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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이사장님께 드리는 부탁 말씀 -이사회의 본인에 대한 제명 의결 무효 내용증명(2차) 관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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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이사장님께 드리는 부탁 말씀 -이사회의 본인에 대한 제명 의결 무효 내용증명(2차) 관련하여

익명 (미확인) | 금, 2019/02/15- 22:20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님께 드리는 부탁 말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회의 본인에 대한 제명 의결 무효 내용증명(2) 관련하여

(아래 첨부의 내용증명(2)을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함세웅 이사장님  

명망 높으시고 평소에 외경해 마지않던 함세웅 이사장님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으로서 만나 뵙고 가까운 자리에서 연구소의 여러 사안들부터 때로는 정치현안까지 말씀을 들은 것을 저는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로서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엄혹한 시절에 고초를 겪으셨으며 그 후에도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행동으로 빛을 비추신 함신부님께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으로 오신 것을 크게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운영위원장직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인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함이사장님으로부터 작년 5월에 회원 제명 처분을 받게 됐습니다.

그 이유를 이 자리에서 따지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저에 대한 회원 제명을 결의한 지난해 511일의 이사회는 서울시교육청에 등기된,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소위 신고 정관또는 승인 정관을 위배했기 때문에 무효라는 취지의 내용증명(2)을 지난주 금요일에 보냈고 연구소에서 수령했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작년 7월초 경에도 내용증명을 보낸바 있습니다.  

그때는 제가 20153월 운영위원장 취임할 때부터 알고 적용해왔으며 작년 5월 제명 당시 유통되던 정관(집행부에서 작년 6월 말경에야 밝힌 소위 운영 정관“)이 법적으로 유효한 정관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정관에 의거해서 무효를 주장하고 내용증명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후 2018822일 저희 민바행 측의 민원처리에 늑장을 부리던 서울시교육청에 세 번째로 항의방문을 가서 관계 공무원으로부터 우리 연구소에 회원이 10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와 연구소에 따로 운영되는 정관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비로소 어렴풋이 알고 있던, 그러나 용도가 무엇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등록된 정관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그 등기된 정관으로 연구소(집행부)에서 뭘 해왔는지, 그 용도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서울시교육청에 정보공개청구를 하게 됐고, 10월경에야 간신히 얻어낸 총회 의사록을 보는 순간 교육청에 등기된 그 승인 정관의 몰랐던 용도를 확실하게 파악하게 됐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822일 서울시교육청 항의 방문 때 교육청 공무원이 얘기한 회원 10과 관련된 것으로, 우리가 알던 (운영) 정관과는 다른 (승인) 정관으로 회원들 몰래 정기 및 임시 총회를 해 오며 연구소의 주요 의사결정을 해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소위 운영 정관만을 유효한 정관으로 알고 회원은 전국에 13천여명으로만 알아온 우리 회원들을 집행부에서 지난 15년 동안 속여왔다는 것으로 이는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처럼 소름 돋는 순간이 또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교육청/민족문제연구소 연합팀과의 줄다리기 끝에 입수한 총회 의사록에서 2013129일 임시총회 때 함신부님께서 이사장으로 선임되시고 그때부터 이사회와 정기총회 그리고 임시총회를 주재하신 것을 알고는 저는 사태의 내막을 상당부분 파악하게 됐습니다.  

그전까지는 저는 (그리고 저의 동료 부위원장들은) 함이사장님께서 연구소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모르시고 집행부 실무자들 말에 현혹되셔서 그러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번 이사장님께 면담신청을 해가면서 연구소의 돌아가는 상황을 자세히 말씀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004년부터 시작된 그 회원 10총회 의사록을 보는 순간 저는 함이사장님께서 모든 걸 파악하고 계셨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함이사장님께서는 2004년부터 회원 10으로 정기 및 임시 총회가 열려온 것을 알고 계셨고, 그것을 이어받으셔서 계속 주재하셨으며, 따라서 연구소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계셨음에도 저희 운영위원장단에서 두어번 면담 신청해서 연구소 집행부의 핵심 상근자들의 비민주적 행태 문제 그리고 운영상 문제들에 대해 말씀을 드릴 때 모른체 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제 지난 15년 동안 그들 상근자들이 5명이나 포함된 회원 10으로 정기총회, 임시총회를 해오면서 전국의 13천 진짜(?) “회원들을 속여 온 행태가 드러나니, 집행부에서 말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 슬슬 후원 회원이라는 말을 퍼뜨리며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기가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인인 회원이라고 생각했던 회원들도 스스로에게 나는 그저 후원 회원이었어!”라는 자기암시를 하게끔 만들고 있는 중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집행부가 십수년을 회원들을 속여 오다가 이제 발각이 돼서 위기가 닥치니 설마 하며 그저 믿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회원들에게 또 속임수를 쓰는 것이지요. 함이사장님은 이런 상황을 혹시 알고 계신지요?  

