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찬 전시 내용 가득…찾는 일본인은 아직 많지 않아 日관람객 “3·1운동에 한국인 프라이드 대단하다 느껴”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많은 일본인은 3·1 독립운동은커녕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과거의 사실을 아는 것에서부터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얘기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일제의 식민지배에 평화적으로 저항한 한국인들의 독립만세 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일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도쿄(東京).
도쿄에서도 중심가인 신주쿠구(區) 오쿠보의 한국광장 빌딩 7층에는 일본인 시민운동가들이 운영하는 ‘고려(高麗ㆍ일본발음 고라이)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국광장 빌딩 7층의 고려박물관에서 일본인들이 주관하는 ‘3ㆍ1독립운동 100년을 생각하는 기획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전시장 모습.
이곳에서 3·1 독립운동 100년을 생각하는 전시회가 지난 6일 시작됐다.
오는 6월 23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회는 아직은 일본인들의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발걸음은 간간이 이어지고 있다.
고려박물관은 일본 시민들만의 힘으로 2001년 12월 만들어진 한국 역사 박물관이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정확히 배워 알리고자 하는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회비를 모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일본 전국에서 700여 명이 연회비로 5천엔(약 5만원)씩을 내고 있다.
한국의 역사를 소개하는 상설 전시 외에 수시로 기획전을 열고 있는데, 3·1절 100주년을 앞두고 기획전시회를 시작했다.
기획전은 자원봉사 활동가 80여 명이 7~8명씩 한 조를 이루어 매번 한국 역사에 연관된 주제로 마련하는데, 이번 3·1절 기획전은 구상 단계부터 따지면 8명이 매달려 1년 6개월 정도 준비했다고 한다.
▲ 고려박물관에서 이사 겸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하라다 교코 씨가 전시물을 설명하고 있다.
작년 6월에는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박물관 회원 6명을 포함한 14명이 3박 4일 일정으로 직접 한국을 찾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시작으로 천안 유관순기념관, 아우내 장터, 독립기념관, 제암리순국박물관, 서대문형무소 등 3.1운동 관련 자료를 모을 수 있는 곳곳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이렇게 모은 자료를 연구하고 분석해 총 24장의 패널로 3·1운동 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정리한 전시물을 내놓았다.
작년까지 고려박물관 이사장을 지낸 뒤 지금은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하라다 교코(77) 이사는 7일 “모든 멤버들이 함께 공부하고 배우면서 전시 패널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봉사자들이 꾸민 전시회라고 했지만 내용은 전문가들의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알찼다.
3·1운동 이전의 한일 관계 역사를 먼저 소개한 뒤 3·1 운동 전개 과정, 종교의 역할, 여성의 참가, 제암리 학살사건, 3·1운동 당시의 신문보도와 일본인의 관점, 3·1운동 이후 100년에 걸친 격동의 한국사를 핵심을 빠뜨리지 않고 자료사진까지 곁들여 명료하게 설명했다.
3·1 운동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24장의 패널을 훑어가면 한국인들이 가혹한 탄압을 받으면서 왜 평화적인 만세 운동에 나섰는지, 일제의 당시 대응은 어땠는지, 한국 식민지화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엇갈린 시각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또 전시장 한 가운데에는 3·1운동 관련 기술이 거의 돼 있지 않는 일본 역사교과서 여러 종을 펴놓았다. 일본인들이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있지 못하며 앞으로 배워 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 고려박물관 전시장에 펼쳐 놓은 일본 역사교과서. 한국인들의 비폭력 독립운동인 3·1 운동이 제대로 기록돼 있지 않다는 것이 하라다 이사의 설명이다.
중학교 교사 출신인 하라다 이사는 “3·1 독립운동 정신에는 동양평화 사상이 깃들어 있다”면서 “우리 일본인들이 많이 와서 배우고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시회 시작 이틀째인 7일까지 이곳을 찾은 일본인은 10명이 채 안 된다고 했다.
하라다 이사는 “일본 언론이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보도를 해줘야 하는데 몇몇 매체가 문의만 하고 아직 오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날 전시회를 찾은 다마키 시노(56·고교 영어교사) 씨는 “한국에 여러 차례 갔는데, 서대문형무소역사관도 둘러본 적이 있다”며 “3·1독립운동에 대한 한국인들의 프라이드(자긍심)가 대단하다고 느꼈다”며 방한 때의 인상을 전했다.
