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통일(統一)에 대한 소고(小考)

지역

통일(統一)에 대한 소고(小考)

익명 (미확인) | 금, 2019/02/01- 11:26

북한의 미래에 관한 논의는 대북 협력 확대를 통한 투자와 비즈니스, 교통망, 전력망, 에너지 협력 등의 증대를 꾀하는 이들과 북한은 아직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선진국들과는 달리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국경의 개방을 수용하지 않는 전체주의 국가이므로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고 느끼는 이들 간의 싸움으로 비화했다.

지난 해 내내 언론은 이렇게 지극히 단편적인 이야기만 해댔다. 미디어에 드러나는 것 너머의 시사를 통찰하는 시민 토론이 거의 붕괴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런 미디어의 전략이 꽤 효과적일 수 있었다.

더 이상 한국에서 1970년대 또는 1980년대 인사동 찻집에 모여 금서를 논하던 반대파와 학생들을 찾을 수 없다. NGO 모임의 정기적인 토론은 물론, 가정에서 저녁을 먹으며, 학교에서 친구들과, 또는 찻집에서, 정책, 환경 또는 나라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던 모습마저 사라졌다. 휴대전화를 통해 유쾌하고 무해한 정보를 수동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수동적 인구의 일상이 되었다.

언론이 특정 정책을 “진보”로 또는 “보수”로 규정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언론의 판단을 그대로 수용한다. 프린스턴 대학교 셸던 월린(Sheldon Wolin) 교수가 언급한 “전도된 전체주의(inverted totalitarianism)”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전도된 전체주의란 상업매체나 광고주의 압력 등 숨겨진 힘에 의해 일상적인 이슈에 대한 담론이 심각하게 제한되는 정치적 상황으로, 복종을 강요하는 독재자 없이도 전체주의적 시스템이 자리잡도록 한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권력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자연스럽게 무시하는 풍토를 만들어냈다.

일례로, 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10분 이상 집중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기업 미디어는 정보 획득의 장이 되었고, 소셜 미디어는 고양이와 디저트 사진을 보여주거나 이따금씩 기업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선보일 뿐이다.

한국 사회가 공동의 문제에 대한 담론을 잃었다는 것은 우리 미디어가 지역경제의 붕괴, 외국계 투자은행의 과도한 영향력,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미세먼지의 재앙, 미국 내 일부 세력이 꿈꾸는 세계대전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제한된 국내의 담론은 남북관계의 발전이 어떻게 비춰지고, 통일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통일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예컨대, 언론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포옹하는 사진들을 잔뜩 보여주면, 남북이 DMZ 양측에서 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협력했다는 소식, 평양의 번듯한 빌딩이 등장하는 장면 등이 긍정적으로 느껴지게 마련이다.

내용 자체는 모두 긍정적이다. 다만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세계와 단절, 폐쇄된 봉건-사회주의 국가에 살아야 했던 북한 주민들이 이제는 소비사회의 기쁨을 누리고, 훨씬 부유한 남한의 형제자매들처럼 즐기며 살 수 있게 될 것임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도 낙원은 아니다. 한국은 상당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힘을 가졌지만, 그 안에서 많은 이들이 깊은 소외감을 느끼고, 이는 높은 자살율, 일상적인 자기학대와 타인학대를 초래하고 있다. 탐욕스러운 고용시스템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이 어렵사리 일을 찾는다 해도 사회에 봉사하고, 고급 훈련을 받거나 진정한 인생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는 커녕 커피숍이나 편의점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삶의 모든 측면이 이윤을 쫓는 쇼로 변질되었고, 사람들은 이에 지쳐버렸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이 북한을 빈곤과 고립에서 구원하기 위해 제시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전세계적으로 힘을 잃고 있다. 미국과 일본, 한국, 유럽에서 1930년대와 1940년대 사회주의의 도전에 맞서 진화한 수정 자본주의는 더욱 탐욕적인 형태로, 1990년대보다는 1890년대에 가까운 모습으로 후퇴했다. 프랑스의 갈등을 참고하면 이러한 모순이 더욱 뚜렷해, 한국과 다른 나라가 겪게 될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소위 “선진 경제”에서 시장은 단조로운 역할만을 하고 있다. 슈퍼 리치 계층은 경제활동을 독점하고, 해당 계층 구성원이라면 얼마든지 돈을 빌리고 투자할 수 있는 경제적 봉건주의를 확립했다. 반면, 대다수 시민들에게는 극도로 제한된 고금리 대출만이 허용될 뿐이다. 언론은 이렇게 민간 은행과 자본이 악몽 같은 세상을 만드는 과정을 다루지 않고, 정책 결정의 배후에 있는 진정한 의사결정자가 누구인지도 모호하다.

언론이 북한에 도입될 거대한 시장경제를 이야기하는 바로 그 순간, 시장경제는 정작 한국, 프랑스 또는 미국에서 소멸하고 있다. 피터 필립스(Peter Phillip)가 숙고의 연구를 통해 펴낸 저서 “자이언트, 세계 권력의 핵심(Giants: The Global Power Elite)”에서 묘사하는 바와 같이, 슈퍼 리치 계층과 그 조력자들은 이제 서로의 주식을 매입하고, 저금리에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서로를 보호하는 그들 만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이에 반해 평범한 사람들은 줄어드는 저임금 일자리라도 잡기 위해 잔혹한 경쟁을 계속해야 한다. 이 착취형 시스템은 “4차 산업혁명”의 산물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글로벌 기관 투자자의 뜻이 아니라, 그저 하늘의 뜻에 따라) 기술로 인해 노동자의 지위가 크게 손상될 것이라 전해진다.

