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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때 일본군 개선식은 왜 용산 벌판에서 벌어졌을까? 과장된 전공(戰功)이 곳곳에 만들어낸 그들의 전승 기념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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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때 일본군 개선식은 왜 용산 벌판에서 벌어졌을까? 과장된 전공(戰功)이 곳곳에 만들어낸 그들의 전승 기념물들

익명 (미확인) | 금, 2019/02/22- 16:54

식민지 비망록 44

청일전쟁 때 일본군 개선식은 왜 용산 벌판에서 벌어졌을까?
– 과장된 전공(戰功)이 곳곳에 만들어낸 그들의 전승 기념물들

이순우 책임연구원

1894년(갑오년) 여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감당하지 못한 조선국 정부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맞서 일본도 10년 전 갑신정변의 여파로 맺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동시 개입을 적극 시도하면서 끝내 이러한 군사충돌은 바로 이 땅에서 청일전쟁이 촉발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해 6월 8일 청국군은 아산만(牙山灣, 마산포와 백석포)을 통해 상륙하여 아산과 성환 일대에 주둔했고, 일본군은 이보다 하루 늦게 인천항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뒤 선발부대인 오시마 혼성여단(大島混成旅團)이 만리창(萬里倉, 효창동 199번지 지점)에 본부를 마련하고 예하 주력부대는 효창원 계곡과 아현리 주변에 포진하였다.

<일청전쟁사진첩> (1895)에 수록된 효창원 만리창 지역의 일본군 숙영지 전경이다.

 

이때 오시마 병력이 한강을 건너 남하하여 청국군의 방어진을 향해 진군함에 따라 7월 29일 새벽 성환의 북쪽 안성도(安城渡, 안성나루;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중리)에서 두 외국 군대 사이에 첫 육상 전투가 벌어졌다. 불과 이틀 사이에 일본군은 청국군의 아산 본영까지 점령하고막대한 전리품을 수습하여 서울로 귀환하였고, 다수의 사상자를 낸 청국군은 홍주 방면으로 패주하였다가 강원도 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방식으로 행군하여 8월 하순에 평양(平壤)에 대기하고 있던 자신들의 군영으로 간신히 합류하였다.

1894년 7월 29일 청국군과 일본군의 첫 전투가 벌어진 안성나루의 모습이다. 이 자리에는 나중에 안성교(安城橋)라는 다리가 설치되었다.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조선지풍광>, 1922)

 

이른바 ‘성환역(成歡役)’으로 표기되는 이 전투에서 크게 이긴 일본군이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이때의 전투 장면은 당시에 크게 유행하던 다색인쇄 목판화 기법인 니시키에(錦繪)로 만들어져 대량 보급되었고, 이를 통해 전쟁분위기를 고취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여기에는 대개 승승장구하는 일본 군대의 모습이 화려하고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이 당시에도 ‘보도사진’이나 ‘종군기자’와 같은 존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진을 인쇄물로 전환하는 기술이 원활하지 않았으므로, 무엇보다도 속보성(速報性)을 생명으로 하는 전쟁화보와 같은 매체조차 제작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대개 인화사진을 보고 다시 목판화로 그려 찍어내는 기법이 선호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청일전쟁 시기에 관한 자료는 일정한 시차를 두고 묶음 제작된 전쟁사진첩보다는 그때그때마다 제작된 목판화 종류의 기록물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수량이 남아 있다.

 

<도쿄아사히신문> 1894년 8월 28일자 부록으로 배포된 ‘일본군 경성 개선식 장면’이다. (이치노헤 쇼코 기증,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런데 이 와중에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은 드물게도 1894년 8월 28일자의 부록으로 ‘명치 27년(1894년) 8월 5일 아병경성개선지도(我兵京城凱旋之圖)’라는 제목을 붙여 3매 연속 사진을 파노라마 형태로 담아낸 인쇄물을 배포하였다. 이미 20여 일 전의 상황이긴 하지만 생생한 전투소식을 알리는 나름의 전쟁 속보였던 셈이다.

<일청전쟁사진첩> (1895)에 수록된 일본군 개선식 장면이다. 사진촬영자는 조선 인천항에 거주하는 히구치 사이조(樋口宰藏)로 표시되어 있다.

 

여길 보면 벌판의 한쪽에 ‘개선문’이라고 써 붙인 커다란 일본식 녹문(綠門)이 서 있고, 그 앞으로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일본군대가 도열한 상태이며, 그 뒤쪽으로 약간 비탈진 언덕 위에는 구경꾼들이 뒤섞인 모습이 포착된다. 사진의 설명문에 이미 그해 8월 5일의 개선상황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이를 단서로 몇 가지 자료를 뒤져보았더니 <경성부사> 제1권 (1934), 590~591쪽에 이 사진 장면과 딱 일치하는 설명이 수록되어 있었다.

