 주장을 하더라고요

김어준 : 그러면서 북한에 정통성을 주게 된다. 이것도 모르겠는데. 북한에 정통성을 주는 것은 오히려 지금 국군의날 아닌가요? 북한에서는 지금 독립운동을 자기들이 주로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준식 : 예, 그건 사실이에요. 북한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게 지금 대한민국에서 강조하는 독립운동이거든요. 1919년에 대한민국이 출범했다고 하는 것보다 더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김어준 : 인민군 창설되기 전에 무슨 소리냐 지금 광복군이 있었는데.

이준식 : 광복군이 창건됐다고 하는 게 훨씬 더 정통성 문제에서 유리한 거죠. 그런데 왜 스스로 불리한 쪽을 택하려고 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김어준 : 지금 주장은 불리해요. 왜냐하면 친일파가 합참, 군을 통솔했던 군대를 가지고 정통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거니까요. 북한에서는 어쨌든 독립운동을 하던 쪽이, 북한 쪽 사이드에서는 군의 기본창설 단위가 됐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는 불리하죠. 바꿔야 되는 거였고.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의미를 퇴색시킨다. 이게 무슨 주장입니까? 어떻게 이해하셨어요?

이준식 : 보수세력에서 흔히 그렇게 얘기하는데요, 해방되고 난 다음에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유엔에서 결의를 합니다. 한반도에서 총선거를 해서 정부를 구성해라. 원래 유엔 결의안에서는 한반도 전체에서 선거를 해서 정부를 구성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게 잘 안됩니다. 북쪽에서 선거를 거부하거든요. 그래서 다시 유엔에서 그러면 선거가 가능한 남쪽에서만 총선거를 해서 정부를 구성하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유엔 결의안에 보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 이렇게 돼 있습니다.

김어준 :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가 아니라.

이준식 :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가 아니라, 그런데 보수세력에서는 그걸 자꾸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고 해석을 하는 건데요. 정확하게 문구가 어떻게 되냐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 그리고 영어 표현에 주목을 하면요 정부입니다. government입니다. 국가가 아니라. 그러니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일부로서의 대한민국 정부. 이렇게 되는 거죠.

김어준 : 이해했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이준식 관장님이었습니다.

이준식 : 예, 고맙습니다.■

<2017-09-13> tbs

☞기사원문: <김어준의 뉴스공장> 이준식 “‘광복군 창설일’이 국군의날이 되어야…” 이유는?

목, 2017/09/14-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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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새로운 길을 모색합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던, 우연한 기회가 주어졌든 도전은 가슴 뛰는 일입니다. 민중의소리 평생교육원 ‘이산아카데미’는 새로운 직업의 길을 개척한 ‘꾼’들을 찾아 그들의 밥벌이와 가치를 묻습니다. 동영상 강좌가 깊이 있는 인문학적 지식을 전한다면, 페이퍼 특강에선 독자에게 정보와 영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을 전할 계획입니다. 직업의 세계에선 때론 구체적인 기술보다 좋은 관점이 필요하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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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진영에서 이승만 국부론을 내세우며 48년 건국설을 밀어붙일 때 역사학자 조한성은 책『한국의 레지스탕스』를 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비밀결사 단원들이 목숨과 맞바꾸면서도 소망했던 새로운 조국 꿈을 추적했다. 그들의 투쟁은 때론 성공하고 많은 경우 패배했지만 그들이 흘린 선혈에서 대한민국이 비롯되었다고 조한성은 말한다. 이후 그는 『해방 후 3년』을 통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해방 후 역사가 미소 양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 민족의 역할은 어디에 있는가? 분단도, 전쟁도 모두 외세 탓인가?”

