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임종국,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지역

임종국,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익명 (미확인) | 금, 2019/02/22- 16:22

임종국 선생의 생애를 온전하게 재구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선생에 대한 사적인 기록이 적은 데다 자료가 없는 시기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그동안 발표되었던 선생의 글을 최대한 수집해서 단편적이나마 선생의 생을 더듬어 보려 한다.

 

어린 시절
임종국은 1929년 10월 26일 경남 창녕군 창녕읍에서 임문호의 4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임문호는 천도교 청년 당수와 조선농민사 사장을 지냈고, 당대 대표적인 민족계몽운동가로서 오늘날 흔히 말하는 우파 민족주의자 가운데 중심인물이었다.

일곱 살 때인가, 형무소에 아버지를 면회 간 적이 있다. ‘의식 있는 조선인’이었던 까닭에 (아버지는) 그 후에도 한두 번 더 형무소를 드나들었다. 그러나 전쟁 말기 젊은이들에게 ‘지원병으로 나가라’는 연설을 했다. 그 당시 상황이 어떠했든 이것은 친일행적임에 틀림없다.(<민족정기를 살려야 합니다>, 월간조선 서병욱 차장 대우와의 인터뷰)

아버지의 이런 행적이 소년 종국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어릴 때 일이었기에 종국의 의식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식의 저 밑 어딘가에 아버지의 흔적이 있었을 것이다.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의 천도교단 내의 직책이 바뀌어 서울로 이사하면서 종국은 재동보통학교를 다녔고, 10대를 신설동에서 보냈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우리 집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만성루(萬盛樓), 오른쪽에 죽정(竹井)이라는 일인이 살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 집 기대(畿代)라는 소녀와 가까워져서 흔히 연정 비슷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다. 근로동원을 가서 꾀를 피우다 으레 “가찌노고다까라”(조선놈의 씨알머리니까) “아레 요보상다요. ”(저건 조선놈의 종내기야)라는 욕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검도하며 총검술을 배웠다. 배낭에 99식총과 대검을 찬 상급생들이 하늘만큼은 장해 보였다. ”조센진또 멘따이와 다다께바 다다꾸호도아지가 데루“(조선놈하구 명태는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맛이 좋아진다)라는 그 유명한 격언(?)을 들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났다. 배급쌀이라고 쌀 반 콩깨묵 반이 나오더니 나중에 쌀알만큼씩 부스러뜨린 국수 종류가 배급되고, 그러자 미구에 해방이 됐다고 세상이 벌컥 뒤집혔다. 나는
해방이 뭔가 하면서 덩달아 좋아했다.
이때 내 나이 17세. 하루는 친구놈한테서 김구 선생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에!~ 너 그, 김구 선생이라는 이가 중국사람이래!”
“그래? 중국사람이 뭐하러 조선엘 오지?”
“이런 짜아식! 임마 것두 몰라! 정치하러 온대.
“정치? 그럼 우린 중국한테 멕히니?”
지금 나는 요즘의 17세에 비해서 그 무렵의 내 정신 연령이 몇 살 쯤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식민지 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번 회의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자화상> 중에서)

1966년 〈친일문학론〉을 출판하면서 쓴 글이다. 민족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자신의 무지와 그 원인을 드러냄으로써 일제의 민족의식 말살정책과 그에 협력했던 사람들의 과오를 비판하기 위해 극적인 기법을 사용한 것이리라. 해방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다시 들어보자.

“우리는 졌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예, 조선이 독립하게 돼서 기쁩니다.
이런 소리를 10일 전 그러니까 8월 14일쯤에 했다면 영락없는 헌병대 영창감이었다.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일본군의 시선에 겁이 나서 나는 얼른 둘러댔었다.
“하지만 애써 싸운 당신네가 졌다는 것을 정말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군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씹어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20년 후에 만나자!”
(<술과 바꾼 법률책>, 『망국을 할 것인가』)

이 회고는 당시 경험과 훗날의 인식이 합쳐서 재구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일본이 다시 올 것이라는 인식은 1965년 대일 굴욕외교(한일협정)을 겪으면서 위기의식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위기의식은 그를 ‘친일문제’라는 지난하고 고독한 세계로 들어서도록 했다.

 

방황하는 청년
청소년기의 임종국에 대해선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게 없다. 다만 이 시기에 그는 시와 소설을 배우는 문학가 지망생이었음은 분명하다. 청년 임종국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된다.
전북 장수군에서 경남 함안군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육십령 고개가 있다. 이곳에서 그는 인민군에게 잡혀 안의로 가는 수십 리 내리막길을 인민군의 짐을 진 채, 행렬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길가에 즐비한 수십 구의 아군 병사 시체를 보면서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위정자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국방과 정치를 어떻게 다루었기에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도 못 돼 이곳 경상도까지 밀린단 말인가. 점심을 평양, 저녁을 신의주서 먹는다더니, 누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죄없는 청춘들만 저렇게 죽어 자빠져야 하는 것인가. 안의에 이르러 인민군 여덟을 무밭에 끌어 묻어준 후 나는 인민군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낙동강을 넘으면 고향인 창녕 땅. 가도 가도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나는 줄곧 분노로 가슴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술과 바꾼 법률책>)

피난살이 속에서 문학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고려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 시절 흔히 그렇듯이 가난한 수재라면 출세를 위해 고시라는 유혹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시 준비를 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작용했다. 육십령 고개에서 본 젊은 죽음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고시에 합격하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칼을 휘둘러 나라를 좀먹은 버러지들을 무청 자르듯이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고시 준비의 한 이유였다.

시골에 처박혀서 여섯 달 정도 비지땀을 흘리면서 민법, 형법 총론, 각론 8권을 송두리째 암기하였다. 판사든 검사든 이미 반 이상은 맡아 놓았다고 기고만장해서 다시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서울은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폐허의 도시이자, 먹고 잘 곳조차 마련되지 않은 수도였다. 팔자 좋은 친구들은 인삼, 녹용을 달여 먹으면서 고시를 준비했지만, 그는 밥 세끼 거르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더구나 한 달에 책 한 권을 완전히 외다시피 하는 강행군을 계속하니 체중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빈 강의실에 앉아서 형사소송법의 조문을 외면서도 마음은 끼니 걱정, 잠자리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운 좋게 절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고아 아닌 고아로 숙식하던 것도 불가능하게 된 데다 등록금이 없어 학교마저 휴학하게 되었다. 판검사가 되어 썩은 세상을 바로잡아 보겠다던 청년의 꿈은 끝내 잠자리와 끼니 걱정으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을 때 청년의 가슴속에서 중뿔난 소리가 들려왔다. 타고난 오기라 할까, 반골의 소리가 그를 유혹한 것이다.
권좌에 앉아서 많은 사람을 머리 숙이게 하지 못할 바에야, 내가 많은 사람에게 머리 숙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권력을 내 것으로 못 한다면 대신 자유를 가지면 될 게 아닌가. 권좌에 연연하고 뇌물에 머리 숙이는 치사한 인간이 되느니 철저하게 자유인으로 살자.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뜬구름 한 조각이 되어 권력 대신 하늘만한 자유를 내 것으로 하면서 사는 거다.(<술과 바꾼 법률책>)

