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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26주년 되는 날의 소회 (2)- 연구소 비리 관련자들과 맹목적 옹호자들, 정녕 임종국 선생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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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26주년 되는 날의 소회 (2)- 연구소 비리 관련자들과 맹목적 옹호자들, 정녕 임종국 선생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익명 (미확인) | 목, 2019/02/07- 02:02

2019. 1. 1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26주년 되는 날의 소회 (2)
– 민족문제연구소 비리 관련자들과 맹목적 옹호자들, 정녕 임종국 선생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내가 제명된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런데 이사회의 제명 결정서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결정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정관에 의거 이사회에 주어진 권한에 따라 참석 이사 전원의 찬성으로 회원 여인철을 제명 처분한다. (51차 이사회는 이사 8인 중 이사 강만길을 제외한 7인이 참석하였으며, 여인철씨의 제척사유 주장에 따라 이사 임헌영과 조세열은 의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죄목(?)으로 제명당한 것인지가 나와있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할때 “정관 몇조 몇항에 의거, 무슨 죄목으로 제명함” 정도는 기본적으로 결정서에 담겨야할 것 같은데 그저 “정관에 의거”,  “이사회에 주어진 권한에 따라” 제명처분했단다.

제명의 이유는 당사자인 내가 추측하기에는, 아마도 내가 총회 때 정관개정을 통해 회원의 대표기구인 운영위원회의 기능과 위상을 축소시킴으로써 권한을 강화하려는 집행부의 기도에 반대하며 성명을 발표하고 총회장에 들어가 반대의사를 밝힌 것 등의 일련의 행동에 대한 응징일 것이다.  나를 괘씸죄로 회원에서 제거하면 될 줄 알았을 것이다.

지금 3공, 5공 시대인가? 내가 폭력을 쓴 것도 아니고, 말과 글로 문제제기한다고 제명을 하다니.  더구나 지부장과 운영위원장까지 지내며 20여년을 헌신하며 회원 활동을 한 사람을…

어떤 이사는 내가 “조직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했다 한다.  지난 20여년을 헌신한 사람이 왜 이제 와서 조직에 있어서는 안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작년 5월 11일자로 제명된 후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민바행)을 동지들과 만들어 함께 행동해 왔다.  처음엔 운영위원회를 쪼그라뜨리는 정관 개악에 반대하며 시작했지만 지금은 문제의 양상과 심각성이 크게 달라졌다.

민문연과 투쟁하면서 알게 된 것은 민문연의 비리 비행 부정의 폭과 깊이가 생각 외로 넓고 크다는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크게 찍힌 꼴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결국 민바행에서 첫 민원을 낸 작년 7월 초 이후 5개월만인 12월 14일 감독관청인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형사고발보다 한 단계 낮은 처벌인 경고처분과 시정조치를 받았다.  4일간이나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나온 행정처분이며 결코 가볍지 않은 처벌이다.

경고처분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문제는 심각하다.
미승인 정관 사용에 ‘엄중경고’,  ‘기부금 부적정 사용’에 기관경고, 그리고 시정조처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사장을 포함한 이사 전원(5명)과 감사 전원(2명)은 경고처분을 받았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표면적 경고 이유는 미승인 정관 사용(임의로 “운영” 정관을 만들어 사용)이지만, 그 이면의 핵심은  지난 십수년동안 법적 효력이 있다는 “신고 정관”-회원들이 그 존재와 용도를 알지 못한- 을 이용해 “회원 10명”으로 총회를 열어오면서 전국의 1만 3천여 회원들을 속여온 것이다.

그리고 “회원 10명”의 구성원이 ‘이사 5명과 상근자 5명’이라니, 그들이 회원 몰래 총회를 열어 주요 사안을 결정해 왔다는 건 실질적으로 몇몇 상근자들이 운영위원회(회원)의 뜻을 무시하고 저들 마음대로 민족문제연구소를 주물러왔다는 것이다.