그렇다면 언론이 이렇게 저돌적으로 대북 포용과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보도하는 이면에 은밀히 숨기고 있는 이슈들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우리는 누가 무엇에, 왜 돈을 대며, 그로 인해 누가 어떤 이득을 보는 지 등 지저분한 뒷얘기는 하나도 듣지 못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철도가 놓인다면, 북한에서 남한까지 석유 또는 천연가스 수송관이 연결된다면, 그 수송관과 그 석유는 누구 소유인지, 석유를 어떻게 팔 것이며 그 수익금은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그 수송관을 설치하기 위해 세금이 쓰이는 경우 납세자들도 그 수익금을 일정 부분 돌려받을 수 있는지 등을 우리가 아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는 기업들이 어떤 계약을 논의하고 있는지 또는 정부가 북한과 어떤 협상을 진행 중인지에 대해 그야말로 무지하다. 지금 이 시기에는 투명성이 특히 더 중요하다. 광산이나 공장이 정부에 속하는 정부주도형 시스템이 일개 회사 또는 개인이 광산 등 자원에 대한 절대적 통제력을 가지는 자본주도형 시스템으로 변하는 경우에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한과 북한에 더 큰 빈곤, 더 큰 부의 집중을 불러올 수 있다.

어떤 다국적은행, 어떤 국부 펀드가 어떤 조건 하에서 북한에 투자할 가능성이 있는지 아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 투자자들이 합의를 이행하지 않을 때 북한 또는 남한 주민들을 보호할 장치는 무엇인지, 서명된 (또는 서명할) 계약서를 대중에 공개할 것인지 등을 파악하는 것이 좋다.

북한에 공장을 세울 계획이 있다면 다음의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누가 그 공장에 돈을 대는가? 수익금은 누구에게 가는가? 누가 그 공장을 소유하는가? 그 공장의 노동자들이 가지는 권리는 무엇이며, 이들은 수익금 중 어느 정도를 받게 되는가? 이들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환경에 미치는 공장의 영향력 평가를 위해 어떤 단계들을 수행하는가?

북한은 석탄, 금, 철, 희귀 광물을 채굴하는 광산의 환경 영향성을 평가할 전문지식이 없으므로 전문가와 NGO가 이러한 평가과정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기구들은 북한 방문 비자 조차 받을 수 없다.

한편, 한국과 일본, 중국, 미국은 베트남이나 미얀마에서 일어난 일들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앞으로 북한도 베트남, 미얀마와 비슷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기업이 베트남의 국유화 자산을 개발하였을 때 평범한 베트남인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지금까지 베트남이 번영하고 있다고만 들었는데, 이것은 정확한 설명인가? 그리고 산업화가 베트남의 환경이나 일반 노동자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우리는 보통 싸게 사서 입고 버리는 옷, 쉽게 소비하는 저렴한 플라스틱, 대수롭지 않게 쓰레기통에 처박는 값싼 스마트폰, 스피커, 선글라스 등에 숨겨진 환경 훼손, 노동자의 피해, 또는 그 밖의 장기적 비용에 대한 토론은 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이 소비사회 안에서 물건에 숨겨진 진짜 비용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됐다. 이것이야 말로 통일시대의 심각한 문제다.

이제 우리는 북한을 통해 잊혔던 현실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 북한에 20~30개의 석탄 발전소를 건립하면, 이는 생태계의 재앙인 동시에 지구 온난화를 부추길 것이며, 이미 위험한 서울의 대기질을 치명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말 것이다. 북한이 이윤을 쫓느라 새로 지어지는 공장에서 나오는 오염물질을 제대로 규제하지 않는 경우, 한국은 그러한 오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뿐 아니라, 한국 공장들도 북한의 선례를 따를 것이 분명하다.

북한의 형편없는 임금과 허술한 환경 보호는 이미 대기오염으로 신음하는 한국 속으로 빠르게 퍼져 나갈 것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북한 노동자들이 단결권 등 노동자의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할 경우, 한국 기업들은 이 모델을 따라 한국 내 근로자들을 착취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우리는 북한이 시장을 개방하면 한국처럼 자유롭고, 행복하고, 부유해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빠졌다. 하지만 현재의 개발 모델에서는 한국인들조차 자유와 행복과 부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아니면 현재 투자은행과 기업이 구상 중인 북한 경제개발계획은 애초에 북한 주민들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북한을 대상으로도 몽고나 베트남 개발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저 수익성을 생각할 뿐, 사람에 대한 고려는 없는 계획을 구상 중인지도 모르겠다.

부의 집중화는 통일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 중, 기후변화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전세계적으로 소수의 몇 명에게만 부가 집중되는 현상이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과 중국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집중화는 법치를 훼손하고, 부패한 미디어의 포장 속에 슈퍼 리치의 사치, 낭비, 화려함을 동경하고 강요하는 문화를 창조한다.

주류 언론의 논조에 따르면, 북한은 가난하고, 남북한 경제에는 커다란 격차가 존재한다. 일반적인 경제용어를 바탕으로 보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한국에 정착한 북한 사람들 중에는 이 곳 생활의 자기중심성, 경쟁, 타인에 대한 무관심 등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다. 북한을 방문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상업화와 경쟁하는 문화 대신, 예술과 체조, 글쓰기의 목적 자체를 소중히 하는 문화에 큰 감동을 느낀다.

