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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의 인물탐구]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김찬·강달영·허형식도 서훈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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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의 인물탐구]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김찬·강달영·허형식도 서훈해야”

익명 (미확인) | 월, 2019/01/2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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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우철훈 선임기자

2019년은 3·1운동 100년, 상해 임시정부 100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단 한 명의 독립운동가도 누락되지 않게 찾아라”고 ‘엄명’을 내렸다. 보훈처는 최근 전국 시·군·읍·면사무소에 있던 일제강점기 수형인 명부 전수조사를 통해 독립운동 수형자 5313명을 찾아냈다. 이 중 2487명은 아직 서훈을 받지 못했다. 정부와 민간단체도 별도의 위원회를 만들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신문·방송을 비롯한 많은 언론도 역시 일제강점기와 항일투쟁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기획물을 쏟아내고 있다.

충남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은 1987년 8월 15일 문을 연 대한민국 최대 독립운동사 전시·연구·교육·홍보기관이다. 독립기념관은 1982년부터 준비해 국민 성금과 모금, 정부 예산 등 말 그대로 온 국민이 합심해 만들었다. 아마 올해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기관일 것이다. 이준식 관장(63)은 한국독립군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의 손자다.

한국독립군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자

-3·1운동 100년, 임정 수립 100년이다. 올해 의미는 역시 1919년 4월 11일 나온 임정헌장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라는 선언에 있다 할 수 있나.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큰 분기점을 잡으라면 바로 1919년이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혁명적 변화가 이뤄진 때다. 당시는 국민주권주의의 선언적 의미가 강했다면 이후 100년의 역사는 이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어떤 외국학자가 한국은 세계 혁명운동사에서 100년간 끊임없이 혁명하는 특이한 사례라고 하더라.”

-독립기념관 차원에서, 또 산하 독립운동사연구소 차원에서 하고 있는 사업은 무엇인가.

“올 2월부터 본격적으로 성과를 내려 하고 있다. 우선 2024년 완성할 예정인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의 경우 올 100주년에 맞춰 특별판을 낼 예정이다. 또 1000명 정도를 웹으로 전시하고, 독립기념관 제3전시관을 3·1운동 주제로 리모델링한다. 이번에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당시 만세시위 때 사용된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서 원본도 특별 전시한다. 이들 자료는 워낙 소중해 평소에는 복제본만 전시했다. 기미독립선언서 원본은 국내에 3개밖에 없다.”

-이번에 보훈처에서 수형인 명부를 통해 새로운 독립유공자를 발굴했다. 독립기념관도 독립유공자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가.

“우리도 지난해 TF를 꾸려 360명 정도를 찾아냈다. 올해는 주로 3·1운동 유공자를 찾으려 한다. 무엇보다 그동안 여러 이유로 서훈받지 못한 김찬·강달영 등 이른바 좌파 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을 시급히 재개해야 한다. 참여정부 때 이들을 대대적으로 서훈했지만 이명박 정부 중반 이후, 7~8년간 좌파 독립운동가 서훈이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해방 후 북한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다. 사실 이 분들은 새로 찾아내기보다 정리해 포상을 신청하면 된다. 개인적으로 꼭 포상해야 할 사람은 허형식이다. 의병장 허위의 조카이자 독립운동 명문가 출신으로 본인도 항일무장투쟁 중 순국했다. 동북항일연군이지만 김일성 부대와 다른 부대였다.”

-4형제 모두 독립운동을 하고, 큰형과 조카가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박진목은 ‘통일되지 않은 조국은 진정한 광복이 아니다’라며 서훈 신청을 하지 않다 돌아가셨다.

“그렇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조문기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부민관에서 친일 어용대회가 열리는 것에 분노,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분이다. 조문기 선생도 ‘자주적 통일이 되지 않았는데 무슨 서훈을 받느냐’면서 신청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서훈을 신청했다. 그런 사람도 찾아내 포상해야 한다.”

