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부터 예술가ㆍ법조인ㆍ공무원까지… 낯 뜨거운 ‘친일 행적’ 마지막 무관생도이자 日 육사 동기 홍사익과 안종인 나라 배반하고 호의호식한 고위공무원의 전형 김종한 작곡가 홍난파·예술가 윤효중·조선총독부 판사 이명섭 총후봉공 위한 정신운동 앞장 선 사학계 거두 이병도 독립군 맹장 지청천·이종혁과 달리 친일의 길 앞장 해방 후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 개념 규정에 어려움 낳아 후손들 밝은 미래 위해 역사의 뼈아픈 반성·성찰 있어야
■ 군인은 국가의 정체
대한민국 대통령을 비롯해 고위공직자들 가운데 본인 또는 아들의 ‘군복무’ 문제로 곤혹을 치룬 사례를 언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다. 그만큼 분단된 대한민국에서 군과 관련된 문제는 가장 민감한 문제이자 중요한 사안이다. 군인은 그 국가의 정체(正體)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대한제국을 침략하면서 친일적 군인을 만들어 내는 데 심열을 기울였다.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면서 일본이 한국적(韓國籍) 군인으로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 경기도 안성 출신의 홍사익이다. 그는 1969년 일본이 펴낸 일본 육군사관학교라는 책의 연표에도 영친왕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왕족과 함께 실려 있다. 그것은 오로지 그의 실력이었다.
몇 해전 소설가 이원규 작가가 저술한 [마지막 무관생도들]이라는 책을 보면서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는 필자는 부끄러움을 크게 느꼈다. 무엇보다도 이원규 작가의 자료 접근과 소설가로서의 풍부한 상상력이 결합된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소설이 아닌 지청천, 이응준, 홍사익에 대한 평전이었다. 그러면 왜 홍사익은 지청천처럼 일본군을 탈출해서 독립군에 투신하지 못했을까. 개인의 영달과 조국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결합된 천재 소년의 비극적 인생, 그것이 홍사익의 자화상이었다.
홍사익은 1889년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소현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열 살때쯤 사서(四書)를 통째로 외워버려 인근 동리에서는 천재소년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16세 때 대한제국 유년학교에 입학했으며 1907년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동기로는 한국독립군의 맹장이자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이 있었다. 홍사익은 지청천과 무척 친하게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속에 처해졌으며 마침내 홍사익을 비롯한 42명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홍사익은 강제병합 소식도 듣고 선배 김경천과 동기 지청천, 이응준이 모여 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14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던 지청천은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그 때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지청천은 선배 김광서(김경천)과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한 후 청산리 전투와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한국독립군의 상징으로 성장했다. 홍사익은 지청전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원체 탁월한 천재였던 홍사익은 일본군에서도 고속승진이 확실한 일본 육군대학을 나오게 된다. 일본 육군대학은 출세의 보증수표이자 별을 달 수 있는 고속도로이다. 동기들 가운데 육군대학을 나온 사람은 없다.
1941년 홍사익은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중국 화북지방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그 때 한국독립군 가운데 윤세주를 비롯한 조선의용대원들이 태항산 지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친구 지청천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홍사익은 다시 필리핀에 전속됐다. 거기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연합군에게 체포돼 1946년 9월26일 밤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홍사익과 함께 대한제국마지막 생도이자 일본 육사를 나온 안종인(안병범)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한국전쟁(6ㆍ25)에서 북한군과 대치하다가 자결했던 안병범이 바로 안종인이다. 그는 홍사익과 동기로서 1914년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그해 12월 큐슈의 구마모토 부대에서 근무했다. 1918년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했다. 이때 함께 출정했던 충무공의 후예였던 일본 육사27기 이종혁은 독립군 탄압에 대한 죄책감으로 1920년대 탈출해 독립군이 됐지만 안종인은 해방 때까지 일본 대좌로서 훈장과 함께 특별하사금까지 받았다.