역사학자 조한성을 만났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 조사관으로 활동하다 지금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에게 인터뷰를 청한 이유는 그의 저술이 우리 사회에 던졌던, 그 참신한 질문 때문이다. 43세의 이 역사학자는 늘 치밀한 사료분석으로 새로운 관점과 상상을 선사했다. 인터뷰는 청량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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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부터 ‘해방 후 3년’ ‘한국의 레지스탕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이다. 이중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은 민족문제연구소 공저다. 그의 저술은 때로 모래알처럼 작게 보였던 것도 크게, 보편적 인식과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보게 한다.ⓒ출판사 생각정원 캡처

현대 사학의 원로이신 서중석 선생님께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현대사에 매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조한성: (웃음) 이제 서중석 선생님 그만 팔아먹어야 하는데…. 대학 1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당시 영상을 접하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 세대는 한국현대사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아서 충격이 컸죠. 돌베개에서 나온 『5.18 광주민중항쟁』을 보고 공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시절 체험이 저를 현대사로 이끌었어요.

지도교수님은 현대사 박사 1호이신 서중석 교수님과 근대사 1세대 연구자이신 임경석 교수님이셨어요. 서 교수님은 한 강의에 20개 정도의 주제가 나오는데 이를 학생들을 나눠 조사를 시키셨어요. 역사연구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선행연구’에 대한 파악이었죠.

연구사 정리는 역사연구의 기초공정이에요. 현대사는 아직도 공백이 많은 분야거든요. 그 공백을 찾아 연구하고 새로운 문제 인식과 질문을 던지게 돼요. 서중석 선생님은 지금 은퇴 후에도 박정희 시대를 계속 정리하고 계시거든요. 개인적으론 힘이 드시더라도 80년대까지 쭉 정리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임 교수님은 사료를 다루는 방법을 세밀하게 가르치셨어요. 서중석 선생님 안식년일 때 임 교수님께 배웠거든요. 사료 가운데 한국 근대사 자료는 일제 생산문서가 상당히 많아요. 이 문서들은 일제의 관점으로 쓰였기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독립운동가가 쓴 자료라 해도 그 문서들은 작성자 중심으로 작성되었기에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쓰인 경우가 많아요. 이런 경우엔 사료를 꼼꼼히 읽고 분석해 참과 거짓을 읽어내야 합니다. 임경석 선생님은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입니다.

성균관대 사학과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전부터 역사학자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인식이 있었잖아요?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는지요.

조한성: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사 선생님 수업이 재미도 있고 진지했어요. 전 좋은 스승님을 만나면 힘을 내는 스타일인가 봐요. 그때부터 역사에 흥미를 느꼈어요. 어머닌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길 원하셨는데 제가 막내라 그런지 진로를 강요하진 않으셨어요. 나중 문제가 있으면 곁에 끼고 함께 살려고 그러셨는지는 몰라요. (웃음)

석사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료와 자료를 봐야 하고, 이때부터는 역사학자로서 자신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해야 해요. 대단한 은사님들께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굉장한 경험이었고 지금도 저의 이야기를 책이나 강의에 담아 알리는 작업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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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인터뷰하는 조한성ⓒ민중의소리

돈벌이 걱정은 없었습니까?

조한성: 처음 이 일을 선택할 때부터 돈 버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웃음)

전 고등학교 시절 역사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사학과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선배들이 사학과 들어가면 죽으라고 한문공부 해야 한다고 해서요. 실제로 사료분석에 한문은 필수인가요?

조한성: 아, 너무 안타까워요. 한문을 피해갈 방법이 있는데, 실제로 한국 고대사, 한국 중세사, 동양사 연구에는 상당한 수준의 한문 실력이 필요해요. ‘지곡서당’ 같은 곳을 다니면서 한문을 공부하는 분들도 많아요. 서양사는 영어가 필수, 한국근대사의 경우 한문과 일어가 중요해요. 한국 현대사는 오히려 영어가 더 중요해요. 전공에 따라 영어, 러시아도 필요하죠. 해당 언어를 알면 더 다양한 사료를 볼 수 있으니까 유학을 가는 친구도 많아요. 다만 현대사의 경우 국한문 혼용이 많아 한문의 자구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설렁설렁해도 가능해요.

