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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개벽학’이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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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개벽학’이 필요한 때

익명 (미확인) | 금, 2019/02/08- 11:41

근대라는 용어에 대하여

설 연휴 잘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번 편지에서도 많은 문제제기를 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쓸 내용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논의의 범위가 방대해서 제 생각을 다 쓸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먼저 저는 ‘한국사상사’라는 제한된 문맥에서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개벽’이라는 자생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근대’라는 번역어를 빌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도 ‘세계 근대’나 ‘동아시아 근대’가 아닌 ‘한국 근대’라고 한 것이고요. 부제를 “개화에서 개벽으로”라고 했던 것은 종래에 개화 중심으로 근대를 생각했던 관점에서 개벽 중심으로 근대를 생각해 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분들과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중국’이나 ‘세계’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근대’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근대의 대상도 사상이나 철학보다는 ‘체제’(관료제)나 ‘시스템’(자본주의)과 같은 제도적 측면에 주목하고 있고요. 반면에 저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한국사상사를 서술하는 범주로서 ‘근대’라는 개념을 빌려오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종래의 실학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학’에 주목하였던 것입니다.

실학담론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실학담론을 주창한 1930년대의 조선학운동가들은 “전통으로부터 근대(=지금과 ‘가까운’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한 사상가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개벽파와 문제의식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고요. 다만 양자의 차이가 있다면 조선학운동가들이 유학이라는 틀을 유지한 채로, 즉 유학 안에서 새로운 시대를 찾고자 했다면, 개벽파는 말 그대로 유학을 개벽해서, 유학과는 다른 ‘학’을 창조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똑같이 유학을 사상자원으로 활용하고는 있지만 개벽파의 경우에는 ‘학’ 자체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조선유학 500년이 끝나는 하나의 사상적 전환점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을 저는 ‘근대’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한된 범위에서 ‘근대’라는 개념을 쓰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처럼 동아시아사나 세계사와 같은 거시적 시각에서 ‘근대’를 논하는 분들에게는 혼란스럽고 납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왜 굳이 그런 혼란스런 ‘근대’ 개념을 고집하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개벽’의 사상적 획기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근대’라는 용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곧바로 ‘개벽’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우리에게 ‘개벽’은 낯설고 ‘근대’는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숙한 용어로 낯선 용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벽에 담긴 사상적 획기성으로 말하면 사실 ‘근대’라는 말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근대’는 고대나 중세와 같은 단계적 시대구분론에서 나온 개념인데 반해, 개벽은 ‘개벽 전’과 ‘개벽 후’로 양분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 이전과 이후로 나누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사상사는 크게 동학 이전과 동학 이후로 양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사상의 ‘작’입니다. 개화파는 중국으로부터의 탈피는 했을지언정 여전히 ‘술’의 관행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1876년 강화도조약, 개항을 시발로 삼는 ‘개화기’라는 시대구분”을 탓하시면서 “1860년 동학 창건으로부터 시작하는 ‘개벽기’라는 시대인식을 바로 세워야겠다”고 설파하신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동학에서 시작되는 한국사상의 ‘근대기’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개벽기’와 상응합니다.

이와 같이 ‘한국’ 근대의 기점을 동학으로 잡는 것은 저의 개인적인 한국사상사 서술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코 이 구분이 다른 나라나 인류 문명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과는 다른 한국사상사 서술방식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최제우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최한기도 근대를 준비한 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기’ 개념을 중심으로 서양의 천문학과 정치체제 등을 수용하여 ‘기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최한기 기학의 선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홍대용도, 『의산문답』을 보면, 서양의 천문학을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유불도 삼교와 성인의 권위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최한기처럼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흔적이 뚜렷합니다. 이 두 사람만 보아도 확실히 조선후기는 뭔가 새로운 사상의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아직 저의 역량이 부족해서 이런 사상가들을 본격적으로 논의에 포함시키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학과 동학이 동시대에 나왔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김태창선생님께서 “앞으로 한국철학의 과제는 기학과 동학을 융합‧접목시켜 새로운 ‘학’을 만드는 일이다”고 하셨다고 들었는데, 탁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업이야말로 21세기 한국에 필요한 새로운 ‘개벽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근대’라는 용어를 고집하는 두 번째 이유는 실천적인 관심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한국인들은 ‘근대’라는 정신적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 편지에서 소개한 중국인 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서구 근대의 독을 가장 많이 먹은 나라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근대화’되지 못해서 ‘식민지’ 지배를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을 부정하면서 서구를 추종하고, 한편으로는 일본을 도덕적으로 미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근대화를 평가하는 상반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중국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노자는 노자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근대는 근대로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근대로 상처받은 영혼을 근대로 치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동학을 비롯한 개벽파를 ‘자생적 근대’나 ‘토착적 근대’로 규정하는 이유입니다.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비어 있는 ‘전통’과 ‘현대’의 사이를 ‘개벽’으로 채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유학중심)-근대(개벽중심)-현대(서학중심)”의 구도로 한국사상사를 나름대로 균형있게 서술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이러한 저의 문제의식(‘치유로서의 개벽근대’)에 공감해 준 서평이 하나 나왔는데,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박지영(인전) 교무님이 쓰신 「근대의 재발견으로 개벽종교를 치유하다」(『개벽종교』 80호)입니다. 저보다도 제 마음을 더 잘 알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개벽사상’과 종래의 ‘탈식민주의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종래의 탈식민주의론은 또 하나의 ‘술(述)’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상을 빌려다가 거기에 기대어서 자신이 처한 사상적 곤경을 해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생님이 맑시즘 역시 개화좌파에 불과했다고 비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중심주의에 갇히거나 그냥 공부로 끝날 뿐입니다.

반면에 개벽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자 했습니다. 최근에 유상용선생님이 “개벽은 나로부터 세계를 보는 눈을 여는 것”이라고 했는데, 탁월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편협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에 빠진 것도 아닙니다. 유학과 서학을 시야에 넣으면서 ‘한울’이라고 하는 세계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개벽 이전에도,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홍대용이나 최한기는 예외라고 하고). 물론 개벽이 사상적으로 완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학과 동학의 관계

유학과 동학의 관계는 저로서는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있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동학은 거의 대부분 유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 왔습니다. 확실히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유학자였고, 이 점은 증산교의 교조로 알려져 있는 강증산이나 대종교를 창시한 홍암 나철, 그리고 원불교를 이론화한 정산 송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증산은 동학을 평가하면서 “유학을 버리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하였고, 실제로 동학 통문(通文)에는 ‘도유(道儒)’라는 표현도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 전봉준과 같은 동학접주의 대부분이 서당 훈장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부의 탄압도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겠고요.

그런 점에서는 분명 선생님이 지적하신대로, 동학과 개벽파는 유학이나 불교와 같은 전통사상의 자산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학’을 ‘개신유학’이나 ‘급진유학’ 또는 ‘민중불교’라고 하지 않고, ‘동학’이나 ‘증산교’ 또는 ‘원불교’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였던 이유는 ‘학’의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즉 전통을 자산으로 삼고는 있지만, 그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학’을 만든 것입니다. 최제우가 ‘다시 개벽’을 주창하거나 강증산이 ‘묵은 하늘’을 뜯어고치자고 한 것은 이런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학’이 나오게 된 이유는 종래의 유학적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시대적 전환기에 대처할 수 없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이 제가 동학을 말할 때 유학과의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무엇보다도 유학 경전을 버리고 독자적인 경전을 만든 이상 이미 유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유학을 유학이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조건은 『시서(詩書)』라는 경전을 신봉하는 것인데 – 마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경』을 신봉하듯이요 – 동학교도들은 『시서』나 『논맹』이 아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경전으로 받들었습니다. 물론 교양으로는 유교경전도 공부했을 수 있습니다만, 농민들이 사서삼경이나 성리학 문헌을 공부한 경우는 드물었다고 생각됩니다. 전봉준과 같이 유학자의 신분에서 동학에 입도한 경우라면 당연히 유교경전은 기본소양이었겠지만요 -.

그래서 이들에게 ‘유학’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하기는 어렵습니다. 천도교인인 모시는사람들의 박길수대표님에게 “당신은 유학자입니까?”라고 물어보면 아마 “아니다”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그냥 “천도교인이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원불교 성직자도 마찬가지고요(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학을 배척하거나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런데 ‘개신유학’이나 ‘급진유학’이라고 규정해 버리면 여전히 유학자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마치 주자학이나 양명학을 신유학이라고 하듯이요. 그래서 제가 이 표현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증산교가 선도(仙道)를 개벽하고, 원불교가 불교를 개벽한 것처럼, 동학이 유학을 개벽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향벽설위에서 향아설위로의 전환”입니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제사를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제사를 거부하는 것보다 더 큰 불경죄를 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벽’으로 상징되는 성인이나 조상보다 ‘나’를 더 존귀한 존재로 설정하고 있으니까요. 동학이 당시의 유학자들에게 ‘사교’로 지목당하고 최제우나 최시형이 처형당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유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명분(名分), 즉 예적(禮的) 질서를 무너뜨렸으니까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동학은 ‘개신유학’이라고 하기보다는 ‘개벽유학’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원불교를 ‘개벽불교’라고 부를 수 있듯이요. 요즘에 저는 원불교를 ‘동학불교’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개벽/동학’과 ‘불교’를 다 알아야 이해될 수 있는 사상체계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동학도 개벽과 유학을 다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사상체계라는 뜻에서 ‘개벽유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신’이나 ‘급진’은 하나의 독립된 사상체계를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새롭거나 과격하다는 수식어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개벽’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상조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개벽유학’은 ‘개벽’이라는 사상과 ‘유학’이라는 사상의 합성어를 의미합니다. 마치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이 한편으로는 최제우를 개벽의 선지자로 존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법을 주체로 한다고 말하였듯이 말입니다. 아일랜드의 젊은 한국학자인 캐빈 콜리는 정약용의 사상체계를 ‘개신유학’이라고 하지 않고 ‘기독유학’(그리스도교+유교)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이것도 비슷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개신유학’이라고 하면 사상적 아이덴티티가 ‘유학’ 하나로 한정되지만, ‘개벽유학’ 또는 ‘기독유학’이라고 하면 사상적 아이덴티티가 두 개로 늘어납니다. 이 중에서 ‘유학’을 강조하면 유학과의 연속성이 강조되고, ‘개벽’이나 ‘기독(교)’을 강조하면 유학과의 단절성이 강조됩니다(물론 정약용의 사상은 유학적 요소가 그리스도교적 요소보다는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동학에는 두 측면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강조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동학이 유학의 연속선상에서 논의된 측면이 강했다면, 저는 단절성을 강조해서 균형을 잡으려는 것이고요.

