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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독립운동가 이화림 지사의 삶을 복원하여 알리고 있는 박경철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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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독립운동가 이화림 지사의 삶을 복원하여 알리고 있는 박경철 회원

익명 (미확인) | 목, 2019/01/24- 13:40

인터뷰

잊혀진 독립운동가 이화림 지사의 삶을 복원하여 알리고 있는 박경철 회원

인터뷰 조한성 출판팀장

 

독립운동가의 삶을 새롭게 발굴하고 알리는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실한 작업이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들 가운데 대부분은 제대로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역사 속에 잊혀져버린 분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이 작업의 주체가 역사가냐 아니냐의 여부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잊혀진 역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중요할 뿐이다.
충남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는 박경철 회원은 농업·농촌·농민문제, 즉 3농문제 전문가이지만, 한인애국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에 참여해 큰 역할을 하셨던 이화림 지사의 회고록을 발굴하여 잊혀진 독립운동가의 삶을 복원하였다.
충남연구원에 찾아가 이화림 지사의 자서전 <정도征途>를 번역해 <이화림 회고록>으로 펴낸 박경철 회원을 만났다. 인터뷰에는 임무성 교육위원도 함께 했다.

문 : 어떻게 이화림 지사를 알게 되셨나요?
답 : 중국 베이징대학 유학 당시 한국유학생 연구생회 활동을 하면서 타이항산 역사탐방을 추진해서 4차례 정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 이화림 지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유학 가기 전부터 윤세주 열사나 조선의용군이 활동했던 옌안 지역은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BS 특집 다큐멘터리 10부작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를 본것이 그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연구생회에서 뜻이 잘 맞았던 후배 정원식과 함께 역사탐방을 추진했는데요. 당시 베이징대학에 방문학자로 와 있던 서울시립대학 염인호 교수의 소개로 윤세주 열사의 후손과 연락이 닿게 되었고, 그분을 통해 ‘석정윤세주열사기념사업회’와 연결되었습니다. 또 개인사업을 하시면서 기념사업회 일도 도와주시던 김영민 선생도 이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영민 선생이 윤세주 열사와 함께 활동하신 분 중에 이화림이라는 분이 있다고 말씀해주시면서, 이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서전을 남기셨다고 하는데, 윤세주 열사의 외종손인 윤명화, 윤명순 할머니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 안타까워하고 계시다
는 거예요. 이 얘기를 듣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자서전을 찾아봤습니다. 제가 박사논문을 쓰고 있었던 때인데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중고서점에 들어갔다가 이화림 선생의 자서전 <정도征途>를 발견하였습니다. 얼른 그 책을 주문해서 받았는데 그때 온몸에 흘렀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왜 이 책이 나에게 오게 되었을까. 뭔가 특별한 인연이 작용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문 : 번역은 언제 시작하신 건가요?
답 : 그때는 먼저 천천히 정독했구요. 박사논문을 다 쓰고 학위를 받아서 한국에 돌아온 후에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도중에 번역을 좀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 생겼어요. 이 책이 번역되기를 기다리시는 윤명화, 윤명순 할머니의 연세도 너무 고령이셔서 마음도 급했구요. 그래서 타이항산 탐방을 같이 했던 김선경 후배와 함께 번역해서 <이화림 회고록>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문 : 회고록을 보면 이화림 지사나 가족이 3·1운동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하신 것 같아요?
답 : 네. 맞습니다. 먼저 3·1운동 당시 이화림 지사의 오빠들이 굉장히 열심히 활동했어요.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전단지를 인쇄해서 뿌리기도 했구요. 그 과정에서 소학교 학생이던 이화림 지사도 오빠들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1995년 8월 요녕민족출판사가 출간한 <정도>와 한글 번역판 <이화림 회고록>

이화림 지사나 오빠들이 3·1운동에 열심히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 듯 해요.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숭현소학교에서 일하셨는데, 상당히 민족의식이 강하셨어요. 구들장에 태극기를 숨겨놓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식들에게 그걸 보여주면서 잊지 말라고 하셨다고 해요.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다보니 경찰들의 압박이 심해졌다는 거구요. 오빠들은 체포될 위험에 처하자 만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후 독립군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그 후론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문 : 이화림 지사는 언제 중국으로 망명하셨나요?
답 : 이화림 지사는 당시 나이도 어렸고 공부도 계속해야 해서 어머니와 함께 국내에 남았어요.

