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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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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개벽

익명 (미확인) | 금, 2019/01/18- 11:40

1. 자생과 자각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연신 끄덕거리다 말미에 갸우뚱 물음표가 돋았습니다. 저 또한 메이지유신 150주년(2018)을 기해 일본에서 나온 서적들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문명개화’, 그간의 개화사 150년과는 다른 결의 서사가 가능할지, 그 가능성을 탐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동북지방의 안도 쇼에키까지 거슬러 올라 개벽의 단서를 찾는 것은 쉬이 수긍하기 힘듭니다.

‘당시의 사무라이 지배층을 “성인의 이름을 빌려 무위도식하는 도둑놈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하셨죠. ‘성인 중심의 지배질서를 정면으로 비판한 동아시아 최초의 사상가’라고 추키셨습니다. 글쎄요. 저로서는 문장의 들머리 ‘당시의 사무라이 지배층’이 더 도드라집니다. 18세기에도 여전히 일본은 무인이 다스리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유학적 소양으로 단련된 사대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조선, 월남이 구현했던 문치주의 유교국가와는 일선을 긋는 동아시아 문명의 주변부였죠. 최근에는 메이지유신이야말로 그 기저에 유교화=중국화=근대화의 동력이 작동했다는 독법마저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무라이에서 사대부로, 무사에서 문인관료로 지배층의 세련화(=文化)가 천년이나 가로 늦게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왕후장상의 씨를 따지지 않는 전통은 동아시아에서 제법 오랩니다. 씨갈이, 역성혁명이 거듭되어 천자를 갈아치웠습니다. 그럼에도 만세일계 천황이 존재한다는 점이야말로 일본의 예외성입니다. 즉슨 성인 중심의 유교문명을 비판했다 하여 ‘개벽파’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유학국가를 온전히 구현해본 적이 없는 일본서는 자칫 허수아비를 때리는 꼴입니다. 물론 중국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거리에 가득한 사람 모두가 성인이다.’ 하였던 15세기의 왕양명을 개벽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병한 사진2 수운 최제우(위키)
수운 최제우

개화파와 척사파의 갈림길, 그리고 개벽파의 새길 내기는 적어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는 19세기 이후의 사태입니다. 이른바 ‘서구의 충격’, 자본주의 세계체제와의 조우라는 역사적 맥락을 소거하면 개벽파의 독창성과 독보성을 도리어 제거해버리고 맙니다. 자칫 여기저기서 시시때때로 개벽파가 출몰할 수도 있습니다. 영성이 충만했던 서구의 중세가 개벽기도 아니며,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의 범신론적 사유를 개벽과 직접 결부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동학혁명이 그 이전의 숱한 민란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 또한 지배층에 대한 민중 반란이라는 흔하고 빤한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충격’이 촉발한 전대미문의 천하대란에 임하여 문명적 각성을 예리하게 품어내었던 것입니다. 개벽을 개벽답게 만드는 티핑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벽파의 역사성에 대한 적확한 인식은 엄밀한 용어 사용과도 직결됩니다. ‘토착적 근대’라는 말이 저는 여전히 말끔하지 않습니다. 내재적, 내발적, 자생적 이라는 수사 또한 깔끔치가 않습니다. 죄다 자족적인 개념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타를 나누고, 내/외를 가르는 발상입니다. 세계사 다시 쓰기, 소위 글로벌 히스토리는 서구적 근대조차 내발적이고 자생적이고 토착적이지 않았음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 계몽주의에도 아랍과의 교류, 아시아와의 교섭, 아프리카-아메리카와의 교역이 중요했음이 나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서구의 계몽주의에 ‘몽골의 충격’과 한문으로 쓰인 동방경전의 알파벳 번역이 있다하여 그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동학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토착적이고 내재적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세계적이어서 소중한 것입니다. 내발론의 강박이 18세기 조선에서 서구적 근대의 맹아를 억지로 추출해내는 실학 담론의 패착을 낳았음을 통렬하게 비판한 점이 <한국 근대의 탄생>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자폐적인 내발론과 자멸적인 외발론을 동시에 극복합시다. 선후(先後)를 따지기보다는 박후(薄厚)를 살펴봅시다.

