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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治下의 朝鮮 중들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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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治下의 朝鮮 중들에게 묻는다

익명 (미확인) | 금, 2019/02/08- 14:06

問日帝治下朝鮮僧徒

 

邦亡奚削髮(방망해삭발)

利敵後人嘆(이적후인탄)

詰問望成佛(힐문망성불)

狂歌百尺竿(광가백척간)

 

일본 제국 治下의 朝鮮 중들에게 묻는다

 

나라 망했는데 어찌 중이 되었는가

敵 이롭게 했으니 훗사람 탄식한다

따져 묻겠노니 부처 되길 바랐는가

百尺竿頭 올라 미친 노래 불렀구나.

 

<時調로 改譯>

 

어찌 중이 됐는가 利敵行爲 탄식한다

따져서 묻겠노니 부처 되길 바랐는가

높다란 장대에 올라 狂歌를 불렀구나.

 

*僧徒:  수행하는  승려의  무리.  치도(緇徒)ㆍ치려(緇侶)ㆍ치류(緇流)  *削髮:  출가

(出家)하여  승려가  됨을 이르는  말 *利敵: 적을 이롭게 함 *後人: 훗사람 *詰問:

트집을 잡아 따져 물음 *狂歌: 곡조나 가사와 상관없이 마구 소리쳐 부르는 노래.

 

<2019.2.8, 이우식 지음>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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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0]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 3월 5일 서울 시위를 주도한 강기덕과 학생지도부

조한성 선임연구원

학생대표 강기덕과 김원벽, 3월 5일 인력거를 타고 만세 시위를 지휘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19년 1월의 어느 날 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관수동에 있는 중국요리집 대관원에 모였다.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인 박희도가 주선한 모임이었다. 청년회 회원을 모집하는 데 전문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이 자리에는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김형기, 경성전수학교의 윤자영,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주종의 등 전문학교 학생들과 보성법률상업학교 졸업생인 주익, 연희전문학교 출신의 배화여학교 교사 윤화정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날 모임에서 시국에 관한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고 하니 이때야말로 조선이 독립을 할 적기가 아닌가. 평화의 정착을 위해 민족자결주의가 주창되었다고 하니 약소국도 독립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생긴 것이 아닌가. 당장 독립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과 좀 더 사태를 관망해야 한다는 의견이 격렬히 이어졌다.
결론이 나진 않았다. 모임의 본래 목적이 여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희도는 그동안 전문학교 학생들이 서로 소원하여 만나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가자고 덕담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이날의 모임은 모두의 가슴에 묵직한 돌덩어리를 남겼다.
며칠 후 강기덕이 김원벽을 찾아왔다. 김형기도 왔다. 그들은 함께 독립운동을 하자고 했다. 다수의 학생들이 뜻을 모으고 있으니 함께 하자고 했다. 결국 김원벽은 그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제2회, 제3회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2월 20일 승동교회에 각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이 모였다.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 한위건, 경성공업전문학교 김대우와 경성전수학교의 전성득, 윤자영,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김문진, 이용설 등이었다. 전문학교 학생들은 이삼일 전인 2월 17~18일에 각 전문학교별로 학생대표를 선정했다. 동지가 될 수 있을지 신원과 인격을 조사하고, 괜찮다싶으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여 본인이 승낙하면 대표자로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2월 20일 전문학교 학생들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추진하고 있는 독립운동에 최대한 협조하되, 그것으로 운동을 끝내지 말고 학생들이 주도하는 운동을 계속해서 벌여나가기로 결정했다.
“독립운동은 한번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제1회에 선언서를 발표한 사람이 체포되면 제2회, 제3회, 계속하여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전문학교 학생들은 이러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책임자를 1선 간부와 2선 간부로 나누었다. 1선 간부는 학생들이 주도한 제2차 독립운동을 책임지도록 하고, 2선 간부는 그 이후에 있을 3차 독립운동을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천도교와 기독교가 주도하는 제1차 독립운동에는 전문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최소화하는 대신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기로 했다. 학생들은 독립운동을 결의하는 순간부터 독자적인 운동을 꿈꿨다. 종교인들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에 협력하기는 하되, 그 운동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운동을 벌일 생각이었다. 학생들이 주익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따로 준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학생들, 독자적 독립선언서 발표를 포기하다