 

일본군의 승전소식이 경성에 알려지자 …… 일본인 측에 있어서는 수비군, 공사관원, 거류민 등의 환희는 비할 바가 없었고, 곧장 환영을 협의하여 구용산 문평산(舊龍山 文平山)의 동측 평지에 높이 4장(丈) 가량의 녹문(綠門, 료쿠몬)을 만들어 중앙에 오토리 공사(大鳥公使)가 쓴 ‘개선문(凱旋門, 아산을 바라보는 방향)’과 ‘환영문(歡迎門, 경성을 바라보는 방향)’이란 편액을 걸었다. 8월 5일 공사관원은 소와 술독을 문 옆으로 옮겼고, 일본거류민은 얼음을 멀리 한강 남안까지 운반하여 향응 준비를 전부 마쳤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경성수비의 일본병은 도로의 양측에 나란히 늘어서고, 공병(工兵)은 동작진(銅雀津)에서 강을 건너도록 배를 띄울 준비를 했다. 오토리 공사는 관원들을 거느리고, 칙사 이윤용(勅使 李允用)과 군국기무소(軍國機務所, 군국기무처) 대표 정경원(鄭敬源)은 박홍천록(薄紅淺綠)의 조선예장(
朝鮮禮裝)을 갖추고 개선문 옆에 도착했다.
일군(日軍)은 매일 황혼에 출발하여 진위(振威), 수원(水原), 과천(果川) 등으로 주간의 더위를 피하며, 선두에는 조선인 인부가 노획품인 징과 큰북을 난타하고 또 포획품인 황룡기(黃龍旗) 여러 유(旒) 및 엽자(葉字; 葉志超), 섭자(聶字; 聶士成), 위자(魏字), 상자(商字), 풍자(馮字) 등의 문자를 수(繡)로 새긴 군기(軍旗) 27류, 기타 당(幢)이라고 하는 간봉(竿棒), 새깃털을 부착한 장창(長槍) 등 20여 개를 들어올리며, 대포 8문(門)은 소가 이끌었는데 각각에 ‘성환(成歡)의 전리품(戰利品)’, ‘청병 대패(淸兵 大敗)의 증(證)’ 등을 묵서(墨書)한 작은 깃발이 더하였고, 초병(哨兵)이 이를 감시하며 전군이 그 뒤를 따랐다. 처음 출정할 당시 흰색이었던 융의(戎衣, 군복)는 전부 갈색으로 염색되어 있어서 한눈에 보더라도 격전(激戰)의 정도를 떠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오시마 여단장(大島旅團長), 나가오카 참모장(長岡參謀長) 등이 앞서 말에서 내리자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 공사관 통역관)는 이윤용에 의한 국왕전하로부터의 감사위로 칙지(勅旨)를 옮겨 전하고, 정경원의 축사를 통역하였다. 이어서 주객(主客)이 서로 교환(交歡)하는 바가 있었고, 공사는 ‘천황폐하만세’를, 여단장은 ‘조선국대군주만세’, 정경원은 ‘대일본황제폐하만세’를 소리 질러 일동 제창하며 개선의 식을 마쳤다. 때는 정각 오전 9시,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은 그 빛을 한강변 백사장 위에 정렬한 개선군에게 뿌렸다. 이로부터 분포품(分捕品)을 선두로 하여 전군 진행을 개시하여 선두가 막영지에 도달할 무렵에는 대행리(大行李, 군수품)는 여전히 개선문의 옆에 있었는데, 구불구불한 장사(長蛇)의 부대는 숙숙(肅肅)하게 만리창(萬里倉)을 향하고 군중은 도로의 양측에 운집하여 이 장관을 마주했다. (하략)

 

이 내용에 따르면 이들은 한강을 건너 자신들의 주둔지인 ‘만리창’으로 가는 도중에 ‘개선문’ 앞에서 거창한 의식을 벌이는 장면인 것으로 드러난다. 사진에 포착된 작은 개울은 만초천(蔓草川; 너추내, 너푸내)인 듯도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물줄기가 약해보이는 것이 지류(支流)의 한가닥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뒤쪽으로 효창원을 품고 있는 연화봉 자락이 드러난 것으로 보아 개선식장은 대략 지금의 ‘삼각지(三角地)’에 가까운 어느 지점인 것으로 짐작된다.

<경성부사> 제1권(1934)에 수록된 종군화가 쿠보다 베이센의 개선식 삽화이다. 여기에는 이 행사가 벌어진 장소가 ‘문평산 동쪽’이라고 적고 있다.

 

실제로 <경성부사> 제1권 (1934), 591쪽에는 종군화가(從軍畫家)로 이름을 날린 쿠보다 베이센(久保田米僊, 1852~1906)이 그린 개선식 삽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에 대해 “장소는 구용산 문평산 동측(舊龍山 文平山 東側)”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문평산’은 일제 때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있던 당현(堂峴, 당고개) 일대의 작은 봉우리를 일컫는 용도로 곧잘 사용된 지명이었다. 따라서 문평산의 동쪽이라고 함은 지금의 ‘삼각지’ 언저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1925년 을축대홍수 당시 경정(京町, 지금의 문배동) 일대의 침수상황이다. 사진촬영지점은 ‘문평산’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전면으로 남산 자락과 삼각지 일대가 포착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조선의 홍수>, 1926)

 

이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일본군대가 효창원 일대에 포진한 내력은 그들만의 전쟁기념물을 곳곳에 설치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1929년 6월에 건립된 ‘오시마 혼성여단막영지적(大島混成旅團幕營之跡) 기념비’와 1931년 6월에 건립된 ‘합리비행기발상지지(合理飛行機發祥之地) 기념비’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우선 앞의 것은 1926년 6월 24일에 오시마 혼성여단 전몰장졸을 위한 추도회를 열면서 그 기념으로 ‘오시마 여단주둔지(大島旅團駐屯地)’라고 쓴 표목(標木)을 우선 세웠다가 이를 대체하는 형태로 효창공원 서쪽고지에 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뒤의 것은 오시마 여단이 주둔하던 때에 제1야전병원부 육군일등조제수(陸軍一等調劑手)이던 니노미야 츄하치(二宮忠八, 1866~1936)가 이곳에서 비행기의 설계를 떠올려 발표했음을 기리기 위해 효창공립보통학교(청파동 3가 115번지 구역)의 경계면에 접한 동쪽고지에 설치한 비석이었다.