13세기 몽골이 유라시아의 대일통을 이루었던 것처럼, 19세기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지구를 석권했습니다. 다만 그 편입과정에서 문명마다 나라마다 여러 갈래의 대응이 등장합니다. 한사코 거부했던 세력이 척사파입니다. 척사파의 양태는 중국에도, 인도에도, 심지어 서유럽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개념입니다. 반대편에서 무조건 수용코자 했던 세력이 개화파입니다. 이 또한 여러 나라 여러 문명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옛 것을 고수한 척사파와 새 것을 추수한 개화파의 충돌이 보/혁 갈등으로 치달았습니다.

‘제3의 길’도 있었습니다. 낯익은 전통을 타파하면서도 낯선 현실의 혁파 또한 겸장했던 개벽파입니다. 자기 고집도 자기 상실도 아닌 자기 혁신을 도모했습니다. 척사파가 무책임하고 개화파가 무절제했다면, 개벽파는 응시하고 응수하고 응전했습니다. 척사파가 시대의 물결에 조응하지 못하고 조선의 적자에서 적폐로 떠밀려갔다면, 개화파는 서세동점의 파고에 휘말리고 휩쓸려서 조선을 배반하고 매국의 독배를 들이키고 말았습니다. 척사파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면, 개화파는 깜빡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반면 개벽파는 반짝반짝 눈을 부릅떴습니다. 서늘한 눈으로 천하대세를 직시하고 빛나는 눈으로 나라다운 새 나라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각적 근대’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즉 근대 세계체제는 단일합니다. 다만 그 근대세계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의 차이로부터 학파와 정파가 분기합니다. ‘서구적 근대’라 해서 개화파 일색이 아닙니다. 그렇게 쓰인 서구사=개화사조차도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서구에도 척사파와 개화파와 개벽파가 길항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비서구적 근대’라고 하여 개벽파가 돌출했던 것도 아닙니다. 작위적인 지리적 구획을 복제하기보다는 사상적 지향에 방점을 두는 편이 이롭습니다. 제가 동학을 높이 치는 이유 또한 묵은 유학을 맹신하지도, 설은 서학을 맹목하지도 않은 탁월한 균형 감각 때문입니다. 구학을 답습하지도, 신학에 매몰되지도 않았습니다. 서구의 충격에 대한 가장 창발적이고 주체적인 응답(Response+Ability)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로 동학은 ‘자각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 개벽은 ‘자각의 탄성’이었습니다. 깨어나고 깨우치고 깨달아서 19세기의 유레카, ‘다시 개벽’을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개벽을 모르고서 한국의 근대를 논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말에 십분 공감합니다. ‘개벽을 누락한 한국의 근대에 관한 모든 논의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넌센스, 비상식과 몰상식이 판을 쳤습니다. 무식하고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근저에서 무심했습니다. 그 무심과 무지와 무식의 소산으로 쌓아올린 탑이 ‘실학’ 연구였습니다. 실학에서 동학으로의 회향, 개화에서 개벽으로의 회심을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헌판을 갈고 엎어 새판을 짭시다.

이병한 사진2 _인류세_ 전시 작품
인류세 전시작품(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의 대리석 채석장)

 

2. 서세동점에서 인류세로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애써 이틀을 썼던 문장을 싹둑 지워버렸습니다. “실학과 동학”으로 써내려갔던 내용을 통째로 덜어냈습니다. 지금 이곳은 수운회관 15층입니다. 1월 15일 오전 9시 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부쩍 창밖이 뿌옇습니다. 희뿌연 미세먼지가 시야를 온통 가립니다. 인왕산은 희미하고 청와대는 흐릿합니다. 왜 한국의 근대를 실학이 아니라 동학에서 구해야 하는지를 논하는 글이 어쩐지 한가해 보입니다. 갓 50일이 된 아들래미 얼굴이 떠올라 더더욱 답답해집니다. 개벽사 쓰기 또한 자칫 먹물의 고질병, 책상물림의 직업병일지 모른다는 노파심이 입니다. 현장감이 덜한 것입니다. 이번만큼은 에둘러 가지 않기로 합니다. 고준담론은 잠시 미루어두고 왜 또 다시 개벽인가, 돌직구를 던지기로 했습니다. 절박하고 절실하고 절절한 제 마음을 고스란히 옮겨봅니다.

