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임종국,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지역

임종국,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익명 (미확인) | 금, 2019/02/22- 16:22

임종국 선생의 생애를 온전하게 재구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선생에 대한 사적인 기록이 적은 데다 자료가 없는 시기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그동안 발표되었던 선생의 글을 최대한 수집해서 단편적이나마 선생의 생을 더듬어 보려 한다.

 

어린 시절
임종국은 1929년 10월 26일 경남 창녕군 창녕읍에서 임문호의 4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임문호는 천도교 청년 당수와 조선농민사 사장을 지냈고, 당대 대표적인 민족계몽운동가로서 오늘날 흔히 말하는 우파 민족주의자 가운데 중심인물이었다.

일곱 살 때인가, 형무소에 아버지를 면회 간 적이 있다. ‘의식 있는 조선인’이었던 까닭에 (아버지는) 그 후에도 한두 번 더 형무소를 드나들었다. 그러나 전쟁 말기 젊은이들에게 ‘지원병으로 나가라’는 연설을 했다. 그 당시 상황이 어떠했든 이것은 친일행적임에 틀림없다.(<민족정기를 살려야 합니다>, 월간조선 서병욱 차장 대우와의 인터뷰)

아버지의 이런 행적이 소년 종국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어릴 때 일이었기에 종국의 의식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식의 저 밑 어딘가에 아버지의 흔적이 있었을 것이다.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의 천도교단 내의 직책이 바뀌어 서울로 이사하면서 종국은 재동보통학교를 다녔고, 10대를 신설동에서 보냈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우리 집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만성루(萬盛樓), 오른쪽에 죽정(竹井)이라는 일인이 살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 집 기대(畿代)라는 소녀와 가까워져서 흔히 연정 비슷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다. 근로동원을 가서 꾀를 피우다 으레 “가찌노고다까라”(조선놈의 씨알머리니까) “아레 요보상다요. ”(저건 조선놈의 종내기야)라는 욕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검도하며 총검술을 배웠다. 배낭에 99식총과 대검을 찬 상급생들이 하늘만큼은 장해 보였다. ”조센진또 멘따이와 다다께바 다다꾸호도아지가 데루“(조선놈하구 명태는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맛이 좋아진다)라는 그 유명한 격언(?)을 들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났다. 배급쌀이라고 쌀 반 콩깨묵 반이 나오더니 나중에 쌀알만큼씩 부스러뜨린 국수 종류가 배급되고, 그러자 미구에 해방이 됐다고 세상이 벌컥 뒤집혔다. 나는
해방이 뭔가 하면서 덩달아 좋아했다.
이때 내 나이 17세. 하루는 친구놈한테서 김구 선생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에!~ 너 그, 김구 선생이라는 이가 중국사람이래!”
“그래? 중국사람이 뭐하러 조선엘 오지?”
“이런 짜아식! 임마 것두 몰라! 정치하러 온대.
“정치? 그럼 우린 중국한테 멕히니?”
지금 나는 요즘의 17세에 비해서 그 무렵의 내 정신 연령이 몇 살 쯤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식민지 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번 회의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자화상> 중에서)

1966년 〈친일문학론〉을 출판하면서 쓴 글이다. 민족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자신의 무지와 그 원인을 드러냄으로써 일제의 민족의식 말살정책과 그에 협력했던 사람들의 과오를 비판하기 위해 극적인 기법을 사용한 것이리라. 해방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다시 들어보자.

“우리는 졌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예, 조선이 독립하게 돼서 기쁩니다.
이런 소리를 10일 전 그러니까 8월 14일쯤에 했다면 영락없는 헌병대 영창감이었다.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일본군의 시선에 겁이 나서 나는 얼른 둘러댔었다.
“하지만 애써 싸운 당신네가 졌다는 것을 정말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군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씹어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20년 후에 만나자!”
(<술과 바꾼 법률책>, 『망국을 할 것인가』)

이 회고는 당시 경험과 훗날의 인식이 합쳐서 재구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일본이 다시 올 것이라는 인식은 1965년 대일 굴욕외교(한일협정)을 겪으면서 위기의식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위기의식은 그를 ‘친일문제’라는 지난하고 고독한 세계로 들어서도록 했다.

 

방황하는 청년
청소년기의 임종국에 대해선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게 없다. 다만 이 시기에 그는 시와 소설을 배우는 문학가 지망생이었음은 분명하다. 청년 임종국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된다.
전북 장수군에서 경남 함안군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육십령 고개가 있다. 이곳에서 그는 인민군에게 잡혀 안의로 가는 수십 리 내리막길을 인민군의 짐을 진 채, 행렬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길가에 즐비한 수십 구의 아군 병사 시체를 보면서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위정자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국방과 정치를 어떻게 다루었기에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도 못 돼 이곳 경상도까지 밀린단 말인가. 점심을 평양, 저녁을 신의주서 먹는다더니, 누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죄없는 청춘들만 저렇게 죽어 자빠져야 하는 것인가. 안의에 이르러 인민군 여덟을 무밭에 끌어 묻어준 후 나는 인민군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낙동강을 넘으면 고향인 창녕 땅. 가도 가도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나는 줄곧 분노로 가슴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술과 바꾼 법률책>)

피난살이 속에서 문학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고려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 시절 흔히 그렇듯이 가난한 수재라면 출세를 위해 고시라는 유혹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시 준비를 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작용했다. 육십령 고개에서 본 젊은 죽음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고시에 합격하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칼을 휘둘러 나라를 좀먹은 버러지들을 무청 자르듯이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고시 준비의 한 이유였다.

