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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다·만·세 100년,“빨갱이란 비난까지 받았지만, 역사 바로잡기 멈출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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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다·만·세 100년,“빨갱이란 비난까지 받았지만, 역사 바로잡기 멈출 수 없어”

익명 (미확인) | 토, 2019/01/1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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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부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 당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email protected]

준비 과정부터 18년 걸친 대장정
시민들 자발적 모금이 큰 원동력

친일파에 대한 엄격한 기준 정하고
편찬위원들 지인까지 수록했는데
편파적이라는 비판에 동의 못해

특정한 사람 매도할 의도 없어
지도층 사람들이 행동을 할 때
훗날 받을 평가 신경쓰도록 영향

해외와 지방의 친일파 조사 미비
여건 좋지 않지만 개정판 준비 중

역사학자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71)은 2002년부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편찬작업이 한창이던 2005년 어느 날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을 비난하는 신문 형식의 전단이 대량 살포돼 있었던 것이다. 한 강연회에서 한·미 공조와 더불어 민족공조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 ‘친북적’이라는 억지 주장이었다. “거기에 도표가 나오는데 강만길 선생-한완상 전 부총리-나 이런 식으로 무슨 간첩단 사건처럼 만들어 놓았더라고요.” 당시는 편찬위원장을 맡아 일부 보수세력으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일부 교회 사람들이 연세가 아흔이 넘은 장모님에게 ‘당신 사위 빨갱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은 멈출 수 없었다. “1949년 친일 경찰의 습격으로 와해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잇는 작업”이자 “역사정의를 위해 반드시 정리하고 가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의 음해와 소송전을 극복하고 2009년 11월8일 친일파 4389명이 담긴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됐다.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발간기념식장 대관마저 취소되자,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효창원 애국선열 묘역으로 행사장을 옮겨 백범 김구 선생 영전에 사전을 헌정했다.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온 지 올해 10주년이 됐다. 윤 위원장을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났다.

– 사전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나.

“민족문제연구소가 1991년 출범한 후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친일 문제를 꼭 한번은 다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업을 계속해왔다. 준비 과정부터 따지자면 18년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그사이 정치적, 사회적 민주화가 진전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오욕의 역사’를 제대로 성찰해야 한다는 국민적 지지와 성원이 밑바탕이 되었다.”

– 시민 참여가 가장 큰 원동력인 건가.

“한 예로 2005년쯤 기초조사 사업차 5억원 정도가 정부예산으로 편성됐는데 당시 한나라당의 반대로 전액 삭감됐다. 이를 보도를 통해 알게 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순식간에 7억원이 모였다.”

– 왜 ‘사전’이라는 형태이고 명칭은 ‘친일인명사전’이었나.

“사전은 가치중립적이다. 객관성을 확보하려면 사전이 적합하다고 봤다. ‘친일파’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방공간을 거쳐 최근까지 널리 사용된 역사화된 용어다. 그대로 쓰자고 했다.”

– 객관성을 어떻게 담보했나.

“전문연구자 150명이 편찬위원을 맡았다. 180여명의 한국근대사 전공자들이 집필위원으로 참여했다. 1차 자료를 방대하게 조사했다. 친일파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정했다. 사전에 수록 예상자를 발표해 이의신청까지 받았다.”

– 주변의 우려도 많았을 것 같다.

“2002년부터 위원장을 맡았다. 2005년 한성대 총장 선거를 앞두고 보수적 교수사회에서 친일 청산에 앞장서는 게 총장이 되는 데 도움이 안된다는 우려도 많았다. 그러나 내가 총장이 안되더라도 이 일은 피할 수 없겠다는 것이었다. 역사를 공부하고 교수도 하고 총장도 했지만 역사학자로서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것이 평생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

– 일부 보수세력은 편파성을 물고 늘어졌다.

“사전을 편찬하면서 놀라기도 하고 마음이 아팠던 적도 많았다. 개인적으로 우리 문중에 친일한 사람이 많았다. 평소 존경하고 가까이 지낸 목사님의 아버지도 들어갔다. 안타깝긴 하지만 역사화는 개인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스승인 백철, 지도위원인 강만길 선생의 지도교수였던 신석호, 연구소의 정신적 지주인 임종국 선생의 부친인 임문호까지 사전에 올랐다. 이게 편파적인가.”

