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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지명 사용하는 전주 ‘동산동’, 전범기업 창업주 호 딴 지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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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지명 사용하는 전주 ‘동산동’, 전범기업 창업주 호 딴 지명도…

익명 (미확인) | 화, 2019/02/12- 13:16

일제 지명 결정판 군산…도시 곳곳 수탈의 역사 담긴 지명 수두룩  

전국 지명의 30퍼센트 일제식 추정 
미쓰비시 창업주 호 딴 전주 동산동 본래 쪽구름, 조각구름이란 우리말 이름 가진 곳 
군산 서수면, 푸른 이삭이 넘실 거리는 땅이라는 일제식 지명 
지자체 의지만 있다면 곧바로 지명 개정 가능…의지의 문제


■ 방송 : 전북CBS 라디오 <사람과 사람> FM 103.7 (17:05~18:00)

■ 진행 : 박민 참여미디어연구소장
■ 대담 :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김재호 소장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인데요. 아직 우리 사회 곳곳에는 일제가 남긴 잔재가 사회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지명인데요. 자세한 내용,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김재호 소장과 짚어보죠. 소장님 어서 오세요.

◆ 김재호> 네, 반갑습니다.

◇ 박민> 3.1절 100주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도 하고요. 역사운동을 하는 분으로서 소감이 더욱 남다를 것 같아요?

◆ 김재호> 네, 남다르기는 한데요. 현재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가 100년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다 보니 일제 잔재나 3.1정신을 그동안 역사 속에서 제대로 조명해냈는가 하는 부분은 의문입니다. 요즘 많이 부각되는 것이 3.1운동이 운동이냐 혁명이냐인데요. 논란이 되겠지만 우리가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고요. 3.1운동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좀 더 살펴보면요. 1908년, 1909년으로 넘어가면서 호남 지방 의병들이 초토화 됩니다. 그리고 경술국치가 이뤄지고요. 이후 거의 10여 년에 걸쳐 무단통치가 행해집니다. 무단통치라는 것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부분들에 저항해서 민족적인 거사로써 일어난 것이 3.1운동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고요. 3.1운동은 이후 우리 독립운동의 방향, 항일무장투쟁이나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 등에 교훈을 남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박민> 우리 민족 독립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인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나란히 100주년을 맞는 시점인데요. 중요한 것은 아직 일제의 잔재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깊숙이 남아있죠. 대표적인 사례가 지명인 것 같아요?

◆ 김재호> 한글학자 배우리 씨에 의하면 우리나라 지명의 약 30퍼센트가 아직도 일제 지명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 박민> 우리 지역에도 있죠. 대표적으로 꼽는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김재호> 우리 지역에도 굉장히 많습니다. 전주 동산동이 대표적이죠.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투하한 두 번째 핵무기가 나가사키에 떨어집니다. 나가사키 조선소에는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돼 가있었단 말이죠. 거기가 초토화되면서 조선인들이 대량 학살됩니다.

◇ 박민> 혹시 미쓰비시 중공업 말씀하시는 건가요?

◆ 김재호> 미쓰비시 그룹은 일본의 군국주의 기업 중에서 가장 최상위층에 있는 그룹이죠. 그런데 미쓰비시 그룹이 한국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서 동산농사주식회사를 차립니다. 수원에 조선지점을 두고 전국에 여러 지점을 둡니다. 전주에 동산농사주식회사의 전주지점이 있었고요. 동산농사의 동산을 따서 동산동이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동산은 미쓰비시 창업주인 이와사키 야타로의 호입니다. 그러니까 창업주의 호를 따서 지은 지명이 동산동이라는 거죠. 원래 이 지역은 편운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말로는 조각구름이나 쪽구름이라는 뜻입니다. 예쁘죠. 그런데 동산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안 바뀌고 3.1운동 100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는 거예요. 큰 문제죠. 그렇다면 동산농사주식회사가 한국에 와서 얼마나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가도 봐야 해요. 여의도의 24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땅이죠. 상상이 가지는 않죠. 전국적으로 2100만여 평 정도 되니까요. 그런데 그들의 호를 딴 동산이라는 지명을 아직도 안 바꾸고 있다는 겁니다.

