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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2019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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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2019년 02월호

익명 (미확인) | 화, 2019/02/19-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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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회의서 일제 입장 용어 강요, 조선일보 폐간되자 조광에 일제전쟁 미화…수차례 침략전쟁 옹호 강연도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이 나왔다.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은 발간사에서 이를 “고백과 성찰을 위한 기록”이라 했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서문에서 “참회와 화해의 첫걸음이 되길” 바랐다. 이는 희망사항으로 끝났다. 조선일보 9대 사장 방응모(조광 발행인)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고,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에서도 방응모를 친일파로 규정하자 조선일보 측은 반발했다.

2010년 1월 방응모의 양손자 방우영 전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방응모 전 사장이 친일행위를 한 적 없다”며 정부에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방우영 전 회장이 2016년 세상을 떠나자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등이 다툼을 이어갔다. 법원에선 방응모를 끝내 친일파로 봤다. 다만 8년에 걸친 소송에서 친일행위의 범위가 줄었다.

▲ 계초 방응모. 원래 호는 춘해였다가 뒤에 계초로 고쳤다. 친일인명사전에선 방응모를 조광 발행인으로 분류했다.

원래 반민규명위에선 잡지 조광에 일제 동조 논설을 쓰고 일제 징병을 권유한 행위, 일제에 군사물품을 납품한 조선항공공업에서 발기인·감사를 지낸 행위, 조선총독부 관변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활동 등 세 가지를 친일행위로 봤다. 대법원은 이 중 조광에 일제 동조 논설을 쓰고 일제 징병을 권유한 행위만을 인정했다.

여전히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는 조선일보와 방 사장 일가가 방응모의 친일행적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아서다. 방응모는 자신의 친형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자신의 양자로 삼고, 방재윤의 아들은 조선일보 사주를 지낸 방일영과 방우영이다. 방상훈 현 조선일보 사장은 방일영의 첫째 아들이다.

이에 미디어오늘은 법원 판결취지와 방응모가 언론사 사주라는 점을 고려해 친일인명사전 내용 중 언론활동을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살펴봤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해 백범묘소 앞을 찾은 다음날인 2009년 11월9일 경향신문 1면 사진기사.

방응모가 첫 인연을 맺은 신문사는 동아일보다. 그는 1884년 1월3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잠깐 교편을 잡았고 변호사사무실에서 대서업을 하거나 여관업 등에 종사하던 그는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한 뒤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지국장이 됐다. 1927년 5월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에서 물러나 동아일보 고문을 맡았다.

방응모는 금광개발로 큰 돈을 벌어 그 중 일부로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1924년 평안북도 삭주의 교동광업소를 인수했다가 1932년 교동광산을 135만원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게 팔았다. 1932년 6월 조선일보 영업국장,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 같은해 7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1940년 8월 조선일보 폐간 때까지 재직했다. 1935년 잡지 ‘조광’을 창간했다.

1936년 8월 경쟁신문사의 불행이 시작됐다.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 조선중앙일보가 휴간하자 조선일보는 전국에서 발전 자축회를 개최하는 등 사세확장의 기회로 활용했다. 이후 방응모는 본격 친일행위에 나섰다.

그는 1937년 2월 원산 순회강연에서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해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정한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는 망언으로 참석자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11월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 등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자고 주장했다. 일제 입장의 표현을 쓰자는 주장이다.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반대하자 방응모는 서춘에게 힘을 실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몇십만원 손해를 봤고 3·1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총독부가 조선일보 지면이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고 평가했다. 1938년 2월 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가 만든 조선춘추회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했다. 또 방응모는 수차례 강연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이 평화를 위한 활동이라고 왜곡·미화했고, 조광에 글로 남겼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당했고 방응모는 월간지 조광 발행인으로 취임해 친일활동을 이어갔다. 같은해 11월호 ‘조광’ 권두언에서 “국민된 자로서 누구나 실로 최후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태평양전쟁 개전소식을 들은 뒤 감상을 적은 1942년 2월호 글에서 영국과 미국을 “동양의 원구자, 동양 전체의 죄인”으로 칭하며 “대동아전쟁은 그들에게 동양을 이탈해 세계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응모는 일제가 전쟁에 이겨야 한다며 조선 민중에게 다음을 요청했다. 첫째, (일제)군관 당국을 절대 신뢰해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 둘째, 일하지 않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는 관념을 가지고 국민개로운동(국가총동원)에 동참할 것. 셋째, 장기전을 대비해 물자를 절약할 것. 넷째, 전비확충을 위해 저금을 많이할 것 등을 강조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돼 방응모의 정확한 사인, 사망시기 등은 확인할 수 없다.


조선일보가 말하는 방응모 ‘조선일보를 중흥시킨 금광왕’

조선일보는 어렵던 신문사를 인수해 경영난을 돌파한 인물로 이 신문을 이끈 30인 중 한 명으로 방응모를 기록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 신문사는 1932년 말 판권을 장악한 사채업자 임경래와 이에 반대하는 기자들 분란으로 신문을 제대로 발행하지 못했다. 당시 사장 조만식이 폐광 개발로 금맥을 발견한 방응모에게 경영을 부탁했다. 조선일보를 살리려 노력하던 주요한 역시 방응모를 찾아가 조선일보 인수를 설득했다.

방응모는 동아일보 정주지국장 경력이 전부일 뿐 서울에선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마흔살에 접어든 1924년 삭주 교동(다릿골) 폐광을 뚫기 시작해 3년 만에 금맥을 발견해 종업원 1000여명을 거느린 광산으로 성장시킨 인물로 알려졌을 뿐이라고 이 신문은 기록했다.

조선에서 금광개발로 거부가 된 사람은 방응모 말고도 최창학과 김태원 등이 있었다. 이들 성공으로 당시를 ‘황금광 시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방응모는 자선사업 정도였던 신문사업에 뛰어들었다. 조선일보는 잡지 ‘삼천리’ 1933년 10월호에서 “신문사업은 아직 소모사업”이라며 “금광왕들은 모두 방응모씨를 본받자”고 한 부분을 인용했다.

▲ 조선일보를 이끈 사람들 30인 중 하나인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사진=조선일보 홈페이지 갈무리

방응모는 50만원을 내 조선일보를 주식회사로 바꿨다. 당시 동아일보 불입 자본금이 35만원,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 자본금이 50만원이었다고 전했다. 방응모는 1933년 4월27일 ‘드리는 말씀’에서 “(조선일보는) 우리 조선 민중의 공유물”이지 “몇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고 했다.

방응모 인수 이후 조선일보가 성장했다. 1933년 조선일보 부수는 2만9341부로 동아일보(4만9945부)와 2만부 가량 차이가 났지만 방응모 사장 취임 3년 만에 6만626부로 동아일보(3만1666부)를 두배정도 앞섰다. 1935년 언론사 최초로 취재용 비행기를 구입했고, 월간지 ‘조광’, ‘여성’, ‘소년’을 창간했다. 일제의 조선일보 폐간에 대비해 1940년 1월 출판부를 독립해 조광사를 설립했다.

방응모는 독립운동가를 지원했다. 안창호가 입원했을 때 500원을 냈고, 안창호가 세상을 떴을 때 조위금을 내 장례를 치렀다. 가곡 ‘선구자’의 주인공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만해 한용운 선생 등의 장례에도 자금을 댔다. 또 독립운동가 소식지를 찍어내는데 활자를 제공하기도 했고 ‘이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친일 논란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했다. 방응모는 일제 요구로 시국강연에 불려 다니거나 임전대책협력회에 이름을 올렸는데 이 단체는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조선 지도급 인사들이 망라됐다고 기록했다.

방응모는 1950년 5·30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낙선한 뒤 6·25 전쟁 발발 후 자택에 머무르다 7월6일 납북됐다고 한다.

<2020-03-03> 미디어오늘

☞기사원문: 친일인명사전, 조선일보 방응모를 뭐라고 기록했을까?

화, 2020/03/03-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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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경 칼럼]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명예훼손 소송 도쿄 2심 재판 결과에 부쳐

* 이 글은 위안부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명예훼손 소송을 지지하는 활동을 해 온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의 칼럼입니다.

지난해 10월, 저는 한겨레 전 부사장이신 원로 언론인 임재경 선생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임 선생은 그가 일본에서 재판을 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그를 지지하기 위해 ‘우에무라 다카시를 생각하는 모임’(우생모)을 만들었는데 그들이 일본에 가니 “한국의 대표적 언론단체인 민언련 사무처장이 함께 가면 좋겠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불매운동이 전개되는 와중에 3박4일이나 일본을 다녀온다는 것이 부담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권유로 저는 우에무라 기자의 자서전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푸른역사)를 읽었고, 결국 함께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2월, 삿포로 재판소 판결을 지켜보기 위해서 저는 또 다시 우생모와 함께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그의 도쿄 재판소의 2심에서 또 다시 패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직 판결문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전해 받지 못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매우 큽니다. 앞으로 이 문제를 더욱 공론화해야겠다는 생각에 제가 느낀 우에무라 기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누구이며, 어떤 재판인가?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62)는 <아사히신문> 기자로 재직 중이던 1991년 8월 11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우에무라 다카시 “27년 전으로 돌아가도 다시 위안부 문제 보도하겠다” 뉴스톱 인터뷰 기사 참고). 그의 보도 사흘 뒤 김학순 할머니가 실명으로 기자회견을 열어서 우리에게도 많이 보도가 되었지만, 우에무라 기자의 보도는 한국보다 앞서 보도한 특종이었습니다. 그의 기사는 위안부 문제를 한‧일간 주요한 외교문제로 만드는데 주요한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014년 1월, 느닷없이 우에무라 기자에 대한 일본 우익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쿄기독교대학의 니시오카 스토무 전 교수가 <주간문춘>에, 저널리스트라 불리는 사쿠라이 요시코가 <주간신초> 등을 통해 우에무라가 날조기자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우에무라 기자의 1991년 보도가 날조라는 주장의 배경은 단순합니다. 우에무라 기자가 쓴 당시 기사의 첫 구절에 “여자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전장으로 연행돼”라는 부분이 나오는 것을 트집 잡으며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고 썼다는 것이죠.

하지만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를 폭로하셨던 1990년대 당시에는 모두들 위안부와 정신대라는 표현이 혼용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에 창립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의 전신)도 단체명에 ’정신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이는 분명합니다. 우에무라 기자도 당연히 “당시 정신대라는 표현은 당시 일본과 한국 언론에서 모두 일반적으로 썼던 표현”이라고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밖에도 우익들은 우에무라 기자의 부인이 한국인이라는 점 등을 빌미로 그가 사적인 의도를 가지고 기사를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보도로 인해서 우에무라 기자는 우익들의 공격에 노출되었습니다. 해당 보도들이 나올 당시, 우에무라는 아사이신문에 사표를 내고, 한 대학 강사로 부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학교에 날조기자를 고용하지 말라는 항의가 이어져 그의 임용은 취소되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그의 기사가 날조가 아니라는 점을 보도했지만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우익들은 ‘일본의 매국노’라며 그에 대한 공격을 이어갔고, 심지어 고등학생인 딸에게 살해 협박까지 했습니다.

명예 회복을 위한 재판, 그러나 두 재판소 모두 2심까지 패소

이렇게 일본 우익으로 인한 공격에 시달리던 우에무라 기자는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명예훼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재판은 니시오카 스토무와 <슈칸분춘>(週刊文春)을 대상으로 도쿄 재판소에서, 사쿠라이 요시코와 <슈칸신초>(週刊新潮) 등을 대상으로 삿포로 재판소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삿포로재판소 1,2심 모두 우에무라 기자가 패소했고, 도쿄재판소도 1심 패소 이후 오늘(3월 3일) 2심 결과가 나왔는데, 마찬가지 결과였습니다.