■ 예술가는 민족혼을 머금는다
위기의 시대, 국난의 시대의 예술가들이 존경받는 것은 민족혼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데 있다. 남북이 만나서 가끔 함께 부르는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는 그 곡이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친일음악가로 낙인찍혀 있다.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난 윤효중은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극성이었던 1940년대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 미화하는 조선미술전람회, 결전(決戰)미술전 등에 출품해 각종 상을 휩쓸었다. 1943년 열린 조선미술전람외에 천인침(千人針)을 응모해 조선총독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태평양전쟁에 나선 일본 군대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며 후방에서 끊임없이 바느질하는 한복 차림의 여인 전신상을 새긴 작품이다. 1944년에는 결전미술전에 [아버지 영령에 맹세한다]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전쟁에 나간 아버지의 뼛가루 상자를 앞으로 메고 있는 소년의 비애와 결연함을 아우르고 있으며 일본의 승리를 염원하는 내용이다. 1945년 1월에는 태평양전쟁에 출전한 가미카제를 기념하는 초상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조각가인 그는 일제의 전쟁에 동원된 민중들의 모습을 미화시키는 작품세계에 몰두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 법으로 친일을 변호하다
이명섭은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했다. 1912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으로 법조계에 입문했다. 1914년 1월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돼 평양지방법원 영변지청 판사에 입명됐다. 그는 1919년 3ㆍ1운동 관련 사건을 잘 처리하였다고 상여금을 받았다. 1920년대와 그가 변호사로 개업하는 1937년까지 한국독립운동과 관련된 크고 작은 재판을 맡아 조선총독부로부터 훈장 서보장, 대례기념장을 받을 정도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김한필 사건, 흥업단 군자금 사건 등이 그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해방 후 그는 미군정청 경성공소원 수석판사에 임명됐다.
■ 역사는 민족의 혼이다
오늘날 한국의 여러 텔레비전에서는 역사를 주제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역사는 미래를 밝혀줄 과거의 이야기이자 현재를 바라보는 거울이다. 해방 이후 한국사학계의 거두 이병도는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했으며 1915년 일본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 문과를 수료했고 사학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지냈으며 1925년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에 임명됐다.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사학을 집대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그는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이마니시(今西)와 함께 조선사 제1편 신라통일 이전 등의 편찬을 담당했다. 이후 청구학회 위원,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전국 유림단체를 연합해 총후봉공(銃後奉公)을 위한 정신운동에 나서도록 촉구했던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에 선임됐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했다. 그는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역사학계의 권력으로 행세했다.
■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친일파의 흔적들
조선 헌종 때인 1844년 태어나서 1930년대까지 호의호식했던 수원 출신 김종한은 천수를 누리면서 조국을 배반한 고위공무원의 전형이었다. 그가 남긴 오염된 유산은 나 자신을 위해서는 공동체의 안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시그널이었다.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한 해방공간의 현재성이 오늘날 친일파 개념 규정에 어려움을 낳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조국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 자신들을 희생할 때 친일파들은 비겁한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한국근현대사를 오염시켜 왔다. 역사의 뼈아픈 반성과 성찰이 보다 나은 미래를 밝혀 줄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후이다.
윤형중 신부 재조명 작업을 추진 중인 함세웅 신부는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윤 신부님의 신앙과 가치관을 되새기면서 스스로를 성찰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준헌 기자
한국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인 함세웅 신부(78)가 해방 전후 한국 언론·출판계 선구자인 윤형중(마태오) 신부(1903~1979)의 삶과 사상·활동상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와 가톨릭교회사를 보다 온전히 복원하는 일로 가톨릭계 안팎에서 주목받는다.
윤 신부는 1930년 사제서품 이후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독재정권 아래에서의 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천주교 사제로서, 한 지식인으로서 치열하게 살아낸 선각자다. ‘가톨릭계의 지성’이자 대표적 논객으로 불린 그는 가톨릭교회와 더불어 정치·사회·문화적으로도 큰 족적을 남겼다.