더 큰 문제가 있다.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가 “21세기 자본론(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에서 설명했듯이, 소수의 손아귀에 더 많은 부가 집중되게 되면 한반도의 분단은 못 먹고 못 사는 북한과 잘 먹고 잘 사는 남한 사이의 분단이 아니라, 남북한의 평범한 시민은 더 가난해지고, 극소수의 선택 받은 자들만 슈퍼 리치가 되는 분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남한과 북한 사이에 존재하는 어마어마한 격차를 부인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부의 집중으로 인한 경제적 왜곡이 훨씬 더 심각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런 추세들은 한반도는 이제 매우 다른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며, 현 상황에서는 북한에서 한강의 기적”을 재현할 가능성은 없음을 시사한다. 앞으로는 물질적인 발전보다 사회 경제적 정의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통일을 위한 노력은 경제 체계가 보통 사람들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반드시 의미 있는 응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경제 체계에서는 전세계 무역항로를 따라 저렴한 물품 운송 시스템이 장려되고, 지역경제가 흔들리며, 오직 대기업만이 합리적인 금융을 누릴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개방 경제의 실패로 동네 가게, 동네 공장, 동네 약국, 동네 빵집이 무너진 반면, 스타벅스와 편의점, 프랜차이즈 빵집, 그 밖에 대기업이 진출한 사업들이 번성했다. 대기업들은 값싼 금융을 이용해 수년간 엄청난 손실을 감내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가족이 경영하는 소규모 비즈니스를 몰아낸다.

그런데 이러한 프랜차이즈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장기 고용이나 적절한 퇴직과 건강보험 혜택을 보장받지 못한다. 직원들은 경영과 금융에 대한 의사결정에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고, 일하고 있는 지점을 소유할 권리도 없다.

한때 어디서나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점점 파산의 위기에 몰리는 소규모 가게들에게는 엄청난 타격이다. 이런 경제학을 북한에 도입할 작정이라면, 북한은 아직 기회가 있을 때 거절해야 한다. 북한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결국 20년 뒤 또는 50년 뒤 국가로서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이지, 당장 비디오게임이나 K-Pop 아이돌을 소개해 주민들을 열광시키는 게 아니다.

통일이란 무엇인가?
통일의 궁극적인 의미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모호하고 오해의 여지가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통일을 1990년 독일의 통일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늦은 밤 외국인들과 소주 한잔 하며 수다라도 떠는 날엔 이 꿈 같은 비교가 단골손님이다. 언제나 동독은 서독의 경제발전을 따라갈 수 없어 속수무책이었고, 통일 후 동독 사람들의 삶이 좋아졌으며, 그 결과 독일은 더욱 번영하는 강대국이 되었다는 게 그 줄거리다. 한국도 독일처럼 통일의 이점을 누릴 수 있지만, 서독과 동독은 한국과 북한만큼 소득과 산업개발의 격차가 크지 않았던 바, 한국의 통일은 더 오랜 시간을 가지고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의 소득 및 산업개발 격차는 긴 통일의 과정 중에 북한의 노동자를 싼 값에 착취하는 한국기업 및 다국적기업의 변명으로 인용되곤 한다. 하지만 북한 노동자가 제대로 보수를 받지 못하고, 전문 기술을 축적하거나 임금을 저축하지 못한다면, 해당 과정은 북한 주민들을 부유하게 만들기 보다는 모든 한국인들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릴 공산이 크다. 북한 노동자가 적은 월급을 벌어 패스트푸드나 휴대전화에 낭비하게 된다면, 이들의 삶은 더 나빠질 뿐이다.

그리고 한국은 어떻게 지난 수십년간 상대적 경제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던가?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한강의 기적”, 그 중에서도 “기적”이라는 말에 가려져 있다. 한국의 번영은 여러 모순의 종합이지만 기적은 아니다.

한국의 경제 성장은 부분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급격한 산업화계획의 결과였다. 돌이켜보면, 그 급격한 산업화로 한국은 화석 연료와 수입 농산물에 너무 의존하게 되었고 산업화는 더 이상 축복이 아니다. 다만 그의 정책이 효과적이었다는 점 하나는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 개발 모델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개발 속도를 높이고, 모든 시민이 마치 거대한 군대의 일부인 듯 국가 사업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산업화로 갈 수 있었던 비결은 외국계 은행과 대기업에서 자본의 통제권을 빼앗아, 정부의 장기 개발 모델 이념에 열정적인 일부 관료들이 그러한 통제권을 갖도록 한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국민들의 해외 공금을 전면 제한했고, 국민들이 저축을 통해 (정부 캠페인에서는 저축을 장려) 정부주도 저축계획에 동참, 개발에 자금을 대도록 했다.

또한 한국으로 유입되는 자본을 정부가 통제하여 산업 및 기술의 육성, 기반 시설 개발, 교육에 집중하도록 했다. 이러한 방식은 현재 북한에 계획되고 있는 형태의 단기적 투기 목적에는 사용되기 어렵다.

박정희의 접근방식에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했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북한의 발전을 위해 그러한 모델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장기 프로젝트를 통해 어떻게 북한의 교육수준이 올라갈 것인지, 또는 어떻게 북한의 시민사회를 육성할 것인지, 녹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북한의 차세대 지식층을 키워낼 필요에 대해 일언반구 없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지식인들을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니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대기업들이 북한의 발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크나큰 이해의 상충이다. 결국 이 대기업들은 태생적으로 단기적 이익에만 집중하고, 북한의 미래를 계획하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 북한의 개발에 대한 논의는 이해의 상충이 없고, 윤리적인 거버넌스에 전념할 수 있는 정부 관료와 전문가들에게 제한하는 것이 옳다.