거듭 강조컨대 더 이상 서구와 비서구를 나누기 힘듭니다. 20세기형 인문학의 낡은 관습일 뿐입니다. 북반구(선진국)과 남반구(후진국)를 쪼개기도 여의치 않습니다. 20세기형 사회과학의 후진 습관일 따름입니다. 저는 이제 20세기 후반을 풍미했던 제3세계론이나 세계체제론에서도 별다른 자극과 영감을 받지 못합니다. 동도와 서도를 견주고 서세에 동세를 맞세우는 것 또한 철지난 발상이라고 여깁니다. 목하 한치 앞도 가리어버린 저 기후변화는 동/서와 남/북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의 지구가 있을 뿐입니다. 그 둥근 지구, 하나의 하늘 아래 동서남북은 갈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온누리와 온생명과 한살림이 있을 뿐입니다. 동도(東道)와 서도(西道)의 소모적인 논쟁을 뒤로하고 천도(天道)와 대도(大道)와 일도(一道)를 탐구합니다. 세계체제론(World System)의 국가간 경쟁을 훌쩍 뛰어넘는 인류와 지구의 공진화, 지구체제론(Earth System)을 모색합니다.

한살림 선언(1989)과 <녹색평론>(1991)도 이제는 어쩐지 미진한 감이 듭니다. 언젠가부터 동어반복의 식상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생태학은 여전히 지상(地上)과 천하(天下) 사이에 주력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 사람의 길, 천지인의 근대화, 천인합일의 현대화를 천착합니다. 지하(지질학)와 천상(천문학)까지는 아우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활동이 지구의 물질대사는 물론이요 우주의 물질대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인류세’(Anthropocene)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 이미 오래인데도 혁신과 갱신에 게으릅니다. 인류사와 지구사가 합류하여 도달한 인류세(人類世)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상, ‘다시 개벽 2.0’을 갈구합니다.

생태적 사유는 한사코 인간의 능력을 축소시키려 듭니다. 포스트휴먼, 만물 가운데 하나로 강등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지구 위에 등장한 그 어떠한 생명도 지구와 우주의 행방에 영향을 미칠 만큼 능력을 확보하지는 못했습니다. 실로 획기적인 사태입니다. 가히 유례없는 사건입니다. 선천개벽 창세기(홀로세, Holocene)와 후천개벽 인류세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신의 뜻이나 자연의 법칙에 버금갈 만큼 인간의 역량이 증대된 것입니다. 45억년 지구사에서 처음으로 인류의 의지가 깃든 행동이 지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의지는 자연의 힘(force)과는 달리 억제되고 절제될 수도 있는 힘(power)이라는 점에서 절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즉 서구의 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여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인간 중심적이지 않아서 문제인 것입니다.

지구는 갈수록 인류의 이 집합적 의지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이 엄청난 힘의 행사 여부를 선택하는 인간의 마음가짐(=정신개벽)이야말로 인류를 고유한 생명체로 우뚝 서게 합니다. 지구를 변화시키는 인간의 고유한 힘이 절정에 치달은 바로 이 순간에 인류의 고유한 특성을 외면하는 생태론이 갑갑하고 어색한 까닭입니다. 포스트휴먼을 궁리할 것이 아니라 네오휴먼을 연마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신인간(新人間)=신인간(神人間)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경쾌한 유발 하라리를 따라 라틴어로는 호모 데우스(Homo Deus)라 하겠습니다. 묵직한 의암 손병희에 기대어 한자로 풀면 인내천(人乃天)이 가장 적절합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며, 사람이 즉 한울인 것입니다.