<매일신보> 1912년 11월 20일자에 수록된 ‘마츠자키 대위 기념비’의 낙성식 광경이다. 성환역 후면에 자리한 이 비석의 전면에는 테라우치 총독이 쓴 ‘유방백세(流芳百世)’라는 글씨가 부착되었다.

 

그런데 일제가 세운 청일전쟁 관련 기념물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고, 일본 군인들의 행적이 남겨진 공간마다 이러한 시설이 잇달아 만들어졌다. 이러한 장소들은 대개 그 지역의 관광명소로 크게 홍보되거나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그들의 전적지 또는 참배의 대상물로 활용되곤 했다.
이러한 종류의 하나로 일찍이 1912년 11월 3일에는 경부선 성환역(成歡驛) 뒤편 언덕에 ‘마츠자키 대위 기념비(松崎大尉記念碑)’가 건립된 바 있었다. 그는 제21연대 제12중대장으로 안성나루전투에서 앞장서 지휘하다가 총탄을 맞아 죽었는데, 이것이 일본군 측의 최초 전사자로 기록되었다. 그의 죽음은 즉시 ‘무부(武夫)의 귀감(龜鑑)’으로 치장되어 전사 장면은 니시키에(錦繪)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급되기도 했다.

마츠자키 대위 기념비 바로 옆에 자리한 ‘육군 나팔수 키구치 코헤이 기념비’의 모습이다. (경기도,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1937)

 

마츠자키 기념비가 건립된 장소는 청국군 섭사평(聶士成, 니에쉬청)의 중앙 진지였다가 점령되어 일본군 포병진지로 변한 구릉을 택하여 정했으며, 성환헌병파견소(成歡憲兵派遣所)와 성환보선구사무소(成歡保線區事務所)와 직산군청(稷山郡廳; 1914년에 천안군으로 흡수되어 합병)이 합동으로 건립부지를 조성하는 일을 담당했다고 알려진다. 기념비의 높이는 30여 척(尺)이며, 위쪽에는 데라우치 총독(寺內
總督)이 휘호(揮毫)한 “유방백세(流芳百世)”라는 글씨를 달았고 아래쪽에는 옛 상관이던 오시마 요시마사 자작(大島義昌 子爵)이 쓴 “육군보병대위 마츠자키 나오오미의 비(陸軍步兵大尉 松崎直臣之碑)”라는 석판을 부착하였다.
이와 함께 육군나팔수 기구치 코헤이(陸軍喇叭手 木口小平)의 비석도 마츠자키 기념비 옆에 설치되었다. 그는 안성나루를 건너는 전투과정에서 선두에 서서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나팔을 불면서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헛웃음을 자아내는 일은 당초에 공표된 나팔수의 정체는 시라카미 겐지로(白神源次郞)라는 군인이었고 그의 미담은 이내 소학교의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일본국민의 열광적 추앙을 받았으나, 알고 보니 그는 전투 중에 익사한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불과 1년 만에 실제 주인공이 기쿠치 코헤이로 번복되는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1900년 남산 왜성대공원에 건립된 ‘갑오역기념비’의 모습이다.(<한국병합기념첩>, 1910)

 

그리고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남산공원(南山公園, 왜성대공원)에는 난데없이 ‘갑오역기념비(甲午役紀念碑)’라는 일종의 추모시설을 겸한 충혼비가 들어섰다. 이 장소가 선택된 것은 청일전쟁 당시 오시마 여단이 포열(砲列)을 펼쳤던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곳에는 청일전쟁 때 죽은 일본군 전몰자만이 아니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당시의 조난자에 더하여 1907년 군대해산 당시의 전사자도 모두 합사되었다.
특히, 이 기념비 아래에는 양화진 등지에 가매장되었던 전몰자의 유골을 몰래 옮겨 파묻었던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는데, <경성부사> 제2권(1936), 687~688쪽에는 갑오역기념비의 조성 경위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수원 팔달산 정상에 설치된 ‘코시 소좌 의사지비’의 전경이다. (경기도,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1937)

 

5월에는 왜성대(倭城臺)에 갑오기념비를 세웠다. 처음에 거류민은 명치 18년(1885년) 이래 임오(壬午) 갑신(甲申)의 양란(兩亂)에 조난된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해마다 제사를 행해 왔으나 명치 29년(1896년) 양화진(楊花鎭)에 가장(假葬, 가매장)한 청일전쟁 때 성환, 중화 등지에서 전몰자의 유골들도 봉납하여 전자와 합사(合祀)하는 기념비를 건립하자는 논의가 관민 사이에 번져, 기부금 3천 원을 갹출하여 주조(鑄造)를 오사카포병공창(大阪砲兵工廠)에 의뢰하고, 장소는 왜성대로 하여 8월 제막식(
除幕式)을 거행했다.
당시 성내에 매골(埋骨)하는 것은 이를 꺼리는 사정이 있었으므로 비밀리에 이 비석 아래에 매몰했다. 지금 경성신사(京城神社) 앞에 있는 ‘갑오역기념(甲午役記念)’의 비가 곧 이것이다.

