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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친일잔재조사’ 용역 최종보고서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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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친일잔재조사’ 용역 최종보고서 요지

익명 (미확인) | 금, 2019/02/22- 15:51

 

2019년 1월 9일 광주시는, 김순흥 광주 친일잔재 태스크포스(TF)팀 위원장을 비롯해 팀원 3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광주 친일잔재 조사 결과와 활용방안을 제시하는 용역 최종보고회를 개최했다. 2017년 4월 광주 친일잔재 TF팀이 꾸려진 후, 1년 9개월 만에 이뤄낸 의미 있는 성과였다. 광주 일제 잔재 조사 용역은 광주산학협력단(책임자 김덕진 교수)에 의해서 수행되었는데 이 협력단에는 광주지부 정용진 학술국장과 이지훈 문화국장이 참여하여 조사활동을 벌였다.
총 250여 쪽으로 된 이 보고서는 156명에 달하는 광주・전남 지역 친일인물을 발굴하였고, 이들과 관련된 비석 등 친일 관련 유적뿐 아니라 친일 음악가들이 작곡한 각급 학교 교가도 찾아 냈으며 광주신사, 송정신사의 자취, 전남도청, 광주지방법원, 광주형무소, 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통치시설까지 전수 조사하였다. 이번 조사는 지자체 단위에서는 최초로 결실을 맺은 친일잔재 조사연구 성과물로서 다른 지역에서의 친일잔재 조사연구에 길잡이가 될 귀중한 전범(典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자리에서 ‘광주 친일잔재조사’ 용역 최종보고서의 방대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보고서 정리는 임무성 교육위원이 맡아주었다.

 

 

1. 친일인물 기초 조사

‘친일’·‘친일반민족행위’의 기준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과 〈친일인명사전〉을 기준으로 정함.
광주·전남 지역 친일인물 명단은 다음과 같다.
광주지역 출생·출신 인사 13명, 전남지역 출생·출신 인사 143명 등 총 156명 발굴함.
분야별 대표적 친일인물로 경찰분야는 전라남도 역대청장 박승관을 비롯한 6명, 광주경찰서(현 동부서) 역대 경찰서장 심형택을 비롯한 3명, 광주 광산경찰서 역대 경찰서장 2명. 사법기관은 광주고등법원 제3대 법원장 방준경,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제5대 지원장 이수현, 박승준을 비롯한 광주고등검찰청 역대 고검장 3명, 광주지방검찰청 역대 지검장 양정수. 관료분야는 윤웅렬을 비롯한 전라남도 관찰사 8명(1896~1910), 원응상을 비롯한 전라남도 도지사 5명, 홍난유를 비롯한 광주군수 2명. 교육분야는 전남교육감 안용백, 전남대학교 총장 김준보,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장 조정두, 정광고등학교 교장 임석진. 예술분야는 현제명을 비롯한 관내 학교 교가 작곡가 4명. 경제분야는 국방금품 헌납자 백낙승.

2. 친일인물 관련 잔재 기초 조사

친일잔재 기초 조사 결과 광주공원 사적비군의 비석 주인공 혹은 비석 찬자(撰者)로 다수의 친일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관찰사 윤웅렬 선정비, 관찰사 이근호 선정비, 광주군수 홍난유 선정비, 광주향교 비각, 박봉주가 찬한 광주향교비각중건기, 원효사 부도전 송화식 부도비·부도탑, 너릿재 유아숲공원 서정주 〈무등을 보며〉 시비 등이다.
그 밖의 친일인물 관련 유산으로 광주광역시 남구의 양파정이라는 누각의 현판에 정봉현의 상량문, 여규형, 남기윤, 정윤수의 시문이 적혀 있다. 또한 광주광역시 서구 습향각의 현판에 전라남도 보성군수를 지낸 신철균과 전라남도 광산군수를 지낸 남계룡이 쓴 시문이 적혀 있다.
각급 학교 교가에서 친일잔재를 확인할 수 있다. 현제명은 전남대학교, 광주숭일중・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했다. 김동진은 호남대학교, 서영대학교, 광주 서강중·고등학교, 광주금호중앙중·여자고등학교, 광주대동고등학교, 동강대학교, 광주동신중·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했다. 김성태는 광주광덕중·고등학교 교가, 이흥렬은 광주제일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했다.