윤 신부는 일제강점기 당시 종교·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한글보급운동·한국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가톨릭 청년’ 창간(1933)을 주도했고, 한국 최고의 정기간행물로 지금도 발간 중인 ‘경향잡지’를 이끌었다. 또 1946년 경향신문 창간 주역으로 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승만 자유당 정부 시절 글을 통해 정부의 실정과 부조리를 비판한 그는 1970년대엔 유신독재에 항거하며 결성된 ‘민주회복국민회의’(1974) 상임대표위원을 맡는 등 민주화운동에도 나섰다. 신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 ‘가톨릭 대변자’이자 호교론자로 잡지 ‘사상계’를 통해 함석헌 등 당대 지성들과 치열한 논쟁도 펼쳤다. 새남터·절두산성지 기초작업, 순교자 유물확보 등 순교자 현양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윤 신부, 1930년 사제서품 후
일제 아래서도 한글 보급
독재엔 항거·민주화운동
신앙·삶·가치관에 담긴 뜻
이 시대 언론·종교 성찰 필요
유품·기리는 글 모아 추모집
10월 중순 ‘서예전’ 준비 중
함세웅 신부를 지난달 22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재조명 작업의 의미와 활동, 한국 언론·종교의 바람직한 역할 등을 듣기 위해서다.
– 윤형중 신부 재조명 작업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최근 그분의 유품과 각계 분들의 기리는 글, 저의 서예작품을 엮은 문집 <암흑속의 횃불-참스승 윤형중 신부 추모집>을 펴냈다. 코로나19로 유동적이긴 한데 10월2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예전도 연다. 추모집에는 윤공희 대주교,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총원장 양기희 수녀,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김영식 신부를 비롯해 서울대 양승규 명예교수 등의 글이 실렸다.”
윤공희 대주교는 추모집에서 윤 신부를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 사제로서 출판과 언론, 지성인 강좌와 신앙교육, 순교자 현양에 몸 바친 선구자”라며 “인권과 평등·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세상 한복판 현장에 뛰어든, 한국천주교회와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이라고 밝혔다.
– 윤 신부 재조명 작업이 갖는 의미는.
“윤 신부는 사제이자 지성인으로 가톨릭과 사회적 언론·출판 활동, 선구적인 순교자 현양, 불의에 맞선 민주화운동 등 교회사적·민족사적으로 큰 활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을 가능케 한 그의 신앙과 철학, 가치관을 되새기고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관계의 기초인 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지켜내는 신의를 순교자들에게서 찾았다. 사실 신앙선조들이 박해받은 것은 만민평등사상, 즉 하느님 아래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믿음, 신의, 가치관 때문이다. 순교자들이 지켰던 이 평등의 마음, 불변의 가치 수호를 위한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이 가치는 사회적 불의에 맞서고, 독재정권 아래에서 교회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던 힘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원조 격이다.”
– 특별히 기억에 남은 윤 신부와의 인연은.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당시 각계 분들을 모셨는데, 1956~1957년 ‘사상계’를 통한 뜨거운 지면논쟁으로 유명한 윤 신부와 함석헌 두 분도 처음 만났다. 두 노인의 만남은 옛 친구, 소년들의 상봉과 같았다. 힘을 모아 독재에 맞서 싸우겠다는 다짐을 하며 소년들같이 순수한 웃음을 나누던 모습이 생생하다. 두 어른의 일치와 연대에서 진실과 용기, 참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아름다움을 확인했다.”
– 이 시대 언론의 역할은.
“언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란 강론을 한 적이 있다. 성경이 하느님 말씀으로 창조의 힘이 있다면 언론은 인간의 언어로 창조의 힘을 드러내야 한다. 요즘 안타깝고 비애감마저 느낄 때가 많다. 공명정대나 진실이 아니라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속이는 일을 하는 경우까지 본다. ‘기레기’란 말까지 나온다. 언론이 출발점, 뿌리를 찾았으면 한다. 기자들 스스로 왜, 어떤 기자가 되려 했는지 순수한 초심을 되새겼으면 한다.”