그 십수년 동안을 회원과 회원을 대표하는 운영위원회는 있으나마나, 그냥 허울로만 존재한 것이다.  그러니 회원으로서, 회원의 대표격인 운영위원장 으로서 분노가 이는 것이다.

어느 시민단체에서 이런 망나니 사기극을 벌이는가?  그런 속임수를 획책한 핵심 상근자들은, 그리고 그 책임자는 그러고도 그 자리를 지키려 하는가? 그 자리를 지키고 싶은가?

그리고 교육청에서는 “기부금 부적정 운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부적정”하게 “운영” 했다는 것의 의미가 무언지 밝혀져야 한다. 돈을 어떻게 걷어서,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의 회원은 10명”이라며 신고한 집행부의 의사록에 대해 “흠결이 없다”고 한 서울시교육청의 판단대로라면 1년에 십수억원씩 들어오는 기부금품 처리에대해 기부금품법 위반 여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공무원이 불법을 인지했을 때 고발해야한다는 의무를 피해가기 위해 고의로 봐주기 처분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아직 남아 있다.

어쨌든 감독관청으로부터 위와 같은 내막의 행정처분을 받은 것은 우리 민족문제연구소로서는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도대체  민문연 집행부는 전국의 회원과 국민을 속여가며 그동안 무슨 짓을 해온 것인가?

18년만의 일이다.  2000년에 민문연이 서울시 동부교육청으로부터 고발조치 처분을  당했을 때는 이사 전원이 사퇴를 했다.  그래도 그때의 이사진은 양심이나 염치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민바행에서는 지난 1월 12일 성명을 통해 작금의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임헌영 소장과 지난 십수년 동안 “회원 10명”으로 회원들을 우롱해온 조세열 당시 사무총장과 방학진 사무국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다.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민바행 측을  법적 조치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시면서도 친일연구에 몸 바치신 고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세워졌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받들어야 할 그분의 정신은 무엇인가?  바로 친일연구를 하다가 알게 된 아버지의 친일 행적까지도 친일 자료에 남기는 엄정함, 그리고 가난과 질병에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친일연구에 매달린 기개 아닌가?  그(분) 덕에 오늘날의 민족문제연구소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에 그런 엄정함과 기개가 남아있나?  그저 오로지 끼리끼리, 패거리 정신과 기득권 지키기 소유욕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임종국 선생은 또 친일한 인사들이 반성하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개탄했다.  그런데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비리와 부정에 연관되거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을 “음해 세력”이라며 공격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비리 관련자들, 그리고 맹목적 비호자들, 정녕 정신적 사표여야 할 임종국 선생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2019. 1. 16.
회원가입 26년째 되는 날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제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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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지회 회원들, 재일동포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 있는 자료 다량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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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우편으로 보내온 기증 자료들 / 최정부님의 민족학교 재학 때 사진들 / 조영숙 회원의 남편 작업복

도쿄지회(총무 조영숙) 회원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용 자료들을 다량 보내왔다. 기증자는 최정부, 조영숙, 남영자 세 분으로 모두 혈연관계이기도 하다. 기증 자료들 대부분은 사진이며, 그 외 외국인등록증명서, 상호부조증서, 작업복, 책자 등도 함께 보내왔다. 보내 준 사진이나 자료마다 일일이 조영숙 총무가 자세하게 설명을 적어놓아 기증 자료에 대한 해설만으로도 작은 책 한 권이 될 정도이다.
최정부 님(1941년생, 최리순 회원의 부친)은 원 호적지가 경북 의성으로 1947년 도쿄 오오타구 지역의 최초의 민족학교인 조선 카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일본의 민족교육 탄압으로 ‘도립조선인학교’를 거쳐 도쿄 조선 중,고급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바에서 건축설계사 취업에 도전했지만 민족차별, 취업차별로 좌절했다. 그 후 삼촌집에서 주물, 고철 수집 등의 일을 도우면서 22세 때 남춘자님과 결혼했고 청년연맹활동(오오타구 청년동맹 부위원장)도 열심히 했다. 2004년 한국 국적으로 변경했으며, 슬하의 2남 2녀는 물론 외손자 모두 조선학교를 졸업했거나 다니고 있을 정도로 민족의식이 투철하다. 따님인 최리순 회원을 통해 보내주신 자료는 해방 후 초기 민족학교 관련 사진들과 청년동맹 시기의 사진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해방 후 초기 도쿄지역의 재일동포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삿포로 동계올림픽 응원사진, 도쿄 청년본부 주최 역전마라톤 대회 사진, 총련 씨름대회 중앙대회 모습, 청년동맹 행사와 각종 활동사진 등은 사료적 가치가 높다. 그밖에도 결혼 이후 식구들의 삶을 보여주는 사진들도 함께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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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숙회원의 딸 남영자의 어린 시절 사진들