두 재판소 모두 우에무라의 사회적 평가가 떨어진 것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익들이 ‘우에무라는 날조기자다’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으며,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안이기 때문에 명예훼손은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상당한 이유’ 그 무엇도 전혀 ‘상당한 근거’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변호인 측은 두 항소심 재판 모두에 대해서 “최고재판소(일본의 대법원)는 명예훼손 재판의 경우 진실 상당성을 엄격하게 해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재판소가 추론으로서 상당한 합리성이 있다고 판결했다”고 평하면서 이는 판례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재판 이후 우에무라 씨와 변호인 측은 즉각 상고하겠다고 밝혔기에, 이제 두 사안은 일본의 최고재판소에서 다투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하는 사람들일까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삿포로 재판을 방청하는 과정에서 저는 사쿠라이 요시코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삿포로 재판은 사쿠라이 요시코와 그의 글을 출판해 준 3개의 출판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쿠라이 요시코는 영화 <주전장>에서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대표적인 일본의 우익인사입니다. 그는 45년생이고 여성으로 베트남에서 출생하여 하와이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도쿄 지국에서 근무한 후 1980년부터 1996년까지 니혼 TV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인 ‘오늘의 사건’에서 메인 캐스터로 일했습니다. 일본에서 여성 캐스터의 선구자적 존재이기에 그를 ‘저널리스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가 쓴 글을 번역한 것들이 제법 있던데요. 일본 ‘슈칸다이아몬드’ 2018년 3월 17일호에 실린 사쿠라이 요시코의 칼럼 <한국의 사회주의화 및 북한화가 진행 중, 문대통령과 보수파 간의 대립에 주목>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근거도 없는 허위조작정보이며, ‘프로 막말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재인이 구상하는 것은 헌법의 전면적인 개정입니다. 한국을 전혀 다른 나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헌법 전문에는 한국을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의 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자유’를 삭제하고 그냥 ‘민주주의적’이라고 바꿉니다. 그렇게 하면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부호가 맞기 때문입니다.”

“(문재인의 헌법 개정 내용 중 하나는) ‘국민의 권리’를 ‘인간의 권리’로 수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북한 김일성의 ‘인간중심’ 주체사상에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재인은 적어도 이념에 있어서는 한국을 북한풍의 국가로 개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연방제를 거쳐 통일국가로 향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사회주의화 및 북한화가 척척 진행중이라고 판단해도 될 것입니다.”

“경계 대상은 북한의 김정은만이 아니라 한국의 문재인이기도 합니다.”

우에무라 다카시를 생각하는 모임(우생모) 회원들이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재판에 참석한 모습

졌지만 이기고 있는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재판과정

삿포로 재판소의 2심에서 패소한 날,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두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도와주고 지지하는 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함께 해주는 이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그 모습을 보니 숙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 그는 “역사적으로는 이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이 재판은 일본의 전쟁범죄와 부끄러운 역사를 파헤친 언론인과 그 역사를 부인하고 다시금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가려는 일본의 보수 우익 아베 정권과의 ‘역사적’ 싸움입니다.

그리고 삿포로 재판을 응원하기 위해 두 번 일본을 방문하면서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에무라 기자를 지지하는 많은 일본의 시민이 있으며, 한국의 우생모 등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일본의 시민사회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작년 민언련은 일본의 무역보복 이후, 일본과 한국의 보수언론들의 하는 거짓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토크쇼를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강연을 한 민족문제연구소 김승은 책임연구자는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고 규명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시민사회의 노력이 매우 진정성 있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저는 실감을 하지 못했죠. 하지만 두 차례 일본 방문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촉구하며 본인의 자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양심을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 시민이 존재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그의 변호인단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우에무라 기자 말로는 삿포로와 도쿄에 계시는 약 270명에 달하는 변호인단이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삿포로에서 활동하는 900여명의 변호사들 중 107명이 우에무라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실제 내가 재판을 방청한 두 번의 재판 모두 상대방 변호인 측은 4명 정도의 변호인이 앉아있는 데 비해서, 우에무라 측 변호인은 그야말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계속 들어왔습니다. 변호인석의 모든 자리가 꽉 차서 간이의자를 가지고 오고, 그 와중에 더 자리를 좁혀서 앉아야 할 정도로 변호인의 수는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구성과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 변호인부터 젊은 여성 변호인까지 정말 다양했고, 재판정에 들어서는 그들의 표정은 매우 따뜻하고 활기찼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재판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실질적으로 그와 연대하고 있었습니다. 재판이 끝나면 시민을 대상으로 재판결과와 의미, 앞으로의 계획 등을 매우 상세히 알려주는 기자회견을 했고, 다시 시민사회를 대상으로 보고회를 했습니다. 많은 변호인들이 이런 과정이 끝난 뒤 우에무라 기자와 함께 한국음식을 먹는 회식 자리까지 함께 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함께 모여서 우에무라 기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변호인단의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일본의 시민들의 우에무라 기자에 대한 응원과 지지도 결연했습니다. 재판이 있을 때마다 재판과정에 대한 보고회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지난 10월 그 자리에 우리가 ‘우에무라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며 인사했을 때, 여러 명의 일본인들은 눈물을 훔치는 것을 봤습니다. 감사와 환영과 연대의 표정은 지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홋카이도 주민이면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해결하는 홋카이도 모임>이라는 시민단체 활동을 하신다는 나나오 히사코(七尾寿子, ‘우에무라재판을 지원하는 시민들의 모임’ 사무국장)라는 일본 여성은 ‘우생모’가 모이는 자리마다 오셔서 시종일관 손을 잡고 우에무라 기자를 지지하기 위해 방문한 것에 대한 감사와 연대의 뜻을 전했습니다. 올 2월 삿포로 판결 이후 열린 보고회에서는 ‘경남지역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의 이경희 공동위원장(‘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창진 시민모임’ 대표)의 발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성금을 걷어주기도 했습니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우익들에게 ‘매국노’로 낙인찍혀있는 상태입니다. 우경화된 일본 사회 내에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많은 시민들과 정의로운 변호사들은 그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비난하며 그를 지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재판은 이런 한일 양국의 깨어있는 시민을 늘려나가고, 그들의 참여로 결국은 역사적으로 승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싸움의 과정에서 한일 양국의 많은 시민들이 왜 이렇게 지극히 정상적인 기사 하나로 인해 한 인간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에 대한 사과와 배상조차 받기 힘든 일본의 현실이 얼마나 엄혹한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2019년 제 7회 리영희상을 수상했다.

한일 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한 우에무라 기자

마지막으로 우에무라 기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거듭 강조한 것은 한일 교류였습니다. 그는 현재 일본의 <슈칸 긴요비>(週刊 金曜日)의 편집장입니다. <슈칸 긴요비>는 일본의 진보적 주간지인데, 경영난에 처한 잡지사가 우에무라 기자를 편집장으로 초빙했다고 합니다. 현재 <슈칸 긴요비>는 우리의 〈시사IN〉과 기사 교류를 맺고 있습니다. 한편 우에무라 씨는 한국가톨릭대학의 초빙교수로 한국에서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개학이 연기되었지만, 학기 중에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강의를 하고,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힘겨운 재판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쁘게 지내는 그는 한일 예비 언론인의 교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예비 언론인’은 우리의 ‘언론사 지망 취업준비생’과는 조금 다릅니다. 일본은 사실상 언론사에 취업이 확정된 상태의 예비 언론인들이 학업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들에게 한일 교류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에무라 기자는 2017년부터 ‘언론인 한일 학생 포럼’을 만들어서 한일 양국의 문제해결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는 언론인의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반일감정이 매우 큰 편입니다. 그래서 처음 우에무라 기자의 이런 간곡한 호소를 들었을 때는 그다지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결심 공판 당시 재판 과정을 미디어에 담고 후원하는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을 보면서 저의 마음은 바뀌었습니다. 친일과 반일, 친한 반한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양국 시민이 함께 노력하는 과정은 분명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일본 최고재판소의 최종 판결을 남겨둔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를 위해서 한일 양국의 많은 시민들이 이 재판에 관심을 갖기를 바라며, 그를 응원합니다.

*참고자료


공소인성명

오늘, 도쿄고등재판소에서 니시오카 츠토무 씨 등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니시무라 도쿄소송의 공소심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1심에 이어 우리는 패소했습니다. 지극히 부당한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시오카 씨는 2014년 2월 6일호《주간문춘》의 기사에서 제가 쓴 전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 씨의 증언기사 A를 “날조”로 규정하는 등, 저에 대한 “날조”공격을 되풀이해왔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격렬한 “우에무라 날조 배싱(bashing)”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내정되어있던 대학의 교수직을 잃었고, “딸을 죽이겠다”는 협박장까지 받았습니다.

저는 2015년 1월 니시오카 씨 등을 고소했습니다. 저의 명예, 가족의 안전, 근무처 학생들의 안전, 그리고 전 “위안부”인 김 씨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오늘 고등재판소 판결에서는 니시오카 씨가 제 기사를 “날조”라고 주장하는 세 가지 점 중 두 가지에 대해 진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나, 믿는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면서 니시오카 씨를 면책했습니다. 니시오카 씨는 저에 대한 직접취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니시오카 씨는 제 기사를 날조기사로 단정할 때에도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것이 1심에서 밝혀졌습니다.

이《주간문춘》의 기사를 보십시오. “이 때 자기 이름을 대고 나온 여성은 부모에게 팔려 위안부가 되었다고 소장에 썼고, 한국 언론의 취재에도 그렇게 답하고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소장에서도 한국 언론의 취재에도 김학순 씨는 그렇게 답하지 않았습니다. “날조” 비판의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있는 것입니다.

또, 니시오카 씨는 저의 기사 B에 대해, 저서『알기 쉬운 위안부문제』에서 김학순 씨가 기생으로 팔려갔던 것을 적지 않았으므로 “악질적이고도 중대한 날조”라고 규정했습니다. 우리는 이 언설을 무너뜨릴 새로운 증거를 발견하여 고법에 제출했습니다.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준비하고 있던 김 씨가 처음 변호단의 청취조사에 응한 1991년 11월 25일의 녹음테이프입니다. 여기서 김 씨는 “기생”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테이프에 근거해 기사 B를 썼습니다.

그러나 고법판결은 이 새 증거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니시오카 씨의 결정적인 오류도 간과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내려놓은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에무라 날조 배싱”의 장본인은 니시오카 씨입니다. 그의 언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배싱에 가담했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던 대학에 협박전화를 한 남성이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제 딸을 트위터로 비방ㆍ중상한 회사원은 그 책임을 추궁 받아 배상금 지불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판결에서 그 장본인이 면죄를 받은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에무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일은 기자 여러분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부당판결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대로라면 가짜뉴스가 거리낌 없이 유포되는 심각한 시대가 옵니다. 즉각 상고하고, 최고재판소에서의 역전판결을 기대하겠습니다.

이상


공소심 판결에 대한 변호인단 성명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씨가 전 “위안부” 김학순 씨의 증언에 관한 91년의 신문기사를 둘러싸고 주식회사 문예춘추와 니시오카 츠토무 씨를 고소한 소송의 공소심에서 도쿄 고등재판소는 오늘, 우에무라 다카시 씨의 공소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우에무라 씨 등의 논문이나《주간문춘》의 기사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것은 인정하면서 진실성ㆍ진실상당성의 항변을 인정한 도쿄지방재판소 판결을 거의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추인한 지극히 부당한 판결이다.

