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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를 넘어 ‘다시 개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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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를 넘어 ‘다시 개벽’으로

익명 (미확인) | 금, 2019/02/01- 13:30

1. 무엇이 근대이고 어째서 개벽인가

꼬장꼬장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꼬치꼬치 따져야 할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지난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근대론과 개벽론이 서걱서걱 착종되어 있습니다. 근대는 무엇이고 왜 개벽인가 흐릿하고 희뿌옇습니다.

‘New’와 ‘Modern’은 다릅니다. 새로운, 이라는 형용사와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근대는 엄격하게 분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새 시대가 곧 근대는 아닙니다. 앙시앙 레짐에서 탈피한다고 하여 아무데나 ‘근대’를 갖다 붙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근대’라고 수식할 수 있는 시대가 너무나도 많아집니다. 자칫 ‘근대 이후’(Post-Modern)조차 ‘근대’(New)가 됩니다. 사실상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作)이 중요한다 한들, 그간의 숱한 ‘술’(述)을 죄다 기각시켜버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게 가볍게 퉁-치기에는 근대에 대한 치열하고 치밀한 논의들이 너무나도 많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저는 근대의 숨은 주어가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백낙청 선생의 견해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다만 그 주창자 월러스틴처럼 14-15세기 지중해까지 거슬러 오르는 것에는 회의적입니다. 여전히 아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형 세계체제가 작동할 무렵이었습니다. 19세기 이후에나 일어나는 동/서 역전을 지나치게 먼 시기까지 소급 적용하고 있습니다. 또 이은선 선생님의 지적처럼 조선을 ‘조숙한 근대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유교적 근대’에도 수긍하는 쪽입니다. 글로벌 히스토리, 세계사 다시 쓰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성의 많은 특징이 송나라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송 이후의 원, 즉 몽골세계제국의 유라시아 네트워크를 통하여 그 근대성의 씨앗들이 동서남북으로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고려와 조선은 그 영향 또한 일찍 받았음이 자연스럽습니다. 조선이 과거제로 운영되는 고도의 합리적 관료제 국가를 일찍이 이룬 까닭입니다. 그 다기한 복수의 (초기) 근대성이 19세기 이후 서구적 근대성으로 획일화되듯 보였다가 목하 서구/비서구를 가르지 않는, 신대륙/구대륙을 나누지 않는 지구적 근대성으로 합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구적 근대(후기 근대?)의 발현에 지난 200년 주눅 들었던 비서구의 다양한 가치들이 재기하고 재활하는 대반전의 형세입니다. 대체로 김상준 선생의 역작 <맹자의 땀, 성왕의 피>에서 그려내었던 중층근대성 이론에 가까운 축입니다.

역사적 시간은 축적되는 것이지, 물리적 시간처럼 차원 변경이 여의치 않습니다. 하여 ‘중국적 성인질서의 탈피’가 곧 근대라는 발상에 동의하기 힘듭니다. 그러하면 동학이 탄생했던 1860년이라는 시점의 유별남과 각별함이 도리어 탈색되고 맙니다. 탈중국은 이미 부차적인 무렵이었습니다. 아편전쟁 이래 중국은 벌써 을로 전락했던 시점입니다. 동학 창도와 베이징조약 체결이 같은 해라는 점은 여러모로 상징적입니다. 당시 중국은 영국과 프랑스에만 굴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연해주, 한반도보다 훨씬 넓은 강역을 러시아에 통째로 넘겨준 해가 바로 1860년입니다. 비단 영토 상실로 그치지만도 않았습니다. 제국의 중심, 자금성이 함락되고 원명원은 불에 타는 수모마저 겼었습니다. 그로써 조선은 졸지에 낯선 동방정교회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는 전례 없는 시대로 휘말려 들어갑니다. (돌아보면 남/북 분단의 먼 기원입니다.)

즉 서세동점의 갑질에 중국조차 대응할 역량이 없음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 또한 스스로 떨쳐 일어서야 했던 것입니다. 탈중국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며, 서구에 대한 대응이야말로 시급한 시대과제였습니다. 그래서 명명 또한 ‘東學’이었던 것입니다. 명명백백 서학에 대한 응수였습니다. 서세의 약진에 대한 주체적이고 자각적인 반응의 소산이었습니다. 비단 황해 건너 중국만도 아닙니다. 1853년 동해 지나 일본에도 시커먼 페리 함대(흑선)가 당도했습니다. 1857년 저 멀리 남쪽 인도양에서는 세포이항쟁이 진압되고 무굴제국이 몰락했습니다. 지중해는 또 어떻습니까. 크림전쟁으로 오스만제국의 핵분열이 시작된 것도 1853년입니다. 대청제국, 무굴제국, 페르시아(사파비드)제국, 오스만제국 등 포스트-몽골 시대를 주름잡던 유라시아 제국들이 공히 쇠락해가던 무렵입니다. 유라시아의 서쪽 모퉁이, 서구 국가들이 집단적으로 굴기하던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시세입니다. 산업혁명 이래 자본주의(물질개벽)의 힘이 동서남북 도처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고 있던 것입니다. 서구의 내부에서조차 ‘악마의 맷돌’을 수습하려는 <공산당 선언>(1848)이 나왔을 만큼 그 기세는 파상적이었습니다. 즉 1860년이면 이미 중화세계보다는 지구적 맥락이 더 중요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세계체제로 편입되어가는 대전환기의 벽두에 ‘다시 개벽’이라는 일성(一聲)이 터져 나왔다는 점이야말로 동학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다나카 쇼조

그 절치부심 속에서 유학은 부채가 아니라 자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침몰하지 않고 튕기어 되오를 수 있는 저력에 유학국가 500년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고 여깁니다. 이걸 사뿐히 소거시킨 얼치기와 양아치들이 개화파 아니었던가요? ‘중국적 성인질서의 탈피’를 곧 ‘근대’라고 규정한다면 개화파들이야말로 그 과제를 철두철미 철저하게 수행하려고 했던 것 아닐지요? 후쿠자와 유기치가 표방한 “탈아입구”(脫亞入歐)야말로 탈중화세계를 표방하는 사상의 정수, 캐치프레이즈 아니었습니까? 일본이 그토록 맹렬하게 문명개화=서구화로 질주할 수 있었던 까닭도 유학적 세계관의 중력과 장력이 부족해서라고 여깁니다.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으로 작동하는 무도한 ‘금수의 세계’에 재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유교국가의 경험이 일천해서라고 봅니다. 그 마주 편에서 메이지유신의 그늘을 직시하고 자본주의 근대문명의 심층을 응시했던 다나카 쇼조를 일본의 ‘개벽파’로 칭하는 데는 조금의 이의도 없습니다. ‘다시 개벽’은 어디까지나 ‘서구의 충격’ 이후의 외침이고 깨침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학국가의 유산이 역력했던 중국과 조선과 월남은 모두 ‘저항’했습니다. 저항의 결과로 공히 사회주의로의 경로에 친화적이었습니다. 고로 동학과 유학을 신/구(新舊)로 무 자르듯 나눌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금(古今)으로 끈끈하게 연결되었다고 여깁니다. 유학이 무르익고 농익어서 비상한 시국에 동학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묵은 것과 낡은 것은 다릅니다. 곪은 것과 삭은 것 또한 다릅니다. 옛 것과 새 것의 분단체제야말로 개화파가 획책했던 몹쓸 습성의 잔재입니다. 제가 유학과 단절된 동학보다는, 유학의 급진적 민주화/민중화로서 동학을 접근하는 까닭입니다. 개화와 개벽이 날카롭게 분기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개화파가 전통을 내팽겨 치고 편승과 추수로 시종했다면, 개벽파는 전통을 승화시켜 저항과 극복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전자가 나를 버리고 남을 따랐다면, 후자는 나도 바꾸고 남도 바꾸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세계체제 이후에 대한 단서까지도 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백년을 예비하고 새로운 백년을 태비하는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이 되어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또 다시 개벽’을 논하는 까닭 또한 민주화 이후의 ‘타는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는 시원한 물줄기를 애타게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개화기인가 개벽기인가

‘뭔가 답답한 대한민국의 현실’이라 하셨습니다. ‘뭔가 막혀있는 지금의 상황’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갑갑하고 답답한 그 무엇인가를 잘 헤아리고 해명하는 것이 선결과제 같습니다. ‘서구중심주의 탈피’만으로는 다소 부족해 보입니다. 이미 서구는 지방화, 국지화되고 있습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의 위상 저하가 괜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커녕 거의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주구장창 읊조렸던 상투적 클리셰야말로 서구중심주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족문학론, 제3세계론, 종속이론, 탈식민주의론 등등 진부하다 못해 지겨운 감마저 없지 않습니다. 저는 ‘개벽’이라는 소중한 개념을 고작 서구중심주의 탈피라는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화두에 헐값으로 넘겨주고 싶지 않습니다.

개벽은 목하 한국은 물론이요 전 인류에게 임박한 ‘6번째 대멸종’을 돌파할 수 있는 파상력(破狀力)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동안의 근대 논의와는 다른 차원에서 오늘날의 세계는 1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점에 수긍합니다. 단지 산업혁명을 통하여 유럽과 아시아 간 대분기가 일어났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산업혁명의 심층은 지상(地上)과 지하(地下)를 결합시킨 데 있습니다. 땅 아래 묻혀 있던 석탄과 석유를 마구 퍼다 썼습니다. 지하자원을 본격적으로 활용하면서 지상자원에만 의존하던 기존의 인류문명을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인류는 이제 대기에는 이산화탄소를 배출시키고, 대지에는 질소를 누적시킴으로써 대양의 구성 비율까지 바꾸어내었습니다. 2019년의 대기와 대지와 대양은 오롯이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46억년 지구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고작 200년 사이의 변화입니다. 인간이 하늘과 땅과 바다를 변화시키고 동식물의 진화까지 좌지우지하게 된 것입니다. 1945년 이후 제3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근대화(산업화+민주화)로 내달리면서 이 지구적 변화의 속도는 더욱 가팔라졌습니다. 대기와 대지와 대양의 지구적 운동이 천상(天上)의 기후를 형성합니다. 그 기후가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비상경보등이 울려 퍼진지도 이미 오래입니다.

제가 보건대 산업화를 추동했던 개화우파는 물론이요, 민주화를 추진했던 개화좌파도 이 임박한 지구적 위기에 대한 근본인식과 근본대책이 없습니다. 시대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작 다음 선거의 승리를 위하여 경기부양에 안달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답답하고 갑갑한 것입니다. 1987년 이후 돌림노래가 30년이 넘도록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즉 민주화세력 또한 이미 기득권입니다. 정체되고 적체되어 있습니다. 제가 스무 살 새내기 때 집권했던 세력이 마흔 살 대학교수가 되어서 재집권한 것이 ‘진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성찰이 부재하니 ‘20년 집권론’이라는 허튼 소리를 내뱉는 것입니다. 한 세대도 모자라 반세기를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선생님이 다른 자리에서 적확하게 꼬집으셨던 것처럼 현 정부는 촛불혁명의 수혜자일 뿐입니다. 어부지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제 분수를 모릅니다. 도무지 ‘구시대의 막내’라는 자각이 없습니다. 척사파의 꼿꼿한 심성과 개화파의 식상한 발상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하자센터의 어느 발랄한 10대 친구의 말을 빌자면, ‘죽 써서 개 준 꼴’입니다.

숲의 원리를 도시 건설에 활용한 _포레스트 시티_ 조감도

갈수록 아득해지고 있는 촛불혁명의 출로가 ‘다시 개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신을 개벽하야 물질을 개벽하자’고 문장의 순서를 바꾼 것은 단순히 정신주의, 백년 전 루쉰이 그토록 신랄하게 비꼬았던 아Q식 정신 승리법이 아닙니다. 물질개벽의 진보가 특이점을 돌파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정신과 물질을 가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사물인터넷, 사람과 사물이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수준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생산’혁명과 ‘생각’혁명이 결합되어 만물이 활물되는 제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20세기 후반의 생태주의로 족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 또한 이미 불가분입니다. 글로벌리스트(개화파 2.0)의 파상공세에 펀더맨털리스트(척사파 2.0)적 대응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앞으로 30년, 귀농은커녕 더더욱 많은 인류가 도시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1세기 중반 인류의 7할이 도시에 살게 됩니다. 물질과 정신이 고도로 연결된 스마트시티가 살림살이의 주요한 형태가 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마음가짐과 마음다짐이 실시간으로 전 지구적으로 온 생명적으로 파동을 일으키고 파장을 미치게 됩니다. 시시각각 마음을 잘 써야 지구와 우주가 잘 돌아갑니다. 고작 4, 5년마다 투표를 통하여 겨우 한 나라의 일반의지를 확인하는 19세기형 민주주의로는 어림도 없는 신시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기왕의 (개화적)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가 이미 수명을 다했습니다. 정권교체에나 연연할 뿐 문명전환에는 깜깜하고 캄캄합니다. 개벽정치의 창조, 개벽경제의 창안, 개벽문화의 창달이 시급합니다.

다시 왜 개벽사를 써야하는가로 돌아갑니다. 다른 미래는 다른 서사의 창출에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술(述)이 아니라 작(作)이 필요합니다. 선도하고 있는 쪽은 오히려 개화우파 같습니다. 지난해 실학론의 허상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기획특집을 선보인 곳이 <중앙일보>였습니다. “리셋 코리아”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고 봅니다. 그쪽에서는 ‘제3의 개항’이라는 말도 즐겨 씁니다. ‘또 다시 개화’라고 고쳐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더더욱 개화’는 남을 넘어 북까지 아우릅니다. 북조선을 ‘친미적 개화국가’로 전변시키려 듭니다. 일본으로 미국으로 기울었던 20세기를 21세기에도 반복하고 복제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현재 ‘근대문화유산’ 하면 대체로 일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인 경우가 많습니다. 개화사로 근대사를 썼기에 부지불식간 일본의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요사이 떠들썩했던 목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비단 목포뿐이겠습니까. 군산도 부산도 인천도 개항과 개화의 유산만 부각되어 있습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 개항을 시발로 삼는 ‘개화기’라는 시대구분 탓입니다. 서둘러 1860년 동학 창건으로부터 시작하는 ‘개벽기’라는 시대인식을 바로 세워야하겠습니다. 개벽의 흥망성쇠를 개화의 물결과 견줌으로써 우리의 근대사 또한 한층 풍요롭고 더욱 온전하게 복원될 수 있을 것입니다.

3.1운동의 중심지였던 천도교중앙대교당

자각적인 개벽보다 외래적인 개화를 더 중시하는 도착은 비단 문화유산 기념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개화우파의 고질병만도 아닙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개화좌파의 역사인식에도 깊숙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지난 몇 달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에서 주도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상하이 국제학술회의 조직을 거들었습니다. VIP가 ‘민주공화국’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남다르셔서 3.1운동(과 5.4운동)을 전후한 동아시아의 민주와 공화 담론을 복기해보자는 얘기가 오고갔습니다. 제가 우선으로 추천한 분이 원광대 정혜정 교수와 <모시는 사람들>의 박길수 대표입니다.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의 독창적인 정치사상이 어떻게 한국의 독자적인 공화담론으로 진화해갔는지를 중국에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별반 논의도 못한 채 묻혀버렸습니다. 기획회의에 모였던 다른 선생님들이 영 뜨악하고 뚱한 눈치였습니다. 3.1운동이 ‘제2의 동학운동’, ‘다시 개벽 운동’이라는 감이 좀체 없습니다. 결국 다른 분이 섭외되었습니다. 그 분의 책은 진즉에 읽어보았습니다. 서구의 공화담론이 일본의 번역을 통하여 유통되는 과정과 신해혁명이 한국에 미친 영향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개화(좌)파의 발상인 것입니다. 안보다는 밖을 살피는데 더 능합니다. 이래서는 ‘2019년을 개벽파 재건의 원년으로 삼자’는 제안이 무색해질 지경입니다. 더욱 배포를 다지고 치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흩어진 개벽파를 세력화하고, 투박한 개벽론을 세련화하고, 소심한 개벽학을 세계화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3.1운동 100년의 의미를 되짚는 담론을 선도적으로 개진했으면 좋겠습니다. ‘개벽기’의 실상 복원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연구해 오신 분이 조성환 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득의와 발군의 3.1혁명론이 기대됩니다. 선창을 요청 드립니다. 제가 후창을 잇겠습니다. 그리하여 기어이 3월이면 삼천리금수강산, ‘또 다시 개벽’의 떼창이 방방곳곳 울려 퍼지면 좋겠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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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1호 문건은 중국공산당 중앙이 매년 연초에 발행하는 주요 국가 정책 방침이다. 2004년부터 중앙1호 문건의 주제는 변함없이 삼농이었다. 2018년부터는 향촌진흥정책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빈곤구제정책의 성공을 선언하고, 중앙정부의 ‘국무원부빈개발영도소조사무소國務院扶貧開發領導小組辦公室’를 향촌진흥국으로 개명하면서, 정책 추진을 보다 본격화하고 있다. 이 조직은 1986년에 설치됐기 때문에, 30여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중점업무를 전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농촌의 절대빈곤문제가 이제 상대적 빈곤문제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농촌과 도시의 융합과 같이, 두 주체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난이도가 높은 일이 될 것임이 예견되고 있다. 향촌진흥의 세부 정책들은 이미 농촌 일부지역에서 실험적으로 실행되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롭기 때문에 농촌과 도시의 격차나 지역간 격차가 적은 져장성浙江과 광둥성廣東 등의 남방지역이 앞장서고 있다. 이는 지역 농촌의 상대적 인프라, 자연인문환경에 이점이 있어 도시민에 대한 소구력이 높고, 주변에 1,2선 도시가 많아서, 이와 같은 이점을 좇아 농촌으로 이주하려는 도시민들이 많으며, 도시와 농촌을 자매권역화하여 쌍방 인구 유동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곳이, 상하이, 항저우 등의 1,2선 도시와 져장성浙江省의 모간산莫干山지역 등이다. 이곳은 자연경관이 수려하면서도 대도시에서 접근성이 좋아서, 아름다운 농촌美麗鄉村으로 불리며 향촌진흥 정책이 거론되기 이전부터 지방정부의 유인정책과 민간의 수요가 만나 모범적으로 개발이 진행된 곳이다.  

쌍순환전략중 내순환은 내수의 진작을 전제로 하는데, 중국정부는 내수가 원하는 수준으로 증가하지 않아서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래서, 2008년 경제위기를 각종 소비우대정책에 의한 농촌 내수진작으로 돌파한 것을 거울삼아, 다시 5억 농민의 소비를 늘리기 위한 정책을 고민중이다. 하지만, 농촌 인구 감소와 노령화 등의 문제 때문에, 단기적 소비진작이 아닌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다. 이를테면, 대도시 혹은 중소도시로 집중되는 교육과 의료자원이 유발하는 소비를 어떻게 농촌에 배분할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가 있다. 청년 인구가 완전히 성이나 시정부 차원의 지역을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중소도시에 자원을 집중화하여 규모를 키우고, 품질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는 지역적 차원의 자원집중이 불가피한 점도 있기 때문이다.

농촌토지의 시장진입 문제, 혹은 오랜기간 유지된 도농이원화 체제에서, 도시민과 농민의 호구제도나 이와 연결된 농촌과 도시의 자원이, 쌍방으로 유동하는 인구에 대해서 어떻게 합리적으로 재분배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들은 모두 모순적인 상황을 불러 일으킨다.   


원톄쥔: 베이징대학 시진핑신시대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연구원 향촌진흥센터 주임

2월23일 충칭重慶일보가 기획한 ‘향촌진흥전략-강연’에서 삼농전문가 원톄쥔 교수가 2021년의 중앙1호문건에 대해서 해설했다.

1. 삼농을 국가 안보의 주요 기초로 삼는다

올해 1호문건은 첫마디부터 삼농의 국가 중대전략으로써의 의의를 강조한다. “농업농촌의 발전이 새로운 역사적인 성과를 거뒀다. 이는 향후 경제 및 사회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든든한 반석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삼농 사업이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의 도전을 헤쳐나가기 위한 내공쌓기이며 국가안보의 주요한 기초라는 것을 보여준다.

농업농촌부 부장 탕런졘唐仁建은 2월22일 기자회견장에서 2020년 팬데믹과 세계경제 침체국면에도 불구하고, 3천3백만 농민공들이 고향에 남거나 고향으로 돌아감으로써, 중국 사회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농촌이 인력과 자원의 저수지로 기능함으로써, 사회적 충격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이 가져올 미래의 리스크와 불안정성을 생각할 때, 삼농이 사회와 국가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국가의 종합적인 안보체제에서, 우선 식량안보를 생각해야 한다. 각급 지방정부는 책임지고 이를 지켜야 하고, 농민과 시민을 연계할 수 있어야 한다. 성단위에서는 리더쉽이 양곡확보를 책임지고 “省長米袋子성장쌀가마“ 시단위 (역자주 – 중국의 시市급 행정구역은 한국의 도道규모에 해당한다)에서는 채소 등의 기타 식량을 책임진다는 “市長菜籃子시장채소바구니“ 정책을 관철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로컬푸드가 결합된 푸드플랜을 수립하여, 적절한 수준의 식량자급과 합리적 생산자 수입을 보장하고, 도농이 상생하는 구조를 만들어 나간다. 그 다음으로는 토종 종자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종자의 상업화로 인해, 농민들이 종자를 남기고 키우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고 종자를 지키려는 의식도 사라졌다. 세번째는, 농지의 보호이다. 최근 도시가 팽창하면서 근교의 농지가 대단위 택지로 변경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본보호면적해당 농지를 임야지대로 옮기거나 (역자주 – 중국은 식량안보를 위해 정책적으로 국가가 지적한 일정 면적의 농지를 지켜야 한다. 기존의 농지나 농지에서 지역 향진기업 등의 부지로 사용하던 기본농지를 택지로 바꾸어 개발하고, 대신에 해당면적 만큼 임야 등을 농지로 개간하는 경우가 있다. 도시의 교외지역의 농지가 도시확장에 따라 이렇게 전용되는 경우가 많다), 농가거주지의 합병 (역자주 – 전통적으로 자신이 경작하는 농지 부근에 위치하던 농가주택을 농지로 전환하고, 분산되어 있던 농가를 한곳으로 모아서 아파트와 같은 집단주거형태로 이주시키거나, 주택을 밀집시키는 형태로 개발한다)으로 농민이 경작지에서 먼 곳으로 이주하는 등, 경작환경이 전반적으로 악화하고 있다. 임야지대에서의 농사는, 기계를 이용한 경작, 그리고 인력에 의한 경우 모두 난이도가 증가하기 때문에 비용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된다. 기본농지보호가 형식에 치우침으로써, 실제로는 경작되지 않는 황폐한 농지도 늘고 있다.

실제로 많은 농민들은 주거지 주변의 텃밭에서 자급할 수준의 농사만 짓고 있는데, 이는 농민이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변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농촌거주민들의 생활방식도 갈수록 시장에 종속되고 있다. 농민도 식품을 구매하고 있고, 그래서 중국 전체의 농산물 수입도 급증하고 있다.