시골에 처박혀서 여섯 달 정도 비지땀을 흘리면서 민법, 형법 총론, 각론 8권을 송두리째 암기하였다. 판사든 검사든 이미 반 이상은 맡아 놓았다고 기고만장해서 다시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서울은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폐허의 도시이자, 먹고 잘 곳조차 마련되지 않은 수도였다. 팔자 좋은 친구들은 인삼, 녹용을 달여 먹으면서 고시를 준비했지만, 그는 밥 세끼 거르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더구나 한 달에 책 한 권을 완전히 외다시피 하는 강행군을 계속하니 체중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빈 강의실에 앉아서 형사소송법의 조문을 외면서도 마음은 끼니 걱정, 잠자리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운 좋게 절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고아 아닌 고아로 숙식하던 것도 불가능하게 된 데다 등록금이 없어 학교마저 휴학하게 되었다. 판검사가 되어 썩은 세상을 바로잡아 보겠다던 청년의 꿈은 끝내 잠자리와 끼니 걱정으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을 때 청년의 가슴속에서 중뿔난 소리가 들려왔다. 타고난 오기라 할까, 반골의 소리가 그를 유혹한 것이다.
권좌에 앉아서 많은 사람을 머리 숙이게 하지 못할 바에야, 내가 많은 사람에게 머리 숙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권력을 내 것으로 못 한다면 대신 자유를 가지면 될 게 아닌가. 권좌에 연연하고 뇌물에 머리 숙이는 치사한 인간이 되느니 철저하게 자유인으로 살자.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뜬구름 한 조각이 되어 권력 대신 하늘만한 자유를 내 것으로 하면서 사는 거다.(<술과 바꾼 법률책>)

이렇게 해서 그는 신주 단지 모시듯 하던 법률책을 술과 바꿔 버리고 말았다. 대신 중학 시절의 꿈이었던 문학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말처럼 ‘돌아온 탕아’가 된 것이다. 탕아의 길동무론 이상(李箱)이 함께 했다. 퇴폐와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를 위로한 것이 이상이었다. 〈민법총론〉 500 페이지를 한 달 만에 외워버린 천재(?)가 밥과 잠자리 걱정 때문에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자신이야말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아닌가. 이상이 죽은 지 20년이 되었건만 이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하나 없는 때였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이상을 발굴해서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스로 날지 못한 자신의 꿈을 이상을 통해서 실현시켜 보고자 했음일까.
〈이상론〉을 쓰고 그의 작품을 모아 〈이상전집〉 전3권을 출판하였고 틈틈이 써놓았던 시들을 발표하여 문단에 얼굴을 내민 후 몇 해 동안 술도 약간은 마셨다. 그러나 묵은 신문 잡지에서 이상의 작품을 뒤지면서 알게 된 1930년대의 사회는 그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공해 주었다. 작품인식의 한계성 문제, 즉 한 시대의 작품은 그 시대의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완벽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상투의 시대와 사회를 모르면서 상투꾼들의 생활감정을 말하는 한 결국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밖에 될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문학과 사회의 관련성, 또 그것이 문학사회사의 문제로 발전하면서 그는 이것을 평생의 연구과제로 삼은 것이다. 이리하여 1960년대 초엽에 그는 향토지 경남문학에 <물레방아론>을 발표했다. 문학사회학적 방법으로 나도향의 <물레방아>를 분석한 평론이다. 그는 이런 방법을 신문학 전체에 적용하여 문학사회사를 쓸 작정으로 본격적인 준비작업을 시작하였다. 1910~1945년의 매일신보를 뒤져서 정치 문화 사회면의 기사색인을 완결한 후, 그 작업을 다른 신문 잡지로 확산 시켜갔던 것이다. 2~3년 걸려서 이 작업을 하던 중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 준 사건이 일어났다. 1965년 한일회담이 타결된 것이다.

 

친일문학론 출간, 이후 일제침략•배족사 연구에 전념

1965년에 들어서마자 1월부터 제7차 한일회담이 개막, 6월 한일협정 정식 조인, 8월 한일협정 비준안 국회 통과라는 과정에서 보듯이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대학생들을 비롯한 거국적인 반대투쟁을 묵살하고 정권의 명운을 걸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일사천리로 처리하고 말았다.

20년 후인 1965년 여름,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그 여름은 뜨거운 여름이었다.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더니, 정말 20년 만에 쪽발이 놈들이 다시 몰려오게 되는구나! 그놈들은 일개 병사조차도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는 장관이란 사람이 ‘제2의 이완용이가 되더라도’ 타령을 하는 판이었다. 이완용이가 될지언정 한일회담을 타결하겠다면 그건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한일회담이란 말인가? 
회담이 타결도 되기 전에 그런 타령부터 나온다면, 그것이 타결된 후의 광경은 뻔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밀듯이 일세(日勢)는 침투해 올 것이요, 거기에 영합하는 제2의 이완용이과 박춘금…..얼마든지 또 생각날 것이다. 묵은 친일파들이 비판받는 꼴을 본다면 제2의 이완용과 박춘금이 그래도 조금은 주춤하겠지? 이런 생각에서 나는 『친일문학론』을 쓰기로 작정했다. (중략)
작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다. 2~3년 걸려서 만들어 둔 신문과 잡지의 게재 작품 기타 문화 사회면의 기사색인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별 카드에 옮겨서 찾아 읽고 비평만 하면 됐던 것이다. 그 기사색인은 문학사회사를 쓰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책인『친일문학론』의 기초자료로 요긴하게 전용된 셈이었다. 그 기사색인 덕분에 『친일문학론』은 복사기가 없던 시대라 자료의 상당 부분을 필사로 옮겨 베끼면서도 원고 2천매 탈고까지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일이 끝나면 다른 문화 분야 및 사회 경제 부분을 원고지 각 2천매씩 2권 정도로 계속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집필이 순조로웠던 반면에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문단의 반응은 냉담했고 책은 우선 팔리지 않았다….. 초판 3천 부를 파는 데 10년이 걸리더니 1975년부터 수요가 늘어서 지금 7판째가 찍혀나갔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실록 친일파』)