이 관장은 임시정부는 좌우 통합의 결과였고, 또 좌우 합작기간에 가장 큰 성과를 냈다고 말했다. 그는 “독립정신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완전한 자주독립은 민족통합과 떼려야 뗄 수 없다”면서 “그것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화문광장에 무명용사 상징물을 지난해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이번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남북이 함께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남과 북이 함께 추진할 다양할 사업을 준비 중이다. 이 관장도 “정부 입장에서 올해 가장 시급한 것이 한반도 평화 분위기”라며 “일단 북에 있는 3·1운동 자료를 입수하고, 3·1운동 사적지에 대한 현지조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북에 있는 3·1운동 사적지 문헌조사는 이미 마친 상태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사업은 우리 통일부가 승인하고, 무엇보다 북측에서도 입국을 허가해야 할 사안이다. 이 관장은 남북 독립운동사 문제에 대해 “좁게는 독립운동가 발굴을 위한 자료협조 부문이 있고, 더 넓게는 현존하는 현대사 역사인식의 간극을 좁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관장의 외조부는 한국독립군총사령관과 한국광복군총사령을 지낸 지청천 장군(1888~1957)이다. 지 장군은 대한제국 시기 장학생으로 일본 육사에 유학, 중위시절 3·1운동 소식을 듣고 선배 김경천과 만주로 망명했다. 지 장군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시작으로 해방까지 26년간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다. 해방 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해 제헌·2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그는 “할아버지는 평생 군인으로 사시다 말년에 잠깐 정치를 한 분으로 군인으로서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다”면서 “만주에서 무장투쟁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하셨다”고 소개했다.

-독립운동사에서 무장투쟁은 외교투쟁에 비해 소홀히 연구된 분야다.

“할아버지에 대한 평전도 있고 논문도 몇 편 있다. 그러나 만주 무장투쟁은 독립군이 스스로 남긴 기록이 별로 없다. 지난해 만든 신흥무관학교 뮤지컬 가사를 보니 ‘우리는 기록을 남기지 않고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다. 실제 무장투쟁이 그렇다. 나중에 귀국한 인사들의 회고록이나 일제 밀정의 정보문서가 발굴되지만 무장투쟁 역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연구가 금기시된 측면도 있지 않나.

“그렇다. 1910년에서 1930년대까지는 민족주의 계열이 무장투쟁을 많이 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무장투쟁 세력이 중국 관내로 이동한 1934년 이후 만주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이 활동했다. 한국학계에서는 민족주의 계열만 강조하거나, 사회주의 계열만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 둘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이 과제다. 평화통일을 얘기할 때 남북 역사에서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 부문으로 김일성 주석의 무장투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일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무장투쟁은 이제 학계에서 사실로 인정하는 것 아닌가.

“197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가짜 김일성, 복수 김일성을 얘기했는데, 지금 학계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 김일성 주석의 실체 활동은 인정하는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선 남북의 견해 차이가 있다. 그 간극을 좁히는 것이 평화공존, 평화통일을 위해 필요한 과제다.”

이 관장은 요즘 많은 언론이 독립운동 다큐멘터리와 기획기사를 쓰는 것에 대해 “분단 이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조선의용대’를 다큐로 다룬 것을 보면서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김원봉이 만든 독립무장투쟁 부대로 김원봉은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6·25 때 참전하기도 했다.