다마키 씨와 3·1운동 기획전을 함께 관람한 니와 쇼코(57·고교 일본어 교사) 씨는 “두 나라 국민은 물론이고 국가 간에도 사이 좋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00~19:30)
■ 방송일 : 2021년 2월 17일 (수요일)
■ 대담 : 함세웅 신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정면승부] 함세웅 “개성공단 재개 강력히 주장하면 미국도 이끌려올 것”
– 백기완 선생, 무종교인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종교적 가치를 지닌 분
– 개성공단, 겨레가 뜻을 모아 실천한다면 미국도 이끌려 올 것
– 사회 혐오 갈등, 언론이 편가르기 자제하고 각성해야
◇ 이동형 앵커(이하 이동형)> 매주 수요일, 원로의 혜안을 통해 정치사회 이슈를 바라봅니다. 오늘은 항일독립선양단체연합회장과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계신 함세웅 신부 전화로 연결합니다. 신부님, 나와계십니까?
◆ 함세웅 신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하 함세웅)> 네. 안녕하세요?
◇ 이동형> 먼저 지난 월요일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통일운동가와 사회운동가로 평생을 헌신하셨던 백기완 선생이 향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는데요. 오늘 문재인 대통령이 빈소를 찾아 조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인과 신부님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 함세웅> 네. 1974년 긴급조치 1호, 2호, 3호서 박정희 유신독재 때. 백기완 선생님하고 장준하 선생님이 처음에 구속되셨잖아요. 100만인 서명운동 하시느라고. 그러면서 그해 4월에 민주항쟁 사건 나고. 또 7월에 지학순 주교님이 구속돼셨어요. 저희들 우리 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면서 이분들의 석방운동을 위해서 저희들이 명동과 각 성당에 모여서 기도를 하고. 또 가족들과 함께 구명운동을 했었는데. 그걸 계기로 백선생님을 옥중에 계실 때 저희들이 만나보게 된거죠. 그 다음에 석방되셨잖아요? 그래서 석방되신 다음에 먼 발치에서 뵀다가 저희들 사제들 모임에도 함께 오시고. 또 격려해주시고. 또 감사의 뜻도 표현해주시고 그러시면서 함께 저희들이 백선생님 모시면서 민주화와 인권. 남북의 평화공정을 위해서 노력했었어요. 대단하신 분이죠. 저희들 많은 격려도 받고 가르침도 받고. 선생님은 종교를 갖고계시지 않으셨는데. 가톨릭을 많이 비판하셨어요. 그래도 저희들이 민족과 함께 하는 인권운동에 대해서 늘 격려해주셨던 마음 한결같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 이동형> 그때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만들어진겁니까?
◆ 함세웅> 네.
◇ 이동형> 안타깝게도 오늘 또 정경모 선생 별세 소식이 들려가지고.
◆ 함세웅> 네. 저도 아침에 보고 하루종일 기도했어요. 백선생님과 정경모 선생님 두분을 기억하면서 정경모 선생님은 제가 또 동경에 갔을 때. 직접 가서 찾아 뵙고. 저희들이 또 모시면서 감사의 뜻도 표현해드렸어요. 97년에서 2000년 사이에. 꼭 한번 조국에 오시기를 바라셨는데 여의치 않아서 늘 저희들이 정경모 선생님과 부인과 아드님. 또 자녀들게 역사적 빚을 진 것이 되겠죠.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저희들 모두를 위한. 민족을 위한 전달자되시리라 확신하면서 기도 올립니다.
◇ 이동형> 말씀하신 것처럼 정경모 선생도 끝내는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눈을 감으셨는데. 이렇게 민주화 운동 하셨던 분들. 또 통일운동의 별들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 둘 사라져가는 모습 보면 신부님 같은 동지로서. 또 존경하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굉장히 아프시겠어요?