그럼 다시 1990년 독일의 통일로 돌아가보자. 상당히 오래 전, 상당히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서유럽의 경제체제와 산업생산은 훨씬 더 넓은 부의 분배를 지지했다. 노조와 정부의 규제로 오늘날 우리가 (국내외에서) 목격하는 노동자의 착취는 불가능했다. 공산권을 의식하여 경제체제를 견제했고, 부의 집중이 최근처럼 과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승리로 떠들썩했던 1990년 독일의 통일은 관료주의적 사회주의 대비, 제대로 된 사회복지국가의 강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급진적 또는 혁명적 사회주의에 전념하는 반대파의 끊임없는 압력과 비판이 없었다면, 독일에서 (또는 프랑스와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그런 사회복지국가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1990년 승리한 자본주의는 수정된, 희석된 자본주의였다. 공산권의 도전이 없어진다는 것은 앞으로 30년간 세상이 파괴적인 형태로 회귀할 것임을 의미했다

소수가 자본을 독점하고 시민들에게 공허한 소비문화를 강요하는 이 악몽 같은 세상과 급작스러운 기후변화의 등장은 무관하지 않다. 유감스럽게도 언론은 소극적이나마 기후변화를 보도하면서 먼 미래의 일인 것처럼 했다. 과학전문가들은 남은 시간이 없다고 외치는 와중에도 말이다.

기후변화 대응은 통일 정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들은 북한이 환경문제 없이 수십년은 개발을 지속할 수 있다고 태평스러운 가정을 하고 있다. 이 자체로도 위험한 사기행각이지만, 한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석탄 사용을 장려하는 것보다는 낫다.

분단의 한반도, 특히 북한이 냉전의 마지막 잔재라는 것 역시 근거 없는 믿음 중 하나다. 북한은 정말 자유로운 개방시장, 자유로운 의견 교환, 민주적인 과정을 통한 개인의 잠재력 실현 등 새로운 세계 질서 곁을 방황하는 한물간 사회주의의 잔재인가? 오늘날 파리의 길 위에서 정부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세상을 그렇게 보지 않는 게 확실하다.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전통적인 농부들을 가난으로 몰아넣는 거대 기업형 농업과 싸우는 사람들은 서구세계에서 파라다이스를 찾지 못했다. 물론 북한이 부패의 늪에 빠져 주민들을 억압하며 너무 오랫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의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싱크탱크를 통해 정부에 정책을 강요하는 무자비한 다국적 은행들로부터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한반도의 비극적인 분단을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는 상징인 비무장지대, 즉 DMZ를 생각해 보라.

나이든 세대에게 DMZ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세계, 국가의 경제 통제와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 간의 가슴 아픈 분열을 뜻한다.

그들에게 DMZ는 유럽 등지에서 이미 극복한 개인의 고통과 과거의 분열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DMZ는 인터넷과 함께 국경이 사라지는 시대, 자유 무역과 자유 관광의 시대, 지난 30년간 자유 무역이 세계의 통합한 지금에도 기묘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보다 효과적으로 DMZ를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DMZ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까?

젊은 세대에게 DMZ가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그들은 DMZ를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 다시 말해 자본과 상품, 슈퍼 리치는 어디든 돈이 되는 곳이면 자유롭게 갈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이동은 제한되는 미래의 전조라 할 지 모른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둘러쌓고 있는 장벽에서,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도널드 트럼프가 건설 중인 거대한 장벽에서 DMZ의 후예들을 만난다. 이들 벽은 가난한 자들을 차단하고, 무력을 사용해 글로벌 투자가 야기한 경제적 갈등을 해결한다.

바로 우리 주변에도 벽이 쌓이는 중이다. 부자만의 세상을 둘러싼 벽, 안락한 삶을 즐기는 그들이 자신과 급이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도록 쌓는 벽이다. 이는 한국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곳의 급진적 분열이 편협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작은 집단들로 세분화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드러나지 않은 통일정책의 선례
통일 프로젝트를 더욱 면밀히 보기 위해서는 통일계획을 수립 중인 한국정부와 기업들의 잠재의식 속에 정확히 어떤 통일 모델이 자리잡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그들은 독일 통일을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독일의 통일 과정은 한반도의 역사나 한국인의 본능적인 반응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은 과거에도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통일을 이룬 바 있다. 한반도는 신라나 고려시대에도 통일되었지만, 시간상 너무나 먼 과거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마음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다만, 영향력은 없다 해도 한국 사람들의 의식 속에 숨겨져 있는 것, 한국인들이 경제 발전과 통일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형성한 그것은 무엇인가?

비교적 최근에도 대규모 경제, 정치적 통일 프로젝트의 선례가 있었다. 1936년 일본인 조선총독에 의해 체결된 “제1차 만주-조선 협력협정 (第一次滿朝協定)” 이다. 해당 협정은 만주와 조선 모두의 빠른 산업화와 효과적인 경제문화적 통일을 위해 “만주와 조선은 하나(滿朝一如)”라는 비전에 시동을 걸었다.

1930년대 후반, 한국의 신문들은 한국 기업들은 값싼 만주 노동력을 활용하고, 만주의 천연자원(석탄, 광물, 비옥한 토양)을 이용해 빠르게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얻었다고 보도하기 바빴다.

2014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북한과의 통일은 “대박(bonanza)”이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사용한 대박이라는 단어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 말은 1930년대 만주가 제공한 경제적 기회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썼던 “천금을 낚아챈다”, 즉 일확천금(一攫千金)의 표현을 현대식으로 직역한 것이다.