이 관장은 숨겨진 독립운동가를 찾고, 임정기념관을 세우는 것도 의미 있지만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고 아쉬워했다. 항일투쟁과 광복과정에서 정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찾지 못한 무명용사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조선에서, 만주에서, 저 연해주는 물론 시베리아 벌판에서 이름도 얼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유명한 독립운동가, 문헌에 나오는 독립운동가에게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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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올해 사업계획 등을 밝히고 있다./우철훈 선임기자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운동 주도

사실 외국 정상이 방문했을 때 첫 번째 방문지가 바로 대부분 해당국의 무명용사비다. 우리는 1907년 영국 언론인 존 매켄지가 찍은 구한말 의병사진에 큰 감명을 받지만 정작 그들의 신원을 확인할 생각을 않는다. 이 관장과 기자는 사진 속의 의병 실체를 찾는 작업도 의미 있겠다는 것에 공감했다. 그는 “적어도 대한민국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면 무명용사를 추념하는 상징물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그 상징물에 ‘이름은 모르지만 당신의 희생이 있어서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라고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모스크바 크렘린궁 바로 앞에 ‘꺼지지 않는 불’이 있고, 베이징 천안문 앞에 중국 혁명과정에서 희생된 무명의 인민을 기념하는 커다란 비석이 있고, 파리 개선문에도 무명용사 기념 상징물이 있다는 점을 들어 광화문광장에 무명용사 상징물을 만드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지청천 장군과 같이 환국했다. 어머니는 서울대 도서관 사서를 하다 아버지와 결혼했다. 부친이 사업을 하다 망해 부산 화교학교에 취업하는 바람에 식구들이 모두 부산으로 이사했다. 그는 초·중·고교를 부산에서 다녔고, 1976년 연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역사를 좋아했지만 ‘사학과 나오면 배고프다’는 담임선생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학보다 역사공부를 했다.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의 전공은 ‘일제강점기 운동사’다.

학위를 받고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제작에 상임위원으로 참여했고, 그 인연으로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을 맡았다. 주변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이 친일파 청산작업을 하니 당신이 적격”이라는 추천 때문이다. 2009년 다시 민족문제연구소로 돌아온 그는 근현대사기념관을 만들고 관장으로 활동했다.

2011년 11월 이명박 정부 때 ‘건국절’ 논란으로 시작된 친일·독재 미화 역사왜곡에 항의, 그는 ‘역사정의실천연대’에 참여해 ‘역사전쟁’을 시작했다. 2013년 박근혜 정권부터 역사왜곡을 노골화하자 역사정의실천연대 정책위원장으로 교학사 교과서와 국정역사교과서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이 관장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 제1타깃이 통합진보당, 제2타깃이 전교조와 민주노총, 그리고 제3타깃이 우리 민족문제연구소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했다”면서 “1·2타깃을 치고 세 번째 타깃을 치려다 역사왜곡이라는 강한 역풍을 맞고 박근혜 콘크리트 지지율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그는 “강남 8학군 학부모 사이에서 ‘박근혜가 아버지 명예회복을 위해 국정 역사교과서를 만든다’는 우려와 분노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 이 싸움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촛불정부가 들어선 2017년 12월 그는 제11대 독립기념관장에 취임했다. 그는 “처음에는 독립기념관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제주 항일투쟁기념관과 경북 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됐고 서울에도 임시정부기념관이 생길 예정”이라면서 “(독립기념관이) 국내 최대 독립운동사 연구·전시시설이지만 천안이라는 지리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 원희복 선임기자 [email protected]·사진 우철훈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19-01-26> 경향신문 

☞기사원문:[원희복의 인물탐구]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김찬·강달영·허형식도 서훈해야”

시민들의 의견

관람안내

• 관람시간
개관 10시 30분 ~18시 (입장은 17시 30분까지)
휴관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연휴

오시는 길
•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 10번 출구 걸어서 7분
1호선 남영역 걸어서 10분
6호선 효창공원역 2번 출구 걸어서 13분
• 버스
(간선) 400 (마을) 용산04 : 숙명여대도서관
(지선) 2016 : 숙명여대 후문
• 박물관 주차장이 좁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십시오.