조영숙 회원의 식구들이 보낸 사진 자료도 사연이 아프다. 조영숙 회원의 경우 1985년 8월 27일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동포 3세와 결혼한 ‘뉴카마 New Comer’이다. 일본에서의 생활을 통해 재일동포들의 삶과 아픔에 대해 이해, 공감하게 되었고, 1985년 8월 일본에서 ’외국인등록증‘을 받으면서 자신의 삶이 ‘그 이전의 역사’와 ‘그 이후의 역사’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본인의 ‘외국인등록증명서’과 함께 기증한 사진들은 ‘그 이후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것이며, 그 시작이 ‘외국인등록증명서’라고 기증 취지를 밝혔다. 그 외에도 따님인 남영자(이번 수련회에 남편과 함께 참가)의 사진들과 재일동포인 남편(남경출)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낡은 작업복 등도 함께 보내왔다.
이번 자료 기증에 애를 쓴 조영숙 총무는 지금도 차별과 각종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재일동포들의 삶을 모국이 알아주고 관심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증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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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 히구치 유이치(도쿄 고려박물관 관장)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가 「경성용산시가지도」(1908)를 기증했다. 지도의 앞면에는 용산 병영지초기배치모습, 관공서, 통감부, 서대문감옥 등이 표시되어 있고 뒷면에는 광고가 빼곡히 자리잡고 있는데 파성관 호텔, 여관 천진루 등 일본인 가게와 주요 사업체의 광고를 확인할 수 있다.
7월 4일 와카타니 마사키 씨가 ‘1944년 9월 인천송현공립국민학교 제1회 졸업기념 촬영, 정신대원 7명의 환송회’라고 쓰여 있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환송회 기념사진 등 총 5점을 기증했다. 이와 함께 식민 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10만 엔(약100만원)을 후원했다. 일본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 3인이 7월 6일과 7일 양일에 걸쳐 소장자료를 기증해 주었다. 나카가와 히사코(삼광작전조사회) 씨는 보고자료 「金学順さんをしのぶ会」 (1998)와 1990년대 활동하면서 찍었던 일본군위안부 5명(강순애, 김상희, 김학순, 박복순, 황금주, 모두 작고)의 사진 등 총 35점을 기증했다. 구리하라 요시코(新聞うずみ火 기자) 씨는 황금주 할머니의 사진 10점을, 쓰보카와 히로코(「慰安婦」問題解決オール連帯ネットワーク) 씨는 김상희 할머니의 로사리오(천주교 묵주)를 기증했다.

심정섭 지도위원 제56차 자료기증, 도서류, 문서류 총 51점 보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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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1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제56차 자료기증을 했다. 이번 기증자료는 학교단체 사진 등 문서와 도서다. 또한 본인이 편저한 <졸재조병조시문집졸재유고>(2017)를상근자 전원에게 기증하였다.
6월 8일 김재범 씨가 <심산 김창숙 평전> 등 도서 11권을 기증했다.
6월 30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이었던 구수미 회원이 만주지역 관련 자료를 기증했다.
7월 20일 서양수 회원(서울남서지부)이 연구소를 방문하여 1965년부터 2007년까지 기록한 「同年契」 1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7/08/0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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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은 1938년 대구 수동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해 무역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확장해 가던 그는 1961년 5.16쿠데타 직후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된다. 하지만 박정희와 만나 군부 세력에 적극 협조를 약속한 뒤 감옥행을 면한다. 1966년에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서울지검에 소환돼 계획적 밀수로 폭리를 취하고 정치자금을 조성했단 혐의 등을 받았지만 법적 책임은 이병철 회장 대신 삼성의 부하 직원이 졌다.