 

2. 중국특색사회주의에 맞는 향촌진흥의 정확한 정치적 방향

지금은 빈곤구제정책을 향촌진흥정책으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시점이다. 당중앙과 각급 당위원회가 책임감있게 실행한 덕택에 빈곤구제정책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향촌진흥정책의 실천은 훨씬 더 복잡하고, 오랜 기간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위아래가 통일된 사상을 바탕으로 과거의 도시화 중심 정책을 삼농중심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왜 중국특색사회주의가 지향하는 향촌진흥정책인가 ? 왜냐하면 산업화 과정에서, 산업자본은 고도의 표준화, 집중화, 규모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사회의 국가에 적합한 것이 아니었고,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크게 훼손시키면서, 기계화한 단작형 대량생산 산업방식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산업화는 유럽의 복지사회주의,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동아시아의 사회자본주의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실은 모두 대량생산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산업화 단계의 이념이다.   。

비록 중국의 산업자본총량과 금융자본총량은 세계1위이지만, 그 발전방향은 향촌진흥정책 및 생태문명전략과 직접적으로 결합돼 있다. 그래서 국가가 금융자본을 규제하여, 금융을 위한 금융산업이 되는 것을 막고 있다. 2019년에 제시된 금융공급측개혁은 실물경제를 위해 운용되어야하는 금융의 본령과 목적을 명확하게 한다. 이와 함께 농업의 공급측 개혁을 행함으로써, 이 단계에서 생태문명전략과 향촌진흥정책이 만들어 나가는 생태경제를 지원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농업생산량 증가를 목표로 움직이는 경제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중국특색사회주의에 걸맞는 정확한 정치적 방향성을 가진 향촌진흥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국가의 농업농촌현대화 정책과는 차별화되며, 중국 사회의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 특히, 중국특색사회주의 향촌진흥정책 체계안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며, 량산兩山사상 (역자 주 –綠水青山金山銀山)에 기반하여 생태자원 가치를 입체적, 통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3. 중국특색사회주의 농업농촌현대화의 이해

우선 명심해야 할 것들이 있다. 자본주의 선진국의 현대화 농업은 하나의 통일된 모델이 아니다. 농업은 자연의 변화, 경제의 변화가 고도로 결합된 결과이다. 현대농업발전 모델을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북미 오세아니아로 대표되는 앵글로아메리칸모델은 대농장을 운영한다. 식민화를 통해서, 광대한 자원을 이용하는 규모화와 자본화를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기업과 산업화된 정책이 만들어졌다. 두번째는 EU가 대표하는 라인모델이다. 중소형농장이 중심이 되고, 인구증가에 따라 신대륙으로의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인구 밀도가 높고, 자원에 제한이 있다. 현대농업자본화와 생태화가 결합되는 것으로만 유지가능하고, 60%의 농장은 중산층시민이 겸업형태로 운영한다. 이들은 환경운동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세번째 모델은 한중일이 대표하는 동아시아 모델이다. 인구밀집도가 높아서 자원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농협과 같은 전국조직을 만들어서, 사회자원의 자본화를 이루고, 삼농의 상대적인 안정을 달성했다.

중국특색사회주의의 농업농촌현대 모델로서 가장 참고할 가치가 높은 것은 중산층 시민들이 주체가 된 라인모델과 농협이 주체가 되는 동아시아 모델이다. 이번 1호문건은 도농융합을 추진하면서, 현급지역縣(역자주 – 한국의 군단위 규모의 지역)을 종합적으로 발전시킨다. 생산자협동조합의 종합적인 심화개혁을 통해, 생산, 소매, 신용의 삼위일체 종합협동조합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새로운 집체경제모델을 만들어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고, 조직화 수준을 높인 농민경제주체를 육성한다. 이렇게 과거 식민지 대농장 위주의 미국모델을 목표 삼아 만들어 놓은 구조를 서서히 탈피하도록 한다.

 

4. ‘새로운 이념’으로 개혁을 심화하여 새로운 국면을 창조한다 

1호 문건은 농촌의 재산권제도와 생산요소 시장화 메커니즘을 개선할 것을 주문한다. 농촌발전의 내적 동력을 충분히 활성화시켜야 한다. 건전한 토지경영권장기임대(流轉) 서비스 체계를 포함하여, 적극적으로 농촌 집체가 경영에 사용할 수 있는 건설용지를 시장에 편입시킬 수 있는 제도 등을 마련해야 한다.

최근, 토지삼권분립 (역자 주 – 소유권, 수익권, 경영권) 등  정책의 실시에 따라, 농촌재산권 개혁이 계속 진전되고 있고, 적지 않은 농민들이 농지와 택지 등 경영권 장기임대로, 안정적인 자산성 수입을 얻고 있다. 하지만, 3,4선이하의 도시 및 현급지역은 토지와 주택 공급 과잉현상도 있어서, 심지어는 전체 현인구의 정상 수요의 2배가 넘는 건설면적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은 당연히 현縣정부 재정내 부채율을 높이고, 현내 금융시장 리스크를 증가시킨다. 개혁도 점차 위험요소가 많고 난이도가 높은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래서, 시급하게 당의 량산사상을 제대로 이해시켜야 한다. 과거 생태문명전략 이전의 농촌재산권개혁은 대개 산업자본이 성장하면서 농촌에서 평면화된 토지, 주택, 노동력 등의 각각의 자원요소들을 쪼개어 약탈해 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오늘날의 농촌재산권개혁은 생태문명안의 새로운 이념에 따라서, 새로운 국면의 제도 혁신에 적응하도록 변신해야 한다.

생태문명 전략하의 생태경제수요는 평면을 탈피한 입체적인 생태자원의 통합적인 개발방법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를 “공간의 정의 空間正義”라고 칭하되 이에 상응하는 개혁은 종합적일 수 밖에 없다. 생태문명의 기초위에서 재산권개혁중의 문제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올해 1호문건은 재차 녹색발전과 생태를 보호하고 키워나가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 자체가 생태화 요소시장의 공간을 개척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산수임전호초山水林田湖草와 같은 자연생태 요소를 하나로 묶어 ‘생명공동체‘라고 이름지었다. 이러한 공간생태자원은 량산이념하의 새로운 생산성 요소이다. 그리고 쪼갤 수 없는 입체성, 종합성을 가지고 있으며 표준화하기 어렵다. 그래서 지금 과거 수십년간 이어져온 양적성장에 맞는 시장개념을 적용해서는 안된다. 이미 여러 곳에서 새로운 개혁적 실천과 과거의 낡은 제도간에 복잡한 양상의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각지역 각부문마다 1호문건의 향촌건설행동을 관철하기 위해서, 과거의 기득권구조를 조사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만 개혁을 심화할 수있다.

 

5. “원활한 도농경제순환”으로 내수를 진작하는 정책의 중점사항

문건과 시진핑 총서기가 강조하는 “새로운 단계, 새로운 이념, 새로운 방식”은 다음 문장과 관련이 있다 “발전의 형평성 문제를 해결한다. 여기서 관건은 삼농이고, 농업농촌의 약점을 시급히 보완해야 한다. 도농이 함께 발전하도록 추진해야 한다. 새로운 발전의 방식을 만들고, 삼농이 잠재력을 발휘하게 하여, 농촌의 내수를 빠르게 확대시켜야 한다.  도농경제순환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 현재 직면한 국내외의 각종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기초는 삼농의 지원이다. 시급히 농업의 기반을 안정화시켜 삼농의 기초를 수호해야 한다. “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도농의 협력을 활성화시키고, 원활한 도농경제순환을 통해 농촌 내수가 확대되어야 한다. 이는 도농융합전략이 향촌진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1호 문건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새로운 발전 방식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잠재력은 삼농에 숨어 있다. 농촌의 수요를 시급히 확대할 필요가 있고, 도농경제순환을 원활하게 만들어야 한다”. 마치 소의 코뚜레를 잡아 끄는 것과 같다. 농민 소비가 최근 계속 하락하고 있다. 어림잡아 농촌인구 40%의 소비 금액이 도시지역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는 5억이 넘는 농촌 거주자의 노령화와 이에 따른 수입의 하락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노동력 대부분이 노년이고, 인력시장에서는 노동생산력으로 간주되지도 않는다. 당연히 노동생산성을 제고할 수 없다. 도농융합을 통해 도농경제순환을 원활하게 함으로써만, 농촌의 소비를 촉진할 수 있다. 그래서, 농민은 그냥 농민이 아니고, 농촌은 그냥 농촌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1호 문건 전반부에서 다루는 통합적인 체제개혁이 필요하다. 두가지 상반되는 양쪽 방향으로의 종합적 시책이 필요하다.

첫째는 도농의 두 요소 시장을 융합하기 위해 필요한 ‘삼변三變개혁 (자원은 자산으로, 자금은 자본으로, 농민은 주주로 세가지 변화를 추구한다)’을 추진해야 한다. 123차산업을 융합하고, 농민이 신형집체경제의 자산변화속에서 장기적인 자산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서 농민이 시민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역량과 연대하여 창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수입을 늘리게 한다.

둘째, 관련부서의 전략적 사고방식을 강화해야 한다. 현급이하의  소도시지역에 발생하는 과잉 부동산 부채를 막아야 한다. 의료, 교육자원이 도시로 집중됨에 따라서, 수입이 적은 농민도 도시에 집을 사고, 농민들의 소비가 다시 도시로 이전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농민의 수입이 적어서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현금을 사용하는 농민의 고정소비조차 도시의 통계로 잡히게 된다. 가장 좋은 예가 교육부문이다. 농촌학교를 병합하고, 교육자원을 비농업지역의 소도시로 집중시키면서, 농촌학생들도 도시에서 학교에 다니게 된다. 관련된 소비가 결코 적지 않다. 이런 소비가 모두 도시의 소비 통계에 포함된다. 의료도 마찬가지이다. 농민이 도시의 병원을 찾는데 의료서비스가 시장화되면서 비용도 증가하고, 도시 소비 통계의 일부가 된다.

이러한 소도시의 소비가 증가하는 것은 농촌의 소비가 이전한 것과 연관이 깊다. 이번 1호문건은 ‘향촌건설행동’을 강조하고있는데, 이 안에는 현급지역경제의 종합계획이 포함되어 있다. 도농융합 발전의 조율과 같은 정책적 요구가 미래수요를 고려하는 개혁의 내용이다. 생태문명과 향촌진흥전략의 종합적인 관철만이 자원이 지나치게 도시로 집중되는 폐단을 개선할 수 있다.

5억이 넘는 방대한 인구의 시장을 어떻게 해야 되살릴 수 있을까? 중앙1호문건이 여러방면에서 연관된 상층부의 설계를 제시하고 있다. 도농융합을 강조하고, 구빈지역의 5년 과도기도 설정하여, 기존 정책을 당분간 유지하도록 한다. 그리고 실제 상황에 맞게 지속적으로 조정해 나갈 것이다. 이것은 구빈정책이 시작한, 빈곤농촌지역 소득증대의 지속가능한 메커니즘의 구현과 향촌진흥을 결합하는 것이고, 저수입군이 안정된 수입원을 얻도록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건속에서 특별히 두가지 요소시장의 유동을 언급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농촌에 남은 농민의 현재 지출수입구조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소비를 촉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도농융합 정책을 관철하여, 원하는 농민은 도시에 갈수 있도록 지원하고, 반대로 시민이 농촌으로 가서 농민과 함께 창업하는 것을 돕는다. 동시에 농촌에서, 다양한 주체가 자주적으로 금융, 물류, 그리고 부동산을 개발하게 하고, 문화교육 등의 업태가 혁신을 통해서 발전한다. 이렇게 농촌소비를 촉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강삼각지대는 져장浙江성과 상하이가 하나의 권역이 되어, 상하이 시민들이 져장성 농촌으로 들어가 종합적인 개혁적 발전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과거 빈곤한 산간지역의 주민들의 수입이 늘고, 도시로 이주한 경우도 많다.  동시에, 상하이 시민들을 중심으로 외지인들이 대규모로 농촌으로 내려가 도시의 소비여력을 농촌으로 이전했다. 그래서, 도농간의 자원요소가 쌍방향으로 유동함으로써, 농촌소비의 증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오늘날, 농업에만 의존하는 1차산업은 실질적으로 농민의 수입을 늘릴 수 없다. 비록 많은 곳에서 많은 이들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지만, 효율이 상당히 낮다. 이에 대해 중앙1호문건은 현급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경제의 가치 증대분이 농민에게 더 많이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는 생산자들이 123차산업융합을 통해서 수익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반드시 123456차산업과 같이 다양한 업태의 융합을 추구해야 한다. 농민이 주체가 되는 종합협동조합이 이러한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 마을집체법인화제도개혁을 지속하여, 자원성 자산을 지분화하고 현단위縣 플랫폼 회사가 이를 인수하여, 현급에서 다양한 업태를 발전시킬 때만이 유효하게 농민의 수입을 증대시킬 수 있다.

향촌산업은 어떻게 더 많은 농민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 과거에 향촌산업은 관련기관에 의해, 투자자가 자원점유를 확대하는 것을 지원하고, 농업외부의 산업의 규모를 키우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방식은 물량이 증대하는 초기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농업의 산업 가치사슬이 길어지면서, 결국 생산자의 수입은 감소하게 된다. 혹은 구조적 과잉 때문에 사업자가 사업을 포기하고 도주하여 부채만이 지역에 부담으로 남는 결과를 가져오곤 했다. 식민지의 대농장 경영방식을 제외하고, 중소규모 농업이 적자를 면치 못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서구 선진국의 모델은 대기업이 농업의 산업화를 진행하여, 수익의 90% 이상을 투자자에게 환원하고, 생산자에게는 10%만 남기는 불공평한 구조이다.

그래서 농민이 향촌진흥정책의 실질적인 수혜자가 되도록, 중앙1호문건은 현급경제의 구조를 통합적으로 설계할 것을 주문한다. 생산, 유통, 신용의 삼위일체 종합협동조합을 통해서 123차산업을 융합시키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듯이, 다양한 우대 정책을 통해서 농민의 조직화 수준을 높이고, 모든 산업 수익이 현과 마을에 남도록 한다. 이를 통해, 농민이 수혜자가 될 수 있다.

산업을 현지역 내에 남게 해야 한다. 과거 현지역 개혁의 함정은 가치사슬내에서 ‘외부자본이익’을 낳는 금융, 보험, 물류 등 제3산업의 증가분이 모두 현의 바깥에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외부의 자본이익에 대한 종합적 개혁이 필요하다. 즉 자원요소 및 수익 유실의 원인을 파악하고 현향촌縣鄉村의 삼급 기층 지역을 묶어서 향촌건설행동을 실행해야 한다. 현이 한 단위가 되는 전역적인 공간생태자원의 개발이 이러한 생태경제체계에서 로컬라이제이션의 주요한 내용이 된다. 이것은 농업농촌이 과거의 양적 발전에서 질적 발전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농융합의 거대한 흐름속에, 사회의 인력과 자원이 농촌으로 내려와 발전을 촉진하게 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듯이 123차산업이 융합함으로써 농민의 수입이 올라가고, 농촌의 소비도 늘게 된다.

 

김유익

목, 2021/04/01-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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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정치 건달이 너무 많다. 그리고 비루하다

현 정부 들어 공공기관의 한 자리 차지했던 그리고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우리 사회에 어떠한 공적이 있어 그 자리를 얻게 되었을까? 백번 양보해서 기왕 그런 자리에 올랐다면 진정 멸사봉공해야 마땅할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일을 했는가? 촛불정신의 구현은 언급할 나위도 없다. 시민 권리의 제도화를 하나라도 이뤄냈다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예 의지도 개념도 없다. 오로지 자리와 ‘떡고물’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 주변에 ‘정치 건달’이 너무 많다.

<출처: 데일리안>

그들은 보수 기득권세력과 너무나 닮아간다. 애초 그들의 롤모델은 보수 기득권 세력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기득권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집단의 하나로 전락해갔다. 지금의 자리는 단지 다음의 더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한 스펙 쌓기 혹은 디딤돌에 불과하다. 매일 같이 고급 한정식집에 모여 자리에 관한 정보 교환하고 청와대와 연결되는 줄 찾아 줄서기에 골몰하며 인맥 구축하느라 날이 샜다. 이런 행태들, 너무 비루하다. 국록을 탐하고 거들먹거리면서 ‘진보’와 ‘공정’을 좀먹은 죄, 매관매직과 다를 게 무엇인가.

돌이켜보면, 우리 주변의 이러한 ‘비루한’ 행태의 시작점은 1987년 대선 당시 오로지 자기 개인의 영달과 출세만을 위해 정치권에 빌붙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바로 그때부터 정치권 보스에 아부하고 줄을 서는 그런 행태가 언제나 가장 정확한 노선이고 합리적인 선택지였다는 ‘교훈 아닌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정치권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선택을 한 경우는 백이면 백 모두 고립무원의 처지로 몰리며 결국 처절한 ‘인생의 실패자’로 전락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 ‘학습’으로 인해 우리 주변에 이토록 ‘정치 건달’의 비루한 행태는 일상화되었다.

 

현 집권세력이 기득권화한 것, 이것이 근본 문제다

선거 참패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온다. 잘 알려진 대로 ‘내로남불’과 ‘무능’은 대표적인 참패 요인으로 지적된다. ‘무능’은 말할 것도 없이 부동산 문제에서 여실히 드러났지만, 예를 들어, 문화계 인사 블랙리스트 문제만 해도 ‘관료의 벽’에 가로막힌 채 몇 년이 가도록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사실 어느 한 가지 문제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능한 인사들을 기용할 생각도 애초부터 없었고, 그렇게 모든 일이 관료 친화적으로 흘러가 용두사미되었다.

근본적으로 집권세력은 이미 뚜렷이 기득권화되었다. 무주택자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고, 직업을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의 서러움을 헤아리지 못했으며, 항상 죽음의 노동에 직면하고 있는 영세업체 하청 노동자에 눈 감았다. 또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절망에 빠진 자영업자와 이미 폐업한 전(前) 자영업자들의 고통에 ‘눈물’만을 연출할 뿐이었다.

사실 집권세력은 ‘국민의힘’ 때문에 이제까지 승승장구, 존립해왔다. 언제나 상대 보수진영과의 비교만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렇듯 늘 ‘비교’하면서 닮아갔다. 그리고 일상화된 ‘비교 습관’ 자체가 이미 보수 세력과 동일하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인) 기득권임을 스스로 입증해주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다면, ‘폐족신세 못 면한다

현 사태의 근원은 단지 기술적이거나 일시적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이다. 이번에도 임시미봉책으로 변명하고 ‘보여주기 쇼’ 식으로 적당히 넘어가려는 움직임이 눈에 보인다. 그러다가는 정말 망한다. 변화되지 못한다면, 공도동망(共倒同亡)한다. 문자 그대로 ‘폐족’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단일화’의 위력을 확인한 국민의힘은 대선에서도 반드시 단일화를 성사시킬 것이고, 안철수의 합류로 민주당의 ‘중도층’ 흡수 전략은 차질이 불가피하다. 더구나 정의당과의 협력은 어려워졌다.

문재인 정부의 현재는 정확히 부동산 문제로 조락했던 참여정부 말기의 데자뷰다. 하지만 부동산 문제는 단지 발화점일 뿐이다. 그간의 갖가지 실정(失政)으로 상처받은 대중들의 분노는 대단히 깊고 전반적이다. 민심은 크게 이반되었다. 집권세력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절체절명의 심각한 위기다.

민주당의 차기 지도부 그리고 차기 대선 주자들은 배수진을 치고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리하여 부동산 문제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 노선을 주창하면서 정국 전반을 주도해나가야 한다. 이 길만이 심각한 오늘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타개책이다.

 

소준섭

화, 2021/04/13-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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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에 등을 돌린 2030세대

민주당이 4월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참패를 한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로 2030세대, 즉 청년세대의 변심이 지목되고 있다. 청년세대는 지난 총선까지만 해도 다수가 민주당을 지지했고 민주당은 그에 힘입어 180여 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년 여의 시간이 흐른 이번 선거에서 다수의 청년세대는 민주당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청년세대가 1년 사이에 정치적 입장을 바꾸었다거나 진보에서 보수로 전향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당에 대한 태도를 포함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짧은 시간 동안 이리저리 뒤바뀔 수 없다. 인간심리는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형성·발전되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심리는 현실이나 환경이 바뀌더라도 한동안은 잘 바뀌지 않는 특징 – 상대적 불변성 – 을 가진다. 따라서 오늘날의 청년세대의 심리를 그들이 어려서부터 청년이 되는 과정에서 경험했던 것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상대적으로 불변하는 집단심리 – 1년 사이에 갑자기 뒤바뀔 수 없는 – 로 보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생존 불안에 짓눌리고 있는 청년세대

나는 『풍요중독사회』에서 한국인들이 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을 기본으로 하는 심각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국인들의 기본적인 삶의 목표이자 동기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한바 있다.

생존 불안이란 단지 육체적 생존에 대한 위협만이 아니라 최소한의 사회적 삶조차 누릴 수 없다는 것과 관련된 불안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러다가 굶어죽을지도 모르겠다’, ‘이래서야 어디 밥이나 제대로 먹고 살겠나?’, ‘노후를 생각하기만 하면 막막해진다’와 같은 말을 하는데, 이런 것들이 생존 불안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존중 불안이란 타인들과 사회로부터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과 관련된 불안이다. 통속적인 말로 표현하면 차별당하거나 무시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경우 어느 세대이든 간에 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에서 자유로운 세대는 없다. 그러나 청년세대의 경우에는 생존 불안이 상대적으로 더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의 청년세대는 ‘사람은 다 자기 밥그릇은 꿰차고 태어난다’, ‘어떤 일이든 열심히만 하면 밥은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성장했다. 더욱이 이들은 경제가 고도성장하고 있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기에 취직 걱정, 일자리 걱정 등에도 그다지 시달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오늘날에 비해 생존 불안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어려서부터 사회와 어른들로부터 ‘공부 열심히 해서 명문대에 가지 못하면 사람대접 못 받는다’, ‘경쟁에서 패배하고 낙오하면 굶어 죽는다’와 같은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성장했다. 한마디로 생존 불안을 부추기고 자극하는 끊임없는 공갈협박에 시달리면서 성장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들은 만성적인 경기침제로 인한 취업난, 일자리 부족이 심각할 때 청년기에 진입했기에 생존 불안이 대단히 심각하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는 청년들의 절규는 청년세대의 생존 불안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개인 단위로 고립되어 있는 청년세대

청년세대는 홀로 살아가는 것이 생활화, 습관화된 세대이다.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아주 어려서부터 공동체 문화가 아닌 개인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성장한 진정한 개인주의 세대이다.

과거의 청년세대는 어렸을 때에는 동네친구들과 하루종일 뛰어놀았고, 공동체 문화가 강했던 시절에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을 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최소한 청년기 이전까지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문화,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개인주의가 온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도 오늘날의 성인세대, 노년세대가 집단주의 성향을 어느 정도까지는 간직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어렸을 때에는 또래들과의 놀이공동체를 경험해보지 못했고, 개인주의적인 경쟁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시기에 학교생활을 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동체 문화, 집단주의 문화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진정한 개인주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어려서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피를 말리는 개인주의적 경쟁 속에서 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에 이웃들과 더불어 같이 살아간다는 말을 머리로는 이해하더라도 가슴으로는 잘 느끼지 못한다. 홀로 살아가는 삶에 너무나도 익숙한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한편으로는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자유분방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매우 고독하고 무력하다.

