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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26주년 되는 날의 소회 (1)- 나의 생애 첫 시민운동 단체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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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26주년 되는 날의 소회 (1)- 나의 생애 첫 시민운동 단체 민족문제연구소

익명 (미확인) | 목, 2019/01/17- 20:57

2019. 1. 1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26주년 되는 날의 소회 (1)
– 나의 생애 첫 시민운동 단체 민족문제연구소

나는 지난 1993년 1월 16일 민족문제연구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당시 이름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다.

울산의 현대조선 중공업에 파견근무할  무렵 우연히 신문인지 잡지의 하단에 조그만 광고를 보고 눈이 번쩍 띄었다.  내가 오래전부터 애타게 찾던 단체였기 때문에 눈에 확 들어온 것이리라.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만일 그런 단체가 없었다면 나는 그런 단체를 만들려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공학을 전공했지만 유학중이던 1980년대 말경 우연한 기회에 문과성향인 내가 역사학이나 사회학 분야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적(?) 생각을 하면서, 해방후 친일청산이 되지 않은 것이 우리 사회의 만악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1989년 어느때인가?  외국인 유학생 숙소 앞 주차장에서 만난 후배를 붙잡고 내가 두시간 가량이나 ‘친일 청산’ 관련 얘기를 하는데  고역이었다는..나는 그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나중에 내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활동한다는 걸 안 그 후배가 나에게 들려준 일화가 있다.

1994년 내가 근무하던 직장(연구소)이 대덕연구단지로 옮기면서 나도 대전으로 이사하게 됐는데, 대전 와서 수소문을 해보니 대전에도 회원이 있었다. 회원이 당시 6~7명 정도였는데, 외롭지만 뜻이 맞는 우리끼리는 매달 꾸준히 3~4 명씩, 많이 나오면 5~6 명씩 모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에서 김OO 소장님이 월례모임에 내려오셔서 나에게 지부장을 맡아달라고 하시는 바람에 그냥 박수로 지부장이 되어버렸다.

당시만 해도 어디 가서 ‘반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라고 소개하면 일반 사람들 중엔 그게 뭐하는거냐는 질문부터 빨갱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불편해 하는 사람이 많았다.

시민운동 한다는 사람들도 “반민족문제연구소” 회원/대전지부장이라고 하면 멀리 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던 때였다.

더구나 대전지역은 그런 쪽에서는 더 불모지였다.  그래서 민문연 대전지부가 1990년 중후반 경 어느 해 현충일날 처음으로 대전 현충원 앞에서 “친일청산”, “친일군인 김창룡묘 대전 현충원에서 이장하라”라는 현수막을 들고 집회를 할 때는 아마 7~8 명 나온 걸로 기억한다.   그저 우리 월례모임 장소를 현충원 앞으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은 정도였다.

그저 그렇게 몇 명이서 대전 현충원 앞 다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현수막 하나,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사진 십여장 걸어놓고,  피켓 몇 개 들고 김창룡의 악행과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국립 현충원에 묻혀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전단지를 나눠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당시 나는 조선일보바로보기시민연대(물총) 대전대표로도  있으면서 안티조선 집회를 어떤 해에는 거의 분기에 한번씩 할 정도로  왕성하게 언론개혁 운동을 했는데, 그렇게 친일청산 운동, 안티조선 운동, 통일연대 운동 등 찬바람 맞는 운동을 하며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 사람들과 교류를 하게 됐고, 그들도 점차 우리 민문연이 무슨 일을 하는 단체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나와 대전지부는 대전 시민사회에 자리잡게 되었고, 우리 대전지부의 친일청산-김창룡묘 이장촉구 집회에 다른 시민단체 사람들과 단체들도 호응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대전지역의 많은 시민단체가 함께 동참하는 상징적 운동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젠 민문연 대전지부의 위상도 대전지역에서 크게 올라가 있다고 알고 있다.

그후 2003년경부터 나는 개인 사정으로 현장에서 멀어져있다가, 2010년대 들어 다시 시민활동을 재개했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회원된지 22년만인 지난 2015년 3월, 9대 운영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운영위원장을 하던 2년 동안은 정말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  민문연 일 뿐 아니라 장준하선생 관련 일과 평화협정 관련 일 등 다른 일들도 같이 맡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청난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쏟아가며 대전과 서울을 오간 일은 뒤돌아보면 지금 같아서는 어림 없는 일이다.