◆ 함세웅> 네. 후배로서 마음이 아픈데. 우리 선배 세대들의 아름다운 삶과 노력. 저희들이 본받으면서 더 열심히 해야되겠다. 생각이 되고. 저도 언젠가 세상을 떠날텐데. 동지들과 후배들이 그 뜻을 이어서 간다면. 물론 선배들 가시고 저희들이 가지만, 그 뜻은 아름답게 후손들에게 전달되야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고 살아갑니다.
◇ 이동형> 백기완 선생이 이야기했던 노나메기 세상이란게 무엇인가요?
◆ 함세웅> 아주 아름다운 삶인데. 함께 일하고. 함께 잘살고. 또 올바로 잘사는 세상을 이룩하자. 라는 말씀인데.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성경 말씀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사실 백기완 선생님은 무종교인이라고 본인이 말씀하셨는데. 이런 기성종교에 속하지 않으셨지만, 백선생님의 마음속에, 양심 안에 아름다운 인간성이 있어요. 그 인간성이 종교의 뿌리와 씨앗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백선생님이 주창하셨던 이러한 내용이나. 사셨던 삶이 가장 아름다운 종교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 가르침. 노나메기는 바로 성서의 핵심입니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우리 겨레가 같이 나누는 삶을 살면 좋겠어요.
◇ 이동형> 네. 알겠습니다. 백기완, 정경모 선생의 그런 뜻을 계속해서 기리도록 하고요. 다른 주제 여쭤보겠습니다. 지난 9일 개성공단 재개선언 범국민연대회의 출범식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함신부님도 상임대표로 참석을 하셨습니다. 개성공단이 재개해야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 함세웅> 개성공단은 남북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나라. 미국, UN등에서 동의하고 지지한 결과였어요. 따라서 어느 한 정치인, 한 정치집단의 판단으로 문을 닫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하고 큰 내용을 한사람에 의해서. 또는 한 정치집단에 의해서 문 닫아진게 매우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죠.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가 즉시 재개해야된다고 생각하면서 이 일을 함께 추진했습니다.
◇ 이동형>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개성공단 재가동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컸었는데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거든요. 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세요?
◆ 함세웅> 그게 참 안타까운데. 문재인 대통령 개인의 뜻은 아무리 고귀하다 하더라도. 또 주변분들과 함께. 또 가장 문제는 미국이 동의해줘야 되는데. 미국의 동의받기가 쉽지 않았던거 같아요. 미국의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저희 겨레가 힘을 모아서. 뜻을 모아서 강력하게 주장하고 실천한다면. 미국도 국제적인 힘에 의해서 또 우리 염원에 의해서 동의하지 않을까. 이끌려 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입니다. 사실 개성공단은 우리들의 권리이자 의무이거든요. 이미 문 닫은건 한 정치인에 의해서 결정이 된건데. 우리가 지금 열면 되는데. 문재인 대통령의 결단. 이게 개인적으로는 아쉽습니다. 그냥 열면 되는 거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기도하고 뜻을 모으고 있습니다.
◇ 이동형>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개성공단에 있는 우리측 자산이 훼손되거나 고장날 가능성도 있고. 또 우리 입주한 기업들의 손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꾸 쌓이는거 아니겠습니까?
◆ 함세웅> 그렇죠.
◇ 이동형> 알겠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고요. 여야로 정치권은 나뉘어서 계속해서 대립하고 있고. 서로 혐오와 갈등과 분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회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어떤게 있겠습니까?
◆ 함세웅> 오늘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재의 수요일이라고. 이마에 죄를 받으면서 회개를 다짐하면서 부활을 향한 첫날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각자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가르침. 내가 잘할 때 나에게 뿐 아니라 우리 가정과 부모님께 연관이 되잖아요. 내가 잘못하면 결국 부모님께 욕이 되는 건데. 정치인들 각자 이 부분을 생각해주시면서 내가 정치를 잘하고. 또 좋은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바로 아름다운 효도고. 또 나라를 위한 공동선을 위한 봉사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되는데. 조금 말씀이나 행동이 너무 어떤 때는 험해요. 이런 것들은 결국 자신의 인격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부모의 인격도 훼손하고. 가정의 인격도 훼손한다는 점을 생각해주시면서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책임있는 정치인의 언행을 하셨으면 좋겠다. 정치인으로서 첫발을 시작하셨을 때 각자의 꿈이 있었을 거예요. 그 꿈을 아름답게 잘 실천해주기 바라면서. 정말 우리 겨레 모두에게. 또 인민 모두에게 큰 희망을 주는 언행을 하셨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호소합니다.