일제의 공적조서, 해방 후엔 명백한 친일파 증거

그래도 한문의 자구 정도는 다 읽을 수 있어야 하는군요? (웃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을 하셨습니다. 그때 6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조사를 하다 보니 자료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래도 큰 성취감을 느낀 조사 활동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조한성: 아시겠지만 친일파와 관련한 조사는 당대에 해야 했던 작업이죠. 하지만 이승만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지금은 증인을 채택할 수가 없죠. 만일 해방 후 철저히 조사했다면, 친일행위를 목격하고 들은 이들의 증언, 당사자의 증언이 결정적 증거자료가 다 남아있었겠죠.

제가 ‘관료팀’에 배치되어 도지사, 군수들 조사했어요. 거물급들은 관련 텍스트가 남아있는데 지방은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어요. 4년 반이라는 시한으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내는 것도 불가능했고요.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 사상범 검거 실화집』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알려지지 않거나,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이 많이 있을까요?

조한성: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남긴 ‘지나사변 공적조서’라는 자료가 있어요. 중일전쟁 시기 일제가 관료들의 공적을 조사해 훈‧포상을 해줬는데 당시엔 공적을 적은 조서였지만 지금은 친일 행위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 것이죠. 어떤 후손이 선조의 친일행적을 숨기고 지방에서 선조를 미화하고 기념사업을 하려다 이 자료 때문에 친일행위가 명확히 드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적이 있어요.

이 자료는 위원회가 일본에서 직접 수집한 자료인데 이 자료 때문에 30년대 후반에 활동했던 관료들의 친일 행위가 많이 드러났어요. 위원회가 천 명 정도의 친일파를 선정했는데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새로운 자료를 발굴한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이런 자료의 수집은 시간과 노력, 자금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국가기관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위원회가 좀 더 오래 유지가 됐더라면 아마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거상 巨商으로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행위를 하다 해방 후 독립운동가와 손잡고 좋은 일을 한 이들도 있어요. 이들의 후손은 자신의 부친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것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더라고요. 친일파 분류는 어떻게 합니까?

조한성:  친일파 분류는 대개 1904년 러일전쟁 시기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의 행위를 바탕으로 판단합니다. 말씀하신 사례처럼 해방 후 행위에 관해서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해방 후에는 누구나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하지, 일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겠죠? 일제 강점기 친일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한 경우는 친일파 선정에서 제외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해서 친일행위를 한 경우는 친일파로 선정합니다.

‘밀정’의 압권,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암살’ ‘밀정’ ‘군함도’ 등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흥행입니다. 모두 보셨는지요?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한다는 긍정성 이면엔, 또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준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조한성:  저 역시 언급하신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어요. 역사학계에서도 굉장히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영화 ‘밀정’은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거든요. 작가나 감독이 공부를 상당히 많이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가 대사 하나하나를 많이 생각하고 썼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김원봉이 황옥(기자 주:황옥은 실제 인물이다)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료를 설득하는 대목의 대사를 보세요.

“이중첩자에게도 조국은 하나뿐이오. 그에게도 분명 마음의 빚이 있을 것이요. 그걸 열어주자는 겁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게 아니겠소?”

김원봉이 황옥을 설득하는 방면도 압권이거든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이 영화의 백미죠. 실제 역사에서도 황옥이 밀정인 것을 알면서도 동지로 받아들이는 장면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에요. 아마 작가의 상상이 사실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요.

하지만 영화는 영화로 봐야죠.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역사 왜곡’이라고 하면 과한 비판이죠.

중요한 것은 ‘영화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느냐’인 것 같아요. 과도한 설정이 있으면 왠지 손발이 오그라들고 어색하잖아요? 그런 건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자연히 느끼게 되죠. 반대로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다고 설득력이 높아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역사적 사실과 장면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기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면 그 역사적 팩트의 무게에 눌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설득력을 잃는 경우도 있거든요. 최근 영화 ‘군함도’가 흥행에 실패한 건 아쉬워요. 흥행의 실패로 군함도의 역사나 강제동원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거대한 축인 건 맞지만 그것이 독립운동의 다양한 계열을 모두 수렴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뉴라이트의 공격에 대한 반정립으로 흐른다는 느낌이 있어요. 임정 법통계승을 따지다 1919년 건국절로 가거든요. 역사적 맥락에 비추면 굉장히 부자연스럽거든요.