그런데 제가 함이사장님께 섭섭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왜 운영위원장이던 20153~ 20173, 2년 동안, 저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   

여위원장이 법적으로 유효하다고 생각하며 사용하고 있고, 집행부에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그 “(운영) 정관은 사실은 법적으로 유효한 정관이 아니고, 법적으로 유효한 “(승인) 정관은 따로 있네. 그리고 회원13천명이 아니고, 10명뿐이네라고.  

여위원장이나 다른 회원들은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의 법적 주인인 사원(법인 회원)이 아니고, 단순 기부자 내지는 후원 회원에 불과하고, 운영위원장이라는 자네의 직책은 소위 지부라고 불리는 각 지역의 아무런 권리도 없는 후원 회원조직의 대표에 불과한거네라고.  

그런 충격적 사실들을 험한 시간 험로를 거쳐 간신히 알아내고 나니 허탈하고 함이사장님께 섭섭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함세웅 이사장님, 작년 7월 경에 내용증명을 보내고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없어 답답했는데, 얼마전 생각해보니 정관이 두 개인데 어느 정관에 의거해서 이사회 결정이 내려졌는지가 궁금해졌고, 결론은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승인 정관에 의거해 새로 작성해서 보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번 내용 증명(2)은 교육청 승인 정관에 의거, 이사회 의결이 무효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입니다.  

핵심 요지는 간단합니다. 법적으로 유효한, 등기된 승인 정관에 의하면 이사가 5인인데, 저에 대한 이사회 제명 의결에 참석한 이사는 7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8명 이사중 한명은 불참). , 이사 자격이 없는 두 명이 의결에 참여했기 때문에 저의 죄의 유무에 상관없이 절차상 하자로 그 결의가 무효라는 것입니다.  

변호사 자문도 얻었는데, 민족문제연구소의 고문 변호사는 어떤 답을 내놓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지난 1차 내용증명은 아무런 소용없는 것이고, 이번 2차 내용증명이 진짜 같고 보내드렸으니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회원 제명을 철회하고 저의 요구에 응답해주실 것을 간곡히 요청 드립니다. 한 단체의 수장 이전에 신부이신데 잘못된 일이 있다면 바로 잡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법적 절차를 밟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최대한 조속한 시일 내에 통보를 부탁드립니다.  

 

2019. 2. 15.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제명자

(9) 운영위원장 여인철

 

 

별첨:

     2018. 5. 11 51차 이사회의 회원(여인철) 제명 의결 무효  

내 용 증 명 (2)  

수신 :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함세웅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47다길 27 (청파동2)

발신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인철 (전 운영위원장)

대전시 서구

제목 : 2018. 5. 11 51차 이사회의 회원(여인철) 제명 의결 무효  

2018511,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 51차 이사회는 본인(여인철)에 대한 회원 제명의 건을 심의하고, 제명 처분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당시 통용되던 정관에 의거, 51차 이사회의 구성, 개최 및 결의가 무효임을 주장하며, 아울러 본인의 회원의 지위를 박탈하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사실을 밝힌 내용증명을 작년 7월 초경에 송부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한 가운데, 우리 민족문제연구소에 본인이 운영위원장으로 재임하던 지난 20153월부터 20173월까지 2년간 법적으로 유효한 정관으로 알고 사용해왔던 위에서 언급한 정관 (집행부에서 말하는 소위 운영 정관”) 외에 또 다른 정관(교육청에서 승인한 정관, 이하 승인 정관”)이 본인을 비롯한 전국의 회원 몰래 운영되고 있었음이 밝혀졌고 (별첨 1: 2018623, 충남아산에서 워크샵을 겸하여 열린 2분기 운영위원회 배포자료),

그 배포자료에서 집행부는 “…서울시 교육청의 인가를 받아 등기된 법적 효력을 지니는 것과 실제 시행하고 있는 운영 정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라고 인정하며, “우리 연구소는 두 가지 정관을 모두 준수하고 있으나 혹 양자가 충돌할 경우에는 등기된 정관의 효력이 우선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에 정관이 두 개였고 연구소는 이 두 개의 정관 모두를 준수하고 있다?  

본인은 연구소가 사단법인 등록할 때 신고한 정관(위 교육청에 등기된 승인 정관”)이 있다는 것에 대해 들은 적은 있으나 그 정관은 사단법인 등록을 위해 필요한 요식행위에 의한 정관이었을 뿐 그 정관이 집행부에 의해 따로 회원 몰래 준수되고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운영위원장으로 재임하던 당시 본인은 집행부로부터 받은 소위 운영 정관이 법적으로 유효한 정관으로 알고 집행부에게 그 정관을 준수하도록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집행부가 지난 십수년 동안 운영 정관외에 승인 정관을 이용해 회원을 10으로 임의로 정하고, 전국의 13천여 회원을 무시하며 이들 10명만으로 정기총회와 임시 총회를 열어 연구소의 주요 사안에 대해 의사결정을 해온 사실을 이사진과 집행부 상근자들은 운영위원장인 저를 비롯한 운영위원(회원)들에게 알리지 않아왔다는 사실이 작년 9월경에야 드러난 것입니다  