1938년 중경 시절의 이화림 지사

 

이화림 지사는 숭현소학교와 숭의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로 일하면서 ‘역사문학연구회’라는 독서클럽에 가입했어요. 그곳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저서들을 처음 접합니다. 그후 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는데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얼마 후 이화림 지사는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오빠들이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북지역으로 떠나는데 오빠들이 있는 곳을 찾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김문국의 소개로 김두봉 선생을 찾
아 상해로 갑니다.
그런데 김두봉 선생이 말하길, 독립운동은 김구 선생에게 가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해요. 그래서 김두봉 선생의 소개를 통해 김구 선생을 찾아갔는데 김구 선생이 이렇게 물어요.
“너의 조국은 어디인가?” 이 질문에 이화림 지사는 “나의 조국은 조선이고 평양에서 자랐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김구 선생은 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이화림 지사는 김구 선생의 비서 역할을 하며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활동합니다. 이화림 지사는 이봉창 의사가 일본에 거사하러 갈 때 폭탄을 넣어갈 속옷 고쟁이에 주머니를 만드는 일도 했구요. 윤봉길 의사의 거사 때에는 윤봉길 의사와 일본인 부부로 위장해 홍커우공원을 미리 정탐하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화림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들어가 활동한 바로 이것이 이화림 지사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독립운동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화림 지사가 이렇게까지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김구기념사업회나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쪽에서는 이화림 지사의 한인애국단 활동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 같아요. 이화림 회고록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역사학계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이 부분에 대하여 연구해주셨으면 합니다.

문 : 이후 이화림 지사는 김구 선생과 헤어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에서 일하게 되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답 : 이화림 지사가 김구 선생과 헤어지게 되는 과정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에요. 한인애국단은 일본의 추격을 피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화림 지사도 그 과정에서 자연히 김구 선생과 헤어지게 된 거죠. 이화림 지사는 광저우로 피신하는데 거기서 유학생이었던 김창국이라는 분을 만나 결혼하고 아들도 낳게 되요. 그런데 이때 조선민족혁명당의 지도자 윤세주가 광저우에 와서 유학생들에게 연설합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나서달라는 것이었죠. 이화림 지사는 그
연설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반성도 하게 된 것 같아요. 독립운동을 하려고 국경을 넘어놓고 지금은 유학생과 결혼해서 애기를 낳고 평범한 삶의 행복을 누리려고 했으니까요. 이화림 지사는 고민 끝에 남편과 아들을 남겨두고 민족혁명당이 있는 난징으로 떠납니다. 이화림 지사는 민족혁명당 부녀국에서 박차정 지사와 함께 열심히 활동하게 됩니다.
사실 윤세주의 후손 분들이 생전에 이화림 지사에게 연락하고, 자서전을 찾으려고 노력한 이유는 여기에 있어요. 윤세주 열사 때문에 이화림 지사가 개인의 행복한 삶을 버리고 힘든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게 됐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윤세주 열사의 마음의 빚을 그 후손 분들이 나누고 계신 거지요.
1942년 5월 일본군 수십만이 팔로군을 섬멸하기 위해 타이항산지구로 쳐들어왔던 유명한 타이항산 전투에서 조선의용군은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팔로군 주력부대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길을 여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전투에서 윤세주, 진광화 열사가 전사하게 되는데요. 이 전투에서 이화림 지사는 중산대학에 다니던 시절부터 배워왔던 의술을 발휘해서 부상자 치료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화림지사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시절 가장 빛나는 활약은 바로 이것이
라고 할 수 있죠.

