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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K] 총독부가 만든 ‘3·1운동 계보도’ 단독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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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K] 총독부가 만든 ‘3·1운동 계보도’ 단독 발굴

익명 (미확인) | 금, 2019/03/01- 23:22

[앵커]

지금 제 뒤로 보이는 건물, 일제 식민통치 기구였던 조선총독붑니다. 실제 건물이 있던 경복궁 바로 앞에 KBS가 당시 모습을 증강현실로 재현했습니다.

일본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조선과 조선 왕실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에 총독부를 세워 민족적 자존심을 짓밟고, 일제의 지배력을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제 KBS가 단독 보도할 역사적 사료도 바로 이곳 총독부에 만든 것입니다.

조선총독부가 만든 이른바 ‘3.1운동 계보도’를 KBS 탐사보도부가 일본 현지에서 최초 발굴했습니다.

3.1운동을 이끈 주도자급 인물 한 명, 한 명 140명을 계보 형태로 조선총독부가 그려놓은 자료입니다. 여기엔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가도 등장합니다.

이 자료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잊힌 독립운동가는 누구인지 집중 보도합니다.

탐사보도부 이재석, 유원중, 이세중 세 기자가 차례로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일본 외무성이 생산한 문서 자료가 한데 모여 있는 외교사료관.

3.1운동 이후 경계심이 한층 높아진 일제가 밀정을 활용해 촘촘한 감시망을 마련한 흔적이 공문서로 포착됩니다.

[김광만/역사저술가 : “일본 관헌이 다수의 밀정을 사용해서 선교사의 가정에에 출입하는 다수의 조선인을, 앙래하는 사람들의 동향을 보고했다는 내용입니다 (1919년 4월)”]

취재진은 일본 공공기관뿐 아니라 분야별로 전문화된 고서점에서도 3.1운동과 밀정 관련 자료를 수개월 동안 추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도쿄의 한 고서점에서 이른바 ‘3.1운동 계보도’를 찾아냈습니다.

3.1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140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계보 형태로 그려져 있습니다.

[김광만/역사저술가/공동 발굴 : “(말하자면 원본 계보도가 들어가 있었던 거죠?) 그렇죠. 수십 장 속에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중에 이제 소요(3·1운동)에 관계된 것만 빼낸 거죠.”]

천도교를 이끌었던 손병희 선생을 맨 위로 놓고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측 인사들이 아래로 배치됩니다.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천도교 조직망이 각 지역 책임자들 이름으로 이어집니다.

기독교계를 이끈 이승훈 선생을 시작으로 각급 주도자들을 거쳐, 6개 학교 학생운동 대표자들로 이어집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 모인 청년들을 이끈 사람들입니다.

특히 정주조, 평양조, 의주조 등 북한 지역 목사들을 주축으로 3.1운동의 동력이 북쪽으로 전해집니다.

이번엔 불교 한용운 선생.

“한용운의 명을 받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자들”이라는 설명과 함께 당시 배포 책임자였던 중앙학림생도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김승태/한국 기독교 역사연구소장 : “(일제가) 어떻게 3·1운동을 보고 어떻게 사건을 구성하려고 했나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굉장히 중요한 자료입니다.”]

백 명이 넘는 3.1 운동 주도자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계보도가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전문가들과 함께 계보도의 구체적 내용을 검증하고 일본 외무성 자료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이 계보도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2일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걸로 확인됐습니다.

[최우석/독립기념관 연구원 : “경찰에서 조사가 일차적으로 끝난 다음에 그것을 총정리해서 만든 문건 속에 이 표도 같이 제작해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1운동이 조직화된 독립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주는 한편, 특히 기존 사료에서 찾기 힘든 ‘3.1운동의 숨은 주역’들이 적잖이 포함됐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박찬승/한양대 사학과 교수 : “3.1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한 사람들 가운데 묻혀 있는 분들이 많죠. 각 인물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확인할 때 도움이 되는 자료입니다.”]

KBS는 3.1운동 계보도를 서울역사박물관에 제공해 오늘(1일)부터 시민들에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계보도를 통해 새롭게 등장한 ‘3.1운동의 주역’들을 이어서 유원중 기자가 보도합니다.

▼ 우리 역사에서 잊힌 ‘3·1운동 주역’ 더 있었다!

