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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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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익명 (미확인) | 금, 2019/02/22- 16:22

임종국 선생의 생애를 온전하게 재구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선생에 대한 사적인 기록이 적은 데다 자료가 없는 시기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그동안 발표되었던 선생의 글을 최대한 수집해서 단편적이나마 선생의 생을 더듬어 보려 한다.

 

어린 시절
임종국은 1929년 10월 26일 경남 창녕군 창녕읍에서 임문호의 4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임문호는 천도교 청년 당수와 조선농민사 사장을 지냈고, 당대 대표적인 민족계몽운동가로서 오늘날 흔히 말하는 우파 민족주의자 가운데 중심인물이었다.

일곱 살 때인가, 형무소에 아버지를 면회 간 적이 있다. ‘의식 있는 조선인’이었던 까닭에 (아버지는) 그 후에도 한두 번 더 형무소를 드나들었다. 그러나 전쟁 말기 젊은이들에게 ‘지원병으로 나가라’는 연설을 했다. 그 당시 상황이 어떠했든 이것은 친일행적임에 틀림없다.(<민족정기를 살려야 합니다>, 월간조선 서병욱 차장 대우와의 인터뷰)

아버지의 이런 행적이 소년 종국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어릴 때 일이었기에 종국의 의식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식의 저 밑 어딘가에 아버지의 흔적이 있었을 것이다.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의 천도교단 내의 직책이 바뀌어 서울로 이사하면서 종국은 재동보통학교를 다녔고, 10대를 신설동에서 보냈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우리 집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만성루(萬盛樓), 오른쪽에 죽정(竹井)이라는 일인이 살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 집 기대(畿代)라는 소녀와 가까워져서 흔히 연정 비슷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다. 근로동원을 가서 꾀를 피우다 으레 “가찌노고다까라”(조선놈의 씨알머리니까) “아레 요보상다요. ”(저건 조선놈의 종내기야)라는 욕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검도하며 총검술을 배웠다. 배낭에 99식총과 대검을 찬 상급생들이 하늘만큼은 장해 보였다. ”조센진또 멘따이와 다다께바 다다꾸호도아지가 데루“(조선놈하구 명태는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맛이 좋아진다)라는 그 유명한 격언(?)을 들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났다. 배급쌀이라고 쌀 반 콩깨묵 반이 나오더니 나중에 쌀알만큼씩 부스러뜨린 국수 종류가 배급되고, 그러자 미구에 해방이 됐다고 세상이 벌컥 뒤집혔다. 나는
해방이 뭔가 하면서 덩달아 좋아했다.
이때 내 나이 17세. 하루는 친구놈한테서 김구 선생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에!~ 너 그, 김구 선생이라는 이가 중국사람이래!”
“그래? 중국사람이 뭐하러 조선엘 오지?”
“이런 짜아식! 임마 것두 몰라! 정치하러 온대.
“정치? 그럼 우린 중국한테 멕히니?”
지금 나는 요즘의 17세에 비해서 그 무렵의 내 정신 연령이 몇 살 쯤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식민지 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번 회의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자화상> 중에서)

1966년 〈친일문학론〉을 출판하면서 쓴 글이다. 민족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자신의 무지와 그 원인을 드러냄으로써 일제의 민족의식 말살정책과 그에 협력했던 사람들의 과오를 비판하기 위해 극적인 기법을 사용한 것이리라. 해방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다시 들어보자.

“우리는 졌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예, 조선이 독립하게 돼서 기쁩니다.
이런 소리를 10일 전 그러니까 8월 14일쯤에 했다면 영락없는 헌병대 영창감이었다.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일본군의 시선에 겁이 나서 나는 얼른 둘러댔었다.
“하지만 애써 싸운 당신네가 졌다는 것을 정말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군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씹어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20년 후에 만나자!”
(<술과 바꾼 법률책>, 『망국을 할 것인가』)

이 회고는 당시 경험과 훗날의 인식이 합쳐서 재구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일본이 다시 올 것이라는 인식은 1965년 대일 굴욕외교(한일협정)을 겪으면서 위기의식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위기의식은 그를 ‘친일문제’라는 지난하고 고독한 세계로 들어서도록 했다.

 

방황하는 청년
청소년기의 임종국에 대해선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게 없다. 다만 이 시기에 그는 시와 소설을 배우는 문학가 지망생이었음은 분명하다. 청년 임종국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된다.
전북 장수군에서 경남 함안군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육십령 고개가 있다. 이곳에서 그는 인민군에게 잡혀 안의로 가는 수십 리 내리막길을 인민군의 짐을 진 채, 행렬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길가에 즐비한 수십 구의 아군 병사 시체를 보면서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위정자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국방과 정치를 어떻게 다루었기에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도 못 돼 이곳 경상도까지 밀린단 말인가. 점심을 평양, 저녁을 신의주서 먹는다더니, 누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죄없는 청춘들만 저렇게 죽어 자빠져야 하는 것인가. 안의에 이르러 인민군 여덟을 무밭에 끌어 묻어준 후 나는 인민군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낙동강을 넘으면 고향인 창녕 땅. 가도 가도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나는 줄곧 분노로 가슴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술과 바꾼 법률책>)

피난살이 속에서 문학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고려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 시절 흔히 그렇듯이 가난한 수재라면 출세를 위해 고시라는 유혹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시 준비를 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작용했다. 육십령 고개에서 본 젊은 죽음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고시에 합격하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칼을 휘둘러 나라를 좀먹은 버러지들을 무청 자르듯이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고시 준비의 한 이유였다.

시골에 처박혀서 여섯 달 정도 비지땀을 흘리면서 민법, 형법 총론, 각론 8권을 송두리째 암기하였다. 판사든 검사든 이미 반 이상은 맡아 놓았다고 기고만장해서 다시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서울은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폐허의 도시이자, 먹고 잘 곳조차 마련되지 않은 수도였다. 팔자 좋은 친구들은 인삼, 녹용을 달여 먹으면서 고시를 준비했지만, 그는 밥 세끼 거르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더구나 한 달에 책 한 권을 완전히 외다시피 하는 강행군을 계속하니 체중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빈 강의실에 앉아서 형사소송법의 조문을 외면서도 마음은 끼니 걱정, 잠자리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운 좋게 절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고아 아닌 고아로 숙식하던 것도 불가능하게 된 데다 등록금이 없어 학교마저 휴학하게 되었다. 판검사가 되어 썩은 세상을 바로잡아 보겠다던 청년의 꿈은 끝내 잠자리와 끼니 걱정으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을 때 청년의 가슴속에서 중뿔난 소리가 들려왔다. 타고난 오기라 할까, 반골의 소리가 그를 유혹한 것이다.
권좌에 앉아서 많은 사람을 머리 숙이게 하지 못할 바에야, 내가 많은 사람에게 머리 숙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권력을 내 것으로 못 한다면 대신 자유를 가지면 될 게 아닌가. 권좌에 연연하고 뇌물에 머리 숙이는 치사한 인간이 되느니 철저하게 자유인으로 살자.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뜬구름 한 조각이 되어 권력 대신 하늘만한 자유를 내 것으로 하면서 사는 거다.(<술과 바꾼 법률책>)

이렇게 해서 그는 신주 단지 모시듯 하던 법률책을 술과 바꿔 버리고 말았다. 대신 중학 시절의 꿈이었던 문학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말처럼 ‘돌아온 탕아’가 된 것이다. 탕아의 길동무론 이상(李箱)이 함께 했다. 퇴폐와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를 위로한 것이 이상이었다. 〈민법총론〉 500 페이지를 한 달 만에 외워버린 천재(?)가 밥과 잠자리 걱정 때문에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자신이야말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아닌가. 이상이 죽은 지 20년이 되었건만 이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하나 없는 때였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이상을 발굴해서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스로 날지 못한 자신의 꿈을 이상을 통해서 실현시켜 보고자 했음일까.
〈이상론〉을 쓰고 그의 작품을 모아 〈이상전집〉 전3권을 출판하였고 틈틈이 써놓았던 시들을 발표하여 문단에 얼굴을 내민 후 몇 해 동안 술도 약간은 마셨다. 그러나 묵은 신문 잡지에서 이상의 작품을 뒤지면서 알게 된 1930년대의 사회는 그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공해 주었다. 작품인식의 한계성 문제, 즉 한 시대의 작품은 그 시대의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완벽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상투의 시대와 사회를 모르면서 상투꾼들의 생활감정을 말하는 한 결국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밖에 될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문학과 사회의 관련성, 또 그것이 문학사회사의 문제로 발전하면서 그는 이것을 평생의 연구과제로 삼은 것이다. 이리하여 1960년대 초엽에 그는 향토지 경남문학에 <물레방아론>을 발표했다. 문학사회학적 방법으로 나도향의 <물레방아>를 분석한 평론이다. 그는 이런 방법을 신문학 전체에 적용하여 문학사회사를 쓸 작정으로 본격적인 준비작업을 시작하였다. 1910~1945년의 매일신보를 뒤져서 정치 문화 사회면의 기사색인을 완결한 후, 그 작업을 다른 신문 잡지로 확산 시켜갔던 것이다. 2~3년 걸려서 이 작업을 하던 중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 준 사건이 일어났다. 1965년 한일회담이 타결된 것이다.