이렇게 해서 그는 신주 단지 모시듯 하던 법률책을 술과 바꿔 버리고 말았다. 대신 중학 시절의 꿈이었던 문학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말처럼 ‘돌아온 탕아’가 된 것이다. 탕아의 길동무론 이상(李箱)이 함께 했다. 퇴폐와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를 위로한 것이 이상이었다. 〈민법총론〉 500 페이지를 한 달 만에 외워버린 천재(?)가 밥과 잠자리 걱정 때문에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자신이야말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아닌가. 이상이 죽은 지 20년이 되었건만 이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하나 없는 때였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이상을 발굴해서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스로 날지 못한 자신의 꿈을 이상을 통해서 실현시켜 보고자 했음일까.
〈이상론〉을 쓰고 그의 작품을 모아 〈이상전집〉 전3권을 출판하였고 틈틈이 써놓았던 시들을 발표하여 문단에 얼굴을 내민 후 몇 해 동안 술도 약간은 마셨다. 그러나 묵은 신문 잡지에서 이상의 작품을 뒤지면서 알게 된 1930년대의 사회는 그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공해 주었다. 작품인식의 한계성 문제, 즉 한 시대의 작품은 그 시대의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완벽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상투의 시대와 사회를 모르면서 상투꾼들의 생활감정을 말하는 한 결국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밖에 될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문학과 사회의 관련성, 또 그것이 문학사회사의 문제로 발전하면서 그는 이것을 평생의 연구과제로 삼은 것이다. 이리하여 1960년대 초엽에 그는 향토지 경남문학에 <물레방아론>을 발표했다. 문학사회학적 방법으로 나도향의 <물레방아>를 분석한 평론이다. 그는 이런 방법을 신문학 전체에 적용하여 문학사회사를 쓸 작정으로 본격적인 준비작업을 시작하였다. 1910~1945년의 매일신보를 뒤져서 정치 문화 사회면의 기사색인을 완결한 후, 그 작업을 다른 신문 잡지로 확산 시켜갔던 것이다. 2~3년 걸려서 이 작업을 하던 중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 준 사건이 일어났다. 1965년 한일회담이 타결된 것이다.

 

친일문학론 출간, 이후 일제침략•배족사 연구에 전념

1965년에 들어서마자 1월부터 제7차 한일회담이 개막, 6월 한일협정 정식 조인, 8월 한일협정 비준안 국회 통과라는 과정에서 보듯이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대학생들을 비롯한 거국적인 반대투쟁을 묵살하고 정권의 명운을 걸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일사천리로 처리하고 말았다.

20년 후인 1965년 여름,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그 여름은 뜨거운 여름이었다.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더니, 정말 20년 만에 쪽발이 놈들이 다시 몰려오게 되는구나! 그놈들은 일개 병사조차도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는 장관이란 사람이 ‘제2의 이완용이가 되더라도’ 타령을 하는 판이었다. 이완용이가 될지언정 한일회담을 타결하겠다면 그건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한일회담이란 말인가? 
회담이 타결도 되기 전에 그런 타령부터 나온다면, 그것이 타결된 후의 광경은 뻔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밀듯이 일세(日勢)는 침투해 올 것이요, 거기에 영합하는 제2의 이완용이과 박춘금…..얼마든지 또 생각날 것이다. 묵은 친일파들이 비판받는 꼴을 본다면 제2의 이완용과 박춘금이 그래도 조금은 주춤하겠지? 이런 생각에서 나는 『친일문학론』을 쓰기로 작정했다. (중략)
작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다. 2~3년 걸려서 만들어 둔 신문과 잡지의 게재 작품 기타 문화 사회면의 기사색인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별 카드에 옮겨서 찾아 읽고 비평만 하면 됐던 것이다. 그 기사색인은 문학사회사를 쓰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책인『친일문학론』의 기초자료로 요긴하게 전용된 셈이었다. 그 기사색인 덕분에 『친일문학론』은 복사기가 없던 시대라 자료의 상당 부분을 필사로 옮겨 베끼면서도 원고 2천매 탈고까지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일이 끝나면 다른 문화 분야 및 사회 경제 부분을 원고지 각 2천매씩 2권 정도로 계속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집필이 순조로웠던 반면에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문단의 반응은 냉담했고 책은 우선 팔리지 않았다….. 초판 3천 부를 파는 데 10년이 걸리더니 1975년부터 수요가 늘어서 지금 7판째가 찍혀나갔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실록 친일파』)

임종국은 한일협정 체결에 크나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절박한 심정으로 『친일문학론』을 썼던 것이다. 1965년 당시 친일파, 친일문학이란 말 자체가 금기시되는 풍토였다. 이광수, 홍난파, 김은호 등 이름 있는 문필가나 예술인들은 민족문학, 민족음악,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았고 그들에 대한 친일 시비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고 언급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광수, 최남선, 김동환, 모윤숙, 노천명 등 쟁쟁한 문인들의 친일작품을 발굴하고 이를 치밀하게 분석한 그의 고투(苦鬪)는 한국문학사뿐 아니라 한국현대사 연구의 전환을 가져오는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이 책이 서점에 배포되자 국내 지성계는 큰 혼란을 겪었고 매스컴의 인터뷰 요청도 빗발쳤으나 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문학계나 강단에서는 이것을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책의 판매도 아주 저조했다. 하지만 임종국은 이 작업을 하면서 친일파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게 되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민족사를 가장 크게 그르친 자가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말았다. 패주행렬 속에서 본 젊은 죽음들, 그들을 그 꼴로 만든 장본인이 친일파였다. 제2의 매국 반민법을 폐기한 것도 친일파였다. 한말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제1의 매국을 했고, 총독부에 영합하면서 친일을 했다. 해방 후에도 개과천선은커녕 반민법을 폐기하면서, 독재와 부패 끝에 5․16과 (10월)유신을 불러들였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임종국이 존경했던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친일파였고 또 그들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민족정기를 훼손했으니 그들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래서 그는 문단이 싫어지고 시나 소설을 쓰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임종국이 시를 쓰면 옹졸해진단 말야!’
언제던가 조지훈 선생님이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말씀이 내 중뿔난 생각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있었다. 남자 한평생에 붓을 잡았으면 몇 천 장 전적을 쓸 것이지, 원고지 서너 장을 시로 메운다는 것이 따분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서 일제의 침략사와 우리의 반민족사를 쓰자! 이리하여 나는 어느새 이사를 해도 문예지에 주소를 알리지 않는 괴팍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술로 바꾼 법률책」)

임종국은 시인, 문학평론가라는 딱지를 떼고 본격적인 친일․일제침략 연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길은 아무도 밟아본 적이 없는 길이요, 끝을 알 수 없는 미궁이었다.

1970년대로 들면서 나는 『친일문학론』의 계속작업을 조금씩 진행시켜 왔다. 그런데 파고들수록 엄청난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전 2권 4천 매의 계획이 전 8권 2만 매로 늘어나 버렸다. 1년에 2500매씩 써도 8년이니 여생을, 아니 그간의 자료조사기를 15년으로 쳐도 평생을 그 일에 매달린 꼴이 되고 말았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자료수집, 생활 방편으로서의 글쓰기