들불처럼 번진 3.1 만세 운동으로 당시 조선총독부는 크게 당황합니다.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고문과 조사가 이어졌고, 경찰과 밀정들의 정보를 더해 3.1운동 전모 파악에 나섰는데요.

이렇게 해서 총독부가 20여 일 만에 만든 게 바로 이번 계보도입니다.

계보도에는 기존에 알려진 3.1운동 주역들보다 더 많은 140명이 등장합니다.

이미 훈장을 받았거나 아니면 친일파로 변절해 서훈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 정부가 역사적 평가를 마친 사람들을 제외하고 34명의 새로운 인물이 드러났습니다.

저희는 이 34명이 누구냐고 보훈처에 질의해봤습니다.

그러자 9명은 현재 독립유공자 심사가 진행 중이고 10명은 친일 또는 월북 등 이상 행적을 보인 사람들로 파악하고 있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15명은 수수께끼로 남습니다.

일제가 3.1운동의 주역이라고 파악했지만 우리 정부 기록에는 없는 이 15명은 누굴까요?

백 년 전의 기록, 탐사K는 지난 2달에 걸쳐 이들의 흔적을 추적했고 일부이지만 의미 있는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이 얘기는 이세중 기자가 전하겠습니다.

▼ ‘3·1운동 계보도’ 단독 발굴…‘숨은 주역’ 있었다

전문학교 학생대표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된 주익 선생,

보성전문학교, 현 고려대학교에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자료보존고 깊숙한 곳에 보관된 졸업앨범,

[서명일/고려대 박물관 학예사 : “(지금 이게 전부 졸업 앨범인 건가요?) 네. 1917년부터 2018년까지의 100년간의 앨범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빛바랜 앨범 속 주익 선생의 사진,

생년월일과 본관 등 구체적인 정보를 찾아냈습니다.

[“본관이 신안이고, 그러니까 신안 주씨라는 뜻이죠. 그리고 학과가 법과이고…”]

후손은 어디에 있을까.

주익 선생의 본관인 신안 주씨 종친회를 찾았습니다.

주익이라는 이름 옆에 적힌 그의 활약상,

[주범석/신안주 씨 종친회 사무국장 : “항일 투사라고 나오네요. 그리고 신간회라고 나오고, 그리고 보전이니까 보성전문을 졸업했다고 나오네요.”]

족보에 나오는 주익 선생의 아들과 손자, 증손주들.

이를 토대로 수소문한 끝에 부산에 후손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란 오면서 호적 하나 챙기지 못한 가족들,

취재진이 가져간 사진으로 난생처음 할아버지를 뵈었습니다.

[주진령/’주익 선생’ 증손녀 : “진짜 사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얘기로만 들었지.”]

주익 선생이 학생대표로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고 신간회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간 이야기는 취재진을 통해 처음 들었습니다.

[주격림/’주익 선생’ 손자 : “독립운동하시고, 함경도 대표로 참가하셨다, 그 정도만 알지. 그 이상은 나도 모르지.”]

후손들은 취재진이 건넨 자료를 토대로 서훈을 신청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경기 이천 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이강우 목사, 계보도가 가리킨 이천중앙교회부터 찾았습니다.

전도사로 몸담았다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당시 문서는 모두 사라진 상태.

[김응호/이천중앙교회 원로 장로 : “그분이 이제 3·1 운동에 관련해서 뭐 활동을 했다고 그러는데 분명한 기록이 없어요.”]

지역 원로 장로로부터 이 목사의 후손을 찾아낼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30년 전 이강우 목사의 기록을 찾고 있던 가족으로부터 호적을 건네받은 적이 있다는 겁니다.

[홍석창/원로 목사 : “가지고 있는 자료를 좀 드리면 자기 아버지가 더 널리 선전될 수 있으리라 기대를 가지고 내 집을 찾아온 거지.”]

호적에 나온 정보를 토대로 막내딸 이경애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리움은 여전합니다.

[이경애/’이강우 목사’ 딸 : “아버지 흔적을 찾은 거 같은 게 기쁘더라고. 아버지하고도 일찍 헤어졌어요, 우리가… 저기 독립운동 한다고 맨날 돌아다니고…”]

이외에도 탐사K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조사한 결과 15명 가운데 일부의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대표인 김문진 선생은 대구지방법원의 조사를 받았고, 함경도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다 숨진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충남 홍성에서 3.1운동을 이끈 김병제 목사는 목회활동을 이어가다 광복 직후 숨졌고, 중앙학교 생도였던 장기욱 선생은 신간회와 조선 공산당에 참여해 항일운동을 이어갔습니다.