– 세계적 탈종교화 속에 한국 종교도 신뢰도가 낮아지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했는데, 아편은 독이기도, 또 약이기도 하다. 종교의 근본도 언론의 소명과 다르지 않다. 종교는 사랑과 평화·용서를 통한 통합기능, 개혁과 고발·회개로 불의를 내리치는 채찍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를 받아먹는 데 급급하다. 돔 헬더 카마라 브라질 대주교는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면 성자라고 하는데, 가난을 낳는 구조를 바꾸고자하면 공산주의자로 손가락질한다’는 뜻의 말을 했다. 지도자들부터 가식을 벗고 낮은 데로 내려가야 한다.”
함세웅 신부가 윤형중 신부 추모 서예전에 내놓을 작품 ‘世(세)-골고타 사형터 세 개의 십자가’(71×34㎝). 발문은 함 신부의 서예 스승인 이동천 박사가 썼다. 함세웅 신부 제공
– 서예전 준비는 잘되고 있나.
“열심히 써오고 있다. 50여점을 내건다. 성경과 명구, 부모님 말씀, 제가 하고 싶은 말 등 내용은 다양하다. 윤 신부님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전교(선교)에 도움되느냐’고 했다. 전시회를 망설이다가 그분의 신앙과 삶·가치관을 더 널리 알리는 데 도움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기도 하다.”
함 신부는 원로 사제로서 기도하는 삶을 살면서 민족문제연구소·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 고문 등으로 ‘정중동’ 활동을 하고 있다.
1946년 경향신문 창간 주역·사장 역임…주필 정지용·편집국장 염상섭 당대 문인들 이끌어
최근 함세웅 신부 등을 중심으로 삶과 사상, 활동상의 재조명 작업이 추진되고 있는 윤형중 신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제공
한국 근현대사에서 선각자 면모를 드러낸 윤형중(마태오) 신부(1903~1979)는 1946년 10월6일 창간호를 낸 ‘경향신문’ 창간의 주역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가톨릭계에서는 일제가 강제 폐간시킨 가톨릭 매체 ‘경향잡지’ 등의 복간을 검토하면서 종합일간지 창간을 논의했다. 정론지 창간이라는 대의에 당시 양기섭·이완성 신부와 윤 신부 등이 적극 나섰다. 결정권자인 경성교구장(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주교는 신중했다. 이에 양 신부는 “수단(사제복)을 벗어버리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밝혔고, 윤 신부는 노 주교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마침내 경향신문은 노기남 주교가 초대 회장을, 양 신부가 사장을, 윤 신부가 부사장을 맡으며 출범했다. 초대 주필은 시인 정지용, 편집국장은 소설가 염상섭으로 당대 문인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는 당시 언론·출판의 선구자인 윤 신부와의 인연이 작용했다.
해방 후 정치사회적 혼돈 속에 경향신문은 불편부당한 정론지를 표방했다. 창간 당시 3만부이던 발행부수는 1년 뒤엔 6만부를 넘어섰다. 윤 신부는 창간 이듬해 신문 운영을 둘러싼 노 주교와의 갈등으로 양 신부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사장대리를 맡았다. 윤 신부는 이승만 자유당 정부를 비판하는 논설을 둘러싸고 노 주교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이듬해에 물러났다.
이승만 정부는 결국 경향신문을 탄압했다. 인기 칼럼으로 지금도 게재되고 있는 ‘여적’ 내용을 문제 삼아 편집국장 등의 연행을 거쳐 1959년 4월30일 결국 폐간시켰다. 해방 이후 최대 언론 탄압 사건이다. 이듬해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 성명이 나오면서 법원의 복간 결정이 내려졌다.
윤 신부와 경향신문의 인연은 그가 3대 사장으로 취임(1961년 3월)하며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 가톨릭계의 재정난 등으로 1962년 1월 윤 신부는 사임하고, 가톨릭과 경향신문은 이듬해 5월 완전 분리된다.
최근 발간된 윤 신부 추모문집 <암흑 속의 횃불>에서 김석종 경향신문 사장은 기고문을 통해 “윤 신부가 씨를 뿌린 경향신문은 국내 첫 사원주주회사이자 ‘독립언론’으로서 불편부당 정론지의 길을 가고 있다”고 밝혔다.