1970년부터 임종국은 본격적인 자료조사 작업에 들어갔다. 원고료와 인세의 상당 부분을 자료 구입비에 쏟았고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안 다닌 곳이 없었다.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를 비롯한 각 대학 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지에서 매일 살다시피 하면서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어서 일일이 필사했다. 이른바 ‘임종국카드’라 불리는 1만 5천여 매의 친일인명카드는 이때부터 작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친일파 연구는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인 연구였다. 아무리 신빙성 있는 증언이 있다 해도 일제시대 문헌자료에 나오지 않는다면 증거자료로 채택하지 않았다. 연구주제가 친일경력을 파헤치는 것이니 만큼 철저한 고증이 없다면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의 지나치리만치 꼼꼼하고 실증적인 연구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연구결과의 첫 성과는 1977년 8월 <대화>에 처음 게재되고 수정 보강하여 <해방전후사의 인식1>(1979)에 실린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였다. 76쪽에 달하는 이 글은 친일파 연구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논문이라 할 수 있다. 임종국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 일제하 전 분야에서 활동한 친일파들과 친일단체를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10년간에 걸쳐 총독부문서와 관보, 각급 관공서 자료와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신문기사, 삼천리, 동양지광 등 잡지 등에서 모은 자료를 집약하여 전체적인 친일군상의 윤곽을 잡아놓은 것이다. 이 글은 이후 후학들에게 친일파 연구의 전범(典範)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 시기에 남긴 관련 글들은 다음과 같다.
「중추원참의」(<월간중앙>(이하 동일) 1973.5), 「징용」(1974.1), 「학도지원병」(1974.3), 「일제 고등계형사」(1974.8), 「일제하의 인력, 물자 이렇게 수탈됐다(1976.5), 「조선주둔군사령부」(1978.8).
임종국은 고려대학교를 마친 이후 별다른 직장 없이 여기저기 출판사를 옮겨 다녔다. 고시공부때 부실한 식사로 몸이 허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질상 직장생활이 맞지 않았다. 직장이라 할 만한 것은 2년 정도 근무한 신구문화사가 전부라 할 수 있다. 한편 늦게 장가든 임종국은 가솔까지 딸려 항상 생활이 넉넉지 않았다. 그동안 펴낸 책들의 인세와 각종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여 받은 원고료가 수입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침략사와 친일배족사 자료를 수집하는 와중에 틈틈이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요구하는 글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신여성시대의 굵직한 연애사」(<여성동아> 1967.11), 「개화의 발자취-단발령 야화」(<여성동아> 1968.1), 「명기열전-기생풍속도」(<여성동아> 1969.1), 「해방전야-빼앗긴 시절의 이야기」(<여학생> 1971), 「여학생풍물지-품삯 받고 다니던 학교」(<여학생>), 「광고면에 나타난 사회의 변천」(<독서신문> 1971.3.21), 「사회풍속야사-최초의 요정 정문루」(<세대> 1971.5), 「일화로 엮은 돈이야기」(<신여원> 1973.7), 「정절과 슬기의 설화」(<신여원> 1973.12), 「개벽지 야화」(<소설문예> 1977.8),
「윤심덕과 사의 찬미-좌절과 허무의 엘레지」(<여고시대> 1979.4) 등등 다양한 주제의 방대한 원고를 갖가지 매체에 발표했다. 이런 글들이 쉽사리 읽히는 읽을거리라지만 허투루 볼 수 없는 내용이다. 당시 문화사나 풍속사에 대한 이해가 없던 시절에도 임종국은 이런 주제에 대해서 사회문화적 접근을 통해서 그 자체의 사회적 의미를 파헤치는 데 노력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이미 축적해 놓은 문헌학적 자료와 함께 동시대상의 박학한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근대 한국문학에 대한 문학사회사적 분석도 병행해 나갔다. 기존에 발표했던 문학비평을 묶어 <한국문학의 사회사>(1974)를 출간한 이후에도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의 기수-채만식」(1976.11), 「관념적 상상의 문학-전영택의 ‘화수분’과 ‘소’」(1976.12), 「지식인의 비극과 좌절 ‘김강사와 T교수’」(1977.3), 「역사를 통한 현실참여-박종화의 현실과 참여」(1977.6), 「민족으로 일관한 리얼리스트-‘북간도’의 작가 안수길」(1977.7), 「정의와 고발의 농촌작가-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 기타」(1977.12) 등등 한국근대문학의 주요 작가와 작품들을 정력적으로 분석했던 것이다.

 

요산재에서의 왕성한 집필활동

10년간에 걸친 자료수집과 주변 지식 축적을 기반으로 하여 1980년대에 들어 임종국의 연구는 드디어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이 무렵 그는 40여 년간 살아온 서울을 떠나 천안으로 이사했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기도 했고 또한 일제침략과 친일파 연구와 집필에 오로지 전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천안 교외에 외딴집을 짓고 스스로 요산재(樂山齋)라 이름 붙였다. 요산재는 이후 임종국의 영면 직전까지 일제침략사와 친일배족사 연구의 요람이자 산실이었다.

1982년 첫 결실로 <일제침략과 친일파>가 나왔다. 임종국은 서문에서 이 책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일제침략의 근간인 사상침략・자원침략․대륙침략의 세 측면과 그에 관련된 친일상을 기술했으나, 그것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임은 우선에 필자가 잘 알고 있다. 종교침략․문화침략․경제침략․교육침략 기타에 걸친 병자수호조약 이래 70년의 친일을 어떻게 조감 할 것인가? 그야말로 현기증이 날 문제이지만, 이 책이 다룬 세 측면에 대해서만은 그런대로 개요는 서술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제침략과 친일파>는 본문에서 서술한 세 측면을 기둥으로 해서, 종교침략․문화침략 기타가 그 기둥을 보좌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후 1984년에 일제총독부 고관들의 침략 이면사를 다룬 <밤의 일제침략사>를, 1985년에 강화도 조약 이후 70년간 일제의 사상탄압을 연구한 <일제하의 사상탄압>을 출간했다. 1987년에 그는 일제하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72명이 쓴 108편의 친일 글을 엮어 <친일논설선집>을 펴냈다. 머리말에서 그는 과거의 친일논설을 새로이 발굴하여 드러내는 작업의 의미를 “민족의 제단 앞에서 허물 있는 자는 허물을 벗어 도약의 제수로 바칠 것이며, 허물 없는 자는 그것
을 음복하되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썼다. 단기간 이만한 분량의 논설을 엮을 수 있었던 것도 기존의 치밀한 자료 축적 결과였던 것이다.
1977년의 「일제말의 친일군상 실태」부터 1987년의 <친일논설선집>까지 여러 저작과 수많은 논설을 통해 친일문제와 일제침략사를 다루어 왔는데, 뭔가 부족한 점이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친일문제를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기 위해 ‘친일파총사’(전10권)를 구상하였다. 총론, 사상침략과 친일파, 정치침략과 친일파, 해방 이후 친일파, 경제침략과 친일파, 문화침략과 친일파, 만주․중국침략, 동양종교, 서양종교, 사회・교육침략과 친일파로 나누고 총론부터 1권씩 차근차근 쓰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2>를 내놓고 나서 그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다. 원래 건강 때문에 천안 벽지로 이사한 것인데 그동안의 무리한 집필과 어려운 생활형편으로 인해 몸을 돌보지 못해 지병인 폐기종이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지 모를 ‘친일파총사’ 발간을 성사시키고자 그는 몇몇 역사전공자를 접촉하여 공동 연구작업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쓸쓸한 죽음, 새로운 시작