그의 대를 이은 이건희 회장도 군사독재정권 기간 삼성을 급성장시킨다. 때로는 세금포탈 혐의로, 때로는 불법 정치자금 제공이나 비자금 조성, 로비 의혹 등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그가 구속 수사를 받거나 감옥에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삼성 재벌 3세 이재용 부회장 역시 이번에 구속을 면했다. 특검이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 씨 일가에게 수백억 원 대의 뇌물을 공여한 혐의 등으로 이재용 부회장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이 19일 새벽 이를 기각한 것이다.

3대에 걸쳐 대물림되고 있는 삼성가의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의 역사. 그리고 3대에 이르도록 단 한번도 삼성재벌 총수를 법의 심판대에 제대로 세워보지 못한 사법 시스템, 대한민국의 법은 과연 언제 ‘법 위의 삼성’ 신화를 깰 수 있을까?


리서치,구성:이보람
편집:박서영

목, 2017/01/1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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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 항일단체 노래 총정리한 <항일음악 330곡집> 눈길

1910년 8월 29일 기어이 한반도와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게 됐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기어이’는 2가지 뜻을 가진다고 한다. 하나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다음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라는 뜻이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빼앗겨 가고 있지만 그래도 설마설마 나라마저 없애겠냐 싶던 이들에게 ‘기어이’는 첫 번째 의미일 것이고, 어떻게 해서라도 일제에 빌붙어 공을 세우고 싶었던 이들에게 ‘기어이’는 두 번째 의미일 것이다.

경술국치 107주년을 맞이해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야 할 책이 한 권 나왔다. 바로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항일음악 330곡집>(노동은 편저, 민연주식회사)이다. 무려 728쪽, 가격은 7만 5000원이다.

자장가에도 광복 의지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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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음악 330곡집> 표지 ⓒ 민족문제연구소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는 우리 역사 중 가장 중요한 대목 중 하나다. 그런데 독립운동 단체가 너무나 다양하고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설명하기 힘든 것이 우리 독립운동사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그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보게 됐다. 700쪽이 훨씬 넘는 어지간한 아령 무게만한 책은, 그 질감만으로도 ‘정말 엄청나게 했구나’라는 느낌이 절로 들게 한다. 

책은 단순하다. 곡마다 노래의 악보 한 쪽, 노래 설명 한 쪽으로 구성됐다. 다만 노래가 330곡이나 되다 보니 700쪽이 훨씬 넘는 것이다. ‘노래 모은 것이 뭐 중요하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떠돌이 생활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무슨 백서나 체계적인 기록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노래로 자신의 신념과 정당성을 되새기고 알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역사를 전공한 필자도 전혀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스코틀랜드 노래 ‘올드 랭 사인’에 애국가 가사를 붙인 ‘독립군 애국가’ 정도만 알 뿐이다.

이 책이 대단한 건 330곡 목차만 보고 있더라도 독립운동에서 어떤 세력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종교적으로는 천도교, 대종교, 기독교가 있으며, 성향으로는 보수적인 위정척사부터 공산주의자까지 다양한 세력이 있었다.

독립운동단체들이 저마다 노래를 만들었기 때문에 제목이 같은 경우가 많았다. ‘애국가’라는 제목의 노래가 총 12곡이나 되며, ‘혁명가’ 5곡, ‘독립가’ 4곡, ‘조선의 노래’ 4곡, ‘용진가’ 3곡, ‘망향가’ 3곡, ‘전진가’ 3곡, ‘운동’이 3곡이다.

항일음악 보급에 가장 매진한 사람은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김인식 선생, 이범석 장군이었다. 특히 안창호 선생은 ‘애국가’와 ‘학도가’를 직접 작사하기도 했다.