친일 작가가 그린 춘향 영정이 봉안된 지 60년 만에 철거됐습니다. 이달 초순까지만 해도 철거를 미루기로 하면서 남원시 안팎은 소란스러웠는데요. 광한루원 곳곳에 철거를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현수막이 내걸렸고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가 잇따랐습니다. 철거냐 아니냐를 두고 오락가락하던 남원시는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당연한 시대적 과업의 첫걸음을 내딛으면서도 끝까지 숨기기에 급급한 모습이었습니다.
■ 천재 어진화사에서 친일 부역자로..’이당 김은호’
반세기 넘게 광한루원 춘향 사당에 봉안돼 있던 춘향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지난 1961년 그린 작품입니다. 원본은 남원 향토박물관에 보관되어있고, 복사본을 춘향 사당에 걸어두었는데요.
이당 김은호는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그린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사로 잘 알려졌습니다. 조선 말부터 근현대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왔습니다.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면서 잠시 독립운동을 했던 적도 있지만, 이내 변절했습니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옹호하고 전쟁 물자를 대기 위한 그림을 그려 총독부에 헌납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한 사실이 드러났는데요. 지난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가운데 미술분야에 이름을 올렸고, 지난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밝힌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에도 포함됐습니다.
■ 남원시, 8월 철거 돌연 연기..의회 때문?
춘향 영정교체를 주도하고 있는 남원정신연구원 강경식 대표는 지난 7월까지만 해도 남원시가 이당 김은호가 그린 춘향 영정을 철거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고 증언하는데요. 하지만 철거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급기야 철거 시점을 시민 여론조사를 거친 뒤로 미루겠다는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남원시가 의회에 업무보고를 했더니 더 다양한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본 뒤 결정하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남원지역 시민사회단체는 더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미 지난 2005년, 이들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춘향 영정 철거를 주도했지만, 남원시가 반대 여론이 적지 않다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흐지부지된 뼈아픈 경험을 했기 때문인데요.
남원지역 시민사회단체 요구로 지난 9월 7일, 남원시, 남원시의회 3자가 모인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남원시의회는 남원시의회의 어떤 의원도 현재 춘향 영정 철거 반대하지 않았다며,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의견을 집행부에 전달했을 뿐이라고 장황한 해명만 늘어놓았습니다. 남원시의회 반대로 친일화가 춘향 영정 철거가 무산된 것처럼 비쳤다며 남원시장에 대한 불쾌감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간담회에 참석한 일부 남원시의원들과 춘향문화선양회 인사는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이 모두 옳은 것도 아니고, 남원 시민 전체의 의견도 아니라며, 여론 조사 이후로 철거를 연기하자는 뜻을 고수했습니다.
남원시는 춘향 영정을 철거한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낸 적이 없다며 의원님 눈치 보기에 급급했습니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간담회는 서로의 입장 차만 확인하고 마무리됐는데요. 간담회를 지켜보면서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 이렇게 한 걸음 떼기가 어려운 일이었다는 생각에 답답함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 007작전하듯 철거..그들은 왜 숨기려 했나?
춘향제 개막일이던 지난 9월 10일 오후 늦게, 남원시는 친일 청산을 위해 이당 김은호의 춘향 영정을 9월 안에 철거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춘향 영정을 새로 봉안하도록 하겠다는 한 장짜리 보도자료를 출입기자들에게 보내왔는데요.
9월도 막바지에 이르는데 철거 소식이 들리지 않아 남원시에 문의해봤습니다. 담당자는 아직 철거일을 잡지 못했다는 답만 반복했습니다. 취재를 가려고 하니 철거일이 정해지면 알려달라는 요청에 “저희는 (춘향 영정이) 철거되는 모습이 보도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답을 하던 담당 직원.
