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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100년 전 임정의 독립정신을 이어받다 – 경찰청 산하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팀’ 팀장인 이영철 총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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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100년 전 임정의 독립정신을 이어받다 – 경찰청 산하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팀’ 팀장인 이영철 총경

익명 (미확인) | 금, 2019/02/22- 15:42

2월 8일 불금(?) 퇴근 즈음, 시내 경찰청 산하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팀’ 팀장(총경)인 이영철 회원을 방학진 기획실장과 함께 찾았다. TF팀 사무실에 들어서니 경찰 팀원 10여 명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열기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영철 팀장은 경찰대학 졸업 후 경찰청에서 기획업무를 담당하며, 이 시대 따뜻한 민중의 벗으로 다가서려는 민주경찰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경찰관이다. 20여 년 전 우연하게 알게 된 임종국 선생의 삶에 매료되면서 연구소 회원이 되었다.

 

이영철 회원

 

문 : 반갑습니다. 팀장님은 오래 전에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제 어떤
계기로 가입하셨습니까?

답 : 예, 제가 어릴 적부터 친일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1991년 경찰대학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친일경찰 역사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0년, 우연히 임종국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되면서 민족문제연구소에 가입하였습니다.

문 : 그렇군요. 지금의 경찰청 임정 100주년 TF 팀장을 맡기 전에는 주로 어떤 업무를 하셨나요?

답 : 저는 주로 경찰청 내의 기획부서에서 오래 근무했습니다. 이곳 TF 팀장으로 오기 전에는 6개월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했습니다. 그 전에는 청와대 경호처에 파견 근무를 했습니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서서 청와대 주변 경찰 검문소를 없애고 주변을 개방하였는데 이 업무를 직접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문 : 경찰청의 기념사업단이 출범하게 된 계기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또 팀장을 자원하신 건가요?

답 : 정부차원의 위원회 출범과 함께 경찰청에서도 자체적인 TF팀을 만들었습니다. 경찰역사를 정립함으로써 조국과 정의를 위해 헌신한 경찰들을 선양하고, 대한민국의 경찰관들이 본받고 계승해야 할 참된 경찰정신의 표상으로 삼도록 하는 일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팀장에 자원한 것은 맞지만, 당초에는 기념사업 정도만 하는 부서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와보니 경찰의 역사와 정신을 바로 세우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인 것을 알고 운명처럼 느껴졌습니다.

문 : 작년 12월엔 경찰청•근현대사학회 공동 학술대회에 발표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발표를
하셨나요? 학술회의의 의의도 설명해 주십시오.

답 : ‘경찰역사 속 바람직한 경찰정신 정립방안’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학술세미나였습니다. 저는〈바람직한 대한민국 경찰정신의 뿌리〉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번 학술회의는 경찰역사상 최초로 경찰의 역사를 제대로 조명하고 그 역사를 통해 미래에 진정한 민주・인권・민생 경찰로 나아가기 위한 해답을 찾는 자리였습니다.

 

 

작년 10월 경찰청은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을 발굴해 미 서훈자 5명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해달라고 보훈처에 요청했다. 그 중한 분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제주도 4.3항쟁기에 성산포경찰서장으로 재직하면서 계엄군의 발포명령을 거부하고 수백 명의 민간인을 구해낸 문형순 서장이다. 또 한 분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인 안맥결 서울여자경찰서장이다. 안 서장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던 단체인 ‘결백단(潔白團)’의 단원이었음이 최근에야 밝혀졌다. ①② 독립운동을 하다가 만삭의 몸으로 옥고를 치렀던 안맥결 총경(가운데 안경 쓴 분)과 그의 흥사단 입단 이력서. ③④ 계엄군의 예비검속자 사살명령을 거부하고 억울한 주민들의 생명을 살린 문형순 경감과 그의 자필 이력서. 자료 제공: 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TF

 

문 : 저희 연구소에서 확인한 바로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광복 후 경찰에 투신한 문형순 서장이 있
는데요, 이런 광복군,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의 자료 추적은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답 : 최근에는 관련 자료들이 전산화되거나 자료집 등으로 집대성되는 등 자료 접근이나 분석이 용이해진 덕분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광복 이후 정부수립 전후의 기록들은 유실되거나 누락된 것들이 많아 추적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팀원들이 작은 단서 하나만 발견되면 집요하게 추적하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경찰에게도 훌륭한 선배님들이 많이 계셨다는 것을 찾아 지금의 경찰관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 : 이분들 중에는 아직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분들이 계셔서 일부를 공훈 신청을 해놓으셨는
데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습니까?