문 : 이화림 지사의 해방 후 활동은 어떠했나요?
답 : 이화림 지사는 옌안에서 해방을 맞습니다. 해방 후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북진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중국 내전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이화림 지사는 당시 무정 장군의 권유로 옌안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무정 장군이 이화림 지사는 옌안에 남아서 의학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해줍니다. 이화림 지사는 1947년 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옌볜에 있는 중국의과대학 제1분교에서 근무합니다.
그러던 중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이화림 지사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해 북한으로 들어옵니다. 그곳에서 의무병으로 부상자 치료에 전념했구요. 그러나 미군의 폭격으로 다리를 다쳐 다시 랴오닝성 선양으로 복귀합니다. 이화림 지사는 부상 치료 후 다시 북한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부상이 너무 심해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맙니다. 그 후 이화림 지사는 중국에서 의사로 주어진 직무에 최선을 다합니다. 1955년에는 교통부 위생처 기술과장으로 일했고, 옌볜조선족자치주 위생국 부국장, 국장, 옌볜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 당대표 등을 역임합니다.
이화림 지사는 1984년 퇴직하는데, 그동안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 1만 2천 위안을 옌볜아동문학상기금회에 기부합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놓고 왔던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아동단체에 대한 기부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문 : 평생 독립운동을 위해 싸우셨는데, 해방 후 활동이 정당한 평가를 가로막고 있군요.
답 : 네. 그렇습니다. 중국인민지원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서훈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의 독립운동, 사회주의자의 독립운동에 대한 서훈을 어디까지 할 것이냐의 문제인데요. 이화림 지사의 서훈이 이 문제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 같아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 하더라도 이분이 기본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의사였다는 점에서 좀 더 전향적인 검토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근 MBC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와 관련해 이화림 지사를 취재해 갔는데요. 그런 관심이 좀 더 널리 퍼져서 서훈 문제도 잘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문 : 이화림 지사에 대해 여쭙느라고 정작 선생님에 대한 질문은 못했습니다. 현재 하고 계신 일에 대해서 소개해주시고, 올해의 계획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답 : 저는 최근 몇 년 동안 농민수당, 농민기본소득에 관해 연구해서 전국에 알리고 중앙정부부터 지방까지 이 정책이 채택되고 추진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농민기본소득이란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주자는 것 인데요. 현재 농민들의 소득은 도시 농촌 간에도 차이가 크지만 농민 간에도 소득차가 큰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농사 규모와 상관없이 모든 농민에게 농민기본소득을 보장해주자는 주장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다행히 지난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공론화되어 현재 해남, 강진, 부여 등지에서 농민수당을 도입한 상태이구요. 조만간 경기도에서도 이 제도를 도입할 예정입니다. 지난해에는 전국적으로 30여 차례 농민기본소득 강연을 하기도 했는데요. 올해도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그 외에 농촌의 사회문제, 복지, 개발문제도 연구하고 충청남도와 중국과의 교류 활성화 문제도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올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아름다운 공주의 풍경을 뒤로 하고 박경철 회원과 인터뷰를 마쳤다. 역사가 왜 연구와 실천이라는 두 개의 바퀴로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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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시민역사강좌 열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민간연계 시민대학에 3년 연속으로 선정되어 시민역사강좌를 개최하였다. 6월 29일부터 9월 14일까지 3개월 간 진행되는 시민역사강좌는 ‘프로그램Ⅰ: 내일을 여는 선언-우리시대 표상이 된 가치들과 그 역사’ 5꼭지와 ‘프로그램Ⅱ: 한일역사부정론의 궤변’ 5꼭지로 구성되며,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강의장에서 온라인 ZOOM
화상강좌로 진행하고 있다. 수강생은 일반 시민과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2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 분포를 보인다.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강의지만 꾸준하게 매주 30여 명이 참여하여 시민강좌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프로그램Ⅰ은 노동, 여성, 난민, 동물생명권, 지역을 주제로 한국현대사에서 변혁을 위해 외쳐진 각 분야의 선언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시대가 현재 지향하고 있는 다음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8월 17일부터 진행할 프로그램Ⅱ의 기획 의도는 현재의 일본과 한국에서 나타나는 역사부정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자행된 강제동원의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을 이열치열로 이겨내려는 참여자들의 열기는 우리 사회현상의 변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시민사회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실천적 움직임으로 승화하고 있다.

화, 2021/07/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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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강제동원증언전 개막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피해자들의 목소리로 일본의 산업유산 시설이 지워버린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증언’하는 기획전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가 7월 16일(금)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이번 전시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공동으로 주최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시작하는 날에 맞춰 개막한 이 전시회는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통해 일본에 ‘전체 역사를 알게 하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이행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있다. 전시는 크게 2부로 나눠진다. 먼저 제1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에서는 ▲‘가라면 가는 거지’ – 식민지 조선 청년의 강제동원 실상 ▲‘갇혀서 일하는 신세야’ – 강제노동 현장의 일상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 반인권적인 처우와 사건·사고 ▲‘다 같은 노예 신세였어’ – 중국인 피해자와 연합군 포로의 강제노동 실태 등이 피해자들의 증언영상을 중심으로 전시된다. 이 같은 증언영상들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20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채록」 사업(민족문제연구소 수행)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2004년 출범) 조사활동 ▲강제동원피해자 소송운동 ▲일본 시민단체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과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의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을 통해 확보된 것들이다.