자세한 정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해주세요~
https://www.historymuseum.or.kr

금, 2018/09/0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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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15번째!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응원영상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기적을 이어 2018년 8월 29일,
다시 시민들의 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모금 참여
https://www.minjok.or.kr/archives/97796

금, 2018/09/0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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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38

이순우 책임연구원

흔히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단연코 한국전쟁 당시의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제일 먼저 떠올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인 일제강점기에도 이 땅에 포로수용소가 엄연히 존재했으며, 더구나 그 위치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는 점은 다소간 이색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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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연합군포로수용소 터에 들어선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의 현재 모습. 사진의 한가운데 보이는 벽돌형 건물이 원래 포로수용소 막사가 있던 자리이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이나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내려 굴다리를 통해 경부선 철길의 서편 청파동 방향으로 나가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 1946년 8월 17일에 신광여자기예초급중학교로 설립 인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다. 정식 명칭으로는 ‘조선부로수용소(朝鮮俘虜收容所, 1942년 7월 5일 개설)’이며, ‘부로’는 ‘포로’와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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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2년 2월 16일자에 전면 보도된 ‘싱가포르 함락’ 관련 내용이다. 이 당시 무조건 항복에 따라 다수의 영국군과 호주군이 포로가 되면서 이것이 식민지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전투현장도 아니고 일본 본토도 아닌 곳에 난데없이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이었다. 태평양전쟁의 확전 초기 단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거쳐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때 10만여 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력이 대거 포로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42년 2월 20일자에 수록된 「오늘은 포로수용소, 소남도(昭南島, 쇼난토) 동방 ‘쟝기’ 요새시찰기」 제하의 현지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함락 직후 포로수용소로 변한 ‘창이요새’에 이미 영국 본토군 1만 3천 명과 호주군 1만 5천 명이 이곳에 억류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나오는 ‘소남도’는 “소화(昭和, 쇼와) 시대에 획득한 남쪽 섬”이라는 뜻을 담아 일본식으로 작명한 ‘싱가포르’의 새 지명이다.
이 당시 일본군은 이른바 ‘남방전선(南方前線)’에서 포로의 숫자가 20여 만 명 남짓으로 급증하게 되자 1942년 1월 14일에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선통사(善通寺, 젠츠우지) 포로수용소를 개설하여 적국 고위장교 위주로 이곳에 배치한 것을 시작으로 상하이와 홍콩에도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일본 오사카와 도쿄, 그리고 조선, 대만(臺灣, 타이완), 태(泰, 타이), 마래(馬來, 말레이), 비도(比島, 필리핀), 과와(瓜哇, 자바), 보르네오 등지에도 속속 포로수용소가 추가되었다.