답 : 저희가 판단하기에는 모두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청한 것인데, 정작 엄격한 기준으로 심사를 하다보면 소명이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부족한 부분을 잘 분석해서 더 보강하여 다시 신청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저희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그분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돼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 : 사실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 시기 민중의 편에 서신 경찰들이 꽤 많다고 하는데 이들 중에 대표적
으로 사표를 삼을 분을 소개해 주세요.

답 : 일제강점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에도 경찰이 있었고, 초대 경무국장이 백범 김구 선생이었다는 사실이 최근에야 일반국민들에게 조금씩 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광복 후 정부수립 전후에 있었던 제주 4・3 당시에는 계엄군의 총살 명령을 “부당하므로 불이행”한다며 거부하고 수백 명의 목숨을 구명하신 ‘제주의 쉰들러’라 불리는 문형순 서장님이 계셨습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때의 안병하 국장, 이준규 목포서장 등 지휘부를 비롯한 전남 경찰들은 계엄군의 무장 강경진압 지시를 거부하고 안전하게 시위를 관리하는 방침을 고수했다가 신군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후유증으로 사망하거나 무더기 징계 또는 강제해직을 당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분들도 여럿 있지만, 좀 더 연구・조사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문 : 경찰청 기념사업추진단이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앞으로 더 크게 경찰이 가
야할 길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답 : 단순히 사례를 찾아 홍보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의미를 분명히 하고 그것이 현재와 미래의 경찰관들에게 바람직한 경찰정신을 심어 주는 매개체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경찰의 역사를 제대로 교육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바람직하고 본받아야 할 역사는 그 의미와 정신을 정확히 전달하고, 반성하고 기억해야 할 역사는 그 문제점과 경계해야 할 점 등을 담담히 성찰하도록 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문 : 이런 경찰의 노력이라면 우리 국민들도 경찰을 적극적으로 지지할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경찰의
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생각이 경찰에서도 나온다는데, 이건 어떤 의미에서 그런 거죠?

답 : 현재의 경찰의 날은 광복 이후 미군정기라는 제한적인 시기에 일제경찰을 탈피하고 한국경찰로 재탄생하기 위해 1945년 10월 21일을 기념하여 지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임시정부에도 경찰이 있었던 만큼 임시정부 경찰 관련 기념일을 경찰의 날로 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찰이 우리 경찰의 뿌리임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헌법에서도 분명히 천명하고 있고,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경찰이었던 임시정부의 경찰을 경찰의 뿌리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포도청이나 대한제국 경무청 같은 그 전의 경찰은 왕국의 경찰, 제국의 경찰로 국민을 위한 민주경찰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경찰의 날을 변경하는 문제는 건국절 시비와 함께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저는 경찰이 바람직한 경찰역사를 발굴하고 참된 경찰정신을 제대로 세우려는 노력이 정치적 시비로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지난 역사 속에서 경찰은 수많은 정치적 시비에 휘둘려 왔습니다. 그 와중에 벌어진 과오와 비극들도 많았습니다. 현재의 경찰의 날도 70년 이상 내려온 경찰의 역사 중 하나이고, 일본인 경찰들을 모두 추방하고 한국인들로 경찰을 구성하여 새롭게 출발했던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향후 학계의 연구나 국민적 공감대 형성 등 더 많은 고민과 논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문 : 연구소와 회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답 : 힘든 시기도 있었겠지만, 연구소가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우리들을 피로하게 만드는 다양한 논쟁들이 산적해 있지만, 우리 사회는 그래도 옳은 방향으로 꾸준히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문 : 이 시대에 바람직한 경찰상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 왕정시대의 경찰은 왕의 통치체제를 보위하기 위해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했지만, 근대이후의 경찰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의 안전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민주경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 경찰이 이러한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시기가 있었다면 이런 부분을 바로잡는 것이 지금 저희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를 통해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고 신뢰받을 수 있는 민주・인권・민생 경찰로 거듭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우리 국민들도 믿음직스럽고 신뢰감 있는 경찰을 꼭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여전히 일부 경찰들의 실망스런 모습을 보면서 아쉬울 때도 있겠지만, 이러한 경찰의 진심을 믿어 주시고 조금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셨으면 합니다.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정리 임무성 교육위원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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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재일동포들, 조선통신사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다