3. 식민잔재 기초 조사

식민잔재는 군사시설에 많이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광주지역에 만들어진 다양한 군 관련 시설물은 다음과 같다.
벽진동 사월산 지하시설(동굴)은 일본이 서구 상무지구에 광주비행장을 건설하여 공군기지로 활용하려 하였으나 활주로 일부만 건설하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무산되었으나 폭탄을 저장하려는 목적에서 근로보국대가 동굴 3개 건설했다는 지역주민의 증언이 있음.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주변 지하시설(동굴)은 4개의 콘크리트 동굴로 연료저장고 용도로 건설됨. 양림동 지하시설(동굴)은 방공호로 건설되었으나, 중앙 광장은 완성 못하고 4개의 입구가 별도의 동굴로 남겨짐.
남광주시장 지하동굴은 중요 일본인들의 대피시설로 추정됨. 그 밖의 각종 군부대 시설로 송정리에 광주사관구 치중병보충대가 주둔한 군부대, 광주비행장, 시내 곳곳의 수비대 시설이 있음.
통치시설은 일제 강점기 동안 광주지역에 만들어져 통치에 활용된 시설물. 광주시 구강공원 일대의 광주신사는 1917년 설립. 광복후 시설물은 모두 파괴되었으나, 광주공원 입구 계단과 중앙광장에서 현충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그대로 남아 있음. 송정신사(현 금선사)는 광주시 광산구 송정공원로에 있던 신사. 현재는 배전과 신주(신관)사무소 건물이 남겨져 대한불교 조계종 금선사의 불전과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음. 송정신사의 참계(參階)는 도서관 계단으로 활용되고 있음.
‘황국신민서사’가 새겨진 충혼탑은 ‘나무아미타불’탑으로 변형됨. 또한 금줄 쳐서 특별 관리하던 신목, 배전으로 향하는 참도, 신사 신앙심을 표현하는 석등롱 기단부 등이 남아있다. 이외에도 1930년에 완공된 전남도청, 광주지방법원, 광주형무소, 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통치시설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광주지역에 만들어진 산업시설 및 수탈시설도 다수 있다.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한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 공장. 그러나 양동 금호아파트 단지 내에 전남도시제사 공장 굴뚝은 남아있음. 학동 삼익평화맨션(아파트) 자리에 가네보방적(鐘紡)주식회사 제사공장이 설립되어 해방후 전남방직주식회사가 되었다가, 1961년 일신방직과 전남방직으로 분리됨. 전남방직 대표 김용주는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 사업부장을 지내며 활발한 친일활동을 함. 현재에도 일신방직 화력발전소, 물탱크, 보일러실은 잔존함.