 

불안은 개인주의를 강화한다

불안과 고립(개인주의)은 서로를 강화하는 관계에 있다.

불안이 심하면 심할수록 개인주의가 더 심각해진다. 불안은 곧 고통이다. 고통스러우면 다른 것에 신경을 쓰기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 아주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다 하더라도 머리가 너무 아프면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통이 심하면 모든 심리적 에너지가 자신의 고통, 통증에 쏠리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안하면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고통에만 집중하게 되고 이웃, 사회 등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이렇게 불안은 사람들의 시야를 ‘나’라는 테두리에 묶어놓음으로써 개인주의를 강화한다.

개인적 고립이 심할수록 불안은 더 심각해진다. 똑같이 가난한 집이라 할지라도 불화 가정보다는 화목한 가정의 불안 수준이 훨씬 낮다. 아주 친한 친구들과 함께 고난을 겪을 때가 홀로 고난을 겪을 때보다 불안 수준이 훨씬 낮다. 고립이 불안을 강화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고립이 사람들을 필연적으로 무력하게 만든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가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므로 개인은 기본적으로 무력하다. 개인이 타인들과 연대하고 단결하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사회를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고립(개인주의)은 고독, 외로움, 무력감 등을 초래함으로써 불안을 강화한다.

불안과 고립 사이의 악순환에서 청년세대가 탈출하려면 연대와 단결을 통해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러나 불안에 짓눌려 개인으로 파편화된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연대와 단결을 중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다고도 믿지 않는다. 이로부터 청년들은 연대와 단결을 배제한 채 홀로 분투하여 불안에서 탈출하려고 하는데, 그 유일한 방법은 돈을 더 많이 벌어 더 높은 위계로 올라가는 것이다.

 

공정과 관련된 청년세대의 분노

개인으로 고립되어 있는 무력한 청년들은 불평등한 사회, 다층적 위계 사회【1】를 뒤집어엎으려고 하지 않으며 그럴 수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각자가 더 많이 노력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 위계 상승을 하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믿는다. 한마디로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어떻게든 자신이 살아남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존 경쟁의 규칙이 공정해야 한다는 요구는 사회개혁이라는 꿈을 포기한 청년들에게는 최후의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정한 경쟁조차 보장해주지 않는 세상이란 청년들의 눈에는 불안에서 탈출할 수 있는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까지도 짓밟아버리는 절망적인 사회로 비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사회에 대해서는 잘 분노하지 않는다. 자기보다 상위 위계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잘 분노하지 않는다. 그래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불평등한 사회, 다층적 위계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믿기에 그 속에서의 위계 상승에만 목을 건다. 유일한 개인주의적 불안 탈출구로 간주되는 생존 게임의 공정성을 해치는 것, 반칙에 대해서 청년세대가 격렬하게 분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차별을 용인하고 나아가 찬성하면서 위계 상승 욕망의 실현에 방해가 되는 불공정성에 대해서는 폭발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참고로 지면관계상 여기에서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청년세대 내에서의 페미니즘 문제를 둘러싼 남녀간 갈등도 공정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두 가지 길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청년세대의 심리를 관통하는 핵심은 불안이다. 청년들은 당연히 불안 탈출을 간절히 원한다. 이로부터 청년세대는 특정한 이념을 지속적으로 지지하기보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정당이나 정책을 가변적으로 지지한다.

박근혜 정권이 촛불국민의 힘으로 탄핵되고 민주당이 집권하자 청년들은 연대와 단결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연장선에서 집단적으로 불안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여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집권한 이후에도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불안은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기대를 무참히 배신당한 청년세대는 집단적으로 불안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다시 개인주의적인 불안 탈출의 길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고 이번 선거에서 여당에게 참패를 안겼다.

청년세대는 앞으로 어떤 길로 걸어가게 될까? 만일 진보세력이 청년세대에게 연대와 단결에 기초해 사회를 개혁하는 집단주의적인 불안 탈출의 길을 제시해줄 수 있다면 청년들은 당연히 진보세력을 지지할 것이다. 그 길만이 불안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세력이 희망을 주지 못한다면 청년들은 극우세력을 지지할 것이다. 개인주의적 불안 탈출의 길을 제시하는 것 – 이명박의 부자 만들어주겠다는 공약을 떠올려보라 – 은 극우세력의 전매특허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번의 선거참패로 인해 민주당까지도 청년들을 개인주의적 불안 탈출의 길로 끌어당기려고 한다면 한국 사회는 파멸로 치닫게 될 것이다. 개인주의적 불안 탈출의 길, 즉 사회개혁을 배제한 공정한 개인적 경쟁으로는 청년세대가 절대로 불안과 고통에서 탈출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더 불안해지고 더 고독해지며 더 분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세력은 불안, 특히 청년들의 생존 불안 문제를 해결할 수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써 청년들을 고립이 아닌 연대와 단결의 길로, 개인주의적 경쟁이 아닌 사회개혁의 길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1】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풍요중독사회』를 참고하라

 

김태형

화, 2021/04/2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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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신임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속셈을 드러내고 말았다. 미국을 또 다시 세계경제의 강자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미 세계경제는 서로 물고 물리는 의존관계망에 갇혀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다극화 체제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표출하고 있다.

4월 12일 미 대통령 관저에서 매우 특별한 회의가 열렸다. 설리번 미 대통령 안보보좌관과 브라이언 디스 국가경제위 위원장이 주재한 회의에 19개 글로벌 기업 CEO들이 참여하였는데 여기에 바이든 대통령과 지나 리만도 상무장관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바이든은 이헐게 선언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세계를 이끌어 가려고 한다. 우리는 21세기에 다시 한번 세계를 이끌어갈 것이다.”(We’re going to lead the world again. We’re going to lead it again in the 21st century.)

<표 1> 미 백악관 반도체 대책회의 참석 기업 및 업종

이 회의는 표면적으로 미 연방정부가 미국내 컴퓨터 칩 산업을 살리기 위해 소집한 것이나 사실은 바이든 대통령이 미 정부의 현안인 일자리 창출과 이를 위한 투자 유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날 바이든은 자신이 제시하는 계획이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미국을 재건하며 우리의 공급망을 보호하고 미국 제조업을 활성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런 이유와 사정 하나 때문이었을까?

 

반도체를 안보사안으로 다루는 바이든

이날 19개사 대표들은 화상회의를 통해 자사 입장을 전달했다. 한국 기업으로 유일하게 초청을 받은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장 최시영 사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주최한 회의에 한국 기업이 불려간 이유는 한국이 세계 반도체시장에서 막강한 힘, 시장점유율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대륙에 소재한 기업은 하나도 초대받지 못한 데 비해 대만의 반도체 기업이 참여한 것 역시 바로 대만도 반도체 강국이었기 때문이다.

이 회의 참석자와 내용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 가겠다는 점과 함께 21세기에 “다시 한번” 더 하겠다는 데 있다. 즉 바이든은 미국을 세계 지도국가로 다시 한번 더 진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문정인 전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세계에 대해 다섯 가지 미래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팍스 아메리카나 II였다. 즉 미국을 통한 세계평화인데 이게 곧 미중 신냉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곧 미국 중심의 패권을 통한 세계 평화의 재현을 뜻한다(문정인 2021 문정인의 미래시나리오 : 코로나 19, 미중 신냉전, 한국의 선택 청림출판. 129쪽). 이 ‘자유주의적 패권의 부활’은 ‘자애로운 패권국’, 다자주의를 내세워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을 고립시켜 나가는 길을 선호한다.

둘째, 바이든은 반도체를 안보 사안으로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날 바이든은 8밀리미터 웨이퍼를 들어 보이며 반도체는 사회기반시설이라고 지적했다. 디지털 전환시대를 이끄는 핵심부품이 아니라 공항이나 항구와 같은 핵심 기반구조라면서 이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다룬 것이다. 그래서 바이든 대통령 안보보좌관이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이 함께 회의를 주재한 것이다. 바이든에게 미국은 군사강국미면서 경제강국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 사안도 언제든지 안보사안으로 취급해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림 1>  바이든 대통령 2021. 4. 13. 한국방송 글로벌 뉴스사진

셋째, 반도체 수급 불일치에 대비함으로써 자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자구책을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해 세계를 덮친 돌림병(COVID-19) 위기는 세계적 차원의 경기 불황을 불러왔지만 빠른 회복세를 보이면서 반도체 경기의 초호황이라는 슈퍼 사이클에 진입하자 반도체 수요-공급 차질이 완제품 생산 정체 현상이 일어났다. 예를 들면 차량용 반도체가 부족하여 완성차 공장들이 가동 중단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현대차와 GM차 공장이 움직이지 않았다. 돌림병 때문도 아니고 노사갈등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이 차량용 반도체 공급망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반도체 회사에 불이나고 지진이 덮치면서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불확실성이 커져갔다. 반도체 부품 대란은 공급망 대란, 반도체 전쟁으로 격화되어 갔다.

지난해 12월 4일 마이크론 대만 팹에서 정전사고가 일어났다. 이 결과 D램 현물가격이 상승했다. 그리고 대만 북동부 이란현 부근 해역에서 지난 해 12월 10일 저녁 9시에 6.7 강도의 지진이 발생했다. 바로 이 지진 발생 지역에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TSMC와 마이크론 공장이 있는 신주현, 타이중 등이 포함되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발생 시 세계 전장반도체 3위 기업인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사의 공장은 지진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일본 완성차기업이 공장가동을 중단한 적이 있다. 당시 도요타는 일본 내 전체 공장 가동을 중지했으며 재개까지 약 1개월 정도 걸렸다. 이 르네사스는 2021년 2월 13일 후쿠시마현 앞바다에서 발생한 규모 7.3의 강진 피해를 확인하기 위해 자동차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이바라키현 나카시 공장의 운영을 중단했다. 보통 진도 3 정도의 지진이 발생하면 반도체 공장은 일단 공정 자체를 중지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31일 대만 북부 신주(新竹) 과학단지내 TSMC 12 공장에서 화재가 일어나 정전사태로 이어져 공장이 멈췄다. 대만 TSMC 공장이 멈추게 되었다는 뉴스가 알려지자마자 세계 전자업체들이 긴장했다. 큰 화재가 아니라 오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4월 12일 인텔의 새로운 CEO인 팻 겔싱어(Pat Gelsinger)는 말했다 : “우리는 6~

9개월 내에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위해 차량용 반도체 설계업체와 논의하고 있다. 우리는 핵심 공급업체들과 전환 작업에 착수했다. 그래서 이 차량용 반도체를 만들어 GM과 포드에 주겠다.”

그리고 이미 인텔사는 200억 달러를 투입하여 미국 애리조나 주 두 곳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넷째, 미 대통령 관저에서 열린 반도체 대책회의는 단순히 반도체 공급망 조정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날 회의에 전자제품, 인터넷 검색, 이동통신, 자동차 완성차제조, 의료기기뿐만 아니라 B2 스텔스 폭격기를 제조하는 군수기업 대표까지 참여함으로써 반도체산업이라는 일개 부품만이 사안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세계 반도체 산업을 미국이 주도하면서 예상되고 있는 ‘지각변동“을 보면 첫쩨, 바이든 취임이후 미국 인프라스트럭처 투자 계획에 반도체와 배터리를 포함하여 미화 500억 달러, 한화 56조원 상당 거액을 쏟아 넣고, 둘째, 이미 바이든은 반도체 공급망을 살피라는 대통령 행정명령을 발동했고, 셋째, 미국 반도체 공급망 확충 법안 발의를 예고하고 있다.

 

중국 패권국 부상을 꺾겠다는 바이든의 불가능한 꿈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해야 할 점은 바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제압하고 세계경제에서 미국의 패권을 되찾겠다는 바이든의 야심이나 그 꿈은 실현가능하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국은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는 국력을 바탕으로 반도체 최강국이 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서슴치 않고 있다.

미국측은 이번 회의에서 삼성에 신규 투자 또는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또는 반도체 공장 증설 속도를 더욱 가속화해 달라는 주문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미 삼성은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중 DRAM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2017년 3분기 기준 44.5%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27.9%로 2위를 차지한 SK하이닉스까지 합하면, 한국 기업의 DRAM 시장점유율은 72.3%로 압도적이다.[이승관 2017년 12월 7일). “반도체 코리아, 메모리 ‘절대강자’ 재확인…D램 점유율 72%”. 《연합뉴스》]. 특히 삼성전자는 2017년 2분기 영업이익 14조원을 벌어 지난 8년동안 영업이익 1위를 고수하전 애플을 제치고 영업이익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경쟁사인 애플로 삼성전자의 반도체를 공급받아 완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더욱이 삼성전자는 미국과 중국에서 반도체 공장을 운영, 반도체 제품을 생산하여 현지 판매를 하고 있다.(<표 2> 참조)

<표 2> 삼성전자 반도체 제품의 세계 시장 점유율,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C%84%B1%EC%A0%84%EC%9E%90#cite_note-42

<표 3> 삼성전자의 해외 반도체 공장, 자료: 삼성전자

반도체 투자액에 대한 국가별 세금 감면 비율을 보면 미국은 10~15%이나 일본은 최대 15%, 한국과 대만은 25~30%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반도체 투자액에 대하여 무려 30~40%의 세금을 감면해 주고 있다(자료 SK증권). 그래서 바이든이 직접 나서서 미국 반도체 패권을 되찾겠다는 것이다.

바이든의 반도체 육성정책을 보면 첫째, 2024년까지 투자 대비 40%가량을 세금 공제하고, 둘째, 16조 6천억원 규모의 연방기금을 조성하여 미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공장 건설을 지원하고, 셋째, 연구개발을 확대하는데 8천억원을 지원하고, 넷째, 주정부는 삼성전자와 대만반도체(TSMC) 등 해외 기업 파운드리 공장을 유치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미 국가안전보장위원회(NSC) 인공지능위원회는 미 연방의회에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과 격차를 확대하기 위해 일본과 네델란드 정부 등과 협력해 EUV와 ArF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해야 한다.”

반도체 생산을 위해서는 전자공학과 광학 함께 정밀화학 및 정밀기계산업 등이 다같이 발전해야 하며 매우 고가의 조립장치 등을 완비해야 한다. 일본과 네델란드는 반도체 제조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이들 두 나라에 관련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도록 그 뜻을 관철할 수 있다면 바이든의 꿈은 실현가능성이 높아지나 그럴게 되기엔 아직 이르다고 평가할 수 있다. EUV는 극자외선 방사(extreme ultraviolet radiation)의 약자로써 네델란드 AMSL사 리쏘그라피(lithography) 장비는 반도체생산의 필수 장비이다.

일부에서는 삼성전자가 미 정부의 지원만 뒷받침된다면 글로벌 회사들이 포진해 있는 미국에서 반도체 사업을 키우는 제2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적극적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이미 삼성은 미국에 20조원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잘 알다시피 현재 삼성기업집단의 최고 총수는 기업집단 경영권 승계를 위해 전임 대통령의 개인 측근 딸에게 경주용 말을 사 주는 뇌물을 주었다가 적발되어 감옥에 갇혀 있는 ‘오너 리스크’에 빠져 있다. 혹여 한국 재벌 특유의 ‘오너 리스크’ 상태라고 하더라도 삼성기업집단은 ‘관리의 삼성’, ‘시스템의 삼성’이라는 말이 나도는 것처럼 비교적 위기관리나 성과관리에 능하기 때문에 큼 문제없는 의사결정과 기업집단운영을 해 나갈 것이다. 이씨재벌은 1990년대 자동차업계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 일렉트로닉스를 강조하며 무리하게 자동차산업에 진출하였다(허상수 1994 삼성과 자동차산업 도서출판 새날 161쪽).

삼성기업집단은 반도체에 관한 한 미국 시장 못지않게 중국시장도 중요하게 여기고 이에 합당한 생산과 판매전략을 구사해 나갈 것이다. 일방적으로 어느 나라에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포드자동차는 1908년 9월 30일부터 ‘T형 포드(T카)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자동차의 대중화시대를 개척하면서 미국인에게 국민기업으로 인정받았다. 고된 일을 하고나서 T카를 몰고 귀하가여 라디오로 야구중계를 들으며 맥주를 홀짝였던 시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사회를 만들었다. 삼성기업집단 역시 이얼 만큼의 국민기업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산업통상자원부 소재융합산업정책관의 주요업무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섬유, 탄소, 나노, 철강, 세라믹 등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육성 및 진흥을 위한 정책을 수립·시행하는 데 있다. 그 산하 반도체디스플레이과의 주요업무는 반도체 산업, 디스플레이 산업, 영상표시장치 산업, 전자부품 산업 및 인쇄전자 산업의 육성 및 진흥을 위한 정책의 수립ㆍ시행과 반도체 산업, 디스플레이 산업, 영상표시장치 산업, 전자부품 산업 및 인쇄전자 산업에 대한 외국인투자 유치, 해외투자 지원, 통상 현안 대응 등 대외 협력에 관한 사항, 내장형 소프트웨어 산업의 기술개발 지원 및 육성 정책의 수립ㆍ시행 등이다. 기업인들이 사활을 걸고 현장을 뛰고 있을 때 장관 등 이들 공직자들 역시 최선을 다해 모든 행정력을 투입하여 기업을 지원해야 마땅할 것이다.

 

반도체 전쟁과 한국

반도체는 과학기술혁명시대를 선도하고 있는 전자공학산업의 쌀이라고 불린다. 미중 신냉전은 미국의 패권 회복과 중국의 패권국 진입을 둘러싼 극한 경합으로 치닫고 있다. 여기에 기술패권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반도체 공급망을 둘러싼 최근의 혼란상은 이 기술패권전쟁을 격화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반도체는 2021년 한중외무장관 회담에 의제가 될 만큼 중요한 외교안보사안이며 중요한 경제재이다.

한국은 미국 대통령의 한국 기업 초청과 거액의 투자요청 사실을 직시하고 그에 걸맞는 행보를 보여야 한다. 이미 한국은 2020년 1인당 GDP3만1천497달러로 이탈리아(3만1천288달러)를 처음으로 넘어섰다. 그리고 브라질과 러시아를 체치고 세계 경제 10위의 중견강국 지위에 진입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에 걸맞는 외교안보역량을 십분 발휘해야 한다. 특히 한미동맹을 들먹거리며 미국에게만 쫄리는 듯한 졸속외교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한미 군사동맹에 중독되었던 구냉전시대의 신화를 극복해야 한다. 바이든이 벌이는 세계패권국가로의 복귀라는 불가능한 꿈에 헛발질하지 않는 한국인의 슬기로운 역량을 마음껏 발휘해야만 한다.

 

허상수

목, 2021/04/2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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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민족을 위한 정책은 누가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코로나 19 감염병이라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전대미문의 위기 상황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예전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자동차 부품의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도 발생했다. 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불과 0.3° 남았다는 기후 위기의 어두운 그림자는 시시각각 우리의 운명을 옥죄어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사회는 온통 부동산 문제로 난리지만, 도무지 그 정확한 해법을 찾지 못하며 갈팡질팡하고 있다. 아니, 집권당은 오히려 거꾸로만 간다. 가야 할 길은 가지 않고, 가지 말아야 할 길만 가고 있다. 전세상한가 법안 통과 바로 전날 자신의 강남아파트 전세를 그 상한가보다 훨씬 높게 계약했던 청와대 전 정책실장. 가장 ‘공정’하지 못한 행위이며 문자 그대로 ‘정책을 잃은’ 정책실(失)장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거대정당 소속 당 연구소로부터 좋은 정책이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밤늦게까지 불 밝히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연구하는 집현전 선비들을 보고 싶다

불행한 사실은 이러한 ‘답답하고도 특별한’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현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특수 상황은 기존 방식대로 대응하기에는 너무나 특별하고 전반적이며 심층적이다. 창조적인 대응 방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세종 시대에 있었던 집현전이 필요하지 않을까. 집현전에서 불을 밝히며 밤늦게까지 자신의 부동산 이익이나 출세가 아니라 오직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연구하는 그런 선비들이 필요하고 그런 정책기관이 필요하다. 그래서 국가의 위기를 미리 예측하여 대비하고 젊은이들의 취업 기회를 창출하며 또 우리나라 미래의 먹거리를 개척해나가는 중차대한 과제를 수행하는 그런 집현전이 절실한 시대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집현전의 연구 기능을 크게 강화하고 당대의 우수한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집현전에 소속시켰다. 집현전은 이전에 이미 존재하기는 했지만 사실 역할이나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기구였다. 세종은 그러한 집현전을 자신의 정치를 뒷받침하는 국책연구 기관으로 삼고자 하였다.

집현전 학사의 자격은 문사(文士)였으며, 그 중에서도 재행(才行)을 지닌 연소한 자를 적임자로 삼았다. 집현전은 그 설치 동기가 학자의 양성과 문풍의 진작에 있었고, 세종 역시 그와 같은 원칙에 의해서 육성하였으므로 학문적인 특성을 지녔다. 그러므로 세종 대에는 일단 집현전 학사에 임명되면 다른 관직으로 전직(轉職)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학자란 모름지기 평생 정치가가 아니라 연구직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집현전 학사들은 집현전 안에서 차례로 승진하여 직제학 또는 부제학에까지 이르렀고, 그 뒤에 육조나 승정원 등으로 진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숙주와 정인지는 이 방침이 정해지기 전에 이미 집현전을 떠나 신분이 풀렸지만, 이후 출세길을 접어야 했던 집현전 학사들에게는 커다란 좌절이기도 하였다.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을 자상하게 보살핀 것은 유명하다. 내관을 보내 공부를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든 신숙주에게 옷을 덮어 주게 하는 등 특별하게 대우했지만, 집현전에서의 연구직 종사 원칙은 끝내 풀지 않았다.

세종 중기에 집현전의 정원이 16인에서 32인으로까지 증가되었고, 그 기능이 확대되어 유교주의적 의례와 제도, 문화의 정리 사업인 고제연구(古制硏究)와 편찬사업이 시작됨으로써 가장 활기를 띠었다. 집현전의 고제연구는 의례 및 제도의 실천에서 발생하는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 많았으며, 세종의 각종 시책 추진에 필요한 당면하는 정치 및 제도적인 문제의 해결에 참고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각국의 제도와 정책에 대한 연구에 해당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세종은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중국과 우리의 역사에서 치국평천하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를 뽑아 ‘너무 복잡하지도 말고 너무 간략하지도 않도록’ 그 요점을 정리한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게 하였다.