3.1운동 밀서를 평북 의주 책임자에게 전달한 송문정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에도 참여했습니다.

3.1 운동의 주역이었지만 역사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당 : “여태까지 조금 보류됐던 인물들에 대해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만큼 더 이제 적극적으로 (서훈 검토)해야 될 필요는 있죠.”]

정부는 지난해 행적이 일부 입증되지 않더라도 친일 활동이 없으면 서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관련 규정을 바꿨습니다.

KBS 뉴스 이세중입니다.

[앵커]

앞서 보신대로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가 한 명, 한 명을 계보로 그렸습니다. 3.1운동으로 인한 위기감이 그만큼 컸고 갈수록 탄압의 강도는 높아졌습니다.

지금 흘러나오는 있는 사진들, 참혹한 수난의 역사입니다. 그 고통,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잊어선 안될 저항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36년의 세월을 보내고서야,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총독부 건물은 꽤 오랜 시간 살아남았습니다. 1996년, 광복 50년이 넘어서야 총독부 건물은 철거됐습니다.

이렇게 무너지고 나서야, 그 뒤로 치욕을 강요당한 경복궁이 제모습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해방이후 220명이 넘는 친일파 인사가 대한민국 훈장을 받았습니다.

역사의 제모습은 언제 되찾을지, 여전히 남는 질문입니다.

<2019.03.01> KBS NEWS 

☞기사원문: [탐사K] 총독부가 만든 ‘3·1운동 계보도’ 단독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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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정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해주세요~
https://www.historymuseum.or.kr

금, 2018/09/0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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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15번째!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응원영상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기적을 이어 2018년 8월 29일,
다시 시민들의 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모금 참여
https://www.minjok.or.kr/archives/97796

금, 2018/09/0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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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38