아울러 어떤 A라는 사상을 만들기 위해서 B라는 사상자원을 활용했다고 해서, 새로 만들어진 A라는 사상을 반드시 B라는 사상 계열로 분류해야 하는 필연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자원으로만 활용할 뿐, 내용 자체는 전혀 다른 사상체계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동학과 서학의 문제

제 생각에 동학은 단지 서학의 도전에 대한 대응일뿐만 아니라 전통적 세계관의 붕괴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였습니다. 최제우는 『동경대전』에서 “인의예지는 성인의 가르침이지만 수심정기는 내가 새롭게 정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학뿐만 아니라 분명히 유학도 의식하고 있습니다. 동학이 유학도 아니고 서학도 아닌 제3의 길을 갔다고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동학의 ‘동’에는 ‘서’에 대한 ‘동’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한 ‘동’의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용례’는 일찍이 신라시대의 최치원에게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최영성교수님의 선행연구에 의하면, 최치원은 신라는 ‘동국(東國)’이고 중국은 ‘서국(西國)’이라고 하면서, 신라인을 ‘동인(東人)’이라고 하고, 한반도를 ‘동방(東方)’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에 고려시대든 조선시대든, 한반도에 사는 지식인들이 자신들을 지칭할 때에는 ‘동방’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동인, 동국, 동방은 모두 서세동점이 시작되기 이전의 개념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동학’은 ‘동양학’이 아니라 ‘한국학’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어떤 분들은 동학은 서학, 즉 천주교의 영향으로 탄생했다고들 말합니다. 『동경대전』에 나오는 ‘천주’나 ‘상제’ 개념을 예로 들면서요. 주로 그리스도교신학을 연구하시는 분들의 주장이라고 생각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동학은 서학의 ‘자극’을 받아서 탄생했다고 할 수는 있어도,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자로는 ‘상제’나 ‘천주’라고 쓰고 있지만 한글로는 ‘하늘님’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 ‘하늘님’은 전통적인 한국인의 하늘신앙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상제나 천주는 그것을 한자로 표현하기 위해서 빌린 말이고요. 그래서 오히려 천주교의 신관이 이런 토착적인 하늘신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하고, 동학도 마찬가지로 그런 토착적 신관 위에서 성립한 신종교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서학의 자극을 받았을 수는 있는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다산 정약용이 서학적 신관을 수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부족하지만 ‘근대’와 ‘유학’의 문제에 대해 제 나름대로 답변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기하신 문제의 취지에 어느 정도 부합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여전히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개벽학의 모색

 마지막 부분에 제시해 주신 “술이 아닌 작의 필요성,” “개벽기에 대한 시대인식,” “밖보다는 안을 살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개벽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개벽문화와 개벽학을 만드는 일이라고 보고요. 지난주부터 페이스북에 『개벽일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개벽에 대해서 남에게 들은 이야기나 자신이 생각한 단상 등을 글로 남겨두고 있는데, 이것이 죽을 때까지 쌓이면 개벽학의 얼개가 대충 짜여질지 모르겠습니다.

“개벽기에 대한 시대인식”은 삼일운동의 사상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삼일운동’하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떠올리기 십상인데, 이것 역시 개화의 시선으로만 사태를 바라보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삼일독립선언서」의 사상적 내용들을 분석해 보면, 개척정신(“자가의 신운명 개척”), 도덕주의와 시대전환 의식(“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온다”) 등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요소들이야말로 개벽사상의 특징이었습니다. 개화파들은 쓸 수 없는 문장입니다. 이 개벽정신이 바로 삼일운동의 내적인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외적인 요인이었다고 한다면요).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삼일운동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독립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독립은 물론이고 사상적 독립까지 아우르는 ‘독립’ 말입니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독립한 상황이지만 사상적 독립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사상적 독립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이 개벽의 자세입니다. 삼일운동에서 만개했는데, 아쉽게도 해방 이후로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세대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젊은이들이 깨어있어야 하겠지요.

선생님과 하자센터의 김현아 선생님이 기획해 주신 ‘개벽학당’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저로서는 10대 후반의 젊은이들과 함께 한국사상과 개벽정신을 얘기할 수 있는 첫 번째 자리이자 시험의 무대입니다. 아울러 원광대학에서도 박맹수총장님이 중심이 되어 개벽의 일꾼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사회를 이끌어 갔듯이, 한국사회도 개벽의 일꾼들이 진취적이고 창조적으로 바꾸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개벽이 이처럼 하나의 사회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개벽학’이라는 체계적인 ‘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언문」으로는 아무래도 지속가능성이 떨어지고 단발적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주자학이 동아시아를 700년 이상 이끌어 갔듯이, 그에 상응할만한 개벽학이 요청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선생님께서 제기하신 ‘민주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개벽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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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의 세 단계

2016년 10월 29일 시작된 대한민국의 ‘촛불집회’는 3차째인 11월 12일의 100만 집회에서부터 ‘촛불혁명’으로 전환되었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자진퇴진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함에 따라 이때부터 촛불광장의 요구가 국민에 의한 ‘하야’와 ‘퇴진’으로 분명해졌고 이 요구를 여러 미디어에서 받아 ‘촛불혁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듯 혁명적 요구를 장착한 거대한 대중행동은 이어 4차(11월 19일, 95만), 5차(11월 26일, 190만), 6차(12월 3일, 230만) 집회를 통해 국회의 대통령 탄핵 가결을 압박했고, 결국 국회는 12월 9일 찬성 234명, 반대 56명으로 대통령 탄핵을 가결했다. 이 ‘합헌적 혁명’의 경로는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탄핵 결정을 승인하고 대통령에게 파면 선고를 내림으로써 그 1단계가 완료되었다.

대통령 탄핵 – 파면 이후 촛불혁명은 다음 단계인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5월 9일 치러진 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41.08퍼센트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국회 내 탄핵을 주도했던 야3당 후보의 득표율을 합하면 68.66퍼센트(국민의당 21.41퍼센트, 정의당 6.17퍼센트), 촛불의 압박 아래 탄핵 지지로 돌아선 새누리당 이탈 세력의 지지율(6.76퍼센트)을 더하면 75.42퍼센트에 이른다. 유권자 4분의 3 이상이 탄핵지지 정당의 후보를 지지하는 가운데 제1야당의 후보가 여유 있게 당선되어 정권을 안정적으로 교체한 이 대선 과정이 ‘합헌적 혁명’의 제2단계라 할 수 있다. 대선 이후 ‘촛불정부’가 들어선 이제 합헌적 혁명으로서 ‘촛불혁명’의 제3단계가 진행 중이다. 이 제3단계를 온전히 마무리하였을 때 촛불혁명은 비로소 완성·완수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은 이렇듯 세 개의 단계를 경과하여 진행 중인 촛불혁명의 지향과 목표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목표와 지향은 무엇보다 우선 이 사건의 역사적 위치, 위상을 객관적으로 점검할 때 비로소 분명해질 수 있다. 그러한 위상이란 한국 현대사 속에서의 위상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사, 더 나아가 세계사 속에서의 위상을 포괄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다. 이 혁명이 어디쯤 있는 줄 알 때,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가 분명해진다.

2016~2017년 촛불혁명의 역사적 위상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한국 현대사 차원에서 볼 때 두드러진 점은 이번 촛불혁명이 1960년의 4·19 혁명과 1987년의 민주항쟁에 이은, 대략 30년 간격으로 터져 나온 거대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세 번째 분출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4·19도, 87년 민주화도 각각 이후 30년에 걸쳐 점차 그리고 결국은 강고한 독재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뼈아픈 사실이다. 거대한 민주적 열망을 냉혹한 독재체제가 회수하고야 마는 ‘마(魔)의 순환고리’ 또는 ‘독재의 반복고리’가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번 촛불혁명도 꼭 같은 순환고리에 포획되고 말 운명인가? 촛불혁명의 완성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이 점을 심각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반복강박 증상과 매우 유사한 이 불쾌한 역사적 순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질 때, 2016~2017년 촛불혁명의 제1과제는 바로 그 ‘마의 순환고리’를 분명히 끊어내는 것에 맞추어지게 된다. 반면 이러한 반복성과 그 뿌리 깊은 구조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못하면 촛불혁명은 다시 한번 자기혼란 속에 퇴행 소멸할 수 있다. 이것이 지난 60년간 한국 현대사에서 두 차례 반복된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의 작동’ 속에서 배울 점이다.

한국의 이번 촛불혁명의 두 번째 역사적 차원은 기존 민주주의 시스템이 세계 곳곳에서 한계와 오작동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에서 유독 이를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돌파하는 새롭고 거대한 힘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한국의 촛불혁명에 세계가 놀랐던 이유다. 외국의 여러 주요 언론이 썼던 바와 같이 이번 한국에서의 촛불혁명의 에너지는 더 이상 ‘민주주의 선진국’의 발자국을 뒤따라가는 후발자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체와 퇴행에 빠진 세계 민주주의 상태에 새로운 활력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보다 고양된 수준으로 이끌어가는 선도자의 힘이다.