4. 기초조사 활용방안

친일잔재 처리 방안 선례에는 조선총독부, 친일파 안용백 흉상, 친일 군인 김백일의 지명 ‘백일’과 같이 철거·폐기 사례가 있다. 보존‧활용의 사례로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목포지점의 근현대사기념관으로의 리모델링과 이근호, 조예석, 이범익, 이두황비 옆에 친일행적을 실은 설명문이나 단죄문을 설치하는 사례가 있다.
광주 식민잔재 처리는 다음의 방법으로 시행할 수 있다. 먼저 폐기하는 경우는 당위성이 있고, 지역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 친일파의 이름이나 호를 딴 지명, 친일파가 작곡·작사한 교가 등이 해당한다. 다음은 보존(안내와 고발)하는 경우로 식민잔재 중 폐기가 곤란하거나 혹은 폐기로 얻어지는 이익보다 보존이나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큰 경우다. 반면교사의 역할을 기대해야 한다. 친일 인사와 관련한 비석 및 기념물, 친일 관련 잔재물, 식민 잔재물 등에 안내판이나 단죄문을 설치하는 방법이다.
광주공원‧광주향교‧원효사 비석, 정자 현판 등은 보존 및 활용을 제안한다. 이들을 기존 공간에서 철거하고 별도의 ‘친일 단죄의 공간’에 모아 단죄비를 통해 친일행적을 설명하여 철거의 당위성과 보존의 교육 효과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광주공원 옛 광주신사 계단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에 대한 다양한 자료가 첨가된 안내판을 설치한다. 송정공원 금선사는 옛 송정신사 배전 건물 등을 일제 신사참배에 대한 역사 교육장으로 만드는 것을 제안한다. 송정공원 ‘나무아미타불’탑은 ‘친일 단죄의 공간’에 여타 비석 등과 함께 파괴·전시하여 교육의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 더욱이 ‘나무아미타불’탑은 뾰족한 사각뿔 모양의 일본식 충혼탑의 모양을 본땄는데, 일명 ‘신도형’이라 불린다. 광주의 〈충의비〉, 〈무양서원 여생비〉,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 주변 안내비, 〈경열사 복원기실비〉, 〈충혼위안비〉, 〈박석현 목사 순교비〉와 해남의 〈기미독립선언기념비〉, 무안의 〈항일독립유공인사 숭모비〉와 〈3・1독립운동 무안의적비〉, 화순의 〈호국경찰관충혼불망비〉 등 특히 항일운동이나 독립운동, 항일애국지사 기념비 등에 일본식 충혼탑을 세우는 것은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자문을 구한 후 일본 식민잔재로 확정된다면 비슷한 양식의 비석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광주뿐 아니라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해나갈 필요가 있다. 더욱이 일제 식민지배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단순히 그 모양을 모방한 경우라도 모양 변경을 유도하여 일본식 충혼탑 모양을 지양해야 한다. 전남도시 제사주식회사 굴뚝은 철거는 어렵고 일제식민지시대 산업시설에 대한 안내문 부착이 필요하다.
친일인물이 작곡한 교가는 교육청과 연계해 변경을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가 이외에도 학교 상징물(교기, 교목, 교표 등)에 담겨있는 식민잔재에 대한 현황을 파악하고, 문제가 있는 경우 시정 조치가 꼭 필요한 상황이다. 특히 각급 학교에 교목으로 많이 심겨져 있는 ‘가이즈카향나무’(왜향나무)는 다른 나무로 교체하는 것이 꼭 필요한 실정이다.
도청, 시청, 교육청, 법원, 경찰서, 대학 등 각급 기관의 홈페이지 등에 친일인물이 소개되는 경우 그들이 친일인물임을 표시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친일인물’이라는 표시와 함께 더 알고 싶은 사람은 링크를 통해 별도 소개 페이지로 유도하고 여기에서 친일 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단죄비’ 개발이 시급한 실정이다.
화정동 ‘백일’지명 잔재 처리는 관청에서 처리하는 부분에서는 대부분 변경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민간의 상호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백일’지명 잔재는 간판교체 비용지원 등의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이 밖에도 불명예스러운 역사가 담긴 현장이나 흔적을 보존해 후대에 교육자료로 활용코자 하는 네거티브 유산의 활성화와 네거티브 유산을 견학하며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기획한 다크투어리즘 추진 등의 활용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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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조정래 감독

 

인터뷰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의 흥과 한이 다시 울려 퍼진다. ’ 작년 7월, 코로나19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독창성과 풍부한 볼거리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 <소리꾼>이 <광대>라는 이름의 ‘감독판’ 영화로 다시 돌아온다.
감독판이니 만큼 이전 개봉작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서사들이 과연 어떤식으로 가미되었을지, 연출자의 시선을 따라 가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포인트다. 연구소에서는 오는 9월 전격 재개봉을 앞두고 전국을 돌며 시사회를 진행하고 있는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의 조정래 감독을 만나 보았다.

● 개봉 1년여 만에 ‘감독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나?

● 일단 나부터가 판소리 고수(鼓手), 즉 국악인 출신이다. 인간문화재이신 정철호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이수자 자격까지 얻었다. 대학교 시절 영화 <서편제>를 보고 국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거의 미쳐있다시피 했던것 같다. 졸업 후 ‘바닥소리’라는 단체를 만들고 전국으로 공연을 다닐 정도였
으니까.(웃음) 어쨌든 대학교 때 판소리를 주제로 한 단편시나리오를 하나 구상했는데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모태가 된 ‘회심곡’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다. 영화 <귀향> 역시 판소리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나눔의 집’과 수요집회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판소리 공연을 나가게 되면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판소리는 영화감독인 나 스스로의 서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콘텐츠다. 이런 판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 <소리꾼>, 게다가 그걸 감독판으로까지 선보일 수 있게 됐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기존 개봉작에 비해 소리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장면이나 음성, 관련 이야기들이 다수 살아났다.

