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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쓰바시 대학에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초청 강연회와 좌담회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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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쓰바시 대학에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초청 강연회와 좌담회 열려

익명 (미확인) | 목, 2019/01/24- 11:35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명예이사장)는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学) 초청으로 12월 12일~16일 일본 도쿄를 방문했다.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한국학 연구센터 설립 2주년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초청 방문으로 신용옥, 조세열 상임이사가 수행하였다. 일정은 12일 출국, 13일 강덕상 전 히토쓰바시 대학 교수 자택 방문, 14일 강연회, 15일 강덕상 교수와의 좌담회, 16일 귀국 순으로 이루어졌다. 강덕상 교수는 재일사학자로서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과 일제의 조선인 학병동원 등을 연구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와는 초창기부터 지도위원을 맡은 인연이 있다.
강 교수는 12월 14일 히토쓰바시대학 국제연구관에 열린 ‘나의 인생과 역사학-분단시대에서 미래를 여는 역사로’ 강연회에서 조선사회 정체후진성론을 주장한 후쿠다 도쿠조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백남운의 사제 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를 연구하게 된 계기, 사회경제사에서 변혁운동사로 연구 지평을 넓혀가게 되는 과정 등 그간의 연구 역정을 소개했고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시아 평화 구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전망했다.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강만길 교수와 강덕상 교수의 ‘한반도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다-역사연구의 과거·현재·미래’ 좌담회가 송연옥 아오야마 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명예교수의 사회로 열렸다. 강덕상 교수는 강만길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을 들고 나와 자신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준 책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두 강 교수는 자본주의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과 관련한 역사인식 문제와 한국 및 동아시아의 근대 이행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강연회와 좌담회에는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생들이 참석했는데, 한국 유학생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이 많았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우리역사를 공부하는 입장, 향후 진로 문제 등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는 질의가 있었는데 그 가슴 뭉클한 사연이 청중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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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광복회, 반민특위 습격일에 경찰청장 사과 요구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6월 6일 오후 3시, 1949년 6월 6일 당시 친일경찰이 자행한 반민특 위 습격 사건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반민특위 유족과 광복회원, 일반시민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졌다. 또한 당시 습격의 책임을 지
고 현 민갑룡 경찰청장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해 4월 3일 서울 광화
문광장에서 열린 제71주년 4‧3 광화문 추념식에 참석, 경찰총수로서는 처음으로 “무고하게 희
생된 분들께 사죄드린다”는 뜻을 밝혔으며 올해 5월 12일에도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경찰
의 지난날을 반성 한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이날 행사는 중부경찰서 앞 가로수에 리본달기를 시작으로 김원웅 광복회장의 대회사, 송영길 의원의 인사말, 임헌영 소장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의 연대사, 구호제창 순으로 마무리됐다. 김원웅 회장은 “71년 전 오늘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폭란의 날’로써 가슴 아프고 슬픈 날이었다.
이 날로부터 이 나라는 ‘친일파의, 친일파에 의한,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며, “광복회는 올해부터 이 날을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하고, 매년 이 날을 애상(哀傷)의 날로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임헌영 소장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모든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반민법을 무력화시킨 데서 비롯됐다. 물론, 그 명령자는 이승만이지만 친일경찰들이 대세를 이루어 반민특위를 무장 습격한 경찰의 수치스런 과거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며, “아직도 과연 경찰이 과거의 미망에서 깨어났는지 각성하는 계기를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화, 2020/06/2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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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20년도 1차 사원총회 열려

코로나 19 감염증으로 연기를 거듭했던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사원총회가 5월 30일 오후 4시 30분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렸다.
여건이 나아지지 않았지만 현안 처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회의에는 법정회원 정수 49명 중 26명이 참석하였으며, 2019년도 결산을 승인하고 2019년 12월〜2020년 4월 기간 입금된 기부금사용 승인 신청안건도 통과시켰다. 2019년 사업성과와 2020년 사업계획에 대한 보고와 검토도 진행됐다.
임기 만료된 함세웅 임헌영 윤경로 이사와 최수전 감사의 연임안도 승인되었으며, 지난 3월 18일 별세한 이이화 선생 후임으로 한상권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전 덕성여대 교수)를 신임이사로 보선했다. 이어 개정 정관에 의거해 1차로 이민우 운영위원장을 비롯해 권위상 김순흥 김희원 박동규 이순옥 조승현 운영위원을 선출하고 운영위원회 세칙안을 검토했다. 한편 올해 전국회원대회와 수련회는 안전상의 문제 때문에 개최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회원대회 보고서는 별도로 발송할 예정이다.