이순우 책임연구원

흔히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단연코 한국전쟁 당시의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제일 먼저 떠올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인 일제강점기에도 이 땅에 포로수용소가 엄연히 존재했으며, 더구나 그 위치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는 점은 다소간 이색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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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연합군포로수용소 터에 들어선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의 현재 모습. 사진의 한가운데 보이는 벽돌형 건물이 원래 포로수용소 막사가 있던 자리이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이나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내려 굴다리를 통해 경부선 철길의 서편 청파동 방향으로 나가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 1946년 8월 17일에 신광여자기예초급중학교로 설립 인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다. 정식 명칭으로는 ‘조선부로수용소(朝鮮俘虜收容所, 1942년 7월 5일 개설)’이며, ‘부로’는 ‘포로’와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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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2년 2월 16일자에 전면 보도된 ‘싱가포르 함락’ 관련 내용이다. 이 당시 무조건 항복에 따라 다수의 영국군과 호주군이 포로가 되면서 이것이 식민지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전투현장도 아니고 일본 본토도 아닌 곳에 난데없이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이었다. 태평양전쟁의 확전 초기 단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거쳐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때 10만여 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력이 대거 포로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42년 2월 20일자에 수록된 「오늘은 포로수용소, 소남도(昭南島, 쇼난토) 동방 ‘쟝기’ 요새시찰기」 제하의 현지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함락 직후 포로수용소로 변한 ‘창이요새’에 이미 영국 본토군 1만 3천 명과 호주군 1만 5천 명이 이곳에 억류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나오는 ‘소남도’는 “소화(昭和, 쇼와) 시대에 획득한 남쪽 섬”이라는 뜻을 담아 일본식으로 작명한 ‘싱가포르’의 새 지명이다.
이 당시 일본군은 이른바 ‘남방전선(南方前線)’에서 포로의 숫자가 20여 만 명 남짓으로 급증하게 되자 1942년 1월 14일에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선통사(善通寺, 젠츠우지) 포로수용소를 개설하여 적국 고위장교 위주로 이곳에 배치한 것을 시작으로 상하이와 홍콩에도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일본 오사카와 도쿄, 그리고 조선, 대만(臺灣, 타이완), 태(泰, 타이), 마래(馬來, 말레이), 비도(比島, 필리핀), 과와(瓜哇, 자바), 보르네오 등지에도 속속 포로수용소가 추가되었다.
그런데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데에는 단순히 과다한 연합군 포로의 인력을 분산하려는 목적만이 아니라 여기에도 일본제국의 남다른 저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선 1942년 2월 28일에 조선군참모장 다카하시 타이라(高橋坦, 육군소장)가 육군차관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郞, 육군중장)에게 보낸 ‘포로수용’에 관한 전문(電文) 내용을 보면, “반도인(半島人, 조선인)의 영미숭경관념(英米崇敬觀念)을 일소하고 필승의 신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매우 유효하므로 …… 영미부로(英米俘虜) 각 1천 명을 조선에 수용하고 싶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42년 3월 23일에 조선군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육군대장)가 육군대신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육군대장)에게 보낸 ‘조선군부로수용계획(朝鮮軍俘虜收容計畫)’ 제하의 전문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설치목적이 노골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미영인 부로(米英人 俘虜)를 조선 내에 수용하여 조선인에 대해 제국의 실력을 현실로 인식시키고자 함과 동시에 의연히 조선인 대부분이 내심 갖고 있는 구미숭배관념(歐美崇拜觀念)을 불식하기 위한 사상선전공작의 재료로 제공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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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성(陸軍省)에서 1942년 7월 5일부로 조선부로수용소가 경성부 청엽정 3정목(청파동 3가) 100번지에 설치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이 『일본제국관보』 1942년 11월 4일자 휘보(彙報)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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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옮겨온 연합군 포로들이 ‘조선부로수용소 본소’인 옛 이와무라제사소 공장터에 당도하는 장면을 담은 보도사진. (『통보』 제126호, 1942년 10월 15일자)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42년 8월 16일 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출발한 1천 명에 달하는 영국군 포로(호주군 100여 명 포함)가 3천 톤급 수송선 복해환(福海丸, 후쿠카이마루)을 타고 1942년 9월 24일에 부산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고, 그 다음날인 9월 25일 경부철도를 통해 용산역에 당도하여 삼각지와 용산경찰서 앞을 지나 최종 목적지인 ‘조선부로수용소 본소(本所)’에 안착하였다. 이 가운데 일부 포로들은 영등포역에서 분할되어 상인천역을 경유하여 인천에 있는 ‘조선부로수용소 분소(分所)’에 배치되었다.