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임종국,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지역

임종국,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익명 (미확인) | 금, 2019/02/22- 16:22

임종국 선생의 생애를 온전하게 재구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선생에 대한 사적인 기록이 적은 데다 자료가 없는 시기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그동안 발표되었던 선생의 글을 최대한 수집해서 단편적이나마 선생의 생을 더듬어 보려 한다.

 

어린 시절
임종국은 1929년 10월 26일 경남 창녕군 창녕읍에서 임문호의 4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임문호는 천도교 청년 당수와 조선농민사 사장을 지냈고, 당대 대표적인 민족계몽운동가로서 오늘날 흔히 말하는 우파 민족주의자 가운데 중심인물이었다.

일곱 살 때인가, 형무소에 아버지를 면회 간 적이 있다. ‘의식 있는 조선인’이었던 까닭에 (아버지는) 그 후에도 한두 번 더 형무소를 드나들었다. 그러나 전쟁 말기 젊은이들에게 ‘지원병으로 나가라’는 연설을 했다. 그 당시 상황이 어떠했든 이것은 친일행적임에 틀림없다.(<민족정기를 살려야 합니다>, 월간조선 서병욱 차장 대우와의 인터뷰)

아버지의 이런 행적이 소년 종국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어릴 때 일이었기에 종국의 의식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식의 저 밑 어딘가에 아버지의 흔적이 있었을 것이다.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의 천도교단 내의 직책이 바뀌어 서울로 이사하면서 종국은 재동보통학교를 다녔고, 10대를 신설동에서 보냈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우리 집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만성루(萬盛樓), 오른쪽에 죽정(竹井)이라는 일인이 살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 집 기대(畿代)라는 소녀와 가까워져서 흔히 연정 비슷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다. 근로동원을 가서 꾀를 피우다 으레 “가찌노고다까라”(조선놈의 씨알머리니까) “아레 요보상다요. ”(저건 조선놈의 종내기야)라는 욕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검도하며 총검술을 배웠다. 배낭에 99식총과 대검을 찬 상급생들이 하늘만큼은 장해 보였다. ”조센진또 멘따이와 다다께바 다다꾸호도아지가 데루“(조선놈하구 명태는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맛이 좋아진다)라는 그 유명한 격언(?)을 들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났다. 배급쌀이라고 쌀 반 콩깨묵 반이 나오더니 나중에 쌀알만큼씩 부스러뜨린 국수 종류가 배급되고, 그러자 미구에 해방이 됐다고 세상이 벌컥 뒤집혔다. 나는
해방이 뭔가 하면서 덩달아 좋아했다.
이때 내 나이 17세. 하루는 친구놈한테서 김구 선생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에!~ 너 그, 김구 선생이라는 이가 중국사람이래!”
“그래? 중국사람이 뭐하러 조선엘 오지?”
“이런 짜아식! 임마 것두 몰라! 정치하러 온대.
“정치? 그럼 우린 중국한테 멕히니?”
지금 나는 요즘의 17세에 비해서 그 무렵의 내 정신 연령이 몇 살 쯤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식민지 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번 회의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자화상> 중에서)

1966년 〈친일문학론〉을 출판하면서 쓴 글이다. 민족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자신의 무지와 그 원인을 드러냄으로써 일제의 민족의식 말살정책과 그에 협력했던 사람들의 과오를 비판하기 위해 극적인 기법을 사용한 것이리라. 해방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다시 들어보자.

“우리는 졌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예, 조선이 독립하게 돼서 기쁩니다.
이런 소리를 10일 전 그러니까 8월 14일쯤에 했다면 영락없는 헌병대 영창감이었다.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일본군의 시선에 겁이 나서 나는 얼른 둘러댔었다.
“하지만 애써 싸운 당신네가 졌다는 것을 정말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군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씹어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20년 후에 만나자!”
(<술과 바꾼 법률책>, 『망국을 할 것인가』)

이 회고는 당시 경험과 훗날의 인식이 합쳐서 재구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일본이 다시 올 것이라는 인식은 1965년 대일 굴욕외교(한일협정)을 겪으면서 위기의식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위기의식은 그를 ‘친일문제’라는 지난하고 고독한 세계로 들어서도록 했다.