화, 2020/06/2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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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2)

조선·동아 전쟁범죄의 민낯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언론은 ‘표현의 자유’를 기본 정신으로 성장한다. 자유는 언론이 성장하기 위한 토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권력의 억압적 성격에 저항하는 언론의 속성으로 상당한 순기능을 우리 사회에 가져다준다. 그러나 반대로, 권력의 위치에 선 언론이 행하는 ‘표현의 자유’는 국가의 이름하에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장치로 변질된다. 여기에 심각하게 경도된 언론들은 특히 전쟁이나 사변 같은 사태에 민중을 선동하면서 중대한 인권범죄를 합리화하거나 폭력과 증오의 ‘표현의 자유’를 외치기도 한다.
국제인권규약은 전쟁선동, 선전 등에 대한 언론의 자유에 분명한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 제20조에 따르면 전쟁을 위한 어떠한 선전도 법률에 의하여 금지되며, 차별이나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만한 증오의 고취 또한 금지된다. 물론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생한 국제적 선언으로 그보다 이전의 사례에 일방적으로 적용하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같은 규약은 존재 자체로 언론의 전쟁부역 행위가 얼마만큼 심각한 폐해를 끼쳤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이재승 교수는 규약 제20조가 “특정한 유형의 표현들이 갖는 파괴적인 성격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언론이 앞장서 민중을 전쟁의 참상 속으로 이끈 사례는 우리 역사에도 적지 않다. 특히 여기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이어진 일제의 침략전쟁 시기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보인 ‘전범언론’으로서의 면모들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이는 한글신문 100년 역사를 자화자찬하기에 앞서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분명한 ‘상흔’이고 어둠이다. 물론 이들이 전쟁부역언론으로 존재한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3년 남짓한 짧은 시기에 불과하지만, 그 보도들은 전쟁이라는 극도의 사회적 불안에 떨었을 조선 민중을 달래고 전쟁의 양상을 투명하게 보도하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앞장서 전쟁을 선전하고 전쟁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일본국민들의 입장에서 게재하라
두 신문은 과연 어떤 입장에서 전쟁보도를 시작했을까? 조선일보는 올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한 〈간추린 조선일보 100년사 – 민족과 함께 한 세기〉에서 중일전쟁과 그 이후의 보도경향을 “강요당한 친일지면”으로 정리했다. 말하자면, 총독부가 자신들의 보도태도를 ‘친일적’ 으로 바꾸려 압박했고 그에 따른 <언문신문지면개선사항>,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 과 같은 “총독부의 모진 탄압”이 더해져 “획일화된 지면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한층 강화된 언론통제책을 써서 언로(言路)를 막으려 한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총독부는 1936년 8월 발생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언론통제를 강화하게 된다.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를 무기한 정간조치 했고, 이듬해 1937년 일본 황실기사 취급방침과 총독부 시정방침에 대한 보도 강화 등을 지시하는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 18개항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와 같은 총독부의 압박이 본격적으로 가해지기도 전에 ‘스스로’ 굴종을 자처하고 나섰다. 연구소가 찾아낸 경성종로경찰서 비밀문서 4466호, <조선일보의 비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은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주필 서춘, 편집국장 김형원, 영업국장 김광수 등은 조선총독부의 언론사 대표자 소집, 협조요청이 있기 전인 1937년 7월 11일, 이미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친일적’ 편집방침을 확고히 결정했다.

 

<조선일보의 비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1938.5.24,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이 문건에는 조선일보 간부진의 회의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7월 11일 회의를 통해 기사를 일본국민의 입장에서 게재하도록 결정했다.