 

친일문학론 출간, 이후 일제침략•배족사 연구에 전념

1965년에 들어서마자 1월부터 제7차 한일회담이 개막, 6월 한일협정 정식 조인, 8월 한일협정 비준안 국회 통과라는 과정에서 보듯이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대학생들을 비롯한 거국적인 반대투쟁을 묵살하고 정권의 명운을 걸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일사천리로 처리하고 말았다.

20년 후인 1965년 여름,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그 여름은 뜨거운 여름이었다.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더니, 정말 20년 만에 쪽발이 놈들이 다시 몰려오게 되는구나! 그놈들은 일개 병사조차도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는 장관이란 사람이 ‘제2의 이완용이가 되더라도’ 타령을 하는 판이었다. 이완용이가 될지언정 한일회담을 타결하겠다면 그건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한일회담이란 말인가? 
회담이 타결도 되기 전에 그런 타령부터 나온다면, 그것이 타결된 후의 광경은 뻔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밀듯이 일세(日勢)는 침투해 올 것이요, 거기에 영합하는 제2의 이완용이과 박춘금…..얼마든지 또 생각날 것이다. 묵은 친일파들이 비판받는 꼴을 본다면 제2의 이완용과 박춘금이 그래도 조금은 주춤하겠지? 이런 생각에서 나는 『친일문학론』을 쓰기로 작정했다. (중략)
작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다. 2~3년 걸려서 만들어 둔 신문과 잡지의 게재 작품 기타 문화 사회면의 기사색인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별 카드에 옮겨서 찾아 읽고 비평만 하면 됐던 것이다. 그 기사색인은 문학사회사를 쓰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책인『친일문학론』의 기초자료로 요긴하게 전용된 셈이었다. 그 기사색인 덕분에 『친일문학론』은 복사기가 없던 시대라 자료의 상당 부분을 필사로 옮겨 베끼면서도 원고 2천매 탈고까지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일이 끝나면 다른 문화 분야 및 사회 경제 부분을 원고지 각 2천매씩 2권 정도로 계속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집필이 순조로웠던 반면에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문단의 반응은 냉담했고 책은 우선 팔리지 않았다….. 초판 3천 부를 파는 데 10년이 걸리더니 1975년부터 수요가 늘어서 지금 7판째가 찍혀나갔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실록 친일파』)

임종국은 한일협정 체결에 크나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절박한 심정으로 『친일문학론』을 썼던 것이다. 1965년 당시 친일파, 친일문학이란 말 자체가 금기시되는 풍토였다. 이광수, 홍난파, 김은호 등 이름 있는 문필가나 예술인들은 민족문학, 민족음악,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았고 그들에 대한 친일 시비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고 언급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광수, 최남선, 김동환, 모윤숙, 노천명 등 쟁쟁한 문인들의 친일작품을 발굴하고 이를 치밀하게 분석한 그의 고투(苦鬪)는 한국문학사뿐 아니라 한국현대사 연구의 전환을 가져오는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이 책이 서점에 배포되자 국내 지성계는 큰 혼란을 겪었고 매스컴의 인터뷰 요청도 빗발쳤으나 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문학계나 강단에서는 이것을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책의 판매도 아주 저조했다. 하지만 임종국은 이 작업을 하면서 친일파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게 되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민족사를 가장 크게 그르친 자가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말았다. 패주행렬 속에서 본 젊은 죽음들, 그들을 그 꼴로 만든 장본인이 친일파였다. 제2의 매국 반민법을 폐기한 것도 친일파였다. 한말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제1의 매국을 했고, 총독부에 영합하면서 친일을 했다. 해방 후에도 개과천선은커녕 반민법을 폐기하면서, 독재와 부패 끝에 5․16과 (10월)유신을 불러들였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임종국이 존경했던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친일파였고 또 그들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민족정기를 훼손했으니 그들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래서 그는 문단이 싫어지고 시나 소설을 쓰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임종국이 시를 쓰면 옹졸해진단 말야!’
언제던가 조지훈 선생님이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말씀이 내 중뿔난 생각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있었다. 남자 한평생에 붓을 잡았으면 몇 천 장 전적을 쓸 것이지, 원고지 서너 장을 시로 메운다는 것이 따분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서 일제의 침략사와 우리의 반민족사를 쓰자! 이리하여 나는 어느새 이사를 해도 문예지에 주소를 알리지 않는 괴팍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술로 바꾼 법률책」)

임종국은 시인, 문학평론가라는 딱지를 떼고 본격적인 친일․일제침략 연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길은 아무도 밟아본 적이 없는 길이요, 끝을 알 수 없는 미궁이었다.

1970년대로 들면서 나는 『친일문학론』의 계속작업을 조금씩 진행시켜 왔다. 그런데 파고들수록 엄청난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전 2권 4천 매의 계획이 전 8권 2만 매로 늘어나 버렸다. 1년에 2500매씩 써도 8년이니 여생을, 아니 그간의 자료조사기를 15년으로 쳐도 평생을 그 일에 매달린 꼴이 되고 말았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자료수집, 생활 방편으로서의 글쓰기

1970년부터 임종국은 본격적인 자료조사 작업에 들어갔다. 원고료와 인세의 상당 부분을 자료 구입비에 쏟았고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안 다닌 곳이 없었다.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를 비롯한 각 대학 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지에서 매일 살다시피 하면서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어서 일일이 필사했다. 이른바 ‘임종국카드’라 불리는 1만 5천여 매의 친일인명카드는 이때부터 작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친일파 연구는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인 연구였다. 아무리 신빙성 있는 증언이 있다 해도 일제시대 문헌자료에 나오지 않는다면 증거자료로 채택하지 않았다. 연구주제가 친일경력을 파헤치는 것이니 만큼 철저한 고증이 없다면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의 지나치리만치 꼼꼼하고 실증적인 연구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연구결과의 첫 성과는 1977년 8월 <대화>에 처음 게재되고 수정 보강하여 <해방전후사의 인식1>(1979)에 실린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였다. 76쪽에 달하는 이 글은 친일파 연구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논문이라 할 수 있다. 임종국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 일제하 전 분야에서 활동한 친일파들과 친일단체를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10년간에 걸쳐 총독부문서와 관보, 각급 관공서 자료와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신문기사, 삼천리, 동양지광 등 잡지 등에서 모은 자료를 집약하여 전체적인 친일군상의 윤곽을 잡아놓은 것이다. 이 글은 이후 후학들에게 친일파 연구의 전범(典範)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 시기에 남긴 관련 글들은 다음과 같다.
「중추원참의」(<월간중앙>(이하 동일) 1973.5), 「징용」(1974.1), 「학도지원병」(1974.3), 「일제 고등계형사」(1974.8), 「일제하의 인력, 물자 이렇게 수탈됐다(1976.5), 「조선주둔군사령부」(1978.8).
임종국은 고려대학교를 마친 이후 별다른 직장 없이 여기저기 출판사를 옮겨 다녔다. 고시공부때 부실한 식사로 몸이 허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질상 직장생활이 맞지 않았다. 직장이라 할 만한 것은 2년 정도 근무한 신구문화사가 전부라 할 수 있다. 한편 늦게 장가든 임종국은 가솔까지 딸려 항상 생활이 넉넉지 않았다. 그동안 펴낸 책들의 인세와 각종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여 받은 원고료가 수입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침략사와 친일배족사 자료를 수집하는 와중에 틈틈이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요구하는 글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신여성시대의 굵직한 연애사」(<여성동아> 1967.11), 「개화의 발자취-단발령 야화」(<여성동아> 1968.1), 「명기열전-기생풍속도」(<여성동아> 1969.1), 「해방전야-빼앗긴 시절의 이야기」(<여학생> 1971), 「여학생풍물지-품삯 받고 다니던 학교」(<여학생>), 「광고면에 나타난 사회의 변천」(<독서신문> 1971.3.21), 「사회풍속야사-최초의 요정 정문루」(<세대> 1971.5), 「일화로 엮은 돈이야기」(<신여원> 1973.7), 「정절과 슬기의 설화」(<신여원> 1973.12), 「개벽지 야화」(<소설문예> 1977.8),
「윤심덕과 사의 찬미-좌절과 허무의 엘레지」(<여고시대> 1979.4) 등등 다양한 주제의 방대한 원고를 갖가지 매체에 발표했다. 이런 글들이 쉽사리 읽히는 읽을거리라지만 허투루 볼 수 없는 내용이다. 당시 문화사나 풍속사에 대한 이해가 없던 시절에도 임종국은 이런 주제에 대해서 사회문화적 접근을 통해서 그 자체의 사회적 의미를 파헤치는 데 노력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이미 축적해 놓은 문헌학적 자료와 함께 동시대상의 박학한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근대 한국문학에 대한 문학사회사적 분석도 병행해 나갔다. 기존에 발표했던 문학비평을 묶어 <한국문학의 사회사>(1974)를 출간한 이후에도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의 기수-채만식」(1976.11), 「관념적 상상의 문학-전영택의 ‘화수분’과 ‘소’」(1976.12), 「지식인의 비극과 좌절 ‘김강사와 T교수’」(1977.3), 「역사를 통한 현실참여-박종화의 현실과 참여」(1977.6), 「민족으로 일관한 리얼리스트-‘북간도’의 작가 안수길」(1977.7), 「정의와 고발의 농촌작가-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 기타」(1977.12) 등등 한국근대문학의 주요 작가와 작품들을 정력적으로 분석했던 것이다.