세종 후기에 이르러 집현전은 세종의 신병으로 인하여 세자의 정무처리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이 설치되면서 집현전 학사들이 종래에 맡아왔던 서연직(書筵職)과 함께 첨사원직까지 거의 전담하게 되어 그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집현전의 언론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강력한 언론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점했으며, 국가 정책의 논의에 참여하는 등 정치 활동도 활발해졌다.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을 뛰어넘는 이러한 일,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일

차기 대선주자들은 이 집현전 설치를 공약으로 삼아야 한다. 현 정부도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착수했으면 한다. 시작이 반이라 했다. 시작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집현전을 국회에 설치하는 방안도 있겠지만, 당리당략으로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할 우려가 높아 정부 안에 설치하는 것이 좋다. 당연히 관료들과도 거리를 둬야 할 것이고, 정치권과도 거리를 두면서 오직 나라와 국민들만 생각하고 자유로운 토론과 폭넓은 채널과 소통을 통해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을 뛰어넘는 집현전의 설치, 이것은 시대적 요청이며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소준섭

화, 2021/04/27-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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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해설:

작년 여름, 광저우의 80년대 청년문화를 그린 “커피에 설탕 좀 타기 給咖啡加點糖(1987) https://movie.douban.com/subject/2080567/?dt_dapp=1 ”라는 ‘데카당한’ 영화 한편을 관람했다. 당시, 이 영화를 소개한 중국 친구들은 관람후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동행했던 싱가폴 친구와 나는, 영화가 너무 비현실적이라면서 투덜거렸다. 막 개혁개방이 시작됐을 뿐인 당시의 중국 광저우 청년들이 이웃 도시 홍콩에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예술적 탐미의식을 생활속에서 놀이문화로 즐겼다는 사실이 좀처럼 납득되지 않았다. 그 후에 중국의 80년대와 관련한 글 몇편을 읽고, 소위 ‘80년대 문화열’ 시대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실은 이 ‘백열상태’는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경제위주의 개혁개방이 지속됨으로써, 비교적 자유로운 문화예술인, 지식인의 공론장도 2010년대 초까지 유지됐다. 인류학자 샹뺘오 박사는 80년대 후반 고향인 져장성 원저우溫州의 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 남방의 지역도시까지 전파된 훈훈한 문예의 열기를 맛볼 수 있었고, 천안문 사태가 일단락된 1991년 베이징 대학 학부에 진학해서 개방의 시대 2막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이 글은 8~90년대를 관통하며, 중국의 사회과학계를 재건해 나가고, 정부의 정책 방향에 끊임없이 아젠다를 세팅하는, ‘지식청년시대’ 지식인들의 공헌과 그들의 변화과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가진 특징과 이러한 특징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 그들의 강점과 한계에 대해서 설명한다. 신향촌건설 운동의 지도자인 원테쥔 선생은 이 그룹에 속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중 한명으로서, 바로 글에서 묘사된 정부의 씽크탱크인 ‘중공중앙농촌연구실’ 출신의 연구관료였다. 이후에, ‘경제체제개혁연구소’산하 언론사의 대표를 거쳐, 인민대학 교수로 재직함으로써, 지식청년 출신 관료와 학자라는 양쪽 커리어를 두루 섭렵한 인물이다. 아래 사진1의 두룬셩 선생이 그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였고, 현재 국가 부주석인 왕치샨은 당시 그의 사수였다. 이 글이 묘사하는 지청 지식인의 모습은 원톄쥔 선생과 ‘씽크로율’ 100%에 가깝다. 그는 2016년 인민대학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다양하고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실제 학술연구는 그의 후학들인 후지청시대지식인 70허우, 80허우 연구자들이 진행하고 있다는 점도 이 글의 설명과 일치한다. 샹뺘오가 현재 협력하고 있는 칭화대학 왕후이 교수 등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현실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과 서구이론의 도구적 사용 (아마도 오류가 있거나, 체리피킹하는 경향도 있는)이라는 공통점도, 많은 중국내외의 지식인이 지적하는 사항이다. 한국의 청년 인문학자가 이를 평한 것을 본 적도 있고 (https://begray.tistory.com/447 푸단대 역사학자 거자오광의 중국사상사 도론평), 홍콩에서 활약하는 대륙출신의 문학평론가 쉬즈둥許子東이 “서구 학자들은 방법론에 집중하고, 중국학자들은 문제 자체에 집중한다”는 커멘트를 하기도 한다. (“ 当时有个机缘,1987 年我去香港大学做访问学者,接触了西方流行的学术界理论,我看到了中西根本性的区别。内地做文学,像在前线打仗,你要治病救人,别管用什么方法,赶紧把病人救活。但在海外,就像医学院学生旁听的实验课,老师们做演示,学生在下面看。区别就在于内地文学批评,问题最重要,但西方学术圈,他们不讲问题意识,他们讲方法

https://shop.vistopia.com.cn/article?article_id=36txI&source=article).   

‘지청시대’ 지식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일종의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이 한국의 586세대와 포개지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자식, 공화국의 주인”이라는 역사적 사명감과 주체성이 문자 그대로 공유된다. 그래서, 근대국가의 형성이라는 역사실천안에서 민주화와 (후일 제도권안으로 들어온 이후엔) 산업화라는 거대담론에 무한한 관심을 두는 반면, “일상생활속의 권력관계가 낳은 다중적 모순이 만드는 미약한 파열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려 들지 않는 지적 편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2~30대 청년세대, 진보좌파, 페미니즘과 척을 진다. 중산층 계급의식 때문에, 이중인격에 속물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이제 고위급 정치가군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은 신향촌건설운동이라는 사회적 실천운동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고, 중국의 사회과학계, 지식인 사회의 역할에 대한 전망과 제언을 위해 쓰여진 글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에 이르기까지, 원톄쥔 교수를 포함하는 소위 중국의 ‘공공지식인’들이 왕성한 사회실천과 학술활동을 벌이던 시절이 있다. 이들은 중국의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델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개발하려고 노력했고, 이러한 이론이 ‘중국의 길’을 설명할 뿐아니라 세계체제에서 주변부나 준주변부에 속한 비서구국가들이 참고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기를 바랐다. 서구의 뉴레프트, 제3세계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오랜기간 지역의 근대성 과제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한국, 일본, 타이완과 같은 동아시아 좌파 지식인들이 이러한 논의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학파’를 건설하고 싶다는 그들의 야심은 큰 성과를 얻지 못했고, 시진핑 정권의 등장이래, 지식인 담론 공간이 거의 완전히 ‘체제화’하면서, 오로지 관방의 언어로 중국 주류사회에 공명하고 있다. 바꿔말하면, 이제 중국 영토를 한발짝만 벗어나도 지지 세력을 끌어모으기 쉽지 않다. 당연히, 미국을 위시한 서구학계의 담론 권력이 워낙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중국 자신의 거버넌스 진화 문제, 그리고 홍콩과 신장 등 국내 지역 문제를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이들 담론의 대외설득력이 떨어지게 된 주요한 이유중의 하나이다.

위와 같은 이야기는 중국내에서 자유롭게 논의할 수 없기 때문에, 샹뺘오 박사는 중국 학문의 규범화가 가져온 체제화 문제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여기서 중국의 ‘체제’라는 표현은 우리가 생각하는 주류, 비주류 구분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비민간’ 혹은 정부와 정부의 직간접 영향이 있는 조직을 포함하는 ‘제도권’에 가깝다. 이를테면, 순수한 민간자본 기반의 사립대학을 제외하고, 중국의 대학은 소위 ‘사업단위’라고 불리는 정부의 ‘지도관리’하에 있는, 공공의 영역을 다루는 조직들의 일부이고 그래서 ‘체제’안이라고 봐야 한다. 즉 ‘공공’이라고 불리는 영역조차 민간의 파이는 매우 작고, 거의 ‘체제’와 등치된다.     

샹뺘오 박사는 지청시대의 지식인과 관료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그 자신은 후지식청년시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또, 중국의 체제내 학계 출신이지만, 본인은 서구 학계인 옥스포드 대학에 소속돼 있다. 중국의 ‘중앙’, 핵심 ‘노른자’인 베이징 대학 사회학과에서도 수재로 꼽히던 인물이지만, 자신의 보다 근원적 정체성 기반은 고향인 ‘지방’ 원저우溫州의 소상공인과 몰락한 향신계급, 실증주의의 본고장 영국 학술계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역자가 그의 대담집인 ‘방법으로서의 자기’ 서평을 일간지에 기고하였다). 그가 사회학과에 소속되지 않고, 본질적으로 주변부를 지향하는 학과인 인류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점도 정체성과 부합한다. 그는 2014년 ‘어큐파이 센트럴’운동을 근거리에서 지켜보면서 천안문 사태의 부정적 유산이 어떻게 홍콩사태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논한 바 있다 ( “홍콩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

http://platformc.kr/2019/09/%ed%99%8d%ec%bd%a9-%eb%8c%80%ec%a4%91%ec%9a%b4%eb%8f%99%ec%9d%98-%eb%af%bc%ec%a3%bc%ed%99%94-%ec%9a%94%ea%b5%ac%ec%99%80-%ec%a0%95%eb%8b%b9%ec%a0%95%ec%b9%98/) . 당시 중국 대륙의 국가 권력층과 홍콩의 시민들이 균형감있게 문제를 바라보고 행동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의 소망과는 반대로 2019년 홍콩사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하지만,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른 것 같다. 이제 중국과 외부 세계의 지식인들, 중앙과 지방, 통일적 거대담론과 파편화된 작은 세계들의 경험에 대한 분석을 이어줄, 중국의 새로운 ‘공공지식인’ 샹뺘오의 활약을 여전히 기대해 본다. 한편 한국의 ‘후586시대’ 지식인들이 중국의 후지청시대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가 되기도 했다.  

보너스 – 중국의 80년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인기 듀오였던 웸이 서방의 대중청년 예술인을 대표하여 1985년 베이징과 광저우에서 공연을 갖은 것이다. 당시 북방과 남방의 거리와 청년들의 모습을 보며, 생동하는 80년대 문화열의 분위기를 간접 체험해보길 바란다.

Wham ! Freedom (공식 뮤직 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BFwOs-jy53A


베이징대학 사회학과 계열을 예로 들자면, 2015년은 아마도 중국의 사회과학 “지식청년시대”의 종언을 고한 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5년을 전후해서 1960년 이전에 출생했으며,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상산하향(하방)경험이 있는 학자들은 모두 은퇴했다. 이들 대부분이 교직을 떠났다. 동시에, 정규교육을 받고, 학교 외에는 별다른 인생경험을 해보지 못한 70년대 출생 학자들이 학계의 주류로 나서게 됐다. 지식청년의 배경을 갖는 학자들은 1978년 (개혁개방)이후 중국 사회과학을 재건해 나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리더쉽이었고,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렇게 ‘지식청년(이후 지청)의 시대’를 만들었다. 2015년 8월13일 나의 석사과정 지도교수였으며 중국 사회과학을 재건하는데 큰 공헌을 한 왕한셩王漢生 선생이 겨우 67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그의 죽음이 2015년의 의미를 내게 되새겨주었다.

지청시대의 종언은 이들 학자의 학술생명이 끝났다거나, 그들의 영향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후後지식청년시대’의 학자인 우리들은, 뭉뚱그려 말하자면 가까운 시일내에 그들의 연구업적을 전면적으로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제와 관점은 미래 상당히 오랜 기간, 중국사회과학발전의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다. 지청시대의 종언이 의미하는 것은 그래서 그들이 리더쉽을 발휘해오던 독특한 분위기와 기질의 학술실천 방식이 종료했음을 의미한다. 중국현대사회과학의 변천은 아마도 토마스쿤이 말한 패러다임 구축(지식이 점차로 쌓이는 과정)과 패러다임 전환이 상호교대되는 경로와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는듯 하다. 다른 세대간에 학술실천방식이 전환되는 것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지식의 습득과 축적방식의 변화이다. 만일 이런 축적방식의 전환을 파악하지 않으면, 유효한 지식의 축적방식에 대해서 논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지청시대의 학술실천은 제한된 물질적 조건하에서, 비공식적인 교류와 조직을 이용하고, 강렬한 사명감과 개척정신에 기반하며, 발산형 사고방식 (역자 주 – divergent thinker)을 택하고 있었다.  반대로 2000년 이후의 학술활동은 공식적인 기관안에서 프로젝트를 만들고, 자금을 따내고, 인정과 허가를 받으며 (이런식으로 학교순위가 매겨지고, 지도자가 칭찬을 하고, 학자 개인도 지명도를 쌓아간다) 전문연구자로서의 직업적 안정성과 커리어의 개발을 추구한다. 지청시대는 반半민간의 연구공간을 창조했지만, 국가기관과도 잘 소통했고, 새로운 의제를 설정함으로써, 공개토론을 하거나, 심지어는 여론을 형성해서 정부개혁방향을 뒤집을 수도 있었다. 이제 후지청시대에 들어와서, 연구방법은 고도로 전문화했지만, 학술은 이제 행정관리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민간과 반민간이 함께 지식을 생산하던 공간은 사라졌다. 학자와 정부간의 협력은 정부관리효율을 높이는 것이 주요목표이다. 이른바, 폐쇄적인 씽크탱크 컨설팅이다. 주어진 과제에 대해 논문을 쓰는 것이 주요한 방식이고, 정부의 논리와 정책 방향을 바꿀 정도의 영향을 주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사회과학의 지청시대가 끝나는 동시에, 국가관료의 지청시대도 끝났다. 2010년 이후 대부분의 지청출신 지방정부 간부들도 은퇴했다. 그들은 대학의 학자들과 사회적 배경, 학습경험, 지식의 구조, 생활방식이 동일했다. 공무원의 지식전문화 그리고 규범화가 관료시스템에 새로운 합법성을 부여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점점 완고해지고,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주요한 동기로 삼는 집단으로 변해갔다. 공무원과 대학과 정부연구기관에 속한 학자들도 2014년 이후 모두 1990년대말에 시작된 ‘사회안정제일주의維穩’ 정책에 반대했지만, 사실은 자기 밥그릇 안정도 챙겨야 했다. 이렇게 ‘사회안정제일주의’가 모두의 이익을 지키는 기반이 됐고, 연구주제든 방법이든 해바라기식唯上으로 변하게 된 이유도 그때문이다.

1980년대의 상황은 이와 매우 달랐다. 당시, 정부의 연구기관, 대학과 반半민간문화단체의 지청세대 학자들과 정부내의 중하층간부, 그리고 지방정부 간부 (모두 대부분 지식청년 배경을 갖고 있다)들이 심리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로 교류하며, 새로운 의제를 주고 받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나는 1990년대 중기에 저쟝浙江성, 후난湖南성 등에 가서 필드조사를 했는데, 지도교수인 왕선생님 네트워크의 덕을 보면서, 이 공동체를 이해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방정부 간부들이 열심히 질문을 던졌다: 경제체제개혁연구소體改所, 특히 중공중앙농촌정책연구실農研室의 책임자는 최근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가 ? 힘있는 간부들은  끝도 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냈고, 힘없는 간부들은 나의 조사를 통해서 새로운 문제를 드러내기 원했다. 모두 토론을 희망했다. 지금의 간부들은 소심한데다가 안온한 분위기만 좋아한다. 국가안전과 이익을 보호한다는 구호하에, 자신의 정치적 안전과 이익만을 보호하려 한다.

<사진1> 지식청년시대를 창조한 반半민간연구공간은 정부부문과도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공개토론이나 혹은 정부개혁방향을 뒤엎는 제안도 서슴지 않았다. 농연실 시절의 두룬셩杜潤生, 왕샤오창王小強, 왕치샨王歧山 (왼쪽부터 오른쪽으로)이 농촌에 가서 필드조사를 하고 있다.

당시와 오늘날의 가장 큰 시대적 차이는 사회과학계와 관료시스템안에 있던 지식청년들이 은퇴하고, 그 중 일부는 정치 상층부로 이동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2013년까지, 엔지니어 출신이나 문화대혁명시기의 대학생 지도자들이 제도, 규범, 조화를 강조했다면, 2013년 이후의 키워드는, 돌파, 의지, 이상, 소그룹小組정치, 과단성과 박력 (大刀闊斧 역자주 – 큰칼과 도끼, 수호지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정치 상층부가 갖는 이런 ‘지식청년 기질’과 다음 세대의 지식인 및 중하층 공무원 그룹은 잘 맞지 않는다. 만일 이들과 같은 매개계층이 없으면, 상층 정치인들이  유효하게 서로 다른 사회의 이익을 적절히 대표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지청시대종언의 역사적 의미가 갖는 중요한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사회과학 지청시대의 종언과 고급정치인 지청시대의 시작이 동시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은 같은 출발점을 갖고 있는, 동일한 역사과정의 결과이다. 이중에서, 지식청년과 국가체제의 관계가 관건이 된다. 1980년대이래 지식청년 담론중에서 이들이 갖는 ‘민간’의 성격에 대해 많이들 논의한다. 문화혁명기간중에 특히 린뺘오林彪 사건후, 어떻게 지하에서 독서를 하고 독립적인 사고능력을 키우며, 문화대혁명을 비판해왔느냐는 것같은 이야기들이다. 사실 이것은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대 중국사회과학의 회복과 재건기간중에, 가장 주목을 받던, 두개의 중첩된 커뮤니티가 있다. 하나는 <<미래를 향해간다走上未來>>총서와 <<20세기문고>>로 대표되는 학자들의 그룹이 있고, 두번째로는 구舊경제체제개혁연구소와 구舊중공중앙서기처농촌정책연구실이 중심이 되던 ‘씽크탱크’그룹이 있다. 당시에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과 베이징대학 등의 대학원생들도 이 두 그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두 그룹으로부터 중요한 학자들과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탄생했다. 이러한 지식청년시대 학자와 학생들이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영향력은 그들이 온전히 ‘민간’의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관심을 끌었고, 우선은 그 문제들이 사회주의 진영내 발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유럽사회주의자들간의 논쟁은 그들의 주요한 사상적 자원이었다. 소련공산당내부의 모순, 1956년 이후 유럽좌파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성, 1968년 이후 사회주의 경향의 사상 (싸르트르, 알베르 까뮈), 유고슬라비아의 개혁 등이 특히 중요했다. 그들의 자아의식안에는, 상당히 강한 ‘공화국정서’가 존재했다.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사회주의 혁명의 자식이자, 인민공화국의 주인이라 여겼다. 그들이 제안하는 의제들은 중국이 다음 행보를 어떻게 취해야 할 것이냐였다. 가장 핵심은, 지식청년들의 활약이었다. 이들중의 리더쉽은 고급간부의 자녀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문혁기간중에 소위 ‘황피서(노란색 커버의 책)黃皮書’, ‘회피서(회색 커버의 책)灰皮書’를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혁’이 끝나고, 최고통치자 집단은 이들 청년들을 자기편으로 여겼다. 지방정부에서도 그들을 무관의 제왕으로 대우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그들은 “내가 아니면 누가 맡으랴”는 자신감과 권위에 기죽지 않는 당당한 기질을 갖게 됐다.

<사진2> 19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중앙선전부와 중앙편역국조직이 번역해서 ‘내부참고비판용’으로(일반인은 열람 금지) 출간한 정치, 역사, 철학, 문학작품 시리즈의 책 대부분 국제공산주의운동과 관련이 있다. 책표지는 대부분 옅은색을 띄고 있어서. 회피서, 황피서라고 불렸다.

1990년이후 (역자 – 천안문 사태가 종결되고), 국가체제와 지식청년 사이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는 조직의 책임자가 되어, 목소리를 낮추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공론장을 떠났다. 다른 일부는, ‘우리편’에서 제외되어, 그중에서도 학문에 뜻이 있는 이들은 학교로 돌아가, 학술연구의 제도화에 힘썼다. 이들 사상가들이 학자로 변신한 것은, 선진국의 학술연구를 동경한 이유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80년대 급진사상운동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있었다. 90년대 지식청년학술시대의 주제는 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전문지식체계와 연구방법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규범화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하고, 학술활동이 온건한 민주주의의 건설, 사회의 장기적 안정의 기초를 닦도록 돕는 것이었다.

현재 지식청년 세대가 고급정치가로 등장한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변수는 구체적으로 누가 선택될 것이냐에 대한 질문과 답일 뿐이다. 학계의 지청시대 종언은 그래서 바탕으로 돌아가, 학술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통해서 사회의 민주화를 촉진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실패했다. 형식상으로는 규범화된 학술활동은 전면적으로 체제안으로 들어왔다. 사회과학원 체계의 변화가 특히 명확하다. 이러한 변화속에서, 사회학자 잉싱應星이 지적한 것처럼, 지청세대의 학자들은 1990년후기부터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잉싱의 설명과는 달리 나는 그들이 이중인격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혁신과 기허, 개척과 탐욕, 무실과 속물성 創新與氣虛,開拓與貪焚,務實與媚俗”,역자주 – 2009년 칭화대학 사회학과 교수 잉싱이 ‘문화종횡’지에 발표한 글, 지청 학자들이 학계의 실력자가 되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경향을 비판함) 학계의 변화가 지식청년그룹의 도덕적 변신의 결과라고 보지 않는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지청학자들의 학술실천이 내재적으로 가진 모순이었다. 이 글에서는 사회학계안에서 드러난 두가지 모순에 대해서만 지적하기로 한다. 첫째, 지청세대 학자들은 원래 비규범적인 학교체제바깥에서의 학술활동에 능했다. 하지만 학교에 돌아간 이후에는 학술의 규범화에 진력해야 했다. 두번째로, 지청세대 학자들은 다른 보통학자들이 얻기 힘든 풍부한 인생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경험연구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하지만, 경험을 처리하는 것이 이론에 복무하는 소재가 되고, 다양한 경험을 초월하는 통일 사상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다양한 측면의 모순간의 상호작용이 1990년대 학술생태계의 하나의 내적인 동력이었다. 지식청년시대의 종결은 모순운동의 종결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순의 구체적인 측면은 계속 존재했지만, 반대로 그 대립면이 사라지면서 생명력을 잃게 됐고, 부정적인 측면의 유산으로 남게 됐다. 지청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자산이 오히려 우리의 족쇄가 됐다. 규범과 비규범의 모순은 이제 ‘체재화’되었다. (지금 시대의) 상대적으로 협소한 경험과 이에 따른 관점이, 실사구시 정신과 자주적 혁신의 기초를 결여한 학술활동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연구활동을 통한 파괴적 혁신을 방해하고, 체재화 앞에서 저항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모순운동이 지청시대 종결의 원인은 아니다. 훨씬 더 복잡한 스토리가 있다. 사실 주요한 원인은 학계 내부에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런 모순은 역사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정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실마리를 제공한다. 나는 이 실마리가 우리가 현재 직면한 주요한 곤경을 드러내기를 희망한다.