조영숙 도쿄지회 총무

2019년 11월 10일 오오타(大田)민단 주최의 역사탐방 여행으로 시즈오카의 淸見寺를 찾았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 후지산도 멋지게 보였고, 마침 이날이 일본의 새 천황 즉위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라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여행했다.
올해는 무오독립선, 2·8독립선언, 3·1혁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뜻깊은 해이다. 그야말로 선열님들의 해이다. 선열님들의 뜻을 이어받아 동북아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뜻깊은 올해에 불행하게도 한일관계는 최악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그 옛날, 양국은 원한과 불신의 상처를 딛고 조선통신사를 통해 평화와 교류의 역사를 200여 년간 이어왔다. 한일관계의 틈새에 끼어 살고있는 우리 재일동포들이 어찌 그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그리워하고 다시 새겨보고 싶지 않겠는가?(조선통신사와 관련한 여러 유물들이 한일 두 나라의 시민사회의 노력에 의해 2018년 유네스코의‘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되었다.)
淸見寺에 도착하여 안내 설명을 듣다가 우리 일행 모두가 깜짝 놀랐다. 2019년 7월 7일자 동경신문 기사의 복사본을 배부받았는데, 그 기사 내용에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가을에 일본을 방문하여 淸見寺에서 아베 수상을 만날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2018년은 양국의 문화교류를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수상이 함께 발표한 ‘한일관계 파트너십 선언’ 20주년이 되던 해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이후 강제징용문제, 수출규제 강화문제, 지소미아문제 등으로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동경신문은 이 어려운 한일관계에 국민들의 대립감정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통해 길을 찾기 바란다며 꿈으로 끝난 淸見寺에서의 한일 정상의 만남을 다시 꿈꾼다며 글을 맺고 있다.
두 정상의 만남을 가장 간절히 바라는 건 재일동포들이 아닐까? 한일 두 나라가 갈등하면 몇 배가 더 아프고 두 나라가 잘 지내면 평안하게 꽃피는 존재가 바로 재일동포들이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은 일제시대 살길을 찾아 건너온 동포들의 후손으로부터 뉴카마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선통신사가 머문 淸見寺를 찾아가는 날도 이런 다양한 재일동포들과 일본인도 함께 했다.
조선통신사는 처음엔 두 나라의 정치적인 목적이 우선이었다고 한다. 조선측에선 조선포로 귀환, 일본정세 파악 등이었고 일본측에선 도쿠카와 이에야스 막부의 새로운 외교방침, 국내정치적 목적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엔 문화교류로 확대 발전되어 조선의 선진문물이 일본에 많이 전해졌고 일본 문화도 조선에 전해지는 무지개 가교였다. 마침 그날 여행에서 출출할 때 먹으려고 고구마를 삶아 가져갔다. 고구마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작물로 많은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낸 구황작물이 되었다.
한편 조선의 선진문물 중에서 일본에 전해진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허준의 <동의보감> 속의 의술이 일본에 전해져 많은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귀한 역할을 했다. 그 귀한 역할을 이 시대 재일동포에게 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사회를 일본인들과 함께 만들며 공생하는 재일동포들, 그러나 재일동포 문제가 한일협정 때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동포들은 일본사회에서 차별받고 한편 조국의 버림 속에서 살아왔다.
몇 겹의 고통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 동포들이 이제 노령을 맞아 몸의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동의보감’이 이 시대 재일동포들에게 빛과 힘이 되어주기를 희망해본다.(<동의보감>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으로 끝난 한일정상회담이 다시 열려야 한다. 그 정상회담이 열리는 장소는 작년 오오타민단에서 역사탐방을 간 ‘고마진자(高麗神社)’ 쯤이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그곳은 고대 양국간의 풍요로운 교류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곳이다.
꽁꽁 묶인 한일관계가 부디 잘 풀리기를 기원하면서 내년의 역사탐방은 좀더 재일의 뿌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오오타민단 지부에 전한다.
• 이 감상문은 오오타민단 소식지 제85호(2020.3.27.)에 간략히 실렸다.