● 영화 기획단계에서는 ‘남북합작영화’로 추진되었다고 들었다. 특별한 준비과정이 있었을 것 같은데?
● ‘남북합작’이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데 중요한 포스트를 차지한다. 제작 초기 단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울과 평양 동시개봉을 준비했을 정도다. 지금이야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지만 영화를 기획할 2018년 당시만 해도 평창올림픽과 4.27 판문점선언을 계기로 남북 간의 평화
무드가 펼쳐지던 시기였다. 나 역시 그 바람을 타고 그해 11월 당시 김덕룡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방북단에 함께했었는데 바로 그때 영화의 북한 로케이션 기회를 얻게 됐다. 방북 기간 내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준비해간 <광대> 제작계획과 시나리오 등을 소개하고 다녔는데 다행히 북측 주관 단체에서 관심을 가져줬다. 어느 날 새벽 호텔로비로 나오라고 하더니 시나리오를 소개해보라고 하더라.(웃음) 그후로 남북합작영화 계획이 급물살을 타게 됐고 귀국 후에는 협의를 진행해보자는 연락이 북측으로부터 왔다. 그때가 2018년 12월경이었다. 협의는 중국 북경에서 남북 측 관계자가 만나 이뤄졌는데 우리가 쓴 제작 계획서를 북한 측에서 따져보고 실행 가능한 부분을 검토하는 형식이었다. 협
의 과정 내내 북측은 대단히 진중한 태도로 임했다. 단 한 줄도 그냥 넘어가는 일 없이 꼼꼼하게 묻고 가능 여부를 검증하더라. 시나리오의 취지는 물론이고 촬영 장소는 어디로 하는지, 어떻게 이동하는지, 엑스트라는 어떻게 지원하는지 등등 … 합의서만 해도 10번은 수정한 것 같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꼼꼼하고 진지한 북측의 태도 덕분에 이 영화의 남북합작이 성사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래서 영화 촬영기간 중 보름에서 한 달 정도를 북측에서 촬영하고 엑스트라까지 지원받기로 합의됐었다. 다만 영화 메인 캐릭터 중 한 명을 북측 배우로 하자는 제안은 거절당했다. “북한에서 영화는 사상이란 말이오!” 라며 단호히 거절하더라. (웃음) 아참, 이 만남은 물론 통일부의 정식허가를 받고 이뤄진 것이다. 귀국보고도 꼼꼼히 했다.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포스터

● 그러나 2019년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부터는 남북관계가 급속히 얼어붙었다.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

● 맞다. 개인적으로도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하노이 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야심차게 기획했던 북측 촬영이 무산됐다. 최대한 남북합작영화로 완성을 시키고 싶었기에 긴장이 완화되는 시점을 기다려보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속절없이 시간이 가고 2019년 여름이 지나면서부터는 더 늦어져서는 이도저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결국 남한만을 무대로 영화를 찍게 됐다. 정말 아쉬웠다. 등장인물들이 한반도 강산을 방랑하는 로드무비적인 느낌이 중요했는데 남쪽의 풍경만으로 묘사해야 했으니. 최후의 수단으로 북측에 사전 답사를 가서 촬영한 영상(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이라도 써보려 했는데 그 시도조차 무산됐다. 아무리 자연풍경이라지만 남북관계가 워낙 안 좋은 상황인지라 북한과 관련된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었다. 색안경 낀 여론몰이에 당할 수도 있고 영화 흥행에도 타격을 받을 거라는 우려들이 많았다. 괴로웠다. 주위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의 의견이기에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었던 거다. 그래서 2020년에 개봉한 <소리꾼>은 감독 입장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물론 영화의 작품성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코로나 때문에 흥행은 잘 안됐지만. (웃음) 동경국제영화제, 스
페인 한국영화제, 중동한국영화제 등에 개막작으로 초청됐고 배우들의 연기력도 주목받았다.