이밖에 성환 전투와 관련하여 설치된 또 다른 전쟁 기념물로는 경기도 수원의 팔달산 정상 남단에 자리했던 육군소좌 코시 마사츠나(陸軍少佐 古志正綱)의 비석도 있었다. 그는 오시마 혼성여단에 소속된 제21연대 제3대대장으로 부천 오류동(富川 梧柳洞)을 거쳐 성환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수원에 머물 때에 치중대(輜重隊, 수송보급부대)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조선인을 대상으로 보급품을 운반할 54마리의 군마(軍馬)를 징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야간을 틈타 마부와 함께 군량미를 실은 말들이 모두 도망을 가는 상황이 벌어지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해 7월 27일 새벽 팔달산 기슭 수원군청의 뒤쪽 소나무 숲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예외없이 분전(奮戰)을 고취하는 전쟁 미담으로 치환되기에 이르렀고, 30년가량이 지난 1932년 10월 1일 수원재향군인분회(水原在鄕軍人分會)의 주도로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던 것이다. 높이 23척에 달하는 이 비석에는 오시마 혼성여단의 참모였던 나가오카 가이시(長岡外史)의 글씨를 받아 “갑오역 코시 소좌 의사지비(甲午役古志少佐義死之碑)”라는 편액이 부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자결 또한 끝내 의로운 죽음으로 승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미 30여 년 전에 있었던 청일전쟁 당시 과장된 전공이 만들어낸 전쟁영웅의 이미지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반복 소비되는 상황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제국이 벌인 또 다른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독려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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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배우고 깨닫는 아이들, 한뼘 더 성장하다"
 

샤론지역아동센터 '역사탐험대 출동!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샤론 지역아동센터 역사탐험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르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서대문형무소. 한여름 무더위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곳에 왁자지껄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울려 퍼졌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10여명 남짓한 샤론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이 그 주인공이다.

올해 6월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운동 역사를 배워가는 역사탐험대 출동!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샤론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은 보다 생생한 독립운동 현장을 경험하기 위해 광복절 즈음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았다. 프로젝트 초기만 해도 31절을 삼점일절로 읽던 아이들은 불과 두 달 사이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삼점일절에서 ‘31독립운동 역사와 거리를 좁히다

 

 

“191931일 파고다 공원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칩니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2000만 명이었는데 이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이 200만 명이었다고 해요. 전 국민의 10퍼센트가 목숨 걸고 독립만세를 외친 거예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랍니다.”

독립운동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 운동이었어요. 말과 글을 잃는다는 것은 마음과 정신을 모두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죠. 그걸 지키려고 애썼던 분들이 계셨고, 총칼로 싸우는 것 못지않게 죽음을 각오하고 활동한 분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쓱 지나가며 곁눈질하는 것과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보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서대문형무소가 초행도 아니고, 독립운동에 대해 웬만큼 안다고 자부했음에도 서대문형무소 도슨트(전시해설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윤명희 선생의 설명을 들으니 알고 있던 사실조차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사전 자료조사를 통해 공부한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간

 

샤론지역아동센터 아이들도 다르지 않은 듯했다. 아니, 중학교 1학년이면 아직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설명을 듣고도 생각은 오히려 더 깊고 넓었다.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설명을 들으면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독립 운동가 외에도 정말 많은 분들이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후손들을 위한 그분들의 희생이 너무 감사하고 감동적이었어요.”

여성 감옥이 따로 있었다는 건 자료조사 하면서 알고 있었는데, 임산부 독립 운동가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어요. 임신한 몸으로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기저귀도 구할 수 없는 감옥 안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저는 정말 상상도 못할 일들인데 그 모든 것을 독립을 위해 견뎌내신 분들이 너무 대단한 것 같아요.”

 

아이들 스스로 배움과 깨달음 이어가는 역사탐험 프로젝트

 

 선생님 강의를 통해서가 아닌 아이들 스스로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워가는 아동청소년 문화체험활동 지원사업 

 

경기도 군포시에 위치한 샤론지역아동센터는 초중생 아이들이 주축이 되어 역사탐험대 출동!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선생님 강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워가는 프로젝트 수업이다.

선생님은 큰 주제만 제시할 뿐, 그 어떤 설명도 자료도 일절 주지 않는다. 연구 주제를 정하고,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과정은 모두가 온전히 아이들의 몫이다. 실제로 서대문형무소에 오기 전에도 자료조사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또래와 비교해 이해의 범위가 남달랐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은 작은 것 하나까지 모두 눈과 귀와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아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설명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거나,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시큰둥한 표정을 보면서 아직 어려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재미가 없어서 지루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고 오해였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이들은 작은 것 하나까지 모두 눈과 귀와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무표정이 전부였지만, 그 뒤에서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새로 알게 된 것 사이를 바삐 오가며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었다.

 

사실 저 역시 아이들 표정만 보고 걱정하던 때가 있었어요. 한번은 종일 견학만 다닌 적이 있었는데 너무 오래 걸으니까 아이들이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더라고요. 무리한 일정이었나 싶어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죠.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설렁설렁 다닌 줄 알았는데 설명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신문기사로 정리해내는가 하면, 그날 다닌 곳들을 그림지도로 만들기도 하고, 직접 대본을 써서 종이인형극을 선보이기도 하는 거예요. 보기엔 떠들고 장난치는 것 같아도 아이들은 마음에 다 담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저는 확신해요.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머리에 지식을 채우는 일보다 마음으로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고요.”