끝으로 필자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러한 선도적 에너지가 세계사의 단계가 ‘서구 주도 근대’ 단계를 넘어 ‘후기근대’로 들어서는 상황에서 표출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후기근대의 주요 특징의 하나는 일극중심 문명체제에서 다극균형 문명체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대변동은 커다란 기회와 위기를 함께 수반한다. 한국의 경우 한편으로 정상사회, 정상국가로의 전환의 계기가 형성되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전환을 오히려 신냉전 기류의 고조를 통해 모면하려는 흐름이 생겨난다. 현재 북미 간의 비상한 군사적 긴장 고조는 여기서 비롯된다. 이러한 상황을 어떤 방향으로 풀어가느냐에 따라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세계 전반의 안녕이 큰 영향을 받게 된다. 20세기적 또는 냉전적 행동패턴, 분단체제적 사고패턴과 과감하게 작별하는 새로운 발상, 담대하고 창의적인 접근이 긴요한 시점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촛불혁명은 한국 현대사에서 30년 간격으로 되풀이 되었던 ‘마의 순환고리’를 확실히 끊어야 하는 목표이자 과제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목표는 세계사 차원의 거대한 지각변동에서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이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과 깊이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표, 과제, 역할은 단기적 시야에서는 포착되기 어렵다. 눈앞에서 쉴 새 없이 진행되는 현상에 매몰될 때 촛불혁명의 제3단계는 방향을 잃고, 이 속에서 앞서 언급한 ‘마의 순환고리’는 다시 한번 거대한 작동을 시작하게 될 수 있다.

이 장은 이렇듯 촛불혁명이 놓인 역사적 위상과 여기서 도출되는 목표에 대해 가능한 구체적으로 적시해보려 한다. 그것은 ‘독재의 순환고리 끊기’와 ‘코리아 양국체제의 정립’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 두 목표·과제가 긴밀히 연관된 것임도 이 글은 밝혀 보일 것이다. 이 두 과제의 달성은 진정 ‘체제전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만이 이번 촛불혁명은 진정 그 이름에 부합하는 혁명으로 완성될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마(魔)의 순환고리’

4·19와 87년은 대한민국 정치사, 민주주의 역사의 기념비적 봉우리였다. 이제 2016~2017년의 촛불혁명은 이를 잇는 세 번째 봉우리가 되었다. 그러나 앞서 두 번의 봉우리가 세계의 주목과 경탄을 받았던 만큼, 그 역사적 대분출 이후의 역사는 독재의 깊은 골짜기로 거듭 굴러 떨어지곤 했다. 그리하여 ‘민주의 대분출과 독재로의 회수’라고 하는 매우 불쾌한 사이클이 한국 정치사에 30년 주기로 반복되어왔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게 그리고 널리 인식되게 된 데는 박근혜 정부의 등장과 귀결이 큰 역할을 했다. 그 이전 이명박 정부 출범은 참여정부 실패의 결과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독재 회귀의 큰 사이클에 대한 인식이 아직 대중적으로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은 박정희 체제로의 회귀라는 상징성이 강했고, 실제 재임 동안 그러한 회귀가 정부의 공공연한 이념공세의 형태로 추진되었다. 물론 이 사실의 확인은 87년 민주항쟁 이후 30년 사이클의 대미를 박근혜 정부의 유신 귀환 행태가 장식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우선 박근혜 정부의 독재화 가속 현상은 최근 밝혀지고 있는 바와 같이 이명박 정부 시기의 전방위적 블랙리스트 정책(감시·배체 체제)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 이전 김대중 – 노무현 민주화 정부 10년도 독재 회귀의 큰 사이클을 결코 끊지 못했다. 그 연원은 멀리 87년 하반기 민주화 진영의 분열과 대선 패배로부터 기인하는바, 이 30년의 전체 흐름에 대한 조망은 이 글 4절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박근혜 정부가 대미를 장식했던 독재 회귀의 피날레 현상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부터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과 군 정보기관의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선거 개입(이명박 버전의 ‘비상국가체제’의 작동)에 의해 출범할 수 있었다. 이렇듯 국가기관의 대규모 선거 개입에 대한 검찰 수사를 박근혜 정부는 유신체제를 연상시키는 매우 강압적인 방식(박근혜 버전의 ‘비상국가체제’ 작동)으로 종결했다. 그렇게 시작된 박근혜 대통령의 재임 기간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에서 보여준 무능과 불통·불감, 통진당 해체에서 보여준 냉전 극성기의 배제와 억압, 국정교과서 추진에서 보여준 시대착오적인 이념적 강압으로 시종 일관했다. 이러한 오만과 강압은 2016년 4·13 총선 공천 과정에서 전통적 지지층마저 고개를 돌릴 만큼 무제약적인 것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불통·불감, 억압·배제의 일방 통치와 오만에도 불구하고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은 다가오는 총선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이 압승하고, 더 나아가 개헌선 이상의 여당 승리에 따른 제2의 유신 개헌 프로젝트가 가동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만큼 신 유신체제로의 회귀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인 것처럼 보였다. 때는 마침 87년 항쟁의 30주년에 임박해 있었기 때문에 87년의 민주주의의 희망찼던 큰 진전과 그 30년 이후 민주주의의 암담한 추락의 대비가 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4·13 총선의 결과는 사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렇듯 전혀 예상 밖에 조성된 여소야대의 상황이 박근혜 체제의 유신 회귀 질주를 멈추게 한 것도 아니었다. 총선 이후로도 전방위 블랙리스트 압박과 국정교과서 개정, 사드 배치, 일제 위안부 문제의 종결(소위 대못박기)을 위한 강박적 정책이 집요하고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10월 말 최순실 국정 개입·농단의 구체적 증거가 언론에 폭로되기 시작하면서 급전직하로 진행된 박근혜 정권의 극적인 몰락 역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무리 독선·독주를 해도 철옹성처럼 견고해 보였던 박근혜 지지층을 단번에 해체해버린 11월, 12월의 거대한 대중행동은 자연스럽게 30년 전, 1987년의 거대했던 민주대항쟁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되살렸고, 많은 미디어가 이 대비를 부각시켰다. 1987년 역시 철옹성 같았던 군부독재체제가 그처럼 물러설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경험과 기억의 중복 속에서 한국 정치사의 반복성은 평범한 국민대중의 인식 차원에서도 분명해져갔다.

그러한 반복의 시간에서 희열은 짧고 고통은 길기 마련이다. 희망의 짧은 시간은, 길고 둔중한 망각과 냉소와 자학과 고통의 시간에 묻히고 만다. 실제가 그러했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란 그렇듯 짧고 날카로운 희망과 압도적으로 길고 둔중한 절망의 시간의 반복 메커니즘을 말한다. 혹시나 이렇듯 확인된 반복성이 ‘아무리 어두워도 새벽은 또 오고야 만다’는 식의 대책 없는 낙관주의로 도치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중증 반복강박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어두운 회귀 구조의 압도적인 불행과 불쾌와 고통에 주목해야 마땅하다. 역사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묘하게도 1960년 4·19, 87년 6월, 2016~17년의 세 개의 봉우리는 30년을 주기로 솟아올랐다. 또한 그 사이에 낀 두 개의 시기(1960~ 1987년과 1987~2016년)의 전개 양상, 즉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장기(長期) 메커니즘’의 작동은 구조적으로 매우 흡사했다. 이 패턴은 극과 극이 대체되는 것으로서, ‘제도 밖의 대중행동이 제도를 변화시키고 점차 보수화되는 제도를 다시금 제도 밖의 대중행동이 변화시킨다’라고 하는 기존 사회변동의 교과서적 일반론과는 매우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4·19나 87년 6월 대투쟁은 (이번 촛불혁명도 마찬가지다) 반전이 도저히 불가능하여 철옹성 같아 보이는 독재 상황, 즉 독재가 외적 구조만이 아니라 멘탈의 내면까지 깊게 장악하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규모와 방식으로 매우 극적으로 분출하였다.

이 글이 주목하는 ‘마의 순환고리’란 이렇듯 정상적인 수준이나 패턴을 넘어서는 지극히 극단적인 독재 수렴 구조의 작동을 말하고, 이러한 극단적 패턴이 반복되는 배후에는 매우 특수한 한반도(코리아)의 상황이 존재한다. 이 강고한 순환고리의 ‘마성(魔性)’은 거대한 대중행동·민주열망이 제도 안으로 수렴되어 제도를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사회변동의 일반론이 작동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행동의 봉우리가 아무리 높고 거대해도 ‘마의 순환고리’ 자체는 끊기지 않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같은 패턴의 ‘독재수렴’이 반복된다.

그러한 ‘마성’의 효력을 마치 영구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반도적 상황’이란 무엇일까. 2차 대전과 6·25 전쟁 후의 동서(동방/서방) 그리고 남북(코리아) 간의 극단적인 적대적 대립이 지정학적 꼭지점에 2중으로 중첩되어 있는 상황을 말한다. 그로 인해 ‘2중의 독재권’이 중첩하여 증폭하게 된다. 이는 극히 예외적 –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그렇듯 특이해 보이는 국가 독재권의 작동 원리가 근대 국가주권론의 일반론에서 반드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근대 국가주권론의 이론적·이념적 순수형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장 선명한 이론적 표현은, 필자가 아는 한,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에 의해 주어졌다. 그는 근대 국가주권의 핵심 권능과 표징이 국가 내외에 적(=예외)을 설정하는 권한(비상대권)의 독점, 즉 독재권에 있다 하였다.

냉전 시기 이 원칙은 국가 간이 아닌 동서 ‘진영’ 간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상황에서 슈미트적 의미의 국가주권의 배타적 권능(=독재권)이 가장 강력하게, 이론적으로 가장 순수한 형태로 표출되었던 곳이 한반도의 남북이었다. 남북의 두 국가가 하나의 주권을 두고 다투는 상황은 남북 상호를 절대적 적(=예외)으로 설정하게 함으로써 남북 각각의 주권이 절대성(=독재권)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진영 간 대립과 분단국가 간 대립이 가장 극단적 형태로 중첩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극단의 상황은 남북 내부에 정상적 정치 경쟁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카를 슈미트가 근대 국가주권 행사의 정화(精華)라고 보았던 최고통치자의 비상대권이 항시적·일상적으로 작동하는 ‘비상(非常)국가체제(permanent emergency state system)’, 그것이 남북한의 국가 상태였다.

