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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학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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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학 어떻게 할 것인가?

익명 (미확인) | 금, 2019/02/22- 11:21

근대의 성찰과 개벽의 귀환

 <개벽론>과 <근대론>을 구분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본말이 전도되고 ‘달’이 아닌 ‘손가락’에 집착할 수 있으니까요. 박맹수 교수님께서도 한국 근대의 탄생이 나올 때 개화에서 개벽으로를 제목으로 잡아야 한다고 충고해 주셨습니다. ‘근대’는 진부한 주제라고 하면서요. 아마 같은 역사학자라서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막상 책이 나오고 난 뒤에 일부 독자들이 “근대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후기를 써주셔서, 학계와는 달리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근대’가 반드시 진부한 주제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근대’ 개념에 대한 재인식과 더불어 ‘개벽’이라는 말도 사회적으로 서서히 확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더디기는 하지만 신비적인 이미지도 조금씩 걷히고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 지적하신 대로 꼭 ‘근대’라는 번역어에 기대지 않고 곧바로 ‘개벽’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렇게 된 데에는 선생님의 “다른 백년, 다시 개벽”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많은 공헌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유라시아 견문이라는 ‘실증’을 통해서 나온 결론이 ‘개벽’이어서 종래와 같은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학으로서의 개벽학

“개벽학은 미래학이요 지구학이고 동서학의 회통과 신문명의 창조”라는 말씀에 개벽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한국학은 ‘미래학’이라기보다는 ‘해석학’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릅니다. 기존에 있는 것들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데 주력해 왔으니까요. 그것도 바깥에서 빌려오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적어도 학문적으로는, 항상 바깥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나 처방을 외국의 유명한 학자에게 구하려는 태도도 이러한 학문풍토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지난 이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의 DNA에 각인되어 온 관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19세기의 ‘개벽’은 우리 스스로가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일종의 태도전환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처음으로 독자적인 경전도 만들어 본 것이고요. 그리고 이러한 개척정신은 「삼일독립선언서」의 첫머리에 “자가의 신운명을 개척한다”는 말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개벽학의 첫걸음은 100여 년 전의 미래지향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우리의 미래의 주인이라고 하는 ‘주인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가짐, 이런 의식이 개벽학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학으로서의 개벽학

‘지구학’은 전통적 개념으로 말하면 ‘천지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난 2천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우주론을 지난 2백여 년 동안 상실한 것입니다. 한문고전을 보면 거의 모든 우주론이 원기(元氣)에서 시작해서 천지가 형성되고, 거기에서 음양과 오행이 분화되고, 여기에서 다시 인간과 만물이 생성되는 순서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절대로 인간이 먼저 나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시대 학문은 기본적으로 ‘지구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지학에서는 “만물이 하나”라고 하는 네트워크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고 보는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요즘과 같이 인터넷이나 디지털로 만물이 연결되는 시대의 세계관과 더 잘 부합됩니다. ‘한울’이나 ‘한살림’이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개벽학은 이런 천지학적인 우주론, ‘한울학’적인 세계관을 회복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근대인’, ‘개화인’에서 ‘지구인’, ‘개벽인’으로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의 세계사상사적 의미

“<동서 문명의 회통과 신문명의 창조>라는 21세기의 과제가 이미 (동학의) ‘다시 개벽’의 외침과 깨침에 내장되어 있다”는 선생님의 지적은, 윤노빈 식으로 말하면 “동학의 세계사상적 의미”를 정확히 짚어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아무도 동학을 이렇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실패한 혁명’이나 ‘일제에 대한 저항’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요.

몇 년 전에 어느 학술대회에서 동학에 대해 발표하시는 선배 학자의 토론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의 발표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동학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요?”라는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대로 “선생님은 동학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요?”라고 반문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저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여전히 동학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비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있는 소중한 것을 못 보고 외국의 사례찾기에 급급합니다. 눈이 바깥으로만 향해 있으니까요. 물론 지나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자가 배제되니까요. 모두가 양극단입니다. 동학은 우리 것이라서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것이라서 좋은 것도 아닙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동서학을 회통시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려고 했기 때문에 세계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아마 신생철학(1974)의 저자인 윤노빈 선생님도 이 점을 말하고 싶어서 「동학의 세계사상적 의미」를 썼을 것입니다.

 

회통과 창조의 정신

동학의 특징이라고 하신 ‘회통’과 ‘창조’는 개벽학의 기본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회통은 중화주의와 같은 중심주의나 제국주의와 같은 패권주의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발상입니다. 항상 자기가 중심이 되고 타자는 주변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니까요. 일종의 ‘본말’ 관계입니다.

반면에 회통은 본말을 설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려 하는 ‘포함’의 태도입니다. 최치원이 ‘포함삼교’(包含三敎)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타자를 맹목적으로 쫒아가는 ‘축물’(逐物)과는 다릅니다. 장자나 율곡 식으로 말하면 자기를 비우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허심응물’(虛心應物)에 가깝습니다.

창조는 이러한 비움과 회통의 태도에서 가능합니다. 어느 하나의 틀에 사로잡혀 있는 축물의 상태에서는 모방과 추종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근대의 캐슬’과 ‘개화의 아성’으로부터의 탈출이 요구됩니다. ‘근대’라는 정신적 식민지상태, 영혼의 중독상태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개벽은 이러한 영혼의 해방을 도와주는 일종의 ‘역사적 도우미’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중화주의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개벽이 탄생했듯이, 지금의 근대주의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개벽의 경험을 참고해야 합니다.