임종국은 결국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환갑을 겨우 넘긴 1989년 11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타계소식을 듣고 그의 빈소에 여러 지인들과 연구자들이 찾아왔으나 그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임종국의 생애는 반골, ‘중뿔난 짓’만 골라하는 삶이었다. 그것은 일체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나왔다.
“이제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 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신라 고구려의 핏줄기인 줄 알았던들 나는!”(자화상, <친일문학론>). 기성의 관념과 지식, 역사 심지어 자신의 의식을 부정하고 나서야 새로운 길이 열렸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부터 그는 각성되었고 그의 각성은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과 새로운 역사 쓰기, 아울러 그에 걸맞은 치열한 삶을 스스로에게 요구했다.
그가 당시 각광받고 있던 독립운동사를 차치하고 민족사의 오욕을 밝히는 친일연구에 몰두한 것은 ‘민족사를 가장 그르친 것은 친일파’라고 한 그의 올바른 역사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숱한 자료를 뒤져서 한 장 두 장 쓴 15,000매에 달하는 친일인명카드는 민족사에 바치는 묘비명이었다. 그의 깊고 넓은 연구 성과는 이후 친일문제와 일제침략사 연구의 밑바탕이 되었고, 일반인들에게 오욕의 역사를 드러내어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게 하는 교과서가 되었다.
선생이 가신 지 16년이 지난 2005년 10월, 화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뒤늦게나마 선생의 지난하고 치열했던 작업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또한 그해 3월 임종국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11월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임종국상’을 제정하여 제1회 수상자를 내었다. 아직도 친일세력이 우리 사회 곳곳에 엄존한 현실 속에서 선생의 유지를 널리 알리고 새로운 민족사를 열어가는 것이 선생께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리라.(2006년 작성)

김민철・박광종 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바론님 뭐 좀 여쭈어 볼께요 임시정부나 광복부터 시작해서 친일인사들과 한국의 정치역사에 대해서 서술한 책이 있으면 추천바랍니다

최소 2종류가 필요합니다 추천바래요~ 수고하세요

금, 2017/08/18- 16:58
68
0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 문학박물관을 방문했는데 문학관내 만해 스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친일파 내지 친일 논란이 있는 인물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일제시대 조선일보 관련 전시 코너였지만 이광수, 주요한, 김동인, 채만식, 노천명 등을 만해 박물관에 있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친일파와는 상종하지 않았던 그리고 유명한 최남선과의 일화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런 처사는 만해 스님에 대한 모독 이라고 생각합니다.

 

일, 2017/08/20- 01:26
135
0

일본해 라는 이름의 낚시 집어제가

버젓이 유통 판매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자기나라 서쪽바다를 일본해라 부르는건

굳이 욕하고 싶지않은데요 우리나라에 판매하는 물품에

버젓이 일본해라는 이름을 붙혀서 판매를 한다는것과

낚시인들의 수차례 건의에도 들은척만척 변명만 늘어놓고 개선의 의지가 안보이네요

마루큐 라는 떡밥 회사의 제품입니다

이 건 에 대해서 해결을 좀 부탁드리고자 글을 남겨봅니다

 

일, 2017/08/20- 20:29
180
0

21-1

▲ 2017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답사 현수막

21-2

▲ 난징대학살기념관 화평탑

21-3

▲ 올 12월 난징대학살 80년을 맞아 기념관 공사가 한창이었다

21-4

▲ 난징 위안소유적진열관 입구

21-5

▲ 난징 위안소유적진열관 외벽

21-6

▲ 난징 리지항위안소 옛터 진열관

21-7

▲ 난징 위안소유적진열관 내부에 전시된 민족문제연구소 발행도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2009)

21-8

▲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본부

21-9

▲ 항공열사공묘 내부 전시실

21-10

▲ 항공열사공묘에서 항일전에 참전한 조선인 전상국, 김원영 열사의 이름도 있다.

21-11

▲ 항공열사공묘 야외에 전시된 당시 중국군 비행기

21-12
▲ 약산 김원봉 주도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터(현재 천녕사)
21-13

▲ 난징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옛터

21-14

▲ 난징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간부학교

21-15
▲ 민족혁명당 거점(현재 난징 호가화원)
21-16

▲ 야경으로 유명한 부자묘(공자 사당) 입구 거리

21-17

▲ 중국 고속철도 난징남역

21-18

▲ 난징에서 광저우로 가는 아침 첫 고속열사 내부

21-19

▲ 제1차 국공합작을 계기로 설립된 황포군관학교는 현재도 항일역사공간으로 활용중

21-20

▲ 군벌 타도, 국민혁명 완성을 목표로 한 황포군관학교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도 많이 입교함

21-21

▲ 한인청년들이 많이 다녔던 대학이자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중산대학

21-22

▲ 황포군관학교 입구에 있는 쑨원의 유언(革命尙未成功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21-23

▲ 1927년 반국민당 정부 무장봉기(광저우꼬뮌)에 참여했다 희생된 조선 청년들을 기려 세워진 광주기의열사능원의 ‘중조인민혈의정’

21-24

▲ 현재 공사 중인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묵념.

21-25

▲ 광주기의열사능원 조형물

21-24-1

▲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이항증 선생(석주 이상룡 증손자)에게 ‘항일’ 구호로 격려하는 학생 답사 단원들

21-26
▲ 혈의정 비문에 의하면 광저우꼬뮌 당시 희생된 조선인 혁명가들이 약 150명에 달한다.
21-27

▲ 광저우 신해혁명기념관에는 당시 주요 혁명가들의 동상이 역동적으로 제작되어 있다.

21-28

▲ 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당시 시국 전도

21-29

▲청나라를 놓고 열강들의 각축을 보여주는 시사만화

21-30

▲ 신해혁명기념관 등 대부분의 역사기념관은 국민들의 역사교육을 위해 입장료가 무료이다.

21-31

▲ 신헤혁명기념관 정문

21-32

▲ 광저우는 주강 강변의 야경이 유명하다.

12-21-32-1

▲ 광저우아시안게임이 열린 주경기장 주변 야경

21-33

▲ 형형색색 조명이 변하는 주강 강변의 광저우탑

월, 2017/08/21- 00:26
271
0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우리 국민들부터 대피시켜야하는거 아닌가? ㅠ.ㅠ

월, 2017/08/21- 11:42
171
0

0821-50

0821-51

버스
(1) 합정역 정류장 하차 뒤 성산초등학교 방면 50M
간선버스271, 지선버스27011, 지선버스7013A, 지선버스7013B
(2) 성산초등학교입구 정류장 하차 뒤 합정역 방면 50M
간선버스271, 지선버스27011, 지선버스7013A, 지선버스7013B

지하철
2호선 6호선 합정역 8번 출구 –> 월드컵 경기장, 성산초교 방면 350m -> GS25 편의점을 왼쪽에 두고 좌회전 50M -> 웰빙센터

차량
합정역 네거리(월드컵경기장, 마포구청 방면) -> 성산초교 앞 교차로 (망원동 방향 좌회전) -> 50M 롯데공개인중개사무소 앞 비보호 좌회전 -> 성산초교를 왼쪽에 두고 50M 남경슈퍼 앞 좌회전 -> 30M 웰빙센터 주차장

지도 크게 보기
2017.8.21 | 지도 크게 보기 ©  NAVER Corp.
월, 2017/08/21- 11:42
195
0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길게 줄을 선 사람들.


대통령이 일하는 곳, 청와대를 보러 온 관람객들입니다.


<인터뷰> 홍영수(경기도 고양시) : “주말에는 6개월 치가 다 예약이 마감돼 있었고,(이것도 방학이라서) 평일 날은 좀 어려웠어요. 간신히 했어요.”


1시간 반가량 청와대 곳곳을 둘러보는 관람 코스.


제한된 장소에선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 후원엔 관람객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문화재가 한 점 있습니다.


바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입니다.


<인터뷰> 신상빈(경기도 용인시) : “못 봤어요. 아예 못 봤어요. 코스에 없나 본데.”


<인터뷰> 홍순(인천시 서구) : “저희는 가족들이 놀러 다니면서 이런 불상도 많이 보는데 여기서는 못 본 것 같아요. 확실히.”