 

요산재에서의 왕성한 집필활동

10년간에 걸친 자료수집과 주변 지식 축적을 기반으로 하여 1980년대에 들어 임종국의 연구는 드디어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이 무렵 그는 40여 년간 살아온 서울을 떠나 천안으로 이사했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기도 했고 또한 일제침략과 친일파 연구와 집필에 오로지 전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천안 교외에 외딴집을 짓고 스스로 요산재(樂山齋)라 이름 붙였다. 요산재는 이후 임종국의 영면 직전까지 일제침략사와 친일배족사 연구의 요람이자 산실이었다.

1982년 첫 결실로 <일제침략과 친일파>가 나왔다. 임종국은 서문에서 이 책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일제침략의 근간인 사상침략・자원침략․대륙침략의 세 측면과 그에 관련된 친일상을 기술했으나, 그것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임은 우선에 필자가 잘 알고 있다. 종교침략․문화침략․경제침략․교육침략 기타에 걸친 병자수호조약 이래 70년의 친일을 어떻게 조감 할 것인가? 그야말로 현기증이 날 문제이지만, 이 책이 다룬 세 측면에 대해서만은 그런대로 개요는 서술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제침략과 친일파>는 본문에서 서술한 세 측면을 기둥으로 해서, 종교침략․문화침략 기타가 그 기둥을 보좌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후 1984년에 일제총독부 고관들의 침략 이면사를 다룬 <밤의 일제침략사>를, 1985년에 강화도 조약 이후 70년간 일제의 사상탄압을 연구한 <일제하의 사상탄압>을 출간했다. 1987년에 그는 일제하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72명이 쓴 108편의 친일 글을 엮어 <친일논설선집>을 펴냈다. 머리말에서 그는 과거의 친일논설을 새로이 발굴하여 드러내는 작업의 의미를 “민족의 제단 앞에서 허물 있는 자는 허물을 벗어 도약의 제수로 바칠 것이며, 허물 없는 자는 그것
을 음복하되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썼다. 단기간 이만한 분량의 논설을 엮을 수 있었던 것도 기존의 치밀한 자료 축적 결과였던 것이다.
1977년의 「일제말의 친일군상 실태」부터 1987년의 <친일논설선집>까지 여러 저작과 수많은 논설을 통해 친일문제와 일제침략사를 다루어 왔는데, 뭔가 부족한 점이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친일문제를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기 위해 ‘친일파총사’(전10권)를 구상하였다. 총론, 사상침략과 친일파, 정치침략과 친일파, 해방 이후 친일파, 경제침략과 친일파, 문화침략과 친일파, 만주․중국침략, 동양종교, 서양종교, 사회・교육침략과 친일파로 나누고 총론부터 1권씩 차근차근 쓰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2>를 내놓고 나서 그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다. 원래 건강 때문에 천안 벽지로 이사한 것인데 그동안의 무리한 집필과 어려운 생활형편으로 인해 몸을 돌보지 못해 지병인 폐기종이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지 모를 ‘친일파총사’ 발간을 성사시키고자 그는 몇몇 역사전공자를 접촉하여 공동 연구작업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쓸쓸한 죽음, 새로운 시작

임종국은 결국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환갑을 겨우 넘긴 1989년 11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타계소식을 듣고 그의 빈소에 여러 지인들과 연구자들이 찾아왔으나 그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임종국의 생애는 반골, ‘중뿔난 짓’만 골라하는 삶이었다. 그것은 일체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나왔다.
“이제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 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신라 고구려의 핏줄기인 줄 알았던들 나는!”(자화상, <친일문학론>). 기성의 관념과 지식, 역사 심지어 자신의 의식을 부정하고 나서야 새로운 길이 열렸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부터 그는 각성되었고 그의 각성은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과 새로운 역사 쓰기, 아울러 그에 걸맞은 치열한 삶을 스스로에게 요구했다.
그가 당시 각광받고 있던 독립운동사를 차치하고 민족사의 오욕을 밝히는 친일연구에 몰두한 것은 ‘민족사를 가장 그르친 것은 친일파’라고 한 그의 올바른 역사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숱한 자료를 뒤져서 한 장 두 장 쓴 15,000매에 달하는 친일인명카드는 민족사에 바치는 묘비명이었다. 그의 깊고 넓은 연구 성과는 이후 친일문제와 일제침략사 연구의 밑바탕이 되었고, 일반인들에게 오욕의 역사를 드러내어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게 하는 교과서가 되었다.
선생이 가신 지 16년이 지난 2005년 10월, 화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뒤늦게나마 선생의 지난하고 치열했던 작업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또한 그해 3월 임종국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11월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임종국상’을 제정하여 제1회 수상자를 내었다. 아직도 친일세력이 우리 사회 곳곳에 엄존한 현실 속에서 선생의 유지를 널리 알리고 새로운 민족사를 열어가는 것이 선생께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리라.(2006년 작성)

김민철・박광종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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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3)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 편집자주

 