 

방황하는 청년
청소년기의 임종국에 대해선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게 없다. 다만 이 시기에 그는 시와 소설을 배우는 문학가 지망생이었음은 분명하다. 청년 임종국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된다.
전북 장수군에서 경남 함안군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육십령 고개가 있다. 이곳에서 그는 인민군에게 잡혀 안의로 가는 수십 리 내리막길을 인민군의 짐을 진 채, 행렬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길가에 즐비한 수십 구의 아군 병사 시체를 보면서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위정자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국방과 정치를 어떻게 다루었기에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도 못 돼 이곳 경상도까지 밀린단 말인가. 점심을 평양, 저녁을 신의주서 먹는다더니, 누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죄없는 청춘들만 저렇게 죽어 자빠져야 하는 것인가. 안의에 이르러 인민군 여덟을 무밭에 끌어 묻어준 후 나는 인민군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낙동강을 넘으면 고향인 창녕 땅. 가도 가도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나는 줄곧 분노로 가슴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술과 바꾼 법률책>)

피난살이 속에서 문학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고려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 시절 흔히 그렇듯이 가난한 수재라면 출세를 위해 고시라는 유혹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시 준비를 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작용했다. 육십령 고개에서 본 젊은 죽음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고시에 합격하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칼을 휘둘러 나라를 좀먹은 버러지들을 무청 자르듯이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고시 준비의 한 이유였다.

시골에 처박혀서 여섯 달 정도 비지땀을 흘리면서 민법, 형법 총론, 각론 8권을 송두리째 암기하였다. 판사든 검사든 이미 반 이상은 맡아 놓았다고 기고만장해서 다시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서울은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폐허의 도시이자, 먹고 잘 곳조차 마련되지 않은 수도였다. 팔자 좋은 친구들은 인삼, 녹용을 달여 먹으면서 고시를 준비했지만, 그는 밥 세끼 거르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더구나 한 달에 책 한 권을 완전히 외다시피 하는 강행군을 계속하니 체중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빈 강의실에 앉아서 형사소송법의 조문을 외면서도 마음은 끼니 걱정, 잠자리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운 좋게 절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고아 아닌 고아로 숙식하던 것도 불가능하게 된 데다 등록금이 없어 학교마저 휴학하게 되었다. 판검사가 되어 썩은 세상을 바로잡아 보겠다던 청년의 꿈은 끝내 잠자리와 끼니 걱정으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을 때 청년의 가슴속에서 중뿔난 소리가 들려왔다. 타고난 오기라 할까, 반골의 소리가 그를 유혹한 것이다.
권좌에 앉아서 많은 사람을 머리 숙이게 하지 못할 바에야, 내가 많은 사람에게 머리 숙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권력을 내 것으로 못 한다면 대신 자유를 가지면 될 게 아닌가. 권좌에 연연하고 뇌물에 머리 숙이는 치사한 인간이 되느니 철저하게 자유인으로 살자.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뜬구름 한 조각이 되어 권력 대신 하늘만한 자유를 내 것으로 하면서 사는 거다.(<술과 바꾼 법률책>)

이렇게 해서 그는 신주 단지 모시듯 하던 법률책을 술과 바꿔 버리고 말았다. 대신 중학 시절의 꿈이었던 문학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말처럼 ‘돌아온 탕아’가 된 것이다. 탕아의 길동무론 이상(李箱)이 함께 했다. 퇴폐와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를 위로한 것이 이상이었다. 〈민법총론〉 500 페이지를 한 달 만에 외워버린 천재(?)가 밥과 잠자리 걱정 때문에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자신이야말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아닌가. 이상이 죽은 지 20년이 되었건만 이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하나 없는 때였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이상을 발굴해서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스로 날지 못한 자신의 꿈을 이상을 통해서 실현시켜 보고자 했음일까.
〈이상론〉을 쓰고 그의 작품을 모아 〈이상전집〉 전3권을 출판하였고 틈틈이 써놓았던 시들을 발표하여 문단에 얼굴을 내민 후 몇 해 동안 술도 약간은 마셨다. 그러나 묵은 신문 잡지에서 이상의 작품을 뒤지면서 알게 된 1930년대의 사회는 그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공해 주었다. 작품인식의 한계성 문제, 즉 한 시대의 작품은 그 시대의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완벽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상투의 시대와 사회를 모르면서 상투꾼들의 생활감정을 말하는 한 결국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밖에 될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문학과 사회의 관련성, 또 그것이 문학사회사의 문제로 발전하면서 그는 이것을 평생의 연구과제로 삼은 것이다. 이리하여 1960년대 초엽에 그는 향토지 경남문학에 <물레방아론>을 발표했다. 문학사회학적 방법으로 나도향의 <물레방아>를 분석한 평론이다. 그는 이런 방법을 신문학 전체에 적용하여 문학사회사를 쓸 작정으로 본격적인 준비작업을 시작하였다. 1910~1945년의 매일신보를 뒤져서 정치 문화 사회면의 기사색인을 완결한 후, 그 작업을 다른 신문 잡지로 확산 시켜갔던 것이다. 2~3년 걸려서 이 작업을 하던 중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 준 사건이 일어났다. 1965년 한일회담이 타결된 것이다.