그런데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데에는 단순히 과다한 연합군 포로의 인력을 분산하려는 목적만이 아니라 여기에도 일본제국의 남다른 저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선 1942년 2월 28일에 조선군참모장 다카하시 타이라(高橋坦, 육군소장)가 육군차관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郞, 육군중장)에게 보낸 ‘포로수용’에 관한 전문(電文) 내용을 보면, “반도인(半島人, 조선인)의 영미숭경관념(英米崇敬觀念)을 일소하고 필승의 신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매우 유효하므로 …… 영미부로(英米俘虜) 각 1천 명을 조선에 수용하고 싶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42년 3월 23일에 조선군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육군대장)가 육군대신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육군대장)에게 보낸 ‘조선군부로수용계획(朝鮮軍俘虜收容計畫)’ 제하의 전문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설치목적이 노골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미영인 부로(米英人 俘虜)를 조선 내에 수용하여 조선인에 대해 제국의 실력을 현실로 인식시키고자 함과 동시에 의연히 조선인 대부분이 내심 갖고 있는 구미숭배관념(歐美崇拜觀念)을 불식하기 위한 사상선전공작의 재료로 제공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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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성(陸軍省)에서 1942년 7월 5일부로 조선부로수용소가 경성부 청엽정 3정목(청파동 3가) 100번지에 설치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이 『일본제국관보』 1942년 11월 4일자 휘보(彙報)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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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옮겨온 연합군 포로들이 ‘조선부로수용소 본소’인 옛 이와무라제사소 공장터에 당도하는 장면을 담은 보도사진. (『통보』 제126호, 1942년 10월 15일자)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42년 8월 16일 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출발한 1천 명에 달하는 영국군 포로(호주군 100여 명 포함)가 3천 톤급 수송선 복해환(福海丸, 후쿠카이마루)을 타고 1942년 9월 24일에 부산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고, 그 다음날인 9월 25일 경부철도를 통해 용산역에 당도하여 삼각지와 용산경찰서 앞을 지나 최종 목적지인 ‘조선부로수용소 본소(本所)’에 안착하였다. 이 가운데 일부 포로들은 영등포역에서 분할되어 상인천역을 경유하여 인천에 있는 ‘조선부로수용소 분소(分所)’에 배치되었다.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설정된 곳은 원래 이와무라제사소(岩村製絲所)의 공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서울과 평양의 신학교 건물과 같은 곳을 포로수용소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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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로수용소 출신 호주군 병사 존 윌킨슨(John D. Wilkinson)이 남긴 『조선포로수용소에 관한 스케치(Sketches of a POW in Korea)』 (1945)에 수록된 ‘경성 캠프 약도’. 포로수용소 막사로 사용된 4층짜리 벽돌건물은 이와무라제사소의 공장 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지난 2011년 1월까지 잔존하였으나, 학교 건물신축공사 관계로 철거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조선총독부 식산국이 편찬하고 조선공업협회가 해마다 발행하는 <조선공장명부(朝鮮工場名簿)>라는 자료를 취합하면, 이 자리가 제사공장으로 사용된 것은 1930년에 가베상회(可部商會, 1927년 1월 창립)가 처음인 듯하다. 그러나 이 회사가 경영난으로 이내 부도 처리되면서 1932년 이후 미쓰이물산(三井物産) 계열의 동양제사 경성지장(東洋製絲 京城支場)으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이와무라제사소(1934년 10월 창립)로 탈바꿈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회사의 설립자는 함북 회령에 있는 유선탄광(遊仙炭鑛)의 주인 이와무라 쵸이치(岩村長市)인데, 이러한 탓인지 이 공간은 토목건축청부업과 목재제재업 등을 영위하는 이와무라구미(岩村組)의 경성출장소로도 함께 사용되었다. 그 후 이와무라제사소는 1940년 1월에 이르러 서울지역을 벗어나 원재료(누에고치) 조달이 용이한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공장을 옮겨감에 따라 이 자리는 빈 건물로 변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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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6월 1일자에는 서울 청파동에 있던 이와무라제사공장이 원재료인 누에고치가 풍부하게 확보되는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이전할 계획이라는 보도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잠깐 눈여겨 볼 대목은 포로수용소의 입지여건이다. 