운영위원장으로서 소위 운영 정관을 법적으로 유효한 정관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연구소 업무에 임했던 본인은 이사진과 상근자들의 배신과 기만행위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사회의 본인에 대한 회원제명 의결 무효의 건과는 별개로, 민족문제연구소를 지난 1991년부터 오늘날까지 회비를 납부하며 지탱해 온 전국의 회원들에 대한 이사진과 집행부 상근자들의 오랜 배신과 기만 행태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작년 7월에 보낸 내용증명(1차라 칭함)운영 정관을 근거로 작성된 것인데, 그렇다면 작년 511일의 이사회 결정은 어떤 정관에 따라 결정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소위 법적 효력이 우선한다는 등기된 정관” (“승인 정관”)에 따라 다시 작성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에 본인에 대한 이사회의 제명 의결 무효를 주장한 1차 내용증명(“운영 정관을 근거로 작성)과 같은 취지의 2차 내용증명(“승인 정관을 근거로 작성)을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송부합니다.     

1. 51차 이사회 결정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511일 민족문제연구소 제51차 이사회는 귀하의 참석 하에 소명절차를 진행하였습니다. 이사회는 운영위원회의 제명건의안과 관련 자료, 귀하의 소명과 관련 자료를 심의한 결과 아래와 같이 결정하였습니다.

결정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정관에 의거 이사회에 주어진 권한에 따라 참석 이사 전원의 찬성으로 회원 여인철을 제명 처분한다. (51차 이사회에는 이사 8 중 이사 강만길을 제외한 7인이 참석하였으며, 여인철 씨의 제척사유 주장에 따라 이사 임헌영과 조세열은 의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정서에 따르면 이사회는 어떤 정관인지에 대한 언급 없이 단지 정관에 의거 한다며 회원 제명 건에 대하여 의결했습니다  

지난 1차 내용증명에서는 회원들에게 기 공개된 운영 정관에 의거하여 이사회의 결정이 무효임을 밝혔으니, 2차 내용증명에서는 운영 정관과는 다른, 법적 효력이 우선한다는 승인 정관”(2017. 12. 28, 4차 개정)에 의거하여 살펴보겠습니다.    

2. “승인 정관의 내용  

3장 임원  

10(임원의 종류와 정수)

이 법인에는 다음의 임원을 둔다.

1. 이사 5인 

2. 감사 2

1항 제1호의 이사에는 이사장을 포함한다.  

51차 이사회 의결의 준거가 되는 교육청 인가 승인 정관의 제10조에서는 이사를 이사장 포함 5인으로 정하고 있으며, 등기부등본 상에 함세웅, 임준열(등기부상 임헌영), 윤경로, 조세열, 신용옥의 5인이 등기되어 있습니다.  

3. 51차 이사회 결의 무효 이유  

이사가 아닌 자가 이사회 의결에 참여 (“승인 정관위반)  

위 이사회 결정서에 따르면 제51차 이사회에는 함세웅, 임준열, 윤경로, 조세열, 신용옥, 이이화, 지수걸의 7인이 참석하고 강만길은 불참했는데, 이중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승인 정관에 따르면 강만길, 이이화, 지수걸은 이사가 아닙니다.  

이사회는 승인 정관에서 정한 5인 즉, 등기부등본에 등기된 5인만으로 구성하고 의결했어야 하며, 따라서 이를 위반하여 이사가 아닌 자가 표결에 참여한 제51차 이사회의 결의는 무효입니다  

4. 결론  

결론적으로 위 3항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제51차 이사회에서 의결한 여인철 회원 제명의 건은 무효이고 따라서 본인은 당연히 정관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회원의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사회, 운영위원회, 집행부는 본인이 회원에서 제명되었다는 주장을 하며 본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재차 요구합니다.  

이사장은

본인을 회원에서 제명한 제51차 이사회의 결의가 무효임을 선언하고, 지체없이 본인에게 정식으로 통보하는 것은 물론,

전국의 회원들에게 이메일로 통보하고,

회보 민족사랑과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다음과 같이 공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회원 여인철을 제명한 2018. 5. 11의 제51차 이사회는 이사가 아닌 자가 의결에 참여하여 제명을 결의한 것이므로 무효입니다. 따라서 여인철 전 운영위원장은 회원의 지위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위법적 회원 제명으로 인해 심대한 심적 피해를 입었을 여인철 회원에게 사과와 위로의 말을 전하며, 이에 사실을 명확히 하기 위해 공지합니다.  

2019OO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함세웅

 

위의 본인의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적당한 방법을 통해 저의 권리를 되찾을 것입니다.  

2019. 2. 8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인철

9대 운영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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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현충원 가보니

0404-13

▲홍경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사무국장이 지난 10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김창룡의 묘 앞에서 그의 친일 행적을 설명하고 있다(왼쪽 사진). 애국지사 묘역에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지사와 아들 김인 지사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오른쪽).