7. 진달래 활짝 피다
감방에서는 겨울과 여름은 길고 봄과 가을은 짧다. 춥거나 덥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독재 권력이 땡깡을 부려도 시간은 흘러 추위가 풀리고 4월이 되자 온 구치소는 축제를 맞은 분위기로 변했다. 진달래가 활짝 폈기 때문이다. 내가 구속됐던 그 삼엄한 겨울에 피신 중이었던 김지하가 무슨 재주로 영치금을 넣어줘 깜짝 놀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잡혀와 나와 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바로 4.3 긴급조치 3호 위반자들과 함께였다. 유홍준(미술평론가, 명지대 교수)이 바로 내 옆방에 들어오더니 이어 강진 출신의 윤한봉(민주화 운동가), 일본인 하야가와 요시하루(早川嘉春) 등이 나와 같은 5사 하층으로 들어왔고, 앞 뒷동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꽉 들어차 서대문 구치소는 광복 이후 정치범이 가장 북적대는 때를 맞았다. 5동의 내 방과 거의 마주보고 있던 3동에는 인혁당의 서도원이 들어와, 자주 통방을 하면서 계속 안부를 확인했다. 그들은 우리의 빨간 딱지와는 달리 노란 걸 달았기에 ‘진달래’로 호칭했다. 온 구치소가 진달래 천지였다.
이때 같은 5사에는 방동규도 있었다. 문단에서는 구라라면 단연 황구라(황석영)판이었는데, 재야의 구라는 방동규였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주먹으로 날렸던 미남에 몸집이 튼실한 문제아였는데, 아버지가 백기완에게 아들 버릇 좀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백기완이 그에게 너 쌈 잘하니, 라고 물으니 한꺼번에 너덧 명은 문제없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귀싸대기를 갈기고는 “이눔아, 기껏 그런 조무래기들을 패대는 게 힘자랑이냐! 너 같은 녀석이 패대기쳐야 할 상대는 따로 있어!”라는 일갈로 대오 각성시켜 정작 싸울 상대가 누구인가를 일깨워 주었다는 설이 있다.
저 당송팔대가의 하나인 증공(曾鞏)이 천하장사 항우를 일러 “영웅본학만인적(英雄本學萬人敵, 영웅은 본래 만인을 대적하는 법을 배운다)”(<虞美人草>) 라는 명 구절을 상기시키는 멋진 장면이다. 이후 방동규는 백기완 사단에서 열심이었으나, 밥벌이 때문에 서독 광부 파견 1기생으로 나갔다. 돈을 모은 그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동물사회학을 청강한 뒤 조용히 귀국, 명동의 한 골목에다 양장점을 차렸다. 미남에다 건장한 체격, 거기다가 소르본 출신이라니까 뭇 숙녀들이 운집하여 엄청나게 돈을 모우는 재미에 주변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숙녀들의 예방에 묻혀 재미가 쏠쏠했던 그의 은밀한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문학평론가 구중서였다. 경기도 광주 곤지암 출신인 그는 고향의 풍광을 자랑하며 작가 신상웅, 등단하기 직전의 김지하, 서울대 철학과의 기인으로 <청맥> 편집으로 통혁당 때 혼쭐이 났던 시인 주성윤, 평론가 백승철, 그리고 나를 초대하여 곤지암 강변에서 천렵으로 한 나절을 즐기고 상경, 헤어진 뒤 몇몇(구중서, 신상웅, 김지하, 나)이 남아 명동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중서가 한 미남을 맞닥뜨리더니 “어, 너 언제 왔어?”하고 물었고, 그는 곤혹스러운 듯 어물거리더니 “나, 여기서 가게 해. 쉬었다가!”해서 들어가 보니 멋진 양장점이었고, 의자에는 아름다운 숙녀들이 디자인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방 배추(그의 별명)는 고객들에게 나중에 들려달라고 내보내더니 얼른 중국집에다 각종 요리와 술을 주문했다. 구중서가 우리 일행을 소개했고, 그는 촌각이 아깝다는 듯이 서독에서의 광부 체험부터 파리 풍경 등등으로 썰을 풀었다. 그의 썰 즉 구라에 우리는 웃기에 바빴는데, 구라라면 뒤지지 않는 김지하는 대뜸 그의 추임새부터 말꼬리를 잡아 자신의 썰을 풀어대며 제법 말상대가 되자 “형님, 형님이 배추니까 나는 동생으로 상추로 합시다.”하며 궁합을 맞춰버렸다.
아마 밤이 깊어서야 우리는 헤어졌을 것이다. 방 배추는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며, 우리만 알고 자주 들리라고 했다. 우리는 그 당부를 지켜 전혀 소문을 안 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한량기질이 도져서 스스로 백기완을 비롯한 여럿에게 연락, 거의 매일 양장점이 술판으로 이어지자 숙녀들이 다 발길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다시 빈털터리 처지에서 최전방 산악지대에다 엄청난 면적의 야산 개발권을 얻어 목장을 하게 되었다며 우리를 초청했다. 버스도 드문 그곳엘 찾아 갔더니 산 입구에서 해가 저물어야 밤에 산길을 더듬어 “방 배추”라고 고함을 질러대면서 찾아갔다. 명산대찰이 서기에 적합한 야산 중의 심산이었다. 거기서 우리가 갖고 간 술과 각종 간식을 다 털어먹으며 밤을 샌 후 헤어진 게 나와는 마지막 만남이었다가 서대문 호텔에서 대면하게 된 것이었다. 목장 일을 돕는 경상도 총각 하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북에서 내려오는 삐라를 주워 열심히 읽더라는 것이다. 그걸 소지만 해도 불법이었기에 모아서 다 태워버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이 총각이 설날 귀향해서 벗들에게 그 내용을 자랑삼아 북쪽 이야길 하니까 신고를 당해 연행, 어디서 들었느냐니까 방 배추를 지목하여 졸지에 연행, 구속당한 처지였다. 대질심문을 요청해 내가 언제 그랬냐고 그 총각에게 물으니 그는 쳐다보기는커녕 대답도 못했다. 그러자 조사관이 그럼 누구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느냐고 다그치니 고개를 푹 숙인 채 팔로 불쑥 방 배추를 가리켰다는 것이다. 이내 풀려나긴 했으나 억울함으로 따지면 나보다 더했다.

 

8. 재판, 그리고 석방 후 으악새 모임
문인간첩단 사건은 언론 방송들이 방정을 떨었던 것에서 날이 갈수록 점점 빛이 바래져 갔다. 더구나 우리 다섯 보다 더 <한양>지와 관계가 깊었던 문인들이 증인으로 나오면서 재판은 점점 희극처럼 변해갔다. 특히 구상 시인, 조연현 평론가의 증언은 분수령을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구상 시인의 증언은 관심의 대상이었는데, 감방 안으로 그가 증인으로 못 나올 것 같다는 소문이 들려와서 우리들은 서운하게 여기며 영감님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어느 재판 땐가 느닷없이 판사석으로 메모지가 전해졌다. 바빠서 증인으로 오기 어려운데 지금 시간이 나서 왔으니 당장 법정 증인석에 세워주길 바란다는 요지였다. 그는 여러 정황으로 미뤄볼 때 자신이 증인으로 출두한다면 온갖 반작용이 일어날 것 같아 안 나간다고 소문을 내고는 불쑥 후배 문인들을 위하여 등장한 것이었다. 이 사려 깊은 시인은 증인석에서 “여기 앉은 이 사람들보다 내가 <한양>지 사장(김기심 발행인과 그는 동향의 친구)이나 편집장과는 훨씬 더 가깝다”고 잘라 말하며, 무죄를 강변해 주었다. 조연현은 나의 등단 은사로 가까우면서도 문학관에서는 너무나 달랐는데, 매우 단호하게 자신과 <한양>지와의 친근감을 강조하며 이 사건의 무죄를 논리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별로 가깝지 않았던 작가 손소희 역시 단호하게 <한양>지의 발행인이나 편집장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언명해 주었다. 나의 대학 은사 백철은 일제하에서 카프 사건으로 투옥 경험이 있는 데다, 한국전쟁 전후해서도 온갖 풍상을 겪었기에 무척 긴장된 표정으로 어물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곤란한 대목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고 하여 우리를 긴장시켰으나 결정적인 쟁점에서는 분명히 부인해 주었다. 
1972년부터 안양교도소에 갇혀있던 마당발 정치인 김상현도 증인으로 등장했다. 기결수라 죄수복을 단정하게 입은 당찬 모습으로 그는 법정에 들어서면서 경호원들이 양쪽에서 부축하자 강하게 뿌리치며 혼자서 당당하게 우리에게 다가와 다섯 피고들에게 차례로 다 고생한다며 악수를 했다. 증인이 이렇게 당당한 건 처음 봤다.

 

<월간 다리> 1970년 9월호(창간), 10월호, 11월호

이 책을 들어 이런 저술을 남긴 김상현 의원 같은 분들도 있다며 반론의 자료로 삼았다. 박정희는 경제기획원 장관 김학렬로 하여금 이 책 5천 권 값 6백만 원을 지불토록 했고, 김상현은 그 돈을 밑천으로 윤형두(범우사 회장)에게 잡지를 하나 만들어 보자고 해서 시작한 게 월간 <다리>지였다. 창간 때 주간은 평론가 구중서였고, 그가 가톨릭에서 월간 <창조>를 창간하자 그리로 옮겨간 뒤에 내가 후임으로 갔다. 이래서 1970년대 초기의 박 정권 비판 잡지의 트리오였던 게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다리>, <창조>가 되었다. 이 잡지들은 끊임없는 필화와 직간접적인 탄압에 시달렸다. <다리>지의 권두언(김상현 명의)이 <아사히신문>에도 소개되는 등 당시 일본 언론은 무척 진보적이었다. 김상현이 나에게 일본에 가서 푹 쉬고 오라는 선심을 쓴 건 1972년 1월이었다. 나 같은 요시찰 인물이 여권을 내려면 3급 이상 비선출직 공직자의 보증인을 둘 이상 내세워야 했는데, 나를 하루아침에 국회의원 수행비서로 등록시켜 신원조회도 없이 며칠 만에 여권과 비자를 다 얻었다.
김상현과 함께 일본 여행 중 내가 소개해서 <한양>지의 편집장과 호텔에서 만나 축사도 구두로 불러주곤 했었다. 더구나 그는 일본문제의 전문가라 김기심이나 한양이 조총련이 아니라 민단 소속임을 분명히 했고 충분히 재판부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그밖에도 남파 전향 간첩을 비롯해 여러 증인이 나왔는데,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한양>지 편집장 김인재의 고향인 남해에서 상경한 모 농민이었다. 검찰 측 증인이라 우리는 무슨 거짓말을 하려나 바짝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검찰은 김인재가 6.25 때 ‘빨갱이’로 나서서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지요? 라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아입니더. 그는 절대로 그런 일을 않았심더. 그는 아주 얌전하고 착했심더.”라고 단호하게 잘라버렸다. 당황한 검찰은 “그럼 이 조서에 왜 날인을 했느냐?”니까 “보안대에서 와서 찍어라 캐서 찍은 겁니더.”라고 해서 온 법정은 와르르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판사는 얼른 그에게 끝났으니 나가라고 하자, “그냥 가면 됩니꺼?”라고 물어 된다고 하니 문을 열고 순순히 나가더니 이내 바로 되돌아 왔다. 판사가 왜 들어왔느냐니까 “차비를 준다고 캤는데 어디서 줍니꺼?”라고 해서 또 한 바탕 마음 푹 놓고 웃었지만 판사도 웃음을 제지하지 않았다.