박대통령이 1930년대 조선과 만주의 정치경제적 통합을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과 만주가 통합된 그 과정을 통해 많은 조선의 가정이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부를 얻었다. 미묘하지만 분명한 울림이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무의식 속에 그런 개념이 내재되어 있었던 듯하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정치와 경제를 배웠고, 아버지가 야심 찬 젊은이로서 경제 붐을 이용하고자 만주로 가 권력을 얻기 까지를 주목한 것이다. 19세기 수많은 미국인들이 “Go West” 라는 치명적 유혹에 홀렸던 것처럼, 1930년대의 한국인들도 1930년대 만주라는 넓은 땅으로 달려갔다.

지금 한국인들에게 북한의 개발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그리고 1930년대 만주의 개발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는지를 보면, 그 유사함이 충격적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 비극적 길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길을 찾고, 착취나 대규모 자본투자에 의존하지 않고도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개발 모델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통일은 반드시 시민운동이어야 한다. 자본가가 가져갈 수익을 걱정하지 않고 개인들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도록 하는 사람들 사이의 거래여야 한다. 통일은 시민들이 비전을 나누고, 실현할 수 있도록 문화와 표현을 되살리는 문화운동이어야 한다. 한반도의 젊은이들이 힘을 모으고, 자신의 권리를 강화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청년 운동이어야 한다.

통일은 사회 문제, 환경 문제, 그 밖에 모두가 공유하는 문제에 집중하는 동시에, 군국주의와 거대한 권력 경쟁에서 벗어난 평화운동이어야 한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일시 장소 : 7. 27. (월) 10:00, 세종문화회관 계단

한반도 평화선언 Korea Peace Appeal

한국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체결합시다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한반도와 세계를 만듭시다

제재와 압박이 아닌 대화와 협력으로 갈등을 해결합시다

군비 경쟁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시민 안전과 환경을 위해 투자합시다

이제는 전쟁을 끝냅시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분단과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수백만의 사상자와 천만 이산의 고통을 가져온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입니다. 냉전 시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정치적·군사적 대결과 갈등으로 한반도 주민들과 세계 곳곳의 사람들은 분단과 적대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제 그 고통을 끝내야 합니다.

다시 적대와 불안이 지배하는 시대로 되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냉전이 끝난 30년 전 남북은 상호존중과 불가침에 합의하였습니다. 20년 전 남북은 첫 정상회담을 열고 전면적인 교류 협력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2018년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도 열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한 대가로, 신뢰가 불신으로 바뀌고 긴장이 높아지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렵게 이뤄낸 합의들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걸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슬픈 상황입니다.

지난 역사는 상대를 불신하고 굴복시키려는 적대 정책이 한반도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도리어 악화시켜 왔음을 보여줍니다. 불안정한 휴전 상태의 한반도는 핵 전쟁의 위협에 시달려왔고 세계적인 핵 군비경쟁과 확산을 촉발하는 장이 되어왔습니다. 이 전쟁을 끝내지 못하면 한반도 비핵화도 이루기 어렵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관련국 정부들이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해 진지하고 책임 있게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전 세계인의 마음을 모아 대결과 분쟁의 상징이었던 한반도를 평화와 공존의 산실로 바꿔냅시다

한반도 주민들과 동아시아, 세계 시민들이 서로 협력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미래를 상상합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대신, 우리의 자원을 시민의 안전과 행복, 지속 가능한 환경,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해 사용하기를 희망합니다. 이제 우리의 이름으로 전쟁을 끝내고, 지난 70년 오지 못했던 미래를 만들어갑시다. 평화를 향한 간절한 염원을 모아 전 세계가 공명할 만큼 큰 목소리로 함께 외칩시다.

기자회견_한반도 평화선언 Korea Peace Appeal

문의 : 경실련 통일협회(02-3673-2142)

월, 2020/07/27- 20:21
2
0

요즘 언론을 보면 매일매일 코로나19 확진자 및 사망자 수 관련 기사와 마스크 대란 기사가 도배된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늘어나는 코로나19 확진자 및 사망자 수를 농구경기 스코어 중계하듯 보도한다.

더 한심한 건 마스크 관련 기사다. 거의 모든 언론이 ‘마스크 대란’, ‘마스크 품절’, ‘마스크 구입 위한 장사진’ 따위의 기사를 쏟아낸다. 이런 기사들은 마스크 수급을 위한 대안은 없이 마스크 공급을 제대로 못하는 정부 성토로 가득하다.

 

시장경제원리가 정확히 작동하는 마스크 시장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히 생각해보자. 마스크를 생산하는 국내 민간기업들의 공급 한계량은 하루 1000만장 남짓이다. 그럼 국내 마스크 생산 업체들이 지금처럼 생산능력의 한계까지 기계를 돌려 마스크를 생산한 때가 또 있었을까? 단언컨대 없었을 것이다.

마스크 소비가 과거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도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린 근년부터인데, 소비가 크게 늘었다고 해봐야 마스크 제조업체들의 생산능력 한계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을 것이 자명하다.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의 일 평균 마스크 생산량은 최대 생산가능량의 몇분의 1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신천지 교인들의 집단 감염 등으로 코로나19가 전국으로 번지면서 너나 할 것 없이 공포에 질린 채 마스크 구입에 혈안이다. 쉽게 말해 가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부당이득을 노린 생산업체·유통업체의 사재기도 마스크 가수요 증가에 일조했음은 물론이다)했고, 이 가수요는 국내 마스크 제조업체들의 생산능력한계를 가볍게 넘어선다.