임종국은 한일협정 체결에 크나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절박한 심정으로 『친일문학론』을 썼던 것이다. 1965년 당시 친일파, 친일문학이란 말 자체가 금기시되는 풍토였다. 이광수, 홍난파, 김은호 등 이름 있는 문필가나 예술인들은 민족문학, 민족음악,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았고 그들에 대한 친일 시비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고 언급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광수, 최남선, 김동환, 모윤숙, 노천명 등 쟁쟁한 문인들의 친일작품을 발굴하고 이를 치밀하게 분석한 그의 고투(苦鬪)는 한국문학사뿐 아니라 한국현대사 연구의 전환을 가져오는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이 책이 서점에 배포되자 국내 지성계는 큰 혼란을 겪었고 매스컴의 인터뷰 요청도 빗발쳤으나 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문학계나 강단에서는 이것을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책의 판매도 아주 저조했다. 하지만 임종국은 이 작업을 하면서 친일파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게 되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민족사를 가장 크게 그르친 자가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말았다. 패주행렬 속에서 본 젊은 죽음들, 그들을 그 꼴로 만든 장본인이 친일파였다. 제2의 매국 반민법을 폐기한 것도 친일파였다. 한말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제1의 매국을 했고, 총독부에 영합하면서 친일을 했다. 해방 후에도 개과천선은커녕 반민법을 폐기하면서, 독재와 부패 끝에 5․16과 (10월)유신을 불러들였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임종국이 존경했던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친일파였고 또 그들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민족정기를 훼손했으니 그들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래서 그는 문단이 싫어지고 시나 소설을 쓰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임종국이 시를 쓰면 옹졸해진단 말야!’
언제던가 조지훈 선생님이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말씀이 내 중뿔난 생각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있었다. 남자 한평생에 붓을 잡았으면 몇 천 장 전적을 쓸 것이지, 원고지 서너 장을 시로 메운다는 것이 따분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서 일제의 침략사와 우리의 반민족사를 쓰자! 이리하여 나는 어느새 이사를 해도 문예지에 주소를 알리지 않는 괴팍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술로 바꾼 법률책」)

임종국은 시인, 문학평론가라는 딱지를 떼고 본격적인 친일․일제침략 연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길은 아무도 밟아본 적이 없는 길이요, 끝을 알 수 없는 미궁이었다.

1970년대로 들면서 나는 『친일문학론』의 계속작업을 조금씩 진행시켜 왔다. 그런데 파고들수록 엄청난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전 2권 4천 매의 계획이 전 8권 2만 매로 늘어나 버렸다. 1년에 2500매씩 써도 8년이니 여생을, 아니 그간의 자료조사기를 15년으로 쳐도 평생을 그 일에 매달린 꼴이 되고 말았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자료수집, 생활 방편으로서의 글쓰기

1970년부터 임종국은 본격적인 자료조사 작업에 들어갔다. 원고료와 인세의 상당 부분을 자료 구입비에 쏟았고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안 다닌 곳이 없었다.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를 비롯한 각 대학 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지에서 매일 살다시피 하면서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어서 일일이 필사했다. 이른바 ‘임종국카드’라 불리는 1만 5천여 매의 친일인명카드는 이때부터 작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친일파 연구는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인 연구였다. 아무리 신빙성 있는 증언이 있다 해도 일제시대 문헌자료에 나오지 않는다면 증거자료로 채택하지 않았다. 연구주제가 친일경력을 파헤치는 것이니 만큼 철저한 고증이 없다면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의 지나치리만치 꼼꼼하고 실증적인 연구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연구결과의 첫 성과는 1977년 8월 <대화>에 처음 게재되고 수정 보강하여 <해방전후사의 인식1>(1979)에 실린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였다. 76쪽에 달하는 이 글은 친일파 연구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논문이라 할 수 있다. 임종국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 일제하 전 분야에서 활동한 친일파들과 친일단체를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10년간에 걸쳐 총독부문서와 관보, 각급 관공서 자료와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신문기사, 삼천리, 동양지광 등 잡지 등에서 모은 자료를 집약하여 전체적인 친일군상의 윤곽을 잡아놓은 것이다. 이 글은 이후 후학들에게 친일파 연구의 전범(典範)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 시기에 남긴 관련 글들은 다음과 같다.
「중추원참의」(<월간중앙>(이하 동일) 1973.5), 「징용」(1974.1), 「학도지원병」(1974.3), 「일제 고등계형사」(1974.8), 「일제하의 인력, 물자 이렇게 수탈됐다(1976.5), 「조선주둔군사령부」(1978.8).
임종국은 고려대학교를 마친 이후 별다른 직장 없이 여기저기 출판사를 옮겨 다녔다. 고시공부때 부실한 식사로 몸이 허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질상 직장생활이 맞지 않았다. 직장이라 할 만한 것은 2년 정도 근무한 신구문화사가 전부라 할 수 있다. 한편 늦게 장가든 임종국은 가솔까지 딸려 항상 생활이 넉넉지 않았다. 그동안 펴낸 책들의 인세와 각종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여 받은 원고료가 수입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침략사와 친일배족사 자료를 수집하는 와중에 틈틈이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요구하는 글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신여성시대의 굵직한 연애사」(<여성동아> 1967.11), 「개화의 발자취-단발령 야화」(<여성동아> 1968.1), 「명기열전-기생풍속도」(<여성동아> 1969.1), 「해방전야-빼앗긴 시절의 이야기」(<여학생> 1971), 「여학생풍물지-품삯 받고 다니던 학교」(<여학생>), 「광고면에 나타난 사회의 변천」(<독서신문> 1971.3.21), 「사회풍속야사-최초의 요정 정문루」(<세대> 1971.5), 「일화로 엮은 돈이야기」(<신여원> 1973.7), 「정절과 슬기의 설화」(<신여원> 1973.12), 「개벽지 야화」(<소설문예> 1977.8),
「윤심덕과 사의 찬미-좌절과 허무의 엘레지」(<여고시대> 1979.4) 등등 다양한 주제의 방대한 원고를 갖가지 매체에 발표했다. 이런 글들이 쉽사리 읽히는 읽을거리라지만 허투루 볼 수 없는 내용이다. 당시 문화사나 풍속사에 대한 이해가 없던 시절에도 임종국은 이런 주제에 대해서 사회문화적 접근을 통해서 그 자체의 사회적 의미를 파헤치는 데 노력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이미 축적해 놓은 문헌학적 자료와 함께 동시대상의 박학한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근대 한국문학에 대한 문학사회사적 분석도 병행해 나갔다. 기존에 발표했던 문학비평을 묶어 <한국문학의 사회사>(1974)를 출간한 이후에도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의 기수-채만식」(1976.11), 「관념적 상상의 문학-전영택의 ‘화수분’과 ‘소’」(1976.12), 「지식인의 비극과 좌절 ‘김강사와 T교수’」(1977.3), 「역사를 통한 현실참여-박종화의 현실과 참여」(1977.6), 「민족으로 일관한 리얼리스트-‘북간도’의 작가 안수길」(1977.7), 「정의와 고발의 농촌작가-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 기타」(1977.12) 등등 한국근대문학의 주요 작가와 작품들을 정력적으로 분석했던 것이다.