이 불상은 최근 한 시민단체가 원래 위치로 되돌려 달라는 진성서를 청와대에 내면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인터뷰> 혜문(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 “(불상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겁니까?) 아닙니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통일신라 불상이 왜, 언제부터, 청와대 안에 있게 된 걸까?


청와대 직원들조차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보안구역에 있다는 불상.


직접 본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더더욱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데요.


청와대 불상에 얽힌 길고도 복잡한 사연을 들여다봤습니다.


청와대 후원 숲 속, 보호각 아래 다소곳이 앉아 있는 석조 불상.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만들어진 석조여래좌상입니다.


불상의 높이는 1.16m.


석굴암 본존상의 축소판으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예술성을 보여주는 보물급 문화재로 꼽힙니다.


<인터뷰> 박임관(경주학연구원 원장) : “양어깨가 딱 벌어지고 가슴이 볼륨이 있고 그다음 무르팍이 아주 크게 웅장하게 되어 있어서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불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빼어난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불상은 관람이 쉽지 않습니다.


대통령 관저에서 가까워 일반인의 접근이 철저하게 금지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 화면 역시 지난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찍은 것으로,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촬영 허가가 난 적이 없습니다.


취재진이 청와대에 불상을 직접 찍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보안 문제 때문에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최근에 불상을 직접 본 사람은 없을까?


수소문 끝에 취재진은 문화유산 답사 모임을 운영하고 있는 강대철 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강 씨가 청와대에서 불상을 직접 본 때는 2015년 11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청와대 불상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사진도 찍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불상의 옆 모습과 뒷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1000년이 넘는 세월에도 보존 상태가 좋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 강대철(옛문화답사회 대표) : “딱 보니까 석굴암의 본존불 생각이 딱 나더라고요. 당당한 자세라든가 또는 조각기법, 그다음에 전체적인 느낌 같은 것이 상당히 가치 있는 문화재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이렇게 좋은 작품이 좀 더 대중들한테 보여졌으면 좋겠는데 외롭게 여기 계신가 하는 생각이 좀 많이 들었죠.”


통일신라 불상이 청와대에 있게 된 이유는 뭘까?


불상 앞에 놓인 돌에는 경주 남산 절터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옮겨온 거라고 적혀 있습니다.


불상이 처음 있었던 자리를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 시내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논밭을 지나 마을 뒷산 쪽으로 걸어 올라가자, 산 아래 탁 트인 지형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신라시대에 ‘이거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입니다.


1,0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에 무너져 내린 석탑만 황량한 절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청와대 불상의 고향을 이곳으로 보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

는 1939년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문서.


당시 일본인이 남긴 경주 출장 보고서를 보면, 이 불상은 본래 경주군 내동면 ‘도지리’의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거라고 돼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이곳에선 도지마을, 도지동이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또 다른 근거는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조를 보면, 737년에 왕이 돌아가시자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인터뷰> 박임관(경주학연구원 원장) : “성덕왕릉의 북쪽에 이거사가 있다는 건데 북쪽에 절터는 이곳이 거의 유일한 절 터이기 때문에 이거사가 정확한 걸로 보고, 이곳에서 청와대에 있는 미남 불상을 옮겨갔다, 이렇게 보고 있죠.”


이 불상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은 한일병합 늑약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2년 말 경주를 방문한 데라우치는 한 일본인의 집 정원에서 잘생긴 불상 한 점을 만납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조선총독부 문서를 보면, 데라우치 총독이 불상을 거듭 되돌아보며 유심히 살피자, 집 주인이 총독의 의중을 눈치채고 불상을 즉시 경성(서울)의 총독관저로 보냈다고 기록했습니다.


총독 진상품 신세가 된 불상이 경주를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서울 남산의 총독 관저.


남산 북쪽 길을 따라 남산공원 방향으로 오르다가, 지난해 새롭게 조성된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안으로 발을 들여 놓으면, 치욕의 역사를 보여주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통감 관저, 훗날 총독 관저가 있던 자리입니다.


이 터 옆을 자세히 보면 절벽 아래 깎아지른 바위가 있습니다.


바로 이곳이 불상이 옮겨졌던 장소입니다.


1913년 2월 데라우치는 자신의 일기에, 불상을 절벽 바위 아래 안치하고, 개안식을 열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취재 과정에서 입수한 한 장의 사진.


일본 관리들 사이에 불상의 얼굴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 이순우(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그 기록이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고 그래서 그 당시 위치는 사진 자료도 있습니다만 일단 총독관저 이웃한 절벽 아래쪽에 있다고 그랬거든요. 큰 나무면서 절벽 아래니까 저기 바로 보이는 저 위치라고 보실 수가 있는 거죠.”


이후 1927년 총독 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새로 지어지면서 불상도 함께 옮겨진 겁니다.


그 뒤 1934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불상에 관한 기사가 실립니다.


불상을 ‘미남석불’이라 부르고,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경주의 보물”이라며 상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 뒤 8.15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까맣게 잊혔던 불상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기자인 이구열 소장.


1973년에 초판을 펴낸 <한국문화재 수난사>란 책에 통일신라 불상의 기구한 사연을 상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인터뷰> 이구열(미술사학자) : “우리로선 문화재 수난의 참 하나의 사례죠.근데 어쨌든 그렇게 됐던 건데 그게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고 경주에 있다가 서울에 와서 지금 청와대에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에요. 그때 많은 것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도 많거든.”


다시 세월이 흘러 청와대 불상이 세간의 이목을 끈 때는 지난 1994년.


구포역 열차 전복부터,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 서해 훼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충주호 유람선 화재까지…


갖가지 대형참사가 잇달아 터지며 민심이 흉흉해지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불상을 치워버린 게 화근이 됐다는 등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습니다.


급기야 청와대가 출입기자단에 불상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집니다.


해방 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식민지 시대의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청와대 통일신라 불상.


그동안 제자리로 되돌려달라는 숱한 요구가 있었지만, 아직 달라진 건 없습니다.


<인터뷰> 이순우(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불상이 청와대에 있어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전혀 없죠, 당연히. 그것은 뭐냐면 불상 자체는 워낙에 우리가 잘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죠. 그런데 우리 한국을 강제 병합했던 바로 그 당사자인 데라우치 총독의 손을 거쳐서 그 불상이 지금 총독관저에 옮겨지게 됐고, 바로 그다음에 총독관저 옮겨지는 거에 따라서 청와대에 들어갔지 않습니까? 그거는 전형적인 일제잔재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광복 72주년을 맞은 올해 시민단체가 또다시 문제 제기에 나섰습니다.


청와대에 있는 불상을 원래 자리인 경주로 돌려보내 달라는 진정서를 청와대에 낸 겁니다.


<인터뷰> 혜문(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 “과거사에 대한 청산, 과거 권위주의적인 시대 청와대의 모습에서 탈피하고 적폐청산을 강조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새 정부 출범과 더불어서 청와대 불상이 원래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과거 시대와 다른 새로운 시대의 청와대의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고 굳게 닫혀 있던 청와대 문을 활짝 열겠다고 약속한 새 정부.


여기에 맞춰 청와대 불상도 과연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김석기자 ([email protected])


<2017-08-20> KBS

☞기사원문: ‘청와대 불상’ 경주 가나?



※관련기사

KBS: ‘아픈 역사’ 청와대 석조불상…경주로 이전?

월, 2017/08/21- 13:12
244
0

<북의 화성 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미국을 흔들고 있다.>

1. 북의 화성 14형, 미국을 확실한 과녁으로 집어넣다.