한국의 경우 그러한 항시적 비상국가 상태에 파열구를 내고는 했던 것이 4·19였고 87년 6월 항쟁이었으며, 이번 촛불혁명이었다. 비정상 상태에서는 비정상이 정상이고, 정상은 비정상이 된다. 오직 그러한 비상 상태를 정지시킴으로써만 정상은 정상이 되고 비정상은 비정상이 된다. 즉 비로소 ‘정상 상태(normal state)’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현대사에서 세 차례의 민주 분출은 비상국가를 정상 상태로 되돌리려는 거대한 계기들이었고, ‘마의 순환고리’란 그러한 거대한 계기를 다시금 비상 상태로 되돌리려는 ‘마적(魔的) 시스템의 회복력’ 또는 ‘비상국가의 자기회복 시스템’이라 하겠다.

정상 상태란 우선 거대한 민주열망의 분출이 정상적으로 제도화되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민주화의 일차적 징표일 것이다. 그러나 4·19와 87년 이후 각 30년은 거대했던 민주열망을 정상적으로 제도화시키는 데 실패했던 시간이었다. 초기 얼마간은 과거 독재기에 비해 유사 민주화가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표피의 변화에 그치고 점차 비상국가체제의 독재·독점의 힘이 민주의 열망을 분산·둔화·왜곡시켜 결국은 몽땅 삼키고 만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러한 ‘마의 순환고리’가 지극히 강고하다는 것을 제대로 입증한 것은 4·19 이후 30년이라기보다 오히려 87년 이후 30년의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4·19 이후 30년은 세계적 동서 냉전이 맹렬하게 진행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비상국가 상태를 근본에서 종식시킨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매우 어려운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87년 이후 30년은 동구권 붕괴와 소련 해체를 통해 동서 냉전이 종식됨으로써 한국의 비상국가체제를 강제하는 국제적 구속력이 크게 약화된 역사적 국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비상국가체제는 그 거대했던 87년의 민주 동력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회수하여 다시금 또 다른 독재체제로 회수하고야 말았다. 동서 냉전이 종식되었고 ‘북방정책’을 통한 대소·대중 해빙이 있었음에도 한국의 비상국가체제는 강고하게 지속되었던 것이다.

 

비상국가체제의 작동과 균열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의 핵심에 ‘비상국가체제’가 있다고 한다면, 우선 그 체제의 작동 방식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상국가체제는 최고권력자의 독재권과 상당히 광범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기득권층과 동맹관계를 통해 작동한다. 최고권력자의 정치적 독재권은 사회 각 부면의 권력과 자원의 독점권·기회획득권을 기득권 상층에게 배타적으로 보장해줌으로써 비상국가의 지배동맹은 성립한다. 이 체제의 위기는 지배동맹의 균열·약화와 국민적 저항이 맞물렸을 때 발생한다.

이번 촛불혁명도 마찬가지였다. 임기 2~3년 차에 들어 (특히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박근혜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실망, 회의, 반발이 누적되었음에도 대통령에 대한 30~40퍼센트에 이르는 ‘콘크리트 지지층’은 2016년 10월 말에 이르기까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40퍼센트에 이르던 지지율이 30퍼센트대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4·13 총선 이후였다. ‘친박 독선·독주에 대한 응징’으로 풀이된 총선 결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자신에 대한 지지율은 놀랍게도 콘크리트 밑바닥인 30퍼센트대를 굳건하게 유지했다.(아래 <그림 2>)

그러나 이 40퍼센트대에서 30퍼센트대로의 변화 과정에는 지배동맹의 균열과 약화라는 중대한 변수가 끼어 있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일단을 흥미롭게 정리해주는 기사가 JTBC의 최순실의 태블릿 공개 직전인 2016년 10월 23일 자 《미디어오늘》에 “조중동에게 노무현보다 박근혜가 최악인 다섯 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떴다. 당시 조중동 기자들의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예사롭지 않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풀이한 기사다. 주요 내용은 2014년부터 시작된 ‘비선실세’ 의혹의 각종 보도에 대해 정부가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소송”을 벌이고 있다는 것(그 소송의 주역은 김기춘·우병우다), 언론사 수익원을 (역시 ‘진보, 보수 가리지 않고’) 막고 있다는 것, (조중동과 같은) ‘언론사’ 출신을 배제하고 (MBC, KBS와 같은) ‘방송사’ 출신만을 청와대가 애호하고 있다(=감투를 주고 있다)는 것 등이다.

이번 촛불혁명 과정에서 상세히 밝혀진 ‘비선실세’ 건은 이미 2014년부터 ‘문고리 3인방’ ‘정윤회’ 보도로 시작되었고, 2015년 초부터는(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이후) 조중동이 한목소리로 대통령이 이 문제를 덮으려 한다고 비판해왔다. 권력과 자원을 조중동, 그리고 그들이 대변하는 사회 기득권층과 공유하고 대통령 개인의 사적 비선실세와만 나누려 하는 행태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권력 공유에 대한 묵언의 지배동맹, 계약을 위반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항의였던 셈이다. 이러한 불만 표출에 대해 청와대는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좌파 세력이 우병우 죽이기에 나섰다”고 예의 그(=박근혜 전대통령의) 매서운 표현 방식으로 응수했다(2015년 8월 21일).

중요한 점은 박근혜 정부와 조중동은 국내의 여러 이권에 대한 입장만이 아니라 국사교과서 국정화, 대중·대러시아 관계, 유라시아 외교, 일제 위안부 문제 합의 건 등 이념과 국제관계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미묘한 불일치와 마찰을 심심치 않게 보여왔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2015년경부터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하여 2016년 들어, 특히 4·13 총선 이후 빈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신 시절과 다름없는 구시대의 이념과 외교관, 정치행태를 점점 더 강하게 표출함에 따라 지배동맹의 이념 전선에도 균열과 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방증하는 사례의 하나로 대통령이 ‘주류 언론’에 대해서조차 이념적으로 지극히 적대적인 언어를 사용했던 사실을 들어본다. 최근(2017. 8. 2) 삼성 이재용 특검 재판에서 나온 이재용 부회장의 증언이 그것인데,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2월 15일 그를 청와대에서 독대하는 자리에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을 언급하면서 “(《중앙일보》 계열 언론사인) JTBC가 왜 정부를 비판하나”라 항의하고 홍 회장에 대해서는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이면 그럴 수가 있나’라며 ‘이적단체’라는 표현까지 썼다”고 하였다. ‘이적단체’란 ‘좌빨·종북’과 동급의, 한국의 비상국가체제가 비판 세력을 말살하고 정치적 독재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던 지극히 폭력적인 언어다. 이제 그러한 정치적 비상(砒礵, 극독)을 삼성 – 《중앙일보》라고 하는 한국 보수의 대표적 주류 기관의 수장들을 대상으로 들이밀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만 객관적인 상황은 국내 자본 그리고 온건 보수의 입장에서도 과거 유신 시절과 같은 강고한 구냉전적 자폐(自閉)와 대결 일변도의 정책이 결코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한미 동맹은 유지하되 동시에 중국·러시아를 거쳐 유럽·중앙아시아·중동이슬람권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통로에 자유롭게 진입하고 싶은 것이 해외 상대의 사업을 하는 층과 온건 보수층의 일반적인 심정이었다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라도 (이명박 정부 이후) 꽉 막힌 대북관계를 어떻게든 풀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과 대중·대러시아 정책은 이명박 정부 때보다 더욱 경직되어 있어 그런 방향의 유연한 타개를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웠다. 자본과 온건 보수의 입장에서도 불만과 우려가 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갔던 것이다.

이렇듯 겉으로는 강고해 보였던 박근혜 체제의 보수동맹은 임기 중반(대략 2015년경)부터 내부로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여 2016년 4·13 총선을 계기로 그 균열이 가시화되었고, 결국 2016년 10월 말 이후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이 백일하에 폭로되면서 정권이 급속하게 침몰하고 말았다. 기적처럼 되돌아온 거대한 대중행동이었다.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집회의 열기가 별다른 성과 없이 소진된 이후 심화되는 양극화와 ‘헬조선’의 현실 속에서도 무기력한 패배감과 냉소·자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민심이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다시 크게 경각하기 시작하여 결국 촛불혁명의 거대한 힘으로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2017년 5월 촛불혁명의 힘에 의해 새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하다. 이렇듯 크게 이완·약화된 비상국가체제를 완전히 역사의 뒷장으로 넘기고 이윽고 정상 상태의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4·19, 87년 항쟁, 이번 촛불혁명의 공통점은 권력 교체기에 권력 최고층의 도를 넘어선 독주와 권력 남용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데 있다. 기득권층의 일정 부분이 권력에서 소외·이반·이탈하면서 민주화의 요구가 압도적 민심이 되었다는 점도 같다. 그러나 앞서 두 차례의 거대한 대중행동(4·19와 87항쟁)은 비상국가체제를 종식시키는 데 결국 실패했다. 구 권력의 최고 담당층만을 밀어냈을 뿐, 비상국가체제를 작동시키는 구조와 논리, 이념을 종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비상국가체제가 더 이상 대한민국의 미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마의 순환고리’가 몇 차례의 커다란 타격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부활하고는 했던 것은 우선 한국이 처한 역사적·지정학적 내외 조건의 구조적 강제 때문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강제의 힘을 별 수 없이 수긍하게 된 또 다른 수동적 민심의 (동의가 아닌) 수용이 있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문제적이라 하더라도 상당 기간 존속해온 체제에는 나름의 현실 근거가 있게 마련이고, 그렇듯 오래 존속해온 것은 비판이나 반대만으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선 현실이 변해야 하고, 그렇듯 변화한 현실을 정확히 읽어야 하며, 새로운 현실에 걸맞은 분명한 방향 제시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그동안 운명처럼 받아들여왔던 ‘역사적·지정학적 내외 조건’이 크게 변하여 더는 옛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 의거했던 ‘비상국가체제’는 변화한 현실과 오히려 크게 부조화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랬을 때 새로운 현실에 맞는 새로운 사회의 방향도 선명해질 것이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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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4/0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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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해체 이후 근대 세계사는 새로운 단계인 후기근대(late modern age)에 접어들었다. 세계인이 이를 점차 실감하고 있는데, 촛불 이후 남북 코리아는 더욱 그러하다. 새로운 시간의 실감 속에서 최원식 교수가 《프레시안》 창간 17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 「남북연합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강조하고 코리아 남북연합이 그 촉진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후기근대의 세계 상황이 두 코리아의 공존체제·평화체제를 가능하게 하고 있으니 이를 위한 내적 준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온 평자로서는 동의하고 환영한다.