 

요산재에서의 왕성한 집필활동

10년간에 걸친 자료수집과 주변 지식 축적을 기반으로 하여 1980년대에 들어 임종국의 연구는 드디어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이 무렵 그는 40여 년간 살아온 서울을 떠나 천안으로 이사했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기도 했고 또한 일제침략과 친일파 연구와 집필에 오로지 전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천안 교외에 외딴집을 짓고 스스로 요산재(樂山齋)라 이름 붙였다. 요산재는 이후 임종국의 영면 직전까지 일제침략사와 친일배족사 연구의 요람이자 산실이었다.

1982년 첫 결실로 <일제침략과 친일파>가 나왔다. 임종국은 서문에서 이 책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일제침략의 근간인 사상침략・자원침략․대륙침략의 세 측면과 그에 관련된 친일상을 기술했으나, 그것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임은 우선에 필자가 잘 알고 있다. 종교침략․문화침략․경제침략․교육침략 기타에 걸친 병자수호조약 이래 70년의 친일을 어떻게 조감 할 것인가? 그야말로 현기증이 날 문제이지만, 이 책이 다룬 세 측면에 대해서만은 그런대로 개요는 서술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제침략과 친일파>는 본문에서 서술한 세 측면을 기둥으로 해서, 종교침략․문화침략 기타가 그 기둥을 보좌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후 1984년에 일제총독부 고관들의 침략 이면사를 다룬 <밤의 일제침략사>를, 1985년에 강화도 조약 이후 70년간 일제의 사상탄압을 연구한 <일제하의 사상탄압>을 출간했다. 1987년에 그는 일제하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72명이 쓴 108편의 친일 글을 엮어 <친일논설선집>을 펴냈다. 머리말에서 그는 과거의 친일논설을 새로이 발굴하여 드러내는 작업의 의미를 “민족의 제단 앞에서 허물 있는 자는 허물을 벗어 도약의 제수로 바칠 것이며, 허물 없는 자는 그것
을 음복하되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썼다. 단기간 이만한 분량의 논설을 엮을 수 있었던 것도 기존의 치밀한 자료 축적 결과였던 것이다.
1977년의 「일제말의 친일군상 실태」부터 1987년의 <친일논설선집>까지 여러 저작과 수많은 논설을 통해 친일문제와 일제침략사를 다루어 왔는데, 뭔가 부족한 점이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친일문제를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기 위해 ‘친일파총사’(전10권)를 구상하였다. 총론, 사상침략과 친일파, 정치침략과 친일파, 해방 이후 친일파, 경제침략과 친일파, 문화침략과 친일파, 만주․중국침략, 동양종교, 서양종교, 사회・교육침략과 친일파로 나누고 총론부터 1권씩 차근차근 쓰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2>를 내놓고 나서 그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다. 원래 건강 때문에 천안 벽지로 이사한 것인데 그동안의 무리한 집필과 어려운 생활형편으로 인해 몸을 돌보지 못해 지병인 폐기종이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지 모를 ‘친일파총사’ 발간을 성사시키고자 그는 몇몇 역사전공자를 접촉하여 공동 연구작업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쓸쓸한 죽음, 새로운 시작

임종국은 결국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환갑을 겨우 넘긴 1989년 11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타계소식을 듣고 그의 빈소에 여러 지인들과 연구자들이 찾아왔으나 그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임종국의 생애는 반골, ‘중뿔난 짓’만 골라하는 삶이었다. 그것은 일체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나왔다.
“이제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 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신라 고구려의 핏줄기인 줄 알았던들 나는!”(자화상, <친일문학론>). 기성의 관념과 지식, 역사 심지어 자신의 의식을 부정하고 나서야 새로운 길이 열렸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부터 그는 각성되었고 그의 각성은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과 새로운 역사 쓰기, 아울러 그에 걸맞은 치열한 삶을 스스로에게 요구했다.
그가 당시 각광받고 있던 독립운동사를 차치하고 민족사의 오욕을 밝히는 친일연구에 몰두한 것은 ‘민족사를 가장 그르친 것은 친일파’라고 한 그의 올바른 역사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숱한 자료를 뒤져서 한 장 두 장 쓴 15,000매에 달하는 친일인명카드는 민족사에 바치는 묘비명이었다. 그의 깊고 넓은 연구 성과는 이후 친일문제와 일제침략사 연구의 밑바탕이 되었고, 일반인들에게 오욕의 역사를 드러내어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게 하는 교과서가 되었다.
선생이 가신 지 16년이 지난 2005년 10월, 화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뒤늦게나마 선생의 지난하고 치열했던 작업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또한 그해 3월 임종국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11월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임종국상’을 제정하여 제1회 수상자를 내었다. 아직도 친일세력이 우리 사회 곳곳에 엄존한 현실 속에서 선생의 유지를 널리 알리고 새로운 민족사를 열어가는 것이 선생께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리라.(2006년 작성)

김민철・박광종 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李承晩之巨罪

 

可嘲云國父(가조운국부)

虐殺罪衝天(학살죄충천)

後世何忘此(후세하망차)

長歎起憤然(장탄기분연)

 

이승만의 큰 죄

 

國父 운운하니 조롱할 만하구나

동족 마구 죽인 罪, 하늘에 닿네

후세에서 어찌 이를 잊어버리랴

길게 탄식하며 분연함 일으킨다.