 

친일문학론 출간, 이후 일제침략•배족사 연구에 전념

1965년에 들어서마자 1월부터 제7차 한일회담이 개막, 6월 한일협정 정식 조인, 8월 한일협정 비준안 국회 통과라는 과정에서 보듯이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대학생들을 비롯한 거국적인 반대투쟁을 묵살하고 정권의 명운을 걸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일사천리로 처리하고 말았다.

20년 후인 1965년 여름,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그 여름은 뜨거운 여름이었다.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더니, 정말 20년 만에 쪽발이 놈들이 다시 몰려오게 되는구나! 그놈들은 일개 병사조차도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는 장관이란 사람이 ‘제2의 이완용이가 되더라도’ 타령을 하는 판이었다. 이완용이가 될지언정 한일회담을 타결하겠다면 그건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한일회담이란 말인가? 
회담이 타결도 되기 전에 그런 타령부터 나온다면, 그것이 타결된 후의 광경은 뻔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밀듯이 일세(日勢)는 침투해 올 것이요, 거기에 영합하는 제2의 이완용이과 박춘금…..얼마든지 또 생각날 것이다. 묵은 친일파들이 비판받는 꼴을 본다면 제2의 이완용과 박춘금이 그래도 조금은 주춤하겠지? 이런 생각에서 나는 『친일문학론』을 쓰기로 작정했다. (중략)
작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다. 2~3년 걸려서 만들어 둔 신문과 잡지의 게재 작품 기타 문화 사회면의 기사색인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별 카드에 옮겨서 찾아 읽고 비평만 하면 됐던 것이다. 그 기사색인은 문학사회사를 쓰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책인『친일문학론』의 기초자료로 요긴하게 전용된 셈이었다. 그 기사색인 덕분에 『친일문학론』은 복사기가 없던 시대라 자료의 상당 부분을 필사로 옮겨 베끼면서도 원고 2천매 탈고까지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일이 끝나면 다른 문화 분야 및 사회 경제 부분을 원고지 각 2천매씩 2권 정도로 계속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집필이 순조로웠던 반면에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문단의 반응은 냉담했고 책은 우선 팔리지 않았다….. 초판 3천 부를 파는 데 10년이 걸리더니 1975년부터 수요가 늘어서 지금 7판째가 찍혀나갔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실록 친일파』)

임종국은 한일협정 체결에 크나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절박한 심정으로 『친일문학론』을 썼던 것이다. 1965년 당시 친일파, 친일문학이란 말 자체가 금기시되는 풍토였다. 이광수, 홍난파, 김은호 등 이름 있는 문필가나 예술인들은 민족문학, 민족음악,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았고 그들에 대한 친일 시비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고 언급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광수, 최남선, 김동환, 모윤숙, 노천명 등 쟁쟁한 문인들의 친일작품을 발굴하고 이를 치밀하게 분석한 그의 고투(苦鬪)는 한국문학사뿐 아니라 한국현대사 연구의 전환을 가져오는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이 책이 서점에 배포되자 국내 지성계는 큰 혼란을 겪었고 매스컴의 인터뷰 요청도 빗발쳤으나 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문학계나 강단에서는 이것을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책의 판매도 아주 저조했다. 하지만 임종국은 이 작업을 하면서 친일파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게 되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민족사를 가장 크게 그르친 자가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말았다. 패주행렬 속에서 본 젊은 죽음들, 그들을 그 꼴로 만든 장본인이 친일파였다. 제2의 매국 반민법을 폐기한 것도 친일파였다. 한말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제1의 매국을 했고, 총독부에 영합하면서 친일을 했다. 해방 후에도 개과천선은커녕 반민법을 폐기하면서, 독재와 부패 끝에 5․16과 (10월)유신을 불러들였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임종국이 존경했던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친일파였고 또 그들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민족정기를 훼손했으니 그들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래서 그는 문단이 싫어지고 시나 소설을 쓰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임종국이 시를 쓰면 옹졸해진단 말야!’
언제던가 조지훈 선생님이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말씀이 내 중뿔난 생각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있었다. 남자 한평생에 붓을 잡았으면 몇 천 장 전적을 쓸 것이지, 원고지 서너 장을 시로 메운다는 것이 따분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서 일제의 침략사와 우리의 반민족사를 쓰자! 이리하여 나는 어느새 이사를 해도 문예지에 주소를 알리지 않는 괴팍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술로 바꾼 법률책」)

임종국은 시인, 문학평론가라는 딱지를 떼고 본격적인 친일․일제침략 연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길은 아무도 밟아본 적이 없는 길이요, 끝을 알 수 없는 미궁이었다.