  

개벽교육과 교육개벽

선생님이 <개벽학당>을 구상하신 것도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잊혀진 개벽사를 복원시켜 다가올 개벽사를 개척할 ‘개벽의 일꾼’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개벽교육’이자 ‘교육개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취지로 저희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도 오는 3월부터 은덕문화원에서 매달 <개벽포럼>을 개최할 예정입니다. 한 달에 한 명씩 각 분야에서 한국사회를 개벽하기 위해 실천하신 분들을 모셔다가 말씀을 듣고 대화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도법스님의 <생명평화와 개벽>을 비롯해서, 원불교대학원대학교 김경일 총장님의 <원불교와 개벽>, ‘다른 백년’ 이래경 이사장님의 <경제와 개벽>, 연찬문화연구소 이남곡 소장님의 <『논어』와 개벽>, 『역주 용비어천가』의 저자 박창희 선생님의 <세종과 개벽>, 한살림운동을 하신 이병철 선생님의 <살림과 개벽>, 인도에서 오신 원현장 교무님의 <동서융합과 개벽>, 하자센터와 로드스꼴라 김현아‧황지은 선생님의 <교육과 개벽>, ‘토착적 근대론’을 제창하신 기타지마 기신 교수님의 <종교와 개벽>, 그리고 선생님의 <유라시아와 개벽>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제가 ‘개벽학’을 구상해 보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부딪힌 가장 큰 벽이 ‘실천’ 경험의 부족입니다. 개벽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와 같이 엄밀한 형이상학체계이기보다는, 실학과 같이 현실에 밀착된 일종의 실천학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현장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현장에서 실천하면서 이론적인 고민도 해 오신 분들의 말씀을 많이 듣고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개벽사를 복원하는 것은 문헌공부나 현장답사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미래의 개벽학은 실천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칫 공허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개벽포럼>은 저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개벽이라는 역사적 경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제가 생각하기에 일본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는 근대기에 ‘개벽’ 경험의 유무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개벽’은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생적으로 새로운 사상을 만들고, 그것에 입각해서 전국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한 역사적 경험을 말합니다. 한국은 동학개벽에서 삼일개벽을 거쳐 최근의 촛불개벽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요한 분수령에서 개벽의 경험을 해왔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이런 경험이 부재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일본이 처한 사상적 곤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화가 저물어 가는 시기에 새로운 돌파구가 안 보이는 거지요. 150년간 개화의 틀에만 의존해 왔기 때문에요.

개화를 못해 식민지를 당했지만 개벽이 일어났던 한국과, 개화가 빨라서 산업화에는 앞섰지만 개벽의 경험이 없었던 일본. 이것이 두 나라의 근대기의 명암입니다. 오구라 기조 교수님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일본에서 도덕은 진부하고 한국에서 도덕은 풋풋하다”고 하셨는데, 이 말을 빌리면 “일본의 근대는 진부하고 한국의 개벽은 풋풋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일본인이 본 동학

다나카 쇼조

작년 8월 22일자 《아사히신문》에 “메이지유신 150주년” 특집기사로 <근대 일본의 빛과 그림자>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여기에서 ‘그림자’는 일본 근대화 과정의 어두움을 말합니다. 150년이 지나서 비로소 일본 근대를 성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기사에서 “동학은 문명적”이라고 절찬한 일본 최초의 환경운동가 다나카 쇼조(1841~1913)를 ‘또 하나의 근대’를 지향한 사상가로 평가했습니다. 일본이 선택한 제국적 근대, 침략적 근대가 아닌 생명적 근대, 평화적 근대를 추구했다는 것이지요.

박맹수교수와 죠마루 요이치 기자(한일시민동학시행)

이 기사를 쓴 죠마루 요이치(上丸洋一) 기자는 작년 10월에 <한일시민동학기행>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이 기행은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과 박맹수 교수님이 10년 넘게 진행해온 동학답사입니다. 이때 죠마루 기자는 다른 일본시민들과 함께 태안, 공주, 천안 등지의 동학전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은 90이 가까운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한국인들에게 정식으로 ‘사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 죠마루 기자는 이때의 기행을 기사화해서 올해 1월에 5회에 걸쳐 《아사히신문》에 연재했습니다.

이 연재에서 동학을 ‘독자적 근대’를 추구했다고 소개했습니다. 다나카 쇼조를 (서구 근대와는 다른) ‘또 하나의 근대’를 추구한 사상가라고 평가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런데 동학에 비하면 다나카 쇼조는 너무나 외롭습니다. 조직이나 공동체가 있었던 게 아니니까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정부에 맞서 싸우다가 쓸쓸하게 홀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벽의 차이입니다. 다나카 쇼조도 동학적으로 말하면 분명 개벽을 추구한 사상가이자 운동가임에 틀림없지만 그를 도와줄 개벽의 동지들이 없었습니다.

 

개벽학 센터의 꿈

마지막 부분에서 한국학과 관련해서 중요한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도학과 과학의 병진”이라는 문제제기입니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 한국학으로서의 개벽학의 최대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동학과 원불교의 개벽학이 도학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홍대용과 최한기의 기학은 과학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 양자를 회통시키고 융합시키는 철학적 작업이 필요합니다. 실학과 개벽학이 만나야 합니다. ‘개벽실학’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개벽실학을 모델로 해서 21세기 개벽학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과학은 최신과학의 성과를 반영하고, 도학도 최근의 수양 프로그램을 반영해서 말입니다. 저는 이런 실험적 작업을 하는 ‘개벽학 센터’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도학과 철학과 과학이 어우러진 개벽학을 디자인하는 작업실 같은 곳 말입니다. 이곳에서 개벽사상을 담은 새로운 민주주의이론도 구상할 수 있을 수 있겠지요. 해원(解冤)의 수양과 경물(敬物)의 윤리와 신명(神明)의 도덕을 겸비한 ‘개벽민주주의.’

 

개벽의 역할분담

유상용선생님과 송지용연구원

마지막으로 유상용 선생님의 ‘제도개벽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답신을 마치고자 합니다. 지난 수요일 아침에 공동체운동을 하시는 유상용 선생님이 원광대학교에 오셨습니다. 수덕호에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봉황각 커피숍에서 종교문제연구소의 김재익 연구원, 원불교사상연구원의 황명희 연구원, 송지용 연구원과 함께 2시간 가까이 개벽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유상용 선생님의 제도개벽론이었는데, 골자는 물질개벽과 정신개벽뿐만 아니라 양자를 잇는 제도개벽도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우리는 모두 제도나 시스템의 영향 하에 살고 있습니다. 교육 커리큘럼에 따라 정신이 개벽되기도 하고 세뇌되기도 합니다. 개벽학당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고요. 개벽파가 주로 도덕개벽과 정신개벽에 치중했다면, 개화파는 제도개벽과 물질개벽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화가 물질개벽을 강조했다면 민주화는 제도개벽을 강조했습니다. 1987년에 민주화투쟁으로 얻은 직선제가 그러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정신개벽 서울선언