화, 2020/05/26-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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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어떤 인연 –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에 부쳐

김경현 후원회원(행정안전부 전문위원)

 

2001년 8월부터 연구소를 후원하기 시작한 김경현 후원회원은 제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이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3팀장을 지냈다. 현재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서 전문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 글은 2018년 타계한 ‘진주정신’의 표상으로 일컬으며 지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왔던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를 맞이해 고인과의 인연을 되돌아보고 쓴 회고담이자 추도사이다.- 엮은이

박노정 선생님의 생전 모습(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박노정(朴魯貞, 1950~2018) 선생님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분의 삶을 이야기해야 제가 맺은 인연에 대한 의미도 부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노정 선생님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경남 진주시 봉곡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주 교육장을 지낸 부친과 중등학교 교장을 지낸 형이 있는 교육자 집안이었습니다. 경상대학교 농과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학군장교(ROTC)로 임관해 전방에서 육군보병 소대장을 지냈으나 폭압적인 군대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군병원에 입원했다가 의가사로 제대했습니다.
이후 출가하고 입산해 팔공산 원효암 등지를 전전하며 승려생활을 하다가 속세에 나왔는데, 고향 진주에 돌아온 후 시인과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습니다.
문인활동으로 ‘동기 이경순선생’ 전집간행위원회 상임위원, 진주문인협회장, ‘진주 가을문예’운영위원장, 진주민예총 회장, 이형기시인 기념사업회장, 경남시인협회장 등을 지냈습니다. 이경순(李敬純)은 일제 때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던 진주의 시인이고, 이형기(李炯基)도 시 「낙화(落花)」로 유명한 진주의 시인입니다.
특히 사회단체활동으로 남성당 김장하(金章河) 선생께서 설립한 진주 남성문화재단에서 이사로 활동했으며, 진주문화예술재단 이사를 비롯해 진주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진주정신지키기모임 대표, 진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6․15공동선언실현을 위한 진주시민운동’ 상임대표, 진주주민협의회 공동대표, 독도수호와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저지를 위한 시민운동본부 공동대표 겸 ‘친일잔재청산 시민운동 공동대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시민단체를 맡아 지역사회운동을 이끄는데 헌신했습니다.
박선생님의 지역사회활동 중 가장 두드러지고 애정을 쏟았던 활동은 지역언론운동이었습니다. 1990년 3월 시민주를 모아 <진주신문>이 창간될 때 발행인과 편집인을 맡았는데, 창간 호에 축하시를 발표했습니다. 이후 2002년까지 <진주신문> 대표이사를 지내며 지역언론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박선생님은 <진주신문> 발행인을 지낼 때 지역권력과 토호세력을 상대로 비리와 부정을 폭로하면서 여러 차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사건으로 피소되어 법정에 서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친일청산운동에 앞장서 친일화가였던 이당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논개영정(論介影幀)’을 논개의 사당인 진주성 의기사에서 뜯어내 폐출했다가 유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박선생님은 ‘진주정신’을 지키고 역사정의를 세운 행위가 죄가 된다면 벌을 달게받겠다고 벌금납부를 거부해 강제노역형에 처해짐으로써 진주교도소 노역장에 유치되었습니다. 이에 진주시민들이 앞장서 모금운동을 벌여 그 성금으로 벌금을 납부해 풀려났으며, 남은 금액은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를 창립하는데 의미있는 기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진주지역사회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실천적 삶의 모습을 보여준 박선생님이었습니다. 과연 저는 어떻게 박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의 끈을 맺게 되었을까요. 1980년대 중반 대학 재학 때 절친했던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선배를 통해 박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는 경상대 터울시조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여태전(余泰田) 선배였습니다. 어느날 저는 여태전 선배의 손에 이끌려 박선생님이 본성동 옛 진주시청 앞에서 운영하는 찻집 ‘아란야(阿蘭若)’[불교용어로 ‘수행처’를 의미함]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박선생님이 가르치는 <금강경(金剛經)> 강의를 듣다가 따분해서 밥만 몇 차례 얻어먹고 도망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박선생님은 개의치 않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저를 불러 <진주신문>에 들어오라고 이끌어 1991년 8월 저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직업으로 팔자에도 없는 신문기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박선생님은 아란야를 방문한 양산 효암학원 채현국(蔡鉉國) 이사장에게 여태전 선배를 훌륭한 젊은이라고 소개해 여선배가 바라던 교직의 길을 걷게 해 주었습니다.
여선배는 양산 효암여상을 시작으로 진주 삼현여고 교사, 산청 간디학교 교감, 창원 태봉고교장을 거쳐 남해 상주중학교장을 지내며 대안교육에 힘쓴 훌륭한 교육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여선배도 박선생님이 추구했던 바와 같이 민족정신과 역사정의활동에 공감하여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지요.
한편 박선생님이 <진주신문>에 있을 때 가끔 직원회식을 가졌는데 드물었지만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술은 전혀 마시지 못했지만 노래는 꽤 잘 불렀습니다. 2차로 자리를 옮긴 노래방에서 반주에 맞추어 노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르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 이 노래는 음유시인으로 잘 알려진 백창우(白昌牛) 시인이 작사・작곡하고 가창력과 호소력이 있던 임희숙(任喜淑) 가수가 1984년에 불러 히트한 곡입니다. 노랫말과 음율이 마치 박선생님이 젊은 시절에 겪었던 고단하고 힘들었던 신산한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3년 저는 박선생님과 함께 검찰조사를 받고 법정에 서야만 했던 운명적인 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제가 당시 경남지역의 최대 현안사업이던 남강댐 보강공사에 따른 수몰지 보상과 관련한 측량비리 및 부정보상에 대한 문제를 심층 취재한 기사를 작성해 보도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그때 이 기사를 본 사천군의회 이원식(李源植) 의원이 자신의 땅에 측량비리와 부정보상이 있다는 취지로 보도한 <진주신문>의 기사에 대해 취재기자였던 저와 신문발행인이었던 박선생님을 창원지방검찰청 진주지청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했던 것입니다.