보통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다수의 군중과 격리된 오지를 선택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도시의 외곽지역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조선포로수용소는 이들의 모습이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도심지 인접지역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직접적인 접촉은 금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 연합군 포로들의 존재를 통해 일본제국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동시에 조선사람들에게 “서양사람들도 알고 보니 별 것 아니더라”는 식의 관념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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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함락 1주년’을 맞이하여 조선군사령부가 영국군 포로장교들을 강제동원하여 벌인 좌담회 내용이 『매일신보』 1943년 2월 15일자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황군(일본군)의 기동력이 빠른 데에 놀랐다”거나 “신속 과감한 기습에는 견디지 못했다”는 식의 굴욕적인 발언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전쟁수행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일조하도록 하겠다는 계략도 깔려 있었다. 실제로 이들 연합군포로들이 노역의 대상자로 적극 활용된 사례는 1943년 9월 함경남도 함흥에 흥남 캠프가 새로 설치되어 경성과 인천에서 선별된 230명의 포로들이 이곳에 재배치된 사실에서도 잘 확인된다. 이들은 흥남에 있는 조선질소비료 공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되었고, 이 인원은 추후 보충되어 총계 350명으로 증원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니는 연합군 포로들의 일상생활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의 부록으로 간행되던 ????통보(通報)???? 제129호(1942년 12월 1일자)에 수록된 「현지보고(12) 조선부로수용소」라는 제목의 탐방기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22쪽)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단벌옷의 나그네 차림으로, 풀이 죽어 정신없이 일동(一同)이 조선으로 보내져 온 것은 가을이 아직은 옅은 9월말이었다. 그리고 이곳 경성 청엽정(靑葉町, 청파동)의 ‘조선부로수용소’에서 그들의 제2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전부 남방(南方) ○○작전에서 살아남아, 시시각각으로 압박해오는 황군(皇軍, 일본군)의 포위철환(包圍鐵環) 아래 온갖 계책이 소진되어 죽음의 문턱을 앞두고 항복에 따라 목숨을 유지하게 된 광영의 ― 그 광영은 이미 낡고 또한 공허한 것이지만 ― 영국군인, 호주군인이다. 그로부터 2개월, 그 가을도 급격히 떨어져 저물어 어느 새 그 사이에는 흰 눈이 온 것을 보았다.
(23쪽) 그 면면은 영국병사, 호주병사 외에 프랑스병사, 카나다병사도 각 1명씩이 섞여 있고, 최고령은 카쥬 중좌(中佐)의 58세부터 최연소는 20세까지이다. 점심에는 빵을 먹고, 아침과 저녁은 일본식(日本食)인데, 이미 미소시루(味噌汁, 된장국)와 다꽝(澤庵, 단무지)의 맛에도 익숙해졌다. 소내(所內)는 장교를 제하고 10개 반으로 나뉘어져, 아침에는 7시에 기상하고 취침은 9시, 정연한 규율생활을 한다. 2개월 사이에 아침저녁 점호의 인원보고만큼은 완전히 일본어로 할 수 있게끔 되었다.
(24쪽) 아침 8시반, 그들은 희희낙락하게 대오를 갖춰, 교대로 황국총후(皇國銃後)의 생산작업에 참가하고자 수용소를 출발한다. 경성에는 시내 수개 소에 그들의 작업장이 있다. 각 곳의 작업장에서 그들은 묵묵히 작업에 힘쓰고 있다.
(25쪽)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 반도 동포가 부로황화(俘虜皇化)의 최일선에 있다. 이곳 작업장에는, 이날, 지난 6월에 모집에 응했던 임헌직(林憲直, 충남), 기본진원(杞本鎭月, 충남), 이부창인(李阜昌仁, 전남 제주도)의 세 사람이 있으며, 그들의 지도와 감시로서 정전(征戰)의 고귀한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의 말미에 조선인 포로감시원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일본제국이 조선인 청년들을 포로감시원으로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역시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 직후의 일이다. ????매일신보???? 1942년 5월 23일에 수록된 「반도인 청년의 광영, 미영인 포로감시원에 대량 채용」 제하의 기사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나열하고 있다.