나는 1991년에 일년간 캠프에 갇혀 군사훈련을 받고,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 대략 대학 2학년에 해당하는 1993년에 왕선생님의 “유동流動농민공” 과제소그룹에 참여했다. 1990년대 베이징의 사회학자들사이에 소위 ‘왕한셩워크숍’이라는 타이틀은 왕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중국사회학에 핵심적인 공헌을 한 일군의 중년학자들이 자주 모여서 토론을 하고, 과제의 협력을 조직한 활동을 의미한다. 나는 1995년에 정식으로 왕선생님의 석사과정 지도학생이 됐고, 1998년에 졸업을 해서, 이 학자들과 더 깊은 교류를 갖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회합에서 신세계를 발견한 기분이었는데, 즉 이들이 구성한 아주 독특한 사회적 관계와 학술실천 방법을 접했다. 왕선생님의 학생으로서 나는 운좋게도, 그분의 매력적인 인격을 직접 지켜봤을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사람됨과 세상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평가하는 말이다) 이러한 매력이 구체적인 인생경험이 농축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점을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 이런 매력적인 사람됨이 환원되어 구체적인 역사적 실천으로 나타났고, 우리는 그러한 실천과 유효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우리가 이를 계승할 수 있을지,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이 글에서 말하는 ‘지식청년’은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일련의 사회역사요소적 속성을 의미한다. 지청시대 학자들의 사람됨이나 학자됨을 적지 않은 ‘후지청세대’의 학자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전체적 상황과 방식은 예전과 아주 많이 다르다. 지식청년시대 학자들의 진퇴결정이 학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변화가 이 그룹의 기복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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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뺘오 项飙

옥스포드대학교 인류학과

 

이글은 <<문화종횡文化縱橫>> 2015년12월호에 실렸으며, 저작권은 문화종횡에 속한다. 

원문링크

https://mp.weixin.qq.com/s/KYkgtq_1fIMIbKVCwZRYZg

화, 2021/05/0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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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국회의원들

지금 이 시각에도 어김없이 국회에 대한 성난 비난 여론은 빗발치고 있다.

그러나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대의민주주의는 모두 대위기에 빠져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이 근본적인 요인이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책임정치’의 실종에 있다고 분석한다. 즉, 선거에서 선출된 자가 선거민들의 요구에 따라야 하며 그 행위는 선거민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명령위임(imperatives Mandat)’의 원칙이 지금의 정치 시스템에서 철저히 부정당해온 점에 그 결정적 요인이 존재하고 있다. 결국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들은 대신 선출한 국민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면제되어 오히려 군림하는 위치로 둔갑시킨 ‘자유위임(freies Mandat)’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이렇게 하여 국회의원은 선거로 선출된 후 자신의 선거구 내지 선거구민의 대리인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대표자로서 선거구민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합법적이고 이론에 부합하는 명분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통치란 모름지기 이성에 맞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미덕을 갖춘 자가 담당해야 하며, 그러나 국민은 결코 이에 직접 개입하면 안 된다고 강조되었다. 이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정’이 아니라 사실상 “국민이 소외되는” ‘귀족정’이며, 이것이 바로 오늘의 ‘군림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허구적 대의민주주의의 실체다.

우리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유명세가 있다 싶으면 자천타천 모두가 국회의원을 열망한다. 출세의 상징이다. 책임을 질 필요도 없는 자리다. 그래서 더더욱 최고의 벼슬이다.

이제 그간 왜곡된 대의민주주의에서 폐기되었던 ‘명령위임’의 개념을 복원시켜냄으로써 진정한 책임정치를 실행시켜야 한다. 만약 국민이 위임한 책임정치가 심각하게 부정된다면,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이 이뤄져야 한다.

 

평의회(評議會) 민주주의

사회주의 통치구조에 있어 1871년의 파리 코뮌(Paris Commune)은 그 이념과 실현 형태의 모델로 평가되고 있다.

1871년의 파리 코뮌은 최소 행정단위인 community와 그보다 큰 district, town 등에 수립되었다. 코뮌은 보통선거 제도에 의하여 선거구민으로부터 선출된 자치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노동자나 노동자에 의하여 인정받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코뮌은 단순한 의회에 머물지 않고 입법기능과 함께 집행기능도 수행하였다.

코뮌에서는 모든 관리들이 국민들에 의하여 직접 선출되었으므로 항상 국민들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었다.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관리 역시 국민들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국민들에 의하여 소환되는 지위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코뮌의 관리들은 노동자들의 임금과 같은 보수를 받았다. 하위 행정단위 코뮌은 상위 행정단위 코뮌에 대리인(delegate)을 파견하였고, 이러한 대리인의 파견은 상위 행정단위 코뮌으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파리의 전국대표회의는 이렇게 파견되어온 대리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러한 대리인들은 물론 자신들의 선거구민들에 의하여 지시를 받고 소환되었다. 즉, 명령적 위임관계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조직 형태는 결국 오늘날의 노조 조직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코뮌의 구조는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공적 기관을 가지는 점에서 철저한 직접 민주주의와 다르지만,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자를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그러한 공적 업무 담당자와 국민 사이에 명령적 위임관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대의제와 본질적으로 상이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파리 코뮌 이념을 계승하는 사회주의 정치체제는 혁명기에 나타난 평의회 형태를 토대로 하여 이른바 평의회 민주주의(Rätedemokratie: 평의회 민주주의를 위원회제 민주주의라고도 부른다)의 이념을 형성시켰다.

여기에서 평의회 민주주의란 국민들에 의한 직접적인 자기 통치(Selbstherrschaft)를 추구하며,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평의회가 입법권과 행정권을 통합적으로 행사하게 된다. 즉, 대의 제도와 달리, 권력분립의 원칙이 아니라 권력 통합의 원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최하위 단위의 평의회에서만 위원(委員)이 국민에 의하여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전국평의회는 지역 평의회의 간접선거에 의하여 구성된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월권(越權)

이러한 평의회는 국민의 위임사항에 엄격하게 기속되므로 다른 관리와 마찬가지로 언제든 국민에 의하여 소환되는 명령적 위임관계를 내용으로 한다. 위원(委員)은 일반적으로 직능단위에서 선출되며, 직업공무원 제도나 종신제는 인정되지 않는다. 법관 역시 국민의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며 국민에 의하여 해임된다.

따라서 이 평의회 민주주의에서는 이를테면,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무소불위의 검찰 그리고 철밥통 공무원도 모두 국민의 뜻을 받들어 수행하지 못하면 소환되고 해임되는 것이다. 사실 검찰이나 법원 그리고 헌법재판소와 같은 국민에 의하여 선출되지 않고 단지 ‘고시’라는 시험제도에 의하여 선발된 권력이 오늘날처럼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명백한 ‘월권(越權)’으로서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된다. 따라서 이들 기구 역시 국민에 의한 직접 선출 요소를 최대한 가미함으로써 국민에 의한 통제와 국민의 자기 통치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의회 민주주의는 혁명기의 시기에만 구현되었을 뿐,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혁명적 엘리트의 지도와 일당 독재의 논리에 의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오직 1%의 기득권층과 진정성 있는접촉을 수행하는 대표자들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대표자가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는 데서 기원한 근대 대의제의 위기는 정치적 책임만을 묻는 선거만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더구나 대부분의 대표자들은 선거 시기를 제외하고는 일반 국민과의 접촉보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소수 기득권층과의 접촉에 자신의 활동이 국한되기 쉽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대표자들이 그야말로 ‘진정성을 가지고’ 접촉하는 것은 이들 1%의 기득권층과 고급 호텔이나 고급 바 혹은 골프장에서 만날 때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이들 기득권층과 보내게 된다. 반면 국민 대중과는 선거 때 반짝 분주한 외에 그 접촉 시간이 매우 짧고, 더구나 모든 것이 표를 의식한 ‘형식적’ 행위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표자들이 일반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여 극소수 기득권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정책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표자에 대한 국민의 통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한 대표자를 소환하는 국민소환제는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최소한의 방어기제이다.

 

지금 의원에 대한 시민의 통제 수단은 전혀 부재한 상태

능력과 의지가 부족하고 심지어 아예 ‘부재’한 의원들, 왜곡된 진영 논리나 이미지 정치의 훈장 혹은 부산물로 국회에 진출한 무능력자들을 국회로부터 퇴출시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처음부터 아예 국회의원이 될 생각을 품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국회개혁의 핵심이기도 하다.

국회의원에 대한 시민의 통제와 견제 수단이 철저하게 결여된 것이 오늘날 모두를 좌절하게 만들고 있는 우리 국회의 난맥상을 낳은 핵심적인 요인 중의 하나이다. 의원의 국민소환제는 국회의원에 대한 가장 중요한 통제 및 견제 수단이다. 국민소환제가 작동되어야 비로소 국회의원들도 국민 무서운 것을 알고 자기의 본분을 지켜 반드시 본업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된다.

만약 국회의원 4년 임기의 한 회기에 한두 명의 의원이라도 소환할 수 있게 된다면, 국회의원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부담감과 그 상징적인 효과는 대단히 클 것이다.

 

영국과 타이완에 의원소환제가 있다

영국 의회의 경우, 2015년 국민소환법(Recall of MPs Act 2015)이 통과되어 공식적으로 국민소환제가 도입되었고, 2019년에 첫 번째 소환된 국회의원이 나왔다. 영국 하원에 설치된 윤리위원회는 7명의 국회의원과 7명의 외부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출석정지 10일 이상의 징계를 받으면 자동으로 해당 의원에 대한 국민소환 절차가 시작된다.

윤리위원회의 징계 외에도 법원 판결에 의해 징역형을 받은 경우, 예산을 부정사용해 적발된 경우에 곧바로 국민소환 절차가 시작된다. 소환 절차가 시작되고 6주 내에 유권자의 10%가 소환 찬성에 서명하면 소환이 이뤄진다.

우리나라 정치와 많은 면에서 닮은 타이완에서도 입법위원(국회의원) 소환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입법의원 소환은 소환 청원 신청자가 해당 지역구 의원 유권자의 1% 이상이면 소환 청원서를 접수시킬 수 있으며, 다시 유권자의 10%가 넘는 서명인의 서명을 받아 소환절차가 진행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환투표에서 소환 찬성자가 반대표보다 많고 소환 찬성표가 해당 선거구 전체 유권자의 1/4 이상일 경우 소환이 성립된다.

 

소준섭

화, 2021/05/1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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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규범화는 체제화를 불러오는가?

”대단히 말솜씨가 뛰어나고, 엄청나게 날카롭다” 많은 학자들, 특히 타이완과 해외에서 온 학자들이 지청시대의 학자들을 평가하는 전형적인 말이다. 말솜씨를 갈고 닦는 것은 당시 지청학자들의 중요한 일의 방식이었다. 1990년대초, 대학과 연구소의 중년, 청년학자들은 업무가 끝나면 거실이 딸린 기숙사로 돌아가곤 했다. 냉동만두와 쏘세지등의 인스턴트 식품이 보급되기 시작해서, 이를 안주삼아 즉흥적인 심야 혹은 철야토론이 가능했다. 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글로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일이다.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핵심, 즉 ‘점’을 짚을 수 있어야 한다: 한가운데 ‘점’을 겨눠, 그 ‘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나서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도약한다. 이렇게 핵심을 짚기 위해서는 충격과 폭발력이 필요하다. 어떤 주제든 2~3분내에 듣는 사람이 이해가능하도록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들을 이어서 선을 긋는다면, 즉, 점을 글에 담아 생각하기 시작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글로 쓰기 위해서는 선을 그어야만 한다. 쓰기 전에 머릿속에 종이에 선을 긋기 위한 틀을 짜야 한다. 쓰는 과정에서, 다른 내용간의 관계를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명료한 분류歸類, 선긋기劃分, 한계정하기界定가 필요하다. 정밀한 논리, 촘촘한 디테일, 물흐르는듯한 연속성이 필요하다. 글쓰기에서 돌파력과 임팩이 목적이 될 수 없다. 전문적인 학술 작법은 독자들을 흥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독자는 에디터, 심사평가원을 포함해서 다섯명을 넘지 않는다). 구두발언조차 교과서를 또박또박 읽는 것처럼 답답하게 들린다. 학자나 관료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혁명가라고 해서 글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에겐 밀실에서의 토론과 광장에서의 연설이 더 중요하다. 밤을 세우며 급하게 준비하는 신문평론이나 소책자도 이러한 토론과 연설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렇게 말로 표현하는 것은, 즉흥적일뿐더러, 예측이 불가능하다.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보수파를 불안하게 만든다. 영국 수상 앤서니 에덴은 당시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나세르의 연설방식이 무쏠리니나 레닌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1956년 수에즈운하 전쟁의 숨은 원인이기도 하다.

잡담같은 대화로 생각을 나누면 생각이 두루 퍼지고, 도약하게 된다. 이런 대화는 고도의 상상력에 의존해서 지속된다. 모두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상상을 해야 한다. 저런 관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떤 감춰진 의미가 있는 것일까? 썰렁해지지 않도록 평범해 보이는 현상에서 어떻게 재미있는 화제를 끌어낼 수 있을지 미리 생각을 해야 한다. 지식청년시대 학자들은 그래서 상상력이 뛰어나다 대신에 당시에 학술적인 능력은 좀 빈곤하기도 했다. 한번은 쑨리핑孫立平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잘모르겠다고 고백했다. 대답이 걸작이었다. “누구는 제대로 알아?”   고개를 들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씀하셨다 “우리들도 어떨 때는 해외문헌을 보면서 큰 영감을 얻고 흥분하는데, 어쩌면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 그럴지도 몰라”. “외국 이론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경우도 많아. 잘못 읽은게 오히려 ‘큰 깨달음’으로 다가 오는거지. “ 사상의 자주성이 자원의 빈곤을 오히려 혁신의 원천으로 전환시킨 셈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사회현상에 대한 통합적 판단을 하고 싶다는 욕망과도 연관이 있다. 무엇을 토론하든, “사회주의의 본질은 이것이다”라든가 “중국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등의 지청학자들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점’에서 (‘선’을 거치지 않고) ‘면’으로 도약한다. 학제를 뛰어넘거나 아예 특정 학과에 소속되지 않으려는 그들의 경향도 상상력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중국사회에 대해서 통합적인 평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자연히 철학, 역사, 정치, 경제의 각 영역을 넘나들게 된다.

대화와 토론은 단체 행동이다. 대화를 통해 사상이 전파되며 친구들간에 공명을 일으키고, 이때 저작권은 고려하지 않는다. 누가 먼저 제안한 생각인지도 따지지 않는다. 1990년대 중국은 가정전화 의 시대로 접어드는데, 작은 범위안에서 연락하고 동태를 전파하는데 매우 도움이 됐다. 당시의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문헌검색기능이 없었다. 개인 PC를 사용하면서, 프린터와 복사기가 보급됐다. 소그룹안에서 끼리끼리 책을 복사하고, 돌려 읽고, 이렇게 출력된 원고에 대해서 평했다. 타이완 사회학자 까오청슈高承恕교수가 왕선생님 소그룹의 허베이河北성 바이꺼우白溝시장 필드조사에 참여했다. 그를 매우 흥분시켰던 것이, 다함께 자전거를 타고 시골로 내려갈 때였다. 대오를 만들어 페달을 밟으며 서로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언제든지 멈춰서 군고구마를 사먹기도 하고, 그러면서 군고구마 장수의 살림살이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다. 나중에 자전거가 자가용으로 대체됐다. 각자 자기 차를 몰아서 간다. 물리적 공간이 닫히고 개별화된다. 아마 이런 변화도 지청시대의 끝을 알리는 지표일 수 있다.

당시 학생들은 자기보다 20~30세가 더 많은 학계의 중진, 원로나 그들의 동료들과도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사상적 교류를 할 수 있었다. 격의없는 논쟁과 대화가 가능했다. 아마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일 것이다. 지금 스승과 제자 사이가 꼭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진짜 중요한 변화는 동료들간에조차 제대로된 토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로 재미없는 사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행운을 누린 것은, 왕선생님이 학생들을 대단히 중시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반대로 그때는 사제관계라는 개념자체가 없었다. 세대의식조차 없었다. 만일 학생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흥미가 있다면, 왜 와서 한번 들어 보라고 할 수 없나? 만일 친구 사이에 절실히 어떤 문제를 궁리하고 있다면, 왜 학생이 뭐라 하는지 들어볼 필요가 없나 ? 한번은 농민공에 대한 이론의 함의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데, 쑨리핑선생님이 말했다. “눈앞 탕속에 들어 있는 고기 한점이 보이는데, 왜 건져 먹지 않나?” “꼭 모든 생각을 다 받아들일만큼 마음이 넓은 것은 아니다 등등. 그냥 눈앞의 고깃덩어리는 건지면 되는 것이고, 그 사상의 탐색이 그들의 반권위적 생활태도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그냥 원래 분위기가 개방적이고 평등했다.

이 학자들의 실천방식은 그들의 생활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동료들간에 질투와 시기하는 법이 없이, 철저하게 함께 생각을 나누는 것은, 아마도 하방시기 단체 생활의 연속선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1990년대 학술계에는 서로 다툴 이익도 없었고, 관리도 엄격하지 않았다 (밤새 토론을 했다면, 아침에 새벽같이 출근해서 정시에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고도로 농축된, 혹은 희극적이기까지 했던 역사적 경험이, 그들에게 매우 특별한 넓은 시야와, 작은 일에서 큰 의미를 포착하는 능력을 선사했다. 어디에 고기덩어리가 있는지  냄새를 맡을 줄 알았다. 이런 밑바닥 생활의 체험이, 각종 생활의 지혜를 근거리에서 관찰할 기회를 주었고, 평범함속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민감함을 선사했다. “점”을 직관적으로 찾아냈다. 계획없이 책을 무차별적으로 읽었고, 다양한 전공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왕선생님 자신이 원래 수학전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철학과 기계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사고는 틀에 갇히지 않고 튈 수 있었다. 그들이 사회과학을 공부한 것은 완전히 흥미와 사명감 때문이었다.

<사진3> 지청학자들의 경계없는 학술실천방식은 그들의 생활경험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동료들간에 질투와 시기도 없었고, 밤새워 함께 토론을 하던 것은 하방때 단체생활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학술실천은 1990년대 지청학자들의 자기비판적 태도를 키웠다. 당시의 공통인식은 전문적인 학과건설을 시급한 임무로 삼았으니, 학술활동은 반드시 지식공동체의 일정한 표준에 의한 대화에 기반한 것이어야 했고, 규범형식이 대화의 기초가 됐다. 그래서, 문헌리뷰와 분석의 틀을 명확히 하는 등, 모두 중요했다. 당시 우리가 시급히 보완해야 할 것들이었다. 왕선생님은 비록 외국에서 공부하거나 일을 해본 경험이 없었지만, 베이징 사회학계의 국제협력을 열심히 추진했다. 많은 지식청년들이 1980년대 특히 1990년대초에 서방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90년대 이후 서구학계의 연구방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왕선생님의 또다른 업적은 전문과제형식의 사회학 연구방법을 도입한 것이다. 경험소재에 대해서 계획을 가지고 접근한다, 체계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그저 관점을 내세우는 식의 주관적 글쓰기와 구분한다. 하지만 1990년대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은 관리자들의 학술규범화 열정이 생각보다 빠르게 학자들을 앞지른 것이라는 점이었다. 중국어 사회과학 검색 및 인용 시스템 (CSSCI), 학술지 평가 및 등급, 임팩트, 인프라 건설, 펀드신청, 과제평가, 국제협력, 국제순위 등과 같은 키워드가 아주 빠르게 학술업무의 황금률이 됐다. 1990년대 추진된 중국사회과학의 규범화속에서 기수역할을 한 덩정라이鄧正來는 그의 말년에는 규범화에 대해서 언급을 삼가하는 대신, 자주성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했고, 특히, ‘지식계획시대’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는 지식계획시대에 연구가 정치적 권력과 그로부터 확정되는 학술제도상 자원분배를 기초로 삼으면, 그 기초가 우리의 지식생산방식을 대부분 결정할뿐 아니라 우리 지식생산물의 구체적 내용까지 간섭할 것이라고 염려했다. 량용자梁永佳는 이에 대해, 덩과 그의 지지자들이 자신들이 초기에 규범화에 기울인 노력이 오히려 학문을 속박하게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규범화의 노력은 본뜻과 달리 ‘체제화’를 촉진한다. 이것은 국가 거버넌스 방식의 전환과 따로 떼어 말할 수 없다. 1990년대 이래, 원래 장기혁명과정에 형성된 것으로써, 사회주의 개혁의 공식인증을 통해서 정당하게 획득한 정부의 합법성은 더 이상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게 됐다. 이제 정부는 새로운 합법성을 만들 필요가 생겼으며, 관리자에게 ‘동의’를 얻어야 했다. 학술연구형식상의 규범화와 운영사이의 상대적 독립은 학술에 대한 행정관리 합법성의 기초가 된다. 행정지도하의 규범화는 확실히 연구의 독립성을 강화한다. 장기간의 훈련이 없으면, 학술과 행정용어를 이해할 수 없다. 각종 명시적 규칙과 암묵적 규칙도 알 수 없다. 그렇게 학술 영역의 문턱을 높이게 된다. 학과내부에서 학자들은 고도의 학술화된 언어를 사용하여 다른 경우에는 사용할 수 없는 화법으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사진4> 덩졍라이(1956-2013)선생이 창간한 <<중국사회과학계간>>과 <<중국서평>>은 1990년대 중국사회과학의 규범화, 본토화의 출발점이었다.

동시에, 처음부터 금단의 영역을 설정함으로써 연구내용의 방법을 통제하는 것이 갈수록 원하는 효과를 얻기 어렵게 됐다. 그래서, 점점 학술연구의 일상적 운용기술 규정으로 전환되는 것을 관리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 – 행정요원은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다. 자원을 농단하는 것은  소수파이고, 주로 여러가지 규칙이나 양식을 채우게 하기, 신청, 평가 등의 수단으로 이를 실현한다. 중년, 청년 학자들은 자기 커리어를 위해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체제화한다: 우선 직위를 추구하고, 점수를 따기 위해 노력하고, 나중에 행정직 수장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기몫으로 할당된 머릿수 쿼터를 받아서, 독립적인 파벌을 만들고 싶어한다. 전속사무원을 배정 받고, 가장 이상적인 것은 독립건물을 가진 자기 연구센터를 하나 꿰차는 것이다. 학술연구로부터 행정직으로 들어가면 물만난 고기와 같다. 일단 이런 위치에 오르면, 다시 학술연구직으로 돌아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두려운 일이다. 한명의 학자가 조직에 들어가서, 직함을 얻고, 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그의 경력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주요한 표준이 된다. 그 연구내용과 업적은 부차적인 것일뿐이다. 후지청학자들이 중년이 되면서, 체제화된 학술연구는 이미 관행이 됐다. 동료간에는 덕담만을 주고 받고, 조화와 평형을 추구하며, 각자 자기 몫을 챙긴다. (공무원 조직이 원래 그렇다. 중하급관원이 정확하게 당신의 연구에 대해서 가치를 평가한다. 하지만 모든 문제는 이미 정부의 손아귀안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나서 매우 친근하게 당신의 가정생활과 건강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물어본다. 유교, 선불교, 차도에 대해서 한담을 나누는 관계가 된다). 거버넌스 기술의 정교화가 학자들의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역으로 이런 구조는 등급화가 되고 심지어는 가부장제 형태로 틀이 짜여, 타파가 아주 어려워진다.