◇ 이동형> 네.
◆ 함세웅> 그리고 이 기회에 언론도 서로 싸우면서. 독자들을 편을 갈라서 자극하는 기사를 싣고있는데. 언론이면서 자제해야될뿐만 아니라. 기사내용이나 정치인들이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한국사회 미래가 참 암담해보이는데. 우리 각자에게 언론인 개개인은 물론, 각자에게 희망을 주는. 또 아름다운 삶을 주는 그러한 식의 기사를 만들어내고 이끌었으면 좋겠다는 말씀. 언론의 각성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 이동형> 정치권과 언론의 각성을 요구하셨고. 70년대 신부님이 민주화운동 하셨을때는 독재정권 하에 있었으니까. 당시에 재야인사들. 야당인사들 시민단체, 종교인사들이 합심해서 독재정권과 싸웠단 말입니다? 근데 그때와 지금과 과연 뭐가 달라졌을까?
◆ 함세웅> 제 생각에는 그 시대에는 조금 단순화된 사회같아요. 박정희의 독재정권은 불의하다는 것을 온 겨레가 전부 다 아셨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민주주의. 인권을 실현하자는데 모두 다 공감하셨어요. 그리고 우리가 지적하는 대척점이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87년. 이른바 부분적이긴 합니다만 6월 항쟁 이후에 민주화가 실현되면서 사회가 다원화가 됐어요. 그래서 시민단체들도 많이 파생되었고. 주장도 여러갈래가 있고. 또 우리들의 의견이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는데. 이 다양하게 표출되는 의견을 공동선. 나만 좋지 말고 함께 좋아하는 공동선의 가치를 확인해야되는데. 시민단체나 주장하는 각 영역에서 공동선의 가치. 공유의 가치를 조금은 놓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아쉬움이 있는데. 저는 함께 이익이 되는. 함께 보탬이 되는. 함께 좋은 그러한 공동선. 커먼굿. 이것의 가치를 우리가 늘 놓치면 안되겠다. 특별히 일제때 나라를 빼앗겼을 때 목숨 바치면서 헌신하셨던 순국선열들의 마음. 또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하셨던 그분들의 마음. 또 평화공존을 위해서 애쓰셨던 마음. 이런 내용들을 함께 늘 되새겨서 상생의 아름다운 문화를 일으키면 참 좋을거 같아요.
▲ 전 세계와 함께 개성공단 재개를 선언한다! 왼쪽부터 김진향 개성공업지구 지원재단 이사장,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오른쪽 정기섭 개성기업협회 위원장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민승준
개성공단 재개와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개성공단 중단 5년 온라인 국제대화’가 18일 오전 10시 국내외 전문가의 마음을 모아 개최됐다.
이는 개성공업지구 지원재단(www.kidmac.or.kr)이 마련한 행사로, 코로나 상황을 고려해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인 줌(Zoom), 유튜브 주권방송 등 온라인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기조발언을 통해 “개성공단이 재개되면 전 세계와 함께 국제화함으로써 한반도 경제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통일부 장관을 맡았던 2002~2004년 개성공단에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어록비를 약무개성 시무국가(若無開城, 是無國家) 바꾸어 개성공단 준비 사무실에 액자로 둔 것을 이야기 하였다.