이제 촛불혁명과 판문점, 싱가포르 선언으로 그 가능성은 바로 코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촛불 직전인 2016년 5월 《프레시안》과 ‘다른백년’이 주관했던 4회 강연에서부터 평자는 공존체제, 평화체제보다 ‘양국체제’라는 개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공존체제나 평화체제는 ‘그냥 맞는 말’로 들릴 수 있다. ‘좋아.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공존과 평화를 이뤄낼 실제적 방법, 핵심고리가 중요한데, 이것이 ‘코리아 남북 양국의 주권국가(sovereign state)로서의 상호 인정’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양국체제가 돼야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다. 양국체제란 양국 공존체제, 양국 평화체제의 줄임말이다. 공존과 평화를 실현할 양국체제가 남북연합의 바탕이 될 것도 자명하다.

발제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우선 발제문은 ‘國際(inter-national)’보다 ‘民際(inter-civic)’를 중시하기에 통상 쓰는 ‘(남북)국가연합’이 아니라 국가를 빼고 ‘남북연합’이라 하는 듯하다. 국제(International)에 민간관계가 빠지는 게 아니니 민제라는 말이 굳이 따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국제와 민제가 따로는 아니겠다. 발제문이 언급한 한중일 관계만 하더라도 국제가 안 풀리면 민제도 어려워진다. 극적 사례는 1992년 한중 수교였다. 국제를 트니 민제가 크게 열렸다. 남북관계는 국제(이 경우는 inter-national이 아니고 inter-state가 된다)가 막혀 민제는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있다 할 형국이니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남북연합 논의에서도 국가(state) 대 국가(state)로서 남북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발제문은 그와 전혀 다르게 본다. 아래 문단은 관련 주장이 집약된 것으로 보이는데, 의외로 ‘양국론’에 대한 ‘경계 긋기’로 시작한다.

최근 세를 얻고 있는 양국론에 대해서도 경계를 그을 필요가 없지 않다. 양국체제론자들의 논의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한 탓에 단정하긴 어렵지만 남북은 일국도 아니지만 양국도 아니다. 분단으로 두 쪽이 난듯이 보여도 남과 북은 분단체제의 드러남으로 연계된바, 분단체제를 상정하지 않은 양국론과는 애초에 무관하다. 그렇다고 그냥 일국론도 물론 아니다. 정말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不一不二]. 요컨대 분단체제를 상정한 남북연합론을 설령 통일의 최종형태로 삼는다고 해도 그 연합이 두 나라의 단순 병치가 되기는 애시당초 그른 것이매 남북연합론은 주변 4강의 의심을 풀고 내부의 대국주의를 절약할 요체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남북연합론은 일국적 통일론과 양국적 반통일론을 가로지르는 중형국가적 분단해소론이다.

국가 대 국가의 문제를 시종 비켜가고 있다. 일국도 아니고 양국도 아니라 한다. 과연 그런가? 현실은 일 민족, 이 국가(one nation two states)이다. 둘이되 하나요, 하나이되 둘[一而二, 二而一]이다. 엄연한 사실이 그러함에도, 즉 이 두 개의 국가가 국제적으로는 모두가 널리 공인된 국가이면서, 막상 양국은 아직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문제요, 비정상 아닌가? 그러나 「발제문」은 거꾸로 본다. 이런 상태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여기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 ‘불일불이(不一不二)’라 한다. 불일불이란 불가(佛家)의 진리관[中論]을 표현하는 높고 찬란한 언어다. 진리적 불일불이가 ‘분단체제’라는 개념에도 적용되고 있다. “분단으로 두 쪽이 난듯이 보여도 남과 북은 분단체제의 드러남으로 연계된바 …… ”라고 하였다. 분단체제를 이렇듯 고도로 긍정적인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발제자의 ‘남북연합’이 “분단체제를 상정한 남북연합론”이라 하였다. 그동안 ‘분단체제’란 말은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에 이를 이렇듯 고도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용법이 일반인에게는 매우 낯설다. 분단체제는 남북이 적대하는 체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국가로서 인정하지 못해왔던 체제 아닌가?

거듭 말하여, 현실은 일 민족 이 국가 상태다. 체제 보장은 북미 간에만 아니라 남북 간에도 이뤄져야 한다. 그것이 양국체제다. 과연 무엇이 분단과 분단체제를 영구화시켜왔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둘임을 부정했기 때문에, 둘을 부정한 채로 결코 하나이자고 했기 때문 아닌가? 둘이 서로 인정하는 것이 이 함정을 벗어나는 제1보다.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것만이 바른 길이다. 『노자(老子)』 22장에서 “곡즉전 왕즉직(曲則全 枉則直)”이라 했던 게 양국체제의 취지와 닿아 있다.

양국체제 없이 남북연합이 제대로 될까? 국(state) 간의 際가 안 열렸는데 民 간의 際가 활짝 열릴까? 그렇듯 국제가 닫힌 채로 가능한 남북연합이란 어떤 것일까? 양국체제가 성립하고 안정돼야 비로소 그 두 국가(state) 간의 남북연합이든 국가연합이든, 낮은 단계든 높은 단계든, 비로소 현실화되는 것 아닌가? 촛불혁명, 그리고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선언으로 이제 양국체제는 목전의 현실문제가 되었다. 판문점, 싱가포르 회담 한참 이전부터 줄곧 강조해온 것처럼 종전과 북미 수교는 양국체제의 입구요 일부다.

양국체제란 1973년 <동서독기본조약> 이후의 동서독 관계로 보면 이해하기 쉽다. <동서독기본조약>에서 양독(兩獨)은 서로를 국가로서 분명히 인정했고, 기본조약 이후 미국은 동독과 수교했다. 그 두 고리가 풀리면서 양독 관계는 안정됐다. 반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는 이 둘 다 이루지 못했다. 유엔 동시가입으로 코리아 양국체제의 외적 모양새는 일단 시작되었지만 완성되지 못했다. 불완전하고 불균형했다. 그랬기에 그 경로는 금방 닫혔다. 반면 동서독의 양국체제는 안정적으로 지속됐다. 정권이 바뀌어도 존속했다.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당시 남북이 처해 있던 여러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낮은 수준에서 합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그것이 마치 아주 높은 수준의 결과였던 것처럼 생각한다면 문제가 된다.

「발제문」의 ‘불일불이’ 구절을 읽으면서 연상을 금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유명한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구절이다. 이 표현은 매우 외교적인 것인데, 이를 액면가보다 낮추어 읽는 것이 아니라(외교문서를 읽는 기본이다), 오히려 액면가보다 훨씬 높게 읽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남북은 국가 대 국가로 서로를 (아직 외적 조건과 내적 능력이 부족하여)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뜻이 높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북은 애당초 두 국가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이기 때문이다’라는 식이다. 그렇게 읽으면 이 구절은 마치 ‘우리가 지금 하나는 아니지만 결코 둘일 수 없다(불일불이)’라는 높은 이상에 남북 대표가 의기투합하여 ‘우리는 결코 두 국가가 될 수 없으니 이러한 불일불이의 상태에서 곧바로 국가연합이나 연방제 통일로 직행하자’라는 뜨거운 마음을 이심전심으로 표현한 것이 된다. 실제로 그런 오독들이 꽤 있었다. 서로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는데 연합이든 연방이든,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에 대한 답은 여태껏 듣지 못했다.

끝으로 ‘말이 아닌 말’을 일부러 만들어낼 필요는 없겠다. 위 인용문에서 “양국적 반통일론”이 그렇다. 앞서 설명한 대로 양국체제 없이는 공존체제도, 평화체제도, 남북연합도 담보되지 않는다. 양국체제 자체가 통일은 아니지만, 어떠한 경로보다 통일 촉진적이다. 양국체제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바람직한 통일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반통일’일까? 또 이 말과 짝을 걸어놓은 “일국적 통일론”이란 뭘까? 진보진영에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안다. 북(DPRK) 역시 이 입장을 폐기한 지 오래됐다. 그럼 뭘까? 발제자의 뜻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런 게 있다면 우스꽝스런 무엇일 듯하다. ‘말이 아닌 말’을 만든 것으로 부족하여 실체 없는 허깨비와 짝을 붙여놓은 꼴이다. 왜 이래야 했을까? 양측에 ‘극단’을 세워놓고 중간에 끼어들어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때로 쓸 만하다. 단, 그 양쪽 입장이 단단하고 분명해야 한다. 그럴수록 자신의 입장이 힘을 받는다. 그렇지 않고 ‘말이 아닌 말’과 ‘대립 아닌 대립’을 세워놓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식이라면 별다른 의미나 성과가 없을 듯하다. 또 그렇듯 가로지르는 게 ‘중형국가적 분단해소론’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국가’는 어떤 국가이고(일 국가? 이 국가?), 여기서 ‘분단 해소’는 어떤 해소인지(분단체제의 해소? 분단의 해소?)도 궁금하다. 어쨌거나 지금 필요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 사이의 ‘경계 긋기’가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공통점을 모으는 일이 아니겠나 생각해본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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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4/2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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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의 시작을 알리는 『흔들리는 분단체제』가 출간된 것은 1998년이다. 앞서 말했듯 이 제목은 역설적이다. 분단체제가 흔들리고 있음을 알리면서 분단체제 개념은 장기화되고 분단체제론은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2006년에는 “지금 돌이켜 보면” 분단체제가 1987년 6월부터 이미 “동요하기 시작했었다”고 하였다. 1987년 6월은 양국체제론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분단체제의 양국체제로의 전환’의 가능성이 이때부터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체제론의 강조점은 다르다. 이렇듯 일찍부터 분단체제가 동요하고 흔들리고, 더 나아가 허물어지고, 해체되고 있다고 하면서, 그럴수록 분단체제는 묘하게 더욱 장기화하고 그에 따라 분단체제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고 하는 이론적 메커니즘이 분단체제론 2기의 특징이다.