백범 어머니·아들 묘역에서600m 떨어진 곳에 김창룡 묘
시민들, 이장 촉구만 20년째
“법 개정안, 국회 통과 안돼”

“저 너머에 김구 선생의 어머니와 아들이 묻혀 있습니다. 자식과 아버지의 암살 배후로 지목된 인물과 같은 곳에 계신 셈이죠. 역사적 단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 민족사가 국립묘지에 그대로 응축돼 있는 겁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10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홍경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사무국장이 김창룡의 묘 앞에서 산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창룡의 묘는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장군1묘역 상단 두 번째 열에 자리 잡고 있다. 홍 국장은 “장군1묘역은 현충원 안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있는 형국의 명당”이라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도록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김창룡은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해방 후 소련군정에 전범으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고,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에 입교해 육군 장교로 임관하면서 군내에서 승승장구했다. 기무사령부 전신인 육군 특무부대장을 지내며 소장까지 진급했고, 1956년 암살된 후엔 중장 계급이 추서됐다.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죽기 전 “김창룡으로부터 강한 암시를 받았다”며 그를 사실상 암살의 배후로 지목했다.

김창룡이 묻힌 장군1묘역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애국지사 묘역이 나온다. 직선거리로 60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지사와 아들 김인 지사가 나란히 묻혀 있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이런 ‘기막힌 동거’를 만들어낸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민중당 대전시당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대전현충원에는 28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안장돼 있다.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인물이다. 4명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도 수록됐다. 28명 가운데 22명이 장군 묘역에 안장된 군 장성 출신이다. 일제강점기엔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등으로 활동하다 해방 후 옷을 갈아입고 한국전쟁기 등을 거치며 군에서 성장한 인물들이다. 애국지사 묘역을 지나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장군2묘역에도 이들 중 5명이 묻혀 있다.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는 2000년부터 매년 현충일이면 김창룡의 묘 앞에서 ‘파묘 시위’ 등을 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묘 이장을 촉구하고 있다. 벌써 20년째다. 이들의 공허한 외침 속에 대전현충원에는 되레 친일파의 묘가 18기나 늘어났다. 친일반민족행위를 이유로 군 장성 등의 묘를 강제 이장하려면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야 하지만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현충일을 앞두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수록된 자에 한해 현충원에 안장할 수 없도록 하는 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그마저도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홍 국장은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친일파 후손들이 지금도 우리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법 개정이 어려운 이유”라며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주년인 올해를 놓치면 법 개정도 친일 잔재 청산도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이종섭 기자 [email protected]

<2019-04-11> 경향신문 

☞기사원문: “백범 가족과 백범 암살 배후가 한자리 묻혀 있어서야…”

금, 2019/04/12-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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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리 만세운동’과‘계남면사무소 습격의거’ 발굴 첫 행사
부천시민연합• 부천민예총•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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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보 전단지<사진=이정성 기자>

[KNS뉴스통신=이정성 기자] 부천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지난 24일 부천 중앙공원과 시청 잔디광장에서 ‘소사리 만세운동’과 ‘계남면사무소 습격 의거’를 발굴하여 재현하는 행사를 열었다.

부천시 시민단체가 의지를 모아 추진한 3.1절 기념 첫 번째 행사로서 의미가 크다.

이날 박종선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은 대회사에서 “부천에서는 3월 24일부터 28일까지 3.1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계남면사무소 습격의거는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한 각종 문서를 태웠으며, 소사리 6개 마을 사람들은 밤 중에 산에 올라 화톳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부른 날이 3월 24일이었다”라고 상기했다.

박 지부장은 이어 “지난 100년간 부천 시민에게 3.1 운동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부천의 독립운동가인 남광욱, 변영로, 이연형 지사 등도 알려지지 않았다”라며 “부천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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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립패가 풍물을 치며 앞장서고 대형태극기가 뒤따르며 남녀노소 시민은 얼크러져 만세를 제창했다<사진=이정성 기자>

장덕천 부천시장은 축사에서 “100년 전, 그날의 꺼지지 않던 횃불에서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와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국 독립을 외치던 그때 우리는 하나였다. 시민주권의 역사를 같이하는 한 뿌리였다. 이제 계층과 이념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었던 3.1 운동의 정신을 되살려 부천시의 희망찬 미래 100년을 우리 함께 만들어 나가자”고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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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시‧도의원(시의원 28명, 도의원 8명)은 흰 적삼과 검정 치마, 흰 두루마기(남성의원)를 입고 당시의 분위를 재현했다.<사진=이정성 기자>

김동희 부천시의회 의장은 축사에서 “전국에서 일어난 3.1 운동은 대중의 자발성을 바탕으로 일어난 비폭력 평화시위로 유관순 열사 이외에도 숨은 영웅이 많을 것이다. 부천의 3.1 운동의 역사를 알리고 이 지역의 숨은 영웅들을 재조명하게 될 이번 행사가 부천 땅을 밟고 살아가는 시민에게 큰 감동의 한 마당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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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시 3.1 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의 참여단체(22개)는 홍보부스(10)를 설치하고 시민에게 활동사업을 설명했다.<사진= 이정성 기자>