◇ 박민> 그렇다면 동산농사주식회사의 땅이 전국적으로 흩어져있을 텐데 전주만 지명이 남아있는 건가요. 아니면 다른 지역에도 이 지명이 남아 있습니까?

◆ 김재호> 이 부분은 전수조사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전국적으로 동산동이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서 보여요. 그런데 아직은 그 부분이 저희 같은 시민사회단체가 전수조사 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거든요. 추정은 하고 있지만 정확한 사실관계가 필요합니다.

◇ 박민> 그런데 전주 동산동은 분명하다는 말씀이죠?

◆ 김재호> 네 맞습니다.

◇ 박민> 이거는 어떻게 확인하신 거예요?

◆ 김재호> 이 부분은 실제 많은 기록들에서 나오고요.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안이 분명해 보입니다. 지명이 바뀐 시기도 일제강점기 때 바뀌었고요.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쭉 유지돼 왔습니다. 문제는 그겁니다. 자치단체나 시의회가 여기에 대해서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면 힘듭니다. 동산동의 유례가 어떻게 전해져 오는 것인지 주민들에게 명확하게 설명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설명 절차가 부실합니다. 주민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크게 필요성을 못 느끼고요. 이 문제가 피부로 와닿지 않는데 바꾸려고 하겠어요? 그리고 지명을 개명하는 문제에서 행정적인 절차가 쌓이잖아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공무원들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잠깐 개정 논의를 하다가 결국 무산됐고 계속 동산동이라는 지명을 쓰고 있는 겁니다.

◇ 박민> 그런데 최근에 또다시 논의가 되고 있다고요?

◆ 김재호> 아무래도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저희 단체, 시민단체들이 지명을 바꿔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최근 들어서 김승수 전주시장도 절박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개정과 관련한 절차를 밟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박민> 전주시의 상황을 짚어봤습니다만 일제 잔재하면 군산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여기도 일본식 지명이 많이 남아있죠?

◆ 김재호> 그렇습니다. 군산은 거의 일본식 지명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 전죽마을, 중야마을, 팔목마을 이런 데는 대부분 일본인 지주나 아니면 측량기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어요. 일본이 식민 통치 편의를 위해서 숫자로 이름을 붙인 마을이 아직도 남아있거든요. 해2마을, 해7마을, 해8마을 이런 식으로도 남아있고요. 군산이 동이 59개인데 쌀 ‘미’자가 들어간 동이 아직도 다섯 개가 남아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군산 식민통치 중심부라고 할 수 있었던 지역인 금광동, 영동, 중동, 영화동 이런 곳들도 모두 일본식 지명입니다. 그런데 군산시는 이런 문제에는 소홀하고요. 오히려 식민 거리를 재현하는 일에는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 박민> 개정 움직임은 없나요?

◆ 김재호> 제가 보기에는 서수면을 제외하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수면도 지금 행정 차원에서 논의가 되는 것은 아니고 주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주민들 사이에서 서수면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 박민> 서수가 어떤 의미이기에 그렇습니까?

◆ 김재호> 서수는 한두 군데 있는 지명이 아니에요. 서수는 대만에도 있고 사할린에도 있고요. 일본에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서수는 신칸센에도 있고 일본 여자 이름에도 서수가 쓰입니다. 푸른 이삭이 넘실거리는 땅이라는 게 서수의 뜻입니다. 자신들이 식민통치하는 국가의 이상향을 지명에 심어놓은 거예요. 침략과 약탈을 본질로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는 그게 이상향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지배를 당한 입장에서는 지옥인 거죠. 여기 같은 경우에는 가와사키라는 농장주가 서수라는 지명을 지었다고 해요.

◇ 박민> 지명을 바꿀 때 절차가 까다롭거나 복잡한 부분이 있습니까. 아니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까?

◆ 김재호> 도로명 주소를 변경하거나 동과 면을 변경할 때 차이가 있어요. 행정동이나 동명 개정은 지방자치법 4조에 분명히 명시돼 있어요.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바꿀 수 있어요. 물론 주민공청회나 설명회는 필요합니다만, 지방자치단체와 시의회가 마음만 먹으면 사실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거죠. 도로명 주소는 주민들의 동의 절차가 필요해요. 복잡하긴 하지만요.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의지가 문제라는 겁니다.