이 메커니즘의 숨은 비밀은 19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매우 높은 평가에서 출발한다. 물론 이 두 사건은 높게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나 역시 매우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높게 평가하는 대목이 크게 다르다. 아무튼 ‘분단체제론적 고평가’는 1997년 발표한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위해」에서부터 표명되기 시작하는데, 이 글은 1991~1994년 사이에 발표된 글들에서 보인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경계와 유보, 그리고 이를 전제로 한 소극적 인정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입론의 첫 단계(1991~1994년)에서 분단체제론은 아직 분단체제극복운동과 현실과의 접맥점을 잘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접맥점이란 그렇듯 높은 목표를 갖는 분단체제극복의 경로와 주체를 구체화하는 것이 될 터인데, 첫 입론 단계에서는 아직 “통일운동이 민중운동이 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거나, “범한반도적 민중운동 …… 남북한 민중연대의 가능성”을 원론적 수준에서 언급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러한 ‘범한반도적 민중운동’과 ‘남북한 민중연대’ 주장이 “남북한의 현실을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 (현실적 근거가 없는) 당위론적이고 관념론적인 이상론이 아닌가”라는 비판에 대해, “문제의식은 정당한데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아서 구체적인 성과가 미미한 것과 문제의식 자체가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당위론 내지 관념론·이상론이라는 것은 마땅히 구별해야 할 터”라고 소극적으로 변명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원론적 시각에서 볼 때 남북 유엔 동시가입이나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이 ‘남북한 민중연대에 기초한 범한반도적 민중운동’의 기준에서 한참 못 미침은 자명했을 것이고, 그래서 백 선생은 1991년 “유엔 가입을 포함한 한국 정부의 ‘북방정책’의 성과”가 “반민주적 분단체제의 부분적 개량에 불과함이 명백하다”고 썼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은 문자 그대로 개량이요 개선이지 개악은 아니며, 분단체제의 장기화에 이바지할 가능성과 더불어 분단체제극복운동에도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라는 흥미로운 표현을 덧붙였다. 소극적인 인정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분단체제 장기화에 이바지”라고 하는, ‘분단체제의 장기화’가 긍정되는 묘한 표현과, 그 분단체제의 장기화가 “분단체제극복운동에도 새로운 공간을 열어”준다고 하는, 분단체제론의 독특한 개념적 함수관계가 처음으로 명료하게 드러난 대목이기도 하다.

우선 유엔 동시가입 등 북방정책의 성과가 ‘분단체제의 장기화에 이바지했다’는 말은 명백하게 틀렸다. 사태를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유엔 동시가입 등 북방정책의 성과들은 분단체제를 분명히 균열내고 흔들었다. 그 균열과 동요를 틀어막았던 것, 즉 진정 “분단체제 장기화에 이바지”했던 쪽은, 그 유엔 동시가입이나 <남북기본합의서>의 효과가 북미・북일 수교로, ‘남북 양국(평화공존)체제’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던 내외의 냉전대결 세력들이었다. 어쨌거나 이 말에서 드러난 분단체제론의 독특한 개념적 함수관계를 정리해본다면, ‘분단체제론은 분단체제의 장기화에 의거하여 분단체제극복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가기 위한 이론’이 될 것이다. 이 독특한 함수관계는 몇 년의 숙고를 거친 후인 1997년,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을 얻게 된다.

통일을 향한 획기적인 한 걸음을 뜻하면서도 분단체제의 급격한 붕괴를 피하는 국가체제라면 비교적 느슨한 형태의 복합국가인 국가연합(confederation)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 북의 ‘연방공화국’ 제안이 영어로는 ‘confederal republic’(즉 국가연합 공화국)으로 표현되었고 1991년 남한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안에 국가연합 단계가 포함되었다는 사실들을 떠나서라도, 남북 간에는 국가연합을 향한 더욱 실질적인 합의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북한의 UN 동시가입이야말로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라는 면에서 그 어느 공동선언보다 실질적인 조치였으며, 이렇게 상호 인정을 나눈 두 국가 당국은 1991년 12월에 조인되어 92년 2월에 발표한 ‘남북합의서’에서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한 관계”로 규정함으로써 이미 국가연합 형태의 단초를 열어놓은 형국이다.

“통일을 위한 획기적인 한 걸음”으로서 남북의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을 강조하고, 남북 유엔 동시가입이 이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였음을 언급하는 대목은 마치 분단체제론이 아니라 양국체제론의 논거를 펼치는 것으로 보일 정도다. 피상적으로 보면 분명 그렇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그렇지가 못하다. 오히려 중요한 점에서 인식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글을 쓴 1997년은 어떤 시간인가. 유엔 동시가입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고 한국은 중국, 러시아와 수교한 반면, 북(DPRK)은 결국 미국, 일본과 수교하지 못한 채 매우 위축된 상황에서 고난의 시기를 보내고 있음에도, 이러한 상태를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매우 후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은 양국체제론의 시각과 분명히 다르다. 양국체제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남북 양국 모두에서 내적 외적으로 안정된 인정구조가 우선 성립되어야 한다. 남북 유엔 동시가입은 외부 세계가 남북 두 국가를 각각 정상적이고 온전한 국가로 인정하는 ‘양국체제의 외적 인정구조 성립’을 위해 중요한 일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불완전하고 불균등했다. 한국은 소련, 중국 및 동구권 모든 국가와 수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은 그러지 못했다. 미국은 냉전 해체 이후 위기에 처한 북을 압박을 통해 붕괴시키려만 했지 인정할 의도가 애초부터 없었다. 그 결과 일본을 비롯하여 미국의 영향력이 강한 많은 국가가 북과 수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과 북은 국제적으로 매우 불균등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이런 상태는 남북 간의 긴장의 소지를 오히려 높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듯 여전히 위태로운 상황 속의 남과 북 두 나라의 관계가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이미 ‘실질적으로’ 이루어져 마치 안정된 평화적 동반 관계가 이미 달성된 상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분명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인식이었다.

양국체제론의 현실 인식과의 차이는 이어지는 다음 대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양국체제론은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이제는 유명해진 구절인 “(남북 쌍방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한 관계”라는 표현을 매우 문제적인 것으로 본다. 나는 다른 글에서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았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란 앞서 분석한 ‘반쪽국가의식’에 정확히 상응하는 표현이다. 흔히 <남북기본합의서>는 1972년 체결된 <동서독기본조약>을 준용한 것이라 한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상호 인정의 수준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동서독기본조약>에 크게 못 미친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동서독기본조약>은 서문, 10개조, 그리고 2개조의 추가조항 전체에서 조약 쌍방을 정식국호인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라 분명히 칭하고, 두 국가가 주권과 영토를 상호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구절은 <동서독기본조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필자가 독일의 동방정책과 관련해서 이와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표현을 조사해본 바로는, 1969년 10월 28일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의 연방정부 성명 중에 “독일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더라도 그 국가는 상호 외국이 아니며, 그 상호관계는 특수한 종류인 것”이라 했던 것이 처음이었다. 그 성명의 핵심은 독일에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다만 그 두 국가는 서로 외국이 아닌 특수관계라는 뜻이었다. 먼저 국가로서 인정하면서, 그다음에 그 두 국가 간의 관계는 특수하다 한 것이다. 하나의 민족이 이룬 두 개의 국가(one nation, two states) 간의 관계이니 특수하다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동서독은 기본조약 이후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일반 수교국 대사보다 격이 높은 장관급 대표를 상호 파견했다. 그런데 <남북기본합의서>는 그와 전혀 다르다. 국가로서 인정하지도 않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고 거듭 확인까지 하고 있다.(이 책 1부 1장, 52~53쪽)

따라서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문제의 그 구절은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아직 그 상태에 이르지 못한 남북 양 당국의 곤혹스러운 상황을 외교적 언어로 봉합하거나 절충하는 표현에 불과한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냉정하게 보면 비록 냉전이 종식이 되었다 하더라도 미국이 북을 인정할 의도가 없는 상태에서 남북 양측만으로 종전(終戰)을 이루기 어려웠다. 아직 전쟁도 공식적으로 끝마치지 못한 상대를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앞뒤가 바뀐 일이기도 하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미국과 별개로 독자적으로 북과 종전처리를 하고 상호 국가 인정까지 밀고 나갈 만큼의 의지와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북 역시 ‘남조선’을 곧바로 국가로서 인정할 만한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못했다. 위기에 처한 당시의 상황을 우선 모면하는 데 급급했지 장기적인 비전을 차분히 재정립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듯 남북 모두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제약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낮은 수준의 합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남북기본합의서>가 <동서독기본조약>에 비해 상호 인정의 수준이 크게 떨어지는 불완전한 합의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문제가 없다.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그것을 극복해갈 방향도 정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낮은 수준에서 합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 그것이 마치 오히려 더욱 높은 수준의 심오한 합의의 결과였던 것처럼 생각한다면 문제가 된다.

실제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표현은 그러한 혼란을 유발할 여지가 없지 않다. ‘남북은 국가 대 국가로 서로를 (아직 능력이 부족하여)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뜻이 높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북은 애당초 두 국가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이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으면 이 구절은 마치 ‘우리가 지금 하나는 아니지만 결코 둘일 수 없다’라는 높은 민족적 이상에 남북 대표가 의기투합한 결과, 곧바로 국가연합이나 연방제 통일로 직행하려는 속마음이 이심전심으로 표현되었던 것처럼 과잉 해석될 수도 있다.(이 책, 53~54쪽)

앞서 인용했던 1997년도의 백 선생의 글이 바로 그런 과잉 해석의 두드러진 일례다.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바로 그 문제의 구절을 “국가연합 형태의 단초를 열어놓은 형국”이라거나, “연방제 통일로의 길도 열어놓았”고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일종의 연합관계를 추인”하는 것이라고 극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런 고평가는 이후 글에서 거듭 되풀이된다.