정치나 시민운동을 하는 분들은 주로 제도개벽에, 종교나 철학을 하는 분들은 주로 정신개벽에, 과학이나 상업을 하는 분들은 주로 물질개벽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각각 자기 역할이 있고 서로 보완해 줍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분야에 있든 개벽의 마인드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무엇’을 개벽하느냐보다는 개벽을 ‘한다’는 의식이 중요한 거죠. 그리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은 쉽게 좌절하지도 않고 자만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무엇’에 초점을 맞추면, 그 ‘무엇’을 얻은 순간 개벽이 멈추게 됩니다. 반대로 얻지 못하면 지쳐서 개벽을 포기하게 되고요. 공자는 “배우는데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았다”(學無常師)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말하면 “개벽에 일정한 대상을 두지 않는다”(開闢無常)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하노이에서 보내시는 「삼일개벽선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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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자들을 정리하면서 느낀 소회를 적어 봅니다.

현대철학은 니이체와 프로이트 및 마르크스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니이체는 존재는 생성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서구의 존재론인 실체론을 폐기하고 생성론을 새로운 존재론으로 제시하였으며 프로이트는 인간을 이성적인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에 칸트의 주체철학은 종말을 고했다고 선포하였으며 마르크스는 서구의 관념론을 거부하고 유물론적 변증법을 제시하면서 물적 토대에 대한 구조적인 변혁의 필요성을 설파하였습니다.

한편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마르크스는 토대인 생산양식의 혁명을 주장하였으며(마르크스는 혁명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엥겔스의 객관적인 결정론을 버리고 토대의 모순이 극대화된 임계상황에서 정치적 의식화를 통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의지가 고양되었을때 토대인 자본주의의 혁명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후기 포스트모더니스트인 슬라보이 지젝은 상부구조인 이데올로기의 혁명을(대중의 계급의식이 소멸함에 따라 토대의 혁명은 불가능해졌기에 상부구조가 만들어낸 허위의식인 이데올로기의 혁명이라도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동시적 변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유와 무가 둘이 아니듯 불교의 중도사상과 양자역학 의 중첩성의 원리를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어느 하나만의 혁명은 온전한 변혁이 아니기에 결코 그에 따른 희생에 비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편 마르크스의 혁명이 종국에 실패한 것은 상부구조에 위치한 욕망의 상대적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상부구조는 토대에 종속된다고 해석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이분법적인 실체론에 입각한 유물론의 필연적인 결론이라 할 것이므로 욕망의 본성을 반영하지 아니한 새로운 생산양식의로의 혁명의 성공가능성은 애초부터 희박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토대에 대해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 즉 상대적 결정론을 주장한 발터 벤야민이나 조르주 루카치의 견해를 계승한 지젝의 상부구조의 혁명론도 현실적으로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결코 절반의 치유책에 불과하기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생존을 위한 대중의 기본적 욕망의 결핍을 대부분 해소하였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욕망의 절대적 결핍상태를 벗어나는 것을 넘어서서 자본이 자신의 확장 및 심화를 위하여 생산한 잉여욕망을 마치 본래적인 인간의 욕구인 것처럼 왜곡시켜버렸기 때문에 대중은 무한한 잉여욕망을 당연한 본성인 것처럼 추구하다보니 결핍에 따른 계급의식 또는 투쟁의식을 상실하였다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을 주입시키는 이데올로기(허위의식)를 못 벗어난 대중이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임을 깨닫고 이를 해체할 수 있을까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이에 대해 진지전 이론을 개진한 안토니오 그람시는 전통을 옹호하는 전통적 지식인 대신에 유기적 지식인이 전선의 참호에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어 이를 해체하는 진지전을 펼침으로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국가나 자본을 해체하여 재구성 하자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여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의 노예로 전락한 대중보다는 깨어있는 유기적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이데올로기를 해체하자는 의미에서의 혁명이론운 제시한 그람시의 이론이 더욱 실현가능성이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현실을 볼 때 지식인들은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유물적인 심층분석 보다는 특정 정치집단이나 특정 진영의 이데올로기나 포플리즘의 전위로서 정치적 구호에 흡수되어 자신의 변혁적 역할을 방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착잡함을 금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직도 한국사회를 진보 또는 보수의 이항대립적 대결구도로 해석하면서 피상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할 뿐 결코 한국의 국가재벌독점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에 대해서는 과감히 눈을 감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면 참으로 답답함을 금치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온전한 혁명은 상부. 하부구조의 동시적 변혁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보는데 언듯 이러한 생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바램이 아닌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는 온전한 혁명은 이상적인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하는 좌절감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대중은 물론 지식인조차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토대와 상부구조를 변혁할 선구적 대안을 제시하는 지식인의 지혜와 토대를 변혁할 대중의 결집된 주체의식과 투쟁의지가 가능하지 않다고 보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이들을 전위에서 창도하고 대안을 설계할 수 있는 유기적 지식인도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토대와 상부구조를 주체적, 자발적인 혁명에 의해서는 불가하므로 결국 외부적 사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라고 슬프지만 어쩔 수없이 추단해봅니다. (그나마 한국사회의 시민운동은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사회 권력에 대해서 저항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시민사회의 독립성과 자구성을 확보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시민운동이 시민단체운동으로 협소하게 왜곡되어버리고 그나마 시민이 아닌 실무자 중심의 운동으로 전락해버렸으며 그 결과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면서 시민운동을 한 단계 레벨업을 시키기보다는 대부분이 정치운동으로 흡수되면서 결코 시민운동과 주체는 물론 목적과 작동방식이 다른 정치운동의 하부구조로 전락해버려 시민운동의 존재의미마저 의심받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기에 이제는 시민운동에 대한 기대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면 페스트에 의해 중세가 몰락하고, 세계대전에 의해 근대가 몰락한 역사가 반증하고 있듯이 현대 산업화의 모순에 따른 인간사회의 불평등과 지구적 차원의 파괴도 인간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하여 이번 코로나 팬더믹 사태가 인간의 생존방식과 생산양식의 변환을 가져올 사건, 즉 알랭 바디우의 진리사건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따라서 데리다의 ‘부재의 진리’를 찾는 노력도 우리에게 그나마 혁명의 당위성을 가르쳐주고 있읍니다만 이 또한 관념적 철학자의 현실불가능한 꿈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지젝은 불가능에 도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만.