– 가장 논란이 된 인물은 누구였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내부에서도 갑론을박이 있었다. 위원장인 내가 최종 결정을 해야 했다. 당시 쟁점 중 하나가 ‘혈서’였다. 일제에 충성하는 혈서를 썼다는 얘기는 많이 돌아다녀도 막상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그 근거를 찾기 시작했고 결국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만주신문’ 1939년 3월31일자에 실린 박정희의 낯 뜨거운 만주군관학교 지원 혈서 기사를 찾아냈다. 박정희를 뺄 수 없었다.”

– 의외의 친일파도 있었나.

“장지연이 대표적이다. ‘시일야방성대곡’ 논설로 얼마나 애국자로 칭송받았나. 조사를 해보니 1910년 일제에 병합된 뒤 경남일보 주필 등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친일 시문을 기고했다.”

– 일부 보수세력은 색깔론, 공과론, 민족공범론으로 비난했다.

“자랑스러운 역사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역사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특정한 사람을 매도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역사가 엄중하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 발간 후 10년 동안 호응이 얼마나 있었나.

“최근까지 8쇄를 찍었고 1만1000질 정도가 나갔다. 처음에 출판 전문가들이 와서 사전은 어차피 많이 팔리는 종류가 아니니 초판 500질만 찍으라고 했다. 그런데 2000질이 순식간에 다 나갔다. 한 질이 30만원이다. 그런데도 초판 대부분을 개인 후원회원들이 구매했다. 집안의 가보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 사전이 10년간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나.

“ ‘무슨 행동을 하거나 발언할 때 훗날 어떻게 평가를 받을 것인가’하는 문제 인식이 커진 것 같다. 지도층 사람들이 앞으로 행동 하나, 발언 하나에 신경 쓰도록 만들게 된 것 같다.”

– 편찬 작업이 선생님에게 끼친 영향도 있는 건가.

“언제 한 인터뷰에서 좌우명을 묻길래 준비 없이 ‘역사학도로서 훗날 어떻게 내 행동과 발언이 평가받을 것인지를 생각하며 행동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신 앞에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려 노력한다’고 답변했다. 이후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됐다. 민족과 역사 앞에 행위가 바르지 않으면 결국 심판을 받는 것이다.”

– <친일인명사전> 작업은 지속되나.

“아직 미비한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해외와 지방의 친일파 조사가 그렇다. 여기에는 다수의 전문인력과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민간기구라 여건이 좋지 않지만 개정판 준비는 계속하고 있다.”

–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다.

“3·1운동을 ‘혁명’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이 된 사건이다. 그 혁명을 ‘민’이 주도했다. 이것마저 없었다면 우리 근대사를 어떻게 주체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갔던, 일제에 순응했던 사람들과 3·1운동으로 핍박받았던 사람들, 그 둘이 대비가 된다. 3·1운동에서 민이 들었던 횃불이 오늘날의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그 힘으로 <친일인명사전>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


[인터랙티브] 맹렬한 무장투쟁가, 아나키스트 역사가…나는 어떤 독립운동가였을까?

100년 전, 대한독립을 주창하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들었고 만세를 불렀고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평범한 이들에게 3·1운동은 삶의 전환점이 됐다. 독립운동가가 된 이들의 목표는 하나였지만, 택한 방법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만주에 정착해 무장투쟁단체를 조직했고, 누군가는 머나먼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았다. 이념과 노선도 민족주의를 기본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여성해방 등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같은 독립운동 안에서도 누군가는 맹렬한 무장투쟁가로, 누군가는 여성운동을 주도하는 대중운동가로 궤도를 달리했다. 만약 내가 독립운동가라면 그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내 선택과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는 누구였을지 알아보자.

▶ [인터랙티브]나는 어떤 독립운동가였을까? 링크 클릭이 안 될시 주소창에 http://news.khan.co.kr/kh_storytelling/2019/myact/ 를 입력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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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7/11/2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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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기자가 직접 동참해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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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쪽에서 카빈소총 탄피( 윗쪽 좌우 붉은 원안)가 발견됐다. 가운데 붉은 원안은 검정고무신의 잔해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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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 폐금광터 유해발굴 구역도 ⓒ 심규상

카메라와 취재수첩을 내려 놓았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B2 구역이다. 대나무 조각칼, 흙받이 등 개인 장비도 챙겼다.

천천히 호미질을 시작했다. 23일 오전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마을 뒷산 8부 능선. 이곳 폐금광터에서는 인근 마을에서 끌려온 주민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린 갓난아기까지 일가족이 끌려와 희생됐다는 증언도 많다. 1950년 인민군 점령 시기에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게 처형 이유였다.