◇ 박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우리 생활 곳곳에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지명을 중심으로 살펴봤는데요.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김재호 소장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재호> 네, 고맙습니다.

<2019-02-12> 노컷뉴스 

☞기사원문: 일제 지명 사용하는 전주 ‘동산동’, 전범기업 창업주 호 딴 지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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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깊숙이 뿌리박힌 ‘일제 그림자’ 이젠 걷어내자
상명하복·서열주의 등 일본제국주의 관행 영향
일제강점기 역사관 ‘식민사관’ 대표적 무형잔재
항일지사들 국학연구 병행해 식민사관과 싸워

올림픽을 앞둔 일본이 독도문제로 우리를 또 도발하였다. 일본은 우리의 반발을 알면서도 계획적으로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지도상에 표시해 놓은 것이다. 일본의 의도는 명백히 자국내의 혐한 분위기 조성과 극우파들을 준동시켜 이미 실패한 올림픽을 면피하려는 속셈이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분노를 삭일 수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도발하는 일본에 대한 응징의 소리는 온 국민을 일치단결시키는데 왜 그럴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의사 출신의 지식인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백인보다 더 백인인 척하고자 노력했던 흑인의 허위의식을 비판하였다. 그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식민지배를 경험한 자들의 폭력 사용과 함께 문화적 지배를 폭로하여 자아를 회복하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이 일본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은 자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에게는 청산해야 할 친일잔재가 너무도 많이 남아있다.

■무형의 친일잔재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에 의하면 친일잔재는 ‘친일 논리의 영향을 받은 유ㆍ무형의 유산’으로 정의하고 있다. 건축물이나 조형물, 친일파 등과 같은 ‘유형의 친일잔재’와 달리 정신과 의식에 남아있는 ‘무형의 친일잔재’는 그 범위가 엄청나고 일상생활, 문화 속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하고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무형의 친일잔재는 군국주의로, 때로는 사대주의와 기회주의로 그리고 패배주의 문화로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며 해독을 끼치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형의 친일잔재는 생활문화 속에서 용어로 가장 흔하게 남아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화나 언어 그리고 전문용어들에도 친일잔재는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고 있다. 특히 어린시절부터 익숙한 ‘묵찌빠’, ‘무궁화 꽂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놀이문화 속에 남아있는 왜색은 성인이 된 뒤의 화투 놀이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친일잔재다. 의식과 관행적인 문화 속에도 친일문화는 강하게 남아있다. 흔히 군사문화로 알려진 상명하복의 전통, 기합과 구타 그리고 서열주의 등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대표적인 일본제국주의의 관행으로 학습된 친일잔재다. 또한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국민교육헌장’은 일본의 군국주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교육칙어에서 따온 것으로 오랜 기간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이 암송해야 했다. 아직도 그 흔적은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로 남아있다.

법과 제도 속의 친일잔재는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치안유지법의 이름만 바꾼 국가보안법으로, 그리고 어려운 한자 말투성이인 재판의 판결문도 역시 친일잔재이다. 행정 서식과 지명들 그리고 교육계의 만연한 친일잔재들. 각종 문화예술 분야의 문투나 음계, 화풍 등도 역시 대표적인 무형의 친일잔재들이다. 아직도 친일작가들의 문학상과 친일음악가를 기리는 상장이 버젓이 수여되는 우리 현실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역사관에 관한 논쟁과 교육계의 친일잔재

무형의 친일잔재로 대표적인 것은 일제강점기의 역사관인 식민사관 문제이다. 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의 다툼은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있다.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지만 식민통치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그 입장이 식민지 시절을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연구(식민사관)의 의도를 담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더욱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상존하는 동아시아의 역사전쟁 속에서 역사를 그대로 순수한 학문의 영역으로 국한한다는 것은 순진함을 넘어 아둔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시절의 항일지사들은 대부분 국학연구를 병행해 식민사관과 싸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단재 신채호를 필두로 백암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안재홍 그리고 조소앙까지 모두 한 손에는 일제와 싸우는 총을 들었지만 다른 한 손에는 식민사관과 싸운 펜을 들었다. 정신사마저 빼앗길 수 없다는 그들의 충심을 헤아려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해방 이후 신채호의 역사학을 계승한 학교나 학자가 없었음을 역사학계는 자문해 봐야 한다. 어쩌면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학보다 이병도의 실증주의 역사학이 강하게 지배한다면 이 역시 정신적으로 강하게 남아있는 친일잔재이다.