국제앰네스티의 문인간첩단 피고인 석방운동 영문자료집인 <남한의 솔제니친> 표지와 목차

 

이쯤 되니 재판은 희극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양>지에 글을 많이 쓴 순서도 아니고, 그들과 자주 만난 친분관계의 깊이로 따진 것도 아니며, 돈과 선물을 많이 받은 서열도 아닌 그야말로 무작위로 뽑힌 다섯 명이었다.
여론은 단연 우리 편이었다. 문학인 297명의 진정서 제출, 국제앰네스티는 <남한의 솔제니친>이란 책자 발간과 세계적인 석방운동, 일본 문인들의 발빠른 석방운동과 서명 작업 등등으로 국제적인 관심사로 변해버린 ‘문인간첩단 사건’은 정작 한국 사회에서도 ‘간첩’이란 게 어마어마한 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조작될 수도 있구나 하는 인식의 변모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소책자를 만들어 대량 배포했는데,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 대학 교수가 나를 만났던 기억을 되살리며 지원을 호소해 주었다. 일본에서는 진보적인 인권변호사의 상징이었던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가 재판 때마다 거의 방청하여 그 정황을 해외에 널리 알려주기도 했다. 그는 일본의 그릇된 역사교과서 바로잡기부터 재일한국교민의 인권문제와 북한 돕기 등에 관여해 온 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감방의 밤은 왁자지껄하다. 그건 느끼기에 따라 시장바닥 같기도 하지만 온갖 벌레와 동물들의 대화로 시끌시끌한 여름 밤 숲속 같기도 하다. 그 소리들은 불협화음이지만 재밌다, “야, 이 도둑놈들아, 욕 좀 하자아아아”하면 바로 “네에미 씹니다.”가 나오고 이어 “네에미 씹이 씹이다.
”에 꼬리를 물고 “네에미 씹이 씹이 씹이다”라며 ‘씹’자가 한자씩 이자를 붙여 나가다가 “X방 000 깨져라” 하면 “*** 뒷문 가서 깨져라” 소리 지른다. 깨져라는 죽으라는 것, 뒷문은 사형장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떤 죄인도 깨지기를 바라진 않는 게 감방의 정서다. 
“야 임마, 3대 째 징역 살아라”, “X방, 원숭이 폭 삶아 보낸다”라고도 했다. 원숭이는 일제 때부터 끔찍하게 재수 없는 상징으로 써온 저주로 그걸 삶기까지 했으니!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머니—”하고 목 놓아 부르는 소리가 며칠 째 계속 나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아, 집에 가고 싶다”는 하소연도 나왔다.
“어이 X방 000, 잘 자. ***(여자 이름) 참 안 됐어. 그 애 십년 후에 애나 낳을 수 있을까?”라는 근심도 터져 나왔다. 어떤 노처녀가 개나리(긴급조치 위반 상징)로 잡혀 온 걸 동정하는 말에, “야, 걱정 마. 그땐 국민소득 1천 5백 달러는 될 테니까 자식 없어도 사회보장제도가 잘 될 테지”라는 처방전도 나왔다. 이어 누군가 “잘 있거라, 나는 내일 목포 간다”라고 소리 지르니 얼른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 목포행 완행열차”라는 구성진 <대전 발 0시 50분>(원제목은 <대전 브루스>)을 불러준다. 실제로 서울역을 출발, 대전에서 0시 50분에 대전으로 출발했던 제33열차는 1959년에 생겼다가 이듬해에 시간이 바뀌어 사라졌으나 노래는 그대로 남았다.
8차에 걸친 지루하고 따분한 심리가 끝나고 6월 28일 금요일이 제1심 판결 날이었다. 밖에서는 아예 다 풀려날 줄 알고 리영희 선생은 희대의 명저 <전환시대의 논리>를 출간하고서 그 출판기념회를 그날 저녁으로 잡았다. 우리가 풀려나면 다 참석하기 쉽게 하려는 배려였다. 그런데 기대를 저버린 채 정을병 혼자만 무죄였고, 김우종과 나는 집행유예, 이호철과 장백일은 실형이 선고되었다. 풀려나도 개운찮은 건 이호철・장백일의 실형(둘 다 2심에서 석방)과, 결국 그간 지녔던 사회적인 모든 직책과 활동이 깡그리 백지화 되어버린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복직도 복권도 안 된 채 요시찰인물로 살아야만 했다.
‘관제(官製) 빨갱이‘란 단어가 얼마나 허황된 독재권력의 산물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자, 그 피해로 일생을 불행하게 살아야만 되었던가의 본보기가 바로 이 사건이었다. 내가 정식으로 복권된 것은 1998년이었다.

 

출소 후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 초대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어머니, 두 살 된 아들(민)을 안은 아내 고경숙, 나카다이라 변호사와 동행자, 뒷줄 정을병, 임헌영, 미상

 

바로 그해 여름 즉 1974년 8.15 경축식은 육영수의 저격 사건이 있었는데, 이호철은 감방 안에서 밥맛이 떨어질 정도로 흥분하며 석방을 고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둘은 예상대로 우리보다 3개월 더 옥살이를 한 뒤에야 2심에서 석방됐다.
그해 연말, 정확히는 12월 9일에 유신반대파였던 정치인 3인방인 김상현, 조연하, 조윤형이 안양교도소에서 출감했다. 갓 출옥한 김상현 환영을 겸한 송년 모임에서 이 풍진 세상을 소일하고자 으악새 모임이 만들어졌다. 한승헌, 장을병, 리영희, 이상두, 윤현, 김상현, 윤형두에다 나중 김중배, 한완상이 추가됐고 나는 최연소 회원으로 합세했다. 유신통치 시절의 유일한 여흥이었던이 모임의 <으악새 선언>은 한승헌이 작성했는데 실로 명문이다.

 

오늘 우리는 ‘체’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허울 좋은 도덕의 멍에 때문에, 처세와 체면 때문에 ‘나’를 속박해온 ‘체’를 벗어 던지기로 한다. 자신을 학대해온 1년을 묻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산하기로 한다. 생각하면 얼마나 거짓생활에 이끌려 다녔던가. 우리의 고뇌와 피로를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 아니던가. 화려한 위장보다는 처참하더라도 진실의 목소리를 우리는 그리워한다. 남을 속이는 기만보다는 자신을 속이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도 불가한 것인가를 새삼 느낀다….
이에 우리는 겉으로 그럴듯하면서도 내심으로 외롭고 불행했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나아가 그런 위로라도 없이는 이 해를 잊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가슴을 마주 대하는 공동의 술상 앞에 나와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전원의 뜻으로 선포한다.

1. 오늘 이 자리에서는 누구나 솔직해야 한다. 솔직할까 말까 망설이는 자는 천추의 한을 면치 못할 것이다.
1. 오늘 이 자리는 저질을 우대하는 자리다. 인간의 태어남이 곧 저질의 부산물인 고로 저질을 욕하는 자야말로, 태어남을 욕하는 자니라.
1.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도록 한다. 어제와 오늘뿐 아니라 내일도 잊어버리라. 내일 내일 하지만 언제 내일이라는 것이 한 번이라도 있어봤나. 기다렸던 내일이란 것도 당하고 보면 항상 오늘이었지 않은가.
1. 오늘 우리는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기를 맹세한다. 사람에게서 기분을 빼놓으면 주민등록증밖에 남을 것이 없다. 괜히 호마이카질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발산에 일로매진하기를 다짐한다.
1. 만일 위와 같은 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거나 그로 인해서 이 자리의 무드에 금이 갈 염려가 있을 때에는 사회자가 본의 아닌 긴급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 긴급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하는 자는 아무런 벌도 받는 일이 없다.

 

주로 김상현이 스폰서를 모셔 오거나 자신이 지불하면서 맘껏 즐겼는데, 한정식, 양식, 일식집 고급부터 싸구려까지 두루 섭렵, 전전했다. 온갖 음담패설과 욕설이 담긴 속요들을 맘대로 불렀으나 춤을 추거나 여성을 들이진 않았다. 리영희가 여성이 동석하자 “낡은 부르주아” 운운하며 비토를 놓은 결과였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뭇 여성 펜이 많았던 한승헌이 자기 펜들만 초청하여 함께 하기도 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발광을 했을까. 익살과 와이당(猥談의 일어)에 일가견을 가졌던 김상현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 장군이 처했던 매독의 비극을 설파했다. 국제매독이라 고칠 수 없는 단계라서 그는 국내 명 의원은 물론이고 이웃나라까지 원정을 갔으나 한결같이 “잘라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점점 썩어 들어가 죽게 됩니다.”라는 진단이었다. 차마 그걸 잘라내기가 아쉬웠던 장군은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을지로 6가 허름한 골목의 중국인 명 한의를 찾아갔다. 늙은 한의는 안경 너머로 물끄러미 그 흉물을 쳐다보더니 “다른 병원에도 가 보셨습니까?” 정중히 물었고 “예, 다 다녀봤습니다”고 답하니 “뭐랍디까?”고 물었다. 장군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답했다. “다들 똑 같이 이걸 잘라내야 한답니다.
”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의는 “미친놈들! 자르긴 왜 잘라!” 했다. 이에 용기백배한 장군은 “그렇지요? 안 잘라도 되지요?” 하자 한의는 다시 “미친놈들!”을 서너 번 반복하기에 장군은 아예 희색을 띄우며, “예, 그렇지요! 안 잘라도 되지요?” 라고 용기 있게 답했다. 지그시 쳐다보던 그 명의는 다시 “미친 놈들! 그냥 둬도 뚝 떨어질 걸!”이라고 조용히 말했다.