“학생들이 독자적인 독립선언의 발표를 중지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질문에 김원벽이 대답했다.
“2월 20일경 선언서를 인쇄하려고 했소. 그런데 박희도가 기독교, 천도교 측에서도 독립운동 계획이 있으므로 하나의 운동에 두 가지 선언서가 있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며 자신들의 계획에 합류해달라고 했소.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고, 선언서는 난로에 넣어 소각해 버렸소.”

학생들과의 논의 창구였던 박희도. 후일 변절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독립선언서는 학생들의 독자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내용적으로 완성시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발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천도교와 기독교 인사들이었다. 그 중심에 강기덕과 김원벽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박희도가 있었다.
박희도는 학생들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의 포기를 종용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격렬한 논쟁 끝에 학생 측은 선언서의 발표를 포기하는 대신, 3월 1일 이후의 운동은 학생 측이 맡아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양측의 갈등은 완전히 봉합되지 않았다. 종교인들은 학생들의 선언서 발표를 막긴 했지만, 학생들의 독자적인 운동에 대해 깊은 우려가 있었고, 학생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종교인들에게 불만이 있었다. 양측의 갈등은 결국 사달을 내고 말았다. 2월 28일 밤,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명월관지점(태화관)으로 변경한 것이다.

독립선언 장소가 탑공공원에서 명월관지점으로 변경된 이유

2월 28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변경할 때 이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박희도였다. 학생들이 탑골공원에 모이면 어떤 일을 할지 모르므로 잘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문제제기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민족대표들 사이에 확산되었고, 독립선언 장소는 순식간에 명월관지점으로 변경되고 말았다.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대관원에서 박희도와의 만남을 계기로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후 민족대표는 박희도를 통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독립운동으로 학생들의 행동을 제어하고자 했다. 문제는 그러한 의도가 생각보다 잘 먹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종교계의 독립운동에 거리를 두고 있었고, 끝까지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유지하고 했다. 2월 28일에 있었던 박희도의 발언은 제어되지 않는 학생들의 운동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이었다. 그 불안감이 결국 양측의 불협화음을 야기하고 만 것이다.
3월 1일 오전 10시경, 보안 유지를 위해 하루 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강기덕의 병실 문을 급히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대표 김문진이었다. 그는 울상이 된 얼굴로 독립선언 발표 장소가 변경된 소식을 알렸다. 강기덕은 김문진, 한국태와 함께 명월관 지점으로 달려갔다.

학생과 대중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강기덕은 손병희와 기타 ‘민족대표’들에게 장소를 변경한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서를 발표하면 경찰이 자신들을 현장에서 체포할 것이고, 학생과 군중들이 그것을 보면 폭동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했다. 폭동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장소를 변경했다는 답변이었다.
강기덕은 납득하지 못했다. 학생과 군중에 대한 저들의 뿌리 깊은 불신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강기덕은 말했다.
“민족대표가 파고다공원에 가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폭동의 원인이 됩니다.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서를 발표한다고 학생과 시민을 모아놓고 갑자기 명월관지점에서 한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파고다공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가 가지 않아서 폭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책임지겠소. 선언서는 여기서 발표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소. 우리는 여기서 발표할 테니 당신은 돌아가는 게 좋겠소.