김허원배 남북평화재단 공동대표는 “100년 전 3.1 운동은 각지에 분산되었던 독립운동세력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3.1 운동 비폭력 평화시위가 2016년 촛불시민 혁명으로 이어져 새로운 민주 정부를 낳았다”고 주장하며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독립지사를 고문하고 탄압했던 세력의 뿌리가 남아 통탄할 일이 오늘도 벌어지고 있다. 아직 미완성인 광복과 조국통일을 완수하는 일과 민주주의, 민족정신을 계승할 소중한 가치로 삼아 훼손된 독립정신과 역사를 지켜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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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덕천 부천시장의 축하 인사<사진=이정성 기자>

이정성 기자 [email protected]

<2019-03-25> KNS뉴스 

☞기사원문: 부천시, 3∙1 운동 100주년 기념 독립운동 재현행사 열려

월, 2019/03/2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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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첫 보도에 나타난 서울 지역 3·1만세시위의 현장

 

• 이순우 책임연구원

 

 

① 경성 종로통 :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촉발시킨 탑골공원(파고다공원)의 전경이다. 추가적인 집회를 막기 위해 일본 군인들이 이곳을 장악한 직후 모든 출입구는 폐쇄되고 말았다.
② 덕수궁 대한문 앞 : 이곳은 고종 국장 행렬의 출발점인 동시에 공간 자체가 광장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만세시위군중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교차지점이 되기도 했다. 왼쪽에 있는 것이 대한문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경성일보사(매일신보사,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이다.
③ 경성우편국 앞 : 종로에서 남대문정거장으로 나가거나 덕수궁 대한문 쪽에서 본정통(혼마치)로 이동할 때 교차지점이 되는 경성우편국 앞 광장의 전경이다. 왼쪽에 보이는 조선은행도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선은전(鮮銀前, 센긴마에)’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되기도 했던 공간이다.
④ 남대문정거장 앞 : 경부철도 남대문정거장의 전면 모습이다. 이 자리는 다시 수 만 명이 참여한 3월 5일 제2차 만세시위의 집결지였을 뿐만 아니라 불과 반년 후인 1919년 9월 2일 사이토 신임 총독이 부임하던 날 다시 강우규 의거의 현장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⑤ 조선보병대 앞 : 광화문 앞 옛 삼군부 터(지금의 정부서울청사 자리)에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가 있었고, 그 아래로 헌병대 숙사(宿舍)와 경성제2헌병분대가 나란히 터를 잡고 있었다.
⑥ 미국총영사관 : 독립선언서를 미국총영사관(정동 10번지)에 전달하고 덕수궁 담장길을 따라 되돌아나오는 만세시위행렬의 모습이다. 독립선언의 취지를 전달하고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만세시위 참여자들은 서울 주재 서양 각국의 영사관을 빠지지 않고 방문하였다.
⑦ 본정통 : 일본인들의 중심 거리인 본정통(혼마치, 지금의 충무로) 일대의 거리풍경이다. 만세시위행렬은 강압적인 식민통치의 본거지인 조선총독부가 있던 남산 왜성대를 향해 나아가려다가 이곳에서 일제의 방어선에 막혀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⑧ 종로경찰서 앞 : 다수의 시위참여자가 체포된 종로경찰서 앞의 거리 풍경이다. 왼쪽에 보이는 시계탑 건물이 옛 한성전기 사옥이자 1919년 당시 종로경찰서로 사용된 건물이며, 오른쪽으로 붙어있는 건물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이다. 종로경찰서는 1923년 1월 김상옥 의거의 현장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1일, 일제는 탑골공원(塔洞公園, 파고다공원)과 명월관 지점(明月館支店, 태화관)에서 촉발된 ‘독립선언’이라는 우리 민족의 거대한 저항에 부딪히자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강압적 식민통치기구를 대거 동원하여 시위참가자들에 대해 구타, 체포, 구금, 살상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와 더불어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고자 일체의 보도를 철저히 통제하였다.
그러나 조선독립의 대의를 외치는 큰 흐름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이 명백해지자 3월 7일에 이르러서야 이른바 ‘소요사건(騷擾事件)’이라는 제목이 붙은 각 지역 만세시위의 양상에 대한 기사가 처음 신문지상에 등장하게 된다. 이때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1919년 3월 7일자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서울 지역에서 이뤄진 시위양상을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3월 1일 오후 2시 반에 학생 3, 4천 명은 경성 종로통 ①에 모여 군중이 부화하여 여러 대로 나뉘어 일단은 덕수궁 대한문 앞 ②에 이르러 한국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일시 대한문 안으로 침입하였다가 다시 대한문 앞 넓은 마당에서 독립연설을 하였고 일단은 경성우편국 앞 ③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남대문정거장 앞④에서 의주통으로 나아가 불란서영사관에 이르고 일단은 창덕궁 문 앞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일단은 조선보병대 앞 ⑤으로 가서 그 영문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못하고 또 대한문 앞에 단체에서 나뉜 일단은 미국총영사관 ⑥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다른 단체 약 3천 명은 총독부로 향하려 함으로써 본정통 ⑦에서 이것을 막아 운동은 일시 표면으로는 진정되었고 군중 중에 괴수로 인정할 만한 자 130명을 체포하였으며 처음의 소요가 진정된 후 1일 오후 8시 경에 마포전차종점 부근에 약 1
천 명이 모였었고 또 11시쯤에 야소교 부속 연희전문학교 부근에 학생 약 200명이 집합하였으나 얼마 아니하여 헤어졌고, 2일 정시 20분에 종로네거리에서부터 약 400명이 만세를 부르며 종로경찰서 앞⑧으로 지나가매 경찰서에서는 이것을 제지하고 괴수로 인정할 만한자 20명을 체포하였는데 나머지 군중은 모두 헤어졌더라.
그러한데 이 군중의 다수는 노동자요 학생도 더러 섞여 있었고 3일의 경성은 전일 이래로 매우 고요하여 훈련원 장제장의 장식은 성대 무사히 마치었고 3월 4일에는 각 관공사립학교에 결석생도가 많고 혹은 한 명도 출석치 아니한 학교가 있었는데 그 원인은 불량학생들이 이번 시위운동에 참가치 아니하면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거나 또는 부형이 위험을 염려하여 출입을 금하고 혹은 3월 1일 소요 후 고향으로 돌아간 자가 많은 까닭이라더라.