 

당시 회의에서는 중일전쟁이 막 시작되던 시류를 일본적 입장에서 반영하여, “일본군, 중국 장개석 씨” 등의 용어를 “아군·황군, 지나 장개석” 등으로 고치고 논설은 “일본국민으로서의 입장에서 게재”할 것에 대해 논의했다. 특히 사장 방응모는 회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동아일보는 일장기 마크 1개 문제로 수십 만 엔의 손해를 입지 않았는가. 또 민중을 1919년처럼 지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려 편집방향에 반대하던 김형원·김광수를 굴복시켰다. 이에 제2회차 호외부터 “일본국민의 태도”로써 편집하기로 했다.
동아일보의 실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일제에 복종을 다짐하는 청원서와 서약서를 제출하고 ‘사고(社告)’까지 특필함으로써 본격적인 부역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조선총독부 미츠하시(三橋孝一郞) 경무국장은 동아일보 정간 해지 담화에서 동아일보가 “총독정치에 익찬(翼贊)할 것을 선서”하였고 “일본제국의 신문지로서 진(眞)사명에 매진할 것을 서약”하였다고 평가했다.(「동아일보 발행 정지 처분의 해제에 이른 경과」, 1937)

 

전쟁선전의 서막 ‘무력철퇴를 가해야’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 발생 이후 전선이 상해로 확대되어 감에 따라 두 신문도 본격적인 전쟁 선전의 구호를 지면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 이들의 보도는 일제가 도발한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일본군을 “아군(我軍)” 또는 “황군(皇軍)”으로 내면화시키고 있었다.
1937년 7월 16일 동아일보는 조선신궁에서 거행된 기원제 보도에서 “황군”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며 전쟁선전의 막을 올렸다. 이어 8월 20일 사설을 통해 “황군은 드디어 화평해결의 희망을 방기하고 전단을 개시했다”며 스스로의 입장을 사설에 담기 시작했다.
바로 3일 뒤인 8월 23일에는 조선일보가 “지나응징”의 구호를 사설에 게재하며 선전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는 당시 일본 육군에서 슬로건처럼 유행했던 “폭려지나응징(暴戾支那膺懲)1”과 상응하는 어투의 사설이기도 했다. 더불어 조선일보는 중국정부에 “자진하야 전비(前非)를 깨닫는 날까지 무력철퇴를 가하는 것이 즉, 응징의 유일한 목적”이라며 호전적 논조로 일제의 입장을 대변했다.
일본군이 침략의 전선을 확대하는 동안 수시로 날아온 ‘일본동맹통신발’ 전황보도를 두 신문은 별다른 수정이나 검토 없이 지면을 할애해 실었다. 조선, 동아는 일본 동맹통신사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일제의 전쟁선전에 일본 통신사들이 적극 활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면 조선, 동아의 ‘받아쓰기’는 침략전쟁을 널리 퍼트리는 ‘확성기’나 다름없었다.
두 신문의 전쟁보도 경쟁이 극에 달한 것은 1937년 12월 중순, 난징침략 때였다. 이 12월을 기점으로 조선일보가 보도한 난징 관련 기사는 무려 161건, 동아일보는 109건에 이른다. 전쟁 사진 또한 ‘남경함락화보’, ‘사변화보’ 등의 제목으로 수시로 보도되었다. 특히 난징 ‘함락’ 하루 전인 12월 12일자 조선일보 석간에는 ‘남경함락축하행사’를 주제로 한 기사가 특필되기도 했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일본군의 승리가 “충용한 황군장병의 우월”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내세우면서 이 전쟁이 중국 국민의 “배일환상(排日幻想)”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켰다는 등의 논리로 일본 정부의 침략의도를 완전히 대변했다.
한편, 동아일보는 12월 12일 사설에 일장기까지 함께 게재했다. 통상 게재되지 않았던 일장기 이미지를 ‘난징함락’을 기념하며 조간 2면 1단에 특별 삽입한 것이다. 사설은 일본 정부가 “군사행동의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장기전을 불사”해야 한다고 적으면서 난징 내에서 진행되고 있던 시가전에 대해 “숙청(肅淸)공작도 시간문제”라며 전투적 논조를 사용했다.