 

최미란 샤론지역아동센터 센터장이 역사탐험대 프로젝트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은 그래서다. 2012년부터 매년 올해로 네 번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고되고 힘든 순간이 적지 않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단번에 잊게 만들만큼 아이들의 빛나는 성장을 매순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어루만지는 따뜻한 돌봄아름다운 동행 계속되길

 

샤론지역아동센터 최미란 센터장

 

샤론지역아동센터가 2010년부터 아름다운재단과 인연을 맺어온 것도 아이들을 향한 남다른 애정 덕분이다. 아름다운재단이 문화소외지역 아동청소년들에게 문화체험 활동을 지원하는 아동청소년 문화체험활동 지원사업에 지원해 정서적으로 혼란을 겪는 아이들에게 태권도와 피아노 레슨 기회를 연결한 것이다. 최미란 센터장은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 센터는 지역 특성상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부모님이 맞벌이여서 아무런 돌봄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아요. 정서적으로 힘든 아이들도 많은데, 다행히 아름다운재단 지원으로 레슨을 받으면서 큰 힘을 얻었어요. 그중 한 아이는 3년간 피아노를 쳤는데 음악으로 마음의 병을 이겨냈고요. 지금은 누구보다 건강하게 성장했답니다. 앞으로도 우리 아이들이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계속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기댈 곳 하나 없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돌봄과 더불어, 역사탐험대 프로젝트처럼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주고 있는 샤론아동지역센터. 아이들을 향한 무한대의 사랑만큼 앞으로 아이들과의 아름다운 동행도 끝없이 진화되길 간절히 바란다.

 

글. 권지희 | 사진. 김흥구


<아동청소년 문화체험활동 지원사업>은 아름다운재단과 한국아동단체협의회가 파트너쉽을 맺어 공동으로 진행하는 사업입니다. 아름다운재단 꿈꾸는나무기금, 성도지엘삼더기금, 아름다운영화인기금, 효주기금, 행복한쉼표기금을 기반으로 전국 문화소외지역(농어촌, 광산촌, 섬지역 등)에서 저소득가정 아동청소년을 위하여 활동하는 단체나 아동청소년 이용시설 및 양육시설에 아동청소년 문화체험활동(문화예술교육, 현장탐방 등)을 지원합니다. [지원사업 자세히 보기]




 

숨요 변화사업국 사업배분팀전서영

 

아이들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꿈꾸는 다음세대' 영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월, 2015/09/0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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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관련기사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⑯ [단독] ‘틀린 표현 버젓이’ 역사교과서…“일본 더 진전하기도”(2017/10/03)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⑮ [단독] 빈약한 강제동원 교과서 기술…심한 경우 3줄뿐 (2017/09/28)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⑭ [단독] 빛 좋은 개살구?…총체적 난국 ‘강제동원역사관’ (2017/09/26)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⑬ [단독] 혈세 522억 어떻게 흘러갔나…수상한 국립강제동원역사관 (2017/09/21)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⑫ [단독]오류투성이 ‘피해자 명부’…창씨개명 알아야 확인 가능? (2017/09/19)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⑪ “한국인은 열람 못해”…여전히 찾지 못한 이름들 (2017/09/1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⑩ 16년간 연락 없는 외교부…”우리가 귀찮은 존재인가” (2017/09/12)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⑨ “화장실 따라와 늦게 나오면 매질” 근로정신대 끌려간 13살 소녀 (2017/09/0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⑧ 친일파비가 현충시설…정부는 ‘나 몰라라’ (2017/09/0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⑦ “노동자상 기부한다”는데…‘안 받겠다’는 국토부 (2017/08/21)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⑥ “너무 배고파 개밥까지” 94세 피해자의 눈물 (2017/08/1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⑤ [단독] 58년만의 부고…“곡괭이 잡은 채 생매장됐다니” (2017/08/11)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④ “내가 죽더라도 알려야 한다” (2017/08/09)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③ “개 묻듯 묻었다” 탄광노동자 기록, 누가 지켜야 하나 (2017/08/07)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② “우리마저 손 놓을 수 없어”…일본의 소도시가 우키시마호를 기억하는 법 (2017/08/03)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① 우키시마호 참사 72년, 가라앉은 귀향의 꿈 (2017/08/01)

광복 72주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여전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정부는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피해자 위로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 대신 나선 이들은 수많은 ‘익명의 조력자’였다. ‘지워진역사 강제동원’ 기획 시리즈에서 다 담지 못한 강제동원 학계, 시민단체계 인사들의 ‘고군분투기’를 소개한다.

▲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국가의 협조가 절실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를 기록할 기관은 전무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지난 1995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뛰어든 이유다. 이후 김 연구원은 일본이 수탈한 조선의 인·물적 자원의 정확한 실태조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피해자와 연구자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정대협), 역사문제연구소,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등에 제안해 ‘강제동원진상규명 시민연대’ 시민단체를 꾸렸다. 이뿐만 아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특별법)’ 초안도 김 연구원의 손을 거쳤다. 김 연구원은 강제동원 연구에 정부의 협조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강제동원 자료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면 해당 자료 열람이 힘들어진다”면서 “우리 정부가 자료 연구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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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김서경 작가 제공

◀ 김서경 노동자상 조각가…예술로 희생자 넋을 위로하다

서울 용산역 앞 세워진 국내 최초의 강제동원노동자상은 김서경, 김운성 부부가 조각했다. 노동자상은 조선인 노동자가 어둡고 깊은 갱도를 나와 태양을 마주하는 순간을 형상화했다. 김 조각가는 이를 ‘불편한 눈부심’이라고 표현한다.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라는 것이다. 김씨 부부는 강제동원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여왔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도 이들의 작품이다. 김 조각가가 노동자상 제작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일제강점기 많은 조선인이 일본 땅에 끌려갔다. 일부는 생존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해로나마 고향 땅에 잠드신 분들도 있다”면서도 “아직 유해조차 발굴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이들이 많다.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후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조각가는 앞으로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진상규명 위해 사할린에 흘린 땀방울