교육계에 만연한 친일잔재는 그 영향성과 파급성 때문에 무엇보다도 앞장서서 해소해야 할 부분이다.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에 의하면 경기도 내 2천400여 학교 중 친일인물이 작사,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는 89개교로 파악되고 있다. 이흥렬, 김성태, 김동진, 현제명, 백남준, 이광수 등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에 의해 작사 작곡된 교가를 오늘도 미래를 책임질 세대가 무비판적으로 부르고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친일파들이 만든 교가를 부르는 학생들에게 일제강점기의 참상과 독립운동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 밖에도 반장, 부반장이라는 호칭이나 상사가 부하에게 훈시한다는 군사용어인 훈화(訓話) 등도 여전히 아무런 생각없이 사용되는 무형의 친일잔재이다.

또한 아침 조회는 일제강점기 당시 궁성요배(宮城遙拜)라고 매일 아침 등교해서 교장부터 전 교생이 모두 일왕이 있는 동경 쪽을 향해 90도 각도로 인사를 한 행위에서 출발했다. 학교행사마다 으레 행하는 차렷이나 경례 등의 용어 역시 일왕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전형적인 군국주의 일제의 잔재이다.

■용어로 남아있는 친일잔재

일상용어에 남아있는 친일잔재 역시 무형의 일제유산이다. 그동안 꾸준히 순화의 과정을 거쳐 많은 일본식 용어가 폐기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용어가 1천171개(국립어학원, 2005년 조사)나 된다고 한다. 특히 음식과 행정분야가 가장 심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우동(가락국수), 다데기(양념장), 덴뿌라(튀김), 오뎅(어묵), 고로케(크로켓), 소보로빵(곰보빵), 돈가스(돼지고기 너비), 모찌(찹쌀떡) 등 음식에는 여전히 순화의 대상이 되는 용어들이 넘친다.

그러나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심각한 영역은 행정용어이다. 지금도 일선 행정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공람(돌려봄)과 결재(재가), 견학(보고 배우기), 감봉(봉급 깎기), 과세(세금), 가건물(임시건물), 나대지(빈 집터), 나염(무늬들임), 납득(이해), 납입(납부), 내역(명세), 가계약(임시계약), 견적서(추산서), 마대(포대 자루), 명찰(이름표) 등 부지기수로 많다. 산업 현장에서의 친일잔재는 용어로 더욱 구체화되어 있다. 특히 건설분야와 인쇄분야가 심한데 모두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공구리(콘크리트), 노가다(공사판 노동자), 가쿠목(각목), 단도리(채비), 찌라시(전단지) 등 한 둘이 아니다.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본어는 거짓말의 비속어인 ‘구라(くら)’였다는 조사가 있다. ‘거짓말하다’ 보다 ‘구라친다’라는 말이 익숙하다면 그만큼 우리는 무형의 친일잔재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순화시켜야 할 언어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왜색 용어를 남발하는 것인지를 반성해야 한다.

무형의 친일잔재 중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역명도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 1914년부터 일제는 전국의 행정구역을 강제로 통ㆍ폐합시켜 오랫동안 생활해 오면서 붙여진 정겨운 지명들을 마음대로 변경해 지역 정체성에 혼동을 주었다. 2020년 경기도 조사에 의하면 도내 398개 읍·면·동에서 약 40%인 160곳이 일제에 의하여 지명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모두 행정편의주의로 지명의 유래나 정체성은 무시되고 일방적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을 하여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공교롭게도 1990년대 신도시 개발할 때의 분당(盆唐), 일산(一山), 평촌(坪村), 산본(山本) 등이 대표적이고 수원의 영동시장의 경우는 원래 성외시장이었던 것이 일제에 의해 영정(榮町)으로 변경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영동(榮洞)이라고 정이 동으로만 바뀐 채 지금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모두 옛 정취를 버린 지명들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치 치하에서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했던 까뮈(Albert Camus)는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라며 식민잔재 청산을 주장했다. 오늘 우리가 친일잔재를 성토하고 청산을 외치는 이유도 명확하다. 더 맑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두운 과거를 그대로 덮어두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형의 친일잔재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청산하기가 쉽지만, 무형의 친일잔재는 독버섯처럼 숨어서 지금도 우리의 의식과 정신을 갉아먹으며 과거 그시절이 좋았다고 세뇌시키고 있다.