1 인도(人道)에서 벗어난 모질고 사나운 중국을 혼낸다는 뜻

 

조선일보 1937년 12월 12일 석간 2면
해당 기사는 “오직 앞으로 남은 문제는 아직도 성중에 머물러 있어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시내잔적의 소탕이 있을 뿐이다”라는 평가와 함께 난징함락이 “전국적으로 국민환호의 대상”이 되어 축제가 전 조선적으로 진행됨을 자축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난징 침략 후 참혹한 시가전이 일어났던 시기에 보도된 기사들은 더욱 자극적이었다. 12월14일 동아일보는 동맹통신의 기사를 인용, “격렬한 백주시가전 혈(血), 시(屍), 규환(叫喚)에 충만”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는 “적병 최후의 절규가 들”린다는 표현과 함께 “대일장기(大日章旗)는 욱광(旭光)을 받으면서 번양하고 있”는 풍경을 지극히 ‘일본적’ 입장에서 표현해내고 있었다. 참고로 이 보도는 난징대학살이 일어났던 시기(12월 13일~15일)에 게재됐다. 난징 대학살과 이 보도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증유의 대학살이 일어났던 시기에 ‘피와 시체, 규환’으로 넘쳐나던 전장을 그 어떠한 문제의식과 인도적 양심 없이 보도했다는 것에서 분명한 비판점이 있어 보인다.

 

전쟁, 그리고 ‘만들어 낸 영웅’
두 신문의 전쟁부역은 단순히 전황보도에만 그치지 않았다. 1938년 일제가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고 조선인의 병력 동원에 나서자 조선, 동아일보는 지원병제도를 선전하는 기획기사, 사설, 사진보도를 연이어 작성했다. 각 지역별 지원병 실적을 경쟁적으로 발굴, 보도했다. 신문 1면의 대부분이 지원병 특집 기사로 구성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들은 조선청년의 ‘지원열’을 선전하기 위해 각종 미담사례를 발굴해 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9년 ‘이인석 상등병 영웅화 보도’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 제1기생으로 동원된 이인석은 1939년 6월 중국 산서전선에서 전사했다. 조선인 지원병으로는 최초의 전사자였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이인석의 전사소식이 전해진 즉시 “영예의 전사”라는 수식어를 달며 미화했다. 이에 질세라 동아일보는 바로 이튿날 이인석의 가정방문 기사를 실었다.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겨있을, 부인의 소감을 어떻게라도 싣겠다며 고인의 자택을 찾아가는 ‘위문’을 감행한 것이다.
나아가 두 신문은 이인석 상등병의 고별식, 위령제 등이 행해지는 현장을 찾아가 이인석 상등병의 유가족들을 상대로 ‘셔터’를 눌렀다. 유가족들의 “애수”와 전사의 명예로움을 더해주는 기사를 쓰기 위함이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1939년 10월 석간 2면 기사 “색연필”을 통해 이인석 상등병의 죽음이 “조선 사람에게 몇 갑절의 열매를 맺게 할” “고마운 주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두 신문이 동원된 조선청년에 대한 추모보다는 일제를 위한 전사자의 현창(顯彰)에 초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39년 7월 9일 조간 2면. 동아일보 대전지국이 故 이인석 상등병의 가정을 방문, 미망인을 만난 내용을 담은 기사

 

조선일보 1939년 10월 1일 석간 2면. 위령제 관련 기사에서 보도된 이인석 상등병의 양친과 부인(가운데)

 

두 신문의 이인석 영웅화 보도는 조선, 동아 폐간 직전인 1940년까지 이어졌다. 지원병 제도의 성과를 올리고 지원을 부추기는데 이인석 상등병의 전사를 인용한 것은 물론, 이인석 상등병을 소재로 한 음악극(나니와부시)까지 만들어진 당시 상황에 편승해 적극적인 홍보기사까지 신문에 싣기도 했다.