이는 국보 제76호 이순신장군 서간첩에 있는 이순신 장군 어록비 중 호남을 개성으로 바꾸어 해석하면 ‘개성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정 전 장관은 “개성공단 재개’ 남북평화의 복원’을 위해 이순신 장군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며 “개성에서 남과 북이 함께 땀 흘려 마음을 모았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기억할 만한 사실이고, 앞으로 개성공단 재개를 못하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며, 북측과 가까운 동남아 국가들은 물론 전 세계의 경제공동체 개성을 국제적으로 연결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기조발언을 하고 있다. 전 세계와 함께 개성공단 재개를 선언한다! ⓒ 민승준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은 “이제는 다 죽어가는 개성기업들이 개성공단 재개의 희망을 포기하기 전에 정부의 개성공단재개 의지를 확인해달라고 호소한다”라며 “국민들의 다수 여론뿐 아니라 전 세계가 개성공단 재개로 마음이 모아지면 우리 정부도 보다 적극적으로 미국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고 호소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자 개성공단재개선언 범국민연대회의 상임대표인 함세웅 신부는 연대사를 통해 “개성공단은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와 공존, 번영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남북8천만 겨레에게 심어줄 것”이라면서 “민족의 미래와 이익을 위해, 개성 도라산을 넘나드는 동포들의 선의와 사랑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땅 우리 손으로 개성공단을 열 수 있도록 기도한다”고 밝혔다.
▲ 개성공단 재개를 선언한다! 오른쪽 민승준 개성관광 재개운동본부 위원장, 왼쪽 함세웅 신부 개성공단재개선언 범국민연대회의 상임대표가 개성공단 재개선언장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간 로비에서 개성공단 재개선언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1.2.18 ⓒ 민승준
2부에서는 40여개국 해외전문가와 시민이 온라인 줌으로 연결되었다. 개성공단 재개를 바라는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남측 북측 해외동포들이 “비록 북측코리아는 미국과 전쟁 중이지만 남북간은 판문점 군사합의를 통해 전쟁을 멈추었다”라며 “관계의 특수성, 개성공단의 의미, 개성에서 남북의 결정에 대한 존중을 이끌어 내기 위해 민간 외교적 노력을 기꺼이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남북 동포가 거주국에서 서로 소통하고 화합하는 긍정적인 코리안 커뮤니티를 만들어 국제사회에서 평화를 위한 개성공단 재개 목소리를 끝까지 지치지 않고 외친다면 개성의 문은 활짝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개성공단 재개를 공약으로 내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개성공단에는 봄이 오는 듯했다. 나아가 정부는 종전선언과 다름없는 판문점 4.27 선언과 9.19 평양 선언을 통해 개성공단 재개를 약속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 제1조 제3항은 “남과 북은 당국 간 협의를 긴밀히 하고 민간교류와 협력을 원만히 보장하기 위하여 쌍방 당국자가 상주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성지역에 설치하기로 하였다”이다. 2018년 4.27판문점선언이 실행되면서 개성공단 내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2018년 9월 14일 문을 열고, 김정은 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조건 없는 개성공단 및 금강산 관광 재개 의지를 밝혔다.
대사관에 준하는 개성연락사무소를 개성공단내에 세우고 남북은 한반도 전쟁을 멈추고 경제, 문화, 사회, 교류 재개를 위해 회담을 열었다. 그러나 결국 문재인 정부에서도 개성공단은 열리지 않았다. 북미관계가 걸림돌이었다. 트럼프행정부는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걸어서 북측에 방문하며 여러 퍼포먼스를 펼치며 우발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 되었으나 싱가포르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회담이 합의서도 채택하지 못한 채 무산되자 개성공단 재개도 희망 고문으로 끝이 났다.
거기다 문재인 정부의 남북 합의 불이행과 전쟁을 부추기는 남측의 극우, 탈북단체 들의 전단 살포 등에 불만을 품은 북측은 2020년 6월 16일 14시 49분, 6.15선언과 4.27판문점선언과 비슷한 숫자를 맞추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말았다.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은 개회사를 통해 “남북의 평화와 번영 국민행복으로 가는 한반도 평화 길의 상징, 개성공단이 중단 5년을 맞아 다시 재개가 되길 바란다”며 개성공단에서 남북의 노동자들이 매일 매일 기적을 만들어 낸 과정들을 소개하며 “그 평화의 감동을 남북 동포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고 밝혔다.