형식상 독립적인 사회과학 연구는 학력, 직책, 지명도 등 관련된 상징자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부는 이런 상징자본을 직접 장악한 것은 아니지만, 자본형성과 전환과정을 통제할 수 있다. 상징자본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조속에서 만들어진다. 이 구조는 복잡한 사회과정이고, 자금을 투입하고 이익을 허락하는 것이, 이 과정속에서 아마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상징자본도 결국 다른 자본과의 상호작용속에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연구 프로젝트가 학계의 인정을 받을 때 (예를 들어 발표를 하거나 상을 받는다) 직접 상금을 받을 수도 있고, 이 자체가 일정 정도 학술상징자본의 독립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로도 작동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정은 공정가격이 되고, 상품은 가격표가 달려야 계속 장사가 되는 법이다. 상징자본의 형성과 자본사이의 전환과정에서 층층이 쌓인 이익위탁대리관계가 다시 형성된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학술체제화과정의 거의 정신분열적으로 보이는 면도 쉽게 이해가 된다. 이를테면, 정부는 대학이 서방사상에 침식당하지 않도록 저항할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동시에 연구 성과가 서방의 인정을 받도록 격려한다. 어떤 대학의 규정은 외국의 저널에 발표하고 정부 지도자의 인정을 받은 연구는 모두 추가 보너스 점수를 얻게 한다. 구체적인 점수값과 이 점수를 인민폐로 환산하는 비율은 저널의 등급과 지도자의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의 연구가 정부의 관료를 기쁘게 하고 동시에 서양사람들의 칭찬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체제화된 학술관리는 두가지 모두를 필요로 한다. 관료는 자원의 공급을 결정하고, 서양 사람들은 체제에 합법성을 부여한다. 관료와 서양사람들 모두가 연구 바깥에 있는 인정 표준의 중요성으로 드러난다. 관료와 서양사람들의 공통점은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는 서민들이 아니며, 그들의 인정이 인민폐로 환전가능하다는 점이다.

지청학자들이 추구하던 규범화와 후지청학자들이 직면하게 된 체제화는 당연히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것은, 규범화의 요구가 체제화에 제공하는 합법성이고, 최소한 이 것들이 우리들의 체제화에 대한 경계를 늦추게 하고, 저항감을 줄인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규범화 자체는 원래 제한을 의미하지 않지만, 대신 일종의 독립성에 대한 환상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사회과학은 만일 사회의 기타부문과 유기적 연관성을 맺지 못하고, 누구를 위해 발언을 하는지, 누가 듣게 하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으면, 형식상의 독립은 사실상의 고립이 되고, 쉽게 체제에 편입되어 버린다. 체제화가 바로 학술연구를 자족적인 시스템으로 만든다. 발전하면 할수록 인볼루션involution內卷 (역자 주 – 생산요소 투입이 늘고, 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생산량이 늘다가, 그 성장 속도가 줄고 더 이상 생산성이 향상되지 않으면서도, 돌파구가 생기지 않는 상황. 중국과 인도네시아 자바의 쌀농사 발전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의 결과로 만들어진 표현)이 일어난다. 그렇게 닫힌 시스템은 스스로의 논리는 강화되지만, 그 생존은 더욱 외부자원에 의존하게 된다.

독립성은 확실히 프랑크푸르트사회연구소가 20세기초에 결성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요한 조건이다. 하지만, 그 독립이라는 것은 정치와 사회에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독립된 학계에서 독립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비판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독립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전통이론’이었다. 연구소는 독일이 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아마도 소련식 무산계급혁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신기원에 대한 기대와 충동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노동자운동은 금방 실패로 돌아갔고, 나치가 등장했다. 이러한 반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 이론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과 혁신성은 이러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강박이 바탕에 깔려있었다. 우리가 오늘날 직면한 문제는 학계와 국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누구를 대표해서 국가와 상호작용할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반드시 인위적인 ‘탈규범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왜 규범화가 필요한지 분명히 하고, 규범화가 사상적 좀비가 입는 비단옷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체제화가 된 학술연구가 다시 유기적이고 자연적으로 하나의 장기적 투쟁과 탁마의 과정을 겪게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경험’이라는 이 범주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아마도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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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뺘오 项飙

옥스포드대학교 인류학과

 

이글은 <<문화종횡文化縱橫>> 2015년12월호에 실렸으며, 저작권은 문화종횡에 속한다. 

원문링크

https://mp.weixin.qq.com/s/KYkgtq_1fIMIbKVCwZRYZg

목, 2021/05/1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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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5월 문재인-바이든 회담의 성공 여부는 한미 정상들이 현 정세의 심각성과 해법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공감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두 나라 대통령은 서로에게 주문하고 기대하는 의제들을 충분히 제시하고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종료 11개월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모든 자원과 대안을 활용하여 바이든 대통령의 귀와 가슴에 한반도 평화와 동아시아 비핵화 정책을 입력해 줘야 한다. 그래서 바이든 대통령이 담대하게 대북 적대시정책을 폐기하고 북한-중국-러시아 동맹의 결속을 조금이라도 완화할 수 있도록 보다 더욱 유연한 정책 선택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문재인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이 요구하는 한국-미국-일본 군사동맹의 강화 요구를 정중하고 완곡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한미일 군사동맹을 한미일 평화외교동맹으로 대전환해야 한다고 맞받아 쳐야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자신의 평화·인권·경제외교 구상을 잘 가다듬고 바이든 대통령의 생각과 그 측근들의 입장을 이해, 판단하여 미국인들이 지닌 편견과 오해를 적극적으로 바로잡으며 그 평화대안과 친선·신뢰외교로의 선회를 강력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미·중간 격돌하는 강대국 국제정치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필요한 대결에서부터 시작될 파국을 회피해야 한다고 역설해야 할 것이다.

문재인-바이든 정상회담에 상정될 의제들은 대부분 이미 거론되어 있다. 말하자면 바이든 대통령의 대외정책은 중국포위정책과 인도-태평양 4개국(미국-일본-인도-호주) 다자협의기구, 미국의 대북정책, 반도체와 백신, 기후변화 및 인권외교 등 경제, 군사, 보건, 환경, 인권 등 매우 광범위하다. 이미 한미외교장관 및 한미일 외교장관, 한미 정보회담과 한미일 정보회담을 통해 이미 거론된 의제들이 반복될 것이다.

낡은 시대의 한미관계였다면 미국 대통령이 말하는 대로 한국측이 들어주면 될 사안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미국 측이 이거 들어 줄 터이니 한국은 고가의 신형무기를 사가라는 식의 회담장 분위기를 상상해 보라. 그러나 지금은 전면적이고 새로운 한미관계를 모색, 형성해 나가는 완전히 다른 회담구조를 갖추어 가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제는 한국 대통령이 앞서서 이런 의제를 다뤄야 한다고 선도할 수도 있고, 그런 의제는 적절하지 않다고 뿌리칠 수도 있는 시점과 단계에 와 있다는 점을 회담 시작부터 강력하게 선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10개월 전 문재인 대통령은 외교안보인사를 단행하였다. 서훈 대통령실 안보실장, 정인용 외교장관,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모두 대북 접촉 경험이 있고, 다른 어느 외교 관료보다도 민족 자주적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이인영 통일원장관과 송영길 민주당 당대표 등이 포진해 있다. 이들은 대통령에게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무엇을 어떻게 거론해야 할 것인가를 진언할 수 있는 지근거리에 있다. 이들 5인이 이번 회담을 앞두고 대통령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고 보고해야 할까? 지난 4년 동안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안보·통일인사들이 7·4공동성언, 6·15평양공동선언, 4·27판문점공동선언, 9·19평양공동선언 등을 이행하기 위해 무슨 노력과 성과를 달성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툭하면 미국 탓을 하면서 고유하게 민족 내부의 문제 해결방식으로써 남북관계 개선과 화해·협력을 잘 해오지 못했는지 철저한 반성부터 해야 할 것이다. 민족 내부의 문제 해결방식에 주목한다면 얼마든지 국제연합(UN) 이나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의 틀을 벗어나 타결이 가능한 접점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게 남북관계를 희망적으로 사고하는 인사들의 주문이다.

미국에 의해 가중되고 있는 한미방위비 분담금에 대한 국회 비준 거부와 재협상,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한 주한미군지위에 관한 행정협정 개정, 무리한 규모의 군사비 지출을 강요하는 첨단 군사무기 도입 거부 등도 국익과 민족우선정책 차원에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회는 4대 남북공동선언의 핵심내용들을 모두 비준함으로써 조약과 같은 효력을 발생하도록 능동적으로 남북관계 개선과 상호협력체계 구축을 선도해야 할 것이다.

물론 분단과 냉전, 한국에서의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한 번도 실체로서의 국가,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 대북 봉쇄정책을 지켜왔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어지고 있는 대북 제재정책은 국제법과 국제인권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장기간의 광범위한 미국의 대북제재는 국제인권규범에도 정면 반(反)하는 만행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런 무모하기 짝이 없는 대북제재가 미국 외교 관료들이 기대하고 있는 만큼 금지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의구심이다. 미국 강경파들이 노렸던 것처럼 만약 장기간의 광범위한 대북제재가 북한경제의 몰락에 결정적 효과가 있었다면 벌써 북한은 망하거나 항복(collapse and surrender)했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기 매우 어렵다는 게 현실주의자들의 평가이다. 이제는 미국도 달라져야 한다. 그에 상응하여 북한도 달라져야만 무엇인가 얻을 수 있고, 더 이상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게 김정은 주석이 북한인민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는 일이 아닐까?

해군 중령 출신의 한 전문가는 2019년 이후 국내외에 퍼졌던 북미관계에 대한 근거가 없는 기대와 희망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지난 2020년 가을 트럼프의 10월 깜짝쇼에 관한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북미관계에 그런 깜짝쇼는 있을 수 없다. 바이든 대통령은 COVID-19, 경제위기, 인종갈등 등 대선 후유증 들 미국 국내문제 처리와 미중관계 대응에 모든 정책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바이든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해서 한반도 평화를 책임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그들 방식으로 원칙에 의거한 단계적 대북접근을 한다는 것인데 여기엔 북미 양국 어느 쪽도 먼저 양보하기 어려운 점들이 놓여있다. 미국은 한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면서 미중간 전략적 대결을 지속할 것이고 이것은 곧 북한의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 심화를 부르게 될 것이다. [김동엽 2020 (사)평화철도 특별강연<5/21한미정상회담과 우리의 자세-미국 가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일시 : 2021년 5월 16일(일요일) 06:30- 서울]

 

남북관계의 위기를 새로운 평화의 기회로 만들어 나가야 할 때

자 그렇다면 미국은 담대한 북한 적대시정책을 폐기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겠다. 첫째, 미국은 대북협상을 통해 무엇인가 주고받는 아담한 거래(some deal)을 해야 한다고 힘주어 요청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바이든 대통령은 역사적 의미가 깊은 김정은-트럼프 회담의 성과를 존중하고 이를 활용해야 한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조미회담의 성과를 서슴없이 인정한 바탕위에서 미국은 북한과 대화에 나서야 한다. 그래서 이를 위한 협상의 규칙들을 공유하고, 작은 거래(small deal)을 성공시킴으로써 상호 신뢰를 축적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트럼프 대통령시기의 미국에 의한 대북제재를 즉시 폐기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하라고 정중하고 간곡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2019년 2월 27-28일, 하노이 조미회담에서 트럼프는 큰 거래(big deal)을 하고 싶었고, 실무접촉을 통해 회담 전날까지 상당한 접근을 양자 사이에 할 수 있었으나 무거래(no deal)로 끝나고 말았다. 하노이 북미회담에서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 포기를 시사했고, 트럼프도 이를 수용할 것처럼 움직였으나 막판에 회담장에 나타난 볼튼 미대통령 안보보좌관의 방해와 견제, 제지로 인해 미국과 북한은 서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외교 실패를 당했다. 트럼프는 하노이 북미회담에서 이런 결정적 패착을 함으로써 그는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코앞에 까지 나타났던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싱가포르 북미회담에서 이루어진 합의정신을 견지해 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매우 큰 평화와 공존의 가치가 있다는 점을 미국 대통령에 머리에 심어줘야 한다.

하노이 북미회담에서 거론된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포기 의사는 명백히 “미래의 북한핵”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북한의 미래 핵”을 개발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왜냐하면 바로 이 영변 시설에 수많은 핵실험시설과 장비, 인원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북한을 4차례나 방문하여 이들 현장을 방문했던 지그프리드 해커 박사의 증언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해커 박사 “영변은 북핵의 심장…비핵화는 영변서 시작돼야. 연합뉴스 2019. 9. 19).

<그림 1> 2018년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방식에 의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의 번영 로드맵. <출처김동엽 2021. 5. 16. 상기 발표자료>

이에 비해 하노이 북미회담에서 미국이 북한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잘해 나갈 것인지를 제시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아보였다. 그러니 하노이회담직후 북한 협상팀은 화를 내는 듯한 기자회견을 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북한핵” 폐기 여부는 한반도 비핵화 못지않게 미국의 북한적대시정책 폐기와 북한체제 인정, 양국 수도에 연락사무소 설치, 평화협정 및 북미 불가침선언 여부에 달려있다. 이를 위해 미국과 북한, 한국과 북한과 미국 사이에 매우 다양한 협상과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남북회담이나 조미회담과 병행 또는 선행하여 남·북·미·중 4자회담, 남·북·미·중·러·일 6자회담을 통해 양자회담의 불안정을 해소할 수 방향으로 선회하는 방안도 추진할 필요가 있따.

둘째, 미국은 특사외교를 통해 교착 국면의 대북관계 개선의지를 밝혀라.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의 하향식 대화방식을 시도하지 않고 상향식 대화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이든이 조만간 김정은과 직접 만나 회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바이든 대통령과 어느 때라도 통화할 수 있을 만큼 위력을 지닌 인사를 특사로 기용하여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과 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김정은 주석도 바이든 대통령을 직접 만나지는 못할 것이지만 바이든 대통령 실세 측근이 평양을 찾아온다면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특사의 접촉 결과에 따라 김정은 주석과 바이든 대통령간의 양자회담 개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바이든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이 결단을 내리고 담대한 평화회담을 추진해야 한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 김정은 주석과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사이의 4자 종전선언 회담으로 나아간다면 이 역시 세기적 평화회담으로 열릴 수 있다. 필요하다면 이 4자 평화회담을 셰계평화의 섬인 제주도에서 개최한다면 더욱 유의미한 평화외교공간이 될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일제 패망 직후 미국은 3년 동안 북위 38도 이남지역을 점령하고 지배했다. 이 3년 미군정 시기에 조용하고 단란하게 지내고 있었던 제주도민에게 엄청난 대살륙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한국전쟁의 기원』 연구로 유명한 부르스 커밍스는 수만 명의 희생된 이 대비극을 ‘제주학살’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확보한 여러 기록과 증거에 의하면 이 제주학살의 발생배경과 발발, 전개과정에 미군정이 직접 개입한 사실이 명백하고, 당시 미군 장교 역시 정책실패를 인정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으며 진압작전을 지휘, 통제, 지원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47년 3월부터 7년 7개월 동안 끌었던 제주학살 피해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 유족에게 사과했다. 따라서 이 제주학살에 결정적 관련을 맺고 있다고 판단해 볼 때 이제라도 미국 연방정부 역시 응분의 상당한 행동을 취할 때가 되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거론하며 한미간 가치 동맹을 강조하였다. 이번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도 미 대통령은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들먹이며 한국과 북한의 인권을 의제에 올릴 것이 분명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주저하지 말고 미국과 미군정이 74년 전부터 제주도와 점령지역에서 한국인들에게 가해진 엄청나고 중대한 인권침해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고주말미주알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중산층을 위한 경제 복원을 약속했고 이들을 위해 일자리 창출에 골몰하고 있는 것처럼 문재인 대통령도 서민 대중의 삶을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정책을 입안, 시행하고 있고, 이행기 정의 실현을 위해 나름대로 국가책임을 다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미국 정부야말로 이제는 문명국가의 일원으로써 제주학살 피해에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회담장에서 말해 주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재인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미국 정부의 국가책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어야 한다.

이제는 한국은 미국과 북한사이를 왕래하면서 해 왔던 한반도 운전자론에 대한 성찰, 성과와 한계, 문제점을 넘어 전략적 주도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행사해 나가야 할 것이다[이래경 다른백년 이사장 2021. 5. 2.(수요토론회) 바이든 정부의 대외정책과 우리나라의 대응전략] 즉 한국은 조미협상에 촉매역할이나 중재역을 하는 데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조미협상 과정을 조정하고 개입할 뿐만 아니라 주도적으로 협상과정을 이끌어나감으로써 지난 날, 낡은 시대의 한미관계를 벗어나야 한다는 데 있다. 더 이상 영원한 한미군사동맹은 불가능해 졌다는 의지를 전달해 줘야 한다.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과 같이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 폐기와 북한 체제 인정을 동시에 행동으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한반도로 날아 들어오는 미군 정찰기와 핵무장 전략자산의 군사 시위와 전시작전권 이양을 앞두고 되풀이되고 있는 한미연합훈련 실시, 무리한 군사비 지출 등은 즉시 중단되거나 동결되어야 할 것이다. 일부 반공우익 보수진영 호전광들이 되풀이하듯이 북한만이 비핵화에 “모든 것을 다걸기”하라는 주장은 한마디로 북한을 사지로 내몰겠다는 흡수통일론, 반평화, 반인권적 사고틀이라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한다.

태초에 말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 정치지도자들은 말을 하면서 생각을 하고, 생각하면서 민족과 국민을 위해 담대하게 행동할 때이다. 남북은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만나 전쟁이 끝났다라고 종전선언을 단행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은 이런 남북의 종전선언을 존중하고, 지역내 안정과 평화를 위해 공동보조를 맞춰야 한다. 70여 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분쟁에 미국과 중국이 불필요하게 개입했던 일은 이제 잘잘못을 떠나 역사에서나 현실에서나 종료되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간절한 사연을 바이든 대통령에게 직언함으로써 한국과 미국이 보다 평화로운 관계의 친선외교의 단계로 비약해 나가야 한다. 이번 문재인-바이든 정상회담의 내용과 형식에 따라 민족사의 진운이 걸려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외교안보라인은 이 점에 주목하여 회담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데 매진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허상수

화, 2021/05/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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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를 올릴 것인가 廟堂折子” 아니면 “저잣거리 객담 江湖段子을 나눌 것인가”: “경험의 돌파력”

경험연구는 지청학자가 1990년대 전력을 기울였던 과제이다. 하지만 다음의 몇가지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선, 만일 경험연구를 고무한 것이 교조화된 마르크스주의가 현실을 설명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라면 왜 1980년대에 먼저 이런 요구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일본에서는 매번 좌익지식인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때마다,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國男를 대표로 하는 민속학, 인류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되살아났다. 그들은 민속학과 인류학을 통해서 기층의 경험에 대해서 직접적인 이해를 형성했다. 하지만, 1980년대의 중국은 “실천은 진리를 경험하는 유일한 표준”이라는 말이 있어도, 실천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을 가져오지 못하고 매번 이론에 대한 열기, 문화에 대한 열기만 불러일으켰다. 의도는 일종의 추상적 사상으로 새로운 거대체계를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두번째, 지청학자들은 왜 자신의 독특한 경험을 이론 자원으로 전환하지 않았는가? 1968년 구미의 학생운동은 직접적으로 20세기 서방사회과학의 발전을 낳았다. 상당수 학자들이 직접 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얻었고, 그들은 개인의 의식, 생활방식, 대중문화의 중요성 등을 친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와 국가 등의 범주에 대한 새로운 함의를 사고했다. 독일에서 나치의 발흥은 제2차세계대전을 불러왔지만, 한편으로 이것이 서방인문사회과학에 끼친 영향이 2차대전이 세계를 전면적으로 변화시킨 것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일군의 학자들 특히 유럽의 유태인 학자들이 자신이 나치점령시기에 겪은 독특한 경험에 대해서 일련의 문제의식을 품고 깊이 사고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한나 아렌트의 이론철학 사고와 같이 대단히 개인적 경험에 의존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비서구사회에서도, 남아시아학자들이 민족-국가의 이론에 대해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들은 민족독립운동과, 인도-파키스탄의 분할통치를 근거리에서 관찰했을 뿐아니라, 그들의 독립후 사회운동 참여 경력이 특히 그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독자들도 익숙한 타케우치 요시미竹内好는 루쉰과 마오쩌뚱에 대해서 대단히 독창적인 분석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특히 중일전쟁에 침략군으로 참여한 한명의 병사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경험과 연구대상의 경험간에 관계를 만들려고 하고, 이 과정에서 독특한 사상이 태어났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개별적인 경험을 모두 포기해 버린다면, 그래서 이런 운동과 전쟁의 처리가 거시적인 역사의 사건으로만 다룬어진다면, 이와같이 경험이 동기가 되는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왜 문화대혁명같이 특수한 경험이 새로운 일련의 사상으로 체화되지 못하는가 ? 주류 담론안에서, 문화혁명이 이미 하나의 오류라고 정리됐고, 토론의 주제는 대개 이러한 오류가 발생한 원인이다. 특히, 자유주의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문화대혁명은 비판의 대상이다. 10억명 중국인의 10년간 생활경험이 충분히 분석되지 못하고 있다. 위루오커遇羅克의 <<혈통론>>은 당시 중국판 인권선언으로 여겨져서 회람됐지만, 거의 아무도 홍위병내부의 서로 다른 그룹들이 당 고급관리의 인정을 받으려고 경쟁한 결과의 일부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이런 사고와 경험이 결합될 때만, 우리는 그 본문을 이해할 수 있고, 충분히 그 가치를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혁명에 의해서 ‘단절’된 1949년 이전의 학술전통을 계승하려고 노력하면서, 상대적으로 혁명후에 형성된 전통을 무시해왔다. 하지만 이 ‘단절’이야말로 가장 분석할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저 부정의 대상으로만 알고 있을뿐이다. 그리고 혁명전 학술연구가 생명력 넘치는 자신의 전통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 당시 학자들의 인생경험과 그들이 사용한 언어의 유기적인 연결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전반적으로 문서형식의 지식만을 과도하게 중시하다보니 배후의 경험과 그 경험이 된 지식을 고찰하지 못했다. 지식 자체의 누적만을 중시하고, 지식이 쌓이는 방식의 전환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않았다.