조한성:  우선 48년 건국절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공로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죠. 반면에 1919년 건국절 주장도 한계가 분명해요. 건국절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서 걱정스러워요. 건국절 논란 자체는 소모적이에요. 애초 뉴라이트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온 주장이거든요.

그런데 임시정부가 모든 독립운동세력을 압도하진 못했어도 여타 독립운동세력과는 구분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1919년~21년까지 대부분 독립운동세력을 하나로 묶었고, 그 이후에는 세력이 약화하지만 40년 이후 중국 국민당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광복군도 만들고 좌우합작도 하면서 다시 세력을 키웠죠. 다만 여타 세력을 압도하진 못했기에 안타까움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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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자로서의 특징이랄까. 조한성 작가는 인터뷰 도중 역사와 관련한 구체적인 질문에선 관련 자료를 다시 꼼꼼히 보고 말을 다듬었다.ⓒ민중의소리

“독립선언 33인 중 단 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요?”

최근 ‘어쩌다 어른’과 같은 TV 프로그램을 비롯해 참 맛깔나게 우리 역사를 소개하는 스타강사들이 여럿 있습니다. 올해 설민석 강사가 3.1 운동 관련 ‘민족대표들의 태화관 술자리 발언’으로 상당한 비난을 받았어요. 그런데 당시 현장을 술자리로 폄하하고 ‘태화관 마담’ 발언 문제는 그렇다 쳐도, 자칭 ‘민족대표’라는 분들이 독립선언문을 내고 자수한 건 당시 목숨 걸고 항쟁을 이어갔던 민중과 대비하면 투항주의, 내지는 명백한 제한성이 아닌가 생각해요.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지도자의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조한성:  

저도 개인적으론 설민석 강사의 강의를 좋아해요. 이분 때문에 우리 역사에 재미를 붙이신 분도 많을 것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강의를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과장하거나 재미있게 하려다 실수할 수 있거든요.

책은 출판 전 단계에서 거를 수 있지만, TV는 그렇지 않죠. 미디어 환경의 특성상 ‘스타강사’들은 자신의 역량 그 이상의 것을 요구받거든요. 방송국에선 시청률을 생각해 더 자극적인 멘트를 끌어내려고 하고요. 그래서 전 역사의 영역에선 강사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만큼인지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고 봐요. 요릿집에서 했다고 독립선언 그 현장을 술자리라고 하는 건 엄청난 왜곡이죠.

독립선언 33인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사학계에서도 존재하죠.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의 역할 즉, 국내 3.1 운동을 기획하고 자금을 준비하고, 조직을 확장해 이 운동을 전국화한 공로는 분명히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 33인의 ‘서명’은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상황에선 목숨 걸고 한 겁니다. 실제로 일제는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이런저런 법령을 끌어 모두 적용하려고 했고요.

33인이 선언서에 서명하면서 ‘조선민족대표’라고 밝혔어요. 이를 이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들을 ‘민족대표’라고, 즉 민족지도자 33인으로 과대평가하는 건 문제라고 봅니다.

33인은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어요.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본 정부, 조선 총독부, 각국 영사관에 알리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래서 ‘통고’를 한 것이죠. ‘자수’라고 하면 너무 폄하한 것이고, 자신들의 표현대로 독립선언을 통고한 것입니다. 딱 여기까지가 이 33인의 역할이었죠.

28일 최종회의에서 군중과 함께하지 않기로 했는데, 군중시위가 폭력화할 것에 대한 우려였어요. 일본 경찰에게 잡히면 피하지 않고 체포되어 독립선언의 경과를 주장하기로 한 것이죠. 애초 33인은 군중을 지도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 이것이 한계죠.