▲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의 시금석 개성공단의 가치 김진향 개성공업지구 지원재단 이사장이 전 세계와 개성공단 재개를 선언한다! 온라인 국제대화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민승준
현재 한반도의 큰 과제라고 한다면 아마도 한반도 평화정착과 경제, 문화 교류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개성공단 재개부터 선언하고 문화, 관광 분야에서 교류가 재개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개성공단이 그동안 굴곡은 있었지만, 한반도 평화의 시금석으로 여러 가지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앞으로는 중단 없이 성공적으로 운영되길 간절히 기원해본다.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의 유지와 반민특위의 정신을 이어받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월 27일(일제침략이 시작된 강화도조약 체결일)로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그간 연구소는 숱한 고난과 역경을 뚫고 역동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짧지 않은 세월인 만큼 괄목할만한 성과도 거두었지만 역량이 따라주지 않아 미처 주목하지 못한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았다.
자화자찬이 될까 조심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지난 30년간 연구소가 이루어낸 주요성과들을 정리해본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업적은 물론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다. 연구소 창립부터 치면 18년, 편찬위원회가 발족한 뒤로도 8년의 시간과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전3권 2,882쪽 4,389명의 친일파를 수록한 대사전이 빛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성원과 헌신이 있었다. 대학교수 1만2천여 명의 편찬 지지선언, 단 11일만에 5억의 성금을 모아주고 후원회원으로 가입한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시민들, 진보언론의 대대적인 보도, 아무런 대가 없이 작업에 참여한 편찬위원들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바친 상근자들. 그야말로 전 국민적 여망과 시대정신이 만들어 낸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기적의 산물이었다. 오랜 기간 소송과 협박에 시달렸으나 『친일인명사전』은 이제 정부기관과 사법부까지 잣대로 삼는 역사의 이정표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많은 어려움을 딛고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 그해 11월8일 국민보고대회를 열었다. 강윤중 기자 @ 경향신문 2020.11.24
2008년 집권한 이명박 정권은 실용주의를 택할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과 달리 철저하게 퇴행의 길을 걸으며 극우세력과 손을 잡았다. 정권인수위원회의 일성이 과거사청산 중단이었던 데서 드러나듯,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고스란히 수용해 정책에 반영하였다. 뉴라이트가 활개치고 공영방송까지 나팔수가 되어 역사왜곡을 본격화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학계와 교육계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를 조직하고 사무국을 맡아 이에 대응하였다. ‘근현대사 진실 찾기’ 역사다큐 시리즈 제작도 관제언론의 이승만 박정희 미화 등 역사변조에 대한 대응이었다. 700만 여명이 관람한 〈백년전쟁〉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를 둘러싸고 최근까지도 소송이 진행되었으나 모두 연구소의 승소로 끝이 났다. 뒤이은 박근혜 정권 아래서는 아예 역사말살이 벌어졌다. 수준이하의 교학사 판 한국사 교과서 검정 통과와 국정제 기도가 그것이다. 연구소는 역사정의실천연대를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로 확대 개편하고 다시 사무국을 맡아 ‘역사쿠데타’를 저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완승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연구소의 지부들은 지역의 저지운동에서 선봉 역할을 기꺼이 떠맡았다. 박근혜의 아버지에 대한 빗나간 ‘효도’는 결국 촛불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의 종말을 앞당기는 단서의 하나가 되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이어 연구소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한 과제는 시민역사관 건립이었다. 사전만으로는 올바른 역사인식을 널리 확산시킬 수 없다는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연구소는 오랜 기간 축적된 10만 여점의 문헌과 실물 등 희귀자료를 소장하고 있었다. 구입한 것도 많지만 다수는 강제동원피해자들과 연구소 회원들이 흔쾌히 기증해 준 소중한 자료들이었다. 2011년 건립위원회가 발족하였고 8년의 노력 끝에 2018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라는 명칭으로 개관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도 시민과 회원들이 17억 원의 성금으로 역사정의 실현의 길에 힘을 보탰다. 일본의 시민사회와 진보 학계는 ‘일본과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잇는 모임’을 결성하고 1억여 원의 성금과 방대한 자료를 기증하였으며, 개관 이후에도 연대와 후원을 지속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차별성 있는 상설전시와 참신한 기획전시, 알찬 시민강좌로 단기간에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으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2015년부터는 서울시 강북구의 위탁으로 독립정신과 민주주의의 성지 수유리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근현대사기념관도 개관 운영 중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3·1혁명, 사월혁명으로 이어지는 100년간에 걸친 연면한 투쟁의 역사를 담은 기념관은 이제 강북구를 넘어 전국적인 명소로 성가를 드높이고 있다.