 

<時調로 改譯>

 

國父 가소롭구나 虐殺罪 하늘에 닿네

후세의 사람들이 어찌 이것을 잊으랴

오호라! 장탄식하며 분연함 일으킨다.

 

*巨罪: 대죄(大罪).  큰 죄  *國父: 나라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임금’을 이르는 말.
나라를  세우는    공로가  많아  국민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지도자를 이르는 말 *虐殺:  가혹하게  마구  죽임  *衝天: 하늘을  찌를  듯이  공중으로  높이 솟아오름. 탱천(撑天).  분하거나  의로운 기개, 기세  따위가 북받쳐 오름 *後世: 다음에 오세상. 또는  다음 세대(世代)의 사람들. 來葉 *長歎: 장탄식(長歎息). 긴 한숨을 지으며   깊이  탄식(歎息)하는    *憤然: 성을  벌컥  내며  분해하는 기색이 있음.

 

<2018.7.28, 이우식 지음>

토, 2018/07/28- 06:21
51
0

0403-4

[바로듣기]

☞ (7.31)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최후의 결전 3편_해방전야의 독립운동가들_민족주의 진영”
☞ (7.24)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최후의 결전 2편_해방전야의 독립운동가들_공산주의그룹과 조선독립동맹”
☞ (7.19)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히스토리: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기념관”
☞ (7.17)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최후의 결전 1편_해방전야의 독립운동가들_여운형”
☞ (7.10)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조국광복회 2편_만주의 무장투쟁과 김일성”
☞ (7.5)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히스토리: “영화 1987 뒷이야기와 남영동대공분실”
☞ (7.3)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조국광복회 1편_만주의 공산주의자들”
☞ (6.26)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민족주의자들의 비밀결사 흥업구락부 2편_탄생과정의 비화”
☞ (6.21)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히스토리: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 (6.19)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민족주의자들의 비밀결사 흥업구락부 1편_탄생과정의 비화”
☞ (6.14) ‘내역사’ 시즌2: 미식가: “을사늑약과 이토히로부미”
☞ (6.12)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조선공산당 4편_12월테제와 신간회”
☞ (6.07)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스토리: “민족문제연구소 워싱턴지부 창립”
☞ (6.06) ‘내역사’ 시즌2: 특별편성: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2부
☞ (6.05) ‘내역사’ 시즌2: 특별편성: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1부
☞ (5.31) ‘내역사’ 시즌2: 미식가: 골프, 친일귀족의 신선놀음”
☞ (5.29)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조선공산당 3편_조선공산당 복구와 김철수의 활약”
☞ (5.24)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히스토리“역사의 심판, 정의봉과 박기서”
(5.22)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조선공산당 2편: 강달영과 6.10만세운동”
(5.17) ‘내역사’ 시즌2: 미식가“망국의 굴욕 헌상품”
(5.15)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조선공산당 1편_조선공산당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5.10)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 히스토리 “금기의 70년, 제주 4.3”
(5.08)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최초의 비밀결사 신민회 2편_데라우치 암살미수 사건”
(5.03) ‘내역사’ 시즌2: 미식가 경복궁 수난사 – ‘조선물산공진회’
(5.01)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최초의 비밀결사 신민회 1편_입헌공화국을 꿈꾸다”
(4.26)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 히스토리 “친일파가 그린 충무공 표준영정”
(4.19)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2회 “파이팅은 일제 잔재인가”
(4.17)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3회 임시정부와 3.1혁명 3편 – 임시정부는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나?”
(4.12)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히스토리 “경희대학교의 뿌리 신흥무관학교??”
(4.10)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2회 임시정부와 3.1혁명 2편 – 3.1혁명의 이름없는 영웅들”
(4.05)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1회 식목일의 기원
(4.03)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1회 임시정부와 3.1혁명 1편 – “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인가”

0403-3


0523-1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화, 2018/07/31- 17:24
58
0

<참 좋은 아침좋은글>

 

좋은 일만으로 기억하며

지낼 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향내와 인간미

물씬 풍기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향수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은은한 향기를 뿜어낼 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산속 깊은 옹달샘의

맑은 물 같은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사람 만났다고

정말 즐거워할 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난 행운아야 라고 말하며

어깨에 힘을 더할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답답하거나

짜증 나지 않고 미소 머금을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행복했다”

“잘 했어” 라고 말할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토토”></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스포츠토토”></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스포츠토토사이트”></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토토사이트 검증”></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토토사이트 검증업체”></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토토사이트 가입”></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토토사이트 추천”></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메이저 토토사이트”></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안전토토사이트”></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사설토토사이트”></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안전놀이터”></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안전놀이터추천”></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안전놀이터 스포츠”></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안전놀이터 토토”></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안전놀이터 소개”></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안전놀이터 모음”></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안전놀이터 검증”></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메이저 토토사이트”></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메이저 토토사이트 추천”></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메이저사이트추천”></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메이저사이트”></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메이저 놀이터”></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메이저 놀이터 검증”></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메이저 놀이터 목록”></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메이저 놀이터 코드”></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메이저 안전놀이터”></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사설토토”></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사설토토사이트”></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사설토토 메이저”></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사설토토추천”></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사설놀이터”></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사설토토놀이터”></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사설놀이터추천”></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사설사이트”></p>

<p><a href=”https://www.totocenter77.com&#8221; target=”_blank” title=”사설안전놀이터”></p>

화, 2018/07/31- 23:51
39
0

<참 좋은 아침좋은글>

 