한번 훼손된 정신문화의 영역은 치유하고 복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서둘러야 한다. 법과 제도로 고칠 수 있는 분야는 시급히 시행하고, 자각한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서 언행을 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일선 교육계의 선생님들이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모두의 노력은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1-06-10> 경기일보

☞기사원문: [광복 76주년, 우리가 몰랐던 친일 잔재 알리기]무형 친일잔재와 청산, 현황과 과제

※관련기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2005.6.2): “무형으로 의식 지배, 해독주는 것이 일제문화잔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기획연재 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

수, 2021/06/16-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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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양성중학교]

도교육청 주관 탐구활동 목적 진행
‘친일파’ 김성태 곡 “개정해야” 92%
학내공모 실시 3학년생 작품 당선
작곡과정 거쳐 1학기내 완성 예정

▲ 학생들이 학생과 학부모, 교사 등 학교구성원의 ‘교가 개정’의견을 확인하고 있다. /사진제공=양성중학교

안성 양성중학교 학생들이 일제 잔재 청산으로 교가 개정을 추진한다.

학생 등의 교가 개정은 경기도교육청이 주관하는 ‘일제 잔재발굴 탐구활동’ 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양성중학교의 교가는 김성태(1910-2012) 작곡가의 곡으로,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김성태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 음악단체인 경성후생 실내악단 등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학교측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등 교육공동체의 의견을 수렴하고 교가 개정의 필요성을 공감했다. 또 학교 총동문회장의 의견도 들었다. 교가 개정의 필요성에 대해 교육공동체(학생·학부모·교사)와 양성중학교 총동문회장의 의견을 1차로 수렴했다.

나아가 학급자치회와 교육공동체 대토론회에서 ‘교가를 개정해야 한다’는 찬성의견 92%를 바탕으로 개정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교가 개정 TF팀’을 중심으로 교가 개정을 위한 프로젝트 계획을 수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교가 가사를 공모해 학생들의 정서를 담은 긍정적인 내용,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빛낼 수 있는 내용 등을 학생들이 직접 작사해보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

그 결과 공모전에 참여한 17명의 학생 작품 중 심사를 거쳐 3학년생의 작품을 선정했고, 이를 토대로 작곡 과정을 거쳐 1학기 내로 교가를 완성할 예정이다.

안준기 교장은 “이번 교가 개정 프로젝트는 양성중학교 교육공동체가 다 함께 교가 개정에 참여해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소속감과 애교심을 고취하는 기회가 됐다”면서 “무엇보다도 독립을 향한 애국심이 3.1만세 운동으로 표출되었던 양성지역에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확립함으로써 민주시민으로서의 성장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안성=이명종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16> 인천일보

☞기사원문: 일제 잔재 청산…학생들이 교가 바꾼다

목, 2021/06/1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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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임재성ㅣ변호사·사회학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익히 잘 알고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난 일인데 피해자들이 왜 소송으로 뒷북을 치냐는 입장. 억지 소송을 대법원이 덜컥 받아주어 한-일 관계가 지금 이 모양으로 파탄 났다는 입장. 동의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하나의 의견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을 넘었다. 지난 10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주필 칼럼 얘기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판결 때문에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현 정권은 여기에 ‘사법농단’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 진보든 보수든, 강제동원 문제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 범죄를 옹호할 수는 없다. 삼권분립과 재판의 공정성이라는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를 똥물에 빠뜨린 범죄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는 그걸 했다.