1919년 당시 20세였던 이학(李鶴)이라는 중동학교(中東學校) 중등과 학생이 있었다.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일리동에 본적지를 둔 그는 공업전습소 학생인 안형선(安衡善)과 함께 경성부 연건동 39번지에서 세를 얻어 살고 있었다. 3월 1일 아침 낙원동에서 만난 친구 안형선에게서 오늘 파고다공원에서 조선의 독립선언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으로 가서 만세시위행렬에 참가하게 된다.
이날 하루 그는 서울 시내의 이곳저곳을 따라다니며 거의 전 행로에 동참했으며, 3월 5일에 다시 남대문 역전에서 벌어진 제2차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북미창정(지금의 북창동)을 거쳐 대한문 앞으로 나가는 도중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는 상황에 처하였다. 그는 5월 3일 총독부 판사 앞에서 “독립선언을 한다는 것에 찬성하여 파고다공원에 갔다”고 당당히 밝혔는데, 그의 신문조서에는 만세시위에 동행한 행로를 이렇게 적고 있다.

 

안형선으로부터 위의 말을 들었으므로 그와 함께 정오가 지나서 파고다공원에 갔다. 그때는 다수의 사람이 모여 있지 않았으나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점차 사람이 많아지고 마침내 다수의 군중이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오후 2시경이 되니 육각당 쪽에서 누군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혹자는 독립신문을 살포했으므로 나는 그것을 주워 보았다. 그러는 중에 군중은 박수를 치고 또 독립만세를 불렀으므로 나도 거기에 맞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나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종로로 나와 남대문역전, 서대문 밖, 영성문(永成門) 앞을 거쳐 미국영사관 앞으로 갔다가 거기서 대한문, 종로, 광화문을 거쳐 서대문 밖 프랑스영사관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서소문정, 대한문앞, 장곡천정(長谷川町)을 거쳐 본정 2정목에 이르렀더니 경찰관이 제지했으므로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위의 행로에 나오는 ‘영성문’은 경운궁 선원전 구역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나가는 쪽에 설치된 북쪽 대문이며, 1900년에 만들어졌다가 덕수궁 해체과정에서 1920년에 철거되어 사라진 유적이다. 그리고 ‘장곡천정’은 일찍이 한국주차군사령관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3.1 당시의 조선총독)가 자신의 관저로 삼았던 대관정(大觀亭)이 있는 동네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소공동(小公洞)’의 일제식 지명을 가리킨다.
이학이 만세시위행렬을 따라 다닌 행로는 앞서 보았던 ????매일신보???? 첫 보도에 기술된 장소들과 거의 겹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3일에 있던 고종 국상일을 넘기고 다시 5일에 열린 제2차 만세시위에 나갔다가 체포되기에 이른다. 비록 닷새 남짓에 불과한 기간이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삶을 통틀어 가장 자유롭고 가슴 벅찬 나날들을 보낸 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금, 2019/03/29-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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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남대문로 반민특위 본부 터>

KB국민은행 옛 명동 본점에 위치
일제강점기 식민지 자본주의 심장부
48년 제헌의회서 제정한 헌법기관
반민특위 터, 2017년 미 금융사에 매각
지상 18층짜리 호텔, 터파기 공사 중
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푯돌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임시 보관
49년 6월 이승만 지시받은 경찰이 습격