진주지청은 고소사건을 접수하자마자 경찰에 사건을 배당하지 않고 직접 수사에 착수해 신속하게 두 사람을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검찰에 구속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로 당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이의원은 당시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순회심판 조정위원을 맡고 있었던 지역유력자로서 검찰과 법원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원식 의원은 당시 사천군의원으로서 지역현안과 관련해 언론보도 및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에 있었으므로 <진주신문>의 기사가 비방을 목적으로 작성된 사실무근한 허위사실로 보기 어려워 그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심 진주지원 재판에서 검사는 피고인들에게 징역 3년씩을 구형했고 판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습니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했습니다. 그 결과 창원지방법원에서 열린 2심 합의부재판에서는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사실관계가 입증되고 언론보도의 공익성이 인정되어 실형을 내린 원심판결을 파기했습니다. 그러나 기사에 일부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여전히 판단함으로써 벌금형이 선택되어 각각 벌금 100만원이 선고되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벌금형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다시 상고했는데 대법원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원심파기환송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냈습니다. 1997년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함으로써 사건을 창원지방법원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지역유력자이며 공적인 존재로서 현직 군의원에 대한 비리의혹은 정당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므로 언론보도로 인한 군의원 개인의 명예가 훼손된다고 하기보다 지역민의 알권리가 우선되어야 함으로 이를 취재해 보도하는 언론의 행위가 부당하다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판결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창원지방법원 형사부로 되돌아온 파기환송심 재판에서 피고인들에게 모두 무죄가 선고되면서 이 사건은 완전히 끝나 판결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5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끌어온 <진주신문>에 대한 남강댐 수몰지 보상과 관련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사건이 무죄로 판결되면서 진실이 승리하고 정의가 살아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저 자신의 개인적인 승리보다 올곧은 언론인의 자세로 초지일관한 박선생님의 승리였고, 또한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진주신문>의 승리였습니다. 이후 저는 <진주신문> 필화사건을 깨끗하게 마무리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신문사를 떠났습니다. 비록 IMF사태를 계기로 신문사를 그만 두고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와 논개제에서 잠시 문화운동을 하다가 2004년 역사운동을 위해 진주를 떠나 서울로 왔지만, 박선생님과 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주에서 친일청산운동을 하던 박선생님을 서울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는데, 2009년 <친일인명사전> 출간을 기념하는 국민대회가 열리던 자리였습니다. 원래 숙명여대 강당에서 열기로 예정되었으나 대학측의 거부로 효창공원의 백범 김구(金九) 선생 묘소로 옮겨져 열릴 때 그곳을 찾아온 박선생님을 발견하고 매우 놀라워하며 뜨겁게 해후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당시 저는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활동을 하면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편찬활동에도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박선생님은 2015년 형평문학선양사업회장 등을 지내며 만년에도 활발히 활동했으나 2018년 지병이 악화되어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00세시대라는 요즘의 장수추세에 비추어 보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너무 이른 야속한 죽음은 아니었는지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부인 황선옥(黃善玉) 여사께서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박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시에서 자신과 함께 했던 ‘낯선 사내’를 스스로 지우고 먼 길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박선생님이 지웠던 낯선 사내는 생애
의 전부를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청빈한 삶을 살았던 박선생님의 자화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 박선생님은 결코 낯선 사내가 아니었으며 그는 아직도 저의 ‘영원한 <진주신문> 발행인’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진주신문>도 박선생님도 없고 단지 이름만 같은 짝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여전히 제 마음속에는 젊은 혈기가 넘치던 그때 그 시절의 <진주신문>과 박선생님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박선생님의 장례식 때 황여사께서 다음 생에는 부부가 아닌 좋은 친구로 만나자고 했던 말이 뇌리에 남습니다. 저 역시 다음 생에는 기자와 발행인이 아니더라도 어떤 인연이든지 끈이 이어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도 괘념치 않을 것입니다.
박선생님이 생전에 남긴 시집으로는 첫 시집 <바람도 한참은 바람난 바람이 되어>를 비롯해 <눈물공양>과 <운주사> 등이 있는데, 저는 첫 시집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아직도 귓전에는 박선생님이 신문사에서 저를 부르던 호칭이 이명처럼 들려옵니다. ‘김경현 기자’가 아닌 “경현 수좌”라고 부르곤 했던 다정한 목소리가 이제는 바람이 되어 다시 귓전을 스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또 다른 저의 사회학과 선배이던 양곡(暘谷) 시인의 시 「고 박노정 시인」을 인용합니다. 이 시를 음미하면서 박선생님의 영면을 빌며, 2주기(7월 4일)를 앞두고 그분의 삶과 인연을 소중하게 추억하고자 합니다.