이걸 1970년대의 유신통치 아래서 최상급 와이당이라고 내가 감히 평하는 것은 바로 그 한의사가 ‘역사적인 필연성’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그냥 둬도 떨어질 건 떨어지고 만다! 실제로 1970년대 중반 이후 모든 민주투사들과 학자들은 박정희가 죽어야만 유신헌법이 끝날 것으로 전망했다. 10.26 이후에 다들 망할 걸 알았다고들 하지만 내가 감히 증언한다. 이미 민주화 운동권조차도 그 군부독재 체제가 쉬 붕괴할 것이란 기대는 갖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 필연성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자는 건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결국 그는 이로부터 5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에 저격당함으로써 유신통치의 막은 내렸다. 그냥 둬도 뚝 떨어진 것이다. 그러고도 사건 44년 뒤인 2018년 6월에야 나는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이에 따른 형사적인 배상도 끝났다. 그러나 내 청춘을 빼앗겼던 민사적 배상 재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세칭 ‘문인간첩단 사건’은 산적한 간첩조작사건의 목록 중 비정치적인 것이라 대중적인 선동력이 강했다. 이승만 치하에서 첫 간첩 조작이었던 ‘국회프락치 사’에 이어 ‘조봉암 조작사건’을 거쳤는데, 박정희 치하에서는 ‘인혁당 사건’이 대중들에게 가장 강력한 호소력으로 작용했고, 유신통치 아래서는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간첩도 만들어 내는 독재’라는 인식을 널리 퍼트리게 작동됐다.

임헌영을 비롯한 문인간첩단 사건 관련자 전원 무죄 기사. <한국경제> 2018년 6월 24일자 기사

 

이런 조작술은 선거 때마다 ‘북풍’을 이용한 수구세력들의 기교가 다양화되어 널리 활용하므로써 각계각층에서 언제라도 필요하면 ‘간첩조작’을 수행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크게 보면 모든 조작사건은 다 정치권력이 날조해낸 결과였다. 민주화와 인권의 첫 걸음은 이런 ‘조작’이 불가능하도록 세상을 바꾸는 일인데, 정작 그 조작 전문가 집단이 민주화되자 사회의 그늘에서 여전히 ‘간첩’이 아닌 ‘여론’ 조작에 나서는 모양새가 참 우려스럽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자신들이 조작했던 사건들이 진짜라고 억지를 쓰고 있다. 진정한 민주화란 그 날조범들이 다시는 어떤 ‘조작’도 불가능하도록 사회를 정화하는 노력일 것이다.

목, 2021/04/29-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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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노을에 그리는 얼굴

최홍이 전 서울시 교육위원장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산 천부의 아들
아무나 낯익은 타향
누구도 낯선 고향 노을에
약지 자른 왼손 낙관
그 유묵 그리며 마음 숙인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순국 111주년 오늘에
2021. 3. 26

목, 2021/04/2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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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김순흥 광주지부장(전 광주대학교 교수)

당신들이 군사독재 밑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압니다.
당신들이 겪고있는 군부의 폭력과 학살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들이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낼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내일 아침에 갑자기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다음 주나 다음 달이나 내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는 여러분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자유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꿈과,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여러분 앞에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갑니다.
손에 손을 잡고 모두 함께 갑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여러분을 지지합니다.
세계만방의 모든 인민들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결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자유를 위해 나아갑시다.
민주주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갑시다.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미얀마 만세 !!!
민주주의 만세 !!!

※ 위 시는 김순흥 광주지부장이 4월 10일 광주광역시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매주 토요일 열리는 ‘미얀마 민주주의를 응원하는 광주시민’ 6차 딴봉띠 집회에서 직접 영어로 전달한 메시지다.

목, 2021/04/2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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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69]

권총을 지닌 그는 왜 이완용을 칼로 찔렀을까?
이재명 의사의 정확한 의거장소에 대한 재검토

이순우 책임연구원

여러 해 전에 몇몇 인터넷 사이트에 언제부터인가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의 키 높이에 관한 엉뚱한 주장 하나가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해서 살펴봤더니 김구 선생은 알고 보면 굉장한 장신거구(長身巨軀)였다는 것인데, 이를 입증하려는 듯이 창덕궁 인정전 월대에서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나란히 선 김구의 모습과 같은 것이 그럴싸하게 증거자료로 제시되어 있었다.
1947년 7월 15일에 개최된 한국민족대표자대회의 기념사진으로 찍은 이 장면만 놓고 보면 확실히 이승만의 신장에 비해 김구 쪽이 월등히 키가 커 보인다. 그래선지 이런 종류의 자료들을 근거로 어떤 이는 김구의 키가 190센티미터는 된다고 하고, 못해도 180센티미터는 넘는다고 공공연히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다 틀렸다. 김구 선생의 키에 대해서는 이미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서대문감옥에서의 수형생활과 관련한 대목에서 본인 스스로 써놓은 구절이 있으므로 이를 통해 명쾌하게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옥중의 고통은 여름, 겨울 두 계절에 더욱 심하다. …… 감옥생활에서 제일 고생을 많이 하는 사람은 신체가 큰 사람이다. 내 키가 5척 6촌 중키에 불과하나 잘 때 종종 발가락이 남에 입에 들어가고 추위도 더 받는다.
― 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02 개정판), 252쪽.

 

이로써 그의 키는 다섯 자 여섯 치(곧, 169.697센티미터)로, 딱 170센티미터에 달하는 것임을 알수 있다. 옛날 사람들의 평균체격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큰 키로 볼 수 있겠으나 터무니없이 장신거구라고 추측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신장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렇듯 김구 선생이 남겨놓은 <백범일지>는 조금만 세심하게 탐독하면 근현대사의 사건, 인물, 현상 등과 관련한 여러 가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단서들이 수두룩하게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과는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이 책에 수록된 것으로 개인적으로 많이 기억에 남는 얘기의 하나는 이재명(李在明, 1887~1910) 의사와 얽힌 일화(逸話) 한 토막이다.

바야흐로 1909년의 초겨울로 막 접어들던 어느 날, 김구와 노백린(盧伯麟, 1875~1926) 둘이 함께어울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우연히 재령 여물평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하필 그날 그 동네 진초학교의 여교사인 오인성(吳仁聖, 1891~?)의 남편이 되는 이가 부인을 위협하고 매국노(賣國奴)를 일일이 총살하겠노라고 소리치며 동네 어귀에서 단총(短銃, 권총)을 쏘아대는 통에 큰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자 김구와 노백린은 짐짓 이 사람을 불러 자초지종과 신상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되었고, 그 결과 그를 “시세의 격변 때문에 헛된 열정에 들뜬 청년”으로 판단하여 “의지를 더욱 강하고 굳게 수양한 다음에 총과 칼을 찾아가라”고 타일러 그가 소지했던 총과 칼을 넘겨받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하지만 아뿔싸, 이러한 마무리가 전혀 뜻밖의 결과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동아일보> 1924년 11월 16일자에 게재된 이재명 의사의 인물사진이다. 이 당시1909년 12월 의거 때의 동지였던 이동수(李東秀)가 궐석재판의 시효만료를 얼마 앞두고 체포되자, 이와 관련하여 이재명사건에 대한 옛 자료와 관련기사들이 잇달아 신문지상에 쏟아져 나오면서 이 사진도 지면에 함께 소개되었다.(왼쪽)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京城府一筆每地形明細圖)>(1929)에 표시한 이재명 의거와 관련한 주요 공간의 배치이다. (1)은 불란서교회당(즉, 명동성당), (2-1)는 특허국 청사(옛 양향청), (2-2)는 특허품진열소(옛 양향청), (3)은 이완용 저동본가(옛 남녕위궁), (4)는 조중응의 집을 나타낸다.(오른쪽)

 

뉘가 알았으랴, 그가 며칠 후 경성 이현(泥峴)에서 군밤장수로 가장하고서 충천하는 의기를 품고 이완용(李完用)을 저격하여 조선 천지를 진동하게 할 이재명 의사인 줄을. 그는 먼저 인력거를 끄는 차부(車夫)를 죽이고 이완용의 생명은 다 빼앗지 못하고 체포되어 순국하였던 것이다.
……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 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02 개정판), 213~214쪽.