친일 청산, 좌우 세력이 정치적 이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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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남대문로84 옛 국민은행 명동 본점 건물이 호텔 신축을 위해 철거돼 사라졌다. 이 건물 지하주차장 모퉁이에 있던 반민특위 푯돌은 용산구 청파동2가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제자리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중구 남대문로84 KB국민은행 옛 명동 본점,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 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반민특위는 1948년 9월 제헌의회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해 제정한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발족한 헌법기관이다. 1949년 8월 활동을 마칠 때까지 당시 명동 롯데백화점 맞은편 옛 상공부 특허국 건물을 독립 청사로 썼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면 한국전력 서울본부와 SK네트웍스 빌딩 바로 다음 건물이다. SK 명동 빌딩과 이비스(ibis) 앰배서더호텔을 지나면 명동 입구에 닿는다. 조선 건국 이래 광통교 아랫동네는 종각~을지로 입구~명동~숭례문을 잇는 남대문로 상의 최고 상권이었다. 길 건너편은 소공동 옛 반도호텔(롯데호텔)~옛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이어졌다. 남대문로는 ‘경성의 월스트리트’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식민지 자본주의’의 심장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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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민특위 청사로 쓰였던 옛 상공부 특허국 건물.

반민특위 터는 철거돼 사라졌다. 사방에 둘러쳐진 가림막 안을 가만히 엿보니 텅 빈 터에 터파기(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내는 기초 공사)가 진행 중이고, 수시로 공사 굉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다. 철거 안내문과 건축 허가 표지판이 붙어 있는 가림막 앞 보도에는 ‘명동 국민은행 앞’이라고 적힌 버스정류장 안내판이 서 있다.

이것이 사람들의 뇌리에 남은 장소성이다. 대지 면적 2589㎡(783평), 연면적 2만6764㎡(8096평)의 이 건물은 2017년 마스턴투자운용과 미국계 대체투자 운용사인 안젤로고든에 2400억원에 팔렸다고 한다. 지하 3층~지상 18층짜리 고급 호텔과 상점이 들어서면 남대문로의 풍경을 또 한번 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반민특위 푯돌은 보이지 않는다. 공사 전 푯돌은 은행 정문을 지나 명동7가길로 꺾여 돌아가는 건물 주차장 입구 모퉁이에 엄전하게 있었다. 본래 이곳은 체포된 부역자를 가두던 유치장 자리였다. 1999년 푯돌 건립 당시 관계 기관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로변에 세우지 않았으면 한다”라면서 난색을 보였기 때문에 정문을 피해 유치장 터로 밀려난 것이다.

푯돌은 어디로 갔을까? 굴곡진 반민특위와 푯돌의 행로가 오버랩되면서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철거 공사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해 말 푯돌 순례자의 두 눈으로 확인한 푯돌에는 ‘이곳은 민족말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을 조사, 처벌하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임’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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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은행 명동 지점이 철거되기 전인 2018년 9월 촬영한 반민특위 푯돌.

철거 과정에서 이 은행 지하주차장 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푯돌의 행방이 묘연하다.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이 빌딩 1층 화단에 세웠으나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두 차례 다른 자리로 전전한 끝에 얻은 안식처였다. 그러나 푯돌의 옆면과 뒷면을 모퉁이에 바짝 붙여 놓아서 숨쉬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푯돌 앞을 지나칠 때마다 안팎곱사등이(가슴과 등이 병적으로 튀어나온 사람) 푯돌 신세가 처량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확인해보니 이번에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면서 오갈 데가 없어 용산구 청파동 2가 식민지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라고 했다.

언론인 정운현의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증언 반민특위>에 따르면, “반민특위 사무실은 1층과 2층 각각 100평 정도의 공간이었고, 1층에 칸막이를 만들어 제1, 2, 3조사부와 조사부장, 조사관, 서기관 자리를 만들었다. 김상덕 위원장실은 회의실로 사용했다. 2층은 검찰관들이 사용했다. 반민 피의자의 체포와 특위 요원 경호를 위해 총경부터 경사에 이르기까지 47명의 경찰관으로 구성된 특별경찰대원들은 1층 구석 칸막이방을 사용했다”는 구술이 나온다.

업무 공간이 다소 좁아서 불편했지만 입지는 최고였다. 줄줄이 잡혀 들어오는 친일 명사들을 보려고 구름 인파가 몰려들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활동을 시작했다. 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김상덕 의원)와 특별재판부(부장 김병로 대법원장), 특별검찰부(부장 권승렬 법무장관) 등 거국적인 조직을 갖췄다.

‘백화점 왕’으로 군림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일본 관동군 첩자 노릇을 한 <대한일보> 사장 이종형, 2·8독립선언서를 쓴 춘원 이광수, 3·1독립선언서를 쓴 육당 최남선, 민족대표 33인이자 <매일신보> 사장을 지낸 최린,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배정자를 비롯해 수도경찰청(서울경찰청) 수사국장 노덕술,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차석 홍택희, 중부서장 박경림 등 친일 경찰 간부를 체포하는 성과를 거뒀다.