” 강기덕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때 책임진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예심판사의 질문에 강기덕이 대답했다.
“모르겠소. 난 그때 실례되는 태도를 취하고 말았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나의 팔을 잡고 제지했고, 그곳은 무척이나 혼란해져 버렸소.”
참아야 했지만 강기덕은 참지 못했다. 분노가 그의 이성을 모두 잠식한 것 같았다.
강기덕은 만류하는 사람들에 의해 끌려나오다시피 해서 명월관지점을 나왔다. 몇몇 사람이 따라 나와 차분한 말투로 그를 설득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의 귀에 그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바로 그때 강기덕은 이제 막 명월관지점으로 들어가는 이갑성과 눈이 마주쳤다. 이갑성은 박희도와 함께 학생 측과 긴밀히 의견을 나눴던 기독교 인사다. 그런데 이갑성은 무언가 얘기할 듯하다가 아무 말 없이 문 안으로 사라졌다.
“손병희 등이 파고다공원에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심판사의 질문에 강기덕이 답했다.
“마음에 불평이 있었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시작하겠다

2월 28일 밤 ‘민족대표’가 장소를 변경했을 때, 박희도나 이갑성은 학생지도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대상은 김원벽이었을 수도 있고, 강기덕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강기덕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소식이 그에게까지 닿지 못했거나, 닿았더라도 충분히 납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강기덕과 김문진은 탑골공원의 학생과 시민들에게 ‘민족대표’가 오지 않기로 한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날의 만세시위를 책임지기로 한 학생들에게 ‘민족대표’와 상관없이 집회를 진행하라고 했다. 강기덕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불법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자리를 떠났다. 강기덕은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산공원으로 향했다. 인근에 있는 조선총독부와 경무총감부가 신경이 쓰였지만 그곳만큼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은 없었다. 시위 계획대로 된다면 학생과 군중들은 조선총독부가 있는 혼마치 일대로 오게 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민족이 온 힘을 다해 부르는 만세의 함성이 공원 안까지 들려왔다. 학생과 군중들이 대열을 갖추고 행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휑했던 마음이 어느새 다시 뜨거워졌다. 확실해진 것이 하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싸움이라는 점이었다. 학생들만으로 제2의 독립운동을 하기로 했을 때부터 학생들은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인들의 마음엔 이미 봄이었다

3월 5일 남대문역 앞 도로는 오전 9시가 되기 전부터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3월 5일 학생들이 주도하는 제2차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날 시위에 각자가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나왔다. 구호를 적어 넣은 깃발이 대표적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엔 언제나 그러하듯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새로운 생각이 태어나고 새로운 인식이 자라난다.

대한문 앞 광장 만세시위 광경. 위의 사진에서 뒤로 보이는 건물은 당시 경성일보 겸 매일신보 사옥(지금 서울시청 자리). 미국 컬럼비아대 유니언신학교의 버크도서관 소장.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3월 5일 남대문역 일대를 붉게 물들인 붉은 수건도 그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붉은 수건을 머리띠인양 머리에 두르기도 하고, 완장처럼 팔에 감기도 하고, 손에 들고 흔들기도 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붉은 수건은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불덩어리를 내 친구, 내 이웃에게 전하는 도구였다.
9시가 조금 지난 시각, 군중 속에서 2대의 인력거가 나타났다. 인력거에 탄 청년들의 손에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이 들려 있었다. 강기덕과 김원벽이었다. 군중들은 인력거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다. 만세의 함성이 온 시내를 뒤흔들었다.
‘만세’로 조선인은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독립과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싸웠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아무도 억압 받지 않는 세상, 아무도 차별 받지 않는 세상, 아무도 착취 받지 않는 세상이 그것이었다.
강기덕은 시위를 시작한 지 10분 만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원벽은 좀 더 오래 버텼지만 그 역시 많이 길지는 않았다. 시위의 경험이 부족해 지도자를 보호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 것은 금세 배울 수 있으니까. 그리고 누군가 다음 사람이 그들이 떨어뜨리고 간 깃발을 주워 흔들면 될 테니까 말이다.
봄은 아직이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마음엔 이미 봄이었다.