1970년대로 들면서 나는 『친일문학론』의 계속작업을 조금씩 진행시켜 왔다. 그런데 파고들수록 엄청난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전 2권 4천 매의 계획이 전 8권 2만 매로 늘어나 버렸다. 1년에 2500매씩 써도 8년이니 여생을, 아니 그간의 자료조사기를 15년으로 쳐도 평생을 그 일에 매달린 꼴이 되고 말았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자료수집, 생활 방편으로서의 글쓰기

1970년부터 임종국은 본격적인 자료조사 작업에 들어갔다. 원고료와 인세의 상당 부분을 자료 구입비에 쏟았고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안 다닌 곳이 없었다.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를 비롯한 각 대학 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지에서 매일 살다시피 하면서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어서 일일이 필사했다. 이른바 ‘임종국카드’라 불리는 1만 5천여 매의 친일인명카드는 이때부터 작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친일파 연구는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인 연구였다. 아무리 신빙성 있는 증언이 있다 해도 일제시대 문헌자료에 나오지 않는다면 증거자료로 채택하지 않았다. 연구주제가 친일경력을 파헤치는 것이니 만큼 철저한 고증이 없다면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의 지나치리만치 꼼꼼하고 실증적인 연구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연구결과의 첫 성과는 1977년 8월 <대화>에 처음 게재되고 수정 보강하여 <해방전후사의 인식1>(1979)에 실린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였다. 76쪽에 달하는 이 글은 친일파 연구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논문이라 할 수 있다. 임종국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 일제하 전 분야에서 활동한 친일파들과 친일단체를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10년간에 걸쳐 총독부문서와 관보, 각급 관공서 자료와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신문기사, 삼천리, 동양지광 등 잡지 등에서 모은 자료를 집약하여 전체적인 친일군상의 윤곽을 잡아놓은 것이다. 이 글은 이후 후학들에게 친일파 연구의 전범(典範)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 시기에 남긴 관련 글들은 다음과 같다.
「중추원참의」(<월간중앙>(이하 동일) 1973.5), 「징용」(1974.1), 「학도지원병」(1974.3), 「일제 고등계형사」(1974.8), 「일제하의 인력, 물자 이렇게 수탈됐다(1976.5), 「조선주둔군사령부」(1978.8).
임종국은 고려대학교를 마친 이후 별다른 직장 없이 여기저기 출판사를 옮겨 다녔다. 고시공부때 부실한 식사로 몸이 허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질상 직장생활이 맞지 않았다. 직장이라 할 만한 것은 2년 정도 근무한 신구문화사가 전부라 할 수 있다. 한편 늦게 장가든 임종국은 가솔까지 딸려 항상 생활이 넉넉지 않았다. 그동안 펴낸 책들의 인세와 각종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여 받은 원고료가 수입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침략사와 친일배족사 자료를 수집하는 와중에 틈틈이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요구하는 글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신여성시대의 굵직한 연애사」(<여성동아> 1967.11), 「개화의 발자취-단발령 야화」(<여성동아> 1968.1), 「명기열전-기생풍속도」(<여성동아> 1969.1), 「해방전야-빼앗긴 시절의 이야기」(<여학생> 1971), 「여학생풍물지-품삯 받고 다니던 학교」(<여학생>), 「광고면에 나타난 사회의 변천」(<독서신문> 1971.3.21), 「사회풍속야사-최초의 요정 정문루」(<세대> 1971.5), 「일화로 엮은 돈이야기」(<신여원> 1973.7), 「정절과 슬기의 설화」(<신여원> 1973.12), 「개벽지 야화」(<소설문예> 1977.8),
「윤심덕과 사의 찬미-좌절과 허무의 엘레지」(<여고시대> 1979.4) 등등 다양한 주제의 방대한 원고를 갖가지 매체에 발표했다. 이런 글들이 쉽사리 읽히는 읽을거리라지만 허투루 볼 수 없는 내용이다. 당시 문화사나 풍속사에 대한 이해가 없던 시절에도 임종국은 이런 주제에 대해서 사회문화적 접근을 통해서 그 자체의 사회적 의미를 파헤치는 데 노력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이미 축적해 놓은 문헌학적 자료와 함께 동시대상의 박학한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근대 한국문학에 대한 문학사회사적 분석도 병행해 나갔다. 기존에 발표했던 문학비평을 묶어 <한국문학의 사회사>(1974)를 출간한 이후에도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의 기수-채만식」(1976.11), 「관념적 상상의 문학-전영택의 ‘화수분’과 ‘소’」(1976.12), 「지식인의 비극과 좌절 ‘김강사와 T교수’」(1977.3), 「역사를 통한 현실참여-박종화의 현실과 참여」(1977.6), 「민족으로 일관한 리얼리스트-‘북간도’의 작가 안수길」(1977.7), 「정의와 고발의 농촌작가-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 기타」(1977.12) 등등 한국근대문학의 주요 작가와 작품들을 정력적으로 분석했던 것이다.