160년 전 노이무공(勞而無功), 아무리 노력해도 헛되었노라, 하늘의 탄식을 들은 이가 최제우입니다. 유학의 천인합일에서 동학의 천인합작으로 도약하는 비상한 순간이었습니다. 하늘과 인간이 합작하는 인류세의 비전을 이미 내장하고 있던 것입니다. 제가 1848년 <공산당선언>이 20세기를 추동했다면, 1860년 <동경대전>은 21세기를 격동시킬 것이라고 호언하고 다니는 연유입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턱없이 모자란 발상입니다. 만인과 만물이 얽히고 섥히는 21세기, 경천(敬天)과 경물(敬物)과 경인(敬人)의 삼경사상야말로 자유-평등-형제애를 능가하는 시대정신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고작 ‘자유-평등-형제애’라고 해보았자 ‘경인’ 단 두 글자로 족합니다.

이병한 사진2 토론토 세계종교의회
토론토 세계종교의회

그러함에도 동학과 개벽은 여태 수줍습니다. 지난해 11월 토론토에 다녀왔습니다. 세계종교의회의 말석을 지켰습니다. 겨우 한국과 한반도 평화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만 동학과 개벽 얘기가 나지막이 오고갔습니다. 한국 연구자와 한국의 종교인들만 단출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크게 안타까웠습니다. 깊이 아쉬웠습니다. 딱하다는 생각마저 일어났습니다. 애가 탔습니다. 속이 쓰렸습니다. 입맛이 쓰디썼습니다. 세계종교의회 행사를 맞춤하여 토론토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던 전시회 주제가 바로 ‘인류세’였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다인종, 다종교, 다국적 인류를 지그시 바라보며 “신동학이 인류세의 학문이요, 또 다시 개벽이 인류세의 시대정신이라”, 전도하고 싶었습니다.

온타리오 호수를 산책하다 곰곰 궁리하노라니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 또한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퍼뜩 일어났습니다. 서세동점, 20세기의 수세적 입장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류세에 맞춤하여 문장의 앞뒤 순서를 바꾸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신을 개벽하야 물질을 개벽하자’고 말입니다. 자각하여 구세하자고도 고쳐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를 갈고 닦아 인물부터 사물까지 만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 편이 인류세에 임하는 인류의 태도에 한층 더 부합하지 싶습니다. ‘다시 개벽’이 19세기의 자각이었다면, 21세기는 ‘또 다시 개벽’의 유레카를 외칠 만 한 것입니다. 고로 개벽파는 코즈모폴리턴, 세련된 세계시민마저 돌파합니다. 국경을 가로지르는 글로벌 엘리트들의 허위의식을 넘어섭니다. 개벽인이야말로 진정한 지구인이며, 하늘과 더불어 지구의 운명을 개척하는 개벽꾼이야말로 참말로 하늘사람입니다. 국민(國民)에서 천민(天民)으로, 국가에서 천국으로. 그런 기상과 기개가 있어야 기미년 100주년을 맞이하는 기해년의 ‘선언’(Manifesto)에 값할 것입니다.

이병한 사진2 온타리오 호수에서 본 토론토 시내
온타리오 호수에서 본 토론토 시내

 

그래야 개벽파를 한낱 학술 유행의 신종 아이템으로 회수하려는 각종 유혹과 회유를 떨쳐낼 수도 있습니다. 부디 동학을 연구하기보다는 신동학을 합시다. 신동학을 살기로 합시다. 앎의 전환에 그치는 탁상공론이 아니라 삶의 전환을 수반하는 수련과 수행을 수반합시다. 그래야만 민심의 감화를 이루고 천심의 감동을 일으켜 포교와 포덕 또한 가능해질 것입니다. 일파만파 지구에 파동을 일으키고 우주까지 파장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야 이 탁한 세상에 맑은 하늘을 되돌려줄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태어난 후세들에게도 푸른 하늘 은하수를 되물려줄 수 있습니다. 꼬장꼬장, 깨작깨작, 자꾸 논문과 비슷해지려던 문장을 몽땅 지워버린 까닭입니다. 후련해졌습니다. 속이 다 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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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개혁을 방해하는 요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민중이므로 개혁을 지체시키고 있는 기본 원인은 외적인 객관적 조건보다는 민중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개혁을 성과적으로 추진하려면 그 무엇보다 민중이 어떤 이유 때문에 개혁에 소극적인가 혹은 개혁에 반대하는가를 알아야 하고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민중이 개혁의 주체가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걸림돌이 무엇인지 밝히고 기본소득이 그것을 없애는데 기여함으로써 개혁을 뒷받침한다는 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정치적 무관심과 기본소득