먼저, 사법농단이라 명명되는 사건이 외교부와 대법원 간의 정상적이고 적법한 소통이었나?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싶어 했다.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등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을 위해 청와대 비위를 맞추고자 했지만, 이미 존재하는 대법원 판결을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범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법원행정처는 사인 간 분쟁을 해결하는 민사소송임에도 정부 부처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하고, 그 제도를 이용해 외교부가 강제동원 사건에 의견서를 내면, 이를 계기로 판결을 뒤집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해당 재판부가 아닌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이런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직권남용죄이다. 그리고 해당 소송 일방 당사자인 일본 기업 대리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에게 위 계획, 즉 재판 기밀사항을 누설한다. 명백한 공무상 비밀누설죄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가관이다.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은 김앤장 변호사에게 ‘빨리 프로세스를 시작해야 하니 조속히 의견서를 제출해달라’며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하라 지시한다. 김앤장 변호사는 그 지시에 따라 서면을 작성했고, 임종헌에게 사전검사도 받았다. 임종헌은 제목과 내용을 친절히 수정해서 돌려보내고, 그 서면은 피고 대리인 김앤장 변호사 명의로 재판에 제출되었다. 이후 외교부에서 제출한 의견서 역시 판사들에 의해 사전에 검토·수정된 것이었다. 판사들이 소송의 일방 당사자와 노골적으로 결탁한 희대의 범죄다.

사법농단 관련 판결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까? 위 사실은 대부분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객관적 증거로 확인된 내용이고 널리 보도되었다. 특히 공무상 비밀누설죄 부분이 그러하다. <조선일보> 칼럼이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주요 사실관계들을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생략, 즉 사실 왜곡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칼럼의 진짜 문제는 이 범죄를 찬양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부디 부탁드린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고위 법관들이 소송 일방 당사자를 비밀리에 만나 ‘이런 서면 내라’, ‘이렇게 써라’ 코치하는지 알려달라. “흔히 있다”고 하셨으니 다수의 사례를 꼭 알려주시라. 그래서 조선일보의 입장은 무엇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청와대, 외교부, 법원이 결탁한 범죄라도 가능하다는 것인가?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법농단 행위는 ‘한-일 간 외교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명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 행위 주체들의 셈법은 꽤 천박했다. 법원행정처는 외교부 입장 반영의 대가로 외교부에 ‘법관 재외공관 파견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법관쯤이나 되어서,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큰일을 꾸미면서도, 본인들 외국 나갈 자리를 만드는 것에 집착했다. 사법농단의 맨얼굴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부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할 절차를 사유화한 것에 대한 책임이 고초라면, 왜 이렇게 판결이 늦게 나오냐며 ‘공정한 재판’만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신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이 당한 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2021-06-16> 한겨레

☞기사원문: 범죄를 옹호하는 조선일보

금, 2021/06/1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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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6/24-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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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우 작가는 인도 델리를 여행하다 그곳에서 한국광복군이 영국군과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있었다. 그곳의 사람과 터를 찍었다.

멕시코에서 고국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김익주 선생의 후손 다빗 킴 씨. ⓒ김동우 제공

대부분 사람들은 ‘국외 독립운동’이란 말에서 만주 벌판을 연상한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이나 김원봉의 의열단이 떠오를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컨대 인도나 멕시코 같은 곳에 우리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김동우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기자 출신인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7년 사진 작업을 위해 장기 여행을 계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을 주제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인도 델리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레드포트(Red Fort)에 방문하게 된 그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견한 한국광복군이 이곳에서 영국군과 함께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구한말 한반도와 아무 연관도 없다고 여겼던 장소에서 들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김 작가는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흩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 독립운동사가 미국·멕시코·쿠바 등지에 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 외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다고 할 정도였다.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현지에 정착하게 된 이주자들은 후손을 남겼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사람과 터를 찍었다. 5월18일부터 8월18일까지 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리는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에 전시된 사진들이 그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직접적 계기는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다. 1921년 3월 한인 300여 명이 쿠바로 향했다. 이들이 출발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멕시코다. 김동우 작가는 그래서 “쿠바 이민을 이야기하려면 멕시코 이민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1905년 4월 제물포에서 영국 상선을 타고 멕시코로 간 1033명이 북중미 이민의 시초 격이다. 이역만리로 향한 이들 전부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기근을 피하고 돈을 벌려는 목적이 강했다. 1905년 〈황성신문〉에는 이런 이민 광고가 실렸다.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이민자 대부분은 에네켄(Henequen·용설란의 일종, 일명 애니깽) 농장으로 분산배치돼 노예와 같은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다. 멕시코 이민자 일부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기 위해 향한 곳이 쿠바이다.