● 말이 나온 김에 감독판 <광대>와 기존 개봉작 <소리꾼>의 차별점을 이야기해 달라

● 아까 잠시 언급했지만, 기존 개봉작에서는 담지 못한 사전답사 영상, 북한의 자연풍경 영상들이 이번 감독판에는 전부 녹아들어 있다. 사전답사 당시 묘향산부터 황해도를 돌면서 북한의 풍광명미(風光明媚)를 찍어놨었는데 그걸 잘 편집하여 영화의 배경으로 대폭 활용했다. 이런 측면에서 <소리꾼>은 감독판인 <광대>에 와서야 ‘남북합작’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 이 영화를 봤을런지 잘 모르겠으나 만약 볼 수 있다면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을 봐줬으면 좋겠다. 또 하나의 차별점은 비주류의 이야기, 즉 기존 영화에서 생략됐던 조연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났다는 점이다.
한 예로 <소리꾼>의 광대패들에 대한 이야기를 완결성 있게 보강했다. 그리고 한국판 레미제라블 같
은 느낌을 조금이라도 살려보고자 민중의 저항적 측면, 혁명적이고 반봉건적 요소도 조금 강화시켰다. 물론 이런 부분들은 재촬영을 한 것이 아니라 기존 개봉작에서는 생략됐던 부분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배우들, 이유리 씨나 김하연 양(아역배우)이 노래하는 장면도 좀 더 추가했다. 그러다보니 러닝 타임이 좀 길어졌는데 시청각적 감상이 풍부해지고 서사의 흐름을 빠르게 하는 것으로 보완해보려 했다.

● 감독판 개봉을 맞아 공개할 수 있는 촬영 에피소드가 있다면?

● 2020년 개봉 뒤에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학규(극중 주연)’가 피투성이의 몸으로 최후의 판소리를 하는 장면을 많이 말씀해주시더라. 실제로 그 장면은 현장에서도 굉장히 깊은 울림을 줬다. 괴산에 있는 세트장에서 촬영했는데 매서운 겨울 날씨로 입과 손이 얼어붙은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완전히 몰입해줬다. 영화상 어떤 사운드 효과도 주지 않고 오로지 현장음만으로 소리를 전달한다는 원칙으로 촬영했기에 ‘학규’ 역을 맡은 이봉근 배우로서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혼신을 다해 소리를 내줬다. 그 진심이 전해졌던지 당시 세트장에 있는 배우와 스텝들이 그 장면을 촬영하며 모두 울었다. 곤란했던 것은 악역들도 울고 있어서(웃음). 어쨌거나 바로 그런 혼신의 소리가 판소리의 ‘프로토타입’이 아닌가 생각한다.
극중 ‘청이(아역)’가 강물에 뛰어드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실제 시퍼런 강물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
문에 배역을 맡은 김하연 양의 고생이 많았다. 처음에는 대역을 쓰려고 했는데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전체적으로 배우, 스태프들의 팀워크가 좋았고 협력이 잘 이뤄졌다. 그리고 이건 영화 스토리
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인데 영화에 나오는 전통 공예품, 이를테면 괴불노리개나 복주머
니 같은 소품들은 전통공예작가인 이혜진 님, 내 아내가 직접 만든 것이다.(웃음) 아내가 미술팀 일
원으로 참여하며 많은 도움을 줬는데 한번쯤 소개하고 싶었다.

● 감독판인 만큼 영화를 통해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것 같다.

● 가족의 복원이다.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갈등으로 얽히고설키는 것이 아
닌, 길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이웃들이 점차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남북합작
의 영화를 만들어보고자 시도한 것 또한 바로 그런 지향에서다. 분단된 남북이 ‘가족의 복원’을 이루어가며 통일까지 꿈꾸는 것, 그런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북한에서 촬영한 풍경들을 이번 <광대 : 소리꾼 감독판>에 넣으면서 이런 감정은 더 절실해졌다. 북한의 자연은 아름다우면서도 이질감이 없다. 외국에 온 것 같은 낯선 느낌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어디 자연뿐이겠는가. 북한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직접 대면했을 때 느낀 감정은 그냥 ‘똑같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식, 술을 좋아하는 것, 흥 많고 신명 있는 것 … 다르고 이질적인 것은 우리들의 심리적 거리일 뿐이다. 이렇게 꼭 닮은 자연, 사람을 느끼면서 ‘가족의 복원’에 대한 꿈을 관객 분들과 공유하고 싶다.