뭘 숨기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유를 물으니 동문서답만 이어졌습니다. 이당 김은호의 춘향 영정을 내리는 모습을 반드시 보도해야겠다는 의지는 더 강해졌는데요. 물어물어 확인해보니 철거일은 바로 이튿날이었습니다. 철거 시간도 미정, 알려주겠다던 직원은 철거 20분 전에 통보…. 우여곡절 끝에 친일화가 김은호의 춘향 영정이 철거되는 순간을 영상에 담긴 했지만 지금도 언론을 대하는 공직자답지 못한 남원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 60년 동안 친일 잔재 방치…뉘우침 없어
이당 김은호의 춘향 영정 철거엔 고작 10분 남짓 걸렸습니다. 숱한 논란을 생각하면 허무할 정도였는데요.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업에 동참한다면서도 독립을 위해 순국한 선열의 숭고한 뜻을 되새겨 보는 시간도, 후손된 입장에서 친일부역행위자의 잔재를 서둘러 지워내지 못한 통렬한 반성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광복 75주년인 올해,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친일 흔적을 지우는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춘향 영정을 교체하는 작업도 그 하나였을 텐데요. 봉안된 지 햇수로는 60년, 지역 내에서 철거 논의가 시작된 지 15년 만에야 친일 화가의 춘향 영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림 한 폭 내리는 일이 왜 그리 더디고 힘들기만 했을까요? 제때 청산하지 못한 친일 잔재는 아직도 세월의 무관심과 친일파 후손들의 방해, 관광자원으로 쓰려는 지자체의 꼼수 속에 부끄러운 낯을 당당하게 들고 숨 쉬고 있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는 친일 잔재 청산에 좌고우면하는 지자체는 나오지 않길 바랍니다.
앞서 여주시는 기존 ‘여주의 노래’ 작곡가 김동진의 친일인명사전 등재로 인해 작년 2월 말부터 노래 사용을 중단하고 시가(市歌) 개정사업을 추진해왔다.
새로 개정된 여주시가(市歌)는 지난 3월 발표한 전국민 가사 공모전 최우수작 ‘꿈꾸는 여주'(김응혜 작사)에 ‘이등병의 편지’를 작곡한 가수 김현성씨가 곡을 붙였다. 가수겸 작곡가인 김현성씨는 처가의 고향인 여주시 흥천면에 20년 전에 정착해 음악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달 11일 제48회 여주시의회 임시회에서 ‘여주시 상징물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 조례안’이 최종 의결돼 지난 달 23일 제8회 여주시민의 날 시상식에서 새로운 여주시 시가(市歌) ‘꿈꾸는 여주’가 처음 선을 보였다.
임영석 시민소통담당관은 “새로운 시가(市歌)는 시민 누구나 쉽고 즐겁게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서 “앞으로 ‘꿈꾸는 여주’가 여주시민의 화합과 단결의 상징이 될 수 있는 노래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꿈꾸는 여주’는 여주시청 홈페이지(https://www.yeoju.go.kr) 여주시 소개 코너에서 악보와 음원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또 여주시 공식 유튜브에도 관련 동영상들이 소개돼있다.
1954년 설립돼 학술발전에 공적이 있는 인문·사회·과학 학자가 회원이 되는 대한민국학술원 역대 회원 15명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7일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학술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 등 역대 회원 중 15명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있다.
자료에 따르면 친일 행적 논란이 있는 회원 15명은 김 전 총장을 비롯해 백낙준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 유진오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 이병도, 고승제, 고황경, 김동화, 김두헌, 김준보, 남흥우, 박일경, 신기석, 신석호, 이인기, 이항녕이다. 이 가운데 고승제, 김두헌, 신기석, 신석호, 유진오, 이병도 6명은 초대 멤버다.
학술원 회원이 되면 임기가 평생 보장되며 매달 180만원 회원 수당을 받고, 회의참석·학술연구지원비를 받는다. 박 의원은 “사실상 (권위 있는) 학술원이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로 시작된 것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또 2004년 학술원에서 간행한 역대 회원 행적 내용을 통해 이들의 친일 행위를 옹호하거나 은폐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 전 총장의 경우 대표적인 여성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꼽히지만 친일행적을 마음대로 폄론해선 안 된다며 옹호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유 전 총장 역시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까지 친일 행적이 있지만 해당 내용을 간행본에 기술하지 않았다.