민중을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고통이다. <풍요중독사회>를 비롯한 저서들을 통해서 줄기차게 강조해왔듯이 한국인들은 심각한 수준의 생존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쉽게 말해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생존 불안은 돈과 관련된 근심걱정을 끊임없이 유발하고 그 결과 돈에 대한 병적인 욕망을 강제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위협하는 생존 불안은 그 자체로서 끔찍한 고통이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자신의 고통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배고픔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아름다운 풍경에 눈길을 주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생존 불안이라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사회개혁, 더 나은 미래 등에 관심을 갖기 힘들다.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한국 젊은이들은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고 절규하며 취직준비에만 골몰하고 자그마한 돈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소위 영끌투자를 하는 반면 정치에는 무관심하다. 이들에게 ‘사회 개혁’이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다.

심각한 생존 불안은 한국인들에게 정치적 무관심을 강요한다. 생존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 고통스러운 사람은 정치가 어찌 되든, 나라가 어찌 되든, 지구촌이 어찌 되든 간에 일단은 자기부터 살려고 발버둥치기 마련이다. 생존 불안과 민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비례관계에 있다. 민중은 기본소득 – 최소한 최저생계비를 상회하는 수준의 기본소득 – 을 통해 심각한 생존 불안에서 해방되면 자연히 사회개혁, 더 나은 미래에 대해 눈길을 돌리게 될 것이다. 즉 생존 불안을 크게 줄여주는 기본소득은 민중이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 정치의 주체로 나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고립과 무저항

“억압과 착취가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이 명제를 의심하게 만든다. 1대 99의 사회라는 말이 웅변하듯,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심각한 불평등 사회 속에서 여전히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있지만 민중의 저항은 과거에 비해 약화되었다. 왜 민중은 저항하지 않는 것일까?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거의 개인 단위로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어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는 학교 공동체, 직장 공동체, 마을 공동체 등 각종 공동체가 존재했다.

민중이 공동체, 집단으로 묶여서 살아가는 경우에는 억압과 착취를 받으면 반드시 저항을 한다 – 그 시점이 언제일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 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농촌마을 사람들이 공동체로 묶여서 살아간다고 가정해보자. 만일 지주가 마을 사람들 중에서 일부를 폭행하거나 가혹하게 착취한다면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문제로 받아들여 분노할 것이다. 그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마을 사람들은 농민봉기에 떨쳐나설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 마을 사람들이 개인 단위로 고립되어 살아가고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면 어떨까? 지주가 마을 사람들 중에서 일부를 폭행하거나 가혹하게 착취하더라도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그 장면을 보면서 더 겁을 먹고 더 무력해질 수도 있다. 물론 폭행과 착취를 당한 당사자들은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분노는 개인적 분노에 그칠 뿐 마을 사람들 모두의 분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분노감정이 건강하게 해소되거나 치유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노감정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우울증을 앓게 될 것이고 그것이 외부로 향하게 되면 타인을 학대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억압과 착취가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다’는 명제에는 전제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전제조건은 민중이 흩어져서가 아니라 공동체로 묶여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온갖 학대, 갑질, 성희롱 등에 시달리는 데도 저항을 잘 하지 못하고 개혁에 미온적인 것은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가 전멸했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인 단위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민중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면 정신병에 걸리거나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게 될 뿐 저항을 하지 못하며 개혁의 주체가 될 수도 없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개혁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민중이 하나로 단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와 기본소득