역사적 인물이나 독립운동가에 대한 노래도 있었다. ‘단군가’, ‘도산선생 추도가’, ‘민충정공(민영환) 추도가’, ‘안중근 옥중가’, ‘우덕순(안중근과 함께 이토히로부미 처단을 결의한 사람)의 노래’, ‘을지문덕’, ‘이동녕선생 추도가’, ‘전씨(스티븐슨 사살한 전명운 의사) 애국가’, ‘정몽주 추모가’, ‘정숙(3.1운동 당시 일제에 참혹하게 피살된 소녀) 추도가’ 등이 있다.

또한 이 책은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 시대순으로 노래를 나열했는데, 가사를 읽다 보면 절로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10년대까지는 고어체에 가까웠던 우리 말이 1930~1940년대를 지나면서 현대어로 변해 가는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국어사적으로도 중요한 자료라 생각된다.

책에 숱한 노래가 있지만 필자의 가슴을 울린 노래는 ‘자장자장’이라는 노래다. 제목에서 짐작했듯이 일종의 자장가이다. 1910년대 초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노래는 작사 작곡자가 누군지 모른다. 자장자장 3절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장하다 자장자장 얼는 소학교
장하다 자장자장 발셔 중대학

박사동이 되고서 영웅동이 되어라

우리나라 광복사업에 아라 자장

우리 조상 중 어떤 이들은 자장가를 부르면서도 이 아이가 자라서 광복을 이끌길 바랐던 것이다. 다음으로 가슴을 울린 것은 ‘처의 명상’이라는 노래다.

보내는 가슴 씨원하랴 부디부디 잘가시오
인제가면 언제오나 언제나오나 정치없이 떠나는 설음의길
떠나는 몸도 쓰라려요 부디부디 잘있소
인제가면 오지못할 영원의길 쓰라린 이몸도 영 못만난다오
십년만에 만난 동생 이름조차 못 묻고
떠나는 얼굴에는 눈물만 젖어 이내몸 갈길이 아득하여요

보내는 사람 가는 사람 서로서로 울면서
손을들며 인사하며 눈물 흘리며 영원한 행복의 고개를넘자

이 노래도 작사 작곡자는 모르며, 중국 요녕성 일대에서 불러졌다고 한다. 정확한 통계를 낼 순 없지만 독립군에 나선다는 것은 80~90%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용케 살아남더라도 전쟁터에 휘말려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가족을 다시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 노래 역시 장송곡이나 다름없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다.

이렇게 독립운동가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기에 전 세계로부터 ‘일제가 무너지면 당연히 한민족은 독립해야지’라고 인정받았던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부르던 330곡을 모으는 건 매우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곳곳에 남아 있는 파편을 수십 년 간 모으고 모은 결과물일 것이다. 이 역작을 낸 사람은 한국근현대음악사 권위자인 고 노동은 한국음악연구소장이다.

그는 한국 근현대 음악 관련 책을 30여 권 썼으며, 논문도 400여 편이나 남겼다. 안타깝게도 노 소장은 작년 12월 2일 지병으로 작고했다. 그가 남긴 원고를 가족과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해 이 책으로 만들었다. 비록 그는 갔지만 이 책은 독립운동사를 알리는데 매우 귀중한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나라를 빼앗겼나

경술국치 107주년이다. 경술국치가 언제인지도 모를 뿐더러 우리는 경술국치가 어떤 과정에서 이뤄졌는지 거의 모르고 있다. 부끄럽기 때문에 덮어 버린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나라를 빼앗겼을까?

1910년 7월 23일, ‘강경파’인 3대 통감 데라우치가 입국했다. 그의 임무는 단순했다.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완전히 일제의 통제 하에 두도록 기반을 닦는 것이었다. 데라우치가 입국하자 대한제국 멸망은 기정사실화가 됐다.

친일파에게는 이제 어떻게 하면 자신의 공을 더 인정받느냐가 핵심이었다. 당시 내각을 쥐고 있던 이완용과 일본서 일진회를 거느린 송병준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누가 먼저 일본의 마음에 드는 안을 가지고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 할 것인가? 결국 이 경쟁에서 이완용이 승리하게 된다.