그렇게 나의 생애 첫 시민활동을 민족문제연구소로 시작하여 오늘 26년을 맞은 나는 지금 민문연으로부터 제명된 상태다.

2019. 1. 16.
회원가입 26년째 되는 날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제명자
전 운영위원장 여인철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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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

월, 2017/08/2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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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대 위험없는 군사옵션, 과연 존재하는가?
(연합뉴스tv)

[앵커]
미국 매티스 국방장관이 서울을 중대한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대북 군사옵션 방안이 존재한다 이렇게 언급했는데요.

이외에도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북한과 관련된 강경 발언들을 일삼고 있습니다.

실제 그런 군사옵션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재선 정치안보 전문기자 연결합니다. 이재선 기자!

계속 강경발언이 쏟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자]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월 미중정상회담 직전에 모든 옵션이 테이블에 올라와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핵실험, 미사일발사 때마다 강경발언들을 쏟아왔습니다.

지난 8월 “화염과 분노”, “가만두지 않을 것” 등의 발언들이 이어졌고 유엔 대북 제재안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검토한 옵션에는 전술핵배치·참수작전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앵커]
과연 그러한 옵션이 가능할까요?

[기자]
이중 참수작전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과거 2011년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할 때 미군 특수부대가 들어갔죠.

네이비 실 팀이 들어갔는데 이런 특수부대가 평양에 들어가서 이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작년 아프간에서 탈레반 지도자 만수르를 제거할 때는 스텔스 무인기를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형태로 해서 참수작전을 진행하게 되었을 때 과연 서울은 어떻게 되겠는가가 문제입니다.

결국 공격형 무인기를 동원하는 군사옵션을 선택한다고 할 때 북한의 지도부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을지가 미지수가 됩니다.

[앵커]
지금 한미 정보력이 그 정도까지 가능한가요?

[기자]
그것이 바로 킬체인 개념인데 북한의 지도부 움직임을 과연 포착할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앵커]
실패할 경우는 어떻게 되나요?

[기자]
실패를 하게 될 경우 서울은 전면전을 피하기 힘듭니다. 전쟁 직후 8분안에 수만개의 북한 방사포가 서울을 날라옵니다. 8분안에 피할 수 있는 사람들은 평소 대피훈련을 해온 주한미군 가족들과 외교관 등일 것입니다.

결국 참수작전이 조금이라도 실패하게 된다면 전면전이 벌어지고 10분안에 수도권 2300만명 중 절반이상에 위험에 노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앵커]
그런데 왜 참수작전을 언급하는 것인가요?

[기자]
일종의 북한에 대한 협박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문제는 이런 말들이 자주 언급될수록 북한의 미사일, 핵실험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발언들이 북한을 자극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발언들이 북한 뿐 아니라 한국 국민들에게도 불안감을 주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실제로 트럼프가 9월 9일 북한 행사장을 폭격하겠다는 발언을 해서 한국에서도 난리가 났었죠?

다행히 아무일이 없이 지나갔지만 이런 발언들이 자주 있게 될 경우 오히려 북한을 더 자극해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의 빈도를 높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또한 발언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전쟁에 대한 불감증이 오히려 커져서 막상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누구도 대처할 수 없게 될 것이고요.

[앵커]
그렇군요. 이번 시간은 서울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대북군사옵션이 가능한지를 확인해보았습니다.

일, 2017/10/08-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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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환장한 미친 늙다리
악마 트럼프의 막말 모음

“한국은 미쳤다”
(2015년 10월 12일 정치단체 노라벨스가 트럼프를 초청한 자리에서)

“한국은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더라”
(4월 19일 중국과의 정상회담 후)

“한국은 하나만 알아”
(9월 4일 트위터)

“한국, 대북 대화 구걸하는 거지 같다”
(9월 7일 아베 총리와의 통화에서)

“한국에 수십억달러 무기판매 승인”
(문재인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한국, 은혜를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북한 9.9절 기념식장 공습하겠다”
(7월 31일 아베 총리와의 전화통화에서)

“북한 화염과 극심한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
(8월 9일 기자회의 대화)

“(북한) 산산조각낼 것”
(9월 15일 공군기지를 방문해서)