전 국민이 매일 마스크 한 개씩만 구입하려해도 매일 5000만개의 마스크가 필요하다. 현재 마스크 생산능력의 5배에 달하는 수요를 당장 해결할 길은 전혀 없다.

그리고 감염병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생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민간업체들이 생산 시설과 인력을 대거 늘릴 리도 만무하다. 감염병이 잦아들고, 해 뜨면 사라지는 아침안개처럼 가수요가 소멸되면, 생산 시설을 확장한 기업들을 기다리는 건 파산이기 때문이다. 설사 일부 기업들이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한다해도 시차효과 때문에 지금의 공급부족 현상을 타개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게 대한민국 경제가 채택하고 있는 시장경제원리의 작동 방식이다. 감염병으로 인해 가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마스크 가격이 폭등하고, 마스크가 품귀 현상을 빚는 건 시장경제원리상 지극히 당연하다. 시장원리를 조금만 알아도 지금의 마스크 부족을 정부 탓만으로 돌릴 수 없다.

 

정부가 마스크 공급? 엄청난 낭비와 비효율도 감수해야

그러거나 말거나 언론과 야당, 일부 시민들이 문재인 정부에 요구하는 건 이런 것 같다.

‘코로나 사태 이전과 같이 KF80, KF94마스크를 1000원 남짓의 저렴한 가격에 맘 편하게 구입하고 싶다. 정부가 무능해서 혹은 사태 초기에 중국에 퍼줘서 마스크가 모자라니 정부는 책임져라.’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매일 5000만장의 저렴한 마스크를 전 국민에게 신원을 확인해 배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보다 다섯 배 이상의 마스크 생산능력을 확보해야 하고, 매일 전 국민에게 1인 1장의 마스크를 제공하는 배급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정부가 마스크 생산업체를 전부 국영으로 만들든, 아니면 지금의 마스크 생산업체들이 매일 5000만장의 생산능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데 드는 천문학적 비용(공장증설, 기계구입, 인력확충 비용 및 그 유지비용)에 대해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든 어마어마한 비용이 발생하는 건 불문가지다.

생산능력만 확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사재기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1인 1장의 마스크 배급이 정확히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신원 확인 시스템과 배급 장소 및 배급 담당 인력의 확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모두 엄청난 비용이 발생할 게 자명하다. 마스크 5000만장 생산능력 확보 및 유지, 마스크 배급체계의 구축 및 유지 등에 들어가는 천문학적 비용은 모두 세금이다.

그런데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어쩌다 발생하는 전염력 강한 역병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천문학적 낭비와 비효율을 감수하는 게 말이다. ‘모든 시민들에게 매일 저렴한 마스크를!’을 외치며 정부를 성토하는 자들은 적어도 그에 따르는 천문학적 낭비와 비효율을 감수할 각오는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시장경제와 작은 정부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자들이 그럴 리 없다.

 

지금은 마스크 가수요를 억제하는 방법뿐

거듭 말하지만 지금의 마스크 품귀와 가격 상승은 감염증 공포로 인한 가수요 때문이다. 이로 인한 일시적 마스크 부족 해결 방법은 가수요를 통제하는 길 뿐이다. 사재기에 대한 단속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특정 기간 동안 구입할 수 있는 마스크의 수를 제한해야 한다. 정부도 그렇게 가닥을 잡은 것 같아 다행이다.

코로나19 공포 마케팅을 통해 마스크 가수요를 폭발시킨 언론은 이제 마스크 타령 좀 그만하기 바란다. 이 마당에도 배급제 운운하며 정부를 공격하는 언론도 있다. 공격하더라도 대안을 내놓고 하기 바란다.

토, 2020/03/21- 22:31
2
0
천안에 아시아 제일의 대학촌 건설
도농 통합 청과물시장 건립
천안역사 현대화작업
전철 버스 환승화 추진
천안 역사·관광 인프라 구축
김정은 정권 교체, 자유민주주의 통일 완성
반공 자유민주주의 블록 참여, 홍콩 민주화 및 대만 독립 지지
자주국방력 강화 및 북핵 완전 폐기(CVID)
한미 동맹 및 한·미·일 삼각연대 강화
우한 폐렴 친중 부실대응 국정조사 실시
5.18 유공자 명단 공개 및 채용시험 가점제 폐지
공수처 폐지, 검찰 기능 정상화
반국가단체·이적단체 해산, 국가보안법 위반자 공직 출마 및 임용 금지 법제화
노조 정치활동 전면 금지

이 글은 AI 가 수집 요약한 글 입니다..
토, 2026/06/13- 03:35
2
0

지난 8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민정수석을 법무부장관 후보로 지명하였고, 9월 9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이 한 달 동안 한국 언론은 조국 법무부장관후보에 대한 사상 유래가 없는 치열한 검증보도를 하면서 이번 사건의 핵심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검찰도 국회인사 청문회가 끝나던 그 시각에 조국 신임장관의 부인을 기소함으로써 또 다른 핵심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이렇게 정치권과 언론, 검찰이 플레이어가 되어서 만든 조국 이벤트는 광화문과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 주최 측 추산 2백만 혹은 3백만의 시민을 끌어내는 마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수많은 시민을 광장으로 호출한 블록버스터급 흥행성공에도 이벤트의 주역인 언론과 검찰이 마냥 웃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검찰은 연일 검찰의 잘못된 수사관행, 수사와 기소독점, 불공정한 검찰권 집행 등의 이슈로 궁지에 몰리고 있고, 언론 역시 부실한 사실검증과 편향된 보도, 의혹 부풀리기 등의 잘못된 보도관행으로 시민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조국장관은 국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언론 검증 보도량 감당할 수 없을 정도…”,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네이버에서 후보자 신분이던 한 달 동안 관련기사를 검색한 결과 적게는 13만 건, 많게는 80만 건이 검색되었다고 한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조사에 따르면, 장관임명 직후인 9월 10~24일의 15일 동안 주요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된 단독기사는 7개 종합일간지 99건, 7개 주요방송국 67건으로 총 166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단독보도 중 검찰 및 법조계를 출처로 하는 보도가 81건에 달하고 있다.