총 688명을 조사해 408명에게 영장을 발부하고, 559건을 검찰에 송치했으며 221건을 기소했다. 이 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 7명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36년간의 식민 시기에 부역한 7천여 명에 이르는 친일파 일람표를 작성해, 심판하겠다고 요란하게 출범한 것치고는 초라한 결과였다. 나치 독일에 5년간 점령당한 프랑스가 부역자 1만 명을 사형에 처하고, 10만 명에게 실형을 선고한 사례와 비교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친일파 처벌은 저주와 속박의 굴레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의 드골 군대와 레지스탕스는 연합군과 함께 점령군 자격으로 파리에 입성해 나치 협력자를 처단했지만, 우리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군 기백명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을 뿐이다. 독자적으로 독립과 해방을 맞지 못한 원죄가 앞을 가로막았다.

해방 이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전까지 3년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친일파 숙청은 군정의 업무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그들에게 해방된 약소국의 민족 감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친일 관료와 경찰, 군인은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거나 오히려 승진했다. 미국에게는 치안 유지와 소련과의 냉전체제 경쟁이 중요했다. 친일부역자 처단보다 공산 세력 척결이 시급했다.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9월 스탈린은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해 친일파 청산 문제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라”는 비밀 지령을 좌익 세력에게 내려보냈다. 미국과 소련 양 대국에게 친일파 청산은 체제 경쟁용에 불과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 경찰의 백주 반민특위 테러 사건 그리고 백범 김구 암살이라는 일련의 사건이 이어지면서 반민특위는 힘을 잃고, 해체 과정을 밟게 된다. 1949년 6월6일 아침 7시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40여 명의 경찰관이 반민특위를 습격해, 35명의 특위 인사를 붙잡아 고문한 사건은 이 대통령의 지시와 김태선 시경국장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6월9일자 회견에서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 명령했다”고 실토했다. 결국 대통령을 등에 업은 친일 경찰이 국회를 기반으로 한 특위를 무력화한 셈이다. 지독한 반미·반일주의자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정치적 의중과 맞아떨어졌다.

이 대통령은 “국내 기반이 없는 자신의 정치적 우군이 친일 세력이고, 민족의 절반을 차지하는 친일 부역자 처벌은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는 부질없는 짓”이라고 여겼다. 경찰과 군 간부 대부분이 친일 부역자였다. 경찰의 경우 1946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 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9명이 친일 경찰 출신이었다. 1946년 11월까지 경찰 간부 비율을 보면 경위 이상 1157명 중 82%인 949명이 일제강점기 경찰 경력자였다. 하위직의 30%도 경력자였다.

군대는 일본군과 만주군에 복무했던 친일파들이 군의 요직을 완전히 장악했다. 무엇보다 반민법 제5조는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반민법은 반민특위와 이승만의 숙명적 대결을 예고했다.

지금 우리에게 반민특위는 역사 교과서 속 교훈이 아니다. 해방 후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대의명분에도 좌우익 간 이데올로기 대립의 와중에 그 기회를 놓쳤다. 반민특위의 좌절은 민족 통합의 좌절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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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에 이전된 반민특위 푯돌.

반민특위 푯돌을 잘 보관 중이라니 다행이다. 하지만 만약 푯돌의 건립 주체가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 서울시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건물 신축 과정에서 갈 곳 없는 푯돌을 시청 창고나 서울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넣어두진 않을 터이다. 건물 옆 다른 자리에 임시로 옮겨놓았다가 다시 원위치하는 순서를 밟는 게 이치다.

그렇다면 혹시 푯돌의 건립 주체가 민간 단체이기 때문에 이렇게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반민특위 푯돌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일본인이 많이 드나드는 호텔 신축 이후 푯돌이 제자리로 돌아갈지 장담 못한다고 한다. 반민특위 푯돌이 일본인 관광객 유치와 국민 통합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 놓으려 한 권위주의 시대 관계 당국의 판단 착오가 반복되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 푯돌이 반드시 돌아와 반민특위 유치장이 아닌 정문 앞에 당당히 자리잡길 바란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2019-04-18> 한겨레 

☞기사원문: 이승만 “민족 분열만 초래” 경찰 동원 강제 해산…푯돌마저 ‘수난’

목, 2019/04/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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邦之羞辱(방지수욕)

 

忘置邦羞辱(망치방수욕)

民無奮發心(민무분발심)

唯私唯利己(유사유이기)

嘆此拙儒吟(탄차졸유음)

 

나라의 수치와 모욕

 

나라 수치와 모욕 까맣게 잊으니

백성에겐 분발하는 맘 따위 없네

오로지 私에 또 오로지 이기심뿐

이를 탄식하며 못난 선비 읊는다.

 

<時調로 改譯>

 

수치, 모욕 잊으니 분발의 그 맘 없네

오직 사사로움에 또 오로지 이기심뿐

이것을 탄식하면서 못난 선비 읊는다.

 

*羞辱: 부끄럽고 욕됨 *忘置: 망각(妄却). 亡失. 어떤 사실을 잊어버림 *奮發心:

마음과 힘을 다해 떨쳐 일어나려는 마음 *利己: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함.

 

<2018년 6월, 이우식 지음>

화, 2018/06/2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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