금, 2019/03/2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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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경향신문사는 해방 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3·1절을 하루 앞둔 1947년 2월 28일자에 3·1운동 특집기사를 내보냈는데 그 중 하나가 김구 선생의 기미년 조선탈출과 관련한 비화다. 당시 43세의 김구 선생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 주변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황해도 안악에서 신의주를 지나 중국 안동현에서 이륭양행의 상선에 승선, 우여곡절 끝에 상해로 탈출하였다. 김구 선생을 취재하여 탈출비화를 소개한 기자가 누군지 기사에 언급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편집부

경향신문 1947년 2월 28일자, <기미년 김구선생 조선탈출비화>

 

비록 어떠한 이유를 내세운다 할지라도 민족의 슬픔을 한 몸에 지니고, 일생동안 조선과 더불어 짓밟히며 지나온 이에 대한 간절한 경애의 정을 차마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기미년 3월 초승 조선 천지가 비통한 민족의 함성으로 뒤덮이었을 때 날카로운 왜정 관헌의 눈을 피하여 조국해방의 크나큰 뜻을 품고 표연히 고국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한 한 사람의 지사가 있었으니 그는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한 김구 선생이었다. 겨레들 사이에 혹시 선생의 이야기를 할 때 선생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의 일은 누구나 흔히 알고 있으되 망명을 하던 때 조선 탈출의 기막힌 고초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때마침 해방 이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기념일을 당하여 선생에게서 직접 들은 바로써 아직 공표되지 않은 한 토막 비화를 감히 세상에 소개한다.

탈출 기회 규시(窺視)

기미년 2월 하순 아직도 남은 추위가 봄바람에 섞여 옷깃으로 스며드는 때에 황해도 신천군 동산리 들판에는 17년 언도를 받은 감옥으로부터 가출옥한 당년 43세의 김구 선생이 수많은 농군들과 섞여 괭이를 들고 논보를 닦으며 온종일 농군들의 일을 지휘하는데 원체 일에만 정성을 바치는 듯한 선생의 태도에 저윽히 안심을 한 모양으로 감시를 하던 경관은 저녁때가 되자 일즉이 읍내로 들어가버렸다.
선생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 자당(慈堂)과 부인과 영식(令息)까지 전부 네 식구가 해주로부터 안악읍으로 이사하여 1년 동안 휴양하다가 농촌운동을 표방하고 동산리에서 다시 농군들과 1년 동안을 지냈으나 사실은 어느 때나 우리를 벗어나려는 범처럼 민족해방의 웅지를 품고 멀리 해외로 탈출하기만을 은근히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시망을 뚫고

그러나 위험인물로 생각하여 한때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삼간초옥(三間草屋)선생의 거처에는 날마다 한 사람의 무장경관이 출장하여 밤낮으로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으며 아무리 기회를 노려도 좀처럼 좋은 기회가 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감시하던 경관이 읍으로 사라지자 처음으로 불의(不意)에 찾아온 이 기회를 타서 선생은 농군들에게 읍내에 잠깐 다녀올 터이니 그동안 일을 하여 놓으라 이르고 마치 참말로 잠깐 나들이라도 가듯이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발에는 짚신을 신은 채 가족의 목 빼인 전송도 받는 둥 마는 둥 총총히 집을 나섰으니 이 길이 바로 30년 동안 고국을 등진 장구한 나그네의 길이었다.

열차 내의 요행

논틀밭틀로 사람을 피하며 밤이 된 후에 사리원읍으로 들어간 선생은 그 고장에 사는 의사 김우범(金禹範) 씨의 호의를 입어 내실에서 조심조심 하룻밤을 지샌 후 밝는 날 새벽차로 신의주로 향하였다.
선생의 품에는 숨은 유지들의 온정으로 얽힌 노자 500원을 수건에 싸서 지니었을 뿐이다. 선생은 3등 차간 한 구석에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데 때마침 3월 초승이라 차가 서는 곳마다 천지를 뒤흔드는 만세소리와 사포끈(?)을 턱에 건 일인 관헌들이 눈이 벌개서 날뛰는 꼴이 차창 밖으로 내다보인다. 차에서 하룻밤을 무사히 지나고 이튿날 아침 신의주역에 내려 만세사건으로 승객들을 이잡듯이 수색하는 경관에게 수건에 싼 돈 500원을 내어놓고 “의주로 재목을 사러왔다”고 감쪽같이 속여 넘긴 후에 아슬아슬하게 경계망을 돌파하여 성내로 들어가니 의주에서는 이미 만세운동을 한바탕 치르고 난 끝이라 주막에서 밥을 사먹으며 듣노라니 간밤에 주모자 22명이 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목적지 상해로