그러나 여기서 고민해야할 문제점은 현재의 생산양식이 가지고 있는 모순은 다른 생산양식으로 대체해야 할만큼 치명적인 결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수정자본주의 또는 사회적 복지국가를 통하여 이미 자본주의 모순을 완화시켜왔기에 다른 보완재로 치유가 가능한 것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기본모순인 계급모순외에 한국만의 독특한 재벌자본주의에 따른 독점모순과 나아가 신자유주의에 따른 불평등 모순 및 기타 부가적 모순인 분단모순 및 지역모순 등을 열거할 수가 있는 바, 과연 그러한 모순들이 한국사회 시스템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방법으로 치유불가능한 치명적 상황을 만들었기에 대체재가 필요한 임계상황인지 아니면 재정비하거나 보완하는 차원으로 치유가 가능한 상태인지를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으나 어떤 결론이 나던지간에 이들을 치유하는 방식은 결국 구조적인 접근방식으로 분석하고 해답을 내놓아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사 진보정권이라하여도 지금껏 계급과 계층 및 집단을 망라하여 한국사회 모순에 대한 구조적인 진단과 근본적인 치유책에 대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해집단을 초월하여 진지한 연구와 성찰과 변혁의지가 부재한 실정이었다고 생각하기에 긴 안목으로 한국사회를 구조적으로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과학적 자세를 갖춘 열린 대중과 유기적 지식인의 참여와 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금, 2020/06/19-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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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만원씩 수령한 법사위 수석전문위원

2018년 7월 5일에 참여연대가 공개한 2011~2013년 국회 특수활동비 지출결의서 내역은 오늘날 국회가 가진 ‘전근대성’을 그대로 보여줬다. 수많은 언론들은 전직 국회의장이 얼마를 받았는지, 국회 내 상임위원장들이 얼마를 받았는지 다뤘다. 또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다른 상임위 소속 의원들과 달리 월 50만원 씩 수령했다는 사실도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새로운 사실’이 제대로 보도되지 않은 경우다. 어떤 언론도 국회사무처 법사위 수석전문위원의 특수활동비 수령액이 매달 150만 원씩이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다른 상임위 소속 의원보다 권한이 세다’고 평가받는 법사위 위원의 수령액보다 3배 더 많다는 팩트가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법사위 위원과 수석전문위원, 양자 간의 위상 혹은 권력 차이의 반영이거나 최소한 그 역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반영일 것이다.

전에 국회 상임위원장을 역임했던 한 의원은 필자에게 “‘뭐든 희망하시는 일을 말씀하시면, 힘써드리겠다’라는 수석전문위원의 말에 ‘이 사람들이 완전 자기들이 주인이고 우리(국회의원)는 그저 왔다 갔다 하는 객(客)으로 아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전문직 분야에 있는 한 지인은 자기들 협회에서 국회의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전문위원에게 로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국회 전문위원 스스로 강조한 전문위원은 정책 결정의 실질적인 주체다

국회 전문위원이 갖는 이렇게 센 힘의 원천은 그들의 ‘검토보고’ 권한에 있다. 국회의원이 법안을 발의하면 해당 상임위원회에서 발의된 법안을 심사하게 되는데, 국회법 상 전문위원의 검토를 반드시 거치게 돼 있다. 국회법 58조에 1항에 따르면 “위원회는 안건을 심사할 때 먼저 그 취지의 설명과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듣고 대체토론[안건 전체에 대한 문제점과 당부(當否)에 관한 일반적 토론을 말하며 제안자와의 질의·답변을 포함한다]과 축조심사 및 찬반토론을 거쳐 표결한다”라고 명기돼 있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 검토보고서의 지적 내용을 위원회 회의 과정의 발언과 통과법안의 수정 부분을 비교한 한 논문은 그 두 내용 간에 높은 인용· 일치율로 미루어 상임위 전문위원의 영향력이 지대하다고 논술하고 있다.1

한편 국회에서 일하는 입법관료 스스로 검토보고의 영향이 크다는 점을 알고 있다. 2010년 12월 상임위 입법조사관 12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조사대상의 90.8%가 법안 검토보고서가 중요한 참고자료로서 국회 상임위원회 심사과정에 영향을 끼친다고 답했다.【2

특히 한 국회 수석전문위원이 재직 당시에 쓴 논문은 아예 국회 전문위원의 역할이 지원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 주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 제출된 총 44개 조항으로 이뤄진 한 법률안에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의 전문위원이 19개의 검토 조항을 보고하였고 결국 법안은 11개 조항을 수정하였다. 그런데 이 11개 수정안 모두 전문위원이 적성한 검토보고에서 주장한 그대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기술하면서 “전문위원은 소속 위원회 입법 활동의 단순한 지원 차원을 넘어 정책 결정의 실질적인 주체로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3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은폐되고,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은 위험할 수 있다.

2017년 8월 22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는 국회사무처가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국회사무처에서는 수석전문위원 2명이 성추행과 횡령 혐의로 면직 처리되기도 했으며 국회사무처 직원 간 음주폭행 사건도 발생하여 이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들끓었다.

 

최저임금법 개정 사례에서 드러난 검토보고의 한계

그렇다면 이토록 영향력이 큰 검토보고는 제 역할을 하고 있을까?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최근 국회에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은 법안이 있다면 단연 ‘최저임금법 일부법률개정안’이 손꼽힌다. 이 법안이 통과되기 전부터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법안 처리를 반대해왔다.

그런데 ‘최저임금법 일부법률개정안’에 대한 국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 내용을 살펴보면 단지 임금의 개념에 대해 언급한 것이 전부였다. 최저임금법이 개정된 뒤 생긴 사회적 갈등과 논란을 봤을 때, 진정한 의미의 ‘검토보고’라면 마땅히 이 법안이 사회적으로 마칠 파장까지 충분히 검토했어야 할 일이다.