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설정된 곳은 원래 이와무라제사소(岩村製絲所)의 공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서울과 평양의 신학교 건물과 같은 곳을 포로수용소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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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로수용소 출신 호주군 병사 존 윌킨슨(John D. Wilkinson)이 남긴 『조선포로수용소에 관한 스케치(Sketches of a POW in Korea)』 (1945)에 수록된 ‘경성 캠프 약도’. 포로수용소 막사로 사용된 4층짜리 벽돌건물은 이와무라제사소의 공장 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지난 2011년 1월까지 잔존하였으나, 학교 건물신축공사 관계로 철거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조선총독부 식산국이 편찬하고 조선공업협회가 해마다 발행하는 <조선공장명부(朝鮮工場名簿)>라는 자료를 취합하면, 이 자리가 제사공장으로 사용된 것은 1930년에 가베상회(可部商會, 1927년 1월 창립)가 처음인 듯하다. 그러나 이 회사가 경영난으로 이내 부도 처리되면서 1932년 이후 미쓰이물산(三井物産) 계열의 동양제사 경성지장(東洋製絲 京城支場)으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이와무라제사소(1934년 10월 창립)로 탈바꿈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회사의 설립자는 함북 회령에 있는 유선탄광(遊仙炭鑛)의 주인 이와무라 쵸이치(岩村長市)인데, 이러한 탓인지 이 공간은 토목건축청부업과 목재제재업 등을 영위하는 이와무라구미(岩村組)의 경성출장소로도 함께 사용되었다. 그 후 이와무라제사소는 1940년 1월에 이르러 서울지역을 벗어나 원재료(누에고치) 조달이 용이한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공장을 옮겨감에 따라 이 자리는 빈 건물로 변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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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6월 1일자에는 서울 청파동에 있던 이와무라제사공장이 원재료인 누에고치가 풍부하게 확보되는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이전할 계획이라는 보도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잠깐 눈여겨 볼 대목은 포로수용소의 입지여건이다. 보통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다수의 군중과 격리된 오지를 선택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도시의 외곽지역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조선포로수용소는 이들의 모습이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도심지 인접지역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직접적인 접촉은 금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 연합군 포로들의 존재를 통해 일본제국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동시에 조선사람들에게 “서양사람들도 알고 보니 별 것 아니더라”는 식의 관념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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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함락 1주년’을 맞이하여 조선군사령부가 영국군 포로장교들을 강제동원하여 벌인 좌담회 내용이 『매일신보』 1943년 2월 15일자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황군(일본군)의 기동력이 빠른 데에 놀랐다”거나 “신속 과감한 기습에는 견디지 못했다”는 식의 굴욕적인 발언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전쟁수행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일조하도록 하겠다는 계략도 깔려 있었다. 실제로 이들 연합군포로들이 노역의 대상자로 적극 활용된 사례는 1943년 9월 함경남도 함흥에 흥남 캠프가 새로 설치되어 경성과 인천에서 선별된 230명의 포로들이 이곳에 재배치된 사실에서도 잘 확인된다. 이들은 흥남에 있는 조선질소비료 공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되었고, 이 인원은 추후 보충되어 총계 350명으로 증원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니는 연합군 포로들의 일상생활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의 부록으로 간행되던 ????통보(通報)???? 제129호(1942년 12월 1일자)에 수록된 「현지보고(12) 조선부로수용소」라는 제목의 탐방기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22쪽)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단벌옷의 나그네 차림으로, 풀이 죽어 정신없이 일동(一同)이 조선으로 보내져 온 것은 가을이 아직은 옅은 9월말이었다. 그리고 이곳 경성 청엽정(靑葉町, 청파동)의 ‘조선부로수용소’에서 그들의 제2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전부 남방(南方) ○○작전에서 살아남아, 시시각각으로 압박해오는 황군(皇軍, 일본군)의 포위철환(包圍鐵環) 아래 온갖 계책이 소진되어 죽음의 문턱을 앞두고 항복에 따라 목숨을 유지하게 된 광영의 ― 그 광영은 이미 낡고 또한 공허한 것이지만 ― 영국군인, 호주군인이다. 그로부터 2개월, 그 가을도 급격히 떨어져 저물어 어느 새 그 사이에는 흰 눈이 온 것을 보았다.
(23쪽) 그 면면은 영국병사, 호주병사 외에 프랑스병사, 카나다병사도 각 1명씩이 섞여 있고, 최고령은 카쥬 중좌(中佐)의 58세부터 최연소는 20세까지이다. 점심에는 빵을 먹고, 아침과 저녁은 일본식(日本食)인데, 이미 미소시루(味噌汁, 된장국)와 다꽝(澤庵, 단무지)의 맛에도 익숙해졌다. 소내(所內)는 장교를 제하고 10개 반으로 나뉘어져, 아침에는 7시에 기상하고 취침은 9시, 정연한 규율생활을 한다. 2개월 사이에 아침저녁 점호의 인원보고만큼은 완전히 일본어로 할 수 있게끔 되었다.
(24쪽) 아침 8시반, 그들은 희희낙락하게 대오를 갖춰, 교대로 황국총후(皇國銃後)의 생산작업에 참가하고자 수용소를 출발한다. 경성에는 시내 수개 소에 그들의 작업장이 있다. 각 곳의 작업장에서 그들은 묵묵히 작업에 힘쓰고 있다.
(25쪽)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 반도 동포가 부로황화(俘虜皇化)의 최일선에 있다. 이곳 작업장에는, 이날, 지난 6월에 모집에 응했던 임헌직(林憲直, 충남), 기본진원(杞本鎭月, 충남), 이부창인(李阜昌仁, 전남 제주도)의 세 사람이 있으며, 그들의 지도와 감시로서 정전(征戰)의 고귀한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의 말미에 조선인 포로감시원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일본제국이 조선인 청년들을 포로감시원으로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역시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 직후의 일이다. ????매일신보???? 1942년 5월 23일에 수록된 「반도인 청년의 광영, 미영인 포로감시원에 대량 채용」 제하의 기사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나열하고 있다.