 

 

● 조금 이른 감이 있는 질문이지만 혹시 지금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이 있는지? 있다면 간단히 소개를 부탁드리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싶다.

●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일본 홋카이도 조선인 강제노동자와 아이누족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디어는 몇 년 전, 일본 홋카이도에서 <귀향> 시사회를 통해 만나게 된 교수님으로부터 제공받았다. 그 교수님이 식민지 당시, 홋카이도로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노동자들의 사연과 아이누족에 대한 일제의 탄압정책에 대해 설명해주시면서 꽤나 많은 사진과 자료들을 함께 주셨다. 그리고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유골이 묻혀있는 장소들과 아이누 인종연구의 현장 훗카이도대 ‘동물실험실’, 아이누 박물관 등을 안내 받았다. 일본이 조선인과 아이누 인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조선인들이 끌려간 군수공장이나 탄광 등의 실상은 어땠는지, 그곳에서 탈출하려던 조선인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
는지 등등. 그 참상이라는 게 듣기만 해도 괴로운 것이어서 참 많이도 울었다. 그렇게 아픈 감정을 느끼면서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게 됐고 대략적인 뼈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걸 영화로 만들려면 만만치 않은 돈이 필요할 것 같다. (웃음) 아무튼 지금은 <광대 : 소리꾼 감독판> 관련 활동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차차 구체화시켜 나갈 예정이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면 아마 민족문제연구소에도 종종 도움을 요청드리게 될 것 같다. 부족함이 많겠지만 회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기대를 부탁드린다.

토, 2021/06/2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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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지금도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지뢰 !!!

 

이철민 전 고파지부장(현 파주지역신문 <파주에서> 편집위원)

 

 

지뢰 사고,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 6월 4일(금요일) 오전 9시 50분경, 고양시 장항습지에서 습지 정화작업을 하던 50대 남성이 발목지뢰(M14) 폭발 사고로 무릎 아래가 절단되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장항습지는 람사르 습지에 등록된 생태계의 중요 지역으로 인구 100만의 고양은 물론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생물 다양성 보전과 인간의 환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지뢰 폭발은 장항습지의 생태 보전과 정화작업을 진행하던 중 일어난 사고이기에 더욱 안타깝다.
‘지뢰’ 하면은 흔히 DMZ나 민통선 인근 군사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고 정도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지뢰사고는 지금 이 순간 고양, 파주, 김포 등 수도권 일대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휴전선 인근 지역에 지뢰가 매설된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대량 살포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1964년을 기점으로 북한은 휴전선을 넘나들며 게릴라식 도발을 감행하였고, 휴전선의 철책선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이 시절 미군은 이 지역에 플라스틱 재질의 대인지뢰 M14를 대량으로 살포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우리군도 민통선 지역에 M14를 대량 살포한다.
이번에 장항습지에서 발견된 대인지뢰 M14는 강원도 화천, 양구, 인제 등 민통선 이북 지역에 매설해 놓은 이들 M14 대인지뢰가 장마와 폭우 등으로 유실되어 나뭇가지 등에 휩싸여 떠내려오다 장항습지에 가라앉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M14는 그 재질이 플라스틱이어서 폭우에 유실되면 땅으로 가라앉지 않고 나뭇가지 등과 함께 떠내려 오면서 한강 하류의 강기슭에 머무를 확률이 높다. 장항습지 지역은 하루 2회 서해안 밀물이 올라오다가 신곡 수중보에 막혀 물살이 머무는 곳으로 김포지역보다 수심이 얕아 플라스틱과 스티로폼 등 생활 쓰레기들이 갈대 및 버드나무 사이로 밀려와 쌓이는 곳이기도 하다. 민통선 지역에는 한국군과 미군이 매설한 M14 이외에도 북한군의 목함지뢰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목함지뢰는 평화의 댐, 화천댐, 소양강댐, 팔당댐 등 강물의 낙차가 심한 댐을 거치면서 목함지뢰 내부의 폭발장치가 분해되어 한강 하류에 이르면 나무상자만 떠내려 올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이에 비해 플라스틱 재질로 가볍고 작은(지름 4.5센티, 두께4센티 정도) M14는 폭우에 유실되어도 분해되지 않고 떠내려와 갈대밭이나 버드나무 가지 등에 걸리거나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다음은 최근 2년 동안 발생한 M14 지뢰사고 내용이다.