 

이재명 의거는 우선 이완용을 처단하려다가 끝내 미수에 그쳤던 사건이지만, 원래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 1868~1912)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을 모두 응징하려는 계획에 따라 진행된 거사였다. 일찍이 일제가 강요한 두 차례 협약(協約)의 부당성에 그렇잖아도 분개하던 차에, 때마침 1909년 12월에 이르러 일진회(一進會)가 이른바 ‘일한합방 청원(日韓合邦 請願)’을 위해 「정합방 상소문(政合邦 上疏文)」, 「통감부에 보내는 장서(長書)」, 「전국 동포에 대한 성명서(聲明書)」 등을 제출하는 등 친일매국의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더구나 이러한 시국의 변화와 관련하여 그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있는 이완용이 그동안의 전력에 비춰보아 이번에도 반드시 합방의 협약 체결에 이를 것이라는 점이 충분히 예견되고 있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이완용과 이용구 두 사람에 대한 응징은 불가피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이에 이재명 의사는 이들을 처단하고자 함께 결의한 김정익(金貞益), 김병록(金丙錄), 조창호(趙昌鎬), 이동수(李東秀), 오복원(吳復元), 박태은(朴泰殷), 김태선(金泰善), 김용문(金龍文), 이응삼(李應三), 김병현(金秉鉉), 이학필(李學泌), 김이걸(金履杰) 등 여러 동지들과 협력하여 거사를 실행에 옮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909년 12월 22일에 경시청(警視廳)에서 작성한 <차압조서(差押調書)>에는 피차압인(被差押人)이 ‘노백린’으로 표시된 “삿쿠(가죽갑)에 든 단총(サック入 短銃)”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혹여 이것이 바로 <백범일지>에 등장했던 그 권총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일제에 의해 이른바 ‘모살미수 및 고살사건(謀殺未遂 及 故殺事件)’으로 명명된 이재명의거와 관련하여 작성된 「이재명 등 13인 판결문(경성지방재판소, 1910년 5월 18일)」 자료를 보면, <백범일지>에서 언급된 상황과는 달리 이재명 의사가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처단하려고 했을 그 시점에 그는 명백히 김태선에게서 건네받은 단총 한 자루를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아니더라도 그 당시의 여러 신문보도에는 ‘5연발 단총’이니 ‘7연발 권총’이니 하여 이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거듭 등장할 뿐더러 1910년 5월 13일에 경성지방재판소 제1호 법정에서 열린 공판에서도 재판장이 “피고는 육혈포(六穴砲, 권총)를 지니고 있었는가?”라고 묻자 이재명 의사가 “그렇다”라고 대답한 내용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오르는 질문은 한 가지이다. 왜 그는 권총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가 몸에 총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완용을 처단할 당시에 그 무기로 단총(短銃)이 아닌 단도(短刀)를 선택한 까닭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자료가 없는 관계로 아쉽게도 그 연유를 자세하게 풀어낼 방도가 없다. 겨울철에 대개 두터운 옷을 착용하므로 칼을 사용하는 것이 불리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원래 단총으로 저격하려 했으나 총이 격발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근접한 위치였기 때문에 굳이 총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칼만으로도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인지는 전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대한민보> 1909년 12월 23자에 수록된 「총상 조난 전말(摠相 遭難 顚末)」 제하의 관련 기사에는 “그가 몸에 권총을 품고 있었어도 총 한 발 쏘지 못했다”라고만 간략히 기술되어 있다.

 

[범인소성(犯人素性] 범인(犯人)의 성명(姓名)은 이재명(李在明)이오, 연령(年齡)은 21인데 평양인(平壤人)이라 하며 6년 전에 미국 상항(米國 桑港, 샌프란시스코)에 유학(留學)하였다가 1개월 전에 귀(歸)한 자(者)인데, 목하(目下) 한성 입정동 백소사 가(漢城 笠井洞 白召史家)에 기류(寄留)하는 자(者)이라. 신문실(訊問室)에 횡와(橫臥)하여 취조(取調)에 응(應)하는데 언어(言語)가 명석(明晣)하고 태도(態度)가 자약(自若)하다 하며 신(身)에 5연발 권총(五連發拳銃)을 회(懷)하였어도 1발(一發)을 방(放)치 못한 자(者)이라 하며 (하략)

 

그리고 1909년 12월 22일에 경시청(警視廳)에서 작성한 「차압조서(差押調書)」를 보면, 피차압인(被差押人)이 ‘노백린(경성 북부 계동 7통 6호)’으로 표시된 “삿쿠(가죽갑)에 든 단총(サック入短銃)”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데, 혹여 이것이 바로 <백범일지>에 등장했던 그 권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재명 의사가 왜 이완용을 처단하는 자리에서 권총을 지니고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인지는 앞으로 누군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이왕 말이 난 김에 이 대목에서 이재명 의거와 관련한 궁금증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그것은 정확한 의거장소가 어디인지에 관한 부분이다. 현재 명동성당의 출입구 앞쪽에 서울특별시에서 설치한 ‘이재명 의사 의거터’ 표석(1999년 11월 설치)이 엄연히 남아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의당 그 자리가 ‘명동성당 앞’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명동성당 앞쪽 보행도로에 설치되어 있는 ‘이재명 의사 의거터’ 표석(1999년 11월, 서울특별시 설치)의 모습이다. 이곳에는 이재명의 생몰연대가 ‘1890~1910’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여러 가지 기록으로 비춰보아 출생연도는 1887년의 잘못인 듯하다.

김명수(金明秀) 편, <일당기사(一堂紀事)>(일당기사출판소, 1927)에 수록된 이른바 ‘종현 카톨릭교당 앞의 조난사건(遭難事件)’ 관련 참고도판이다. 사진 아래에 “교당 앞 동측 판로(坂路, 언덕길)”라고 적은 것은 이곳을 피습지로 인지하고 있다는 뜻인 듯하다. 뒤쪽으로 명동성당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고, 담장에는 ‘계성보통학교(啓星普通學校)’ 간판이 붙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재명 의거에 관한 각종 자료별 서술 내용 비교

하지만 이재명 의거와 관련하여 그 시절에 생성된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면, 세부 사항에 들어가서는 제각기 조금씩 다르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 금세 파악이 된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의 보도에는 ‘외율상(煨栗商, 군밤장사)’으로 변장하고 기다렸다고 하였으나 <황성신문>의 보도에는 그런 언급은 없고 ‘배광양복(背廣洋服, 세비로양복)’이라거나 ‘단발양복(斷髮洋服)’이라고 적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국민신보>의 경우에는 이와는 달리 그의 복장이 ‘흑주의(黑周衣, 검은 두루마기)’라고 채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의거현장의 구체적인 위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간략하게 ‘불란서교회당 앞’이라고만 서술한 자료가 일반적이지만, 천주교당 문앞 약 7, 8칸(間 ; 1칸=1.818미터) 지점이라거나 동측 판로(坂路, 언덕길)라거나 그게 아니라면 아예 특허국진열소 앞 이라고 적고 있는 사례도 여럿 눈에 띈다. 이렇게 본다면 명동성당 앞쪽에서 이완용의 피습지로언급되는 지점은 자료에 따라 최대 100미터 남짓한 편차를 두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셈이 된다.

<황성신문> 1909년 3월 5일자에 수록된 탁지부 건축소의 ‘건물매각 입찰광고’이다. 이를 통해 옛 양향청 자리(당시 특허국 특허품진 열소가 있던 곳)에 농상공부 신축청사가 들어선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 농상공부 신청사가 건립될 당시에 제작된 「농상공부 부지지균공사 평면도」이다. 가운데 농상공부 청사가 들어서는 곳은 종래 특허품진열소가 있던 지점이고, 그 왼쪽(북쪽)에 특허국 청사(옛 위수병원 터)가 자리한 것이 보인다. 오른쪽(남쪽)에 있는 산림국 자리도 모두 원래 양향청에 포함된 영역이었다. (ⓒ국가기록원)

조선은행에서 펴낸 <픽토리얼 조센 앤 만츄리아(Pictorial Chosen and Manchuria)> (1919)에 수록된 상품진열관(商品陳列館)의 전경 사진이다. 이 건물은 옛 양향청 구역 안에 있던 특허품 진열소를 헐고 1910년 8월에 신축 이전한 농상공부 청사로 건립된 것이었으므로, 이곳 문앞 일대는 이완용의 피습지이자 인력거꾼 박문원의 절명 장소에 해당하는 공간인 셈이다.