니시오카 씨 등은 무에무라 기사에 대해 “기생이었던 김학순 씨의 경력을 쓰지 않았으니 날조다”라는 취지를 주장해왔다. 우에무라 씨는 공소심에서 91년 12월 기사의 근거가 된 김학순 씨의 증언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했다. 증언테이프 안에는 기생에 대한 증언이 없었다. 증언자가 증언하지 않은 내용을 기사로 쓰지 않은 것이 “날조”가 될 리 없다. 그러나 공소심은 해당 증언 테이프가 김학순 씨의 증언 전체를 기록한 것이라 인정하기 힘들다는 둥 믿기 어렵다는 트집을 잡으면서 그 증거력을 부정했다. 이런 주장은 상대방에게도 통하지 않아, 테이프의 성립과정을 입증하기 위해 신청된 본인 신문도 각하되었다. 고등재판소의 판결은 변호인단으로부터 반론의 기회를 빼앗은 기습적인 인정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판결은 8월의 우에무라 기사 중에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라는 기사가 “강제연행을 의미한다”는 전제에서 우에무라 씨가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기사를 썼다는 1심의 인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8월에 기사에는 확실하게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고 써놓지 않았는가. 우에무라 씨에게 강제연행을 꾸며내려는 악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면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 따위를 썼을 리가 없다. 이 판결의 인정은 상식을 까마득히 벗어나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이 판결은 결론을 미리 내려놓은 너무도 조잡한 판결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한편, 고등재판소 판결은 ① 우에무라 씨가 김 씨가 기생으로 팔려갔다는 경력을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다는 사실, ② 우에무라 씨가 장모의 재판에 유리하도록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기사를 썼다는 사실에 대해 공히 진실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공소심의 큰 성과로써 우에무라 씨의 명예를 일부나마 회복한 것이다.

변호인단은 이번 심리 과정에서 우에무라 씨의 기사가 날조가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입증하고, 그의 명예를 회복함과 동시에, 전 “위안부”의 존엄회복 운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고 믿는다. 이러한 1심, 2심의 성과를 토대로 최고재판소에서 끝까지 싸워낼 것이다.

이상

2020년 3월 3일

<2020-03-04> 뉴스톱 

☞기사원문:
‘위안부 최초 보도’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패소했지만 지지 않았다

 

목, 2020/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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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가 – 식민주의 전승과 소리의 기억

근대적인 의미의 교가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일본의 식민지배 이후이다. 조선반도에서 시행된 ‘황국신민화’ 교육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독특하다. 이는 음악이 지니는 정서적인 힘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장기를 게양하고 운동장에서 조회하고 있는 학교 모습(위 사진)과 현대 들어 학생들이 교가를 부르고 있는 모습. 민족문제연구소·경향신문 자료사진

긴 겨울을 뚫고 만물이 생동하는 3월이다. 매년 이맘때면 계절의 변화와 함께 새롭게 기지개를 켜는 곳이 있다. ‘학교’가 바로 그곳이다. 예상치 못한 사태로 인해 일선 학교에서는 학사일정의 혼선이 빚어진 상황이지만, 신입생들을 맞을 채비로 학교는 그 어느 곳보다 분주하다.

신입생의 신분으로 맞이하는 3월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시기이면서도, 무엇보다 새로운 학교의 역사와 학풍에 대해 익히는 시기이다. 학교의 전통을 상징하는 ‘교가’(校歌)를 처음 접하는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그런데 이 영구불변의 상징물인 교가를 둘러싸고 기억전쟁이 시작되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일본 식민지배 이후 만들어진 교가
제국주의 위한 획일적 인간상 담아
조국·민족 위해 충성·헌신 요구
해방 후 대부분 교가에 그대로 전승
군사정권·독재시대 거치며 심화

‘교가’는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각종 행사를 비롯해 매주 조회시간에 제창 형식으로 부르게 되는 교육용의 노래이다. 학창 시절의 일과와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의 한구석을 차지하는 교가는 그만큼 우리의 일상 속에 알게 모르게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일상의 불가피한 속성인 ‘하찮음’은 교가가 담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의 문제적인 지점들을 간단히 덮어버린다. 그 별것 아닌 노래 속에 제국주의와 개발독재라는 질곡의 시대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생소하다면 그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교가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일본의 식민지배 이후이다. 메이지 정부의 국시인 근대화 또는 국민화 작업은 공교육 기관을 중요한 거점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국가 정책에 따라 기획된 교과목을 통해 어린 학생들은 황국신민으로 길러졌다. 여기에서 제국 일본과 그 식민지 간의 차이는 없었으며, 당시 조선 반도에서도 이른바 ‘황국신민화’라는 교육 목표는 동일했다.

이러한 황국신민화 교육에 있어서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독특하다 할 수 있는데, 이는 음악이 지니는 정서적인 힘과 무관하지 않다. 음악이 인간의 심성을 결정한다는 에토스론적인 사상에 따라, 당시의 음악 교과서인 창가집에는 ‘용장 활발하고 쾌활한 정’이 넘쳐흘렀다. 우울하고 비탄에 젖은 감정은 퇴폐로 낙인찍혔다. 이 대목에서 ‘우울한 정서를 권하는 정권이 과연 있었던가’라는 의문을 잠시 던져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탄을 장착하고 자살 공격을 감행한 특공대 ‘가미카제’의 출항을 일본 여학생들이 환송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커먼스

다시 교가로 돌아가보자. 수차례 개정을 거듭한 대한민국의 음악 교과서에서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각급 학교에서 여전히 불리는 교가 속에는 당시 제국이 요구했던 규범화된 인간상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대부분의 교가에서는 학생들에게 ‘조국’과 ‘민족’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는, ‘겨레’의 ‘일꾼’이자 ‘등불’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학교 교가의 경우 진선미나 현모양처의 규범은 일종의 클리셰로 등장하고 있으며, 남학교의 경우 극단적으로는 ‘나라의 전사(戰士)가 되어’라거나 ‘이 몸을 깎아 기둥을 삼고’ 식의 선동적이고 호전적인 문구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러한 유형의 가사들은 일제강점기에 유입된 군국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군사정권의 개발독재 시대를 거치며 한층 심화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문제는 백여 년 된 유서 깊은 학교의 교가든, 새로 개교한 학교의 교가든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사실상 판박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교가는 이전 시대의 규범을 단절 없이 계승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교가 하나 정도는 외우고 있을 터이니 그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마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교가를 ‘청각적 기억의 매체’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교가에 기록된 기억의 역사는 생각만큼 가볍지 않다.

진보 성향 교사들 중심 변화 바람
판에 박힌 가사·내포된 규범 둔 채
일상 속 식민주의 척결 ‘무의미’
획일화된 규범에서부터 해방돼야
식민주의 청산 시작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렇게 요지부동의 교가에 최근 들어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변화의 주체는 주로 진보적 성향의 교사 단체들이다. 교가를 비롯한 교목, 교화, 교표 등 학교의 상징물이 지니는 식민주의적 속성에 문제의식을 느낀 이들 단체에서 교가 교체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상에 침투해 있는 식민주의에 문제를 제기하고 준성역화되어 있는 학교 상징물에 외과적 수술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움직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속사정을 살펴보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그 내용인즉, 교가를 비롯한 학교 상징물들은 친일 혐의가 있는 인사와 관련된 경우가 상당수이며, 이는 식민주의의 잔재이므로 친일과는 무관한 인물에 의해 새로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친일 문제는 간단히 청산된다는 논리이다. 실제로 2019년 들어 소위 친일파로 분류되는 음악가가 작곡한 교가들은 상당수 교체된 바 있다.

교육계의 움직임을 추동한 현실정치의 맥락도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이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지소미아 종료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2019년 대한민국은 소위 ‘NO JAPAN’의 구호로 뜨겁게 달아오른 바 있다. 교육계의 친일파 척결 운동이 한·일 간의 관계 악화라는 정치적 맥락과 때를 같이한다는 사실은 교가가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소거하는지 그 실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연성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교가 교체 작업은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므로 섣부른 판단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친일파 청산이 곧바로 식민주의 청산으로 치환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판에 박힌 가사,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된 식민주의적인 규범은 그대로 둔 채 곡조만 바꾸면 식민주의의 기억은 소거될 수 있는가. 가사와 곡조 모두 교체된다 한들 ‘전달하는 메시지’에 대한 섬세한 고려가 없다면 무의미한 일이 아니겠는가. 식민지배 이래 공고히 구축된 규범화된 인간상은 아직까지 수정되지 못한 채 영속되고 있는 것이 교가 교체의 안타까운 현주소이다.

적어도 식민주의의 단절은 획일화된 규범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식민주의를 계승한 국가주의 사상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규범은 자칫하면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도쿄대학교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 교수의 비판이 말해 주듯이 전사자들의 죽음을 ‘숭고한 희생’으로 기리는 국가의 추모 의례는 전쟁의 실체를 가리는 은폐 행위이며, 이는 학교 교육을 통해 전승되는 규범화의 사슬로부터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교가는 기억을 작동시키는 청각적인 매체로서, 기억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장소이다. 특별히 기억할 일이 없는 교가이지만, 정작 잊으려고 하면 쉽사리 잊히지 않는 것이 또한 교가이다. 파편적으로 존재하던 온갖 기억들이 경합과 투쟁을 벌이는 중이다. 소리의 기억을 둘러싸고 소리 없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도 함께 귀 기울여볼 때다.

배묘정 |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2020-03-09> 경향신문 

☞기사원문: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5)겨레·헌신·일꾼…교가 속에 쟁쟁한 식민주의·국가주의 유산

※ 연재 –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4)재난을 기억하는 것은 상실을 위로하는 것이다 
(3)‘위안부’의 실증은 끝났다, 이젠 ‘초국적 방법의 기념’을 고민해야 한다 
(2)한 공간, 어긋난 기억…‘정치의 격투장’ 
(1)‘기억을 학살하라’…그들이 비극의 역사를 부정하는 법

화, 2020/03/10-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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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시(社是) 가운데 첫째가 ‘정의옹호(正義擁護)’다. 조선일보는 정의옹호를 사시로 삼은 이유에 대해 “민족지로서 민족의 정의를 으뜸가는 가치로서 정치적 정의, 경제적 정의, 사회적 정의를 옹호하겠다는 신념의 피력”이라고 설명한다.

민족지로서 민족의 정의를 으뜸가는 가치로 내세우는 조선일보가 과연 그 ‘사시’를 어떻게 구현해 왔는지 살펴보자.

1937년 1월 1일, 조선일보 1면 한가운데에 당시 일본왕 히로히토 부부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일제강점기였지만 그래도 ‘민족지’를 내세우며 한글 발행을 하는 신문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나 시도할만한 지면 배치였다.

자칭 ‘민족지’ 조선일보, 1937년 1월 1일 1면에 일왕부부 대형 사진 올려

이날 자칭 ‘민족지’ 조선일보는 1면 제호 옆에 눈 쌓인 소나무 그림을 배치하고, 중앙에 일왕 부부 사진을 올렸다. 사진은 봉황 이미지와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으로 장식됐다. ‘원단(元旦)‧궁중(宮中)의 어의(御儀)’, 즉 ‘설날 아침 궁중의 의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왕을 ‘천황폐하’로 칭했고, 임금의 손을 높여 부르는 ‘어수(御手)’, 임금의 옷을 높여 부르는 ‘어포(御袍)’ 같은 극존칭 단어를 동원해 일왕을 찬양했다. 일왕 부부 사진 왼쪽에는 당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의 사진과 함께 그의 신년사를 빼놓지 않고 실었다.

▲ 1937년 1월 1일, 조선일보는 처음으로 1면에 히로히토 일왕 부부의 사진을 크게 실었다. 조선일보는 이 때부터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해마다 새해 1면을 일왕 부부의 사진으로 채웠다.

동아일보는 이듬해인 1938년 1월 1일부터 일왕 부부 사진 1면 게재를 시작했다. 1면 제호 옆부터 일왕 부부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배치했다.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봉황과 국화 문양으로 일왕 부부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동아일보 1938년 1월 1일부터 1면에 일왕부부 사진 등장

동아일보는 이날 1면 ‘대본영하(大本營下)에 어월년(御越年), 황공(惶恐)-천황폐하어일상(天皇陛下御日常)’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일왕을 ‘천황폐하’ 또는 ‘대원수폐하’로 표기했고, 임금의 뜻을 높여 부르는 ‘성지(聖旨)’, 임금의 걱정을 높여 부르는 ‘성려(聖慮)’, 임금의 나이를 높여 부르는 ‘성수(聖壽)’라는 극존칭을 사용해 일왕 히로히토를 칭송했다.