8월 4일, 이완용은 비서 이인직(<혈의 누>를 쓴 사람)을 통해 데라우치에게 병합을 건의한다. 데라우치는 측근들에게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든다”며 환영했다.

8월 중순이 되자 이완용은 병합에 반대하는 인사를 통감부에 알리며 충성심을 끊임없이 내보였다. 한편으로는 총리대신 권한으로 병합 반대파인 학부대신 이용직을 일본 수해 위문 사절단으로 보냈다. 물론 이용직은 이완용의 속셈을 간파하고 와병을 핑계로 일본에 가지 않았다.

8월 15일, 순종 황제는 이재면을 흥친왕으로 봉했다. 흥선대원군의 첫째 아들인 이재면은 동생인 고종 황제에 대해 경쟁의식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면 왕이나 황제가 될까 노력한 끝에 드디어 일제에 의해 왕으로 봉해진다. 이는 일제가 한일병합 때 친일성향 황실대표로 참석시키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8월 16일, 데라우치는 한일병합조약안 초안을 이완용과 조중응(농상공부대신)에게 협의토록 했고, 18일 내각회의에서 조약 내용과 절차를 결정했다.

8월 20일부터 일제는 전국에 흩어진 군대를 한성으로 집결토록 했으며. 2명 이상 모여 회합을 한다 싶으면 무조건 체포했다. 당시 한성 각 지역 경찰서 구치감에는 수천 명이 체포된 상태라고 하기도 한다. 일제는 궁궐 인근 평균 30미터 당 군인 1명씩 배치해 삼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8월 22일, 이완용은 (병합 반대파인 이용직에게는 알리지 않고) 어전회의 개최안을 순종에게 요구했다. 순종은 순순히 응했다고 한다. 이날 오후 1시 어전회의 개최 칙명이 내려졌다. 오후 1시, 칙명에 따라 이완용은 내각 대신을 소집했고, 황실대표로 흥친왕 이재면이 함께 했다. 오후 2시 순종 황제가 회의장에 등장했다. 순종 황제는 통치권 이양을 선언하고 병합조약체결 전권위원으로 이완용을 임명한다는 안에 옥새를 찍었다.

전권위원이 된 이완용은 데라우치가 기다리는 통감관저에 ‘뛰어서’ 갔다. 오후 4시, 일본 측 전권위원 데라우치가 조약안에 서명함으로써 한일병합조약은 성립됐고, 그날 저녁 통감관저에서 연회가 열렸다. 그러나 민중의 반발과 마침 27일이 순종 황제 즉위일이라 바로 발표하지는 못하고 29일에 발표하기로 했다.

8월 23일에는 토지조사위원회 설립안이 통과됐다. 이는 한반도 토지 수탈을 위한 기반이 됐다. 8월 26일경 기자들에게 병합조약안이 통과됐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8월 28일 조약안 전문이 언론사에 전송됐다.

그리고 운명의 날인 1910년 8월 29일. 순종 황제의 조칙으로 한일병합조약안이 공표됐다. 옥새만 찍혔고 황제의 수결(사인)은 없었지만 어쨌든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경복궁에 일장기가 내걸렸고, 새 지배자인 일본 메이지 천황 조서와 조령이 발표됐다. 대한제국은 대일본제국 조선국으로 강등됐고, 순종은 이왕 전하·고종은 이태왕 전하로 부르고 일본 황실에 배속했으며, 모든 통치권은 조선총독부(임시로 통감부)가 관장한다는 것이다.

<2017-08-29>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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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기] 항일음악 330곡집

화, 2017/08/29-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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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물스럽다”며 석상 철거 청원·순종 동상은 역사 왜곡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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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 원시인 석상 [대구 달서구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대구=연합뉴스) 최수호 기자 = 대구 기초자치단체가 도심에 설치한 대형 조형물에 비판 여론이 일어 속앓이를 하고 있다.