기본소득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한국인들을 단합시키고 공동체를 복원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한국인들을 공동의 이해관계로 묶음으로써 민중적 단결과 공동체 복원을 촉진할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고 단결하려면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발견하기가 어렵고 많은 경우에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민주노총이 개혁적인 부동산정책을 주장하기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 중에 주택보유자도 있고 무주택자도 있어서다. 집값이 오르기를 바라는 주택보유자와 집값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무주택자를 하나로 묶기는 힘들다. 물론 한국인들은 근본적인 사회대개혁이라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인들의 의식 수준은 그것을 당면한 자기 문제로 받아들일 정도가 아니므로 근본적인 사회대개혁은 현실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역할을 하기 힘들다. 반면에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제공할 수 있는 기본소득은 절대다수의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이웃과 사회 나아가 기본소득을 추진하거나 실시하는 정부에 대한 한국인들의 우호적 태도와 친사회적 심리를 강화할 것이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이웃과 사회가 자기한테 피해를 주면 주지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웃을 경쟁대상으로 간주하여 경계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며 사회에 등을 돌린 채 살아간다. 한국인들은 정부에게 뜯기기만 할뿐 받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금저항 심리가 강할 뿐만 아니라 정부가 무슨 말을 해도 의심부터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장차 어떤 정부가 집권하더라도 한국은 미래로 나아가기 힘들다. 지금까지 이웃, 사회, 국가는 생존 불안으로 신음하는 절대다수의 국민들을 외면해왔다. 즉 한국인들은 이웃, 사회, 국가가 자신을 사랑해주고 보호해주는 경험, 위기에 빠진 자신을 도와주는 경험을 거의 해보지 못했다. 이런 조건에서 기본소득은 이웃, 사회, 국가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며 활동한다는 믿음을 갖게 해줌으로써 이웃, 사회, 국가에 대한 신뢰를 가능하게 해주고 친사회적인 심리를 강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적 단결과 공동체 복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의식개혁과 기본소득

반복적으로 강조하건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개혁의 성패는 민중적 단결과 공동체의 복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립된 개인의 처지에서 벗어나 공동체로 묶여야만 개인들은 비로소 개인중심적 사고가 아닌 집단중심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되고, ‘우리는 모두가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있다. 한국인들이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면 나의 고통이 곧 이웃의 고통이자 세상의 고통임을 깨닫게 되고 나의 행복만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바라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이 촉진하는 민중적 공동체의 복원은 우선 의식개혁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개인으로 고립되어 살아왔기에 생존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자도생의 생존전략에 기초해 각개약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각자도생이 아닌 다른 방법, 집단적 힘으로 사회를 개혁함으로써 생존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즉 기본소득은 한국인들에게 ‘이웃과 미친 듯이 경쟁하고 싸워야만 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서로 단결하고 협력하는 방식으로도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겠구나’라는 통찰과 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각개약진이 아닌 모두가 힘을 합쳐 세상을 바꾸는 방식이 있으며 그것만이 살길임을 깨닫게 해주는 의식혁명의 가교역할을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 기본소득의 실시는 한국인들의 의식개혁을 촉진함으로써 개혁의 분위기를 크게 강화할 것이다.

기본소득이 촉진하는 민중적 공동체의 복원은 또한 개혁에 대한 민중의 자신감을 강화할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 사회가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사회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기보다는 각자도생에 매몰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믿어서다. 단결된 집단의 힘은 무한대이지만 고립된 개인은 무력하다. 개인의 힘이 제아무리 크다 한들 개인의 힘만으로는 사회를 개혁할 수 없다. 개인이 최대의 능력을 발휘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경쟁에서 승리해 떼돈을 벌거나 출세하는 것뿐이다. 고립되어 살아가는 개인은 무력감으로 인해 사회 개혁에 대해서는 꿈조차 꾸기 힘들다. 따라서 고립된 개인은 개혁의 청사진이 아무리 멋져도 그것을 냉소적으로 대한다. 이런 조건에서 기본소득은 개개인의 생존 불안을 없애고 공동체 복원을 촉진하여 한국인들을 무력감의 깊은 늪에서 구출해냄으로써 개혁을 힘차게 떠밀어나갈 수 있다. 고립된 개인들이 공동체로 묶이면 묶일수록 민중의 자신감은 백배해질 것이고 개혁에는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다.