일, 2017/10/08-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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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조선총독부 자문기구로 설치된 임시교육심의위원회의 한 장면. ‘문교의조선’ 1928년 9월호.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16년 7월 일제는 조선 문화유산의 조사와 보존을 심의한다는 목적을 내걸고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조사방법의 유형은 일반조사·특별조사·임시조사 등 세 가지로 나뉘었는데, 고구려·백제·신라·한사군·임나와 관련된 지역이 집중 조사 대상으로 선정됐다. 이는 고적조사위원회의 실제 목적이 문화유산의 가치를 밝히기보다는 식민사학의 논리를 찾는 데 있었음을 방증한다. 1922년 12월 등장한 조선사편찬위원회와 이를 이어받은 조선사편수회가 철저하게 식민사관에 입각한 역사서를 발간하는 데 몰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1939년 2월에는 조선인의 만주 이민을 국책사업으로 간주하여 ‘이민위원회’를 설치했다. 만주 개척은 일제의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한 오랜 계획의 일부분이었고, 일본인의 이민이 사실상 실패하자 조선인이 적극 동원됐다. 그 해 8월 ‘개척민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한 위원회는 △농업·공업·광업 분야의 실제 기술자 파견 △청년의용대를 늘려 개척민 지도자로 활용 △강원도와 함경도의 화전민을 만주 삼림지대로 파견 등을 의결했다. 이처럼 조선인의 만주로의 이주는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되고 통제되었다.

위의 두 사례는 일본이 조선 식민지배 과정에서 위원회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보여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통감부·조선총독부 편>은 그동안 실체조차 파악되지 않았던 조선총독부 산하의 140여개의 위원회에 관한 정보를 모두 담았다. 위원회는 식민지 조선이 당면한 현안에 대한 심의·조사·자문·징계·조정의 기능을 갖추고, 긴급한 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위원회가 한시적으로 운영됐음에도 그 역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식민지 조선에서 모든 사안이 총독 1인의 제왕적 리더십에 따라 처리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는 위원회를 통해 많은 부분이 결정된 측면도 있다”며 “앞으로 연구를 통해 더 밝혀지겠지만 위원회는 식민통치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고 지적했다.

위원회는 토지·농업·교육·상공업·세제·경제정책·노동·강제동원·재난대응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해 설치되었다. 이는 일본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준 이상으로 세세하게 조선 사회를 파악하고 통제했음을 드러낸다. 이미 통감부나 총독부 산하에 관련 부서가 존재하는 경우에도 별도로 위원회를 설치해 이중, 삼중의 통제 장치를 마련한 경우도 많았다. 치안유지법으로 처벌을 받은 사상범 중 비전향자를 구금하는 문제를 다룬 ‘예방구금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본격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일상 구석구석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예방구금제도는 일본보다 조선에서 먼저 시행되었는데, 전향하지 않는 사상범에 대해서는 무기한으로 구금 기간을 연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주택대책위원회’, ‘물가위원회’, ‘조선전염병 및 지방병조사위원회’, ‘조선중앙위생회’처럼 이른바 ‘민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구들은 일제가 식민지인의 동요를 막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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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4월 28일 ‘매일신보’에 게재된 조선학도동원 교별기준 관련 기사. 일제는 1944년 4월 조선 학생을 전쟁에 동원할 목적으로 학도동원본부를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치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이번에 나온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은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사실상 상실한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한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 총 248개(통감부 26개, 조선총독부 222개)를 모두 포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박수현 실장은 “각각의 기구에 대해 개별적인 논문은 존재했지만, 조선총독부와 일본 내각의 관보 등 공식 문헌을 토대로 실증적인 자료를 만들어낸 것은 이 사전이 처음이다”고 밝혔다. 사전은 또한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둔 최고 권력기구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총론과 함께 연도별로 기구의 현황과 구조를 담은 부록, 각종 사진을 수록했다.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는 근대 법령 체계와 관료제를 기반으로 설치,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외형적으로는 근대국가의 요건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통치구조에 종속적이었을 뿐 아니라, 조직체계나 기능의 측면에서 근대화보다는 식민지 경영에 주력하는 등 ‘근대의 외피’를 두르고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통치기구의 근대적 체계와 운용은 식민지 지배의 억압성과 수탈성을 은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한 상당수의 기구나 법령, 정책 규제 용어 등이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점은 뼈아픈 대목이다.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곧바로 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연구소는 3.1 운동 100주년인 2019년을 맞아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본군·국영기업·관변단체 편>의 발간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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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개척민지원자훈련소에서 일본 우치하라훈련소로 이동하는 장면. ‘통보’ 제120호(1942년 7월15일).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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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8>경향신문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무엇이 담겼나

※관련자료

[보도자료] 민족문제연구소,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통감부・조선총독부 편』 펴내

목, 2017/09/2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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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08/1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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