<사진5> 우리는 혁명에 의해 ‘단절’된 1949년 이전의 학술전통을 회복하고 계승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 ‘단절’ 자체가 대면하고 분석해야할 가장 가치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단절은 반동적 폐기 대상이 아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최소한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중국 주류의 전통사회사상과 아마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른 학자들이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하지만 가장 경험을 중시하는 중국문화는 서구로부터 수입된 ‘경험’이라는 분석범주를 일본어를 빌려서 서술된 것이다. 유교사상은 경험을 강조하는데 왜냐하면 ‘실천이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실천을 초월하는 신성한 준칙을 부정한다. 하지만 유교에서는 경험은 예약질서의 실시방식이고, 경험은 간섭의 대상이지 분석의 기초가 아니다. 자위자주自為自主의 범주도 아니다. 우리의 오늘날 사유를 반영하면, 이것은 경험 자체는 의의가 없다는 뜻이다. 이론의 빛 아래서만 진정한 의의를 획득하게 된다. 두번째는 지청의 사회지위와 관련이 있다. 지청은 사회주의체제내부의 불평등관계의 산물이다. 지청은 지식청년, 도시지식청년이라는 문자적 의미이외에도 농촌으로 하방되어 내려간 도시지식청년을 의미한다. 당시 그들의 우월적 지위는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박탈당했으며, 그들에게 일종의 무의식적인 지식귀족기질을 부여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마음으로 천하를 품었으나, 단순히 독서와 사고를 즐거움으로 삼고, 자신의 물질생활을 근심거리로 삼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선 자신의 위치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사고가 진정으로 천하공리를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지청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그들이 정말로 농민들을 인정하고, 농민들을 이해했는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지청학자는 비록 수많은 관찰을 남겼지만, 자신의 위치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부족했기 때문에 관찰은 소재로 삼았을뿐 자신의 경험은 새로운 관점속에서 활성화되지 못했고,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낼 경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1990년대 경험연구의 첫번째 임무는 교조주의와 탁상공론에 반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경험이라는 것은, 경제학 혹은 심지어 자연과학이 말하는 팩트와 데이터에 가까왔다. 객관성과 재현성을 강조한다. 동시에, 지청시대는 거시적 통일화 서술을 추구한다. 중국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전면적인 틀을 제공해야할 뿐아니라, 특정한 입장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서술이 폭넓게 받아들여지길 희망했다. 이렇게 경험의 개체성, 주관성, 분열과 충돌이라는 특징때문에 왕왕 소란스러움으로 간주되어 차단당하기도 했다.

<사진6> 지청시대가 추구하는 거시적 통일화 서술. 중국을 해석하기 위한 큰 틀을 제공할뿐더러, 이 서술이 특정입장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폭넓게 받아들여지길 원했다.

지청학술시대의 경험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사회과학에 대해서, 특히 내가 속한 인류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경험은 인류학의 목숨같은 것이다. 하지만 왜 경험이 이론에 우선해야 하는지, 왜 민족지에 경험을 상세히 기술하는 것을 강조하는지, 그 배후의 철학과 정치의식의 함의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비인류학자가 보기에, 인류학은 일종의 방법론에 불과하다. 필드조사와 동의어이고, 다른 학과를 위해 중국특색의 소재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족하다. 인류학자는 그래서 강조한다. 인류학의 진짜 포부는 자신의 이론 체계를 수립해서, 다른 학과와 대화를 하는 것이라고. 지금의 체제화 압력하에서 원래 체재화를 가장 반대하는 성격을 갖는 인류학은 반대로 체재화를 당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자원의 획득을 꾀한다. 중국 명문대학의 인류학과 학과장들이 함께 모여 앉으면, 제일 중요한 화제는 첫째, 어떻게 국가가 정한 학과체계안에서 인류학을 2급에서 1급으로 승격할 것인가, 둘째, 어떻게 주류 담론과 긴밀하게 결합할 것인가이다 (이런 주류 담론에는 ‘조화’, ‘거버넌스’, 그리고 ‘일대일로’, 당연히 ‘중국학파’가 있다) 인류학을 선전하고 주류의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 명문대학의 시니어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학부과정 신입생들에게 인류학이 어떻게 부자, 권력자를 만들고 역사를 바꾸는 사람을 키워낼 수 있는지 선전한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외국의 인류학이 역사적으로 국가정보기관과 협력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 이것은 (그런 부끄러운 학문적 역사를 갖는) 서구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중국인류학이 이렇게 발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인류학의 원래 임무가, 주류가 보지 못하거나 대면하고 싶어하지 않는 다중적인 사회모순을 충분히 정확히 묘사하는 것이고, 주류의 관점으로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약자들의 생각을 파악하는 것이고, 주변화된 경험을 통해 중심부의 이론에 질문을 던져서, 모두를 주류담론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들을 거의 완전히 망각한 것같다.

인류학은 스스로를 항상 주변부에 위치시키기때문에, 전세계 어디서나 주류에 속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류학적 경험관의 발흥이 서방 현대사회과학 발전의 핵심 실마리로 간주될 수도 있다. 코넬이 지적하는 것처럼, 현재 교과서속의 소위 사회학은 서방공업사회와 근대성에 대한 대답이지만, 여전히 최근의 역사를 새롭게 서술하기 위한 것이다. 구미사회학 최초의 목표는 사실 세계성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1881년에 출판된 사회학 교과서의 제목은 “사회학: 민족지를 기초로 함”이었다. 확실히 만일 타문화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왜 자기의 생활과 실천을 고찰대상으로 삼았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처음에 이러한 세계성의 차이는 문화확산론을 통해서 특히 진화론을 가지고 해석됐다. 그래서 말리노프스키의 장기적인, 현지, 참여방식의 조사는 혁명적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문화에서의 생활경험이 진화단계의 차이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곤혹스럽게 여겨지거나 혐오스러운 생활방식조차도 나름의 합리적 이유를 갖는다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현지인에게 배워야 한다. 당사자의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동시에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반성하고 비판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철학사변안에서는 원래, 먹고 마시고 싸고 자는 삶의 필수 행위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지만, 이런 차이가 충만한, 파편식의 개체경험이야말로 풍부한 함의를 얻을 수 있고, 부단히 새로운 사회과학문제를 발견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다른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인류학의 본질적 특징은 아니다. 반대로, 인류학은 역사의 우연한 현상에서 탄생했다. 이것은 우연히도 유럽사상가의 사람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예를 들어 칸트의 ‘내재성’ 사상은, 사회를 주재하는 역량이 외부의 신령이 아니라 사회내부에서 온다고 아는 것, 그리고 영국의 실증주의철학은 귀납적 인지론을 강조한다는 것 등) 유럽 식민운동이 겹치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만일 그런 사상이 없었다면 식민주의만으로는 우리가 지금 이해하는 인류학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식민자들이 미대륙에서 벌인 살륙, 아프리카에서 행한 노예사냥, 그리고 프랑스가 고도과학기술을 이용해 만든 이집트학 모두 인류학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이들이 인류학을 낳은 것도 아니다.

동시에, 어떠한 학과도 사실상 다른 문화를 연구할 수 있다. 만일 학문이 주류 정치, 비즈니스를 위해서 복무해야 한다면, 다른 문화에 대한 국제무역, 비교정치, 군사관계연구가 인류학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생산적일 것이다. 인류학이 다른 문화를 중시하는 것은, 그 ‘다름’ 자체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인류학 방식의 경험이 ‘다름’에 독특한 의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제학은 모든 인류를 연구해야 하므로, 당연히 다양한 문화를 포괄하게 된다. 하지만 경제학 관점에서 각종 차이는 동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인류학적 관점으로는 차이는 본질적으로 마음대로 단순화될 수 없다. 다른 문화는 우리가 다른 경험에 대해서 더 민감한 체험을 하도록 하고, 더 유효하게 자기의 상황을 문제삼도록 만든다. 그래서, 만일 자기자신조차 대상화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하찮아 보이는 경험까지 질문을 던져가며,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욕망이 없다면, 인류학이라고 부를 수 없다. 중국의 민족학자들은 1950년대 수많은 서남부 소수민족에 대한 훌륭한 조사를 수행했다. 하지만 이 풍부한 소재를 가지고 새로운 사회사상을 창조해 내지 못했다. 왜 그런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지청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아마도 사회학적 상상의 과잉일지 모른다. 반대로 인류학적 상상력은 부족하다. 미국 사회학자 밀스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제창했다. 즉 자기의 인생경험과 사회구조를 연구하고, 역사의 변화와 연관시켜서 이해를 하는 것이다. 중국의 지식인, 특히 지청학자들에게는 거의 타고난 능력이다. 개인 생활의 궤적이 국가의 중대한 실천을 통해서 만들어졌다. 개인 인생의 의의는 국가의 거대서술안에서만 체현될 수 있었다. 이런 서술바깥에서 어떤 다른 담론체계도 의의를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서술바깥으로 벗어나는 대량의 경험은 모두 일상생활의 자잘한 요소밖에 없다. 굳이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논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 받은 것들만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은 같은 틀안에서의 반복일뿐 사상적인 돌파구를 찾기 힘들다. 인류학적 상상력은 구체적인 인생경험과 곤혹스러움에서 출발한다. 자기의 경험을 살려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살려, 자신의 대안적 생활의 가능성을 상상해야 한다. 보통사람의 경험과 목소리 그 자체가 무기가 된다. 반드시 이론화가 되는 것을 기다린 후에야 사람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줄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생활속에서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역사를 추진하다가 생활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작은새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답이 있어서가 아니다” 뜻을 품은 젊은이가 기량을 발휘하는데 방향이 꼭 분명할 필요는 없다. 왜 작은 새에게 반드시 악보가 필요하고 독수리에게 ‘내비’가 꼭 필요하겠나?

중국사회과학 지청시대의 종결은 한 세대 현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분기점으로써 연대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헤겔식 역사철학 의의상의 ‘시대’의 종언일 뿐이다. 시대는 여기서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명확한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는 운동을 의미한다. 역사의 방향에 대한 자신감을 체현한다. 역사적 사명감과 이에 기반한 집체의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80년대의 신세대 80年代的新一輩”라는 한때 전 중국에서 유행하던 노래가 있었는데 (역자주 – 年轻的朋友来相会라는 곡명을 가지고 있으며, 가사중에 80년대의 신세대라는 표현이 있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아름다운 조국을 건설하자는 내용), 이런 시대정신의 최후의 상징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사진7> 오늘날과 1980년대의 가장 큰 차이는, 사회과학과 관료시스템의 지식청년시대가 끝나는 동시에, 이들 중 일부가 고위 정치가가 됐다는 점이다. 시진핑 주석의 청년시절 사진.

후지청시대에 생물학적 나이로 규정되는 세대로는, 소위 70치링허우, 80빠링허우 등등이 우리의 시간의식을 주도하게 됐다. 평범한 일상생활이 우리의 중요한 경험이 된다. 체제화된 학술연구가 도시중산층계급과 그 자녀들이 갖게 된 중산층 신분의 채널이 된다. 공무원그룹이 전문화된 이익집단으로서 사회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도시중산층 출신의 젊은 연구자들은 일상경험에 대해서 아마 더 민감할 수도 있다. 예전처럼, 지나치게 크게 판단하고 과장된 방안의 연구방식을 제안하는 것에 더 많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고등교육을 받은 공무원도 거대한 독자讀者그룹이 된다. 그들은 이론 해설이 아니라 영감을 주는 경험을 묘사한 연구결과를 선호한다. 레거시 매체의 권위와 공신력이 하락하고 소셜미디어의 중요성이 커진다. 이들이 풍부하고 생동감있는 경험을 보여주기 위한 공간을 제공한다. 사회과학과 인문연구 및 기타문예형식이 서로 결합된 탐색이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인터넷 쇼핑몰의 소비자들은 모두 잠재적 혁명가가 될 수도 있다. 온갖 속물적인 광고 카피의 배후가 새로운 이념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모든 이가 소비자로 변하고, 모든 곳이 광고 장소로 바뀔수록, 이런 상상력이 필요해진다. 단지, 혁명의 잠재력과 새로운 생각이 외부에서 강요된 신념이 아닌, 일상생활경험내부의 모순, 소외와 다양성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지청시대에 비해서, 아마 오늘날 우리가 보다 편안하게 (자기) 경험으로부터 (문제를 제기하고),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 다가서서, 다시 (자기) 경험속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후지청학자들이, 스스로 완전히 ‘독립’적일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시대’를 대표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고, 자기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자기 문제도 정확히 파악하고, 누구를 위해서 연구하고, 누구를 위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지금 하나의 거대한 목소리가 당신을 근심케 한다면, 당신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일필일획으로 대안적인 목소리를 그려내는 것일 것이다. 이 목소리는 아주 작고 미약하지만, 구체적 생활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벼락소리처럼, 모호하지만 바탕이 있고, 대지의 다른 구석으로부터 공감을 얻어낼 수 있다. 그렇게 함께 모여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잠재적 흐름이 된다.

(3/3)

 

샹뺘오 项飙

옥스포드대학교 인류학과

 

이글은 <<문화종횡文化縱橫>> 2015년12월호에 실렸으며, 저작권은 문화종횡에 속한다. 

원문링크

https://mp.weixin.qq.com/s/KYkgtq_1fIMIbKVCwZRYZg

목, 2021/05/20-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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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언영색의 이벤트 정치로 일관하다

엄동설한의 그 차디찬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들이 끈질기게 전개했던 처절한 촛불항쟁의 과실은 고스란히 정당으로 넘어갔다. 그 정당은 촛불시민들을 철저히 배제시킨 채 권력을 독점하였다.

하지만 부동산 문제에서 드러나듯 그 정치세력은 너무도 무능했다. 사실 부동산 문제만이 아니라 여타 다른 모든 분야에서 유사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정치권은 관료들에 의존하여 그 말과 의도에 적응해간 과정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 개혁은 고사하고 모든 정책과 방향이 현상 유지와 기득권 편향이라는 퇴행적 행태로 수렴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이 수행했던 것은 오로지 표와 지지율만 추구하면서 유명무실한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이벤트 정치’를 구사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시민들의 결사적인 투쟁으로 권력을 쟁취했지만, 정당과 정치세력의 철저한 무능으로 그 권력은 고스란히 관료에게 넘어갔다. 결국 촛불항쟁은 관료들에게 권력을 넘겨준 셈이었다. 돌이켜보면, 4.19 항쟁부터 1979년 부마항쟁, 80년 항쟁, 87년 6월항쟁 그리고 이번 촛불항쟁에 이르기까지, 항상 어김없이 그래왔다. 필자도 도저히 이런 항쟁은 할 수 없겠다는 마음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누구도 시민들에게 더 이상 항쟁을 요구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심각한 성찰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치명적인 약점을 보완할 다각적인 대응 전략이 반드시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무능한 정당, 실질적 정책정당으로 만들 수 있는 방안은 과연 없는가?

이 글에서는 국회 개혁의 주제에 맞춰 우선 정당의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대응 전략을 제기하고자 한다.

독일에서 연방의회의 운영은 대체로 정당에 의해 좌우된다. 그리고 독일 정당의 정책 전문성은 정당의 전문성에서 비롯되고 있다. 정당의 전문성을 제고하는 논의들이 중요하게 되고, 이에 따라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들의 역할이 대단히 활성화되고 있다.

독일의 입법과정은 정당을 통하여 매개되며, 의회의 정책결정은 정당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다. 그러나 사안마다 의원총회를 소집 운영하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들고 또 참여 의원이 많으면 심도 있는 논의가 될 수 없다.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독일 의회는 입법 활동과 정책전문성을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발전시켜 왔다. 즉, 위원회에서 정당 간에 협상을 개시하기 전에 각 정당이 상임위원회별로 특정 주제에 대하여 깊이 있는 토론과 연구의 진행을 통하여 전문성을 높이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독일 의회는 각 정당 내 상임위원회마다 소그룹이 운영되고 소그룹 소속 의원들과 교섭단체 정책 연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마다 만나서 해당 상임위의 의제를 사전에 토론하고 조율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한 주제 당 6주에서 6개월까지 연구한다. 이렇게 특정 주제를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논의하기 때문에 의원 개개인의 전문성도 향상되고 각 정당의 전문성도 당연히 증대되며 이는 의회의 전문성 제고로 이어진다. 소그룹에서 채택된 사항은 대부분 그대로 정당 전체의 견해로 채택된다.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은 연방의회 소속이며, 이들의 채용, 보수 등은 교섭단체가 관할한다. 이들 정책 전문위원들은 분야별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로서 정당에 소속되어 의원과 정당을 긴밀하게 지원, 보좌한다. 대부분 행정부에서 경험을 쌓은 전문가가 대부분이며, 자부심이 강하고 대외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국회 전문위원은 정당에 소속되어야 한다

세계 어느 나라 의회든 상임위원회란 정당 간 정책경쟁의 장(場)이다. 그러므로 상임위원회를 지원하는 입법조직 역시 정당의 개입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그리하여 상임위를 지원하는 전문가 조직은 미국식처럼 정당 소속이거나 독일식처럼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의 국회 상임위 전문위원 제도는 우리 국회를 허구화시키고 왜곡시켜온 핵심적 적폐이다. 현재의 국회 전문위원제도는 결국 행정 지원관료가 국회의 입법과정을 장악하고 결국 국회의 입법권을 허구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써 국회는 본분을 잃고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으로 왜곡되고 말았다.

이제 발상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여 독일 의회 방식으로 정책전문위원을 정당에 소속시켜야 한다. 현재로선 과도기 해법으로 국회 전문위원이 정당에 소속하는 방안을 고려한다.

우선 1단계로 수석전문위원을 정당에 소속시킨다. 수석 전문위원은 별정직 1급이므로 지금 당장 정당에 소속시켜도 커다란 무리가 없다(이 점에 관련하여 현재 정당 소속이면서도 국회 별정직공무원 신분으로 상임위에서 활동하고 있는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의 경우에 준하여 적용할 수 있다 – 국회법 제34조).

2단계로 6개월 내지 1년여 시차를 두고 2급 전문위원도 정당에 소속시킨다. 물론 현재의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은 모두 상임위에 배속시킨다.

다시 3단계에서 위원회 지원 조직의 대부분을 정당에 소속시킨다.

최종적으로 국회의 각 상임위원회 지원 정책전문위원을 총 200명 정도로 구성한다. 이렇게 되면 각 정당들은 국회에서 예산이 지출되는 약 100명의 정책전문가를 보유하게 된다.

이는 상임위 활동을 활성화하는 방안일 뿐 아니라 정당의 정책 전문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방법이고, 나아가 의회의 전문성 제고로 이어지며, 결국 이 땅의 의회민주주의 발전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방법으로써 현재 유명무실한 정당은 실질적인 정책정당에 성큼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바라건대, 단 한 가지라도 실질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래야만 암울한 이 땅에도 한 줄기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

 

소준섭

화, 2021/05/2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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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농촌의 현실을 얘기하면 긍정적이고 즐거운 얘기를 쓰기 어렵다. 그래도 흥미있고 눈길이 가는 애기를 쓰고 싶은데 소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번에는 필자가 사는 마을 얘기를 전하려고 한다. 우리 마을도 여느 농촌마을과 그리 다르지 않아서 크게 재미를 전달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또 다른 마을 이야기가 있기도 해서 독자들에게 농촌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겠다 싶어서 우리 마을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필자가 사는 마을은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에 있는 마을이다. 이 지역은 6개 리가 이웃하며 살고 있는 지역이다. 춘천호가 사북면의 다른 지역과 경계를 짓고 석봉산과 용화산 그리고 삿갓봉과 수리봉이 화천과 신북읍, 춘천시내 지역과 경계를 만들고 있다. 그러니까 호수와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 지역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 마을은 초등학교과 농협, 보건진료소를 같이 이용하고 407번 지방도로를 이용해 다른 지역과 통하고 있다.

6개 리의 마을 전체 인구는 9백 여명 정도 되는데 그중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40% 정도 된다. 20대가 60여 명, 30대가 40여 명 정도 등록되어 있지만 실제 거주는 하지 않고 주소만 두고 있다. 40대도 백 명 정도 되지만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비거주 등록인구를 빼면 절반 이상이 노인들인 경로우대마을(?)이라 할 수 있다.

농촌노인들은 나이들어도 살던 곳에서 계속 사시고 싶어한다. 간혹 자식들이 모시려고 해서 자식들 집으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 다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 답답하다는 게 이유인데 그럴 것이 도시에 가면 자식부부는 일하러 나가고 손주들은 학교에 가니 노인만 남아서 감옥같은 하루를 보내야 한다. 그래서 잘 견뎌야 한달 정도 지나면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돌아오면 편안함이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농협까지 4~5키로 걷는 건 일도 아니었고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혹은 경운기를 몰고 농협출입을 하며 이웃 분들을 만났지만 연로하여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농협이나 마을회관 출입도 힘들다.

우리 마을에는 별빛사회적협동조합이라는 마을사업을 하는 조직이 있다. 이 협동조합은 마을 원주민들과 외지에서 들어온 이주민들 그리고 시내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함께 실무자로 일하고 있다. 별빛사회적협동조합은 크게 세가지 사업을 하고 있다. 하나는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마을 초등학교 아이들이 하교하면 모두 센터에 와서 방과후 프로그램을 한다. 또 하나는 농촌유학센터이다. 마을 초등학교에는 현재 열 한명의 유학생이 있다. 이들은 서울 등 수도권에 사는 아이들인데 우리 마을 초등학교로 전학온 아이들이다. 처음에는 1년 정도 시골에서 살며 학교를 다닐 예정으로 오는데 대부분 졸업하고 돌아간다. 이 아이들을 돌봐주는 곳이 농촌유학센터이다. 아이들은 두, 세 명씩 농가에 위탁되어 생활하며 초등학교를 다니고 하교하면 지역아동센터에서 방과후 프로그램을 같이하고 끝나면 농가로 돌아간다. 아이들의 건강과 부모와의 연락, 농가 관리, 학교에서의 생활 및 학교와의 관계 등을 관리하는 일이 유학센터의 일이다.

마지막으로 ‘나이들기 좋은 마을’(일명 나좋을) 팀이 있다. 마을의 노인을을 돌보는 사업을 하는 팀이다. 오늘은 나좋을 팀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불과 몇 십년 전만 해도 아이들은 마을에서 컸고 노인들은 마을과 함께 살다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농촌의 아이들은 이제 태어나지도 않고 그나마 몇 안되는 아이들은 마을에 초등학교가 없어져 먼 거리를 학교버스를 타고 통학을 해야 한다. 마을사람들은 아이들이 마을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노인들은 자식의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손자를 돌보고 마을과 자식들의 부양을 받다가 돌아가셨는데 이제는 자식들 다 떠나고 외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걷는 것 조차 힘드니 마실 다니는 것도 쉽지 않다.

별빛협동조합에서 나좋을 팀을 만든 건 자식들이 돌보고 마을에서 늙어가던 노년을 지금도 잘 유지해 보자는 것이다.

나좋을 팀에는 세대공감센터와 우리마을119 센터가 있다.

세대공감센터는 마을의 아이들과 함께 70세 이상 노인들 가정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이야기도 나누고 불편한 것은 없는지 체크도 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반찬공급도 하고 아이들과 점심식사도 같이한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센터 식당에서 한 달에 한번씩 무료 점심식사를 해서 마을 노인들이 백 여명 이상씩 모여 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코로나로 중단이 되면서 반찬 배달과 점심식사 같이하기를 하게 되었다. 또 우리마을119 센터는 주거 환경 개선을 도와준다. 변기 고장이나 수도고장, 씽크대나 배선 고장 등 소소한 주거불편을 해결해 준다. 재료비가 3만원 이하이면 무료로 고쳐준다. 지난 해에는 집안의 전등을 모두 LED등으로 바꿔 주었고, 변기 옆에 안전핸들을 부착해서 앉고 일어설 때 짚을 수 있도록 했다. 수자원공사의 도움을 받아 의사 1명, 간호사 1명, 코디네이터 한명이 팀을 짜 마을 순회 방문 진료도 하였다.