2017년 7월 4일과 28일 연달아 진행된 북의 화성 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은 한마디로 세계사적 사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7월 28일 발사한 화성 14형은 고각발사로 약 1000KM를 비행하였고 정상각도로 발사한다면 그 사정거리가 최소 10,000KM 최대 14,000KM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미국 동부의 주요 도시, 워싱턴이 북한의 핵 타격 범위 내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확증해 주었다.

미국도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사정거리가 미 전역을 포괄하고 있음을 자인하고 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국가의 우두머리로 소위 ‘세계 경찰관’을 자처해 온 미국은 이제 본토에 대한 실질적인 핵 위협이라는 불안거리를 안게 되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은 가장 발전된 무기 체계로 평가되며 불의의 시각에 발사되고 요격회피기동을 할 경우 마하 20이상의 속도로 낙하하는 탄두에 대한 요격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대륙간탄도미사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미국은 중국, 러시아와 수교관계에 있지만 북과는 법적으로는 정전상태, 즉 전쟁을 일시 중지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동안 동북아 패권을 쥐기 위해서 대북적대정책을 지속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 오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것이 미국에게는 최대의 안보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

2. 미국은 이제 핵전쟁에 대비해야

미국은 지금 공식적으로 북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신뢰성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내년 초에나 갖출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아직 탄두의 재진입 기술 문제가 있기 때문에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신뢰성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북한의 핵, 미사일 기술의 진전속도와 그 독자적 발전 경로를 무시한 발상이다. 미국이 그동안 거쳐왔던 발전경로를 보면 아직도 수십 회의 실험을 해야겠지만 북은 수회의 시험만으로도 그 성능을 확증해 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미국은 이제 핵전쟁을 대비해야 한다. 본국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며 전쟁에 대한 방어 준비를 하지 않아 핵공격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된 미국과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의 핵전쟁 위협에 대비해 전 사회적 방어체계를 갖춘 북. 상당히 대비되는 상황이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미국은 하와이에서 북의 핵 공격을 대비한 비상훈련을 월 단위로 진행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요격미사일 방어체계에 국방비 예산을 대폭 증강시키며 각종 전략자산과 신무기 개발에 막대한 돈을 투입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핵전쟁에 대비한 사회적 인프라가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이런 문제는 북이 전자기탄을 발사할 경우에 대한 토론에서도 제기되었다. 북이 미국 영공 수백KM의 상공에서 전자기파를 최대로 발생시키는 핵폭탄을 3~4개만 터뜨려도 미 전역의 전력공급망이 붕괴되며 이를 회복하는데 10년 이상이 소요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어 왔다. 미국이 핵전쟁을 대비하려면 보조전력계통의 신설과 핵방호를 위한 각종 시설의 구축 등이 필요하며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하는데, 지난 수십년 간 핵위협을 해 왔지 핵위협을 당해오지 않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매우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한마디로 핵전쟁이 현실로 다가왔으며 그에 대한 대비는 너무나도 취약한 것이 미국의 실정이다.

이는 미 경제에도 큰 부담이 될 것이며, 지금 미국인의 70~80%가 북의 핵공격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황 자체가 사회적 긴장과 모순을 격화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하겠다.
3. 화성 14형 발사 이후 쏟아져 나오는 대화론

미 군부는 자신들이 세계 최강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 언제든지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엄포를 놓고 있으며 미 중앙정보국장은 북의 정권교체를 공공연하게 거론하고 있다. 최근 조성된 긴장 국면에서 미국이 선제폭격, 예방전쟁이나 정권교체 공작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이라는 위기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선제타격론에 대한 미국 내 반발도 만만치 않다. 이미 미 군부의 일각에서는 실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동안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전쟁이 되며,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이 예상된다는 공포에 질린 소리를 해대기도 하였고, 미 국방부, 국무부의 전직관리들도 다양한 북미대화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비핵화가 아닌 북의 핵탄도미사일이 미 본토에 도달하지 않는 선(중거리 핵탄도미사일 용인)에서의 핵군축 안까지 있다.

트럼프가 정치에 발을 디디게 한 계기를 주었다는 키신저는 중국을 통한 대북압박을 강화하기 위해서 하나의 한국(흡수통일) 정책의 폐기, 주한미군철수를 중국에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 미국에서는 북에 대해서 나올 수 있는 주장은 다 나오고 있고, 북한의 현실적 실체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고 하겠다. 지금 미국은 북에 대해서 단일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중국에게 볼멘 목소리만 하는 매우 취약한 행태만을 보이고 있다. 지금 미국의 일각에서 그 무슨 북의 정권교체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고장난 레코드판의 반복에 다름이 아니다.

지금 한국의 일부 우익세력들은 한미동맹은 영원하다고 주장하며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에도 한미동맹은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철저히 자국의 이해와 요구에 기초해 움직이는 실용주의 국가, 자본주의 국가이다.

LA와 뉴욕, 워싱턴에 핵미사일이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북에 대한 선제타격이나 정권교체를 추진할 수 있고, 그것이 한미동맹의 근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일부 우익세력들의 생각은 현실을 보지 못하는 사대주의적 사고에 불과하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한반도에서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게 된 것이 엄연한 현실이며 북의 국제전략적 지위는 달라졌다.

4. 미국의 분열은 체제붕괴로까지 가속화될 수도

공화당계의 원로로 키신저가 대표 인물 중 한 명이라면 민주당계의 원로는 브레진스키가 대표인물 중 한 명이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제국이 되기에 취약한 점으로 미국 국민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들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파쇼독일과 같은 전체주의가 되기에는 국민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미국은 국가보다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전통이 강하고 주별 독자성도 강하다. 트럼프에 대해서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구호가 LA 등지에 울려 나온 것은 이런 미국민들의 성향을 대표하는 현상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기존 정치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트럼프의 등장이 이런 미국의 전통적인 개인주의, 자유주의 관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전체주의, 동원체제를 도입하기 위한 시도라는 분석도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미 독점자본의 심각한 위기는 결국 전체주의를 통한 총력동원체제를 요구하는데 미국의 체질개선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이런 시도는 미국 내에서도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북의 핵위협이 현실화되고 있는 조건에 국운을 건 대북전쟁에 미국민들은 열광적 지지를 보낼 수 있겠는가. 미 본토가 전쟁터가 되고 핵의 불바다가 펼쳐지는 상황에서 미국민의 절대 다수가 멀리 떨어진 동북아시아에서 그 무슨 개인적 이득을 얻는다고 목숨을 건 전쟁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지금 미국에게 던져진 근본적인 질문이다. 미국의 전통적 관습에 기초한다면 미국민들은 미국의 호전세력들에게 동조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독점세력들이 전쟁을 택한 순간, 미국 사회는 일대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근 년에 들어와서 미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흑인폭동과 같은 사태가 다중으로 발생하고 각 주들의 알력과 갈등이 더 심하게 번질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전쟁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원격전쟁으로 벌어져 왔을 때에는 하나의 산업, 전자게임으로밖에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제 자신들의 집 마당에 핵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전쟁이 산업과 게임으로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다. 수많은 엄폐시설을 갖추고 그곳에서 수년간 생활할 수 있는 독점자본가들과 관료집단들에게 핵전쟁은 여전히 산업과 정치수단의 하나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수의 미국인들에 그것은 공포이고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이며 결국 미국의 해체라는 파국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북은 화성 14형 발사로 미국에게 북미평화협정체결, 주한미군철수로 나서든지 아니면 자멸로 길로 치달아 갈 것인지 선택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

북의 화성 14형 시험발사가 던진 메시지와 그 파장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세계사의 근본적 질서가 변화하는 바로 그 현장을 살고 있으며 거기에서 미국은 하나의 거대한 공룡, 적응하지 못하며 자기 무게로 무너지는, 파산하는 제국으로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끝)

월, 2017/08/21- 17:24
178
0

바로가기 [텀블벅 펀딩]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사라져가는 기억을 위해 집을 지어주려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프로젝트
0712-2

일본 남쪽, 나가사키 항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하시마(군함도)는 야구장 두 개 정도 크기의 작은 섬입니다.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져 근대화의 상징으로 불렸던 이 섬은 좁은 섬에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는 모습이 마치 군함처럼 보여 그때부터 ‘군함도’라고 불렸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그대로 간직한 그 섬에서 과연 누가 살았을까요?