비포장도로를 7시간 가까이 달린다. 러시아 사할린 각 지자체 기록보존소에 연금, 노동자 카드 등 자료의 열람을 신청한다. 허가가 떨어지면 ‘서류철’로 된 문서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펴본다. 대부분의 자료가 전산화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개인정보 문제로 복사가 불가능한 자료도 다수다. 일일이 손으로 베낄 수밖에 없다.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가 사할린에서 강제동원 관련 자료를 조사해온 방법이다. 방 교수는 지난 2005년부터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서 활동, 사할린에 잠들어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발굴에 집중해왔다. 지난해에는 사할린에 홀로 파견됐다. 그는 약 500여 명의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을 발굴해냈다. 방 교수는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와 유가족 모두 절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며 “이들의 수난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진상규명 활동을 지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의 경우, 자료가 부족해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 있다”며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명부 발굴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공동대표…포기할 수 없던 아버지의 ‘이름’

“이희자 보추협 대표에게 물어봐라. 이 대표는 우리의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취재 도중 만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강제동원 피해 유가족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이 대표는 유가족과 피해자를 보듬으며 약 3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 또한 강제동원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이 대표는 지난 89년부터 관련 기록 찾기에 나섰다. 고군분투의 연속이었다. 가까스로 아버지의 사망 사실이 적힌 명부와 야스쿠니 신사 합사를 명시한 문건 등 총 6건의 자료를 찾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피해 유가족을 돕기 시작했다. 지난 2001년에는 보추협을 결성,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대표는 찾아낸 기록을 토대로 일본 정부에 피해보상 소송을 걸었다. 또 끊임없이 국회 문을 두드려 특별법 제정을 이뤄냈다. 지난 6월 이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의 이야기를 모은 책을 출판했다. 이 대표는 “우리나라가 지난 45년 이후 정말 해방된 것이 맞는지 정부에 묻고 싶다”면서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65년 한·일 협정으로 보상받을 권리마저 빼앗겼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가족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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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완익 변호사

▶장완익 변호사,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충 해결사’

장완익 변호사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만남은 우연히 이뤄졌다. 지난 1994년, 정대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담당 변호사로 일하던 지인이 유학을 가면서 장 변호사가 대신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장 변호사는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 고충 해결에도 발 벗고 나섰다.

그는 지난 2004년부터 2년 동안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 업무를 진행했다. 장 변호사는 광복 이후 들어선 정권이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무관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박정희·노태우·전두환 등 권위주의 정권들은 과거사 해결을 경시했다”며 “이로 인해 강제동원 역사가 국민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국가 주도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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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외길 25년째 

“술맛 떨어지게 또 우키시마호 얘기냐”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이 지인을 만나면 듣는 핀잔이다. 우키시마호 사건은 지난 1948년 강제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을 실은 우키시마호가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폭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아직 정부는 희생자 숫자는 물론 정확한 사고 원인마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전 회장은 지난 1992년부터 꾸준히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당시 아시아반핵포럼에 참석해 유적지를 답사하던 중 이 비극적 사건을 알게 됐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모두 사비를 들여 이뤄진 일들이었다. 그는 총 82명의 생존자를 만나 증언을 일일이 기록했다. 정부는 지난 2008년에서야 ‘우키시마호사건소송자료집’ 두 권을 내놓았다. 이마저도 형식적 조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 회장의 주장이다. 세월이 흘러 이 가운데 남은 생존자는 단 2명. 전 회장은 “더 늦기 전에 정부가 우키시마호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며 “아직도 일본 마이즈루만 앞바다에 묻혀 있을 유해를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를 다룬 영화 제작도 계획 중이다. 언제까지 정부가 아닌 개인이 홀로 싸워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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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역사 알아야 바로 잡는 것도 가능하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수십 년간 자료를 분석, 수집해온 ‘강제동원 전문가’다. 대학원 재학 당시 지도교수의 제의로 강제동원 문제에 첫발을 디뎠다. 지난 95년 일본에서 온 연구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후 시민단체 등에서 활동하며 강제동원 특별법 제정을 도왔다. 지난 2005년 2월부터 지난 2015년까지 위원회 조사과장으로 1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다. 노무동원 피해자의 유골 발굴과 자료 정리, 진상조사, 지원금 지급, 명부 전산화 등의 작업을 지휘했다. 특히 일본에 남아 있는 강제동원 관련 자료 입수와 유골 봉환에 힘썼다. 위원회가 종료된 후에는 강제동원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정 연구위원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에서 반성과 교훈을 얻기 위한 ‘다크투어(역사교훈여행)’를 기획 중이다. 경희궁 지하터널, 인천 동일방직터 등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은 8000여 곳이 넘는다. 인천과 부산 등 각 지역에 노동자상을 세우는 일에도 참여했다. 정 연구위원은 “강제동원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일본에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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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문재인 정부, 노동자상 건립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라”

최종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강제동원 노동자상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노동자상을 세우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지난해 8월 최 직무대행은 노동자상 건립 행사 참석을 위해 일본 교토시 단바망간광산을 방문하려 했다. 그러나 탐탁지 않은 이유로 일본 입국이 불허됐다. 일본 정부뿐이었을까. 한국 정부마저 노동자상 건립에 비협조적이었다. 최 직무대행이 속한 민주노총은 노동자상 건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등은 지난 4월6일부터 매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였다. 최 직무대행은 지난 6월24일 열린 ‘노동자상 건립 촉구대회’에서 “정부는 강제동원 노동자 피해 보상을 위해 주권국가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력 끝에 노동자상은 지난 8월 용산역 앞에 세워졌다. 현재 부산에서도 노동자상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는 시민을 상대로 지지 서명을 받고 노동자상 조성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 오는 12월28일에 노동자상을 세운다는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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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수산 작가