 

반도인으로 하여금 명실이 같은 황국신민으로서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자가 되게 하고자 명후년부터 징병제도를 실시한다는 발표에 조선산천이 기쁨과 감격에 가득 차 있는 때 22일에도 다시 대동아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의하여 남방 각지에 포로가 되어 있는 미국, 영국 사람을 감시하는 무거운 임무를 조선 청년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였다는 공표가 있어 반도청년의 기쁨을 절정까지 폭발시키고 있다. 육군당국에서 이와 같이 중요한 일을 반도청년에가 맡기게 된 것은 그들이 황국신민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결과로서 조선의 큰 영예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 걸음 나아가 생각할 때 포로를 감시한다는 것은 거만하기 짝이 없어 동양 사람은 사람으로 알지 않든 미국과 영국 사람을 지킨다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실로 그들로 하여금 반도인의 일본국민으로서의 우수함을 인식케 하여 마음으로부터 일본제국에 대하여 존경하는 정신을 갖게 하는데 있는 만큼 그 일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며 (하략)

 

30

『매일신보』 1943년 3월 1일자에 수록된 「조선에 온 부로(포로)」 개봉안내 광고문. 안석영(安夕影)이 감독 편집한(조선군사령부 지도, 조선영화 제작 배급) 이 영화는 연합군 포로와 더불어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활약을 담고 있는데, “귀축미영의 초라해진 패잔의 생생한 모습을 보라”는 선전문구만으로도 제작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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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포로감시원 모집에 관한 구라시게 조선군 보도부장의 담화를 담고 있는 『매일신보』 1942년 5월 24일자 보도내용.

 

이와 함께 이 당시 포로감시원의 채용대상으로는 21세에서 30세 사이의 국민학교 졸업자로 정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두 달 가량의 훈련과 더불어 군속(軍屬)의 신분으로 현지에 파견한다는 방침이 공표되었다. 다만, 이때 함경남북과 평안남북을 포함하는 서북선 지방 거주자는 인력동원대상에서 특별히 배제하였는데, 이 지역은 지하자원개발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많은 사람이 소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당시 조선군 보도부장 구라시게는 “특히 특별지원병을 지망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은 자나 장래의 비약을 기하여 구미인(歐米人)을 연구하려는 열의를 가진 청년은 절호한 이 기회이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희망하는 바이다”라는 취지로 포로감시원 지원 모집을 부추긴 바 있었다. 이때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청년들이 포로감시원으로 선발되어 동남아 일대의 포로수용소로 배치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애꿎게도’ 일본의 패망 이후 포로학대와 가혹행위를 이유로 BC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사형 판결을 받거나 징역형에 처해진 일도 있었다.

금, 2018/09/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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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露(백로)

 

衆人嘆酷暑(중인탄혹서)

可識忽秋臨(가식홀추림)

促織哀鳴夜(촉직애명야)

思鄕獨醉吟(사향독취음)

 

白露에

 

많은 사람 심한 더위 탄식했는데

문득 가을이 왔음을 가히 알겠네

귀뚜라미 찌르르 구슬피 우는 밤

고향을 그리며 홀로 취해 읊는다.

 

<時調로 改譯>

 

酷暑를 탄식했는데 문득 가을이 왔네

귀뚜라미 찌르르르 구슬프게 우는 밤

고향을 그리워하며 홀로 취해 읊는다.

 

*白露: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하나.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에 들며

9월  8일경이다.  또는 ‘이슬’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  *衆人: 뭇사람 *酷暑: 몹시

심한 더위 *促織: 실솔(蟋蟀). 청렬(蜻蛚). 귀뚜라미  *哀鳴: 새나 짐승, 벌레 따

위가 슬프게 욺. 또는 그런 소리 *思鄕: 망향(望鄕). 고향을  그리워하며 생각함.

 

<2018.9.8, 이우식 지음>

토, 2018/09/0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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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실수로 입금했습니다. 명단에서 삭제좀 부탁드립니다.

2013년 부정선거 주장때부터 주사파들에게 악용당하면서 피해를 많이 본 이석훈이라고 합니다.

실수로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하였습니다. 명단에서 삭제좀 부탁드립니다. 문자 메세지도 그만 주시길 바랍니다.

이석훈  010-4335-7501     [email protected]      790812-1######

월, 2018/09/1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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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news&write_id=2502

안녕하세요?
위의 사이트는 모 교회의 계시판입니다.
건국 100주년이 아니다.
이승만은 배드로다.
등등 참 힘든 역사관으로 교인들이 힘들어 합니다.