이렇게 마을에서 마을 아이들과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우리 마을 뿐 아니라 모든 농촌 마을이 이렇게 마을에서 노인들이 함께 잘 사시다가 마을에서 동네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집 문을 나서면 공기좋은 자연을 만나고 텃밭에서 가벼운 노동을 지속하며 이웃사람들과 일상의 소소한 얘기들을 나누며 행복이 뭔지 따지지도 않고 사시다가 가벼운 치매가 왔다고 혹은 자녀들이 들여다 보기 어렵다고 요양원으로 보내지는 건 감옥행이나 마찬가지다. 한번 마을과 격리되어 요양원으로 보내지면 돌아가실 때까지 돌아오지 못한다.

이런 마을이 유지될 수 있는 농촌지원정책이 필요하다. 그래야 나이들어서 편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실 수 있고 비어가는 농촌에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고 마을 공동체를 유지하는 실무자들도 생긴다.

우리 별빛 협동조합은 강원랜드에서 지원받은 11인승 차가 한 대 있다. 어디서 차 한 대를 더 지원받을 수 있다면 노인돌봄 서비스를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농촌에는 다양한 일손이 필요하지만 거주할 집이 없어서 들어오지 못한다. 노인들이 같이 밥먹고 더불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노인 돌봄 시설도 있었으면 좋겠다.

요즘 기본소득, 기본주택 같은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공동주택이나 기본소득, 농촌형 돌봄 서비스 지원 같은 사업을 농촌에도 시행하면 도시보다 적은 비용으로 노인들을 돌볼 수 있다.

마을에서 마을을 돌보는 것이 농촌 노인들이 행복하게 살다 가시는 길이다.

이 분들이 행복한 게 뭔지 모르고 잘 사시다 돌아가시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

요즘 이런 농촌형 지역사회통합돌봄 서비스를 하는 지역들과 전국네트워킹을 추진하고 있다.

마을에서 통합돌봄서비스를 하는 기관들이 대부분 예산이나 사업의 지속성이 불투명한데도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농촌형 돌봄을 지속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제도적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노인돌봄의 사회적 비용도 줄일 수 있다.

 

※ 1월에 실었던 ‘살처분과 과잉 육식 – 산안마을을 보호하라’ 글에 나오는 산안마을 동물복지농장의 닭들은 결국 모두 살처분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인간의 식탐으로 인한 공장형 축산 방식은 동물 전염병이 쉽게 전염됩니다. 가축전염병 과잉대응 – 3km 이내 살처분 처리 방식으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산안농장 닭들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이재욱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전 소장

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목, 2021/05/2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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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가장 보통 젊은이’들, 입을 열기 시작하다

매년 중국의 대입학력고사인 ‘까오카오高考‘에 응시하는 인원은 현재 약 천만명 수준에 이르고, 이중 절반이상이 전문대학을 포함한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한다. 한때 매년 2천만명 넘게 출생하던 중국에서는 점차 감소추세를 보이는 가운데, 2천년 이후 매년 천오백만명 정도가 태어나고 있으며, 작년에는 가까스로 천만명을 넘는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래서, 80년대 출생한 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기 시작한 2천년대부터는 중국의 대다수 대학들도 엘리트가 아닌, 대중교육기관으로 여겨지고 있다. “나의 이본二本 학생”은 과거 한국의 전후기 모집처럼 응모 시기에 맞춰 일본一本, 이본二本, 삼본三本으로 구분되며, 그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본 즉 ’비명문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황덩 작가의 논픽션 문학 작품이다. 그가 십년 넘게 비즈니스 중국어와 중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광둥금융학원은 광둥성 광저우시에 위치한 대학인데, 금융계 전문대학으로 오랜 기간 운영되다가, 정부의 대학정원 확대 방침에 따라, 2천년대 초반에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됐다. 대부분의 이본 대학과 마찬가지로, 주로 학교가 소재한 성省내 출신인 자신의 학생들을 저자는 중국의 ’가장 보통 젊은이들‘로 부른다.

나의이본학생 – 황덩

74년생인 황덩은 광둥성 북쪽에 위치한 내륙지역 후난성의 가난한 농촌 출신인데, 본인이 후난의 한 이본대학 학부를 졸업하고, 당시 관행대로 국가가 지정해준 국영기업에서 사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다. 90년대 경제개혁의 한파속에 문을 닫은 대부분의 국영기업의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정리해고를 당했다. 하지만, 전화위복인지, 일본(명문)대학인 우한대학, 중산대학에서 각각 석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됐다.

그는 자신이 십여년간 이어 가르친 80호우, 90호우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정리하게 된 일종의 구술사 기록과, 작문 지도 등을 통해서 이해한 그들의 구체적 인생 경험을 하나 하나 들여다 본다. 여기에 자신이 속한 70호우 대학 동기 동창들의 생애를 덮어 씌워 보면, 중국이 가장 급속한 변화를 겪은 개혁개방 후 지난 40여년 동안의 세 ‘청년세대’의 경험이 인공위성에서 들여다 본 장강의 거대한 물줄기처럼 굽이쳐 흐른다. 70호우는 농촌출신이 ‘개천에서 용나는’ 것이 가능한 가성비 높은 마지막 고등교육 세대였다. 80호우는 졸업하자마자 직장을 얻게 될 도시에서 집을 구매한 결정 여부가 중산층 진입을 가르게 된 희비극의 세대였다. 90호우는 이미 벼락같이 올라버린 집값을 감당할 수도 없고,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어진 탓인지, 늘 성적에 조바심하면서도, 조금만 수업이 재미없다고 느끼면, 무심하게 스마트폰으로 고개를 떨구는, 한국의 사회학자 엄기호가 얘기했던 ‘단속세대’에 해당한다. 그래서, 기시감이 든다. 마치, 한국의 50호우부터 90호우의 이야기가 압축돼 있는 것 같다. 일선 도시의 90호우 이야기는 아프게 동시대적이다.

다시 급강하해서, 이름이 호명된 모든 학생들이 들려주는 낱낱의 이야기로 빠져들면, 잔물결들에 부서지는 기포소리마저 생생하게 들린다. 2020년 발간 직후 큰 화제가 된 이 책은, 같은 시기에, 인기를 끈, 서바이벌 음악예능프로에 출연해 일약 전국구 스타가 된, 광둥성 출신의 언더 그라운드 롹밴드 우탸오런五條人의 모습과도 은근히 겹치는 바가 있다. 가난한 지방, 현성縣城 (한국이라면 군청소재지에 해당하는) 출신에, 중국인 대부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지역 방언인 차오저우화로 자기 사는 이야기를 가사로 풀어 놓는 이들은 약속된 곡대신 즉흥적으로 다른 곡을 연주하는 방송사고를 치고도 너무나 태연히 행동했다. 무대를 떠나며 오히려 방송스태프를 위로하는 이들의 태도가 광둥의 동네 청년들 옷차림인 플립플롭 & 가죽자켓과 너무도 잘어울렸다. 그들의 대표곡중 하나인 ‘지구의’의 가사가 또 절묘했다. “立足世界. 放眼海丰 세계에 서서, 하이펑 (그들의 고향인)을 바라보다.”

14억 인구의 무게와 5천년 역사의 지층에 까마득하게 묻혀버린 중국의 보통 청년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한다. 황덩의 문학사 수업에 참여한 덕에,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삶의 언어를 연결하는 마법을 발견한 한 90호우 학생이 증언한다. “현재 중국 사회를 둘러 보면, GDP2위로 올라선 우리 나라가 자랑스럽긴 하죠, 하지만, 시대를 거슬러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분투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하나뿐인 삶이 어디에 놓이는지를 살피는 것이 더 값지고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의 또다른 재미는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인 광둥이라는 지역의 문화적 특성, 그리고,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온 이들이, 광둥에 와서 느끼는 위화감을 함께 관찰하면서 현대 중국을 만화경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따로 한 장을 할애해서, 남방사회의 특질이 매우 두드러진 챠오샨 지역, 그리고 이제는 경제적 위상으로 홍콩을 능가해버린, 션전 출신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전히 절반에 불과한 ‘보통대학생’의 이야기가 비진학 청년과 농촌 청년들을 홀대하고 있다고 불평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황덩 작가는 2016년 발간된, 자신과 남편의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비장한 톤으로 들려준 책 ‘대지의 친족들’로 이미 명성을 얻은 논픽션 전문 작가이다. 그의 전공 분야가 향촌사회와 향촌문학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가 극도의 진실성을 갖게되는 이유는 이 책의 서문에 인용한 중국 사회학과 인류학의 비조인 페이샤오퉁费孝通의 주장과, 이에 영향을 받은 중국 사회과학계의 풍토와도 관련이 있다. “내가 책에서 서술하는 것은 모두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나는 사회과학 연구는 반드시 필드에 기반함으로써 탁상공론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나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보편성을 희생할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 3월1일에 발표된 중국 교육 당국의 통계에 의하면, 중국의 고등교육 기관 입학률은 54.4%에 달한다 (해당 학령인구대비, 전체 학생수 비율. 2021년 전체 모집인원은 900만명 가량이라고 한다)

■ 5월11일 발표된 2020년 중국 인구센서스 자료

■ 이 글의 축약본이 경향신문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경향신문의 허락을 얻어, 다른백년에도 옮깁니다.

목, 2021/06/03-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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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사무처가 국회의 주인’? 아전이 권력을 농단하는 꼴

몇 년 전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 지원부서는 폐쇄적이다. 언터처블이다. 행정부의 감사감찰, 수사기능이 여기에 미치지 않는다. 국회의 주인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회사무처 직원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지적한 바 있었다. 국회사무처란 문자 그대로 국회의 ‘사무’를 담당하는 보조기관일 뿐이다. 그런 국회사무처가 국회의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은 약간 과장해 말하자면 “아전이 권력을 농단”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일들은 주인이 주인답지 못할 때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국회사무처란 마땅히 명실상부(名實相符), 국회의 사무 및 관리(administer)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 의회 시스템에서 행정 사무관리 업무를 지원하는 기관이 비대해짐으로써 결과적으로 행정부를 연상케 하는 제2의 관료체제로 전환되어서는 안 된다. 국회 사무처의 경우, 바로 이러한 행정관리 업무를 중심으로 관료적 질서를 구축하면서 사실상 제3의 세력 집단으로 성장해 있다. 이는 입법관료가 대표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국회 사무처가 국회의원에 대한 입법지원 기구라는 점에서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독일의회의 사무처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6급 이하’로 구성된 공무원들이 맡은 바 ‘사무’ 업무를 수행하며 의회를 지원하고 있다.

이제 국회사무처는 본연의 ‘보조’ 업무로 되돌아가야 한다. 미국 의회의 경우, 1946년과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입법부 재조직법’을 제정하고 입법지원 조직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 우리도 이를 모델로 하여 국회의원들로 구성되는 가칭 ‘입법부강화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입법부 재조직법」을 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로써 현 국회 행정조직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진정한 입법지원 조직으로서의 국회공무원 조직을 정립시켜야 한다.

 

미국 의회의 전문성은 유능한 입법지원 조직에서 나온다

어느 나라든 의회의 의원들은 국가 중요 정책의 결정권을 가지며, 그 활동 결과는 국가와 국민에게 매우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하여 의원들은 그 직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것이 요청되며 이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갖출 것이 요구된다. 하지만 국회의원이란 기본적으로 전문성에 의해 선출된 것이 아니라 선거에 의해 국민을 대표하는 대표자로 선출되었고, 정치활동에도 매우 바쁜 정치인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시간과 전문성 부족을 보완하고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조직이 절실히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 대표들을 도와 정책과 전문성의 분야를 높여주는 제도적 장치가 바로 입법지원 기구이다. 다시 말하면, 입법지원 기구란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의회의 전문성을 확보하여 의회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적 장치’라고 규정될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입법지원 기구의 형태는 미국 의회를 모델로 하고 있다. 미국 의회의 입법지원 기구 규모는 2007년 현재 회계감사원(GAO) 3,159명, 의회예산처(CBO) 235명, 의회도서관 4,302명, 의회조사처(CRS) 700명이다. 이밖에 의원 보좌관, 상임위 스태프, 기타 행정 보조원까지 합하면 약 2만 4,000명의 엄청난 규모이다.

의회가 행정부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의회는 행정부에 비견되는 전문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의회의 전문성 확보는 곧 의회의 기능 회복과 직결된 문제이다. 그리하여 입법지원 조직에서는 대체로 일반 행정가(Generalist)보다 각 분야의 전문가(Specialist)를 더 필요로 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하원 법제실은 35명의 법제관과 15명의 법제보조직원으로 구성되는데, 법제관은 모두 변호사나 법학박사 등으로 이뤄진다. 미 의회 입법지원 기관들은 행정부보다 우수한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정규직 임용을 기본으로 하며, 행정부보다 높은 급여 체계를 운용하고 있다. 그 결과 행정부와 비교하여 교육수준, 재임기간, 급여수준이 모두 상대적으로 높다.

 

회계감사원, 의회예산처, 의회조사처행정부를 능가하는 의회의 입법지원조직

먼저 의회예산처(CBO)는 전문직 직원의 70% 이상이 경제학이나 공공정책 분야 전문가로서 구성된다. 행정부 산하 예산관리국과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사후적으로 볼 때 의회예산처 예측의 정확도가 예산관리국보다 높다고 평가되고 있다. 미 의회는 이 의회예산처의 활동을 배경으로 하여 예산에 대해 실질적으로 심의할 수 있게 된다.

회계감사원(GAO)의 경우, 1921년 제정된 예산회계법 제7장에 의하여 회계감사원이 “권력에 대항하여 진실을 말할 의무를 가진 독립된 기관”으로 규정되어 설치되었다. 당시 의회지도자들은 예산 감시기관이 행정부의 외부에 설치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원래 재무부 관할 하에 있었던 회계 감사 기능을 의회에 이전시켰다. 미국 회계감사원은 연방정부의 예산 지출과 운영에 대한 감사를 임무로 하며, 연방 정부의 예산을 사용하는 모든 사업과 활동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회계감사원 활동에 의한 예산절감, 비용절약, 지출연기, 수입증대 등 재정적 이익은 엄청난 수준이다. 1998년도의 그 재정적 이익은 197억 달러에 이르렀고, 이는 회계감사원이 사용하는 예산(약 4억 달러)의 매 1달러 당 49 달러에 해당한다. 회계감사원의 감사결과는 수시로 모든 상하원 의원과 행정부에 제출된다. 그러므로 미국 의원들은 우리처럼 매년 국정감사를 하지 않아도 이 감사보고를 통해 각 부처의 운영상황을 손금 보듯 파악할 수 있다.

한편 1900년대 초, 의회도서관 직원의 능력만으로는 대규모 연구기관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자, 의회지도자들은 의회도서관 내에 입법정보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별도의 의회조사처를 설치하였다. 의회조사처의 인력구성은 700명 중 연구요원(Analyst)이 400명 정도로 대부분 석ㆍ박사이며, 미국 공무원 등급(GS) 13~15 등급에 해당한다. 의회조사처의 직원 채용은 필요한 직위를 적시에 선발하며 다양한 방식에 의해 이뤄진다. 2007년의 경우, 모두 82개 직위에 대한 채용이 이뤄졌는데, 이 중 72개는 전문직과 행정직이었고 10개 직위는 지원부서의 직위였다. 2007년 상근 직위 중 6개는 ‘대통령 공공관리 펠로우 프로그램(PMF: Presidential Management Fellow program)’, 즉 석ㆍ박사를 대상으로 하는 우수인재 유치 프로그램에 의해 채용이 이뤄졌고, 다른 6개 직위는 로스쿨 재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법률가 채용 프로그램에 의해 채용되었다. 이 방식에 의해 채용되기 위해서는 인터뷰와 서류 심사를 거쳐 미법무부에서 실시하는 심층 인터뷰를 통과해야 한다. 시험 방식에 의한 채용은 일반 행정직 이외에 드물다.

 

국회의원이 국회의원답지 못한 국회, 그것은 국회가 아니다

국회의원이 국회의원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국회가 존립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국회를 허수아비로 전락시키기 위해 독재권력이 만들어낸 구태와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입법관료에 의존하는 빈 깡통 국회, 일은 하지 않고 군림만 하는 국회. 그것을 국회라 말할 수 없다.

‘사무보조’ 업무에 충실한 국회사무처, 입법지원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국회 입법지원 기구, 국민이 부여한 직책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국회의원. 이렇게 ‘정명(正名)’이 정확하게 구현되는 것, 그것이 “국회다운 국회”의 선결조건이다.

 

소준섭

화, 2021/06/0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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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이라는 문제

“현대중국의 영토기준으로, 역사상의 중국을 설정해서는 안된다. 고구려는 당나라가 관할하던 지방정권이 아니다. 토번(티벳)도 당나라의 일부가 아니었다”. “조선(반도)과 월남의 문화와 제도는 중국 내륙이나 변경의 소수민족보다 훨씬 더 중국에 가까왔다. 하지만, 두 나라는 독립왕조 성립후, 중국의 일부였던 적이 없다.” 상하이의 명문 푸단대학에는 거자오광(葛兆光), 거젠슝(葛劍雄)이라는 동성의 두 저명한 역사학자가 있다. 각각, 사상사와 문화사 그리고 역사지리학과 이민사 전문가인 두 사람의 또다른 공통점은 “과연 중국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오랜 동안 천착해왔다는 것이다. 2011년 출간직후 한국어 번역본도 나온 <이 중국에 거하라>, 1994년에 출간된 <통일과 분열>은 그들의 대표작들로써 위와 같이 역사상의 고구려에 대한 관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준고전급 반열에 들어갈만한 예전 책들을 굳이 소개한 것은, 최근 한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문화분쟁과 관련한 몇가지 오해를 불식하고자 함이다. 김치공정, 한복공정과 같은 신조어는 동북공정에서 비롯한 것일 터인데, 한국에서는 중국사람이라면 민관이 합심하여 한민족과 한반도를 중국에 흡수통합하려는 야망에 불타오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정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꼭둑각시같은 중국학자들은 당연히 이 국가대사에 협력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지식인이나 지식대중들은 그리 우매하지 않다. 이 책들은 전문학술서적이 아닌 대중교양서일뿐더러, 두 사람의 강연은 중국의 유튜브격인 삐리삐리에서도 인기가 높다. 특히 거자오광 연구팀이 연재중이며 책으로 출간도 준비중인 <중국에서 출발하는 세계사>  칸리샹(看理想)오디오 강연시리즈는 중국의 지성인들에게 가장 ‘핫’한 콘텐츠중 하나이다.

이 중국에 거하라 – 거자오광

ᅠ사실 두 거교수의 관점과 입장은 조금 다르다. 정협위원이자 중국역사지리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교육부사회과학위원회에 속한 거졘슝교수가 왕이 부장을 비롯한 외교부 간부들에게 정책 조언을 할만큼 관방의 입장도 수용하는 반면 거자오광 교수는 철저히 민간의 학술적 입장을 대변한다. 그래서, 거자오광 교수의 대표저작들은 영어, 일어, 한국어 등으로 번역이 되어 있으며, 외국과의 학술교류도 잦은 편이다. 그는 작년에도 도쿄대학과의 온라인 학술교류를 통해 청나라의 최전성기인 건륭제의 팔순축하연이라는 역사적 외교이벤트를, 중국, 조선을 포함한 이웃나라들, 글로벌이라는 세가지 관점으로 분석한다. 당시 황제의 만기친람형 권력이 지나쳐, 민간의 활력을 억제하는 상황이, 청나라의 쇠퇴로 이어졌음에 대한 신랄한 비평을 남겼다. 시진핑 정권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이 강연은 유튜브뿐 아니라 삐리삐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거졘슝은 학술로서의 역사와 정책에 활용되는 응용으로서의 역사를 나누어 설명한다. 그는 고대부터 티벳이나 신장지역이 중국의 일부였다는 중국 사학계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일축한다. 그의 학술적 주장은 엄밀한 고증을 토대로 한다. 중국 역사상 통일보다는 분열된 상황이 민중의 이익에 부합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청이 황실의 종교적 연대, 유목민족간의 연대를 통해, 신장, 시장, 몽골과 같은 변경지역을 국토의 일부로 삼았고, 이를 이어받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이 영토의 주권을 보유하게 된 사실에 대해서는 양보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속도로나 철도와 같은 교통수단의 강화, 한족 이민정책을 통해, 이를 공고히 할 것을  주장한다.

ᅠ거자오광은 2004년작인 <고대중국문화강의>에서도 중국인들의 천하관이 유아독존적이었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러한 생각을 오랜 기간 벗어나지 못한 탓에 반半식민지의 고통으로 귀결됐다는 것을 뼈아프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주체성이 강조된 중국과  외부시각속에 자기객관화한 중국관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한족중심의 중국이라는 민족국가의식은, 송나라부터 본격화되어, 도시에서 농촌으로, 중앙에서 지역으로, 그리고 상층에서 하층으로 수백년의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 온 실체를 지니고 있다. 그는 중국의 지역연구를 통해서 아래로부터, 혹은 탈근대, 후기식민지주의, 혹은 동아시아 관점을 통해 위로부터 ‘중국사’를  해체하려는 시도를 경계한다. 서구와 일본이 자기 이익을 위해, 중국을 분열시키려한 역사의 경험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아시아를 중국과 등치시키며, 서방의 타자와 거칠게 비교하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한자로 기록된, 한국, 일본, 베트남과 같은 이웃 나라의 역사적 시각으로 섬세하게 중국을 살피고자 하는 노력도 최근 10여년간 지속해 왔다. 그래서 한중일 지식인들이 함께 참여해 온 공동역사교과서나 동아시아 담론에 대해서도 나름의 의견을 제시한다.

2017년 고등교육재단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중국정부의 간섭을 피할 수 없는 역사교과서 논의를 순수 민간협력에 의한 출판 프로젝트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과거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는 기반이 됐던 반서구진영으로의 결집을 호소하는 침략적 아시아주의를 비판적으로 살핀다. 그래서, 주로 일본의 학자들이 제기한 90년대 이후의 새로운 동아시아 담론이 상정하는 역사상의 동아시아 공동체가 오히려 상상에 기반한 것이 아닌지, 정확히 어떤 의도에서 출발한 것인지 묻는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처럼 근대에 이르러서야 민족국가 개념이 형성된 유럽과 달리, 17세기 중엽이후 동아시아는 이미 각 나라가 자신만의 민족 주체성을 강화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증국은 또, 언어나 문화가 동일한 ‘단일민족국가’인 한국이나 일본과도 다른 복잡한 다원일체성을 가진 제국이라는 비대칭성 때문에, 주변 국가와 한통으로 묶기가 어렵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스스로에 대해서, 그리고 주변국가와의 차이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 그래서, 백영서와 거자오광의 주장을 함께 살핀 이케가미 요시히코는 그가 미래지향적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토론에 대해서는 열려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동아시아 논단으로의 초대, <공생의 길과 핵심현장>이 이끄는 세계

 

이 글의 축약본이 경향신문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경향신문의 허락을 얻어, 다른백년에도 옮깁니다.

 

김유익

목, 2021/06/10-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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