 

100년 세월에도 부재한 ‘반성’
일제의 침략전쟁에 부역했던 이 시기들은 조선, 동아일보 입장에서도 분명 지우고 싶은 과거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올해 100주년을 기념한 사설에서 중일전쟁 이후 자신들의 과오를 그저 “100년 비바람을 버텨온 나무에 남은 크고 작은 상흔”이라며 뜬구름 잡는 논평을 남겼다. 또 “일제강압과 신문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이 오점으로 남아 있다”고도 평가했다. 그나마 동아일보가 이번 100주년을 맞이해, 일제 침략시기의 언론부역에 대한 ‘사과’를 표명한 것은 나름의 진전 같아 보인다. 물론 그조차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압박으로 저들의 요구가 반영된 지면이 제작”되었다고 에둘러 변명하였기에 그 진정성이 완전하다고 하긴 어렵다.

일제강압과 신문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이 대체 왜 그 같이 현란한 전쟁부역으로 나타났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같은 논평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일제강점기가 조선일보에 있어 ‘크고 작은 상흔’이었다면 조선일보의 전쟁선전에 상처 입은 민중들의 아픔은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신문을 반성과 성찰의 시험대에 올리는 것이다.

 

▪ 참고문헌
최상원 외, 「1937년 일본군의 중국 난징 점령 관련 한국언론의 보도태도」. <지역과커뮤니케이션> 14, 2010.2
박용규, 「일제의 지배정책에 대한 신문들의 논조 변화」, <한국언론정보학보> 2005.5
장신, 「1930년대 언론의 상업화와 조선동아일보의 선택」, 역사비평, 2005.2
조선일보사, <간추린 조선일보 100년사 – 민족과 함께 한 세기>, 2020
이재승, 「증오적 표현과 역사의 부정」, 국회 토론회 <올바른 기억확립을 위한 법률 제정을 위한 토론회>, 2007.5.16.

화, 2020/06/2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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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김세형 매일경제 고문이 6월 9일자 매경닷컴에 게재한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라는 칼럼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하여 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의 신뢰를 크게 손상시켰다. 즉 칼럼에서 “일개 시민단체가 정치권의 보수・진보의 합의도 없이 입맛대로 정하다보니” “만해 한용운, 춘원 이광수까지 모조리 친일 명단에 들어가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 등등 〈친일인명사전〉 발간 취지나 수록자 선정기준, 사전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 허위 사실을 기사화했던 것이다. 연구소는 이러한 허위 왜곡보도를 바로잡고자 6월 18일에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했다. 이어서 7월 2일과 15일 두 차례의 조정심리를 가졌는데 2차 심리기일에 처음 출석한 매경닷컴측은 연구소의 입장을 전면 수용하였다. 이에 언론중재위원회는 ‘반론보도’ 형식으로 김세형 칼럼 하단에 다음 문구를 영구적으로 게재하도록 결정했다.
연구소는 앞으로도 〈친일인명사전〉과 연구소를 허위 비방하거나 음해하는 세력과 언론매체
에 강력히 대응할 방침이다.


 

본 신문(매경닷컴)은 지난 6월9일 게재한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김세형 칼럼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했습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은 국민성금으로 학계를 망라한 180여명의 교수 연구자들이 8년간의 지난한 작업 끝에 이뤄낸 소중한 성과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의 객관성 공정성은 학계가 공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법부의 판결에서도 여러 차례 입증된 바 있습니다. 나아가 보수 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정부기관에서도 공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는 데서 그 엄밀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 칼럼에서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고 허위의 사실을 서술하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는 등 근거 없는 내용을 기재하여 친일인명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신뢰도를 크게 손상하였습니다. 이에 본 칼럼에서 위 내용을 삭제하고, 친일인명사전의 선정기준을 수록합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 국세현 회원사업부팀장

월, 2020/07/27-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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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3)

부역언론의 ‘산파’, 두 사주(社主)의 민낯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하시 고이치로(三橋孝一郞)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를 자기 관사로 불렀다. 조선일보의 경영에 관한 내용을 청취하고 총독부의 ‘언문신문’ 관리 의향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최고의 실세 중 하나였던 미하시와 방응모의 만남을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諺文新聞統制ニ關スル件)」이라는 극비문서로 자세히 기록했다. 이 문서에 ‘협의(協議)’로 정의된 둘의 만남은 이날부터 무려 10차에 걸쳐 이어졌다. 
12월 22일 첫 번째 만남에서 방응모는 먼저 이렇게 고백했다.