 

요산재에서의 왕성한 집필활동

10년간에 걸친 자료수집과 주변 지식 축적을 기반으로 하여 1980년대에 들어 임종국의 연구는 드디어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이 무렵 그는 40여 년간 살아온 서울을 떠나 천안으로 이사했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기도 했고 또한 일제침략과 친일파 연구와 집필에 오로지 전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천안 교외에 외딴집을 짓고 스스로 요산재(樂山齋)라 이름 붙였다. 요산재는 이후 임종국의 영면 직전까지 일제침략사와 친일배족사 연구의 요람이자 산실이었다.

1982년 첫 결실로 <일제침략과 친일파>가 나왔다. 임종국은 서문에서 이 책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일제침략의 근간인 사상침략・자원침략․대륙침략의 세 측면과 그에 관련된 친일상을 기술했으나, 그것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임은 우선에 필자가 잘 알고 있다. 종교침략․문화침략․경제침략․교육침략 기타에 걸친 병자수호조약 이래 70년의 친일을 어떻게 조감 할 것인가? 그야말로 현기증이 날 문제이지만, 이 책이 다룬 세 측면에 대해서만은 그런대로 개요는 서술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제침략과 친일파>는 본문에서 서술한 세 측면을 기둥으로 해서, 종교침략․문화침략 기타가 그 기둥을 보좌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후 1984년에 일제총독부 고관들의 침략 이면사를 다룬 <밤의 일제침략사>를, 1985년에 강화도 조약 이후 70년간 일제의 사상탄압을 연구한 <일제하의 사상탄압>을 출간했다. 1987년에 그는 일제하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72명이 쓴 108편의 친일 글을 엮어 <친일논설선집>을 펴냈다. 머리말에서 그는 과거의 친일논설을 새로이 발굴하여 드러내는 작업의 의미를 “민족의 제단 앞에서 허물 있는 자는 허물을 벗어 도약의 제수로 바칠 것이며, 허물 없는 자는 그것
을 음복하되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썼다. 단기간 이만한 분량의 논설을 엮을 수 있었던 것도 기존의 치밀한 자료 축적 결과였던 것이다.
1977년의 「일제말의 친일군상 실태」부터 1987년의 <친일논설선집>까지 여러 저작과 수많은 논설을 통해 친일문제와 일제침략사를 다루어 왔는데, 뭔가 부족한 점이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친일문제를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기 위해 ‘친일파총사’(전10권)를 구상하였다. 총론, 사상침략과 친일파, 정치침략과 친일파, 해방 이후 친일파, 경제침략과 친일파, 문화침략과 친일파, 만주․중국침략, 동양종교, 서양종교, 사회・교육침략과 친일파로 나누고 총론부터 1권씩 차근차근 쓰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2>를 내놓고 나서 그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다. 원래 건강 때문에 천안 벽지로 이사한 것인데 그동안의 무리한 집필과 어려운 생활형편으로 인해 몸을 돌보지 못해 지병인 폐기종이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지 모를 ‘친일파총사’ 발간을 성사시키고자 그는 몇몇 역사전공자를 접촉하여 공동 연구작업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쓸쓸한 죽음, 새로운 시작