학술원 친일논란 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 출신이 회원 145명 중 114명을 차지하면서 ‘그들만의 리그’라는 지적도 나온다. 자료에 따르면 서울대 출신 회원은 78.6%이며, 연세대 출신 7명(4.8%), 고려대 출신 3명(2.1%), 기타 대학(14.5%)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최근 5년 간 가입회원 26명 중 20명도 서울대 출신이 차지한 것으로 확인됐다.
박 의원은 회원 선출 방식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학술원 회원 선출은 기존 회원이 후보자를 추천하고, 분과회의 심사와 총회 승인을 거쳐 최종 뽑는다. 서울대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박 의원은 “회원 선출 심사를 담당하는 분과회도 서울대 출신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며 “비정상적인 회원 선출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간사가 법률안 제안설명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서울 소공동 한국은행 옛 본점 건물 머릿돌에 11일 일제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친필로 알려진 ‘정초’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문화재청이 일제의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친필로 알려진 한국은행 옛 본점(현 화폐박물관) 머릿돌의 글씨체 고증에 착수하기로 했다. 111년간 한국은행 문턱을 지켜온 머릿돌이 이토의 글씨로 최종 결론날 경우 이를 ‘식민지 잔재’로 여겨 철거할 것인지, 아니면 안내문 설치 등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작업에 들어갈지 관심이 쏠린다.
문화재청은 11일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의 ‘한국은행 정초석 고증을 언제 마칠 것인가’라는 질의에 “오는 26일 확인감사 전까지 서체 전문가 등의 현지 조사를 실시하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909년 설립된 서울 소공동 한국은행 옛 본점의 머릿돌은 사적 제280호로 지정돼 있다. 해당 글씨가 이토 것이 맞다고 결론이 나고 한국은행도 철거를 원할 경우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철거 여부를 확정짓게 된다. 한국은행은 “(문화재의) 현상변경을 요청할 여건이 마련되면 (철거 신청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머릿돌의 ‘이토 히로부미 친필 논란’이 불거진 것은 2016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잡지에서 해당 사실이 공개되면서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도 다수 제시된 상태다. 1918년 조선은행이 발간한 잡지에는 머릿돌 사진과 함께 ‘이토 공작 글씨가 새겨진 주춧돌’이라는 설명이 실려 있다. 서울시도 앞서 ‘일제강점기 침탈 기록 조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로 확인됐다”고 결론냈다. 머릿돌 앞에 이 같은 사실을 적시한 안내문을 설치해 역사적 사실을 명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으나, 문화재청과 서울시, 한국은행 3자 간 협의가 지연되면서 결국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이후 ‘식민지 잔재’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자 문화재청이 4년 만에 “필적 확인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문화재청이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일본 현지에 남아 있는 손글씨 원본과 대조하는 작업을 거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 중앙도서관에는 ‘명치 42년(1909년) 7월11일 공작 이등박문 정초’라는 휘호가 보존돼 있다. 문화재청은 “정초석 제작 시 붓글씨를 돌에 옮겨 새기기 때문에 완벽한 획 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전 의원실에 “머릿돌을 남겨두어 그러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반면 전 의원은 “아픈 역사도 보존해야 한다지만 친일의 잔재는 철저히 구분지어야 한다. 문화재청은 정초석을 철거해 민족적 자긍심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경제 이현주 기자] 교표, 동상, 교가 등 전국 학교 곳곳에 일제강점기 식민 잔재가 남아 있지만 이에 대한 조사 및 연구는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15일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전국 교육청으로부터 제출 받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학교 내 일제강점기 식민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교육청이 주관해 조사를 완료한 지역은 광주·전남 두 곳에 불과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서울 소재 학교 내 친일잔재 전수조사를 통해 결과를 발표했음에도 조사나 청산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부산·대구·세종·강원·충북·경북·경남 교육청 역시 식민잔재 청산을 위한 사업이 전무했다.
인천·대전·울산·경기·충남·전북·제주 7개 교육청은 교육 현장 속 일제 잔재 실태 파악 및 청산 관련 조사나 토론회를 현재 진행 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울산교육청은 지난해에 시작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욱일기를 연상시키는 학교 상징물에 대해 검토한 결과 65건은 변경, 13건은 현행 유지, 4건은 장기 검토 등 조치를 하고 후속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조사가 완료된 광주시교육청과 전남교육청은 결과 보고서를 발간해 상징물 등 교체하는 데 예산을 지원 중이다.
