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서울지부 관계자가 2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전교조 대회의실에서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1차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의 초∙중∙고교 100곳 이상이 친일인사가 등재된 인물이 만든 교가를 사용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의 동상을 세운 학교도 7곳이나 됐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서울지부와 민족문제연구소는 2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전교조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3.1운동 100주년,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1차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는 서울지역 모든 초∙중∙고교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 교가를 작사 또는 작곡한 학교는 113개교에 달했다. 초등학교가 18개교, 중∙고등학교는 95개교였다. 설립유형으로 보면 사립이 73개교(64.6%)로 40개교인 공립(35.4%)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 여기엔 서울대사범대학 부설초, 영훈초, 창덕여중, 숙명여고, 휘문중∙고 등이 포함됐다. 성남중∙고교는 친일인사가 작사∙곡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교가에 친일파였던 이 학교 설립자 원윤수와 김석원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사의 동상 등 기념물이 있는 학교는 7곳으로 파악됐다. 중앙고와 고려대에는 두 학교의 설립자로 알려진 김성수의 동상이 있는데, 김성수는 조선방송협회 평의원 등 친일단체 간부를 역임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고려대 학생들은 꾸준히 김성수 동상 철거를 요구해왔다. 휘문고에는 대표적 친일 자본가로 알려진 민영휘의 동상이, 상명대에는 친일단체 간부로 활동한 배상명의 동상과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전교조 관계자는 “서울시교육청과 서울시가 관련 시민사회단체와 공동 TF팀을 꾸려 교육계 친일잔재에 대한 전수조사와 청산작업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 윗쪽에서 카빈소총 탄피( 윗쪽 좌우 붉은 원안)가 발견됐다. 가운데 붉은 원안은 검정고무신의 잔해다. ⓒ 심규상
▲ 아산 폐금광터 유해발굴 구역도 ⓒ 심규상
카메라와 취재수첩을 내려 놓았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B2 구역이다. 대나무 조각칼, 흙받이 등 개인 장비도 챙겼다.
천천히 호미질을 시작했다. 23일 오전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마을 뒷산 8부 능선. 이곳 폐금광터에서는 인근 마을에서 끌려온 주민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린 갓난아기까지 일가족이 끌려와 희생됐다는 증언도 많다. 1950년 인민군 점령 시기에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게 처형 이유였다.
유해 발굴 구덩이는 가로 10m, 세로 15m 크기다. 유해발굴단은 이 면적을 다시 7개 구역으로 나눴다. 유해발굴과 기록을 꼼꼼히 하기 위해서다. 기자가 자리한 B2 지역은 가로세로 3m 남짓으로 협소했다. 여기서 세 명이 자리를 잡았다.
끝날이 평평한 호미를 이용해 흙을 조금씩 긁어서 걷어내는 일이 시작됐다. 모인 흙은 양동이에 담아 따로 모은다. 양동이 흙 속에 혹여 유해가 섞여 있는지를 재확인하기 위해서다.
호미질을 시작한 지 15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앞 경사면 중간쯤에 푸른색 물체가 살짝 드러났다.
▲ 20 대 여성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치아(오른쪽)와 같은 희생자이 유품으로 보이는 옥비녀 ⓒ 심규상
“단장님! 단장님!”
기자가 박선주 유해발굴 단장을 급히 불렀다. 오전 10시께였다.
“옥비녀 같아요. 부녀자들이 쪽진 머리에 꽂던….”
온전히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조심조심 흙을 헤집었다. 부러져 있었지만, 옥비녀가 분명했다. 호미를 내려놓고 대나무 조각칼로 주변 흙을 조심스레 긁어나갔다. 비녀가 있던 한 뼘 아래쯤에서 하얀 물체가 보였다. 치아였다. 유해가 손상되지 않도록 신경 썼다. 간간이 골짜기 찬 바람이 몰아치는데도 등줄기에 땀이 배어 나왔다. 여러개의 치아가 가지런히 박힌 잇몸뼈와 턱뼈가 모습을 보였다.
박 단장이 치아를 유심히 살폈다.
“치아의 크기와 마모 정도로 볼 때 20대 여성으로 보이네요”
범위를 조금 넓혀 비녀가 나왔던 왼쪽 경사면 흙을 걷어냈다. 푸른 빛이 도는 탄피가 발견됐다. 당시 경찰이 두루 사용하던 카빈총 탄피였다. 학살이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의 지휘와 지시로 이뤄졌다는 증언을 뒷받침했다. 30여㎝ 떨어진 오른쪽 경사면에서도 같은 탄피가 추가 발견됐다. 옥비녀를 꽂은 20대 여성을 쏜 총탄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손끝이 떨렸다.
주변 좌우로 척추·갈비뼈, 엉덩뼈도 나타났다. 1시간 정도 작업을 이어가자 머리뼈도 보였다. 몸을 잔뜩 움츠린 상태에서 살해됐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검정 고무신 조각도 발견됐다. 박 단장은 “모두 20대 여성의 유해와 유품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이름 모를 20대 여성 희생자와 기자와의 67년만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 이름 모를 20대 여성 희생자와 기자와의 67년만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유해발굴을 하고 있는 기자. ⓒ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 박선주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장(오른쪽)과 발굴팀의 노용석 교수(영남대)가 드러난 희생자 유해를 들여다 보고 있다. ⓒ 심규상
주변 B1 구역에서도 유해가 무더기로 드러났다. 머리 형체가 뚜렷한 유해도 있었다. 폐광산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했다는 증언은 사실이었다. 유해와 함께 불에 탄 흔적도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 폐금광 안으로 연기를 피워 질식사시켰다는 또 다른 마을 주민의 증언도 나왔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원들이 끌고 온 사람들을 마을 방앗간에 가둬 놓았어. 어느 날 사람들을 금광으로 끌고 갔어. 한꺼번에 끌고 간게 아니라 수십 명 단위로…. 몇 명이었냐고? 암튼 셀 수도 없을 만큼 엄청 많았어. 금광이 일직선이 아니라 입구에서 곧바로 왼쪽으로 굽어 있었어. 사람들을 몰아넣고 총질을 해 죽었는데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불을 피워서 태우거나 동굴 안으로 연기를 피워 죽었어. 말도 마, 너무 끔찍해서….” (정윤섭, 80, 중리 3구)
▲ B1구역에서 발견된 희생자 유해 ⓒ 심규상
▲ 또 다른 구역에서는 머리카락이 발견됐다. ⓒ 심규상
아산시에서만 부역 혐의로 80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중 이곳 폐금광에는 약 200~300명이 묻혀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산시와 시민단체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지난 22일부터 한 달간 일정으로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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