좋은 일만으로 기억하며

지낼 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향내와 인간미

물씬 풍기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향수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은은한 향기를 뿜어낼 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산속 깊은 옹달샘의

맑은 물 같은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사람 만났다고

정말 즐거워할 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난 행운아야 라고 말하며

어깨에 힘을 더할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답답하거나

짜증 나지 않고 미소 머금을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행복했다”

“잘 했어” 라고 말할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화, 2018/07/31- 23:52
63
0

라이나라에 남아서 지킨 놈은 다 친일이고 도망간 놈만 애국자냐? 병신들…

화, 2018/07/31- 21:48
38
0

김일성만 하오리까. 일본이 연합국과 편하게 싸우라고 불가침조약 체결하고 뒤를 기켜준 소련. 8월6일 히로시마에 원폭떨어지자마자 8월8일 불가침조약 파기하고 다죽어가는 일본군 사냥하며 만주로… 딱 일주일 싸우는척하고 한반도 반을 쳐먹은 소련… 완장차고 따라 들어온 김일성… 그때 한반도 문맹률이 78%!  김일성이가 친일을 청산했다고 사기치는 놈들과 거기 속은 바보들… 글도 못읽는 무지랭이 완장채우준다고 나라가 되는가 아니고… 북조선 철도, 발전소는 일본 기술관료 출신 아니면 누가 운전했을까?  문과나와서 행정관료, 경찰관료했으면 친일이고, 이과나와 기술관료했으면 친일이 아니라고?  개가 웃는다!

화, 2018/07/31- 22:01
53
0

/wp-content/uploads/2018/07/201807.pdf

수, 2018/08/01- 13:01
59
0

식민지역사박물관 함께만들어요!

수, 2018/08/01- 15:48
53
0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일제의 병영으로 가득한 땅
– 용산시가도龍山市街圖

 

01

용산시가도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용산이 일제침략의 총본산이었음을 알려주는 1929년에 발행한 지도이다. 축적은 1:7,500이며 색인으로 행정구역(町, 洞, 里) 표기와 함께 관청과 회사, 학교를 표기하였는데 총독관저, 보병영步兵營, 병기지창兵器支廠, 군사령부, 군사령관 관저, 야포병영, 공병영工兵營, 기병영騎兵營, 사단사령부, 사단장관저 등 군사시설과 철도국, 철도원양성소, 철도공장, 철도병원 등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철도관계 시설, 용산소학교, 중학교, 효창보통학교, 삼판三坂소학교 등 학교 시설, 용산경찰서, 경성형무소, 형무소공장 등이 기재되어 있다.

지도는 모눈의 형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일한 축적과 형식을 갖춘 시가도, 특히 경성시가도 같은 지도를 모눈에 이어서 맞춰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범례로 교량, 산악 등고선, 성벽, 철도, 전차선로, 행정구역 경계까지 표시하였는데 이렇게 상세한 범례와 모눈의 형식은 군사용 지도로 사용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시가지에는 지번과 함께 주요 건물들을 모양대로 그려 넣었으며 지도의 범위는 북쪽으로 서울역 아래, 동쪽으로 이태원, 서쪽으로 마포, 남쪽으로 용산역까지 보여준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서울지도>의지도전시관에도“용산시가도”를볼 수 있는데1927년에 발행된 것이다. 연구소 소장 “용산시가도”(1929년판)와 다른 지형이 세 곳인데 이는 모두 을축년 대홍수(1925년)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먼저 1927년판에 보이던 용산역 하단의 이촌동 지역 마을이 1929년판에서 사라졌다. 해마다 비만 오면 침수문제로 이재민이 발생하던 이촌동이 을축년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촌동 주민들을 노량진(500戶)과 공덕리(215戶)로 나누어 이전시켰다.
원래 이촌동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요청한 이전지는 효창원이었는데 관철되지 못하였다. 대신 효창원 부지에는 용산역에 있던 철도관사를 옮겨 지은 것을 1929년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용산역 위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하천을 정비하여 직선화한 모습도 보이는데 2년 만에 이와 같이 변화된 지형도는 을축년 대홍수와 관련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02

물에 잠긴 이촌동, 『매일신보』 1925. 7. 13.

 

용산역 근처에는 구획이 정리된 신시가지의 모습과 함께 거대한 일제의 군사시설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조선의 중심부에 일제의 군대를 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담당하는 마지막 보루인 군대를 상시적으로 주둔시켜 안정된 통치기반을 조성하려는 의도와 함께 대륙침략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03

일장기가 걸려 있는 조선군사령부 정문, 사단대항연습사진첩

 

04

사단대항연습사진첩일본군의 위세를 과시하는 관병식 장면 항공사진, 사단대항기념사진첩

 

이처럼 1929년판 “용산시가도”는 용산 주둔 일본군의 관계시설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민족사랑> 2014년 9월호에 실린 「하늘에서 본 일제강점기 용산 일대 전경」(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과 함께 보면 용산의 실상을 더욱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 강동민 지료팀장

수, 2018/08/01- 16:30
28
0

• 방학진 기획실장 인터뷰 • 이홍관 정리

현재 국제운송회사 로드 원(ROAD 1) 로지스틱스를 운영하고 있는 홍남화 아산지회장은 2000년 9월부터 연구소 회원에 가입했다. 2016년 5월에는 아산 둔포면에 있는 친일파 윤웅렬, 윤치호 공덕비를 제보하였고, 아산지역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2017년 1월~5월)을 제안하고 이끌었다. 우리에게 ‘톨레랑스’라는 화두를 각인시킨 <나는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선생과사촌지간이다. 찾아간 날, 마침 홍남화 회원은 업무상 무언가 바쁜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이곳저곳으로부터 쉴 새 없이 전화를 받고 처리하면서도, 성의 있고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인터뷰는 아산의 신정호수 인근에서 진행되었다.

18

문 : 아산지회의 회원은 몇 명이나 되나요?