전례가 없는 이렇게 많은 기사와 단독보도들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조국장관을 둘러싼 사건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도리어 정치권과 언론, 검찰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 구체회되고 있다. 시민들은 지난 10년간 진행된 서울대 입시의 실태도 알게 됐고, SCI논문의 저자 적격성 기준도 알게 됐다. 동양대에서 조국장관의 딸이 어떤 봉사를 했고, 장관의 부인이 해명 과정에서 손을 떨었다는 사실도 안다. 심지어 장관 딸의 중2 때 일기장의 압수수색 과정과 압수수색에서 검찰이 먹은 식사메뉴까지 안다. 하지만, 정작 사건의 의미와 실체적 진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래서 모두들 추측한다. 이건 시민들뿐만 아니라 정작 보도를 하는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기사는 ‘추측 된다’ ‘알려졌다’ ‘의혹이 있다’로 도배되어 있다.

언론 보도는 경우에 따라 ‘사실(fact)’이 ‘진실(truth)’을 감추는 경우가 생긴다. 격투기선수 출신인 K씨와 평범한 일반인 L씨의 싸움을 상상해보자. K씨와 L씨는 우연히 만난 술자리에서 말다툼을 벌이다 주먹다짐으로 벌였다. 당연히 격투기 선수 출신인 K씨가 L씨를 늘씬하게 두들겼는데, 이 과정에서 L씨도 저항하면서 K씨를 몇 대 때렸다. 다음날 기사에 L씨가 격투기 선수출신 K씨를 폭행했다는 기사가 나왔다면 어떨까? L씨가 K씨를 때린 건 팩트다. 그렇지만 사건의 실체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진실보도가 아니며, 이런 뉴스가 바로 가짜뉴스다.

바람직한 보도를 평가하는 기준은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있어야 한다. 진실보도는 사실성, 완전성, 균형성, 투명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진실보도는 사실에 기초해야 하며, 사건을 분절화 파편화해서 퍼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체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최대한 모두 그려야 한다. 또한 진실보도는 이해당사자 모두의 의견을 균형 있게 담아야 하고, 취재원이나 정보 소스에 대해서 가능한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기자들은 조국장관에 대한 보도가 과연 이런 기준을 충족하고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봐야 하고, 독자들 역시 이런 기준을 갖고서 보도를 접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조국장관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보도에 남발되고 있는 ‘의혹이 있다’, ‘전해졌다’, ‘짐작된다’, ‘예상된다’, ‘추정된다’ 등의 추상적 서술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는지 되물어봐야 한다. 보도가 가진 사실성은 끊임없는 사실확인, 팩트검증에 의해서 충족될 수 있다. 80만 건에 이르는 보도가 얼마나 사실확인, 팩트검증을 거쳐 작성되었는지 알 도리는 없으나, 보도된 내용 자체만 보아도 대충 짐작이 가능하다.

보도가 얼마나 보도의 완전성을 추구했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조국장관 일가에 대한 수십만 건에 가까운 보도들을 통해 조국장관 부인의 손에 떨렸는지, 압수수색이 몇 시간이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검찰이 짜장면을 먹었는지 한식을 먹었는지를 아는 것이 사건의 진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고, 이런 것이 단독이나 특종이라고 올리는 언론사들이 정상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파편화되고, 분절된 사실을 전달하는 기사들이 혹시 본 사건의 진실을 덮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마치 백대 때린 가해자를 폭행당한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마법을 부리려는 의도가 없기를 바랄뿐이다.

현재 조국장관 관련 보도에서 불편한 점은 균형성에도 있다. 우리는 검찰이 국가기관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검찰의 행위를 공적인 행위 내지 중립적인 행위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검찰이 기소를 하면 당연히 죄가 있으니까 국가가 나섰겠지 생각할 수 있지만, 엄밀히 이야기해서 검찰은 소송의 당사자이다. 검찰이 사건 심판의 주체라면 굳이 재판을 할 필요도 없이 그냥 검찰이 다 판결을 내리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언론 보도는 당연히 검찰의 주장과 동등하게 피의자에게 반론권을 제공하는 것이 정당하다. 사실 이런 검찰의존의 관행을 깨고 법원내지 공판 중심의 보도관행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언론계 내에서도 계속해서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여전히 언론은 검찰의존적인 취재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몰고온 논두렁 시계보도의 참극을 겪고도 여전히 언론은 반성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보도는 최대한 투명해야 한다. 보도의 내용은 언제나 검증을 통한 사실확인의 가능성에 열려있어야 한다. 사실에 대한 검증과 재확인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취재원이 투명해야 한다. ‘관계자에 의하면’이 남발되는 기사는 좋은 기사가 아니다. 최소한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이 드러나야 하고, 취재과정에서 정보를 제공한 취재원이 명확히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모든 지식과 정보가 검증가능성에 열려있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룰을 가진 세상을 살고 있다. 아무리 확실하고 논리적인 지식 내지 정보라도 타인의 검증이 불가능하다면 지식이나 정보로서 인정되어서 안 된다.