한국 사회에는 단순히 입법관료의 검토보고에 의해 처리되어서는 안 되는 법률과 쟁점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보다 심층적으로 토론하고 논의하기 위하여 국민의 대표자로서 국회의원이 선출되는 것이다. 또한 이들 국회의원들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정당이 존재하고 그 정당 소속의 정책위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법안 처리의 길목에 국회 입법관료는 일종의 게이트키핑(gatekeeping)의 역할을 한다. 국회사무처는 전문위원 임용자격에 관한 규칙에서 전문위원의 자격기준(국회에서 10년 이상 재직하고 2급 이상의 공무원이 돼 2년이 경과한 자로서 입법심사와 조사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자 등)을 정해놨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출되지 않은, 그리고 전문가집단에서 선발되지 않은 ‘행정사무’의 역할을 갖고 있는 공무원일 뿐이다.

특히 전문위원의 업무상 전문성에는 의문부호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물론 전문성이란 ‘개인이 조직에 들어오기 전 그가 사회화 과정을 겪으면서 취득하는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의미하는 통상적인 의미로서의 ‘개인적 전문성’ 외에도 ‘조직에 들어와 업무를 수행하게 됨으로써 그 업무를 통하여 획득하게 되는 전문적 지식’을 뜻하는 ‘업무상 전문성’의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국회 전문위원의 경우, ‘개인적 전문성’의 측면만이 아니라 ‘업무상 전문성’의 측면에서도 순환 보직 근무의 관행으로 인해 깊은 전문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실제 지금은 퇴직한 한 수석 전문위원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각기 다른 세 곳 상임위원회의 수석전문위원을 맡았다.

 

관료들은 전문성 있다’, 왜곡된 신화

흔히 공무원들은 대단한 전문성을 지니는 존재로 이해된다. 적지 않은 언론매체들이 그러한 시각으로 기사를 쓰고 있으며, 심지어 진보 쪽에 있는 정당들의 관계자도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 전문성으로 무장한 공무원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 등의 논리를 계승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혹시 부분적으로나 특수한 상황에서 타당할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잘못된 ‘선입견’이다. 무엇보다 공무원들은 ‘전문성’을 기준으로 선발된 것이 아니라 단지 공무원시험을 통해 선발되었을 뿐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대부분의 경우 2년을 단위로 여러 부서를 옮겨 다니며 순환 근무하게 된다. 결국 전문성을 축적할 기회가 근본적으로 차단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관료들은 전문성이 있다”는 시각은 우선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최소한 정보 접근성이 압도적으로 용이한) 공무원들의 객관 조건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 또 절차나 수속 등의 행정업무 분야에서 공무원들이 전문성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시각이 그런대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밖의 관련 분야의 전문지식이나 분석력 등 순수한 의미의 ‘전문성’ 측면에서 관료집단은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대단히 미흡할 수밖에 없다.

공무원들이 높은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는 ‘잘못된’ 선입견과 시각은 우리 사회의 강고한 관료주의를 유지시켜주는 주요한 이데올로기로 작동되고 있다.

 

국민을 너무 힘들게 하는 국회

국회는 “국민에게 힘이 되는 국회”라는 꿈도 야무진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국회의원들은 입만 열면 스스로의 특권을 줄이겠다고 매일 같이 다짐하지만, 그러나 실천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지칠 줄 모르는 정쟁과 내로남불, 외화내빈의 말잔치만 난무한다.

‘국민을 힘들게 하는 국회’라는 말이 훨씬 정확하고 설득력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본업을 수행하지 않고 방기하는 조직은 왜곡되고 부패할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의 본업인 입법을 스스로 올곧이 수행하게 될 때, 국회는 시민의 진정한 대표로서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발전하는 출발선에 다시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국회 전문위원 제도의 개혁이 절실하다.

 

1】 장봉아, “국회상임위원회 공무원의 입법과정상 영향력 분석: 법안 심사 회의록과 검토보고서의 일치 여부에 대한 사례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4.

【2】 배용근, “국회 상임위원회 전문위원 검토보고서의 영향요인과 발전방안”, 「의정논총」제6권 제1호, 2011

【3】 김춘엽, “논변 모형을 통해 본 법률 제정 과정에서의 전문위원 검토보고의 영향력에 관한 연구”, 「한국인사행정학보」제5권 제2호, 2006.

화, 2020/07/1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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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한민국 대전환의 시작을 선언했다. 지구촌사회를 휩쓸고 있는 미증유의 바이러스 위기를 벗어나면서 경제위기와 기후위기까지 잡아보겠다는 야심찬 ‘한국판 뉴딜’ 추진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앞으로 5년간 국비만 114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재정투자를 약속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지방비 25조원을 포함하여 어떻게 이 막대한 투자비를 조달할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인재 양성계획은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판 뉴딜’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사회”이다. 정부뿐만 아니라 노동과 자본, 정당 등 주요이해관계집단의 기대와 요구를 담아냈다. 정부안에서도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환경부, 산업부, 과기부, 행안부, 교육부, 복지부, 중기부, 해수부, 산림청, 고용부 등이 참여하여 정책통합을 시도했다. 기존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 혁신성장 등 3대 축으로 구성된 경제정책 기조아래 ‘사회 안정망 확충’을 바탕에 깔고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림 1> 한국판 뉴딜 3대 정책 및 5년간 투자 총액 160조 원, 예상 일자리 190만개

한국판 뉴딜 정책은 앞으로 5년 동안 국비와 지방비, 민간투자를 포함하여 총사업비 160조원을 투자하여 일자리 190만개를 창출함으로써 3중복합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추격형 국가에서 추월하는 선도형 국가로 대전환하겠다는 담대한 포부와 정치적 의지의 반영이다.

<그림 2> 한국판 뉴딜 비전과 2+1 정책방향 <출처 : 기획재정부>

<그림 3> 한국판 뉴딜 4+3+2 사업 분야 및 28대 과제 <출처: 기획재정부>

녹색전환 선도국가로 나아가는 길 (1)

민간투자를 포함해 58조2천억 원을 투입하는 디지털 뉴딜은 ① 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DNA) 생태계 강화, ② 교육 인프라 디지털 전환, ③ 비대면 산업 육성, ④ 사회간접자본(SOC) 디지털화하는 것이다. 사회 안전망 강화는 ① 고용사회 안전망과 ② 사람투자이다.