2019년 8월 29일 : 김포 해병 2사단 담당 장교(중위)가 철책선 바깥 갈대 제거작업 수행 중 지뢰폭발사고로 왼쪽 발목 절단

2020년 7월 4일 : 김포대교 상류 고양시 한강변에서 낚시하던 시민 지뢰폭발 사고로 다리 절단

2020년 9월 10일 : 강원도 인제군 12사단 이모 중사 수해복구 철책작업을 수행하던 중 지뢰폭발 사고로 발목 절단

2021년 6월 4일 : 고양시 장항습지 정화작업 중 민간인 지뢰폭발 사고로 오른쪽 발목 절단

가장 넓은 지역에 매설된 대인지뢰, M14

우리 국민들은 지뢰 폭발 사고가 발생하면 북한군의 짓으로 알고 있으나 지뢰 폭발사고의 90% 이상은 미군과 한국군이 매설한 대인지뢰에 의한 것이다. M14 대인지뢰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생산되어 DMZ 지역의 남방한계 철책선이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던 시기에 북한군의 DMZ 도발을 방어할 목적으로 약 1,300개소에 약 40만 발을 매설하여 놓았다. 한마디로 한반도 곳곳이 지뢰밭이 되어버린 것이다. 1960년대에는 미군이, 1970년대에는 한국군이 주도적으로 매설한 이 지뢰는 폭우가 내리면 빗물을 따라 강과 바다로 떠 내려와 무고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괴물이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군인과 민간인 지뢰사고자 약 6,000여 명 중 90%가 M14 대인지뢰 폭발사고 피해자이다. M14 대인지뢰는 누군가 제거하지 않는 이상 혼자서 없어지지 않는다. 

 

민통선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지뢰 매설 경고판(한국지뢰제거연구소 제공)

핵과 더불어 20세기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유해한 무기 중의 하나이다. 대인지뢰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던가 다리를 절단시키거나 동물의 목숨을 앗아가야만 자신도 소멸되는 아주 비열한 살상 무기이다.
현대식 첨단 무기의 발전으로 대인지뢰가 적의 침투를 저지하는 효과는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한군이 휴전선을 넘나들며 도발하던 1960년에는 대인지뢰가 적의 침투를 저지하는 효과가 높았다. 그러나 이제 대인지뢰는 전방에 근무하는 우리 군장병, 그리고 후방 국민들의 목숨과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대인지뢰 전면 사용금지 협약에 가입해야 지뢰는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1983년 12월 특정 재래식 무기의 사용금지 및 제한에 관한 협약(CCW 제1의정서)에는 가입하였다. 그리고 1996년 9월 재래식 대인지뢰 전면 사용 금지 협약이 ICBL(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에 의해 발효되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와 미국은 북한과 군사적 대치 상황을 이유로 이 협약에는 가입을 유보하고 있다.
국내의 대인지뢰 금지운동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가 주축이 된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가 국내 대인지뢰 피해자 실태 조사와 특별 보상법을 추진하고 있으나 국방부의 비협조로 법 제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뢰 문제는 이제는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특히 민통선 지역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파주는 지금도 지뢰의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이다. 지뢰 폭발사고의 근본적 해결책은 개인적 차원에서 조심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다. 지뢰 문제를 공론화하고 여론화하여 군과 자치단체는 물론 지역 주민과 전문가, 정치인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법제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토, 2021/06/26-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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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시민역사강좌 열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민간연계 시민대학에 3년 연속으로 선정되어 시민역사강좌를 개최하였다. 6월 29일부터 9월 14일까지 3개월 간 진행되는 시민역사강좌는 ‘프로그램Ⅰ: 내일을 여는 선언-우리시대 표상이 된 가치들과 그 역사’ 5꼭지와 ‘프로그램Ⅱ: 한일역사부정론의 궤변’ 5꼭지로 구성되며,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강의장에서 온라인 ZOOM
화상강좌로 진행하고 있다. 수강생은 일반 시민과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2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 분포를 보인다.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강의지만 꾸준하게 매주 30여 명이 참여하여 시민강좌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프로그램Ⅰ은 노동, 여성, 난민, 동물생명권, 지역을 주제로 한국현대사에서 변혁을 위해 외쳐진 각 분야의 선언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시대가 현재 지향하고 있는 다음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8월 17일부터 진행할 프로그램Ⅱ의 기획 의도는 현재의 일본과 한국에서 나타나는 역사부정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자행된 강제동원의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을 이열치열로 이겨내려는 참여자들의 열기는 우리 사회현상의 변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시민사회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실천적 움직임으로 승화하고 있다.