한쪽(DPRK)은 ‘고난의 행군’에다 ‘핵사찰’의 압박 속에서 생사존망의 위기에 빠져 있고, 휴전선의 삼엄한 대치와 긴장은 여전한데, 그러한 상황에서 ‘연방제 통일의 길’이 이미 열려 있고 남북 간 ‘연합관계’가 이미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강조한다? 실제 1991년은 그러한 ‘양국 평화공존 체제’의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열렸던 순간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한국 민주화운동 세력이 분열되고, 내외 냉전대결 세력의 힘이 압도하면서 금방 닫히고 말았다. 사정이 그러했기 때문에 1991년의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1997년에 돌아보면서 쓰는 글이라면, 그 가능성이 어떻게 열릴 수 있었으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빨리 닫히고 말았는지,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지적하는 글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랬더라면 훨씬 더 시의적절했을 것이다. 아쉬운 대목이다.

1997년 쓴 백 선생의 이 글이 왜 그렇게까지 낙관적인 글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분단체제론을 초기 입론한 1994년의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의 한반도 정세와 분단체제론」에는 유엔 동시가입과 기본합의서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1992년의 「분단체제의 인식을 위하여」에는 지나가는 말로 “남북 양쪽에서 제기된 국가연합을 전제한 민족공동체라든가 연방제, 연합성 연방제 등”이라고 딱 한 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 단계에서는 두 사건이 분단체제론의 입론에서 별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7년에는 이 두 사건에 대한 매우 높은 사후 평가가 분단체제론의 새로운 입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렇게 변화한 사정을 잘 알 수는 없지만, 시기상 남북 화해와 통일정책에 적극적이었던 김대중 씨의 집권 가능성이 생겼다는 상황과 연관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북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사정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어느 것이든 짐작일 뿐이다. 그렇지만 순전히 이론적 차원에서만 본다면, 백 선생의 분단체제론이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입론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미 19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 직후에 이 속에서 “분단체제의 장기화에 이바지할 가능성”, 그와 더불어 “분단체제극복운동에도 새로운 공간을 열어”줄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분단체제론 2기에는 ‘국가연합(또는 남북연합)’이 분단체제론의 키워드로 부상한다. 이 점이 1기와의 큰 차이다. 그런데 어떤 국가연합이든, 구 소련연방 국가들의 ‘국가연합(CIS)’이나 유럽연합(EU) 등 어떤 사례를 보더라도, 국가의 연합이라 하면 먼저 국가 간 국가로서의 완전한 상호 인정과 정식 수교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국가연합을 이룬 나라들은 국가연합 이전에 당연히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대사를 교환한다. 우리와 같이 한 민족이 두 나라를 이루고 있는 경우에 이 두 나라(ROK와 DPRK)의 수교관계란 마땅히 일반 외국 사이의 수교관계보다 더 높은 것이 된다. 그래서 동서독도 기본조약 이후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양국에 대표부를 설치했고, 일반 대사보다 급이 높은 장관급의 대표를 교환했다. 그것이 양국체제고, 그것이 전제되어 있지 못한 국가연합, 즉 ‘국가 간 정식 수교관계 없는 국가연합’이란 도대체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국가연합을 하자면 먼저 국가 간 수교가 당연히 선행해야 되지 않겠는가? 먼저 밥을 지어놓아야 그것으로 비빔밥이든 볶음밥이든 만들 것 아닌가. 밥도 해놓지 않고 비빔밥 나와라 볶음밥 나와라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애당초 불충분하고 불완전했던 것이 1991년의 유엔 동시가입과 기본합의서였다. 이것이 양국체제론의 시각이다. 그러나 백 선생은 그 유엔 동시가입과 기본합의서의 취지조차 그 후 북핵문제와 전쟁소동으로 빛이 바래버린 1997년에 이르러, 1991년에 남북은 이미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이뤄졌고, 더 나아가 기본합의서를 통해 “국가연합을 향한 더욱 실질적인 합의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조건이 무르익은 국가연합의 완성을 위해 이제 일로매진만 하면 된다. 이로써 분단체제론은 현실과의 실천의 접면을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국가연합의 완성을 위해 일로매진할 때, 앞서 1991년의 글에서 예고하였듯, ‘분단체제극복운동에 새로운 공간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새로운 공간이란 ‘분단체제 장기화’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분단체제론은 이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마련되어 있는 이곳, 국가연합(남북연합)의 터가 바로 분단체제론의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Hic Rhodus, hic salta! 동시에 바로 이곳이 ‘지평선 도달하기 운동’의 출발점이다. 이곳에 출발선을 그은 이상, 이제 여기서부터의 한 발짝은 모두 지평선을 향한 한 발짝이다. 우리가 발걸음을 떼는 만큼 우리는 지평선에 가까워진다. 분명하지 않은가! 지평선 도달하기 운동의 실체성, 실천성은 이로써 명확해진다.

백 선생이 “나라 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고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기본합의서 서문의 구절을 1997년에 이르러 그토록 높게 평가했던 이유를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분단체제는 하나의 체제다’라는 분단체제론의 명제에서의 강조점이, 이론 1기에는 ‘체제’ 쪽에 있었다면, 2기에는 ‘하나의’로 쪽으로 이동했다. 분단체제란 결코 둘일 수 없는, 둘이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체제다. 그렇다면 남북관계를 “나라 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고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했던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표현은, 이렇듯 (나라 대 나라 사이의) 둘의 관계가 아닌, ‘하나의’ 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특수한 관계”라고 하는 ‘분단체제’의 성격을 지극히 절묘하게 표현해준 것으로 읽힌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태를 “국가연합을 향한 더욱 실질적인 합의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와 등치하게 된다.

앞서 최원식 교수가 “분단체제를 상정한 남북연합론”이라 했던 표현의 근원이 어디였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다. 남북연합(국가연합)은 ‘하나의’ 체제인 분단체제를 상정하고 전제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하나의’ 체제인 분단체제를 상정하지 않고 ‘두 개의 나라’를 전제하는 양국체제론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는다. 이런 사고법에서는 양국체제가 안정되어야 비로소 정책연합이든 국가연합이든 통일로 가는 다음 단계가 가능해진다는 생각은 자리 잡을 데가 없어진다. 분단체제론이 국가연합과 함께 강조해온 남북 민중연대(또는 시민연대)도 양국 수교를 통한 안정된 민간 교류 속에서 훨씬 대대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가로막혀 있다. 다만 양국체제는 ‘국가연합과 연방제를 통해 통일로 직행하는 길’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로 간주될 뿐이다.

분단체제론 1기에서 분단체제 개념의 ‘과잉이론화’는 분단체제의 장기화와 분단체제극복 과제의 초역사적 보편화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2기에서의 과잉이론화는 분단체제가 국가연합(남북연합)의 전제조건으로 상정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로써 분단체제 자체가 국가연합이라는 적극적인 실천목표와 어느덧 엉켜버린다. 국가연합의 목표 실현을 위해서는 분단체제의 존속이 상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 국가연합(남북연합)은 분단체체론의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초점이 된다. 이로써 분단체제론은 분단체제의 존속을 상정해야만 하게 되었다. 앞서 이를 ‘분단체제론의 곤경(딜레마)’이라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분단체제론의 출발에서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었던 분단체제가 이제 ‘남북연합’이라는 분단체제극복운동의 목표와 뒤엉키면서, 어느덧 분단체제 자체가 적극적인 긍정의 대상으로, 처음과는 정반대의 존재로 환골탈태하고 만다. 앞서 이를 ‘분단체제론의 역설(패러독스)’이라 했다. 이 분단체제의 곤경과 역설은 이론 2기에 이르러 이제 그 전모를 완연히 드러내게 되었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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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0/05/2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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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2017년부터 준비되어 2018년 큰 물꼬를 텄고, 최근 하노이 북미회담에서 일시적 교착국면에 빠진 남북미 간 평화체제 정착은 어떻게 수순을 풀어야 할까? 남북관계든 북미관계든 핵심은 ‘신뢰의 확증’에 있다. 남북과 북미관계가 대화 지속 – 신뢰 축적의 트랙을 이어가면 남북·북미관계 서로를 선(善) 방향으로 추동한다. 그러나 지금 하노이 회담 이후 보듯, 북미관계에서 지체가 생길 수 있다. 그럴 때 남북관계의 주동성, 추동력이 더욱 부각될 수 있다. 남북관계의 게임의 차원을 바꾸는 것이, 북미관계의 게임의 차원을 바꾸는 일보다 우리의 주동력이 발휘될 수 있다. ‘양국체제론’은 남북관계가 동북아 주변관계에 최대의 주동성, 추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으로 구상되었다.

남북관계의 고리를 획기적으로 풀어나가는 방법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 신뢰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면 된다. 신뢰에는 ‘피상적 신뢰’가 있고, ‘심층적 신뢰’가 있다. 심층적 신뢰란 가장 기본적인,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신뢰를 말한다. 남북 간에 그렇듯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신뢰가 무엇이겠는가. 남북이 서로의 존재를, 존립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명환 교수의 글에도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있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정식 국교를 맺고 적대정책을 철회하더라도 남한의 존재가 위협이라는 현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고,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고 북한 사회가 개혁·개방에 노출될수록 북의 체제 운영자들은 정치적 위협을 심각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 북한 당국이 자신의 주민이 친족방문을 위해 남을 왕래하는 일을 허용하는 일은 상당 기간 기대하기 어렵다”는 부분이다. 김명환 교수는 이런 사정 때문에 양국체제는 어렵고, ‘남북연합만이 올바른 길’이라 하였지만, 김 교수가 언급한 내용이 필자에게는 오히려 김 교수의 주장을 반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북미 수교, 북일 수교는 가능하더라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교, 즉 ‘한조(韓朝) 수교’는 오히려 불가능하다고 보는 듯하다. 글쎄 그럴까.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라는 토픽이 미국과 일본의 정책 캐비넷에 올라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베까지도 이 판에 끼어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북미 수교, 북일 수교는 오히려 한조 수교가 물꼬를 터줌으로써 빠르게 뒤따라올 가능성이 더욱 크다. 왜냐하면 ‘근본적 신뢰의 확증 순서’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북의 안보조건에서 미국과 일본 쪽에 자신의 존립에 대한 근본적 신뢰를 먼저 확보하려고 할 가능성은 낮다. 반면 한국과는 그 가능성이 더 높다. 촛불 이후의 국면에서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앞서 김명환 교수가 말한 “남한의 존재가 위협이라는 현실”은 이제 북에게도 더 이상 그렇게 자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스스로가 북(DPRK)의 존립에 위협이 되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물론 30년간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단번에 일소한 촛불혁명의 힘, 그리고 그 힘에 의해 들어선 촛불정부의 역할 때문이다. 아니, 30년이 아니라, 코리아전쟁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의 민의가 이만큼 남북의 공존과 평화를 소망하는 방향으로 모아져본 적이 없다. 남의 한국도, 북의 조선도 이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조선 간에 그러한 ‘근본적 신뢰’를 확증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백낙청 선생, 그리고 백 선생을 항상 충실하게 조술(祖述)하는 김명환 교수도, 그 방법이란 ‘남북연합’이라고, ‘남북연합밖에 없다’고, 되풀이해왔다. 그런데 지금 이 마당에 그 ‘남북연합’의 방책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히 한 것이 없다. 필자가 본 단 하나의 예외라면 백 선생이 2018년 《창작과비평》 181호에 “미국이 어느 시점에 변심하여 북을 다시 침공하거나 적대정책으로 되돌아갈 태세가 되었을 경우, 이것이 곧바로 대한민국이 가담한 국가연합에 대한 침공 내지 적대가 될 수밖에 없도록 제도화해 놓는 일”이라 한 것인데, 이 정도로 높은 수준의 ‘국가연합’이란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국가 간의 관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누가 읽어도 당연히 그렇게 읽히는 말이다.(이렇게 읽은 것이 ‘오독’이고 ‘비약’이라는 김명환 교수의 반론에는 아쉽게도 무엇이, 왜, 어떻게 ‘오독’이고 ‘비약’이라는 것인지 설명이 없다. 다만 ‘기성 사회과학 교과서에 맞춰 재단한 탓’이라 하고 만다.)