“신문사업을 경영한 지 6년여에 그 실비(失費)가 많아서 곤란함에 빠져 오히려 교육 기타 사회사업 등의 문화 사업으로 전환하기를 희망한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자진’ 폐간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미하시는 반색했다. 2차대전 발발 등으로 어수선한 정국을 ‘언론통폐합’을 통해 다잡으려 했던 조선총독부의 모략을 언론사 사주(社主)가 스스로 나서 도와주는 셈이었다. 미하시는 실제로도 이 같은 방응모의 제안이 고마웠던지 통제방침에 잘 응하면, 방응모의 희망에 대해서도 “상당한 고려를 할 수 있다”며 선심을 썼다. 이에 방응모 또한 “그 뜻이 크게 움직”였다고 문서는 적고 있다.
12월 24일 두 번째 만남, 이틀 전의 면담을 통해 조선총독부가 협상에 응할 여지가 있음을 포착한 방응모는 이날부터 본격적인 사업상의 조건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기에 이른다. 당시 방응모가 총독부에 희망한 조건은 아래와 같다.

 


 

① 동아일보도 함께 처분될 것
② 본사 발행의 3종(조광·여성·소년) 출판물은 계속 간행될 수 있게 할 것
③ 폐간 당일까지 본 협의에 응하는 것에 대해서는 외부에 대해 극비에 부쳐질 것
④ 종업원의 취직·전직의 알선 및 수당 지급에 유감이 없게 할 것
⑤ 건물을 포괄 약 100만 원 정도로 양도하는 데 차질이 없게 할 것
⑥ 장래 교육 또는 사회사업 방면에 활동하고자 희망함에 대해 원조해 줄 것

 


 

정리하자면 경쟁 언론사를 제거하고, 조선일보의 바통을 이어받을 출판사업은 유지하며, 새 사업으로의 진출과, 총독부의 원조 보상금 등을 충분히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자기네들은 사업은 유지하면서 경쟁사는 제거해버리는, 치밀한 ‘이면공작’이다. 방응모는 총독부의 약속을 토대로 조선일보의 출판부를 따로 독립시켜 ‘주식회사 조광사’를 발족시킬 수 있었다(1940.4). 즉, 조선일보의 중요한 알맹이는 살아남은 것이다. 잡지 <조광>은 원색적 친일과 전쟁선동의 논조를 유지하며 한글 신문과 잡지가 폐간당한 상황에서도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살아남는다.
세 번째 만남인 12월 28일, 방응모는 마침내 자신의 요구사항이 대부분 반영된 각서를 조인한다. 폐간계 제출은 이 같은 협상이 일단락된 뒤 이뤄졌다. 조선일보의 폐간은 사실상 사주 방응모의 자발적 의지로 결정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와 방응모의 협상은 10차에 걸쳐 계속됐고 이어진 협상과정에서도 폐간에 저항 따윈 없었다. 그저 폐간의 형식을 만들고 각종 이권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확답을 받아내는데 진력했을 뿐이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조선일보와 중요한 협상안들을 마무리한지 한 달여 지난 시점에서야 동아일보와 첫 협상이 시작됐다.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에 따르면 동아일보가 “(폐간에) 응하는 기색이 없”었다는 총독부 당국의 평가와 경무국장이 사장 백관수, 고문 송진우를 불러 ‘권설(勸說)’했다는 내용 등이 적시되어 있다. 조선일보와의 ‘협상’ 기록에 비해서는 대조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폐간’이라는 총독부의 극단적 조치를 대하는 두 신문사의 태도는 다소 달랐다. 그러나 두 신문은 이미 총독부 기관지와 다름없는 논조의 기사와 일본 동맹통신사로부터 제공받은 전쟁 보도 기사들로 지면을 도배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선‧동아 두 언론사가 총독부의 언론통제 방침에 충실했음에도 1940년 언론통폐합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전황이 복잡해지고 장기화되는 국면에서 총독부는 <매일신보>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두 한글신문의 활용가치를 더 이상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돈, 돈, 돈 … 퇴직사원들은 절망으로