‘경제적 이유로 건너간 이민자’와 ‘국외 독립운동가’가 늘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둘 다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혹독한 농장 생활을 견딘 이들이 차츰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쓴 것이다. 독립군 훈련을 위해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번 돈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부치는 이도 있었다.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해외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촬영한 김동우 작가. ⓒ시사IN 조남진

아흔 넘은 안창호 선생의 아들 랄프 안

이민자들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동우 작가는 과거에 나온 언론 인터뷰나 학술자료를 바탕으로 현지 한인회 선교사 등과 접촉했다. 오래된 자료가 대부분이라 허탕 치기 일쑤였다. 국가보훈처에도 문의했으나 ‘개인정보’를 건네는 데에 난색을 표했다. 소재지를 찾아도 문제였다. 한국을 기억하는 이들은 고령이거나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는 후손들은 한국과 유대감이 옅었다. “이민 3세대 이후로는 외양이 변한다. 한식을 먹고 한인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보니 점점 현지인과 동화된다. ‘우리 조상이 코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먼 곳에서 왔다고 하니 취재에 반갑게 응하기는 하는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약하다.” 후손들을 촬영한 뒤 김 작가는 인물만 반투명 처리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존재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김 작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 랄프 안(안필영) 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안창호의 ‘아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부터 놀라웠다. 아흔을 넘긴 랄프 안 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김 작가를 만난 랄프 안 씨는 코리아타운에서 갈비탕을 사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안창호)가 독립운동에 앞장서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는 게 김동우 작가가 전한 랄프 안 씨의 말이다. 의병장 민긍호의 직계자손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났다. 이들의 존재가 알려진 건 한국과 옛 소련이 수교를 맺은 이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먼 친척들이 자손으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연금을 수령했다. 직계자손들은 훈장만이라도 받기 위해 한국 정부에 훈장 재교부를 신청했지만, 어렵게 재교부된 훈장은 전달식도 없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전달됐다. 김동우 작가는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집집마다 울먹이며 이런 사정을 호소했다.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 사진은 눈길을 끄는 반면, 이번 전시의 풍경 사진은 상대적으로 맥이 빠진다. 거리나 건물을 찍은 사진은 주의 깊게 들여다보더라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구조물, 나무와 풀뿐인 벌판도 마찬가지다. 관람객이 느끼는 헛헛함은 김동우 작가 스스로 느낀 것이며, 작업 과정에서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조상들이 토론하고 서성였던 자리, 건물이 있었던 곳에 막상 가보면 멸실된 게 많았다. 나무로 된 집이 다 헐려서 옥수수밭만 남았다면 옥수수밭을 찍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군사학교가 있던 곳에는 시장이 생겼고, 독립운동가들이 사형당한 곳은 소문에 의지해 추정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김 작가는 “수많은 현장을 찾아다니며 가장 많이 마주한 풍경은 공(空)이었다”라고 했다. 시간의 흐름 때문이지만 적극적으로 보존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새벽. 100년 전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김동우 제공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100년 전과 다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썩고 헐리는 인공물과 달리 자연 풍광은 그대로였다. 김 작가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새벽 5시에 맞춰 셔터를 눌렀다.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쿠바 이민자들이 도착한 마나티 항구의 저녁노을, 연해주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초원도 찍었다. 조상들이 본 광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김동우 작가는 당분간 국외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진 작업에 집중할 예정이다. ‘쿠바 이주 100주년’이라는 전시 주제에 맞지 않아 내놓지 못한 사진도 많다고 했다. 특히 중국 지역 독립운동이 그렇다. 김 작가는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동우 작가는 이 일이 “우연처럼 시작된 운명” 같다고 했다. 그는 씁쓸한 독립운동의 후일담을, 거의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당분간 이어갈 예정이다.

이상원 기자

<2021-06-18> 시사인 호수 717

☞기사원문: 미국·멕시코·쿠바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찍다

수, 2021/07/07-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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