한수산 작가…‘군함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다

“소설 ‘군함도’ 집필은 운명이었습니다” 지난 7월 영화 ‘군함도’가 개봉했다. 영화 이전에 소설로 먼저 군함도의 비극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는 한수산 작가다. 한 작가가 소설 ‘군함도’를 취재하고 집필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27년. 한 작가는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일본 정부가 철저히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은폐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 작가는 오로지 ‘피해자의 증언’에 의지해 소설을 완성해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피해자들의 기억도 정확하지 않았다. 한 작가는 지금부터라도 일제강점기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면서 “친일인명사전 모금 운동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에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다만 이 분노를 분출할 길을 여는데 우리가 소홀했을 뿐”이라고 봤다. 또 “건국 이후 흔히 말하는 ‘친일 정부’가 이어졌다. 기득권 세력은 부단히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면서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올바른 과거사 기록 작업이 더 폭넓게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1005-16

▲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수많은 희생자는 왜 죽어야 했는가”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의 전문분야는 일본 역사교과서다. 한 박사는 지난 2010년부터 일본 역사교과서가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를 사실대로 기술하고 있는지 꼼꼼히 ‘모니터링’ 해왔다. 한 박사는 일본의 각 출판사를 직접 찾아가 왜곡된 부분의 수정을 요청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은 기본적으로 강제동원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한국 교과서는 일제강점기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술한다. 또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착취당한 일에 대해 ‘강제동원’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일본은 ‘강제연행’이라고 말한다. 이 단어에는 전쟁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인 범죄, 또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는 의미가 내포돼있다.

한 박사는 “우리 민족은 식민지 체제 하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일본 국민이 해야 할 일을 강요당했다”면서 “그런데 현재 역사 교과서는 희생자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기술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 박사는 “강제동원과 관련해 교과서에서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강제동원의 실태를 정확히 알리고, 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짚어주는 것이 교과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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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행동하는 일본의 양심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바라는 목소리는 일본에도 있었다. 지난 60년대부터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과거를 반성하며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한 자료 수집에 나섰다.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네트워크) 공동대표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를 처음 공론화했던 재일사학자 고(故) 박경식 선생의 강연을 들으며 문제의식을 키웠다. 이후 일본 전역을 돌며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 지난 2005년에는 네트워크 공동 대표를 맡는 등 주축이 됐다. 네트워크는 일본 내 흩어져 있던 400여 명의 강제동원 연구자와 시민운동가들을 모은 단체다. 히다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조사, 비밀 자료 공개 요구, 미불 임금 처리 등을 위해 힘썼다. 네트워크가 수집한 자료는 한국 위원회로 보내져 진상규명을 위한 토대가 됐다. 최근에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도 힘을 보탰다. 히다 대표는 “과거 노무현 정부가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위원회를 설립했던 것처럼 새로운 정부에서도 다시금 노력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정진용, 이소연, 심유철, 박효상, 박태현 기자 [email protected]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email protected]

영상=윤기만 [email protected]

<2017-10-05>쿠키뉴스

☞기사원문: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⑰ 어둠 속 건져올린 진실…진상규명 힘쓴 11인의 조력자

목, 2017/10/0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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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에 '세월호'는 어떻게 기록될까?

참사를 둘러싼 역사 전쟁

 

박주민 변호사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학자 E. H. 카의 명언이 회자되고 있는 요즘이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단순한 사실(a mere fact)이 아니라 이것에 현재의 가치를 부여하여 역사적 사실(a fact of history)로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역사가 이렇게 가치 부여가 수반되는 것이기에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역사 앞에 "하나의" 혹은 "올바른"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어렵고, 특히 국가가 그런 수식어를 붙인 '역사'를 만들어 국민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이렇게 원래 안 되는 것이지만 만약 진실을 은폐하고 국민의 사고를 호도하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세력이 역사에 대해 단 하나의 가치관만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작업을 하려 한다면 그러한 시도는 더욱 더 좌절되어야 한다. 그들의 목표는 애초부터 '올바른 역사'가 아니라 '국민에 대한 호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의 집권 세력이 자국민의 정치적 선호를 바꾸려 국정원과 군 사이버 사령부를 동원해 자국민을 상대로 한 '심리전(戰)'을 전개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또 세월호 참사 당시 정작 12명의 잠수부, 헬기 2대, 군함 2척, 특수보트 6대만이 동원되어 구조 작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진행되지 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500명의 잠수사와 121대의 헬기, 69척의 함정이 동원되어 대대적인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온 국민이 믿게 했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현재의 집권 세력이 국민에게 진실을 드러내고, 국민의 비판을 수용하여 문제를 개선하는 민주주의적 선순환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고 정치적 비판과 그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두려워해 진실을 숨기고 국민의 여론을 호도하는 악순환을 추구하는 자들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그들이 끊임없는 거짓으로 국민을 기만해왔다는 것은 앞으로도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한다. 진실을 은폐하려고 한 사람이 소위 '올바른 역사'란 것을 입에 담을 수는 없다.