이런 경과를 통해 두 신문은 1940년 8월 11일자 석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20년의 사사(社史)를 잠시 마감한다. 조동 100년사에 남긴 두 언론의 공백, 즉 ‘폐간기’는 해방 전까지 약 5년정도 지속된다.(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1945년 11월 23일, 12월 1일에 복간을 선언했다)
물론 유력한 자본가였던 방응모와 김성수에게 ‘폐간’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정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20년간 실질적으로 신문사를 떠받치며 저널리즘의 현장에서 고생한 사원, 배달부들로 이들은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조선, 동아일보는 사원들에게 <매일신보>한테 받은 영업권 보상금에다 회사 차원에서 자금을 더 증액하여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는 2년간의 봉급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조선일보는 1년간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3년 이상 근무한 사원에게 법정퇴직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의 실상은 참담했다. 불만이 쌓인 사원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결국 조선총독부가 관련 사안을 진상조사하기에 이른다. 경기도경찰부가 경무국장 앞으로 작성한 보고서 「폐간 양언문지의 사원 퇴직금 지급상황에 관한 건(廢刊 兩諺文紙ノ社員退職金 支給狀況ニ關スル件)」에는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 현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350명의 사원들에게 총 23만 2,891원을, 동아일보는 303명의 사원에게 37만 968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일단 총액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발생한다
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퇴직금 지급율이 가장 저조한 계층은 배달원으로 조선일보는 배달원에게 ‘평균 6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가 배달원에게 평균 734원의 퇴직금을 지급한 것에 비추어 보면 122배의 차이가 발생했다. 사원, 준사원, 공장종사원에게 지급한 평균액 또한 그 차이가 뚜렷하다. 1,473원의 동아일보 평균 지급액에 비해 조선일보의 평균 지급액은 801원에 불과해 여기서도 2배 가까운 차이가 발생한다. 다만, 퇴직금의 최고 지급액은 조선일보가 9,617원으로 동아일보 7,614원에 비해 높았는데 이 9,617원의 최고액을 가져간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사장인 방응모였다.

 

 

조선일보의 퇴직금 문제를 조사한 경기도경찰부는 “조선일보사의 지급율은 전자(동아일보)에 대해 비교도 안될 만큼 소액”이며 “양사의 차이가 너무나도 심하여 조선일보사원의 불평은 무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어 조선일보 사원들이 “방응모에 면회를 구하여 하등의 구제책을 요구”했으나 방응모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야말로 사주의, 사주에 의한, 사주를 위한 퇴직금 행정이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양사의 사주, 전쟁의 나팔수로 변신하다