최근에는 김문수 전 경기지사까지 동원해서 몇개월간 계속 힘든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을 보시고 제발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합니다.

o 대한민국의 위기와 기독교의 역할_건국 70주년의 의미

2018년 9월 16일(일요일)에는 다시 김문수 전 지사를 초청하여 2시간에 걸쳐 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들으려고 합니다.

이 강연에서는 좌파와 우파의 차이, 좌파의 근본 문제점, 좌파 탈출 경험, 좌파 정책의 필연적 실패 등에 대해 김문수 전 지사가 체험하여 느끼고 본 대로 진술하려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사랑침례교회 서창동 캠퍼스로 오셔서 같이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시: 2018년 9월 16일 오후 3시
강사: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강연 제목: 나의 좌파 체험 및 탈출기

o 이병태 교수: 문재인 정부 1년_한국 경제는 왜 위기인가? 최저 임금 소득 주도 성장의 허구

o 이춘근 박사: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건국과 부국강병 2부_박정희 시대의 국제 정세

o 김철홍 교수: 나는 어떻게 좌파를 버렸나?_공산주의 주사파 이해, 좌파 탈출

o 전교조의 실체와 학교 교육의 문제 1부_전교조의 정체 및 사상

o 홍지수 작가: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 1부_정치적 금기어(PC)의 정의 및 계보, 마르크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전 세계 좌경화

일, 2018/09/1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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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읽던 도중 철도순직자조혼비에 대해 알게되어서 여기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철도순직자 조혼비에 관한 정보를 더 들을 수 있을까해서 글 남겨 봅니다.

추가적으로 기사에서 조혼비 설명해주시던 이순우 소장님께 연락이 닿아서 몇가지 질문하고 싶은게 있는데 이메일을 알아갈 수 있을지 글 남겨봅니다.

일, 2018/09/1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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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勸人君國家朝餐祈禱會不參

 

衆嘲祈禱會(중조기도회)

忽欲使君知(홀욕사군지)

孰語耶蘇國(숙어야소국)

愚民起大疑(우민기대의)

 

삼가 나라님께 국가 朝餐 기도회 不參을 권하오

 

많은 이가 朝餐 기도회 조롱하니

문득 나라님이 알도록 하고 싶소

그 누가 예수의 나라라 말합니까

못난 백성은 큰 의심을 일으키오.

 

<時調로 改譯>

 

많은 이 조롱하니 나라님 아셔야겠소

예수의 나라라고 그 뉘라서 말합니까

마침내 못난 백성은 大疑를 일으키오.

 

*人君: 임금. 나라님 *朝餐: 손님을 초대하여 함께 먹는 아침 식사 *耶蘇: ‘예수’

音譯語 *愚民: 우맹(愚氓). 어리석은 백성 *大疑: 크게 의심함. 의심이나 의혹.

 

<2018.9.17, 이우식 지음>

월, 2018/09/1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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嘆世態(탄세태)

 

愚夫論國事(우부논국사)

雜漢說儒經(잡한설유경)

牧者錢蟲化(목자전충화)

山僧尙未醒(산승상미성)

 

세태를 탄식하며

 

어리석은 남자가 나라의 일 논하고

잡스런 놈이 儒家의 경전을 說하네

牧者는 그만 돈벌레 되고 말았으며

山僧은 아직도 술에서 못 깨어났네.

 

<時調로 改譯>

 

愚夫가 國事 논하고 잡놈이 儒經 설하네

예수 믿는 목사님은 錢蟲 되고 말았으며

산속의 저 스님 또한 아직도 未醒이라네.

 

*愚夫: 어리석은 남자 *國事: 나라에 관한 . 나라 정치에 관한 일. 나랏일 *雜漢:

잡놈 *儒經: 유서(儒書). 유가서(儒家書). 유가(儒家)에서 쓰는, 유학에 관한 책.

 

<2018.9.18, 이우식 지음>

화, 2018/09/18-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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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전진 도상에는 여전히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고, 역풍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과 남이 서로 손을 맞잡고 뜻과 힘을 합쳐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때 길은 열릴 것이며, 우리 스스로 주인이 되는 새로운 시대는 흔들림을 모르고 더욱 힘 있게 전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소중한 자산입니다

목, 2018/09/2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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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9/21-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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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9/21-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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