답 : 저희가 80명 정도 되요. 3년 전까지만 해도 천안아산지회였는데 분리하고 보니까 좀 아쉽게 느껴집니다. 열성적이고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이 지회의 발전을 전망하면서 힘들더라도 각자 독자적으로 가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문 : 천안아산지회로 활동하셨을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요?

답 : 그때나 지금이나 주로 임종국 선생님 추모사업을 했었죠. 오랫동안 노력이 쌓이니 2016년에는 천안 신부공원에 임종국선생의 조형물을 세웠고 앞으로 지역의 명소로 가꿔 나갈 계획입니다.

 

문 : 아산에 내려오시기 전에 이미 연구소와 인연을 맺으셨지요?

답 : 제가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는데요. 1997년 또는 1998년 무렵 수원 북문 부근에서 북한동포돕기 캠페인을 보고 그 단체가 어디인가 하고 찾아갔더니 연구소 경기남부지부와 관련되어 있더라구요. 그것이 연구소와의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북한동포돕기 성금으로 5만원을 송금했습니다.
그 무렵 수원지역에서 열린 강연들을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수원역전의 경기서적에서 리영희 선생님 강연에도 참가해 제가 “DJ와 YS는 둘 다 민주화운동을 했는데 왜 차이가 납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리영희 선생님께서 “한 사람은 철학이 있고, 다른 사람은 철학이 없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수원청소년문화센터에서 노동은 교수님의 친일음악 강연도 참석했습니다. 노동은 교수님 강연은 화성시가 홍난파기념관 건립을 계획하자 반대운동 차원에서 연구소 경기남부지부가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강연에서 방학진 사무국장을 처음 만났는데 현재 방학진 기획실장은 기억을 못하시네요. 그 후 오산으로 이사해서 2001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선거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문 : 수원에서 오산으로 다시 천안에서 고향인 아산으로 계속 내려오셨네요?

답 : 제 회사 이름이 로드 원(ROAD 1)입니다. 1번 국도를 타고 대륙까지 오가자는 뜻입니다. 우리 가족사를 살펴보니 큰 집은 북한 진남포에서 해방을 맞고 소련군에 쫓겨 인천으로 내려옵니다. 우리 집안을 보면 수백 년간 한 곳에서 살다가 개화기를 거치면서 할아버지는 천안, 아버지는 홍성, 저는 아산에서 태어납니다.
지난 100여 년의 격동과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집안이 이리저리 내몰렸던 거죠. 그렇게 집안 어른들의 기억 조각들을 하나하나 연결하다보니 다시 고향인 아산으로 오게 되었고 그동안 잘 몰랐던 가족사를 80% 정도는 복원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고, 이름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오명으로 남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렇게 가족사를 복원했던 것 같습니다.

 

문 : 아직 복원하지 못한 가족사의 20%는 무엇입니까?

답 : 6·25전쟁 전후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의한 망각이 그 20%입니다. 그래서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더욱 관심이 많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 당시 희생될 뻔 하셨습니다. 아산 현충사 부근의 황골이라는 마을은 대대로 남양 홍씨(홍남화 지회장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 집안이다) 집성촌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와중에 황골에서 우익에 의한 학살이 벌어진 것은 1950년 추석 무렵입니다. 새벽에 아버지가 화장실을 가던 중 요란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사촌이며 큰어머니가 모두 끌려간 후였습니다. 우익 청년들이 동네 사람들을 공회당에 가두어놓고, 좌익 혐의자에 대해 인민재판을 거꾸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운좋게도 친척 되시는 할머니가 두둔해주어 살아남았지만 아버지의 큰어머니를 비롯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홍세화 선생도 그때 죽을 뻔했습니다. ????나는빠리의택시운전사????에그 내용이 실려 있구요. 그 후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가해자들과 한평생 사셨습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집과 살림살이는 풍비박산 났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릴 적부터 6·25 이야기를 알음알음 알아 오면서 자랐고, 숙명처럼 민간인 학살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을까, 시골마을에 두레패가 왜 둘이나 있는지 의문을 품었지요. 난리가 끝나고 마을 한켠을 지키던 왜가리떼도 사라지고 맙니다.

 

문 : 그래서 이번에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열심히 참여하셨군요?

답 : 네. 6·25전쟁기에 민간인 학살은 학살의 주체나 피해 유형이 다양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요시찰대상처럼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은 좌익사상자들을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구실로 보도연맹을 만들고, 이들을 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산지역에서 보도연맹건으로 희생된 사례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아산의 경우 UN군이 들어오면서 북한군 지배가 끝나가는 2~3일 전후 치안 공백기에 우익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무차별 학살을 벌였고 이후 치안이 확보된 상황에서 경찰이 좌익 혐의자들을 검거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발굴한 설화산 민간인 희생자 유골은 1951년 1월 평택까지 중공군이 내려오자 후퇴 직전의 경찰이 학살한 좌익 혐의자들의 유골인 거죠.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기록에는 아산지역 민간인 희생자를 800명 정도로 추산했지만, 일부에서는 피난민들의 희생이 컸던 점을 들어서 1,300명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천안의 경우 당시 천안경찰서 김종대 서장이 희생을 줄이려고 노력했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는데. 아산에서는 그렇지 못했기에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문 : 내년에 제2기 진화위가 출범할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러면 현재 직업을 잠시 접어두고 조사관 활동하면서 민간인 학살 진상을 조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답 : 이번 설화산 유해 발굴 현장에 진화위 당시 아산지역 조사관으로 활동하신 경찰관이 휴가를 내고 조용히 찾아주었는데 본인도 당시 조사가 미흡했다고 말하더군요. 여하튼 2기 진화위에서는 1기와 달리 위원회뿐 아니라 아산시 등 지자체의 적극적인 협조가 예상되는 만큼 더 이상의 논란이 없도록 명확한 조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이번에 당선된 아산시장이 후보 때 공약으로 내건 민간인 학살 실태 파악과 공청회 개최, 인권기념관 건립이 반드시 이뤄지길 고대합니다.

19

문 : 아산지회는 이밖에도 친일파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교체운동도 열심히 벌이고 계시지요?