▲ 히로히토 일왕 부부를 1면 전면에 실은 동아일보 1938년 1월 1일자 신문. 봉황과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 등으로 장식했다.

두 신문은 이후 1940년 8월 폐간때까지 매년 1월 1일, 1면 중앙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실었다. 일왕 부부 사진을 장식하는 배경이나 문양은 해가 갈수록 화려해졌다. 봉황은 물론, 떠오르는 태양, 눈 쌓인 소나무, 날아오르는 학, 구름,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 등이 일왕 부부의 존엄을 보조하는 상징으로 다양하게 동원됐다.

▲ 일왕 부부가 등장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지면.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939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1940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1938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1940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1939년과 1940년 1월 1일자 1면에는 예복이 아닌 군복을 입은 일왕의 사진을 실었다. 일왕을 전쟁을 지휘하는 ‘대원수폐하’로, 즉 중일전쟁 시기 최고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천황’을 강조한 것이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조선일보가 독자들에게 “황국신민으로서 침략전쟁의 수행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 1939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1면. 예복이 아닌 군복을 입고 있는 일왕이 눈에 띈다.

조선과 동아일보, 두 신문이 일왕 부부의 사진으로 1면을 장식한 것은 1월 1일만이 아니었다.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천장절)인 4월 29일에도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배치했다. 조선일보는 1937년과 1938년, 동아일보는 1938년, 1939년 4월 29일 일왕 부부의 사진을 싣고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어휘를 동원해 일왕 생일을 ‘봉축’했다.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왕 생일(천장절)에도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실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937년 4월 29일자 조선일보, 1938년 4월 29일자 조선일보, 1938년 4월 29일자 동아일보, 1939년 4월 29일자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0년부터 제호 위에 일장기 새겨, 모두 10건 확인

일제를 향한 조선일보의 충성은 1940년 1월 1일 지면에서 극에 달한다. 바로 조선일보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려 놓고 인쇄한 것이다. 신문 제호 위에 일장기를 새겨 넣은 것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나 경성일보, 또는 일본 신문들이 하는 행태였다.

▲ 1940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1면.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려놨다.

뉴스타파 조사 결과, 일제강점기 조선일보가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려놓은 지면은 모두 10건으로 확인됐다. 새해 첫날은 물론 주요 기념일마다 제호 위에 일장을 새겨 넣었다.

1940년 1월 1일, 3일, 5일 그리고 우리의 개천절과 비슷한 일왕 기원절인 2월 11일, 일제 육군기념일인 3월 10일, 일왕 생일(천장절) 다음날인 4월 30일, 일제 해군기념일인 5월 27일, ‘지나사변(중일전쟁)’ 3주년인 7월 7일에 특별히 일장기를 새긴 것으로 나타났다.

▲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린 조선일보 지면. 왼쪽 위부터 1940년 1월 3일자, 1월 5일자, 2월 11일자, 3월 10일자, 3월 21일자, 4월 3일자, 4월 30일자, 5월 27일자, 7월 7일자.

뉴스타파는 일제가 조선의 젊은이를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던 시기에 조선과 동아, 두 신문은 어떤 보도행태를 보였는지 다음 편(3월 11일)에 보도한다.

뉴스타파는 조선일보 창간일인 3월 5일부터 동아일보 창간일인 4월 1일까지 조선과 동아 두 신문의 정체를 알리는 기획시리즈를 연재하고 이를 토대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해 개봉할 예정이다.

<2020-03-09> 뉴스타파 

☞기사원문: [조동(朝東)100년] ③ 조선일보 1면엔 일왕과 일장기가 얼마나 등장했나 

※관련연재 

[조동(朝東)100년] ② 조선일보 윤전기는 왜 철거됐나 

[조동(朝東)100년] ① 뉴스타파, 조선 · 동아 정체 알리는 다큐영화 제작

화, 2020/03/10-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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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중화를 이끈 이이화 선생은 집필 활동만이 아니라 역사운동가로서 고구려사 보전 운동, 과거사 정리 운동, 친일청산 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의 ‘역사 대중화’를 이끈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李離和) 선생이 18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인은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철저한 고증 작업을 바탕으로 일반인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이를 통해 역사학의 높은 장벽을 허물어 ‘재야 사학계의 별’로 불렸다. 대학 중심의 ‘강단 사학’에 대비해 부른 말이지만, 그가 일군 학문적 업적은 역사학계를 비롯해 사회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36년 대구에서 주역 대가인 야산 이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주역 팔괘에 따라 고른 ‘떠날 리(離)’에 돌림자 화(和)를 붙여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주역에서 ‘리’는 무언가를 녹여 새롭게 만드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이름자를 갖게된 그는 이름처럼 남다른 삶을 살았다.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유명 역사학자가 된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전북 익산으로 이주했고, 부친이 학교를 보내지 않아 대둔산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사서(四書)를 배웠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가출해 각지를 돌며 고학을 하다 광주고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중앙대 문예창작과의 전신)를 다녔다. 어려운 형편 탓에 대학을 중퇴한 그는 아이스케키·빈대약 장수, 술집 웨이터, 가정교사, 불교시보 기자 등 20여가지 직업을 거쳤다. 1967년 동아일보 출판부에 임시직으로 입사해 원고를 다듬고 수정하거나, 기사 색인 작업을 맡아보며 근현대사에 눈을 떴다. 그는 이 시절을 두고 ‘학사과정을 마쳤다’고 말했다.

그는 ‘허균과 개혁사상’,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 같은 한국사 관련 글을 ‘창작과 비평’ 등 잡지와 신문에 기고하면서 30대 후반부터 필명을 얻는다. 역사 대중화를 위해 일반인 대상의 교양서를 써보기로 결심한 것도 이때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을 번역했고, 서울대 규장각에선 고전 해제를 쓰기도 했다. 고서의 가치를 밝히며 일종의 ‘박사과정’을 거친 셈이다.

고인은 계간지 ‘역사비평’을 펴내는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당시 인권 변호사 박원순(현 서울시장)과 임헌영(현 민족문제연구소장), 서중석(현 성균관대 명예교수) 등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1986년 2월 연구소를 설립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문제를 공동으로 연구하고 대중들에게 알린다는 ‘역사 대중화’가 목적이었다. 그는 운영위원과 부소장을 맡아 근현대 민중운동사를 써내려간다.

고인은 역사를 케케묵은 옛이야기가 아닌 현실과 맞물린 오늘의 이야기로 인식했다. 다양한 책으로 한국사를 대중에게 알렸다. 대표작이 개인이 쓴 한국 통사로는 가장 분량이 많은 22권짜리 <한국사 이야기>(한길사)다. 한반도의 빙하기부터 1945년 해방까지 홀로 집필하는 전대미문의 작업이었다. 이 책은 무려 50만권이나 팔렸다. 그 외에도 <인물로 읽는 한국사>, <만화 한국사>, <주제로 보는 한국사>, <허균의 생각>, <전봉준 혁명의 기록> 등을 발간했다.

그는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자유롭게 오가며 연구했다. 정치와 경제에 집중하는 문헌사와 민속에 관심을 기울이는 생활사 간 경계도 뛰어넘고자 했다. 특히 50년 가까이 ‘동학농민전쟁’에 천착하며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사건을 드러내는데 힘썼다. 이전까지 한국사에 ‘아웃사이더’였던 의적 또는 동학세력들, 평민의병장이나 민중세력들의 활동을 재평가했다.

아울러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우월성을 내세우는 민족주의 사관은 배격했다. 국정교과서 도입 등 역사 왜곡에 맞서고, 고령의 나이에도 ‘촛불 집회’에 꾸준히 참석하며 사회 참여 목소리를 내왔다. 그는 2011년 펴낸 자서전 <역사를 쓰다>(한겨레출판)에서 올바른 역사의식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21세기 들어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해묵은 이데올로기 문제로 사회적 갈등을 빚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또 근래 들어 과거사 청산 문제로 사회분열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제고하고 민주 가치를 존중하며 인권사회로 가는 도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이이화 선생은 어릴 적부터 풍찬노숙하고 많은 고생을 거치면서 역사학에서 소신껏 연구해 일가를 이뤘다”면서 “야성적이고 비판적인 지식인이자 행동인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고인은 단재학술상(2001년), 임창순 학술상(2006년)을 받았고, 2014년 원광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2018년 8월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개관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도 맡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희씨와 아들 응일씨, 딸 응소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1일 오전 10시. 장지는 파주동화경모공원이다.

배문규·홍진수 기자 [email protected]

<2020-03-18> 경향신문

☞기사원문: ‘친근한 역사학’ 기틀 마련한 ‘재야 사학계의 별’…역사학자 이이화 별세

※관련기사 

☞한겨레: 민중사학 개척자 이이화 선생 역사가 되어 떠나다 

☞연합뉴스: 역사 대중화 이끈 ‘재야사학의 별’ 이이화 별세(종합2보) 

☞KBS: 역사 대중화 이끈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 별세 

☞MBC: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향년 84세로 별세

목, 2020/03/19-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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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보내며

▲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이이화 선생 빈소 ⓒ 민족문제연구소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

지난 40년 동안 선생님과 함께 우리 민족사의 현장을 탐험하면서, 빛나는 우리 민족사를 책으로 펴낼 수 있어서 저는 행복했습니다. 저 고단한 1980년대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역사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역사 정신이란 무엇인가를 우리들 가슴에 심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역사 이야기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찰하는 지혜였습니다.

1980년대에 진행된 선생님의 ‘역사강좌’를 통해 이 땅의 젊은이들은 힘찬 우리 민족사를 만났습니다. ‘한국근대민중운동사’를 통해 역사의 동력이 되는 민중과 민중 운동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역사 보는 눈을 활짝 뜨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국토와 산하에서 펼쳐진 ‘역사기행’의 현장 강의를 통해 선생님은 온몸으로 온정신으로 민족사를 체험하게 했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역사의 현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역사 정신은 삶의 현장에서 체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에서, 그 민중의 함성을 들었습니다.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을 만났습니다. 김개남 장군의 집터에 ‘김개남 장군 생가터’라는 푯말을 선생님의 글씨로 세우기도 했지요. 지리산을 오르고,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를 들었습니다. 의병장 신돌석 장군과 의병들을 찾아 나서 ‘이 시대의 의병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영덕의 농가에서 토론했지요. 아름다운 국토의 산하에서 펼친 우리들의 역사기행은 한판의 역사축제였습니다.

선생님은 당대의 사관이었습니다. 1994년부터 2004년 10년에 걸쳐 완성되는 <이이화·한국사 이야기>는 그 누구도 엄두도 내지 못할 경이로운 작업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이 책을 펴내게 된 것을 한 출판인으로서 긍지로 삼고 있습니다.

<한국사 이야기>는 선생님의 저간의 연찬을 집대성 하는 혼신의 작업이었습니다. 역사학자로서의 신념의 소산이었습니다. 그 어떤 기득권과도 무관한 재야정신이 아니었다면, 그 어떤 제도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면, 성취해낼 수 없는 역사정신의 실천이라고, 저는 책을 펴내면서 당당하게 주장했습니다. 오늘의 역사 현실을 온몸으로 대응해내는, 역사의 현장을 걷는 역사가가 써낸 생동하는 역사이기에, ‘국민독본’으로 우뚝 서는 큰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늘 우리들과 함께 계셨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선생님의 역사정신이 더 절실해지는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역사란 특정인이나 특별한 계층의 독점물이 아니고, 오늘의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국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계화의 시대에도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역사정신·민족정신이 큰 이야기가 되어 우리들의 가슴에 울림이 되고 있습니다. 아,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

덧붙이는 글 | 김언호 기자는 출판인·한길사 대표입니다.