 

카의 위의 말에 따르면 진실과 동떨어진 것을 역사로 만들려는 것을 막는 싸움은 2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는 '특정한 사건에 대한 사실을 확정하는 것과 관련되어서'이고, 다른 하나는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관련되어서'이다.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반대하는 것은 후자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에 속하는 싸움이 작년부터 지속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교통사고로 만들기 위해 아니 믿게 만들기 위해 참사의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진상 규명 작업 자체를 방해하는 세력과의 싸움이다.

 

이 세력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여러 시도들을 벌여왔다. 우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충분한 권한이 부여된 조사 기구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방해했다. 이후 600만 명이 넘는 국민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픔을 제대로 치유하지도 못한 채 풍찬노숙을 견뎌냈던 피해자 및 그 가족들의 열망의 일부가 담긴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진상규명특별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법의 취지를 몰각시키는 시행령을 만들었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국회법을 개정하기까지 하였으나 이에 대해서도 거부권이라는 비상한 방법으로 막아서기도 했다.

 

또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특조위)가 요청한 조사 예산에 턱없이 부족한 예산만 집행하였고, 내년 예산도 세월호 특조위가 요청한 예산액 중 31%만 배정하려 하고 있다. 파견하기로 했던 공무원들도 제때 파견하지 않았다. 세월호특조위의 활동 시한을 연장하기로 여야 원내대표가 합의를 하였건만 이제는 말을 바꾸어 연장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사사건건 가로막고 있는 이러한 시도들은 대부분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만한 사실관계 자체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만히 둘 수는 없다. 1863년 영국에서 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전 세계에서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지하철 사고는 단 3건인데 이 중 2건이 우리나라 그것도 대구에서 발생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대형 참사가 밥 먹듯이 아니 황당할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여러 전문가들은 참사 때마다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현장 실무 책임자만이 책임을 지는 소위 '꼬리 자르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제도적 개선과 그를 통한 참사의 재발 방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참사가 단순한 사고로만 역사적으로 기록되도록 만들어 왔던 것이 참사가 재발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달리 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세월호 참사의 진상은 제대로 규명되어야 하고, 세월호 참사의 의미가 제대로 기록되게 만들어야 한다.

 

세월호특조위의 활동시한 연장과 조사에 필요한 예산의 확보가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세월호특조위는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수사권과 기소권은 보장되어 있지 않지만 제한 없이 청문회를 할 수 있고, 특검도 2번이나 요청할 수 있다. 과거의 다른 위원회에 비하면 훨씬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세월호특조위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다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역사적 왜곡은 중단될 수 있을 것이고 참사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당시 해당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그를 통해 진상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그 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진 역사를 통해 후대와 현세가 배울 수 있는 교훈 역시 달라질 것이다. 이미 지나간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느냐의 싸움도 중요하지만 현재 발생한 그리고 진행 중인 사건들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는 일도 역사를 둘러싼 전쟁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역사를 둘러싼 싸움이 한창인 이때 다시 한 번 세월호 참사를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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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5/11/1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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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17/08/1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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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홍 “판사가 역사에 무식..즉각 항소할 것”

 

정미홍 전 아나운서. 2017.3.8/뉴스1 © News1 문요한 기자

(서울=뉴스1) 이유지 기자 =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혈서(血書)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해 연구소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58)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단독 김종복 판사는 31일 한국 근현대사 비영리 연구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정 전 아나운서에게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

김 판사는 “전직 아나운서로 대중의 영향력이 큰 사람이기에 명예훼손글을 무분별하게 실은 경우 통상에 비해 높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다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용한 링크글의 논지가 분명하지 않고 전파가능성도 낮은 점을 감안해 벌금 30만원에 처한다”고 판시했다.

그는 “트위터로 글을 단순히 리트윗한 것이라 해도 타인의 글이 명예훼손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된다”며 “민족문제연구소는 역사문제를 연구하는 단체를 표방하는 바, 증거도 없이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했다고 적시하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또 “피고인 글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만주신문을 내세우기 전 과거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삼았지만 만주일보에 박 전 대통령의 혈서 기사가 있다는 것은 거짓이기에 박정희 혈서설은 조작됐다는 취지”라고 밝히고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해왔다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 전 아나운서는 선고 중 판사를 향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지속적으로 방송에 나와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설) 증거가 있다고 이야기해왔다”며 “위증죄로 증인을 고소한 건이 현재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어갔고 판사에게도 증거로 제출했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그는 선고 후 기자와 만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있기에 저에 대해 인신공격 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판사가 링크글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무식하기 때문으로, 역사 공부를 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39년 3월 31자 만주신문을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국 군관학교에 지원하면서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라’라는 혈서를 썼다고 2009년 밝혔다.

정 전 아나운서는 2013년 2월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 기사 조작’이라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인용해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방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올린 혐의를 받고 있다. 해당 글은 ‘지난 5년간 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 혈서 기사가 만주일보에 실렸다고 주장했으나 만주일보는 1908년 폐간된 신문’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4년 7월 강용석 변호사와 정 전 아나운서를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하고, 각각 30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강 변호사가 500만원, 정 전 아나운서는 3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고, 2심 재판부도 1심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지난 1월 원심을 확정했다.

 

<2017-08-31> 뉴스1

☞기사원문: ‘박정희 혈서 날조’ 주장 정미홍 1심서 벌금 30만원

※관련기사

☞ 연합뉴스 :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정미홍 전 아나운서 1심 벌금 30만원

☞ SBS :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정미홍 전 아나운서 1심 벌금 30만 원

☞ 머니투데이 :  ‘박정희 혈서 날조’ 주장 정미홍씨, 1심서 벌금 30만원

목, 2017/08/3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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