그린 뉴딜은 ① 도시·공간·생활 인프라 녹색 전환, ② 저탄소·분산형 에너지 확산, ③ 녹색산업 혁신 생태계 구축하는 것이다. 이 3개 분야에 아래와 같이 8개 세부 사업을 추진한다.

<그림 4> 그린 뉴딜 3대 분야 및 8대 사업 분야 <출처: 기획재정부>

정부의 담대하고 야심찬 계획 발표에 대해 많은 기대와 희망을 품으면서도 몇 가지 넘어서야 할 지점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린 뉴딜이 ‘문재인 대통령식의 녹색성장’이라는 비판을 벗어나려면 다음과 같은 5대 쟁점들이 모두 풀려나가야 할 것이다.【1】

첫째, 그린 뉴딜의 정의와 목표가 무엇인가, 무엇으로 볼 것인가? 그린 뉴딜을 단순히 친환경산업에 공공재정을 투입하여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만들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전략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1930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을 추진했던 것처럼 그동안 정당한 사회경제적 대가를 받지 못한 노동자계층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노사관계 개혁과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고,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여 사회적 약자를 배려함으로써 미국식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실현하는 사회대개혁을 추진했던 것처럼 한국의 그린 뉴딜도 환경을 적극 고려하면서 경제성장도 도모하는 새로운 녹색경제체제로 대전환하는 사회적 합의, 사회적 협약인가 여부이다. 여전히 그린 딜을 통해 달성해야 할 목표가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되고 있다. 임기 이후까지 5년 동안 막대한 규모의 재정투자를 통해 문제가 되고 있는 온실가스 감축을 언제까지 얼마나 달성하겠다는 것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한 마디로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든다’는 ‘2050 넷 제로(Net Zero)’를 달성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는 점이 환경단체에 의해 지적되었다. 그 대신 이번 발표에는 “탄소 중립을 지향한다”라고만 되어 있어 “목표가 불분명하다”는 지적을 받았다.【2】

한국은 이명박 정권 시기에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고 녹색성장을 추진하여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그린 뉴딜정책을 이미 시행했다.【3】 당시 정부는 이 녹색뉴딜 사업의 핵심인 국정과제 최우선순위인 일자리 창출 수치를 내놓았고, 그동안 부처간 중복이 심하고, 산출숫자가 ‘주먹구구’라는 비판과 지적을 의식해 비교적 구체적 계산방법과 함께 사업별 고용 창출 인원을 끝자리 수까지 맞춰 내놨었다. 그러나 이미 계획에서부터 건설단순생산직이 95.8%였다.【4】

<그림 5> 이명박 정권의 녹색 뉴딜사업 구성도

한 마디로 이명박 정권의 녹색 뉴딜 사업은 일자리 창출계획이었고 사회간접자본 개발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업추진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었고, 사회적 동의도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일자리 창출효과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 2020년 그린 뉴딜은 이것들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 분명히 정리하고 나가야 한다.

어떤 경우든 녹색 세탁(green washing)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목표 달성을 위한 투자재원의 확보와 함께 투자 규모는 적정한가 여부이다. 그린뉴딜 종합계획은 “5년 단기투자 계획 제시에 그쳐 기후위기 대응 중장기 비전이 안 보인다, ‘2050년 넷 제로’ 같은 탈탄소사회 청사진을 못 내놨고, 에너지전환 정책 목표도 없고, “혁신적 계획 수립도 의욕적 재정투자도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5】

한국 경제 규모는 유럽(EU)의 10배라고 볼 수 있다. 유럽 역내 국가들은 그린 뉴딜을 위해 7년간 1,000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규모로 볼 때 100조원 정도는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5년간 42조7천억 원을 투자하는 데 그치고 있다.【6】

둘째, 그린 뉴딜의 대상 영역과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그린 뉴딜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개념정의나 문제의식과 직결된 이 쟁점은 그린 뉴딜이야말로 기후위기에 대한 심각성과 세계경제의 파국적 변화 가능성, 감염병의 세계적 만연과 확산위기라는 점에서 에너지 전환을 비롯한 포괄적 전환에 치중해야 한다. 그렇지만 에너지 전환만이 모든 문제 해결수단과 방법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슨 분야나 영역을 선택하고 집중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환원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정책의 우선순위 배정과 비중 부여문제 해결이 매우 중요하다.

<그림 6> 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 초안

2020년 7월 14일 발표된 한국판 뉴딜정책 내용과 6월 1일 처음 발표된 정책내용의 기조가 사실상 동일, 유사하다. 더 나아가 그린 뉴딜과 관련해 보자면 이명박 정부의 그것과 문재인 정부의 그것 역시 동일, 유사하다(그림 3, 4, 5, 6 참조). 왜 이렇게 되었을까를 놓고 보자면 그동안 관련부처 정책입안자들은 교체, 이동, 보충되었으나 정책내용과 구조는 이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 유사한 틀 안에서 이것저것 꿰어 맞추는 방식으로 채워져 온 게 아닌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석탄 화력발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부에 달려있다. 석탄 화력발전의 조기 폐쇄와 가동 중단, 대체 에너지 개발, 석탄 화력발전 종사자의 전업 훈련교육과 전업, 탈석탄 발전시대의 지역경제 회복과 일자리 영향 최소화 등 보완대책이 병행 개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도 다른 나라에서는 지속가능한 사회형성, 지속가능성을 보장·확보할 수 있는 미래를 지향하며 다양한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 순환경제를 위한 자원순환정책, 농수산식품정책, 전반적 환경질 제고, 생물종 다양성 보전과 생태계 회복탄력성 유지 등을 포함한 포괄적 정책을 개발, 추진, 이행하고 있다.