달서구는 최근 2억여원을 들여 깊이 잠든 원시인을 형상화한 길이 20m, 높이 6m 석상을 진천동 도로변에 설치했다.

달서구가 2016년부터 국가사적 제411호 진천동 입석이 있는 선사유적공원 일대를 ‘선사시대 테마거리’로 조성하는 사업 가운데 하나다. 사업 기획과 디자인은 공익광고 전문가 이제석씨가 맡았다.

지난해에는 돌도끼로 도로안내판을 내려치거나 밝은 표정으로 운전자에게 손을 흔드는 원시인 모습을 담은 조형물과 표지판을 선보여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대형 석상을 두고 인근 주민 반응이 썩 좋지 않다.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고 겁난다”, “조형물이 너무 커 영업에 지장이 있다”는 여론과 함께 주민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석상 인근 상인은 2천197명 서명을 받아 달서구의회에 원시인 조형물 철거 청원을 했다. 석상 철거를 요구하는 집회도 열 계획이다.

달서구의회 복지문화위원회는 오는 26일 제254회 임시회에서 관련 내용을 검토해 본회의 상정 여부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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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성공원 앞 순종 동상 [대구 중구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달서구 관계자는 “청원이 구의회 본회의를 통과하더라도 법적 강제성은 없다”며 “조명 설치 등 석상 주변 환경을 보완할 수 있지만, 철거는 어렵다”고 말했다.

중구가 다크 투어리즘(역사교훈 여행)을 내세워 달성공원 앞에 세운 순종 동상도 역사 왜곡 논란과 철거 주장에 시달린다.

중구는 2013년부터 70억원을 들여 수창동∼인교동 2.1㎞에 벽화 설치, 쉼터 조성 등 ‘순종어가길 조성사업’을 했다. 순종이 대구를 다녀간 사실을 토대로 대례복 차림을 한 5.4m 높이 동상도 설치했다.

순종은 1909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경상도 지방을 순행했다. 왕을 앞세워 일본에 저항하는 백성에게 순응할 것을 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순종은 화려한 대례복이 아닌 제복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홍석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장은 “반일 감정을 잠재우려는 일제 속셈을 알고도 따라나선 순종 처지를 안다면 이를 관광 상품화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며 “게다가 순종을 화려하게 표현한 것은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고 지적했다.

이어 “오히려 순종이 일제 강압에 억지로 끌려 나온 모습을 표현했더라면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사업 취지에 부합했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6·13지방선거 중구청장 출마를 선언한 예비후보 사이에서도 동상 철거에 찬·반 의견이 엇갈린다.

중구 관계자는 “순종 동상을 두고 찬·반 의견이 있지만 동상을 철거하거나 주변을 보완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2018-04-05>연합뉴스
☞기사원문: 원시인 석상·순종 동상 철거 주장에 대구 지자체 속앓이

목, 2018/04/05-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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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友訪我酬酌吟

 

每夜孤酣樂(매야고감락)

蝸廬化別宮(와려화별궁)

月明逢李杜(월명봉이두)

三者意無窮(삼자의무궁)

 

고향 벗이 나를 찾았기에 술잔을 주고받으며 읊다

 

밤마다 외롭게 술 마시며 즐기니

낡은 오두막도 특별한 宮이 되네

달 밝으면 이백과 두보도 만나며

세 사람의 詩意 또한 무궁하다네.

 

<時調로 改譯>

 

밤마다 獨酌 즐기니 오두막도 別宮 되네

휘영청 달이 밝으면 李杜도 만나게 되며

세 사람 읊는 詩의 뜻 그 또한 끝이 없네.

 

*酬酌: 술잔을  서로  주고받음  *每夜: 야야(夜夜).  매일  밤마다  *酣樂: 술을

마시며  마음껏 즐김  *蝸廬: 달팽이의  집이라는  뜻으로, 작고 초라한 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別宮: 특별히 따로

지은  궁전  *月明:  달빛이  밝음  *李杜: 이백과  두보를  이름  *三者: 세 사람.

 

<2017.7.25, 이우식 지음>

화, 2017/07/25-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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