유발거사(有髮居士)였다/술은 마시지 못해 차를 즐기며/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언제나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시(詩)를 좋아했고/문화와 예술을 좋아했다/무엇보다도 올곧고 결 바른 시대의/민족정신을 좋아했다????에나 진주사람이었다/옳고 바른 일에는 늘 앞장서고자 했고/시들어져가거나 꺼져가는 목숨들에게는 슬그머니 다가가/빙그레 미소 지으며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불어넣어주곤 했다.

화, 2020/05/2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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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친일파 흉상 철거, 고등학생의 민원에 보훈처가 답하다

임승관 전남동부지부장

김정태 흉상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작년,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 전남교육청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남청소년 역사탐구대회’를 진행해 왔으며 작년
으로 9회째를 맞이했다. 작년도 주제는 ‘임정 100주년·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 전라도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의 실상과 해결방안’ ‘전남지역 친일잔재의 실상과 해결방안’이었으며 도내 중·고교 70여 팀이 참가했다.
참가팀 중에는 고흥 녹동고등학교 팀도 있었는데 이 학생들은 대회 과정에서 자신들의 고장에 김정태의 흉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정태(1869~1935)는 강제합병 후, 전남 영광군수, 광주군수, 순천군수 등을 지냈으며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전남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했다. 1924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한국병합기념장(1912),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15),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28) 등을 받았다.
김정태의 아들 김상형(1897~?) 역시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며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전조선시국강연반 연사로 참여하였다. 중추원 의원 시절에는 내선일체 정신의 구현은 “반도민중의 일본화”에 달렸다고 주장하며 “천황폐하를 경모하여 받드는 정조(情操)를 고양”시키기 위해 “마을에서 학교에서 황거망배(皇居望拜)와 천양무궁(天壤無窮)을 기원하고 마음을 정화해 황국신민임을 맹세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 자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형은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에 송치되었다.
이와 같은 김정태의 친일행적을 확인한 학생들은 2019년 8월 고흥군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광복 74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역겨운 동상이 주민들의 휴식공간인 옥하공원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고흥 군민들을 내려다보며 분명히 비웃고 있을 것입니다. 동상이 철거된다면 주민들의 애국심과 지역 역사의식이 한층 더 함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친일파 동상이 버젓이 세워진 채로 우릴 내려다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학생의 민원 글 발췌