지상에서 일하는 일본인과 달리 강제동원 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지하에서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그 지하는 숨 쉬기조차 어렵고 몸을 펼 수 없을 만큼 좁았으며, 식량과 식수조차 주어지지 않는 말 그대로의 지옥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석탄 채굴을 위해 강제동원 되었지만, 그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때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가 족히 10개는 넘게 들어 있다는 납골당과 공양탑은 지금은 파괴되어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근대화의 상징’, ‘자랑스러운 세계유산’으로 포장하려는 군함도(하시마)는 일본의 근대화가 강제징용 된 조선인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0712-3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많은 나라들이 과거를 돌이켜보며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역사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정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떨까요? 우리는 아직도 친일문제가 분명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한일 과거사를 청산하고,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반민특위 정신을 이어받고,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일 과거사 문제뿐만 아니라 박정희기념관 건립 저지, 친일파기념사업 저지와 같은 다양한 활동과 전시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과거사 청산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이제 행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민족문제연구소가 꾸준히 모아온 자료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며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바라보고 기억하기 위해 2018년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려 합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부지를 정했지만,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박물관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많은 것들이 부족합니다. 0712-4 Print

일본은 한일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근거 없음’이라고 주장합니다. 과거에 동아시아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동아시아 안보를 지키는 파수꾼이라 자처합니다. 게다가 일본은 일제 침략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의 상황을 토대로 경제부흥을 이끌었지만, 전후 보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발언을 그치지 않습니다. 한국정부는 그렇다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했을까요? 한국정부 역시 일본정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한국정부는 국민적 합의 없이 한일협정을 진행해 그 청구금을 경제발전의 재원으로 사용한 바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 역시 당사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진행하여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 번 눈물을 쏟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곁에는 과거를 부정하는 세력들에 저항하며 물러서지 않고 목소리를 내온 역사의 산 증인들이 살아 계십니다. 그러나 역사의 산 증인이신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며 과거를 증명하는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조금씩 사라지고 흩어져가는 기억들을 이제 한 곳에 모아 모든 이들이 함께 기억하고, 세대를 넘어 기억을 전달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지어주려 합니다. 이 기억들이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시민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시민들이 함께 모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여 제대로 된 역사 인식과 함께 역사를 통해 성찰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합니다.

역사의 참혹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민의 귀에 닿도록 만든 것은 피해자의 용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가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곁에서 도운 것은 한국에서 조직된 시민들의 힘이었습니다. 역사는 시민의 것입니다. 강한 자들이 제멋대로 헝클어놓은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 위해,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이제 역사 위에서 성찰하기 위해 시민의 힘이 필요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통해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기 위한 큰 길을 내고 싶습니다. 함께 동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 2017/07/12- 16:54
83
0


[보도자료] [다운로드]

국정교과서 부역자에 대한 인적 청산,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1. 최근 교육부의 김연석 과장이 인천의 한 중학교 교장으로 발령이 났다가 철회된 것을 두고 일부 보수 언론을 비롯해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두 야당이 ‘전 정부의 정책을 맡았던 실무 공무원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4월 한국교원대학교 사무국장 발령을 받았다가 학교 구성원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자 이준식 전 교육부 장관이 학술원으로 전보 조치한 박성민 부단장까지 거론하며 두 사람을 정권교체의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파렴치한 작태를 보이고 있다. 두 야당과 보수 언론은 두 사람을 국가공무원법상 ‘성실 의무’와 ‘복종의 의무’ 규정에 따라 주어진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 ‘실무 공무원’으로 정의하며, 이들에 대한 발령 취소나 전보가 선량한 공무원들에 대한 정치 보복이라고 주장한다. 자유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공무원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라는 망발도 서슴지 않는다.

2. 우리 헌법 7조는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고 하여, 공무원의 법적 지위·책임·신분과 정치적 중립성 등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 공무원은 그 임용주체가 국민이고, 그 직무가 공공성을 띠기 때문에 특정인이나 특정의 당파·계급·종교·지역 등 부분이익만을 대표하여서는 아니 되고, 국민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 국민은 국가권력을 이들에게 신탁(信託)한 주권자이기 때문에,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公僕)이어야 하는 것이다.

3. 한국갤럽이 작년 12월 2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추진을 찬성한다는 응답자는 17%에 불과했다. 반대 의견이 67%, 유보한다는 답변이 15%로 나타났다. 국정교과서 현장 검토본이 공개된 후 여론조사에서 내용이 적절하다는 반응은 11%에 그쳤고, 71%는 부적절하다고 응답했다. 국민 절대 다수가 국정교과서 추진 자체에 반대하고 서술내용 또한 부실하다는 데 동의한 것이다.

4. 이런 여론조사 결과를 접하고서도, 교육부 고위 공무원인 두 사람이 지난 2년 동안 박근혜 정권이 밀어붙인 국정교과서 정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실을 되돌아보면, 이들이 ‘국민의 공복’이 아니라 ‘정권의 충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결코 ‘선량한 실무 공무원’이 아니라, 중립의무를 저버리고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거역한 ‘불량한 어용 공무원’이었던 것이다.

5. 김연석은 박근혜 정권이 국정화를 강행하던 2015년, 역사교육지원팀장, 국정화 추진 비밀 T/F팀 기획팀장,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 기획팀장을 연이어 맡았던 인사이다. 그가 거쳐 간 조직은 총리령으로 급조된 것으로 국정교과서 제작을 위해 만든 기구들이었다. 특히 그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공무원임에도 불구하고 2015년 국정감사 당시에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만 기존 한국사 교과서를 좌편향으로 정의한 ‘색깔론 보고서’를 작성해 몰래 전달하기도 했다. 직속상관인 장·차관의 결재도 받지 않은 이 행위에 대해,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 교문위원들은 공무원이 정치적 중립성을 위반한 것이라고 강력 항의하고 질책한 적이 있다.

6. 박성민 역시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 부단장으로 국정교과서 추진의 핵심 인사였다. 고위 공무원 신분인 박성민은 새누리당 전희경 의원의 주관한 국회 토론회에 참석하여, 자신이 부임한 후 1년 동안 국정교과서 작업을 총괄하면서 ‘전혀 부끄럽지 않게 작업했다’고 말했다. 학계의 ‘국정교과서가 오류투성이의 균형감각을 상실한 편향적인 역사책’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공연히 ‘시비를 건다.’며 조롱했다. 게다가 역사교사들이 수능 필수가 아니라서 ‘설렁 설렁 수업을 한다.’거나 학생들이 ‘촛불집회 한다니까 우르르 가서 막 이야기한다.’ 등의 막말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 속에서 진행되는 촛불집회를 폄하하고 역사교사들과 학생들을 모욕했다. 박성민 역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심각하게 위반한 대표적인 인사다.