 

반도인으로 하여금 명실이 같은 황국신민으로서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자가 되게 하고자 명후년부터 징병제도를 실시한다는 발표에 조선산천이 기쁨과 감격에 가득 차 있는 때 22일에도 다시 대동아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의하여 남방 각지에 포로가 되어 있는 미국, 영국 사람을 감시하는 무거운 임무를 조선 청년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였다는 공표가 있어 반도청년의 기쁨을 절정까지 폭발시키고 있다. 육군당국에서 이와 같이 중요한 일을 반도청년에가 맡기게 된 것은 그들이 황국신민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결과로서 조선의 큰 영예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 걸음 나아가 생각할 때 포로를 감시한다는 것은 거만하기 짝이 없어 동양 사람은 사람으로 알지 않든 미국과 영국 사람을 지킨다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실로 그들로 하여금 반도인의 일본국민으로서의 우수함을 인식케 하여 마음으로부터 일본제국에 대하여 존경하는 정신을 갖게 하는데 있는 만큼 그 일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며 (하략)

 

30

『매일신보』 1943년 3월 1일자에 수록된 「조선에 온 부로(포로)」 개봉안내 광고문. 안석영(安夕影)이 감독 편집한(조선군사령부 지도, 조선영화 제작 배급) 이 영화는 연합군 포로와 더불어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활약을 담고 있는데, “귀축미영의 초라해진 패잔의 생생한 모습을 보라”는 선전문구만으로도 제작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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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포로감시원 모집에 관한 구라시게 조선군 보도부장의 담화를 담고 있는 『매일신보』 1942년 5월 24일자 보도내용.

 

이와 함께 이 당시 포로감시원의 채용대상으로는 21세에서 30세 사이의 국민학교 졸업자로 정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두 달 가량의 훈련과 더불어 군속(軍屬)의 신분으로 현지에 파견한다는 방침이 공표되었다. 다만, 이때 함경남북과 평안남북을 포함하는 서북선 지방 거주자는 인력동원대상에서 특별히 배제하였는데, 이 지역은 지하자원개발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많은 사람이 소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당시 조선군 보도부장 구라시게는 “특히 특별지원병을 지망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은 자나 장래의 비약을 기하여 구미인(歐米人)을 연구하려는 열의를 가진 청년은 절호한 이 기회이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희망하는 바이다”라는 취지로 포로감시원 지원 모집을 부추긴 바 있었다. 이때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청년들이 포로감시원으로 선발되어 동남아 일대의 포로수용소로 배치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애꿎게도’ 일본의 패망 이후 포로학대와 가혹행위를 이유로 BC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사형 판결을 받거나 징역형에 처해진 일도 있었다.

금, 2018/09/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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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露(백로)

 

衆人嘆酷暑(중인탄혹서)

可識忽秋臨(가식홀추림)

促織哀鳴夜(촉직애명야)

思鄕獨醉吟(사향독취음)

 

白露에

 

많은 사람 심한 더위 탄식했는데

문득 가을이 왔음을 가히 알겠네

귀뚜라미 찌르르 구슬피 우는 밤

고향을 그리며 홀로 취해 읊는다.

 

<時調로 改譯>

 

酷暑를 탄식했는데 문득 가을이 왔네

귀뚜라미 찌르르르 구슬프게 우는 밤

고향을 그리워하며 홀로 취해 읊는다.

 

*白露: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하나.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에 들며

9월  8일경이다.  또는 ‘이슬’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  *衆人: 뭇사람 *酷暑: 몹시

심한 더위 *促織: 실솔(蟋蟀). 청렬(蜻蛚). 귀뚜라미  *哀鳴: 새나 짐승, 벌레 따

위가 슬프게 욺. 또는 그런 소리 *思鄕: 망향(望鄕). 고향을  그리워하며 생각함.

 

<2018.9.8, 이우식 지음>

토, 2018/09/0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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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실수로 입금했습니다. 명단에서 삭제좀 부탁드립니다.

2013년 부정선거 주장때부터 주사파들에게 악용당하면서 피해를 많이 본 이석훈이라고 합니다.

실수로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하였습니다. 명단에서 삭제좀 부탁드립니다. 문자 메세지도 그만 주시길 바랍니다.

이석훈  010-4335-7501     [email protected]      790812-1######

월, 2018/09/1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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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news&write_id=2502

안녕하세요?
위의 사이트는 모 교회의 계시판입니다.
건국 100주년이 아니다.
이승만은 배드로다.
등등 참 힘든 역사관으로 교인들이 힘들어 합니다.

최근에는 김문수 전 경기지사까지 동원해서 몇개월간 계속 힘든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을 보시고 제발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합니다.

o 대한민국의 위기와 기독교의 역할_건국 70주년의 의미

2018년 9월 16일(일요일)에는 다시 김문수 전 지사를 초청하여 2시간에 걸쳐 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들으려고 합니다.