화, 2021/07/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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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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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집는 듯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1년 365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구곡을 끊어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간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 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區) 안에 있다.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당시 코뮨 때에 희생된 5천여 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 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1927년 국민당의 쿠데타로 공산당이 궤멸되고 또한 반군벌 반봉건세력이 무너질 때 조국의 독립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중국인민은 그들 나름대로 지방군벌이 득세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 한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국민당의 배신으로 멀어져간 조국독립에의 꿈이 광저우 봉기의 시발점이었다.
그즈음 나는 김산의 광동에서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행을 하는 중에 있었다. 1927년의 김산 역시 이곳 기의(起義)에 참가를 하였었다. 그들은 장개석 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광저우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잠시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점령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장개석 군대와 진형명 군대가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간 150여 명의 조선인 동포들을 ‘물에 녹은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피해 층계를 내려와 찾은 곳은 팔각정자였다. 왠지 빗소리에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던 음악소리가 연못을 지나갈 때는 더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왼쪽) 조우원용과 천티엔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오른쪽) 혈제헌원 정자

연못가의 녹음으로 가려진 곳이 음악소리의 발원지였다. 소리는 울부짖듯 한꺼번에 내딛다가, 흐느낄 듯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듯 하고 다시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흐르는 곡조의 유장함이 더해지고 종국에는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내는 소리로 마감되었다.
조우원용(周文雍)과 천티엔쥰(陳鐵軍)의 죽은 시신은 그렇게 양쪽의 연못에 버려지고 묻혔다. 1927년 11월, 남창(南昌) 봉기에 이어 광저우에서 봉기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나중에 봉기의 주모자들을 체포할 때 이들도 잡힌 것이다. 봉기가 실패한 결과는 5천여 명의 목숨이 조선에서 온젊은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조우원용 23세 그리고 천티엔쥰 24세, 그들은 처형되기 직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의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기념한 정자(血祭軒轅亭)는 1957년에 세워졌다. 연못은 당시의 처형장이었으니 이곳에서 죽어간 것이다. 끝간 데 없이 허공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는 사실은 그때 죽은 사람들과 조우원용 그리고 천티엔쥰의 진혼곡이었음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자 곁에 세워진 그 두 사람의 동상. 약간은 머리를 숙인 듯, 조우원용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천티엔쥰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호수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커다란 정자는 봉기에 참여한 150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4년 전, 나라가 망하고 설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젊음들이 해왔던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대학가는 뒤숭숭하였다. 그러다가 5월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끌려가고 실종되었으며 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은 한때 은행직원이었다. 영어도 유창했던 그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같이 야학을 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하였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혁명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피와 땀을 요구하였다. 절망과도 같은 삶을 개선해 보고자 죽음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부르고 잊지 못한다. 선각자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명들이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꽃처럼 사라져 갔는가. 여기에서 ‘물속의 소금’ 그리고 ‘봄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이념과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편 혈제헌원정의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그리고 광주의 윤상원과 박기순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남겨져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 모두는 이름을 남기건 남기지 못했건 모두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누군가 이곳 정자를 낀 연못을 돌 때 들리는 노랫가락이 진혼가임을 안다면 한줌의 꽃이라도 그들을 위해 뿌려주지 않겠는가,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윤상원과 박기순 그리고 남의 나라 혁명에 가담하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조선의 젊은 혼들에게.

토, 2021/08/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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