친일문제, 일제하강제동원,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 등 과거사진상규명이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데는 연구소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진상규명이 학문적 전문적 영역이었다면 이에 기초한 입법과 청산 운동은 실천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박정희기념관반대운동, 친일문인기념문학상 등 친일파 기념사업 철폐운동, 강제동원 소송지원, 야스쿠니신사 조선인 합사 철폐운동, 전범기업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반대운동, 민간인학살희생자 유해발굴 등 지속적인 시민운동의 전개는 전 국민적 관심과 여론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일부 분야의 특별법 제정이라는 최종의 성과로 이어졌다.
민간과 별개로 국가의 과거청산은 당연한 책무의 이행이라는 점에서 ‘나라다운 나라’의 선결 과제임에 틀림없다. 너무도 늦은 감이 있고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여러 과거사 관련 특별법의 제정과 정부 위원회의 발족은 거대한 역사의 진전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최근에는 과거사 청산이 전문분야와 지방자치단체, 교육현장 등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어 미래세대를 생각하면 더더욱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독립운동의 위상 복원에도 앞장섰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최대의 독립군 양성 기지로 그 교관과 생도들이 봉오동·청산리 전투 등 초기 독립전쟁의 주력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의열단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를 배출한 무장항일투쟁의 금자탑이었다. 그럼에도 사실상 잊혀진 독립운동이었던 신흥무관학교의 활약을 되살리기 위해 설립 100주년을 맞은 2011년 기념사업회 발족을 주도하였으며 사무국을 맡아 신흥무관학교가 남긴 불멸의 공적을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3·1운동은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역사적 함의는 훨씬 크다. 우리 민족사에 비로소 민주공화정을 대세로 확립시켰으며, 여성과 천민들이 대거 변혁운동의 주역으로 현실참여에 나섰다. 나아가 전면적인 항일무장투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지역과 종교, 신분과 계급, 좌우의 이념을 뛰어넘어 민족협동전선의 시원을 이루었다. 연구소는 3·1운동 95주년이던 2014년 3·1혁명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사무국을 맡았으며 〈제국에서 민국으로〉 심포지엄을 시작으로 정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학술연구와 실천운동을 병행하는 특유의 도전을 계속해 왔다. 민주화운동 시기 많은 연구단체들이 같은 지향을 가지고 활동했지만 오늘날 성공적으로 이를 체화시킨 단체는 드문 형편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사회참여에 못지않게 학술부문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전시 교육 등 무수한 일상적인 사업부문은 논외로 하더라도, 『일제하전시체제기정책자료총서』 전 98권과 『일제협력단체사전』 『식민통치기구사전』 『재일조선인단체사전(근간)』 등 사전류, 『친일파 99인』 『청산하지 못한 역사』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거리에서 국정교과서를 묻다』 등 대중서 발간 등 의미 있는 결실들을 거둬왔다. 논문집 등 연구서 발간이 저조하지만 이는 남들이 회피하는 ‘공장’을 돌리고 있는 연구소의 불가피한 현실에서 기인하는 바, 실정을 헤아려 주길 바랄 뿐이다.
지난 30년간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일을 해왔다. 그래서 어떤 분은 ‘모든 문제 연구소’라고 애정 어린 지적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연구소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다른 단체에서 주목하지 않은 일들을 주로 감당하는 편이었다. 앞으로도 역사와 현실이 우리를 불러내면 기꺼이 궂은일도 떠맡을 작정이다.
1991년 2월 27일, 소장 사무국장 연구원 둘 총원 네명으로 11평 좁은 방에서 첫발을 내디뎠던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제 상근자만 40명(근현대사기념관 파견 6명 포함)인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갖가지 탄압과 협박, 각종의 음해와 비방에 시달려 온 것도 사실이다. 이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고 오늘에 이른 데에는 무엇보다 회원들(현재 1만2천여 명)의 한결같은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 학계와 시민사회에도 갚을 수 없는 많은 빚을 졌다. 성심을 담아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역사와 사회 정의 실현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이에 보답하고자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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