요기를 한 후 선생은 곧 중국사람 인력거를 빌려 타고 안동현으로 건너가서 이곳에서는 당시에 이륭양행(怡隆洋行)을 경영하던 영국 아일랜드 사람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 1880~1943)라는 이의 호의를 입어 그의 집에서 일주일을 묻다가 상해로 가는 그의 상선을 타고 일행 15명이 안동현
을 떠났다. 원래 조지라는 사람은 조선사람에 대하여 뜨거운 동정을 품고 있어서 하나씩 둘씩 왜국 관헌의 눈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오는 조선의 지사들을 무조건 하고 집에 들여 보호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와준 조지 루이스 쇼

 

그때 김구 선생과 함께 상선을 타고 상해로 간 사람들은 선생까지 전부 15명이었으나 지금은 선생의 기억에서 사라진 이가 태반으로 생각나는 사람만 적으면 다음과 같다. 선우혁(鮮于爀) 송병조(宋秉祚) 장덕로(張德櫓) 이원익(李元益) 김병조(金秉祚) 조상섭(趙尙燮)…이 15명 조선의 지사들이 이륭양행 창고로부터 비밀리에 상선에 오를 때 주인 조지 씨는 일일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선장에게는 “이 15명은 조선의 독립투사들이니 각별히 조심하라”고 재삼 부탁하였다.
상선을 타고 고향을 떠난 지 보름 만에 상해 프랑스 조계에 상륙하니 검붉은 황포강 너머로 멀리 고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김구 선생의 눈에는 한순간 감격의 눈물이 어리었다.
그 후로 조지 씨에게는 임시정부로터 감사하는 특별 훈장을 수여하였다.(1963년 한국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편집자)

금, 2019/03/29-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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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신사의 이토 시비 탁본
– 침략 원흉이 남긴 ‘녹천정(綠泉亭)’ 칠언절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통감에서 물러나 추밀원 의장으로 영전한 것은 1909년 6월 14일이었다. 그의 자리는 1907년 10월 이래로 부통감(副統監)으로 있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물려받았다. 통감교체에 따른 사무인계와 고별인사를 위해 일본에 있던 이토가 서울로 들어온 것은 그 다음 달인 7월 5일인데, 며칠 후 덕수궁 함녕전에서는 태황제의 자리로 물러난 고종황제가 베푸는 송별연이 열리게 되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고종황 제가 인(人), 신(新), 춘(春)의 석 자를 운(韻)으로 내려 시를 지어볼 것을 권하자 송별잔치는 느닷없이 시회(詩會)로 바뀌었다. 그 결과 이토와 이완용, 소네 등이 가세하여 다음과 같은 합작시가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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甘雨初來霑萬人 단비가 처음 내려 만 사람을 적셔주니 [이토 히로부미 ; 춘묘(春畝)]
咸寧殿上露華新 함녕전 위에 이슬빛이 새롭구나 [모리 타이라이 ; 괴남(槐南)]
扶桑槿域何論態 부상과 근역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소네 아라스케 ; 서호(西湖)]
兩地一家天下春 두 땅이 한 집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 [이완용 ; 일당(一堂)]

 

위의 구절에 나오는 부상(扶桑, 후소)은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고, 근역(槿域)은 알다시피 한국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겉으로는 한일간 선린우호의 뜻을 내세우고 있는 듯하지만, “두 나라가 하나”라는 구절을 버젓이 읊조린다는 것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토가 한국 땅에서 물러나면서 남긴 시문으로는 이 합작시말고도 제법 유명한 칠언절구(七言絶句)가 하나 더 있었다. 이름 하여 ‘녹천정(綠泉亭)의 자작시’가 그것이었다.