<2020-03-2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이이화 선생님의 역사 정신, 우리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관련기사 

연합뉴스: “역사학계 큰 별이 졌다”…각계서 이이화 추모 잇따라

경향신문: 행동하는 양심, 이이화 선생을 떠나보내며…‘억강부약’의 삶 잘 간직하겠습니다

☞전주문화방송: 동학혁명 연구 큰 별 역사학자 이이화

일, 2020/03/22-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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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잔재 청산·도민 알 권리 충족 방침

▲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6대 김학응 충남도지사와 제 7대 김홍식 충남도지사 ⓒ 충남도 누리집 갈무리

친일행위가 뚜렷한 인물이 버젓이 역대 충남도지사로 소개되고 있다는 <오마이뉴스> 보도와 관련 충남도(도지사 양승조)가 해당 인물의 친일 행적을 기록해 게시하기로 했다.

충남도 관계자는 “친일잔재 청산과 도민 알 권리 충족을 위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2명의 역대 충남지사의 친일 행적을 기록해 게시하기로 했다”고 25일 밝혔다.

이어 “도 본청 대회의실에 걸린 역대 지사의 액자 아래에 동판으로 친일 행적을 기록해 게시하고, 홈페이지에도 역대 도지사의 약력과 친일 행적을 병기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앞서 <오마이뉴스>는 지난달 17일, ‘역대 충남지사 중 친일행위가 뚜렷하거나 의혹 또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사람이 5명에 이른다’며 ‘철거 또는 친일 행적을 기록 해 알리는 등의 조치가 요구된다’고 보도했었다. (관련 기사: 역대 충남도지사 중 친일반민족행위자 ‘2명’)

5명 중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역대 충남도지사는 제6대 김학용과 제7대 김홍식이다. 김학응(金鶴應, 일본식 이름 金子薰, 1899.1.25~ ?,충북 괴산 생)은 1955년 충북도지사를 거쳐 1958년 충남도지사(7.29-1960.4.30)를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 관리로 충북 보은군수, 제천군수, 옥천군수를 역임했다. 또 충남지사 재임 중 3·15 부정선거의 충남 지역 책임자로 기소돼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뒤를 이은 김홍식(金弘植,1909~1974, 충남 아산 생) 또한 일제강점기 때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1934)와 행정과(1935)에 합격해 평남 양덕군수에 임명됐다. 이때 황민화 운동을 주도하며 친일잡지 <내선일체>를 발간했다. 또 내선일체실천사 평남도지사의 고문을 지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의 군수로 일하며 내선융화를 적극적으로 주도, 친일반민족행위가 인정됐다. 충남도는 친일행위 의혹 또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역대 도지사는 이번 친일 행적 기록 대상에서 일단 제외하기로 했다.

충남도 관계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친일행위 의혹 또는 논란이 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이후 도의회에서 ‘친일잔재청산조례’가 제정되면 이 조례에 의거, 의회와 협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충남도의회는 지난해 7월, ‘충남도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특별위원회'(위원장 김영권 의원, 아산 1, 부위원장 이선영 의원, 비례)을 각각 선임하고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다른 지자체에 비해 친일 잔재 청산 작업이 늦어지고 있는데 대해 이 관계자는 “코로나19로 방역 등 다른 업무가 많아 집중하지 못했다”며 “이달 초 양 지사께서 방침을 정한 만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역대 충남지사의 친일 행적 기록과 게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말했다.

<2020-03-2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충남도 “역대 도지사 친일 행적 기록·게시하겠다”

목, 2020/03/26-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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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정보센터 개관… 진실 외면ㆍ산업화만 미화

일제 강점기 최대 800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 군함도.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본 정부가 이번엔 ‘나가사키 군함도’ 관련 전시관을 도쿄에 개관하면서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했다. 최근 역사 왜곡을 심화시킨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내놓은 데 이어 한일 갈등의 불씨를 더 키운 것이다.

일본 언론들은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나가사키 군함도 등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소개하는 ‘산업유산 정보센터’가 도쿄시내 총무성 제2청사 별관에 마련됐다고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군함도 원주민의 증언 동영상과 당시의 급여명세서 공개 등을 통해 한반도 출신 노동자들이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한국의 주장과는 다른 진실을 전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실제 정보센터는 태평양전쟁 당시 군함도에서 거주한 재일 조선인 2세 스즈키 후미오(鈴木文雄)씨가 생전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모습 등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섬 주민 36명의 증언을 동영상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가사키조선소에 동원됐던 대만 출신 노동자의 급여 봉투 등도 전시했다. 정보센터 운영 주체인 산업유산국민회의의 가토 고코(加藤康子)전무이사는 “1차 사료와 당시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에서 한반도 출신 노동자들이 학대당했다는 증언은 듣지 못했다”면서 “판단은 관람객들이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보센터의 전시 내용은 일본 정부가 국제사회에 약속했던 바를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일본은 2015년 7월 군함도 등 근대산업시설 23곳의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유네스코가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하자 조선인 등의 강제동원 사실을 알리고 피해자들을 기리는 정보센터 설치를 공언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군함도 등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조선인은 약 3만3,400명이고,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도 각각 4,184명과 5,140명이다. 그런데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외면한 채 자국의 산업화 과정만 과장되게 미화한 것이다.

이에 앞서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난 24일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이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억지 주장을 비롯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19종에 대한 검정 결과를 공개했다. 당시 외교부는 도미타 고지(富田浩司)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해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강력 항의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email protected]

<2020-03-31> 한국일보 

☞기사원문: 일본 또 역사 도발… “군함도 강제노역 없었다”

목, 2020/04/02-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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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유력인사로 징병 권유글 친일행적으로 인정, 박정희 때 받은 훈장 최근 박탈…군용기 건조 300원 헌납 등 친일행적서 일부 제외

2009년 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하자 동아일보는 다음날 사설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노린 좌파史觀(사관) 친일사전”을 통해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것은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과거 공산주의 단체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전력이 있고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에 이바지한 인물을 상처내기 위해 친일파 작업에 돌입했다며 인명사전 발표 배경을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등에 게재된 징병 권고문 등을 문제 삼아 김성수 전 부통령을 친일 명단에 포함했는데 당시 글들은 조선 사회의 지도적 인사들을 전쟁 동원에 앞세우기 위해 이름을 도용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학생들도 ‘교장으로 있던 인촌이 학병에 나가라고 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다”고 했다.

▲ 2009년 11월9일 동아일보 사설

김성수가 만든 동아일보는 100년 전인 1920년 4월1일 민족지를 표방하며 출발했고,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한 손기정 선수 사진을 보도하며 일장기를 지운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 정간을 당하는 등 조선총독부 탄압을 감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사세를 확장한 조선일보와 차이를 보인 게 분명해 김성수와 방응모,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단순 비교할 순 없다.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는 의미로 부통령직을 사퇴하거나 건국훈장을 받은 사실 등 김성수를 보통의 친일파의 행적과는 다르다는 의견이 힘을 얻는 면도 있다. 다만, 역사책 한쪽에 친일파라는 평가 자체를 지울 순 없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에서도 김성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김성수의 증손자인 김재호 동아일보 대표와 인촌기념회는 이를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동아일보 측은 김성수가 징병을 권유한 글이 허위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망인(김성수) 관련 기사들(징병 독려 글 등)이 모두 명의가 도용됐거나 허위 조작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며 “망인이 3·1운동에 참여하고 동아일보사나 보성전문학교 등을 운영하며 민족문화의 보존과 유지·발전에 기여한 성과가 적지 않더라도 이 같은 사정과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친일 행적의 주도·적극성을 감쇄시킬 정도로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친일행위에서 제외한 활동은 김성수가 1941년 ‘황국정신 앙양(북돋움)’을 위해 만든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활동, 1937년 중일전쟁기에 라디오강좌와 강연회를 통해 시국인식을 철저히 할 것을 역설한 것, 군용기 건조비로 300원 헌납한 사실 등이다. 1943~44년 매일신보에 출정 군인 유족에 대한 원호사업을 철저히 시행하고 협력할 것을 역설한 부분도 친일활동에서 제외했다.

▲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왼쪽)와 이승만 전 대통령

미디어오늘은 판결 취지와 언론사 사주라는 점을 고려해 친일인명사전 내용 중 언론 활동 중심으로 김성수 행적을 살펴봤다.

김성수는 1891년 10월11일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914년 7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고 같은해 10월 조선총독부에서 경성방직 설립 인가를 받고, 동아일보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 7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 일했고, 1936년 11월 ‘일장기 말소사건’ 여파로 취체역(주식회사 이사에 해당)에서 물러났다.

친일인명사전에선 김성수를 보성전문학교 교장과 동아일보 사장으로 소개했다.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뒤 약 3년간 교장으로 활동했고, 1937년 다시 교장 자리로 돌아왔다. 김성수는 1938년 7월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해 이사를 맡았다. 1939년 4월엔 경성부 내 중학교 이상 학교장 자격으로 신설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를 맡았다. 1941년 조선방송협회 평의원과 조선사회사업협회 평의원도 겸임했다.

그는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하자 1943년 8월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격려문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징병제를 실시해 조선인이 이제 황국신민이 됐다며 지난 500년간 문약했던 조선 분위기를 일신할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같은해 11월6일 매일신보가 주최하는 ‘학도출진을 말하는 좌담회’에서도 지원율이 저조한 이유를 ‘조선인의 문약한 성질’이라고 했다.

▲ 친일인명사전에는 김성수의 대표적인 친일논설로 이 글을 자료사진으로 실었다. 김성수는 매일신보 1943년 8월5일 ‘선배의 부탁’이란 특집란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는 징병격려문을 기고했다. 보성전문학교장 김성수 명의로 자신의 사진을 함께 실었다. 사진=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같은해 11월7일 ‘매일신보’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란 글에서는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했다. 여기서 의무란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로 살면서 받은 국가·사회·가정 혜택에 보답하는 것이다. 김성수는 학병에 지원하지 않아 ‘대동아건설’에 동참하지 못하면 일본인 즉 ‘내지’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달 20일 학병지원 마감일을 맞아 ‘경성일보’에 ‘학병 미지원자는 원칙대로 징용돼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고, 12월10일 매일신보에 한 사람도 주저없이 “광영스러운 군문으로 들어가는” 징병검사에 나설 것을 권유했다. 또 같은달 17일 보성전문학교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 “제군은 세계무비의 황군의 일원의 광영을 입게됐으니 학도의 기분을 버리고 군인의 마음으로 규율있게 생활하라”고 훈시했다.

김성수는 해방 후 1946년 1월 동아일보 사장에 다시 취임했고, 송진우(한국민주당 초대 수석총무, 독립운동가) 사망으로 공백이 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선출됐다. 같은해 2월 보성전문학교 교장, 이듬해 2월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했다. 1949년 2월 민주국민당을 창당해 최고위원이 됐고, 같은해 7월 동아일보 고문을 맡았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6월 대한민국 부통령으로 선출돼 이듬해 5월까지 일했고, 1955년 2월18일 세상을 떠났다.

1962년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승인을 거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동아일보 측이 반민규명위(정부)를 상대로 김성수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것을 취소하라는 소송에서 대법원이 2017년 4월 동아일보 측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판결을 반영해 지난 2018년 2월13일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서훈을 박탈했다. 김재호 동아일보 대표와 인촌기념회는 서훈박탈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에 나섰지만 지난 2월 서울행정법원은 동아일보 측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슬기 기자 [email protected]

<2020-04-01> 미디어오늘 

☞기사원문: 친일인명사전은 동아일보 김성수를 뭐라고 기록했을까 

※관련기사 

☞미디어오늘: 친일인명사전,조선일보 방응모를 뭐라고 기록했을까?