이 강연에서는 좌파와 우파의 차이, 좌파의 근본 문제점, 좌파 탈출 경험, 좌파 정책의 필연적 실패 등에 대해 김문수 전 지사가 체험하여 느끼고 본 대로 진술하려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사랑침례교회 서창동 캠퍼스로 오셔서 같이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시: 2018년 9월 16일 오후 3시
강사: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강연 제목: 나의 좌파 체험 및 탈출기

o 이병태 교수: 문재인 정부 1년_한국 경제는 왜 위기인가? 최저 임금 소득 주도 성장의 허구

o 이춘근 박사: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건국과 부국강병 2부_박정희 시대의 국제 정세

o 김철홍 교수: 나는 어떻게 좌파를 버렸나?_공산주의 주사파 이해, 좌파 탈출

o 전교조의 실체와 학교 교육의 문제 1부_전교조의 정체 및 사상

o 홍지수 작가: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 1부_정치적 금기어(PC)의 정의 및 계보, 마르크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전 세계 좌경화

일, 2018/09/1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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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읽던 도중 철도순직자조혼비에 대해 알게되어서 여기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철도순직자 조혼비에 관한 정보를 더 들을 수 있을까해서 글 남겨 봅니다.

추가적으로 기사에서 조혼비 설명해주시던 이순우 소장님께 연락이 닿아서 몇가지 질문하고 싶은게 있는데 이메일을 알아갈 수 있을지 글 남겨봅니다.

일, 2018/09/1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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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勸人君國家朝餐祈禱會不參

 

衆嘲祈禱會(중조기도회)

忽欲使君知(홀욕사군지)

孰語耶蘇國(숙어야소국)

愚民起大疑(우민기대의)

 

삼가 나라님께 국가 朝餐 기도회 不參을 권하오

 

많은 이가 朝餐 기도회 조롱하니

문득 나라님이 알도록 하고 싶소

그 누가 예수의 나라라 말합니까

못난 백성은 큰 의심을 일으키오.

 

<時調로 改譯>

 

많은 이 조롱하니 나라님 아셔야겠소

예수의 나라라고 그 뉘라서 말합니까

마침내 못난 백성은 大疑를 일으키오.

 

*人君: 임금. 나라님 *朝餐: 손님을 초대하여 함께 먹는 아침 식사 *耶蘇: ‘예수’

音譯語 *愚民: 우맹(愚氓). 어리석은 백성 *大疑: 크게 의심함. 의심이나 의혹.

 

<2018.9.17, 이우식 지음>

월, 2018/09/1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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嘆世態(탄세태)

 

愚夫論國事(우부논국사)

雜漢說儒經(잡한설유경)

牧者錢蟲化(목자전충화)

山僧尙未醒(산승상미성)

 

세태를 탄식하며

 

어리석은 남자가 나라의 일 논하고

잡스런 놈이 儒家의 경전을 說하네

牧者는 그만 돈벌레 되고 말았으며

山僧은 아직도 술에서 못 깨어났네.

 

<時調로 改譯>

 

愚夫가 國事 논하고 잡놈이 儒經 설하네

예수 믿는 목사님은 錢蟲 되고 말았으며

산속의 저 스님 또한 아직도 未醒이라네.

 

*愚夫: 어리석은 남자 *國事: 나라에 관한 . 나라 정치에 관한 일. 나랏일 *雜漢:

잡놈 *儒經: 유서(儒書). 유가서(儒家書). 유가(儒家)에서 쓰는, 유학에 관한 책.

 

<2018.9.18, 이우식 지음>

화, 2018/09/18-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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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전진 도상에는 여전히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고, 역풍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과 남이 서로 손을 맞잡고 뜻과 힘을 합쳐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때 길은 열릴 것이며, 우리 스스로 주인이 되는 새로운 시대는 흔들림을 모르고 더욱 힘 있게 전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소중한 자산입니다

목, 2018/09/2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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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9/21-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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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9/21-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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