답 : 우선 새로 출범한 아산시의회와 충남도의회 차원의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노력하고 표준영정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표준영정 퇴출 서명운동에 함께 했던 아산지회 회원들 중에 각각 아산시의원(홍성표 회원)과 충남도의원(안장헌 회원)에 당선되어 아주 든든합니다.

20

문 :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 이문구의 「관촌수필」에는 바다에 마을사람을 수장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산 구성리에서도 마을사람들을 좌우로 길게 세워서 바닷가로 나가게 하고, 물이 차서 더 이상 못가겠다고 하자 총을 쏴 살해해서 그대로 수장된 일이 있었는데, 당시 현장을 목격한 희생되신 분의 딸이 노인이 되어 증언합니다. 엄마한테 동네 청년들이 남편이 어디 있냐고 묻자, 마당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그 길로 아버지는 불귀의 객이 됩니다.
현재 이 같은 증언을 할 분들은 찾기 어렵고, 생존해 계신 분들이라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당시 상황을 여간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6·25전쟁 때 학살된 유가족이 아닌 사람이 거의 없고, 반대로 한 사람을 통하면 가해자와 연결되지 않을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며 어설프게 덮기보다는 민족사의 상혼을 드러내 근원부터 차근차근 치유하면서 서로에게 응어리진 아픔을 보듬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수, 2018/08/01- 17:25
70
0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헌법에 반대하다 간첩 누명을 썼던 임헌영 소장이 6월 21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수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들로부터 불법적인 수사를 받으면서 작성된 진술서 및 피의자신문조서는 모두 그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무죄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은 1974년 문인들이 개헌 지지 성명 등을 발표하자 보안사가 임 소장을 비롯해 이호철·장병희·정을병·김우종 씨 등 문인 5명을 상대로 고문과 가혹행위 끝에 거짓 자백을 받아낸 뒤 처벌한 사건이다. 당시 보안사는 일본에서 발행된 잡지 『한양(漢陽)』에 글을 기고했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했고, 법원은 임 소장을 비롯한 이호철·장병희·김우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13

이와 관련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이 사건을 재조사한 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던 보안사가 불법 수사했으므로 잘못된 판결”이라며 재심을 권고했다. 이후 이호철·장병희·김우종 씨 등은 재심 청구를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편 검찰은 2017년 독재정권 시절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 중 하나로 재심 청구를 하지 않았던 임 소장을 대신해 재심을 청구, 무죄를 구형한 바 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52
21
0

전국 465개 독립·민주화운동 단체, 교육·학술단체 등이 활동하고 있는 역사정의실천연대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이하 국정화저지넷, 사무국 민족문제연구소)는 6월 6일 오전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앞서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대구 교육감 후보로 출마한 강은희의 심판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박근혜 정부의 반 헌법적이고 불법적인 국정농단 사건인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인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슴에 비수를 꽂은 인물, 국정농단 세력을 비호한 인물, 강은희 후보에게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내려달라”며 “2·28민주화운동 정신과 촛불정신으로 강은희 후보를 단죄해달라”고 대구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0607

 

이어 11일 대구시교육청 앞에서도 국정화저지넷과 대구 5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 대구네트워크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무너져 가는 공교육을 바로 세우고 대구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교육청의 수장이 되겠다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강 후보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역사의 산증인인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위안부합의 주동자인 인물이 내가 사는 대구에서 교육감 후보로 나온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각계의 사퇴 요구에도 불구하고 6월 13일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강은희 후보는 40.7%의 득표율로 대구교육감에 당선됐다. 그러자 대구의 학생·청소년들이 강은희 대구교육감 당선을 취소해 달라는 내용의 국민청원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며 학생들 손으로 교육감을 뽑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강 교육감은 2015년 새누리당 의원 시절 역사교과서 개선 특별위원회 간사로서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하며 역사교과서 국정화지지 여론조성에 앞장섰다. 또 여성가족부 장관 재직 당시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옹호하며,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일본 정부의 ‘위로금’을 받도록 회유하고 종용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2014년 국회 교문위 회의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비선실세’인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특혜 입학 등을 비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송민희 홍보팀장 /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

수, 2018/08/01- 16:41
25
0

진주지회 회원인 박노정 시인이 7월 4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 시인의 부고기사가 여러 언론에 났지만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에 가장 공감이 간다.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 별세〉.
박 시인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박 시인이 ????진주신문????대표이사 시절 그의 소개로 진주의 어른인 남성(南星) 김장하 선생을 만났으니 아마도 1990년대 후반으로 짐작한다.

▲ 박노정 시인./경남도민일보DB

????진주신문????은1990년진주시민들이모여창간한신문으로지역의수구적인여론에맞서 정론직필 그리고 ‘진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정신을 ‘신분해방운동인 형평, 임진왜란 때 2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일체가 돼 보여준 주체, 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 등 3가지를 꼽았다.
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이사뿐아니라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진주민예총회장,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를 빼놓고 진주의 시민운동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던 2005년 5월, 박 시인은 지역의 후배들과 함께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을 뜯어내 박 시인을 포함해 4명이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모두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벌금 대납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당시 4명의 벌금은 2,000만원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성금이 이보다 더 많은 2,370만원이나 모아졌다. 박 시인 등은 나중에 이 성금 중 일부를 연구소 진주지회 결성(2012년 3월) 자금으로 내놓았다. 실제로 박 시인은 연구소 진주지회의 숨은 설계자였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시절이던1990년대초부터논개영정폐출운동을시작해 2008년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린 새로운 논개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박 시인은 2006년에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을 만들어 진주 출신 친일가수 남인수의 이름을 딴 ‘남인수 가요제’를 ‘진주 가요제’로 바꾸기도 했고 ‘을사늑약 100년 남북공동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친일잔재 지도’ 제작도 추진했다. 이처럼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의 일생은 올바른 ‘진주정신’의 발굴과 계승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18/08/01- 17:29
9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