목, 2020/04/02-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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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 [편집자말]

▲ [현충원 안장 친일파] 신응균 묘지 아버지 따라 친일파가 된 아들, 대한민국은 ‘포병의 아버지’라 불렀다 친일파 신응균의 묘는 국립서울현충원 가장 안쪽에 자리한 일본 만주군 출신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 건너편에 위치한 장군1묘역 입구 바로 뒤쪽에 위치해 있다. ⓒ 김종훈

1945년 4월부터 시작된 일본과 미국의 오키나와 전투는 치열했다. 전투에 참여했던 신응균 스스로도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해방 후 한참이 지나서야 “미군이 조선인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라는 말을 듣고 미군에 투항한 뒤 조선으로 돌아왔다.

1946년 5월 신응균은 수년 만에 만난 부인에게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전했다. 당시 그의 부인은 훗날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가 된 노라노(NORA NOH)씨다.

“가까스로 살아나 산속에 숨어 지내며 게릴라전을 계속했소. 그러다 부상을 당해 어느 일본 여인에게 구조되었소. 그리고는 그 여인의 집에 은신하며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살았었소. 그런데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들이 조선인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지 않겠소. 그 소문을 듣고 나는 용기를 냈소.” – <나의 선택 나의 패션> 중 일부 / 중앙일보. 2006.12.26.

▲ 전역 후 국방부차관에 임명된 신응균 ⓒ 국가기록원

신응균은 1921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일본 육사 출신이자 30년 넘게 일본 군인으로 복무한 친일파 신태영의 장남이다. 신응균이 태어날 때 신태영은 일본 나고야 3사단에서 복무 중이었다.

신응균은 아버지를 따라 일본 육군사관학교 53기로 입학한 후 스무 살인 1940년 2월 졸업했다. 이후 일본 육군과학학교 포병과, 육군중포병학교에서 신식 군사기술을 습득, 42년 12월에 대위로 진급한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자 신응균은 일본군 장교로 참전했다.

‘일본군 장교’에서 ‘대한민국 장교’로 변신

1946년 3월,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신응균은 다른 친일파 출신 군인들과는 다소 다른 행보를 걸었다. 진명여고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1948년 7월, 제주 4.3 항쟁과 남한 단독정부 출범 등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다시 군으로 들어갔다.

항공이등병으로 입대해 보좌관으로 역할하며 국방법과 국군조직법 등을 기초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는 일은 고위직 업무였지만 직급은 이등병이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신응균이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것을 반성하는 뜻으로 이등병으로 입대했다는 설도 있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신응균은 이등병으로 입대한 지 한 달만인 48년 8월,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됐다. 이후로는 탄탄대로였다. 1949년 3월, 병기에 관한 모든 실무를 책임지는 특별 참모부서의 우두머리인 육군본부 병기감을 거쳐 호국군 간부학교 교장, 포병연대장, 육본 포병감 겸 포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땐 야전포병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야전포병사령관은 대한민국 국군 포병의 최고 책임자다.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은 신응균을 두고 ‘한국 포병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그는 2사단장, 육군관리부장을 거쳐 육군 중장에 올랐다. 48년 7월 이등병으로 입대한 지 만 7년도 안 돼 대한민국 육군 3성 장군이 된 것이다.

1959년 별 세 개를 단 장군으로 예편한 신응균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에 따라 주 터키대사로 부임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1961년에는 국방부 차관을 거쳐 주 서독대사로 임명됐다. 1970년 박정희 정권에서 초대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에 임명됐으며 73년부터 82년까지 재향군인회 부회장을 지냈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한 신응균

▲ 1945년 6월 7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오키나와 전투 상황 ⓒ 공훈전자사료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신응균이 일본군 장교로 오키나와 전투에 적극 참여한 사실’을 근거로 ‘국가공인 친일파’로 결정해 발표했다.

“신응균은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육군중포병학교에서 복무하던 중 전세 악화에 따라 오키나와에 파견됐다. 신응균은 독립 중포병 제100대대 중 일부를 직접 지휘하면서 종전까지 일본군의 오키나와 방어전에 직접 참여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위원회가 신응균의 보고서에 직접 인용한 후지와라 아키라의 <일본군사사>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는) 적의 손에 함락되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은 천황제 이데올로기 전쟁관이 만든 비극”이었다. “3개월의 격전 끝에 오키나와 의용군을 포함한 약 10만의 수비대는 거의 전멸했다. 이 과정에서 은신처와 식량을 빼앗긴 20만의 오키나와 현민 역시 전화의 희생양이 됐다.”

신응균 자신도 오키나와 전투 참여에 대해 <(일본 육사·해사)동기생사 정간보>에 기록을 남겼다.

“우리 대대는 1944년 6월 중포교에서 편성된 현역병 정예부대였다. 7월 중순 큐슈 북단에서 승선해 오키나와로 향했다. 미국 잠수함이 출몰하는 위험한 항로였지만 우군기의 계속된 호위로 비밀리에 무사히 나하에 상륙했다. 나는 선임 소대장이었기 때문에 대대 주력으로부터 떨어져 89식 150mm 캐논포 2문의 소대를 이끌고 오키나와 본도 북부를 맡고 있는 독립혼성 제44여단에 배속됐다.”

▲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분들을 기리는 평화의 비에는 많은 꽃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 제주다크투어

신응균이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을 당시 오키나와에는 1만여 명이 넘는 조선인이 끌려와 비행장 구축 등 강제노동에 시달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 ‘군부(군대에 소속된 잡역부)’라는 이름을 달고 강제동원됐지만 정확한 규모나 피해 상황은 지금까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가 만든 <미래를 여는 역사>에는 “주민 사망자 중에는 전투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집단자결로 내몰려 죽은 경우와 스파이 혐의로 살해된 경우, 피난했던 참호에서 군대가 쫓아내 죽은 경우가 다수 포함됐다”면서 “총알받이로 내몰린 오키나와 주민과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 온 한국인‧대만인 등 식민지 주민, 군국주의에 세뇌당해 스스로를 소모전에 바친 어린 병사들이 오키니와 전쟁의 희생자”라고 기술되어 있다.

90년대 들어 오키나와 남부에 위치한 평화공원 안에 ‘평화의 비’가 세워졌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리지 않고 24만여 명의 전사자 이름이 새겨졌다. 이 중에는 한국인 364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82명, 대만인 34명 등의 이름도 포함됐다.

박정희 건너편의 신응균

▲ 국립서울현충원 장군1묘역 입구, 바로 뒤쪽에 신응균의 묘가 있다. ⓒ 김종훈

1996년, 신응균은 일흔 다섯 나이에 사망한 후 국립서울현충원 장군1묘역에 묻혔다. 김백일,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과 마찬가지로 국립묘지법 제5조 1항 마항목 “장성급 장교 또는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사람 중 전역·퇴역 또는 면역된 후 사망한 사람”이라는 게 근거다.

두 마리 호랑이 석상이 지키고 있는 장군1묘역 입구 바로 뒤쪽이 신응균의 묘다. 그의 묘 건너편에는 신응균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4기수 후배인 박정희 대통령 묘소가 있다.

그의 묘 하단에는 “조국의 국방, 외교, 과학기술분야는 물론 로타리인으로서 초아의 봉사활동에 이르기까지 부끄럼 없는 소신으로 다방면에 업적을 남겼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신응균의 묘는 2009년 그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규정된 이후에도 그대로다. 현행 상훈법 제8조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명시돼 있다.

▲ 신응균 (1921~1996) – 일제강점기엔 일본 군인, 해방 후엔 대한민국 포병의 아버지? 일본 육사 출신이자 30년 넘게 일본 군인으로 복무한 친일파 신태영의 장남으로 1921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1940년 2월 스무살 나이에 일본 육사 53기를 졸업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자 일본군 장교로 참전했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는 “신응균은 독립 중포병 제100대대 중 일부를 직접 지휘하면서 종전까지 일본군의 오키나와 방어전에 직접 참여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응균이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해 활약했을 당시?오키나와에는 1만여 명이 넘는 조선인이 끌려와 비행장 구축 등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해방 후엔 미군에 투항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육군본부 병기감, 포병연대장을 거쳤다. 한국전쟁 땐 야전포병사령관으로 활동, 대한민국 국군은 지금도 그를 ‘한국 포병의 아버지’로 부른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2020-03-3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대한민국 포병의 아버지? 그는 일제에 충성한 일본군 장교였다. 신용균편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친일 행적만 22페이지, 그는 어떻게 현충원에 묻혔나 김백일편

목, 2020/04/02-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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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 번역 출간

(서울 = 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 살아있는 사람을 얼리거나 세균을 주입해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지켜보고 산 채로 해부하는 만행을 저지른 ‘731부대’의 이름은 한국에서도 웬만큼 익숙한 편이다. 그러나 인터넷 블로그나 삼류 저작물, SNS를 통해 나도는 정보는 거짓이거나 부풀려진 것이 많다. 생체 해부 사진이라거나 한국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 생체 실험의 희생이 됐다는 이야기 등이 그렇다. 큰 틀에서 이 부대의 존재와 역할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히 입증된 만큼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근거가 없는 정보로 이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지를 강조하기보다는 세부적인 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데 더 긴요한 작업이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일본에서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단체를 만들어 활동 중이다. ’15년 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라는 모임이다. ’15년 전쟁’이란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을 거쳐 1945년 일제의 패망에 이르기까지 15년을 하나의 연속된 전쟁이라고 보는 개념이다. 이 모임은 의학계·의료계의 전쟁 책임에 대해 자신의 문제로 직시하고 일본의 의학과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발휘하자”는 취지로 2000년 결성된 이래 매년 정례회와 회지 발행을 통해 15년 전쟁과 관련된 사실 규명 작업을 해오고 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건강미디어협동조합·원제 NO MORE 731)는 주요 탐구 대상 가운데 하나인 731부대에 관해 자료를 찾아 분석하고 관련자들로부터 증언을 듣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과 동문이며 그와 직접 대면하기도 했던 원로 의학자를 비롯한 의대 교수, 의사들과 731부대의 최말단에서 손발의 역할을 한 소년대원, 중국인 피해자, 언론인, 연구원 등의 증언과 조사 결과 등을 담았다.

731부대 보일러실 [건강미디어협동조합 제공·재판매 및 DB금지]

가해자라고 분류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시노즈카 요시오(篠塚良雄)는 실업학교 재학 당시인 1939년 소년대원으로 지원해 당시 만주국 하얼빈(哈爾濱) 외곽 핑팡(平房)의 731부대에 배치된 후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한다. 그는 세균을 대량 생산할 때 쓰는 균주(菌株)를 운반하는 것과 같은 허드렛일을 맡았다. 지위상 고급 정보에 접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증언한 내용은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과 일치한다. 1939년 일본과 소련의 노몬한 전투 때 세균을 무기로 사용했다거나 1940년 페스트균 양성을 위한 벼룩을 운반했는데 그것이 닝보(寧波) 등지에서 중국인들에게 공중투하된 것 같다는 것과 같은 증언이다. 그는 생체실험과 생체해부에도 참여했다. “처음 본 희생자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는 그는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점차 익숙해졌고 별다른 느낌을 갖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731부대의 사체 소각로 – 731 부대에는 이 같은 사체 소각로가 3개 있었다 [건강미디어협동조합 제공·재판매 및 DB금지]

세균전 피해자들의 증언도 나온다. 대개 어린 나이였던 증인들은 중국 화중(華中) 지역에 투하된 페스트균 폭탄으로 가족들이 페스트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전염 우려로 희생자들의 시신은 제대로 된 장례도 없이 버려졌고 남은 가족들은 강물 위에 띄운 작은 배 등에 격리돼야 했다. 731부대의 페스트 세균전은 일본 법원이 전후 제기된 소송에서 인정한 바 있다. 도쿄지방법원은 2002년 8월 중국인 피해자 180명이 낸 소송판결문에서 “731부대는 1940~1942년 페스트균을 감염시킨 벼룩을 상공에서 살포하거나 콜레라균을 우물이나 음식물에 넣는 등 방법으로 세균전을 실시해 약 1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적시했다. 그러나 일본 법원은 사실관계는 인정하면서도 배상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여러 사정을 전제로 고차원의 재량에 따라 결정해야 할 문제”라면서 기각했다.