기자가 진실보도를 하는 것은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무한한 팩트 검증도 불가능하고, 사건 전체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해당사자들의 사이에서 균형잡힌 보도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기계적 중립은 가능할지 모르나 균형의 추는 항상 모호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취재원을 밝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취재원이 공개에 동의를 해야 하고, 취재원이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기자에게 진실보도는 시지푸스의 바위와 같은 것이다.

이 시점에서 조국장관과 그 가족에 대한 80만 건의 보도에 대해서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연 80만 건의 보도가 그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는지? 더 나아가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보루로서 언론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많은 시민들이 왜 기성언론을 불신하고 언론개혁을 이야기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검찰이 스스로 휘두른 검이 자신의 목을 겨누게 되었듯이, 이제 검찰을 개혁하고 나면 그 다음 우리사회의 특권과 반칙을 뿌리 뽑기 위해 개혁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언론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정완규

정책연구소 이음 선임연구원

화, 2019/10/15- 21:04
2
0

조국 대전이 모든 걸 흡수하는 와중에 정말 중요한 뉴스가 나왔다. 부동산 양도차익 등 불로소득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가 그것이다. 미디어의 보도에 따르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유승희 의원(더불어민주당)이 ‘2017년 귀속 양도소득과 금융소득’ 자료를 국세청에서 받았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부동산 양도차익으로 인한 소득이 한 해 84조8천억원, 주식 양도차익이 17조4천억원, 배당 및 이자소득 등 금융소득은 33조4천억원이었다고 한다([단독] 불로소득 ‘136조’ 돈이 돈을 불렸다).

<출처: 한겨레>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부동산 양도차익 등 불로소득 규모는 135조6천억원인데 이는 2016년(112조 7천억원)보다 20% 증가한 액수다. 불로소득의 규모도 천문학적이지만 이 불로소득이 극소수에게 집중된다는 사실이 더욱 심각하다. 배당소득의 경우 2017년 전체 배당소득이 19조6천억원에 달했는데, 상위 0.1%에 해당하는 9,313명이 8조9387억원(전체의 45.7%)을, 상위 10%가 18조3740억원(전체의 93.9%)을 각각 차지했다. 이자소득도 상황은 비슷하다. 2017년 전체 이자소득은 13조8천억원인데, 상위 0.1%에 해당하는 5만2435명이 2조5331억원을(전체의 18.3%), 상위 10%에 해당하는 524만3532명이 12조5654억원(전체의 90.8%)을 각각 차지했다. 부동산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 신고액수를 기준으로 줄 세웠을 때 상위 10%에 해당하는 부동산 거래로 인한 양도소득이 전체 소득 84조7947억원의 절반이 넘는 53조7913억원(63.4%)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고 하니 말이다.

배당소득, 이자소득, 부동산양도소득 등의 불로소득 편중도와 근로소득을 비교해 보면 불로소득의 양극화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근로소득의 경우 상위 0.1% 초고소득층(1만8005명)이 전체 근로소득(633조6천억원)의 2.3%를 차지하는데, 이는 자산소득의 불평등도에 견주면 귀여울 정도다.

 

부동산불로소득 환수가 가장 선행되어야  

불로소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적이다. 불로소득이 창궐하고 시장참여자들이 불로소득을 추구문하면 자산양극화와 소득양극화가 심화되고, 자원배분이 왜곡되며, 기업가 정신과 근로의욕이 소멸하고, 사회적 연대의식이 저해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 불로소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결정적으로 침해하는 암종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는 만사를 제쳐두고 불로소득의 공적 환수에 나서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불로소득의 공적 환수에 나설 때 무엇보다 먼저 손을 대야 하는 부문은 단연 부동산 불로소득이다. 부동산 불로소득은 배당, 이자 등의 불로소득과 비교불가일만큼 규모가 크며(국세청 자료는 양도차익만 집계한 것이지만, 임대소득과 귀속임대소득까지 포함하면 GDP의 30%수준이다) 불로소득 중에서도 가장 악성의 불로소득이기 때문이다. 흔히 불로소득을 다 같은 불로소득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이는 심각한 착각이다. 불로소득도 악성의 정도가 다르다.

불로소득의 악성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을 1.기여 및 폐단의 정도, 2. 불로소득을 얻을 기회의 공평성, 3. 무책손실의 정도 이렇게 세 가지로 제시해보겠다. 주식과 부동산을 비교해 보자. 주식은 기업에 자금을 직접 제공하는 기여가 있으며, 비교적 금액이 크지 않아 주식투자로 인해 불로소득을 얻을 기회가 공평하고, 주식투자를 하지 않으면 손실을 볼 가능성이 없다. 반면 부동산은 사회경제적으로 폐단만 있으며, 금액이 너무 커 불로소득을 얻을 기회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아도 가격이 오르면 엄청난 손실을 본다.

모든 일에는 선후와 완급과 경중이 있다. 문재인 정부는 노력소득은 보장하고 불로소득을 환수해야 한다. 불로소득의 환수 순위는 부동산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조국 대전에서 승리하고 검찰개혁에 성공하더라도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에 지금처럼 미온적이라면 문재인 정부의 앞날은 어두울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도 암담할 것이다.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의 성공여부에 대한민국의 앞날이 걸려 있다.

목, 2019/10/10- 23:57
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