미국인 사진여행가 엘리아스 버튼 홈즈(Elias Burton Holmes)가 남긴 <버튼 홈즈의 여행 강의(The Burton Holmes Lectures)> Vol. 10(1901)에는 명동성당 쪽에서 서울 시내 쪽으로 담아낸 파노라마 전경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사진의 오른쪽으로 기와담장 안쪽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옛 양향청(糧餉廳) 자리이다. 그러니까 불과 8년 후에 이곳의 앞길은 이완용을 처단하려는 이재명 의거의 현장으로 바뀌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특허국진열소’라는 것은 정식명칭으로 ‘통감부 특허국 특허품진열소(統監府 特許局 特許品陳列所, 1909년 11월 18일 설치)’를 가리키는데,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물품조달과 급료 등 재정을 관리했던 기구였던 양향청(糧餉廳, 영락정 1정목 1번지 및 2번지 포괄)’이 자리했던 구역이었다. 이 일대의 면적은 2,517평에 달할 정도로 꽤나 너른 공간이기 때문에 이곳에 특허국 청사(特許局 廳舍, 영락정 1정목 1번지에 해당)도 함께 존재하였다.
특허품진열소는 그 이후 1910년 5월 21일에 폐쇄되고, 그 자리에는 농상공부 청사(農商工部 廳舍, 1910년 8월 22일 신축 이전)가 새로 건립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이곳은 한때 조선총독부 취조국이 사용했다가 1912년 11월부터 상품진열관(商品陳列館)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총독부 전매국 청사와 경성세무서 등의 용도로 바뀌어 사용된 바 있다. 경성부에서 편찬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1936), 135쪽에는 이른바 ‘이완용의 조난’과 관련하여 “인력거꾼 박원문(朴元文)도 현 전매국(專賣局) 앞까지 기어와서 마침내 절명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이곳은 특허품진열소 앞이라는 말과 동일한 표현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해둘 만한 사실은 이곳 특허국 청사(특허품진열소 구역 포함)와 북쪽으로 담장이 맞붙어 있는 곳이 바로 총면적 2,244평이나 되는 옛 남녕위궁(南寧尉宮) 터이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저동본저(苧洞本邸, 황금정 2정목 148번지)였다는 점이다. 또한 동쪽으로 나란히 붙어 있는 곳에는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 1860~1919)의 거처(영락정 2정목 85번지; 면적 499평)가 자리하고 있었다. 친일매국에 관한 일에 있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째가라면 서러워했을 두 사람이 알고 보니 실제로 ‘이웃사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간배치는 이재명 의사의 칼에 찔린 이완용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내막과도 관련이 있다. 그의 집 위치가 피습현장과 수십 미터 상간에 불과하였으므로 재빠르게 다친 몸을 집으로 옮길 수 있었고, 그리하여 가까운 곳에 자리한 한성병원(漢城病院)의 일본인 의사들에 이어 급히 달려온 대한의원장 키쿠치 죠사부로(大韓醫院長 菊池常三郞)의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력거꾼 박원문이 절명(絶命)한 장소로 <대한민보> 1909년 12월 23일자에 ‘특허국 진열소 앞’이 아닌 ‘총상저 문전(總相邸 門前)’이라고 표시된 것도 두 곳이 사실상 동일한 공간의 다른 표현인 탓이기도 하다.
이상의 내용에서 살펴본 바를 종합하면 이재명 의사의 의거장소를 일컬어 그저 ‘명동성당 앞’이라고만 단순화해서 표현되어도 좋을 만한 것은 전혀 아니라고 판단되며, 여기에는 의당 역동적인 의거현장의 재구성 작업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명동성당 앞쪽 언덕길 초입에서 시작되어 특허품진열소(지금의 남대문세무서 자리) 앞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 진행과정을 요약도(要約圖) 형식으로 담아내어 현장 주변에 안내판을 설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듯하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의 자료이긴 하지만, <삼천리> 제6호(1930년 5월 1일 발행)에 게재된 「야순탐보대(夜巡探報臺)」 코너(24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에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최후(最后)의 일언(一言)] 명동천주교당(明洞天主敎堂)에 열린 백이의 황제(白耳義 皇帝)의 추도회(追悼會)에 참석(參席)하고 돌아오는 이완용(李完用)을 찌른 이재명(李在明)은 그때 포박(捕縛)을 당(當)하면서 영어(英語)로 I die for my Country! 라고 한 마디 부르짖었다고.

 

각기 다른 기록들을 잘 간추려 최대한 사실관계에 가깝게 의거현장을 재구성하여 바르게 알리는 것도 후대의 사람들이 바로 110여 년 전에 그가 외친 목소리에 호응하는 합당한 방법의 하나인지도 모를 일이다.

목, 2021/04/2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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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21년 상반기 특수분야 교원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교과서 사료 읽기 2 – 근대 사진 자료로 역사 읽기>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작년 교원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에 이어 5월14일부터 5월 16일까지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 읽기 2 – 근대 사진 자료로 역사읽기>를 진행하였다.
이번 연수는 교과서에 소개된 식민지역사박물관 소장 자료 중에서도 사진에 초점을 맞추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 자료를 직접 보고 활용법을 토론하며 교과서에 실릴 새로운 사료 발굴 차원의 다양한 사료 소개와 역사부교재 개발을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기존40명의 참가인원을 계획하였으나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연장됨에 따라 인원을 간소화하여 24명의 교사가 참여하였다.
5월 14일(금) 진행된 첫 강의 「사진엽서에 담긴 식민지 조선과 근대 표상」은 권혁희 강원대 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교과서나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많은 사진엽서를 제시하며 당시 일본 제국이 조선인을 야만적이고 미개한 모습으로 보이도록 의도를 담아 촬영하여 제작·보급했음을 상기시켰다. 특히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관광 상품화하여 그 홍보 수단으로서 사진엽서를 적극 활용하였던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평한 참가자들이 많았다. 이어진 강동민 자료팀장의 실습 시간에는 이러한 근대 사진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사이트를 소개하고 직접 접속해 보여주어 참가자들로 하여금 수업시간에 사진을 활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5월 15일(토)의 첫 번째 강의 「사진자료에 담긴 근대사의 공간과 사건」에서는 이순우 자료실 책임연구원이 근대시기 어떻게 사진 기술이 등장하고 보급되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짚었다. 이후 교과서에 활용된 근대시기 사진의 오류, 잘못 알려진 사진들의 원출처를 발굴해낸 과정 등을 통해 잘못된 출처인용의 교육적 위험성과 출처 확인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다. 
당일 두 번째 강의인 「사진과 삽화로 본 식민지 여성의 삶 -신여성과 일본군‘위안부’ 사이-」는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센터의 박정애 연구위원이 강사로 참여했다. 교과서에서는 신여성을 구여성이라는 비교대상을 전제로 하여 개화기의 새로운 문화와 패션을 접한 모습으로만 소개할 뿐 신여성들의 풍성한 작품 활동이나 사회 참여는 다루지 않는 모습을 꼬집었다. 또한 여전히 교과서에서 일본군‘위안부’를 피해자다움이 담긴 전형화된 모습으로 소비하고 있음을 짚으며 더욱 다면적인 접근과 풍성한 사례 소개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어진 실습 시간에는 노기 카오리 학예실 선임연구원이 직접 참여했던 일본군‘위안부’ 지도 제작 사례를 발표하고 직접 교사들이 지도를 그려보는 시간을 갖게 함으로써 일본군‘위안부’ 지도 제작의 의의를 깨닫고 교육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마지막 날인 5월 16일(일)은 김민철 연구위원의 강의 「일본군경의 사진첩 속 무단통치의 실상」으로 문을 열었다. 일본군경의 사진을 통해 헌병경찰제와 총독의 의미를 짚고, 당시 유생들의 일기를 통해 일본군경을 통한 무단통치는 곧 폭력지배의 일상화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강의 「사진에 담긴 식민지 조선의 농촌과 농민의 삶」은 이송순 고려대 교
수가 맡았다. 조선 농촌과 농민의 삶을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을 설명하며 토지조사사업과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한 일본 제국의 의도를 보여주었다. 또한 수많은 사진을 통해 당시 농촌과 농민의 삶을 더욱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모든 강의를 마무리한 후 김승은 학예실장의 인솔 하에 앞선 강의들에서 소개된 박물관 전시 자료들을 관람하고 실물 자료를 통해 강의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시간을 가졌다.
코로나에 더해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자리를 지키고 반짝이는 눈으로 강의에 집중하던 모든 참가자들과 함께 교원연수를 알차게 끝마쳤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올 하반기에도 교과서에 수록된 박물관 소장 자료를 중심으로 특색 있는 교원연수를 기획하고 있다. 관심있는 교사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수, 2021/06/02-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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