유해 발굴 구덩이는 가로 10m, 세로 15m 크기다. 유해발굴단은 이 면적을 다시 7개 구역으로 나눴다. 유해발굴과 기록을 꼼꼼히 하기 위해서다. 기자가 자리한 B2 지역은 가로세로 3m 남짓으로 협소했다. 여기서 세 명이 자리를 잡았다.

끝날이 평평한 호미를 이용해 흙을 조금씩 긁어서 걷어내는 일이 시작됐다. 모인 흙은 양동이에 담아 따로 모은다. 양동이 흙 속에 혹여 유해가 섞여 있는지를 재확인하기 위해서다.

호미질을 시작한 지 15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앞 경사면 중간쯤에 푸른색 물체가 살짝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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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대 여성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치아(오른쪽)와 같은 희생자이 유품으로 보이는 옥비녀 ⓒ 심규상

“단장님! 단장님!”

기자가 박선주 유해발굴 단장을 급히 불렀다. 오전 10시께였다.

“옥비녀 같아요. 부녀자들이 쪽진 머리에 꽂던….”

온전히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조심조심 흙을 헤집었다. 부러져 있었지만, 옥비녀가 분명했다. 호미를 내려놓고 대나무 조각칼로 주변 흙을 조심스레 긁어나갔다. 비녀가 있던 한 뼘 아래쯤에서 하얀 물체가 보였다. 치아였다. 유해가 손상되지 않도록 신경 썼다. 간간이 골짜기 찬 바람이 몰아치는데도 등줄기에 땀이 배어 나왔다. 여러개의 치아가 가지런히 박힌 잇몸뼈와 턱뼈가 모습을 보였다.

박 단장이 치아를 유심히 살폈다.

“치아의 크기와 마모 정도로 볼 때 20대 여성으로 보이네요”

범위를 조금 넓혀 비녀가 나왔던 왼쪽 경사면 흙을 걷어냈다. 푸른 빛이 도는 탄피가 발견됐다. 당시 경찰이 두루 사용하던 카빈총 탄피였다. 학살이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의 지휘와 지시로 이뤄졌다는 증언을 뒷받침했다. 30여㎝ 떨어진 오른쪽 경사면에서도 같은 탄피가 추가 발견됐다. 옥비녀를 꽂은 20대 여성을 쏜 총탄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손끝이 떨렸다.

주변 좌우로 척추·갈비뼈, 엉덩뼈도 나타났다. 1시간 정도 작업을 이어가자 머리뼈도 보였다. 몸을 잔뜩 움츠린 상태에서 살해됐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검정 고무신 조각도 발견됐다. 박 단장은 “모두 20대 여성의 유해와 유품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이름 모를 20대 여성 희생자와 기자와의 67년만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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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모를 20대 여성 희생자와 기자와의 67년만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유해발굴을 하고 있는 기자. ⓒ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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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선주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장(오른쪽)과 발굴팀의 노용석 교수(영남대)가 드러난 희생자 유해를 들여다 보고 있다. ⓒ 심규상

주변 B1 구역에서도 유해가 무더기로 드러났다. 머리 형체가 뚜렷한 유해도 있었다. 폐광산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했다는 증언은 사실이었다. 유해와 함께 불에 탄 흔적도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 폐금광 안으로 연기를 피워 질식사시켰다는 또 다른 마을 주민의 증언도 나왔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원들이 끌고 온 사람들을 마을 방앗간에 가둬 놓았어. 어느 날 사람들을 금광으로 끌고 갔어. 한꺼번에 끌고 간게 아니라 수십 명 단위로…. 몇 명이었냐고? 암튼 셀 수도 없을 만큼 엄청 많았어. 금광이 일직선이 아니라 입구에서 곧바로 왼쪽으로 굽어 있었어. 사람들을 몰아넣고 총질을 해 죽었는데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불을 피워서 태우거나 동굴 안으로 연기를 피워 죽었어. 말도 마, 너무 끔찍해서….” (정윤섭, 80, 중리 3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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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1구역에서 발견된 희생자 유해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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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구역에서는 머리카락이 발견됐다. ⓒ 심규상

아산시에서만 부역 혐의로 80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중 이곳 폐금광에는 약 200~300명이 묻혀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산시와 시민단체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지난 22일부터 한 달간 일정으로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글: 심규상(djsim) 편집: 김시연(staright)

<2017-02-25>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옥비녀 꽂은 20대 여성 희생자, 67년 만에 빛을 보다

※관련 기사
연필 대신 ‘호미’ 들고 유해발굴에 나선 학생들 (2.24)

일본 대학생들,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현장서 자원봉사 (2.24)