 

국민통합과 기본소득

오늘날 한국인들 사이의 관계는 유사 이래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악화되어 있다. 이것은 사회적 관계 영역에서 한국이 OECD 회원국 중에서 꼴찌를 차지한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최악이라는 것은 특정한 사회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개혁과제에 나머지 사회집단이 박수를 쳐주기보다는 배 아파하거나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타깝지만 한국인들은 서로에게 그다지 너그럽지 않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처럼 시기와 질투가 심하다. 이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는 특정한 집단에게만 이익이 되는 정책이나 제도에 대한 찬성률이 낮은 편이다. 예를 들면 노동자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은 사실 자영업자들에게도 이익 – 노동자들의 수입이 올라가면 소비를 많이 할 테니까 – 임에도 그들은 그 제도를 반대한다. 청년들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은 사실 그들의 아버지뻘인 중장년층에게도 이익임에도 그들은 그 제도를 반대한다. 이런 식으로 악화된 인간관계는 택시 기사들에게 도움이 되는 개혁과제를 버스 기사들은 싫어하고 노인세대에게 도움이 되는 개혁과제를 청년세대는 반대하게 만들 수 있다.

민중이 다종다양한 집단으로 분열되어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갈등하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공적인 개혁의 추진은 불가능하다. 사회가 분열되면 국가적 개혁과제를 제기하기도 힘들고 추진하기는 더더욱 힘들어진다. 특히 어떤 개혁과제가 특정한 사회집단의 생존 불안을 자극할 경우 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 취지가 아무리 좋더라도 과감한 부동산 개혁, 토지개혁이 일부 집단의 생존 불안을 건드린다면 그들은 결사반대할 것이다. 최소한 생존 불안에서는 해방되어야 사람들은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고 설사 개인적으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그것이 전체 사회에 이익이 된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고질적인 사회 분열과 갈등을 완화하고 국민통합에 기여하며 개혁 추진에 유리한 사회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사회 개혁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개혁의 마중물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생존 불안을 해결하는데 그치지 않고 평등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평등 수준이 높아져야 ‘너와 나는 다르다’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감이나 일체감이 형성될 수 있다. 또한 위계 간 학대 현상이 근절됨으로써 연대의식이나 공동체 의식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개혁을 위해서도, 즉 격차를 줄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도 기본소득부터 실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계속 강조했듯이 기본소득으로 생존 불안이 약화되어야 민중의 의식이 깨어나고 정치참여가 가속화되며 민중적 단합이 실현됨으로써 한국 사회가 경제적 격차를 줄이는 쪽으로 거대한 방향전환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기본소득과 인권>이라는 글에서 강조했듯이, 기본소득은 민중의 저항 의지와 권리를 든든히 뒷받침해주고 강화할 것이다. 위계 관계나 조직 내에서 사람들이 저항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해고나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즉 생존 불안이다. 직장상사가 갑질을 하거나 성희롱을 해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참는 것은 해고를 당해 생존이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해서다. 기본소득은 사람들을 생존 불안에서 해방시킴으로써 불의에 저항할 용기를 내도록 고무하고 격려해줄 것이다. 생존 불안에서 해방된 민중이 조직이나 직장에서 불의에 저항하기 시작하면 한국의 조직 문화, 직장 문화, 사회 문화는 민주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즉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가 권위주의적이고 수직적인 문화에서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문화로 바뀌어나가고 각종 조직이나 직장은 조직 구성원들을 더 우대하고 존중해주는 쪽으로 변화해나갈 것이고 그 결과 민주화, 개혁이 촉진될 것이다.

기본소득이 개혁의 마중물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려면 최소한 최저생계비 이상의 기본소득이 지급되어야 한다. 현재 여당의 대권 주자인 이재명 도지사는 기본소득의 최종목표를 1인당 월 50만 원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정도로 개혁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본소득이 되기 위해서는 또 기본소득의 거대한 의의가 충분히 발휘되기 위해서는 월 지급액의 목표치를 더 높이 잡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재명 지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민중은 그의 기본소득 정책을 지지하면서 그것의 목표치를 더 상향조정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다.

 

김태형

토, 2021/09/18-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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