만약 33인 중 단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투쟁하며 체포될 때까지 지도한 지도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 사람은 안창호, 이승만에 버금가는 민족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3.1 운동 주역 중 천도교, 기독교 못지않은 세력이 있었는데요. 바로 학생이에요. 한국 학생운동의 시초지요. 이들이 3.1, 3.5 서울시위를 실질적으로 지도했고 각 지방의 시위에서 활약했어요. 29년 광주학생운동에서 45년 이후 4.19, 6월 항쟁 등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죠. 전 학생운동에 대해 더 적극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 독립 운동사를 보면 무슨 단체니 계파니 하며 반목하는 대목이 꽤 많습니다. 어떤 큰 줄기가 없이 오밀조밀하게 흩어져 분열하는 것으로 보여 흥미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유독 우리나라 독립운동이 그런 것인지요? 당시 식민지 나라 독립운동의 공통적인 모습이었는지요?

조한성: 사실 나라를 빼앗기고 하나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다른 나라의 사례는 연구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비슷할 겁니다. 다만, 우리 독립운동의 약점은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이 없었다는 겁니다. 다들 고만고만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우리 민족의 진짜 불행은 해방 시기가 바로 치열한 냉전의 시작 시기였다는 것이죠. 미소 대결이 첨예화된 곳이 한반도였어요.

“내부의 힘이 강대국의 ‘규정’을 충분히 바꿀 수 있어요”

저서 『해방 후 3년』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우리 역사는 강대국의 강력한 힘에 압도되어 규정된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민족 내부의 통합된 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이는 지금의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일종의 경각심을 준다고나 할까요? 선생님의 관점은 ‘역사에 대한 가정’,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시 분단의 길목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목은요?

조한성: 해방 후 3년의 역사를 보면 미·소의 규정력이 너무 강해 어쩔 수 없이 미소 양국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소 공동위원회죠. 한반도를 미래를 다루는 회의인데 정작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지 못했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수동적인 역사의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외부의 힘만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내부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느냐는 것도 미소의 규정력만큼이나 크다는 것이죠. 그럼 분단이 되지 않으려면 어때야 했을까. 그것은 좌우가 하나로 뭉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것이 좌파의 역할입니다. 남쪽에는 여운형이나 김규식처럼 좌우를 묶으려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북쪽에 이런 세력이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자연히 박헌영이나 김일성이 좌우합작을 할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북한의 경우 소련의 영향으로 하나의 세력으로 되어 있었거든요.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은 남쪽이 훨씬 진지했어요. 여운형의 경우 수차례 북으로 가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을 했거든요. 김일성은 단 한 차례도 내려오지 않았죠.

『해방 후 3년』을 읽다가 든 생각입니다. 남로당의 단정 반대 투쟁이나 4.3 항쟁, 지하 총투표 조직이 진지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보여주기 식 , 좌경 모험주의로 보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했던.

조한성: 남로당의 모험주의가 큰 영향을 주었어요. 박헌영은 지하 선거를 위해 모든 조직을 동원해 투표용지를 옮기고 주민을 모아 투표를 시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조직이 노출되고 파괴돼요. 한국전쟁 이전에 남로당 조직이 모두 깨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죠. 당시 참가했던 이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 투쟁이 얼마나 졸속이고 많은 희생을 불러왔는지를 알 수 있죠. 김일성과의 경쟁을 의식한 박헌영의 야심이었다고 밖엔 해석이 안 돼요.

김구는 일관되게 ‘충칭 임정’으로의 권력 이양을 주장했고, 미 군정을 엎기 위한 2차례의 쿠데타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좌우 합작 절호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충칭 임정세력이 주요 내각을 구성하고 나머지 3석 정도를 상대에게 양보하는 수준의 안을 제시해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완고한 고집과 배타성’, 지도자로서는 치명적인 약점 아닌가요? 김구가 해방 이후 나라의 전면적인 개혁의 측면에서 좌익세력과도 진지하게 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의 반공의식의 기원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제가 연구 하면서 가장 복잡한, 그러니까 어떤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 인물이 바로 김구 선생입니다. 김구 선생은 이승만과 달리 개인적 권력욕은 없어 보여요. 그런데 임정에 대한 열망은 엄청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20여 년간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임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확실히 김구 선생은 반공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활동하면서 쌓인 것들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갈등은 20년 무렵 레닌자금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김립을 암살하는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선생님께선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 즉 ‘5년 신탁통치 후 통일 정부 수립방안’에 진정성이나, 현실성이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가령 동아일보의 치명적 오보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조한성: 모스크바 3상 회의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무이한 국제적 합의였으니 결의안대로 되었다면 통일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겠죠. 문제는 반탁운동이 일어나면서 결의안대로 하는 것이 어렵게 돼버렸다는 겁니다.