임종국은 결국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환갑을 겨우 넘긴 1989년 11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타계소식을 듣고 그의 빈소에 여러 지인들과 연구자들이 찾아왔으나 그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임종국의 생애는 반골, ‘중뿔난 짓’만 골라하는 삶이었다. 그것은 일체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나왔다.
“이제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 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신라 고구려의 핏줄기인 줄 알았던들 나는!”(자화상, <친일문학론>). 기성의 관념과 지식, 역사 심지어 자신의 의식을 부정하고 나서야 새로운 길이 열렸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부터 그는 각성되었고 그의 각성은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과 새로운 역사 쓰기, 아울러 그에 걸맞은 치열한 삶을 스스로에게 요구했다.
그가 당시 각광받고 있던 독립운동사를 차치하고 민족사의 오욕을 밝히는 친일연구에 몰두한 것은 ‘민족사를 가장 그르친 것은 친일파’라고 한 그의 올바른 역사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숱한 자료를 뒤져서 한 장 두 장 쓴 15,000매에 달하는 친일인명카드는 민족사에 바치는 묘비명이었다. 그의 깊고 넓은 연구 성과는 이후 친일문제와 일제침략사 연구의 밑바탕이 되었고, 일반인들에게 오욕의 역사를 드러내어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게 하는 교과서가 되었다.
선생이 가신 지 16년이 지난 2005년 10월, 화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뒤늦게나마 선생의 지난하고 치열했던 작업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또한 그해 3월 임종국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11월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임종국상’을 제정하여 제1회 수상자를 내었다. 아직도 친일세력이 우리 사회 곳곳에 엄존한 현실 속에서 선생의 유지를 널리 알리고 새로운 민족사를 열어가는 것이 선생께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리라.(2006년 작성)

김민철・박광종 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민주당 민주연구원 국립현충원 이장 추진
“친일인사와 함께 모실 수 없다” 반대 거세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25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독립운동열사 7위선열의 사당인 의열사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문재인 캠프 제공)2017.3.25/뉴스1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복무하며 독립투사 소탕에 앞장섰던 김창룡(1902~1956)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다. 바로 맞은편 묘역에는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모친 곽낙원 여사(1858~1939)와 장남 김인(1917~1945)이 잠들어 있다. 친일논란 대상인데다 백범 암살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을 받는 인물과 독립투사의 유족이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민주당이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김구 선생의 묘소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한다는 구상을 밝히면서 비슷한 우려가 나온다. 민주당 민주연구원의 김민석 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효창공원에 안장된 김구 선생과 윤봉길·이봉창·안중근 열사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8월15일 광복절에 효창공원을 직접 찾아 참배해 임정 법통을 강조한 바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친일인사는 서울에 37명, 대전에 26명이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된 인물 중에는 서울에 7명, 대전에 4명이 묻혔다. 이 때문에 친일인사의 이장을 위해 국립묘지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여당이 임시정부 주석을 예우하기 위해 고민한다는 건 일리가 있다”면서도 “김창룡을 비롯해 친일인사들이 국립현충원에 남아있는데 그곳에 백범을 모시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박 실장은 “역사적폐 청산 차원에서도 친일독재를 반대한 민족인사를 반민족인사와 함께 모신다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이장 반대의사를 밝혔다.

김구 선생은 생전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효창공원 독립운동 동지들 곁에 묻어달라는 유훈을 남겼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김구 선생 외에도 항일투쟁 중 순국한 윤봉길(1908~1932), 이봉창(1901~1932), 백정기(1896~1934) 3의사의 묘소와 유해를 찾지못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가묘도 설치됐다. 이동녕(1869~1940), 조성환(1875~1948), 차이석(1881~1945)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의 묘소도 있다. 이는 모두 김구 선생이 해방 후 직접 조성해 의미가 크다.

이장보다는 현재 효창공원을 성역화하는 게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합당한 예우라는 지적도 있다. 친일인사가 섞여있는 현충원보다 독립투사들만으로 조성된 효창공원이 역사적 성지로서 더욱 상징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출입이 제한되고 일부 부지가 훼손되는 등 굴곡진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 효창공원은 국립묘지가 아닌 사적과 근린공원의 법적 지위로 용산구가 관리 중이다.

친일문제 전문가 정운현씨는 “효창공원은 역사성이 있고 백범기념관도 함께 운영 중이라는 가치도 있다. 백범도 땅속에서 이장을 원치않을 것”이라며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승격해 중앙정부 차원에서 예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nevermind@

<2018-03-01> 뉴스1

☞기사원문: “백범도 친일파와 묻히기 원치 않아”…효창공원 묘소이장 논란

토, 2018/03/03- 02:31
82
0

◀ 앵커 ▶

오는 8월 29일은 한일합병조약문이 발표된 경술국치일입니다.

이날, 서울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개관합니다.

그동안 시민들의 성금으로 개관이 추진됐는데, 식민지 시대 민중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개관에 앞서서 이지수 기자가 미리 다녀왔습니다.

◀ 리포트 ▶

빛바랜 종이에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이 한 자 한 자 적혀 있습니다.

“부모님께오서 양 내외가 걱정없이 사시고 아들도 잘 지내며…”

강제징용 피해자인 김외준 씨가 전쟁터에서 부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입니다.