 

특히 하시마 강제동원 피해자인 서정우 씨, 이경운·이지창 씨의 증언영상과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강제노동실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료들이다. 수십 년간 이 문제에 천착해온 일본 시민단체 POW연구회와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의 협력으로 공개가 가능했다. 제2부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에서는 유네스코 일본 산업유산의 등재 논란과 현재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산업유산정보센터의 문제점을 다루었다. 특히, 제2부는 2015년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독일 본에서 일본 산업유산 전시(戰時) 강제노동의 어두운 역사를 세계유산위원들에게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민족문제연구소 주최·주관)의 확장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에 폴란드 아우슈비츠수용소, 독일 푈클링겐 제철소 등과 같은 ‘부정적 세계유산Negative Heritage)’이 어떤 방식으로 후대에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를 소개하면서 일본 산업유산의 역사부정 실태를 꼬집는다. 
아울러 연구소는 이날 전시 개막과 함께 강제동원의 전체 역사를 전시하도록 촉구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안을 지지하고 일본 정부의 충실한 이행을 촉구하는 한일 시민단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같은 활동들은 일본 산업유산 현장에서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 등에게 가해진 전시 강제노동의 역사를 알리는 온라인 한일시민연대공동행동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캠페인 및 이벤트가 기획·추진될 예정으로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

수, 2021/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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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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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집는 듯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1년 365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구곡을 끊어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간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 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區) 안에 있다.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당시 코뮨 때에 희생된 5천여 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 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1927년 국민당의 쿠데타로 공산당이 궤멸되고 또한 반군벌 반봉건세력이 무너질 때 조국의 독립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중국인민은 그들 나름대로 지방군벌이 득세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 한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국민당의 배신으로 멀어져간 조국독립에의 꿈이 광저우 봉기의 시발점이었다.
그즈음 나는 김산의 광동에서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행을 하는 중에 있었다. 1927년의 김산 역시 이곳 기의(起義)에 참가를 하였었다. 그들은 장개석 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광저우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잠시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점령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장개석 군대와 진형명 군대가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간 150여 명의 조선인 동포들을 ‘물에 녹은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피해 층계를 내려와 찾은 곳은 팔각정자였다. 왠지 빗소리에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던 음악소리가 연못을 지나갈 때는 더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왼쪽) 조우원용과 천티엔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오른쪽) 혈제헌원 정자

연못가의 녹음으로 가려진 곳이 음악소리의 발원지였다. 소리는 울부짖듯 한꺼번에 내딛다가, 흐느낄 듯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듯 하고 다시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흐르는 곡조의 유장함이 더해지고 종국에는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내는 소리로 마감되었다.
조우원용(周文雍)과 천티엔쥰(陳鐵軍)의 죽은 시신은 그렇게 양쪽의 연못에 버려지고 묻혔다. 1927년 11월, 남창(南昌) 봉기에 이어 광저우에서 봉기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나중에 봉기의 주모자들을 체포할 때 이들도 잡힌 것이다. 봉기가 실패한 결과는 5천여 명의 목숨이 조선에서 온젊은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조우원용 23세 그리고 천티엔쥰 24세, 그들은 처형되기 직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의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기념한 정자(血祭軒轅亭)는 1957년에 세워졌다. 연못은 당시의 처형장이었으니 이곳에서 죽어간 것이다. 끝간 데 없이 허공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는 사실은 그때 죽은 사람들과 조우원용 그리고 천티엔쥰의 진혼곡이었음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자 곁에 세워진 그 두 사람의 동상. 약간은 머리를 숙인 듯, 조우원용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천티엔쥰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호수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커다란 정자는 봉기에 참여한 150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4년 전, 나라가 망하고 설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젊음들이 해왔던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대학가는 뒤숭숭하였다. 그러다가 5월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끌려가고 실종되었으며 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은 한때 은행직원이었다. 영어도 유창했던 그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같이 야학을 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하였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혁명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피와 땀을 요구하였다. 절망과도 같은 삶을 개선해 보고자 죽음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부르고 잊지 못한다. 선각자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명들이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꽃처럼 사라져 갔는가. 여기에서 ‘물속의 소금’ 그리고 ‘봄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이념과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편 혈제헌원정의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그리고 광주의 윤상원과 박기순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남겨져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 모두는 이름을 남기건 남기지 못했건 모두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누군가 이곳 정자를 낀 연못을 돌 때 들리는 노랫가락이 진혼가임을 안다면 한줌의 꽃이라도 그들을 위해 뿌려주지 않겠는가,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윤상원과 박기순 그리고 남의 나라 혁명에 가담하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조선의 젊은 혼들에게.

토, 2021/08/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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