책은 이밖에 생체실험을 간접 입증하는 731부대 참여자의 논문, 세균 및 독가스 실험시설과 세균 무기 연구 및 생산시설 등을 갖춘 731부대 터 현장 조사 자료, 도쿄 전범재판 기록과 미국·영국·소련 등 연합국 측 보고서와 같은 여러 자료를 분석한다. 그러나 대부분 단편적이고 간접적인 자료들이며 731부대의 만행의 구체적인 전말과 최종 책임자를 가려줄 일목요연한 증거나 고위급의 자료는 없다. ’15년 전쟁’ 모임을 비롯해 731부대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사람들을 애태우는 것은 전후 미국과 일본의 야합으로 진상이 은폐됐다는 점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미국과 일본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세상에 드러날 자료들이 남아 있다.

미국은 전쟁범죄로 고발해야 할 731부대 관계자를 ‘냉전’ 협력자로 만들기 위해 그 죄를 ‘면책’했고 그들이 얻어낸 세균전 등에 관한 노하우를 끌어내기 위해 731부대의 모든 것을 은폐했다. 미국 육군의 의학연구 관계자는 731부대의 연구 자료에 관해 “그것은 일본인 과학자들이 수백만 달러와 여러 해의 연구를 통해 얻은 성과이다. 이러한 정보는 인체실험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우리 실험실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 데이터를 입수하기 위해 든 비용은 25만엔이며 실제 연구를 하는 데 드는 비용과 비교하면 아주 소액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미국의 소극적 태도는 독일 전범재판에서 생체실험 등에 참여했던 의사 전범 20명이 기소돼 7명이 사형을 선고받는 등 무겁게 처벌된 것과 비교된다. 심지어 소련조차 전쟁 후 만주를 점령한 뒤 731부대에 관한 광범위한 조사를 벌여 전모를 거의 파악했고 100명이 넘는 관계자들 가운데 12명을 기소했다. 소련은 조사 내용을 미군 측에도 넘겼으나 미국은 반인도 범죄를 처벌하는 대신 731부대의 연구 성과를 넘겨받고 일본을 냉전의 대리인으로 내세우기 위해 용인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나 전범 처벌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국 역시 731부대에 관해 상세히 조사할 필요성은 느꼈을 것이고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지난 1989년 아사히(朝日) 신문은 “미국의 육군기록관리부장이 731부대에서 입수한 자료를 박스에 넣어 일본 정부에 반환했다”고 보도했다. 이 자료의 행방에 관한 일본 의원의 질의에 일본 정부는 “1958년 미국이 압수한 구 육군 자료를 반환받아 현재 약 4만건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으나 세균전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고 발뺌했다.

’15년 전쟁’ 모임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731부대 관계 자료의 전면 공개’를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정부가 관여할 수 없는 문제”라며 거부해 오고 있다. 일본 의학계의 대표단체인 일본의학회도 진실 규명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다. ’15년 전쟁’ 모임 등이 정기 총회나 심포지엄 등을 통해 731부대 문제를 비롯한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는 주제를 다룰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의학회는 응하지 않고 있다.

한일 통·번역가 하세가와 사오리 씨와 함께 책을 공동 번역한 최규진 씨는 역자 후기에서 “731부대를 ‘광기’나 ‘악마’로 치부하는 것으로는 문제의 본질에 다가설 수 없다. 더욱 냉정하게 그 너머에 있는 제국주의의 민낯을 들여다 봐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으로 몰고 간 사람들과 그것에 편승한 사람들, 그로 인해 짓밟힌 사람들이 같지 않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731부대의 피해는 주로 중국과 중국인에 집중됐지만, 우리 피해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 여러 자료로 입증되고 있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의 양심 세력과 연대하고 진실 규명에 힘을 보태야 하는 이유다.

408쪽. 2만2천원.

[email protected]

<2020-04-02> 연합뉴스 

☞기사원문: 미·일 야합으로 75년간 은폐된 731부대의 진실

금, 2020/04/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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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교육재단의 교사 징계 철회 촉구 목소리 확산

문명교육재단이 국정 한국사 교과서 시범학교 반대 교사에 대한 징계위원회를 강행하면서 적반하장식 징계 시도 철회를 촉구하는 교육계의 요구가 확산되고 있다.

문명교육재단은 2일 2017년 당시 문명고 국정 한국사 교과서 시범학교 지정에 반대한 교사 3명에 대한 징계위원회(징계위)를 연다. 이날 열리는 징계위는 문명교육재단이 지난 2월 징계의결요구서를 보낸 5명의 교사 가운데 현재 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교사 3명에 대한 것으로 교사 2명은 중징계, 나머지 1명은 경징계의결요구를 받은 상태다.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국정화저지넷)는 징계위가 열리는 2일 성명을 내고 시대착오적 징계 시도를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국정화저지넷은 “위법한 국정 교과서 연구학교 지정으로 학생들과 학부모, 교사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게 당시 법원의 분명한 판결이었다.”면서 “교육자적 양심에 따라 국정교과서 연구학교 운영에 반대 입장을 밝히고 반대 운동에 동참한 교사들에 대한 징계 요구는 부적절하며 시대착오적”이라고 강조했다.

2018년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는 박근혜 정부 당시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과정에서 위법·부당한 행위를 한 공무원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고, 17명은 검찰에 수사 의뢰하였지만 이들은 지금까지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실무를 담당했던 중하위직 공무원들은 상급자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교육부에 남아있다. 경북교육청과 문명교육재단 역시 연구학교 지정 관련 교육부와 위법·부당한 정책을 교사들에게 강요한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국정화저지넷은 이 같은 상황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양심 교사에 대한 징계 시도 철회 △경북도교육청의 행정지도 △문명교육재단에 대한 교육부의 지휘 감독권 행사 등을 촉구했다.

▲ 경북교육연대는 징계위가 열리는 2일 문명교육재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당징계 시도 철회를 촉구했다 © 경북교육연대 제공

전교조 경북지부 등 경북지역 교육사회단체로 구성된 경북교육연대는 징계위가 열리는 2일 경북 경산 문명고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당한 징계 의결을 즉각 취소할 것을 촉구했다.

경북교육연대는 “국정 한국사 교과서 연구학교는 잘못된 정책이라는 정부 사과와 사법적 판단을 받았다. 하지만 이를 강행했던 문명교육재단이나 학교장은 사과 한마디 없이 지난 3년을 보내다가 징계시효 만료가 다가오자 해당 교사들에게 징계를 요구했다.”는 말로 적반하장 식 징계 시도 철회를 촉구했다.

전국역사교사모임도 지난달 30일 성명을 내고 부당징계의결 철회를 촉구했다. 전국 역사교사 1034명이 서명한 항의서도 문명교육재단에 팩스로 전송했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은 “국정 역사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는 최종본에서도 발견되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의 오류였고 수많은 시민, 역사 연구가와 교사들은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부정하고 오류로 가득 찬 국정 역사 교과서를 거부하였다. 연구학교 지정을 막고자 노력한 것은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가르쳐야 하는 교사의 의무이자 권리 행사였다.”면서 “학생, 학부모, 교사 3주체가 함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공간인 학교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과거로 돌리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나아가 “학교는 설립 주체에 상관없이 사회의 공공재로 민주시민의 자질을 기르는 배움터의 역할에 충실해야한다.”면서 문명교육재단의 징계 철회와 사립학교 재단의 부당한 권리 행사를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을 촉구했다.

전교조는 지난 1일 전국 2282명의 교사들이 참여한 부당징계 철회 촉구 서한을 문명교육재단에 팩스로 제출했다. 재단이 징계 의결을 강행한다면 오는 6일부터 부당징계 철회 촉구 탄원서 제출 투쟁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은 문명교육재단 교사들에 대한 징계 철회를 촉구하는 국민청원(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Temp/pMTD7t)을 진행한다.

강성란 기자

<2020-04-02>교육희망 

☞기사원문: 위법한 한국사 국정화 연구학교 막은 것이 징계사유? 

※관련기사 

☞뉴스민: 경산 문명고, 3년 전 국정교과서 반대 교사 5명 징계 추진 

☞교육희망: “교육부도 국정교과서 반대 교사 징계 취소”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크워크: [보도자료] 문명교육재단의 양심적인 교사 징계 움직임, 참으로 개탄스럽다.

금, 2020/04/03-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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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도쿄 신주쿠 정부 청사에서 개관식
“조선인 노동자 차별 없었다” 증언 영상 전시돼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도(東京都) 신주쿠(新宿)구 소재 총무성 제2청사 한쪽에 개관한 산업유산정보센터에 조선인 징용 현장인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를 비롯해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본의 산업시설을 표시하는 지도가 전시돼 있다. 산업유산국민회의 측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등의 영향을 고려해 당분간 센터의 일반 공개를 보류한다고 밝혔다. 도쿄=연합뉴스

일제 강제징용의 상징 ‘군함도’의 역사를 왜곡하는 또 하나의 시설이 일본 도쿄 한복판에 세워졌다. 2015년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당시엔 강제징용의 역사적 사실을 알리겠다고 약속했던 일본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린 사이 이 같은 전시관을 슬그머니 열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3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 같은 소식을 알리며 “그야말로 개관 시기도 기가 막히지 않나”라고 꼬집었다. 일본정부는 지난달 31일 도쿄 신주쿠구 총무성 제2청사 별관에서 산업유산정보센터 개관식을 열었다. 전시관엔 일본 근대 산업시설 자료가 전시됐지만, 군함도의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한 언급은 빠졌다. 오히려 군함도에서 “(조선인 노동자가) 주위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섬 주민들의 증언 자료 등을 소개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해당 정보센터의 개관식에는 관계자들만 참석했고, 일반 공개는 당분간 허용되지 않는다. 서 교수는 이를 두고 “전 세계인들이 코로나 사태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 딱 ‘도둑장가’를 가는 격”이라며 “정말이지 일본 아베 정권은 꼼수의 대마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미쓰비시 석탄광업의 주력 탄광이었던 하시마섬. 군함을 닮았다고 군함도라고도 불린다. 나가사키=홍인기기자

공식 지명은 ‘하시마’인 군함도는 나가사키항으로부터 남서쪽 18㎞ 해상에 있는 섬으로 모습이 군함을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라는 별칭이 붙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군함도 등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조선인은 약 3만 3,400명에 달한다. 일본은 2015년 7월 군함도 근대산업시설 23곳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유네스코로부터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권고를 받았다. 일본은 이에 조선인 등이 강제로 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정보센터를 설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서 교수는 “이런 전시 내용은 일본 정부가 계인들 앞에서 한 약속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상황”이라면서 “조만간 유네스코 측에 이러한 역사왜곡 현장을 제대로 알려줄 것”이라고도 전했다.

전혼잎 기자 [email protected]

<2020-04-03> 한국일보 

☞기사원문: 日 코로나 틈타 ‘군함도’ 역사왜곡 전시관 개관… 서경덕 “꼼수 대마왕”

토, 2020/04/0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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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민족문학연구회 엮음|128×205×10 mm|199쪽 10,000원|ISBN 978-89-93741-32-2 03810 | 2020.3.20

■ 시집 소개

45명의 독립운동가를 45명의 시인들이 기린 『겨레의 큰 별들』이 <독립운동가 기림 시선 2>로 출간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학연구회에서 지난해의 『독립운동의 접두사』에 이어 두 번째로 간행한 시집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고통을 겪을 때 민족의 정신을 지키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과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잔재 청산과 남북 분단을 극복하는 데 큰 거울이 되고 있다. 독립운동가 기림 시선은 계속 간행될 예정이다.