편지 옆에는 전쟁터에 끌려가 시베리아에 억류됐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규철 씨의 수기가 전시돼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전쟁터로 가야만 하나. 일본을 위해서 죽고싶지 않다…”

벽면 한쪽에는 순사 임명장, 조선총독부 관료 임명장 등 친일파들의 행적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모두 식민지 시기를 겪었던 민중과 후손들이 수십 년 동안 간직했다가 기증한 물건들입니다.

강제징용 피해자나 항일운동가들의 유족들이 활동하면서 모은 자료는 물론, 일본 시민들이 보내온 것도 적지 않습니다.

[이희자/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대표]
“내가 활동을 하면서 나도 나이가 먹어가잖아요. (기록들이) 재탄생을 하게 돼서 나는 정말 30년의 활동이 허무하지 않았고…”

전시된 물건만 4백여 점, 서고에 보관된 기록물까지 합하면 7만 점 가까이 됩니다.

[김승은/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장]
“식민지배의 실상과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가 거기에는 일상적인 민중의 삶도 있고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지난 2007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기 시작해 11년 만에 시민 5천여 명의 기증품과 기금 35억 원이 모여 만들어졌습니다.

박물관은 오는 29일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될 예정입니다.

MBC뉴스 이지수입니다.

<2018-08-14> MBC

☞기사원문: ‘경술국치’ 기록한다..식민지 역사박물관 개관

※관련기사

☞ 경향신문: 일제강점기 역사박물관, 시민 모금으로 ‘첫 개관’

☞ KBS: “치욕도 역사” 시민이 세운 ‘식민지 박물관’ 첫 공개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이끈 이이화 건립위원장 인터뷰 이 위원장
“식민지 시대 아픈 역사 고스란히 알릴 것…청소년 위한 토론장 돼야”

0815-2

▲ 연합뉴스와 인터뷰 하는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촬영 성서호]

 

(파주=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3·1 운동 때 발표한 독립선언서의 원본을 확보했습니다. 일본 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간 이들의 편지나 일기도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어요.”

이이화(82)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은 광복절을 맞아 경기도 파주 자택에서 진행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물관을 소개하며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사 대중화에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 사학자인 이 위원장은 처음 건립위원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고령을 이유로 자리를 고사했지만, 오는 29일 박물관의 정식 개관을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공적 자금의 도움 없이 시민들의 모금과 자료 기증으로 마련된 박물관은 특히, 여러 박물관 중 가장 많은 기증품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이 위원장은 “돈을 주고 사 와도 자료를 못 구하는 마당에 국가 예산도 안 받고 어떻게 꾸릴지 걱정이 컸다”며 “그런데 예상치 못한 호응을 받았고, 여러 곳에서 자료를 희사해 주셨다”고 고마워했다.

0815-3

▲ 순종의 칙유 [민족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그는 “전시 자료 7만 점 정도를 모았는데 국내외 통틀어 7개 정도밖에 없다는 3·1 운동 독립선언서 원본도 있다”며 “강제 징용된 일본군에서 몸에 두르던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적힌 띠는 물론,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글 등의 자료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밖에 식민지역사박물관에는 “한국의 통치권을 예전부터 친하고 믿고 의지하고 우러르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한다”는 내용의 순종 칙유(勅諭·임금의 말씀을 적은 포고문)와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포고문 등 국치의 아픔을 담은 사료가 전시될 예정이다.

0815-4

▲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민족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나라를 팔고 귀족이 된 조선 고위층들이 1910년 11월 부부동반으로 일본을 관광하던 당시의 흑백사진 등을 담은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이나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을 감시·탄압했던 경찰들의 자료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나라를 빼앗긴 시절 민초들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1940년 육군지원병에 끌려갔다가 전쟁터에서 소식이 끊겼던 임용택 씨의 사진부터 1945년 징집된 뒤 관동군 자폭특수대에서 훈련받은 이규철 씨의 육필일기 등은 당시 민중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런 자료들은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들의 유족이 직접 기증한 것이다.