셋째, 그린 뉴딜은 정의로운 전환인가? 정의로운 전환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기술의 개발과 도입, 디지털 전환, 생태적 전환은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고용기회가 확대될 수 가능성을 높인다. 그러나 동시에 기존 일자리 축소나 회색 노동자의 소멸로 이어질 기회가 넓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화석연료 연소 동력의 자동차 생산은 수많은 부품업체와 협력업체, 완성차 노동자들의 고용 현장이었으나 전기차, 수소차 제조가 주류가 되면 기존 자동차공업 노동자의 대량실직, 해고는 불가피하다. 이 경우 이들 회색 노동자 노동자에 대한 교육과 재교육 기회 제공, 전직을 통해 노동시장의 동요를 최소화하는 고용의 연착륙 대책이 필요하다. 에너지 전환포럼은 디지털 그린특구 지정을 제안했다. 예를 들면 화력발전이 밀집한 당진과 보령지역에 그린데이터특수, 영덕 삼척 디지털 클린에너지특구, 자동차공업 밀집지역인 울산, 경남에 디지털모빌리티특구, 김해 그린데이터센터특구, 창원 그린리모델링특구 지정을 말한다.

넷째, 그린 뉴딜 추진을 위한 법률과 제도, 조직을 어떻게 입안, 구성, 운영할 것인가?

한 마디로 그린 뉴딜은 기존 방식과 접근으로 추진해 왔던 개별 사업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 협약’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 이런 담대하고 통합적인 추진내용을 담아내는 법을 마련하여 강력하게 시행해야 한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 지속가능발전법, 에너지법을 폐지하여 일부 통합, 전면 개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린 뉴딜 추진, 이행을 위한 협치·공치(거버넌스) 기구로써 기존의 녹색성장위원회, 국가기후환경회의, 지속가능발전위원회, 미세먼지대책특별위원회 역시 폐지, 전면 교체, 통합하여 운영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누가 그린 뉴딜 정책 수립과정에 참여하고 주도할 것인가?

말하자면 누구를 위해 누구와 함께 추진하는 그린 딜이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는가 여부이다. 디지털 뉴딜이든 그린 뉴딜이든 ‘한국판 뉴딜’은 말 그대로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합의여야 한다. 그동안 정부와 국회, 지방자치단체와 정당 등은 기후위기 극복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한국판 뉴딜을 위한 대전환을 재빠르게 논의해 왔다.

▪2020년 6월 05일 : 228개 전국 모든 기초 지자체, “기후위기 비상선언”

▪6월 30일 : 국회 한정애 의원 등 48인, 기후위기 비상 대응 촉구 결의안 제출

▪7월 02일 : 김성환의원 등 109인, 기후위기비상선언 결의안 제출

▪7월 07일 : 17개 전국 모든 광역 지자체, 탄소중립 선언

▪7월 08일 : 국회 강은미 의원 등 12인, 탈탄소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기후위기대응 및 특별위원회 설치 결의안 제출

▪7월 14일 : 대통령, 한국판 뉴딜 발표. 2050년 탄소 제로 발표 예정되었으나 없음

<출처: 연합뉴스>

이들 뿐만 아니라 경제계와 노동조합, 시민사회와의 협치·공치와 공동행동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확보 논의와 범사회적 수용성이 검토되어야 한다. 최근 수도권 부동산가 파동을 해결하기 위한 주택공급을 위해 박정희 정권 이래 고수해 온 서울지역 그린벨트 해제 논의나 석탄 화력발전 해외 수출 결정과 같이 그린 뉴딜 시책에 정면 배치되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런 회색정책이 반복된다면 누가 녹색정책의 주류화, 산업정책의 녹색화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될 것인지 매우 의심이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국무총리만이 앞장서서 한국 뉴딜을 선도하는게 아니라 장관과 차관이 책임지고 이웃부처와의 정책조정과 협의를 통해 정책통합을 우선 실현하고, 확정된 추진과제는 대통령 임기이내, 국가계획 추진일정에 맞추어 지체나 차질이 없이 이행, 실천되어야 한다. 그런 그린 뉴딜 우선순위 정책 효과가 가시적으로 성과를 거두어 갈 때 시장과 시민사회의 신뢰가 축적되어 협치가 구현됨으로써 회색국가에서 기후불량국가의 오명을 씻어내며 이산화탄소 등 지구온난화기체 배출이 없는 녹색국가로의 대전환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1】 윤순진 2020 「그린 뉴딜의 원칙과 방향」. 그린뉴딜 경제위기 기후위기 생태위기 극복을 위한 현장과 정책의 대화. 주최·주관 국회의원 이학영·김성환·안호영·진성준·강은미·윤준병·이해식·한국환경정책연구원·한국환경회의 발표 자료. 2020. 7. 1.

【2】 경향신문 2020.07.15.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007152052005#c2b

【3】 기획재정부 2009.01.23. 보도자료. 국제기구 UNEP의 한국 녹색뉴딜정책에 대한 긍정평가. UN 환경계획(UNEP, 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me)은 ‘09.1.9일 보도 자료에서 한국과 일본이 녹색뉴딜의 국제적 기조확산을 선도하고 있다고 평가하였음. UNEP Achim Steiner 사무총장의 브리핑 주요 내용 : ㅇ 글로벌 경제위기 대응 및 지구환경 보전을 위해 세계적 차원의 녹색뉴딜(Global Green New Deal) 및 녹색경제 이니셔티브(Green Economy Initiative)가 필요한 시기라고 언급.

ㅇ 청정기술ㆍ신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경제침체와 실업에 대응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달성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

ㅇ 최근 한국과 일본이 녹색뉴딜 정책을 입안ㆍ발표함으로써 국제적 기조확산을 주도.

* UNEP는 ‘10년까지 녹색산업 시장, 공공지출 및 정책에 대한 재조명 작업을 통해 각국의 경제위기 극복 및 녹색경제성장 전략 수립지원 예정.

【4】 아시아경제 2009.01.06. https://www.asiae.co.kr/article/2009010610274672546

【5】 한겨레, 2020.07.14.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953682.html

【6】 세계일보, 2020.07.15.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3484470

목, 2020/07/23-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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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코로나와 대선 이후, 미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미국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코로나19와 대통령 선거,
흔들리는 자본주의 제국의 향방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전망한다!

코로나19로 세계사적인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국 미국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코로나19와 대통령 선거의 향방 때문이다.