신문이 폐간되고 사원들이 퇴직금 문제로 허덕이는 사이 김성수와 방응모 두 사주들 또한 분주했다. 바로 전쟁부역의 ‘나팔수’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진작부터 다양한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전쟁협력 관변단체에 참여했으며 시국강좌, 기사, 방송 등을 통해 전쟁 선동의 일익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폐간 이후에도 이들의 활동들은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교육자를 자처했던 김성수의 학병지원강요 행적은 충격적이다. 김성수는 1943년 10월 조선에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자신이 맡고 있던 보성전문학교의 지원율을 높이기 위해 각종 활동에 나섰다. 그는 자신이 교장을 맡고 있는 보성전문학교의 학병 지원 실적이 신통치 않자 직접 조회에 나서 학생들을 설득하는가 하면 교내에 조선군 논객 ‘에가미(江上守彦)’ 중좌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학병지원병 독려를 위한 교장회의, 좌담회에 참여하고 지원을 호소하는 글도 여럿 기고했다. 그 결과 보성전문은 학병지원을 강요하는 집회를 가장 많이 개최한 학교가 되어버렸다.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석간 1면에 실린 김성수의 대표적인 친일논설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다른 학교 학생들에 비해 일제의 전시정책에 비협조적인 경향을 보인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이 같은 ‘교장’ 김성수의 전쟁선동 행위는 상당한 혼돈을 주었다.
실제로 학병지원 마감시점인 11월 17일, 보성전문의 학병 지원율은 53.6%에 불과했다. 가장 많은 선전활동을 했음에도 학생들의 지원율이 저조하자 김성수는 “한명이라도 지원에서 빠지는 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징용”되어야 한다는 모진 발언으로 학생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희생과 죽음을 강요하면서 거부하는 학생들의 의지를 ‘문약(文弱)’이라며 폄훼하기도 했다.
한편, 방응모는 일본 육해군의 ‘응원단장’과 같은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1933년에 이미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제16호)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한 바 있다.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한 직후의 일이었다. 조선총독부와의 거래에 밝았던 방응모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적극적인 전쟁부역 행위에 나섰다. 1937년부터 경성군사후원연맹, 경성부지원병후원회,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 이사 등으로 참여했으며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감사역을 맡기도 했다. 일제의 진주만 기습을 찬양하는가 하면, “일억국민의 총궐기”를 부르짖으며 침략전쟁에 감정적으로도 동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조선, 동아일보는 사라졌지만 사주들의 친일행각은 폐간 뒤에도 계속됐다. 아니, 신문을 통한 친일행위가 사라진 만큼 더욱 열심히 부역에 매진한 듯도 보인다. 특히 방응모는 조선일보의 후신인<조광>을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 청년들에게 징병을 권유하는 논설과 문예물로 채워 완전한 친일잡지로 거듭났다.

 

민족을 배반한 한 세기. 반성 없인 영광도 없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양사의 사주 방응모와 김성수는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언론재벌이 된 그 후손들은 2010년 당당하게 국가를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럼에도 방응모는 2012년에, 김성수 2018년에 반민족행위자로 최종 확정되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부역행위에 대한 반성은커녕 민족의 수난기를 함께 한 역사를 부각하며 ‘민족지’로서의 미화를 창간 100년이 된 이 시점에도 거듭하고 있다.
이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역사퇴행적 행태들을 볼 때마다 나치 부역언론을 단죄했던 프랑스의 사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한 언론인 개개인에 대한 숙청뿐만 아니라 언론사 자체에 대한 단죄도 강력하게 진행했다. 나치에 협력한 주류 언론은 모두 폐간되었으며 그들이 사용한 모든 시설과 공간 등 재산도 몰수하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항을 지속해온 〈콩바〉, 〈데팡스 드 라 프랑스〉 등 지하언론이 사용하도록 조치됐다.
‘어쩔 수 없었다’ 식의 변명을 일삼던 언론인들도 가차 없이 심판을 받았다. 한 예로 나치독일을 미화한 일간지 〈르마텡〉의 편집국장 로잔은 (조선, 동아의 사주들처럼) “압력에 못 이겨”라는 변명으로 일관했지만 프랑스 재판부는 “독일 선전상 괴벨스의 품에 결국 안겼다”고 질타하면서 로잔에게 2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프랑스 나치청산에 대해 천착해온 주섭일은 “이 같은 (청산)과정들이 프랑스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자유와 사회정의, 인권이 참되게 존중받는 민주국가 건설에 이정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렇듯 엄정했던 프랑스의 청산사례들과 우리 역사의 청산과제들을 비교해 볼 때면 ‘한발 늦었다’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동아 100년을 맞은 지금 더욱 절실하게 언론개혁을 외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취지에서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마련했다. 3회에 걸친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의 연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은 오는 8월 11일 열리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기획전과 연계한 특강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도 함께 진행되니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 참고문헌
박용규,
「일제 말기(1937~1945)의 언론통제정책과 언론구조변동」, 한국언론학보, 2009
장신, 「일제말기 김성수의 친일 행적과 변호론 비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09
주섭일,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연대, 2004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1~3, 민족문제연구소, 2009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보유편>, 2017

월, 2020/07/27-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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