이 위원장은 식민지역사박물관의 의의를 해방 후 7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디딤돌’이라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만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해방 이후 경제 발전상에만 집중했지, 독립운동의 역사를 소홀히 하고 있다”며 “이번에 개관할 박물관은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똑바로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지향점은 과거를 반성하고, 진실을 밝히고 화해하는 것”이라며 “일본과 친일파들이 반성하도록 하고 이후 화해하자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초대 박물관장 제안을 손사래 치며 거부한 그는 앞으로 박물관이 ‘살아있는’ 곳이 되길 바랐다.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강의도 듣고, 토론도 하는 학습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해방이라고 식민지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닌 만큼 자꾸 말로만 떠드는 것보다는 국민이, 특히 청소년들이 많이 알게 해야 한다”며 “기본 성격은 박물관이지만, 참신한 방법으로 식민지 역사를 알리기 위해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경술국치 108주년을 맞은 이달 29일 문을 연다. 2007년 준비위원회 발족 이후 약 11년 만으로, 공적 자금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일반시민 성금과 자료 기증으로 마련됐다.

[email protected]

<2018-08-14> 연합뉴스

☞기사원문: “시민의 힘으로 세운 식민지역사박물관…살아있는 역사 될 것”

수, 2018/08/15- 06:57
82
0

過寒露寄友人

 

霜降丹楓落(상강단풍락)

還鄕與我吟(환향여아음)

爲君新釀酒(위군신양주)

共醉臥空林(공취와공림)

 

寒露를 지나 벗님에게 띄우는 글

 

서리 오고 우수수 단풍도 지면

고향에 돌아와 나와 詩를 읊세

그대 위해 새로 술도 빚었으니

함께 취해 空林에 누워도 보세.

 

<時調로 改譯>

 

霜降에 단풍도 지면 還鄕하여 詩를 읊세

그대 벗님을 위하여 새로 술도 빚었으니

둘이서 함께 취하여 空林에 누워도 보세.

 

*友人: 벗 *霜降: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하나.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

들며, 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다. 10월

23일경이다  *還鄕: 고향(故鄕)으로  돌아옴  *釀酒: 술을 빚어서 담금. 온양(醞釀)

*空林: 나뭇잎이 떨어져 공허한 숲. 또는 인가(人家)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숲.

 

<2018.10.12, 이우식 지음>

토, 2018/10/13- 07:13
82
0

[앵커]

일본 오키나와에서 조선인 묘표가 확인됐다는 소식 어제(15일) 전해드렸는데요.

오키나와 곳곳에 조선인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들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인의 유해가 발굴돼 국내로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유해 반환에 대한 논의도 답보 상탭니다.

윤봄이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오키나와 본섬의 최남단.

패전을 앞둔 일본군이 후퇴해 주둔했던 숲입니다.

미군의 집중 공격을 받은 곳인데,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설수상근무대도 이 일대에 주둔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게 지났지만, 유해 발굴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이렇게 깊은 산 속까지 찾아와 발굴 작업에 힘쓰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손을 놓은 사이, 유해 발굴을 계속 하고 있는 건 자원봉사자 대여섯 명입니다.

[“(뭐가 나왔나요?) 손가락뼈. 아마도 이 부위인가? 손인지, 발인지 아직 확실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발굴된 유해는 오키나와 현에서 임시 보관하고 있는데, 대부분 DNA 확인도 못했습니다.

[구지켄 다카마츠/유해 발굴 자원봉사자 : “지금까지 발견된 유골 중에 조선인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발굴 현장 인근엔 유골 3만 5천구가 묻혔다는 자리가 남아있습니다.

전쟁 직후 농부들이 밭을 갈 때마다 유해가 쏟아져 나와, 이를 한 번에 묻고 탑을 세운 겁니다.

[오키모토 후키코/강제 동원 조선인 연구자 : “(조선인 부대가) 이곳에서 전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인들의 유골도 이 혼백의 탑 아래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미군이 일본군 포로 7천 명을 감시했다는 수용소 자리.

이 해안가엔 지금 마을이 들어섰고 포로수용소 터를 표시하는 비만 남아있습니다.

일본의 한 단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확인한 매장자 명단.

조선인으로 보이는 이름도 여럿 확인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어디에 어떻게 묻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산속부터 해안까지, 오키나와에서 숨지거나 행방불명된 조선인은 최소 7백여 명.

조선인 유해가 발굴돼 반환된 사례는 없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정부 차원의 논의는 지지부진합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 : “일본 정부와 유해 반환 교섭에서 어떤 내용을 요구했고, 이후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저희가 수차례 정보공개청구를 요청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외교적 사안이라 공개할 수 없다.”]

오키나와 외에도 소재가 파악된 한국인 유골은 2천 8백 위에 달하지만, 정부 차원의 유해 반환은 2010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된 상태입니다.

KBS 뉴스 윤봄이입니다.

<2018-08-16>  KBS

☞기사원문: 오키나와 섬 곳곳 거대한 무덤…조선인 유해 반환은 ‘0건’

금, 2018/08/17- 19:26
8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