코로나19는 미국에게 가장 파괴적인 태풍, 퍼펙트 스톰이다. 강력한 태풍이 불면 모든 것이 날아가고 감추어졌던 흉물들이 드러나듯 코로나는 미국의 감추어졌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것이 현재의 미국을 단 한마디로 묘사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을 선망하던 외국인의 입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인의 입에서 그 말이 터져 나오고 있다. 공포, 불안, 분노, 그리고 절망의 유령이 미국 전역을 휘감고 있다.

그 와중에 치러지고 있는 미국 대통령 선거의 향방은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트럼프나 바이든은 이 사태를 과연 해결할 수 있을까? 현직 대통령과 전직 부통령인 그들은 이 사태에 어떤 책임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알던 미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코로나19라는 퍼펙트 스톰으로 드러난 미국의 충격적인 실상을 파헤치며, 이제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가 아니라 ‘아메리칸 나이트메어(악몽)’의 나라가 되고 있음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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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극심한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양극화…”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연합뉴스>

 

김광기

수, 2020/11/04-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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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3차 유행을 예감하면서, 한국 역시 서구와 유사한 상황에 돌입하는 것이 아닌지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반면에 서구 사회는 점점 더 명료하게 서구 근대 민주주의의 한계에 봉착하는 모습이다. 코로나 1차 유행 시에 서구의 ‘기본권’ 개념은 명료했고, 아시아의 ‘파시즘’적이거나 ‘독재’적인 문화를 비판하는 데에 거리낌 없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이제 구미에서 극우세력과 코로나 부정 세력 간에 연대가 커지면서, ‘기본권’ 개념은 점점 더 극우적으로 옹호되는 ‘묻지 마 자유’의 방향으로 오용되고 있다.

이에 <피로사회>로 유명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최근 유럽 언론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단지 코로나19 상황이라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에 그러한 화해가 급조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그러기에는 1990년대 이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의 대립이 매우 완강했고,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구별되지 않는 경향 역시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한병철이 새롭게 주장하듯이 공동체 정신이 자유주의의 전제라면, 공동체주의자들은 굳이 공동체주의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자유주의를 옹호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비판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공교롭게도 정의로운 분배의 절차를 제도화하려고 했던 자유주의자 존 롤스였다.

따라서 코로나19로 구미에서 ‘기본권’이나 ‘자유’와 같은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과도 같은 개념들이 ‘이기주의’나 ‘경제적 생존’과 동일시된다고 해서, 공동체주의자가 갑자기 자유주의를 옹호하기는 어렵다.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의 수렴이 아니라, 오히려 그도 저도 아닌 제3의 다른 원칙이 필요해진 것은 아닌가? 공동체주의는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도덕적 가치의 사회적 통일성을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에, 추상적 절차에 기초하여 개인들의 권리와 연대를 조절하려는 ‘가치 다원주의’적인 자유주의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아무리 가는 길이 급해도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가 최근 한 학술지에 투고했다가 수정 재심 요청을 받아 투고를 철회한 논문에서, 필자는 ‘공동체’의 개념이 아니라 ‘상호의존성’의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공동체’는 사회 구성원이 동일한 가치를 공유함을 전제하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분화해서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가치 갈등’ 및 ‘가치 지배’의 문제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반면에 ‘상호의존성’은 가치와 무관하게 인간의 존재 조건, 즉 서로 돌봄이 필요한 개인들의 취약성이라는 조건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즉 어떤 가치로 어떤 형태의 공동체를 정당화하는가의 경험적 사실과 무관하게, 사회는 모종의 ‘연대’ 형태일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 원칙이다. ‘공동체’는 ‘상호의존성’의 조건에서 출현하지만, 그러한 조건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상호의존성’ 관계에 대한 특정 해석방식, 즉 ‘가치’에 의해 정당화된다. 따라서 특정 가치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서로 돌보는 연대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아닌 ‘상호의존성’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유주의가 공동체주의와 수렴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상호의존성’ 개념과 관련된다. 즉 자유주의에서는 사회적 연대를 ‘상호의존성’의 결과가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들의 자발적 협동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공동체적 상호 돌봄’을 전제로 삼을 수 없으며, ‘합리적인 협동의 형태에 대한 자율적 합의’를 추구한다. 즉 ‘공동체’를 주장하려면, 가장 먼저 자유주의의 인간관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이 아니라, ‘타인과 상호의존성 속에서 사는 개인’으로 개인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를 주장하려면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서, ‘가치의 공유’까지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런 행보는 ‘가치 지배’라는 새로운 위계와 불평등을 초래한다. 따라서 ‘공동체’로 한 발 더 내딛는 행보를 생략하고, ‘상호의존성’에서 출발해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롭게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코로나19의 n차 유행을 통해 점점 더 명료해지는 서구 근대 민주주의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개인을 집합체나 타인과 분리해서 보는 ‘개인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분리를 ‘완전한 자율과 독립’으로 고정해서 이해하는 것이 문제이다. 오히려 ‘분리’는 순간순간의 ‘사건’들에 불과할 터인데, 그것을 영구적인 개인의 실체적 속성으로 정의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에서 ‘책임’은 정언명령을 따르는 실천 이성 또는 개인의 합리적 성찰의 결과로 이해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개인들이 더 이상 정언명령을 따르거나 합리적일 수 없을 때, 자유주의 사회에서 책임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현재 구미에서 ‘자유’의 개념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극우적으로 오용된다. ‘경제적 생존’ 문제가 실천 이성의 정언명령이나 합리성보다 훨씬 더 시급하기 때문에, 책임 없는 자유가 ‘기본권’의 개념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실천 이성을 장착해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앞서 먹고 살아야 하는 생물학적 존재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 사는 방법을 제시하는 시장 논리는 ‘상호의존성’이 아니라 ‘적자생존’의 논리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 개념에 익숙한 한국 사회가 서구 자유주의에 거울이 되어주고 또 동시에 ‘개인정보 보호’ 개념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적인 서구 사회를 한국 사회가 배워야 한다는 절충론적인 접근은 무의미하다. 한국 사회는 ‘가치 동일적 사회=공동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서, 서구 사회는 ‘자유주의적 개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상호의존성’이라는 인간 조건에 기초한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를 기획하는 것이 두 사회 모두에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홍찬숙

목, 2020/12/0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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