당시 오보를 동아일보만 꼭 찍어서 얘기하면 동아일보측이 굉장히 섭섭할 거예요. 당시 다른 신문들도 대부분 똑같이 보도했으니까요. 당시 오보는 사실상 미 군정이 유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련의 입장에서 반탁운동이 일어났을 때 큰 충격을 받은 건 그 뒤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이 소련을 경직화시켰고, 이후 3상회의 원안 고수만 주장하게 됩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두고 미국이나 소련이나 그 대처 방안이라는 것이 참 문제가 많았습니다.

“한국 대통령의 역사적 소임, 전쟁 막는 것입니다.”

역사학자가 보는 지금의 한반도, 남북 상황.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 대통령의 안보행보에 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조한성: (한숨) 우선 답이 없어 보일 만큼 깜깜하죠. 북한은 당분간 핵무장의 완성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이고요. 그 후 북미협상에 나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당사자이면서도 당사자가 아닌듯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인데요. 해방 후 3년의 경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외부의 상황에 끌려만 가서는 절대 안 됩니다. 내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참혹한 실정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외교력과 상관없이 48년도엔 누가 봐도 전쟁이 확실했어요. 이승만은 대책도 없이 북진통일을 외쳤고, 이런 이승만이 불안했던 미국은 한국군을 위한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죠. 결국 전쟁에 이길 힘도 준비도 아무것도 없이 그저 쌍방 간의 도발을 이어가다 남침을 맞잖아요? 만약 이승만이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면 김일성이 그렇게 쉽게 남침을 했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전쟁을 막는 일’입니다.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우리 정부는 북한과 계속 대화를 시도하며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사인을 계속 주면서 북‧미간 협상을 유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쟁을 억지하는 것은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당사자 아닙니까?

역사연구자로 살면서 가장 희열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조한성: 제 관점으로 대중에게 역사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아직 한국 학계에선 ‘논문’은 인정받지만, ‘대중저술’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역사학자들이 대중저술을 선호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대중에게 역사를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한 작업이잖아요. 그러다보니 작가들이 오히려 역사 관련 책을 써요. 재미있죠. 하지만 작가들의 작업엔 늘 ‘오류’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전 이런 오류 없이 대중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

『한국의 레지스탕스』 , 『해방 후 3년』, 민족문제연구소 공동 저술인 『군함도 – 끝나지 않은 전쟁』모두 재미있게 봤습니다. 힘 있는 문체가 당대 상황으로 몰입하게 만들더군요. 다음 작품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지금은 ‘3.1 운동’에 대한 책을 구상 중이에요. 자료가 굉장히 많은데, 그래서 오히려 잘 정리가 안 되는 경우에요. 일반인들이 200만 명이 참가했는데 그분들의 자료가 모두 남아있지는 않지만 ‘심문 조서’같은 형식으로 많은 분의 자료가 남아있어요. 이분들의 이야기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쓰고 싶습니다.

역사학자를 꿈꾸거나 역사 관련 일을 하고 싶은 이들이 많습니다. 학생들이 역사를 공부하며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붙잡는 방법이랄까요? 조언 해주신 다면요?

조한성: 역사 속 인물이 되어, 실제 주인공으로 분해서 인터뷰 형식이든, 신문기사의 형식이든 자신의 글로 써보시면 어떨까요? 수업시간의 일방적인 가르침보다 훨씬 재미있거든요. 역사는 정말 재미있는 학문입니다. 학교 현장에서도 학생들이 더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을 개발했으면 해요.

<2017-10-0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목, 2017/10/05-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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