현재 이 순간의 남북관계에서 생각해보자. 백 선생과 ‘분단체제론’에서는 현재 이 순간 역시 당연히 ‘남북연합’, ‘국가연합’ 상태다. 남북연합은 분단체제를 상정·전제하는 것이라 하니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재의 남북관계 또는 남북연합 관계에서 백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미국이 어느 시점에 변심하여 북을 다시 침공하거나 적대정책으로 되돌아갈 태세가 되었을 경우, 이것이 곧바로 대한민국이 가담한 국가연합에 대한 침공 내지 적대”가 된다고 어느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너무나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다. 그렇다면 백 선생이 그리는, 그렇듯 높은 수준의 ‘국가연합’까지 한참을 올라가야 할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높이 올라가기 위한 첫 계단, 첫 단추가 무엇이냐다. 나는 지금껏 여기에 대한 답을 들어본 바 없다.

그 답이 어려워서 그런 것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필자가 지난 글들에서 여러 차례 설명해놓았다. 기존의 남북 간의 고통을 아주 기본적인 수준에서 느껴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다 알 수 있는 문제다. 남과 북이 서로의 존립을 보장하는 신뢰의 확증이 무엇이겠는가? 그 첫 단추가 무엇이 될까? 상대방을 적으로, 붕괴와 소멸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확증 장치다. 지금 남과 북의 상태에서 무엇이 그런 확증 장치가 될까? 남은 북을, 북은 남을, 영토와 주권을 가진 정당한 국가 대 국가로서 서로 인정하고 이를 만천하에 공표하고 상호 대표부를 교환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과 조선 두 나라의 수교, 즉 ‘한조(韓朝) 수교’다. 이렇게 될 때 ‘분단체제’라는 과거의 룰은 폐기되고 ‘양국체제’라는 새로운 차원의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 이 ‘한조 수교’의 역사적 파급력은 1972년 ‘동서독 수교’에 못지않을 것이다. 동서독 수교 이후 상호 교류와 협력이 크게 증가했던 것은, 상호 간의 ‘근본적 신뢰’의 문제를 일차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두 국가가 상호의 존립을 위협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지켜질 것임을 서로가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018년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역시 그러한 근본적 신뢰를 확증해가는 과정이었다. 그 결실이 머지않은 미래에 맺어지기를 바란다. 한국이 북미 대화를 잘 중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이 있다. 남북이 만나는 모든 자리에서, 남북의 모든 논의와 합의가 어떤 쪽을 향해가고 있는지 방향감각이 무엇보다 우선 분명해야 한다. 그것은 ‘남북 간의 근본적 신뢰의 확증’이며 ‘남과 북이 서로를 정당한 국가 대 국가로 인정’하는 일이다. 북미 수교가 한조 수교에 선행하기보다, 한조 수교가 북미 수교를 성사시키는 경로가 더 현실적이다. 소위 ‘대북제제’ 문제도 ‘한조 수교’라는 역사적 임팩트에 틀 자체가 변용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김명환 교수는 여전히 북은 ‘남한의 존재의 위협’을 벗어날 수 없고, 남 역시 마찬가지로 ‘북한의 존재의 위협’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할까? 한 발 물러서 생각해보자. 물론 ‘한조 수교’가 이뤄지자마자 남북이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상태가 당장 100퍼센트 깨끗하게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사에 그런 일은 없다. 그러나 ‘한조 수교’가 이뤄지면 역사적 첫 단추가 채워진다. 게임과 트랙이 달라지는 것이다. 코리아의 지난 70년 적대 상태를 생각해보면, 당장 100퍼센트는 언감생심이고, 우선 절반만 해소된다고 하여도 획기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이런 것이 바로 ‘질적 변화’다. ‘위협’은 강박이어서 붙들려 있을수록 커진다. 기존의 ‘분단체제론’에는 그러한 ‘위협’을 넘어서고 극복할 담대한 전망이 부족했다.

그렇듯 질적 변화를 이루어내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그 후의 과정 역시, 그만큼, 또는 그보다 더욱 중요할 것이다. 상호 신뢰를 확인하고 쌓아가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배려들이 교환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매우 많다. 동서독 간 성공적 교류의 선례도 있다. 나는 ‘분단체제론’이 이러한 양국체제의 전망을 아주 적극적으로 포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원래 분단체제론은 분단체제를 비판하고 극복하자는 이론이었다. 분단체제론이 양국체제의 전망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러한 원래의 이론적 취지와 포부에도 부합한다.

 

독일 양국체제의 경험을 다시 생각한다

끝으로 앞서 몇 차례 언급한 만큼, 동서독 사례의 의미에 대해 첨언해보려 한다. 1970년대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동서독 수교(=<동서독기본조약>)의 의미를 다시 새겨볼 때가 되었다. 1990년대 초반 백낙청 선생이 분단체제론을 처음 입론하고 있을 때, 백 선생은 당시 이뤄졌던 독일의 흡수통일 사례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고, 그래서 독일과 한반도의 분단 원인과 통일 전망은 크게 다르다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당시 백 선생이 그러한 태도를 취했던 데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동구권이 붕괴하고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통일 되었던 당시에는 ‘북한 조기붕괴론’을 펴는 사람들 중에 독일식 통일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북한’은 어차피 곧 붕괴될 것이니까 한국은 서독처럼 흡수통일 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물론 허황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독일의 사례를 무조건 백안시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1970년대 동서독 수교와 독일 양국체제이지, 1990년의 흡수통일이 아니다. 1972년 동서독 수교와 1990년 흡수통일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벌어진 전혀 다른 사건이다.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제는 1990년대 초반에 독일 흡수통일의 스펙터클에 눈이 팔려 1970년대의 독일 양국체제 경험의 역사적 중요성을 놓치고 있지 않았는지 다시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백낙청 선생과 김명환 교수도 다시 주목해주기 바라는 대목이다. 1989~1991년 당시 남북의 ‘당국자’들은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시각에서 양국체제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북이 유엔에 동시가입할 수 있었고, <남북기본합의서>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볼 때도 대단한 용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정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남북 수교까지 이루었다면 코리아 양국체제는 이미 그때 성립할 수 있었다. 왜 이 길이 막혔던가? 누가 막았었나? 남쪽의 노태우 대통령도, 북쪽의 김일성 주석도 아니었다. 이들은 오히려 더 속도를 내서 이 방향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길을 막았던 것은, 이 책 1부 1장에서 상세히 분석해둔 바와 같이, 북미 수교를 거부하고 북의 조기붕괴를 도모했던 미국과 한국의 냉전대결 세력들이었다.

1970년대의 동서독 수교 – 독일 양국체제와 1990년대 흡수통일이 전혀 성격이 다른 사건이라는 것은, 흡수통일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반추해볼 시각을 1970년대 양국체제의 경험이 제공해주고 있다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독일 흡수통일의 최대 문제는 동독을 내부 식민지로, 동독인을 열등국민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통일독일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동구권 – 소련 붕괴라는 충격 속에서 통일과정이 눈사태와 같은 파국적 양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 체결 이후 1989년 소련·동구권 붕괴 이전까지 독일의 양국체제는 동서독의 차이를 장기적이고 점진적으로 줄여나간다는 분명한 공동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독일 양국체제의 경험이 우리에게 여전히 귀중한 타산지석이 되는 이유다.

더구나 과거 독일 양국체제를 둘러싼 국제적 상황에 비해 오늘날 코리아 양국체제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훨씬 더 안정적이다. 1970~1980년대 미소 간의 적대와 대립은 오늘날 미중, 미러, 또는 중일 간의 갈등에 비해 훨씬 날카롭고 높았다. 냉전 이후 세계는 진영 간 이념 적대가 사라지고 국가 간 지역 간 상호 의존이 깊어졌다. 필자는 이러한 새로운 세계상황을 ‘후기근대’로 정의하면서, 이 새로운 역사 단계의 세계사적 의미에 대해 여러 차례 분석하고 음미해본 바 있다. 후기근대에는 과거 소련·동구권 붕괴와 같은 진영 붕괴가 발생하지 않는다. 과거와 같은 수준의 진영 자체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중국 혹은 미국이 머지않아 과거 소련과 같이 극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이 세계의 그 많은 ‘전문가’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없는 이유다. 그리고 이는 코리아 양국체제가, 성공적으로 정립되기만 한다면, 과거 독일의 양국체제보다 훨씬 성공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예상해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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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0/06/25-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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