 

고흥군은 학생들의 민원을 국가보훈처에 이첩했다. 김정태 흉상이 자리했던 옥하공원 내 토지를 비롯해 약 56만㎡의 토지가 김정태 후손들의 소유였으나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에 의해서 국가로 귀속된 이후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관리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민원 전까지 국가보훈처는 그 땅에 친일파의 흉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민원을 넘겨받은 국가보훈처는 김정태의 후손에게 흉상을 자진 철거할 것을 통보했다. 그러나 후손들이 흉상 철거를 미루자 국가보훈처는 행정대집행을 통보했고, 결국 후손들은 4월 28일 오전 흉상을 철거했다. 철거는 국가보훈처와 고흥군청 관계자들이 오기 전에 신속히 진행 되었지만 필자는 오전 일찍 현장에 가 있었기에 다행히 철거의 모든 과정을 영상에 담아 지역언론사 등에 제공할 수 있었다.
김정태 흉상 철거는 아마도 친일파 기념물 철거를 학생들이 요구하고 고흥군과 국가보훈처 등 공공기관이 응답한 첫 번째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흉상 철거를 담당한 국가보훈처 담당자는 배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행동과 민원 내용에 진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민원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백방으로 철거 방법을 알아내어 결국 성과를 이룬 보훈처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해 준 녹동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화, 2020/05/2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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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

 

한국광복군 창군 80주년을 맞아 한국광복군동지회 주최로 6월 1일 국립서울현충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위령탑에서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이 봉행됐다. 김영관(97)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이 추념사를 했는데 현재 생존 광복군은 15명으로 그나마 거동이 자유로운 분은 김영관 회장뿐이다.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로 불리고 있으나 회원들이 점점 나이 들어가며 동지회 사무실 운영조차 어렵게 꾸려가고 있어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특히 이날 추모제전에는 국방부 등 유관 기관의 참여와 후원이 눈에 띄지 않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무색했다. 이날 추모제전에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참석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6/2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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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광복회, 반민특위 습격일에 경찰청장 사과 요구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6월 6일 오후 3시, 1949년 6월 6일 당시 친일경찰이 자행한 반민특 위 습격 사건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반민특위 유족과 광복회원, 일반시민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졌다. 또한 당시 습격의 책임을 지
고 현 민갑룡 경찰청장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해 4월 3일 서울 광화
문광장에서 열린 제71주년 4‧3 광화문 추념식에 참석, 경찰총수로서는 처음으로 “무고하게 희
생된 분들께 사죄드린다”는 뜻을 밝혔으며 올해 5월 12일에도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경찰
의 지난날을 반성 한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이날 행사는 중부경찰서 앞 가로수에 리본달기를 시작으로 김원웅 광복회장의 대회사, 송영길 의원의 인사말, 임헌영 소장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의 연대사, 구호제창 순으로 마무리됐다. 김원웅 회장은 “71년 전 오늘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폭란의 날’로써 가슴 아프고 슬픈 날이었다.
이 날로부터 이 나라는 ‘친일파의, 친일파에 의한,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며, “광복회는 올해부터 이 날을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하고, 매년 이 날을 애상(哀傷)의 날로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임헌영 소장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모든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반민법을 무력화시킨 데서 비롯됐다. 물론, 그 명령자는 이승만이지만 친일경찰들이 대세를 이루어 반민특위를 무장 습격한 경찰의 수치스런 과거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며, “아직도 과연 경찰이 과거의 미망에서 깨어났는지 각성하는 계기를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화, 2020/06/2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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