유해발굴 지원한 복기왕 전 아산시장 “너무 늦어 죄송” (2.23)

“참담하게 학살됐다”, 유해 중 한 명은 6~7세 어린이 (2.22)

아산 설화산 암매장된 민간인희생자 유해 발굴한다 (1.31)

“어린애들이 뭔 죄라고..” 300명 유해암매장지 찾았다 (2017.11.19)

부역 혐의로 학살된 아산 주민 유해 햇볕 볼까 (2017.11.17)

화, 2018/02/2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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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만순변호사님

저는 Ids홀딩스 사기 피해자입니다

IDS홀딩스 김성훈은 1조원대 사기범이고 피해자가 1만2천명입니다

노후자금 전세금 노후연금등 피해자들은 자기에게 있어 소중한 자산을 사기당했고

현재 파산절차를 보면서 깊은 절망속에 있습니다

이 파산은 1만명의 동의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20여명이 신청하였고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써 김성훈에게 파산은 결코 용납할수

없습니다.

김성훈 파산이 이루어지면 동의하지 않은 피해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게 공평한 재산 나눔일까요

파산이 이루어지면 김성훈과 동조했던 이들이 월급이라며 받아가고

직급자들도 투자사실있으면 받아가고.. 현재 피해자별지에

누락된 피해자들은 또 법정싸움을 해야합니다.

피해자들 입장에서 생각해주십시요.

민족문제연구소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죄없다며 상고중에 있는 김성훈을 돕는 파산을멈춰주십시요

 

화, 2017/12/05-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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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5.24)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히스토리“안두희 응징 정의봉 박기서”
(5.22)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조선공산당 2편: 강달영과 6.10만세운동”
(5.17) ‘내역사’ 시즌2: 미식가“망국의 굴욕 헌상품”
(5.15)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조선공산당 1편_조선공산당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5.10)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 히스토리 “금기의 70년, 제주 4.3”
(5.08)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최초의 비밀결사 신민회 2편_데라우치 암살미수 사건”
(5.03) ‘내역사’ 시즌2: 미식가 경복궁 수난사 – ‘조선물산공진회’
(5.01)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최초의 비밀결사 신민회 1편_입헌공화국을 꿈꾸다”
(4.26)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 히스토리 “친일파가 그린 충무공 표준영정”
(4.19)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2회 “파이팅은 일제 잔재인가”
(4.17)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3회 임시정부와 3.1혁명 3편 – 임시정부는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나?”
(4.12)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히스토리 “경희대학교의 뿌리 신흥무관학교??”
(4.10)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2회 임시정부와 3.1혁명 2편 – 3.1혁명의 이름없는 영웅들”
(4.05)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1회 식목일의 기원
(4.03)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1회 임시정부와 3.1혁명 1편 – “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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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목, 2018/05/2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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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IDS 홀딩스의 피해자입니다.
Ids홀딩스는 2심에서 15년형을 받은 금융다단계로 37명이 목숨을 잃은 사기사건 입니다.

김성훈은 입으로만 피해자들한테 변제한다 변제한다를 외치고 있지만,
1년이상 긴 시간동안 피해자들에게는 단한푼도 변제 하지 않고,

구치소 안에서도 사기! 사기! 사기! 사기 생각만 하고 사는 쓰레기 입니다.

1년동안 쓰레기 변제안을 들이밀더니, 그 변제안 또한 감방동기와 함께 또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15년형을 받은 IDS 홀딩스 대표 김성훈의 파산은 부당합니다!!

이런 파렴치한 사기꾼이 파산을 하겠다네요.. 이게 말이 됩니까? 범죄자가 파산이라니요.
피해자들에게 변제는 생각지도 않고, 지금도 피해자들을 두번 세번 죽이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오늘도 1심에서 무죄를 받은 지점장들을 2심에서 유죄로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곳에 집중하기에도 모자른 이 시간에 김성훈의 파산을 막기 위해 또 생업을 뒤로하고 진정서와 시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성훈의 파산은 김성훈의 파산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책임을 져야 하는 공범자들.. 지점장과 본부장 모집책들도 파산 신청을 할겁니다.
그리고 사기를 진행 중인 많은 금융사기꾼들의 표본이 될것입니다.

소수의 피해자들과 파산을 진행중인 정만순 변호사님,
부디 부당한 파산으로 더이상의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해주세요.
IDS 홀딩스 사건 관련 내용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0&articleId=2569417

파산 반대 청와대 국민 청원 및 제안 :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45021?navigation=petitions

화, 2017/12/0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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