정 의원은 “학교에 남아있는 친일 행적 상징물과 시설 등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조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예산을 학교에 지원하고, 교육공동체 협의를 통해 75년이나 묵은 식민주의 잔재를 하루빨리 깨끗이 청산해 주시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강만길연구지원금’은 신진 연구자들이 진보적 학술성과를 심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2008년 제정되었으며,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개척자 강만길 선생이 사재를 출연해 마련한 ‘강만길연구기금’을 재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수여 대상은 최근 1년간의 국내외 한국근현대사 박사학위 취득자이며 지원액은 2천만 원이다. 그간 12명의 연구자들이 혜택을 받았으며, 대다수가 대학과 학술기관으로 진출하여 활발한 연구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강만길 선생은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고쳐 쓴 한국근대사> <고쳐 쓴 한국현대사> <한국민족운동사론> <분단고통과 통일전망의 역사> 등 수많은 연구업적을 냈으며, 분단극복과 평화통일을 화두로 현실참여에 앞장서왔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재임 때인 1980년 군부세력에 의해 4년간 해직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며, 상지대 총장을 역임한 뒤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과거사 청산에도 크게 기여했다.
▲ “강만길연구지원금” 행사안내 ⓒ 민족문제연구소
올해 ‘강만길연구지원금’ 심사 대상에는 2018년 8월과 2019년 2월 2기에 걸쳐 통과된 박사학위 논문 개항기 6편, 일제강점기 10편, 현대사 5편 등 총 21편이 올라왔다. 3월 14일 열린 예비심사위원회에서 이 중 3편을 선정하여 본심에 회부하였으며, 4월 23일 열린 본심 결과 2018년 8월 경희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전후 북한의 사회주의 이행과 자력갱생 경제의 형성’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조수룡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제13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령자로 최종 확정됐다.
심사위원회(위원장 지수걸 공주대 교수)는 조수룡 박사의 논문을 선정한 이유를 정치사, 경제사, 국제관계사를 넘나들며 1950년대 북한의 전후복구 및 사회주의 이행 전략이 ‘자력갱생’ 경제로 귀결되는 과정을 밝혀내어 북한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러시아의 방대한 북소관계 자료를 전면적으로 분석하여 북한 사회의 내적 발전과정을 객관화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정치체제의 변화과정을 설명한 대목은 이 논문의 장점을 가장 잘 보여준 지점이라고 평가했다.
수여식은 10월 16일 오후 7시 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한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리며, 코로나19-감염증 사태를 고려해 약식으로 진행한다. 당일 행사는 온라인으로 실시간 생중계(https://youtu.be/Hich1p0rU64)된다.
[고성=뉴스핌] 이순철 기자 = 강원 고성군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고 군이 후원하는 한반도 평화 및 남북대화 진전 염원을 담은 백두대간 사진전을 통일전망타워에서 19일부터 내달 2일까지 15일간 개최한다고 20일 밝혔다.
강원 고성군에서 개최하는 일맥상통 백두대간 사진전 안내 포스터.[사진=고성군]2020.10.20 [email protected]
이번 전시회는 작가 로저 앨런 셰퍼드가 지난 2011년과 2012년에 북한지역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촬영한 북측 백두대간 풍광 사진 50여 점이 전시된다.
로저 앨런 셰펴드는 2007년부터 2017년까지 남북의 백두대간을 종주한 최초의 외국인으로 현재 한국에서 외국인 방문객 한국 가이드 회사 운영, 북한 관련 책자 출판 및 사진 전시회 등을 통하여 남북 문화 교류에 힘써 온 인물이다.
고성군 관계자는 “이번 사진전은 백두산 천지와 삼지연에서 개마고원을 거쳐 태백준령을 지나 지리산 자락에 이르기까지 백두대간의 비경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드문 기회” 라며 “지역주민과 군을 찾는 관광객에게 통일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남북관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유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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