7. 지난 3월 17일 대구지방법원은 문명고등학교 학부모가 낸 ‘연구학교 지정처분의 효력 정지 신청’을 인용하였다. 법원은 문명고가 국정교과서를 주교재로 하여 역사수업을 진행함으로써 학습자인 학생들의 인격발현과 학부모의 자녀교육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면서, 그 근거로 학생의 학습권 및 학부모의 자녀 교육권은 결코 희생되어서는 아니 되는 “헌법상 보장되는 중요한 기본권”이라는 점을 들었다. 불법, 탈법, 위법, 꼼수로 점철되었던 국정교과서 제작에 충성을 다한 김연석과 박성민은 ‘헌법 가치’인 학생의 ‘학습권’과 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권’을 침해하는 데 일조한 ‘범법자’인 것이다.

8. 최근 문재인 정부의 각 부처는 과거 정부의 정책 중 국민의 의견을 무시하고 진행했던 정책을 되돌아보고 같은 실수를 방지하기 위한 TF를 꾸리고 있다. 외교부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를, 통일부는 ‘정잭 검증 TF’, 문체부는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 TF’를 각각 구성했다. 심지어 국정원도 ‘국정원 적폐청산 TF’를 구성해 이전 정권의 적폐를 밝히는 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9. 반면 ‘역사쿠데타’의 주역인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대 국민 사과는 물론 적폐 청산을 위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준식 전 장관은 어떤 정치적 책임도 지지 않고 퇴임사에서 ‘국정교과서가 최선은 아니었다.’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다시 서울대 명예교수로 돌아갔다. 이영 전 차관은 퇴임식에서 국정교과서를 추진했던 시기를 ‘힘들었지만 보람 있는 시간’이라 말하고 한양대 교수로 돌아갔다. 전 교육부 차관 김재춘 역시 현재 한국교육개발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10. 교육부뿐만이 아니다. 집필진 구성, 집필기준 작성, 그리고 탈법 감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무를 맡았던 국사편찬위원회의 진재관 편사부장, 박덕호 역사교과서 편수실장도 국정교과서 폐기 이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바뀌었지만, 국정화에 찬성하였던 뉴라이트 성향의 위원들은 아직도 뻔뻔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들은 출세를 위해 기꺼이 정권의 ‘충견’이 되어 주권자인 국민이 반대하는 국정교과서 정책을 밀어붙임으로써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고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 ‘역사의 죄인’이다.

11. 그러는 사이 국정화 추진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교육부 관료들은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범법자’들을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이 나서서 비호하고 있는 형국이다.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시대착오적인 야당과 보수언론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국정교과서 부역자에 대한 강도 높은 인적 청산을 함으로써, 교육적폐 청산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끝>


2017년 8월 21일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월, 2017/08/21- 15:56
193
0

[팟캐스트 역적 여름특집2] 도쿄 야스쿠니 반대 촛불행동에 가다
2017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야스쿠니 반대 촛불행동!

월, 2017/08/21- 17:36
169
0

위키리크스,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제거 지시

미CIA가 도널드 트럼프 美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차 중국공산당대회를 앞두고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제거 작전에 나섰다는 정황이 제기되고 있다.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북한문제에 중국과 이견을 갖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의 독재체제에 문제의 원인이 있다는 분석에 근거하여 CIA에게 긴급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현재 시진핑 주석은 19차 중국공산당대회를 앞두고 수십년 유지돼온 집단지도체제의 관례를 깨고 ‘시진핑 1인체제’를 구상하고 있다.
중국 혁명원로 2,3세대 자녀들로 구성된 태자당의 정치권력화 시도가 철저히 분쇄되고 장쩌민파 지방세력 역시 완전히 몰락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정치형국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시진핑의 독재’를 막아내야 한다는 입장을 표방하면서 CIA에게 암살을 지시했다고 한다.
또한 꾸준히 있어온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북한도발과 무역적자 문제에서의 갈등으로부터 그런 결론을 내린 것으로 추측한다.
지난 12일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은 전화통화를 통해 북한 도발문제에 대해 논의를 했고 백악관에서는 “양국 정상 간 관계는 매우 가까우며, 이는 북한 문제의 평화적 해결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안보리 새 대북제재 2371호 합의 당시 중국이 원유공급 중단은 반대했던 점, 북한의 도발책동에 중국이 사실 침묵하고 있는 점, 북한의 태도에 전혀 변화가 없는 점 등을 내세워 이것이 사실 시 주석 채널의 문제라고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이번 19차 중국공산당대회를 계기로 시진핑 주석이 아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바라보고 있다.
실제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이 글은 허프포스트US의 “Wikileaks said Trump wanted to get rid of Xi.”를 번역한 것입니다.

—————————————-
Wikileaks said US President Trump wanted to get rid of Xi.

CIA is moving to get rid of China’s President Xi jinping before upcoming 19th Congress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CPC) by order of Donald Trump.
wikileaks said Washington and Beizing have different opinion about North Korea affair and thinking that originates by the despotism of Xi, Trump ordered CIA urgent intruction to remove Xi.
Recently China’s President Xi jinping has made ‘one man leadership’ breaking collective leadership system in preparing of 19th Congress of the CPC.
The Princelings, Crown Prince Party wanted to possess the political power, but Xi pulverized that attempt and local power of Jiang Jemin had ruined.
perceiving the “serious” situation of China political system, Trump gave signs to kill Xi in order to block ‘the tyranny of Xi’.
It is also because of that Xi has not agreed with the sanction of North Korea and currency manipulating problem.
Last 12th according to a White House Statement, Trump had a phone call to Xi and discussed about the North Korea affair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Presidents is an extremely close one, and will hopefully lead to a peaceful resolution of the North Korea problem”.
But Trump is thinking the change of China’s president because Beizing didn’t want to stop oil supply to North Korea at discussing about the new UNSC Sanction 2371 and China didn’t any action to stop North Korea’s missile and there is no change in North Korea’s attitude.
As so, US President Donald Trump needs new man for China’s president and exchange of regime in 19th Congress of the CPC.
But Which method CIA uses to accomplish the order is confidential.

목, 2017/08/24- 16:27
92
0

[문모닝~♡] 역시 우리 이니님은 현명하시다!
최근 우리 문통님께서 미국의 일방적인 FTA재협상 요구에 너무 열받으셨단 소식을 청와대 지인으로부터 전해들음.

너무 멋있음~!! 미국은 이제 지는 해라는 표현을 직접하시며, 대한민국의 미래는 중국과 러시아에 있다고 판단하신 듯. 미국의 강압에 지혜롭게 대처하시면서 사드철회를 전제로하는 중국과 러시아와 물밑접촉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고 한다.

요즘 이런저런 소식들에 암울한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열심히 민주화 운동에 함께했던 선배한테 이런 소식을 듣고 나니 역시 우리 이니님이란 생각을 다시 해본다. 전국민이 이렇게 깊고 현명한 생각을 하는 우리 문통령님을 끝까지 믿고 가야한다. 보이는게 다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한테 하등 도움안되는 싸드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중국과 러시아랑 손잡아야하는 대세를 청와대도 잘 알고 있는 듯~!! 끝까지 응원합니다~♡

목, 2017/08/24- 19:00
106
0

[팟캐스트 역적 여름특집2] 도쿄 야스쿠니 반대 촛불행동에 가다

목, 2017/08/24- 18:46
21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