■ 책을 펴내며 중에서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일본의 강제 침탈과 외세에 의한 한반도 남북 분할, 이후 지난 70년 동안 그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데 있다. 독립을 쟁취한 이후 남북전쟁의 비극을 겪고 타의에 의한 한반도 분할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독립을 쟁취한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내부의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 정치적인 부분은 물론 문화, 사고의 영역에서 여전히 일제강점기 시절의 흔적들이 잔존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가운데 문화, 특히 문학 영역에서 마저 그런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찬양하며 일본에 부역한 민족 반역자이면서 친일문인인 이들을 기리는 문학상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정신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문학이 여전히 식민지 지배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민족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키고 우리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과 우국지사들을 기리는 우리의 작업이 중요한 까닭이다.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삶을 바친 그 분들의 삶과 정신을 올곧게 되찾아 바로 세우고 그 정신의 바탕 위에서 우리를 성찰하는 것은 단순히 그 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될 것이다.

―편집위원회

■ 발문 중에서

『친일문학론』이라는 책이 나왔을 때 뛸 듯이 기뻐한 사람들이 ‘민족반역자’들이었다는 것을 알면 놀랄 사람들이 많겠지만, 이것은 진짜이다. 1965년 6월 22일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맺어는 것을 보고 놀라고 성난 임종국(林鐘國)선생이 그 한 해 뒤 펴낸 ‘친일문학론’이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왜(倭)앞잡이 또는 심부름꾼이 되어 같은 겨레를 괴롭혔던 인숭무레기들을 ‘민족반역자’ 또는 ‘부왜반역자’라고 불렀지 ‘친일파’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니 땅 밑으로 스며들어 납죽 엎드린 채 준엄한 심판을 기다리던 ‘민족반역자’들 모습이 눈에 보인다. ‘민족반역자’ 또는 ‘부왜반역자’라고 불도장 찍히는 것과 ‘친일파’ 또는 ‘친일문인’ 소리 듣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저마다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민족반역자들’한테 그리하여 ‘친일문학론’이라는 책은 구세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친일’이라는 그 말이 구세주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를 모르는 치룽구니들이 하는 말이다.

이웃나라 “일본과 친하게 지내자는 ‘친일파’가 왜 나쁘냐?”

‘이름’ 이야기를 지질펀펀 늘어놓는 데는 까닭이 있으니 공자님 말씀이다. 정권을 잡게 되면 가장 먼저 무슨 일부터 하시겠느냐고 여쭈었을 때였다고 한다.

“이름을 바로잡는 일(正名)부터 하겠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나 피어린 민족사를 아파하는 이들은 이제도 ‘일본’이라고 하지 않고 ‘왜국’이라 하고, ‘일본인’이라고 하지 않고 ‘왜놈’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이라는 날벼락을 맞아 산천과 백성이 짓이겨진 다음부터 디엔에이로 굳어진 것이니, ‘왜노(倭奴)’를 힘주어 말하면 ‘왜놈’이 된다.

우리 겨레가 겪고 있는 온갖 부조리와 모순을 줄 밑 걷어보면 만나게 되는 슬픈 역사가 있으니, ‘갑오왜란’이다. 아니, ‘강화왜란’이다. ‘일제침략 36년’이 아니라 ‘왜제강점 143년’인 것이다. 같은 이치로 ‘미제침탈 74년’이 아니라 1866년 7월 제너럴셔먼호 침략부터 보아 ‘미제강점 153년’이 될 것이다.

“문장이기위주(文章而氣爲主)요 법차(法次)니, 시자언지야(詩者言志也)라. (문장은 씩씩한 기상을 주장삼고 수법은 다음으로 치니, 시는 사상의 드러냄인 까닭인저.)”

어머니 누나와 세 식구가 서울로 부자리를 옮기려던 1964년 찔레꽃머리였다. 큰절을 저쑵고 나자 할아버지는 말씀하시었다.

“이롭지 뭇헌 책은 읽지를 말구 쓸모웂넌 글은 짓지를 말거라”.

서둘러 방을 나서는데 시나브로 떨려나오는 할아버지 말씀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른바 역사를 올바르게 읽어낼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사람(史覽)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니-

“모름지기 사람이 되어야 허너니라.”

-김성동(소설가)

■ 목차

가네코 후미코_유승도ㅣ강상호_원종태ㅣ강우규_윤석홍ㅣ곽낙원_김혜영ㅣ김 구_차옥혜ㅣ김알렉산드라_ 김미승 ㅣ김창숙_배창환ㅣ김 철_최기종ㅣ나석주_ 정소슬ㅣ민영환 _ 이영숙ㅣ박상진_김태수ㅣ박 열_김 림ㅣ박은식_ 김은정ㅣ박자혜 _ 최종천ㅣ박희광_김윤현ㅣ서재필_임시현ㅣ송몽규_김채운ㅣ신규식 _ 윤일균ㅣ신석구_김학성ㅣ심 훈_정진남ㅣ안창남_김 선 ㅣ양한묵 _ 김준태ㅣ유관순_유현아ㅣ유일한_김종숙ㅣ윤희순_정진경ㅣ이경채 _ 김정원 ㅣ이동녕_여국현ㅣ이범석_김연종ㅣ이은숙_김자흔ㅣ이화림 _ 최기순ㅣ임용우_임종철ㅣ장준하_김황흠ㅣ정율성_김 완ㅣ정칠성_ 오미옥ㅣ조만식_박관서ㅣ조명희_성향숙ㅣ조봉암_채상근ㅣ차리석_ 조호진ㅣ최양옥_임영석ㅣ최용덕_주영국ㅣ최정숙_허영선ㅣ최현배_ 이주희ㅣ한백흥_김경훈ㅣ한용운_정일관ㅣ홍범식_박원희ㅣ

토, 2020/04/0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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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 [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낙준 묘지 민족을 붙들고 살리기 위해 ‘친일’ 을 택했다는 사람, 백낙준 친일파 백낙준의 묘는 국가유공자1묘역에 자리해 있다. 유공자1묘역은 이승만 대통령 묘소 바로 뒤쪽으로 친일파 김백일과 신응균이 잠든 장군1묘역으로 가는 길목이다. ⓒ 김종훈

국립현충원에 잠든 11명의 ‘국가공인 친일파’ 중 군인이 아닌 인물이 하나 있다. 연희전문학교 초대 총장이자 문교부 장관, 초대 참의원 의장을 지낸 백낙준이다.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자리한 그의 묘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는 전쟁을 앞뒤에 두고 나고 자라고 일하는 동안 민족을 붙들고 살리는 방도가 교육에 있음을 알고 일생 사업으로 교육에 종사하여 왔다.”

▲ 국가공인 친일파 백낙준 ⓒ 한국학중앙연구소

일제강점기 백낙준의 삶은 묘비에 새겨진 말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백낙준은 일제강점기부터 교육자이자 언론인, 종교인으로 활동하며 설교, 사설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특히 <기독교신문>의 편집위원과 이사로 활동하며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했다. 1942년 5월 20일 백낙준이 직접 작성해 <기독교신문>에 실은 설교문 ‘내 아버지의 집’ 중 일부다.

“우리 제국의 궐기는 대동아 공존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한 정의의 옹호다. 이러한 성전에 몸과 정성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황국에 생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 신민된 자에게 무한한 영광이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자기 나라가 이 세상 나라였다면 그 신하가 싸울 것이라 했다.”

백낙준이 직접 편집과 설교, 사설을 써가며 자신의 친일 행각을 알린 <기독교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조선기독교협회에 의해 창간됐다. 4월 29일은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로, <기독교신문> 창간 10년 전인 1932년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한 날이기도 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백낙준은 1942년 ‘종교보국’을 사명으로 창간된 기독교 신교 각파의 합동기관지 <기독교신문> 이사와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면서 황민화 정책과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지면을 편집하고 직접 설교와 사설을 썼다. ‘미영타도’ 좌담회에 참석하고 전쟁협력을 역설하는 기고문을 반복적으로 발표하는 등 사회단체를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적극 협력했다.”

▲ 1943년 1월 당시 매일신보에 실린 일본 항공기 관련 기사 ⓒ 공훈전자사료관
▲ 1941년 12월 2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애국기헌납운동’ 관련 기사. 백낙준은 지대한 활동을 보였다. ⓒ 공훈전자사료관

백낙준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헌신적으로 부역하기 위해 ‘조선예수교 장로교도 애국기헌납기성회’라는 단체의 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42년 9월 23일 <기독교신문>에는 이 단체에서 구입해 일제에 헌납한 해군전투기 ‘조선장로호’ 명명식 장면이 기사로 실렸다. 이 자리에는 목사 백낙준도 참석했다.

“남으로 북으로 종횡무진의 활약을 하고 있는 우리 육해공군의 분투와 노고에 보답해, 총후 37만 장로교도 일동은 우리 무적해군에 해군기 1대와 병기 2정을 헌납한 사실을 누차 보도했다. 이 보국호(조선장로호)의 명명식은 ‘대공의 제전’에 전개된 항공일의 의도 깊은 9월 12일 오후 1시부터 경성 함태영 목사, 백낙준 목수 외 80여 명 장로회 대표들이 열석하고, 군관민 내빈 5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경성운동장에서 엄숙히 거행됐다.”

독립운동가 서훈 심사위원이 된 친일파

▲ 1951. 부산, 한 초등학교 어린이 대표가 교과서 용지를 원조해준 미국의 원조기관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하고 있다(오른쪽 끝은 당시 백낙준 문교부장관) ⓒ NARA

해방 후 한 달 뒤인 1945년 9월 백낙준은 큰 어려움 없이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김성수, 김활란 등과 함께 활동한다. 이어 10월부터는 경성대학(서울대학 전신) 법문학부 부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부터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1946년 8월 연희전문학교가 연희대학교로 승격되자 초대 총장이 됐다.

1950년 5월부터 문교부 장관을 맡아 1952년 10월까지 재임했다. 이후 국민사상지도원 원장과 연희대학교 이사장을 맡았다. 1953년에 다시 연희대학교 총장으로 복귀, 1957년 1월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대가 통합해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자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1985년 1월 8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연세대학교 명예총장을 지냈다.

1968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가 열리자 박정희 정권은 백낙준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기준으로 조선사편수회 출신 신석호, 이병도,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회부장 출신 홍종인 등도 백낙준과 함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박정희 정권 때 활동했다.

24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친일행적

▲ 1943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백낙준 관련 기사 ⓒ 매일신보 캡처본 재촬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담긴 백낙준의 친일행적은 A4용지 24장에 이른다.

1940년대 교육과 문화, 언론, 종교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부역한 백낙준의 친일 족적이 그만큼 방대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백낙준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라고 평가했다.

“백낙준은 평남 신성학교와 중국 천진신학서원을 거쳐 미국 파크대학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신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예일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연희전문교수로 재직하며 문과과장을 지냈다. 194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예수교 장로회 포교자로 허가를 받은 뒤 각종 사회단체를 통해 일제에 협력하는 활동을 했다.”

백낙준은 ‘국가사회 유공자’라는 이유로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혔다. 2009년 정부가 ‘친일파’로 결정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누워있다. 현행 상훈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명시됐다.

▲ 백낙준 (1896~1985) –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이 된 친일파, 연세대 총장 “제국의 궐기는 대동아 공존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한 정의의 옹호다. 이러한 성전에 몸과 정성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황국에 생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 신민된 자에게 무한한 영광이다.” 연희전문학교 초대 총장이자 문교부 장관, 초대 참의원 의장을 지낸 백낙준이 직접 창간한 <기독교신문>에 실은 글이다. <기독교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창간했다. 10년 전,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성공시킨 날이기도 하다. 해방 후엔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김성수, 김활란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57년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자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1968년엔 친일파 홍종인 등과 함께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국립현충원 11명의 국가공인 친일파 중 유일하게 군인이 아닌 인물이다. 그의 친일행적 기록은 A4용지 24쪽에 달한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김종훈 기자

<2020-04-0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독립유공자 심사를 친일파가? 연세대 학생들은 알까 백낙준편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추적’ 특별페이지

월, 2020/04/06-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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