 

南山脚下綠泉亭 남산 발 아래 녹천정에서
三載星霜夢裡經 삼년 세월을 꿈속에 지냈네.
心緖人間隨境變 마음이란 곳에 따라 변하는 것이
別時閑看岫雲靑 때로는 한가롭게 구름도 쳐다보네.
(己酉 七月 十有四日 將辭京城 援筆自題 春畝山人 ; 기유년 7월 14일에 장차 경성을 떠나려 하매 붓을 잡고 스스로 짓다. 춘묘산인)

 

녹천정(綠泉亭)은 본래 철종대에 건립된 정자로 주초만 남아 있었으나, 근처에 통감관저가 들어서면서 이토가 신축하여 휴식공간으로 사용했다. 위의 자작시는 커다란 편액으로 꾸며져 총독관저에 걸려 있었으며, 특히 데라우치 총독은 스스로 이토의 위업을 허물없이 계승하였노라고 하면서 그 유래를 적은 글을 남긴 것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이토의 칠언절구는 일제강점기에 걸쳐 조선에 거주하는 모든 일본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한시가 되었고, 그 결과 1933년 10월에는 신 다츠마(進辰馬)라는 일본인의 헌납으로 경성신사(京城神社)의 구내에 시비가 조성되기에 이른다.
그는 일찍이 청일전쟁 시기에 조선으로 건너와 가메야(龜屋)라는 제법 유명한 수입잡화점을 운영하면서 큰 재력을 쌓은 거류민 유지의 한 사람이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이토 칠언절구 탁본자료는 바로 이 경성신사에 세워놓았던 시비에서 떠낸 것이다. 이 녹천정의 자작시를 보면 이토가 겉으로는 한가한 나날이 이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가 꿈처럼 보낸 3년 세월이란 것은 곧 한국병합으로 귀결되는 국권침탈의 치밀한 행보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이토는 불과 석 달 후에 안중근 의사의 손으로 처단되어 운명을 달리하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죄상과 업보는 여전히 무겁고 또 준엄하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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叱假僧語戱

 

無悲無喜境(무비무희경)

死後始完成(사후시완성)

未免當然事(미면당연사)

欺人罪不輕(기인죄불경)

 

땡추중의 말장난을 꾸짖다

 

슬픔도 없으며 기쁨도 없는 경지

死後에야 비로서 다 이뤄지는 바

아직 면치 못함 마땅한 일이거늘

사람을 속이니 죄가 가볍지 않다.

 

<時調로 改譯>

 

無悲無喜의 경지 死後에 이뤄지는 바

아직 면하지 못함이 마땅한 일이거늘

사람을 속이는 죄가 가볍지 아니하다.

 

*假僧: 가짜 승려. 땡추. 땡추중 *語戱: 말을 재미 삼아 하는 일 *未免: 아직 면치

못함 *當然: 일의 앞뒤 사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그러함 *不輕: 가볍지 아니함.

 

<2018.7.13, 이우식 지음>

금, 2018/07/13-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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制憲節(제헌절)

 

孩童嘲國法(해동조국법)

守此作愚人(수차작우인)

重罪逢輕罰(중죄봉경벌)

行刑遂不均(행형수불균)

 

제헌절에

 

저 어린아이도 나라의 법을 조롱

이를 지키면 어리석은 이가 되네

무거운 죄도 가벼운 벌을 만나니

刑의 집행이 마침내 고르지 않네.

 

<時調로 改譯>

 

아이도 國法 조롱 지키면 바보 된다네

매우 무거운 죄도 가벼운 벌을 만나니

마침내 그 刑의 집행 고르지 아니하네.

 

*孩童: 어린아이 *愚人:  어리석은  사람  *重罪: 무거운  죄. ≒중벽(重辟)  *輕罰:

가벼운 *行刑: 자유형(自由刑)의 집행 방법 사형수의 수용, 노역장 유치,

미결(未決)  수용(收容)  따위의  절차를 통틀어 이르는 말 *不均:  고르지 않음.

 

<2018.7.17, 이우식 지음>

화, 2018/07/1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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